외전 5. 레오니에, 3학년, 남부(2)
인생 다 부질없다.
인생이란 복수다.
인생은 한 방이다.
일명 ‘인생’ 시리즈로 유명한 이 작품은 오랫동안 많은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의 고군분투, 그리고 복수를 향한 한 여자의 눈물겨운 노력.
실화를 기반으로 쓰였다는 작품은 수많은 독자를 울렸으며, 역경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다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유명한 작가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낭독회를 열거나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과 비교하면 의아하긴 했다.
그리고 오늘. 신비주의를 고수했던 작가는 인생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인 ‘그래도 인생이다’ 작품 출간과 함께 사인회를 열었다.
“작가님…….”
벌써부터 장사진인 서점 앞 기나긴 줄 가운데 선 레오니에가 코를 훌쩍였다.
“저리도 좋으실까.”
플로무스가 호호 웃었다.
“와, 근데 진짜 사람 많다.”
우피클라가 까치발까지 들며 앞뒤로 줄 선 사람들을 구경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주로 많았지만, 간간이 남성들도 보였다.
“플로 언니는 책 읽은 적 있어요?”
“레오니에 님께 추천받아서 읽었어요.”
“나도 엄마 따라 읽긴 했는데…….”
우피클라도 아비페르를 따라 읽은 적이 있는데, 내용이 너무 암울해서 결국 중간에 포기했다.
“저도 좀 어려웠어요.”
1권이었던 ‘인생 다 부질없다’가 유독 음울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2권과 3권의 복수전이 더욱 두드러지고 개연성이 살아나는 거야. 작가님이 괜히 이런 구성을 잡은 게 아니라고.”
레오니에가 품에 고이 안은 책들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무려 어릴 적부터 읽었던 각 시리즈의 초판본이었다. 손때가 거뭇거뭇 묻은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품에 안고 지녔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 줬다.
“근데 공작 부인과 백작 부인께선 안 오시나요?”
플로무스가 알기론, 그 두 사람도 이 작품의 애독자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우리 엄마는 레아 때문에 못 와.”
지금 벨레아니는 아주 예민한 생태였다. 언니와 또 헤어지게 된 아가 맹수는 누구든 한 명만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바리아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고. 대신 레오니에가 전권을 다 사서 사인을 받아 오겠다고 약속했다.
“울 엄마는 사인 이런 거 싫어하거든요.”
반면 아비페르는 설령 작가 본인이라고 해도 책에 낙서하는 걸 싫어했다. 그리고 괜한 기대감 품고 만난 작가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면 실망만 한다며,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난 아비페르 님의 의견도 존중해.”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떠들며 기다리기를 잠깐, 서점 안에서 나온 직원이 모두가 기다리던 소식을 전했다.
“작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곧 서점 입구를 막고 있던 파란색 끈이 치워졌다.
“레오니에 님, 이제 들어가나 봐요.”
“세상에, 나의 신이시여…!”
“와, 살짝 두근거린다.”
드디어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소녀는 조금씩 발을 앞으로 움직이며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했다.
“…응?”
가장 먼저 그 낌새를 눈치챈 건 우피클라였다. 앞서 사인을 받고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저게 응당 당연한 반응일 텐데. 몇몇 사람들은 아주 큰 충격에 빠진 것처럼 넋이 나간 채로 돌아왔다. 이들은 전부 귀족이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우피클라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왜 저러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레오니에 역시 불쾌하단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귀한 분 영접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딴 식으로 안면 근육을 움직이다니.”
호강하는 줄도 모르고 저런다며 레오니에가 혀를 찼다.
“…….”
우피클라는 괜히 물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분들이 다 귀족인 건 의아하긴 해요.”
다행히 플로무스가 우피클라의 의구심에 동의했다.
“저 잘난 귀족들이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큰 충격을 줄 법한 사람이 있나?”
농담처럼 받아넘겼던 레오니에도 나름 추리해 봤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애당초 지금 저의 신경은 곧 만날 작가님에게 쏠려 있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작가님께 저의 애절한 진심을 전부 전하고 싶단 것뿐이었다.
“레오니에 님.”
플로무스가 레오니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저희 차례에요.”
어느새 레오니에의 앞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함께 온 일행인지, 앞에 있던 두 사람은 사인을 받은 책을 끌어안으며 행복한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야, 너희 먼저 해라.”
귀한 분을 만나기 전, 레오니에가 긴장된 마음을 출산 호흡법으로 히히후 갈무리하는 동안.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에 사인해 주세요.”
플로무스와 우피클라가 먼저 사인을 받았다.
“어머, 아카데미 학생들이신가 봐요?”
우리 작가님 여자셨구나, 아직 작가를 보지 못한 레오니에는 작가님의 명랑한 목소리에 두 귀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나 지금 저분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거야…!’
펠리오가 봤다면 ‘주접도 저런 주접이 없다’라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테지만, 레오니에는 상관없었다. 어린 시절, 정신적으로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던 저를 위로해 준 분이 바로 저 앞에 있었다. 그리고 플로무스와 우피클라가 사인을 받고 자리를 비키니.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오니에가 고집스럽게 품고 있던 저의 오랜 장서들을 내밀었다.
“어릴 적부터, 그러니까 일곱 살 때부터 작가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정말 작가님의 작품은 심금을 울리는…!”
레오니에가 저의 뜨거운 마음을 토하던 중.
“어머나, 정말?”
귀에 익은 목소리가 유난히 간드러지게 다가왔다.
“우리 보레오티 영애께서 내 작품의 독자님이셨다니!”
촉촉하게 반짝이던 검은 눈동자에 매서운 가뭄이 일어났다.
반면, 작가님의 초록 머리는 유난히 우거졌다. 귀밑 아래까지 짧게 친 단발에 천진난만한 동안까지 더해지니 나이를 가늠하기가 유독 어려웠다.
마치 그 사람처럼.
“아이, 기뻐라!”
작가가 싱긋 웃었다.
“시발…!”
레오니에가 눈을 질끈 감으며 좌절에 가까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일단 사인부터 해 줘 봐요.”
신간 2권에, 앞에 나온 것들 3권도 새 책에다 다 해 주시고요.
“이름은 뭐라고 적어 줄까요?”
우시스가 물었다.
“새 책이랑 신간 한 권에는 바리아 보레오티라고 써 주시고요, 여기 이 책들이랑 나머지 신간에는…….”
역성혁명 하고 싶은 레오니에라고 적어 주세요.
절망은 그다음에 하기로 했다.
* * *
사인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오니에는 플로무스와 우피클라의 부축을 받으며 보레오티 저택으로 향했다.
“아가씨?”
“아니 왜 저택에…….”
“괜찮으세요?”
트라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갑작스러운 레오니에의 방문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언니야아아!”
그리고 레오니에를 발견한 벨레아니가 우다다 달려와 황소처럼 품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컥!”
몸통 박치기를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한 레오니에가 단말마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세상에…!”
“아가씨가 휘청거리셨어!”
사용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소라면 가뿐히 받아 내고도 남았을 사람이 곧 쓰러질 것처럼 어지러워하다니! 사용인들은 큰 아가씨가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뒤에 있던 우피클라가 끙끙거리며 뒤를 받쳐 주지 않았다면 당장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언니야 바보! 바보!”
절 두고 가 버린 언니에게 심통이 잔뜩 나 있던 아가 맹수는 레오니에의 가슴에 매달린 채 빼액 소리를 질렀다.
“벨레아니! 너 또 못된 말…!”
소란을 듣고 나온 바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오?”
이 시간에 저택에 찾아온 큰딸을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안색이 심상치 않단 걸 알아채곤 서둘러 다가왔다.
“너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공작 부인, 일단 진정하시고요.”
“사실은 아까 서점에서…….”
플로무스와 우피클라가 서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줬다. 물론 듣기만 하면 이상할 게 없는 내용이었다. 평소 존경하던 작가님을 만나 사인을 받은 게 전부였으니까. 게다가 저 둘은 우시스 전 황비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였다.
“…….”
하지만 바리아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잠깐.”
한참 넋 놓고 있던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엄마, 지금 그 반응 뭐야?”
“어, 어?”
“설마 알았어?”
“뭐, 뭐를 말이야?”
바리아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시선을 빠르게 피했으나, 레오니에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게 있지…….”
결국 바리아가 이실직고했다.
“나도 어제 알았어…….”
벨레아니의 눈치가 보여서 갈 수 없었지만, 바리아도 사인회에 무척이나 가고 싶어 했었다. 그리고 그 혼잣말을 들어 버린 펠리오가 진실을 알려 줬다고.
“이 망할 아빠가!”
레오니에가 소리를 빽 지르며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였다.
“저, 아가씨.”
눈치껏 입 다물고 멀찍이서 구경하던 트라가 조심히 전했다.
“주인님께선 외출하셨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아마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도망친 듯했다. 레오니에는 머리 위로 피가 쏠리는 기분을 꾹 참았다.
“죽여, 진짜…!”
그리고 그때까지도, 벨레아니는 레오니에의 가슴팍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난 여기만 오면 참 재밌더라고요.”
우피클라가 플로무스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플로무스가 동의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참 화목한 가족이에요.”
* * *
“…….”
앞에 놓인 차를 빤히 내려다보던 펠리오가 일순 한쪽 눈꼬리를 비틀었다.
“공작님?”
동행한 루페가 이를 살피고 조심히 물었다.
“아무것도.”
대충 둘러댄 펠리오가 찻잔을 들었다.
‘지금쯤이면 집에서 난리를 치고 있겠지.’
레오니에의 반응과 이후의 행동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펠리오는 피난을 겸해 황궁에 들렀다. 물론 그런 사사로운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곧 문이 열리면서 황궁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보레오티 공작.”
서둘러 온 건지, 황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거칠었다. 그 역시 펠리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눈치였다. 펠리오와 루페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리코스 자작도 건강해 보여 다행이군. 일단 자리에 앉지.”
세 사람이 자리에 앉으니, 시종들이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과 다과들을 치우고 새로운 것으로 다시 준비해 뒀다.
“…….”
“…….”
그 찰나, 펠리오는 황제의 뒤에 있던 스칸디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펠리오는 기억하기도 싫지만, 소위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위를 ‘점령’했던 그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스칸디아가 먼저 인사했다.
펠리오는 제 눈치만 살피며 낑낑거리는 저 덩치를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마음 같아서야 몇 번이고 죽여 버리고 싶지만, 레오니에가 죽고 못 살다 못해 족쇄를 채워 감금하고 싶어 할 정도로 좋아하니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게다가 저놈의 어릴 적 모습도 간간이 떠올랐다.
하필 또 저 원수의 탄생에 자신이 일조했단 사실만 떠올리면.
“…….”
한참을 말이 없던 펠리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레오한테 차일 생각 없나?”
그럼 자연스럽게 저놈도 자진할 것 같은데.
“공작님…….”
루페가 무척이나 안타까운 눈으로 저의 상사를 응시했다. 살다 살다 저 인간이 자식 때문에 저런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날이 오다니.
“스칸 네가 이겼다, 야.”
크리세토스 황제가 넌지시 감탄했다.
“제가 레오에게 많이 부족한 것을 알지만, 항상 노력하며 정진하겠습니다.”
이 와중에 스칸디아가 자신의 각오를 한 번 더 다졌다.
“그 마음가짐으로 차여 볼 생각 없나?”
“공작, 그만 체통을 지키게.”
기어코 황제가 나서 말렸다.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이면서도, 자식과 관련된 일이면 참 이상하게 변하는군.”
“아버지란 그런 존재입니다.”
펠리오는 당당했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단 결연함마저 느껴져, 듣는 사람들이 숙연해질 정도였다.
“…공작.”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그게 제 딸의 연애까지 막으라는 소리는 아니지 않을까?”
“우리 레오라면 언젠가 자체 임신도 가능할 겁니다.”
“혹시 술 마시고 왔나?”
황제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뒤늦게 본론을 꺼냈다.
“남부가 회담을 요청했네. 일정은 시일 내 잡힐 거야.”
“수장들은 다 모입니까?”
“귀하신 분이 걸음하시니 다들 마중해야지 않겠나.”
비아냥거리는 황제의 말투엔 여전히 남부를 향한 사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전 황비께서 모습을 드러냈다지?”
우시스 전 황비가 서점에서 모습을 드러냈단 사실은 일찌감치 황제의 귀에도 전해졌다.
‘많이 놀랐을까.’
스칸디아는 남몰래 레오니에를 걱정했다.
“역시 기사단 창립 허가를 요구하겠지요?”
“애초에 여기에 관심조차 있는지도 모르겠군.”
짜증 어린 황제의 중얼거림에 펠리오가 조용히 감탄했다.
‘확실히 선황보단 낫군.’
펠리오 역시 아우스트가 요청한 회담이 그저 단순히 기사단 창립을 허가받기 위한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기사단 창립은 눈속임일지도 모른다. 숨겨진 진의는 어쩌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하찮은, 그러나 저들에겐 무척 중요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황제가 콧방귀를 뀌었다.
“존재감 하난 확실히 드러내겠어.”
펠리오의 생각과 황제의 대답이 일치했다.
* * *
“보레오티 공작님.”
스칸디아가 돌아가려는 펠리오를 붙잡았다.
“루페, 먼저 가 있어라.”
“공작님, 죽이시면 안 됩니다.”
루페가 신신당부했다.
“큰 아가씨는 자웅 동체가 될 수 없으시고, 자체 임신도 불가능합니다.”
“진심 어린 충정을 보아하니 봉급이 너무 많은 모양인데…….”
“편히 말씀 나누시고 오십시오.”
루페가 냉큼 자리를 떠났다.
“공작님.”
스칸디아는 루페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펠리오를 불렀다.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그러곤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
한껏 아래로 숙인 잿빛 은발을 내려다보는 펠리오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병 주고 약 주는군.’
그렇다고 약발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펠리오는 그냥 이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고개를 들어.”
짜증 섞인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스칸디아가 상체를 들었다.
그랬다, 펠리오가 가장 불만스러운 건 바로 저놈의 쓸데없이 성실하고 예의 바른 인성이었다.
저 망할 것이 레오니에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야 일찌감치 눈치챘다. 낳아 준 부모도 그 모양인데, 어찌 안 닮을 수 있을까. 추적추적하고 음산한 순애보는 이따금 펠리오가 보더라도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섬뜩했다.
‘아빠보다 잘난 남자는 찾기 힘들지.’
레오니에는 스칸디아를 편들 때마다 항상 저렇게 말했고.
‘그런 점에선 우리 뿜뿜이는 정말 귀한 존재 아니야?’
마지막엔 늘 저렇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 보니, 펠리오는 자연히 저 나이 때의 자신과 스칸디아를 비교하곤 했다. 승자는 스칸디아였다. 그것도 압승으로.
펠리오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썩 깨끗하지 않단 걸 알고 있다. 그 시절에야 의식하진 않았으나, 레오니에를 키우면서 스스로의 과거가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반면 스칸디아는 오로지 레오니에 한 사람뿐이었다. 과거의 저처럼 하룻밤 보내고 끝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놈과 레오가 싸우면 우리 애가 이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제발 부탁이니.”
이렇기에 종국엔 늘 펠리오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레오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좀 참아라.”
그 뒤에는 네가 레오한테 어떻게 잡아먹히는지 상관하지 않겠다며 펠리오가 드물게 신신당부했다. 사실 이것만으로 펠리오는 속이 충분히 문드러졌다. 피눈물을 삼킨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절실히 공감되고, 결국엔 저놈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숨 쉬는 것도 괴로웠다.
“네가 발목에 족쇄를 차든, 새장에 갇히든 관여 안 할 테니.”
“공작님…….”
스칸디아가 감동 어린 눈망울을 반짝였다. 신뢰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여 큰 실망을 안겨 드렸는데도, 저분은 제게 또 선의를 베풀어 기회를 주셨다.
스칸디아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괜히 레오니에를 자극해 자신을 먼저 건드리게 하려 했던 저의 얄팍한 수가 어찌나 유치하게 느껴지는지. 눈앞에 있는 펠리오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아서, 스칸디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공작님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칸디아가 고개를 꾸벅였다.
“…네놈은 배알도 없나.”
이쯤 되니 펠리오는 스칸디아의 지능이 의심스러웠다.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었다.
* * *
우시스 전 황비가 나타났다.
4년 전 진압된 올로르의 반란을 끝으로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여인의 등장에 수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행방을 알 수 없던 황비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다. 황실은 그녀가 사망했을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지었다. 그런데 죽었을 거라 여겼던 전 황비가 다시 나타났다. 심지어 아우스트 공작 가문의 이름을 달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도 놀라운데…….”
“아우스트라니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세상에, 설마 황비도 선황 생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겁니까?”
“에끼! 감히 헤스페리 후작님과 같은 선상에 두지 말게! 그분은 황후로 계실 적에 최선을 다하셨어.”
어쨌거나 확실한 건 딱 하나였다.
“바다가 요동치는군요.”
심해에 숨어 있던 남부의 진짜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옥의 고래는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걷잡을 수 없는 파랑을 일으켰다. 수도는 아우스트가 일으킨 파랑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조금 달랐다.
“고로, 당시 통과된 보안 규정은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체결된 것으로서…….”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아카데미는 평화로웠다. 물론 아카데미도 소문에 무관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당시 반란을 진압했던 당사자가 재학 중이었다. 그 탓에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그럼 이에 대하여 비판해 볼 분이 계신가요?”
정치학 수업을 담당하는 에르키나 교수가 교실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습니까?”
과연 학구열로 유명한 아카데미답게, 학생들의 침묵 또한 뜨거웠다. 에르키나 교수가 그런 학생들을 아주 즐겁게 바라봤다. 가늘게 접힌 눈웃음이 어찌나 선한지, 학생들이 흠칫거렸다.
“그럼…….”
때마침 창살 너머로 흰 구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푸르른 하늘과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냈다. 덩달아 불어온 바람 한 가닥이 창가에 앉아 있던 학생의 머리칼을 살랑이듯 건드렸다.
“…….”
머리칼이 얼굴을 스치며 수업을 방해하는데도, 학생은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에르키나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레오티 양.”
그러곤 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흩날리던 머리칼을 뒤늦게 넘기려던 손이 멈칫했다.
“학생분이 이야기해 볼까요?”
“…….”
“얼마 전 수정 논의가 일어났던 보안 규정에 대해서요.”
“…아.”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레오니에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하던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우선,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유는요?”
“전시 중 제정된 규정입니다.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하에 언론에 규제하는 건 나쁘지 않으나, 이를 현시점에도…….”
에르키나 교수는 레오니에의 의견을 묵묵히 들었다. 그녀의 시선도 발표 중인 레오니에에게 고정된 채였다.
“좋습니다.”
에르키나 교수가 싱긋 웃었다.
“제가 하려던 설명을 보레오티 양이 다 말씀해 버렸군요.”
칠판으로 돌아간 에르키나 교수가 레오니에가 발표한 내용을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했다.
“레오니에 님, 대단하세요.”
옆에 함께 앉았던 플로무스가 소곤거렸다. 레오니에는 아까 정리하지 못했던 머리카락만 매만졌다.
“얼마 전 개정된 법안은 그런 문제점을 개편했단 점에서 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이전 방식은 인적과 자원 낭비가…….”
보충 설명을 마치니, 책상 위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에르키나 교수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기 무섭게 종이 울렸다. 곧 학생들이 복도로 우르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고, 다음 시간까지 지난 대신 회의에서 논의된 정책안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십시오.”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학생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레오티 영애.”
에르키나 교수가 나가는 학생들 속에 있던 레오니에를 불렀다. 레오니에는 플로무스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플로무스는 복도에서 기다리겠다며 먼저 나가 있었다.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에르키나 교수가 물었다.
“드물게 넋을 놓고 계시던데.”
역시 이거였나, 레오니에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짧게 냈다.
“심려를 끼쳐 드렸네요.”
“혼내려고 부른 건 아닙니다.”
“혼내신다고 제가 울적해할 것도 아니지만요.”
레오니에의 농담에 담긴 사과를 읽은 에르키나 교수가 가볍게 웃었다.
“다름이 아니고…….”
정돈이 안 된 책상 위를 한참 뒤적이던 교수의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연락이 왔는데, 다음 주에 결석을 하신다고요?”
“지역 수장들이 모여 회담을 연다고 하세요. 저도 후계 자격으로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회담에는 수장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후계들도 함께 모여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어머, 좋겠다…….”
에르키나 교수가 부러워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요? 최근 말이 많은 남부와 관련된 것일까요? 그들의 행보가 보통은 아니잖아요.”
“스승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눈을 반짝이던 교수가 일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슬쩍 레오니에의 눈치를 살폈다.
“소문의 그 사람과 관련된 걸지도 모르죠.”
레오니에는 말없이 웃었다.
“회담 내용은 공개가 될까요? 수업에 써도 될까요?”
“그건 아버지와 수장들의 권한으로 결정될 겁니다. 회담 내용이 수업에 쓰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하고요.”
기대하지 마시란 단언에 에르키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스승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따금 북부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네요.”
“차기 보레오티께 그런 말을 듣다니, 최고의 칭찬입니다!”
에르키나가 기뻐했다. 레오니에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보레오티 영애라고 봐주는 건 없으니, 과제는 미리 제출해 주세요.”
빙그레 올라갔던 레오니에의 입꼬리가 삐끗했다.
“…그게 본론이셨나요?”
“물론이죠!”
“차별 아닌가요? 저만 제출 기간이 촉박하잖아요.”
“애제자를 위한 특별 관심과 특별 대우라고 합시다.”
어차피 잘 해낼 거면서.
에르키나는 위로와 함께, 조금 전 책상에서 찾아낸 것을 레오니에에게 내밀었다.
“보세요, 특별 대우죠?”
조금 전까지 죽상이었던 레오니에의 얼굴에 생기가 점점 퍼져 갔다.
“오늘 아침에 제가 황궁에 방문했던 거, 알죠?”
에르키나 교수는 황실의 정치 자문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황궁에 방문했다.
“그분께서 주신 거랍니다.”
“뿜뿜아…!”
레오니에가 편지를 두 손으로 쥔 채 폴짝 뛰었다. 연인의 편지에 행복해하는 레오니에를 볼 때마다, 에르키나는 새삼 레오니에가 아직 어리단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흐뭇하게 지켜보던 교수의 얼굴에 무안함이 피어올랐다. 에르키나는 레오니에의 연인을 만난 적이 있다. 과연 보레오티는 배우자도 범상치 않았다. 아름답고 몸 좋은 건 두말하면 입 아프단 뜻이었다.
‘뿜뿜이’를 처음 만났던 날, 에르키나는 레오니에의 취향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탄탄한 근육질을 지닌 아련한 미인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래서 에르키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별명이 너무 하찮은데.’
저런 별명을 부르고 불리는 두 사람의 생각은 차치하고서라도, 저렇게까지 안 어울리는 별명도 없을 것 같았다.
* * *
레오니에는 스칸디아가 쓴 편지를 좋아했다. 한 자, 한 자 진심을 눌러 담은 글씨체는 참으로 정갈했다. 하지만 이따금 끄트머리에 잉크가 번져 있는 실수도 보였다. 이마저도 어찌나 귀여운지. 편지를 읽을 때면, 레오니에는 늘 손가락으로 글씨들을 찬찬히 쓸었다. 손가락을 통해 글씨 속 그의 진심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레오니에는 이따금 저토록 순수한 이유로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아마 부모님이 알았다면 너 어디 아프냐고,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걱정할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등줄기 예쁘겠지.’
물론 본성은 여전했지만.
넓고 올곧은 등이 제게 편지를 쓴다고 살짝 굽었을 것을 상상하니, 글자를 쓸어내리는 손가락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마치 진짜로 스칸디아의 등을 매만지는 것처럼.
‘아카데미의 유일한 단점이군.’
마음에 그리는 사람을 바로 볼 수 없다는 게 고역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그 단점을 가까스로 참았다.
“레오니에 님, 어디 가세요?”
함께 방을 쓰는 플로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잠깐 산책.”
“조심히 다녀오세요.”
자세히 묻지 않는 플로무스의 인사를 뒤로한 채, 레오니에는 가볍게 걸칠 것을 챙기곤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품에는 편지를 넣은 채였다.
아카데미 기숙사는 본교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했다. 아름다운 정원과 휴식 시설을 조성하여 집 떠나와 생활하는 학생들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건물 뒤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을 등진 기숙사 뒤는 그늘이 깊이 졌고, 사람도 없는 외진 곳이었다. 해가 한창인데도 꽤나 으슬으슬하기까지 했다. 챙겨 온 얇은 것을 두를 생각도 않은 채, 레오니에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아주 익숙한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심술이 나날이 느시는 것 같습니다.”
걱정 어린 목소리와 함께, 기다리던 누군가가 등 뒤에서 레오니에를 끌어안았다. 조심조심한 손길과 다르게, 팔에 담긴 힘은 꽤 억세서 쉬이 풀기 힘들 정도였다.
“저를 걱정시키려고 일부러 이런 곳에서 기다리신 겁니까?”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귀를 간질이는 부루퉁한 목소리에 레오니에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는 제 허리를 감싼 팔을 감싸 쥐었다.
“이리 따뜻한데 뭐 덮을 게 필요하다고요.”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편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편지 마지막에 늘 적혀 있는 예고장 때문이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만나러 가겠습니다.’
스칸디아는 이따금 편지 말미에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항상 약속을 지켰다. 그곳이 어디든.
“오늘은 어떻게 왔어요?”
“황제 폐하의 심부름을 겸해 왔습니다.”
실제로 스칸디아는 황실에서 일할 때 입는 시종 차림이었다. 레오니에는 이 옷을 아주 좋아했고, 그래서 스칸디아는 종종 이 차림새로 그녀를 만나러 오곤 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뽀뽀해 주면 잘 지냈을 것 같은데…….”
레오니에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말끝을 은근히 흐렸다.
“…이 보십시오.”
스칸디아가 얼굴을 느리게 숙이며 속삭였다.
“심술이 나날이 느십니다.”
그리고는 쪽,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치 나비가 꽃 위에 앉은 것처럼. 레오니에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간질거렸다. 이 맹수는 천하의 펠리오마저 두 손 드는 변태지만, 의외로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접촉에 약했다.
아기의 힘없는 간지럼처럼, 스칸디아는 레오니에의 입술을 제 입술로 스치기만 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을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집도 있어서, 기분 좋은 저릿함이 느껴지기 딱 직전까지만 했다.
“…….”
기어코 레오니에가 심통 가득한 표정을 짓고 나서야, 스칸디아가 싱긋 웃었다.
“이제 잘 지내셨겠지요.”
이딴 식으로 불 지펴 놓고 잘 지냈냐고?
열 받은 레오니에가 안긴 상태 그대로 몸을 돌리곤, 두 팔로 스칸디아의 허리를 감쌌다. 귀에 닿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조금 더 품에 파고들듯 안기니, 심장 소리가 문짝을 부수는 발길질처럼 거세졌다. 그제야 레오니에는 기분이 좋아졌다.
“겨우 그런 뽀뽀로 날 만족시켰다고 생각하면 혼나요.”
엄한 목소리로 훈계하듯 말했고, 레오니에는 스칸디아의 반항을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의외였다.
“그래도 참아야지요…….”
평소보다 풀 죽은 목소리에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가슴에 턱을 기대며 시선을 올렸다.
“울 아빠한테 혼났어요?”
“혼나진 않았습니다.”
한 소리 듣긴 들었나 보군, 레오니에가 혀를 짧게 찼다. 그러나 스칸디아가 너무 걱정 말라며 싱긋 웃었다. 그 표정에 거짓은 없었다.
“그저 성인이 될 때까지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신 것이 전부입니다. 저도 반성 많이 했고요.”
“뭔 반성?”
“제가 아무래도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너는 좀 그렇게 살아도 되는데?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서 스칸디아만큼 예의 바른 사람은 없었다.
스칸디아는 이어 고백했다.
“저는 레오 당신이 아니면 사랑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정말 못 해요.”
그래서 이따금 조급해질 때가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느새 레오니에의 눈앞엔 혼이 난 강아지가 있었다. 잿빛 은발이 살짝 흐트러진 덩치 큰 강아지가 낑낑거렸다.
“지난번에 보여 준 내 진심은 안 닿았나요?”
레오니에가 손을 뻗었다. 스칸디아가 제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더더욱 얼굴을 기대어 비비적거렸다.
“레오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이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그저 제 아량이 좁아서 이런 거지.”
“…….”
“눈부신 당신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지 못하는 제가 그저 안타깝고 슬플 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스칸디아는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은 것을 종종 후회하곤 했다. 가까이서 지켜보지 못할 때마다 초조했다. 그래서 곧잘 심술궂은 반항으로 레오니에가 자신을 먼저 원하고 만져 주기를 유도했다.
남들은 경악해 마지않는 족쇄나 힘줄 절단, 새장에 가둔다는 말이 얼마나 달콤하고 안심되는지.
스칸디아는 도리어 질색하는 이들을 동정했다. 그분의 진심 어린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니 불쌍하기까지 했다. 이따금 그녀가 제 목이나 손목, 발목 같은 곳을 빤히 응시할 때면 진정 행복했다. 레오니에가 저 때문에 애태우는 것 같아서.
이렇게나 질척하고 어둑한 것을 어찌 사랑이라 표현할까. 하지만 스칸디아는 양심도 없이 이를 사랑이라 불렀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저의 어린 주인께 자신이 여태껏 품은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다 울어 주면.
얼마나 예쁠까.
찰나의 상상만으로도 숨이 뜨거워지고 피가 몰렸다.
“…하지만.”
스칸디아는 이 모든 욕심을 억지로 꾹 참기로 했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이런 제게 신뢰를 보여 주시는데, 제가 어찌 그 믿음을 배신하겠습니까.”
펠리오는 화를 내기는커녕 자중하라고 타이를 뿐이었다. 바리아도 평소 제게 얼마나 상냥했던가. 벨레아니 역시 저를 좋아해 주며 곧잘 따라 주는데. 스칸디아는 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스칸.”
묵묵히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이름을 불렀다. 상냥한 어조만큼이나, 레오니에는 아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착하기도 힘들 텐데 말이야.”
어리석기까지 한 선량함이 어찌나 고맙고 미안한지 모른다. 레오니에는 스칸디아 같은 사람이 저를 이리도 사랑해 주는 게 엄청난 축복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저는 단 한 순간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비슷한 고민은 한 적 있었다. 가령 벨레아니가 태어나기 전이라든가. 하나 그때조차도 레오니에는 자신이 가진 걸 동생에게 줄 생각은 없었다.
“소중히 여겨 줘서 고마워요.”
두 손으로 스칸디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발꿈치를 들어 입술을 쪽 맞췄다.
“…여태 제가 한 짓이 있는데, 뭐가 고맙습니까.”
스칸디아는 풀이 죽었다. 잘한 것도 없는데 뽀뽀까지 받으니 더 미안해져서 시선까지 피했다. 레오니에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귀여워서야, 안 잡아먹을 수가 없네!”
한참을 웃던 레오니에가 물었다.
“…정말 잡아먹을 건가요?”
스칸디아가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레오니에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의 밀회는 건전했다.
두 사람은 손을 깍지 낀 채 두런두런 이야기만 나누었다. 이따금 입을 맞추거나 서로를 꼭 끌어안기도 했지만,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실로 오랜만에 순수한 시간이었다. 레오니에는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난 의외로 이런 거에 약한 것 같아요.”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좋은 정보를 얻었네요.”
“흥, 내 약점 잡아서 좋아요?”
레오니에가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내 웃어 버렸다. 저런 사소한 것을 알게 되어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마냥 행복했다.
“그럼.”
스칸디아가 이별을 먼저 말했다. 노을에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우리 뿜뿜이도.”
그나마 이번 이별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건.
“나중에 궁에서 만나요.”
며칠 후 열리는 회담에서 후계자 자격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벨리우스 제국은 재미난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다.
중앙 수도에 황제가 기거하며 나라를 다스리니 일단은 군주제를 취하고 있으나. 건국 이전부터 터를 잡고 존재했던 네 지역의 수장은 지금도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니, 연방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수장들이 그 아래 소귀족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 봉건제의 면모도 갖추었다.
이렇다 보니 황권은 상대적으로 낮았고,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특정 지역과 결탁하여 부족한 황권을 키워 왔다.
“…그런 점에서 난 어떨까.”
크리세토스 황제가 중얼거렸다.
황제와 네 지역의 수장들이 모여 회담을 하는 날. 시종들의 도움으로 단장을 마친 황제는 회담이 열릴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잠시 쉬고 있었다. 스칸디아가 그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는 겸 말동무가 되어 줬다.
“형님께서는…….”
스칸디아가 잠시 고민했다.
“양날의 검이시군요.”
“내 말이.”
황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찌 생각하면 좋은 여건이지만, 자칫하단 내 입지만 좁아질 것 같단 말이지…….”
티그리아 전 황후가 헤스페리 후작이 되면서, 서부는 황제의 외척이 되었다, 거기다 헤스페리 후작의 양아들이 보레오티 공작 영애와 결혼하게 되면 북부와도 사돈을 맺는다.
황족과 직접 하는 혼인은 아니나, 이로써 보레오티와 황실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돈 관계가 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황제가 북부와 서부의 힘을 등에 지고 황권을 높이 세울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예찬에 콧방귀를 뀌었다. 도리어 몸을 떨었다.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본다.”
서부의 헤스페리는 아들이 황제라고 해도 쉬이 도와줄 만큼 마음 여린 어머니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선 스칸디아도 동의하는 바였다.
“어머닌 공사가 확실하죠.”
“그래도 최악의 경우엔 불쌍한 아들 흉내라도 내서 동정이라도 구할 수 있다지만…….”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은 서부가 아니었다. 동부와 남부도 아니었다.
“난 진짜…….”
마른침까지 꿀꺽 삼킨 황제가 괜히 두리번거렸다. 지금 이곳엔 저와 스칸디아 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소리 낮춰 말했다.
“영애가 너무 무서워.”
뉘 집 영애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자기 입으로 광공이 되겠다잖아.”
그런 장래 희망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란 증거였다. 하물며 그 광기에 좀 익숙해지려나 싶으면 보란 듯이 한층 발전한 광기를 보여 줬다. 황제는 이해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했다.
“형님.”
스칸디아가 나무랐다.
“레오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뿐입니다.”
“감정에 두 번 솔직하다가 널 죽일 것 같아서 그래.”
황제가 실로 오랜만에 이리 두려움에 떠는 이유는 저 동생 놈 때문이었다.
“스칸.”
황제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이 스칸디아의 목에 걸린 검은색 가죽 목걸이를 가리켰다.
“보통은 그런 걸 선물하지 않는다.”
스칸디아의 목걸이는 시커먼 가죽에 장식된 거라곤 순은으로 만든 고리형 장신구가 전부였다. 연인에게 선물하기엔 너무 섬뜩한 모양새였다. 어떻게 보아도 쇠사슬 달린 족쇄 같았으니까.
“넌 화를 낼 때를 좀 알아야 해.”
이런 걸 받으면 화를 내야 한다며, 황제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러다 호구로 잡혀 산다?”
황제는 아직도 눈에 선했다. 족쇄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 초커 목걸이를 가져와, 해맑은 미소로 그것을 자랑하던 남동생이 말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스칸디아는 진심이었다. 제 목에 걸린 검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며, 이를 온전히 느끼는 표정. 황홀경에 빠진 이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형님이 조금 가엽습니다.”
“네가 드디어 돌았구나.”
“저는 레오가 이보다 더 강하게 절 옥죄길 바랄 뿐입니다.”
황제가 입을 쩍 벌렸다.
“너 설마…….”
그런 취향이었냐? 차마 끝말을 입에 담지 못한 황제의 얼굴에 암운이 일었다.
“스칸 네가 보레오티 영애와 결혼하면, 북부가 그걸 빌미로 내 목을 조여 올 줄 알았는데…….”
남동생의 몸이 진짜로 조여지기 직전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그러다 다칠라!”
“형님. 레오는 늘 제게 상냥하고 다정합니다.”
“나 역시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만…….”
“설령 레오가 제게 아픔을 주더라도, 저는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겁니다.”
그마저도 사랑이고 기쁨이라고 스칸디아가 수줍게 말했다. 스칸디아는 말 그대로 레오니에와 함께라면 슬프고 괴로운 일도 전부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 황제의 귀에는.
‘미친 녀석!’
진짜 그쪽 세상에 눈을 떠 버린 거냐! 우애로 납득하기엔 너무도 머나먼 세상 이야기였다.
황제가 그렇게 남동생의 취향을 오해하면서 충격과 공포에 물들어 가던 찰나.
“오라버니.”
똑똑.
이동을 알리는 시종의 단조로운 음성 대신, 해맑은 목소리가 두 형제의 고개를 퍼뜩 돌리게 했다.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황제가 허겁지겁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손수 문을 열었다.
“큰 오라버니!”
시선을 한참 아래로 내린 뒤에야, 감히 황제를 오라버니라 부른 발칙한 존재를 볼 수 있었다.
황제가 환히 웃었다.
“펠리!”
“큰 오라버니!”
은발을 사탕 포장지처럼 두 갈래로 나눠 묶은 꼬마 숙녀가 황제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펠리데아 헤스페리, 헤스페리 후작 부부의 막내딸이었다. 막냇동생을 번쩍 안아 든 황제가 인중을 축 늘어트린 채 히죽거렸다. 혀 짧은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우리 아가가 걸어왔어요? 아가 호랑이가 총총 걸어왔어요? 혼자서 왔어요?”
“…….”
“이 오라버니를 보러…….”
“큰 오라버니.”
펠리데아가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 전체적으로 이벡스를 닮아 아련한 인상이지만, 입술을 꾹 다문 엄중한 표정은 명백히 헤스페리 후작과 판박이였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황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뜩함을 느꼈다. 어머니께 혼날 때 딱 이랬었다.
“…….”
펠리데아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황제는 여동생을 바닥에 도로 내렸다. 이제 겨우 기저귀 뗀 아가에게서 어머니의 노한 모습이 겹쳐 보이니, 황제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건 스칸디아도 마찬가지였다.
펠리데아가 엄히 말했다.
“저는 아기가, 아닙니다.”
“…….”
“…….”
황제와 스칸디아가 몰래 눈을 마주쳤다.
‘아기잖아.’
‘아기지요.’
그러나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황실과 헤스페리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 펠리데아였으니까.
“큰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
펠리데아가 말할 때마다 볼살이 출렁거렸다.
“철 좀 드세요.”
“너 그거 누구, 아, 아니야…….”
“반성할게…….”
어디서 배워 온 건지 모를 고품격 어휘에 오라버니들이 큰 덩치를 숙이며 굽신거렸다.
“형님.”
스칸디아가 말했다.
“펠리가 온 걸 보니, 아무래도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보다.”
밖으로 나가니 시종들이 동행을 위해 준비 중이었다.
“폐하, 카수스 궁에 다들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시종장이 다가와 알렸다.
“머리 아픈 일 하러 가야겠군.”
황제는 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도 피곤해졌다.
“근데 펠리는 누가 여기까지 데려왔지?”
“헤스페리 후작 부군께서 함께 오셨습니다.”
“아버님이?”
“아버지가요, 같이 왔어요.”
펠리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셨으면 인사라도 하고 가시지.”
황제가 퍽 섭섭하단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에 펠리데아가 꺄르르 웃었다.
“…형님을 배려하신 겁니다.”
스칸디아가 어린 동생을 번쩍 안았다.
“회담 전에 황제 폐하를 만났다간 오해 사기 쉬우니까요. 폐하께 폐를 끼치지 않으시려는 겁니다.”
“거참, 세상 빡빡하군.”
부자끼리 그간 나누지 못한 안부 한 번 묻기 힘들다며, 황제가 한참을 투덜거렸다. 하나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쳐진 채였다.
“…그래도 아버님의 깊은 배려를 무시할 수 없지.”
생물학적 부친에게선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배려를, 양부에게 받는다는 건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큰 오라버니, 힘내세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펠리데아와 스칸디아가 번갈아 응원했다.
“오냐.”
시종들과 함께 가는 황제의 뒷모습이 아까보다 한결 믿음직스러워졌다.
“근데 큰 오라버니는, 어디 가요?”
펠리데아가 물었다.
“아주 중요한 싸움을 하러 가신단다.”
“이거?”
펠리데아가 조그마한 주먹을 쥐었다.
“씩씩도 하지.”
스칸디아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 * *
카수스 궁은 ‘철창’이란 뜻이었다. 귀족들이 한데 모여 나라의 대사를 논하는 모습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싸우는 짐승들에 줄곧 비유되곤 했다. 그런 귀족들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카수스라 명명되었다.
그리고 오늘.
제국을 이루는 다섯 지역의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중앙 수도의 황제. 가장 상석에 앉은 그를 중심으로 왼쪽부터 동부의 오르티오 후작, 남부의 아우스트 공작, 서부의 헤스페리 후작. 마지막으로 북부의 보레오티 공작까지.
“…….”
황제는 눈앞에 모인 이들을 말없이 둘러봤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태연한 표정과 달리, 속은 이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여기가 지옥이구나.’
동생들에게 호기롭게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저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저들은 진짜 맹수이고, 황제는 솜털도 채 마르지 않은 새끼 독수리였다.
그나마 가장 만만해 보이는 게 남부의 아우스트 공작이었다. 아우스트 전 공작은 노환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뒤, 그 뒤를 후계로 지목되었던 손녀 대신 아들에게 물려줬다.
새로운 아우스트 공작은 아주 유순한 인상이었다. 몸이 좋지 않단 소문이 사실인지, 겉으로 보이는 그의 체격은 상당히 왜소했다.
‘…아니지.’
황제는 생각을 고쳤다. 지금 여기 모인 수장들은 전부 한 체격 했다. 그 탓에 상대적으로 저리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일단.”
본격적으로 회담을 진행하기 전.
“네 지역이 이렇게 모이는 건 역사에서도 무척 드문 일이지.”
황제가 먼저 의례적인 언사를 시작했다.
“더욱이 제국에 이바지할 신을 다시 마주하게 되니 아주 기쁘게 생각하오.”
황제는 말하는 동시에 아우스트 공작을 바라봤다. 아우스트 공작이 선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뜻깊은 자리이니만큼.”
순식간에 회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웃는 상을 유지하던 오르티오 후작, 큰아들을 보며 흐뭇해하던 헤스페리 후작, 오늘 회담의 주인공인 아우스트 공작과 심드렁히 관조하던 보레오티 공작.
“부디 나라에 도움이 될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되길 바라오.”
태연함을 애써 유지하던 황제까지.
이들 다섯의 얼굴에 짐승의 사나움이 드리웠다.
“그럼 회담을 시작하지.”
철창 속 맹수들이 이빨과 발톱을 내밀 시간이었다.
* * *
이번 회담은 친목 다짐이라는 대외적 명목을 위해, 다섯 수장의 반려와 후계들도 카수스 궁에 머물렀다. 반려들은 그들끼리 따로 모였고, 후계들 역시 따로 모였다.
두 곳 중 가장 시끌벅적한 곳은 당연히 후자였다.
“레오.”
“레오니에 님!”
레오니에가 안에 들어가기 무섭게,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스칸디아와 유니시아가 쪼르르 다가왔다.
“예쁜 아찌!”
레오니에의 다리를 꼭 붙잡고 있던 벨레아니가 아는 척을 하다가 흠칫거렸다.
“…….”
“…….”
왜냐하면 스칸디아의 옆에도 저와 눈높이가 비슷한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펠리데아 역시 처음 보는 벨레아니를 예의 주시했다. 둘은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스칸, 잘 지냈어요?”
“레오도 그간 평온하셨나요.”
동생들이 서로를 탐색하든 말든,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는 서로를 가볍게 껴안고 입술을 쪽 맞추며 다정히 인사했다. 찰나에 주고받은 시선이 달콤했다.
“와아.”
그리고 중간에서 지켜보던 유니시아가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유니시아 양도 오랜만이에요.”
레오니에가 유니시아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잠깐 사이에 키가 많이 자랐네요. 오르티오 후작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후작 부군을 닮아 점점 아름다워지네요.”
“저, 정말요?”
유니시아가 얼굴을 붉혔다.
“시, 실은 이 머리요. 레오니에 님을 따라 묶은 거예요.”
유니시아가 말총처럼 올려 묶은 제 머리를 가리켰다.
“잘 어울려요.”
레오니에가 빙그레 웃으니, 유니시아가 부끄러운 듯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찰나.
“에이, 질투 나라.”
나한테도 다정하게 대해 주지. 청옥색의 머리칼이 레오니에의 눈앞에서 나부꼈다.
“안녕? 오랜만이네?”
살루스가 싱긋 웃었다.
“…너도 왔어?”
레오니에가 짐짓 놀란 어조로 물었다.
“그거야 내가 남부의 후계니까. 그나저나 레오 넌 키가 엄청 자랐구나. 예뻐진 건 당연하고.”
“뭐, 너도…….”
여전히 짜증 나게 발랄하다며, 레오니에가 떨떠름히 인사했다.
“아우스트 공작 영애신가요?”
스칸디아가 살루스의 청옥색 머리칼을 응시했다. 보레오티의 검은색만큼은 아니어도 아우스트의 청옥 역시 꽤나 드문 색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과연 이 여자가 레오니에에게 어떤 존재냐는 점이었다. 아우스트가 4년 전 반란의 실 주동자란 사실을 스칸디아 역시 알고 있었기에 더욱 신중했다.
“으음…….”
스칸디아를 빤히 응시하던 살루스가 활짝 웃었다.
“레오의 연인이시죠?”
좋은 사람이군, 스칸디아가 먼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칸디아 헤스페리입니다.”
“살루스 아우스트예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아, 오르티오 영애도 뵙게 되어서 기뻐요.”
“유니시아 오르티오예요. 저도 반갑습니다.”
살루스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두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곤 대뜸 몸을 쑥 낮췄다. 서로를 주시하느라 바쁜 아가 맹수들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도 안녕하세요?”
살루스와 눈이 마주친 벨레아니와 펠리데아는 후다닥 제 언니 오빠의 다리 뒤로 도망쳤다.
“언니야.”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의 바지를 꾹꾹 잡아당겼다. 레오니에가 잠시 득과 실을 따지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언니 친구야.”
생각지 못한 레오니에의 대답에 살루스가 기쁘게 웃었다.
“아주 친한 친구랍니다. 영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벨레아니 보레오티.”
“무척 근사한 이름이네요.”
“언니야가 지어 줬어!”
벨레아니는 큰 목소리로 자랑했다. 자신의 이름을 칭찬해 주는 사람에게 항상 이 중요한 사실을 기꺼이 알려 줬다.
“펠리.”
스칸디아가 등을 가볍게 토닥이니, 그제야 펠리데아도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인사했다.
“펠리데아 헤스페리입니다.”
“반가워요, 헤스페리 영애.”
그사이, 레오니에는 홀로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던 누군가를 발견했다.
“이야, 저게 누구야.”
기척을 죽이며 얌전히 있던 사내가 멈칫했다.
“반역죄로 쫓겨난 주제에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올로르 가문을 이어받은 전 1황자 아닌가.”
레오니에의 거침없는 시비에 다들 숨을 죽였다. 살루스 빼고.
“알리, 너도 와서 인사해.”
“루스…….”
알리스가 짜증을 꾸욱 누르며 제 쌍둥이 누이를 불렀다. 그의 머리칼은 제 누이와 다르게 초록색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어디 건방지게 저러고 있는지.”
“알리가 수줍음이 많아서 그래. 마음이 여리거든.”
“어이구, 마음이 여려서 반란을 일으켰어요?”
레오니에의 비아냥이 이어질수록, 알리스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이 파여 갔다.
“와아…….”
유니시아가 감동 어린 시선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멋있다…….”
스칸디아는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왜? 또 반란 일으키게? 이번에는 네가 울 엄마 납치할래? 그래서 내 손에 진짜 죽어 볼래?”
“…….”
“째려보는 것 봐라? 아주 그냥 제 삼촌이랑 똑같구만.”
그래서 올로르가 되었나? 레오니에는 그렇게 한참을, 온갖 정성을 쏟아부어 알리스의 신경을 건드리는 데만 집중했다. 덕분에 알리스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상대하기도 싫었고, 상대해서 이길 자신도 없었다.
“내가 이래서 안 오려고 했어…….”
그는 애초에 이 자리에 올 생각이 없었다.
“그럼 왜 왔냐?”
가장 좋은 소파에 건방진 자세로 앉은 레오니에가 대놓고 비웃었다. 그런 레오니에의 주위로 알리스를 제외한 모두가 쪼르르 모여 있었다.
“가족끼리 나들이 온 건데, 알리 혼자 빠지면 서운하잖아.”
살루스가 동생 대신 대답했다.
“너희는 소풍 개념으로 이 사달을 일으켰냐.”
레오니에는 기가 막혔다. 남부의 등장으로 제국이 얼마나 들썩이는지를 알고도 저리 태평하다니. 심지어 이것들은 기사단 창립 허가를 목적으로 그간 축소된 자신들의 존재감을 제대로 키워 볼 심상이었다.
‘재수 없어.’
레오니에는 역시 남부가 싫었다. 이제 와서 이런 소란을 벌이는 저 뻔뻔함이 가증스러웠다. 그런데도 레오니에가 참고 넘어가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작가님, 아니,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어린 시절 외롭던 저의 마음을 위로해 준 작가님이 우시스 전 황비란 사실에 레오니에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 충격은 의외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했다. 이제 레오니에는 우시스 전 황비에게 일말의 동정심까지 느끼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작가님의 행복을 바라는 제 진심이 더욱 간절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 여자였으니까 쓸 수 있는 책이었어.’
그토록 끔찍하고 처절했던 주인공의 상황을 담담히 묘사할 수 있었던 건 본인의 경험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읽고 공감했던 레오니에는 이제 더는 우시스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스칸디아가 말이 없는 레오니에를 살폈다.
“아, 별건 아니고.”
그제야 사색에서 벗어난 레오니에가 짧게 답했다.
“반란 진압할 때 우시스 전 황비를 안 죽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울 엄마 죽을 뻔했네…….”
살루스가 넌지시 탄복했다.
“…어, 엄마?”
벨레아니와 펠리데아에게 마법을 보여 주며 놀아 주던 유니시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이야기를 나누던 레오니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시스 전 황비 전하가 제 친모예요!”
충격을 감추지 못한 유니시아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그, 그, 그럼 아우스트 영애께서도, 선황 폐하의 자식인가요?”
“초면에 너무하셔라.”
살루스가 친절히 설명해 줬다. 진실을 알게 된 유니시아는 이제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 * *
그리고 여기.
“…….”
“…….”
또 놀란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안녕하셨어요?”
아우스트 공작의 반려로 참석한 우시스는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헤스페리와 오르디오 후작 부군은 웃을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은 어느 정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이벡스는 당시 반란을 진압했던 당사자 중 한 명이었고, 오르디오 후작 부군은 아내에게서 못 알아내는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설마 이 자리에 참석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놀란 건 바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나마 친분이 좀 있었던 바리아가 분위기를 환기할 겸 먼저 말을 걸었다.
“참석을, 하셨네요?”
“그거야 저는 원래 아우스트였으니까요.”
하니 남편 따라 오는 게 당연하다며 태연히 답했다. 순간, 우시스를 제외한 세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선황제가 개차반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만, 도대체 얼마나 인성을 말아먹고 다녔으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욕먹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 정도면 뇌가 발톱에 달렸던 게 아닐까?’
발톱을 깎다 보니 어느새 무뇌가 된 거지. 언젠가 레오니에가 말했다. 그러지 않은 이상, 그리 멍청하기도 힘들다던 레오니에의 신랄한 비판이 떠오르면서, 바리아는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한결 좋아 보여 다행입니다.”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나.”
생각도 못 한 인사, 그것도 거짓 없는 진심에 우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아직 말이 없는 바리아와 이벡스를 힐끔거렸다. 이 자리에 떡하니 앉아는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특히 저 두 사람에겐 미안한 감정이 있기에 더욱 그랬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으나.”
이벡스가 허심탄회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이제는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헤스페리 부군께선 참으로 인자하시네요.”
“저도 그런 말을 당신께 듣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군요.”
역시 세상은 살아 봐야 아는 것이라며 중얼거리는 이벡스 또한 우시스만큼이나 평온한 인상이었다.
“…보레오티 부인도?”
이제 남은 건 바리아뿐이었다.
“…….”
바리아는 말을 아꼈다. 덩달아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바리아는 우시스의 외면 하에 레무스 올로르에게 납치당했고, 자칫 크게 당할 뻔했었다.
“어휴.”
짧은 한숨과 함께, 바리아가 소파에 몸을 느긋이 기댔다.
“지금에 와서 뭘 어쩌겠어요.”
죽이지도 못하고.
심드렁한 혼잣말에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싱긋 웃었다.
“보레오티 공작 부인께서도 그런 표현을 입에 담으시는군요.”
“놀라셨나요?”
“설마요.”
오히려 정감 간다며 즐거워했다.
“이래 봬도 한때 재정부에서 일했답니다.”
어지간히 저속한 표현은 듣고 쓰면서 살았다며, 바리아가 어느새 훌쩍 가 버린 20대를 추억했다.
“게다가 제 딸이 피눈물 삼키며 용서했잖아요.”
레오가 용서했으니까.
바리아는 그렇게 우시스를 용서했다.
“아우스트 부인께선 나중에 제 딸에게 감사하셔야 할 거예요.”
“열렬한 독자님 덕에 살았네요.”
환히 웃는 우시스는 여전히 나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책을 아우스트 부인께서 쓰신 겁니까?”
“저희 부인께서도 아시곤 놀라셨는데…….”
그렇게 사적인 감정이 깔끔히 정리되니, 네 사람의 사교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사실 이들은 서로를 겨눌 이유가 없었다.
각자의 지역을 위해 물어뜯고 싸우는 건 남편과 아내의 몫이었다. 그들의 반려는 그간 못 나눈 안부를 물으며 모처럼 어깨에 힘을 빼며 쉬어 갔다.
“그런데 오르티오 후작 부군께선 성함이 어찌 되시죠?”
바리아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다 알아도, 아직도 오르티오 후작 부군의 이름을 모른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이벡스나 우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저는…….”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곤란하단 듯이 머뭇거렸다. 바리아가 눈치껏 질문을 철회했다.
“곤란하시면 안 가르쳐 주셔도 돼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부군이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저는 그저, 제 이름은 제 부인께서만 불러 주셨으면 해서요…….”
오르티오 후작 부군의 귀와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꼬물거리는 모습이 첫사랑을 힘겹게 고백하는 소년처럼 보였다.
“어머, 낭만적이다!”
우시스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나도 우리 남편한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벌칙 놀이로도 재미있답니다. 가령 제가 지금 여러분께 이름을 알려 드리면, 이를 부인께 고해 벌을 받는…….”
“직접 고하는 건가요?”
“벌이란 응당 진심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연유로.
“제 이름은 아이크입니다.”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줬다.
“어머나…….”
바리아는 당황스러웠다.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그러니까 아이크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준다는 건 자진해서 벌을 받겠다는 뜻이었다.
‘와, 이게 그거구나.’
당하는 걸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레오가 말하던 공수의 수인가?’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사람을 마주한지라, 바리아는 충격을 넘어 새삼 호기심이 동했다.
반면 이벡스는 조금 착잡한 심경이었다.
‘스칸 그 녀석도 저리 변하는 걸까.’
그는 아이크를 보고 있자니, 사랑에 미쳐 제 발목 힘줄마저 기꺼이 잘릴 각오를 하던 둘째 아들이 떠올라 심란했다.
“아, 참.”
뭔가를 떠올린 우시스가 바리아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며칠 뒤에 저희 하녀를 한 명 보내려고 하는데.”
바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우시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전해 줄 게 있어서 그래요.”
“…….”
“나중에 받으면 알 거예요.”
제 할 말을 끝내고, 우시스는 다시 오르티오 후작 부군과 낭만 가득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해가 창밖으로 한참 기울어졌는데도, 다섯 지역 수장들의 회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사이에 반려들과 후계들의 만남은 끝난 지가 오래였다.
“엄마, 이거 봐.”
펠리오를 기다리는 동안, 레오니에는 바리아에게 자신이 그린 시계 도안들을 보여 줬다.
“이번에 새로 만들 것들인데, 어때?”
한 장, 한 장 넘기며 구경하던 바리아가 감탄했다.
“너무 근사하다, 얘. 혹시 이건 동부를 본 따 구상한 거야?”
“역시 엄마는 안목이 좋아.”
자신의 역작을 알아주는 바리아에게 레오니에가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아도 했어!”
벨레아니가 저를 잊지 말라며 팔을 마구 흔들었다.
“맞아, 레아도 엄청 도와줬어.”
“장하네, 우리 막내.”
바리아가 벨레아니의 검은 머리에 입술을 쪽 맞췄다. 칭찬받은 벨레아니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니에가 도안에 대해 설명하던 찰나였다.
“동부는 유명한 계곡에서 영감을 떠올렸어. 서부는 숲, 수도는 번화가, 남부는 바다, 북부는 만년설을…….”
“아빠!”
벨레아니가 문 쪽을 바라보더니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자 진짜로 문이 열리면서 펠리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다! 아빠 알았어!”
벨레아니가 두 손을 갈퀴처럼 굽히고는 어흥 흉내를 냈다. 맹수의 송곳니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는 뜻이었다.
“여보, 고생했어요.”
다가간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기다리게 하느라 미안합니다.”
“덕분에 저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어요.”
단순히 반려들과 친목을 다지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각 지역 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동향을 탐색하였다.
“…동부에서 마법약 물가를 올릴 예정이래요. 서부의 숙청 때문에 재료 공급에 차질이 생겨서요.”
짧은 입맞춤을 나누면서 바리아가 흘리듯 말했다.
“미리 발주를 넣어야겠군요.”
“그 전에 확인부터 해 보죠.”
“현명하신 아내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띄워 주기는.”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옆에서 얌전히 기다려 주던 레오니에가 인중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며 투덜거렸다.
“오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벨레아니도 따라 코를 만지작거렸다.
“아빠도 전만큼 명석하지 못하나 보군. 슬슬 내게 작위를 넘기고 요양 여행이라도 가심이 어떨까?”
“레오 네가 그리 말하는 꼴을 보니 오기로라도 버티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 아빠는 아직 팔팔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일모레면 마흔인데 정년퇴직은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나이도 나이인데 이제 근 손실이나 신경 쓰셔.”
아빠가 그렇게 말할수록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단 말야.
“내가 아마 죽을 때 가장 후회되는 게, 레오 네 양심 키우는 걸 포기했단 걸 테지…….”
내 아픈 손가락 같으니.
“아빠 닮은 거 뻔히 알면서 왜 애먼 양심 타령한대?”
항상 감사하고 고마워.
맹수 부녀는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정한 걱정과 위로를 건네받았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흘러넘쳤다.
“엄마.”
아빠와 언니가 나누는 대화를 물끄러미 듣고 있던 벨레아니가 물었다.
“양심이 뭐야?”
“저 둘에겐 없는 거란다.”
“그러면, 레아도 없어?”
“아니야, 있어.”
바리아가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언젠간 없어질 것 같지만.”
* * *
요란스러웠던 회담은 상당히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남부 아우스트는 끝내 기사단 창설 허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이 실패했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데뷔치고는 성공했죠.”
존재감을 그렇게 드러냈으니까요, 카텔이 말했다. 카텔은 레오니에의 부름에 시계 브랜드 매장에서 입는 직원복 차림 그대로 아카데미에 방문한 차였다.
“원래 회담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레오니에가 테이블 위에 올린 팔에 턱을 괴었다.
“서로 물고 뜯을 것처럼 굴면서 자기들 체면 세우려는 연극 같은 거라고.”
“역시 정치란 어렵네요.”
“그냥 남부가 올라온다니까 맞장구쳐 준 거지. 아, 그건 채도 좀 낮게 잡자.”
“덕분에 저희도 득을 보잖아요. 그럼 이쪽도 색감을 조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둘은 새롭게 출시할 신상 도안을 살피는 중이었다. 일전에 언급한 남부만이 아니라, 서부와 동부, 북부를 참고로 한 도안들도 있었다.
“그래도 제 생각엔 말이죠…….”
레오니에의 지시 사항을 꼼꼼히 적던 카텔이 말했다.
“주인님이야말로 진정한 승자이지 않았나요?”
“당연하지.”
검은 맹수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레오니에는 이번 회담에서 시계 브랜드 매점을 남부와 서부에 입점시키는 쾌거도 이뤄 냈다.
“한데 동부는요?”
“오르티오 영애가 아직 미성년이거든. 대신 후작 부부가 논해 주기로 했어.”
“세상에, 세상에!”
카텔이 제 일처럼 기뻐했다.
“제가 주인님 덕에 일복이 넘친다니까요.”
“사람 좀 구해 줄까?”
레오니에가 물었다. 생각해 보니 사람을 좀 늘릴 필요가 있다.
“확실히 사람이 부족할 것 같네요.”
다른 지역에 가맹점이 생긴다면 더더욱 사람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구인 공모를 내야겠어요.”
“카텔 네가 알아서 해.”
“나중에 서류 보내겠습니다.”
“울 아빠, 아니, 아버지께도 소식 알려 주고.”
“그건 주인님이 하시면 안 될까요?”
저 공작님 너무 무서운데, 카텔이 우는소리를 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혔지만.
* * *
“언니야는 거짓말쟁이!”
벨레아니는 요 며칠 성이 난 상태였다.
“또 집에 없어!”
분명 황궁에서 마차 타고 나올 때는 같이 있었는데, 마차에서 깜빡 잠이 들었더니 또 사라졌다. 이번에는 분명 옷을 꽉 쥐고 있었기에 더욱 억울했다.
“작은 아가씨.”
트라가 흥분한 벨레아니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큰 아가씨는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왜애?”
“주인님의 뒤를 이어 보레오티 공작이 되셔야 하거든요.”
“그치만…!”
한참을 씩씩거리던 벨레아니가 입술을 대문짝만큼 내밀었다.
“공부는 인생의 전부가 아냐!”
생각지 못한 삶의 진리에 트라가 깜짝 놀랐다.
“실례지만, 누구께 그런 말을 들으셨나요?”
“언니야.”
“…….”
트라가 미심쩍은 눈빛을 지었다. 벨레아니는 묘한 말을 쓸 때마다 ‘언니야’란 핑계를 댔다. 한데 이게 레오니에가 어릴 적에 줄곧 둘러대던 ‘고아원’ 같은 느낌이었다.
“큰 아가씨는 아카데미에 계시니 작은 아가씨께 그런 말을 가르쳐 주실 수 없을 텐데요?”
“…아, 아닌데?”
벨레아니가 눈을 피했다.
“언니야, 언니야가 했어…!”
그러고는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트라가 그만 너털웃음을 흘렸다. 도망치는 벨레아니가 잔망스러워 마냥 귀여웠고, 그 모습에서 어린 레오니에가 겹쳐 보이니 그리움이 파도처럼 잔잔히 밀려왔다.
‘아이들은 참 빨리 자라는군.’
그나저나 누구한테 말을 배우는 거지? 벨레아니의 뛰어난 어휘 습득력을 걱정하던 중이었다. 하인 한 명이 다가오더니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집사님. 아우스트 공작저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우스트에서 온 사람이란 말에 트라가 크게 당황했다.
“저는 오늘 그곳에서 사람이 온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기에…….”
“그래, 연락은 없었어.”
하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서둘러 현관 홀로 향했다. 활짝 열린 현관문 앞에는 웬 여자가 있었다.
“…….”
트라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다. 타인의 특징을 빠르게 잡아내어, 이를 토대로 한 번 본 사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떠올렸다. 가령, 눈앞에 있는 여자의 경우엔 선명한 분홍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주인마님의 탁한 분홍색과 눈에 띄게 다른 색.
그래서 트라는 옆에 있던 하인에게 조용히 명했다.
“마님께 조용히 전해 드리게.”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안내하겠습니다.”
트라는 로타를 손님을 모시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로타는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자리에 앉은 로타에게, 트라가 말했다.
“약속 없이 찾아오셨기에, 마님께서 만남에 불응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무심히 답하는 로타의 목소리는 트라의 기억보다 평이했다. 아마 로타가 이곳 저택에 왔을 적에 바리아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던 것이 하도 뇌리에 박힌 탓이 컸을 테지.
곧 향긋한 찻물이 우려졌다. 트라는 로타의 앞에 찻잔을 내려놨다. 찻잔을 들어 마시는 로타의 모습은 한때 귀족이었단 사실을 보여 줬다. 하지만 찻잔을 쥔 손은 결코 귀족의 것이 아니었다. 소박한 차림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군.’
로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트라, 찾아온 손님이…….”
응접실로 들어온 바리아가 저를 찾아온 손님을 발견하고는 내뱉던 말을 멈췄다. 얼굴에 피어 있던 미소도 천천히 사그라졌다.
“마님.”
트라가 바리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우스트 공작저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우스트…….”
짐작되는 바가 있던 바리아가 알겠다며 대답했다.
“그이한텐 말하진 말게. 내가 나중에 따로 말할 테니.”
“알겠습니다.”
트라는 바리아 몫의 차까지 올린 뒤에야 응접실을 나갔다. 온전히 자매 두 사람만 있음을 확인한 뒤에야, 로타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잘 지낸 것 같네.”
비아냥인가? 미간을 설핏 찡그리던 바리아는 곧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어릴 적부터 저가 가장 만만한 상대였으니, 내뱉는 말도 자연스레 삐뚤어지게 나오곤 했다. 습관적으로 나온 말투. 하지만 그 속엔 예전과 같은 독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악의가 담겨 있더래도, 바리아는 상관없었다. 남편과 딸들의 성질머리와 비교하면 그 정도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으니까.
“아우스트 부인이 내게 전해 줄 게 있다더니, 그게 너였니?”
“그분께서 언니한테 전해 주란 건 따로 있어.”
로타의 옆에는 포장된 꾸러미 하나가 있었다.
“이번에 새로 출간한 신작 사인본이래.”
“아아.”
그제야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점에서 충격과 공포의 사인회를 겪은 레오니에에게, 우시스가 사인한 책을 저택에 따로 보내겠다고 했었다. 얼마 전 회담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었고. 아마 그걸 로타를 통해 전한 듯했다.
“언니는.”
로타가 물었다.
“궁금하지 않았어?”
“뭐가 말이니.”
“가족들 말이야.”
두 번째 물음에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언니가 날 미워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부모님한테까지 그러는 건…….”
“로타.”
바리아가 로타의 말을 잘랐다.
“할 말은 그게 다니?”
“…….”
“그럼 이번엔 내 차례구나.”
줄곧 무심한 표정을 짓던 바리아가 입을 열려던 찰나.
“엄마!”
느닷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벨레아니가 아장아장 들어왔다. 깜짝 놀란 바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누가 예의 없이 문을 벌컥 열라고 했지?”
“언니야!”
“또 언니 핑계.”
네 언니가 얼마나 예의 바른데. 바리아가 벨레아니의 말랑한 볼을 잡아 살살 눌렀다. 꺄르르 웃으며 엄마 품에 안기려던 벨레아니는 그제야 로타를 발견했다.
“엄마 손님이야.”
아이가 낯을 가리는 걸 빠르게 눈치챈 바리아가 로타를 소개했다.
“그나저나 우리 근육이는 왜 또 혼자 다니지?”
“레아는 독립적이야!”
“뭐가 독립적이야. 요 사고뭉치.”
유모한테서 또 도망친 게 뻔했기에, 바리아는 벨레아니를 품에 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엄마, 엄마.”
벨레아니는 바리아의 가슴에 폭삭 기댄 채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검은 두 눈은 로타를 조용히 응시했다. 경계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로타 역시 벨레아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리아가 송곳니를 지닌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가 한때 진짜 후계가 될지 모른단 소문을 접하기는 했다. 그리고 왜 그런 말이 돌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검은색이 워낙 위압적이라, 몇 번 본 적 없는 펠리오가 바로 떠올랐다. 아니, 오히려 레오니에 판박이였다.
로타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3살배기에게 위축되었다. 한데 어리광을 부리던 모습에선 바리아가 겹쳐 보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로타는 일순 억울해졌다.
지금은 모두가 바리아를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라고 존중하며,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런 입장이었었다. 가족들의 사랑스러운 딸은 바로 저였고, 제국의 실세였던 가문의 안주인 역시 자신이었다. 가지고 싶은 건 언제든 가졌다. 모든 칭찬과 찬사는 전부 저의 것이었다.
“…아까 한 말 말인데.”
바리아가 벨레아니의 머리를 다시 고쳐 묶으며 말했다.
“가족들이 궁금하지 않았느냐는 거.”
바리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검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레아를 낳았을 때…….”
“우?”
제 이름에 벨레아니가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바리아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우리 둘째 태어나던 날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여러 번 떠올랐었다. 하나 그리움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
“아아, 난 그들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구나.”
벨레아니가 태어나 네 가족이 처음으로 모였던 순간은 다시 생각해도 울컥할 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고 숭고한 존재인데, 그런 자식을 어떻게 비교하며 편애할 수 있었던 걸까.
“그거야 그 아이만 언니가 낳은 자식이니까…….”
“말조심해.”
바리아가 벨레아니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깜짝 놀란 벨레아니가 바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칭얼거렸다.
“둘 다 내 자식이야.”
“…….”
“괜한 소리를 뱉었다간 이 저택에서 못 나가는 수가 있어.”
서슬 퍼런 위협에 로타가 상체를 바짝 뒤로 당겼다. 차갑게 식은 초록빛 눈동자와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금 전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실히 보였다.
“정말, 똑같아?”
로타가 오기를 담아 물었다.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이구나.”
바리아가 놀란 벨레아니를 도닥이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 화 안 났어, 라고 덧붙인 속삭임은 오롯이 제 딸을 향한 다정함에서 비롯되었다.
“자식은 절대적이야.”
이 말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자식은 절대적이기에, 부모는 아이에게 진심을 다해야 했다.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사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녔다. 그들은 아이의 신이고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식은 절대적이기에.
“상대적인 비교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존재들이지.”
그것은 하늘과 땅을 비교질하며 하늘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작 어리석은 이의 발은 땅에 머무르는데도 말이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로타가 억울함을 토했다.
“차별은 부모님이 했어. 나는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
“나도 그걸 네 탓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하나 분명한 건, 로타는 그 차별에 힘입어 오만방자하게 굴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리고 내가 널 미워한다고?”
“…….”
“그럴 정도 없단다.”
“…….”
“네가 내게 저질렀던 잘잘못을 논할 생각도 없어.”
그런 것도 반성이 가능한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부모님을 들먹이며 동정심을 끌어 보려고 하더니, 제게 불리하니 곧장 선을 긋는 저 태도.
바리아는 이 자리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과거는 이제 상관없어.”
레오니에가 가르쳐 줬다. 어차피 그날의 과거들은 저의 잘못이 아니었고,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그러니 바리아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괴로움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분명 네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
정신 차리고 레무스와 헤어지면, 어떤 식으로라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었다.
“거절한 건 너고.”
바리아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기회마저 뿌리친 건 저들이었다.
“…….”
로타는 어느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일어나지.”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시는 분께 선물은 잘 받았다고 전해 주게.”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하녀를 불러 책 꾸러미를 챙기게 했다. 그리고 공작 부인 역시 자리를 나섰다.
로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 얼굴을 붉히며 도로 앉았다. 바리아가 돌아 나서는 순간, 아우스트 저택의 하녀로 일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창피한 건 잠깐이었다.
공작 부인이 자리를 파했으니, 일개 하녀가 응접실에 계속 머무를 수 없었다.
“…….”
로타는 보레오티 저택에서 완전히 나온 후에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저가 품었던 헛된 기대는, 한때 제 언니였던 사람이 품었던 것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고.
‘알고 있었을 거야.’
자신이 아우스트의 하녀로 일하는 것도. 아버지가 술병에 걸려 앓아눕고, 어머니가 친정으로 도망쳤다는 것도.
그런데도 연락하지 않았던 건.
“…….”
로타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굳이 닦지 않았다. 뒤늦은 미련과 후회가 전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 * *
“…미친 거 아냐?”
다음 날, 레오니에는 아카데미에 방문한 펠리오에게서 바리아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우리 작가님이 선을 넘으시네.”
글만 쓰게 어디 외딴 감옥에 가둬야 하나, 레오니에가 퍽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남부는 양심이란 게 없어? 작열하는 태양에 양심이 바싹 말라서 모래알이 되었나?”
로타가 아우스트 가문의 하녀로 간신히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레오니에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에 띄게 하지 말라고 보내 놨더니 이런 식으로 또 통수를 치네.
“모래알도 그네들 양심보단 크고 예쁠 테지.”
“그건 또 그렇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작성한 시계 브랜드 가맹점 확장 계획서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으응, 내 사업인데 아빠 허락을 왜 일일이 거쳐야 하는지.”
“그거야 네가 아직 미성년자니까.”
“짜증 나, 진짜…….”
두 사람이 있는 아카데미 내 휴게실은 학생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더니 어느새 그들만의 독실이 되었다.
“…엄마는 괜찮아?”
레오니에가 물었다.
“강한 사람이니까.”
굳이 위로나 걱정은 필요 없다며 펠리오가 답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건 남편인 자신의 몫이지, 자식의 몫은 아니었다.
“레아가 언니 보고 싶다고 투덜거리니까, 종종 외출해서 집에 들러.”
펠리오가 서류에 서명하며 말했다.
“그냥 레아를 데려와. 아카데미 구경도 시키게.”
“네가 외출을 빙자해 망할 놈을 만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 이 아빠가 진짜 이상하게 보수적이네.”
숨 쉬듯 대꾸하던 레오니에는 심장이 철렁했다. 혹여 아빠가 저와 스칸디아의 밀회를 알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딸자식 둔 아빠는 다 이렇다.”
“아니야, 아빠가 좀 유별나.”
“그래서 싫으냐.”
“싫지는 않고.”
서류를 건네받은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다행히 모르나 보네.’
밀회는 계속 즐겨도 되겠어, 레오니에가 남몰래 안도했다.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펠리오가 물었다.
“아빠는 나 볼 때마다 그거 물어보더라?”
“너도 나중에 애 낳아 봐. 딸 가진 부모는 언제고 항상 밖에서 지내는 딸이 걱정이지.”
“헤헤.”
레오니에가 철없이 웃었다.
“그치만 내가 애를 낳으려면 뿜뿜이랑 거사를 치러야 하는데?”
“씨만 받고 결혼 안 하면 안 되겠냐.”
“아빠는 이상한 데서 또 개방적이란 말이지.”
두 사람은 아카데미 입구까지 느긋하게 걸었다. 자신이 젊은 시절에 다니고 졸업한 곳인데도, 펠리오는 주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근데 아빠.”
펠리오가 마차에 오르려던 차였다.
“아빠 옷 치수는 그대로야?”
“옷?”
의아한 질문에 펠리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근육이 더 커진 것 같아서.”
“네 엄마 운동 맞춰 해 주니 좀 커진 것 같다.”
“힝, 엄마는 좋겠다…….”
“이젠 네 엄마 근육이니 희롱하지 마라.”
“아빠 그럴 때마다 레아가 잘 지내는지 심히 걱정 돼.”
따박따박 대꾸하는 와중에도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체격을 빠르게 훑어봤다. 확실히 좀 커진 것 같았다.
‘…예복은 가장 늦게 맞춰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