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레오니에, 3학년, 남부(1)
보레오티의 초봄은 여전히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국이었다.
“싫어어어!”
그러나 내리쬐는 햇볕은 조금씩 눈을 녹이고, 그 아래 숨어 있는 푸른 싹들도 기지개를 켜고자 꿈틀거렸다.
“언니야! 언니야!”
아카데미 개학 때문에 수도로 내려가는 레오니에를 붙잡고 몸부림을 치는 벨레아니처럼.
벨레아니는 오늘 아침 식사 때까지는 아주 행복했다. 멋쟁이 아빠는 손수 아가를 식탁 의자에 앉혀 주고, 턱받이까지 예쁘게 묶어 줬다. 집에서 가장 강한 엄마는 아가의 볼에 입을 쪽쪽 맞춰 주며 사랑한다고 말해 줬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언니야는 채소 주스를 남기지 않은 아가를 장하다며 꼬옥 끌어안아 줬다.
보레오티의 아가 맹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오늘이라면 언니야에게서 또 숨바꼭질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용인들이 조금 분주하게 움직였다. 감이 좋은 벨레아니는 괜한 불안감에 사용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들이 레오니에의 방에서 짐 가방을 가지고 나오는 걸 목격했다. 짐 가방은 현관 홀 밖으로 옮겨져, 대기 중이던 마차에 하나씩 실리기 시작했다.
그랬다.
오늘은 레오니에가 개학을 위해 수도로 내려가는 날이었다.
“으아앙! 언니야아아!”
조용히 떠나가려고 했건만, 결국 이 사달이 나 버렸다.
“언니야, 가지 마! 가지 마아아!”
“자, 잠깐만! 근육아, 잠깐!”
“으애애앵!”
벨레아니는 마차에 오르려는 레오니에의 다리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레오니에는 다리가 뜯길 것 같은 통증에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그러게 태명을 왜 그렇게 지어서.”
보다 못한 펠리오가 손수 벨레아니를 떨어트렸다.
“으아아아!”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된 못난 얼굴이 드러났다.
“…우리 집 딸들은 울기만 하면 못생겨지는군.”
펠리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자기 욕하는 소리인 걸 알아챈 벨레아니가 더 자지러졌다.
“아빠 바보! 똥멍청이!”
“스읍, 벨레아니.”
바리아가 엄하게 경고했다.
“누가 아빠한테 그런 못된 말을 해!”
엄한 목소리에 벨레아니가 울음을 가까스로 멈췄다.
“어, 언니야가…….”
그 와중에 자신에게 욕을 가르친 사람을 지목했다.
“우리 집 가정 교육을 다 망치는구나, 장녀야.”
오랜만에 ‘바른말 사용하기 기간’을 다시 개최했던 펠리오가 첫째를 원망스레 흘겨봤다. 저 바른말 기간의 기원이 어린 레오니에의 정서 발달을 위해서였는데, 그때도 망쳐 버리더니 이번에도 망쳐 버렸다.
“날 이렇게 가르친 건 아빠잖아.”
아직도 욱신거리는 다리를 문지르며 레오니에가 대꾸했다.
“레오 너도 잘한 거 없어.”
바리아가 레오니에 역시도 혼을 냈다.
“엄마가 말 좀 조심하라고 늘 말했지? 차기 공작이라면 고상하고 우아하게 뒷말 까야 한다고.”
그런 상스러운 단어는 사용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경고했다.
“…반성할게.”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니 순순히 사과했다.
“…….”
어이없는 훈육에 말문이 막힌 펠리오가 한숨을 짧게 흘렸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가슴팍에는 여전히 둘째가 ‘가지 마아…….’라고 울먹거리며 매달리고 있었다.
“레아.”
펠리오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언니는 공부하러 가는 거다.”
“싫어…….”
그는 다시 칭얼거리는 벨레아니의 등을 도닥였다.
“우리도 나중에 언니 보러 갈 거고.”
“지금 가아…….”
“아빠가 아직 일을 덜 해서…….”
“아빠 똥멍청이!”
빼애액, 벨레아니의 울음이 다시 터졌다. 바리아는 그 틈에 어서 마차에 오르라고 레오니에의 등을 밀었다. 벨레아니가 고집을 부리면 여기 있는 셋이 덤벼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여동생의 눈물바다에 발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레오니에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레아한테 인사하고 가면 안 돼?”
어느새 레오니에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 가고 있었다.
“전쟁 통에 헤어져도 너희보단 덜 애절할 거야.”
바리아가 끝내 레오니에를 억지로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누가 보면 레오 네가 낳은 줄 알겠다, 얘.”
“나 엄마가 진통 중일 때 같이 아파했어. 그러니까 나도 어느 정도 낳는 데 기여했지.”
“그래, 우리 효녀.”
신박한 논리에 감탄한 바리아가 징글징글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장녀의 양 볼에 입을 쪽쪽 맞췄다.
“그러니 이 엄마를 위해 그만 가 주렴.”
나중에 수도에서 보자?
마차 문을 닫은 바리아가 펠리오와 시선을 마주쳤다.
“출발해라.”
펠리오가 명했고.
“출발한다!”
마차 선두에 있던 멜레스가 명했다. 검은 말들이 다리를 움직이자, 마차의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언니야아아!”
저를 두고 떠나는 마차를 향해, 벨레아니가 통탄의 절규를 내질렀다. 격정적인 고음을 고스란히 귀에 담은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둘째는 노래를 가르쳐야겠군.”
첫째는 그림으로, 둘째는 목청으로 내 속을 썩이네.
펠리오가 뒤로 넘어가려는 벨레아니의 등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 대신 제 턱을 야무지게 찰싹 때리는 손길은 참고 넘어가야 했다.
“으애애앵!”
마차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야 겨우 펠리오의 품에서 벗어난 벨레아니가 도도도 달렸다. 그러나 마차는 이미 사라졌다. 아가 맹수는 몇 발자국 달리지도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을 했다.
뭐가 그리 원통한지, 조그마한 덩어리가 땅을 손으로 치며 한참을 울어 댔다. 지켜보는 어른들의 마음이 짠하게 젖어 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펠리오가 말했다.
“푸딩 먹을까?”
‘푸’라고 발음하기 무섭게 벨레아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로 볼이 흥건하고, 콧물로 인중이 더러워진 아가가 우느라 시뻘게진 얼굴을 출렁거렸다.
“…푸딩?”
애처로운 눈동자가 끔뻑거렸다.
“푸딩은, 점심 먹고, 훌쩍, 간식 때 하나만 먹는 건데에…….”
“오늘은 특별히.”
“그럼 간식은?”
간식 때도 푸딩 먹을 수 있는지 벨레아니가 물었다. 펠리오는 대답 전에 집안 내 최고 권력자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오늘은 특별히.”
아침부터 진이 다 빠진 바리아는 펠리오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감히 간식 때 푸딩을 먹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일단은 저 작은 폭군을 달래는 게 중요했다.
“…헤헤.”
벨레아니가 못난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그새 기분이 좋아진 아가 맹수가 양손으로 부모님 손을 꼭 잡았다.
“푸딩 먹으러 가자요!”
씩씩한 호령이 이어졌다. 정작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둘째를 바라보는 펠리오와 바리아의 얼굴엔 묵직한 피로가 얼룩진 채였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지만.”
펠리오가 자신들의 손을 놓고 거실로 먼저 달려가는 아가 맹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레오보다 더하군요.”
레오니에를 처음 키울 때, 육아란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는 진리를 수도 없이 깨우쳤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레오니에는 입가심이었다. 아니, 입가심도 아니었다. 차녀를 키우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장녀가 아주 순하고,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아이였다는 것을.
“그 말을 당사자한테 해 주면 참 좋아할 텐데.”
꼭 없을 때 칭찬하지.
바리아가 펠리오의 미운 입술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 * *
이렇듯, 북부 보레오티는 푸딩으로 평화를 겨우 되찾았지만.
“…세상에나.”
수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 무슨 일인가.”
크리세토스 황제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북부 게이트를 통과한 레오니에를 비롯한 아카데미 학생들을 친히 마중하러 나온 차였다.
말이 마중이지, 사실은 이번 휴가 내내 도적을 퇴치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동생을 위한 형님의 배려였다.
한데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가 심상치 않았다.
황제가 제 옆을 힐끔거렸다. 주인만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오매불망 레오니에만 기다렸던 스칸디아는 세상이 다 무너진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평소였다면 주접이라고 욕을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저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역시 레오니에가 저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레오니에가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스칸디아가 달려갔다. 내뻗은 팔이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검은 맹수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의 눈엔 레오니에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보였다. 좀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보던 황제가 괴이한 것이라도 본 듯 인상을 팍 썼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평소라면 온갖 멋을 부리며, 제 남동생과 쪽쪽 빨고 비비적거렸을 텐데.
황제는 솔직히 레오니에가 그리 걱정되진 않았다. 저렇게나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데도, 그의 눈에는 마치 악마의 눈물처럼 섬뜩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어서, 크리세토스 황제는 제 뒤에 있던 시종들과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레오니에의 약한 모습을 함부로 보여 줘선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신상을 위해서라도.
“그대, 괜찮은가?”
황제가 다가가 물었다. 레오니에는 답지 않게 손수건으로 눈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처연한 모습이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황제는 적잖게 놀라는 중이었다.
“레아가 저랑 헤어지기 싫다고 그렇게 우는데, 그 어린 것을 떼어 놓고 저 혼자 수도에 왔다는 게…….”
“으음…….”
황제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성격 차가 있겠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아기들이었다. 저 역시 그 나이대 여동생이 있어서 알았다.
“작은 영애도 그대가 보고 싶을 걸세.”
정작 그 작은 영애는 아침부터 푸딩 하나를 깔끔하게 해치우고는 접시를 혀로 날름 핥고 있었다.
“뿜뿜이도 그렇게 생각해?”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에게 물었다.
큰맘 먹고 위로해 줬는데도 무시당한 황제는 그러려니, 했다.
“물론이죠.”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이제 기운 차리라고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 다 꺼졌으면 좋겠다.’
황제가 미소 뒤로 욕을 삼켰다.
가까스로 슬픔을 극복한 레오니에가 뒤로 물러난 궁인들과 기사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는 얼굴이 보이네요.”
작년 여름, 북부로 합동 훈련을 하러 왔던 레보오 기사단 몇 명이 이곳에 있었다.
“아직도 물갈이 중이라.”
크리세토스 황제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단행한 수많은 일 중 하나가 황실 기사단 교체였다. 기사단 중추 대다수가 올로르의 입김으로 들어온 자였고, 그 탓에 대부분을 갈아 치워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그간 곪았던 알력 다툼까지 드러났다.
황실에 충성하지 못한 이들 중 죄가 중한 기사들은 사형에, 나머지는 검을 쥐는 손을 잃고 쫓겨났다.
“덕분에 피의 황제란 별명까지 생겼지.”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치곤 황제의 표정은 썩 기뻐 보이지 않았다.
“폐하.”
레오니에가 말했다.
“농부는 보리 새싹이 올라오면 꾸욱 밟아 준답니다. 왜 그런지 아시나요?”
“땅을 다지려고?”
잠시 고민한 황제가 대답했다.
“밟을수록 새싹 뿌리가 땅속에 깊이 박히기 때문입니다.”
레오니에의 눈엔, 지금 크리세토스 황제가 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결단이 필요했던 일이고, 무엇보다 민심의 반응도 좋았습니다.”
레오니에가 황제의 눈을 응시했다.
“권력을 갓 쥔 황제는 아주 만만한 먹잇감이에요.”
빈틈을 보이지 말고, 설령 보이더라도 그것을 덫으로 만들어 자리를 단단히 잡으시라 충언했다.
“…밟아야 할 건 밟아야 안 기어오르지.”
기실 그게 가장 중요하다며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놀란 것처럼 넋이 나가 있던 황제가 머쓱하게나마 따라 웃었다.
“역시 보레오티는 아군일 땐 누구보다 든든해.”
“내가 우리 뿜뿜이 봐서라도 폐하께 잘해 드리죠.”
“동생을 잘 둔 내 복인가.”
황제가 스칸디아를 보며 기쁘게 말했다. 스칸디아는 입가를 부드럽게 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 그만 자리를 비켜야겠네요.”
그제야 레오니에가 자리를 비켰고, 보레오티 마차가 비운 게이트 너머로 또 다른 마차가 들어왔다. 케라타 가문의 마차였다.
“그런데 폐하도 슬슬 황후를 맞이하셔야 하지 않나요?”
레오니에가 마차에서 내리는 플로무스에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
“영애까지 나한테 잔소리인가.”
황제가 오만상을 쓰며 질색했다. 마침 오늘 아침 어전 회의에서 황후를 서둘러 맞이하란 대신들의 잔소리를 배부르게 먹고 오는 길이었다.
“자리가 자리니까요.”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덤덤히 말하는 레오니에의 눈동자엔 일말의 동정이 고여 있었다.
“하긴,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겠지만.”
“내 말이 그거야.”
황후의 자리에 앉을 이는 신중히 골라야 했다. 대신들이 황후를 빨리 들이라고 난리를 쳐도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폐하 정도면.”
황제의 얼굴을 빤히 살피던 레오니에가 넌지시 말했다.
“꽤 잘생긴 편이잖아요.”
“선황을 닮아서?”
“최근엔 후작 얼굴도 좀 보여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헤스페리 후작의 모습이 황제에게서 보였다. 특히 눈매와 입꼬리가 똑 닮았다.
“그렇단 말이지?”
그 말에 황제가 씩 웃으며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형님은 출중한 외모를 지니셨습니다.”
“맞아. 선황 그 새끼도 얼굴 하나는 훈훈하고 좋았어요.”
죽은 선황제가 유일하게 잘한 건, 그의 아들에게 잘생긴 외모를 남겨 준 것이다. 그의 외모는 인성으로 가야 할 지분마저 얼굴로 몰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괜찮았었다.
“레오니에 님.”
때마침 플로무스가 다가왔다. 황제가 싱긋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케라타 영애, 오느라 수고했어요.”
조금 전까지 청승맞게 떠들던 모습은 감추고, 멋들어진 미소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자신을 가꾸었다.
“제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플로무스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멋있는 척하긴.’
레오니에가 피식거렸다. 그런 와중에 저한테만 반말하는 게 좀 아니꼽기도 했다.
‘근데 나 말고도…….’
다른 귀족들에게도 반말을 쓰던 것 같았는데, 라고 레오니에가 의아해하던 찰나.
“보레오티 영애.”
황제가 불현듯 뭔가를 떠올렸다.
“손님이 온다더군.”
“손님?”
네 손님을 왜 나한테 말하냐?
그런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황제를 바라보던 레오니에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설마…….”
레오니에가 스칸디아를 휙 돌아봤다.
“어제 연락이 왔습니다.”
스칸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가 올 겁니다.”
“메리디오?”
“아니요.”
진짜 남부의 주인.
아우스트 공작 가문이 수도로 올라온다.
* * *
“그러고 보니 요즘 아우스트 저택이 분주하긴 하더군요.”
트라가 소파에 나뒹구는 레오니에의 겉옷을 주우며 말했다.
“일꾼들이 들어가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흐음…….”
소파에 누운 레오니에가 손에 들린 보고서를 넘기며 대꾸했다. 시계 브랜드에서 보낸 전월 판매 보고서였다.
‘이제 슬슬 새 구상을 떠올려 볼까.’
살짝 떨어진 판매 실적을 보니, 이쯤에서 신상을 발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가씨.”
부르는 소리에 보고서를 치우니, 트라가 저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른 자세로 앉으셔야죠.”
“집인데 좀 누우면 어때요.”
레오니에가 소파에서 더욱 빈둥거리며 킥킥 웃었다.
“미래의 공작님이 되실 분이라면 안 보이는 곳에서도 항상 준비된 자세를 갖추고 계셔야 합니다.”
“난 그런 거 안 해도 이미 준비된 공작이지롱.”
말은 빈둥거려도, 레오니에가 슬그머니 일어나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참, 다과회 준비는요?”
레오니에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기 전마다 소수의 인원에게 초대장을 보내 다과회를 열었다.
“아가씨께서 서명만 해 주시면 됩니다.”
준비는 일찌감치 끝냈으니, 마지막 확인만 하면 된다고 트라가 말했다.
“트라 아저씨는 나중에 북부로 올라올 거죠?”
레오니에는 자신이 공작이 되었을 때, 트라가 그의 어머니처럼 북부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가 되기를 바랐다.
“나중에 나랑 스칸한테서 태어난 자식들이 트라 아저씨를 할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일단 주인님이 가만 안 두실 것 같습니다.”
“누굴요? 트라 아저씨를?”
“저 말고 기사님을요.”
트라가 쓰게 웃었다. 그는 레오니에가 아이를 낳으면, 낳은 수만큼 스칸디아의 뼈를 부러트리겠다던 펠리오의 취중 진담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펠리오는 술에 잘 취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때 했던 말은 맨정신일 때도 항상 다짐하는 진담이었을 게 분명했다.
“이런.”
레오니에가 혀를 찼다.
“난 기사단 하나 창설할 정도로 낳을 생각이었는데.”
“아가씨, 제가 그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겠습니까.”
트라는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레오니에의 다산 계획에 능청스레 반응할 만큼 철면피가 아니었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진짜로 그만큼 낳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남부가 왜 올라오는 걸까요?”
다행히 레오니에는 빠르게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트라가 제 딴에 생각해 본 이유를 말했다.
“아무래도 4년 전 올로르의 반란 이후로 아우스트가 남부에서 영향력을 다시 행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부도 그 이후로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갔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기사단 창설 허가?”
안 봐도 뻔하다며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슬슬 주장할 때가 되긴 되었죠.”
오랫동안 바닷속에 숨어 있던 청옥의 고래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니에는 커다란 고래의 몸동작에 과연 제국이 얼마나 요동칠지 궁금해졌다.
‘남부에 기사단이라…….’
레오니에는 여러 가능성을, 그리고 이것들이 성사되었을 경우 북부에 끼칠 영향들을 고려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트라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주인님 판박이시네.’
지금의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딱 저 나이였을 때와 똑같았다.
“차를 드릴까요?”
트라가 물었다.
“설탕은 빼고요.”
레오니에가 마시고 싶은 차 종류와 곁들어 먹을 것들을 부탁했다.
“아가씨께선 남부에 기사단이 창설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레오니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번에도 힘들 거 같네요.”
* * *
“그야 당연히 기사단 창립 건의겠지.”
그날 밤.
크리세토스 황제는 제 침실에서 술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앞에 놓인 유리잔에 담긴 술은 한 방울도 줄어들지 않았다. 술맛이 확 떨어지는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허락해 주실 겁니까?”
마주 앉은 스칸디아의 잔에도 입을 댄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니.”
황제가 애먼 안주만 포크로 콕콕 찌르며 대답했다.
“웃기는 놈들이야.”
북부와 서부에는 기사단이, 동부에는 마탑이 있었다. 아우스트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사단을 창설하고 싶어 했다. 남부를 자치적으로 지키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듣기엔 참 타당한 주장이었다. 분명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형평성에 어긋나기도 했다.
“누가 들으면 남부만 차별하는 줄 알겠네.”
그러나 작년 회의에서 크리세토스 황제가 남부의 기사단 창설 허가를 보류한 덴 이유가 있었다.
“남부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은 뭐가 되냐고, 그러면.”
지금이야 서부의 리네 영지에게 첫 번째 위상을 빼앗겼지만, 남부는 지금도 수많은 무역선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러니 해상에서 노략질하는 해적들이 빈번하게 출두했다. 그래서 제국은 남부에 해군을 병설했고, 이에 대한 관리 감독을 남부 아우스트에 맡겼다.
“해군도 병력이야.”
물론 육지에선 실권을 행사할 수 없단 조건하에 전임하였지만, 여기에 또 병력을 추가할 순 없었다.
“유사시 해군 지휘권이 남부로 설정되어 있긴 한데,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게 아니라고 해도…….”
무엇보다, 해상 전투만큼은 아우스트와 메리디오가 전문가였다. 지휘권을 황제가 함부로 가져갈 경우, 해전을 지휘할 전문가의 부재로 나라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해상과 육지 병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건 황제 입장에선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기사단 창설을 허락하면, 서부는 어떻겠냐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황제가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설마…….”
어머니께서 그러시겠느냐고 말하려던 스칸디아가 멈칫했다. 헤스페리 후작이라면 제 아들이 황제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위인이었다.
“난 어머님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어…….”
황제를 가르친 스승 중 단연코 가장 위대했던 분은 바로 헤스페리 후작이었다.
“그리고 난 남부 싫어.”
“레오도 싫어하는데.”
스칸디아가 제 연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여기서까지 네 애인 끄집어내냐?”
중증 같으니, 황제가 혀를 찼다.
“그놈들이 지난번에 날 죽이려고 했잖아.”
황제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우스트와 메리디오는 당시 황자였던 크리세토스를 죽이려고 했었다.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형님…….”
스칸디아가 조심히 말했다.
“요즘 묘하게 귀여우시네요.”
투정 부리는 모습도 어째 레오니에와 비슷해 보였다.
“네가 내 동생만 아니었으면 하옥시켰을 텐데.”
황제가 퍽 아쉬워했다.
* * *
수도에 위치한 보레오티 저택에 여러 대의 마차들이 들어왔다.
“보레오티 영애, 그간 잘 지내셨어요?”
“이번에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학 동안 더욱 강해지신, 아 원래 강하셨지만요.”
레오니에가 개학 전마다 여는 조그마한 다과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이었다.
“다들 어서 와요.”
레오니에는 손님들을 손수 맞이했다. 다과회는 딱히 특이할 것이 없었다. 잘 가꿔진 정원, 그곳에서 가장 큰 아름드리나무 그늘에 준비된 테이블에서 차를 즐기는 것뿐이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이미 졸업한 사회인부터 올해 입학하는 신입생까지. 열 명이 조금 넘는 인원. 전부 레오니에가 아카데미에서 눈여겨 둔 사람들이었다.
다과회에서 나누는 내용은 지극히 평범했다.
“지난달 신문에 난 기사 보셨나요?”
“서부에서 외부 감사를 감행했다던데…….”
소소한 안부를 물으면서, 어느 사건이나 주제가 화두로 올라가면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시기에 도적 소탕도 했다지요? 혹시 연관이 있을까요?”
“소문으로는 남부에서 이주했다던 소상단이…….”
“하지만 이런 급작스러운 감사는 업무상 큰 피해가 발생…….”
각자의 출신, 성향, 가문 등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그 속에서 홀로 침묵을 유지했다.
“헤스페리 후작의 행보는 대체로 강경해요.”
“다만 이번에는 악수로 느껴지는데…….”
“나도 같은 의견이에요. 그 때문에 타 지역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흐름이 끊기는 건…….”
무료한 표정과 심드렁한 눈빛으로 대화를 듣고 있기를 잠깐.
“숙청.”
레오니에가 찻잔을 손에 쥐었다.
“하려나 보네요.”
차받침과 찻잔이 부딪치면서 달칵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레오니에가 입을 열자마자 모두 말을 멈춘 탓이었다.
“…그렇네요.”
우피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를 모으시려는 건가요?”
“이렇게 대놓고? 눈치채고 증거를 숨기려면…….”
“이마저도 눈속임일 수도 있죠.”
“타 지역을 향한 견제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네요.”
테이블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이제는 레오니에도 제 생각을 드러내며 참여했다. 뒤에 물러서 있던 어느 하녀는 테이블 위로 오가는 대화에 적잖게 놀랐다.
‘이게 평범한 다과회라고?’
향긋한 차와 보기에도 예쁜 과자와 케이크, 평화로운 정원. 이 모든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어지러운 대화들이 이어졌다.
‘아카데미는 대단하구나.’
하녀는 내심 감탄했다.
이처럼, 레오니에의 다과회는 일단 ‘평범’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임이 ‘등용문’으로 소문이 난 건 이미 오래였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학년만큼이나 입장도 다양했다. 귀족 가문의 후계자도 있고, 후계를 잇지 않는 귀족 자제나 평민도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는 이가 있으면, 아카데미에 어떻게 입학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 이도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의 다과회에 초대받은 후, 이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미친 듯이 드러냈다. 다과회는 표면상의 모습일 뿐. 사실은 레오니에가 자신이 공작 작위를 받을 때를 위해 준비하는 발판의 일환이었다.
인맥을 쌓고, 제 사람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고. 그렇기에 다과회 주인과 초대받은 손님들은 친구 관계라기보다는 상하 관계에 더 가까웠다.
“참.”
마침 누군가가 새로운 대화 주제를 꺼냈다.
“아우스트가 온다지요?”
남부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기사단 창립에 관한 주제도 자연히 따라 나왔다. 대체로 기사단 창립은 힘들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남부 출신들은 기사단이 필요하다며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주인님.”
그때, 레오니에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소곤거렸다. 단정히 올려 묶은 밀색 머리가 도드라졌다.
“남부를 주제로 한 시계는 어떨까요?”
밀색 머리를 단정히 올려 묶은 여자의 이름은 카텔. 작년에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곧장 레오니에의 시계 브랜드에 입사한 직원이었다.
“귀한 발걸음을 행차하셨는데, 존재감이 급부상하는 지금이야말로 이용하기 딱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오니에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과연 홍보 전략이 탁월한 인재답게 발상이 좋았다.
“진행하렴.”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텔은 신상품 판매일과 그때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다과회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 준비를 할 때였다.
“참, 그거 들으셨나요?”
슬슬 다과회를 파장할 때를 가늠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인생 다 부질없다’ 읽으신 분 계시나요?”
뜬금없는 애독서 등장에 레오니에는 당황했다. 물론 수려한 권태로움으로 뒤덮인 표정이 흔들리는 실수 따윈 하지 않았다.
‘설마…!’
그러나 레오니에의 가슴은 실로 오랜만에 콩닥콩닥 뛰었다.
“그 작가님이 무려 4년 만에 신간을 내는데, 이번에 서점에서 신간 기념 사인회까지…….”
쾅!
엄청난 굉음이 평화로운 다과회 정중앙에 들이닥쳤다.
“꺄악!”
뒤에 있던 하녀가 두 팔로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이, 이게…!”
“테이블이…….”
다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는지,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졌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레오니에는 홀로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테이블을 내려칠 때 반으로 깔끔하게 쪼개진 찻잔이 들려 있었다.
“으억.”
어느 가문의 영식이 이를 보더니 쓰러졌다.
“…그래서.”
레오니에가 깨진 찻잔을 하녀에게 넘기며 말했다.
“누가, 뭘 한다고?”
* * *
다과회가 무사히 끝나고.
“보스그루니 백작께서 감동하실 겁니다.”
자신의 전설을 계승한 후계자를 어찌 기뻐하지 않을까. 트라가 반으로 쪼개진 테이블이 하인들의 손에 옮겨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뒤에 덧붙인 ‘주인님껜 뭐라 말씀드려야 하지?’라는 혼잣말을 들어 보면.
아무래도 테이블이 보통 값비싼 게 아닌 듯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다 상관없었다.
“으아, 으아, 으아아!”
방으로 올라간 레오니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새된 비명을 한참 질러 댔다. 그러다 침대 위로 폴짝 뛰어서는 미친 듯이 뒹굴었다.
“작가님!”
애꿎은 베개를 주먹질할 때마다 존경해 마지않는 저의 작가님을 울부짖기 바빴다.
“…레오?”
그리고 그 모습을, 황제의 전갈을 전하러 온 스칸디아가 전부 보게 되었다.
“뿜뿜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레오니에가 우다다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뭐가 그리 기쁩니까.”
스칸디아는 레오니에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놀라움이 뒤섞인 웃음을 지으며 레오니에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저 때문은 아닌 거 같아 조금 섭섭합니다만.”
“에이, 그래도 나한테는 우리 뿜뿜이가 최고지!”
레오니에가 조금 전 스칸디아가 했던 것처럼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특히 입술에다 입을 맞출 때는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
“작가님이 온대요!”
“작가님이요?”
스칸디아가 레오니에를 소파에 내려 주며 물었다.
“내 애독서 작가님!”
그 순간.
“…애독서?”
스칸디아의 미소가 아주 잠깐 돌처럼 굳어졌다. 레오니에는 드물게도 이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스칸디아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것도 있지만, 레오니에가 유달리 흥분한 까닭도 있었다.
“이거 봐요, 이거.”
어느새 책장까지 이동한 레오니에의 팔에는 오래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처음 읽었던 애독서예요.”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난 탓에 손때가 묻고 여기저기 수선한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낡은 책. 하지만 레오니에는 어딜 가든 항상 이 책을 챙겼다.
“내 마음을 위로해 준 책이었어요.”
책을 소중히 어루만질 때마다 선명하게 떠올랐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당시, 레오니에는 자신이 겪었던 부조리한 상황을 위로받았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저의 괴로움을, 소설 속 주인공이 보듬어 주고 이해해 줬다.
“여기에 작가님 사인을 받는다면, 난 정말 기쁠 거예요.”
“그렇군요.”
“스칸도 같이 갈래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사인회 갔다가 밥도 먹고, 광장 구경도 하고, 으슥한 곳에 가서 둘만의 시간도 갖고…….”
으슥한 곳을 가자고 말할 때는 상대를 향해 살짝 힐끔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싫어요?”
그럴 리가. 스칸디아가 목이 떨어질 정도로 격하게 흔들었다.
“권하지 않으면 진짜로 섭섭할 뻔했습니다.”
“아이 좋아!”
레오니에가 냉큼 스칸디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크으, 이 감촉!’
옷 너머로도 훤히 느껴지는 불끈불끈한 갈라짐과 저보다 조금 더 높은 체온.
레오니에는 이제 이 근육이 아니면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저만의 근육이 생겼는데, 심지어 너무도 완벽한데. 게다가 이 근육은 스칸디아가 저를 위해 키워 온 사랑의 증거였다. 이러한데 굳이 다른 근육을 눈에 담을 필요가 있을까.
전혀 없었다.
레오니에가 자라면서 펠리오와 글라디고 기사단의 근육을 염탐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뿜뿜이도 이 책 읽었지요?”
“그대가 추천한 책은 무조건 읽습니다.”
하물며 음지에서 몰래 판매하는 레오니에의 동인지일지라도. 어느새 소파에 앉은 둘은 착 달라붙은 채 서로의 귀에만 들리게끔 목소리를 낮추며 재잘거렸다. 그로도 모자랐는지, 스칸디아는 레오니에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번쩍 들리는 순간에 레오니에가 꺄르르 웃었다.
‘한데 어쩌지…….’
스칸디아가 레오니에를 어화둥둥 부둥켜안은 채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그 작가가 우시스라고 가르쳐 드려야 하나.’
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제 입으로 레오니에를 슬프게 하는 말 따위는 꺼내기 싫었다.
“레오.”
“응?”
스칸디아의 이두근을 콕콕 찌르며 놀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
스칸디아가 살짝 흐트러진 검은 앞머리를 손수 정리하며 생각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라면, 굳이 그걸 지금 알릴 필요가 있을까. 어찌할 수 없는 바라면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즐기게 놔두는 것이 배려일지 모른다.
“그 전에도 저와 함께 놀아 주실 거지요?”
스칸디아가 강아지처럼 얼굴을 가까이 비비며 물었다. 눈꼬리를 살짝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
빵긋빵긋 웃던 레오니에의 얼굴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지난번에도 느꼈는데.”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힘을 줘 밀었다. 스칸디아는 저항하지 않고 소파에 쓰러져 누웠다.
“우리 뿜뿜이가 요즘…….”
가슴에 얹어졌던 레오니에의 손가락이 붓질하듯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위로 움직였다. 흉근을 지나 빗장뼈 사이, 툭 튀어나온 울대뼈. 그리고 선이 매끄러운 턱.
“기어오르나?”
“기어오르다니요.”
스칸디아가 퍽 서운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저는 항상 당신의 아래에 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요.”
“입만 살아서는.”
레오니에가 괘씸하단 듯이 손가락으로 스칸디아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
“나를 은근슬쩍 자극한단 말이지요?”
“그럼 어쩝니까.”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는 이제 곧 성인이 됩니다.”
스칸디아가 여전히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을 무시하며 말했다. 오히려 말할 때 일부러 혀를 살짝 내밀어 핥았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뒤로 피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이런 걸 보면 아직 어리구나, 싶었다.
“하지만 레오는 아직 한참 남았어요.”
“그래서 뭐, 내 탓이라도 하는 거예요?”
“저는 레오보다 연상이고, 성인이 되면 당신을 배려해 꾹 참아야 합니다.”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우리 둘 다 미성년자일 때 한바탕하자고요?”
“그런 뜻은 아니고…….”
스칸디아가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이를 내려다보던 레오니에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아닌 건 아니지만, 역시 참기 힘들다는 소리입니다.”
“그래도 참겠다는 거죠?”
“예.”
“그럼 참아요.”
매정한 명령에 스칸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제 심정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근데.”
레오니에가 고개를 스윽 내렸다.
“나는 안 참을래.”
귓가에 닿은 더운 숨결에 스칸디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서둘러 옆을 돌아보니, 저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진 채였다. 스칸디아는 뒤늦게 제 허리춤 근처를 만지작거리는 레오니에의 손길을 느꼈다.
허둥거리던 스칸디아가 저도 모르게 레오니에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참으랬더니 만지고 있어.”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채, 레오니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늘막처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사이로 뜨거운 시선이 얽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집어삼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달뜬 호흡을 한참이나 주고받던 중.
스칸디아의 손이 슬그머니 레오니에의 허벅지 뒤를 꽉 움켜쥐었고, 레오니에의 손이 어느새 흐트러진 스칸디아의 셔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까꿍!”
오동통한 손가락이 툭, 끼어들었다.
방정맞고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레오니에와 스칸디아의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어?”
레오니에가 믿을 수 없단 듯이 제 여동생을 바라봤다. 소파에 턱을 괸 채 둘을 바라보던 벨레아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야!”
그리곤 통통한 볼살이 눈 밑을 찌를 정도로 해사하게 웃었다.
“…으아악!”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레오니에가 후다닥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발라당 바닥에 넘어졌는데,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킨 레오니에가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어, 언제 왔어! 왜 왔어!”
“마차 타고오, 게이트!”
“근육이 너 혼자 왔어? 아니, 왜 내가…….”
네 기척을 못 느낀 거지? 라고 고민하던 찰나에 눈에 들어온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문 앞에 굳은 채로 서 있는 바리아였다.
“악!”
장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바리아의 목깃에 장식된 검은 다이아 브로치와 벨레아니의 구두에 장식된 검은 다이아가 눈에 들어왔다.
‘망할 아빠가!’
그리고 이걸 누가 생각해 냈는지 알았다.
“예쁜 아찌다. 아찌!”
“오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레오니에가 충격으로 굳어진 사이, 벨레아니는 소파 뒤에서 나오지 않는 스칸디아를 졸졸 따라다녔다. 스칸디아는 드물게 허둥거리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재킷을 서둘러 허리에 걸쳤다.
“…….”
그러자 단단히 삐친 벨레아니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아빠한테 다 말해.”
최후의 폭탄을 던졌다. 영악한 아가는 눈치챘다. 지금 언니와 예쁜 아찌가 뭔가 좋지 않은 것을 했단 걸.
“아빠아아.”
말릴 틈도 없이, 벨레아니가 냉큼 복도로 달려갔다.
잠시 후.
“…레오니에 보레오티!”
활화산 같은 목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살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뿜뿜아, 도망쳐!”
와장창!
그날, 보레오티 저택 3층에서 누군가가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리는 모습을 수많은 사용인이 목격했다.
* * *
스칸디아는 어찌어찌 저택을 벗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추정만 되었다. 사실 누구도 그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3층에서 뛰어내려서 다쳤다든가, 유리에 몸이 베였을지 모른다든가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에겐 그 정돈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드디어 제국이 무너지는 걸까요.”
트라가 몸서리를 얕게 치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내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술을 건네받은 루페의 얼굴 위에는 메마른 미소만 남아 있었다.
“이 나라는 끝이야.”
그는 조금 전까지 펠리오에게서 황실과 서부를 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계산하란 명령을 받든 참이었다. 이제 제국의 운명은 펠리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래도 정말 하겠습니까.”
트라는 혹시 모를 희망을 괜히 찾았다.
“역성혁명이야, 심심하면 입에 담은 말씀 아닙니까.”
“이번엔 심심해서 입에 담은 게 아니라서 문제지.”
하나 루페는 현실을 일깨웠다.
“진짜 각오해야 할지도 몰라.”
“아가씨…….”
트라가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 남은 건 아가씨 손에 달렸어.”
술잔을 비우는 루페의 속도 그리 편하진 않았다. 물론 그 아가씨도 멀쩡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트라는 마지막으로 본 레오니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제 운명을 받아들이며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미어졌다.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가 없었다.
루페와 트라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문 너머를 바라봤다. 이곳 직원 휴게실보다 한 층 아래, 그리고 동쪽으로 조금 더 지나가면 있는 곳. 보레오티 가족들이 저녁이면 늘 모여 시간을 보내는 안락한 거실이 있었다.
하나 오늘만큼은 안락하지 않았다.
“…후우.”
펠리오가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또 내뱉었다. 그가 앉은 소파 팔걸이는 엉망으로 으깨진 지가 오래였다. 부러진 파편들이 바닥에 수북이 쌓인 채였다.
트라가 봤다면 또 비싼 가구가 제 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가슴 아파할 터였으나, 그나마 부서트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어느 젊은이의 목이 저렇게 부러졌을 테니까.
“레오니에 보레오티.”
펠리오의 입에서 본명과 성이 동시에 나왔다는 건, 곧 레오니에가 제대로 혼날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한참을 침묵하던 펠리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묵직하다 못해 바닥을 기는 음성이 갈퀴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갈고리는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눈치만 살피는 그의 원수 같은 큰딸을 위협했다.
“수도 없이 당부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다리가 저리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오늘만큼은 너무 괘씸해서 쉬이 용서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참으라고.”
“…….”
“대답.”
“네에…….”
레오니에가 눈치껏 존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동의하는 바라고 알고 있다. 아니 그러더냐?”
“레아는 없었잖아.”
“…….”
“물론 저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버님.”
냉큼 꼬리를 만 레오니에는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저의 입방정을 크게 후회했다. 지금은 눈치껏 반성하는 척을 해야 했다.
보레오티는 미성년자의 성적 자율권에 엄격했다. 펠리오의 사촌 여동생에게 있었던 일은 두말하면 입 아프고, 그 일로 태어난 레오니에는 애먼 고통을 겪었었다. 바리아 역시 제 여동생이 소아 성도착증자에게 세뇌당한 적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선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은 레오니에의 연애를 최대한 존중하나, 성인이 될 때까지 선을 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레오니에도 아카데미 졸업 전까진 조심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냐고…….’
레오니에는 의외로 건전한 연애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악한 순둥이가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애걸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거나, 버르장머리 없이 허락도 묻지 않고 치근거리기 일쑤였다. 오늘만 해도 레오니에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리지 않았던가.
스칸디아는 자신이 레오니에의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와 근육을 지녔단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이를 이용해, 부디 저의 주인께서 먼저 자신을 예뻐하시라고 유혹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변태에게 이는 시련이었다.
“…변명해도 됩니까?”
레오니에가 오른손을 들어 허락을 구했다.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이 생의 마지막 숨이 될 수 있다.”
“너무해! 그렇다고 딸을 죽여?”
“너 말고 그 새끼.”
“에구머니나.”
서둘러 입을 꾹 다문 레오니에가 아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변명거리를 궁리했다. 펠리오가 부러진 팔걸이 위에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올렸다.
“변명은 다 생각해 뒀나?”
“그…….”
레오니에가 머뭇거렸다. 자신의 변명에 스칸디아의 명줄이 달려 있음은 물론이고, 서부와 수도에 피바람이 불 수 있었다.
“그래도…….”
한참을 머뭇거린 레오니에가 이내 결심하듯 말했다.
“내가 위였어.”
“…….”
“이 레오니에 보레오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검은 맹수가 아빠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손으로 가슴 언저리를 팡팡 치는 모양새가 쓸데없이 씩씩했다.
“위를 점령했다고!”
“그래.”
묵묵히 듣던 펠리오가 천천히 일어났다. 감았다 뜬 눈꺼풀 아래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잠깐 역성혁명 좀 하고 오마.”
“아빠아!”
레오니에가 냉큼 펠리오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펠리오는 제 다리에 레오니에를 붙인 채로 복도로 나왔다. 다행히 복도엔 아무도 없었는데, 펠리오의 불쾌한 심기 때문에 사용인들이 몸을 사린다고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 진짜 조심한다고!”
레오니에가 빽 소리 질렀다.
그래도 펠리오는 아버지였다.
“네 결혼식 때 신랑의 머리로 만든 부케를 들고 가면 참 아름다울 것 같지 않으냐.”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결혼식을 생각해 주는 아버지의 진심에 무척 감동했다.
다행히 펠리오는 역성혁명을 하러 나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마침 장녀의 우위 점령에 충격을 받고 드러누웠던 바리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아는 바로 레오니에를 찾더니.
“레오니에 보레오티!”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 혼을 냈다.
풀이 팍 죽은 레오니에가 은근히 변명했다.
“옛날에는 나보고 세상 모든 남자를 점령할 거라더니…….”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심지어 그건 네가 성인이란 조건하에 성립되는 것이라며, 바리아가 온갖 잔소리를 퍼부었다.
“세상 어디에도 믿을 남자는 없어! 결혼하고 한 이불 덮고 몇 년 살아 봐야 아는 거야.”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의 살벌한 잔소리를 이어 듣던 레오니에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빠랑 싸웠나?’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세상에, 내가 어제 네 아빠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아니나 다를까, 바리아의 경고 어린 잔소리는 어느새 한풀이로 변해 있었다.
“귀걸이 좀 골라 달라고 물었더니, 쳐다도 안 보고 왼쪽이라고 하는 거야?”
“아아, 아빠…!”
그건 너무했다며 레오니에가 맞장구를 쳤다.
‘뭐 그런 거로 싸운대.’
정작 속마음은 참 부질없는 거로 부부 싸움 한다며 투덜거리기 바빴다. 저는 지금 제 예쁜이와 놀지도 못하는데, 지금 누구 염장을 지르나.
“내가 그때 왼손에 뭐 들고 있었는지 아니?”
“뭐 들고 있었어?”
“레아가 벗은 양말.”
심지어 뒤집힌 채였다.
“세상에, 세상에!”
레오니에가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 사귈 때는 그렇게 예뻐 죽으려고 하더니, 이젠 정말…….”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바리아는 결국 코까지 훌쩍이며 울먹거렸다.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간 레오니에가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위로했다.
“이혼하고 싶으면 말해. 솜씨 좋은 변호사 붙여 줄 테니까.”
덩달아 재산 명의도 좀 빼돌려 주겠다며, 레오니에가 효심을 발휘했다.
‘어쩐지 엄마 혼자 올라왔더라니.’
이런 연유가 있었군.
평소라면 둘이 함께 저를 찾아왔을 텐데, 바리아가 먼저 올라왔던 걸 보면 펠리오가 눈치껏 몸을 사린 듯했다. 역시 세계 최강은 바리아인 듯했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예측했다.
‘사나흘 걸리겠는데?’
* * *
바리아가 말은 저리 했으나, 레오니에는 부모님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저들도 사람이고 부부라서 종종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늘 거치는 화해의 과정이 있었다.
“언니야.”
아침부터 기운 넘치는 벨레아니가 쪼르르 다가와 레오니에의 다리에 폭삭 안겼다.
“또 유모 따돌리고 혼자 다니지?”
글라디고 기사단과 훈련을 마친 후 씻고 나온 레오니에가 동생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언니야, 언니야.”
“왜?”
“엄마랑 아빠는?”
“코오, 자고 있지?”
“또오?”
벨레아니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허리춤에 손을 야무지게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못 말려!”
“그러게나 말이야.”
유모 두고 혼자 쏘다니는 너도 못 말리지만.
레오니에가 또 다른 진심을 은근슬쩍 숨기며 동의했다.
지금 부모님은 ‘화해의 사나흘’ 중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진짜 주인공 부부는 무섭다니까.’
애가 둘인데도 여전히 신혼이라니, 레오니에가 진절머리를 쳤다.
‘이러면서 나한테만 잔소리지.’
내가 보고 배운 게 다 그런 건데, 애인이랑 이 짓 저 짓 못 한다고 생각하자 조금 억울했다.
“레아는 아빠랑 엄마 못 봐서 슬퍼?”
만약 벨레아니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레오니에는 당장 부모님이 계시는 침실로 가서 깽판을 칠 예정이었다.
“아니?”
하지만 벨레아니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도리도리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머리 위 우뚝 선 사과 꼭지도 흔들렸다.
“레아는, 독립적이야!”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옹알이만 따따따 내질렀던 것 같았는데. 레오니에는 나날이 발전하는 동생의 언어 구사력에 감탄했다.
“그럼 언니랑 놀래?”
“응.”
다람쥐처럼 쪼르르 바닥으로 내려간 아가 맹수가 두 팔을 벌렸다.
“어부바!”
“너도 참 사람 등골 빼먹는 데엔 일가견이 있구나.”
자기 욕하는 걸 눈치챈 벨레아니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몸을 숙여 등을 보이니 냉큼 올라탔다.
“헤헤.”
레오니에의 허리 양쪽으로 툭 나온 다리가 흔들거렸다.
“언니가 어부바해 주니 좋아?”
“응.”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며 배시시 웃었다. 레오니에를 놓치지 않겠단 듯이 양팔에는 힘이 잔뜩 실린 채였다. 레오니에는 그대로 복도를 느릿느릿 걸어 다녔다.
‘…내일 또 울려나.’
내일이면 아카데미가 개학하고, 레오니에는 기숙사로 간다. 고개를 힐끔 돌리면, 어느새 제 옷자락을 꼭 쥔 여동생의 통통한 손이 보였다. 자신이 수도로 먼저 떠날 적에도 그렇게 엉엉 울었던 것이 생생해 아직도 미안하기만 했다.
“언니야.”
“응?”
“노래! 노래해 줘!”
“그럼 피아노 치면서 놀까?”
“응!”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등 뒤에 업힌 벨레아니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선명히 보였다.
둘은 피아노가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레오니에가 벨레아니를 바닥에 내려 준 뒤, 피아노 덮개를 치우며 건반을 가볍게 누르곤 음을 확인했다.
‘오늘은 레아랑 놀아 줘야겠다.’
내일 벨레아니가 자지러지게 울 건 뻔했으니, 지금이라도 실컷 놀아 주는 게 레오니에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죄였다.
‘뿜뿜이는 다음에 만나야지.’
다과회 이후로 보지 못한 스칸디아의 생사 여부는 나중에 밀회를 통해 확인하면 되었다.
“무슨 노래 불러 줄까?”
“어어, 광공 생일!”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아가씨.”
선곡을 받은 연주자의 손가락이 건반을 눌렀다.
딴딴, 딴딴.
경쾌한 선율을 따라 벨레아니가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비장한 표정이 무색하게끔 잔망스러운 팔다리 움직임이 퍽 웃겼다.
레오니에가 먼저 선창했다.
“북부 광공이라 하는 맹수 님의 생신날이래요.”
“래요!”
“따까리들 모두 모두 모여, 조공들을 바쳐요.”
“바쳐요오!”
두 자매의 즐거운 노래 시간은 그렇게나 한참 이어졌다.
“…저 노래는 교육적으로 괜찮은 걸까?”
응접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파보가 때늦은 걱정을 떠올렸다.
“부질없는 걱정이구나.”
멜레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사소한 것이 아가씨들께 영향이라도 끼칠 성싶냐?”
“그건 또 그래.”
“파보 너 기억나?”
멜레스는 레오니에가 글라디고 기사단을 처음 방문했을 적을 언급했다.
파보는 당연히 기억난다며 킥킥 웃었다.
“처음에 다들 웬 변태가 잠입했냐고 수군거렸잖아.”
그리고는 엄청난 노래를 모두의 앞에서 불렀었다.
“범상찮은 떡잎이셨지.”
그리고 새로운 떡잎이 하나 더 생겼다. 레오니에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또 다른 범상찮은 존재가.
“…….”
파보가 뭔가를 고민했다.
“…주군이 고혈압으로 한 번은 쓰러지신다.”
“난 허파 뒤집혀 과호흡으로 쓰러지신다에 건다.”
“지는 사람이 술 사기.”
“기간은 언제까지?”
“큰 아가씨 결혼 전까지.”
“내가 이기겠군.”
둘만의 술 내기가 성사되었다.
* * *
보레오티 가문에 두 가지 소식이 들렸다.
일단, 공작 부부가 ‘화해의 사나흘’을 고작 하루 반나절 만에 끝냈다. 거의 이틀 만에 부모님과 만난 두 딸의 싸늘한 시선을 차치하면 나름 훈훈한 소식이었다.
반면 두 번째 소식은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와아, 저거 뭐야?”
“독개구리 무늬 아냐?”
“쉿, 입조심해.”
“저 검은 머리는 설마…….”
“야, 그냥 빨리 지나가자.”
개학을 맞이한 아카데미는 어느 때보다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아카데미 본관 입구 앞에 떡하니 드러누워 있었다.
“으에에엥!”
바리아가 제발 입지 말라고 뜯어말렸던, 검은 점박이 무늬가 강렬한 주황색 비단 원피스.
“언니야! 가지 마아!”
딸 등신으로 소문 난 펠리오마저 외면케 만든 점박이 리본.
“으아앙! 으에에에!”
제 취향으로 한껏 무장한 벨레아니는 통곡 중이었다. 레오니에가 오늘 아카데미 개학으로 기숙사에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벨레아니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아침부터였다. 사용인들이 아침부터 커다란 가방들을 마차에 옮겼고, 그게 뭐냐고 물어도 답하지 않았다.
‘푸딩 먹으러 갈까?’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아침부터 푸딩을 먹자고 했다.
아침부터 푸딩이라니!
똘똘한 아가 맹수는 기뻐하는 대신 수상쩍음을 느꼈다.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은 마차를 타는 언니의 옷을 보면서 커졌다. 그것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족들이 탄 마차가 도착한 어느 커다란 건물로 들어가는 걸 보자마자.
“배신자! 배신자아아!”
벨레아니의 통탄의 울음이 시작되었다.
“우리 둘째가 똑똑한가 봅니다. 벌써 저런 말을 쓰다니.”
“그런 칭찬은 나중에 집에서 하면 안 될까요?”
이 와중에 감탄하는 남편을 가볍게 흘겨본 바리아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레오 너까지 땅에 드러누울 건 아니지?”
다행히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걱정과 달리 바닥에 눕지는 않았다. 대신 엉엉 우는 벨레아니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이에에엥…….”
그제야 벨레아니의 얼굴이 드러났다. 우느라 새빨개진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우리 근육이.”
레오니에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동생의 얼굴을 닦아 줬다.
“언니야, 어이야이…….”
우느라 지쳤는지, 이제 입에서는 흐느낌에 가까운 옹알이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충 가지 말라고, 저랑 같이 있자는 뜻인 건 알 수 있었다.
“언니도 레아랑 헤어지기 싫어.”
“으허어어, 히끅!”
벨레아니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아가 맹수의 콧구멍이 심하게 벌렁거렸다. 이건 좀 많이 웃겼던 레오니에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언니야, 레아랑, 흑, 있어…….”
그 사이 언니야의 품을 차지한 벨레아니가 매미처럼 매달렸다.
“…데려가 키울까?”
레오니에의 진심 어린 중얼거림을 들은 펠리오가 결국 나서서 벨레아니를 떨어트렸다.
“으아아앙!”
붙잡힌 벨레아니는 이거 놓으라고 거세게 저항했다. 발길질도 하고 몸부림도 쳤지만, 결국 펠리오에게 발목이 잡혀 대롱대롱 거꾸로 들리고 말았다. 다행히 드레스 자락은 펠리오가 다른 팔로 다리를 둘러싸 단단히 고정한 채라 흘러내리진 않았다.
“그럼 우린 그만 갈게.”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볼에 입을 맞췄다.
“뭐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피곤하니…….”
“나 없는 동안 고생해.”
“어휴…….”
바리아가 뒤를 힐끔 보았다. 잠깐 사이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거꾸로 매달렸던 벨레아니가 펠리오의 코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천하의 검은 맹수가 끙끙거리며 한쪽 무릎을 땅에 꿇었다.
곧 자신도 참전할 잔혹한 풍경을 잠시 지켜보던 바리아가 레오니에에게 말했다.
“우리 딸 정말 효녀였구나.”
“그러게 있을 때 잘해야지.”
효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실 장식장 세 번째 서랍에 근육 미남 색칠 놀이 책이랑 뿜뿜이 그린 연습장 있거든?”
만일을 위해 준비해 둔 벨레아니 전용 진정제의 위치도 알려 줬다.
“엄마가 우리 딸 너무 사랑해.”
펠리오도 바리아에게 벨레아니를 넘기곤,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레오니에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 틈에 바리아가 벨레아니를 안고 마차에 올랐다.
“…아빠 코 괜찮아?”
레오니에가 경악했다.
“피 나는 거 아냐?”
“내가 널 몰라봤다.”
펠리오가 시뻘게진 코를 손가락으로 살살 만지작거렸다.
“우리 큰딸.”
살짝 맹맹해진 목소리엔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후회가 가득했다.
“다시 보니 효녀구나.”
그렇게 말 잘 듣는 아이였는데.
그간 너무 불효녀라고 막 대한 것 같아 아빠의 마음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더럽게 기분 나쁜 상대적인 평가, 고맙슈.”
부모님께 연달아 재평가를 받은 효녀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마차를 배웅했다.
“아, 나중에 지역 수장들끼리 모일 거지? 나도 참석해?”
“너한테도 초대장이 갈 거다.”
“평일에? 조퇴?”
“네 학업에 지장 없도록 주말에 모일 거다.”
“수장 놈들 짜증 나.”
그렇게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
레오니에가 흘러내린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아카데미를 향해 돌아섰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쉬움이 가득하던 얼굴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고, 냉정을 되찾은 검은 눈에서 시린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금 전까지 아가 맹수에게 놀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진짜 맹수에게 두려움을 느낄 차례였다. 벨레아니의 무당개구리 드레스와 청천벽력 같던 생떼를 전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린 정도였다.
어느샌가, 레오니에의 앞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알아서 길을 비켜 줬기 때문이다.
“…….”
“…….”
숨 막히는 위압감과 별개로, 검은 머리를 흩날리는 아름다운 미모에 넋이 나간 사람들이 자진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이 모든 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으쓱하거나 자랑할 일이 아니었다.
모두의 두려움과 존경, 부러움과 약간의 시기 질투를 받는 건 응당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레오니에의 곁으로 다가왔다.
“서, 서, 선배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웬 여학생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배꼽 앞으로 다소곳이 쥔 두 손은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그러나 인사하는 목소리만큼은 우렁찼다.
“아, 안녕하세요! 방학 동안 잘 지내셨나요?”
“…….”
“선배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그, 그러니까…….”
“같이 그렸었지?”
점점 절규로 변질되는 여학생의 자기소개가 끊어졌다.
“…네?”
멍청한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든 여학생의 눈에,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레오니에가 들어왔다. 심지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여학생은 그것이 저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멍하니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기숙사 정원에서 같이 그렸었지?”
“네! 선배님께서, 제가 그리시는 걸 보고, 여, 옆에서 같이 그려도 되겠느냐고 친히 물어봐…….”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하던 여학생이 멈칫했다. 레오니에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여학생의 귀밑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곤 귀 뒤로 넘겨 줬다.
“으어어.”
여학생의 입에서 혼이 빠져나가는 신음이 이어졌다. 새빨개진 얼굴에선 이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 학기도.”
검은 눈동자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잘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레오니에가 자리를 떠났고, 감격에 겨운 여학생은 망부석처럼 서 있다가 기절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친구들이 서둘러 여학생에게 다가가 정신 차리라며 소리치고 부축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건 레오니에에게 지극히 당연하고, 너무도 익숙하며, 앞으로도 지겹도록 반복될 평범한 학교생활이었다.
* * *
“언니는 여기 여자 꼬시러 왔어요?”
“보자마자 시비니?”
개학식을 위해 모인 강당.
레오니에는 며칠 만에 만난 우피클라의 볼을 반가운 마음으로 가볍게 꼬집었다.
“그리고 여긴 너희 학년 자리가 아니야.”
레오니에는 아침부터 저를 찾아온 우피클라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지금 우리 학년 난리 났어요.”
“왜?”
“거야 당연히 언니 때문이죠.”
아침에 레오니에가 어느 여학생에게 웃어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정작 소문의 당사자는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며 심드렁히 굴었다.
“두 번 웃었다가 난리 나겠네.”
“한 번 웃어도 이 난리인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피클라가 부산스럽게 팔을 흔들었다. 덩달아 흔들리는 붉은 머리가 여우 꼬리를 연상케 했다. 아침부터 참 기운 넘친다는, 영감님 같은 감상을 끝으로 레오니에가 어쩔 수 없단 미소를 짧게 지었다.
“어쩌겠니, 우피.”
그리곤 우피클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가 너무 잘났는데.”
자기애 넘치는 검은 맹수는 아카데미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세상이 여기 있었네.’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다닐걸.’
입학하고 부모님께 썼던 첫 편지에는 아카데미가 저와 무척이나 잘 맞는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저를 향한 존경과 두려움, 덤으로 따라오는 질투까지. 레오니에는 이 모든 관심이 좋았다.
그만큼 자신의 존재가 대단하단 방증이며, 보레오티의 드높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달가웠던 건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이런 것들이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었었다. 펠리오의 품으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물론 품에 안길 때는 으르렁거리며 눈 내리라고 위협했지만.
하나 점점 자라 보레오티에 버금가는 힘과 실력을 지니게 되면서. 레오니에는 저를 향한 시선이 아무렇지 않단 듯이 연기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즐기는 수준까지 되었다.
“…변태.”
우피클라의 눈이 점점 메말라 갔다.
“원래 잘나고 예쁜 사람은 뭘 해도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받는단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그게 변태지.”
“물론 나라고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레오니에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괬다.
“다들 몸이 왜 저러니.”
아카데미에 딱 하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레오니에의 취향에 부합하는 근육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탓에 레오니에의 눈은 항상 영양실조 상태였다. 어릴 적에 이곳에서 만났던 파보의 남동생 보파는 기적 중의 기적, 진흙 속의 근육이었단 사실을 늘 깨닫게 된다.
“저리 비실거려서…….”
끝내 잇지 못한 마지막 말속엔 ‘구실은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라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응?”
우피클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레오니에의 입학 전후로 들어온 학생들, 특히 남학생들은 얼굴로 뽑았나 싶을 정도로 외모가 출중했다. 혹여 보레오티의 눈에 들어가 공작 부군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단 이유 때문이었다.
거기다 레오니에가 저리 불만스러워하는 그들의 체격도 일반인치고는 상당히 건장한 축이었다.
“아, 뿜뿜이 보고 싶다…….”
정작 당사자는 관심도 없었지만.
“뿜뿜이의 흉근과 대퇴근에 기대어 편히 쉬고 싶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검은 눈동자는 저의 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젖어갔다.
“레오니에 님.”
때마침 플로무스가 두 사람 곁에 다가왔다.
“같은 교복인데도 분위기가 저렇게 다를 수 있구나…….”
“…….”
“아야! 왜 때려요!”
“기분 나빠서.”
반갑게 다가가던 플로무스는 갑자기 티격태격 싸우는 레오니에와 우피클라 때문에 몸을 멈칫했다. 하지만 곧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싱긋 웃었다.
“우피클라 님도 계셨네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플로 언니 안녕! 잠깐 놀러 왔어요.”
“너 이제 가라.”
레오니에가 우피클라에게 어여 가라고 손짓했다.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거든요오.”
우피클라가 혀를 메롱 내밀다가 뭔가를 퍼뜩 떠올렸다.
“언니들도 이틀 뒤에 외출할 거죠?”
무엇을 위한 외출인지는 생략된 질문이었으나, 확실하게 알아들은 레오니에가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였다.
“언제든 덤벼라, 그래.”
“후후, 레오니에 님도 참. 그렇게나 기대되세요?”
“저게 무슨 기대되는 얼굴이에요…….”
누가 봐도 사람 예닐곱은 패고 온 얼굴인데.
결국 입방정을 떤 죄로, 우피클라는 사람 예닐곱은 가볍게 팰 듯한 힘으로 입술을 꼬집히고 말았다. 소리 없는 비명이 차마 열리지 못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어휴, 성질머리하곤.’
그래도 또 혼나는 게 무서워서, 우피클라는 속으로만 삐죽이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우피는 좋겠다…….”
“보레오티 선배님이랑 서슴없이 지내고. 부러워!”
“근데 너 입술 왜 그래?”
“보레오티 영애께서 꼬집은 거야?”
“나도 꼬집어 주시지!”
자신이 레오니에에게 괴롭힘 당한 걸 지켜봤으면서도, 친구들은 마냥 부러움 섞인 투정을 내뱉었다. 우피클라는 레오니에가 어서 졸업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 *
아카데미에서 누가 가장 유명하냐고 물으면, 재학생 전원이 레오니에 보레오티라 답한다. 그럼 가장 우수한 건 누구냐 질문하면, 교수진 전원이 레오니에 보레오티를 지목한다.
반박은 어디에도 없다.
‘…당연한 거 아냐?’
그럼 나 말고 또 있어?
당사자조차 인정하는 바였다.
레오니에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첫날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 행보 하나하나가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
입학한 첫해에는 자신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다며 직접 교수를 뽑았다. 물론 채용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레오니에는 제게 주어진 권력의 무거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아카데미에 판을 치던 채용 비리를 조사해 고발해, 부당하게 떨어진 저의 스승 후보를 아카데미에 들어오게 했다.
당시 이 사건은 제국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제국의 세 가지 권력 중 하나였던 학술원 내부가 물갈이되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두 번째 해는 첫해와 비교하면 나름 조용한 편이었다.
자신이 고른 스승과 함께 정치학을 연구해 논문을 공동으로 저술했고, 제 친구에게 찝쩍대던 학생의 가문을 가볍게 혼내 주었다. 그랬더니 정치학 연구 논문은 황실에서 정책 반영에 참고하겠다고 발표했다. 혼을 내 준 학생의 가문은 조사받던 중 암거래에 참여했단 정황이 포착되어 큰 난리가 났었다.
이렇다 보니, 자연히 세간은 레오니에의 행보를 주목하게 되었다. 하물며 어느 비평가는 신문에 이런 내용의 사설을 기재하기까지 했다.
‘차기 보레오티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이러한 존재감을 드러내니, 우리는 현 보레오티 공작이 얼마나 인자하였는지를 뒤늦게 깨달으며…….’
그리고 레오니에는 이 사설을 잘라서 곱게 보관해 뒀다.
“역시 학교는 좋아…….”
평화로웠던 2년간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던 레오니에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등나무 아래 자리 잡고 앉은 레오니에의 손에는 ‘병법론’이라 적힌 오래된 도서가 들려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레오니에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반면 책을 살피는 검은 눈동자 역시 기민하게 움직였다.
“야, 저기 봐…….”
“보레오티 영애셔.”
“뭘 읽고 계시는 걸까?”
“읽는 모습도 아름다우셔….”
지나가던 학생들은 독서 중인 레오니에를 힐끔거리며 감탄했다. 이따금 바람이라도 불어 흔들거리는 푸른 잎사귀 따라 레오니에의 검은 머리도 살랑거릴 때면 안타까운 탄성마저 쏟아지곤 했다.
정작 당사자는 독서에 집중하느라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는 동작을 조금 더…….’
표지 속에 숨긴 근육질 사내들의 격한 운동이 그려진 회지를 점검 중이던 찰나.
“레오니에 님.”
플로무스가 달뜬 걸음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와.”
그러다 다친다며, 레오니에가 책을 덮으며 플로무스 곁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뛰어 왔는지 플로무스의 숨이 조금 거칠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아. 덕분에 막혔던 부분이 풀렸거든.”
조금 더 격한 감정을 끌어 올리고 싶었던 레오니에는, 역시 유연성을 강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단 정답을 손에 넣었다.
“병법론까지 읽으세요?”
책 표지에 적힌 제목을 읽은 플로무스가 감탄했다.
“와, 저는 읽어 보려다가 너무 어려워서 바로 포기했는데.”
“병법론은 재밌는 학문이야.”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상대를 농락하고 나락으로 떨어트리니, 얼마나 재밌는가.
“어머.”
복도를 지나가던 중, 플로무스가 복도에 설치된 게시판 앞에 멈춰 섰다.
“이것 좀 보세요.”
게시판에 기재된 여러 공고 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정치학 수업을 담당하는 에르키나 교수가 이번에 황제의 정치 자문으로 선발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와아,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게 말이야.”
“아니요, 레오니에 님이요.”
“내가?”
“그야…….”
플로무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지금은 이곳에 저와 레오니에 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플로무스가 소리를 낮췄다.
“레오니에 님이 찾아낸 분이시잖아요.”
레오니에가 한쪽 입꼬리를 기분 좋게 비틀었다.
“난 발판을 마련해 준 게 다야.”
그러니 그녀가 정치 자문으로 선발된 건 순전히 그녀의 실력과 노력 덕이었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오늘따라 우리 플로가 칭찬이 후하네.”
“레오니에 님은 본인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잘 아셔야 해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데?”
“그것보다 더 아셔야 해요.”
플로무스가 열성을 다해 주장하니, 레오니에는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다시 걸음을 옮긴 둘은 기숙사에 들러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특히 레오니에가 유독 열심이었다.
“언니, 나 밤새 과제했는데…….”
새벽에나 겨우 잠들었던 우피클라가 징징거렸다.
“넌 안 갈 거야?”
“가긴 갈 건데,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두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언니 진짜 졸업 언제 해요?”
제발 좀 빨리 나가라고, 우피클라가 플로무스의 허벅지에 머리를 누이며 기도했다.
“한숨 좀 주무시겠어요?”
플로무스가 근처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우피클라에게 덮어 줬다.
“짜증 나서 잠 안 와요.”
“그럼 나 어떤지 좀 봐 줘 봐.”
레오니에가 저의 긴 머리를 손으로 이리저리 잡으며 물었다.
“뭐가 더 어울려?”
“어차피 머리 감출 거 아니에요?”
기어코 상체를 일으킨 우피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오니에의 검은 머리는 워낙 눈에 띄기 때문에, 외출할 때는 종종 망토 두건에 숨기며 다닐 때가 있었다. 특히나 오늘은 더욱 그럴 거라 생각했다.
“마음가짐이란 중요한 법이니까.”
“이 언니 진짜 인생 귀찮게 사네…….”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우피클라는 첫 번째 머리가 더 낫다고 말했다. 그렇게 감춰질 머리를 솜씨 좋게 묶고, 아카데미 교복 위로 지정된 망토를 걸쳤다.
“어때? 괜찮아?”
“딱 봐도 보레오티 공작 영애예요.”
“내가 공작에 오르면, 리네 가문을 가장 먼저 멸문시킬 거야.”
“와, 나 곧 백수 될 테니까 공부 때려 칠까나.”
한마디씩 티격태격 주고받는 와중에도.
“오늘 참 날이 좋네요.”
외출하기 좋은 날씨라며, 플로무스 혼자 평화로웠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우피클라가 레오니에에게만 들리게 속닥거렸다.
“저 언니는 요즘 왜 저런데요?”
원래도 사람이 착하긴 했지만, 요새 유독 머리에 꽃이 핀 것처럼 행동했다.
“사랑을 하면 다 저렇단다.”
애송아.
레오니에가 충격적인 소식에 쩍 벌어진 우피클라의 입을 손수 닫아 줬다.
“어, 언제부터요?”
우피클라는 믿을 수 없단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나도 상대는 몰라.”
“어? 왜요?”
“친구라고 다 아는 건 아니란다.”
오히려 레오니에는 가문의 입장이 있어서 그런 사적인 문제엔 함부로 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거기다 플로무스 본인이 이에 관해 말을 무척이나 아꼈다.
“상대 분께서 저를 배려해서 비밀로 하자고 했거든요.”
플로무스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정말로 좋아하는지,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모습이 한없이 귀여웠다.
“그나저나 상대가 몇 살이라고 했더라?”
“작년에 성인이 되셨어요.”
“세상에, 나 빼고 다 연애하잖아…….”
혼자 남겨진 기분이라며, 우피클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린 게 무슨 연애야.”
“언니도 연애하잖아요.”
“야, 실수하다가 애 생기는 것보다야 안 하는 게 나아.”
연애 4년 차로 접어든 레오니에가 잔소리했다.
“너 지금 그 나이에 애 생겨 봐라, 애가 애를 낳는 거야. 네 부모님은 얼마나 속이 상하시겠어. 싸지르는 새끼들 만날 바에…….”
잔소리는 한참 이어졌고, 우피클라는 넋 나간 미소를 지으며 한 귀로 듣고 반대쪽 귀로 흘려보냈다.
‘귀에서 피 날 것 같아.’
이젠 하도 들어서 잔소리 대사를 전부 기억할 정도였다. 과장 전혀 없이, 얼추 백 번 이상은 들은 기분이었다.
‘혼전 임신에 크게 당해 봤나…….’
우피클라는 레오니에가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