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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첫 싸움(2) (45/51)

외전 4. 첫 싸움(2)

수도에 위치한 헤스페리 저택은 최근 정원으로 무척 유명해졌다.

헤스페리 후작의 취미가 손수 정원을 가꾸는 일인데, 그녀의 솜씨는 현역 정원사들마저 감탄하게 할 정도였다. 특히 손수 개량한 하얀 장미가 가장 유명한데, 장미꽃들이 화사하게 필 때면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나, 올해는 꽃이 조금 시들했다. 특히 별관 쪽 정원은 꽃잎들이 아예 힘을 잃고 툭툭 떨어졌다. 한철이던 장미꽃들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느껴지는 황량함이 더욱 컸다.

“…보세요, 오라버니.”

누군가가 창문으로 헐벗은 장미 나무를 보며 서글피 웃었다.

“저의 미래 같아요.”

갈색 머리에 푸른 눈.

“전 이제 죽겠죠?”

살짝 말랐음에도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소녀의 얼굴엔 죽음을 각오한 처연한 감정이 머물렀다.

“그래도 괜찮아요.”

마니크는 유서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제 시체는 어머니께 보여 주지 말아 줘요. 맹수의 송곳니에 난장판으로 찢긴 제 시체를 보면 슬퍼할 거예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마니크는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텅 빈 눈동자를 품고 있었다.

“저금한 돈은 얼마 없지만, 그것도 어머니께 다 주세요.”

“…….”

“마지막으로, 서부와 하얀 호랑이에게 영광 있으…….”

“마니크.”

옆에서 친척 동생의 유서 작성을 지켜보던 스칸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른세수를 연거푸 반복하던 손이 또 한 번 움직였다.

“미안하다.”

그러나 마니크는 사과를 받을 수 없었다.

“이게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결국 폭발한 마니크가 소리쳤다.

마니크는 너무 억울했다. 그냥 억울한 게 아니라, 어렸을 적부터 스칸디아와 서부를 위해 살아온 저의 삶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오라버니 정체 안 들키게 하려고 내가 가발까지 써 가며 황녀 흉내를 냈는데, 이게 뭐냐고요!”

마니크는 신을 원망했다. 자신이 제 또래와 비교하면 범상치 않은 시절을 보낸 걸 안다. 하지만 딱히 불행하다고도 여기진 않았다.

그래도 신이 있다면 저를 이렇게 내쳐서는 안 되었다. 목숨을 걸고 헤스페리를 지켰던 어린 저를 보듬었으면 보듬었지, 이딴 식으로 불행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마니크는 항상 치마 속에 암기를 숨기고 다녔다. 스칸디아를 대신해 황녀로 위장하고 지낼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지금도 밀명을 받아 이리저리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무기를 소지해야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암기를 차고 다니는 벨트를 세게 조였는지 꽤나 아팠고, 그걸 눈치챈 스칸디아가 괜찮으냐고 물어봤다. 시선은 당연히 아파하는 친척 동생을 향했고, 치마를 향하던 손짓은 아픈 부위를 짐작하려던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그 찰나를 목격했다.

스칸디아를 데리러 왔던 레오니에의 눈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마저 비추는 은하수 같았다. 그런데 은하수가 빠르게 메마르더니, 자비 없는 가뭄처럼 숨통을 바싹 쪼이는 작열이 되었다. 혹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설.

마니크는 사람의 눈에 그토록 강렬한 감정이 담긴다는 것도, 그리고 그 감정이 빠르게 변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어쨌건 이 모든 것의 결론은 하나였다.

“걸리면 난 죽을 거야…….”

마니크는 뼈에 사무치는 두려움이란 게 무엇인지, 그 찰나 같던 순간에 뼛속 깊이 깨우쳤다. 냉혹히 돌아서던 찰나의 검은 눈은, 네놈들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시궁창에 적셔 앞뒤로 구워 버리겠다는 살기로 가득했다.

“마니크.”

스칸디아가 퍽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은 죄가 없어.”

“이 미친 인간아!”

그 와중에 편을 드냐! 마니크가 옆에 있던 쿠션을 스칸디아에게 집어 던졌다.

“오라버니는 못 봐서 그래! 보레오티 영애는 진짜 무서운 사람이고, 난 그걸 아카데미에서 목격했다고!”

“강하시고 아름다운 분이지.”

“아, 좀!”

답하기도 지친 마니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뭐, 강하고 아름다운 분이긴 하죠.”

누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단순히 보레오티란 이유 때문이 아니라,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미모와 자비라곤 전혀 없는 성질머리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레오니에의 아름다움에 반했다가, 성질머리에 겁을 먹고 몸을 사렸다.

“페르딕스 가문, 알죠?”

페르딕스 백작 가문은 암시장에서 불법 경매를 주최한 사실이 드러나 크게 휘청거렸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된 건, 그들이 북부에 서식하는 마물까지 손에 넣으려고 계획을 세웠다는 정황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이 일은 아주 큰 화젯거리였다. 페르딕스 영식이 아카데미에 재학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이 모든 것을 보레오티 영애가 주도해 드러냈단 소문 때문이었다.

“그 가문 영식이 케라타 영애를 건드렸거든요.”

“어우.”

스칸디아는 한순간 페르딕스 영식을 동정했다.

“케라타 영애한테 추파를 계속 던지고, 심지어 외출할 때도 뒤를 따라가다가 걸렸대요.”

마음씨 곱고 현명한 플로무스는 스스로 해결하는 대신에 레오니에에게 일러바쳤다.

그리고.

날이 화창하던 어느 날.

레오니에는 실수로 페르딕스 영식의 정강이를 부러트렸다. 그러고는 또 실수로 영식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찍어 버렸다.

“레오가 다부져 보여도 의외로 연약한 면이 있어.”

더욱이 일조가 적은 북부에서 자랐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며 스칸디아가 레오니에를 두둔했다.

“이래서 그분 옆에 내가 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분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버러지들을 치울 수 있었을 거란 안타까움은 덤이었다.

“인간아…….”

마니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삼켰다.

‘사랑에 빠지면 다 저러나?’

저 정도면 사랑이 아니라 약에 빠진 것 같은데?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스칸디아의 지능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어쨌건.”

마니크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페르딕스에선 이 일로 아카데미에 항의를 넣었어요.”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신문 1면에 페르딕스의 치부가 드러났다. 바로 현재 세간을 들썩이게 한 불법 경매 사건이었다.

“오라버니,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뭔지 알겠어요?”

마르니가 마지막 인내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교훈은 딱 하나였다. 레오니에에게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것. 이번 일로 레오니에는 역대 보레오티 중 가장 흉포하단 명예를 얻었다.

묵묵히 듣던 스칸디아가 입을 열었다.

“누구든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면 죽는 거지.”

“이런 놈을 지키려고 내 어린 시절을 낭비했다니.”

마니크는 헤스페리 후작께 저 인간 면상에 주먹 한 번만 꽂게 해 달라고 청을 올리고 싶어졌다.

“오라버니 그냥 얼른 북부로 꺼졌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하네.”

“아, 그냥 보레오티 영애가 빨리 날 죽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답답한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대화 잠깐 했다고 탈진한 마니크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나 죽거든 뼈라도 추슬러 줘요.”

마니크는 이제 반쯤 포기했다. 역시 유서를 써 두길 잘한 것 같았다.

“미안하다.”

스칸디아가 뒤늦게 위로를 건넸다.

“됐어요. 죽기야 하겠어요.”

“안 죽을 거야.”

“그건 오라버니가 그분께 사정을 빨리 설명해야 가능하죠.”

그게 언제일지가 문제지.

친척 동생의 암울한 전망에 스칸디아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북부로 달려가 사정을 설명하고,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른세수를 연거푸 해 대던 손가락 사이로 차게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찾았어?”

“당연히 찾았죠.”

마니크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뻐근한 어깨를 들썩였다. 그날, 자신이 괜히 치마 속에 암기를 차고 다닌 게 아니었다.

“여러 곳에 발을 걸쳤더라고요.”

페르딕스 가문은 암시장을 손에 넣고자 물밑에서 여러 작업을 벌였는데, 의외로 많은 가문이 연관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를 확인했다. 페르딕스 가문의 돈을 받고 움직이던 일당 중 일부가 서부로 숨어들었다.

“최근 기승을 부리던 서부 도적의 습격 사건들의 원인인 것 같아요.”

“…후우.”

스칸디아가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덤덤한 표정 아래엔 감정이 마구 뒤얽혀 있었다. 분노와 불안. 짜증과 조급. 저런 머저리들 때문에 레오니에에게 큰 오해와 미움을 사 버리다니, 눈앞에 그들이 있다면 당장 팔다리를 뽑아 인간 꽃꽂이를 해 버리고 싶었다.

‘오해를 빨리 풀어야 할 텐데.’

자리에서 일어난 스칸디아가 옆에 풀어 뒀던 망토를 다시 걸쳤다. 마니크는 레오니에가 화가 났다고 말하지만, 스칸디아가 본 건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실망하셨어.’

배신감으로 얼룩진 검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스칸디아는 그 모습만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마음이 여리신 분인데.’

혹여 혼자 울고 계시는 건 아닐지. 너무 슬픈 마음 때문에 식음이라도 전폐하면 어쩌지.

만에 하나라도 저의 진심을 의심하시는 건 아닐지.

“…진심이에요?”

스칸디아의 혼잣말을 본의 아니게 들어 버린 마니크는 해괴망측한 표정을 지었다.

“제 생각엔, 보레오티 영애라면 저랑 오라버니 죽이려고 서부를 정복할 분이에요.”

“그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아 뭐야, 진짜.”

저거 진짜 미친놈이었잖아.

기함한 마니크가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 * *

‘서부를 정복할까.’

그리고 레오니에는 마니크의 걱정대로, 지금 당장 서부를 치는 상상을 제법 상세하게 펼치고 있었다. 예상 기간과 비용, 식량 보급 경로와 바다를 이용한 전술까지.

‘도적 떼를 이용해도 괜찮을 거야.’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내준 후계 수업의 일환으로 각 지역의 동향을 독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최근 서부는 도적 떼로 고생 중이었다. 서부의 자랑인 광활한 숲은 안타깝게도 도적이나 범죄자들이 은닉하기에도 좋았다.

‘내가 너무 풀어 줬나.’

슥슥, 연필로 명암을 주던 손이 멈칫했다.

‘새장에 가둬 둘 수도 없고.’

금빛 새장 속, 외로이 설치한 그네에 홀로 앉은 스칸디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절로 간질거렸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상식을 지키려는 훌륭한 미성년자였다. 몹쓸 상상을 실천하기엔 너무도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다.

‘정복하는 순간, 피폐물이 되는 건데.’

그건 또 그것대로 맛날 것 같지만, 아빠랑 엄마가 허락해 줄지를 모를 일이었다.

온갖 생각과 추측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새하얀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손은 부드럽고 섬세했다.

똑똑. 불쑥 들려오는 소리에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잔뜩 인상 쓰던 표정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풀려 갔다. 이토록 앙증맞고 조그마한 송곳니라니.

“누구야?”

레오니에가 문 뒤에 숨어 있을 아가 맹수를 떠올리며 물었다.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킥킥 소리 죽인 웃음소리만 들렸다. 요것 봐라, 레오니에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도대체 누가 차기 공작에게 장난을 치는 거야.”

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지만, 레오니에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제 밑에서 숨죽이며 깨작깨작 움직이는 작은 덩어리는 못 본 척했다.

“이상하네…….”

귀신이라도 있나, 레오니에가 퍽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섰더니.

“크앙!”

어느새 뒤에 있었던 아가 맹수가 폴짝 뛰어 다리에 들러붙었다.

“크앙, 크아앙!”

벨레아니는 무시무시한 울음을 토했다. 바짝 세운 손가락으로 레오니에의 바짓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호들갑스러운 비명에 벨레아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히죽히죽 올라간 입꼬리 덕에 희고 작은 치아가 훤히 보였다.

“레아가 잡았어! 사냥했어!”

“도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언니 깜짝 놀랐잖아.”

사냥에 성공한 벨레아니가 으쓱거렸다. 정수리 위로 흔들거리는 머리가 유난히 찰랑거렸다.

“그런데 유모는?”

“…….”

으쓱거리던 아가 맹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으이구, 요 사고뭉치.”

레오니에가 벨레아니를 번쩍 들어 안았다. 깜짝 놀란 벨레아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으어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이내 꺄르르 웃었다.

“코니.”

종을 흔들어 코니를 부른 레오니에가 사정을 설명했다.

“다들 레아 찾고 있었지?”

“주인님께서 별문제 없을 거라고 말씀하셔서, 아가씨랑 같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내가 따끔하게 혼낼 테니 유모한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쉬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코니가 떠나고, 레오니에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소파에 벨레아니를 내려놨다.

“어디 놀러 갈 때는 유모한테 말하고 가야지.”

“싫어! 재미없어!”

벨레아니가 씩씩하게 외쳤다.

“엄마 속 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레오니에가 영혼 없는 웃음을 허허 흘렸다. 보레오티의 핏줄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어디, 언니가 뽀뽀 한 번 해 볼까요?”

레오니에가 벨레아니를 와락 끌어안고는 볼에다 냅다 입술을 쪽쪽 찍었다.

“꺄아아!”

“레아는 볼도 말랑하고, 확 잡아먹어 버릴까!”

“하하! 아하하!”

한참을 자지러지게 웃던 벨레아니가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 마!”

고양이 하악질 비슷한 소리를 내며 신경질을 낸 벨레아니가 새초롬한 눈꼬리에 힘을 줬다.

“언니야 떼찌!”

“녀석, 성질머리 하곤.”

아빠를 빼닮았군, 레오니에가 퍽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야, 레아한테 미안해, 해!”

아가 맹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짐짓 엄하게 명했다.

“죄송합니다.”

레오니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또 그러면, 맴매야아.”

“네, 알겠습니다.”

“어른은, 그러면 안 돼!”

조그마한 게 발음만 똑 부러져 무척 귀여웠지만, 레오니에는 무서운 척하며 물었다.

“언니는 아직 어른이 아닌데?”

“그치만, 언니야, 아가 아냐.”

레아는 아가지만, 언니야는 아가가 아니야. 마지막까지 야무지게 혼낸 벨레아니가 콧방귀를 뿜었다.

‘저런 점은 엄마를 닮았네.’

레오니에가 피식거렸다.

“언니야.”

그때, 벨레아니가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던 그림들을 가리켰다.

“예쁜 아찌?”

벨레아니가 토실한 손가락으로 그림 속 남자를 가리켰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를 스멀스멀 떠올린 레오니에가 그림을 설명해 줬다.

“예쁜 아찌가 새장에 갇혀 있는 그림이란다.”

그림 속 스칸디아는 커다란 새장 속 그네에 앉아 있는데, 목과 손목에는 시커먼 가죽끈과 가죽 수갑이 채워진 채였다.

“오오.”

벨레아니는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림을 빤히 노려보는 시선이 퍽 진지하고 심오했다.ㄴ

“벨레아니 보레오티.”

그때, 레오니에가 목소리를 낮췄다. 슬그머니 연필을 쥐고 낙서하려던 벨레아니가 움찔거렸다.

“지금부터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다.”

“임무!”

아가 맹수가 차렷했다. 펠리오가 종종 기사들에게 명을 내릴 때, 그 명을 하사받던 기사들 흉내였다.

“그대는 아주 똑똑하고 귀여운 아가지?”

“응!”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그 아가라며, 벨레아니가 고개를 무려 세 번이나 끄덕였다.

“그럼 이것들 중에서.”

뾰족한 연필을 슬그머니 치우면서, 레오니에가 아까 그렸던 그림 중 세 장을 나란히 놓았다.

“어느 것이 예쁜 아찌에게 어울릴지 골라 주길 바란다.”

“뭐야요?”

벨레아니가 어색한 존대로 물었다.

“예쁜 아찌에게 줄 선물.”

“선물!”

“다른 말로 구속구라고 한다.”

“꾸우!”

레오니에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왜 아빠가 엄마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쁘다! 레아도 갖고 싶어!”

“너도 차게?”

“으으응, 인형 줄래!”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역시 자신들은 광공의 딸이었다. 북부 광공의 차녀가 구속구를 고르는 동안, 북부 광공의 장녀는 소파에 기대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빠르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귀여웠으나, 정작 벨레아니 손에 들린 건 목, 손, 발에 채우는 구속구는 귀엽지 않았다.

‘이건 내 태교 영향이 아니야.’

이따금 펠리오는 지금처럼 벨레아니가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면 제 아내와 큰딸을 원망했다.

‘누가 태교로 그런 소설을 읽고, 그런 그림을 보는지.’

그런 소설은 동성애 소설이고. 그런 그림은 근육이 근육하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극한 태교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바리아와 레오니에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우웅…….”

어느 구속구가 스칸디아에게 어울릴지, 입술까지 쭉 내밀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벨레아니는 펠리오의 딸이었다.

‘난 알아봤지.’

벨레아니는 태아 시절 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가였다.

‘물론 내가 가장 무섭지만.’

레오니에가 자조 어린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말 그대로였다. 레오니에는 이따금 스스로가 두려웠다. 내면에 잠재된 집념과 광기에 홀로 몸서리를 칠 때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사랑에 맹목적인 인간이었나. 차기 북부 광공으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니.

만일 펠리오가 들었다면 쟤는 또 어디서 저런 요상한 걸 배워 와 저러느냐고 혀를 찼을 소리였다. 딸의 취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리아도 ‘아, 그건 좀…….’이라고 머뭇거렸을 거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걱정이고 두려웠다.

‘성급하긴 했어.’

스칸디아가 저 말고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던 장면을 본 것만으로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당장 달려가 여자를 집어 던지고 스칸디아의 힘줄을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장할 지경이었다.

‘아마 걔겠지.’

장골이 타고났던 스칸디아를 대신해 황녀 흉내를 냈다던 친척 아이. 아카데미에서도 몇 번 본 적 있었고, 심지어 눈인사도 여러 번 주고받았었다. 욱한 나머지 북부 저택에 돌아온 뒤에야 누구인지 떠올라 버린 게 문제였지만.

그런데도 껄끄러운 건,

‘스칸 대신해서 황녀 흉내를…….’

답지 않게 속 좁은 짓을 한 자신이 부끄러운 건 별개로 치고. 자신이 모르는 스칸디아의 과거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친척 아이는 밉보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

레오니에가 자괴감에 빠지는 동안.

“언니야!”

벨레아니가 자신이 고른 구속구를 보여 줬다.

“이거!”

아가 맹수가 신중하게 고른 건 어떤 장식도 없는 시커먼 구속구였다. 구속구 끝에는 기다란 쇠사슬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예쁜 아찌, 이거 줘!”

“레아 너 안목이 뛰어나구나.”

뭔 뜻인지는 몰라도 저를 칭찬한다는 건 알아들은 벨레아니가 빵긋 웃었다.

“기본은 늘 정도지.”

여타 화려하기만 한 구속구보다, 이렇게 아무런 장식 없이 기능에 충실한 기본이 명관일 때가 많았다.

“언니야, 색칠해도 돼?”

“이건 빼고.”

레오니에는 흔쾌히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을 동생에게 넘겼다. 벨레아니는 양손에 크레용을 쥐고 그림에다 예쁜 색깔을 입히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검은색과 분홍색이 새장에 갇힌 스칸디아를 점점 채워 갔다.

‘색 표현을 잘하네.’

그걸 힐끔 본 레오니에가 퍼석한 웃음을 흘렸다.

“우리 레아는 누구 닮아서 이리 그림을 잘 그리나.”

“언니야!”

벌어진 셔츠 속 드러난 가슴에만 유난히 집중해서 색칠하는 동생을 보며, 레오니에는 역시 가족만한 친구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야.”

소파에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있던 레오니에가 눈을 슬쩍 떴다. 색칠에 몰두하는 벨레아니의 뒤통수 너머 튀어나온 볼살이 씰룩거렸다.

“예쁜 아찌 언제 와아?”

“언니가 있는데 그 아찌는 왜 계속 찾아?”

“예쁘잖아!”

“넌 정말 내 동생이구나.”

레오니에가 상체를 일으켜, 동생의 머리에 입술을 쪽 맞췄다.

“나도 보고 싶다…….”

* * *

그러나 스칸디아는 북부로 오지 않았다.

“…….”

그 탓에 레오니에의 심기는 북부 산맥을 반 토막 내다 못해 잘게 다져 버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네가 안 와?’

그렇게 헤어진 지 벌써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레오니에는 아량을 베풀려고 노력했다. 저 역시 성급했던 점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스칸디아는 오지 않았고, 하물며 연락 한 통 없었다.

“오늘은 아가씨 옆에 함부로 가지 마라.”

아침 훈련을 시작하기 전, 모노가 기사단들에게 주의를 줄 정도였다. 그 경고가 없더라도 현명한 글라디고 기사단들은 사랑싸움으로 상처 입은 아가씨 곁에 갈 생각을 일찌감치 접은 채였다. 레오니에는 그만큼 살벌한 상태였다. 기사들도 몸을 사릴 정도니, 평범한 사용인들마저 흠칫거리며 슬그머니 피해 다녔다.

성질머리를 못 이겨 주먹질로 부서트린 소파만 세 개였고. 내 눈에 잘못 걸리면 족치겠다는 서슬 퍼런 표정 때문에 갓 채용된 사용인 몇몇이 울어 대기 일쑤였다. 하물며 오랫동안 레오니에를 돌본 코니와 미아마저 눈치를 살피며 조심할 지경이니.

“성질 더러운 것 봐라.”

사용인들의 불편을 접수한 펠리오가 나섰다.

그는 레오니에를 집무실로 불렀다.

“이래서 내가 너한테 어떻게 이 자리를 물려주겠냐.”

호출당한 레오니에의 입술이 오리 부리처럼 툭 튀어나온 채였다. 아주 불충한 태도였다.

“성질 좀 죽여라. 어지간한 일에 쉬이 화내지 말고.”

“죽이고 살잖아.”

“죽이고 산다는 게 가문 하나를 없애려고 해?”

말이 나온 김에,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아카데미에서 친 조그마한 사고에 대해 물어봤다.

“왜 그런 거야.”

“그 새끼는 자기 매를 벌었어.”

레오니에가 인상을 썼다.

“플로한테 계속 집적댔단 말야.”

“딸아.”

펠리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수도는 새로운 자살 방법이 늘 창안되는 곳이다.”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면 너만 피곤할 뿐이라며 나름 점잖게 타일렀다.

“…나도 알아.”

차분한 타이름이 먹혔는데, 돌아오는 대답도 꽤나 얌전했다.

“그래서 처음엔 그 새끼 면상이랑 다리만 건드리려고 했어.”

“네가 거기까지만 했다면 이리 잔소리하진 않았을 거다.”

“그치만 설마 그렇게까지 구린 짓을 했을 줄 알았겠어?”

자신은 그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었다며, 레오니에가 아주 조금 고소하단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도야 어찌 되었건, 펠리오를 앞질러 행동한 것이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이 아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청소도 준비 중이었다고.

“알면 좀 일찍이 청소하지 그랬어.”

“그러려고 했더니 눈앞에 있는 우리 원수가 망쳤더구나.”

일찌감치 정보를 입수해 페르딕스 가문을 청소할 준비를 하던 찰나에, 수도에 있던 딸내미가 먼저 선수를 치고 말았다.

“흥, 자기가 늦은 걸 애먼 내 탓으로 돌린대.”

“반성은 못 할지언정.”

펠리오가 혀를 찼다.

“레오 네 덕에 잔당들을 놓쳤어.”

“그건 내가 알아서 잡을 거야.”

그리고 감정도 좀 추스를게.

성의 없는 약속과 함께 뒤돌아 나가려던 찰나.

“잡는 김에 네 뿜뿜이도 잡으려고?”

레오니에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말 나온 김에 말인데.”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입술 언저리를 톡톡 두드렸다. 별거 아닌 것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맹수의 검은 눈동자에 진득하고 오싹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내 방에 감옥 하나 만들어 주면 안 되나?”

펠리오는 답하지 않았다.

“그럼 새장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면 안 돼?”

“내가 왜 아까 답하지 않았는지 알 텐데.”

“그러면 힘줄은 잘라도 돼?”

“그 녀석을 걱정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못 걸으면 어때.”

딱 그 정도로만 손을 보고, 한평생 자신이 수발을 들어 주면 되는 일이었다.

“…….”

딸아이의 음험한 혼잣말을 들어 버린 펠리오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 동심보다 양심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는데.’

어린아이가 애늙은이처럼 구는 게 안타까워서 장난감도 사 주고, 아이 동반 다과회에 참석했던 과거가 후회로 바뀌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제 와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고, 저런 애라도 결국 제 자식이었다. 자신이 감싸 주지 않으면 누가 할까.

“…뭐.”

어쩔 수 없었다.

아빠인 것을.

“죽이지만 마라.”

정말 만약에. 설령 레오니에가 기어코 스칸디아를 납치해 힘줄을 자른다면, 서부에 광산 세 개까지 넘겨 보상할 의향이 있었다. 물론 죽여도 뒤치다꺼리 정도는 해 줄 수 있었지만, 그걸 끝으로 후계 자리는 박탈할 생각이었다.

“안 죽여.”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난 상식인이라고.”

“근래 들은 농담 중 가장 재밌구나.”

“아빠는 아빠 딸이 상식인이 아니라 재밌어?”

“나름.”

“짜증 나, 진짜…….”

* * *

서부 헤스페리 후작저 회의실은 늦은 밤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티그리아 헤스페리 후작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이들은 최근 골칫거리로 부상 중인 도적 떼 소탕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레보오 기사단 부단장이 속속들이 올라오는 상황을 정리해 보고했고, 이를 듣는 헤스페리 후작의 미간이 천천히 파여 갔다.

“…역시.”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근래 늘어난 도적 습격은 페르딕스 가문과 연관된 일이었군.”

“숲 지리에 익숙한 도적 일부와 암시장 부랑배들이 합친 듯합니다.”

“꼴에 별짓을 다 해.”

비아냥거리는 조소가 섬뜩했다. 후작 작위를 받으면서 함께 짧게 자른 단발이 신경질적인 웃음과 함께 흔들거렸다.

도적에게 당한 피해자들은 주로 중소 상단이었는데, 크게 두 분류로 나뉘었다. 귀중품처럼 값비싼 상품을 운송하는 상단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전자는 상품만 크게 털렸고, 후자는 사람이 많이 다쳤다. 그리고 최근엔 후자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페르딕스 가문이 키우려고 했던 암시장이 그대로 무너지면서, 그곳에 빌붙어 일하던 소위 ‘부랑배’들이 합류한 탓이었다.

문제는 이 부랑배들의 정체였다. 애당초 도적 자체가 그런 인간들이 모여 형성된 단체였는데, 거기에 또 부랑배가 섞였다고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지다니.

“어지간한 내기들이 아니야.”

헤스페리 후작이 피해 보고서를 가볍게 훑으며 말했다.

기사는 기사만의, 마법사는 마법사만의 흔적이 남는다. 하물며 깡패나 용병들에게도 특유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최근 습격당한 부상자들의 상처들은 앞서 피해를 본 자들의 부상과 완전히 달랐다. 아주 깔끔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암살자였군.”

하나 오랫동안 숲과 함께한 레보오 기사단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누가 키운 걸까요?”

이벡스가 지도에 꽂힌 핀들을 빤히 내려다보며 입을 말했다.

암살자는 숙련된 기술이다. 단순히 길바닥을 전전하면서 습득하는 조잡한 싸움 실력과 차별되었다. 오히려 비슷하기로는 어린 시절부터 시동으로 들어와 배우는 기사의 그것과 유사했다.

즉, 페르딕스가 주도했던 암시장 형성은 세상에 드러난 것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분명 배후가 있을 겁니다.”

이벡스가 중얼거렸다. 암살자 훈련은 기사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니, 기본적으로 자본이 크게 필요했다.

“페르딕스 본인일까요?”

“글쎄…….”

헤스페리 후작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가문에서 그런 실력자들을 키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지원할 재력은 없을 텐데.”

“시선을 피해 병력을 키울 장소도 없었을 거고요.”

이벡스가 동의했다.

“내 책임이군.”

헤스페리 후작이 입맛을 쓰게 다졌다.

“황궁에서 물러나기 전에 한 번 더 옥죄어야 했는데.”

자책 어린 혼잣말에 이벡스와 기사들이 서둘러 반박했다.

“그게 어찌 후작의 책임입니까.”

“그렇습니다! 주군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국이 지금껏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후작이 황후로서 자신의 책무 그 이상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 점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마음이 편해진 헤스페리 후작이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스칸.”

“예.”

부름에 응한 건 후작 부부가 몇 년 전에 입양한 양아들이었다.

헤스페리의 먼 방계 출신이라는 그는 마차 사고로 실종된 스칸디아 황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19살인데도, 근육이 촘촘하게 찬 체격은 레보오 기사단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심지어 키도 이 중에서 꽤나 큰 편이었다.

그리고 먼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후작을 빼닮은 훤칠한 미모를 자랑했다. 심지어 후작 부군의 생김새도 꽤 겹쳐 보였다.

그런데 이 양아들이 알고 보니 보레오티 영애와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한다. 또한 황제의 최측근으로도 활동 중이라고.

“넌 어찌 생각하니.”

“…….”

“스칸?”

“…….”

그런데 오늘따라 이 효자가 영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기운도 영 없어 보였고, 어째 넋을 놓은 듯했다. 꼭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너 괜찮으니?”

이벡스가 염려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제 보니 아들의 청명한 눈동자도 꽤 심상치 않았다.

“죄송합니다.”

스칸디아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사과했다.

“그저 사안이 심각해 보여 걱정되어 그럽니다.”

“그렇겠지.”

아들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헤스페리 후작이 도로 지도로 눈을 돌렸다.

“그럼 네 생각은?”

헤스페리 후작이 다시 물었고, 스칸디아는 이번엔 제대로 대답했다.

“마니크와 함께 페르딕스 백작의 뒤를 쫓았고, 그의 저택에서 금고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페르딕스 백작이 암살자 단체와 맺은 계약서와 암매장에 내놓을 상품들을 불법적으로 들일 계획서 등이 숨겨져 있었다.

“황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했을 때는 나오지 않은 것이구나.”

후작이 혀를 짧게 찼다. 새롭게 즉위한 황제는 각 지역 수장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히 무력으로 강한 북부와 서부가 그의 즉위에 힘을 보태었으니, 어느 때보다 강한 황권을 자랑했다. 그러니 황실에서 이런 조잡한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후작의 생각을 읽은 스칸디아가 기사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헤스페리 후작이 쓰게 웃었다.

“페르딕스가 머리를 좀 썼구나.”

어떻게 되었는지 대충 감이 왔다.

“그 계약서를 직전까지 지니고 있었던 놈은?”

“코칙스 백작 가문입니다.”

“본 계약서를 그쪽에서 보관했던 모양입니다.”

이벡스의 말에 후작이 동의했다.

“평가를 좀 올려야겠어요.”

웬 듣도 보도 못한 귀족 놈이 암흑가의 주인이 되겠다고 제 주제를 분실했나 싶었더니, 의외로 얕은꾀를 부리는 재주도 가졌다. 그리고 그 얕은꾀에 가려진 진실도.

“진짜는 누구지?”

페르딕스는 함정.

진짜 계획서와 계약서를 가지고 있었던 코칙스도 함정.

“진짜 실세는 따로 있었군.”

“시그노 상단입니다.”

티그리아 황후의 시녀였고, 현재는 헤스페리 후작의 비서이자 마니크의 모친인 르미아가 말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실 하나도 전했다.

“4년 전 남부에서 이주한 상단입니다.”

“남부?”

헤스페리 후작을 비롯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인상을 와락 썼다.

“…아니, 잠깐.”

찰나의 놀라움에서 황급히 빠져나온 후작이 허리춤에 올렸던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약간의 성급함이 묻어난 동작이었다.

“올로르 가문도.”

그녀가 황궁에 있었을 때 올라온 보고 하나가 떠올랐다.

“사병을 키웠었지.”

올로르.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몰락 가문의 이름임에도, 그 누구 하나 그 이름에 그리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도 암살자였습니까?”

이벡스가 물었다.

“같은 부류였지요.”

“혹여 올로르가 망하고 거처를 잃은 잔병일까요?”

“보레오티가 들었다면 무척 화낼 말이군.”

후작이 바로 부정했다. 보레오티가 오랫동안 준비한 ‘사냥’엔 빈틈이 존재할 수 없었다.

“다 없앴어.”

보레오티의 사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잔혹했다. 타고난 사냥꾼들은 올로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국에서 지워 버렸다.

올로르의 뒷돈을 챙겨 받던 수하의 가문, 그들이 즐겨 찾았다는 찻집과 그 찻집에서 거래했다던 곳까지. 그리고 올로르의 자금 세탁을 담당했던, 바다 건너의 유령 회사를 운영한 이국의 상인도.

“…….”

“…….”

방 안은 단숨에 정적으로 휩싸였다. 레보오 기사단들은 말을 아꼈지만, 다들 참 징하고 독하다는 감상을 마음속으로 동시에 떠올렸다.

“하지만.”

헤스페리 후작이 팔짱을 끼며 지도를 바라봤다.

“그래…….”

후작은 황후였을 적에 올로르에 대한 정보를 상당히 검열했다. 그가 저질렀던 범죄 계획 등, 알려지면 모방될 수 있을 것들로만 최대한.

하지만 남부에서 왔다는 그 상단주라면.

“올로르가 했던 짓을 배웠을 순 있지.”

한때 남부의 진짜 주인마저 앞지를 뻔했던 가문이었다.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같은 동향이 잘 알 터.

지도를 빤히 보던 헤스페리 후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후작님.”

전 기사이자 현 리네 백작인 카니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는 지금 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듯했다.

“펠리오 성질머리가 영…….”

물론 펠리오도 펠리오지만, 최근엔 펠리오보다 더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그의 딸이 방학을 맞아 북부로 돌아왔다.

“대가도 없이 이용하면 당연히 화를 입을 수밖에.”

후작이 말했다.

양심도 없이 그냥 이용하려 했다가 큰 낭패를 본 아우스트와 메리디오란 선례가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대가를 내야지요.”

묵직한 한숨과 함께 헤스페리 후작이 눈을 힐끔거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스칸디아가 있었다. 도적 소탕으로 독기가 차오른 주제에, 조금 전에 보레오티가 언급되기 무섭게 낑낑거리는 꼴이 참으로 볼만했다.

“제물 한번 바쳐 봅시다.”

아들 하나로 도적 소탕과 북부와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다면 아주 싼값이라고, 헤스페리 후작은 생각했다.

* * *

시그노 상단은 본래 남부에 터를 잡은 상단이었다. 나름 실력을 갖춰 승승장구하던 상단이었으나, 4년 전에 피눈물을 삼키고 서부로 이주했다. 남부를 장악하던 올로르 때문이었다.

황실을 등에 지고 있던 올로르는 자신이 남부의 주인인 듯 행세했다. 그 탓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데, 시그노 상단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시그노 상단도 올로르 못지않게 더러운 수법으로 장사를 해 왔다. 그 탓에 문을 닫은 가게도 여럿 있었고.

상단주는 올로르가 황제에게 딸을 팔아넘겨 귀족이 된 걸 알고 나서, 제게 딸이 없던 것을 후회했었다.

어쨌건 시그노 상단은 서부로 이주했으나, 자리를 잡는 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이미 리네 상단처럼 큼직큼직한 세력이 오랫동안 자리 잡았고, 중소 상단들 역시 제각각 단골들을 꽉 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서부의 수장인 헤스페리가 상단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감독했다. 때문에 남부에서처럼 뒤에서 수작을 부리며 세를 키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던 찰나에 또 배 아픈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올로르의 패가망신이었다. 상단주는 올로르라면 치를 떨었으나, 그 소식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주 슬퍼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서부로 이주한 뒤에 망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남부에서 버텼다면 그 빈자리는 자신의 것이 되고, 그간 고생했던 것을 보상받을 정도로 챙길 수 있었을 텐데.

시그노 상단주는 욕심도 많았고, 미련도 넘쳤다.

그리고 의외로 위기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능력도 있었다.

시그노 상단주는 올로르가 남부에서 해 온 짓들을 떠올렸고, 그중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조금씩 따라 했다. 바로 사병이었다.

그리고 이를 감추기 위해 장막으로 암시장을 만들었다. 암시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몇몇 귀족들과 손을 잡아 지원을 받고, 그 돈으로 사병을 수소문해 키웠다.

상단주는 그때까지만 해도 천운이 자신을 따른다고 확신했다. 운 좋게 암살자 집단을 만나 사병으로 계약했고, 암시장에서 주최할 불법 경매도 착실하게 준비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레오티…!”

상단주가 치를 떨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쾅, 하고 큰 소리와 함께 흔들린 책상 위로 잔에 담겼던 술 몇 방울이 튀었다.

“이 망할 것들이!”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인 상단주가 부산스럽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는 요사이 눈에 띄게 예민해졌다. 페르딕스 가문이 암시장을 형성하려고 했다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본 날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이를 밝힌 게 보레오티 공작 영애란 사실을 알고 나선 거의 불면증에 시달렸다.

올로르를 파멸로 이끈 것이 보레오티였다. 그리고 상단주는 올로르가 했던 짓을 따라 하는데, 마치 올로르의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보레오티가 끼어들었다.

자신은 아직 들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공포에 질려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목 뒤를 보레오티가 죽음으로 겨누는 기분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단주 혼자 있었던 방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상단주가 뒤를 돌아봤다.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사람은 시그노 상단주의 사병을 키우는 ‘선생’이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건 서부지요.”

여우를 떠오르게 하는 가는 눈초리가 슬그머니 움직였다.

“지금 서부가 도적을 소탕하겠다고 아주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단 말이죠.”

잘못 걸렸다간 둘 다 죽게 될 판이라는 심각한 말을 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여유가 넘쳤다.

그런 묘한 의문이 도리어 상단주를 자극했다.

“하, 하지만 보레오티가…….”

“보레오티는 자신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선생의 느린 걸음이 어느새 상단주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웃는 얼굴이 서글서글하니 보기 좋은데도, 몸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분위기는 범상치 않았다.

무예와 연관이 전혀 없는 시그노 상단주도 눈치챌 만큼 섬뜩할 정도였다.

“지난 반란을 진압한 게 보레오티와 헤스페리였어.”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올로르의 반란을 진압한 건 보레오티와 헤스페리, 이 두 가문이었다. 그리고 반란은 결국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올로르의 판단 실수로 일어난 자살극이었다.

“반란 진압은 좀 과대평가된 점이 있죠.”

시그노 상단주가 경악이 서린 눈으로 선생을 바라봤다.

“그리고 보레오티도.”

선생이 상단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국에서 보레오티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태연자약한 모습이 더욱 소름 끼칠 정도였다.

“…외국에서 살다 왔나요?”

상단주가 기겁하며 물었다.

“뼛속까지 제국민이랍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그냥.”

선생은 상단주의 등을 제 친구 대하듯 가볍게 두들겼다. 그럼에도 상단주의 굳은 표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지레 겁먹지 마시라고요.”

북부 마물을 잡으려고 했던 건 결국 계획에 그쳤다. 그러니 보레오티가 황실보다 지엄하신 몸을 움직일 가능성도 적었다. 그리고 설령 움직였대도.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매정한 시선이 상단주를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창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왜냐하면.

콰앙-!

멀쩡히 잠겨 있던 문짝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조금 전 그림자가 서 있던 자리까지 날아와 크게 박혔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방심하고 있던 시그노 상단주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란 눈으로 문짝이 떨어져 나간 곳을 응시하니, 곧 그곳에서 검을 찬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서, 선생! 선생…!”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상단주가 서둘러 선생을 찾았다. 그러나 휑하니 열린 창문만 있을 뿐이었고, 상단주는 레보오 기사단에게 제압당한 채 끌려갔다.

* * *

‘그러게 내가 뭐랬어.’

상단주가 레보오 기사단에게 압송당하는 모습을 숨어 지켜보던 선생이 혀를 삐죽 내밀었다.

‘보레오티보다 헤스페리가 더 위험하다니까.’

선생은 레보오 기사단이 시그노 상단주를 잡으러 온 것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저답지 않게 친절을 베풀었건만, 저 둔해 빠진 상단주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결국 잡혀 버렸다.

‘이왕 잡힌 거 시간이나 좀 끌어 주라고.’

애초에 선생은 상단주를 이용할 생각뿐이었다. 암시장 같은 발상은 퍽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으나, 저나 제 동료들을 사병 따위로 취급해 명령하는 꼴을 볼 때마다 살기가 몇 번이고 치솟았다.

약속된 장소로 도착한 선생은 먼저 와 있던 이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비는?”

“전부 다 끝냈어.”

함께 어울렸던 도적들도 해치웠지.

“그럼 서둘러 움직인다.”

빠르게 이동하던 무리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어두컴컴한 숲길, 이동하던 그들의 동선 앞에서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등불을 단 마차들이었다.

“…에페우스 상단이야.”

선생이 밤눈 좋은 눈으로 마차에 그려진 문장을 발견했다. 시그노 상단주와 이리저리 어울리면서 얼추 익혔던 것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뭘 운반하는데?”

“밀가루.”

“털 것도 없군.”

누군가가 혀를 찼다.

“이번에도 서부의 개들이 난리를 치려나?”

또 다른 누군가가 레보오에 대해 물었다. 망할 서부 기사단 때문에 이쪽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먼저 죽은 동료들 때문이 아닌, 그저 자신에게도 그런 피해가 닥칠 수 있다는 염려였다.

“이번에는 괜찮아.”

선생이 말했다.

“레보오는 지금 상단주 저택에 있다.”

그러니 도망을 치려면 지금이 절호였다. 짧은 대화를 끝낸 그들은 기척을 지웠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상단 직원들과 마차를 조용히 추격했다.

‘운이 좋군.’

마침 저 상단이 북부로 이동 중이었다. 이곳에서 대충 도적 떼의 습격인 것처럼 꾸미면 레보오는 북쪽을 수색할 테고, 자신들은 그 틈에 남부로 잠입하면 끝이었다.

‘북부는 위험하지.’

상단주에게는 보레오티가 별것 아니라고 허세를 떨었지만, 그도 검은 맹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실행되진 않았다곤 해도 마물을 사냥하려던 계획까지 세웠으니 괜히 건드릴 필요도 없었고.

어둠 속에서도 마차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동했다.

마치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는 수상한 그림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그 반대던가.

상단이 숲을 벗어나 물류 창고를 코앞에 둘 때.

“…어?”

나무 위에서 숨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 지면 아래로 심장에 단검이 박힌 시체가 추락했다.

“…!”

선생의 잇새 사이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함정이다!”

뒤늦게 외쳤지만, 너무 늦은 경고였다. 상인으로 위장한 레보오 기사단이 마차에 숨겨 둔 검을 들고 그림자들을 습격했다. 밀가루를 실어야 했던 마차 안에서도 다른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상단주한테 갔다며?”

레보오에게 쫓기던 무리들이 선생을 탓했다. 선생이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철 맛과 함께, 시그노 상단주를 체포하는 계획마저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림자들이 서둘러 속도를 높였다.

“자, 잠깐만! 거긴 북부야!”

뒤따라가던 이가 당황했다.

“어쩔 수 없어! 당장 북부로 아예 몸을 숨겨야 해.”

“하지만 거기엔 보레오티가…!”

“안 들키면 돼!”

맹수 굴에 자진하여 가는 꼴이지만, 어쩌면 등잔 밑이 도리어 안전한 은신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저놈들은 북부로 못 넘어와.”

각 기사단은 무장한 채 타 지역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순간 전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레보오 기사단 역시 이를 인지하는 것처럼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북부로 넘어가지 못하게 해라!”

달빛에 흐릿하게 물든 은발의 기사가 소리쳤다. 그 말마따나 쉬이 보내 주지 않겠단 듯이 검을 휘둘렀다.

“으악!”

“커헉!”

곧 검붉은 선혈이 떨어지는 여름 꽃처럼 땅에 흩뿌려졌다.

“북부로만 넘어가면 저들도 못 쫓아온다!”

“서부의 개새끼들이…!”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 주마!”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림자들이 겨우 북부 경계선을 넘었을 때, 무장한 레보오 기사들은 선생의 예상대로 추격을 멈췄다. 그러나 눈앞에서 목표물을 놓쳤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끝났으니까.

“치욕을 반드시 갚는다라…….”

고저 없는 목소리 하나가 웅얼거렸다.

“대체로 그딴 소리 지껄이는 것들이 빨리 죽더라.”

밤하늘에 뜬 달 위로 먹구름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땅 위를 고즈넉하게 밝히던 달빛은 사라졌건만, 오히려 숨어 있던 누군가의 존재감은 선연하게 드러났다. 살기 어린 위압감이 암살자들을 옥죄었다.

‘이, 이게 뭐야…!’

겁에 질린 선생이 결국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생명의 근본 그 자체를 위협하는 공포심이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보레오티 공작?”

먹구름 틈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내리쬐니, 만년설보다 시린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놈이 죽기 전에 듣기 좋은 말을 지껄이네.”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글라디고.”

검은 맹수의 등 뒤로 또 다른 맹수들이 기척을 드러냈다.

“사냥을 시작해라.”

* * *

“깊은 산 속, 암매장.”

누가 묻혔을까요.

“깊은 산 속, 암매장.”

레오니에의 흥겨운 노래가 어두운 밤을 가득 채웠다.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천진난만한지 듣는 사람의 심정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나들이 나온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은 얼굴만 빼고 땅에 묻힌 암살자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누가 묻었을까요.”

문득 노래를 멈춘 레오니에가 친히 무릎을 수그려 앉았다.

“응? 누가 묻었을까?”

레오니에는 암살자들에게 물었지만, 그들은 답할 수 없었다. 이미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두들겨 맞은 채였다. 그리고 레오니에의 하얀 망토에도 검붉은 피가 그득했다. 딱히 답을 기대한 것도 아닌지라,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니에가 마저 노래를 불렀다.

“새벽에 광공이.”

부드러운 음색이 단번에 높이 올라감에도 소리가 엇나가거나 깨지지 않았다. 레오니에는 의외로 노래를 잘 불렀다.

“조신수 재워 두고.”

위스키를 홀짝이며.

“묻으라 지시했죠.”

곡조를 시원하게 뽑아 부른 레오니에는 제 노래에 만족했는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암살자들을 진압하고 얌전히 뒤로 물러선 글라디고 기사단은 자신들의 차기 주군이 지금 얼마나 심기가 불편한지 잘 알았다.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저 분노의 대상은 자신들이 아니었으니까.

“…오늘이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겠구나.”

헤스페리 후작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레오니에의 분노는 누구 하나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잡히면 끝장날 ‘누구’는 저의 아들일 테고.

그러나 걱정스러운 마음과 달리, 스칸디아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레오니에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레오니에도 어느샌가 스칸디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감 서린 적막만이 두 연인 사이에 존재했다. 유난히 환한 달빛이 레오니에의 얼굴에 그늘을 지게 했으며, 반대로 스칸디아의 얼굴은 선명히 비추었다.

“아가씨.”

멜레스가 조용히 물었다.

“처분을.”

얼굴만 빼고 땅에 묻힌 저들을 어찌 처리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본래 서부에서 죄를 저질러 도망쳐 온 놈들이지만, 결국 이들을 붙잡아 반죽음으로 만든 건 북부의 차기 공작이었다.

“그렇네.”

레오니에가 뒤늦게 깨달은 척했다.

“어떻게 할까…….”

차게 식은 눈빛에 음산한 혼잣말이 더해지니 주변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멜레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장 무릎을 꿇고 잘못을 고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경계선 아래 있는 서부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장성하셨군요.”

이벡스가 마른 입술을 침으로 가볍게 축이며 마른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에 공작의 품에 안겨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던 어린 꼬마 영애는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였다.

“리네 백작,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함께 온 카니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니스라고 뭐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휴, 지 아빠 판박이네.”

카니스는 딱 저 시절의 펠리오를 보는 기분이라 감개무량했다. 그와 동시에 레오니에가 그 시절의 펠리오보다 더한 것 같아 혀를 내둘렀다.

두 부녀는 묘하게 달랐다. 펠리오는 아주 차가워서 뜨거운 얼음이었고, 레오니에는 아주 뜨거워서 차가운 불이었다.

“제물을 바쳐야 할 것 같은데요.”

카니스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제안했다.

사실 방법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저 사나운 맹수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제물 신랑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아들놈에게 해 준 것도 별로 없는데.”

이벡스가 통탄의 이별을 과하게 각오하던 순간.

“여, 영애!”

“잠시만요, 지금 그 선을…!”

경계선 주변에서 어수선한 소란이 들려왔다.

레오니에가 경계선을 넘었다. 일순 레보오 기사단이 긴장했다. 다행히 레오니에는 무장을 완전히 푼 채였다.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검은 넘어오기 전에 멜레스에게 넘겼다.

어느새 레오니에는 레보오 기사단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손으로 밀치거나 저리 비키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레보오 기사단들은 자연히 길을 터 주었다. 숨마저 옥죄는 위압감이 그들을 옆으로 밀어냈고, 자연히 발이 뒤로 물러 나갔다.

레오니에는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갈라지는 인파의 종착점엔 스칸디아가 있었다.

둘은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네가 지금.”

레오니에가 언짢단 듯이 중얼거렸다.

“나를 내려 봐?”

가소롭단 웃음과 함께 레오니에의 입에서 희뿌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꿇어.”

그 한마디에 서부엔 겨울이 찾아왔다. 살얼음이 져도 이상하지 않을 차가운 공기를 먼저 깨트린 건 스칸디아였다.

“레오.”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은 스칸디아는 피가 묻은 레오니에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어 제 얼굴을 감싸게 했다.

“하아.”

그제야 삭막했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레오니에는 제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는 스칸디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지금 너의 다리 힘줄을 자르면 안 될 이유를 대 봐.”

스칸디아는 고민하지 않았다.

힘줄이 잘리는 건 딱히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아플 것 같긴 한데, 그딴 것보다 레오니에가 다시는 저를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더욱 무서웠다.

“응? 대 보라니까?”

아량이라도 베풀겠단 듯이, 레오니에가 선뜻 되물었다.

“힘줄을 자르면, 그 뒤엔 어떻게 해 줄까?”

예쁜 새장에 가둬야 그런 사달이 안 나려나?

“설사 그게 오해라고 해도, 이 언짢은 마음이 쉬이 진정이 안 될 거 같아.”

술렁이는 검은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렸다.

“그곳에.”

스칸디아가 제 볼을 감싸던 레오니에의 손을 천천히 떨어트리더니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비릿한 피 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짙은 살 내음이 미칠 것 같은 중독성을 불러왔다.

“당신도 함께 갇혀 주세요.”

스칸디아는 세상에서 저만큼 레오니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단언컨대, 펠리오와 겨루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토록 심기가 어지러운 저의 폭군이 무슨 짓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도 알 수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저를 곁에 두고 한평생 보살펴 주신다면, 그곳은 감옥이 아니라 천국일 겁니다.”

“내가 저것도 자식새끼라고.”

뭘 먹고 키웠는지 모르겠네.

한 발치 떨어져 있던 헤스페리 후작이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속 타는 시늉을 했다.

레오니에가 바싹 마른 웃음을 슬쩍 흘렸다.

“역시.”

볼을 감싼 손가락이 그의 턱 아래를 지탱하듯 건드렸다.

“요즈음 좀 기어오르는 거 같네.”

그 별것 아닌 손짓과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오싹했다. 스칸디아는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을 흘리고 말았다. 레오니에의 입꼬리가 비식거렸다. 그러고는 잡혔던 손을 치우고는 휙 돌아섰다.

스칸디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감히 레오니에에게 손을 뻗어 잡지도 못하고,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레비페스 경!”

도로 경계선을 넘은 레오니에가 멜레스에게 명했다.

“잡은 녀석들을 레보오 기사단에게 넘겨라.”

“예, 아가씨.”

“글라디고, 채비해라.”

산책은 끝났으니.

철수를 명받은 글라디고 기사단들이 가지고 온 서류 하나를 레오니에에게 내밀었다. 레오니에는 같이 건넨 펜으로 서류에다 서명을 작성했다. 북부로 침입한 범죄자를 서부로 이송한다는 서류였다. 그제야 레보오가 북부로 넘어와 암살자들을 땅에서 무 뽑듯 뽑아 포박하기 시작했다.

“보레오티 영애.”

그 틈에 카니스가 레오니에를 찾아갔다.

“백작님.”

레오니에가 살가운 표정으로 카니스를 반겼다.

“잘 지내셨어요? 아비페르 님과 자녀분들은 건강하지요?”

조금 전까지 살벌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정상적인 인사였다. 카니스가 의아한 마음을 숨기며 서로의 안부를 나누던 중, 입 안에서 맴도는 물음을 가까스로 꺼냈다.

“진짜로 자를 건 아니지요?”

“뭐를요?”

“그, 영식의 힘줄…….”

카니스는 그 대답을 입에 담기도 무서웠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면.

“으이구, 아주 그냥 모시고 살아라.”

“그래도 됩니까, 어머니?”

“내가 너 때문에 혈압으로 쓰러지겠다.”

“여보, 그럼 제 팔에 기대겠습니까?”

“…스칸, 네가 누굴 닮았는지 알겠네.”

거의 죄인 교환처럼 북부로 가게 된 스칸디아의 양옆으로 후작 부부가 제 아들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하긴, 속이 보통 타겠어.’

카니스는 헤스페리 후작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저만 해도 우피클라와 피누가 사랑에 눈멀어 제 심장이고 쓸개고 다 내어 줄 것처럼 굴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게 뻔했다. 게다가 상대가 또 상대인지라, 뭔 수를 쓰지도 못하니 더욱 답답할 거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레오니에 역시 스칸디아 한 사람에게만 진심을 오롯이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힘줄 잘라서 옆에 두는 진심은 아니지.

카니스는 도대체 레오니에가 누굴 보고 저런 발상을 떠올리게 된 건지 심히 궁금했다. 자신이 아는 펠리오는 저러진 않았다.

‘설마 부인이?’

카니스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동안. 마찬가지로 같은 곳을 바라보던 레오니에의 눈동자는 어딘가 기묘하고 어수선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영애?”

이를 눈치챈 카니스가 불렀다.

“…….”

그럼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불안한 마음에 카니스가 한 번 더 불렀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레오니에는 그저 선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백작님,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잠깐!”

놀란 마음에 반말까지 내뱉은 카니스가 검은 마차로 돌아가려는 레오니에 앞을 가로막았다.

“진짜로 자를 건 아니지?”

그리고는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아무리 남자가 허릿심이래도 두 다리가 건실함으로써 발휘할 수 있는 기적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알고 그럽니까.”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친구 딸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거의 성희롱인데? 그의 아내인 아비페르가 옆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바로 등짝을 열 번 정도 사정없이 갈겼을 거다.

“어차피 영애는 알아듣지 않습니까.”

“당연하죠.”

레오니에가 당당히 긍정했다. 저 말이 성희롱이 되지 않은 건, 대화의 청자가 어릴 적부터 변태적 기질을 숨기지 않은 레오니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힘줄은 함부로 자르는 게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위해서라도 자중하라고 카니스가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누가 아빠 친구 아니랄까 봐.’

쉼 없는 잔소리가 슬슬 견디기 힘들었던지라, 레오니에가 카니스의 팔뚝을 가볍게 툭 두들겼다.

“백작님.”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후작님과 후작 부군께, 마취하면 별로 안 아플 거라고 전해 주세요.”

그러곤 냅다 마차에 올라탔다.

“영애! 남자의 생명은 다리란 말입니다!”

허벅지 근력을 발휘하려면 그걸 지탱할 발목이 중요하다며, 카니스는 애절하기까지 한 당부를 마지막까지 외쳤다.

레오니에는 진심 어린 충고를 애써 무시하며 마차에 올랐는데, 닫으려는 마차 문이 누군가에 의해 막혔다.

“신이시여, 저분께 가호를…….”

“야, 힘줄이 잘려도 다시 붙는 마법 약 만들 수 있냐?”

“돌아가면 당장 연구해야지.”

“작은 부군, 위험한 순간이면 눈을 찡긋거리세요.”

힘줄 잘릴 위기에 처한 스칸디아는 막상 태연하게 마차에 올라타는데, 정작 뒤에 있는 글라디고 기사단이 입방정을 떨었다. 심지어 몇몇은 기도까지 하고 있었다.

“언 놈이야.”

잡히면 가만 안 두겠다며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린 뒤에야 기사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타라고 말 안 했는데.”

털썩 자리에 앉은 레오니에가 입바람을 코 위로 훅 불었다. 살짝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가 흔들거렸다.

“갈아입을 옷을 받아 왔습니다.”

철면피라도 깐 것처럼 뻔뻔스럽기까지 한 스칸디아의 옆에는 깨끗한 셔츠와 바지, 망토가 있었다. 그러나 레오니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무거운 적막이 마차 안을 채웠다.

그 사이 마차가 움직였다. 검은 마차는 아주 약간의 덜컹거림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했다. 그러나 마차 안은 그런 안락함조차 안타까울 정도로 숨 막히는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레오니에가 먼저 움직였다.

입이 아니라 손을.

툭,

발치 아래로 피 묻은 망토가 떨어졌다. 스칸디아가 몸을 숙여 그것을 주우니, 레오니에가 곧장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툭툭, 단추 풀리는 소리가 스칸디아의 귀를 자극했다.

죽을 맛이란 게 이런 거였다.

셔츠가 조금씩 흘러내리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조그마한 구멍 사이로 단추가 빠지는 소리. 이 모든 걸 애써 참는 스칸디아의 절박함과 다르게 평온하기까지 한 상대의 숨소리까지. 스칸디아는 주제도 모르고 마구 들썩이려는 욕망을 잠재우고자 어떤 책 내용을 떠올렸다.

근육과 근육의 어울림, 섬세한 화풍, 감성적 서사. 수배령이 내려진 어느 얼굴 모를 작가가 그린 음란서적.

그러자 거짓말처럼 내적 평화가 찾아왔다.

그 틈에 스칸디아는 갈아입을 옷을 레오니에의 옆에 옮겨 줬다. 벗은 망토와 셔츠도 곱게 접어 제 옆에다 치워 줬다.

“친척 동생이었습니다.”

그리곤 눈을 감은 채 뒤늦은 변명을 시작했다.

“…알아요.”

레오니에가 깨끗한 셔츠에 팔을 끼워 넣으며 대꾸했다. 한결 부드럽게 풀린 목소리는 이제 반말 대신 존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근데 아까 보니까, 그 친척이 안 보이던데?”

“무서워서 안 나왔습니다.”

“앞으로 치마 안에 암기 숨기지 말라고 해요.”

“그냥 제가 신경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아주 좋고.”

셔츠를 다 갈아입은 레오니에가 옷 속에 들어간 머리를 손으로 넘기듯 뽑아냈다. 그제야 스칸디아가 눈을 떴다.

“힘줄은 안 자를 거예요.”

레오니에가 다리를 우아하게 꼬았다.

“흥, 누구 좋은 일이라고.”

경계선을 향할 때까지는 그냥 서부를 토벌하고 스칸디아의 사지를 사로잡아 새장에 가두려고 했다. 실제로도 진짜 마취 약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른거리는 달빛 아래 선 스칸디아를 보고 있자니, 그런 못된 생각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짜증 났던 마음도, 제게 곧장 찾아오지 않았던 괘씸함도 얼굴을 보기 무섭게 다 사라졌다.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백작 아저씨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어른이 하는 말씀이 다 옳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레오니에의 주변에 있는 어른들 말씀은 대부분 옳았다. 카니스 역시 기사 출신답게 근육의 힘이 발휘되려면 발목이 튼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물러지는 이유는 하나였다.

‘더 좋아하면 지는 거지.’

천하의 검은 맹수도 사랑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속상하셨지요.”

순식간에 들어온 커다란 손이 레오니에의 말간 볼을 조심히 감쌌다.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진 채 힐끔거리니, 스칸디아가 속상하단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 손 치우라고 레오니에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스칸디아는 못 들은 척했다. 오히려 제 엄지로 레오니에의 뺨을 느리게 보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스칸디아가 사과했다.

“바로 쫓아가지 못한 것도, 북부로 찾아가지 못한 것도.”

“…….”

“하지만 저는 아주 조금은 기뻤습니다.”

물론 저도 슬프고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기뻤다며 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제게 질투를 해 주신 것 아닙니까.”

그리 말하는 스칸디아의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간 채였다.

“저만 안달 난 것 같았는데.”

“누가 그래요.”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듣자 하니 건방지게 제 속을 살살 긁고 있었다.

“내가 먼저 널 알아봤고.”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니에가 맞은편에 앉은 스칸디아의 위를 덮치듯이 내려다봤다.

“항상 내가 먼저 네 이름을 불렀는데.”

스칸디아의 팔이 레오니에의 허리를 끌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잡아먹을 듯한 맹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달은 내가 더 났어.”

자연히 시선이 올라간 레오니에가 낮게 읊조렸다.

“넌 내가 아직 미성년자인 걸 고마운 줄 알아야 해.”

미성년자만 아니었으면 당장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며 진심을 다해 협박했다.

“그건…….”

레오니에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내가 할 말인데.”

스칸디아가 또 다른 손으로 레오니에의 검은 뒤통수를 감쌌다. 달뜬 숨결이 얽히는 입술 사이는 손가락 하나도 못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이것 봐라?

레오니에가 가소롭단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허락이 떨어져야 허겁지겁 다가갈 수 있었던 어수룩한 소년이 감히 반역을 시도하다니.

“나중에 어쩌려고.”

은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입맛이라도 다시듯이 목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릉, 미세한 떨림이 피부 위로 선명히 보였다.

“응?”

스칸디아가 제 추악하고 원초적인 진심을 감추고자 보기 좋은 미소를 걸쳤다. 레오니에가 가장 좋아하는 선한 웃음을.

“감당하기 힘들 텐데?”

“어쭈?”

기어오르는 게 퍽 귀여웠던 레오니에가 피식거렸다. 대화를 나누면서 달싹이는 두 입술이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 아쉬운 접촉이 도리어 몸을 조금 이상하게 만들었다. 덩달아 마차 내부가 거짓말처럼 열기를 더해 갔다.

‘…종종 싸울 만한데?’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 순둥이가 반항이라니. 신기하게도, 불쾌한 감정보다, 이 앙칼진 은빛 맹수가 과연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것을 제게 줄지 궁금해졌다.

‘다른 놈이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짓밟았을 건데.’

반면 스칸디아의 반항은 그가 말한 ‘나중’을 무척이나 기대하게 했다.

“성년이 되려면 얼마나 남았더라…….”

레오니에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1년 1개월 18일 남았고, 레오는 2년 11개월 6일 남았지요.”

심통 맞은 목소리가 아래서 들려왔다. 특히 레오니에의 남은 생일을 말할 때 더 힘을 주었다. 마치 나보다 네가 더 큰 문제라고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이야, 내가 이래서 우리 뿜뿜이를 사랑한다니까.”

레오니에가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귀여운 애인 때문에 웃음이 나는 것도 있지만, 강아지처럼 제 목 언저리에 코와 입을 비비적거리는 애교가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이리 귀여우니 결국 내가 지지.”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그의 관자놀이 근처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허벅지 위에 올라타 앉았는데도 마주치는 시선의 높이가 평행이었다. 스칸디아의 키가 그만큼 크단 방증이었다.

“저는 늘 제가 진다고 생각했는데.”

스칸디아가 이갈이하듯 레오니에의 가는 목에 이를 살살 박았다. 레오니에는 제 셔츠 단추를 은근슬쩍 풀어 버리는 스칸디아의 손길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단추가 가슴께까지 풀어졌을 때.

“…어.”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짧은 탄성과 함께, 스칸디아가 몸을 잘게 떨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레오니에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이어 말했다.

“외간 남자 앞에서 그냥 옷을 벗었을까 봐요?”

반쯤 벌어진 셔츠 사이로 글라디고에서 즐겨 입는 쫄쫄이 훈련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칸디아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아이, 귀여워.”

레오니에가 냉큼 스칸디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도장처럼 꾸욱 눌러 찍었다. 배신감에 바싹 메말랐던 스칸디아의 눈동자가 다시 생기를 머금으며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꾹꾹 눌러지기만 하던 입술들이 곧 깍지를 끼고 위아래로 문질러지며 조금 더 질척한 교류를 나누게 되는 건 금방이었다.

“…얼굴이 이게 뭐람.”

가까스로 입술을 떨어트린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얼굴을 손으로 보듬었다.

“제대로 먹긴 했어요?”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마른 듯 보였다.

“속상하게 진짜.”

“그건 제가 할 말인데.”

덩달아 스칸디아도 쓰게 웃었다.

“식사는 제대로 했습니까? 밤잠 설치진 않았고요?”

“열 받아서 이불을 수도 없이 차긴 했어요.”

“다리가 아프셨겠네요.”

천근을 발로 찬 것도 아닌데, 스칸디아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레오니에의 다리를 바라봤다.

저 연약한 다리로 이불을 찼다니.

“발목은 안 삐셨습니까?”

“내 발목보다는…….”

레오니에가 살짝 몸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떨어지는 연인을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스칸디아는, 레오니에가 맞은편이 아닌 제 옆에 앉는 걸 보고 다시 싱긋 웃었다.

“뿜뿜이 발목이 더 위험할 거 같은데?”

그러곤 스칸디아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입술을 쪽 맞췄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어지간한 건 다 용서할 수 있어요. 배신만 하지 않으면 뭐든 용서할 거야.”

손등에 입술을 묻은 채 중얼거리는 진심이, 마치 자신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맹세 같았다.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고백에 스칸디아의 심장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스칸디아가 손을 뻗어 레오니에의 숙인 얼굴을 감싸 올리려던 찰나.

“우리 부모님은 아닐걸?”

레오니에를 향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아주 늦은 깨달음이, 스칸디아의 두뇌를 빠르게 스쳐 갔다.

* * *

두 사람이 보레오티 저에 도착한 건 새벽이었고.

“죽이더라도 잠은 재우고 죽여야지.”

그 새벽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던 펠리오가 스칸디아의 귀환을 확인하곤 침실로 향했다. 예상과 달리 화내는 기색조차 없는 펠리오에게, 스칸디아는 처음으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공작님이 저렇게 무섭기는 처음입니다.”

스칸디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렸을 적에 그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 무서웠다. 차라리 저에게 화를 쏟아 내는 게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래도 스칸디아는 펠리오의 말대로 순순히 제 전용 손님방으로 들어가 눈을 잠깐이나마 붙였다. 그러나 쉬이 잠들 수 없었고, 결국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어머.”

방을 나와 거실로 향하니 먼저 일어난 바리아가 스칸디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나요, 헤스페리 후작 영식.”

전엔 없던 벽이 느껴지는 아침 인사였다.

“바…….”

‘바리아 님’이라고 부르려던 스칸디아의 입술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러든 말든, 바리아는 북부 산맥의 만년설처럼 차갑고 시린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스칸디아는 바리아의 등 뒤로 시커먼 맹수가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저를 죽이려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맹수가.

“야아!”

그때 뒤에서 앙증맞은 외침이 들렸다.

보온 기능에 충실한 내복 비슷한 잠옷을 입은 벨레아니가 눈과 입과 콧구멍을 크게 벌린 채로 서 있었다. 한 팔에는 까만 사자 인형이 들려 있는데, 레오니에가 아끼는 사자 인형 가족 중 막내였다.

“예쁜 아찌!”

벨레아니는 스칸디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혼나 볼래?”

아가 맹수가 으르렁거렸다. 벨레아니는 어젯밤에 레오니에가 저택을 떠나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부모님께 물어봤다.

‘아저씨 데리러 가는 거다.’

‘예쁜 아찌? 아찌 와?’

‘예쁘긴 어디가 예쁘니. 우리 레아가 훨씬 예쁘지.’

‘사위, 사위 노래를 부를 땐 언제고…….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중에 그 아저씨 오면, 레아 네가 혼내 주거라.’

스칸디아가 언니와 싸워서 슬프게 했단 사실을 알게 된 벨레아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단단히 혼내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예쁜 아찌 아냐. 나쁜 아찌야.”

벨레아니는 두 주먹을 사납게 쥔 채 윗입술을 씰룩거렸다.

“언니야 괴롭히지 마!”

삐죽 올라간 눈초리가 어찌나 매섭고 사나운지, 스칸디아는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잘못했지?”

“예, 죄송합니다.”

“그걸 알면서 그래!”

잘못인 줄 알면 하질 말아야지!

생각지도 못한 호통에 스칸디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벨레아니의 어휘력이 상당히 수준급이 되었다.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바리아도 놀란 눈초리였다.

“아찌, 왜 서 있어?”

그 말에 스칸디아가 냉큼 무릎을 꿇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내가 몸을 움츠린 채 앉아 있고, 쪼그마한 아가가 빽빽 잔소리하는 모습은 퍽 유쾌했다.

“또 그러면, 맴매야!”

“죄송합니다.”

“죄송한 짓을 왜 해!”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벨레아니의 폭설 같은 잔소리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도대체 저 말들은 어디서 배워 왔지? 스칸디아는 혼나는 와중에도 그것이 궁금해졌다.

“으이고, 요즘 애들은 이래서 문제야아!”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벨레아니는 이제 나이가 제법 지긋한 어르신 같았다.

“아침부터 참.”

때마침 펠리오가 나타났다.

“아빠, 아빠.”

벨레아니가 쪼르르 달려가 펠리오의 다리에 매달렸다.

“레아가 혼냈어.”

“어떻게 혼냈는데?”

“…아빠, 안 봤어?”

아가 맹수가 배신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봤지.”

펠리오가 서둘러 제 허벅지에 매달린 벨레아니를 안았다. 그러나 벨레아니의 차게 식은 눈빛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레아가 무섭게 크앙, 했는데.”

크앙, 크앙!

아가 맹수가 손톱을 바짝 세우며 으르렁 울었다.

“정말 무섭구나.”

펠리오가 세상 무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빠 미워.”

벨레아니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야, 아빠도 무서워.”

“…….”

“저기 봐라. 저 아저씨도 레아가 너무 무서워서 오줌 쌌겠는데?”

“레아는 이제 변기에서 쉬야 하는데.”

벨레아니가 기저귀를 뗀 제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그럼 나중에 레아가 썼던 기저귀를 저 아저씨한테 빌려줄까?”

“아니. 싫어.”

똑 부러진 발음으로 야무지게 거절한 벨레아니가 버둥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언니야한테 갈래.”

“아빠랑 있지.”

“싫어. 재미없어.”

야무지게 거절한 벨레아니는 절 찾으러 온 유모와 함께 가 버렸다. ‘아빠는 놀 줄 몰라!’라고 유모에게 고자질하는 목소리가 제법 크게 걸렸다.

“…쟨 내 딸인데.”

닫힌 문을 빤히 응시하던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날이 가면 갈수록 레오를 닮아 가는 건지.”

“그리고 레오는 당신을 닮았죠.”

그러니 돌고 돌아 펠리오를 닮았다고 말하는 바리아는 그제야 참고 있었던 웃음을 터트렸다.

“배 아파 죽는 줄 알았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또 어딜 갑니까.”

“배고파서 아침 먹으러요.”

남자 둘이서 재밌게 이야기나 나누라며 미련도 없이 가 버렸다.

“애들이 엄마를 빼닮았지.”

매정하게 가 버리는 게 아주 똑같다며 펠리오가 답지 않게 구시렁거렸다.

“그만 일어나.”

펠리오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스칸디아에게 퉁명스럽게 명했다.

“그, 다리가 저려서…….”

익숙하지 않은 무릎 꿇는 자세에 스칸디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다리가 쥐가 나 버렸다.

“환장하겠네.”

펠리오는 결국 스칸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는 것까지 도와줬다. 팔자에도 없는 예비 사위 부축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겨우 자리에 앉은 스칸디아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따님께 심려를 안겨 드렸습니다.”

“알고는 있군.”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놀란 스칸디아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이렇게 싱겁게 끝낸다고?

펠리오는 겉으로도 딸들을 아끼고, 속으로는 더욱 딸들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제 장녀를 속상하게 만든 저를 가만히 둘 위인이 아니란 것도 스칸디아는 알았다. 매번 그에게서 견제를 받아 왔으니까.

한데 오늘 새벽에도 저를 용서하는 것처럼 넘어가더니, 지금도 이렇게 가볍게 넘어간다는 게 너무도 낯설었다.

스칸디아가 아는 펠리오는 결코 이래선 안 되었다.

“골절까진 각오했습니다.”

기어코 팔을 내밀었다.

“자비를 베풀어, 두 동강으로만 깔끔하게 부러트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칸디아의 귀에 들린 건 뼈 부러지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당연히 팔에 통증도 없었다.

“네놈한텐.”

펠리오가 살짝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우리 레아가 했던 경고는 무섭지도 않았던가? 아주 그냥 아가 재롱 같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경고였습니다.”

“그럼 됐어.”

이미 둘째가 제 몫까지 다 혼냈으니, 펠리오는 굳이 저가 나서 입 아프게 타이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끔은 맞는 것보다 이렇게 넘기는 게 더 힘들 때도 있지.”

꽤나 거친 보레오티 가풍을 익히 아는 스칸디아에겐 더욱 잘 먹힐 평화주의적 고문이었다.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있었다간.”

와지끈! 펠리오가 앉은 소파 팔걸이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 집 여자들이 좋아하는 그 곱상한 얼굴을 보다 거칠게 만들어 주지.”

팔걸이를 쥔 손을 떨어트리자, 가루가 된 나무 조각이 후두두 떨어졌다. 스칸디아는 저 위협을 받고 나서야 크게 안심했다. 그제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 상태지.”

왜 그런지 아느냐며, 펠리오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제가 혼나서요?”

“아니.”

펠리오가 더욱 기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오늘 바로 수도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살을 자연히 찌푸리던 스칸디아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휴가…!”

서부 도적 소탕과 숨겨진 흑막을 잡느라 허비한 황궁 여름 휴가가 오늘로 끝이었다.

“정말 상쾌한 아침이군.”

창문 너머로 비치는 햇살을 만끽하며, 펠리오는 좌절하는 스칸디아를 놔둔 채 식당으로 향했다.

어느 여름.

겨우 만났던 연인은 또 헤어져야 했고, 아버지는 소화제라도 먹은 것처럼 속이 쾌청했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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