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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첫 싸움(1) (44/51)

외전 4. 첫 싸움(1)

보레오티 영지.

보레오티 공작 가문이 다스리는 험준한 북쪽 대륙을 일컫는 그 이름에는 여러 별명이 붙어 있었다. 마물의 소굴, 만년설의 끝, 검은 맹수들의 고향.

검은 맹수란 ‘맹수의 송곳니’라 불리는 이능을 지닌 보레오티를 가리켰다. 이능을 지닌 보레오티는 모두 검은색을 품었고, 그들이 가진 힘은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보레오티 문장에 새겨진 검은 사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현재 보레오티에는 검은 맹수가 무려 셋이나 있었다. 그중 둘은 이미 제국에서 유명 인사였다. 역대 보레오티 중 최강이라 불리는 현 공작. 그의 장녀이자 차기 보레오티가 될 공작 영애.

반면 남은 한 명은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알려진 것이라곤 보레오티 공작 부부의 차녀라는 것과, 공작 영애가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란 사실뿐이었다.

하나 추측하기론, 세 번째 맹수 역시 보레오티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보통내기는 아닐 터였다.

그리고 이 추측은 귀족들의 추악한 뒷소문치곤 꽤 정확했다.

* * *

아가 맹수는 조용히 눈을 반짝였다. 겨우 생후 25개월밖에 안 되었음에도, 기척을 숨기고 움직이는 행동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벨레아니는 무서운 맹수다. 자신에게 등을 보인 사냥감은 반드시 덮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벨레아니에게 걸린 불쌍한 사냥감은 카라였다.

‘오늘도 씩씩하시구나.’

경험 많은 집사는 제 뒤를 향해 슬금슬금 접근하는 아가 맹수를 애써 무시하며, 저택에 도착한 편지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벨레아니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아가가 걸을 때마다 높이 묶은 사과 머리가 흔들거렸다. 토실토실한 볼살은 긴장감에 점점 붉어졌다. 하나 목표물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가 맹수는 먹잇감을 코앞에 두고도 냉정을 유지했다. 폭신한 융단 덕에 발소리는 감춰졌고, 입술도 꾹 다문 덕에 코로 나오는 삑삑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코가 막히셨나?’

감기약을 챙겨야겠군, 이라고 카라가 생각하던 찰나.

“크앙!”

예상치 못한 공격이 카라를 덮쳤다.

“어머나, 깜짝이야.”

카라는 팔자에도 없는 연기력을 내보이며 과장스럽게 주저앉았다.

“크앙, 크아앙!”

벨레아니는 쓰러진 카라의 등을 와락 껴안았다. 잔혹한 아가 맹수는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끈기를 발휘했다.

“세상에나, 도대체 누구지요?”

카라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힘겹게 참으며 뒤를 돌아봤다.

“작은 아가씨!”

벨레아니가 토실토실한 볼을 씰룩거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라지 않았습니까. 제 심장이 멈출 뻔했습니다.”

카라는 손을 뒤로 뻗어 벨레아니의 등을 토닥거렸다.

“레아가, 잡았어!”

사냥을 성공한 벨레아니가 씩씩하게 외쳤다. 용맹한 아가 맹수는 짧은 팔을 허리에 올리며 으스댔다. 올챙이처럼 배가 튀어나온 벨레아니를 보며, 카라는 레오니에의 어린 시절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어린 레오니에도 으스댈 때면 으레 배가 먼저 나왔었다.

몸을 도로 일으킨 카라는 다시 편지를 분류했다.

“뭐야? 뭐야아?”

다리 밑에서는 벨레아니가 빙글빙글 돌면서 치덕거렸다. 꽤나 심심했는지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유모와 하녀는 어디 있나요?”

카라가 벨레아니에게 물었다.

“몰라? 몰라?”

벨레아니가 능청을 부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또 따돌리고 오신 건가요?”

카라가 예리하게 물었다.

“분명히 유모나 하녀들 몰래 혼자서 돌아다니시면 안 된다고 주인님과 마님께서 말씀하셨을 텐데요?”

“레아는 몰라.”

벨레아니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카라는 이 아가 맹수가 아주 영악하고 사랑스러운 아기임을 알았다. 아가의 언니가 그랬듯.

“그거, 뭐야아?”

괜히 모르는 척하던 벨레아니가 카라의 손에 들린 것들을 가리켰다. 혼나기 싫어서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는 영악한 의도였다.

‘주인님은 나중에 또 고생하시겠군.’

카라는 벨레아니가 조금만 더 자라면 레오니에만큼이나 펠리오의 허파를 뒤집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 동시에 아주 행복한 가족이 될 것이고.

“편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편지?”

벨레아니가 눈을 반짝였다.

“언니야?”

아가가 조막만 한 손으로 카라의 바짓자락을 잡으며 칭얼거렸다. 어느새 벨레아니의 눈동자엔 고집이 어려 있었다.

“언니야 있어? 언니야야?”

“물론이지요.”

카라가 새까만 봉투 하나를 따로 빼내 보여 줬다.

“…!”

벨레아니가 잔뜩 고조된 표정을 지었다. 엉거주춤한 뜀박질로 멀리까지 달렸던 벨레아니는 다시 카라의 곁으로 돌아왔다.

“내가, 레아가!”

벨레아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레아가 할래!”

“그럼 작은 아가씨께, 제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카라가 물었다.

“주인님과 마님께 이 편지를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큰 아가씨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벨레아니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가슴을 팡팡 쳤다. 저에게 맡기라는 뜻이었다.

“레아 잘해! 할 수 있어!”

서투른 발음으로 힘차게 외친 벨레아니가 편지를 받았다. 시커먼 편지 봉투는 분홍색 촛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엄마다, 엄마.”

벨레아니가 촛농을 가리켰다.

편지를 손에 쥔 벨레아니가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앞장섰다. 아가는 부모님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았다. 아직 몸속에 잠들어 있는 맹수의 송곳니가 자연스럽게 길을 인도해 주었다.

그 뒤를 따라가는 카라의 손에는 나머지 편지와 편지용 칼, 조금 묵직한 소포가 담긴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작은 아가씨.”

카라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아한 공작 영애께서 주먹으로 문을 치시려고요?”

카라는 벨레아니의 옹골찬 주먹을 눈으로 가리켰다. 있는 힘껏 문을 두들기려고 했던 벨레아니가 슬그머니 주먹을 내렸다. 대신 발을 내밀었다.

“…큰 아가씨가 가르쳐 주셨나요?”

카라는 순간 과거로 돌아간 줄 알았다. 벨레아니는 제 언니의 행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언니야가, 차래!”

벨레아니는 고작 생후 25개월이지만, 기억력이 아주 우수했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 언니가 하는 말은 항상 실천하고 몸에 익히는 흡수력을 지녔다.

“이렇게 손등으로 똑똑, 하셔야죠.”

“발은?”

“문이 너무 커서, 발로 차시면 아프실 텐데요?”

“레아는 괜찮아.”

아픈 건 참을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진짜로 아픈 건 싫어서 슬그머니 발을 내렸다.

“똑똑.”

그리고 카라가 가르쳐 준 대로 문을 손등으로 살짝 두드렸다. 입으로 똑똑 소리를 내는 야무짐도 잊지 않았다.

“들어와.”

곧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웃음기가 만연한 목소리는 문밖에서 나눈 벨레아니와 카라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던 듯하다.

카라가 문을 열자, 벨레아니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엄마!”

아이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바리아에게 쪼르르 달려가려다가, 곧장 몸을 틀어 집무실 책상 쪽으로 갔다.

“아빠, 아빠!”

“이 영악한 것.”

펠리오가 제 다리에 달라붙은 막내딸을 보며 입꼬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곤 번쩍 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네 엄마가 너한테 화난 걸 알고 있었구나.”

바리아는 조금 전에 벨레아니가 사라졌고, 사라진 벨레아니가 또 사냥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유모의 보고를 들은 참이었다.

“벨레아니 보레오티.”

예상대로, 바리아는 꽤나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벨레아니는 냉큼 고개를 아빠의 가슴팍에 숨겼다. 흔들거리는 사과 꼭지 머리가 펠리오의 가슴 언저리를 간질였다.

“아빠한테 숨어도 소용없어.”

“으으응.”

“유모 속여서 혼자 다니지 말라고, 엄마가 분명히 말했지?”

벨레아니의 도망 전적은 이제 세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워낙 장난기가 넘쳐서 사용인들을 곤란케 하는 데는 도가 텄다.

“그치만.”

혼이 나서 풀이 죽은 벨레아니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뭔가 억울한 게 있는 듯했다.

“재밌어…….”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지.”

가만히 듣고 있던 펠리오가 실소를 흘렸다.

“하여튼 누굴 닮아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몰라.”

“당신이지, 누구겠어요.”

바리아가 즉답했다. 이번에는 펠리오가 입술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곧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안타깝게도 바리아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건 보레오티의 특징이었으니.

“레오한테 다 들었어요.”

바리아는 펠리오가 여태 고용했던 가정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도대체 왜 그랬냐고 화까지 냈었다.

“도대체 다른 사람 생각을 안 해.”

“배울 점이 많은 교사들이었습니다.”

펠리오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반면교사도 교육이고, 레오도 그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그럼 또 고용해 봐요.”

내가 어떻게 나올지 보고 싶으면. 바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최근 바리아는 보레오티의 자산을 수치화하는 데 열중하는 중이었다.

“아빠.”

부모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벨레아니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이겼어?”

“엄마는 늘 이기지.”

펠리오가 벨레아니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너희 엄마는 신보다 강하거든.”

그는 다른 손으로 벨레아니가 들고 온 검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제야 벨레아니는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떠올렸다.

“언니야!”

“그래, 네 언니가 편지를 보냈구나.”

펠리오는 소파에 앉으면서 저와 바리아 사이에 벨레아니를 앉혔다. 바리아는 벨레아니에게 또 유모를 속이면 크게 혼을 낼 거라고 엄하게 말했다.

그 틈에 펠리오는 카라에게 받은 편지용 칼로 재빨리 봉투를 열었다. 여태 표정 관리 하느라 얼굴 근육이 아프던 카라는 나머지 편지들이 올려진 은쟁반과 함께 책상에 따로 올려 뒀다.

“이건 아가씨께서 함께 보내신 겁니다.”

카라가 내민 건, 누런 종이와 얇은 끈으로 포장된 소포였다.

“레아가! 레아가!”

벨레아니가 팔을 높이 뻗으며 칭얼거렸다. 바리아는 소포 끈만 먼저 풀어낸 뒤에 아이에게 주었다.

“언니가 뭘 보냈을까?”

“레아 선물!”

엉성하게 뜯겨 나간 누런 포장지 조각이 눈처럼 바닥에 쌓였다. 그중 몇 개는 벨레아니의 실내용 파란 망토에도 붙었다.

“으흐흥, 흐응!”

콧노래까지 부르며 선물을 푸는 작은딸을 보며, 펠리오와 바리아가 서로 눈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레오가 편지에 뭐라고 썼어요?”

“아카데미엔 근육이 적다고 투덜거리는군요.”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가 벌써 1년 하고 반이 지났건만, 레오니에의 편지에는 아직도 투덜거림이 가득했다. 하나 그 덕에 펠리오와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다.

‘주방장이 해 준 닭고기 요리 먹고 싶어. 크림에 뭉근하게 익힌 거!’

‘이놈들은 공부만 하느라 근육을 소중히 대하지 않았나 봐.’

‘레아는 나 안 잊었지? 언니 보고 싶다고 울고 있지?’

철없고 유치한 편지는 부모님의 적적함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았다.

“어머, 우리 딸 힘들겠네…….”

바리아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썩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눈 보신할 것 좀 챙겨야겠네.”

바리아는 눈 보신에 좋은 것들을 빠르게 떠올렸다. 가령 아이의 창의력을 자극할 소설이라던가. 그림이 취미인 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근육 크로키 사전이나.

“적당히 주십시오, 적당히.”

면역이 쌓인 펠리오는 이제 그러려니 했다.

“와아!”

혼자서 묵묵히 선물을 뜯던 벨레아니가 환호했다. 동글동글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어머, 너무 귀엽다.”

바리아가 신기하단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오니에가 벨레아니에게 보낸 선물은 과일 모양을 한 크레용과 색칠 놀이 공책이었다. 하나 벨레아니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찌다, 아찌!”

벨레아니가 공책에 그려진 그림들을 가리켰다.

“예쁜 아찌!”

색칠 놀이 공책은 레오니에의 수작으로, 손수 그린 그림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개중 대부분이 스칸디아를 그린 것이었다.

“…….”

당연히 이를 본 펠리오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레아.”

펠리오가 벨레아니를 불렀다. 그림에 흠뻑 빠진 아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으응, 이라고 대충 대답했다.

“아빠랑 이 못생긴 그림 중에 누가 더 잘생겼지?”

“여보…….”

바리아는 그런 남편을 조금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빠.”

고민도 하지 않고 튀어나온 딸의 대답에 펠리오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슬그머니 소파에 등을 기대며 뒤로 젖힌 고갯짓이 무척이나 거만했다.

“아빠는 멋쟁이.”

벨레아니가 조그마한 엄지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겨울 방학 때 북부에 왔었던 레오니에가 가르쳐 준 손동작이었다.

“우리 딸은 역시 천재였군.”

“그리고오, 아찌는 예뻐.”

“천재도 가끔 실수하곤 하지.”

펠리오가 벨레아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레아는 이 아찌가 좋아?”

바리아가 공책에 그려진 스칸디아를 가리켰다. 벨레아니가 색칠하기 좋게 큼직하게 그려져 있었다.

“응…….”

벨레아니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아찌는 예쁘고오, 근육이야아.”

25개월의 취향 고백은 펠리오의 추억 하나를 꺼내었다.

‘나는 우람 불끈한 근육이 좋아!’

레오니에는 글라디고 기사단을 처음 만나러 갔던 날, 우렁찬 목소리로 지고지순한 취향을 밝혔었다. 그땐 중진 기사들이 말한 것처럼, 독특한 것에 빠지는 어린아이 특유의 찰나인 줄 알았다. 하나 저의 징글징글한 장녀는 여전히 그 취향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코.

“울끈불끈.”

제 동생에게도 취향을 전염시켰다.

* * *

펠리오는 육아란 본디 인내와 인내, 그리고 인내라는 사실을 레오니에를 키우면서 처절하게 깨달았다. 씻을 때 말곤 만져 본 적도 없는 목 뒤를 수시로 잡았고, 감당 못 할 아이의 취향 때문에 허파가 하도 접혀 폐병이라도 걸리는 줄 알았다.

레오니에가 찻잔으로 뭇 사내를 사로잡는 방법을 배웠을 때는 자다가도 놀라 벌떡 깨어난 게 수십 번이며, 레오니에가 기사단의 근육들 속에서 히죽거리며 해괴한 노래와 춤을 자랑할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의 첫 육아는 지나치게 고난이었다.

그렇기에, 펠리오는 벨레아니를 잘 키울 자신이 생겼다.

‘그게 말처럼 쉬울까요?’

반면 바리아는 회의적이었다.

‘레아는 레오 동생이에요.’

벨레아니는 태아였을 때도 레오니에가 동질감을 느낀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배 속에 있었을 때도 미인을 알아보고, 근육에 반응하고, 근육 미남이 눈앞에 있으면 바리아의 배를 뚫을 정도로 움직였다.

‘그래도 레오보다는 쉬울 겁니다.’

바리아는 자신하는 펠리오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몇 년 전 출산을 우습게 봤던 자신이 떠오르는 건 마냥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레오가 들으면 섭섭할 거예요.’

‘무슨 섭섭한 소리를.’

펠리오는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면 결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물론 어린 레오니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레아까지 그랬다간…….

큰딸 취향도 힘들어 죽겠는데, 둘째까지 제 언니 따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소름이 끼쳤다.

‘내가 기필코.’

펠리오는 큰 걸 바라지 않았다.

‘애독서는 동화책이고, 꽃을 예쁘다고 말하는 동심만 가지면 됩니다.’

‘레오도 꽃 보면 예쁘다고 하잖아요.’

‘그 꽃이 그냥 꽃이 아니니 문제지요.’

나름 교양을 가르쳐 보고자 보스그루니 백작에게 꽃말 좀 가르치라고 부탁도 따로 했었다. 그러나 결국 레오니에가 좋아하는 꽃은 장미뿐이었다. 화단에 피는 장미 말고, 근육 남자 둘이 붙어 있을 때만 피어나는 장미.

펠리오는 제 인생 최대의 적은 죽은 수비테오 황제나 올로르 따위가 아니라, 바로 레오니에란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렇기에 바리아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당신 머리 꼭대기에 있는 애를…….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럴 마음도 없었을 테고. 바리아는 그 계획이 실패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근육이 제일 좋아!”

언니에게 선물 받고 잔뜩 들뜬 벨레아니가 신명 난 곡조를 부모님 앞에서 뽑아냈다.

“불끈불끈 모여라!”

레오니에가 짧게 가르쳐 준 노래를, 똑똑한 벨레아니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불렀다.

“이두근! 삼두근!”

근육 이름을 외칠 때마다 그 부위를 손으로 콕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펠리오가 커다란 손으로 연거푸 얼굴을 쓸었다. 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폴짝폴짝 뛰는 벨레아니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하필 부르는 노래가 듣는 이의 마음을 암울하게 했다. 레오니에의 사악한 웃음마저 들리는 기분이었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벨레아니가 아직 발음이 덜 여물어 노래 가사가 뭉그러졌고, 아직 가사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해 몸만 덩실덩실 흔들 뿐이란 점이었다.

펠리오의 각오도 함께 흔들렸다.

“내가 그러게 뭐랬어요.”

딸아이 재롱에 손뼉 치며 호응하던 바리아가 조용히 판정승을 외쳤다. 승자는 지금 이곳에 없는 자신들의 장녀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펠리오는 패배의 원인을 빠르게 찾았다.

“그냥 못 이기는 거예요.”

이제 와서 새삼 그러지 말라며, 바리아가 남편의 등을 쓸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딨어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누가 레오니에에 대해 쑥덕거린다면 끔찍한 지옥을 보일 사람이 바로 펠리오였다.

“그런데.”

바리아가 말을 돌렸다.

“레오는 언제 온대요?”

이제 곧 아카데미 여름 방학이 시작될 때였다.

* * *

며칠 후.

북부 게이트에서 마차 여러 대가 통과했다.

“확실히 수도와 비교하면 북부는 날씨가 좋아요.”

게이트를 통과한 마차를 점검하는 동안, 플로무스는 뾰족뾰족한 전나무 잎들을 반갑게 구경했다. 수도에서 본 이파리 넓은 나무들도 무척 예뻤다. 알록달록 물들었던 계절 꽃도 향기로웠다. 그래도 북부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가 무척 그리웠다.

“역시 여름은 북부가 최고야.”

“레오니에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플로무스가 뒤돌았다. 그곳엔 제법 높이가 있는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채 서류를 훑느라 정신이 없는 레오니에가 있었다.

“…….”

플로무스는 그런 레오니에를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왜 그렇게 봐?”

시선을 느낀 검은 눈동자가 싱긋거렸다. 조금 전까지 골치 아프단 듯이 서류를 응시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게요.”

곁으로 다가간 플로무스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레오니에 님의 어릴 적이 떠올라서요.”

“객기만 부리던 시절을.”

뭣 하러 그런 걸 떠올리냐며 레오니에가 타박했다.

“하지만 레오니에 님이 너무 멋진걸요.”

플로무스가 수줍게 말했다.

지난 늦가을, 열일곱이 된 레오니에는 이제 마냥 귀여운 아이가 아니었다. 총명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 밤하늘보다 어둑한 검은 머리. 말을 하지 않을 때면 항상 꾹 다물린 붉은 입술. 희미한 혈색을 띠는 보드라운 피부.

거기다 볼살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한 얼굴은 보레오티 특유의 냉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누구나 아름답다고 찬양하나, 누구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지고한 위압감도 함께였다.

오만하고 건방진.

그러나 아름답고 강인한.

‘그렇게 귀여우셨는데.’

플로무스는 레오니에를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저보다도 한참 작았으면서 ‘에구, 아직 아기네.’라고 말하던 레오니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의 당혹감은 이제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둘은 종종 그때를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근데 좀 듣기 안 좋은데?”

레오니에가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엔 안 멋졌어?”

“무, 물론 멋졌어요!”

플로무스가 허둥거리며 덧붙였다. 레오니에가 킥킥 웃으며 손을 뻗어 플로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담이야.”

“너무하세요…….”

퍽 서운하단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플로무스는 레오니에의 미소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공작님을 많이 닮았어.’

레오니에는 자랄수록 펠리오를 소름 끼치게 닮아 갔다. 본인 역시 이를 알았고, 그 사실을 은근히 좋아했다.

‘…성격은 레오니에 님이 조금 더 강하실까?’

둘 다 어지간한 일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발화점은 레오니에가 조금 더 낮았다. 한 번 열 받으면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점이 특히 그랬다.

플로무스는 그 성격을 최근에 경험했었다. 물론 레오니에를 건드린 머저리는 자신이 아니었지만.

“아가씨, 마차 정비 다 했어요.”

이제 출발할 거라며, 코니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플로무스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레오니에는 코니와 기사들에 점검 보고를 받았다.

“부서진 곳은 없습니다. 말들도 무사하고요.”

“사람들은?”

레오니에는 코니가 챙겨 주는 아카데미 망토를 걸치며 물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짐도 무사합니다.”

“바퀴 확인만 한 번 더 하고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귀한 손님이 계시니, 케라타 저택에 먼저 들르도록.”

명을 마친 레오니에도 이어 마차에 올라갔다. 레오니에가 등을 돌렸음에도 다들 예를 갖췄다.

이제 레오니에는 기사들에게도 존대를 거뒀다. 언니 오빠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호칭도 치웠다. 보고를 받는 모습은 자연스러웠고. 하명하는 말투 역시 어색함이 없었다.

기사들은 그저 감개무량했다.

‘하필 성질머리도 공작님을 닮아서.’

‘공작님보다 가끔은 더하지.’

‘말도 마라. 아가씨 화난 거 못 봤냐?’

‘사람 안 죽은 게 기적이었다.’

‘난 수도 멀쩡한 게 신기했어.’

그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 * *

깨끗하게 닦은 유리창 표면에, 벨레아니가 얼굴을 찰싹 붙인 채 울상을 지었다. 달싹이는 발동작이 하염없었다.

“언니야 언제 와아?”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바리아가 창문에서 벨레아니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창문에는 벨레아니의 콧김과 입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채였다. 바리아가 피식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딸의 얼굴을 닦아 줬다. 그 손길이 귀찮았던 벨레아니가 고갯짓을 휙휙 했다.

“언니야 빨리 와아!”

벨레아니가 허공에 팔을 흔들며 칭얼거렸다.

아가는 아침부터 언니를 기다렸다. 레오니에가 수도에서 유행한다고 보내 준 옷을 입었고, 겨울에 언니가 선물해 준 하얀 방울로 머리를 묶었다.

“너도 참 기운 넘치지.”

마침 계단에서 내려온 펠리오가 벨레아니를 번쩍 안았다.

“잠깐만 참으면 올 거다.”

“언니야아아!”

기어코 벨레아니가 상체를 뒤로 발라당 넘기며 짜증을 냈다. 그러나 펠리오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익숙한 손길로 벨레아니를 고쳐 안았다. 그에게 벨레아니의 투정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고난도의 육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촐랑거리는 건 네 언니 어릴 때와 똑같구나.”

제압당해 씩씩거리던 벨레아니가 멈칫했다.

“언니야? 레아랑 같아?”

“고집스럽고 말 안 듣는 게 똑같네.”

“헤헤…….”

벨레아니가 헤벌쭉 웃었다.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닌데도 그리 좋다고 배시시 웃는 막내딸을 빤히 보던 펠리오도 덩달아 미소를 머금었다.

“레오의 어디가 그리 좋은지.”

“언니야 멋져!”

도로 바닥에 내려온 벨레아니가 바리아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바리아가 벨레아니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가만히 있으라고 타일렀다.

“아빠보다?”

펠리오가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어.”

바리아의 치마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가지고 놀던 벨레아니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푸훕!”

바리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펠리오가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아내를 바라봤다.

“그래도 언니가 멋진 건 아빠를 닮아서 그런 게 아닐까?”

바리아가 눈치껏 벨레아니에게 물었다.

“아냐.”

사과 머리가 매정하게 흔들거렸다.

“언니야가 멋져! 언니야가 최고야!”

“하지만 레오 언니는 아빠를 닮았는데?”

벨레아니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집스레 다물린 일자 입술은 바리아의 의견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자가 서려 있었다. 그런 막내딸을 빤히 보던 바리아가 남편의 팔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당신 딸 틀림없어요.”

바리아가 위로랍시고 말했다.

“그대의 딸이기도 하죠.”

펠리오가 퍽 억울하단 듯이 덧붙였다.

“…!”

그때였다.

“엄마, 아빠!”

벨레아니가 부모님의 옷자락을 양손에 쥐고 잡아당겼다. 덩달아 모두의 시선이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 향했다. 낯익은 검은 마차가 안으로 들어왔다.

“왔네요.”

“엄마, 엄마!”

“나가 볼까?”

말하기 무섭게 벨레아니가 아장아장 뛰어나갔다. 두 살배기에겐 꽤 높은 계단도 벨레아니는 뒤돌아 네 발로 내려가는 영리함을 발휘했다. 들뜬 숨소리가 색색거렸다. 곧 마차가 정원 중앙에 설치된 분수대 앞에 멈춰 섰다. 여전히 힘줘 쥐고 있는 두 주먹이 토실토실했다.

잠시 후,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마차 문을 열었다.

“레아야!”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가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벨레아니의 토실토실한 볼살이 눈 밑을 찔렀다.

“언니야!”

곧 벨레아니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순식간에 두 팔 벌려 달려온 레오니에가 어린 동생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 예쁜 아가씨는 도대체 누구람?”

“레아!”

“우리 레아가 벌써 이만큼 컸어? 너무 커서 언니가 몰라봤어.”

“레아, 많이 컸어!”

벨레아니가 턱을 치켜들며 자랑했다. 더더욱 자신을 칭찬해 달란 뜻이었다.

“요 귀염둥이!”

레오니에는 말랑말랑한 볼에 쪽쪽 입술을 맞췄다. 어떤 칭찬도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완벽하게 치하할 수 없었다.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바리아가 다가와 두 팔 가득 벌려 안아 줬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힘들지?”

“엄마 얼굴 보니 피로가 바로 풀리는데?”

“하여튼 말은 예쁘게 해. 괜히 띄워 주지 마.”

“내가 아무리 예쁘게 말해도, 그게 엄마의 미모에 견줄 바는 아니지. 그새 또 예뻐졌어.”

능청스러운 장녀는 엄마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바리아의 볼에 들뜬 열기가 붉게 올라왔다.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엄마한테 작업하지 마라.”

보다 못한 펠리오가 적당히 하라며 레오니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빠!”

벨레아니를 바닥에 내려 준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펠리오도 팔을 둘러 큰딸의 등을 토닥였다.

“나 다녀왔어!”

“오느라 고생했다.”

“엄청 고생했지!”

품에서 떨어진 레오니에가 하인들이 가져오는 짐들을 가리켰다.

“수도에서 사 온 선물들이야.”

“…다 내 돈 아니더냐.”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선물들을 보며, 펠리오가 한마디 했다.

“아빠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내 돈이지.”

그런 거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옆에서 불효녀라고 혀를 차는 잔소리쯤이야 이젠 가볍게 넘겼다.

“언니야.”

그때,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레오니에가 상냥한 미소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우리 레아, 왜 그래?”

“예쁜 아찌는?”

“그러고 보니 스칸 님은 왜 함께 안 왔니?”

분명 편지에는 스칸디아와 함께 북부에 돌아가겠다고 적혀 있었다.

“아, 그건…!”

뒤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온 코니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아, 그 새끼?”

하나 이미 늦었다.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헤어졌어.”

냉혹하게 굳어 버린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 *

“헤어지신 건 아니고…….”

레오니에가 벨레아니와 놀아 준다며 방으로 데려간 사이. 모시는 아가씨를 따라 수도에 머물렀던 코니와 미아가 집무실로 호출당했다.

“그, 출발하기 전에 일이 생겨서…….”

“이를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둘은 말을 신중히 골라 가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를 듣는 부모의 표정은 험상궂었다. 펠리오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바로 옆에 있던 바리아는 조용히 제 주먹만 노려봤다.

그러기를 잠깐.

“…그러니까.”

바리아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요는 단순했다.

“여자가, 있었다고?”

황제의 최측근으로 일하는 스칸디아는 레오니에의 방학에 맞춰 장기 휴가를 받아 함께 북부로 올라왔었다. 오늘도 레오니에는 여지껏 그랬듯이 스칸디아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스칸디아가 웬 여자와 함께 있었다.

레오니에와 똑같은 아카데미 교복을 걸친 여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둘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심지어 스칸디아의 손이 여자의 치맛자락을 향했었다.

레오니에는 그걸 다 목격했고.

“제 주제에 바람을?”

스칸 님, 우리 사위라고 살뜰히 챙겨 부르던 바리아의 다정함은 분노에 화르르 타올라 증발해 버렸다. 지금 바리아에게서 보이는 건 당장 그 자식 입에 주먹을 박아넣어 그 가지런한 치아들을 부러트리고 싶다는 폭력성뿐이었다.

“고작 살쾡이 새끼 주제에…!”

한때 재정부에 이름을 떨쳤던 맹수가 서슬 퍼런 이채를 번뜩였다.

“드디어 당신과 나의 뜻이 일치하는군요.”

펠리오가 그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드디어 제 딸 옆에 얼씬거리는 망할 놈을 치울 수 있게 되었다는 감격과는 별개로.

‘그놈이 레오를 두고?’

펠리오는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스칸디아가 이따금 레오니에에게 보이는 시커먼 감정은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마저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았는데, 그 집착을 고스란히 빼닮은 스칸디아가 변심했단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추측에는 무척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레오보다 잘난 애는 없어.’

누굴 닮았는데. 그리 생각한 펠리오는 둘에게 그 여자의 생김새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했다.

“갈색 머리에 눈은 푸른색이었어요.”

“그리고 좀 마른 근육이 잡혀 있고…….”

“확실히 얼굴은 마르셨는데, 하체가 좀 발달된?”

“승모근도 도드라졌죠.”

“전체적으론 마른 근육질이었어요.”

코니와 미아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펠리오가 상체를 고쳐 앉았다.

“…둘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사람 인적 사항을 근육으로 설명하는 거냐고 펠리오가 되물었다. 코니와 미아는 그게 왜 이상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딴에 좀 반반하게 생겼나 보네.”

그런데 바리아는 또 그걸 알아들었다. 펠리오는 착잡한 마음이었으나, 어쨌건 의사소통이 되었으면 그걸로 되었다 싶어 하녀들을 내보냈다.

“여보, 어떻게 하죠?”

바리아가 씩씩거렸다.

“왜 이렇게 침착해요? 우리 레오를 두고 바람이라잖아요.”

“일단 진정합시다.”

펠리오가 바리아의 등을 쓸어 주며 심호흡을 유도했다. 바리아는 유난히 태연한 펠리오를 원망스레 노려보면서도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죽여 버릴 거죠?”

“후작 아들을요?”

“아, 죽이는 건 레오 몫이구나.”

그럼 우린 서부를 정복해야 하나?

“정신적 피해 보상금을 서부 곡창 지대로…….”

바리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헤스페리 후작 가문의 깃발은 꺾이고, 저택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뭐요?”

“콜록!”

“그 여자가 누군데요!”

“아니, 바리아, 잠깐, 멱살은…….”

펠리오가 콜록거리며 제 멱살을 잡아 흔드는 바리아를 겨우 떨어트렸다.

‘어디서 이리 실력이 는 거지?’

막을 틈도 없이 제 목을 움켜쥐는 아내의 재빠른 솜씨는 천하의 펠리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누른 펠리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마 시녀의 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글프게도, 펠리오 역시 하녀들의 근육 묘사로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헤스페리 후작이 황후였을 때…….”

그 곁을 계속해서 수행하던 시녀가 있었는데, 그 시녀의 딸로 보인다고 펠리오가 말했다.

“후작과 그 시녀가 사촌지간입니다.”

“미친, 그럼 근친이란 말이에요?”

“여보, 그건 너무 갔습니다.”

펠리오가 퍽 당황하며 아내를 진정시켰다. 그제야 바리아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건 레오의 영향이군.’

레오니에가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지 아직 한 시간도 채 안 지났는데, 펠리오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여튼 파란만장한 장녀였다.

“근데, 리오 당신은 어떻게 알아요?”

바리아가 물었다.

“안다기보다는…….”

펠리오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세워 머리를 지탱했다.

“그 시녀의 딸이, 그놈을 대신해 황녀 흉내를 냈었죠.”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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