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육아일기
벨레아니가 태어났다.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벨레아니는 여자아이였다. 아기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누구든 벨레아니를 보면 미소를 지었고, 자신의 선한 감정만을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지만은 않았다. 이토록 순진무구한 아기의 탄생조차도 몇몇 사람들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 있지도 않은 심각성을 조성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검은 머리라지?”
“눈동자도 까맣다고 하더군요.”
“그럼 맹수의 송곳니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군요.”
“영애의 후계 자리가 위태롭겠어.”
슬프게도, 아기의 사랑스러움보다 이런 헛말 따위가 가장 먼저 제국에 널리 퍼졌다. 멋모르는 귀족들은 레오니에의 후계 자리가 위태로울지 모른다고 쑥덕거렸다. 그들이 저런 무지를 떠드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당성은 역시 적통이…….”
“안 그러면 문제가 심각하죠.”
“근본도 없는 것들이 자기도 경쟁하겠다고…….”
적법한 절차로 결혼한 바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이, 고아원에서 데려온 사생아 따위보다 정당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나 북부만은 그 헛된 소문에 휩쓸리지 않았다. 보레오티는 그런 헛소문에 어떤 의견도 표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차기 보레오티는 여전히 레오니에였기 때문이었다.
“그 치들이 아가씨를 제대로 몰라서 하는 소리지.”
파르두스 후작이 콧방귀를 꼈다.
“차기 보레오티로 그분만큼 어울리는 분이 없어.”
오랜만에 막내아들 집에 놀러 온 파르두스 후작은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물론 멋모르고 떠드는 멍청이들은 마음에 안 들지만, 제 옆에서 옹알거리는 손주 덕에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치? 치이!”
푸른 은발을 어깨까지 기른 루피가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인형을 흔들며 조금 전 후작의 말을 따라 하니, 루페가 퍽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루피 앞에서 그런 단어는 자중해 주세요.”
최근 그의 외동아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습득하는 중이었다. 파르두스 후작이 껄껄 웃었다.
“너나 며늘아기나 머리가 비상하니까. 아무래도 루피도 그걸 닮은 모양이구나.”
“비상은, 이거!”
아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루피가 늑대 인형을 쥔 손을 높이 뻗었다. 인형은 파르두스 후작의 턱에 닿았다.
“하하! 우리 루피가 비상이란 말도 알아?”
“또오, 어어, 똑똑해!”
“그것도 알아?”
벌써 동음이의어를 깨닫다니, 파르두스 후작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요, 가르쳐 줬어요.”
루피가 조그마한 몸을 부풀리며 으스댔다. 루페와 파르두스 후작의 얼굴에 미소가 자연히 그려졌다. 그렇게 재잘거리던 루피는 곧 졸음에 못 이겨 고개를 휘청거렸다.
“아부지이이…….”
루피가 잠투정을 부리자, 루페가 일어나 아이를 품에 안았다.
“우리 아기 늑대가 낮잠을 잘 시간이로군.”
파르두스 후작이 흐뭇하게 이를 지켜봤다. 때마침 유모가 나타났고, 그녀는 잠든 루피를 품에 안고 나갔다.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루페가 후작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선.”
그는 문득, 레오니에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그렇게나 작고 야위었던 아이가 어느새 모두를 위협하는 차기 보레오티가 되다니.
“그러니 이런 추문이 도는 것이고요.”
지금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정통성이니 뭐니 하는 말은, 레오니에가 어릴 적에 돌았던 악의적인 수군거림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레오니에의 출생을 빌려 펠리오를 간접적으로 공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레오니에 자체를 경계하는 바가 더 컸다. 세간엔 레오니에가 훗날 공작이 되면 지금의 펠리오보다 더 강할 거란 말이 돌고 있었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이지.”
파르두스 후작이 혀를 찼다.
“보레오티는 가장 강한 자만이 대를 잇는다.”
“그렇지요.”
“이번 보레오티는 정말 복을 타고나는구나.”
레오니에는 나날이 펠리오를 닮아 갔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성질머리는 당연했고, 뛰어난 실력과 강한 맹수의 송곳니까지.
“저대로 계속 자라신다면, 어쩌면 정말로 공작님을 넘어설지도 몰라.”
“으으…….”
루페가 앓는 소리를 냈다. 펠리오 한 명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보다 더한 존재가 된다고 하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녀석, 좋으면서 싫은 척은.”
파르두스 후작이 피식거렸다.
“강한 주인을 섬기는 건 아주 명예로운 일이다.”
“저도 잘 아는 바입니다.”
루페 역시 강자에게 충성하는 파르두스 가문의 피가 흘렀다. 그렇기에 제 주인들의 강인함에 진정한 존경과 충심을 느꼈다. 그들을 보필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을 안겨 줬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것과 그건 다릅니다.”
레오니에의 성질머리야 떡잎부터 알아봤다. 루페는 아직도 그의 인생에서 레오니에만큼 거칠고 능글맞았던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도 제 욕망을 다 드러내고 다니던 애늙은이가 펠리오를 넘어선다는 것은, 어찌 보면 괴로운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 아들 어떡해……!”
루페는 벌써 루피의 미래가 불쌍했다.
“근육만 잘 키우면 아가씨께서 귀히 여기시지 않겠느냐.”
파르두스 후작은 별일 아니란 듯이 태평했다. 오히려 그는 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루피의 얼굴도 반반하니, 몸만 잘 자라면 아가씨의 샛서방…….”
“아버지!”
“농담이다, 농담.”
후작이 껄껄 웃으며 앞말을 철회했다.
“…….”
루페는 농담이 아닌 것 같은 제 아버지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어차피 불가능합니다.”
레오니에에겐 스칸디아가 있었다.
“두 분 사이가 얼마나 돈독하신데. 그 때문에 공작님이 몇 번이고 후작 영식을 죽일 뻔했는지 아십니까?”
그런데도 펠리오가 스칸디아를 죽이지 않은 건, 이 제국에 그놈 말고는 제 딸에게 그나마 어울릴 사내새끼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공작님은 꼭 아가씨와 관련된 일에만 정신을 놓으시는군.”
“마님과 관련된 일도요.”
“작은 아가씨까지 태어났으니, 그분의 약점이 또 하나 늘었구나.”
그리 말하는 파르두스 후작의 눈동자엔 다정함이 가득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해.”
* * *
“우, 으우우.”
커다란 분홍색 덩어리가 하나.
“으으응.”
그리고 그 위에 조그마한 분홍색 덩어리가 네 개.
벨레아니는 고양이 발바닥 모양 손 싸개를 두른 제 팔을 허공에다 마구 휘적거렸다.
“크흑……!”
이를 내려다보는 레오니에는 심장을 움켜잡아야 했다. 그리고 쓰러졌다.
“난 여기서 끝이야. 내 인생은 레아 주먹으로 끝났어…….”
끝났다는 사람치고는 무척 행복한 미소였다.
“레아가 또 이겼네.”
옆에서 함께 지켜보던 바리아가 손을 뻗어 벨레아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간질간질 손짓에 벨레아니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매일 오전, 레오니에는 항상 아기방에 출근했다. 샛노란 벽지가 화사하고, 작고 폭신폭신한 물건들이 가득한 방은 벨레아니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매일 벨레아니에게 치명상을 입고 명을 달리했다. 동시에 벨레아니도 생후 70일째 연패 행진이었다.
“엄마는 거짓말쟁이야.”
기적처럼 소생한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밉지 않게 노려봤다.
“내가?”
바리아가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레아가 엄마를 닮아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아?”
“어머, 얘도 진짜!”
바리아가 주책이라며 꺄르르 웃었다.
“그런다고 뭐 나오는 것도 없는데.”
“하지만 진짜인걸.”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처음 벨레아니를 봤을 땐 펠리오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아를 닮은 모습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배냇짓을 하며 입꼬리를 올릴 때라던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라던가.
“아앙!”
그때, 벨레아니가 힘차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구어구, 우리 레아도 엄마 닮아서 좋지?”
레오니에가 요람 속 동생을 조심히 안아 올렸다. 벨레아니는 칭얼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면 진짜 모유 나올…….”
“얘가 진짜.”
바리아가 더한 말이 나오기 전에 냉큼 벨레아니를 받아 갔다.
“시집도 안 간 애가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바리아가 퍽 심각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그리고 네 아빠 앞에서 그 말 절대 하지 말고.”
말만 했는데도 바리아가 몸서리를 쳤다. 펠리오가 들었다간 다른 의미로 오해해서 아주 큰 사달이 날 수 있었다. 억측이라기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딸등신이었다.
“아빤 가끔 사람이 좀 이상한 거 같아.”
“어떤 아빠든 시집 안 간 딸이 모유 나올 거 같다고 하면 눈이 뒤집힌단다?”
“그치만 레아가 너무 귀여운걸! 내가 키우면 안 돼?”
“엄마는 또 낳을 자신 없어.”
지금이야 아련한 추억처럼 떠오르지만, 배가 부르고 산통을 겪었던 당시는 너무도 힘든 순간이었다. 그러니 딸 둘로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근데 오늘은 수업 없니?”
바리아가 벨레아니를 도로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
“지금쯤 후계 수업이 있을 텐데…….”
그런데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
바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어?”
더듬거리며 대답한 레오니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자, 자체 휴일이랄까…….”
“자체 휴일?”
“우, 우리 레아! 까꿍 놀이할까요?”
레오니에가 도망치듯 벨레아니에게 까꿍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관자놀이에 닿는 바리아의 매서운 시선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잠깐 잊고 있었네.’
바리아는 본래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거짓말과 얕은꾀를 싫어하는 옹고집이었다.
그래서 재정부에서 일할 당시에 너무 엄격하고 융통성 없이 굴어 맹수라고 불리었고, 레오니에의 가정교사였을 때도 항상 도망치던 레오니에를 잡아 와 교양을 가르치는 끈기를 보였다.
하나 그런 과거치고는 레오니에에게 어서 후계 수업을 들으러 가라는 잔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지?’
살짝 꺼림칙한 기분이 들려던 찰나였다.
“엄마가 왜 잔소리 안 하는지 알아?”
레오니에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바리아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순간 레오니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왜냐면 곧 올 거거든.”
“……누가?”
“바로 저지요.”
펠리오의 명으로 레오니에를 데리러 온 루페였다.
“열심히 하고 오렴.”
바리아는 루페에게 잡혀가는 레오니에에게 정다운 작별을 건넸다.
“엄마 짜증 나…….”
레오니에는 처음으로 바리아가 펠리오만큼 얄미웠다. 아기 맹수는 집무실로 가는 내내 엄마는 치사하다고, 공과 사를 너무 구분한다고 구시렁거렸다. 덕분에 루페는 한쪽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일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렇지 않으냐며 레오니에가 루페에게 동의를 구했다.
“루페 아저씨는 내 편이죠?”
“저는 돈의 편입니다.”
“난 아저씨의 그런 속물근성이 참 좋아요.”
집무실에 도착한 레오니에는 곧장 후계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 네가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다.”
펠리오는 자신이 직접 고른 서류 뭉치들을 레오니에의 책상 위에 올려 줬다. 어림잡아도 서류가 손 한 뼘 높이였다.
“그리고 이건 네 사업 현황들이고.”
또 다른 서류 뭉치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옆에 놓였다.
“이건 아동 학대야…….”
레오니에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아주 짜고 쉰내 나는 치즈를 먹은 노인 같았다.
“아빠는 내가 자기 친딸이 아니라고 막 부려 먹어!”
“우리 불효녀는 오늘도 망설임 없이 선을 넘는구나.”
대답하는 펠리오의 표정은 덤덤했다. 오히려 둘 사이에 낀 루페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씨, 레아 데리고 가출할 거야!”
“나랑 바리아도 같이 가출할 테니 걱정 마라.”
진심 어린 자식 사랑에 감동한 레오니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한마디를 안 져!”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부모가 자식을 왜 이겨 먹으려고 해!”
“자식이 아빠를 이기려고 하면 쓰나.”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짜증 나……!”
속에서 열불이 난 레오니에가 한참을 씩씩거렸다. 분에 겨워 콧숨만 흥흥 내뿜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너 오늘 좀 마물처럼 생겼다.”
왜 이렇게 못생겼냐.
“끼아아악!”
레오니에가 책상을 밟고 펠리오에게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루페의 경악에 찬 얼굴 위로 레오니에의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정작 펠리오는 가소롭단 듯이 몸을 휙 돌려 가뿐하게 피했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딸쯤이야 긴 팔을 쭉 뻗어 머리를 막으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마물 닮았다고 또 말했다간 다리 사이 뽑아 버리겠다고!”
“늙어 보인다고 놀리면 뽑는다고 했는데?”
“그거나 이거나!”
“레오 넌 날 닮아 얼굴은 괜찮은데 성질머리는 왜 그런지 몰라. 네 엄마도 안 그러는데.”
“아빠가 이렇게 키웠는데 누굴 원망해!”
“그래, 다 내 잘못이지.”
그러니 이 잘못을 바로잡겠다며, 펠리오가 아직도 씩씩거리는 레오니에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듯 잡았다. 그리곤 번쩍 들어 의자에 손수 앉혔다.
“놀이 시간은 이제 끝.”
“이게 지금 놀이로 보여? 난 지금 당장이라도 아빠를 암살할 수 있다고!”
“알았으니 이제 일해라.”
펠리오가 서류 뭉치 가장 위에 있던 것을 손수 책상 위에 올려 줬다.
“힘내라, 우리 딸.”
영혼 없는 응원을 끝으로, 펠리오도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놀랄 새도 없이 자리에 앉은 레오니에의 눈코입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다하면 암살 시도해도 돼?”
레오니에가 물었다. 펠리오는 듣는 척도 안 했다.
살벌했던 부녀 싸움은 이렇게 끝났다.
‘……저럴 거면 왜 싸우는 거지?’
루페는 이해가 안 갔다. 두 부녀의 싸움을 관전한 지가 벌써 7년째였다. 그리고 여전히 저 싸움의 의의를 찾지 못했다. 하나 그걸 물을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집무실은 빠르게 평화를 되찾았다.
햇살이 조용히 내리쬐는 집무실에 들리는 거라곤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 사각사각 만년필 움직이는 소리뿐이었다.
“……오오, 내 사업이 잘 돌아가는군.”
레오니에가 수도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이 난 어깨가 절로 들썩거렸다.
“저, 아가씨.”
눈치를 살피던 루페가 슬쩍 말을 걸었다.
“이번에 또 브랜드를 내셨다고 들었는데…….”
“어머, 고객님.”
레오니에가 호호 웃었다.
“아주 그냥 정보통이시네. 내가 우리 루페 아찌 엄청 챙기는 거 알죠?”
레오니에의 손목시계 사업은 구매 대상층에 따라 세 브랜드로 나누어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브랜드마다 차별화된 전략을 보였다.
일반 평민에겐 약간의 오작동이 생길 순 있어도 적정 가격선에서 구매할 수 있는 중저가형.
돈 좀 만지는 전문직이나 상인들에겐 고급스러우면서도 내구성이 튼실한 고급형.
마지막은 오로지 한정 수량만을 예약 판매하는 최고급형.
이번에 레오니에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건 이 세 가지 중 최고급형에서 발매할 새로운 시계 모델이었다.
‘돈은 있는 놈들한테서 빼 와야 하거든.’
예를 들면 루페 같은.
루페는 레오니에에게 손목시계를 선물 받은 후로 충성스러운 고객이 되었다. 시계 수집은 자본의 노예라 자칭하는 루페의 몇 안 되는 소비이자 취미였다.
“이번에도 예약을 받으실 건가요?”
루페가 당장이라도 돈을 쥐여 줄 각오로 물었다.
“예약을 받긴 받을 건데.”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난 이번에 이 시계를 딱 일곱 개만 만들 예정이거든요.”
“그렇게 적게요?”
“그리고 예약도 이미 꽉 찼다고 말할 거예요.”
이번 신상품은 예약 판매를 하되, 예약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일곱 개는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주인들이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여섯 개는 누구에게 갈 건지 궁금하군.”
잠자코 듣고 있던 펠리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이미 한정판 중 하나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레오니에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펠리오의 확신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예약을 왜 받으시려고요…….”
루페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은 구매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의욕을 상실했다.
“그래야 몸값이 오르잖아요.”
받지도 않을 예약은 오로지 시계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받지도 않을 예약임에도 조건을 붙였다.
“이번 한정판을 예약하려면, 반드시 우리 브랜드에서 시계를 구매하였다는 이력을 제출해야 해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시계를, 과연 너희는 가질 자격을 갖추었는가. 오만스럽기까지 한 최고급형 브랜드의 전략은 자존심 높은 귀족들의 허세와 소유욕을 제대로 자극했다.
“루페 아저씨.”
레오니에가 풀 죽은 루페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줬다.
“내가 우리 호구 아니, 고객님을 잊었겠어요?”
“서, 설마……!”
“왜 그 여섯 개 중에 아저씨 건 없다고 생각한담.”
좀 서운하려고 하네.
레오니에의 말에 루페의 눈이 점점 커져 갔다.
“……세상에, 신이시여!”
잔뜩 흥분한 루페가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으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한참 기뻐한 뒤에야, 루페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
“…….”
나잇값 못하고 방방 뛰던 루페를,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해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대단하잖습니까.”
그 시선을 느꼈음에도, 루페는 여전히 진정할 수 없었다.
“설마 시계 사업이 이렇게까지 번창하다니요.”
“그건 나도 동감이군.”
펠리오도 같은 의견이었다.
“중간에 한 번 무너질 뻔했으니까.”
“그 정돈 아니었어.”
레오니에가 바로 반박했다. 하나 시계 사업은 실제로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심각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장 크기가 작은 회중시계에 팔찌 형태로 가죽끈을 연결했다. 발상은 신선했으나, 아무리 작은 회중시계라도 손목에 장시간 착용하기엔 부담이 있었다.
문제에 직면한 레오니에는 파보의 남동생인 보파를 비롯해, 그의 아카데미 동기 중 실력 있는 자들을 전부 고용해 북부로 데려왔다. 그리고 시계 부품 소형화 개발에 참여시켰다.
원래도 조그마한 시계 부품을 더욱 축소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길고 험난했다.
수많은 좌절을 겪고,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뒤에야 가까스로 부품 축소화에 성공했다. 여기에 더해, 일정한 힘을 가하면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수정을 이용하여 시간 오차를 더욱 줄이는 기술까지 개발했다.
그 덕에 현 시계 사업은 북부가, 더욱 정확히는 레오니에가 손에 쥐고 주도하는 중이었다.
“어릴 적부터 발상 하나는 남달랐지.”
별일 아닌 듯 말하는 펠리오의 목소리엔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으응, 좋으면서 아닌 척은.”
이를 알아챈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아빠는 정말 솔직하지 못해!”
“조금만 방심해도 기어오르는 누구 덕분이지.”
“내가 원래 등반이 취미잖아.”
세상의 모든 것이 제 발밑이라며 레오니에가 으스댔다.
“노는 건 이제 끝.”
펠리오가 산만한 집무실 분위기를 도로 환기했다.
“……아빠도 실컷 떠들어 놓곤.”
레오니에가 구시렁거리면서도 순순히 일에 집중했다. 다시 사각사각 펜 소리와 종이가 팔랑팔랑 넘겨지는 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조용하니 재미없는데?”
레오니에가 말했다.
“누가 노래라도 좀 불러 봐요.”
“너 계속 떠들면 레아 못 보게 한다?”
“자식 가지고 협박하지 마!”
하지만 꽤나 잘 들어 먹힌 협박이라서, 레오니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다시 일에 집중했다.
* * *
레오니에는 열네 살이 되었다.
처음 저택에 왔던 메마른 일곱 살 고아는 이제 제 또래보다 우월한 체격을 지녔다. 보레오티 특유의 검은색을 품은 외모는 아름답다 못해 오만했으며,
다방면으로 보여 주는 그녀의 재능은 말 그대로 신의 선물이었다. 하물며 역대 최강의 보레오티라 불리는 펠리오마저 뛰어넘을 후계자라고 수군거리기까지 하니, 레오니에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져 갔다.
그런 만큼, 레오니에의 일거수일투족은 제국의 커다란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 하나가 내년에 입학하는 아카데미였다.
신문에서까지 레오니에가 내년에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동시에 올해 아카데미 입학 신청률이 높아질 거란 추측도 따라왔다.
정작 당사자인 레오니에는 아카데미 입학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입학은커녕 졸업시험마저 어릴 적에 아르데아에게 배웠었고, 도리어 지금은 학술원 논문을 읽으며 코를 파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입학 시 제출해야 할 서류 준비는 펠리오가 루페에게 시켰다.
고로, 레오니에에게 아카데미 입학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후계 수업이었다.
“하여튼 더럽게 공부시켜요.”
그날, 레오니에는 아주 조금 삐딱한 마음으로 집무실 서재에 들어갔다.
“뭐 봐주는 게 없담.”
펠리오의 후계 수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공작의 업무를 대행하는 실무, 다른 하나는 펠리오가 직접 가르치는 강의였다. 책 한 권 읽는 게 전부였던 어릴 적과 비교하면, 후계 수업의 난도는 무척 높아졌다. 가끔은 저 아빠가 그간 자신이 저지른 불효를 앙갚음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았다.
어제 실무를 했기에 오늘은 펠리오가 직접 가르치는 날이었고, 레오니에는 영지 간 불화를 중계하는 방법에 대해 나름의 고찰을 제시했다.
‘보레오티의 명성과 위엄으로 강제 화해를 시키는 게 가장 효율적인데?’
요컨대 힘으로 제압하자. 레오니에는 그리 답했고.
‘사실상 정답이지.’
그러나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선 안타까운 답이라며, 펠리오는 중계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와 그렇기에 제안할 수 있는 중계 방안을 숙제로 냈다.
“어차피 후계는 나인데, 그냥 곱게 물려주면 서로한테 좋을 거 아니야.”
레오니에는 숙제보다 암살이 빠를지 모른단 생각을 퍽 진지하게 했었다.
“오후에 레아랑 놀려고 했는데!”
눈앞에 아른거리는 어린 동생을 떠올리며, 레오니에가 한참을 씩씩거렸다.
“두고 봐라, 나중에 아빠 늙으면 저택 밖으로 쫓아낼 거야.”
“다 들린다, 불효녀.”
그리고 서재 밖 집무실에서 장녀의 투정을 묵묵히 들어주던 펠리오가 기어코 한소리 했다.
“들리면 좀 작작 해!”
레오니에가 지지 않고 외쳤다.
“나 오늘 레아랑 놀아 주기로 했단 말이야! 레아가 언니 없으면 얼마나 슬퍼하는데!”
“레아는 이제 생후 71일 차라 그런 걸 느낄 나이가 아니야.”
어디서 말도 못 하는 동생을 핑곗거리로 삼는 건지. 일전에는 바리아가 산후우울증을 겪지 않게 자신이 함께 있어야 한다던 핑계보다 더했다.
“웃기고 있네. 언제는 레아가 아빠 얼굴만 보면 방끗 웃는다고 주접을 떨더만.”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아이는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아빠는 나 숙제할 때 엄마랑 레아 옆에 있잖아.”
“레오 넌 이미 오전에 같이 있었잖아.”
“아빠는 대신 밤에 같이 있으면서.”
“그땐 다 자잖아.”
“뻥 치고 있네! 아빠는 그때 엄마랑…….”
불효녀가 불효를 채 말하기도 전에, 기어코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불효녀가 말이 참 많다, 응?”
“아야! 아야야!”
“나 너한테 손도 안 댔다.”
“내가 내뱉으려던 말을 무시하고 끊었어! 그래서 내 마음이 아파!”
“……그거참 아프겠구나.”
티격태격 오가는 말다툼은 쉴 새 없어 쏟아졌고.
‘오늘도 평화롭구나.’
이제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루페가 관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제 할 일에 묵묵히 집중했다. 오히려 저 부녀의 말다툼이 한 번이라도 없으면, 그건 보레오티에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건 도대체 누굴 닮아 뒷말이 많은지 몰라.”
다시 자리로 돌아온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하여튼 저 맹랑한 것은 어릴 적부터 지는 법을 몰라 잘도 앙앙 짖었다.
“엄마는 안 그러니 딱 봐도 아빠지.”
“난 뒷말 안 해.”
깔끔하게 치워 버릴 뿐이지, 색다른 청소가 특기인 펠리오가 덤덤히 대꾸했다.
“흥, 아빠만 잘났지.”
실컷 내지르고 속이 후련해진 레오니에가 서재에서 필요한 책들을 뽑았다. 후딱 숙제를 끝내고 레아랑 노는 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응?”
그렇게 서재를 나가려던 레오니에의 눈에 낯선 책들이 보였다.
“아빠!”
“또 왜.”
“아빠 책 샀어?”
“루페한테 물어봐.”
그런 잡다한 건 전부 루페의 소관이라는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멈췄던 업무를 다시 보았다.
‘돈만 아니면……!’
루페는 눈물을 삼키며 서재로 향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루페 아저씨.”
마침 잘 왔다며 루페를 반긴 레오니에가 책장 어느 구석을 가리켰다.
“어?”
루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오니에가 궁금해한 책들은, 바로 몇 달 전에 루페도 똑같이 궁금해했던 장서들이었다.
* * *
‘……이게 뭐지?’
필요한 자료를 찾으려 집무실 서재에 들어갔더니, 웬 낯선 책들이 장서처럼 꽂혀 있었다.
‘이런 게 있었나?’
집무실 서재는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물론 그 크기는 저택에 따로 있는 커다란 서재와 비교해서 작을 뿐이지, 규모는 제법 되었다. 어쨌거나 그 집무실 서재에는 영지 운영과 보레오티 가문과 관련된 기록으로 가득했다.
희귀성과 내용의 중요성을 따진다면 보레오티 저택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였고, 그 때문에 서재에는 출입하는 사람을 감시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보레오티 공작과 그가 허락한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고, 루페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루페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재에 어떤 책들이 있고 어디에 있는지 전부 외우고 있지만, 보레오티와 관련된 서적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책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원래 비어 있던 책장이었는데…….’
분명 수도에서 북부로 돌아올 적만 해도 이곳은 비어 있었다.
‘공작님이 넣어 두신 건가?’
펠리오는 종종 이곳 서재에 업무와 관련 없는 것들을 보관하곤 했다. 예를 들면 레오니에에게서 압수한 근육 크로키 북이나, 그의 딸에게서 압수한 동성애를 주제로 한 소설이라던가, 후계자에게서 압수한 쫄쫄이 훈련복이라든가.
‘……다 아가씨 물건이네.’
루페가 혀를 내둘렀다.
‘그럼 이것도 아가씨 것인가.’
그리 생각을 결론지은 루페는 필요한 책들을 다시 찾아 서재를 나섰다.
* * *
“저는 아가씨의 물건인 줄 알았습니다. 공작님께 압수당한 남성 동성애 소설 아니었습니까?”
“그건 내가 레아 요람 밑에 숨겨 뒀는데?”
“레오 넌 나중에 그거 압수다.”
어느새 나타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엄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이씨…….”
말실수로 금단의 오아시스를 빼앗긴 레오니에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스칸은, 나의 뿜뿜이는 내가 그런 거 읽어도 대단하다고 칭찬하는데!”
아이는 서부에 있는 저의 연인을 떠올렸다.
“그게 진짜 칭찬이겠냐.”
펠리오는 처음으로 스칸디아를 동정했다. 딱 봐도 그런 엄한 것을 대낮에 떡하니 읽고 있는 레오니에의 작태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게 분명했다.
“진짜거든!”
레오니에가 씩씩거렸다.
“스칸도 그거 같이 읽었어.”
“네가 억지로 읽혔겠지.”
“헤헤! 스칸이 서부에 갈 때 그거 몇 권 사 갔거든?”
펠리오와 루페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진짜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야! 뿜뿜이가 그거 후작 태교에 도움이 될 거 같다고 선물로 샀어. 아빠 몰랐지?”
“서부에 큰 민폐를…….”
“지금이라도 사죄의 편지를……!”
펠리오는 이마를 짚었고, 루페는 보레오티 저택에서 가장 값비싸고 질 좋은 편지지를 찾았다.
그런 두 남자를 으르렁거리며 노려보던 레오니에는 다시 정체 모를 장서로 눈을 돌렸다.
“근데 이건 뭐야?”
서재에 꽂힌 책들은 대부분 낡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특히 도서 대부분이 역대 보레오티 공작들이 기록한 수기들이라 더했다. 그나마 가장 깨끗한 것도 펠리오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낯선 새 장서들은 분명.
“……아빠가 썼어?”
레오니에가 물었다. 편지지를 찾던 루페도 펠리오를 바라봤다.
“그래.”
순순히 인정한 펠리오가 그중 한 권을 빼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의 손길이 퍽 조심스러웠다.
“보레오티의 중요한 역사가 될 거다.”
그렇게 말하는 펠리오의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고단함과 피곤, 그리움이 적절히 섞인 것이 낯설었다.
레오니에와 루페가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무언의 시선을 몇 번 주고받은 뒤, 루페가 펠리오에게 물었다.
“언제 쓰셨습니까?”
루페는 펠리오가 이런 걸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새 장서의 존재가 꽤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 분량이면 아무리 봐도 몇 년 동안 매일 꾸준히 써야 할 양이었다.
“와아, 그럼 아빠가 작가야?”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펠리오는 입가를 가볍게 비틀며 피식 웃었다.
“그냥 수기야.”
심드렁한 대답치고는 퍽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펠리오는 여전히 딸의 칭찬에 약했다.
“……잠깐.”
장서를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던 레오니에가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서재에 새로운 책이 생겼다는 건, 레오니에가 읽고 공부해야 하는 책도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좋은 게 아니잖아!”
레오니에가 징징거렸다. 아까 펠리오가 보레오티의 중요한 역사를 적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카데미 수석 졸업을 거머쥔 실력이니, 책의 내용이나 수준이 평범치 않을 게 분명했다.
“공부가 또 늘었……!”
“지금 당장 안 읽어도 돼.”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적잖게 놀랐다.
“…….”
아이의 머리에 올린 그의 손 높이가 가슴 위를 웃돌고 있었다. 제 다리 언저리에서 재잘재잘 떠들던 맹랑한 꼬마가 어느새 저와 비슷한 눈높이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저보다 여전히 작고 약하지만.
“나중에 읽어.”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머리를 이어 쓰다듬었다. 그는 아직 젊으나, 적어도 아이를 다독이거나 어루만질 때의 조심스러운 손짓은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그 흐름의 무게는 온전히 레오니에와 함께한 세월 그 자체였다.
“나중에 내가 죽거든 읽어.”
그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서재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은 레오니에와 루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보레오티의 주된 사망 원인은 자연사였다.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는 일반인들보다 신체가 건강해, 어지간한 병은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 덕에 대부분의 보레오티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무병장수를 누리고 갔다.
물론 다 그렇진 않았다.
사고사로 죽은 선대 보레오티 공작 부부나, 살해당한 레지나가 있으니 마냥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쨌건.’
서재에서 정체불명의 장서를 발견한 그 날 밤.
‘아빠가 당장 죽는 건 아니고.’
레오니에는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펠리오가 서재에서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보레오티의 중요한 역사를 적었다면서, 정작 읽는 건 나중에 자신이 죽은 뒤에 읽으라고 말하다니. 아이는 뒷맛이 찝찝해서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괜히 그런 소리를 해서…….’
레오니에가 인상을 썼다. 부모의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식에게 불편한 주제다. 농담으로야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암살할 거라는 둥 시답잖은 소리를 했었지만, 진심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했던 말이 불편했다.
‘나중에 내가 죽거든 읽어.’
펠리오는 진짜로 자신의 죽음을 조건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짜증 나.”
결국 생각하다가 지친 레오니에가 몸을 뒤척이다 죄 없는 이불만 발로 퍽퍽 찼다. 애먼 분풀이를 당한 이불은 허공에서 펄럭거렸다. 하지만 고작 그런 얄팍한 발짓 따위로 레오니에의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뒤척이다 밤을 새운 레오니에는 퀭한 눈으로 아침 해를 바라봤다.
“세상에나!”
세숫물을 가져온 코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못 주무셨어요?”
“잠이 안 와서…….”
입이 찢어질 만큼 하품한 레오니에가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코니가 이를 조심히 말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편찮으세요?”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주인님과 마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레아가 날 보고 울까?”
레오니에가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답니다.”
코니가 야무진 손길로 레오니에의 머리를 빗질하며 말했다.
“우선, 작은 아가씨는 생후 두 달밖에 안 되셨답니다.”
“생후 72일!”
“……72일 차시니, 그런 것을 아직 인지하시지 못해요.”
“그러니 더욱 예쁘고 멋진 것만 보여 줘야 해!”
거울 속에 비친 레오니에가 힘차게 외쳤다. 우렁찬 외침에 따라 길게 자란 검은 머리가 흔들거렸다.
“우리 레아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우니까,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멋진 것만 봐야 해!”
아빠 근육이라던가, 엄마 얼굴이라던가.
“그리고 나의 멋짐!”
“아가씨는 충분히 멋지답니다.”
레오니에가 고른 분홍색 리본으로 머리를 묶으며, 코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어리시구나.’
코니의 입가엔 다정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코니에게 레오니에는 여전히 작고 어린 꼬마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호들갑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좋았다.
“아가씨는 어떤 모습이건 근사하고 멋지시답니다.”
“정말?”
“최고의 보레오티시니까요.”
동그랗게 뜬 검은 눈이 이내 둥근 호선을 그렸다.
“역시 코니가 제일 좋아!”
“미아보다 제가 더 낫지요?”
“지금은 코니가 더 좋아.”
“아가씨 정말 너무하세요!”
마침 레오니에가 입을 옷을 챙겨 온 미아가 서운한 표정을 지은 채 투덜거렸다. 작은 소동과 함께한 아침 단장을 마친 레오니에는 곧장 아기방으로 갔다.
벨레아니가 지내는 아기방은 레오니에의 침실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는 동생과 가까이서 지내고 싶다는 레오니에의 강렬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펠리오는 이를 순순히 허락해 줬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여기에 펠리오의 속셈이 숨어 있단 걸 알고 있었다.
‘딱 봐도 뻔해.’
레오니에가 입가를 삐죽였다.
‘그렇게 운동을 하는데…….’
원래는 바리아나 펠리오의 침실 중 한 곳과 가까운 곳에 아기방을 꾸미려고 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두 사람의 뜨거운 침대 운동 때문에 그 방에서 지낼 유모가 고생할 게 뻔했다. 자칫하다간 벨레아니도 잠을 설칠 수 있었다.
‘이기적이고 못된 아빠.’
특히 어제 제 머리를 괜히 복잡하게 만든 펠리오의 말 때문에 더욱 미웠다.
아기방에 들어간 레오니에는 바로 요람으로 향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좋은 아침, 유모.”
이번에 새로 고용한 유모는 조금 마른 인상이 눈에 띄는 중년의 여자였다. 일찍이 두 자녀를 키우고 독립시킨 경력을 지닌 그녀는 벨레아니를 아주 능숙한 솜씨로 돌보았다. 덕분에 바리아가 크게 안심한다며 유모를 신뢰했다.
“작은 아가씨를 보러 오셨나요?”
“내 하루의 시작은 레아의 옹알옹알 인사로 시작되지.”
레오니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주인님도 다녀가셨는데.”
펠리오도 그러했고.
“엄마는 아직 자지?”
“곧 마님께 작은 아가씨를 모셔가려고요. 밥 드실 시간이거든요.”
바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 모두 벨레아니를 먼저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몸도 채 가누지 못하는 아기는 그만큼 보레오티 가족에게 중요한 존재였다.
“우리 레아.”
레오니에가 싱긋 웃으며 요람 속을 내려다봤다.
“우우.”
자그마한 입술에서 힘찬 옹알이가 튀어나왔다. 졸음이 완전히 깬 벨레아니는 손 싸개로 감싼 손을 흔들며 레오니에와 눈을 마주쳤다.
“아고 예뻐, 아고 예뻐!”
이를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표정이 흐물흐물 녹았다.
“언니가 왔어요, 차기 공작님이 어린 동생님을 보러 직접 왔어요.”
“품에 안겨 드릴까요?”
“괜찮아, 나도 이제 잘 안아.”
요람 속 벨레아니를 조심히 안아 드는 레오니에의 손동작이 무척이나 능숙했다.
처음에는 갓 태어난 벨레아니를 안는 것도 무서워 달달 떨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안아야 벨레아니가 편안한지 잘 알았다.
“으응, 으우우!”
벨레아니가 투레질을 하며 꼬물거렸다.
“…….”
이를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검은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유모.”
“네, 아가씨.”
“나 지금이라면 엄마를 대신해서 모유가…….”
“서둘러 마님께 다녀오겠습니다.”
유모가 냉큼 벨레아니를 품에서 빼내었다. 레오니에가 입술을 샐쭉거렸다.
* * *
“진짜 나올 것 같았는데.”
레오니에가 심통 난 표정으로 바리아에게 조금 전 일을 투덜거렸다.
“너는 또.”
바리아가 쓰게 웃으며 제 품을 응시했다. 품에 안긴 벨레아니가 열심히 젖을 빨고 있었다. 식성이 좋은 탓에 빠는 힘도 어마어마했다. 가끔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아프기도 했다.
“아프지?”
그리고 이를 눈치챈 레오니에가 걱정했다. 벨레아니는 보레오티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 이따금 보여 주는 꼬물거림이나 젖 먹는 힘, 손아귀 악력만 봐도 생후 2개월의 수준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아빠는 왜 젖이 안 나오는 거람.”
레오니에의 엄마 걱정은 자리에 없는 아빠에게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좀 억울하네. 애 낳는 고생은 엄마들이 다 겪는데, 하다못해 젖이라도 아빠한테서 나와야 하는 거 아냐?”
“…….”
바리아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상상은 가는데, 해 보니 꽤 괜찮았는데, 그걸 동의했다가는 레오니에가 더욱 흥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의 가슴은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지켜줘야 할 건 지켜줘야 했다.
“푸우.”
식사를 다 마친 벨레아니가 입을 오물거렸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모가 아기를 안아 트림을 시켰다. 바리아는 옷을 추스르며 하품을 작게 했다.
“그럼 저는 아가씨를 방에 모셔가겠습니다.”
“부탁하네.”
“힝, 레아 잘 가…….”
레오니에가 유모와 함께 떠나는 동생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벨레아니는 그런 언니의 마음도 모르는 채 손 싸개를 두른 제 손만 구경하느라 바빴다. 벨레아니가 떠나는 걸 지켜본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어깨를 주물러 줬다.
“어휴, 시원해라.”
바리아의 표정이 사르르 녹았다. 레오니에의 안마 솜씨는 저택 내에서도 정말 유명했다. 근육이 뭉친 곳을 찾아 적절한 힘으로 눌러 풀어 주는데, 그걸 한 번 맛보면 도통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응?”
열심히 안마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살이 좀 빠졌나?”
뒤에서 보니 전체적으로 미약하게나마 선이 가늘어진 기분이었다.
“정말?”
고개를 뒤로 돌린 바리아의 표정이 화사하게 빛났다.
“다행이다, 최근에 운동을 다시 하고 있거든.”
바리아는 임신과 출산으로 찐 살을 뺄 겸, 임신으로 포기했던 근육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복직근을 도드라지게 만들 거야!”
순진하기 그지없는 초록색 눈망울에 불굴의 의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임신 전에 근육의 미학을 깨우친 바리아는 틈틈이 근력 운동을 했었다. 그 덕에 배에 가느다란 세로선 두 개까지 만들어 내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임신으로 이를 잠시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이제는 아이도 낳았으니, 몸을 챙기며 다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자세야!”
레오니에가 진심으로 엄마의 근육 덕질을 응원했다.
“근데 아빠는 뭐래?”
그러다 문득 펠리오의 의견이 궁금해졌다.
레오니에가 보기엔, 펠리오는 바리아의 보드랍고 폭신한 살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바리아의 배와 팔을 조물거리다가 레오니에에게 들켜 싸늘한 눈빛을 받은 적도 있었다.
‘변태라니까, 하여튼.’
그렇게 펠리오를 가볍게 욕한 레오니에가 한 번 더 물었다.
“엄마 살에 아주 푹 빠졌더만.”
레오니에는 딱히 큰 의미 없이 물었다. 말 그대로 펠리오는 바리아의 살을 조물거리는 데 재미가 들렸으니까.
“어…….”
하지만 바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건…….”
말을 머뭇거리며 이불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는 바리아는 조금 전까지 근육에 의지를 불태우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아니야.”
레오니에가 질문을 바로 철회했다.
“참, 엄마 그거 알아?”
레오니에는 대화 주제를 돌릴 겸 집무실 서재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에 아빠가 쓴 책이 있거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지만, 레오니에는 대답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곳 서재에 주로 드나드는 사람은 펠리오와 레오니에, 루페뿐이었다. 바리아도 이따금 드나들지만 하는 일이 완전히 달라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아빠가 그걸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읽으라는 거야.”
이왕 물어보는 거, 어제 자신의 마음을 찝찝하게 했던 펠리오의 조건도 일러바쳤다.
“아아, 혹시 그 장서 여러 권?”
그런데 바리아는 그 책을 알고 있었다.
“갈색 가죽에 금박 무늬가 그려진 거 맞지?”
“엄마 알아?”
“당연히 알지! 아빠가 읽어 보라고 먼저 보여 줬는걸?”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입을 채 다물기도 전에, 그보다 더 놀라운 대답을 바리아가 이어 말했다.
“그거 펠리오가 레오 널 기르면서 쓴 육아일기야.”
* * *
“망할 아빠!”
장서의 정체를 알고만 레오니에가 거친 인사와 함께 집무실에 들어섰다.
“으아아악!”
깜짝 놀란 루페가 몸을 움찔거렸다. 손에 들고 있던 책들이 와르르 바닥에 쏟아지면서 그의 발등을 찍었고, 덕분에 루페는 그대로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네 엄마가 그새 일렀군.”
반면 펠리오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미없게 말이지.”
“아빠 혼자 재미 찾아?”
정작 서재 속 장서의 정체를 알게 된 레오니에는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뭐가 또 불만이야.”
펠리오는 그런 딸의 반응이 퍽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불만이 아니라.”
레오니에가 말하려다가 잠시 멈칫하곤, 이내 루페에게 물었다.
“루페 아저씨는 울 아빠가 내 육아일기 썼던 거 알고 있었어요?”
“예에?”
루페는 조금 전 레오니에가 문을 쾅 열고 나타난 것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껏 레오니에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 때문에 레오니에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잠시 까먹었다.
“그런 걸 쓰셨습니까?”
다행히 잠시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린 레오니에를 대신해, 루페가 이 황망한 사실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물었다.
“그럼 남이 썼을까.”
펠리오는 꺼릴 것 없이 답했다.
“그리고 ‘그런’ 거라니.”
오히려 살짝 화가 난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루페가 펠리오가 쓴 육아일기를 그만 실수로 ‘그런 것’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실수를 깨달은 루페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언제부터 썼어?”
다행히 레오니에가 먼저 나서 대화 주제를 돌렸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루페는 마음속으로 레오니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펠리오도 딱히 그 이상 루페를 물고 넘어지지 않았다.
“너 데려오고 얼마 안 있어서.”
“그렇게 오래?”
당황한 레오니에는 제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연차를 계산했다. 자신이 일곱 살 때 펠리오를 만나 저택에 왔고, 올가을에 열다섯이 된다.
“와아…….”
같이 연차를 따진 루페가 먼저 감탄했다. 펠리오는 무려 칠 년 하고 반년 동안 레오니에의 육아를 기록해 온 것이었다. 그의 육아일기 집필은 생각보다 기나긴 역사였다.
“아빠…….”
레오니에가 울먹거렸다.
“날 그렇게 소중히 생각했어?”
“난 네가 그거 물어볼 때마다 기가 막히더라.”
정작 일기를 쓰신 당사자는 태연자약했다.
“에잉, 내가 아빠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면서.”
레오니에가 후다닥 펠리오가 앉은 의자 뒤로 다가가 조금 전에 바리아에게 해 줬던 안마를 똑같이 해 주었다. 펠리오는 전신이 근육이라 주무르는 맛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효심을 발휘해 제 욕심을 꾹 참고 결린 부분만 찾아 주물렀다.
“나도 몰랐다.”
그리 대답하는 펠리오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손맛 좋은 레오니에의 안마 덕이었다. 어쨌건 펠리오 그 자신도 육아일기를 저토록 길게 쓸 줄 몰랐다.
시작은 아주 하찮았다.
“처음엔 네가 너무 작은 거야.”
열심히 안마하던 장녀의 손이 멈칫했다.
“한데 쥐똥만 한 게 입은 술 취한 영감보다 걸쭉했지.”
“호호, 아빠는 표현도 참……!”
내 허파를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하시네.
펠리오의 어깨를 쥔 레오니에의 손에 힘이 빠직 들어갔다. 다행히 뭉친 곳을 쥔 탓에 펠리오는 아픔보다 개운한 시원함을 느꼈다.
‘나만 그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떨어진 책을 도로 줍던 루페가 공감의 한숨을 흘렸다.
“그래서 짧게 기록만 하려고 한 게 다야.”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니에가 보레오티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방계 출신이었던 레지나의 자식이니, 펠리오는 아이의 성장을 기록해 맹수의 송곳니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다.
“…….”
하지만 그런 이유로 쓴 육아일기가 이토록 길게 이어질 줄은 펠리오조차 몰랐다. 심지어 그는 아직도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가 지금껏 쓴 일기들을 서재에 옮겨 둔 건, 오로지 서랍에 넣어 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젠 레오니에만이 아니라 벨레아니의 육아일기도 써야 했으니까.
“그럼 내가 읽어도 되는 거 아냐?”
사실을 알게 된 레오니에는 더욱 펠리오의 조건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 내용도 아니겠구만.”
하지만 펠리오는 그 말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레오니에는 아직도 서재에 있는 저의 육아일기를 읽지 못했다.
* * *
서재에 있던 장서들의 정체는 알았지만, 레오니에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욱 호기심에 불이 붙고 말았다.
“나에 대해 무슨 일기를 쓴 걸까?”
부모님의 허락하에 벨레아니를 제 방에 데리고 온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아우우, 으으!”
그리고 벨레아니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옹알이를 쉴 새 없이 내뱉었다. 레오니에는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인중을 축 내렸다. 그러자 벨레아니도 따라 웃었다.
레오니에는 도대체 이 귀여운 생명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부모님의 운동 덕에 생겨난 걸 알지만, 그래도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 응축하면 그게 바로 벨레아니가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보레오티 가문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 만인에게도 응당 그런 감탄을 받으며 자라야 했다.
여동생을 보며 행복을 만끽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육아로 쓸 게 있나?”
딸랑이 인형을 흔들며 생각했다.
“우우.”
벨레아니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움직이거나 팔을 흔들었다. 옹알이는 점점 많아졌다.
“언니는 아주 얌전하고 조숙했단다?”
양심 없는 장녀가 동생에게 속삭였다.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자신은 아주 키우기 쉬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정신연령이 높잖아.’
말 통하지, 눈치 좋지, 지적 수준 맞지, 자기 할 일은 알아서 스스로 척척 해내지. 어지간한 꼬맹이들과는 차원부터 달랐다. 레오니에는 자신의 장점을 떠올릴 때마다 손가락도 하나씩 접었다. 이제 벨레아니는 제 언니의 손가락에 팔을 뻗으며 꺄르륵 웃었다.
‘유일한 단점이라곤 내 취향이군.’
다행히 아기 맹수는 제 취향의 문제점을 잘 알았다.
“으우!”
레오니에가 고민하는 찰나, 벨레아니가 딸랑이 인형을 붙잡았다. 하지만 아직 손에 힘이 없어서 인형이 아기의 얼굴에 떨어졌다.
“아고고.”
서둘러 인형을 치우니, 벨레아니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다행히 작고 가벼운 것이라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았다.
“우리 레아 놀랐어?”
레오니에는 혹여 동생이 울까 봐 어둥어둥 달랬다.
“으으응.”
다행히 벨레아니는 짧게 칭얼거리는 것으로 불만을 끝냈다. 보레오티의 피를 이어받은 맹수 새끼답게 어지간한 것으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
그런 동생을 빤히 바라보던 레오니에 중얼거렸다.
“한번 볼까?”
레오니에는 제 방 서랍 어딘가에 처박아 둔 얇은 철사를 떠올렸다.
* * *
그리고 그날 밤.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라.”
“좋은 꿈 꾸고.”
“아우우.”
레오니에는 피곤하단 이유로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펠리오와 바리아의 볼에 입을 맞추고, 벨레아니의 숱 적은 머리 위에 입을 맞추며 밤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 연기였다.
‘오랜만에 또 재능을 낭비했군.’
코니와 미아마저 속인 레오니에는 침대 위에서 동글동글한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문밖에서 들리던 하녀들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가장 폭신폭신하고 소리가 나지 않는 실내화를 신고, 밤에 걸치는 가운도 끈을 허리에 칭칭 감아 천이 스치지 않도록 했다. 방해되는 긴 머리는 높이 올려 묶고, 스칸디아가 선물해 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뿜뿜아.’
그리고 방문을 나서기 전.
레오니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창가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했다.
‘성스러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줘.’
허락하지 않아도 훔쳐 읽으러 갈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구색이라는 건 아주 중요했기에 자신의 연인에게 저의 죄 아닌 죄를 고하였다.
‘원래는 신한테 기도하지만.’
레오니에가 방문을 소리 죽여 열었다.
‘같잖은 소리.’
신에게 된통 당한 바가 있어서, 레오니에는 신에게 기도할 바에야 죽은 선황제의 무덤 앞에 꽃이라도 바칠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도 썩 좋은 건 아니었다.
불이 꺼진 복도는 조용했다. 어둠이 자박하게 깔린 복도는 얼핏 음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맹수의 송곳니 덕에 남들보다 몇 배나 감각이 발달한 레오니에에게 어둠은 아주 좋은 가림막이 되어 주었다.
아기 맹수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계단도 술술 올라갔고, 복도에 세워 둔 장식품도 민첩하게 피했다.
그렇게 도착한 펠리오의 집무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보레오티 가문의 집무실 열쇠는 오로지 저택의 가주인 펠리오만 손에 쥐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지.’
레오니에는 소리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로 가는 철사였다.
‘전에 파보 오빠한테 배워 두길 잘했어.’
배운 대로 철사를 구부려 접고, 가늘게 피기를 몇 번 반복한 레오니에는 솜씨 좋게 열쇠 구멍에 철사를 집어넣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누가 보면 도둑질하러 온 밤손님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문에 기댄 채 열쇠 구멍을 만지작거리는 레오니에는 도저히 이 저택에 사는 귀한 아가씨로 보이지 않았다.
“아이씨…….”
잘 안 되네.
의미 없는 철컥철컥 소리만 하염없이 반복되기를 잠깐.
찰칵.
“……!”
드디어 의미가 있을 법한 소리가 들렸다. 레오니에는 철사를 당겨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바싹 마른 입술 위로 혀를 날름거리며 대충 침으로 수분공급을 해 줬다.
곧 철사가 구멍에서 느릿느릿 빠져나왔다.
“…….”
몸을 일으킨 레오니에가 다시 한번 더 문손잡이를 돌렸다.
이번에는 막힘없이 움직였다.
‘그렇지!’
소리 죽인 레오니에가 허공에다 주먹질을 미친 듯이 찔러 댔다.
‘……그런데 이렇게 허술해도 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레오니에는 집무실의 허술한 잠금을 걱정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글라디고 기사단이 저택을 호위하고 있지만, 그래도 보레오티의 중요한 업무들이 행해지는 집무실이 너무 쉽게 뚫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뭐, 됐나.’
어차피 집무실에 도둑이 든다고 해도 기사단에게 잡힐 거고, 그 도둑은 지하 감옥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것이 뻔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집어치운 레오니에는 집무실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어둠이 깔리고 아무도 없는 집무실은 낮과는 완전히 달랐다. 환한 대낮에는 소리 없는 분주함이 가득하건만, 지금은 시커먼 밤하늘 속 큼지막한 달이 내비치는 희미한 빛만이 창문 너머로 은은하게 들어올 뿐이었다.
‘왠지 낯설어.’
늘 펠리오가 앉아 있던 책상에 펠리오가 없으니, 레오니에는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잠시 집무실을 살펴보던 레오니에는 몸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어이구?”
서재로 들어간 레오니에가 헛웃음을 흘렸다. 집무실 입구는 그래도 잠겨라도 있었지, 서재는 완전히 열려 있었다.
“우리 아빠가 참 위기의식이 없네.”
자기가 강한 걸 아니까 아주 매사에 허술했다. 레오니에는 그런 펠리오의 당당함이 질리면서도 참으로 부러웠다.
서재 안으로 들어온 레오니에는 가장 먼저 초를 찾았다. 마침 책장 빈칸에 새것처럼 보이는 초와 그 초를 넣을 수 있는 유리 등이 있었다.
레오니에가 초를 집어 들었다.
“…….”
초 심지를 응시하는 레오니에의 눈동자에 황금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심지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롱아롱 흔들리는 촛불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린 레오니에는 곧 유리 등 안에 초를 넣었다.
그러자 어둑하던 서재가 제법 환해졌다.
‘도대체 뭘 썼기에 자기 죽을 때 읽으라고 했을까.’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썼다는 육아일기들을 전부 꺼내 자신의 옆에다 쌓아 두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낡은 것의 표지를 펼쳤다. 펠리오가 가장 처음 쓴 것이었다.
‘떨리네…….’
아빠가 과연 저에 대해 무엇을 썼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친 레오니에는 심호흡을 서너 번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첫 줄을 읽었다.
“‘아무래도 나는 못 하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레오니에는 바로 일기를 덮었다.
“……미쳤나 봐, 이 아빠가.”
여태 펠리오 때문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지금만큼 충격이었던 적은 없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의 성장을 기록하는 육아일기에 자기애 흘러넘치는 문장을 적는단 말인가.
‘진짜 자기가 잘난 걸 아는군.’
레오니에는 이렇게 살기도 정말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어쨌건 일단 읽기로 했으니, 레오니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기를 펼쳤다.
x월 x일.
아무래도 나는 못 하는 게 없는 모양이다.
레오니에는 레지나의 딸이었다. 아이에겐 맹수의 송곳니가 있었다. 그 사실도 몰랐음에도 맹수를 뜻하는 이름을 지어 주다니. 인상부터 남달랐던 레오니에는 확실히 그 이름처럼 대단한 녀석이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아이의 삐뚤어진 취향이다. 속옷을 밖으로 꺼내 입는 남자를 좋아하는 점이나, 그런 미친놈은 편들어 주면서 내겐 변태라고 외치는 점이나.
게다가 동성애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아이의 성적 성향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고아원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된다. 내일은 고아원 선생들의 대접을 보다 강화해야 할 것 같았다.
x월 x일.
레오니에는 보통 변태가 아니었다. 기사단 훈련장에서 근육이 좋다고 외치는 배짱이나, 기사들의 흉근을 가지고 노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고아원의 열악한 환경이 아이에게 끔찍한 가치관을 심어 준 것 같아 보인다. 처절한 약자의 삶을 살았을 아이에게 근육은 힘과 권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을 테고, 그 때문에 저런 삐뚤어진 취향을 지니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일단 이에 대한 방안은 내일 고아원 손님들과 차근차근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내 허락 없이 기사단 훈련장에 출입하는 걸 금해야겠다.
x월 x일.
다행히 후사 걱정을 덜었다.
레오니에는 그저 동성애, 특히 남성들 간의 연애를 좋아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근육에 대한 삐뚤어진 관심과 애정이 만들어 낸 부차적인 취향으로 보인다. 도대체 사내새끼들끼리 들러붙어 있는 것이 뭐가 그리 좋아서 목을 매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보레오티의 핏줄이 끊기지 않아 한숨 돌렸다.
오늘 고아원 손님들과 아이의 성장에 대한 의논을 해 봤는데, 역시 제대로 된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내 의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저들은 레오니에를 데리고 있었으면서, 검은색은 제국에서 아주 희귀한 색이란 상식을 앎에도 보레오티에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감옥에 갇힌 것들에게선 더는 알아낼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저 감옥에 갇히지 않은 다른 선생…….
* * *
“…….”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맥없이 흔들렸다. 일순 황금빛 안개가 검은 눈 위로 피어올랐지만, 다행히 레오니에가 마음을 빠르게 다잡은 덕에 안개는 빠르게 사라졌다.
‘정말, 알고 있었어.’
과한 호흡을 하지 않도록, 레오니에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느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오르내리는 어깨의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처음부터 의심했구나.’
펠리오는 정말로 레오니에를 입양했을 때부터 고아원을, 그리고 코니에를 의심하고 있었다. 순간 레오니에는 가슴이 먹먹했다. 코니에에게 당했던 배신이 오랜만에 떠올랐지만, 고작 이것 때문에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이 당시의 펠리오가 그 여자를 좋아했던 자신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가 떠올라 미안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것들을 차치하고.
‘이 아빠가 내 취향을 이렇게까지 걱정했다고?’
레오니에는 오히려 이쪽이 더 충격이었다.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육아일기의 태반이 레오니에의 취향에 대한 깊은 고찰과 걱정이었다. 평소에 별말 하지 않아서 다 이해해 주나, 싶었더니 이렇게까지 걱정했단다. 심지어 후사까지 걱정했었다니.
‘후사를 걱정했으면 뿜뿜이한테 잘해 줄 것이지.’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은 스칸디아말고는 어떤 남자와도 연애나 결혼은 힘들 것 같았다. 펠리오 때문에 눈만 높아져서 어지간한 놈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저 읽을까?’
여기까지 읽고 방으로 돌아가도 되었지만, 레오니에는 앉은 자세를 조금 더 편안하게 고쳤다. 펠리오가 쓴 육아일기는 당시의 아빠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어서 재밌었다.
‘역시 훔쳐보는 건 재밌어.’
레오니에가 사악한 웃음과 함께 마저 일기장을 열었다.
* * *
x월 x일
마물 사냥의 날짜가 잡혔다.
그전에 서둘러 레오니에의 가정교사들을 데려와 소개해 줘야 할 것 같다. 케레나 백작 부인은 예법을 가르치고, 아르데아는 북부의 자긍심과 역사를 가르쳐 줄 것이다. 그는 골수 귀족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지만, 우습게도 북부에 대한 자긍심은 누구보다 컸다.
다만 아르데아 때문에 보스그루니 백작을 예절 교수로 데려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마음 같아서는 백작을 우선하고 싶지만, 아르데아가 수도에서 겪은 일 때문에 함부로 내칠 수가 없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x월 x일
아이의 손은 무척 작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레오니에의 손을 잡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또래보다 훨씬 작은 아이는 걸음도 느렸고, 손도 작고, 지켜보면 참으로 위태로운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내 걸음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가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이 카니스가 말했던 아버지의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그 감정이 부성애가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다만, 레오니에의 손을 쥐었던 감각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작고 보드라운 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온기였다. 그 작은 것이 살기 위해 열심히 움직인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오늘 이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오니에와 함께 걸었던 정원은 아름다웠다.
x월 x일
큰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아무래도 카라의 말대로 큰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내 부모보다 나를 살뜰히 챙겼던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믿고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
레오니에는 감정이 격해져 맹수의 송곳니를 폭주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후유증으로 고열에 시달렸다. 아이를 괴롭게 만든 것에 대한 벌은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나는 레오니에를 ‘그 나이 때’ 아이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애초에 카라의 말대로 가족 놀이에 쓰려고 데리고 온 ‘애완동물’로 대했던 모양이다. 어리석었던 내 결정은 아이를 아프게 했고, 아이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음을 보였다. 자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애처롭게 흐느끼던 모습은 나의 잘못된 선택과 순간들을 매질했다.
나는 이제 인정해야 한다. 나는 외로웠으며, 그 허전함을 채우고자 충동적으로 아이를 입양했다. 그리고 그 부적절한 선택의 대가는 아무 죄도 없는 아이의 몫이 되었다.
나는 그 아이를 품에 안아 잠이 들 때까지 토닥여 줬다. 처음 해 보는 낯선 행동이라 과연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었으나, 내 가슴을 만지며 근육이라고 중얼거리는 아이를 보니 기가 막히면서도 무척이나 안심했다. 내 품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아무래도 나는, 카니스가 그토록 자랑했던 ‘아버지’가 될 준비를 마친 것 같다. 그리고 그 준비의 마침표는 나의 하나뿐인 딸이 찍어 줬다. 나는 내가 느꼈던 외로움을 이 아이에겐 절대 주고 싶지 않다.
* * *
툭, 툭.
“…….”
레오니에는 더는 일기를 읽을 수 없었다. 차오르는 눈물이 눈앞을 점점 잠식해 갔다. 어느새 흐릿해진 시야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차오르고 맺히던 눈물은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흑…….”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훔친 레오니에가 서둘러 일기를 치웠다. 이미 눈물 몇 방울이 일기장 위에 떨어져 잉크가 살짝 번졌다.
“이 바보 아빠……!”
결국 레오니에는 엉엉 울었다.
“으어엉! 으앙!”
레오니에는 오늘만큼 자신이 멍청하고 어리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펠리오가 수도 없이 고민하며 썼을 이 일기를, 온전히 저를 생각하며 기록했을 소중한 흔적을 고작 호기심 하나 못 이겨서 밤에 몰래 들어와 훔쳐 읽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었다. 웬 예절 교사에게 이상한 시비가 붙어 화가 났을 때도, 제 출생의 비밀을 알았을 때도 이렇게 미안하지 않았다.
레오니에는 자신이 지금 아주 큰 잘못을 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아빠의 진심을 너무 장난스럽게 여길 때가 있다. 어릴 적에 스토커를 만나러 모두를 속이고 갔을 때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레오니에를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는다. 레오니에의 행동이나 말이 너무 늙은이 같은 점도 한몫했지만, 보레오티라는 이름이 아이의 진짜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펠리오만큼은 레오니에를 보호받아야 할 아이, 어른이 지켜줘야 할 아이로 대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레오니에를 보살피고 지켜줬다.
“아빠아아…….”
레오니에는 실로 오랜만에 미안했고, 진심으로 반성했다.
“다 읽었어?”
기척 없이 다가온 낯선 목소리에 레오니에가 퍼뜩 뒤를 돌아봤다.
“아빠가 아니라서 어떡해.”
바리아가 조그마한 등불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잠옷에 검은 다이아로 만든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이유였다.
“엄마…….”
서둘러 손등으로 젖은 얼굴을 닦은 레오니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옆으로 엉덩이를 치워, 조금 전 자신이 앉았던 곳을 손으로 툭툭 쳤다.
“여기 앉아.”
레오니에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아이를 낳은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안 된 바리아를 차가운 곳에 앉힐 수 없었다.
“방석 가져왔어.”
다행히 바리아의 손에는 도톰한 방석 두 장이 있었다. 바리아는 이를 바닥에 깔아 레오니에를 앉혔다. 덕분에 두 모녀는 차가운 바닥에 서로 앉겠다고 싸우지 않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바리아는 가지고 온 등불을 서재의 유리등 옆에 두었다. 덕분에 서재 내부가 더욱 밝아졌다.
“어, 언제부터, 있었어?”
레오니에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촛불 하나가 더해진 서재 내부는 아까보다 훨씬 밝았고, 바리아는 그 덕에 레오니에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애는 애구나.’
바리아는 그런 레오니에가 참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부끄러우면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며 시선을 피하는 것도 펠리오를 완전히 빼닮았다. 정말 빼도 박도 못 할 부녀지간이었다.
“펠리오가, 가 보라고 하더라.”
“아빤 내가 여기 올 줄 알았네, 이미.”
나중에 자신이 죽거든 읽으라는 말을,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지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잖니.”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사람이 참 얄미워, 그치?”
부끄러웠던 레오니에는 괜히 퉁명한 목소리로 틱틱거렸다. 하지만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저 말이 진심이 아닌 걸 안다. 까만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둥그런 귀가 촛불보다 더 붉었다.
“그만큼 네 아빠가 너를 지켜보고 있단 뜻이야.”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근처에 있던 일기를 집어 들었다. 표지를 소중히 쓸어 넘기는 손길이 어찌나 인자한지, 레오니에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가 버렸다.
“엄마는, 그거 읽었어?”
레오니에가 물었다.
“네 아빠가 먼저 보여 줬어.”
바리아가 일기장을 펼쳤다. 하필 펼친 곳이 조금 전에 레오니에가 통곡을 했던 부분이었다.
“창피하게 진짜…….”
레오니에가 흠뻑 젖은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분위기가 너무 낯간지러웠다. 두툼한 실내화 속 발가락도 꼬물거렸다.
“창피한 거 하나도 없어.”
육아일기에 여전히 시선이 고정된 바리아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레오니에는 그 모습이 펠리오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레오.”
문득 고개를 든 바리아가 물었다.
“내가 왜 펠리오에게 반했다고 생각해?”
“근육?”
“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바리아가 퍽 당황했다. 근데 더욱 웃긴 건, 바리아가 펠리오에게 호감을 느낀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근육이었다. 사실 근육이 큰 도움을 주긴 했다.
“그것도, 있긴 하지.”
바리아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근육이 결정타는 아니었어.”
“어, 진짜로?”
이번엔 레오니에가 놀랐다.
“아빠는 만날 자기 얼굴이랑 몸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하던데?”
“도대체 애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얼굴을 붉힌 바리아가 나중에 한마디 해야겠다며 씩씩거렸다.
“그치만 엄마도 결혼 전에 아빠 근육 밝혔잖아.”
“나는 노력의 증표로 밝힌 거야!”
“결국 밝혔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바리아가 다른 길로 빠지려는 이야기를 서둘러 돌려 잡았다.
“내가 펠리오에게 반한 건, 바로 레오 너 때문이었어.”
* * *
바리아는 본래 평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저 혼자 외치는 평화는 도리어 자신을 타인에게 낮잡아 보이게 했다. 하물며 가족들까지 바리아를 무시했다. 그 결과 죽음을 맞이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바리아는 첫 번째 삶을 비관하고 탓했다. 내가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죽임을 당한 건 전부 자신의 나약했던 정신머리 때문이라고 비난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강한 척을 했고, 아무도 자신을 낮잡아 보지 않도록 행동했다. 어떻게든 저의 빈틈을 막으려고 악을 썼다.
“……솔직히 여유가 없었어.”
그 시절을 떠올린 바리아가 쓰게 웃었다.
“물론 나에게 집중하며 살 수 있어서 좋았지만, 가끔은 이 길이 옳은 건지 수도 없이 고민했어.”
레오니에가 동그랗게 뜬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지금 엄마가…….’
바리아가 자신의 ‘회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서로가 어떤 비밀을 지녔는지 다 알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어 말한 적은 없었다. 서로에게 예민한 문제라서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게 무언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무척이나 놀랐다.
당황스러운 레오니에의 시선은 여전히 바리아에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정작 바리아의 눈은 아지랑이 흔들리는 촛불에 고정되었다. 바람 한 점 안 들어오는데도 촛불은 이따금 두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렸다.
“나는 왜 과거로 돌아왔을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과연 이런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나지막이 읊조리는 바리아의 목소리는 무척 덤덤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고뇌는 결코 평온하지 못했다.
“가끔은 조바심이 나서 숨이 막힐 때도 있었어.”
“그, 그건 몰랐어…….”
“나도 당시에는 몰랐어.”
그런데 그 불안을 깨닫고 치유해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펠리오와 레오니에였다.
“보레오티는 마냥 무섭고 잔인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바리아가 겪은 보레오티는 자신이 조사하고 여기저기 주워들은 것과 완전히 달랐다.
촛불이 비친 바리아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보물을 가진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바리아는 정말로 행복했다.
“너무도 멋진 가족이었어.”
겉으로 보기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것처럼 보였지만,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서로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다. 펠리오는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땐 기꺼이 다리를 굽혔고, 귀에서 피날 정도로 내뱉는 잔소리엔 항상 애정이 기반으로 깔려 있었다.
레오니에도 마찬가지였다. 말로는 투덜거려도 진심으로 펠리오를 존경했다. 펠리오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응원자가 바로 레오니에였다.
“그냥, 너무 따뜻했어.”
물론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기 딸과 맞먹는 아버지와 근육을 밝히는 변태 딸이라니. 그러나 둘은 둘만으로 이미 완벽한 가족이었다. 누구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부러웠어?”
레오니에가 조심스레 물었다.
“부러웠어.”
바리아가 순순히 인정했다.
“혹시 슬픈 생각도 했어?”
“그런 건 없었어.”
그러기엔 이미 자신의 가족에게 가진 가졌었던 기대를 다 버린 채였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점점 행복해지고 있었어.”
저에겐 펠리오 같은 아빠도, 레오니에 같은 동생도 없었다. 하지만 바리아는 어느샌가 부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행복해졌다.
“레오 네가 내 곁에 있어 줬거든.”
보레오티 저택에 저를 데려간 것도, 엉뚱한 이야기로 당혹스러움을 안긴 것도, 그러나 결국엔 제게 웃음을 선물한 것도. 전부 레오니에였다.
이전 생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미지의 존재가, 이전 생에선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과 기쁨을 선물해 줬다.
“그, 그 정도는 아니었어!”
머쓱해진 레오니에가 괜히 큰소리를 쳤다. 아이의 얼굴로 피가 몰려 새빨갛게 물든 모습이 거의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냥 난 평범한 변태야.”
“평범하긴.”
바리아가 손을 뻗어 레오니에의 붉어진 귀를 톡 건드렸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변태가 어디 있어.”
“응? 변태는 부정 안 해?”
쑥스러워하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솔직히 변태잖아.”
그리고 바리아는 변태 같은 레오니에도 좋아했다. 레오니에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젠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펠리오는 그런 널 한 번도 비난한 적 없었어.”
“대신 대놓고 놀리잖아.”
“애정이 깔린 놀림이야.”
“뭐, 그거야…….”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이며 긍정했다. 펠리오는 오로지 레오니에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가 레오니에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 그것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서 반했어.”
바리아가 수줍게 고백했다.
“저토록 숭고한 사랑을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니.”
어떻게 반하지 않을까.
분명 시작은 인간적인 호감이었다. 하나 그 감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육아일기를 읽었을 때 무척 기뻤어.”
펠리오의 변함없는 심성에 감동했고, 그의 진심 어린 고뇌에 공감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레오니에가 누굴 닮아 이토록 의젓하고 착하게 자랐는지 알 수 있었다.
“레오 넌 펠리오를 많이 닮았어.”
“칭찬이지?”
“이 이상의 칭찬은 없어.”
바리아가 자신했다.
“그럼, 이제는 행복해?”
레오니에가 물었다.
“안 행복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펠리오와 사랑에 빠지고, 레오니에의 엄마가 된 바리아는 비로소 행복해졌다.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바랐는지 깨달았다.
“난 정이 그리웠던 거야.”
저를 죽인 가족을 향한 복수, 제국을 혼란케 하려는 올로르와 황실의 음모를 저지하는 것 이상으로. 바리아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던 사랑을 원했었다. 그리고 저조차 몰랐었던 간절함을,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아낌없이 퍼부었다.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친 사랑은 이제 벨레아니라는 새로운 가족까지 만나게 해 주었다.
“…….”
레오니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리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레오니에의 심장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특히 레오 넌…….”
다정한 손길이 레오니에의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려줬어.”
“뭐, 뭐를?”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혹여 과거의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건 아닐지 후회하던 찰나를, 레오니에는 망설임 없이 방해했다.
‘그때로 돌아가도 아무것도 못 해.’
‘자기 앞가림도 못 할 정도로 힘들었잖아!’
‘누굴 챙길 여력도 아니었는데, 뭘 못 도와줘서 그리 후회해!’
그제야 바리아는 모든 미련을 떨칠 수 있었다.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졌고, 가장 듣고 싶었던 위로도 다 들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
레오니에는 또다시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눈물이 차올라, 바리아의 모습이 흐리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레오니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의 신은 너란다.”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손을 잡아 이마에 가져갔다.
“……드디어 말했네.”
수줍은 고백과 함께, 바리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네가 나를 펠리오에게 데려다줬고, 너의 엄마가 되게 해 주었어. 그래서 행복할 수 있었어.”
“엄마는 내가 아니었어도 다 가질 수 있었어.”
레오니에가 부정했다.
“내가 봤는걸.”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일어나, 스스로 쟁취한 행복에 기뻐하던 바리아를 다른 세상에서 직접 읽었었다.
“하지만 그 삶에 레오 너는 없었잖아.”
바리아는 단언할 수 있었다.
“네가 내 행복의 마침표야.”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삶 속의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대도, 레오니에가 있는 이 순간처럼 행복하진 못할 거라고.
“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레오니에가 울먹거렸다.
“나 지금 나쁜 짓 했잖아……!”
밤중에 몰래 일어나 읽지 말라고 한 걸 훔쳐 읽으러 왔다가 칭찬만 듣고 눈물까지 펑펑 흘려 버렸다.
“혼을 내야지!”
아이는 결국 콧물까지 훌쩍거렸다.
“내가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해? 눈치껏 혼을 내라고!”
“혼 안 낸다고 화내는 애가 어디 있니.”
“여기 있잖아!”
“하하하!”
기가 막힌 바리아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너무 행복하다.”
실컷 웃은 바리아가 걸치고 있던 숄로 아이의 젖은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 줬다.
“자, 흥.”
“흥!”
그리고 코도 풀어 줬다. 어느 정도 진정한 레오니에가 아직 채 읽지 못한 육아일기들을 도로 책장에 꽂아 뒀다.
“더 안 읽어?”
바리아가 물었다.
“또 읽으면 울 거 같아.”
레오니에는 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고, 매일매일 웃고 싶었다. 물론 그런 날만이 자신을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 정말 울고 싶을 때 읽을 거야.”
언젠가, 펠리오와 바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읽을지도 모른다. 레오니에는 부디 그날이 아주아주 머나먼 후일에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도, 뭐…….”
일기를 다 정리한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엄마랑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조금 기뻐.”
“엄마도 기뻐.”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레오니에는 여전히 부끄러워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니면 레아가 좀 더 컸을 때, 그때 다 같이 읽을까?”
바리아의 제안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과 함께 육아일기를 읽으며 즐겁게 웃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빠는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알고 있을까?”
레오니에가 바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리아는 기꺼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대충 짐작은 하지 않을까?”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빠.”
레오니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에 대해 다 꿰뚫어 본다는 사실이 적잖게 불쾌했다.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모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레오니에는 바리아가 들고 온 등불을 대신 들었다. 어둑한 복도에 따스한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언제까지 어린애로 있는 건 싫은데.”
“레오 넌 항상 우리에게 어린아이일 거야.”
“어른이 되어도?”
“당연하지.”
“애를 가져도?”
“부탁이니까, 펠리오 앞에선 그 말 절대로 하지 마.”
바리아가 진심으로 당부했다.
“네 아빠가 얼마나 그걸로 예민한데.”
“갱년긴가?”
레오니에가 퍽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중에 50살이 되어야 레오 네 결혼을 허락한다더라.”
“그럼 그때 내 나이가 서른이야!”
농담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바리아의 고백에, 레오니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네가 50살이 되면.”
바리아가 정정했다.
“……그때면 둘 중 한 명은 없을 수도 있겠는데?”
레오니에가 진지하게 답했다.
* * *
다음 날.
“…….”
“…….”
펠리오는 눈이 팅팅 부은 레오니에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봤고, 레오니에는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펠리오를 올려다봤다.
‘둘 다 쑥스러워하긴.’
그리고 한 발치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보던 바리아는 몰래 키득키득 웃었다.
‘하여튼 부끄럼쟁이들이야.’
그렇지, 레아?
바리아가 제 옆에 놓인 요람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안에는 똘망똘망한 검은 눈을 끔뻑이는 벨레아니가 있었다. 아기는 아빠와 언니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팔을 허우적거렸다.
“……아침부터.”
먼저 입을 뗀 건 펠리오였다.
“보기 힘든 못생김이구나.”
다정한 비난에 아기 맹수가 오만상을 썼다.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이제 펠리오에게 어지간하면 대들지 말고 넘어가자고 다짐했던 레오니에의 효심이 바싹 말라 갔다.
“내가 이래서 아빠가 싫어.”
“거기다 불효스럽기까지.”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아빠는 도대체 눈치라는 게 없어!”
레오니에가 씩씩거리며 도끼눈을 떴다.
“내가 아빠한테 쪼오오끔 미안한 게 있어서 간만에 효심을 좀 발휘해 주려고 했더니, 그걸 이렇게 방해해?”
“그럼 좀만 더 발휘하지 그랬어.”
“나 진짜 아빠 너무 미워.”
“녀석, 좋으면서 부끄러워하긴.”
“진짜 밉다고!”
아침부터 살벌한 부녀를 지켜보던 바리아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이게 우리 집이지.’
감동이 1분을 넘기지 못하고, 서로를 못 이겨 먹어 안달이 난 시끌벅적한 가족. 한편 벨레아니는 이 시끄러운 공간에서 한 번도 칭얼거리지 않았다. 그저 고른 숨소리만 색색 들릴 뿐이었다. 그러다 가끔 배시시 웃었다.
‘……배에서 듣고 자라서 익숙한가?’
이것이 태교의 효과인가, 바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도 벨레아니의 표정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한편.
“복수할 거야! 내가 반드시 아빠 등 뒤에 멍청이라고 쓴 종이를 붙이고 말 거야!”
“그래, 잘해 봐라.”
“으아아, 진짜 짜증 나!”
맹수 부녀는 아직도 싸움 중이었다.
“둘 다 그만 해요.”
기어코 바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러다 목 상하겠어.”
“엄마아아!”
레오니에가 이때다, 싶어서 후다다닥 달려갔다. 벨레아니를 의식해 사뿐히 엉덩이를 소파에 붙이고는 입술을 축 내린 채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빠가 나보고 못생겼대. 나보고 불효녀래.”
“펠리오가 부끄럼쟁이라 그래.”
바리아는 펠리오의 진심을 잘 알았다. 그는 엉엉 우느라 눈이 팅팅 부은 레오니에를 걱정했고, 아이가 괜히 일기 때문에 제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지 않길 바랐다. 펠리오는 그만큼 레오니에를 잘 알았다.
아이는 눈물이 많고, 부끄럼도 잘 타며, 특히 부모님의 애정에 약하다는 것도. 그러니 그런 일기는 상관없이, 레오니에가 오늘도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다만, 그 진심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게 펠리오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하여튼 둘 다 똑 닮았어.’
바리아는 절로 웃음이 났다. 진심 어린 칭찬에 쑥스러워하던 레오니에가 누굴 닮았는지, 이제는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으으우!”
그때였다.
갑자기 벨레아니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젖살이 토실토실한 얼굴을 찡그리며 옹알옹알 입술을 움직이는 모양새가 무언가 불만을 토로하는 것 같았다.
“우리 아가가 왜 이러지?”
바리아가 벨레아니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맘마도 먹었고, 기저귀도 갈았는데…….”
벨레아니는 바리아의 품에 안겼는데도 한참을 칭얼거렸다.
“아빠가 너무 시끄러워서 짜증 났나 봐.”
생후 10주하고 3일 차에겐 너무 가혹한 목소리였다며, 레오니에가 퍽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언니가 못생겼단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펠리오가 지지 않고 덧붙였다. 레오니에는 기어코 펠리오의 정강이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펠리오는 순순히 맞아 주기는커녕 몸을 옆으로 휙 돌려 가뿐히 피했다.
그러나 벨레아니는 계속해서 몸부림을 쳤다.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품에 번갈아 안겨도 아기는 진정하질 못했다.
“왜 이러지?”
세 가족이 당황하던 찰나였다. 레오니에가 담요를 깐 바닥에 벨레아니를 내려놨다. 바닥에 등을 눕힌 벨레아니는 바로 조용해졌다. 어느새 가족들은 벨레아니 옆에 쪼르르 앉아 물끄러미 구경했다.
“으으응.”
가족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벨레아니가 몸을 꼬물거렸다.
“…….”
그러더니 볼살에 눈이 파묻힐 정도로 빵긋 웃었다.
“……와아!”
덩달아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 웃었다!”
“세상에, 세상에!”
놀란 바리아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벨레아니는 감정 표현이 무척 미세했다.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를 갈아야 할 때도 칭얼거리는 수준으로만 울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벨레아니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아기는 그런 가족들을 보며 더욱 웃었다.
“혹시 레아도 끼고 싶었어?”
바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랑 언니가 너무 사이좋으니까, 레아가 질투했나 봐요.”
“히잉, 언니는 아빠보다 울 레아가 더 좋은데?”
레오니에가 입술을 쭉 내밀며 뽀뽀하는 시늉을 했다. 벨레아니는 이제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아빠도 우리 레아를 가장 좋아할 거야.”
레오니에가 벨레아니의 배를 간질이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펠리오가 콧방귀를 꼈다.
“아빠!”
레오니에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리아를 힐끔 봤다. 혹여라도 상처받았을까 봐. 하지만 오히려 바리아 역시 펠리오의 말이 맞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 다 소중해.”
레오도, 레아도. 펠리오에겐 누구 하나 차등을 둘 수 없는 소중한 딸들이었다.
레오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벨레아니가 너무 귀여워서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기에, 그런 식으로 대답한 펠리오에게 조금 놀라움을 느꼈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아빠.”
그래서 레오니에는 쑥스러운 마음을 꾹 숨겼다. 당연한 사실에 괜히 부끄러워하며 히죽거릴 필요가 없었다.
“귀 엄청 빨개.”
“남 말하고 있긴.”
너도 마찬가지라며,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다소 거칠게 쓰다듬었다.
“하여튼 이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영악한지.”
“그걸 몰라서 물어?”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당연히 아빠랑 엄마를 닮았지!”
이 역시도,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다.
* * *
“…….”
편지를 읽는 내내, 스칸디아의 얼굴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스칸디아는 레오니에가 쓴 편지를 아주 좋아했다. 레오니에의 편지는 마치 그녀가 그리는 그림과 같았다. 덕분에 스칸디아는 레오니에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아주 그냥 입꼬리가 귀에 닿겠구나.”
편지에 정신이 팔렸던 스칸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스칸디아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이벡스가 햇빛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앉아도 되겠지?”
“물론이죠.”
옆에 앉은 이벡스가 스칸디아의 손에 들린 편지를 힐끔 봤다.
“공작 영애가 보낸 편지?”
아들놈이 대낮부터 이유도 없이 웃는다면, 그건 필히 북부에서 온 편지 때문이었다. 스칸디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벡스가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할까 봐 서둘러 품에 감췄다. 그리곤 편지 내용을 아주 짧게 전했다.
“동생분이 예쁘게 웃어서, 무척이나 기쁘다고 합니다.”
“어떻게 안 예쁠 수 있겠어.”
테이블에 올려 둔 팔을 세워 턱을 괸 이벡스가 싱긋 웃었다.
“네 동생과 좋은 사이가 되면 좋겠구나.”
그는 자연히 막내딸을 떠올렸다.
헤스페리 역시 한 달 전 태어난 셋째 덕에 어느 때 보다 들뜨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자리에서 물러난 헤스페리 전 후작이 가장 기뻐했다. 막내 손녀가 헤스페리 후작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형님이 펠리데아가 보고 싶다고 편지에 얼마나 적어대는지.”
“펠리가 조금 더 자라면 얼른 수도로 가야겠구나.”
이벡스가 홀로 황궁에 있을 장남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수도로 가려고요.”
스칸디아가 말했다.
“형님 곁에 잠시 머물러서, 일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이벡스가 피식 웃었다.
“내년에 아카데미 입학하는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따라가는 거잖아.”
“그러는 겸해서 형님도 도와주고 좋지 않습니까.”
“나 참.”
기어코 이벡스가 혀를 내둘렀다.
“너도 나만큼 집념이 강하구나.”
스칸디아는 그저 조용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저 역시도 제 부친의 말씀처럼 집념이 강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분이 아카데미에 들어가시면, 얼마나 많은 짐승 새끼들이 침을 흘릴지 뻔한데.’
그토록 강하고 아름다운 분을 한 번이라도 바라보면 반드시 마음을 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가까이서 그런 떨거지들을 없애야 하지 않겠나.
‘……아.’
스칸디아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시에 그의 손이 편지를 숨긴 옷자락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어서 빨리 보고 싶어요.’
하늘은 푸르렀고.
‘저도 보고 싶습니다.’
저의 마음은 점점 짙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