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새로운 가족
스칸디아가 북부에 찾아온 지 어느새 석 달이 지났다. 황실의 전언을 알리러 온 사자치고는 꽤나 오래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보레오티의 정기 행사인 마물 사냥이었다.
‘저 미친 아저씨가 그간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함께 마물을 사냥했던 레오니에가 오랜만에 ‘아저씨’ 호칭까지 부르며 아빠를 경멸했다. 지금 펠리오는 바리아의 임신 때문에 맹수의 송곳니가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느 때보다 더 대단한 기량을 발휘했다.
‘진짜 재수 없어.’
레오니에는 짜증이 났다.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가 더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하나 승부욕도 동시에 자극된 레오니에 역시 어느 때보다 힘차게 마물을 사냥했다.
‘……우리 꿀 빠는 거 같지?’
‘약간 그런 기분이야.’
‘그런 게 아니라 진짜잖아.’
덕분에 함께 온 글라디고 기사단은 어느 때보다 수월하게 임무를 해냈다. 그리고 그해 마물 사냥은 역대 최단 시간을 기록했다.
두 번째 일은, 예상보다 훨씬 빨라진 황태자 책봉식이었다.
보레오티 부녀는 마물 사냥을 끝내자마자 곧장 수도로 향했다. 빠듯한 일정이었음에도 가능했던 건,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황궁과 이어진 게이트를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크리세토스 황자의 황태자 책봉식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경건한 표정으로 관을 쓴 크리세토스 황자는 황금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입가를 슬쩍 올렸다. 황자의 진지한 모습은 오늘 처음 봤는데, 스칸디아와 무척 닮았다. 역시 형제는 형제인 듯했다. 레오니에는 크리세토스가 훗날 황제가 된다면, 제 충성심을 아주 조금은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쨌건 미래의 아주버님이니까.’
보레오티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원만한 군신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번째는 바로 티그리아 황후의 헤스페리 후작 작위 계승이었다.
황태자 책봉식은 죽은 황제를 대신해 대리청정한 황후의 마지막 업무이기도 했다. 티그리아 황후는 책봉식이 끝난 뒤에 친정인 서부로 내려갔다. 결혼 전 성이었던 헤스페리로 바꾸었고, 부친에게서 작위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오랜 연인이었던 이벡스와 결혼했다.
새 헤스페리 후작은 곧이어 충격적인 사실을 공표했다. 바로 자신의 임신과 아이의 부친이 이벡스란 사실이었다.
황후의 폭탄선언에 제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황제를 두고 불륜을 저질렀단 사실에 욕을 하는 이도 있었고, 황제도 첩을 두었는데 뭐가 문제냐며 편드는 이도 있었다.
여론은 의외로 후자 쪽이 많았다. 그만큼 선황제가 죽어서도 용서 못 할 놈이란 뜻이었고, 황후가 제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단 사실을 모두가 알아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황궁에는 크리세토스 황태자 한 사람만 남았다. 황태자 위엔 황제도 황후도 없고, 그의 아래에도 이제 형제는 없다. 하니, 혼자 남은 황태자는 자연히 황제가 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네 번째인, 크리세토스 황태자의 황제 즉위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스칸디아가 북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스칸디아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황녀이며, 시집가던 중에 사망한 인물이었다. 그런 황녀가 갑자기 살아나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사실 남자였고, 황실의 핏줄도 아니란 사실까지 밝히면서.
그 순간 크리세토스 황제는 큰 타격을 받게 되며 그의 정통성 역시 흔들리게 된다. 헤스페리 후작도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하물며 서부에서도 스칸디아의 정체는 아직 비밀이었고, 현재도 헤스페리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스칸디아는 북부에 은거 중이었다.
* * *
바리아는 최근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겨울이 다 지나가는 동안, 바리아의 배도 꽤 부풀었다. 이젠 거동이 불편한 것을 넘어 가만히 있어도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았다. 전신도 퉁퉁 부어 펠리오와 맞춘 결혼반지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바리아에게 흔들의자는 최고의 휴식처였다.
흔들의자는 펠리오의 선물이었다. 무려 바리아가 좋아했던 외할머니가 쓰던 의자였다. 펠리오가 직접 바리아의 외가까지 사람을 보내 가져왔다. 선물을 받은 바리아는 펑펑 울었고, 펠리오는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우와.’
당시 옆에서 이 감동적인 순간을 지켜보던 레오니에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계획적이긴.’
펠리오는 바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데도 손수건을 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죄책감을 이번 기회에 떨쳐 냈다.
속내를 눈치챈 레오니에는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바리아가 저리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딴죽을 걸지 못했다. 펠리오도 바리아를 위해 준비한 성의가 있기에 그냥 넘어갔다.
어쨌건 그 뒤로 흔들의자는 바리아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밤에 제대로 못 잔 잠을 보충하기도 했다.
오늘도 바리아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옆에 두고 독서 중이었다. 남편과 딸이 저만 두고 수도에 간 게 아주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저의 인생에 이런 조용한 평화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바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공작 부인.”
절 부르는 소리에 바리아가 읽던 책을 덮었다.
“황녀 전하.”
바리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기쁘게 불러 주는 바리아 덕에 스칸디아도 덩달아 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에 보레오티 마차가 게이트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맹수 부녀와 동행했던 기사가 먼저 저택에 도착해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드디어 왔네요!”
바리아가 무릎을 덮은 담요를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칸디아가 서둘러 다가가 부축해 줬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오늘 아침에도 물으셨으면서.”
바리아가 말할 때마다 혈색이 완연한 볼살이 도드라지게 움직였다.
“전하께서 머물러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혼자 저택에 있었으면 분명 쓸쓸하고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남편과 딸의 말싸움이 그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칸디아가 말동무가 되어 주며 함께 지내 준 덕에 무척 안심했다.
“저야말로 죄송하지요.”
“어머, 왜요?”
“객식구처럼 머무르는 게…….”
“전하께서 왜 객식구에요!”
바리아가 그런 섭섭한 소리 하지 마시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칸디아는 그런 바리아가 레오니에와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우리 딸이 사랑하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니 가족이나 마찬가지랍니다. 게다가 우리 근육이의 대부시고요.”
“공작이 들으면 화낼 겁니다.”
펠리오는 지금도 스칸디아가 제 둘째의 대부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편이 조금 주책이잖아요.”
그런 건 너무 신경 쓰지 말라며, 바리아가 스칸디아의 손을 꼭 잡았다. 바리아는 스칸디아의 손을 좋아했다. 검을 쥐는 사람 특유의 거친 감촉이 남편과 딸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아,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바리아 조금 전 말을 황급히 정정했다.
“우린 이미 가족이죠.”
스칸디아가 입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슬그머니 숙였다.
“그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쑥스러움이 담긴 대답이 돌아왔다.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왜 그렇게 스칸디아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마음씨 곱고 상냥한 근육남은 제 남편만큼이나 귀한 사람이었다. 제 딸에게 좋은 사람이 함께해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둘은 곧 도착할 맹수 부녀의 마중을 위해 현관 홀로 내려갔다. 스칸디아는 바리아가 편하도록 걸음 속도를 맞췄다.
‘걸음이 빠르시구나.’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바리아는 의외로 발걸음이 빨랐다. 황궁 재정부에서 근무할 적에 빠릿빠릿 움직이던 습관 때문이었다. 그래서 펠리오가 종종 조심히 걸으라고 잔소리하곤 했었다.
“부인께서도.”
스칸디아가 발밑 계단을 살피며 말했다.
“저를 편히 불러 주십시오.”
보레오티와 황실 간의 결혼 금지는 제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약속이었다. 스칸디아는 레오니에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약속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아무리 황제의 친자식이 아니어도 황녀로 자라 왔고, 그렇다고 제 진짜 모습을 그대로 떳떳하게 드러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더는 황실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스칸이라 불러도 괜찮다고 말하니, 바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건 우리 레오만 불러야 하는 애칭 아닌가요?”
“제 가족들은 다 저를 스칸이라 부릅니다.”
조금 전에 자신을 가족이라고 말해 준 바리아의 친절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를 눈치챈 바리아가 방긋 웃었다. 얼마나 기쁜지 신중하게 걷던 발걸음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스칸 님도 저를 바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나중에 레오랑 결혼하면 어머님 소리를 듣게 되니까, 그전까지 이름으로 친근하게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예.”
스칸디아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하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은은하게 펴져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늘 이렇게 몽글몽글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보레오티 사용인들의 표정은 항상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평화로운 순간이야.’
‘너무 따뜻하다…….’
‘이렇게 아늑할 수가.’
보레오티에선 희귀한 따스함이었다.
물론 레오니에가 어릴 적에 저택에 나타났을 때도 모두 따뜻한 볕이 들었었다. 다만 아기 맹수가 전파했던 씩씩한 행복과는 아주 조금 달랐다.
바리아와 스칸디아가 만들어 내는 몽글몽글한 따뜻함은 따뜻한 우유에 갓 구운 빵을 적신 것처럼 보드라웠고, 향기로운 입욕제를 잔뜩 푼 따뜻한 물에 전신을 담그는 것처럼 포근했다.
두 사람의 시중을 들어 주는 사용인들의 얼굴은 항상 녹진녹진하게 풀어진 채였다.
‘아가씨께서도 좋은 배필을 만나셨구나.’
카라는 보레오티 저택에 또다시 커다란 복이 들어올 거란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성질머리 더러운 주인들이 배우자 복은 크게 타고난 모양이었다.
잔걱정이 많은 집사는 오늘도 안경을 벗어 주름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남몰래 훔쳤다.
그리고 잠시 후.
“와아, 드디어 집이다!”
“귀 찢어지겠다.”
“아빠가 늙어서 고막이 약해진 걸 왜 내 탓으로 돌린대.”
“네 아빤 아직 서른 초반이다.”
“늙었네.”
“……레오 넌 어디 안 늙는지 보자.”
“그래 봤자 아빠보단 젊은데!”
“하여튼 말 한마디를 안 지지.”
크고 검은 맹수가 재잘거리는 아기 맹수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 뿜뿜아!”
저를 마중 나온 두 사람을 발견한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두 손을 높이 흔들었다.
“나 다녀왔어!”
저택에 돌아온 레오니에는 곧장 바리아의 품에 안겼다.
“씻고 안아라.”
뒤에서 들려오는 펠리오의 잔소리는 깨끗하게 무시했다. 뒤통수를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정작 레오니에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와아, 엄마 배 엄청 커졌네?”
레오니에가 놀란 눈으로 바리아를 살폈다. 바리아의 배는 이제 저의 두 팔로 완전히 껴안지도 못할 정도로 컸다.
“안 불편해? 괜찮아?”
“얘는 그새 또 아빠를 닮아서 엄살은.”
“엄마는 안 본 사이에 욕 실력이 늘었구나.”
“저 녀석이.”
하인이 가져온 대야에서 손을 씻던 펠리오가 혀를 찼다.
“안 괜찮을 거 같은데…….”
레오니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배를 보았다. 봄이 가까워지는 만큼, 바리아의 출산일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 잘 지냈어.”
바리아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들 얼마나 잘 챙겨 줬는데. 특히 스칸 님이 말동무도 해 주시고, 심심할 때면 함께 산책하거나 게임도 했는걸?”
“좋겠다!”
레오니에가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마물 사냥이나 수도 일만 아니었어도 이번 겨울을 스칸디아와 그렇게 놀면서 보낼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솟구쳤다.
“별일 없어 다행입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펠리오가 바리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스칸디아를 밀쳐 냈다.
“하지만 조금 섭섭하군요. 저 없이도 너무 잘 지낸 것 같아서요.”
펠리오가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뒤에서 레오니에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설마요!”
바리아가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그리곤 그간 보고팠던 마음을 담아 펠리오의 품에 와락 안겼다. 품에 안긴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크고 듬직한 가슴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배가 아무리 커지고 몸이 부어도, 남편은 항상 자신을 이토록 완벽하게 감싸 줬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펠리오의 가슴을 간질였다.
“……나 먼저 갈래.”
이를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마치 항복이라도 하듯 두 팔을 짧게 들었다.
“스칸, 우리는 먼저 올라가요.”
“어, 그, 괜찮습니까?”
스칸디아가 여전히 서로를 품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보레오티 공작 부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다 펠리오와 바리아가 입을 맞추기 시작했고, 스칸디아는 서둘러 눈을 돌렸다.
레오니에가 그런 스칸디아를 보며 혀를 가볍게 찼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올라가자고 했잖아요.”
펠리오와 바리아는 저들 딴엔 나름 손님을 배려한다고 그간 애정행각을 아주 많이 줄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스칸디아가 보기엔 참 다정한 부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마물 사냥에 수도 출장까지 더해지면서 무려 3주 가까이 서로 만나지를 못했다가, 오늘에서야 제대로 된 상봉을 했다.
레오니에는 직감했다.
“닷새 정도는 방에서 안 나올 거예요.”
“예?”
놀란 스칸디아가 되물었다.
“……부인께서 임신하셨는데요?”
“그럼 뭐.”
레오니에가 정정했다.
“한 사흘 정도? 못해도 나흘 안엔 나오겠지.”
레오니에는 일찌감치 체념한 상태였다. 부모님의 끈적한 신혼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북부 산맥에 있는 싹수 까만 아기 신이라도. 결론은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사용인들도 이미 다 사라진 채였다.
“레오.”
그때, 펠리오가 계단을 올라가려던 둘을 불러 세웠다.
“일정 거리를 유지해라.”
“아빠는 엄마 입술에서 좀 떨어지고 말을 해!”
웅얼웅얼 쩝쩝 말하지 말고!
결국 참다못한 레오니에가 한소리 터트렸다.
* * *
펠리오와 바리아는 정확히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여전히 그동안의 달콤했던 분위기에 흠뻑 젖은 채였다. 두 사람이 있는 거실 안으로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발을 디디는 순간 달콤하고 진득한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영애의 예언이 맞았군요.”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눈치랍니다.”
별것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모님의 첫 합방이 무려 닷새였던 것을 기억하면 이 정도 날짜 추측은 죽은 선황제 욕하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
스칸디아가 조심히 물었다.
“영애는 괜찮은 겁니까?”
“응? 나요?”
“혼자 방치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어?”
레오니에는 순간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나 곧 스칸디아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부모님이 처음 합방했을 때조차도 저를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레오니에 주위에는 카라나 펠리카 부인, 코니와 미아처럼 돌봐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거기다 주변 어른들은 레오니에가 아무리 어려도 보레오티, 차기 공작 입장이란 색안경 탓에 아이 취급을 하지 않았다.
하나 감동은 감동이었고.
‘나도 재미나게 놀았는데.’
펠리오와 바리아가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동안, 레오니에도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스칸디아와 단둘이 외출하고, 보레오티의 재산 일부를 제 아래로 슬쩍하고, 시계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도 장부를 손봐 탈세도 했다. 그리고 원래 살던 세상에서 죽기 전까지 그렸던 회지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충실한 시간이었다.
“사실 조금 외로웠어요.”
하나 레오니에는 그런 일 다 없었다는 듯이 스칸디아의 품에 안겼다. 스칸디아는 그런 레오니에를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이내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서운한 마음은 감추면 안 됩니다.”
“그치만…….”
레오니에가 웅얼거렸다.
“부모님이 그만큼 사이가 좋은 거니까, 좋은 일이잖아요.”
“하지만 영애가 홀로 남겨지는 건…….”
“혼자 아닌데?”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가슴에 턱을 기댄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칸이랑 같이 있는데? 그래서 하나도 안 외로운데?”
“…….”
“그러니 괜찮은데?”
“아, 그…….”
몰아붙이는 애정 공세에 당황한 스칸디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레오니에는 사람의 귀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걸 처음 보았다.
“우리도 뽀뽀?”
“뽀, 뽀뽀…….”
스칸디아가 말을 더듬거렸다. 하나 곧 고개를 부웅부웅 끄덕였다. 레오니에는 고갯짓에서 나오는 바람에 몸이 괜히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스칸디아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그럼 누가 해 줄까요?”
레오니에가 인내심을 발휘해 질문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벽에 밀쳐서 온갖 칭찬으로 희롱하고 싶었으나, 그래도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같이 하면, 안 됩니까?”
스칸디아가 물었다.
“후우우우.”
레오니에가 길고 긴 한숨으로 솟구치는 욕망을 억눌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너무 귀여워서 어디 밖에 내놓는 게 걱정이었다. 펠리오가 왜 그렇게 바리아를 제 품에만 가두려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이윽고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 자연스레 두 눈이 마주쳤고, 둘은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를 깊이 담았다.
“예뻐라.”
레오니에는 스칸디아의 잿빛 눈동자에서 맑고 진득한 감정을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질척이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레오니에에게도 있었다.
“영애가 더 예쁩니다.”
“칫, 뽀뽀할 때는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레오니에 보레오티.”
“아니이이, 레오라는 예쁜 애…….”
애칭이 있었는데.
“레오니에 보레오티.”
지금 막 사라졌다.
흉악한 부름이 어른을 코앞에 둔 아기 맹수의 등골을 위협했다.
반쯤 감겼던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칸디아는 이미 그대로 굳어진 채였다. 하지만 서로 마주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도리어 힘만 더 줬다. 레오니에가 고장 난 인형처럼 쭈뼛쭈뼛 뒤를 돌아봤다.
“……어, 어머나!”
아기 맹수가 알랑방귀를 뀌었다.
“우리 잘생긴 아빠네에?”
그러나 안타깝게도 잘생긴 펠리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사람 백 명 정도는 아주 가볍게 접어 아기 장난감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검은 맹수가 서 있었다. 겨우내 북부 산맥에서 잡았던 마물보다 더 무서웠다.
“내가 분명 경고했지?”
펠리오가 레오니에와 스칸디아가 맞잡은 손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건전한 교제를 하라고.”
마물 사냥을 떠나기 며칠 전, 펠리오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레오니에와 스칸디아의 교제를 허락해 줬다. 제 딸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스칸디아밖에 없단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신 아주 엄격한 조건 몇 가지를 걸어 줬다. 그중 하나가 신체적 접촉은 오로지 악수까지였다.
“뽀뽀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레오니에가 스칸디아를 제 뒤에 숨기며 말했다.
“그리고 아빠도 엄마랑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뽀뽀했고!”
“어른은 가능해.”
“와아, 그런 치사한 이유를…….”
레오니에는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펠리오가 인상이 험악하고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지, 세상 누구보다 이해심 넘치고 생각이 열린 아버지였다. 그러니 레오니에의 비밀을 알고도 부성애로 안아 줄 수 있었고.
한데 이런 멋진 아버지가 꼭 딸의 연애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다.
“……근데 엄마는?”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찾았다. 이쯤 되면 제 연애의 유일한 지지자가 나타나야 할 때였다. 그런데 분홍 머리카락은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네 엄마는 잔다.”
“아이씨…….”
레오니에가 욕설을 짧게 읊조렸다. 바리아가 왜 자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흘하고도 반나절 내내 아빠한테 시달렸을 텐데, 심지어 임신까지 한 상태였으니 피로가 쌓여 쿨쿨 자고 있을 테다.
‘이거 진짜 걱정이네.’
저야 알 것 다 아니까 부모님의 과도한 애정행각이 코 후빌 정도밖에 안 되지만, 나중에 자신이 아카데미 가고 없는 동안 근육이가 나쁜 걸 배울까 봐 걱정이었다.
제 소중한 동생이 나쁜 물 들어서 난잡해지면 어쩌란 말이냐.
“그.”
그때였다.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스칸디아가 손을 들어 조심스레 요청했다. 맹수 부녀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스칸디아를 바라봤다. 펠리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허락했다. 그는 유독 예의 바른 사람에게 약했다. 제 주변에 그런 사람이 별로 없는 탓이었다.
말하기에 앞서, 스칸디아가 숨을 짧게 내쉬었다. 퍽 긴장된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공작이 영애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잘 압니다.”
“일단은 딸이니까.”
“‘일단은’이 뭐야.”
이번엔 레오니에가 끼어들었다. 펠리오의 수식어가 탐탁지 않았다.
정작 펠리오는 뭘 이제 와 반응하냐며 태연했다.
“레오 넌 내 딸만 아니었으면 벌써 내다 버렸어. 내가 이거 한두 번 말하냐.”
“하긴, 나도 가끔 그 생각해.”
저여도 저 닮은 딸은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건 제 아빠는 펠리오였고, 레오니에는 덕분에 어떤 사고도 당당하게 칠 자신감을 얻었다. 딸이니까 다 용서해 주고 품어 줄 아빠가 있으니까.
“그런 말씀이.”
한데 스칸디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는 어째선지 뭔가 결심한 것처럼 다부졌다.
“영애께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뭐?”
“으응?”
맹수 부녀가 동시에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지금 느끼는 기막힘은, 거의 레무스 올로르가 개과천선했단 헛소리와 똑같은 강도였다.
“공작이 영애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저는 정말 잘 압니다.”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머.”
품에 안긴 레오니에는 평소보다 다섯 배 빠르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놀란 눈과 달리 히죽이는 입꼬리는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격한 뿜뿜이!’
평소 조용하고 참한 남자지만, 상대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면이 있었다. 레오니에는 이 희귀한 경험을 딱 한 번 겪어 봤다. 수도에서 처음 입을 맞췄을 때.
“왜 이러셔요, 갑자기…….”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혀를 꼬았다.
“울 아빠가 보고 있눈데엥, 쮹쯔릅께.”
레오니에가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럴수록 펠리오의 얼굴 근육은 굳어지다 못 해 거의 돌이 되었다. 그리고 퍼뜩, 뭔가가 떠올랐다.
펠리오의 생엔 끔찍한 순간이 두 가지 있었다. 바리아가 레무스에게 납치당했을 때,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와 입 맞췄다고 자랑했을 때. 그리고 후자 때문에 생애 처음으로 드러누워도 봤다.
지금 펠리오가 그랬다.
드러누울 것 같았다.
“영애는 아직 어립니다. 아무리 의젓하고 성숙하다고 해도, 아직은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입니다.”
그런 어린 애한테 너는 반해서 졸졸 따라다니냐.
펠리오는 일순 올라오는 격한 물음을 애써 참았다. 여기서 따져 봤자 저만 손해였다.
“물론 조금 전엔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칸디아는 입을 맞출 뻔한 자신의 경솔함을 반성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환한 대낮에만 건전한 신체적 접촉만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펠리오는 그 말에 화가 좀 풀렸고, 레오니에는 크게 아쉬워했다.
“하지만 공작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뭘?”
“자식을 그렇게 방치하는 건 아동폭력입니다.”
“내가 언제 방치를…….”
했냐고 따지려던 펠리오의 입술이 멈칫했다. 동시에 레오니에 역시 스칸디아가 왜 갑자기 펠리오에게 대드는지 알아챘다.
스칸디아는 펠리오와 바리아의 사흘하고 반나절 간의 뜨거운 합방을 문제 삼고 있었다. 그 시간만큼 레오니에가 혼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인은 아직 몸이 편치 않으시고, 영애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하는 아이입니다.”
펠리오는 퍽 억울했다.
‘환장하겠군.’
흘러가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어째 제 욕망에만 치중해 임신한 아내를 괴롭히고 어린 자식을 냉대한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기가 막혀 반박도 안 나왔다. 스스로 완벽한 아버지라고 단언하진 못해도, 펠리오는 저 능글맞은 근육 변태를 최선을 다해 키우고 사랑했다.
그런데 이런 취급을 받다니.
거기다 바리아와의 장기 합방 때도 마냥 제 욕심만 쏟아 낸 건 아니었다.
임신하면 신체가 변해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책 내용을 읽고, 바리아에게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오히려 더욱 사랑하고 있단 걸 보여 줬을 뿐이었다. 당연히 임산부를 배려하고 조심히 대했다.
“어어…….”
레오니에도 적잖게 당황했다. 저를 생각해 주는 스칸디아의 마음은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펠리오가 저를 내쳤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레오니에는 부모의 큰 사랑과 관심 덕에 질척질척한 상태였다.
동물로 비유하면 고양잇과 맹수가 커다란 혀로 새끼의 털을 틈만 나면 날름날름 핥는 것과 똑같았다. 아기 맹수는 늘 부모님의 침 범벅이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가끔 젖은 털을 말릴 때가 필요했다.
그때가 바로 비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부모님의 장기 합방 기간이었다.
“…….”
레오니에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나는 지금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가.
저를 키워 준 주주이냐, 앞으로 자신이 키워 낼 유망주인가.
“……사실.”
잠깐의 고민 끝에, 레오니에가 결정을 내렸다.
“나 아빠랑 엄마가 보고 싶었어.”
레오니에는 유망주를 선택했다.
“그치만 괜찮아!”
레오니에가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글썽거렸다.
“부모님이 다정한 건 아주 큰 축복인데, 그걸 내 욕심만 생각해서 방해하기 싫단 말이야.”
“그래도 서운한 걸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칸디아는 그런 레오니에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거기다 자기 딸이 아니었으면 버리겠다니…….”
원망스러운 시선이 펠리오를 향했다. 펠리오는 이제 슬슬 뒷목을 붙잡고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하지만 전 아빠에게 이미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아빠가 날 찾아내지 않았으면 그 끔찍한 고아원에서……!”
훌쩍훌쩍,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가슴에 기댄 채 흐느꼈다.
“울지 마십시오.”
스칸디아가 허둥거리다 이내 꼬옥 끌어안았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믿고 의지해 주세요.”
“뿜뿜, 아니, 스칸…….”
어린 연인은 비극 속 연인들처럼 서로를 애절하게 껴안았다.
“…….”
이를 지켜보던 펠리오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스칸디아가 제 딸에게 잡혀 살 거라는 확신이었다. 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덩어리는 세상을 제대로 접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니에의 연기에 홀라당 빠져 속아 버리는 거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자식새끼 키워 봐야 아무 소용없군.’
무심한 표정과 달리, 펠리오는 가슴이 제법 아렸다. 훌쩍 자란 레오니에 옆에 낯선 남자가 있고, 그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상상.
펠리오는 그 끔찍한 미래를 항상 무시했다. 하나 결국엔 그 순간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레오.”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펠리오의 목소리가 한결 어두워졌다.
“아빠……?”
레오니에는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챘다.
“내가 잘못한 게 좀 있군.”
“그, 그 정도는 아냐.”
괜히 미안해진 레오니에가 서둘러 부정했다. 펠리오는 제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이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을 도로 잡아야지.”
그러곤 인자한 미소로 아이를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았다. 스칸디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애먼 부녀 관계를 비튼 것 같아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네가 나 없는 동안 빼돌린 재산도, 장부 조작해서 탈세한 것도.”
“……어?”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다 나의 부덕이지.”
“그, 그걸 아빠가 어떻게……!”
펠리오를 향해 뻗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경악 어린 표정만이 지금 레오니에가 얼마나 놀랐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 딸이 이제 이런 장난도 칠 줄 아는구나, 싶어 장한 마음에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천천히 다가온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면서 동시에 반대쪽 팔로 스칸디아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엉겁결에 밀려난 스칸디아는 그만 벽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내 새끼가 친 장난은 다 원래대로 돌려놓고.”
레오니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레오 네가 쓸쓸했던 만큼, 아빠가 같이 공부하고 훈련하고 함께 있어 주마.”
나는 너의 자유를 존중해도 네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이리도 어리네.”
우리 새끼, 어리광쟁이.
펠리오가 화려한 역전승을 이뤘다.
“아, 아아아!”
장렬하게 패배한 레오니에가 기어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북부는 강하구나.’
스칸디아는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 북부는 혹독한 계절만큼이나 가정교육도 살벌했다. 하나 그건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예외일지 모른단 생각도 얼핏 들었으나, 그런 걸 따지면 머리가 너무 아플 것 같아 무시하기로 했다.
어쨌건 자신이 장가갈 곳은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 * *
펠리오는 아이를 깊이 생각하는 아버지였다.
그는 저 없는 동안 쓸쓸했다던 레오니에를 위해 사흘하고 반나절 내내 함께했다.
새벽부터 함께 훈련하고, 오전 내내 집무실에서 일을 가르치며, 쉬는 시간엔 가족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공부를 봐주기도 했고, 레오니에가 잠들려고 할 때는 침대 맡에서 아르데아가 최근에 발표한 논문을 손수 읽어 주었다.
물론 그는 레오니에의 이성 교제도 허락해 주는 여유로움도 보여 줬다.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와 외출하려고 하면 친히 마차도 빌려주고, 어느 식당이 맛있는지도 친히 골라 줬다.
바로 옆에서.
“…….”
바리아는 그런 남편이 여러모로 참 대단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드디어 사흘하고 반나절이 지났다.
“이제 속이 좀 후련해요?”
“난 원래 속이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습니다.”
“애초에 리오 당신이, 그, 좀…….”
바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걸, 좀, 적당히 했으면 되었잖아요.”
“바리아, 여보.”
펠리오가 바리아의 손을 조심히 쥐었다. 바리아가 얄궂은 시선으로 밉지 않게 노려보았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속이 후련해 보였다.
“레오가 우리와 같이 보내지 못한 시간 동안 외로웠다고 먼저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 딸을 생각해서 그간 못 챙겨 준 만큼 함께한 거고요.”
“지금 레오 얼굴을 보고도 그래요?”
바리아가 건너편 소파에 앉은 레오니에를 눈짓했다.
“우리 딸 좀 봐요.”
생기가 통통 튀다 못해 팍팍 내려치던 아이가, 지금은 생기가 쏙 빨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저렇게 축 처진 모습을 처음 봤다.
“숯 같잖아요.”
그것도 다 타고 새하얗게 남은 숯이었다. 그런 레오니에 옆에 축 처진 채 앉은 스칸디아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니에만큼이나 펠리오에게 시달린 스칸디아도 맥을 못 추리고 있었다.
‘……근육이도 딸이면 어쩌지?’
바리아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이 재앙을 두 번이나 지켜봐야 한다니, 벌써 눈앞이 캄캄했다.
그 순간.
펠리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둥글게 부푼 바리아의 복부가 꿀렁거렸다. 배 속 근육이가 움직였다.
“보십시오.”
펠리오가 사랑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바리아의 배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큰 손은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이 바리아의 배를 보듬고 있었다.
“우리 근육이도 아빠랑 같은 생각인 모양입니다.”
아닐걸?
바리아가 펠리오의 시커먼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왜냐하면 근육이가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근육이 움직였어?”
때마침 레오니에가 꾸물꾸물 기어 왔다. 어느새 바리아의 다리 옆에 자리 잡은 레오니에가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근육이 잘 잤어? 재미나게 놀고 있지?”
레오니에가 말을 걸자, 근육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 바리아의 두꺼운 옷자락이 살짝 들썩였다.
“와아.”
뒤에서 눈치 보듯 구경하던 스칸디아가 조용히 감탄했다. 태동을 몇 번이나 보았는데도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리 와서 같이 인사해요.”
“그래요, 왜 그렇게 떨어져 있담.”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스칸디아를 가까이 데려왔다. 펠리오도 딱히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빠 화 안 내?”
레오니에가 작게 속닥거렸다.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내가 애도 아니고.”
“애처럼 반대해 놓고 무슨.”
“태아 시절부터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건 좋은 일이야. 그러니 이 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야지.”
“내 연애도 좀 관대해 주지.”
레오니에가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예 반대하라고?”
“어유, 우리 근육이잉!”
레오니에가 앉은 몸을 씰룩이며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펠리오는 간사한 딸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중에 만나면, 재미나게 놀아 줄게? 알았지?”
약속한다며 레오니에가 새끼손가락을 배에 얹었다. 그러자 또 한 번 태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살짝 미약했다.
“안 아프십니까?”
스칸디아가 걱정 어린 눈으로 바리아를 바라봤다. 바리아가 괜찮다며 씩씩하게 웃었다.
“처음엔 좀 놀랐는데, 적응되니 또 괜찮아요.”
“하지만 배가 거의 뚫어질 정도로…….”
스칸디아가 걱정하기 무섭게 배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주 커다란 태동이었다. 털을 촘촘히 채운 겨울 드레스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바리아도 이건 아팠는지 눈을 질끈 감은 채 끙끙거렸다. 놀란 펠리오가 서둘러 바리아의 몸을 잡아 줬다.
“……제가 말을 걸면 늘 이러네요.”
스칸디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풀 죽은 목소리가 가엾었다.
“제가 싫은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좋아해서 이러는 거라고, 바리아가 미소 지었다. 거짓이라곤 전혀 없는 미소였다.
근육이는 남자 목소리에 가장 크게 반응했다. 그것도 이상하게 외모가 무척 훤칠한 남자들의 목소리만 골라서 반응했다. 펠리오는 두말할 것도 없고, 복도를 걷다 마주친 루페가 인사를 해도 꿀렁거리고, 글라디고 기사단에게도 반응했다.
그중 가장 크게 반응하는 건 스칸디아였다. 스칸디아가 말을 걸어 주거나 배에 손을 얹기라도 하면 배를 뚫을 정도로 움직여 댔다. 그때 바리아도 태동이 아프다는 걸 처음 알았다.
‘펠리오는 아빠라서 덜 반응하나?’
그 와중에 펠리오가 더 취향인 바리아는 의아했다.
“역시 내 동생!”
레오니에는 그런 동생이 기특했다.
“네가 벌써 뭘 좀 아는구나!”
태어나기도 전부터 변태의 기질이 느껴진다며 기뻐했다. 과연 동생에게 제 애독서와 근육 크로키들을 보여 준 보람이 있었다.
“태아에게 동질감을 느껴 보긴 처음이야.”
배를 빤히 보던 레오니에가 말했다.
“……여자앤가?”
그 말에 펠리오와 바리아는 서로 다른 이유로 오싹함을 느꼈다. 펠리오는 둘째가 레오니에의 부패한 취향을 닮을까 걱정이었고, 바리아는 이 난리를 또 겪게 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남자아이로 태어나도 괜찮아!”
레오니에는 동생의 성별 따윈 아무 상관없었다.
“그냥 씩씩하고 건강하게 태어나면 돼.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아주 그냥 코딱지처럼 쏙 나오는 거야, 알았지?”
조금 전까지 장난처럼 굴던 레오니에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둘 다 무탈해야 해…….”
북부는 이제 봄이 되었다.
북부가 봄을 맞이한다는 건, 바리아의 출산 예정일도 코앞이란 뜻이었다.
사실 이 예정일은 정확하지 않았다. 둘째가 만들어진 시기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의원 얼굴이 참…….’
레오니에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임신 추정 날들을 전해 듣던 의원의 메마른 눈동자를. 펠리오는 정말 심각하게 부부관계가 있었던 날들과 횟수를 알려 줬지만, 정작 듣는 의원에겐 성희롱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옆에서 얼굴을 붉히던 바리아는 말하기도 입 아팠다.
물론 바리아의 월경 주기와 이런저런 검사 덕에 어느 정도 임신주수를 확인했고, 출산 예정일도 올봄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다만 최근에 의원이 예정일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근육이가 너무 잘 자란 탓이었다.
“…….”
배를 응시하는 펠리오의 안색이 어두웠다.
“너무 걱정 마요.”
그런 남편의 걱정을 안다는 듯, 바리아가 도리어 남편을 위로했다.
“의원이 늘 대기 중이고, 준비도 다 되어 있잖아요.”
바리아는 언제든지 태어날 테면 태어나 보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하나 맹수 부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다가오는 앞날이 기대되면서도 무서웠다.
“……바리아 님은 강하시니까.”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스칸디아가 용기 내어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뒤따라 근육이도 씩씩하게 움직였다.
* * *
“수도는 어땠어요?”
늦은 감은 있으나, 바리아는 남편과 딸에게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그냥 그랬죠.”
“그냥 그랬지, 뭐.”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심드렁히 대꾸했다.
“수도는 날씨가 애매해. 우중충한 하늘에 추적추적한 진눈깨비나 내리고.”
“확실히 사람이 지내기 좋은 곳은 아니지.”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레오니에와 펠리오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수도를 욕했다.
“난 그 수도에서 자랐는데.”
바리아가 쓰게 웃었다.
“엄마, 사실 비밀인데, 나 수도 꽤 좋아해.”
“예전부터 수도는 사람들에게 명당이라 소문이 자자했죠.”
“맞아, 그래서 아빠도 수도에서 3년 내리 복을 쌓고 난 뒤에야 고아원에서 나를 만났잖아.”
“명당 기운이 다 빠져나갔군.”
“뭐 이 아빠야!”
캬아아아, 레오니에가 불쾌감을 토했다.
“황제 즉위식은 어땠습니까?”
스칸디아가 물었다.
“시끌벅적했어요.”
레오니에가 자신이 본 즉위식을 종이에 그리며 말했다. 황관을 쓰던 크리세토스의 옆모습, 수도의 겨울 풍경, 눈 쌓인 수도 저택.
레오니에가 그린 그림은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섬세하고 세밀했다. 덕분에 바리아와 스칸디아는 마치 자신들이 그곳에 갔다 온 것은 기분이었다.
“헤스페리 후작 부부가 참석했거든요.”
티그리아 전 황후는 황태자 책봉식 후에 서부로 내려가 헤스페리 후작이 되었고, 그 뒤에 또 수도로 올라와 황제 즉위식에 참석했다. 그 탓에 경건했던 책봉식 분위기와 달리, 새 황제 즉위 축하 연회는 어수선했다.
정작 헤스페리 후작은 제게 쏟아지는 관심을 아주 멋들어지게 무시하였지만.
“황제 폐하가 배꼽을 잡고 웃었더랬죠.”
레오니에가 연회 당시를 빠르게 그리며 말했다. 손은 점점 빠르게 움직이는데, 도리어 그림은 선명해졌다.
“다들 후작 보고 놀라는 얼굴이 웃긴다면서요.”
“어떤 의미론 대물이지.”
펠리오가 피식 웃었다. 자칫 뒷말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인데도 웃어 버린 크리세토스 황제의 배짱을 좋게 보았다.
“이제 결혼만 남으셨나.”
바리아과 중얼거렸다.
“좋은 분을 만나면 좋겠어.”
벨리우스 황실의 비극이 절정에 이르게 된 건, 사랑은커녕 책임감조차 지니려 하지 않았던 선황제의 만행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그걸 알기에 이번 황제는 그런 실수를 답습하지 않기를 바랐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칸디아가 동의했다.
“형님께서도 저처럼 사랑하는 분과 좋은 연을 맺기를 바랍니다.”
“뿜뿜아……!”
예고 없는 고백에 감격한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도 사랑해!”
레오니에가 그대로 스칸디아의 품에 안겼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는 그대로 팔랑거리며 허공을 날아갔다.
“…….”
그리고 펠리오는 오늘도 마음속에서 스칸디아의 목을 잡아 비틀어 뜯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상상 속 스칸디아는 이만 번 이상이나 펠리오의 손에서 살해당했다.
“아, 이거 줄게요.”
레오니에가 편지 몇 통을 스칸디아에게 건넸다. 연회에서 만났던 헤스페리 후작 부부와 크리세토스 황제가 쓴 편지들이었다.
“후작께서도 참석하셨는데, 저도 갈 걸 그랬나 봐요.”
바리아가 조금 아쉬운 투로 말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십시오.”
펠리오는 단호히 말했다. 지난번 납치와 북부 산맥 사건 이후로 바리아의 단독 외출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공작 부인으로서 대외적으로 해야 할 일들도 레오니에와 함께할 수 있는 걸 제외하고는 전부 다 금지했다.
바리아가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소심한 반항이었다. 하나 그것도 곧 펠리오의 입술에 의해 쏙 들어갔다.
그사이, 스칸디아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혼자 읽으셔도 되는데.”
레오니에가 말했다. 혹여 가족들끼리의 그리움을 나누는 내용이 적힌 편지라면 방에서 혼자 읽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하나 스칸디아는 그 자리에서 세 통을 빠르게 다 읽었다. 그동안 보레오티 세 가족은 조용히 기다려 줬다.
“어머님이.”
편지를 다 읽은 스칸디아가 말했다.
“처가댁에 너무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시네요.”
“처가댁?”
펠리오가 가소롭단 듯이 웃었다.
“요즘은 아무 집이나 처가댁이라 부르는 게 유행인가 보지?”
“아빠도 이제 슬슬 고집 좀 꺾어.”
듣다 못 한 레오니에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아니, 솔직히!”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얼굴과 몸을 척척 가리켰다.
“이 얼굴, 이 근육, 이 키!”
얼마나 대단하냐고 칭찬하는 레오니에의 열성에, 스칸디아가 얼굴을 옅게 붉혔다. 펠리오가 그 모습을 아주 조금 한심하고 안타깝게 바라봤다. 저건 또 뭐 좋다고 히죽거리는 건지, 그냥 다 마음에 안 들었다.
펠리오는 요즘 들어 늘 후회했다.
‘괜히 도와서.’
왜 저의 호의로 딸 도둑이 태어났는지. 왜 자신은 후작과 이벡스 경을 이어 준 건지. 그런 아빠의 속은 전혀 모르는 채, 레오니에가 열심히 남자친구를 자랑했다.
“우리 뿜뿜이한테 모자란 점이 어디 있어?”
“뿜뿜이…….”
바리아가 조용히 어깨를 떨었다. 아직도 저 애칭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나도 있어.”
펠리오가 콧방귀를 꼈다. 오히려 그야말로 레오니에에게 저 칭찬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왔었다.
“아빠가 나랑 결혼해 줄 거 아니잖아.”
레오니에가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물론 이런 외향도 중요해.”
레오니에는 외모를 아주 많이 봤다. 주변에 미인과 근육이 많은 탓이었다.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았다.
“바로 인성이지.”
그 말에 펠리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고,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꼈다.
“내 인성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펠리오가 반박하기 무섭게 아내와 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양심이 북부 산맥처럼 허허벌판이로구먼.”
“가소롭구나, 우리 변태.”
“아빤 뭘 믿고 그리 본인을 칭찬하는 거야?”
“난 널 키웠어.”
속물과 변태라는 단어 그 자체인 레오니에를 이리 잘 키운 것만으로도, 펠리오는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갈 선행은 다 했다고 자신했다.
“오오.”
바리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 나…….”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펠리오의 오만함이 너무 얄미운데, 서글프게도 반박할 거리가 전혀 없었다.
“그치만 아빠도 툭하면 사람 협박해서 구석으로 몰아넣는 음험한 성격이잖아.”
그래서 불효녀는 아빠를 잡고 늘어졌다. 내가 이렇게 자란 건 다 아빠를 닮아서라고.
“……네 엄마는 좋아하던데?”
“애들 앞에서 무슨 소리예요!”
얼굴이 새빨개진 바리아가 등을 받치던 쿠션 하나를 휙, 던졌다. 물론 펠리오는 얄미울 정도로 잘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 냈다. 그리고 도로 바리아의 등에 넣어 줬다.
“별말 안 했습니다만.”
펠리오가 옆에 있던 담요까지 끌고 와 바리아의 무릎에 덮어 줬다.
“레오는 똑똑해서 다 안단 말이에요!”
바리아의 말대로, 레오니에의 눈은 염전에서 한 바가지 퍼 온 천일염만큼이나 바싹바싹 메말라 갔다. 또 쓸모없고 알기 싫었던 부모님의 침대 사정을 알아 버렸다. 스칸디아도 못 들은 척하며 편지만 다시 읽었다.
“어쨌건, 착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펠리오는 너무 착하면 이용당하기 쉬운 호구라며 반박했다.
“영애.”
스칸디아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혹시 공작이 제가 착하다고 걱정하시는 걸까요?”
남의 집 귀한 따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집에서 계속 지내는 것도 미안한데, 착해서 걱정이라고 챙겨 주니 무척 죄송하면서도 감사했다.
“…….”
“…….”
펠리오와 바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바리아는 처음으로 ‘아, 저쪽도 보통은 아니었구나.’라고 넌지시 감탄했다. 그리고 그런 스칸디아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 제 딸도.
“당연하지!”
레오니에는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단 눈으로 스칸디아를 바라봤다. 거의 시선만으로도 스칸디아를 물고 빨고 핥는 중이었다.
“우리 뿜뿜이는 너무 착하고 멋있고 근육이고 귀여운걸?”
저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라면서,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허리와 등 사이를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기 예뻐하듯 다독이는 손길이 이상할 정도 느릿했다.
“어서 어른이 되자고요, 응?”
“영애만 어른이 되면 됩니다.”
“괜찮아요, 제 속은 오래전부터 어른이었거든요.”
누나 믿지?
레오니에가 히죽였다.
바리아가 슬쩍 남편을 보았다. 펠리오는 한숨을 푹 내쉰 채 주먹 쥔 손을 마구 떨고 있었다.
* * *
헤스페리 후작과 황제가 보낸 편지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별개로 펠리오에게 알려 줬으면 한다는 말도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북부 게이트 개방이었다.
헤스페리 후작은 황후였을 적, 펠리오와 약속 하나를 했다. 바로 북부 게이트를 개방하는 조건으로 북부와 서부를 잇는 길목에 관광지구를 만들자고.
실제로 이는 활발히 논의되는 중이었다. 두 지역을 잇는 관목에 산림욕장을 설치하거나 계절 축제 등을 조성하는 방안이 진행되고 있었다.
황제 역시 어머니의 뜻을 이어, 북부 게이트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폐지하겠단 의사를 밝혔다. 현재 북부와 수도 간의 우편과 물자를 게이트를 통해 간헐적으로 운반하는 중이었다.
북부와 수도 간의 오래된 갈등이 조금씩 풀리려고 했다.
편지에 적힌 두 번째 내용은 헤스페리 가문의 후계 문제였다. 원래대로라면 스칸디아가 차기 후작이 되어야 하나, 그는 지금 입장이 여러모로 곤란해서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거기다 스칸디아는 레오니에를 사랑하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어릴 적부터 차기 보레오티로 자랐고, 둘째가 생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훗날 두 사람이 결혼하면 자연히 스칸디아가 보레오티로 들어와야 했다.
한데 다행인지 몰라도, 후작이 지금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 헤스페리 후작은 펠리오에게 전하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둘째가 아무래도 그쪽에 장가갈 것 같으니, 서쪽 후계는 막내가 계승할 것 같다고.
“……첫째는 황제, 둘째는 보레오티, 셋째는 헤스페리.”
늦은 밤, 침대에 앉아 편지를 읽던 펠리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식 농사 한번 잘 짓는군.”
건조하다 못해 바싹 마른 감상이 짧게 이어졌다.
“펠리오.”
콕콕, 하고 등 뒤에서 바리아가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찔렀다. 바리아는 뻗은 팔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크게 부푼 배 때문이었다.
펠리오는 스칸디아가 건넨 편지를 협탁 위에 치웠다. 그리고 바리아가 누운 자세를 손수 고쳐 주며 불편한 곳은 없는지 살폈다. 바리아가 잘게 웃으며 손길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아까와 반대로 몸을 옆으로 누운 바리아는 곧 등 뒤로 저를 감싸는 체온에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허락할 거죠?”
펠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불만스럽게 입술을 꾹 다무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좋아하잖아요.”
바리아가 제 배를 어루만지는 펠리오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당신은 꼭 좋아하면 괴롭히더라.”
레오한테 틱틱거리는 것도 그렇고, 밤에 저 괴롭히는 것도 그렇고.
크고 작은 두 손이 깍지를 꼈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바리아는 이제 펠리오를 잘 알았다. 그의 입에서 ‘싫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제법 괜찮다는 뜻이었다.
곧 뒤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펠리오가 바리아의 머리에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하여튼 저거 얼굴 밝히는 거 보면…….”
“안목이 있는 거예요. 나랑 당신 닮아서.”
바리아가 말했다.
“레오도 이제 열네 살이에요.”
사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되었습니다.”
펠리오가 투덜거렸다.
“나한테는 아직도 작고 어린 덩어리입니다.”
“딸한테 덩어리라니요.”
레오가 들으면 기겁하겠네, 바리아가 쓰게 웃었다.
“물론 레오는 내게도 소중한 딸이에요.”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어린애 취급하면 레오가 미워할지도 몰라요.”
“재산 물려주기 전까지는 싫어도 효도할 겁니다.”
펠리오가 자신했다. 바리아는 역시 저 둘은 빼도 박도 못 할 부녀지간임을 느꼈다. 남편과 딸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나도 압니다.”
이어 펠리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착한 놈이지요. 성실하기도 하고.”
어쨌거나 펠리오는 스칸디아의 대부 같은 존재였다. 그도 그 점을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에 머물 당시에 종종 스칸디아와 크리세토스를 보러 갔었다.
그때마다 둘은 펠리오의 흉악한 인상에 놀라 울었다. 하지만 스칸디아는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바들바들 떨면서도, 꿋꿋이 제게 인사하는 배짱을 보였다. 펠리오는 그때 처음으로 ‘대견’하다는 감정을 느꼈었다.
사실 알고 있다. 이 세상에 펠리오가 인정하는 남자는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리고 스칸디아는 그 손가락 안에서도 꽤나 상위에 들어가는 남자였다.
하나 아빠의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탐탁지 않았다.
“오십이 되면 허락하려고 했더니.”
“그때면 레오가 서른이에요!”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펠리오가 오해하지 말라며 제 말을 정정했다.
“레오가 오십이 되면 말입니다.”
“우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요?”
바리아가 퍽 진지한 목소리로, 남편의 바보 같은 고집에 반박했다.
* * *
스칸디아가 저택에 머무른 지 어느새 4개월이 넘었다.
“작은 부군!”
“작은 부군, 편히 주무셨습니까?”
“작은 부군, 식사는 어떻게…….”
그리고 보레오티 사용인들은 스칸디아를 보면 ‘작은 부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듣기 좋은데요?”
곁에 있던 레오니에가 흥얼거렸다.
“저는 조금 부끄럽군요.”
그 옆에서 손잡고 함께 걷던 스칸디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 호칭이 싫은 건 아니었다. 붉어진 귀가 증거였다.
“당연한 호칭인데 뭐 부끄럽담.”
레오니에의 말마따나, 이는 아주 당연한 변화였다.
일단, 스칸디아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하녀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걸 볼 때면 종종 도와주기도 하고, 매번 식사가 끝날 때마다 요리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미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착한 미인.
스칸디아는 보레오티 특유의 강하고 화려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희뿌연 은발과 이따금 아련하기까지 한 회색 눈동자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절절하게 했다.
그러다 미소 한 번 살짝 지으면 어느새 다들 마음이 사르르 녹아 버린다. 코니 말로는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은 인상이라고 했다.
‘마님과 비슷한 분위기시죠.’
그 말엔 레오니에도 동감했다. 펠리오가 바리아를 데려왔을 적에도, 모두 그녀의 선량한 분위기에 감동했었다.
“부끄러워할 시간에, 응?”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스칸디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떨어지는 순간 마주친 두 눈은 서로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 둘은 정원을 산책 중이었다. 그래서 펠리오는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영애 덕에…….”
“이름.”
“……레오 덕에.”
스칸디아가 수줍게 정정했다.
“덕분에 편하게 지내는 중입니다.”
“내가 뭘 해 줬는데요?”
“이렇게 항상 손을 잡아 주시고.”
스칸디아가 맞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둘은 함께 있을 때면 이렇게 손을 잡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격해지면 조금 더 가까이 붙는 일도 많았다.
사용인 중에는 레오니에가 스칸디아를 벽에 밀쳐 가둔 채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처음 이를 목격했던 하녀는 레오니에가 스칸디아를 협박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공작과 공작 부인께서도 제게 잘해 주시고요.”
“으응?”
레오니에가 걸음을 멈췄다.
“……아빠가 잘해 줘요?”
진짜?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름진 미간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잘해 주십니다.”
스칸디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가 잘해 주는 건 알겠는데…….”
바리아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있는 스칸디아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이것저것 챙겨 주고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살뜰히 물었다. 반면 펠리오는 여전히 스칸디아에게 틱틱거렸다. 이렇게 손잡고 있는 모습을 들키면 어떻게든 끊어 내려고 했다.
“최근 공작이 저와 대련도 해 주십니다.”
“그거 안 힘들어요?”
“제 실력을 인정해 주신 건지, 항상 온 힘을 담아 해 주십니다.”
대련을 빙자한 괴롭힘이군.
레오니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걸 왜 맞고 있어요!”
레오니에는 속이 상했다. 어쩐지 요즘 스칸디아의 팔뚝에 멍이 그득하다고 했다.
“대련하면 다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 바보야…….”
사람이 어쩜 이렇게 착하고 미련한지. 레오니에는 속상했다. 그리고 펠리오가 처음으로 미워질 것 같았다.
“사실 말이지요.”
그런 레오니에의 볼을 어루만지며, 스칸디아가 조심히 말했다. 레오니에가 저 때문에 속상해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 조금 기뻤다.
“대련 중에 한 번이라도 자신의 몸에 검을 닿게 한다면, 교제를 인정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빠가요?”
그 말을 한 게 진짜 아빠라고?
레오니에가 믿기지 않는 마음에 한 번 더 물었다. 그러나 스칸디아는 정말이란 듯이 웃을 뿐이었다.
“아빠가……!”
그런 전형적인 고전을 선택하다니!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내 딸을 데려가려거든 나를 무찔러야 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유치하고 감동적인 대사들이 절로 떠올랐다.
당연히 펠리오는 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스칸디아가 미워서 대련을 핑계로 괴롭힐 뿐이었다. 그리고 스칸디아에게 그런 희망 고문을 한 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꼭 이겨요! 검으로 우리 아빠 심장을 꿰뚫어 버려요!”
“그러면 돌아가시는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어쨌건 힘내라는 말과 함께,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품에 와락 안겼다. 갑작스러운 안김에 당황한 스칸디아가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하지만 아직 채 녹지 않은 눈 때문에 크게 아프지 않았다.
그 설레발 때문에, 레오니에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잠시 잊어버렸다.
펠리오 보레오티.
한 가정의 가장.
북부의 수장.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다.
* * *
보레오티의 봄은 다른 지역과 많이 다르다. 분명 달력상 봄인데도 눈이 내리고, 응달진 곳에는 얼음이 꽝꽝 얼었다. 아직 도톰한 솜이불을 덮어야 하고, 머리를 감고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살얼음이 맺힐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 변화는 있었다. 화단에 쌓인 눈은 점점 두께가 얇아졌다. 내리는 눈도 싸락눈이고, 하늘에 뜬 해도 눈에 띄게 길어졌다. 메마른 나무와 땅에 앙증맞은 새싹이 돋아났다.
그리고 보레오티 저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너무 큰 거 아냐?”
레오니에는 이제 바리아를 볼 때면 인사보다 걱정부터 먼저 했다. 사람 배가 이렇게 커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태어날 날이 얼마 안 남아서 그래.”
바리아가 배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기는 대답이라도 하듯 힘차게 발길질을 했다. 그 움직임이 두꺼운 옷을 뚫고 나왔다.
“이런 거 보면 진짜 세상 억울해.”
레오니에가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임신수는 있으면서 임신공은 왜 없는 거야?”
“이, 임신공?”
바리아가 크게 당황했다. 하나 레오니에는 스스로 떠올린 재앙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변태적이다 못해 천벌 받을 발상이 어느새 인류의 진화론까지 건드렸다.
“그래, 그런 거야…….”
레오니에는 깨달음의 문 앞에 섰다.
“진정한 광공이라면, 응당 사랑하는 이를 대신해 자신의 몸으로 임신까지……!”
새로운 문이 열리기 직전, 광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완성하려던 찰나.
“레오.”
스칸디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이 찾아요.”
“아이씨…….”
맥이 푹 빠져 버린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바리아를 핑계로 늦장을 부리려고 했더니, 펠리오가 아예 스칸디아를 보내 버렸다.
“가기 싫어.”
새초롬한 눈꼬리가 축 늘어졌다.
“아빠 요즘 너무 엄해.”
“왜? 펠리오가 화내?”
바리아가 아이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물었다.
“으으응.”
레오니에가 부정했다. 펠리오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 말도 안 해.”
전에는 레오니에가 처리한 업무를 보며 잘하고 못한 점을 하나씩 말해 줬다. 맡기는 일도 쉬운 것들이고, 정말 중요한 건 항상 본인이 처리했다.
하지만 요즈음 어떤 조언도 없었다.
“내가 처리한 일들을 스윽 보고는, ‘이게 다야?’ 딱 이 한마디만 한다니까!”
“잘해서 그런 거겠지.”
“아니야, 나 괴롭히는 거야.”
레오니에가 엄마 배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처리한 일들을 훑어만 볼 뿐이었다. 어떤 조언이나 충고도 없었다. 그는 이제 레오니에가 제 실수를 스스로 찾고, 그 과정을 빠르게 익혀 실수하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인간이 실수 좀 해야 매력 있지.”
자긴 뭐 처음부터 잘했나.
불퉁한 표정으로 구시렁대던 레오니에가 애꿎은 바닥만 발로 틱틱 두드렸다.
‘근데 아빠는 처음부터 잘났대.’
루페고 카라고, 펠리오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펠리오의 유년 시절을 똑같이 증언했다.
“근육아, 다녀올게?”
레오니에가 동생에게 칭얼거렸다.
“우리 근육이 무사히 태어나면, 장미들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함께 공부하자?”
그러자 근육이가 크게 반응했다. 바리아가 앓는 소리를 끙끙 냈다.
“아이고, 근육아! 살살 쳐!”
“엄만 괜찮으니까 어서 가.”
“동생분과 정원 나들이라도 하시려고요?”
스칸디아가 참으로 어여쁜 소망이라고 말했다.
“……진짜 가기 싫다.”
토끼 같은 엄마와 남자친구, 그리고 동지애가 느껴지는 동생을 두고 가야 한다니. 레오니에는 오늘따라 천근만근인 엉덩이를 겨우 떼어 냈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배웅한 스칸디아가 바리아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전 환자가 아닌데, 다들 왜 그리 걱정한담.”
“생명을 잉태하신 몸이니 다들 걱정하는 겁니다.”
“스칸 님은 말도 참 예쁘게 하시지.”
바리아는 근육이가 스칸을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칸디아의 귀가 붉어졌다.
“산책하시겠습니까?”
“좀 걷고 싶긴 하네요.”
스칸디아는 바리아의 몸을 조심히 일으켰다. 바리아가 엉거주춤하며 제 발로 서는 동안, 스칸디아가 옆에 있던 숄을 챙겨 어깨에 걸쳐 줬다.
“오늘 날씨가 좋습니다.”
“그러게요. 하늘도 유난히 푸르네요.”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둘은 복도를 걸어 어느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스칸디아가 문을 열었다.
“공작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감탄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건물 안에 정원을 만들다니요.”
방문을 열었는데, 안에는 푸른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펠리오는 바리아가 납치당했던 일이 엄청난 충격으로 남은 듯했다. 북부에 돌아온 뒤로는 바리아가 절대 혼자서는 나가지 못하게 했고, 바리아도 그날이 여러모로 힘들었기 때문에 홀로 외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바깥 외출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임산부는 적절한 운동이 필요했고, 그래서 펠리오는 공사를 진행했다. 바리아를 위해 마련한 산실 근처에 안 쓰는 빈방들을 전부 뜯어 정원으로 만들었다.
“레오 말로는 주접이라네요,”
바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신발 아래 닿는 흙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 남편에게 시달렸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만큼 공작님이 부인과 배 속 아기씨를 걱정한다는 뜻입니다.”
둘은 실내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정원 내부는 일정 온도를 항상 유지했고, 덕분에 올망졸망 예쁜 꽃들이 겨우내 피어 있었다. 눈이 2층 건물 높이까지 쌓이는 겨울에는 이곳에서 돗자리를 깔고 소박한 소풍을 즐기기도 했다.
“카라가 무척 슬퍼했죠.”
바리아는 아직도 선명했다. 역사와 전통 그 자체인 보레오티 저택을 뜯어 버리는 공사 앞에서 슬퍼하던 카라의 얼굴을 말이다.
실내 정원은 꽤 길었다. 펠리오가 아예 한 층의 절반을 정원으로 만든 탓이었다. 덕분에 산모가 걷기 좋은 보드라운 흙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금 쉬시겠습니까?”
“그렇게 안 힘든대…….”
“공작이 부인과 함께 산책할 땐 무조건 10분에 한 번씩 쉬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펠리오…….”
바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침 근처에 푹신한 쿠션이 가득 있는 그네 모양의 의자가 있었다.
“스칸 님도 앉으세요.”
자리에 앉은 바리아가 제 옆을 톡톡 쳤다. 스칸디아는 거절하지 않고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둘은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무척 평화롭고 잔잔했다. 불편한 기운도 없었다. 바리아와 스칸디아는 닮은 구석이 의외로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침묵조차도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아.”
하지만 배 속 아기는 아닌 듯했다.
“그래, 근육이도 있었지?”
바리아가 태동이 느껴지는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기가 정말 씩씩하네요.”
스칸디아가 감탄했다. 단 한 번도 배 속 아기가 안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스칸 님 동생도 많이 자랐겠죠?”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 어머님이 입덧이 좀 심하셨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 세상에나.”
바리아가 제 일처럼 걱정했다.
“몸에 좋은 거라도 보내드려야겠어요.”
이미 여러 차례 보냈지만, 그래도 힘들다는데 당연히 또 보내야 했다.
‘내 사돈 되실 분!’
바리아는 입술을 비장하게 다물었다. 어차피 레오니에가 결혼하면 진짜 아들이 되는 거니까, 이런 오지랖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펠리오의 반대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레오는 정 안 되면 임신부터 할 거 같아.’
레지나란 선례가 있어서 최대한 조심하겠지만, 펠리오가 저렇게 계속 고집이면 자식 결혼보다 손주를 더 빨리 볼 것 같았다.
“부인.”
그때, 스칸디아가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스칸디아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였고, 바리아는 이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줬다. 어쩐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추 알 것 같았다. 다행히 스칸디아는 용기를 금방 내었다.
“배를 아주 잠깐만, 만져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바리아가 선뜻 허락했다.
하지만 스칸디아는 쉬이 배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몇 번 인가 허락받고 시도를 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제가 말만 걸어도 근육이가 너무 크게 움직여서 겁이 나 매번 실패했었다.
이를 바라보는 바리아가 쓰게 웃었다.
‘아직 어리구나.’
바리아가 스칸디아의 손을 잡아 제 배 위에 올렸다.
“……오.”
스칸디아의 넓은 어깨가 움찔했다. 배에 손을 얹자마자 아기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반가워요, 라고 인사하네요.”
“저도 반갑습니다.”
얼떨결에 인사하니, 또 한 번 아기가 힘차게 움직였다. 놀란 스칸디아는 바리아를 걱정했다.
“안 아프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요즘은 그래도 익숙해져서 참을 만해요.”
“하지만 살가죽을 뚫고 나올 것 같습니다.”
“방금 표현이 레오 같았어요.”
바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아무래도 근육이는 스칸 님의 목소리가 좋은 모양이에요.”
진짜 여자아이인가? 바리아가 중얼거렸다. 스칸디아는 그 틈에 몇 번인가 더 말을 걸었다. 자신에게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이 있고, 제 동생과 나중에 사이좋게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근육이도 열심히 반응했다.
‘……이건 좀 아프네.’
바리아가 통증을 살짝 느낄 즈음이었다.
“저도 많이 보고 싶습니다.”
스칸디아가 또박또박, 마치 눈앞에 정말로 아기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건강하게 태어나셔야 합니다. 모두 기다리고 있답니다. 당연히 저도요. 특히 레오는 장미들판에서 당신과 노는걸…….”
그때였다.
바리아가 스칸디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스칸 님…….”
심상찮은 부름에 스칸디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 죄송한데…….”
바리아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기울어졌다. 놀란 스칸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그네가 흔들리는 걸 서둘러 붙잡았다.
“남편이랑 딸 좀, 불러 주시겠어요?”
아무래도 진통이 시작되는 듯했다.
* * *
처음 가진통을 경험했을 때.
‘이 정도면 순풍 낳겠는데요?’
‘아파 죽겠다고 울 땐 언제고.’
‘리오 당신이 울었죠.’
‘운 게 아니라 주저앉은 겁니다.’
펠리오는 그런 아내를 더욱 못 미더운 시선으로 보았다. 제 손을 잡은 채 아프고 무섭다고 엉엉 울던 건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쨌건 올 테면 와라!’
‘레오한테 허세 옮았습니까?’
바리아는 이 정도 통증이라면 무난하게 근육이를 낳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
‘이거 장난 아니겠는데?’
바리아는 오만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진짜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걸 직감한 순간에 알아챘다. 곧 들이닥칠 고통은 그깟 가진통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자 손발이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렸고, 이마에선 괜히 식은땀이 맺혔다.
‘잘할 수 있을까?’
진통이 시작되면 나중에 진짜 아프다던데.
근육이는 무사히 낳을 수 있을까?
만약 잘못되면 어쩌지?
수없이 각오하고 기다려 온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바리아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혹여 아기와 자신이 잘못되어 큰일이라도 날까 무서웠다.
“바리아 님!”
스칸디아가 큰 소리로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
“조금 전에 사람을 불렀습니다.”
스칸디아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 사람을 찾았다. 마침 레오니에의 전담 하녀인 코니가 지나가고 있었다. 바리아의 상태를 들은 코니는 서둘러 펠리오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곧 있으면 공작과 레오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 자신이 옆에 있겠다며, 스킨디아가 바리아의 손을 잡으며 힘줘 말했다.
“…….”
넋이 나간 듯이 스칸디아를 바라보던 바리아가 반대편 손을 들었다. 그리곤 제 볼을 찰싹 때렸다. 놀란 스칸디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정신 차려!’
이제부터 자신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저도 근육이도 큰일이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얼얼한 볼 때문에 한결 침착해졌다.
‘일단 산실로 가서…….’
바리아는 자신이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빠르게 떠올렸다. 여태 차곡차곡 준비했던 것들이 떠오르니 두려움도 한결 가시는 듯했다.
그때, 부산한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리아!”
“엄마!”
집무실에서부터 뛰어온 부녀의 얼굴엔 핏기가 싹 가셨다. 누가 보면 바리아가 아니라 이 두 사람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엄마 괜찮아?”
레오니에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리아와 바리아의 배를 번갈아 봤다.
“양수 터졌어? 아파? 죽을 거 같아?”
“그 정도는 아니야.”
바리아는 지금 진통이 잠깐 가셔서 아주 괜찮은 상태였다.
“아직 괜찮으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엄마는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레오니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 놀란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고 더 놀랐다.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신경질적으로 코를 훌쩍거렸다.
“제발 그놈의 괜찮다는 말 좀 하지 마!”
사람이 왜 그렇게 쓸데없이 착하냐며, 그러는 게 보는 사람을 더 괴롭히는 거라고 레오니에가 화를 냈다. 기어코 아이의 검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진짜 괜찮은데…….’
바리아는 마음이 복잡했다. 진통이 가라앉은 지금이야말로 산실로 가야 하는 기회였다. 그런데 레오니에가 너무 걱정하니 이 이상 뭐라 말하는 것도 힘들었다. 거기다 콧물까지 훌쩍이는 딸의 착각이 너무 귀여웠다.
‘우는 거 처음 봤어.’
가슴이 아리면서도 웃음이 계속 새어 나오려고 했다. 옆을 슬쩍 보니 스칸디아도 비슷한 생각인지, 꽤 심각하고 진지한 눈으로 레오니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레오.”
내내 말없이 바리아를 살피던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놀라면 바리아가 더 놀라.”
“그치만 엄마가, 안 괜찮은데, 흐윽, 계속 괜찮다고……!”
“엄마는 정말 괜찮아.”
아마 진통이 잠복기에 들어간 것 같다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여보……!”
바리아는 크게 감동했다. 지금 이 상황에 필요한 건 바로 저 냉철한 상황 판단력이었다.
“아빠, 엄마 괜찮을까?”
“당연하지.”
펠리오가 힘주어 말했다.
“정 안 되면 여기서 출산하면 돼.”
펠리오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태어나는 아이를 받는 방법과 후처리 등을 책을 통해 배웠다.
“…….”
바리아는 일순 불길함을 감지했다.
“그러니 날 믿고 여기서 아기를 낳아도 됩니다. 진통을 느꼈다니 곧 출산하겠군요.”
“미친, 아빠 쩐다!”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바리아, 통증은 일정 간격으로 느껴집니까?”
펠리오가 제 겉옷을 벗어 바리아의 허리 아래에 깔아 줬다.
“아빠, 나도 도울게!”
레오니에가 소맷자락을 팔꿈치까지 접었다.
“뜨거운 물이랑, 깨끗한 천, 또 뭐가 필요하더라…….”
레오니에는 출산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펠리오가 책으로 생명의 탄생을 공부할 적에 옆에 같이 있어서 어느 정도 기억해 뒀다.
‘……이거 큰일이다.’
침착하게 난리 치는 남편과 딸을 보며, 바리아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어쩌면 저 둘을 부른 건 실수일지 모른다고.
그리고 곧 찾아올 진통으로 저 두 사람의 호들갑이 더욱 커진다는 것도.
“……윽!”
예상하기 무섭게 진통이 바리아를 덮쳤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통증이었다. 바리아가 저도 모르게 그만 손을 뻗어 펠리오의 팔뚝을 잡았다. 아직은 참을 만하나, 드디어 제대로 된 진통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당장 나오려나 보다.”
펠리오가 침착하게 오판했다.
아니야!
아프긴 해도 여기서 낳을 만큼 급한 건 아니었다. 하나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바리아의 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통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이다.
“보레오티 공작, 공작 영애.”
그때였다.
“두 분 덕에 부인은 무척 안도하고 있을 겁니다.”
바리아가 믿기지 않는단 눈으로 스칸디아를 바라봤다. 안도는커녕 지금 이 흙바닥에서 진짜 애를 낳을까 봐 걱정이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보다 산실이 부인에게 더 편할 겁니다.”
이곳 실내 정원을 나가면 산실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곳엔 청결을 유지한 침대와 다양한 상황에 필요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 사위……!”
배신감에 상처 입었던 초록색 눈에 희망이 반짝였다.
“그리고 제가 진통 간격을 확인해 봤는데, 아직 1기인 것 같습니다.”
보레오티 가족이 임신과 출산에 대해 공부할 때, 스칸디아도 옆에서 함께 관련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다.
“여기서 진통이 조금 가라앉으면 그때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살짝 떠밀리듯 익혔던 지식이 오늘 빛을 보게 되었다.
“…….”
“…….”
맹수 부녀는 그제야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오늘 같은 순간을 기다려 왔지만, 막상 닥치니 멍청한 짓만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부끄러워할 시간이 없었다.
때마침 바리아의 진통이 잠잠해졌다.
“좀 괜찮습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그럼 조금만 참아.”
조급해진 나머지 짧게 나온 말투와 달리, 바리아의 등과 무릎 아래로 두 팔을 넣어 안아 올리는 펠리오의 움직임은 조심스럽다 못해 정중하기까지 했다.
“공작님, 먼저 문을 열겠습니다.”
스칸디아가 먼저 앞장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레오니에는 가장 먼저 달려가 산실 앞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펠리오가 도착하기 무섭게 문을 열어 줬다. 산실 안에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으아아앙!”
바리아는 폭신폭신한 이불보가 몸에 닿기 무섭게 울음을 터트렸다.
“나 진짜 거기서 애 낳는 줄 알았어! 이 멍청하고 귀여운 남편아!”
평소엔 그렇게 멋있으면서 왜 아까는 그렇게 사람이 변했냐며, 바리아가 목 놓아 울었다. 정원에서 있었던 일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어요.”
펠리오는 그저 자신이 잘못했다며 바리아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사과했다.
“왜 리오 당신이 근육이를 받으려고 해!”
“남편이 응급상황에 자기 자식 좀 받을 수 있지…….”
“나도 낳는 걸 못 보는데 네가 왜 보냐고!”
부부가 이상한 말다툼을 하는 동안, 의원이 바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아기님이 태어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아플까요? 많이 아플까요?”
“공작 부인, 저희가 함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원이 괜찮을 거라며 위로했다. 하지만 바리아는 저 말이 결코 위안으로 들리지 않았다. 의원은 결국 끝까지 안 아플 거란 소리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옆에 있을 겁니다.”
펠리오가 겁에 질린 바리아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소리도 지르고.”
“소리 지르면 힘 빠져서 안 됩니다. 아기님 낳으시다 힘 빠지면 큰일이에요.”
의원이 끼어들었다. 펠리오는 의원을 아주 탐탁지 않게 노려봤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해 줬으니 봐주기로 했다.
“……여보, 옆에 있어 줄 거죠?”
바리아가 훌쩍거렸다. 펠리오가 당연하단 듯이 아내의 이마에 입을 쪽 맞췄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옆에 있을 겁니다.”
“아기가 아니라, 근육이라고 불러 줘요…….”
“…….”
펠리오는 이게 무슨 부탁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큰일을 앞에 둔 바리아에게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근육이는 무사할 겁니다. 리아 당신도.”
펠리오가 순순히 태명을 불렀다. 그제야 바리아가 기쁘게 웃었다.
* * *
바리아와 펠리오가 산실에 들어가고, 둘이 남은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는 산실 밖 복도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하녀가 그런 둘을 보며 깜짝 놀라더니 이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담요, 방석 등을 챙겨 줬다.
“괜찮으십니까?”
스칸디아가 제 몫의 담요를 레오니에에게 둘러 주며 물었다.
“아까 나 멍청했죠?”
레오니에가 멋쩍게 웃었다. 스칸디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이 왜 멍청합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전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그런 준비를 하지 못할 겁니다.”
분명 조금 전 맹수 부녀는 이상하긴 했다. 평소보다 바보처럼 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어느 누가 사랑하는 아내와 엄마를 걱정해 아이를 받는 것까지 각오하고 공부한단 말인가. 스칸디아는 한 번 더 펠리오를 존경하게 되었고, 레오니에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런 감동과 별개로.
스칸디아는 레오니에가 울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저 사람도 울 수 있구나.’
레오니에가 우는 걸 처음 보았던 스칸디아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스칸디아는 단 한 번도 레오니에와 눈물을 연관시킨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레오니에는 무척 강한 사람이란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스칸디아는 그런 레오니에에게 매료되었다.
자신은 결코 그녀를 이길 수 없으며, 세상 모두가 그녀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거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오늘 레오니에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바리아가 혹여 아이를 낳다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해서. 그때 스칸디아는 어릴 적 보았던 레오니에가 떠올랐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울먹이던 모습을 보니 그때의 어린 모습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울 수 있구나.’
맹수도 우는구나.
당황할 수 있구나.
“……우는 모습도.”
스칸디아가 중얼거렸다.
“아름다웠습니다.”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그 눈물을 내가 다 맛보고 싶을 정도로.
‘울려 보고 싶다.’
이번에는 오로지 저 때문에 울어 줬으면 했다. 저를 걱정하는 눈물도 보고 싶었지만, 그것과는 조금 더 다른 이유로 울려 보고 싶었다. 하나 스칸디아는 그 마음을 깊숙이 숨겨 뒀다.
“아, 뭐, 효녀의 눈물이었죠.”
레오니에가 수줍게 웃었다.
‘이것 봐.’
스칸디아는 그런 레오니에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다.
‘순진한 건 레오인데.’
레오니에는 늘 스칸디아가 멋모르는 순진한 사람이라고 믿지만, 사실 스칸디아는 그렇게까지 어수룩하지 않았다. 애당초 여태 운이 좋아 황궁에서 정체를 숨길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눈치를 살피고 누구보다 빠르게 어른이 되어야 했다.
하나 이런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에 늘 속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레오니에는 그런 스칸디아를 항상 귀엽고 착하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스칸디아는 궁금했다. 과연 그녀는 자신이 내뱉는 말의 무게를 알고 저러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뭘 생각하는지 모를 거야.’
레오니에는 늘 자신이 엄한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스칸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빈도나 상상 속 내용만 따지자면 자신이 더 위험했다.
‘공작은 알고 있어.’
검은 맹수는 촉이 기민했다. 그러니 펠리오가 제 딸을 두고 이런 감정을 품은 저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스칸디아는 그런 펠리오를 충분히 이해했다. 저도 저 같은 놈이 딸에게 접근하면 어떻게든 말릴 터였다.
“우리 엄마 괜찮겠죠?”
두 다리를 가슴까지 모아 안은 채, 레오니에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근육이도 무사해야 하지만, 그래도 역시 엄마가 조금 더 걱정이에요.”
“두 분 다 무사할 겁니다. 누구보다 강한 분들이니까요.”
스칸디아는 그런 속을 꽁꽁 감췄다. 그리고 레오니에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지었다.
“……스칸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레오니에가 슬그머니 스칸디아의 어깨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그리곤 마구 비비적거렸다. 정전기가 일어난 검은 머리칼이 스칸디아의 옷자락에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이거 봐요! 정전기!”
“머리가 엉망이 되셨네요.”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정리해 줬다.
‘아직은 기다려야 해.’
저도 어리고, 레오니에는 더 어리니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모두가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이 소녀가 제게만 그토록 사랑스러운 미소를 허락해 주는데,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스칸디아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까지 레오니에의 곁을 지킬 자신과, 레오니에가 저 아닌 누구도 돌아보지 않게 만들 자신.
“동생분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으신가요?”
스칸디아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래요.”
“울진 않을 거고요?”
“이제 안 울어요.”
“정말입니까?”
“으음, 엄마랑 동생 보면 조금은 울려나?”
레오니에가 엄지와 검지로 아주 작은 틈을 만들며 ‘이만큼?’이라고 살짝 웃었다.
“그럼 오늘만 울기로 합시다.”
스칸디아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레오니에도 따라 손가락을 걸었다.
“오늘 내가 운 거, 스칸은 다 잊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둘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리고 스칸디아는 이 손가락에 다음부터 레오니에가 흘릴 눈물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는 일방적인 약속을 몰래 걸었다.
* * *
바리아가 산실에 들어간 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어졌고, 하녀들이 부산하게 산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때마다 레오니에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산실에서 나오는 하녀들이 종종 피가 묻은 천을 옮기고 있었고, 문이 열릴 때마다 바리아가 아파하는 소리도 생생하게 들렸다.
“레오 말이 맞았어! 왜 세상에 임신공은 없냐고!”
“내가 다 미안하니까 소리만 지르지 말고…….”
“나만 낳는 건 억울해! 당신도 낳아요!”
하다못해 모유 수유라도 네가 하라는, 악에 받친 바리아의 원망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다 가끔은 소리조차 못 지르고 끙끙 앓는 신음만 흘러나오기도 했다.
“마님! 주인님 머리 뜯겨요!”
“여기 인형 쥐세요! 이러다 주인님 목 뜯어질……!”
산실에 들어간 하녀들이 필사적으로 펠리오를 구하려는 소리도 들렸다. 그만큼 바리아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단 뜻이었다.
“제발, 제발…….”
레오니에가 기어코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했다.
‘진짜 이번만 비는 거야. 너희 때문에 울 엄마 두 번이나 과거로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제발 순산하게 해 주라고!’
동생만 무사하게 태어나면 안 된다. 바리아도 무사해야 했다.
‘두 사람 다 무사히……!’
레오니에는 열성을 다해 기도했다. 어렸을 적 고아원에서 신을 찾았을 때보다 더 필사적이었다. 그 긴장감이 전해진 스칸디아도 쉬이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기실 그 역시 서부에 있는 후작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이 떠올라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때였다.
“아가씨!”
코니가 산실 문을 열고 나왔다.
레오니에와 스칸디아가 동시에 일어났다. 레오니에가 앉았던 의자는 덜컹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으애, 으애앵!”
산실 안에서 들리는 낯선 울음이 레오니에를 사로잡았다. 가늘고 여린 목소리가 무척이나 힘찼다.
“어, 엄마는? 엄마는?”
“마님은 무사하세요! 작은 아가씨도요!”
어서 들어가 보시라며, 코니가 코를 훌쩍이며 재촉했다.
“다녀오십시오.”
스칸디아가 자신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
산실 안으로 들어간 레오니에는 쉬이 발걸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뒷정리하는 의원이나 하녀들의 분주함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레오니에의 시선은 오로지 침대에 누워 있는 바리아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펠리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바리아는 어떻게 봐도 지친 상태였다. 힘을 잔뜩 준 탓에 얼굴에 실핏줄이 터져 울긋불긋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산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부어 있었다. 하지만 바리아는 웃고 있었다. 그런 바리아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는 펠리오 역시 웃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눈가엔 보기 드문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곧 의원이 포대기 하나를 두 사람에게 건네줬다. 펠리오는 포대기 속 아기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
레오니에는 쉬이 저곳으로 갈 수 없었다.
‘원래 동생의 것이잖아요.’
펠리오와 바리아의 사랑, 보레오티의 후계자.
‘처음으로 후회가 됐어요.’
‘근육이가 나중에 저를 원망하면 어쩌지요?’
‘난 내가 가진 걸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본래 이 모든 것의 진짜 주인이 드디어 태어났고, 레오니에는 원래 살던 세상에서 글로만 접했던 모습을 처음 두 눈으로 목격하는 중이었다.
‘처음으로 후회가 됐어요.’
한때 떨쳤다고 여겼던 고민이 다시 레오니에의 발목을 붙잡았다.
“레오.”
그런 레오니에를 발견한 바리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딸, 이리 와 봐.”
바리아가 어서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신기하게도, 멈춰 있던 레오니에의 발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오니에조차 놀랄 정도였다. 어느새 다급해진 발걸음은 성큼성큼 침대까지 도착했다.
“……엄마는 정말 애 낳은 사람 맞아?”
왜 이리 기운이 넘쳐? 레오니에가 괜히 무안해져 멋쩍은 농담을 흘렸다.
“그리고 아빠는…….”
아이는 말을 아꼈다. 멀쩡한 바리아와 달리, 펠리오는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 단추는 죄다 뜯겨 있었다.
“네 엄마가 신보다 강하더라.”
펠리오는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실웃음을 흘렸다. 옆에서 바리아가 미안하다고 웅얼거렸다. 산통 때문에 정신이 없어 자신도 펠리오한테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얘가 아기야?”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품에 안긴 포대기를 가리켰다. 워낙 펠리오의 체격이 크다 보니, 하얀 포대기에 말린 아기가 꼭 조그마한 밀빵처럼 생겼다.
“엄청 귀여워. 레오 널 많이 닮았더라.”
바리아가 키득거렸다. 펠리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동생이 제 언니 닮는 건 당연한 거죠.”
“그래도 내 배에서 자랐는데, 내 모습도 좀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한 명 더 낳을까요?”
“당신이 낳는 거 아니면 입 다물어요.”
임신공도 아니면서 어딜 감히 낳자고 말해, 바리아가 으르렁거렸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순풍순풍 낳을 거 같다고 자신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에헤, 혼났대요!”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웃었다.
“혼난 거 아니야.”
펠리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네가 왔으니 이제 부를 수 있겠군.”
“응? 뭘?”
“우리 둘째 이름.”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도 안 불렀어?”
“레오 네가 지었으니, 네가 먼저 불러 줘야지.”
“보레오티에 그런 전통이 있어?”
“그런 전통을 오늘부터 만들어도 괜찮겠군.”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레오니에는 괜히 부끄러워 시선을 휙 돌렸다. 어쩐지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자.”
곧 펠리오가 포대기에 싼 근육이를 레오니에에게 건넸다.
“어, 어어……!”
레오니에가 당황하며 허둥거리자, 펠리오가 침착하라며 팔 자세를 고쳐 줬다.
품에 안긴 아기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작고, 가볍고, 따뜻했다.
“…….”
레오니에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 아이가 원래 두 사람의 첫 아이여야 했고, 차기 보레오티가 되어야 했다. 레오니에가 가진 모든 것의 원래 주인이었다.
“세상에나.”
펠리오의 도움을 받아 상체를 살짝 일으킨 바리아가 기쁘게 웃었다.
“근육이가 언니를 알아보네.”
조그마한 아기는 레오니에의 품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 했다. 레오니에가 아기가 원하는 대로 자세를 고쳐 주자, 아기는 편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
레오니에는 가슴이 쾅쾅 뛰었다.
“……너 우냐?”
지켜보던 펠리오가 퍽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바리아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으애애애앵!”
기어코 레오니에가 눈물을 흘렸다.
“어,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울 수가 있어!”
아기는 새빨갰다. 채 뜨지 못한 눈은 퉁퉁 부어 있는 것 같고, 앙증맞은 코 아래 꾹 다물린 일자 입술은 어째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검은색을 몸에 품고 있었다. 아기는 예상했던 대로 맹수의 송곳니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다 상관없었다.
“안녕, 근육아…….”
인사를 건네는 언니의 목소리엔 기쁨의 눈물이 그렁그렁 묻어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레오니에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이 알던 원작은 일찌감치 끝났다. 그러니 이 아기도 원작과 전혀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사랑스러운 동생일 뿐이었다.
‘그래도 원래라면 다 너의 것이었어.’
내가 지금 가지고 누리는 모든 건, 원래 다 너의 것이었어.
‘하지만 난 주지 않을 거야.’
대신 네가 가지지 못했던 하나를 줄게.
‘내가 네 언니가 되는 거야.’
지금 이 마음속에서 흘러넘치는 행복한 감정을 너에게 오롯이 주겠다며, 이 세상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동생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했다.
“우리 레아.”
내 여동생.
“벨레아니 보레오티.”
레오니에가 동생의 이름을 드디어 불렀다.
“내 동생으로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