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이름 (41/51)

외전 1. 이름

레오니에 보레오티.

보레오티 공작 부부의 장녀이자, 북부의 수장이 될 명실상부 후계자.

어릴 적에는 고아원에서 자란 천한 사생아란 악의적인 꼬리표 때문에 얕보인 적도 있으나, 지금은 그 누구도 레오니에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특히 이번 반란 진압으로 입지를 더욱 다진 덕에, 귀족들에겐 레오니에가 현 공작인 펠리오보다 더욱 흉악한 보레오티가 될 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일찌감치 그 싹을 알아본 티그리아 황후는, 언젠가 ‘넌 네 아빠보다 더한 공작이 되겠어’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할 정도였다.

아이는 영악하고 강인했다. 심지어 간사한 면을 숨기지 않으니 잔인하기까지 했다.

하나 이런 레오니에도 부모님 앞에서는 평범한 아이였다. 부모님의 사랑에 몸을 배배 꼬고, 칭찬을 들으면 귀를 붉히며 얼굴을 손으로 감싼다. 펠리오가 늘 주는 딸기우유 맛 사탕은 항상 유리병에 저금하며, 바리아와 함께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했다.

이따금 부모 속 썩이는 사고도 치며 따끔한 꾸중을 받기도 했다.

공작 부부에게 레오니에는 이토록 어리고 귀여운 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아이에게 무른 것도 아니었다. 특히 펠리오가 레오니에에게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연애였다. 누군가가 듣는다면 펠리오가 딸을 너무 아껴서 그런다고 하지만, 그건 펠리오를 전혀 모르기에 하는 소리였다.

펠리오는 진심으로 레오니에의 연애를 금지했다. 결혼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차기 보레오티를 이을 레오니에는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 이를 위해선 사위를 반드시 들여야 했고, 그것이 루페를 비롯한 골수 귀족 전원의 의견이었다.

그럴 때마다 펠리오의 대답은 딱 하나였다.

‘씨만 받아, 씨.’

연애와 결혼은 절대 금지.

그러나 후계를 위한 씨 증정은 허용.

이 보수적이면서도 괴상하게 개방적인 펠리오의 지론은 거의 불변의 진리였다.

‘아빠도 제정신은 아니다, 그치?’

‘널 많이 사랑해서 그래.’

‘엄마 정말 진심이야?’

……아주 가끔 이상하긴 해.’

물론 그의 딸과 아내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만.

어쨌건 펠리오가 그만큼 레오니에를 아낀다는 뜻이었다.

펠리오의 눈에 그의 딸은 언제나 작고 소중한 아이였다. 레오니에도 그걸 알기에 연애는 좀 더 신중하기로 했다. 겉으로야 세상 모든 남자를 제 발치 아래 무릎 꿇게 할 패기를 뿜어 대나, 레오니에 역시 제 친모의 일도 있어 교제 문제는 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효심을 계속 건드렸다.

‘나보고는 그러지 말라면서.’

딸의 연애는 그렇게 반대하면서, 정작 펠리오는 바리아와 함께 연애 겸 신혼을 즐기면서 인생 최고의 달콤함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도 외로운 딸 앞에서.

물론 레오니에는 부모님을 사랑했다. 저를 위해 뭐든 해 주려는 부모님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다만, 정도껏 했으면 했다.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님의 애정행각을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린 저는 추악한 욕망을 꾹 누르며 살고 있건만, 부모님은 본인들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살고 계시니 억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폭탄을 던졌다.

‘나 황녀 전하랑 입 맞췄어!’

펠리오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데 약간의 죄책감은 있었다. 하지만 저도 이제 내일모레면 열다섯 살이니, 이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어, 어서 빨리 의원을!”

“정신 차리십시오!”

레오니에의 입맞춤은 엄청난 파란을 불러왔다.

펠리오가 쓰러졌다.

* * *

펠리오는 딸아이의 뽀뽀 고백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배신감은 그의 건강한 신체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북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휘청거렸다.

“아빠!”

“리오, 당신 열이……!”

깜짝 놀란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펠리오를 부축했다. 카라를 비롯해 마중을 하러 나온 북부 저택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펠리오는 곧장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침실로 옮겨졌다. 임신한 바리아를 진찰하기 위해 새로 고용한 의원은 얼떨결에 펠리오부터 진찰하게 되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아무래도 피로가 많이 쌓이신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시면 됩니다.”

그리고 피로의 원인인 두 사람이 펠리오가 누운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웃기게도 그 둘은 펠리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아빠 괜찮아……?”

레오니에는 울상이었다.

“괜찮을 거야.”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어깨를 끌어 제 품에 안았다. 폭 안긴 레오니에가 미약한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아빠가 이렇게 약할 줄 몰랐어.”

“그, 약한 건 아니고…….”

바리아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냥, 으음…….”

단어를 한참 고르던 바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레오 널 너무 사랑해서 저런 거야. 그러니 어디서 여장하며 살던 놈이 달라붙으니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엄마!”

레오니에가 성을 냈다.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

서운해진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엄마는 그게…….”

바리아가 허둥거렸다. 그저 남편의 입장에서 말을 그렇게 한 것이지, 바리아는 스칸디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그건 레오니에도 잘 알았다.

“그런 제정신 박힌 여장남자가 얼마나 귀한데!”

레오니에가 소리쳤다.

“심지어 미인이라고! 아빠 못지않게 근육질이 될 상이라고!”

“…….”

바리아는 조금 전까지 레오니에에게 미안하던 자신의 감정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아빤 나중에 어쩌려고 저러지?”

도로 자리에 앉은 레오니에는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나중에 나 결혼하고 임신할 땐 아주 기절까지 하겠네.”

“기절만 하면 다행이지.”

바리아도 내심 걱정이었다.

재정부에서 레오니에에 관한 정보를 모을 적에도,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본 펠리오는 자신이 알던 것 이상으로 레오니에를 소중히 키웠다.

‘솔직히 레오가 아깝지.’

그리고 바리아는 이제 펠리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남편이 딸의 남자를 죽이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엄마.”

그때,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어쨌건 아빠가 나 때문에 쓰러진 거지?”

“당연하지.”

“역시 내가 세계 최강이었어.”

이불 덮고 괴로워하는 아빠를 보며, 불효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딸…….”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손을 꼭 쥐었다.

“지금은 자중하자.”

이러다 펠리오가 더 병날 기미였다.

“근데, 엄마.”

“응?”

“아빠 좀 야하지 않아?”

바리아가 입을 크게 벌렸다.

“레오니에!”

그리고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어떻게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어?”

“난 정말 이래서 엄마가 좋아.”

레오니에가 소름 돋았다며 제 팔을 마구 문질렀다. 바리아가 근육에 눈을 떴을 때부터 범상찮은 재인인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너희 아빠 아픈 건 정말 귀한 장면이잖니. 물론 빨리 나았으면 좋겠지만서도.”

“저 얼굴과 저 근육이니 아파도 야한 거야.”

“답답해 보이는데 단추 좀 풀어 줄까? 팔 한쪽도 베개 위로 올리면…….”

“아씨, 내 영혼의 동반자가 여기 있었네!”

마음이 통한 두 모녀는 뜻이 통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 둘은 가족애를 뛰어넘는 무언가로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

“…….”

펠리오가 입을 뻐끔거렸다.

“아빠, 왜?”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펠리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둘 다…….”

뜨겁고 거친 목소리가 가뿐 숨소리 사이로 튀어나왔다. 붉게 충혈된 눈은 평소보다 살짝 부은 채였다.

“나가…….”

펠리오가 기어코 원수 둘을 방에서 쫓아냈다.

* * *

펠리오는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마치 그간 안 아팠던 만큼 몰아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펠리오의 열병은 제법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아파 본 적도 별로 없어서 꽤나 힘들어했다.

“카라 할머니 말로는, 거의 20여 년 만이래요.”

레오니에가 서류를 읽으며 말했다. 전직 펠리오의 유모였던 카라의 말로는, 어릴 적에도 펠리오는 감기 같은 가벼운 잔병치레만 몇 번 겪은 게 다라고 했다. 아이는 그런 아픈 아빠를 대신해 공작 대리로서 집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제 기억에도 공작님이 아프셨던 적은 없었습니다.”

루페가 과거를 떠올렸다.

“그래서 좀 신기하군요.”

“울 아빠가 아픈 게요?”

“공작님도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루페는 이번 일로 펠리오가 저와 같은 인간이었단 사실을 뼛속 깊이 실감했다.

“정말 사람이긴 했네…….”

루페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가 아빠 없다고 막말하네.”

레오니에가 루페를 노려봤다.

“지금 그 말, 아빠한테 일러도 돼요?”

“공작 대리, 수도 황궁에서 편지가 막 왔습니다.”

루페가 재빨리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저씨는 울 아빠 없다고 바로 그렇게 말해요?”

“그렇게라도 안 하면 어찌 버티겠습니까.”

루페는 이 정도는 부하직원의 소박한 분풀이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레오니에는 두 번 분풀이했다가는 상사한테 죽을 거라고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아저씨는 돈 많이 받잖아요.”

“그래서 소소한 분풀이 몇 번으로 참는 겁니다.”

“저 아저씨가 진짜…….”

어이없단 시선으로 루페를 잠깐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저 아저씨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공작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오늘 가 보니 둘이 얼싸안고 침대 위를 뒹굴던데요?”

루페의 얼굴이 절인 양배추처럼 일그러졌다.

“둘 다 옷 입었어요.”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루페의 얼굴이 도로 생생해졌다.

“아빠는 일찌감치 다 나았어요. 나 괘씸하다고 일부러 요양하는 거지.”

미간을 찌푸린 채, 레오니에가 손에 들린 편지를 살폈다. 곧 루페가 편지용 칼을 찾아 건넸다.

“아가씨의 이번 공작 대리 수행은 벌 대신이군요.”

“이럴 거면 작위나 진짜 줄 것이지.”

레오니에가 편지용 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돌리며 투덜거렸다. 받는 것도 없이 일만 하려니 짜증만 났다.

스윽, 하고 편지용 칼로 깔끔하게 잘라 낸 봉투 속에는 곱게 접힌 편지가 있었다. 발신인은 크리세토스 황자였다. 편지에는 의례상 하는 인사를 시작으로, 지난번 반란 진압과 관련하여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알리스 황자가,”

편지를 읽던 레오니에가 한쪽 입가를 즐겁게 비틀었다.

“올로르 가문의 작위를 아주 죄송하고 떨떠름하게 받았다고 적혀 있네요.”

“어이구.”

루페가 진심으로 동정했다. 정작 레오니에는 새끼손가락으로 인중을 긁으며 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반란의 개연성이 완성되었네.’

세간에는 얼마 전 진압한 반란의 주동자가 올로르 자작 부자라고 알려졌다. 하나 무작정 그렇게 몰고 가기에는 허술한 점이 많았다. 가령, 어떻게 ‘자작’ 주제에 그 많은 병력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이런 허점을 채우고자, 레오니에는 그들의 핏줄인 알리스 황자를 쑤셔 넣기로 했다. 이로써 올로르의 반란은 알리스 황자를 황제로 올리기 위해서로 꾸며졌다.

‘동정할 필요도 없어.’

레오니에는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한통속이었던 주제에.’

알리스 황자는 아우스트와 메리디오의 반란을 알고 있었고, 쉬이 움직이기 힘든 우시스 황비를 대신해 움직였었다.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알리스 황자가 가장 끔찍하게 여길 벌을 떠올렸다. 그게 바로 그가 증오해 마지않는 올로르의 성과 작위를 내리는 것이었다.

하나 여기엔 또 하나의 꿍꿍이가 있었다. 바로 황자의 입지를 올리고 죽은 선황제의 흔적을 떨치기 위함이었다.

‘황자의 문제는 외모야.’

크리세토스 황자는 선황제의 얼굴을 지나치게 빼닮았다. 생김새에 대한 편견은 생각보다 강했고, 그 때문에 제대로 국정을 돌보지 못할 거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이런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제 부친의 악평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리스 황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반란의 원인인 알리스 황자를 그래도 형이라고, 죽이는 대신 허울뿐인 작위를 내려 궁 밖으로 유배를 보내는 상냥한 심성으로 포장했다.

거기다 일부러 ‘올로르’의 성을 내림으로써, 알리스 황자 역시 반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강조했다. 황자가 마냥 녹록지 않다는 점도 드러나게 했다.

훗날 황제가 될 인물이 절대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되니까.

“……잘해라.”

북부가 더는 움직이지 않게끔. 짧은 응원을 담백하게 끝낸 레오니에가 편지를 도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 전 응원은 한 적도 없는 것처럼, 레오니에는 편지를 도로 루페에게 건넸다. 편지를 받아 든 루페는 적힌 내용을 빠르게 확인했다.

“배상금 관련해서, 황실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하는군요.”

“나중에 따로 연락한다니, 그때까지 기다리죠.”

“그럼 저희 쪽 피해 목록들만 미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어머나, 그때를 생각하니 어깨가 결리고 두통이 밀려오네…….”

“정신적 피해 보상금을 우선순위에 넣어 두겠습니다.”

루페는 자신이 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했다.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왜 루페에게는 그토록 관대한지 알 것 같았다. 저렇게 일을 잘하니 이따금 기어올라도 봐주는 것이었다.

‘이러니 먹히는 거야.’

사장과 비서라는 장르가.

레오니에는 자신이 어릴 적에 그토록 펠리오와 루페를 엮었던 정당성이 틀리지 않았음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잠깐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새 또 변태의 날개를 펄럭이던 레오니에의 귀에 루페의 목소리가 들렸다.

“꽤 오래 일하시지 않았습니까.”

“어, 그런가……?”

레오니에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곤 깜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럼 좀 쉴까나!”

“오전 업무 수고하셨습니다.”

“루페 아찌도 수고했어요!”

집무실을 나온 레오니에가 복도를 걸어가며 기지개를 쭉 켰다.

“으으으으!”

찌뿌둥한 몸을 펼칠 때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사무직은 적성이 아니었다는 둥, 다른 세상에서 그리다 만 회지나 다시 그려 볼까는 둥, 레오니에는 이런저런 잡생각과 함께 펠리오의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엄마도 있으려나?’

문을 벌컥 열려던 레오니에의 손이 멈칫했다. 아침에 병문안 겸 들렀을 때는 펠리오가 바리아를 품에 껴안고 뒹굴고 있었다. 바리아가 벗어나려고 팔다리를 버둥거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잠시 고민한 레오니에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빠, 엄마?”

혹시, 하는 마음에 부모님을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자, 잠깐만! 진짜 잠깐만!”

“10초만 세고 들어와.”

당황하는 바리아와 태평한 펠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

실컷 하던 거 하슈. 아기 맹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레오니에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근육이는 내가 키워야 해.’

역시 이 집은 아이가 자라기엔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 * *

수도에서 겪었던 난리는 마치 액땜과도 비슷했다. 북부로 돌아온 보레오티 가족들은 그간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듯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미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따금 레오니에가 북부 산맥이 보이는 창문 너머로 신성 모독에 버금가는 저주를 중얼거린 적이 있지만, 대체로 행복했다.

행복이 커지는 만큼, 바리아의 배도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다.

“와아……!”

한적한 어느 오후.

“자라고 있긴 하구나.”

따뜻한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오르는 거실에서,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배를 보며 감탄했다. 수도에 있을 때는 밋밋했던 배가 눈에 띄게 커졌다.

“이 녀석, 재수 없는 소릴.”

펠리오가 혀를 가볍게 찼다.

최근 맹수 부녀는 바리아 주변을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배에 손을 얹거나 말을 걸었다. 덕분에 바리아는 혼자 있을 틈이 없었다.

“근육아, 안녕?”

인사를 건네는 레오니에의 말투가 어색했다.

“……그래, 근육아.”

반면 둘째를 부르는 펠리오의 목소리는 어딘가 체념한 것처럼 들렸다. 그는 이제 둘째의 태명이 근육이로 결정된 사실을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했다. 집안 최대 권력자 두 분께서 고집을 부리시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그나마 위로라곤, 근육이란 태명 덕에 둘째가 정말 튼튼하게 태어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 하나였다.

거기다 계속 불러 보니 조금 귀여운 감도 있었다.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그래, 힘들게 하면 안 돼!”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말을 따라 했다. 펠리오가 첫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엄마는 입덧 안 해?”

“으음…….”

바리아가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골똘히 생각했다.

“딱히?”

생각해 보니 입덧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썩 떠오르지 않았다.

“수도에서 잠깐 식욕이 없었던 적이 있는데, 아마 그거 같아.”

“와아, 엄마 복 받았네!”

무탈하게 지나간 바리아의 입덧을 기뻐한 레오니에가 곧장 배 속 동생을 칭찬했다.

“우웅, 우리 근육이잉!”

레오니에가 입술을 쭈욱 내밀며 배 위에서 쪽쪽 거렸다. 이를 어이가 없단 듯이 바라보던 펠리오가 이내 피식거렸다. 지켜보는 바리아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레오 생일이네?”

바리아가 말했다.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뭐 사 줄 거야? 뭐 선물해 줄 거야?”

“이놈의 속물은 변한 게 없군.”

“그거야 아빠가 날 이렇게 키웠으니까 그렇지.”

“정말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펠리오가 쉴 틈 없이 기어오르는 레오니에를 가볍게 흘겨봤다. 하나 이미 펠리오와 바리아는 레오니에에게 무얼 선물할지 이미 다 고른 상태였다. 이미 레오니에 전용 선물 방에는 몰래몰래 저택에 들인 선물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레오니에도 이를 알고 있었다.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그, 그럼……!”

눈을 동그랗게 뜬 레오니에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안 돼.”

펠리오가 먼저 말을 잘랐다. 레오니에가 도끼눈을 치켜뜨며 펠리오를 노려봤다.

“듣고 안 된다고 해!”

“황녀 보고 싶다는 거잖아.”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몸을 들썩거렸다.

“아빠 뭐 독심술 할 줄 알아?”

“가소로운 우리 딸.”

펠리오가 입꼬리를 얄밉게 비틀었다. 레오니에는 이미 펠리오의 손바닥 안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

“그거 쫄쫄이 훈련복 한정이었잖아!”

“연애랑 결혼도 안 돼.”

“그럼 저기 벽난로에 시커먼 불씨가 있는데, 저거 흙 대신하면 안 돼?”

“안 되지, 당연히!”

단란했던 가족들의 오후는, 기어코 벽난로로 가려는 레오니에를 바리아가 황급히 막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며칠 뒤.

“생일 축하합니다!”

“아가씨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드려요!”

레오니에는 성대한 축하 속에서 열네 살이 되었다.

“생일 축하한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펠리오와 바리아는 사랑을 담아 레오니에의 볼에 입을 맞췄다. 레오니에는 빨개진 귀를 다 드러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을 치우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레오니에는 수많은 사람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동시에 보레오티 후계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펠리오는 모두의 앞에서 레오니에를 차기 공작으로 선언했다. 바리아 역시 저의 임신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에게 배 속 아이를 ‘레오니에의 동생’, ‘둘째’라고 말했다. 배 속 아이는 결코 레오니에의 후계 자리를 위태롭게 하지 못한단 뜻이었다.

북부 골수 귀족들은 레오니에의 생일을 축하하는 동시에, 훗날 북부를 다스릴 주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제파인 파르두스 후작도 허리를 숙였다. 이로써 북부는 레오니에를 차기 보레오티 공작으로 인정했다.

“행복했어…….”

쉬이 잠들 수 없는 하루였다.

“나 오늘 잠 못 들 거 같아.”

침대에 누운 레오니에는 발로 이불을 퐁퐁 띄워 올렸다. 나풀나풀 흔들리는 이불자락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던 아이의 마음과 같았다.

“즐거웠지?”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앞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물었다. 옆에 함께 있던 펠리오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부모는 잠들 때까지 재워 달라는 딸의 생일 소원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즐겁고 행복했어.”

하얀 이를 씩 보이며 웃던 레오니에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뿜뿜이가 없어서 허전했어.”

“없으니 속만 후련하던데.”

“펠리오.”

바리아가 눈치를 줬다. 레오니에가 파티 내내 연회장 문을 힐끔거리던 모습이 어찌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밤이 늦었으니 얼른 자.”

하나 펠리오는 당당하기만 했다.

“일찍 자야 쑥쑥 자라지.”

펠리오가 흐트러진 이불을 고치며 잔소리했다. 레오니에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쳐 준 이불을 괜히 흔들었다. 그러나 펠리오의 커다란 손은 이불을 도로 아이의 목까지 올렸다.

“하긴, 내일은 루피 생일이니까!”

레오니에의 생일 다음 날은 루피의 생일이었다. 세상에 생기기 전부터 레오니에의 비서로 점지된 꼬마 늑대의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라도 일찍 잠들어야 했다. 레오니에는 자신의 꼬마 비서를 위해 이미 멋진 생일선물도 준비해 두었다.

“오늘은 정말 행복했어.”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앞으로 더 행복할 거야.”

오늘보다 더 큰 행복이 찾아올 걸, 아기 맹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슬슬 준비하자.’

레오니에는 후년에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가족들과 떨어져 몇 년간 홀로 수도에서 지내야 했고, 그렇게 되면 태어난 동생과도 함께 놀아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짐한 게 있어!”

레오니에가 잠을 이겨 내며 소리쳤다.

“레오 너 안 자냐?”

펠리오가 이제 좀 자라며 잔소리했다.

“아빠! 엄마!”

레오니에가 중대 발표를 했다.

“내가 동생 이름 지을래!”

“그래, 안 돼.”

펠리오가 단호히 거절했다.

“……뀨.”

기세 좋던 아기 맹수는 풀이 죽은 채 잠들었다.

레오니에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한 부부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너무 단호해서 단호박인 줄 알았어요.”

침실로 돌아온 바리아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레오가 가르쳐 준 농담입니까?”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

“농담의 질이 레오 같아서요.”

어쩐지 농담에서 레오니에의 사악한 미소가 덧그려지는 기분이었단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한테 너무했어요.”

바리아가 도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레오가 동생 생각해서 이름을 생각해 주겠다는데, 허락 좀 해 주지.”

정 안 되면 셋이서 함께 고민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너무 야멸차게 거절한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리아.”

바리아 옆에 나란히 누운 펠리오가 몸을 옆으로 눕혔다. 커다란 팔이 바리아의 부푼 배를 조심히 감쌌다.

“혹시 레오 책상을 보았습니까?”

“책상?”

고개를 갸웃거리는 바리아의 턱선이 둥글둥글했다. 북부로 돌아온 뒤, 바리아는 잘 먹고 잘 잔 덕에 볼이 전보다 둥그스름해졌다.

“난 보고 말았습니다.”

펠리오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웠다.

“태명은 몰라도, 이름은 안 됩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책상에 올려져 있던 ‘근육이 이름에 어울리는 근육 학명’을 떠올리며 학을 뗐다.

* * *

며칠 뒤.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봤다던 둘째 이름 목록을 그대로 가져와 보여 줬다.

“나 진짜 열심히 고심했어!”

“어디가?”

반강제로 이름 목록을 훑어본 펠리오는 이제 한숨 쉴 여력도 없었다. 목록에는 근육 학명만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세상에나……!”

반면 바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둘째의 이름 후보들을 구경했다.

“이렇게까지 근육이를 생각해 주다니……!”

바리아는 감동했다. 동생을 생각하는 레오니에의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떡해, 나 진짜 울 것 같아.”

레오니에를 바라보는 바리아의 눈가가 촉촉했다. 레오니에는 괜히 머쓱해져 턱 아래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렸다.

“절대 안 돼.”

하나 모녀가 이토록 좋다고 생각해도, 펠리오는 안 된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태명은 봐줬지만, 이름만큼은 절대 안 돼.”

“이름, 뜻 다 좋아!”

“뭐가 다 좋아, 죄다 근육 명칭인데.”

“학명이잖아!”

레오니에가 이 이름들을 고르고 고른 이유를 설명했다. 제 진심이 통하지 않아 조금 답답하고 억울한 목소리였다.

“근육처럼 건강하고, 학명처럼 똑똑하길 바란다는 나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이쯤 되니 가정폭력이 마냥 다른 집 이야기가 아니로군.”

“이 아빠가 진짜……!”

윗입술을 들썩이며 분노한 레오니에가 옆에 있던 바리아에게 다가갔다.

“엄마아아…….”

레오니에가 바리아가 앉은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볼록 나온 배에 얼굴을 비볐다.

“아빠가 내 성의를 무시해!”

“그런 거 아니야.”

바리아가 칭얼거리는 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삐친 마음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아이는 곧 바리아 옆에 발라당 누웠다.

“이름 예쁘지 않아?”

레오니에가 샐쭉한 표정으로 자신이 생각해 둔 이름 후보들을 하나하나 말했다.

“엠토라시스, 라티시, 도르시, 가스트로…….”

“가슴, 가슴 옆, 종아리로군.”

“근데 복직근이 빠졌네?”

레오니에가 중얼거린 이름만으로도 펠리오와 바리아는 어느 부위에서 이름을 따왔는지 바로 알아챘다. 근처에서 화병 물을 갈던 하녀 한 명이 흠칫하더니, 역시 보레오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봐, 발음도 괜찮잖아. 뜻도 좋고.”

레오니에가 으스댔다.

“그래도 안 돼.”

하나 펠리오는 철벽이었다.

“아빠 단호박이야? 왜 이리 단호해?”

“그 농담은 어제 네 엄마한테 먼저 들었다.”

“아, 그랬어?”

레오니에가 머쓱하니 바리아를 올려다봤다.

“……아빠는 레오 네가 지은 이름이 싫어서 저러는 게 아니야.”

바리아가 어젯밤 펠리오에게서 들은 이유를 떠올렸다.

오랜 역사를 지닌 보레오티는 명망 높은 전통이 몇 개 있었다. 매년 겨울마다 하는 마물 사냥도 전통이라면 전통이고, 맹수의 송곳니를 지녀야만 차기 공작이 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직계의 작명에도 전통이 있었다.

“‘맹수’가 들어가야지.”

펠리오가 말했다. 보레오티 직계는 항상 ‘맹수’를 뜻하는 이름을 가졌다.

“……아, 맞다.”

레오니에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입양될 적에도 펠리오는 그걸 염두에 두고 이름을 새로 지어 선물했었다.

“그럼 맹수의 근육은 어때?”

레오니에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펠리오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씨…….”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아까처럼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냥 아빠랑 엄마가 지어.”

“레오도 같이 생각해 줘야지.”

바리아가 양보해 준 딸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이게 얼마나 큰 양보인지, 바라아는 잘 알았다. 레오니에가 적어 온 이름 목록에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렇죠, 여보?”

바리아가 펠리오에게 물었다.

“……숙제다.”

펠리오가 괜한 신문을 펼치며 말했다.

“일주일 동안 동생 이름 후보 정해 와.”

“아빠!”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와락 껴안았다. 덕분에 그의 손에 들린 신문이 찌그러졌다. 펠리오는 품에 안긴 딸의 등을 무심한 척 툭툭 두드렸다.

“이상하게 지었다간 너 빼고 이름 짓는다.”

“내가 꼭 예쁜 이름 지어 올게!”

아빠 볼에 입술을 쪽, 하고 맞춘 레오니에는 이어서 바리아의 볼에도 입술을 쪽 맞췄다. 그리곤 당장 이름을 정하겠다며 서재로 가 버렸다.

“우리 근육이는 좋겠네.”

바리아가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렇게 멋진 사람을 언니나 누나로 둬서 말이야. 엄마는 아주 조금 질투나.”

“뭐 질투까지야.”

펠리오가 피식거렸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바리아는 진심이었다.

만약 저에게도 레오니에 같은 언니나 동생이 있었다면, 바리아는 자신의 유년 시절은 훨씬 더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레오니에의 넘치는 자신감은 주변 사람마저 감응시켰다. 아이는 절대 지지 않는 태양이었으며, 그늘졌던 바리아의 삶에 따스한 희망을 선물했다.

“저의 신은 레오일 거예요.”

바리아가 중얼거렸다.

“산맥 뒤에 있는 것들보다야 우리 딸이 훨씬 낫죠.”

공감하는 펠리오의 말에,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아무렴요, 누구 딸인데.”

* * *

호기롭게 동생 이름을 짓겠다고 선언한 레오니에는 그 뒤로 틈만 나면 서재에 틀어박혔다.

“……어렵네.”

정작 레오니에 앞에 놓인 종이는 며칠째 깨끗했다. 오히려 종이 테두리만 손때가 묻어 거뭇거뭇했다.

“아, 진짜!”

레오니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설마 동생 이름 하나 짓는 거로 시간을 이토록 잡아먹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이런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아빠는 내 이름 바로 짓던데.’

레오니에는 펠리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고아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펠리오는 그 자리에서 ‘레오니에’를 지어 주었다.

‘고집을 그만 부릴까?’

사실 레오니에가 동생 이름을 짓는 데 이토록 애를 먹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애칭은 꼭 레아로 하고 싶은걸.’

바로 태어날 동생의 애칭이었다.

보레오티 가족들은 서로를 향한 애정을 애칭으로 표현한다. 부모님은 늘 레오니에를 ‘레오’라 불렀다. 펠리오와 바리아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를 때가 더 많았지만, 단둘이서 분위기를 잡을 때는 애칭으로 불렀다.

“으웩.”

잠시 부모님의 다정한 한때를 떠올린 레오니에가 헛구역질을 했다.

어쨌건 보레오티에선 애칭은 무척 중요했다.

‘나는 레오고, 아빠는 리오, 엄마는 리아.’

그러니 태어날 동생 이름도 짝을 맞춰서 레아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레아란 발음이 들어간 이름을 찾으니 맹수란 뜻이 없고, 맹수를 뜻하는 이름을 찾으니 레아란 발음이 없었다.

혹시 몰라 역대 보레오티 공작들의 이름이 적힌 족보도 읽어 봤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절제되지 않은 머나먼 조상님의 이름에 놀라기만 했다.

‘맹수의 엉덩이라니.’

레오니에는 저딴 이름이나 짓는 조상님 작명 실력에 의구심을 지녔다.

‘역시 보레오티에 제정신인 사람은 어디에도 없나 보군.’

나 빼고.

뻔뻔한 감상을 끝으로, 레오니에가 책상 위에 엎드려 흐느적거렸다. 슬슬 인내심이 닳기 직전이었다. 이쯤 되니 역성혁명이 작명보다 더 쉽게 느껴졌다. 펠리오가 왜 걸핏하면 역성혁명을 운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동생아, 너는 나의 노고를 알아야 해.’

내가 널 위해 이렇게 고생한다.

‘그러니 잊으면 안 돼.’

레오니에가 푸우, 하고 입바람을 크게 내뱉었다.

“……진짜 잘해 줘야 하는데.”

책상 위 엎드린 레오니에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기를 한참.

레오니에는 잡념을 떨칠 겸 저택 내부를 슬렁슬렁 산책했다.

“아가씨.”

마침 지나가던 카라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카라는 점잖으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단숨에 레오니에 곁으로 다가왔다.

“이런,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카라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으으응, 괜찮아.”

레오니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카라의 걱정 어린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냥 동생 이름 짓기가 어려워서 그래요.”

“아직 고민 중이신가요?”

“이름은 모든 사람이 처음 받는 선물이에요! 나는 동생에게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서 선물할 거예요!”

주먹을 쥔 채 포부를 밝히는 레오니에를, 카라는 여전히 걱정했다.

“이것이 아가씨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었으면 하네요.”

그리고는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아가씨께 온 편지입니다.”

편지를 이리저리 살피던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빛 촛농 위에 헤스페리 가문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찍혀 있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펠리오는 만일 레오니에에게 온 편지가 있다면, 일단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엄하게 말했다. 그리고 바리아는 그런 편지가 있다면, 몰래 숨겨서 레오니에에게 주라고 말했다.

“주인님껜 비밀입니다.”

카라는 마님의 뜻을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와아아!”

레오니에의 침울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마워요, 할머니!”

레오니에는 카라를 부둥켜안았다. 카라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에 안심했다.

달뜬 걸음으로 자신의 방까지 달려온 레오니에는 그대로 침대에 뛰어 드러누웠다. 그러나 협탁 서랍에 있던 편지용 칼로 봉투를 뜯는 동작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신중했다. 얼마 전 황실에서 보낸 편지를 뜯는 것과는 새삼 다른 모습이었다.

반듯하게 잘린 봉투 속에는 두툼한 편지들이 접혀 있었다.

“뿜뿜이 편지!”

레오니에가 편지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편지 발신인은 스칸디아였다.

[북부에 조심히 돌아가셨습니까?]

레오니에는 편지 첫 줄을 읽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널 두고 왔지?’

지금이라도 데려와야 하나?

레오니에는 스칸디아가 보고 싶었다. 고작 한 줄 읽었는데, 스칸디아가 바로 자신의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자연히 마지막에 나눴던 입맞춤이 떠올랐고, 레오니에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날, 만날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었습니다.]

스칸디아의 편지는 마지막 인사를 나눈 직후에 바로 쓴 것처럼 보였다.

[매일 그때를 생각한다고 하면, 저를 미워하실 겁니까?]

그 문장에 레오니에는 협탁에 머리를 박아야 했다.

“……변태 너무 좋아!”

역시 내 남자!

흥분을 주체 못 한 레오니에는 주먹으로 애먼 침대만 팡팡 두드려 팼다. 그때를 생각한다고 미워한다니, 세상에나. 도리어 레오니에는 그때만 생각하면 당장 스칸디아를 제 곁에 데려다 놓고 물고 빨고 핥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도 슬펐다.

그런 안타까움을 그대로 담은 주먹은 아주 셌고, 덕분에 안으로 푹푹 꺼지는 매트리스가 조금 위태로웠다.

가까스로 진정한 레오니에가 마저 편지를 읽었다.

[곧 겨울이 찾아옵니다. 마물 사냥을 나설 적엔 조심하십시오.]

[저의 걱정은 쓸모가 없단 것을 압니다. 영애는 누구보다 강하시니까요.]

[그런데도 저는 걱정이 가시지 않습니다. 왜 이런 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후우, 레오니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알고 있어.”

날 좋아해서잖아.

편지를 잠시 멈춘 레오니에의 귀는 무척이나 벌겠다. 수도에서 입을 맞췄을 때도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진짜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레오니에는 지금도 자신의 감정이 신기했다. 둘의 만남은 손가락 열 개도 겨우 안 될 정도로 적었다. 레오니에는 스칸디아의 미래를 기대하며 능글거렸고, 스칸디아는 그런 레오니에를 신기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둘은 서로에게 이끌렸다.

‘으음, 못된 남자.’

사람을 이렇게 홀리다니.

‘다음에 만나면 등 뒤를 봐야겠어.’

아무래도 꼬리 아홉 개 달린 호랑이가 분명했다.

이제 레오니에는 스칸디아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스칸디아도 마찬가지라는 확신도 있었다.

‘약탈혼이라도 할까?’

만약 펠리오가 계속 결혼을 반대한다면, 레오니에는 이 튼실하고 귀여운 녀석을 납치하겠단 계획도 고려 중이었다.

[최근 형님의 황태자 책봉식 준비를 앞당기려고 준비 중입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문구에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앞당긴다고?’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이야기가 편지에 적혀 있었다. 분명 수도에 있었을 때만 해도, 크리세토스 황자의 황태자 책봉식은 내년 늦봄 즈음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뭔 일이 있나?’

원래 예정된 날도 충분히 이른 편인데,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오니에는 문득 스칸디아와 크리세토스 형제가 저와 비슷하단 사실을 알아챘다. 둘은 아버지가 서로 다른 형제였다. 그리고 레오니에와 근육이는 표면상 어머니만 달랐다.

‘이제 나도 그렇게 되는 거네.’

침대에 누운 채 편지를 읽던 레오니에는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았다.

‘…….’

레오니에는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겨우 가라앉혔던 일말의 감정 하나가 다시 가슴을 어수선하게 했다.

“……응?”

그런 레오니에의 눈에, 흐트러진 마음을 위로해 줄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만나러 가겠습니다.]

바로 내일.

스칸디아가 북부로 온다고 한다.

* * *

“화창하고 기운찬 아침!”

꼭두새벽부터 기상한 레오니에는 기운이 넘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침 깨우러 온 코니가 따뜻한 세숫물을 들고 왔다. 레오니에가 저렇게 이유 없이 씩씩한 건 흔한 일이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코니가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을 그릇에 붓는 동안, 레오니에는 창문을 열어 방 안을 환기했다.

“아침 햇살이 참 따스하고 눈부셔.”

“아가씨, 아직 오전 여섯 시도 안 되었답니다.”

초겨울에 진입한 북부는 아침이 늦게 찾아왔다. 지금 저 어두컴컴한 창밖에 비치는 건 저택 아래 광장에 켜진 희미한 가로등이 전부였다.

“내 마음이 눈부시니 괜찮아!”

그러나 레오니에의 눈에는 세상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코니는 오늘따라 유달리 씩씩한 아가씨를 보고 있자니, 주인님과 마님께서 꽤 고생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레오니에를 돌본 하녀로서의 경험이었다.

코니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뿜뿜이를 만나는 거야!’

창문에 비친 레오니에는 무척 들떴다.

최근 마음이 뒤숭숭했던 탓에, 예상치 못한 스칸디아의 등장은 무척 큰 위안이 되었다. 사실 어제 편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모든 근심과 걱정이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았다. 하지만 녹은 눈은 자그만 물웅덩이로 남아 있으니, 레오니에는 스칸디아와 여름처럼 격정적인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마저도 증발시킬 생각이었다.

코니의 도움으로 아침 단장을 마친 레오니에는 곧장 수련장으로 향했다.

“좋은 아침, 나의 짐승들!”

“아직은 내 짐승들이다.”

먼저 수련장에 도착한 펠리오가 아침부터 기사들을 희롱하려는 제 딸을 마땅치 않은 눈으로 흘겨봤다.

“잔소리 많은 울 멋진 아빠도 잘 잤어?”

레오니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펠리오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오늘 왜 그러냐?”

펠리오가 딸의 볼에 입을 가볍게 맞추며 물었다.

“난 레오 네가 그렇게 들뜰 때면 불안하던데.”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야!”

“내 잔소리에도 소리 한 번 안 지르다니…….”

만년설이 녹으려고 하나.

펠리오는 이제 섬뜩하기까지 했다. 하나 수상쩍은 눈으로 노려보아도, 아기 맹수는 개의치 않고 아침 훈련에 열중했다.

“자, 누가 나랑 대련할래요? 나 오늘 끝내준다고!”

레오니에는 목검을 씩씩하게 휘두르며 자신의 대련 상대를 모집했다.

“그 전에 준비운동부터.”

물론 펠리오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레오니에는 스스로 장담한 대로 훈련을 성황리에 마쳤다. 심지어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아빠의 빈틈을 발견해 목검을 찔러 넣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패로 끝났다.

‘이게 뿜뿜이의 힘이야!’

하나 그것만으로도 레오니에는 오랜만에 펠리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는 검술처럼 몸을 다칠 수 있는 훈련에선 항상 엄격했기에 값진 칭찬이었다.

“눈누난나!”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레오니에가 들른 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어두컴컴한 감옥 내부는 습하고 꿉꿉한 냄새가 가득했다.

레오니에는 벽에 걸린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었다.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 안개가 스멀스멀 차오르자, 막대기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붉은 횃불이 빛 한 점 없는 감옥 내부를 밝혔다.

“잘 지냈어?”

아이의 해맑은 목소리가 감옥 안에서 메아리쳤다.

레오니에가 멈춰선 곳에는 누군가가 갇혀 있었다. 여기저기 녹슨 쇠창살은 한눈에 봐도 비린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너머엔, 그보다 더 역겹고 끔찍한 냄새가 풍겼다. 레오니에가 들고 있던 횃불을 쇠창살 너머로 가까이 가져갔다.

“이런, 건방지게 답도 없네.”

레오니에가 혀를 쯧쯧 찼다. 펠리오 흉내였다.

“…….”

몸을 꿈틀거린 무언가에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소리라고도 할 수 없는 신음은 미약했고, 그마저도 거의 끊어지듯 흘러나왔다.

“말을 어찌 그리 못해.”

아기 비서보다 더 못하네.

무릎을 쪼그린 레오니에가 횃불을 쇠창살 안으로 살짝 집어넣었다. 그러자 새까맣게 그늘졌던 무언가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팔과 다리가 뒤로 묶인 채 포박된 백발의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노인이라기엔 너무도 젊었다. 그러나 노인보다 더 지치고 고된 흔적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그의 전신은 불규칙적으로 비틀리고 꺾여 있었다. 마치 물 머금은 걸레를 힘껏 쥐어짜고, 팍팍 힘줘 펼친 것처럼 어색했다. 특히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을 만치 끔찍했다.

그나마 최대한 묘사를 해 보자면, 이목구비를 뜯어다 마구잡이로 배치한 것 같았다. 얼굴 윤곽도 값비싼 도자기를 일부러 깨트린 뒤에 다시 조각조각 이어 붙인 듯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쉬이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비쩍 말랐고, 이따금 무엇이 두려운지는 몰라도 눈을 뒤집으며 경련하기까지 했다.

“그 곱던 얼굴은…….”

레오니에가 손으로 턱을 괴며 안타까이 중얼거렸다.

“게이트에 두고 왔나?”

“…….”

“직접 체감한 신의 힘은 어땠어?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웠지?”

일그러짐, 정지, 존재 부정.

“레무스 올로르.”

레오니에가 역겨운 이름을 친히 입에 담았다.

신은 약속대로 레무스를 뱉어 냈다. 하지만 내주기 싫었던 신의 아쉬운 흔적이 고스란히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그의 육체와 정신은 게이트 속에서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게이트의 부작용인 일그러짐이었다. 그리고 뼈와 살이 으스러진 채 정지당해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이는 또 다른 부작용인 정지였다.

그리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게이트의 마지막 부작용인 존재 부정이었다.

그러면 다시금 일그러짐이 시작되고, 그 상태로 정지당해 유지되다가, 한 번 더 존재를 부정당해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수십 번.

그리고 수백, 수천 번.

어쩌면 영겁의 찰나.

한때 만인의 칭송을 받던 미남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레오니에의 눈앞에는 신의 힘을 탐하다 추락한 결과물만이 있었다. 게이트의 부작용을 온몸으로 겪은 레무스는 짓밟힌 벌레의 발버둥보다 못했다.

“오늘 말이야.”

몸을 일으킨 레오니에는 횃불을 벽에 걸었다.

“우리 뿜뿜이랑 오늘 즐거워야 하는데, 괜히 뭔 일 생기면 내가 슬프잖아.”

레오니에는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으로 스칸디아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니 푸닥거리 좀 하려고.”

레오니에가 벽에 걸린 고문 기구 중 가볍고 아름다운 것으로 골로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펠리오가 특별히 맞춤 제작해 준 쌍칼이었다. 칼을 양손으로 가볍게 쥐고 흔들며 확인해 본 레오니에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쇠창살 안으로 들어갔다.

“아, 개운해!”

지하 감옥에서 나온 레오니에는 더없이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스트레스는 몸으로 풀어야 하는 체질이구나.’

오늘 칼춤은 유독 신명 났지, 레오니에는 자신의 실력을 자화자찬했다. 전연령 관람 불가 수준의 칼춤을 추고 나온 레오니에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었다. 저택에 돌아온 레오니에는 피가 묻은 훈련복을 하녀들에게 넘기고,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엄마 잘 잤어?”

식당으로 내려간 레오니에는 먼저 와 있던 바리아의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우리 근육이도 잘 잤고?”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배에도 인사했다.

“레오는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볼에 입 맞추며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아침부터 기운 넘치는 딸을 보니 저까지 행복해졌다.

“으흥, 숙녀의 비밀!”

“숙녀 같은 소리 한다, 14살.”

뒤이어 들어온 펠리오가 끼어들었다.

“아빠는 내가 예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만날 저렇게 잔소리해.”

“넌 정말 날이 가면 갈수록 양심이 바닥을 치는구나.”

“펠리오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저래.”

“근육이한테는 그러지 마! 우리 아가 상처받는다고!”

단란하고 시끌벅적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레오니에는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코니, 미아.”

레오니에가 퍽 심각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섰다.

“나 오늘 외출할 거야.”

“화방에 가시나요?”

“으음, 가는 김에 산책?”

“그럼 평소 즐겨 입으시는 대로 준비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다르게 입을래.”

평소 즐겨 입던 셔츠와 바지 대신, 레오니에는 신중에 신중을 더해 고른 원피스를 입었다. 어둡고 차분한 초록색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머리도 평소보다 손이 많이 가는 모양으로 묶고, 장신구는 스칸디아가 준 목걸이 하나만 걸었다.

“어때?”

거울 속 자신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두 하녀에게 물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언제 이렇게 자라셨어요?”

“그렇게 작고 귀엽던 분이……!”

“물론 지금도 귀여우시지만!”

팔불출 하녀들의 진심 어린 칭찬이 쏟아졌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레오니에는 예쁘고 불편한 구두로 바꿔 신었다. 마무리로 바리아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향수를 손수건에 칙칙 뿌려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엄마는 임신해서 향수 잘 안 뿌리는걸.’

괴도 효녀는 양심이 없었다.

준비를 마친 레오니에는 마차를 타고 광장으로 갔다.

“평소에도 아름다우시지만.”

호위로 따라온 멜레스가 한껏 꾸민 레오니에를 보고 감탄했다.

“오늘은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아이, 기분 좋아!”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멜레스는 그런 레오니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에 뿜뿜이를 봐서 너무 좋아요.”

“주군껜 비밀로 하셨지요?”

“아빠가 알면 시끄럽거든요.”

“아가씨를 무척 아끼시니까요.”

멜레스는 얼마 전 병상에 누웠던 펠리오를 떠올렸다. 제 주군이 아팠던 이유가 레오니에가 스칸디아 황녀와 입맞춤한 탓이라는 건, 이제 보레오티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아빠한테는 비밀로!”

레오니에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대신 빨리 오셔야 합니다.”

멜레스는 이번 한 번만 주군의 뜻을 거역하기로 했다. 자신의 어린 주인께 찾아온 따뜻한 봄바람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마차는 곧 광장에 도착했다.

레오니에는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화방으로 달려갔다. 심심하면 들르는 화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고 색다르게 보이는 건, 그 앞에 서 있는 은발의 사내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 아득한 눈으로 어딘가를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스칸!”

레오니에가 큰소리로 외쳤다.

돌아서는 미인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기쁜 호선을 그렸다.

스칸디아는 제게 달려오는 레오니에를 두 팔 벌려 와락 껴안았다.

* * *

스칸디아는 품이 큰 방한용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북부의 초겨울은 뼈가 아릴 정도였다. 따스한 지역에서만 자라 온 그에겐 아직 낯선 기후였다.

하나 오늘은 그 날씨 덕에 행복할 수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스칸디아는 레오니에를 망토 속에 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달려오는 레오니에를 껴안다 보니 자연히 망토가 벌려졌고, 레오니에가 얍삽하게 그 속으로 냉큼 파고든 탓이었다.

덕분에 스칸디아의 심장은 빠르게 뜀박질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스칸디아는 레오니에를 만나면 어떻게 인사하고 무슨 말을 할지 열심히 연습했다. 지난번에 너무 어리숙한 모습만 보여서 이번에는 멋지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를 보며 환한 미소로 달려오는 레오니에를 보자니, 그런 건 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자신은 레오니에 앞에선 바보가 되어도 행복했다.

왜냐하면.

“나도 보고 싶었어요!”

저를 향해 웃어 주는 레오니에가 너무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저 행복이 오롯이 저로 인한 것이라면, 스칸디아는 그저 바랄 게 없었다.

“아, 우리 뿜뿜이 냄새…….”

레오니에가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럴 때마다 레오니에의 들숨으로 부푼 가슴이 스칸디아에게 적나라하게 맞닿았다. 당황한 스칸디아는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

스칸디아가 말을 더듬거렸다.

“여, 여관에서 씻고 왔는데…….”

“뿜뿜이 냄새는 좋은 냄새에요!”

고개를 위로 올린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사람이 왜 이리 예쁘고 귀엽담.’

이대로 저택에 데려가서, 제 침실에 딸린 조그마한 방에 안락한 감옥 하나 만들어서 평생 가두고 싶을 정도였다.

레오니에는 음흉한 진심을 애써 감추며, 한 번 더 스칸디아를 힘줘 껴안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뒤로 성큼 물러섰다. 스칸디아는 아쉬우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자칫했다간 정말 여러 가지로 큰일이 날 뻔했다.

“머리칼이 다 보이는데.”

스칸디아는 헝클어진 레오니에의 앞머리를 손으로 정돈해 줬다.

“괜찮으십니까?”

“여기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다 알아요.”

레오니에는 어릴 적부터 펠리오와 함께 이곳 광장을 자주 방문했었다. 그렇기에 이곳 주민들은 레오니에를 알고 있었다. 거기다 보레오티 영지 주민들이 다른 지역민들보다 검은색에 익숙하니, 레오니에를 보아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대부분 모르는 척해 줘요. 어린아이들은 종종 다가와서 물어보지만요.”

“뭐라고요?”

“맹수의 송곳니가 정말 있어요? 보여 줄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십니까?”

“입 안에 있는 송곳니 보여 줘요.”

진짜 맹수의 송곳니를 꺼냈다간 아이들을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

둘은 손을 마주 잡고 자리를 이동했다. 레오니에의 말대로, 사람들은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신기한 눈으로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어린 아가씨의 손을 잡은 은발의 남자가 신기하고 궁금한 듯했다.

“근데 편지가.”

레오니에는 어제 도착한 편지를 언급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단 말이에요.”

자칫했으면 못 만날 뻔했다며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그랬다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저택으로 찾아갔을 겁니다.”

“어휴, 또 걱정되는 소리.”

레오니에가 떽, 하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나를 좋아하면, 내가 걱정할 만한 짓은 하지 마요.”

“죄송합니다.”

“맞아요, 이건 죄송할 일이에요.”

레오니에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러니 앞으로 자신을 만나려거든, 꼭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기다리라고 따끔히 말했다. 스칸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리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게 헤어지고.”

입 맞추고 헤어진 뒤.

“영애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솔직하게 답하는 스칸디아의 얼굴엔 수줍은 생기가 발갛게 피어올랐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또 자란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청초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스칸디아의 엄지손가락이 마주 잡은 레오니에의 손등을 살짝살짝 쓰다듬었다. 레오니에가 이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결혼할래요?”

“예?”

“아, 미안해요. 좀 성급했죠?”

레오니에가 아직은 좀 이른 말이었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잡은 손은 견고했고, 오히려 스칸디아의 손에 땀이 차면서 힘이 더욱 들어갔다.

“……어서 빨리 영애께서 성인이 되셔야지요.”

희뿌연 은발에 살짝 가려진 스칸디아의 둥그런 귀가 붉어졌다.

“반지 좋아하세요?”

레오니에가 또 급하게 물었다.

“반지, 요?”

뜬금없는 물음에 스칸디아가 되물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답이 없었다. 이미 레오니에의 머릿속엔 엄청난 계획이 진행 중이었다.

‘북부 세공사는 제국 최고지.’

마침 북부가 보석으로 유명하단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레오니에는 오늘 저택에 돌아가면 당장 북부산 보석으로 온갖 종류의 반지들을 만들어 두자고 다짐했다. 그래야 나중에 스칸디아에게 어떤 반지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본 후에, 약혼반지 차원으로 둘이 맞춰 낄 수 있을 테니까.

“반지가 싫으면 팔찌나 족쇄는 어때요?”

“다 좋습니다.”

뭐든 둘이서 함께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좋다고, 스칸디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레오니에는 왜 하필 자신들은 밖에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실내였으면 당장 입 맞췄는데!’

아쉬움에 끙끙거리는 레오니에를 눈치챈 스칸디아는 근처에 앉아서 쉴 곳이 없는지 둘러봤다. 아무래도 걷느라 조금 피곤한 것 같았다.

둘은 그렇게 성급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며 광장을 구경했다.

“저기 기억해요?”

“영애께서 저와 형님을 데려갔던 곳이군요.”

간만에 날이 좋아 가판대를 설치한 서점을 보고.

“여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게예요.”

“전에 소개해 주셨던 곳이네요. 생활형 근육이 잘 잡힌 곳이라고.”

레오니에가 즐겨 찾는 방앗간도 보고.

“푹신푹신 구름 슈크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에요!”

“좀 달군요.”

“단 거 싫어해요?”

“아니요.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둘이서 푹신푹신 구름 슈크림을 하나씩 사서 먹었다. 스칸디아는 레오니에의 입가에 묻은 슈크림을 손으로 닦아 제 입에 가져갔고. 레오니에는 스킨디아의 깨끗한 입 주위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그런데 왜 온 거예요?”

어느 정도 실컷 돌아본 뒤,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는 앉아서 쉴 수 있는 찻집에 들어갔다.

“정말 나만 보려고 온 건 아니지요?”

“영애를 보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어머, 기뻐라.”

하지만 레오니에는 스칸디아가 마냥 저 하나를 보려고 이곳 북부에 온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겐 분명 진짜 이곳에 와야 할 목적이 있었다.

“형님의 책봉식 일정이 당겨질 겁니다.”

스칸디아가 말했다.

“편지로 읽기는 했어요.”

레오니에가 편지에 적혔던 내용을 떠올렸다.

“내년 봄도 빠듯하지 않나요? 여러모로 준비할 것도 많고, 지금은 수도 내부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꽤 바쁠 텐데.”

“영애의 말씀이 맞습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수도 내부 민심은 여전히 뒤숭숭했다. 하나 다행이라면 그 뒷정리가 생각보다 잘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수비테오 전 황제와 올로르의 만행으로 일어난 문제였다. 원흉이 사라지니 반란의 뒷정리나 민심 수습도 잘 되어 갔다. 특히 차기 황제가 될 크리세토스 황자를 향한 각 지역 수장들의 지지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황태자 책봉식이 앞당겨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뭐가 있는데…….’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스칸디아를 보았다.

“중요한 비밀이에요?”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나한테 말도 못 할 정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허락도 미리 받아 뒀고.

스칸디아가 싱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그는 레오니에의 바로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레오니에의 눈이 동그래졌다.

“실은 말이지요.”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머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티그리아 황후가 임신했다.

“아, 아빠는 누군데요?”

큰 충격에 빠진 레오니에가 허둥거리며 물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설마 수비테오 그 새낀……!”

“제 어머님을 뭐로 보시고.”

스칸디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엄청난 비밀을 전했음에도 스칸디아는 여전히 레오니에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가까이 붙은 몸도 그대로였다. 레오니에도 굳이 그를 밀치진 않았다. 오히려 넓은 어깨에 머리를 슬그머니 기댄 척했다. 누가 보면 아주 다정한 연인처럼 보일 모습이었다. 실제로도 둘은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콤한 밀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설마 이벡스 경?”

“예. 제 아버지십니다.”

“에구머니나.”

레오니에가 할머니 같은 감탄사를 토했다.

“언제요?”

“그건 저도 잘…….”

스칸디아가 머뭇거렸다. 저라고 부모님의 밤일까지 알지는 못했다.

‘난 알았는데.’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바리아가 처음 합방하던 날, 저택이 떠나갈 정도로 이 소식을 크게 떠들고 다녔다.

“잠깐…….”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혹시, 임신한 몸으로 반란을 진압했던 거예요?”

스칸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그렇게 물어보시면서 무척 놀라셨습니다.”

“당연히 놀라죠!”

레오니에는 이벡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이쪽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울 엄마가 그 백조 새끼한테 납치당했던 것만 생각하면……!”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지라, 레오니에는 치를 떨었다. 아침에 액땜 차원으로 레무스에게 칼춤을 선사했던 것이 헛수고가 된 기분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한 번 더 칼춤을 춰야 할 것 같았다.

“황자 전하는 뭐라고 하세요?”

“형님이요?”

“어쨌건 동생이 생기는 거잖아요.”

레오니에는 한 번 더 물었다.

“기분이 어떻대요? 그리고 스칸 당신은?”

“솔직히 놀랐지요.”

아무래도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 생기는 거니, 크리세토스 황자나 스칸디아에게도 황후의 회임 소식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태어날 제 동생은 저와 형님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조금 기쁘다고, 스칸디아가 웃었다.

“형님은 여동생을 바라십니다.”

이번엔 진짜 여동생이 좋다면서, 크리세토스 황자는 벌써 동생 선물을 사다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형님이 늘 저보고 가짜 여동생이라고 놀렸거든요,”

“그렇게 놀렸어요? 혼내 줘요?”

“욕은 아니었습니다. 형님은 제가 왜 여자처럼 꾸며야 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런 제가 슬프지 않도록 농담 같은 것으로 위로해 줬거든요.”

크리세토스 황자는 얼굴이 수비테오 황제를 닮아 안쓰러웠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상냥하고 배려심이 넘쳤다. 그는 늘 숨어 살아야 했던 동생을 걱정했었다. 가끔은 자신도 스칸디아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며 놀아 주기도 했다.

“사이가 좋으셨네요.”

레오니에는 어린 황자와 황녀를 떠올려 봤다. 둘이서 서로를 의지하며 즐겁게 놀았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사실은요.”

레오니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우리 집도 엄마가 임신 중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동생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거든요?”

“근사한 선물을 주시는군요.”

스칸디아가 진심으로 칭찬했다. 하나 레오니에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근데 잘 떠오르지 않아요.”

어느새 레오니에는 자신이 갖고 있던 걱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난 동생이 너무 좋아요. 정말로요. 난 근육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 다 품에 안겨 줄 거예요.”

하지만 불안했다.

“동생이 날 싫어하면 어쩌죠?”

“왜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묵묵히 듣던 스칸디아가 물었다. 레오니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스칸디아는 아까부터 위화감이 느껴졌다. 동생을 향한 레오니에의 진심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은 반드시 동생에게 잘해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았다.

“……그.”

레오니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스칸디아의 시선이 저 자신도 몰랐던 속내를 툭툭 건드렸다.

“사실은.”

레오니에가 고백했다.

“동생한테 미안하거든요.”

스칸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오니에가 머쓱히 웃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가요?”

“내가 다 가졌잖아요.”

“그거야 영애께서는 공작 부부의 장녀시고, 북부가 인정한 후계시니까요.”

“원래는 동생이 가졌어야 했던 거예요.”

그리 대답한 레오니에가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은 뒤에야 처음 알았다.

레오니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행보를 후회한 적이 없었다. 펠리오의 딸로서 모든 것을 다 누린 것도, 보레오티 영애로서 북부의 차기 수장이 되는 것도, 바리아를 만나 함께 근육을 덕질할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니까.

고아원에서 펠리오의 앞을 막아선 것도, 바리아를 보레오티 저택에 데려온 것도, 차기 공작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한 것도 온전히 저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레오니에는 문뜩 생각했다.

“원래 동생의 것이잖아요.”

펠리오와 바리아의 사랑, 보레오티의 후계자.

본래 이 모든 것은 펠리오와 바리아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의 것이었다.

“처음으로 후회가 됐어요.”

혹여 저 때문에 태어날 동생이 본래 자신의 것을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닌지, 동생이 본래 가져야 했던 후계 자리를 자신이 가로챈 건 아닌지.

“근육이가 나중에 저를 원망하면 어쩌지요?”

“동생분이 원망할 것 같습니까?”

“그거야…….”

레오니에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난 내가 가진 걸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부모님의 사랑도, 후계 자리도, 제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감조차. 레오니에는 이 모든 걸 가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설령 동생이 자신을 사생아라고 비난하며 가진 걸 내놓으라고 해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좀 비약적인 사고죠?”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다.

‘원래 이런 건 신경도 안 썼는데.’

여태 고려하지 않았던 원작의 흐름이 뒤늦게 레오니에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만큼 동생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이. 그래서 죄책감이 들었고,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걸 주기는 싫기에 더더욱 동생에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나고 있었다.

“……영애는.”

드물게 풀이 죽은 레오니에를 바라보며, 스칸디아가 말했다.

“정말 착하시네요.”

“아닌데요.”

레오니에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얼마나 욕심꾸러긴데.”

“아니요, 정말 착하십니다.”

스칸디아가 힘주어 말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 각오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곱고 선량한 마음씨입니다.”

“그건 전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물론 저도 동생이 소중합니다.”

하나 스칸디아는 레오니에처럼 미움받기 무섭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동생분은 아주 행복할 겁니다.”

“왜요?”

레오니에가 삐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자기 것을 다 빼앗았고, 그걸 돌려줄 생각도 없는데?”

레오니에는 스칸디아가 자신의 비밀을 모르니까 저렇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동생의 입장이었다면, 아주 억울할 것만 같았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스칸디아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레오니에는 귀가 간지러운 걸 꾹 참았다. 불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만약 지금 나누는 대화 주제만 아니었다면, 당장 이놈을 벽에 밀치고 입술을 허겁지겁 훔쳤을지도 모른다.

“영애가 어떤 소문으로 괴로워했는지 조금은 압니다.”

자신이 한 말이 아닌데도, 스칸디아는 소문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공작의 사생아.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

차기 보레오티로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기 전, 레오니에에게 향한 소문은 무척이나 잔인하고 악의적이었다. 북부를 두려워한 귀족 사회는 그런 소문을 퍼트리며 보레오티를 견제하려 했다.

하나 레오니에는 보란 듯이 여기까지 왔다.

“지금 영애가 서 있는 자리는, 영애께서 스스로 노력해서 오르신 겁니다.”

스칸디아는 펠리오를 남들보다는 조금 더 잘 알았다.

“공작은 딸이란 이유로 후계 자리를 물려주는 물렁한 인간이 아닙니다.”

펠리오는 분명 자신의 딸을 사랑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후계 자격을 줄 만큼 마음이 여린 사람도 아니었다. 실제로도 펠리오는 레오니에에게 후계가 되기 위한 엄격한 기준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혹독하게 가르쳤다. 이따금 루페조차 지나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항상 열심히 노력했다. 입으론 늘 힘들다고 투덜거려도, 단 한 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당신은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입니다.”

스칸디아가 힘주어 말했다.

“…….”

레오니에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스칸디아를 보고 있자니, 어째선지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처음이야…….’

부모님이 아닌 타인에게 저의 노력을 인정받는 건 처음이었다.

주변에선 항상 보레오티니까 당연하다고, 보레오티니까 능히 할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레오니에도 자신이 보레오티니까 노력을 굳이 티 내지 않고 타고난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했다.

그런데 그걸 스칸디아가 바로 알아 줬다.

레오니에는 스칸디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 태어날 동생분은.”

곧 굵은 손가락이 기다렸단 듯이 레오니에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끼어 들어왔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자신의 형제란 사실을 무척 기뻐할 겁니다.”

스칸디아가 말에 힘을 실었다.

“만일 동생분께서 영애를 미워한다면, 그땐 싸우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 작은 거랑 어떻게 싸워요!”

때릴 곳도 없는데!

레오니에가 씩씩거렸다.

“하나 동생분도 보레오티지 않습니까. 용맹한 맹수가 태어나실 건데,”

“뭐, 그거야 그렇죠.”

곧장 수긍한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정말 신기했다. 이제 레오니에는 태어날 동생에게 미안하지도 않았고, 죄책감도 지니지 않았다.

일순, 어릴 적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안쓰럽대?’

쓸데없는 동정심을 부리려 할 때,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말을 조곤조곤 들어주며 큰 깨달음을 가르쳐 줬다. 원작은 찰나일 뿐이라고.

그리고 이번엔 스칸디아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 당연했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한 번 더 깨우치게 해 줬다.

“거기다 영애께서도 공작 부부의 딸인데, 정당성이야 당연히 있죠.”

“사실 나만큼 멋진 딸은 찾기 힘들죠.”

“그럼 이제 그런 생각은 마십시오. 공작 부부께서 조금 전 영애의 생각을 들었다면 슬퍼하실 겁니다.”

“그걸 핑계로 전 광산 몇 개를 제 이름으로 돌릴 수 있고요.”

그 말에 스칸디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운은 좀 차리셨습니까?”

“난 원래 기운 넘쳤어요.”

그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레오니에는 냅다 스칸디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크게 당황한 스칸디아가 돌처럼 굳어졌다. 두 팔도 어정쩡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슬쩍 뒤로 물러난 레오니에의 얼굴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역시 뿜뿜이가 최고야!”

이 세상엔 정해진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원작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꿨다.

‘이제 원작은 없어.’

있는 거라곤 오로지, 레오니에가 노력으로 일군 과거와 현재뿐이었다.

그리고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북부 산맥 너머, 그 시커먼 땅에 숨어 사는 건방진 신들조차도.

* * *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지니, 레오니에는 어느 때보다 뛰어난 역량을 과시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펠리오는 그런 딸아이를 수상쩍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오니에가 저렇게 기운이 넘치게 된 날을 되짚어 보니, 예정에도 없던 외출을 하고 온 뒤부터였다.

“그동안 답답했던 것을 스스로 깨부순 거겠죠.”

바리아가 별일 아닐 거라며 대꾸했다.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밖에서 스칸디아를 만나고 왔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바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레오가 근육이 이름은 다 정했을까요?”

“저리 기분 좋은 걸 보니, 아마 정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당신은 생각해 둔 거 있어요?”

“아니요.”

펠리오가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대며 팔짱을 꼈다. 바리아를 향해 돌아보는 시선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레오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럴 줄 알았어요.”

바리아가 키득거렸다. 이 딸 바보는 결국 아이를 믿고 있었던 거다.

“바리아 그대는?”

“저도 당연히 준비 안 했죠.”

부모는 둘째의 이름을 오로지 첫째에게 맡겼다.

그리고 며칠 후.

“벨레아니!”

레오니에가 힘차게 소개했다.

“동생 이름은 벨레아니 보레오티야!”

일주일 동안 고민해서 내놓은 근육이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펠리오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레오니에가 그토록 고민해서 멀쩡한 이름을 내놓았는데, 펠리오는 열심히 노력한 아이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 그의 심기가 상당히 언짢단 뜻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레오니에가 떠올린 동생 이름 때문은 아니었다. 불쾌감에 짓이겨진 검은 눈동자가 향한 곳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스칸디아가 공작 부부에게 인사했다. 사뭇 긴장된 표정이었다.

펠리오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등장이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목을 댕강 썰어 버리고 싶다는 진심을 담아 스칸디아를 노려봤다. 정작 스칸디아는 살짝 움찔거리는 것 빼고는 태연했다.

바리아는 감탄했다.

‘이 얼굴을 보고도 저렇게 버티다니.’

과연 레오니에가 인정한 사람다웠다. 게다가 스칸디아의 긴장은 펠리오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의 부모님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홀로 속을 삭인 펠리오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벨레아니.”

그가 가까스로 화를 억누를 수 있었던 건, 어쨌건 레오니에가 지어 온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끈 쥔 주먹은 쉬이 펴질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옆에서 바리아가 열심히 손을 조물거린 덕에 겨우 소파 팔걸이를 붙잡을 정도로 펴지게 되었다.

“사실 이름 짓는 게 좀 어려웠는데, 전하가 도와주셨어.”

“제가 뭘 했다고…….”

스칸디아가 쑥스러워했다.

“그치만 우리 뿜뿜이가 답답했던 내 마음을 위로해 줬잖아요.”

“제가 없었어도, 영애께선 스스로 일어나셨을 분입니다.”

둘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와지끈, 펠리오가 앉은 소파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리아가 겨우 풀어 놓은 손이 기어코 소파 팔걸이를 으깨고 말았다.

아기 맹수는 이를 무시하며 말했다.

“내 이름이 사자란 뜻이잖아?”

레오니에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옛날에는, 레오를 ‘레아’라고도 발음했대.”

스칸디아를 만나고 난 뒤, 저택에 돌아온 레오니에는 서재에서 읽었던 조상님들 이름을 떠올렸다. 설마 ‘맹수의 엉덩이’란 흉물스러운 이름이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레오니에도 그 해괴한 이름처럼, 단어 두 개를 합쳐서 작명했다.

“난 동생이 씩씩하고, 튼튼하고 용감했으면 좋겠어.”

예쁜 건 부모님을 닮아 이미 보장되었고, 머리 좋은 건 나중에 자신이 하나씩 가르쳐 주면 되는 거였다. 그러니 레오니에가 동생에게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보레오티의 핏줄답게, 용감한 마음을 지니는 것

“그래서 용감한 사자, 용감한 맹수라고 지었어.”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여동생이면 벨레아니, 남동생이면 벨레오니!”

애칭은 일찌감치 정해졌다. 처음 이름을 지을 때 생각해 둔 것처럼, 어느 쪽이건 둘 다 ‘레아’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제 근육이 이름은 벨레아니다? 응? 레아라고 부르기다?”

레오니에가 발까지 동동 구르며 부모님에게 부탁했다.

“너무 멋진 이름이야……!”

바리아가 감격에 겨워 코를 훌쩍였다. 레오니에가 이렇게까지 동생을 생각해 줘서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지 모른다.

“근육이도 기뻐할 거야. 틀림없어!”

“헤헤, 그러면 좋겠다.”

레오니에가 헤죽헤죽 웃었다.

“리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바리아가 물었다.

“뭐…….”

펠리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쁘진 않네.”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지만, 기실 그가 새 이름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쯤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손으로 슬쩍 가린 펠리오의 입술 끄트머리가 넌지시 올라갔기 때문이다. 펠리오는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벨레아니.”

부드러운 저음이 둘째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새 눈가를 촉촉이 적신 바리아가 기쁜 미소를 지었다.

벨레아니 보레오티.

드디어 새로운 보레오티의 이름이 정해졌다.

“……잘 되셨습니다, 영애.”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에게 말했다.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시선도 함께였다.

“다 전하 덕분이에요.”

레오니에가 싱긋 웃으며 스칸디아의 어깨에 몸을 기대듯 붙였다. 예고 없는 접촉에 스칸디아가 몸을 움찔하며 굳혔다. 얼굴과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를 눈앞에서 목격한 펠리오의 두 눈에선 불이 뿜어질 기세였다.

“아, 그러면!”

뭔가를 떠올린 레오니에가 도로 떨어졌다. 펠리오의 날 선 시선이 한결 가라앉았다.

“스칸이 우리 근육이 대부네!”

“대, 대부요?”

“우리 근육이 이름 짓는 걸 도와줬으니까요!”

아아, 안 돼! 바리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지금은 안 돼! 제발 조금만 참아! 네 아빠 또 쓰러져!

바리아는 차마 옆에 있는 펠리오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제 남편이 지금 당장 제국을 토막 낼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쯤이야. 다행히 레오니에도 그쯤에서 순순히 물러났다. 바리아가 가슴을 쓸었다.

그리고 바리아는 자신의 안도가 너무 이른 판단이었음을 곧 알아챘다.

“그럼 나중에 근육이는 뿜뿜이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바리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눈을 질끈 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부? 매형?”

아니나 다를까.

“레오니에 보레오티!”

펠리오가 고성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와아, 아빠가 뿔났대요!”

짓궂은 미소와 함께,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손을 잡고 도망쳤다. 스칸디아는 그 와중에도 펠리오와 바리아에게 예를 갖추며 나중에 따로 인사드리겠다고 정중히 말했다.

“우리 딸 세네…….”

실눈을 슬그머니 뜬 바리아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가 저걸 뭘 먹고 키웠지…….”

“잘 키웠으면서 또 그런 말.”

“동심이 아니라 양심을 키웠어야 했는데.”

펠리오가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중얼거렸다. 그리곤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건강 하나는 보장된 보레오티에서 처음으로 화병과 울화통, 고혈압으로 죽는 사람이 나올 것 같았다. 바로 자신이.

그런 남편의 어깨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우리 근육이는.’

바리아가 배 속 아기에게 부탁했다.

‘아빠 속 조금만 썩이자?’

그러나 그 부탁이 잘 통할지는, 솔직히 바리아도 장담하지 못했다.

‘……딸이면 큰일 나겠네.’

바리아는 이 난리 통을 한 번 더 겪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스칸디아가 북부에 온 건 비단 레오니에를 만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레오니에가 공작 대리로 일할 때, 황실에서 보낸 편지 하나가 있었다. 편지에는 곧 황실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스칸디아였다.

스칸디아는 황실의 뜻을 전하로 온 사자였다. 고로, 그가 본래 가장 먼저 만났어야 했던 사람은 펠리오였다.

하나 두 사람의 만남은 며칠 뒤에나 가까스로 이뤄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펠리오가 스칸디아와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루페가 속이 저리 좁을 줄은 몰랐다고 뒷말을 했다가 월급을 무자비하게 감봉당하고 눈물을 흘렸었다.

사실 펠리오도 그런 스스로가 꼴불견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펠리오는 제 앞에 앉은 스칸디아를 노려봤다. 스칸디아는 쓸데없이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릴 적에 황녀로 지내면서 받은 교육 덕이었다.

‘진짜 미치겠군.’

레오니에는 스칸디아가 근육이의 대부라고 말했지만, 진짜 대부와 대자 관계는 바로 여기 있었다. 자신은 선의로 황후와 이벡스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다였다. 그런데 왜 그 선의가 이런 식으로 저를 엿 먹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공작.”

스칸디아가 그런 펠리오를 살피며 물었다.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시작하죠.”

펠리오가 대충 손짓하며 답했다. 볼일을 빨리 끝내고 내보내는 게 속 편했다.

스칸디아는 황실에서 이번 반란을 어떻게 처리했으며, 보상금 분배에 관한 사항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 가지고 온 자료들도 보여 주었다.

펠리오도 막상 이야기가 진행되니 사적인 감정은 잊어버리고 몰두했다. 기실 그라고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스칸디아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제 딸과 엮이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남부 기사단 설립은 결국 보류되었군.”

“하지만 몇 년 뒤에 다시 논해 볼 예정입니다. 아마 그땐 기사단이 아니라 해군을 중앙과 함께…….”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보레오티 공작.”

스칸디아가 두 번째 소식을 전해 줬다.

“어머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환장하겠군.”

펠리오가 솔직한 감상을 토했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애가 생긴답니까?”

그렇게 해서 생긴 첫 번째 아이가 바로 펠리오의 눈앞에 있었다. 스칸디아도 거기엔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다.

“그래서 황태자 책봉식을 급하게 하는 거군.”

“그렇습니다.”

“마물 사냥이 끝난 뒤에 책봉식을 진행하면 좋겠는데.”

“참석할 시에 북부와 이어진 황궁 내 게이트를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스칸디아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영애께 말씀드리는 게 맞는 것 같지만…….”

레오니에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스칸디아는 펠리오에게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올로르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조사하던 중, 우시스 전 황비가 차명으로 만들어 둔 사재가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레오랑 무슨 상관이지?”

“인생 다 부질없다, 아십니까?”

펠리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시를 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내 딸의 애독서도 모를까 봐?”

“그 책을 저술한 작가가 우시스 전 황비였습니다.”

그 순간.

펠리오는 그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코니에가 배후였단 사실을 안 것보다, 북부 산맥에서 신에게 방해를 받았을 때보다 충격이었다.

한참을 손으로 입 주변을 쓸어내리던 펠리오가 말했다.

“이건.”

신중에 신중을 더한 결론이 내려졌다.

“영원히 비밀로 하지.”

스칸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