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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첫 뽀뽀 (40/51)

#40. 첫 뽀뽀

보레오티 가족이 수도 저택에 저택으로 돌아가니,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크게 안도하며 격하게 환영했다.

천하의 루페마저 물기 어린 눈으로 돌아온 주인을 반겼다.

돌아온 펠리오는 옷을 가볍게 갈아입은 뒤에 뒤쪽 정원으로 갔다. 그곳엔 긴장된 얼굴로 주군을 기다리는 글라디고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펠리오만큼 편안한 훈련복 차림새였으나, 얼굴에선 편안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펠리오가 말없이 눈짓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사들이 곧장 엎드려 뻗쳤다.

내내 벼르던 글라디고 기사단의 기강 잡기가 시작됐다.

“내가 아무리.”

엎드려 뻗친 기사들 사이를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펠리오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숨쉬기도 벅찬 위압감도 함께 따라왔다.

“유해지고 인자해졌대도.”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벌 받는 와중에도, 기사들은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와 바리아에게만 인자했지, 그 외 인간들에겐 변함없이 인정머리 없고 매정했다.

“그대들의 기강까지 흔들리다니.”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 펠리오의 말투엔 살기가 그득했다.

“어린애 한 명 인질로 붙잡은 미친놈 하나 제압을 못 하고.”

“…….”

“……대답.”

서슬 퍼런 명령에 그제야 기사들이 입을 모아 죄송하다고 크게 답했다.

하나 그런다고 펠리오의 마음이 풀리는 게 아니었다. 바리아가 레무스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것이 지옥으로 변했다.

다시 떠올려도 섬뜩하고 두려운 순간이었다.

“멜레스 레비페스 경.”

기사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던 펠리오가 가장 앞에서 벌을 받는 기사 앞에 섰다. 잿빛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멜레스였다.

“그대에게 기대한 것이 컸기에, 이번 일은 더욱 실망스럽군.”

“송구합니다…….”

힘겹게 답하는 멜레스의 등 언저리가 벌써 땀으로 젖어 갔다. 가을 초입이어도 아직 해가 쨍쨍한 정오의 더위는 버티기 힘들었다.

“내가 그댈 호위 기사의 대장으로 삼은 이유는 잘 알 테고.”

“…….”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답해선 안 될 일이지.”

지금 북부에 있는 부기사단장인 모노를 비롯한 중진 기사들이 추천하는 차기 부기사단장 후보가 바로 멜레스였다.

글라디고 기사단에 시동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멜레스는 뛰어난 기질을 보였다. 주변 동료들을 잘 챙기며, 본인 스스로에게도 냉정한 노력가였다.

뼈를 갈 정도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작년 겨울에 처음으로 오러가 발현될 가능성도 보였다.

“레비페스 경.”

펠리오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

“이런 멍청한 실수로 날 실망케 하지 마라.”

“……주의하겠습니다.”

“말로 끝나선 절대 안 될 거야.”

“제 목숨을 걸고 명심하겠습니다.”

“내 마지막 기회는 그대의 목숨보다 비싸야 해.”

두 번은 없다고 경고하는 펠리오의 목소리는 마구잡이로 부서진 얼음장만큼 차갑고 날카로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벌 받는 와중에도 기사들의 목덜미가 시린 건 그 탓이었다.

“손 뒤로 돌려.”

그 말에 기사들의 몸을 지탱하는 건 머리가 되었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달려왔다. 뒤에는 코니와 미아도 함께였다.

기사들이 혼나는 모습을 본 레오니에가 일순 동정을 내비쳤다.

저들이 레무스에게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건 신의 간섭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론 억울한 처사였다.

하나 레오니에는 그걸 알면서도 펠리오를 막을 수 없었다. 진실을 저들에게 말해 줄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말하더라도 그것이 기사들의 불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제 딴에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을 가져왔다.

“여긴 왜 왔어.”

펠리오가 물었다. 지금부터 더 힘든 벌을 내릴 생각이었기에 딸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영 탐탁지 않았다.

“이거 주려고.”

레오니에가 함께 온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곧 코니와 미아가 커다란 바구니에 한가득 들고 온 것을 바닥에 내려 뒀다.

이를 본 펠리오의 한쪽 눈썹이 의아하단 듯이 올라갔다.

“……방석?”

바구니 안엔 폭신폭신한 방석이 수십 장 담겨 있었다.

“엄마가 챙겨 주래.”

바리아도 신의 간섭 때문에 이렇게 된 걸 알지만, 설령 그딴 게 없더라도 자신은 분명 인질 때문에라도 기사들에게 민폐를 끼쳤을 것을 잘 알았다.

“이거 머리에 괴어요.”

그럼 덜 아플 거라며 손수 기사의 목덜미를 휙 잡아 들어 방석을 받쳐 주는 레오니에의 얼굴엔 자비로움이 가득했다.

정작 목덜미를 잡힌, 하필 또 레오니에에게 자주 당하다 못해 오늘도 당하는 프로보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깔려 있었다.

벌 잘 받으라고 챙겨 주는 건 친절보다 저주에 가까웠다.

‘아……!’

하나, 프로보는 방석에 머리가 닿자마자 눈물이 울컥 쏟아질 뻔했다.

바리아가 챙겨 준 방석은 폭신폭신하고 높이가 높았다. 덕분에 상체가 자연히 올라가면서 몸을 지탱하는 부담감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마님…….”

프로보가 훌쩍였다. 펠리오는 그런 프로보를 미친놈 보듯 흘겨봤다.

“네 엄마도 참…….”

바리아의 배려가 영 불만스러운 펠리오는 이를 어찌할까 고민했다. 아마 이 방석은 기사들을 너무 나무라지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사람 마음이 너무 곱지?”

레오니에가 다 안다는 듯이 아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패악질 부리는 방법 좀 가르쳐야지, 사람이 이리 여려서야…….”

“천하의 악녀로 만들어.”

“족쇄도 하나 준비해 두고.”

“진짜 하게?”

레오니에가 물었다. 말로만 족쇄 운운하는 줄 알았더니, 펠리오는 진심으로 바리아의 발목 두께를 가늠하며 족쇄 색깔과 무늬를 고르고 있었다.

“……이래서 북부 광공은.”

답이 없단 듯이 중얼거리는 아이의 고개가 절레절레 움직였다.

“차라리 발목 근육을 다 끊어서 다시는 혼자 걷지 못하게 만들어.”

뒤에 있던 코니와 미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집착과 광기에 질려서 핀잔 격으로 한 말이었지만, 정작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제 어미에게 행할 패륜을 계획하는 소리로 들렸다.

“나도 그런 생각은…….”

펠리오도 엄한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그래도 도저히 바리아에게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아 생각에서만 멈췄었다.

그런데 이놈의 딸은 그런 양심의 가책 따위도 없는 모양이었다.

“……됐다.”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잔소리를 도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은 펠리오가 착잡한 눈으로 장녀를 바라봤다.

“건강하게만 자라라.”

“욕처럼 들리는데…….”

기분 나빠진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접은 채 펠리오를 노려봤다.

“레오 너의 메마른 동심과 양심에 패배했던 경험을 거름 삼아, 둘째만큼은 기필코 올바르게 키워 보도록 노력하마.”

“역시 내가 세계 최강.”

기어코 아빠 입에서 패배했단 소리를 들은 레오니에가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을 긁적거렸다.

“아빠는 육아를 너무 쉽게 생각해.”

“누가 쉽게 생각했대.”

살짝 욱한 펠리오가 빠르게 반박했다. 세상 누구보다 어려운 육아를 현재도 진행 중인 그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소리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철이 들어서 아빠가 별 고생을 안 했지.”

“저게 뚫린 입이라고…….”

펠리오는 당장이라도 레오니에를 키우면서 겪었던 곤란한 일들과 온갖 고생들을 나열할 수 있었다. 시간만 준다면 책 서너 권은 거뜬히 쓸 분량이었다.

“평화롭다, 그치?”

“그러게.”

코니와 미아는 으르렁거리는 맹수 부녀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나 방석 덕에 조금은 편해졌대도 여전히 힘든 벌을 받는 중인 기사들은 부디 저들이 자신들을 잊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저 웃긴 대화도 그만두길 바랐다. 안 그러면 너무 웃겨서 힘을 주고 있는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방석 위에 머리 박은 기사들만 끙끙거리며, 제발 저 두 사람이 자신들을 잊지 않았기를 또 한 번 기도했다.

* * *

“주인님.”

트라가 펠리오를 찾았다.

펠리오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바리아와 함께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의 손엔 바삐 해결해야 할 서류가 들려 있었지만, 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걸리적대는 것들을 빠르게 치우니 이렇게 내면에서 여유가 흘러넘쳤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트라는 며칠 전 펠리오가 미리 말해 뒀던 손님들의 도착을 전했다.

“저도 같이 갈까요?”

바리아가 읽던 책을 덮으며 물었다. 레오니에가 태교에 좋다며 자기 책장에서 빼낸 근육 크로키 최신판이었다.

“금방 올 테니 쉬고 있어요.”

펠리오가 바리아의 손에서 크로키 연습장을 슬그머니 빼내며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레오가 안 보이는군.”

응접실로 이동하던 펠리오가 아침 식사 이후로 보이지 않는 큰딸을 찾았다.

“아가씨께선 기사들과 함께 계십니다.”

“기사들?”

“지하 감옥에 가신다고 합니다. 주인님께서 자신의 행방을 물으면, 칼춤을 추러 간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트라의 전언에 펠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칼춤?”

순간 그의 머리에 칼을 휘두르며 신명 나게 몸을 흔드는 레오니에가 떠올랐다. 기가 막히다가도 우스워서 헛웃음이 피식 튀어나왔다.

“그 작던 게, 많이 자랐어.”

“그렇습니다.”

“피 튀기는 고문은 싫다고 투덜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어엿한 보레오티가 되어 스스로 할 줄 아는 실천력까지 지니었다. 펠리오는 흐뭇하기만 했다.

“하나 마님껜 비밀로 하시는 게…….”

“당연히 그래야지.”

바리아 역시 누구보다 레무스를 싫어하지만, 그래도 레오니에의 손에 그런 놈의 피가 묻는 걸 달가워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레오니에가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지하 감옥에 내려간 것일 테고.

응접실에 도착한 펠리오가 문 앞에 섰다. 곧 트라가 문을 열었고, 그 안으로 들어간 펠리오는 곧장 손님들 앞에 앉았다.

“그래서.”

펠리오는 인사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이어 트라가 밖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응접실에는 온전히 펠리오와 손님들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공작.”

손님은 펠리오의 무례한 행동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손주를 만나러 온 것처럼, 아우스트 공작의 입가엔 인자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엄연히 따지면 공작이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올 것 같았으니까요.”

“거야 황궁에선 만나 주지 않았으니 말이죠.”

옆에 함께 있던 살루스 아우스트 공작 영애 역시 빙그레 웃으며 반박했다.

‘우시스의 딸…….’

그 사실을 알고나서야, 펠리오는 살루스의 얼굴에서 우시스가 겹쳐 보였다. 이제 보니 웃는 모습이 제 어미를 쏙 빼닮았다. 머리 색만 제외하면 오히려 알리스 1황자보다 더 닮았다.

“모친을 많이 닮으셨군요.”

펠리오가 이미 차려진 다과상을 훑어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무척 미인이시거든요.”

“거기다 성실하시지요.”

펠리오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복수를 위해 적진에 잠입해 살아갔을 우시스의 집념은 성실 그 이상이었다.

그 점만큼은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었다. 물론 제 가족을 건드렸던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받아 갈 것들은 받았습니까?”

펠리오가 황궁에 가둔 메리디오 기사들을 언급했다.

“황후 폐하께서 친절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보레티오 공작의 도움이 컸다지요.”

“제가 굳이 한 것은 없군요.”

“저희의 죄를 덮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우스트 공작이 본론을 말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청옥의 눈동자가 아득한 바다의 수평선처럼 반짝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임에도, 펠리오에겐 딱히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펠리오가 차향을 가볍게 맡으며 말했다.

“우리 사정이 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요.”

레무스가 돌발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우스트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더욱이 우시스 황비가 레무스의 거처와 작전을 알고도 내버려 둔 걸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남부를 뒤집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렇기에 보레오티가 반란을 올로르에게 뒤집어씌운 것도 순화된 복수였다.

아우스트와 메리디오가 그간 준비해 왔을 노력을 한낱 올로르가 벌인 범죄로 실추시켰으니, 어떤 의미론 반란을 들키는 것보다 더한 수치였다.

실제로도 눈앞에 있는 두 아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대답하는 살루스의 목소리엔 기운이 빠져 있었다.

“안 될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반란은 성공할 수 없을 거란 안타까운 예측 정도는 일찌감치 지니고 있었다.

“예언으로 보았습니까?”

펠리오의 물음에 살루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며 몸을 숨겼던 겁쟁이들이 갑자기 일어선들…….”

그리 말하는 살루스의 얼굴엔 씁쓸함이 가득했다.

“무수한 견제와 시련을 헤쳐 온 검은 맹수 앞에선 하룻강아지도 못 됩니다.”

“…….”

“보레오티를 믿지 않은 것에서부터, 패배는 정해진 것이지요.”

살루스는 순순히 자신들의 패배와 그 원인을 인정했다.

예언이 가르쳐 주는 미래는 한정적이다. 언제고 바뀔 가능성이 있고, 도리어 미래를 안다는 자신 때문에 일을 그르칠 때도 있다.

그런 살루스를 지켜보는 펠리오의 무감한 시선에 미약한 감정 하나가 머무르다 이내 사라졌다.

“다음 대 공작은.”

찻잔을 테이블에 완전히 내려 둔 펠리오가 물었다.

“영애입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놀란 살루스가 아우스트 공작을 보았다. 아우스트 공작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곧 살루스가 답했다.

“본래라면 제 아버지가 작위를 이어야 하지만, 당신께선 반란과 이를 도운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계셔요.”

“요컨대 기회가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셨어요. 이제라도 오롯이 두 분이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루스는 성의껏 대답했으나, 펠리오가 제게 그런 질문을 던진 의도까진 알 수 없었다. 스스로 감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영 그 촉이 곤두서질 않았다.

“조건을 하나 달죠.”

펠리오가 다과로 나온 쿠키 중 모양이 제법 예쁜 것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걸 살루스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쿠키를 건네받은 살루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리워졌다.

“올로르 가문의 성씨와 작위는 현재 황실에 반납된 상태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난 그걸 황후 폐하께 부탁해서, 그대들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그 말에 쿠키를 이리저리 살피던 살루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우스트 공작만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 올로르 가문 앞에는 엄청난 빚과 불명예가 쌓여 있습니다.”

올로르에게 당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 줘야 하고, 그들이 불법으로 수취한 재산이나 토지 역시 원래대로 돌려놔야 한다.

문제는, 이 많은 일을 행하기엔 현재 황실은 너무 바빴다.

“선황이 그렇게 죽고, 대리청정하시는 황후 폐하는 물론이거니와 황태자 책봉을 앞둔 황자 전하도 바쁘시지요.”

그러니 요는, 아우스트 중 누군가가 올로르란 성씨와 자작 작위를 물려받아 그 일을 대신하란 뜻이었다.

당연히 펠리오의 조건은 황실과 일찍이 합의된 일이었다.

“……우와.”

살루스가 경악했다.

“그건 좀 잔인하지 않나요?”

아우스트 공작 영식은 후계 자리를 포기했다. 그 뒤는 그의 쌍둥이 딸인 살루스가 이어받을 예정이니,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알리스가 싫어할 텐데.’

행방불명된 우시스 황비의 소생인 알리스 황자는 현재 남부 별장에서 유배 중이라 알려졌다. 살루스는 누구보다 올로르를 증오했던 쌍둥이 동생이 그 조건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 재밌을지도.’

짓궂은 누나는 이를 알고 난리를 칠 남동생이 궁금해졌다.

“할머니이…….”

살루스가 아우스트 공작을 힐끔 보았다. 아직 결정권이 없는 손녀는 할머니의 뜻을 기다렸다.

아우스트 공작은 상의에 걸친 가벼운 숄을 정리하며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하나 노부인의 입가에도 살루스와 마찬가지로 흥미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심지어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보레오티 공작.”

아우스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죄지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우스트 공작은 이 말 하나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무척 변했군요.”

그것도 아주 근사하게.

“그런 말씀 하신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만.”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이며 말했다.

살루스는 보레오티 공작의 목소리가 어째선지 아주 퉁명스럽게 느껴졌고, 그게 레오니에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믿을지도 모르지만.”

아우스트 공작이 말했다.

“이래 봬도 그대를 제법 걱정했답니다.”

“글쎄…….”

펠리오는 믿지 못하겠단 듯이 피식거렸다.

그러나 이번처럼 유감스러운 일은 뒤로 제쳐 두고도, 펠리오는 아우스트 공작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걱정해 준 몇 안 되는 귀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저 남의 집 불쌍한 아이보다 제 집안 문제가 더 중요했을 뿐.

어쨌거나 그 덕에 아우스트는 큰 고초를 치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는 펠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예언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십시오.”

모든 일이 북부 산맥 너머 신들의 꿍꿍이였던 걸 생각하면 영 찜찜하지만, 그래도 펠리오는 예언 핑계를 대며 통 크게 넘어갔다.

이는 레오니에와 바리아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둘밖에 없는 공작 가문끼리 괜히 척을 져 봐야 서로 좋을 게 없었다.

“아, 참.”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살루스가 잠시 잊었던 것을 떠올렸다.

“로타 올로르, 아시죠?”

뜬금없는 처제의 이름에 문을 손수 열어 주던 펠리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우리 집에 있어요.”

“……어째서입니까?”

“레오가 부탁해서요.”

엄마 발목 붙잡지 않게끔 로타를 치워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고자, 살루스는 로타를 아우스트의 별장에 숨겨 뒀다.

“우리 엄마가 잘 설득해 줬죠.”

“…….”

“사실 설득할 것도 없었대요. 그 집에서 거의 버려지다시피 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네요?”

이번 일의 여파로 에르바누 역시 작위를 빼앗기고 몰락하게 됐다.

그러니 로타는 돌아갈 친정조차 사라진 셈이었고, 그녀가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은 우시스 황비가 내민 손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미래는 기껏해야…….”

살루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하녀?”

하나 그것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워낙 오만방자하게 자란 탓에 남부 지역 하녀들에게 악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요.”

펠리오가 헤실헤실 웃는 살루스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어째 파르두스 후작과 닮은 꼴이었다. 특히 불쾌할 정도로 얄미운 능글거림이 그랬다.

“그럼, 곧 다시 뵙죠.”

펠리오가 문을 나서는 두 아우스트에게 말했다.

“황제의 장례식에서.”

수비테오 황제의 장례식은 아주 조용히 진행되었다.

원래는 장례식 자체도 치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간 저지른 죄들이 드러나면서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단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황후는 장례식을 진행했다. 황자의 아버지였기에, 어쨌거나 황실의 일원이었기에.

그 이유 하나로 치러진 장례식은 어지간한 평민들의 장례식만큼이나 소박했다.

그래도 참석한 귀족들은 제법 되었다. 수비테오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닌, 대리청정을 시작한 티그리아 황후와 곧 황태자로 책봉될 크리세토스 황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귀찮아 죽겠네, 이거 언제 끝나냐…….”

“레오, 목소리 크다.”

“그럼 작게 욕해도 돼?”

물론 그 속에는 딱히 잘 보일 노력은커녕 장례식 중에도 자기들 할 말을 당당하게 하는 보레오티 부녀도 있었다.

“……그런데, 관이 닫혀 있네?”

지겨움에 딸기 우유 맛 사탕만 오물거리던 레오니에가 관을 보았다.

“원래는 열어 놓고 하는데.”

펠리오도 사탕 하나를 입에 문 채 대답했다. 대답하는 그의 미간엔 흐릿한 주름이 잡혔다. 사탕이 달아서만은 아니었다.

“미관상 좋지 않아 뚜껑을 덮었다더라.”

죽은 수비테오 황제의 몰골이 워낙 끔찍해서, 시신을 수없이 닦고 씻겨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다 뭐가 억울하다고 퍼뜩 올라간 눈꺼풀이 도통 내려오지도 않았다고.

“살아생전에도 미관상 좋지 않았는데.”

레오니에는 비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관뚜껑을 열어 침이라도 뱉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이어진 추모의 마지막은 크리세토스 황자와 티그리아 황후였다.

“어디 숨겨 둔 재산 없습니까?”

네가 저지른 일 수습하느라 재정이 쪼들리는데. 황자는 닫힌 뚜껑에다 물었다.

“……내가 죽이려 했는데.”

쯧.

여기에 황후의 혀 차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수비테오 선황의 장례식이 끝났다.

반면 가장 소란스럽고 분주했던 행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장례식 다음 날에 열린 귀족 회의였다.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귀족 회의였어.”

귀족 회의에 다녀온 펠리오는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상당히 흡족해 보였는데, 그로서도 이렇게 제대로 된 귀족 회의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회의 안건은 주로 전 황제파의 처벌 문제였다.

“행방불명된 우시스 황비와 유배된 알리스 1황자의 지위 및 재산 박탈도 있었지.”

“오호, 그렇군.”

레오니에가 흥미롭단 눈으로 경청했다.

“펠리오.”

바리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벌을 받는 귀족 중엔…….”

“에르바누도 있습니다.”

“벌은 어떻게 받나요?”

“이 일로 목숨을 잃는 자는 없습니다.”

대신 작위를 몰수하거나, 엄청난 금액을 벌금으로 물거나. 혹은 둘 다이거나.

“에르바누가 세 번째 경우입니다.”

그들은 작위를 몰수당했고, 엄청난 금액을 벌금으로 내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 친정인데?”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리아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엄연히 공작 부인의 친정임에도 큰 벌을 받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에 대한 대답은 펠리오가 했다.

“레지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측되는 검은 다이아를 경매에서 낙찰한 자가 바로 에르바누였어.”

충격적인 사실에 레오니에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르바누에 그런 돈이 있었어? 검은 다이아가 얼마나 비싼데…….”

“몇몇이 돈을 보탠 듯해. 낙찰은 선대 에르바누 백작이 받고.”

“선대라면…….”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힐끔 보았다.

“세상에…….”

바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 다이아가 가장 최근에 경매로 나왔을 때가 무려 20년도 더 전이었다.

그리고 그땐 지금의 에르바누 백작은 아직 영식이었다.

“……초대 황제부터 북부를 노렸으니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펠리오가 바리아를 위로했다. 제국이 존재한 이래, 그런 시도는 수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저 그 하찮은 속셈이 드러난 게 이번이 처음일 뿐이었다.

“그럼 그 사람들은?”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백작은 일단 감옥, 백작 부인은 이혼 신청 후 친정으로 도망.”

“내 법적 이모는?”

“아우스트에.”

바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 집 딸인지 몰라도.”

그리 말하는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웬 말괄량이가 아우스트에 로타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모양입니다. 아우스트 공작 영식 부인이 하녀로 쓸 것 같다네요.”

“그렇군요…….”

그리 대답한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꼭 껴안았다. 레오니에도 바리아를 껴안았다.

“정말 다 끝났네요.”

드디어 가족들과의 연이 끊어짐을 확인한 바리아는 그제야 가슴 한쪽에 남아 있던 짐이 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다 끝났으니.”

펠리오가 몸을 낮춰 두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북부로 돌아갑시다.”

“그래요. 돌아가요.”

“야호! 드디어 간다!”

검은 맹수가 북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아가씨!”

북부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던 레오니에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레오니에는 오늘 가족들과 함께 북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번엔 황궁에 있는 북부 게이트를 통해 넘어갈 거라 준비가 여유로웠다.

“코니? 무슨 일이야?”

북부로 돌아갈 때 가져갈 물건과 옷을 마지막으로 살피던 레오니에가 물었다.

“너는 아가씨 심부름 다녀온 애가.”

호들갑스럽게 뭐하는 거냐고 미아가 타일렀다. 그 말마따나 코니의 손에는 이곳 수도에서만 파는 간식들과 미술 도구가 포장되어 들려 있었다.

“이거! 아가씨!”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코니는 사 온 물건을 근처 테이블에 올려 둔 뒤, 품에서 웬 편지 한 통을 꺼내었다.

“이게 뭔데?”

“아가씨게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코니, 내가 이런 건 안 받는다고 했잖아.”

레오니에가 편지를 흔들며 점잖게 말했다.

예전에 펠리오가 뭇 귀족 영애들에게 받은 연서로 고생한 뒤, 보레오티 가문엔 연서는 무조건 거르고 본다는 암묵적 규칙이 생겼다.

“그냥 연서 따위가 아니에요!”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한 코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은발의 기사님이 주셨어요!”

“걘 또 누구야.”

이젠 듣도 보도 못한 것이 저를 사모한다고 귀찮아하던 레오니에가 헉, 했다.

“누, 누구라고?”

“은발의 기사님이요! 아가씨께서 손목시계를 주셨던 그분!”

“어머머! 어서 열어 보세요!”

이젠 미아까지 가세해 어서 편지를 열어 보라고 재촉했다.

“으흠! 뭐 이리 호들갑이야!”

레오니에가 괜히 틱틱거리며 두 하녀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흥분한 건 레오니에 본인이었다.

황궁에서 돌아온 이후, 스칸디아 황녀와 줄곧 만나지 못했던 레오니에는 서둘러 편지를 뜯었다.

“뭐라고 쓰셨어요?”

“사랑 고백이죠? 그렇죠?”

“아이, 둘 다 좀 기다려 봐!”

언니 같은 두 하녀를 쏙쏙 피한 레오니에가 후다닥 밖으로 도망쳤다.

뒤에서 아쉬운 소리가 들렸지만, 레오니에는 이 편지만큼은 저 혼자서 읽고 싶었다.

근처에 있던 빈방으로 들어간 레오니에는 가장 먼저 문부터 잠갔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마음 졸이며 읽어야 한다니. 그런 스스로가 한심한데, 편지를 보는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서서 편지 봉투를 천천히 뜯는 레오니에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목은 침을 연신 삼킨다고 계속 꿀렁거렸다.

“하아, 하아……!”

편지를 펼치는 레오니에의 숨결은 쓸데없이 거칠어져 갔다.

[친애하는 보레오티 영애.]

레오니에가 손으로 이마를 확 쳤다.

“……진정해라, 북부 광공.”

고작 아는 남자일 뿐인 자의 편지, 그것도 받는 이를 부르는 한 줄 따위로 입꼬리를 헤벌쭉 올릴 수 없었다. 체신을 유지해야 했다.

“근데 글씨 예쁘네.”

나보다 더 예쁜 것 같은데? 레오니에는 그런 생각을 짧게 하며 편지를 마저 읽었다.

동그란 눈이 빠르게 편지를 훑었고, 그럴 때마다 레오니에의 몸은 점점 문으로 향했다.

쾅!

“우와, 아가씨!”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던 하인 한 명이 발라당 넘어졌다.

“으아, 미안해!”

그러나 갈 길이 바쁜 레오니에는 넘어진 하인에게 대충 사과를 건넨 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거의 뛰다시피 내려온 계단 아래엔 펠리오가 있었다. 출발 준비를 지휘하던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 저택에선 뛰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잘못했어! 그리고 다녀올게!”

“어딜 가는데?”

밖으로 나가려는 딸의 옷깃을 잽싸게 잡은 펠리오가 물었다.

“곧 있으면 황궁으로 출발할 거다.”

“금방 올게! 멀리 안 나가!”

그러니 이거 좀 놓으라고 레오니에가 버둥거렸지만, 펠리오는 오히려 수상쩍단 듯이 아이를 흘겨봤다.

“……너 그건 뭐야?”

그러곤 아이의 손에 들린 편지를 가리켰다.

“그냥 편지야.”

“레오, 우리 집은 연서 금지…….”

“연서는 아니야!”

빼액 소리 지른 레오니에가 푸다닥 몸을 흔들며 아빠에게서 빠져나왔다.

“연서‘는’ 아니라고?”

하나 도리어 그 말에 펠리오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럼 무슨 편지인데?”

“그냥 나한테 온 거야!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아빠한테 말하는 버릇하곤. 다 널 걱정해서 물어보는 거다.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애먼 놈한테 걸려서 큰일이라도…….”

“우리 뿜뿜이는 그런 사람…….”

아.

짜증스레 답하던 레오니에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반면 펠리오의 얼굴엔 승자의 미소가 그려졌다. 레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아직은 내 손바닥 안이라는 뜻이었다.

“잠깐 만나자네…….”

아빠의 꼼수에 당하고 만 레오니에가 외출 이유를 밝혔다.

“왜?”

“왜긴 왜야. 북부 가니까 인사하러 오는 거겠지.”

“그러니까 왜.”

“아빠야말로 왜 그래?”

살짝 답답해진 레오니에가 따졌다.

“가서 인사만 하고 올 거야. 그리고 엄연히 따지면 내가 흉흉해.”

“네가 왜 흉해. 날 닮아서 이쁘기만 한데.”

“나 이쁜 거야 당연한 거고! 아니, 그리고 아빠 닮으면 얼굴이 흉기…….”

“어쨌든 나가지 말고 안에 있어.”

가서 바리아랑 같이 있으라며 펠리오가 단호히 명령했다.

“엄마가 이제 배가 나오면서 거동도 쉽지 않을 텐데 옆에서 좀 보살펴 줘.”

“엄마가 거동이 쉽지 않은 건 아빠가 기어코 엄마 발에 족쇄를 채운 탓이잖아.”

“족쇄가 아니라 발찌.”

“발찌라 쓰고 족쇄라 읽지.”

레오니에는 솔직히 엄마의 발에 걸린 발찌가 불만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신 새끼가 엄마를 조종한 건데…….’

그걸 알면서도 발찌를 사서 바리아의 발목에 손수 채워 주던 펠리오의 입가에 무척 흡족하고 음험한 미소가 걸렸던 걸, 레오니에는 메마른 눈으로 다 지켜봤다.

“……알았어.”

어깨를 늘어트린 채 몸을 돌린 레오니에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바리아가 있다는 거실로 향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거실로 들어가 문까지 닫는 걸 지켜봤다.

이를 지켜보던 루페와 트라가 조심히 다가갔다.

“공작님, 방금 건 좀 강압적이지 않았습니까?”

“아가씨께서 친구분과 헤어지시는 게 쓸쓸하신 듯한데.”

“그게 무슨 친구야.”

해충이나 다름없다는 펠리오의 발언에, 레오니에가 만나고 싶던 ‘뿜뿜이’의 정체를 모르는 루페와 트라가 경악했다.

“주인님, 그래도 아가씨 친구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솔직한 말로 아가씨 쪽이 더…….”

“더, 뭐?”

“……더 아깝고 멋지시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루페가 한숨을 내쉬며 숨을 돌렸다.

“…….”

그런 루페를 조금 안타까이 바라보던 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기시감이…….’

트라의 머릿속에, 오늘과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어쨌건, 이제 곧 출발할 거다.”

서둘러 마무리를 지으라고 펠리오가 명령하던 순간.

히이이잉!

저택 밖에서 말이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이 땅을 격하게 박차는 소리가 현관 홀에 있던 세 남자의 귓가에 박혔다.

“주군!”

기사 한 명이 문을 벌컥 열며 나타났다.

“아가씨께서……!”

펠리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가 말을 채 꺼내기 전인데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경험상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말을 훔쳐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또…….”

트라는 그제야 이 기시감이 오래전, 레오니에가 수도 저택에 처음 왔을 때 있었던 가출 사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챘다.

정말 뼛속까지 보레오티이신 분이었다.

“어머, 훔치다니.”

그때, 거실에서 쉬고 있던 바리아가 키득거리며 나타났다.

“잠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다녀오라고 했어요.”

“바리아…….”

펠리오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아내를 바라봤다. 그러나 바리아는 제 딴엔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에게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친구를 못 만나게 하다니! 아빠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누굴 만나러 가는지 모릅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애 엄마가 그 정도도 모르겠냐며, 바리아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금방 온대요.”

바리아가 펠리오의 볼을 어루만지며 다정히 타일렀다.

“우리 레오는 아직 어리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한참 뒤일 거예요.”

“레오는 그 한참을 앞당길 수 있는 아이입니다.”

“뭐…….”

바리아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 점만큼은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레오니에의 추진력만큼은 세 가족 중 가장 으뜸이었으니까.

“도대체 왜 도와준 겁니까?”

펠리오가 제 얼굴을 감싼 바리아의 손을 내렸다. 하나 내려진 두 손은 꼭 깍지를 꼈다. 살짝 안심한 바리아가 말했다.

“어쩌겠어요. 엄만데.”

엄마가 딸을 돕지 않으면 누가 돕느냐며,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 * *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레오니에는 편지에 적힌 마지막 한 줄이 쓸데없이 엉뚱하고 애절해서,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조급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서둘러 말을 타고 달려간 곳은 우습게도 저택 바로 뒤였다.

북부 저택만큼은 아니어도 수도에서 가장 큰 저택인지라, 말을 타고 담을 따라 달리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달려 저택 뒤에 도착하자.

“전하!”

급하게 말을 멈춘 레오니에가 뛰어내리듯 착지했다. 그러나 너무 급했던 탓에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놀랐습니다.”

휘청거리는 레오니에의 허리를 빠르게 감싼 누군가의 팔이 제 품에 안듯이 끌어당겼다.

레오니에는 제 몸을 감싸는 낯선 체온과 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머리 회전이 잠시 멈춰 버렸다.

“괜찮습니까?”

스칸디아 황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대답 대신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황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혹시 다치셨나요?”

한 번 더 물어보는 황녀의 다른 팔엔 말고삐가 들려 있었다. 넘어지는 레오니에를 붙잡는 순간에 말도 진정시켰다.

“……편지가 그게 뭐람.”

레오니에가 한 발자국 뒤로 떨어지며 말했다. 얼굴의 열기는 괜히 날씨 탓을 하며 손부채질로 진정시켰다.

“기다리고 있을 거면서, 뭘 기다려도 되냐고 물어봐요.”

“약속도 하지 않고 찾아왔으니 불편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황녀는 레오니에가 진짜 더운 줄 알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 줬다. 레오니에는 입술을 삐죽이며 묵묵히 그 손길을 받았다.

손수건을 쥔 손가락은 뼈대가 두껍고 길었다. 황녀가 얼마나 열심히 검술에 매진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분 나쁘셨습니까?”

황녀가 말이 없는 레오니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빴으면 무시하고 안 나갔을 거예요.”

내가 얼마나 비싼 몸인데.

오만한 말투와 달리, 레오니에의 얼굴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미소가 활짝 폈다. 얼굴에 맺히지도 않은 땀을 닦아 주던 황녀의 손이 멈칫했다.

손수건을 슬쩍 치우니, 그 아래 숨겨졌던 레오니에의 볼이 아까보다 더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스칸디아 황녀는 어쩐지 제게도 저 열기가 옮겨진 것 같았다.

둘은 근처에 드리워진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레오니에가 타고 온 말의 고삐는 바로 옆 나무 기둥에 묶었다.

“오늘 떠나신다고 해서.”

황녀가 땅에 난 잡초를 뜯어 먹는 말을 보며 말했다. 말의 갈기가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가시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근데 코니한테는 어떻게 편지를 준 거예요?”

“광장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우연히 만났는데 편지까지 들고 있었어요?”

레오니에가 수상쩍음을 담아 눈을 밉지 않게 흘겼다. 황녀는 곤란하단 듯이 눈동자를 몇 번 굴리더니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편지는, 사실 미리 써 뒀습니다.”

황후에게서 보레오티 공작이 곧 북부로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날, 스칸디아 황녀는 곧장 레오니에에게 보낼 편지를 적었다.

처음엔 간단한 인사와 안부만 적으려고 했다. 북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 없길 바란다는 내용도 간단히 적었는데, 쓰다 보니 편지지가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10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녀는 자신이 레오니에에게 이렇게까지 궁금한 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편지를 쓰면 쓸수록 이상하게 레오니에가 보고 싶었고, 글로 담은 안부나 궁금증도 직접 물어서 제 귀로 답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새로 고쳐 쓴 편지엔 만나고 싶다는 간결한 내용만 담아, 일부러 광장에서 레오니에의 하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언제부터요?”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물었다.

“내가 우리 하녀 언니를 언제 밖에 보낼 줄 알고!”

“그렇게 오래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언제?”

“……나흘 정도.”

“그렇게 길게?”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하셨지요?”

스칸디아 황녀가 사과했다.

“하나도 안 불쾌해요.”

오히려 레오니에는 그렇게까지 해서 편지를 주려고 했던 황녀의 노력에 감동했다.

그리고 편지를 주려고 나흘이나 광장에 있었을 황녀의 뒷모습이 괜히 선명히 떠올라 가슴이 찡하니 흔들렸다.

‘솔직히 웬 잡것이 그랬다고 하면 반 죽였겠지만…….’

황녀니까 다 용서가 되었다.

“요 며칠 꽤 더웠는데.”

괜히 안쓰럽고 짜증이 난 레오니에가 머리로 황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미련하게 진짜. 앞으로는 약속을 잡아요.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요.”

“그래도 됩니까?”

“듣다 보니 서운하네.”

레오니에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황녀는 사람이 저렇게 표정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구나, 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나름 오래 안 사이잖아요.”

레오니에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렇게 손 흔들면서 ‘빠빠’도 했잖아요. 이거 친한 사람한테만 하는 인사인데?”

실제로 빠빠 인사는 지금껏 레오니에가 신뢰할 만하고 친해졌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만 해 온 인사였다.

“……아. 선황 빼고.”

“선황, 이요?”

“어렸을 적에 참석했던 연회에서 엿 먹이려고 한 번 했어요.”

심드렁히 대답하는 레오니에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연기였다고 해도 그딴 놈에게 귀한 빠빠 인사를 했단 사실이 뒤늦게 아쉬워졌다.

“근데.”

레오니에가 찝찝한 기분을 털어 버릴 겸 황녀에게 물었다.

“저한테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보러 온 거예요?”

“그냥 잘 가라는 말을…….”

“에게? 고작 그거?”

아까는 편지가 10장도 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팔꿈치로 톡톡 건드렸다.

하나 황녀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뭐가 부끄러운지 눈도 못 마주치고 바닥만 내려다봤다.

‘……이 녀석.’

놀리는 맛이 있군.

레오니에가 속으로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나흘을 광장에서 기다렸다는 황녀의 노력이 가상해 괴롭히지 않고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하나 황녀는 막상 레오니에를 만나니 물어보고 싶었던 걸 다 잊어버렸다.

그냥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도 몰랐던 가슴 속 허전함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벅차오른 감정이 너무 흘러넘친 탓에 그새 또 새로운 허전함을 가져왔다.

“……손을.”

한참 고민하던 황녀가 제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도 될까요?”

“손?”

뜬금없는 부탁에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거렸다.

황녀는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급히 사과하려 했으나, 곧 제 손 위에 턱 올려진 작은 손에 살짝 굳어 버렸다.

“썩 예쁜 손은 아닌데.”

그리 말하는 레오니에의 손은 투박하고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황녀는 아주 귀한 보물을 만지는 것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레오니에의 손을 어루만졌다.

“굳은살이 많죠?”

“제가 더 많습니다.”

“나도 만만치 않은데.”

“그러나 이리 곱지 않습니까.”

레오니에가 허겁지겁 다른 손으로 제 입을 턱 막았다.

‘미친 거 아냐?’

어떻게 그런 당연한 사실을 저렇게 감미롭게 말할 수 있지? 레오니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런 레오니에를 눈치채지 못한 황녀는 여전히 손을 만지작거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잡는다는 말이 무색할 만치 열심히 주물럭거렸다. 특히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 마디의 굳은살을 유난스럽게 건드렸다.

간지럼을 탈 부위가 아닌데도 레오니에는 몸을 비비 꼬고 싶어졌다.

“그림이 취미라서요.”

레오니에가 괜히 핑계를 댔다.

“무슨 그림을 그리시나요?”

“크로키요. 근육의 움직임을 빠르게 잡아내서 그리는 걸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스칸디아 황녀가 레오니에와 나눈 몇 안 되는 대화들을 떠올렸다.

“……근육을 좋아하나요?”

그 몇 안 되는 대화엔 근육이 자주 나왔다.

“근육은 예술이죠!”

레오니에가 신나게 답했다.

“전 제 그림에 나름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잘 그려도 근육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흉내 낼 순 없어요.”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노력의 상징이잖아요.”

“노력…….”

황녀가 레오니에의 손을 놓았다.

레오니에는 자유로워진 오른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몇 번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도 만져져서 그런지 자신의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도 황녀가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저는.”

한참 손을 보는 중에, 황녀가 퍽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노력하면…….”

“노력하면?”

“그러니까…….”

여전히 말이 없는 황녀를 물끄러미 구경하던 레오니에의 눈에 문득 붉은 것이 들어왔다. 짧게 정돈한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였다.

“……헤스페리 가문은 풍채가 좋기로 유명합니다.”

붉은 귀에 팔렸던 레오니에의 정신이 뜬금없는 외가 자랑에 퍼뜩 돌아왔다.

“……잉? 갑자기?”

레오니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정작 황녀의 얼굴엔 진지함이 가득했다.

“현 후작이신 제 조부님은 두말할 것 없고, 어머님도 우월한 신체를 자랑하시죠.”

“뭐, 그건 그렇죠.”

“아버지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벡스 경의 몸도 좋지요.”

근육에 깐깐한 레오니에의 눈에도 헤스페리 가문은 타고난 근육 집안이었다.

“그러니, 아마 저도…….”

황녀는 이제 귀만이 아니라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분명 노력하면, 남들보다 대단한 근육질이 될 겁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황녀의 팔뚝을 비롯해 전체적인 윤곽을 빠르게 훑었다.

단순히 원작의 미래를 알기에 그런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몸은 이미 황녀 또래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앳된 얼굴만 아니면 어른 취급을 받고도 남았다.

‘하지만 아직 애는 애군.’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계속 노력할 테니까.”

“노력할 테니까?”

“제가 언젠가 영애의 눈에도 흡족할 만한 근육을 가지게 된다면…….”

“된다면?”

레오니에는 일부러 황녀의 말끝을 따라 했다.

이 귀여운 사람을 두고 북부로 가려니 눈에 계속 밟힐 것 같았다.

“제 근육도……!”

그래서 얼른 황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제 근육도 좋아해 달라고 용기 내 고백하려던 황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오니에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육만?”

“…….”

“정말 근육만?”

손바닥에 닿은 입술이 꿈틀거렸다. 레오니에가 천천히 손을 떼기 무섭게 황녀가 그 손을 낚아채듯 잡아 끌어당겼다.

레오니에는 기꺼이 황녀의 품 안에 쓰러졌다.

“어머, 격한 남자!”

“일부러 안긴 거 다 압니다.”

“그럼 일어나요?”

“그러지는 마십시오.”

“하하! 귀여워라!”

기꺼이 품에 얼굴을 기댄 레오니에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황녀의 심장이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귀가 아플 정도였다.

“……안부만 물으려고 했습니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와중에, 머리 위에서 황녀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안부만 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얼 물으려고 했는지 잊었습니다. 변태처럼 손이나 만져대고, 이상한 소리나 해대고…….”

“으음.”

레오니에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들어온 건, 귀와 목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오른 스칸디아 황녀였다.

“……아쉽게도.”

레오니에가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야 해요.”

스칸디아 황녀가 벌떡 따라 일어났다. 가야 한다는 레오니에의 말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곧 북부로 떠나야 하는 레오니에를 막을 이유 같은 게 제게는 전혀 없었다.

“붙잡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무쪼록 조심히…….”

“제가요.”

잘 가라고 인사하려던 황녀의 턱을, 레오니에가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편지 쓰는 걸 꽤 좋아해요.”

“편지, 말씀입니까?”

황녀가 되물었다.

“써 줄 수 있어요?”

“답장해 주실 건가요?”

“물론이죠.”

“매일 쓰겠습니다.”

“매일은 지치니까, 쉬엄쉬엄 써요.”

레오니에가 나무 기둥에 묶인 말 고삐를 풀며 말했다.

스칸디아 황녀는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쉬엄쉬엄 매일 쓰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황녀 전하.”

레오니에는 말 위에 오르기 전에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정말 기뻤어요. 일부러 보러 와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귀한 시간을 뺏은 것 같아 오히려 죄송할…….”

“어허, 또!”

그런 말 말라며 레오니에는 황녀의 입술을 가볍게 찰싹, 두들겼다.

“내 시간이 귀한 건 사실이지만, 전하는 그 귀한 걸 빼앗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제게 너무 겸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제가 취향이 좀 이상해서 말이죠.”

“근육이요?”

“근육도 근육인데.”

레오니에가 황녀의 목에 팔을 둘렀다. 느닷없는 접촉과 단숨에 좁혀진 거리에 황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곧 황녀의 두 팔이 레오니에의 등과 허리를 감쌌다.

레오니에는 그런 황녀를 저의 검은 두 눈에 담았다.

“……이렇게 할 땐 하는 사람이 좋답니다.”

그러나 황녀는 이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열이 넘치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었다.

미동도 없는 황녀를 답답하게 보던 레오니에가 그의 옷자락을 쥐고 제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황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코가 부딪힐 뻔한 걸 가까스로 막았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스칸디아.”

레오니에가 명령했다.

“어서 입 맞춰.”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황녀의 커다란 손이 레오니에의 뒤통수를 와락 감쌀 수 있었다.

“……역시 좋아하는 걸까.”

크리세토스 황자가 찻잔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어머, 무어를?”

“보레오티 공작 영애요.”

“너 공작 영애를 좋아해?”

티그리아 황후가 깜짝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쿠키를 떨어트렸다.

간만에 큰아들과 단둘이 여유로운 다과를 즐기던 황후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얘가, 얘가! 너 보레오티 공작한테 죽고 싶어서 그래?”

“저 말고요! 그리고 저도 취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 변태예요!’라고 소리치는 여자는 별로라며 크리세토스 황자가 반박했다.

“저 말고, 스칸 말입니다.”

“스칸? 네 동생?”

“예, 어머님 둘째 아들이요.”

“어머나…….”

황후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얼마 전에 보레오티 공작이 자기 딸은 씨만 받으면 된다고 하던데…….”

그렇게 말하던 펠리오의 얼굴은 죽음을 가지러 오는 사신보다 흉악했다. 만약 사신이 그 얼굴을 보았다면 낫을 떨어트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 어미는 전혀 몰랐구나?”

너희끼리만 알았냐며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황자는 결코 아니라며 빠르게 부정했다.

“스칸 그 녀석이 워낙 자기 속내를 말하지 않잖아요.”

황자는 저 역시도 얼마 전에야 눈치를 챘다고 대답했다. 그로서도 동생이 연모하는 사람이 레오니에라는 사실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대충 의심할 만한 정황은 조금 있었다.

“그 녀석이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장신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황녀의 손목에 언제부턴가 손목시계가 항상 있었다.

“어머님, 그 손목시계는 보레오티 영애가 준 겁니다.”

“정말이니? 웬일이니, 그게.”

“그렇지요? 웬일이죠?”

두 모자는 호들갑을 떨며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떠들었다. 황후는 진심으로 충격이었는지 연거푸 차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공작네가 황궁 내 게이트를 쓰기로 했지.”

황후가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보레오티 마차가 황궁으로 들어와 게이트로 향하고 있을 것이었다.

“스칸이 배웅할지도 모르겠네요.”

“걔가 공작 영애를 그렇게 좋아해?”

“공작 영애도 스칸을 꽤 아끼는 것 같던데 말이지요.”

“당연히 아껴야지.”

황후는 둘째 아들의 외모만큼은 저를 닮아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자신했다.

“그나저나 조금 곤란하게 되었구나.”

“아, 혹시 황실과 보레오티 간의 혼인 금지 때문에요?”

“스칸은 거기에 해당하진 않아.”

황가의 피가 섞이지 않은 스칸디아 황녀는 보레오티 가문과의 혼인이 가능했다.

다만 황후가 곤란한 것은, 둘째 아들이 차기 헤스페리 후작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간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황후는 잘 키운 아들을 북부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남 좋은 일만 시키는구나.”

“그럼 어머님은 스칸의 연애를 허락하시나요?”

“허락이고 자시고.”

황후는 굳이 자신이 끼어들어 자식 사랑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 간섭으로 저 자신이 오랫동안 힘들었기에 더욱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황후는 보레오티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 어미는 말이지, 솔직히 보레오티 공작보다 보레오티 영애가 더 무섭단다.”

황후는 지금도 레오니에가 했던 충격적인 발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동생이랑 어렸을 때 딱 한 번 마주쳤는데, 그때 골격을 보고 남자인 줄 알았대.”

“언제요?”

“그때 스칸 나이가 아홉이었어.”

“……전 그런 괴물과 국정을 의논해야 하는군요.”

황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후는 그런 아들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황자, 그 솔직한 마음은 절대 다른 귀족들 앞에서 보이면 안 됩니다.”

황후는 인간미 넘치는 큰아들이 아주 걱정이었다. 저렇게 레오니에를 무서워하다가 나중엔 질질 끌려다닐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뭐라고 할까요?”

겨우 정신 차린 크리세토스 황자는 이벡스의 생각도 궁금해졌다.

“글쎄다…….”

황후는 저도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러나 이벡스와 황녀 부자의 성격이 워낙 판박인지라, 분명 둘째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해 줄 거란 확신은 있었다.

그 역시도 황후와 똑같은 피해자였으니까.

“그래도 보레오티 영애면 나쁘지는 않지.”

조건만 따지면 오히려 보레오티 쪽이 훨씬 대단했다. 나라에 둘밖에 없는 공작 가문이면서 역사상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실세였다.

‘이번 기회에 북부와 연을 맺는 것도 나쁘진 않아.’

객관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서부에겐 아주 큰 기회였다. 북부와의 관계는 긴밀하고 두터울수록 오히려 좋았다.

‘어쩌면 차기 헤스페리 후작은 보레오티의 피가 섞인…….’

이래 봬도 한때 헤스페리 후작이 될 뻔했던 티그리아 황후는 열심히 서부에 이득이 될 법한 상황들을 궁리했다.

그러나 황후는 이내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자괴감에 빠졌다. 지금 자신들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여기서 떠드는 탁상공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요?”

황자의 물음에 황후가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스칸이 공작에게서 살아남는 것.”

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자는커녕 씨만 받으면 된다는 난잡한 주장까지 해대는 보레오티 공작이야말로 최악의 걸림돌이었다.

“아…….”

황자의 탄식 어린 한숨이 묵직했다.

두 모자는 딸등신 보레오티 공작의 흉악스러움을 떠올리며 몸을 잘게 떨었다.

* * *

보레오티를 상징하는 검은 맹수가 새겨진 마차가 황궁으로 출발했다.

“다녀올게!”

레오니에가 창문으로 몸을 내민 채 열심히 팔을 흔들었다.

배웅하러 나온 트라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마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레오니에 역시 시야에서 저택과 사용인들이 보이지 않은 뒤에야 인사를 멈췄다.

“아아, 이제 북부로 가네…….”

도로 자리에 앉은 아기 맹수의 얼굴에는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언제는 북부로 가고 싶다고 그렇게 징징거리더니.”

펠리오가 아이의 앞머리를 손으로 넘겨주며 피식 비웃었다.

“징징거리진 않았어.”

“징징거렸죠?”

“네, 징징거렸죠.”

펠리오의 물음에 바리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부모님의 놀림에 아이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삐죽거렸다. 하나 입술은 금방 쏙 들어갔다.

“……있지, 레오.”

바리아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황녀 전하랑 만났어?”

‘황녀’란 말에 펠리오의 눈에 섬뜩한 이채가 스쳤다. 두 귀도 눈에 띄게 쫑긋거렸다.

“엄마 덕에 무사히 만났어.”

“다행이네. 전하께서 인사도 하러 와 주시고, 참 상냥…….”

“레오니에.”

심기가 불편해진 펠리오가 오랜만에 딸아이의 이름을 똑바로 불렀다.

“그 빌어먹을 놈팽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펠리오.”

바리아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며 손으로 배를 가렸다.

“근육이가 다 들어요.”

“맞아! 울 동생 다 들어!”

레오니에도 엄마 배에 슬쩍 손을 올리며 아빠에게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효녀는 아빠가 엄마한테 혼날 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 여장 남자가.”

레오니에를 아니꼽게 흘겨본 펠리오가 기어코 단어를 정정했다.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별짓 안 했는데?”

“해도 레오가 할 것 같은데…….”

“엄마는 역시 날 잘 알아!”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그래도 펠리오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지라, 아이는 순순히 황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려 줬다.

“그냥 무사히 가란 인사하고, 편지 써도 되냐고 물어보길래 그러라고 했어.”

“편지…….”

펠리오는 북부로 돌아가면 카라에게 레오니에 앞으로 오는 편지는 무조건 제게 먼저 올리라고 지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올겨울 벽난로는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를 예정이었다.

“여보…….”

그리고 바리아는 그런 남편을 아주 조금 안타까이 바라봤다. 사람이 멀쩡하다가도 꼭 딸아이 이성 문제만 마주하면 저렇게 나사가 빠져 버렸다.

그럼에도 바리아는 그런 펠리오가 싫지 않았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가 저와 가족들 앞에서는 저렇게 평범한 남편이고 아빠란 사실이 기쁘기까지 했다.

마차는 어느새 황궁에 도착했다. 황후의 명을 받은 궁인들이 마차를 통과시키고, 게이트로 향하는 길목까지 친절히 안내했다.

“…….”

레오니에는 창문 너머를 빤히 바라봤다.

“누구 찾아?”

펠리오가 그런 레오니에를 수상쩍단 듯이 노려봤다.

“아니. 그냥 구경.”

“허리 삐뚤어지니 똑바로 앉아.”

“그놈의 잔소리…….”

“레오 네가 나한테 다리 꼬지 말라는 거랑 똑같은 격이야.”

“핑계도 가지가지…….”

레오니에가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 바르게 앉았다. 바리아는 부녀의 말다툼이 마냥 웃겨 한참을 키득거렸다.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는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래도 배웅하러 오실 줄 알았는데.”

함께 창밖을 보던 바리아가 도리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니에가 저보다 더 서운한 표정을 짓는 바리아를 위로했다.

“괜찮아, 아까 인사 다 했는걸? 너무 집착해도 멋없어.”

“여장 남자는 원래 멋없어.”

“난 그게 취향이라서 좋은데?”

“역시 동심보다 양심이 먼저였는데…….”

왜 쓸데없이 동심을 키운다고.

펠리오는 지고지순한 레오니에의 취향에 또 한 번 패배를 맛보았다. 장난감 따위로 있지도 않았던 동심을 키울 바에야 그나마 발톱의 때를 물에 희석한 것만큼이나 존재했던 양심을 키웠어야 했다.

“오오, 북부 게이트!”

정작 아이의 관심은 이미 마차 앞에 있는 북부 게이트로 향했다.

레오니에는 제국이 건국된 이후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게이트를 자신들 가족이 처음 넘는다는 사실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또 북부 산맥에 도착하는 건 아니겠죠?”

바리아는 게이트를 넘는 게 조금 두려웠다.

“우리가 가겠다고 바라지 않으면 문제없습니다. 마음 편히 있어도 돼요.”

“펠리오……!”

“내가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라고.”

“아놔, 진짜…….”

눈꼴 시려서 원.

또 눈 마주치기 무섭게 침대 운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부모님에게 짜증이 난 레오니에가 창틀에 턱을 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흥.’

하나 창에 비친 아기 맹수의 입가엔 고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참.”

마차가 게이트를 넘기 직전.

“아빠, 엄마.”

레오니에가 해맑은 목소리로 부모님을 불렀다. 그들은 아이가 잠깐 창밖으로 눈을 돌린 사이에 벌써 뽀뽀를 서너 번 나눈 뒤였다.

평소였다면 레오니에가 뭐하는 짓이냐고, 제발 제 정서 발달을 위해 이왕 할 거면 혀도 좀 교환하라고 투덜거렸을 거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하는 거 깜빡했는데.”

레오니에는 조금 전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기꺼이 전해 줬다.

“나 황녀 전하랑 입 맞췄어!”

순간 마차 안 공기가 서늘해졌다. 게이트를 통과해 북부로 넘어온 터라 기온이 단번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북부는 가을로 접어들다 못해 겨울에 가까워진 날씨였다.

하지만 바리아는 확신했다.

지금 이 마차 안 분위기는 결코 변해 버린 바깥 배경 때문이 아니라는 걸.

“우리 뿜뿜 기사님이 마음에 들었지 뭐야!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나 봐. 그래서 그냥 입술 도장 꾸욱, 찍고 왔지!”

거침없는 딸아이의 자랑.

“…….”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아빠.

“아우…….”

그걸 지켜보는 엄마.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보레오티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남주의 입양딸이 되었습니다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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