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신의 ‘세 번째’
크리세토스 황자는 오늘 하루 황궁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진이 쭉 빠졌다.
‘피곤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쓰러져 한숨 푹 자고 싶었다. 저를 죽이러 온 메리디오 기사들이 어찌나 살벌한지, 오금이 다 저려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도 결국 살았다.
‘이걸로 끝이구나…….’
애먼 미신에 정신 팔렸던 황실의 연은 자신의 앞에서 끊어졌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벨리우스 제국이 시작될 일만 남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자신이었다.
‘막상 하려니 겁도 나네.’
크리세토스 황자는 자신이 훌륭한 황제가 될 거란 확신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황제가 되고 싶었다. 의무에서 도망치는 황제만큼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스칸.”
각오를 다진 황자가 동생의 곁으로 갔다. 게이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은 스칸디아 황녀가 제 옆에 털썩 앉는 형을 바라봤다.
“너무 늦게 물어보는 것 같은데, 가서 잘 지냈냐?”
“형님께서는요?”
“너 없으니 조금 외롭더라.”
“저도 그랬습니다.”
두 형제가 서로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게이트를 바라봤다.
“아직도 안 오네.”
크리세토스 황자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북부에 간 거 아닐까?”
게이트 너머 하늘은 어느새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푸르렀던 하늘엔 이제 노을이 떴고, 그 위로 제법 어두운 감색 하늘이 펼쳐지려 했다.
“……돌아올 겁니다.”
스칸이 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곳으로 돌아올 겁니다.”
“누가? 공작 영애?”
“지금은 공작입니다.”
“기어코 공작이 되었냐…….”
황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전에 저택에서 레오니에가 보여 준 광공 놀이가 떠올랐다. 미친 공작의 재림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 몰랐던 황자는 소름이 돋았다.
하나 그 걱정도 잠시였다.
“그러다 네가 쓰러지겠어.”
“전 괜찮습니다.”
이 보라며 황녀가 제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리켰다. 글라디고 기사단들이 황실 기사단 망토를 약탈해 돗자리처럼 깔아 주고, 황실 기사단 창고를 털어 목을 축일 만한 것과 간단한 음식들을 준비해 뒀다.
“……너 찍혔구나.”
“밉보인 것 같진 않은데요.”
스칸디아 황녀가 반박했다.
“아니, 그쪽 말고…….”
황자가 쓰게 웃었다. 지금 근처에 제 주인 가족을 기다리는 글라디고 기사단이 슬쩍슬쩍 이곳을 보았다. 그들은 제 어린 주인을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황녀를 놓칠세라 조심하는 중이었다.
‘너 벌써 공작 부군으로 찍혔어.’
답답한 마음을 담아 황자가 동생을 걱정했다.
“지금 몇 시간 째 이러고 있잖아.”
동생이 찍힌 건 일단 둘째 치고, 크리세토스 황자는 게이트 앞에서 요지부동인 남동생이 걱정이었다.
“너도 오늘 힘들었을 텐데.”
황자가 조금 쉬라고 설득했다. 레오니에가 게이트를 넘은 뒤로 하염없이 자리를 지키는 황녀의 얼굴엔 피로감이 짙게 묻어 있었다.
“네가 이러는 게 공작 영애, 아니, 공작한테 더 민폐야. 여기서 돌석상처럼 기다린다고 좋아하겠냐.”
“좋아할 것 같습니다.”
“뭐, 그럴 분이지.”
황자도 긍정했다.
지금껏 경험한 레오니에의 성정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 미친 변태 공작은 예상을 뛰어넘는 위인이었다.
하나 황자에겐 북부 광공보다 하나뿐인 동생이 더 중요했다. 결국엔 크리세토스 황자도 함께 기다리기로 했다.
“형님께서야말로 쉬시는 편이…….”
“널 두고 어딜 가냐.”
그도 나름 보레오티 가족이 걱정이긴 했다. 신세 좀 몇 번 지었더니 정이 좀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거기다…….’
황자가 힐끔 황녀를 보았다. 어째 선명히 떠오르는 동생의 미래가 퍽 걱정이었다.
“……넌 이쁨받을 거야.”
에휴, 황자가 복잡한 심경을 담아 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레오니에가 취향이 문제지, 성격 자체는 그렇게 문제 있진 않았다.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그렇게 잘하는 것처럼, 레오니에도 분명 제 반려에겐 잘해 줄 게 틀림없었다.
“……!”
그때, 스칸디아 황녀가 벌떡 일어났다.
잠잠했던 기둥 사이 게이트가 출렁거리더니, 아주 차갑고 혹독한 눈바람이 쏟아졌다.
느닷없이 몰려든 강추위에 방심하던 사람들이 주춤거렸으나, 글라디고 기사단에겐 익숙한 추위였다.
“게이트가 열렸다!”
“주군! 마님!”
“망토를 벗어라! 어서!”
“의원, 의원은 빨리 이쪽으로!”
글라디고 기사단이 게이트를 넘어온 주군 가족을 부축했다. 기사단에게 붙잡혀 몇 시간 째 대기 중이던 불쌍한 황궁 의원이 서둘러 다가갔다. 스칸디아 황녀도 그곳으로 향했다.
게이트를 넘어 도착한 보레오티 가족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투성이이었고, 옷도 눈과 흙, 거기에 피까지 묻어 엉망이었다.
글라디고 기사단이 서둘러 망토를 벗어 주군 가족들의 몸을 덮어 줬다.
“바리아, 괜찮습니까?”
“조, 조금 추운 것…….”
“추운 거 맞아! 옷이 눈에 젖었잖아!”
북부 산맥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바리아가 추위에 떨었다.
그곳에선 기묘한 힘 덕에 추위를 느끼지 못했지만, 눈으로 흠뻑 젖은 옷과 레무스 때문에 생긴 정신적 피로가 뒤늦게 바리아를 괴롭혔다.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제 몫의 망토까지 벗어 바리아에게 덮어 줬다. 그거로도 모자라, 펠리오는 아예 옷을 벗어 제 체온을 나눠 주기 위해 바리아를 꼭 껴안았다.
“근처에 돌 좀 모아 줘요!”
레오니에가 기사들이 모아온 작은 돌들을 맹수의 송곳니로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곤 망토들로 둘둘 말아 간이 손난로를 만들었다.
“엄마, 이것 좀 품고 있어 봐!”
따뜻한 온기가 닿기 무섭게 바리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송곳니가 나오잖아?’
레오니에는 뒤늦게 자신의 변화를 깨우쳤다. 펠리오도 바리아의 체온을 덥히는 데 자신의 미약해진 송곳니를 쓰고 있었다.
“보레오티 공작!”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누가 아빠 부르는데?”
“지금은 네가 공작이다만.”
펠리오가 턱짓으로 레오니에의 옷에 달린 흉장을 가리켰다. 눈이 녹아 물기가 어린 흉장이 반짝거렸다.
“……아, 맞다.”
잠시 까먹었던 레오니에가 구시렁거리며 일어났다.
‘귀찮은데 반납할까?’
막상 공작이 되어서 이것저것 해 보니 여러모로 귀찮은 점이 많았다. 거기다 펠리오가 저에게 공작 작위를 넘기고 편히 놀려는 심보도 살짝 얄미웠다.
“우와!”
방심하던 찰나, 예고도 없이 저를 껴안는 두 손에 레오니에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황녀 전하!”
저를 꼭 끌어안은 은발의 기사를 본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깜짝 놀랐네.”
진심으로 놀란 레오니에의 두 손은 어정쩡하게 허공에 들린 채였다.
“뭔 일 있어요? 그나저나 여긴 왜 있어요?”
“마중하라고 했잖습니까.”
중얼거리는 황녀의 말투엔 그걸 잊어버렸느냐는 작은 책망이 담겼다.
“정말 기다렸어요?”
레오니에는 괜히 미안해졌다. 황녀는 대답 대신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바보같이 왜 그랬대.”
이젠 노을마저 반이나 가라앉아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레오니에는 시간이 이렇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는 황녀가 걱정스러운 한편, 고작 그 한 마디 때문에 여기 있었다는 그가 귀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바로 북부로 넘어가서 쉬면 어쩌려고 했어요.”
이런 착한 바보 같으니, 레오니에가 어정쩡히 들고 있던 두 팔을 황녀의 등에 얹으며 토닥거렸다.
“어이구, 요 순진한 기사님!”
레오니에의 손이 닿기 무섭게 황녀의 등 근육이 바싹 긴장했지만, 곧 천천히 힘을 풀며 편하게 안기었다.
“전 별로 안 순진합니다.”
“그런다고 계속 기다리면 어떡해요!”
“다녀온다고 했으니, 이렇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황후 폐하가 세상은 험난하다고 안 가르치셨어요?”
황녀에게서 살짝 떨어진 레오니에가 인상을 작게 찡그렸다. 황후가 일에 미쳐서 이 예쁘고 귀여운 아들의 안전 교육은 제대로 못 한 모양이었다.
하는 말마다 아주 귀엽고 예뻐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저러나 싶었다.
‘별수 있나.’
내가 지켜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치고는, 레오니에의 얼굴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작 레오니에가 왜 웃는지 모르는 황녀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
“……!”
이를 지켜보는 펠리오의 눈에 살기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꿈틀거릴 때마다 기사들이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머 추워!”
너무 추워, 갑자기 추워!
기사들의 간절한 눈빛을 읽은 바리아가 어색한 말투로 추위를 호소했다. 다시금 정신을 차린 펠리오가 바리아를 껴안았다.
하나 눈만큼은 레오니에 옆에 찰싹 달라붙은 황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리아는 혹여나 펠리오가 저리로 뛰쳐나갈지도 몰라, 그를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좀 내버려 둬요.”
바리아가 그런 남편에게 훈수를 뒀다.
“보기 좋잖아요, 순수하고.”
“도대체 뭐가 순수하단 겁니까.”
“아니, 그럼 안 순수해요?”
“한 놈의 속이 너무 시커멓지 않습니까.”
펠리오의 으르렁거림에 바리아가 서로를 보며 다정히 웃는 레오니에와 황녀를 신중히 살폈다.
“……우리 레오요?”
안타깝게도 바리아의 눈엔, 레오니에가 황녀를 다독이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몸을 더듬으며 근육의 성장을 확인하는 모습이 더 선명히 보였다.
“레오도 레오지만.”
펠리오도 그 점을 부정하진 않았다.
“해충은 눈에 보이면 즉각 박멸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해서 올로르 같은 것들이 날뛴 것 아니냐고 펠리오가 반박했다.
“해충이라니요!”
바리아가 타일렀다.
“아무리 그래도, 황녀 전하……!”
아.
바리아가 뒤늦게 제 실언을 깨달았다. 서둘러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주변 사람들은 저 은발의 기사가 누구인지 전부 알아 버렸다.
애초에 바리아가 실언하기 전에 레오니에가 우렁찬 목소리로 황녀의 정체를 공개해 버린 탓이었다.
“화, 황녀 전하?”
“저 기사가 황녀라고?”
“아니, 그전에, 황녀 전하는 여자잖아!”
“그런데 저 기사는 어딜 봐도…….”
“헉, 여자랑 여자!”
“그게 아니잖아!”
아가씨한테 옮았냐! 파보가 프로보의 엉덩이를 발로 펑 찼다.
“아이고, 머리야…….”
멀찍이서 이 모든 걸 지켜본 크리세토스 황자가 구부정한 등을 한 채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미친 듯이 하고 있었다.
“씨만 받으면 돼.”
펠리오가 사납게 읊조렸다. 이에 기겁한 바리아가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정신 바짝 차리자.’
자신이 여기서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레오니에는 정말 씨만 받고 상대를 버리는 파렴치가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아기야?’
바리아가 배 속 아기에게 물었다.
‘……정신 바짝!’
괜히 오싹해진 바리아는 또 한 번 자신의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아기가 태어나서 말을 하게 되면, ‘씨! 씨!’라고 소리치며 돌아다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보레오티 가족은 시간이 늦어진 관계로 황궁에서 마련해 준 곳에 머물렀다.
티그리아 황후는 바쁜 와중에 제 전담 의원을 바리아에게 보내었다.
“임신 중이셨나요?”
진찰하던 의원이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옆에서 저를 돕던 제자에게 이것저것을 챙겨오라고 말했다. 나갔던 제자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을 끌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엄마 많이 아파? 아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펠리오와 레오니에도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따라 들어왔다.
험악한 공작 부녀의 표정을 보고 겁에 질린 제자는 그만 실수로 도구를 떨어트릴 뻔했다.
“죄송하지만, 잠깐 나가 계십시오.”
의원이 단호하게 둘을 쫓아냈다. 그러나 돌아와서 바리아 옆에 도로 앉은 의원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저 둘은 너무 무서웠다.
애써 정신을 다잡은 의원이 바리아와 아기의 상태를 살폈다. 바리아에게 양해를 구하며 몸 상태도 조금 더 신중히 살폈다. 바리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간절히 아기의 무사를 기도했다.
“역시 보레오티네요.”
의원이 싱긋 웃었다.
“아기 님은 건강합니다.”
그 말에 바리아가 몸에 힘을 쭉 뺐다. 산맥 정상에서 있었던 일로 아닌 척해도 계속 품고 있었던 걱정과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래도 의원은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요 며칠은 무조건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 님도 무럭무럭 자랄 겁니다.”
“정말 고마워요.”
바리아가 다시 옷이 내려진 제 배를 쓰다듬으며 감사를 표했다. 푹 쉬라는 말을 남긴 의원은 제자와 함께 방을 나섰다.
“꺄야아!”
그러나 곧 문밖에서 의원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깜짝 놀란 바리아는 이내 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엄마 괜찮아? 괜찮아?”
“비켜 봐, 너 때문에 더 정신 사나워.”
“아빠야말로 아까 의원 울렸잖아!”
아니나 다를까, 의원을 붙잡고 이것저것 한참 물어본 남편과 딸아이가 서둘러 바리아 곁에 다가갔다. 둘은 서로가 방해된다며 으르렁거렸다.
“……아까 의원한테 들었죠?”
바리아가 둘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다 괜찮대요.”
“아기도?”
레오니에는 바리아가 누운 침대에 상체를 엎드린 채 물었다.
“물론 아기도 건강…….”
건강하다고 말하려던 바리아가 입을 쩍 벌렸다.
“이 앙큼한 딸이.”
펠리오가 바리아의 벌어진 입을 손수 닫아 주며 말했다.
“다 알고 있었답니다.”
“에헷!”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깜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어, 왜애?”
바리아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깜짝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아빠가 엄마 허리랑 배를 거의 껴안고 다녔어.”
변명할 여지가 없는 펠리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리아는 괜히 부끄러워 손에 쥔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나중에 태어날 동생이 부모님의 주접을 보고 배울까 걱정이야.”
레오니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잘 키우는 수밖에 없네.”
“동생 미래 망치지 마라.”
“어허!”
스읍, 레오니에가 어린아이를 혼내듯 숨을 짧게 들이쉬며 펠리오를 위협했다.
“감히 무례하게! 북부 공작의 말에 토를 다는 건방짐이라니!”
기가 막힌 펠리오는 아이의 옷에 여전히 달려 있는 흉장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곤 툭 떼어 냈다.
“내 작위!”
레오니에가 어여 내놓으라고 손을 쭉 뻗었다. 그러나 펠리오가 한발 먼저 일어나 레오니에를 가볍게 피했다.
“아빠가 하극상했어!”
“하극상은 무슨.”
펠리오가 가소롭단 듯이 턱을 살짝 들고 비웃었다.
“애초에 넌 공작도 아니었어.”
“공작 맞았거든!”
그러니 기사들을 끌고 반란을 진압했고, 귀족 회의에 참석했다며 레오니에가 가슴을 활짝 펼치며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바보 같은 딸.”
레오니에를 다정히 부르는 펠리오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작위 증명서엔 아직도 이 아빠의 이름이 적혀 있단다.”
검은 사자가 그려진 흉장은 장식에 불과했다. 공작의 이름으로 공적인 일을 해낼 때 자주 착용하긴 하나, 까먹고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합법적인 효과가 있는 작위 증명서는 북부 저택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
말없이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레오니에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겼다.
“……알고 있었거든?”
펠리오와 바리아가 서로를 마주 봤다. 아무래도 레오니에는 그 중요한 사실을 잊은 듯했다.
“그래도 엄마는 레오가 너무 멋졌어.”
정말 멋진 공작이었다고 바리아가 칭찬했다. 도로 고개를 돌린 레오니에가 헤벌쭉 웃었다.
“하여튼 허세 하나는 벌써 공작이군.”
펠리오도 나름 잘 어울렸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솔직하지 못하긴.”
레오니에가 콧노래를 부르며 아빠가 쓰다듬어 주는 손에 머리를 마구 비볐다. 그런 딸을 보는 펠리오의 입꼬리가 둥글게 올라갔다.
“뭐, 상관없어! 작위야 언제든 빼앗을 수 있으니까.”
“진짜 암살당하겠군.”
“어쨌든 중요한 건!”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보며 씩 웃었다. 바리아는 문득 떠오르는 섬뜩함에 이불자락을 꼭 쥐었다.
“이제 엄마가 혼날 시간이란 거야.”
“그러고 보니…….”
펠리오의 입가에도 사악한 미소가 걸쳐졌다.
“시, 신이시여…….”
바리아가 간절히 신을 불렀다. 그러나 정작 그녀에게 찾아온 건 신의 구원 따위가 아닌, 남편과 딸아이의 어마어마한 잔소리였다.
“……거기서 무얼 하는 거지?”
황후를 보필하는 시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보레오티 공작 부인의 상태를 살피고 안부를 물으란 명을 받고 온 시녀는 방앞에 하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그게!”
“그것이…….”
시녀의 엄한 목소리에 하녀들이 서둘러 문에서 떨어졌다. 그들의 손에는 깨끗한 수건과 예쁘게 담긴 과일들이 올려진 쟁반이 들려 있었다. 이를 본 시녀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너희들은 여기가 어디인지 잊은 모양이구나. 본분을 잊은 채 손님들의 말을 염탐하다니.”
“아, 아니어요!”
“그런 것이 아니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하녀들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려던 찰나였다. 문틈 사이로 귀 따가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레오티의 기상을 드높이고, 아주 대단한 부인이 나셨군요.”
“무기 하나도 없이 무슨 배짱으로 그놈을 따라가!”
“공작 부인이라면 응당 패악질 부리면서 사용인들 시켜 먹는 재주도 있어야지.”
“사람이 왜 그렇게 착해 빠져서! 어엉? 아주 다음 생엔 천사가 되겠구먼!”
“앞으로는 보호자 없이 절대 혼자 외출하지 마십시오.”
“그냥 방문 앞에 못질할까 보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예쁜 족쇄를 하나 사서 선물하겠습니다.”
“족쇄로 되겠어? 수갑도 같이 채워.”
숨 쉴 틈 없이 쫑알쫑알 쏟아지는 맹수 부녀의 잔소리에 시녀가 흠칫했다.
“저, 시녀님.”
하녀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희는 정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하나 공작 부인을 걱정하시는 두 분이…….”
“그, 너무 걱정을 하셔서…….”
요는,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잔소리가 무서워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녀가 소리 없는 한숨을 흘렸다.
“기다리렴.”
하녀들을 향한 동정이 생긴 시녀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그제야 듣는 사람마저 지치는 잔소리 폭격이 멈췄다. ‘누가 왔나 봐요!’라며 환호하는 공작 부인의 기운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하녀들이 가지고 온 것들을 제자리에 옮겨 두고 방을 깨끗이 정돈했다.
“황후 폐하께서 공작 부인의 안부를 걱정하십니다. 일이 많으셔서 이곳에 오지 못하신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신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시녀가 공손한 태도로 황후의 뜻을 전하였다.
“저야말로 이렇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바리아가 감사의 뜻을 표했다.
“……더 줘야지.”
반란도 알려 주고, 제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어 줬는데 고작 이것 가지고 되겠느냐며 레오니에가 구시렁거렸다. 펠리오도 딸아이의 의견에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 그런데, 무슨 일로?”
바리아가 일부러 큰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시녀가 마음이 상하면 어쩌나 싶었다.
다행히 시녀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국의 황후에게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레오니에의 배짱에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금일 귀족 회의 일로 보레오티 공작에게 여쭐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아, 그래요?”
레오니에가 일어서려던 찰나.
“네가 왜 일어나.”
펠리오가 일어서려는 아이의 머리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이가 없어진 레오니에가 제 머리를 누르는 아빠의 손을 휙 쳐냈다.
“뭐하는 짓입니까, 아버지?”
“공작에게 여쭐 것이 있다지 않으냐.”
“그러니 내가……!”
으르렁거리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곧 아이의 얼굴에 짜증이 화사하게 번져 갔다.
“귀족 회의 안건 처리 문제인가.”
“그렇습니다.”
“나 겁나 잘한 것 같은데?”
레오니에가 퍽 억울한 목소리로 따졌다.
안건에 의견도 잘 냈고, 올로르 자작에게 인생의 비릿한 피 맛도 보여 주고, 회의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분노를 참고 있었다.
하나 시녀는 유감이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께서 대리로 참석하셨으나, 파르두스 후작 영식처럼 정식 위임장을 제출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내가 공작이었으니까!”
“하나 보레오티 공작 작위 증명서엔…….”
“내 이름이 쓰여 있지.”
펠리오가 오만방자한 미소로 마무리를 지었다. 단단히 삐친 레오니에는 바리아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
엄마의 허리를 꼭 붙든 아이는 ‘아빠 짜증 나.’라며 배 속 동생에게 고자질했다. 바리아가 괜찮다면서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와요.”
“어디 나가지 말고.”
“차라리 숨도 쉬지 말라 해요.”
펠리오는 바리아와 가볍게 입을 쪽 맞췄고, 단단히 삐친 딸아이의 욕 섞인 배웅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시녀를 따라 방을 나섰다.
그러고도 레오니에는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근데 엄마.”
넓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레오니에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엄마 잘못이 아냐.”
레오니에가 조심히 말했다. 딸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잠시 생각하던 바리아가 쓰게 웃었다.
“아니야, 그건 엄마가 조심…….”
“조심할 일이 아니었어.”
상체를 슬그머니 일으킨 레오니에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랑 아빠가 그렇게 잔소리한 건,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엄청 무섭고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거야.”
둘은 결코 그 일이 바리아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외출하고 싶어서 외출했던 거고, 안전을 위해 기사들도 데려갔어.”
꽃을 파는 아이가 다칠 뻔했단 말에 걱정이 되어 살핀 것도 절대 잘못이 아니었다.
“나쁜 건 레무스야.”
“…….”
“엄마도, 인질로 잡혔던 아이들도.”
지금껏 올로르에게 당한 무수한 피해자들도, 신념을 굽히지 않아 살해당했던 바리아의 첫 번째 삶도, 레무스 같은 쓰레기를 한때나마 사랑했을 레지나도.
레오니에는 그들의 상처가 결코 자신들의 무지와 무력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후회는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모든 것의 책임은 상처를 입힌 사람의 것이었다.
“엄마는 잘했어!”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바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묵묵히 듣고 있던 바리아의 눈가가 점점 촉촉이 젖어 갔다. 레오니에가 울지 말라며 갈아입은 새 옷 소매로 눈물을 닦아 줬다.
“우리 딸은…….”
바리아가 훌쩍이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내게 행복한 기분을 선물해 주네.”
“그거야 난 엄마 편이니까!”
가족이니까 당연하지!
아기 맹수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닌 제 말에 눈물까지 흘리는 엄마 때문에 조금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행복해졌다고 해 줘서 무척 기뻤다.
두 모녀는 서로를 꼬옥 끌어안았다.
“으휴, 그만 울어. 내 동생 울보 될라.”
레오니에가 와락 껴안은 두 팔로 바리아의 등을 토닥여 줬다.
“……레지나는 편히 눈 감았을까?”
레오니에는 저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암사자가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에 계속 떠올리고 있던 순간이었지만, 레오니에는 일부러 상황이 진정되고 조용해진 지금에야 그 존재를 입에 담았다.
“궁금해?”
바리아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말투가 왜 그래?”
레오니에가 인상을 와락 썼다. 평소 레지나를 친근히 생각하던 바리아라곤 생각할 수 없는 말투였다.
“꼭 무슨 애처럼…….”
고개를 들어 바리아를 본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궁금하면 가르쳐 줄까?”
한 번 더 물어보는 바리아의 눈에 검은 안개가 일렁거렸다.
“너……!”
레오니에가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마저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레오니에의 검은 눈에 황금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누구야.”
날 선 경계심을 보이는 아기 맹수를 향해, 바리아가 깔깔 웃었다.
“우리 아까 저기서 만났잖아.”
바리아가 창밖 너머를 가리켰다. 레오니에는 그곳에 북부와 연결된 게이트가 있단 것을 알아챘고, 레오니에는 그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닥치고 나가.”
오히려 더욱 화를 내며 어서 바리아의 몸에서 나가라고 경고했다.
“너희 때문에 오늘 우리 가족이 얼마나 위험했는 줄 알아!”
“건방지고 불경해라.”
바리아의 몸에 깃든 신이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레오니에의 눈에 비친 황금빛 안개가 사라졌다.
“그 힘이 누구한테서 왔는지, 잘 알면서 말이야.”
신은 레오니에의 송곳니를 잠재웠다.
“너랑 싸우려고 온 거 아니야.”
저 혼자 태평한 신이 씩 웃으며 레오니에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 말은 당연히 먹히지 않았고, 레오니에는 북부 산맥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으르렁거렸다.
“아까는 왜 방해한 거야!”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
신이 손을 든 채 어깨를 으쓱했다.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얼굴로 저딴 표정을 짓는 신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정작 신은 그런 레오니에를 즐겁게 바라봤다.
“약속했거든.”
“무슨 약속?”
“레지나랑.”
그 이름을 꺼낸 신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덩달아 레오니에 역시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공격적이던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못 가겠대.”
신의 품으로 돌아온 레지나는 고통스러워했고, 괴로워했다.
나는 이대로 잠들 수 없다고.
부디 이 한을 풀어달라고.
그 말을 들은 레오니에의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럼 역시 그 암사자는 레지나……!”
“아니야.”
신이 말하는 동시에 허공에 작은 암사자 한 마리가 폴짝거리며 나타났다. 암사자는 신의 주위를 빙그르르 돌다가 레오니에에게로 달려갔다.
“그건 힘의 원천일 뿐이야.”
“원천?”
“너희들이 맹수의 송곳니라 부르는 힘의 진짜 모습.”
설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암사자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를 신기하게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다시 신을 바라봤다. 바리아의 눈을 뒤덮은 검은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그 힘은 우리가 보레오티에게 주는 애정이자 시련이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하되, 죽으면 힘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와.”
“하지만…….”
레오니에는 하늘색 눈물을 흘리던 암사자를 떠올렸다.
“레지나는 울었어.”
“그러니까 그거 레지나 아니래도.”
신이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레지나는 죽었어.”
보레오티 치곤 어이없는 죽음이었단 무자비한 평가에 레오니에의 심기가 뒤틀렸다.
하나 신은 냉정했다.
“그딴 식으로 죽은 것도 별로지만…….”
신랄하게 비난하던 신이 레오니에를 노려봤다.
“다른 보레오티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다니.”
“다른, 보레오티?”
“그 몸의 진짜 주인.”
레오니에는 자신을 가리키는 신의 손가락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법 거리가 벌려져 있는데도 저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널 탓하는 건 아니야.”
손가락을 거둔 신이 한결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레오니에는 저 신이란 존재가 제 정체를 꿰뚫어 본 것보다, 레지나를 생각보다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놀랐다.
“어쨌건 너희가 본 암사자는 레지나가 아니라.”
곧이어, 신이 암사자의 정체를 밝혔다.
“레지나의 원한이 깃든 송곳니였어.”
‘원한’이 깃든.
그 말 하나로, 레지나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레오니에는 레무스의 목걸이를 삼킨 채 죽었다던 펠리오의 이야기가 뼈저리게 와 닿았다.
“죽기 직전에야 제 어리석음을 깨달은 불쌍하고 가련한 것.”
신조차 레지나를 동정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
경계심을 살짝 푼 레오니에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게 우리를 방해할 이유가 돼?”
“방해한 거 아니라니까?”
신이 한 번 더 말을 정정했다. 오히려 도운 거라고 말했다.
“레지나는 이미 죽은 존재야. 원한 찌꺼기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럼 우리는?”
“내버려 둬도 됐을 일이긴 한데…….”
그랬다간 레지나의 한을 풀어 줄 수 없었다.
“송곳니를 그런 식으로 계속 둘 수는 없었어.”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온 맹수의 송곳니는 검은 평원에서 마음껏 뛰놀다가 다시금 새로운 보레오티에게 깃들어야 했다. 그러니 레지나의 원한이 깃든 채로는 신들도 곤란했다.
“우리도 그놈들은 좀 혼낼 필요가 있었고.”
“그놈들이라면…….”
“붉은 백조랑 노란 검독수리.”
레무스와 벨리우스 황실.
그중 신들이 노린 것은 황실이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북부 산맥을 노리다니.”
신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하도 같잖아서 내버려 뒀더니 어느샌가 북부의 비밀까지 알아내 바로 지척까지 와 버렸다.
“그런데 백조가 검독수리를 죽이려는 거야!”
실제로 죽였고!
신이 정말 깜짝 놀랐다며 손뼉까지 마주쳤다.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제발 신이 바리아의 몸으로 저런 방정맞은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너희 가족을 북부 산맥으로 불렀어.”
“그게, 방해한 이유가 되나?”
레오니에가 언짢은 듯이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간섭엔 한계가 있거든.”
신이 제아무리 세상을 만들고 생명을 창조했대도, 검은 평원 너머는 오롯이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명체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두 번이나 실패했지.”
“두 번이나?”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신은 대답 대신 바리아의 몸을 가리켰다.
‘아.’
검은 맹수의 바리아. 순간 떠오른 원작의 제목이 레오니에의 전신에 섬뜩한 소름이 돋게 했다.
“이 몸은 간섭하기 아주 쉬웠어.”
“……왜?”
“보레오티의 반려들은 늘 그랬어.”
정작 신의 선물을 받은 보레오티는 간섭이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반려들은 그런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황녀인 척하는 기사도 그렇고.”
“누구?”
“아, 있어.”
대충 얼버무린 신이 이어 말했다.
“하지만 첫 번째 간섭은 실패했어.”
바리아가 레무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은 바리아를 다시 과거로 돌려보냈다. 간섭이 쉬운 존재였기에 가능했지만, 부작용으로 바리아는 이전 삶의 기억을 지닌 채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간섭을 최대한 안 하려고 해.”
그래도 덕분에 다시 한번 더 살아가게 된 바리아는 펠리오와 만나 연을 맺었고, 수비테오 황제와 올로르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도 실패였어.”
“왜?”
“진짜 잘못은 감춰졌잖아.”
레지나의 원한은 고작 그깟 처벌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신은 고민했고, 세 번째 수단을 떠올렸다.
“바로 너야.”
레오니에 보레오티.
신은 지난 시간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의 이름을 친히 불렀다.
다행히 바리아는 두 번째 삶을 기억하지 못한 채 회귀했지만, 이번에도 부작용은 생겼다.
“아우스트랑 메리디오가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더라고.”
“……야!”
가만히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버럭 소리쳤다.
“너희 때문에 상황이 더 꼬였잖아!”
“그럼 송곳니에 죽은 것의 원한이 붙어 있도록 계속 내버려 둬?”
송곳니에 남은 레지나의 원한은 생전에 품은 것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 남겼던 것이기에 신은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건 넌 많이 바꿨어.”
그중 하나가 바로 이거라며, 신이 바리아의 배에 조심히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바리아가 새 보레오티를 과거보다 일찍 잉태했어.”
그 덕에 신은 바리아와 더욱 크게 교감할 수 있었고, 덕분에 간섭 역시 이전보다 크게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네가 아는 대로야.”
“이거 완전 악마 새끼구먼!”
숨겨진 진실을 들은 레오니에는 기가 막혔다. 원래도 바닥을 치던 신앙심이 아예 바싹 말라 먼지가 되어 갔다.
“그거 때문에 엄마랑 동생이 위험할 뻔했어!”
“그래도 아무런 해가 없었잖아?”
신은 저 나름 신경 썼다며 허리춤에 손까지 올린 채 당당히 말했다.
“……이건 왜 이리 지랄 발랄이야.”
기가 막힌 레오니에는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이번 겨울 마물 사냥 때 산꼭대기에 올라 검은 평원에다 침과 가래를 확 뱉을 생각뿐이었다. 가운뎃손가락도 미친 듯이 흔들 예정이었다.
“그럼 도대체 왜 우릴 방해한 거야.”
“방해가 아니라니까.”
“몇 번이고 레무스를 죽이거나 잡을 기회가 있었어! 근데 방해했잖아!”
특히 다 죽어 가던 레무스가 벌떡 일어났을 때는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다.
“살린 건 아니야.”
신이 정정했다.
“아까도 말했잖아.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간섭엔 제한이 있어.”
그래서 지금껏 바리아 한 사람에게만 간섭을 해 왔다. 하나 그것도 두 번이나 실패했고, 레오니에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낸 세 번째 기회 덕에 겨우 가능했다며 신이 투덜거렸다.
지난 두 번의 기회에선 신의 영역과 가장 가까운 북부 산맥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간섭의 시도조차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힘은 아니었어.”
신의 간섭은 기껏해야 즉사를 즉사 3초 전으로 돌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 다이아?”
“너희 인간들은 그걸 그렇게 부르긴 하더라.”
“미친…….”
레오니에가 헛웃음을 지었다. 북부와 보레오티에 신과 연관된 것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어쨌건 그 힘 덕분에 붉은 백조는 덫에 걸려들었어.”
신이 주입한 힘은 레무스가 아주 큰 착각에 빠지게 했다. 자신이 무슨 엄청난 힘을 받았다는 착각, 신에게 선택받았단 착각.
“그렇게 주제도 모르는 채 오만방자하게 굴 때.”
신이 추락을 연상시키는 손동작을 보였다. 검지가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내 침대를 쿡 찔렀다.
“검은 평원 아래로 떨어지고.”
“…….”
“거기서부턴 신의 영역이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신의 미소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럼 레무스는, 죽었어?”
“죽진 않았어.”
그러나 죽음을 바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살아 있는 채로 겪는 중이라고 했다.
“바로 우리의 몸속에서.”
“신의 몸?”
“너도 잘 아는 거야.”
“내가 너희들 몸을 왜 알아!”
“왜냐하면, 너도 겪어 봤잖아.”
그게 얼마나 힘든지.
“하지만 그 덕에 그 나무는 엄청 컸지?”
신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삐딱하게 움직였다. 하나 불만스럽게 찡그린 얼굴 위로 곧 경악스러운 감정이 빠르게 퍼져 갔다.
‘우에에에엑!’
펠리오에게 막 입양되었을 때, 레오니에는 엄청난 멀미를 경험해야 했다.
‘내가 토했던 자리에 심어졌던 나무 있잖아, 그거 엄청 커졌어.’
그리고 1년 후, 제 멀미로 쑥쑥 자란 나무를 어른들에게 마구 자랑했었다.
‘일그러짐, 정지, 존재 부정.’
언젠가 파보가 설명해 준 세 가지의 부작용 중 하나.
“일그러짐…….”
일그러짐으로 생긴 멀미였다.
“레무스는 게이트에 갇혔어.”
신은 말했다.
“게이트의 부작용은 아주 무섭지.”
레무스의 몸과 정신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그 상태로 정지당해 유지될 것이다.
하나 게이트는 그 존재를 부정할 것이기에 도로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것이다. 그러면 다시금 일그러짐이 반복되다가 다시 정지당해 한동안 유지되겠지만, 곧 존재를 부정당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럼 또다시 일그러짐이 시작된다.
“신이 주는 힘을 그렇게 원했으니까.”
신이 손으로 턱을 받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꼭 영악한 어느 아기 맹수가 떠오르는 말투와 태도였다.
“평생 그 고통을 겪는다면 본인도 행복할 거야.”
신이 자비를 베풀 듯이 상냥한 어조로 레무스의 앞날을 예언했다.
* * *
황후궁에 도착한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귀족 회의에서 처리한 안건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굳이 수정할 건 없군.’
레오니에는 아주 잘해 내었다. 아무리 이번 귀족 회의가 짜고 치는 카드판이었다고 해도, 레오니에는 그 속에서 보레오티와 북부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상황을 잘 이끌었다.
가령 크리세토스 황자의 황태자 책봉 건은 책봉 전에 따로 만남을 가지는 조건을 건다든가.
올로르 가문의 처벌과 관련하여 보레오티가 주도적으로 집행할 수 있게끔 했다든가.
“아주 입꼬리가 찢어지겠어.”
그런 펠리오를 묵묵히 지켜보던 티그리아 황후가 피식 웃었다.
“나름 했군요.”
처리된 안건들을 넘기는 펠리오의 말투는 무덤덤했으나, 그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황후는 차라리 칭찬을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나 레오니에는 분명 잘했다.
“……그래도 말이지.”
황후가 아주 약간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영애의 호전성은 좀…….”
“좀?”
“그대보다 더해.”
황후는 아직도 회의실에서 올로르 전 자작을 죽일 작정으로 패던 레오니에가 잊히지 않았다.
하필 또 얼굴에 피가 튈 때마다 어찌나 즐겁게 웃던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황후마저도 등골이 오싹했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반면 펠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딸아이의 성장에 뿌듯해했다.
“하나 그래 보여도 아직 마음이 여려서 걱정입니다.”
“마음이 여리다고?”
황후는 자신이 뭘 헛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펠리오는 진심이란 듯이 그 점을 퍽 심각하게 걱정했다.
“아이가 정이 너무 많아서.”
“정이…….”
“아무한테나 친근하게 대하니, 아빠로서 걱정입니다.”
“걱정…….”
황후는 어렴풋이나마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 딸등신 공작은 그의 딸을 아주 작고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도 그랬지.’
일전에 다과회에서 만났던 바리아도 펠리오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더한 것으로 기억했다.
레오니에가 먹고 싶단 과자를 손수 입에 넣어 먹이고, 입에 묻은 걸 하나하나 떼 주고, 아이가 조금만 칭얼거려도 토닥거리며 안아 주고 달래 줬다.
바리아의 눈에도 레오니에는 돌봄이 필요한 아기 동물인 모양이었다.
‘피 칠갑을 한 맹수였는데.’
심기가 조금만 뒤틀려도 달려드는 마물 같은 맹수.
“……영애 정도라면.”
그러나 황후조차 펠리오와 같은 의견을 두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여기저기서 관심을 보이고 구혼하고 싶단 말이 나오겠군.”
성격이나 취향은 둘째 치고, 레오니에의 멀쩡한 겉모습만 본다면 훗날 제국의 사내들을 다 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될 게 분명했다.
‘거기다 보레오티 가문의 차기 후계자란 명성이 뒷받침하고 있으니.’
제국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거란 추측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과연 어떤 사내가 차기 보레오티의 부군이 될 영광을 차지할까.”
“분에 넘치는 영광일 테죠.”
펠리오는 기대된다고 말하는 황후를 아주 탐탁잖은 눈으로 바라봤다.
“물론 그럴 놈은 없을 겁니다.”
가뜩이나 스칸디아 황녀 때문에 예민해진 탓에, 펠리오의 목소리엔 불쾌감이 잔뜩 깔려 있었다.
“후계자야, 씨만 받으면 됩니다.”
“어머나, 공작…….”
황후는 말문이 막힌 것만으로도 모자라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펠리오의 발언은 과감하고 개방적이다 못해, 난잡했다.
황후는 그토록 무뚝뚝하고 이성적인 펠리오에게서 저딴 소리를 들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으음…….”
하나 그만큼 펠리오의 자식 사랑이 극진하단 걸 안 황후가 최대한 말을 골랐다.
“영애가 나중에 커서, 자유로운 연애를 해도 허락한다는 건가?”
요컨대 네 딸이 방탕하게 놀아 재껴도 괜찮으냔 뜻이었다. 그 질문에 펠리오는 불쾌하단 듯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나 곧 그는 잠깐의 고민 끝에야 입을 열었다.
“제 딸이라면 응당 군림해야지요.”
“군림이라…….”
“제국에서 레오와 동등할 수 있는 사내새끼들은 없습니다.”
“혹시 북부 산맥에서 어딜 다치기라도 했나?”
예를 들면 머리 같은 곳.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황후는 진심으로 펠리오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내가 피곤한 사람을 너무 붙들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만 가 보라며 황후가 말했다.
“부인께 축하한다는 말도 전해 주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했어, 공작.”
여러모로.
황후의 진심 어린 인사를 배웅 삼아 나온 펠리오는 곧장 바리아와 레오니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 끝났군.’
홀로 복도를 걷던 펠리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빌어먹을 사냥이 끝났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예상 밖의 일들이 튀어나오고, 방해도 많았지만.
‘끝났어.’
그 사실을 한 번 더 되짚은 펠리오는 오랜만에 어깨에 힘을 뺄 수 있었다. 어두운 창밖 너머로 비치는 한 줌의 달빛을 볼 여유가 생겼다.
‘북부로 돌아가야겠군.’
내일 오전 중에 저택으로 돌아간 뒤, 바리아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한 뒤에 서둘러 북부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했다.
‘레오 생일도 곧이니.’
선물을 사야 하고,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어야 했다. 아이의 생일을 소홀히 보낸다는 건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 뒤엔 마물 사냥을 준비하고…….’
바리아와 태어날 아기를 위한 준비도 해야 하고, 레오니에가 아기한테 본인 취향 주입시킬 것도 저지해야 했다.
‘……아카데미 입학도.’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오니에가 열다섯 살 생일을 맞이하면 그다음 해 봄엔 수도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했다. 거기다 아카데미는 기숙사제였다. 입학하게 되면 방학을 제외하곤 항시 그곳에서 아이 혼자 지내야 했다.
펠리오는 기분이 묘했다. 그는 레오니에가 그만큼 컸단 사실도 신기했고, 그곳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걱정인 저 자신이 기이했다.
멈춰 섰던 펠리오의 다리가 다시 움직였다. 사람 없는 복도를 홀로 걸어가는 그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제 육아라면 제법 자신 있다고 생각했건만, 여전히 새롭고 걱정스러운 것이 가득했다.
“…….”
한참 생각에 잠겼던 펠리오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리아와 레오니에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생각한 펠리오가 저도 모르게 걷는 속도를 올렸다.
“……당장 나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레오니에의 욕설에 펠리오가 멈칫했다.
“엄마랑 내 동생한테서 떨어져! 더는 우리를 방해하지……!”
“너 참 이상하구나?”
이어 들리는 바리아의 목소리는 낯설고 기이했다.
“진짜 그 몸의 주인도 아니면서.”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묻는 거 아니잖아.”
낯선 목소리가 말했다.
“왜 그렇게 보레오티처럼 굴어?”
넌 진짜가 아닌데.
그 목소리는 마치, 문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흘러나왔다.
레오니에는 신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이었고, 저나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노력 역시 다 신이 레무스를 벌주기 위한 체스 말에 불과했다고?
“와아, 기가 막혀서.”
레오니에는 헛숨만 계속 후후 내뱉었다. 얼굴 위로 오르는 열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산스럽게 돌아다녔고, 손부채질도 미친 듯이 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런 레오니에를 물끄러미 구경하던 신이 의아해했다.
“너희도 레무스를 벌주고 싶었던 거잖아.”
그래서 최악의 고통을 선물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며 신이 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천천히 돌아서며 신을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눈에 황당함과 증오 어린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그건 내 몫이었어.”
인간이 지은 죄이고, 인간이 응당 벌해야 할 인간들만의 일이었다.
“간섭할 자격도 없는 신 따위가, 보레오티의 사냥감을 빼앗아?”
“하지만 너흰 우리가 준 맹수의 송곳…….”
“그깟 힘 없어도 보레오티는 강해!”
참다못한 레오니에가 소리쳤다.
“맹수의 송곳니? 젠장, 그깟 힘 따위야, 겨우 마물 사냥할 때나 쓰지!”
“네가 그 힘으로 고아원에서 버틴 건 기억도 안 나나?”
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넌 그 덕에 죽지 않고 버텼던 거야.”
바리아의 탁한 분홍색 머리가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나 레오니에는 겁나지 않았다.
“그럼 내가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까?”
레오니에는 절 대신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보레오티를 아꼈다면, 레지나나 도와주지 그랬어?”
비아냥거리는 아기 맹수에겐 이제 신을 향한 존경심 따윈 전혀 없었다.
“너흰 기껏해야 우리가 차려 놓은 밥상에 수저 하나 올린 것뿐이야.”
“그 밥상을 차릴 수 있었던 것도 우리의 힘이…….”
“‘우리의 힘’?”
레오니에가 같잖다는 듯이 비웃었다. 이제 신의 얼굴엔 여유로움도,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한 미소도 없었다.
“맹수의 송곳니? 아우스트의 예언?”
그러나 둘 다 막상 필요할 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
“……좋아, 백번 양보해서 송곳니는 도움이 되었다고 치자.”
레오니에가 선심 쓰듯 말했다. 솔직히 마물 사냥할 때 말고는 잘 쓰지도 않는 힘이었다. 게다가 레무스를 잡을 때 역시도 신이 방해한 탓에 제대로 발동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우스트의 예언은 너희가 엄마를 부추기고 기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실현되지 않았을 거야!”
“네가 살짝 미워지려고 하네.”
신이 정색했다.
“그럼 미워해.”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난 너흴 증오할 테니까.”
그리고 신에게 말했다.
“당장 그 새끼 내놔.”
“레무스?”
“벌은 우리가 줄 거야.”
“그럼 레지나의 한은?”
“한 풀렸잖아.”
자신이 직접 레무스를 게이트 안에 떨어트린 암사자는 검은 평원으로 돌아갔다. 그건 레지나의 한이 풀렸다는 뜻이었다.
“레무스는 아직 살아 있으니, 명백히 우리 산 사람의 것이야.”
“넌 도대체 왜 그렇게 건방진 거야? 신에 대한 존경심도 없어?”
“존경심 따윈 옛날에 버린 지 오래야.”
고아원에서 눈을 떴던 순간부터.
레오니에는 괴롭고 힘겨운 순간마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돌아온 건 끔찍한 현실의 반복과 아픈 폭력뿐이었다. 신은 레오니에에게 좌절만을 선물했다.
“그러니 당장 나가!”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옷자락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이제 엄마랑 내 동생한테서 떨어져! 더는 우리를 방해하지……!”
“너 참 이상하구나?”
얼굴을 훅 들이민 신이 요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들리는 바리아의 목소리가 낯설고 기이했다.
“진짜 그 몸의 주인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니?
옷자락을 쥔 레오니에의 손이 움찔거렸다. 하나 애써 모르는 척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묻는 거 아니잖아.”
신이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보레오티처럼 굴어?”
순간 레오니에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저도 모르게 힘이 풀린 손바닥 사이로 바리아의 옷자락이 사르르 빠져나갔다.
신이 흐트러진 옷을 손가락으로 콕콕 누르며 말했다.
“내가 널 어떻게 데려왔는지 알아?”
세 번째 시도를 준비하기에 앞서, 신은 이쪽 세상과 어울릴 법한 혼을 찾던 중이었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의 흔적을 여러 곳에 뿌렸다.
“예를 들면, 책 같은 거?”
하나 그 흔적을 접한 인간 중엔 딱히 신의 기준에 적합한 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딱 적절한 것을 하나 찾았다.
“너는 막 죽은 혼이었어.”
“뭐?!”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 질렀다. 눈살을 찌푸린 신이 자신이 보았던 것을 손으로 허공에다 더듬거리며 표현했다.
“이렇게 생긴 기계에다가, 뭔 그림을 그리던데…….”
“헉……!”
“근육 탄탄한 인간 사내 둘이 아무것도 안 입…….”
“와, 됐어! 됐다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한 레오니에가 적나라한 장미 들판을 증언하려던 신의 입을 막았다. 하나 다른 세상의 자신이 원래 죽었다는 사실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회지를 그리다 죽었다니.
“심장 마비 같더라.”
그런 찐한 정사나 그리니 몸에서 기가 빠져서 죽은 거라며 신이 참견했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귀에 그딴 건 들리지 않았다.
‘컴퓨터 파일……!’
그 안에 있는 원고 파일과 후끈 달아오르는 자료가 아기 맹수를 괴롭혔다. 저쪽 세상의 가족들이 그걸 봤을 거라 생각하니 차라리 죽은 게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건 네 혼은 좀 불안하게 정착했는데.”
신이 이어 말했다.
불안한 정착 탓에 맹수의 송곳니가 있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고, 저를 향한 사우라의 적대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 멀미했던 것도 그 탓이었다고 신이 말했다.
“지금의 넌 너무도 완벽한 보레오티야.”
신의 눈앞에 있는 레오니에는 여태 본 보레오티들과 다를 바 없었다. 신은 그게 너무도 신기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어째서?”
진정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신의 의아함이 레오니에의 답답하고 기가 막힌 짜증을 천천히 풀어 줬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 두고 온 것들로 인한 창피함도 잊을 수 있게 해 줬다.
“……멍청한 신 새끼.”
레오니에가 진심을 담아 욕했다. 신이 언짢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하나 그 표정 덕에 아기 맹수의 마음이 점점 더 편안해졌다.
“그거야 네깟 신보다 엄청난 존재가 날 구원해 줬기 때문이지.”
“누구?”
물어보는 신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레오니에가 히죽거렸다.
“우리 아빠.”
* * *
‘이대로 살다 죽는 걸까.’
원장이 읽던 소설 속 매춘부의 이름, ‘니아’로 불리던 고아는 푸르른 하늘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는 지옥이었고, 시간이 흘러도 이 지옥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고아는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끔찍한 지옥이 꿈으로 변할 수 있었으니까. 하나 죽는 건 또 무섭고 억울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잘못은 저 새끼들이 했는데.’
고아는 낡아빠진 걸레만도 못한 옷소매 너머로 삐져나온 마른 팔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맞아 생긴 흉터를 남긴, 그리고 옷 속에 감춰진 또 다른 흉터를 남긴 저 망할 선생들이 잘못이니 자신이 그렇게 도망치듯 죽을 순 없었다.
절망과 분노만이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후.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힌 적 없던 원장이 굽신거리며 부르던 방문객의 이름. 귀족이 타고 온 검은 마차에 그려진 사자 문양.
고아는 이곳이 자신이 다른 세상에서 읽었던 어느 소설 속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
고아는 잡일하는 하녀라도 되겠단 각오로 주인공의 앞을 막았고.
‘레오니에 보레오티.’
소설 속 주인공은 고아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레오니에’는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펠리오 보레오티의 딸이야.”
레오니에는 자신의 시작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원, 그곳에서 처음으로 펠리오를 ‘아빠’라 불렀던 자신. 그런 ‘딸’을 꼭 안아 주며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준 펠리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걸음에 맞춰 새하얀 정원에 발자국을 새겼다. 바로 레오니에가 이 세상에 첫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아빠가 날 인정했고, 그 덕에 난 나로서 살 수 있었어.”
“미안한 건 없어?”
“항상 있지.”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레오니에가 슬프게 웃었다. 펠리오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커질수록, 미안한 마음도 똑같이 자랐다.
“나 같은 거 키운다고 고생 엄청 하잖아.”
“알곤 있었네…….”
“나도 내 취향이나 성격이 모난 건 알아.”
그건 다른 세상에서 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런 흉한 그림을 그려 어마어마한 별명으로 불렸던 거지.
하지만 레오니에는 그런 자신을 속이거나 숨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가족이잖아.”
가족이니까 더욱 숨김없는 자신을 보이고 싶었다. 레오니에는 그런 저를 이해해 주길 바랐고, 펠리오는 정말로 아이를 아끼고 사랑했다.
“나는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
그것이 레오니에가 보레오티 공작이 되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빠 덕에 북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필요했어. 그래서 난 공작이 되고 싶었던 거야.”
“그럼 만약에 펠리오가 너에게 안 물려준다고 하면?”
신이 떠보듯 물었다.
“이 배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고, 펠리오가 후계를 그 아이에게 주겠다고 하면?”
“포기해야지.”
레오니에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아빠의 선택이 그렇다면.”
“그러다 펠리오가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그러진 않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아빠가 아무 이유 없이 후계자를 바꿀 리가 없어.”
“분명 이유가 있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니까.”
그러니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다며,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자신 있게 말했다.
“후계자가 못 돼도, 까짓 돈 많은 백수로 띵가띵가 살면 돼.”
손목시계 사업으로 벌어 둔 재산도 많고, 애당초 첫 번째 꿈이 돈 많은 백수였으니 좋은 기회라며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물론 난 엄마도 사랑해!”
“동생 임신한 것 때문에 싫어진 건 아니고?”
“그러기엔 내가 너무 잘나서.”
레오니에가 오만하게 말했다.
아기 맹수는 자신이 선 후계자 자리도 쉽게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넌 레무스나 뱉어내고 가.”
“하지만 고통은 게이트가 최고인데…….”
신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너희는 절대 그 고통을 못 흉내 내.”
“걱정도 팔자다.”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그 고통을 흉내 낼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흉내 내야지.”
거기다 고통은 레무스 혼자만 받게 할 수는 없었다. 레오니에는 레무스를 이용해 올로르 전 자작에게도 세상 무엇보다 끔찍한 고통을 선물하려 했다.
“우와…….”
신이 진심으로 질린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레오니에가 신의 귀에 속삭였다.
“꺼져.”
한 자, 한 자 짓이기며 내뱉은 아기 맹수의 검은 눈동자엔 그간 쌓였던 분노가 일렁거렸다.
“다시는 우리 가족한테 나타나지 마. 또 한 번 이딴 짓으로 내 심기를 건드렸다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찢어발길 테니까.”
신이 멍한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너 좀, 무섭다?”
그 말이 진심이란 듯이, 신이 슬그머니 몸을 뒤로 내뺐다.
“차기 보레오티가 신 따위도 못 이길까.”
“오만하고 뻔뻔하긴.”
“그거야 내가 우리 부모님 딸이니까.”
레오니에가 자랑했다.
“……좋아.”
기어코 신이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붉은 백조를 줄게.”
“죽은 채로 주지 마! 생생한 채로 내놔!”
“깐깐하긴.”
게이트의 부작용 중 ‘존재 부정’으로 상태가 멀쩡해졌을 때 돌려보내겠다고 신이 말했다.
“어쩌면 내 최대의 실수는 널 보레오티로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누가 보레오티 건들래?”
“도대체 엄마랑 아빠는 왜 나한테 이 일을 시켰나…….”
쫑알쫑알 투덜거리던 신이 곧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만 간다는 뜻이었다. 레오니에는 어서 꺼지라고 가운뎃손가락을 양손에다 들며 배웅했다.
“나 사라지면 너희 엄마 몸 잘 받쳐라. 이대로 잠들 테니까.”
“마지막까지 민폐네.”
“그럼 나중에 죽거든 봐.”
“죽어서 만나면 너흰 나한테 죽는 줄 알아라.”
죽어서도 만나기 싫은 신들에게, 그래도 마음씨 착한 아기 맹수는 다음을 기약했다.
“아빠랑도 잘해 내고.”
그 말을 끝으로, 신이 눈을 감았다.
“어구, 어구.”
신이 떠난 바리아는 그대로 몸을 고꾸라트렸다. 이를 무사히 받아 낸 레오니에가 작게 안도하며 바리아를 조심조심 침대에 눕혔다.
‘잠들었구나.’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머리를 정돈해 줬다.
‘엄마도 고생 많았네.’
보레오티의 반려가 될 운명이란 이유로 신에게 세 번이나 이용당했다니, 주인공의 시련이라기엔 너무 안타깝고 억울한 삶이었다.
‘잘 견뎠어.’
대견한 마음을 담아,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이부자리를 손수 고쳐 줬다.
“엄마는 역시 멋진 사람이야.”
레오니에가 잠든 바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얹었다. 쪽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입맞춤엔 엄마를 존경하는 아이의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우리 동생도.”
이윽고 아이는 바리아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
이제 천천히 불러올 배를 보는 레오니에의 눈엔 다정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레오니에는 태어날 아기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줄 자신이 있었다.
“태명은 근육이 어때?”
레오니에가 몰래몰래 떠올려 둔 동생의 태명을 속삭였다.
“나중에 태어나면 재밌는 거 많이 가르쳐 줄게. 세상엔 숨어서 즐겨야 할 것들이 아주 많은데, 그건 윗사람한테 잘 배워야 해.”
근육이나, 동성 짝짓기나.
“앞으로 매일 말 걸게.”
손바닥에 입술 도장을 찍어 후 불어 준 레오니에가 조심조심 방을 나왔다. 방 안의 불을 끄는 것도 당연히 잊지 않았다.
“끄으으으……!”
기지개를 쭉 켠 레오니에는 바로 옆에 있는 제 방으로 갔다.
‘일단 아빠한테 레무스 이야기를 하고…….’
아마 신은 황궁에 있는 북부 게이트로 레무스를 넘길 것 같았다. 하지만 북부에 있는 게이트로 레무스를 토해 낼 가능성도 있었다.
‘이왕이면 이쪽으로 던지는 게 좋지.’
그래야 북부로 가는 길에 중간중간 괴롭힐 수 있으니까.
이미 레오니에의 머릿속엔 각양각색의 고문 방법이 북부 산맥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어떤 것부터 시작할지 즐겁게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방에 들어가려던 찰나.
“아빠!”
문 앞에서 펠리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이리 오란 듯이 느리게 손짓했다.
“황후 폐하랑 이야기 잘했어?”
쪼르르 다가간 레오니에가 히죽 웃으며 촐싹맞게 물었다.
“귀족 회의 안건 다 잘해 냈지? 딱히 뭐 손댈 것도 없지? 역시 나지?”
“……잘했다고 칭찬하면 작위 내놓으라 난리겠군.”
펠리오가 재잘거리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나 이내 손을 올려 레오니에의 머리를 토닥였다.
칭찬받아 기쁜 레오니에가 가슴을 활짝 펼치며 으스댔다. 그 모습에 펠리오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근데 아빠.”
레오니에는 그런 펠리오를 묘한 시선으로 보았다.
“뭔 일 있어?”
“왜?”
“그냥 평소랑 조금 다른 것 같아서.”
“다르지.”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에 걸쳐도 겪어 보지 못할 악재였다며 펠리오가 대답했다.
“하긴, 나도 좀 피곤해.”
거기다 조금 전까지 신에게서 엄청난 사실까지 들어 버렸기에 더욱 힘들었다.
레오니에가 방으로 들어가자, 펠리오도 뒤따라 들어갔다. 황후가 레오니에에게 내준 손님방은 바리아가 잠든 방과 똑같은 구조였다. 다만 장식은 아까보다 조금 더 화려했다.
“엄마한테 안 가?”
레오니에가 창가 근처 소파에 앉았다. 저 팔불출이 바리아를 보러 가지 않는다니 조금 놀라웠다.
“괜히 깨울라.”
펠리오가 건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누구보다 피곤했을 사람이 겨우 잠들었다는데, 그는 실수로라도 바리아를 깨울 생각이 없었다.
“하긴, 엄마 푹 자더라.”
“이불 잘 덮어 주고 왔냐.”
“물론! 아, 나 동생한테도 인사했다?”
“그런데 너, 그 이름은 뭐였냐.”
“응? 무어가?”
펠리오가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맞은편에 앉은 레오니에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거렸다.
“동생 태명이 그게 뭐야.”
“튼튼해 보여서 좋잖아.”
레오니에가 잔소리하지 말란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긁었다.
“원래 태명은 좀 이상…….”
당당하게 태명의 뜻을 설파하려던 레오니에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동시에 헉, 하고 숨을 멈췄다. 황급히 올린 시선의 끝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저를 바라보는 펠리오가 있었다.
“……어?”
테이블에 올려 뒀던 레오니에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그걸 어떻게……!”
심장이 아래로 훅 떨어지는 듯한 두려움이 전신을 덮쳤다.
동생 태명을 근육이라고 지은 건 레오니에 혼자만 아는 사실이었다. 바리아의 임신 사실을 안 뒤, 항상 잠들기 전까지 태명이며 함께할 수 있는 놀이까지 무척 즐겁게 상상하고 고민했다.
그러니 그걸 펠리오가 알고 있단 건.
“…….”
레오니에는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단단했던 세상이 푹 꺼지면서 아기 맹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들었을까?’
설마 알아 버렸나?
“……네가 생각한 대로.”
펠리오는 그런 레오니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비밀을……!’
레오니에는 도저히 펠리오를 바라볼 수 없었다. 새하얗게 질려 가는 얼굴엔 절망과 두려움으로 그늘이 져 갔다.
“들었다.”
아아, 레오니에가 절망 어린 표정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무릎 위에 올라간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고.”
펠리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하나 당황한 레오니에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시선을 피한 탓에, 아이는 펠리오가 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너랑 바리아가 싸우는 줄 알았어.”
“…….”
“생각해 보면 네가 바리아한테 그렇게 할 일이 없었지.”
“그, 그건, 신이…….”
“알아.”
들었으니까.
펠리오는 다시금 자신이 들은 것을 확인시켰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툭, 툭. 펠리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느릿느릿 두드렸다. 숨 막히는 분위기 탓에 한껏 가라앉은 공기를 뚫는 손가락 소리가 레오니에의 귀를 후벼팠다.
“내 딸이 누구보다 특별하고 대단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군.”
“……어?”
예상을 뛰어넘는 펠리오의 말에 레오니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펠리오는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아이를 보고 있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누구보다도 너를 믿는다는.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아빠’의 눈이었다.
‘딸이라고…….’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저를 ‘내 딸’이라고 호칭한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무너져 가던 발밑이 다시 단단해졌다.
“안 놀랐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펠리오가 솔직히 말했다. 그로서도 문 너머로 들었던 레오니에와 신과의 대화는 아주 큰 충격이었다. 레무스와 싸웠을 때보다 훨씬 강렬했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
진짜 일곱 살이 아니었던 딸.
억울한 죽음과 반복되는 삶을 경험한 아내.
천하의 펠리오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밀이었다. 손끝이 천천히 차가워졌고, 저답지 않게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런데 말이지.”
펠리오가 어이가 없단 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사람이 그렇게 변함없기도 힘든데.”
“뭐, 뭐가……?”
“거기서나 여기서나 레오 네가…….”
진심으로 웃음이 터진 펠리오가 기어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덩달아 레오니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창피한 게 아니라, 여전히 저를 ‘레오’라고 부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엄청난 변태인 거야.”
우스운 대답치고는 펠리오의 말투가 퍽 심각했다.
“그 지고지순한 취향에 감탄마저 나오더군.”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듣다 보니 저를 비꼬는 듯한 느낌이 강해졌다.
“어쩐지 내 노력이 안 통한 이유가 있었어.”
펠리오는 제국에 있는 모든 육아 도서를 섭렵했다고 자신했다. 하나 동서고금을 막론한 육아 지식으로도 레오니에의 변태 성향을 고칠 수 없었다.
동심을 길러 주려고 온갖 수를 떠올렸으나 전부 쓴맛을 보았고, 도리어 레오니에의 반격에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로서의 마음가짐이 부족했던 건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드디어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단 사실을 비로소 알아냈다.
“……어어.”
멍하니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올렸다.
“육아는 그렇다 쳐도, 그림도 엄청 궤멸적으로 못 그리잖아.”
그림 실력만큼은 모든 걸 잘하는 펠리오의 유일한 취약점이었다. 맹수의 송곳니를 그려 준답시고 찌부러진 푹신푹신 구름 슈크림 같은 형체를 그렸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재앙과 파멸 사이에 아빠 그림이 있잖아.”
“그건 원시적이고 입체적인 화풍이란 거다.”
펠리오가 얼굴 근육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즉각 대답했다. 레오니에는 핑계도 참 좋다고 생각했다. 분명 저 핑계는 엄청난 고뇌 끝에 나온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완벽해도 멋없어.”
특히나 저처럼 잘난 인간에겐 약간의 부족한 면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덜 불편해한다며 오만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레오니에는 기가 막히면서도 아주 조금 기뻤다.
‘그대로야.’
나누는 대화도, 투닥거리는 말투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펠리오의 태도에 레오니에는 용기를 얻었다.
“화, 안 났어?”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있나?”
“속였으니까…….”
“속인 게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거야.”
펠리오가 친히 레오니에의 말실수를 고쳐 줬다.
“너도, 바리아도. 자칫했다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당하기 딱 좋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그리고 레오 넌 딱히 네 비밀을 숨기지도 않았고.”
세상의 어떤 일곱 살도 근육을 탐스러워하지 않고, 남자와 남자를 엮으면서 광대뼈가 들썩일 정도로 음흉하게 웃지도 않는다.
게다가 레오니에는 한 번 자신의 진짜 나이를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정작 당사자도 모르는 순간을, 펠리오는 아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 동반 다과회.”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동심을 길러 주고 또래 아이들과 놀게 해 주려고 케라타 자작 부부가 열었던 아이 동반 다과회에 참석했었다.
하나 레오니에는 아이들과 노는 걸 아주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더니 대뜸 펠리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아?’
‘다섯 살처럼 보이는 일곱이지.’
‘사실 있지, 나 스물 넘었어. 내일모레면 서…….’
레오니에는 자신의 ‘진짜’ 나이를 펠리오에게 말했었다.
“넌 항상 진실만 보여 줬어.”
어린아이가 되었어도 어린아이처럼 굴지 않았다. 레오니에는 언제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 단 한순간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힘들었을 텐데.”
그런 비밀을 홀로 지닌 채 살아왔을 아이가 그저 안쓰럽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옆에 앉았다. 제 곁에 다가오는 펠리오를, 레오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너보고 근육 밝힌다고 혼낸 적 있어?”
“그, 그런 적은, 없어…….”
“왜 이렇게 애늙은이냐고 욕한 적 있어?”
“한 번도 없어…….”
“레오 널 데려온 뒤에 후회한 적 있어?”
“없어……!”
기어코 뜨거워진 눈시울 위로 눈물이 넘쳐 흘렀다. 레오니에는 주체못할 감정을 버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지만, 펠리오는 두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달라지는 건 없어.”
펠리오가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원래 대단한 사람일수록 엄청난 비밀 한두 개쯤은 다 지니는 법이야.”
너의 비밀도 그 정도일 뿐이란 속삭임이 어찌나 다정한지, 레오니에의 눈물이 점점 더 넘쳐 갔다. 아이의 얼굴을 감싼 펠리오의 손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치우기는커녕 도리어 그 손으로 레오니에의 눈물을 조심조심 닦아 줬다.
“울 일 따위도 아니야.”
그리고, 제법 엄한 목소리로 아이를 타일렀다.
“우린 가족이잖아.”
서로의 손을 잡고 눈밭을 걸었던 그 날부터, 둘은 서로에게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관계가 되었다. 싸워도 곧장 화해할 수 있고, 맛있는 걸 먹으면 가장 먼저 서로의 얼굴이 떠오르고, 기쁜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말해 주고 싶은. 슬픈 일이 생기면 위로받고 싶은.
“……으아아앙!”
레오니에의 턱이 바들바들 떨리더니, 곧 엄청난 울음을 터트렸다. 구슬처럼 투명하고 커다란 눈물들이 또르르 흐르더니 턱 아래에서 만나 툭툭 크게 떨어졌다.
“너도 참 눈물 많다.”
별일도 아닌데 우느냐고 핀잔을 주는 펠리오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아, 아빠…….”
레오니에가 훌쩍이며 불렀다.
“고마워, 고마워어……!”
“별걸 다 고마워하네.”
펠리오가 피식 웃었다.
“가족은 원래 그런 거야.”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방에서 나온 건 그 뒤로 정확히 한 시간 후였다.
펠리오는 하도 울어 눈이 시뻘겋게 부은 레오니에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손수 닦아 주고, 침대에 눕혀 이불까지 덮어 주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줬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궁금한 거 없어?’
레오니에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금이라면 궁금한 건 다 답하겠다고 말했다.
펠리오도 억지로 재우지 않고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주로 다른 세상에서 함께 했던 가족들에 대해 물었다.
아이가 젊은 나이에 급사했단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펠리오는 그곳 가족들을 먼저 걱정해 줬다. 저 역시 자식을 둔 아버지이기에 그 슬픔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세상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지?’
‘평범했나? 좀 고리타분했어.’
‘형제는 있었고?’
‘남동생이 있었어.’
‘장래 희망이나 꿈은?’
‘사실 화가가 되고 싶었어.’
레오니에는 특히 자신의 꿈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그런데 집에서 반대해서 그냥 취직했어.’
‘딸이 하겠다는데?’
‘그 반대도 날 위한 거였어. 거기선 그림으로 밥벌이하기가 힘들거든.’
하나 그림을 포기할 수 없어서, 퇴근하거나 쉬는 날마다 틈틈이 그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장미 들판의 여신, 근육 광공의 모신이란 명성을 얻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음탕한 호칭이군.’
‘음탕이라니! 신성한 거야!’
‘레오 넌 어쩌다 그런 취향을 가지게 된 거냐.’
근육 자체를 좋아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레오니에는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그게 말이지…….’
그리고 레오니에는 아주 충격적인 이유를 말해 줬다.
‘내 첫사랑이…….’
펠리오는 끔찍한 단어라도 들은 것처럼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요는 첫사랑이 운동에 미친 놈이었는데, 말 한마디라도 해 보고 싶어서 운동 방법이나 근육을 공부한다는 게 그만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릴없는 대화를 나누고 얼마 되지 않아 레오니에가 잠들었다.
잠든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이부자리를 고쳐 준 뒤에야 펠리오는 바리아가 머무는 방으로 갔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알리니 곧 바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자고 있었군요.”
“리오 당신도요.”
둘은 서로를 보며 쓰게 웃었다.
“……들었군요.”
침대 가까이 의자를 끌고 가 앉은 펠리오가 물었다. 바리아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곤함은 북부 산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항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신의 간섭으로 의식을 잃을 때면 언제나 그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 들었네요.”
“일부러 들려준 걸지도 모르죠.”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바리아가 이불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레오는, 괜찮아요?”
바리아가 아이를 가장 먼저 챙겼다. 펠리오는 조금 전에 잠든 모습을 보고 왔다고 말했다.
“놀란 것 같긴 했습니다.”
“놀란 것 같은 게 아니라, 엄청 놀랐을 거예요.”
“그렇다고 레오가 우리 딸이 아닌 것도 아니고.”
펠리오는 그깟 비밀이 저와 레오니에 사이를 방해할 수 없단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우리 아이가 남들보다 특별하단 사실에 유치한 우월감마저 들었다.
그건 바리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 아내도 그만큼 특별하단 뜻이니까.
하나 바리아는 자신의 비밀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어리석었던 첫 번째 삶의 결말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바리아.”
펠리오가 풀이 죽은 아내의 볼을 손등으로 조심조심 쓸었다.
“잘못은 항상 가해하는 쪽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어리석었다고 비난하지 말라 부탁했다.
“두 번이나 올로르에게 복수를 먹였는데, 그거로도 부족합니까?”
역성혁명까지 해야 속이 후련하겠냐며 펠리오가 농담조로 물었다. 그제야 바리아가 얕은 웃음을 푸스스 흘렸다.
“이젠 됐어요.”
고개를 가로젓는 바리아는 평화를 바랐다.
“당신이랑 레오랑.”
그리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그간 고생했던 만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 * *
다음 날 새벽.
“레무스 올로르를 발견했네.”
펠리오를 서둘러 부른 티그리아 황후가 조금 전 들어온 보고를 전해 줬다.
급한 부름이었음에도 멀끔한 차림으로 나타난 펠리오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황후가 자신을 부를 걸 알고 미리 준비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황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펠리오를 노려봤다.
“제가 신도 아니고, 그런 걸 어찌 알겠습니다.”
“그놈의 신.”
황후가 질색하며 한 손으로 허공을 휙휙 휘저었다. 진절머리나니 말도 하지 말란 뜻이었다.
“듣고 싶지도 않아.”
옛사람들이 지어낸 게 뻔한 전설 따위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다. 한동안은 그와 관련된 주제는 피하고 싶었다.
펠리오는 그런 황후를 충분히 이해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이트 사고로 처리하면 됩니다.”
“나도 그럴 생각이네.”
“대외적으론 레무스 올로르가 북부 산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줘도 안 가져가.”
황후는 기꺼이 주워 가라고 말했다. 애당초 그런 쓰레기를 가지겠다고 보레오티와 기 싸움할 기력이 없었다. 이쪽도 일이 바빴다.
“황녀 전하 건은 어찌 되었습니까.”
펠리오가 어제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레오니에의 입방정 때문에 그곳에 있던 기사들이 스칸디아 황녀의 정체를 알아 버렸다.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황후가 피식 웃었다.
“다행히 그곳엔 글라디고와 레보오밖에 없었던지라.”
“발 없는 말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입니다.”
“어머, 글라디고가 그렇게 입이 쌌나?”
“레보오를 잘못 발음하셨군요.”
“그러게. 정확히는 공작 영애인가.”
“저희 딸은 왜 건드리십니까.”
레오니에를 언급하기 무섭게 펠리오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대의 딸 덕에 알려지지 않았나.”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언젠가 알려질 사실이라면 일찍이 공개하는 게 편하다며 펠리오가 말했다.
“올로르를 보십시오.”
“그게 이거랑 같나.”
황후는 그딴 것과 제 아들의 비밀이 비교되는 것이 아주 못마땅했다.
“공작 그대가 태세 전환이 그렇게 빠른 줄 몰랐는데.”
“황공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펠리오는 등을 편히 기댄 채 무료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래, 뭐…….”
본인이 칭찬이라 생각하면 그런 거겠지.
칭찬 아닌 칭찬을 끝으로, 티그리아 황후는 레무스에 관한 논의를 끝냈다. 그리고 두 번째 용건을 물었다.
“아우스트가 새벽에 도착했다.”
“귀한 행차를 하셨군요.”
펠리오가 비아냥거렸다.
“그대와 만나고 싶다는데, 어찌하겠나.”
만나겠다면 바로 자리를 준비하겠다고 황후가 말했다. 하나 펠리오는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만남을 거부했다. 황후는 펠리오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이 자리에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내가 적당히 처리하면 되겠나?”
“친절에 응하겠습니다.”
“나야 고마운 일이지.”
이로써 황실이 남부에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황후는 크리세토스 황자에게 어떻게든 더욱 안정적인 정세를 선물하고 싶었다.
“……황자 전하라면 폐하께서 그리 노력하지 않으셔도 잘할 겁니다.”
펠리오는 크리세토스 황자의 능력을 높이 샀다. 눈에 띄게 특출난 점은 없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재능을 지니었다.
거기다 지난 귀족 회의에서 올로르 전 자작을 기선 제압한 모습은 가히 한 나라의 정점이 될 만한 자질이었다.
다정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엄하고 무서워지는 건 아주 중요했다.
“그대가 그리 생각해 줘서 기쁘군.”
황후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스칸은 어떤가.”
“황녀 전하는…….”
아름다운 은발의 기사를 떠올린 펠리오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잘 자라셨지요.”
펠리오는 최대한 감정을 죽인 채 답했다. 요즘 그의 정신 건강에 가장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바로 스칸디아 황녀였다. 어떤 의미론 올로르보다 더 끔찍했다.
“공작은 스칸에게 대부 같은 존재지.”
“그런 황송한 칭호는…….”
“어머, 내가 주책이었나?”
“아닙니다.”
펠리오는 그저 후회 중이었다.
만일 자신이 바리아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황후와 이벡스 경에게 전시회 내부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장소가 있다고 알려 주지 않을 거였다.
‘골 아프군.’
수비테오 황제 엿 잡수시게 하려다가 본인 손에 엿이 끈적하게 남아 버렸다.
“언제 북부로 돌아가나?”
그런 펠리오의 심정을 모르는 황후가 물었다.
“오늘 오전 중에 저택에 먼저 돌아가서 결정할 생각입니다만, 최대한 빨리 올라갈 예정입니다.”
“부인의 몸을 생각한다면 서둘러야지.”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황궁의 게이트를 쓰는 건 어떠한가.”
황후의 제안에 펠리오가 눈꺼풀을 느리게 움직였다. 자칫 모든 것이 하찮고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검은 눈이 황후를 조용히 응시했다.
“북부 게이트를 개방하겠단 뜻입니까?”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럴 생각은 있다고, 황후가 선뜻 말했다.
“오랜 세월 불편을 겪어 온 죄 없고 선량한 북부 주민들에게도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제공해야지.”
“요는 서부 지역의 도적 퇴치하는 비용이나 노력 등이 아쉽다?”
“사람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군.”
황후가 아쉬움 하나 없는 얼굴로 아쉬워했다.
“다행히 북부 게이트는 궁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어. 시간은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황후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며 싱긋 웃었다. 이왕이면 서로에게 좋은 게 좋지 않겠느냔 말도 덧붙였다.
“서부에 이득이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서부의 경제적 피해가 제법 생길 판이었다.
도적 퇴치는 둘째 치더라도, 지금껏 수도로 가기 위해 서부에 들르던 북부민의 수가 감소하면 그로 인한 수입 역시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내가 그런 것도 염려치 않았을까.”
티그리아 황후가 싱긋 웃었다.
“이번 일로 몰수하는 가문들의 배상금이 서부에도 들어갈 거야.”
“그 돈으로 무슨 수를 쓴다는 것이군요.”
“가령 북부 주민들이 들렀던 길목을 관광 지구로 삼는다거나.”
“가능이나 할지요.”
“가능할 때까지 북부 게이트는 못 쓰는 거지.”
황후는 북부 게이트를 개방할 의향이 있다고만 말했지, 반드시 개방하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펠리오는 저런 인간이 황제여야 했단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 그래야 싸울 맛도 있을 텐데.
황후와 이야기를 마친 펠리오가 다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복도에서부터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펠리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고, 걸음걸이도 눈에 띄게 빨라졌다. 때마침 지나가던 궁중 하녀들이 얼굴을 붉힌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딸과 아내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펠리오는 두 모녀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했고, 최대한 소리와 기척을 죽인 채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니에와 바리아는 종이가 널브러진 테이블에 마주 앉아 무언가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입덧이 심해질 땐, 이걸 보는 거야.”
“어머나, 세상에……!”
레오니에가 밀수하듯 그림 한 장을 스윽 내밀었다. 이를 받은 바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환호했다.
“고아원 생활이 힘들었던 건, 눈 보신할 게 없었던 탓도 있어.”
그러고는 자신의 성장을 보라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또래들보다 훨씬 크고 근육까지 촘촘히 붙은 몸은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다.
“역시 보기 좋은 몸이 정신에도 좋다고…….”
“바로 그것입니다, 어머니!”
레오니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둔부는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펠리오는 그제야 두 모녀가 바라보는 종이에 그려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휘두르는 저의 뒤태였다.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골반 부위가 강조된.
“아빠의 둔근은 정말 예술이야. 조각으로 남겨서 가보로 삼아야 한다니까?”
“아, 안 돼! 이제 엄마 거야!”
바리아가 조각은 안 된다고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치사하게…….”
공공재를 독차지하다니,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뭐, 상관없어!”
레오니에는 후하게 넘겨줬다. 어차피 아빠의 둔근은 자신이 애초에 손댈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딱딱한 조각 따위가 감히 그 위대함을 제대로 표현할 리도 없었고.
“진정한 근육은 바로 흉근 옆에 활짝 펼쳐진 날개! 광배근이……!”
“이 불효녀야.”
듣다못한 펠리오가 기어코 레오니에의 양 볼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으으!”
레오니에가 물고기 입술이 된 채 뻐끔거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 살짝 젖어 있었다.
“와, 왔어요?”
슬그머니 그림을 치마 속 주머니에 넣은 바리아의 눈가도 마찬가지였다.
펠리오는 자신이 없는 동안, 두 사람이 근육으로 똘똘 뭉치기 전에 크게 울었음을 알았다. 서로의 비밀을 나눈 채 얼싸 끌어안고 엉엉 운 모양이었다.
‘눈물도 많지.’
그런 걱정 어린 생각과 함께,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리아는 죄지은 아이처럼 풀 죽은 표정으로 그림을 넘겼다.
“……내가 이렇게 쪘나요?”
펠리오는 종이 속 유난히 강조된 제 엉덩이를 노려봤다.
“내가 조금 강조했어.”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펠리오는 칭찬 대신 딸아이의 코를 꾸욱 잡았다. 동시에 터져 나온 코맹맹이 비명이 제법 웃겼다.
“그, 그렇지만, 보면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는걸요…….”
바리아가 은근슬쩍 그림을 제 쪽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우리 근육이가 아빠를 좋아하나 봐요!”
“기어코 그…….”
아연한 펠리오는 입조차 다물지 못했다. 앞으로 점점 커질 바리아의 배에다 ‘근육아’라고 둘째를 부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정작 바리아는 마음에 든 눈치였다.
“엄청 건강한 아이가 태어날 것 같지 않아요?”
“너무 건강해서 제 허파도 뒤집을 것 같군요.”
자기 언니한테 배운 걸 고스란히 따라 할 둘째가 훤히 보였다.
‘……언니?’
테이블에 펼쳐진 또 다른 근육 그림들을 못마땅하게 살피던 펠리오의 손이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둘째의 모습이 딸이었다. 태어날 둘째가 딸이든 아들이든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더 바랄 게 없지만, 막연히 떠오른 둘째의 성별이 너무 선명했다.
“아빠 왜 그래?”
그림 위에 멈춘 손등 위를 손가락 하나가 톡톡, 두드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펠리오는 징글징글한 첫째의 머리를 벅벅 쓸었다. 커다란 손이 몇 번이고 움직이니 레오니에의 머리도 마구 흔들렸다.
“아빠!”
가까스로 벗어난 아이가 헝클어진 머리를 내버려 둔 채 물었다.
“이제 가?”
“그래.”
그 말에 레오니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집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