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신의 농간
‘펠리오.’
우리 꼬마 맹수.
디아토르 보레오티가 복도에 발라당 누워 있는 어린 손주를 살갑게 불렀다.
정작 손주는 뚱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힐끔 보고는, 다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해 버렸다.
‘저는 꼬마 맹수가 아니에요.’
‘아우스트 공작이 널 그리 불렀다며.’
‘그 할머니…….’
펠리오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이는 그 별명이 괜히 낯간지러웠다.
‘귀여운 녀석.’
‘할아버지 성격 이상해.’
북부 저택 괘종시계도 고장 냈으면서. 펠리오는 동부 후작이 선물로 준 귀한 것을 고작 시끄럽단 이유로 태엽을 뽑아 고장 내 버린 할아버지가 신기하고 이상했다.
‘그런데 네 부모님은?’
‘레지나랑 외출이요.’
펠리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펠리오 넌?’
디아토르가 황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부할 게 있어서 안 갔어요.’
‘…….’
‘괜찮아요, 전.’
그러나 아이의 공허한 눈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디아토르는 이 넓고 사람 많은 저택에서 홀로 외로운 어린 손주를 동정했다.
‘네 부모가 멍청한 짓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아내가 이 꼴을 본다면 당장 아들 내외의 머리를 구두 굽으로 찍어 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데.’
디아토르가 대화 주제를 바꿨다.
‘우리 꼬마 맹수는 아까부터 뭐하는 거지?’
‘저 꼬마 맹수 아니라니까요?’
‘오, 그림을 보고 있었나?’
어느새 펠리오 옆에 누운 디아토르도 함께 천장에 그려진 그림을 감상했다.
‘저 그림엔 이야기가 담겨 있단다.’
디아토르가 손가락으로 천장 속 그림을 가리켰다. 마침 두 사람이 누운 곳은 집무실 근처였고, 그림이 끝나가는 곳이었다.
‘저 동물들은 골수 귀족이야. 그리고 저 검은 머리 사람은 보레오티고.’
‘옆에 있는 검은 사자는 맹수의 송곳니지요?’
‘맞아, 신이 우리에게 주신 이능이지.’
‘그런데 파르두스는 왜 있는 거예요?’
펠리오가 그림자 속에 있는 점박이 표범을 가리켰다.
파르두스는 본디 초대 황제의 친척 가문이었다. 원래부터 북부에 거주했던 이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초대 공작이 그렸다는 그림 속엔 파르두스가 떡하니 있었다.
‘……알려 줄까?’
디아토르가 험상궂은 얼굴로 씩 웃었다. 펠리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나중에 자신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무서운 얼굴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골수 귀족이거든.’
신이 ‘선택’하신.
디아토르의 귓속말에 아이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딴 미신으로 자신을 놀리는 할아버지에게 무척 실망했다.
‘신 따윈 없어요.’
‘있단다.’
‘어디 있는데요?’
‘바로 저기에.’
디아토르가 그림을 가리켰다.
‘신은 북부 산맥 뒤에 있단다. 이 그림은 보레오티가 신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보여 주는 과정이기도 하단다.’
‘……이기도?’
잠자코 듣던 펠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아토르는 마치 저 그림 속에 또 하나의 비밀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펠리오, 반대로 생각해.’
디아토르의 굵직한 손가락이 그림 속 인물과 동물들이 지나온 길을 반대로 훑었다. 그 말에 펠리오가 상상력을 발휘했다.
북부 산맥으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던 검은 머리 사람이, 북부 산맥에서부터 나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응?’
펠리오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보레오티는 산에서 나왔나요?’
아, 펠리오가 순간 후회했다. 스스로 말하고도 참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이런 건 레지나처럼 머리에 꽃이 가득한 애들이나 할 소리였다.
그러나 디아토르는 펠리오의 말을 비웃지 않았다.
‘저 너머에 사는 신이.’
디아토르는 펠리오의 대답을 살짝 고쳐 주었다.
‘우리를 이곳으로 보냈단다.’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보레오티의 탄생을 담고 있었다.
* * *
“……신이라.”
오랜만에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린 펠리오는 웃음이 나왔다.
단연코 웃음이 나올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은 북부 산맥에 홀로 덩그러니 있고, 바리아는 레무스에게 붙잡혀 이곳 산맥 어딘가에 있으며, 레오니에는 홀로 황궁에서 분투하고 있으니.
그러나 어린 시절의 몇 안 되는 행복한 추억은 신기하게도 펠리오의 걱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디아토르 보레오티는, 즉 펠리오의 할아버지는 그날 이후 몇 달 뒤에 사망했다.
‘어지간히 걱정이었나 보군.’
엉뚱한 괴짜였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가 한참이건만, 여전히 손주가 걱정인지 기억에서까지 튀어나와 펠리오를 다독였다.
신은 너희를 지킬 거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펠리오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이 건넨 위로에 기대기로 했다.
궁에 남은 레오니에는 잘해 낼 거라 믿었다. 그 아이는 저와 함께 이 모든 걸 처음부터 준비해 온 당사자였다. 믿음직스러운 후계자는 오히려 아빠 보란 듯이 해낼 성격이었다.
‘그리고 바리아는…….’
저 위에 있었다.
펠리오는 확신했다. 몸속에 잠든 맹수의 송곳니가 바리아의 배 속에 있는 아기를 느끼는지 제법 선명하게 꿈틀거렸다.
‘아기가 송곳니를 지녔나?’
그럼 큰일인데, 하고 생각한 펠리오가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펠리오는 뼈가 시리는 추위와 희박한 산소로 괴로워하지 않았다. 마치 동네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길을 뛰어다니는 아이처럼 여유로웠다. 물론 그의 걸음걸이는 꽤 다급했다.
‘레오를 빼닮으면 안 되는데.’
펠리오는 어째 둘째가 저나 바리아가 아닌 레오니에를 아주 쏙 빼닮을 것 같은 불안한 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가 근육 명칭이나 은빛 코끼리니, 자줏빛 공작새 같은 부패하고 주접스러운 단어를 옹알거린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일단 바리아를 찾고 나면…….’
펠리오는 딸만큼이나 사고를 치는 아내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검은색으로.’
어떤 색깔의 족쇄가 바리아의 발에 잘 어울릴지. 요 며칠 밖에 나가는 건 불안하다고 붙잡아 뒀더니, 자기 보란 듯이 대형 사고를 친 바리아에게 기가 막히면서도 감탄이 나왔다.
‘안 바쁜 날이 없어.’
펠리오는 하루가 멀다고 시끌벅적한 자신의 가족이 웃기기까지 했다.
‘가족…….’
펠리오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른 ‘가족’이란 단어가 새삼 신기했다.
어느새 그는 산맥 정상에 거의 도달했다.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맹수의 송곳니는 더욱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덩달아 정상을 향하는 다리의 움직임 역시 훨씬 빨라졌다.
그러나 펠리오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어쩌다 이런 가족이 생겼지?’
내가 바리아에게 반해서?
그런데 왜 반했을까.
‘레오와 비슷했어.’
고집 있고, 이상한 면에서 엉뚱하고, 근육을 만지는 손이 범상치 않았지. 한 번 화가 나면 욕도 서슴없이 내뱉고, 주먹도 잘 쓰는 편이었어.
펠리오가 그런 바리아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럼 난 왜 레오를 아끼는 걸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자신이 그 변태를 아끼거나 사랑할 객관적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변태였다. 멀미로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에서도 제 가슴 근육을 희롱했고, 근육 좋은 기사들을 희롱하기 바빴으며, 펠리오의 허벅지며 종아리를 항상 조물거렸다.
거기다 이상할 정도로 남자와 남자를 짝짓는 것도 좋아했다. 펠리오만 해도 루페나 모노, 트라, 하물며 우르마리티 백작이나 파르두스 후작과도 여러 번 얽혔다.
심지어 어렸을 땐 스토커를 만난다고 말까지 몰아 무작정 가출하지 않았던가.
혼을 내도 반성은 죽어도 안 해, 입 거칠기는 사포보다 더하고, 욕은 얼마나 잘하는지 듣는 사람이 장수할 지경이었다.
‘딸만 아니었어도 진짜.’
그놈의 ‘딸’이 뭐라고.
펠리오는 그 욕쟁이 변태를 ‘딸’이란 이유 하나로 인내하고 참아온 세월을 떠올렸다. 어찌 보면 펠리오의 청춘은 온통 육아의 고뇌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행복했지.’
하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그 고통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펠리오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의 인생은 레오니에를 만난 이후에 완전히 바뀌었다.
골치 아픈 날도 많았다. 하나 그 이상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이 더 많았다. 오히려 세상이 의외로 살만하단 생각도 자주 들었다.
내일은 레오와 무얼 할지. 이 간식은 레오가 좋아할지 고민하고. 바리아에게 해 줄 선물을 레오와 고르거나. 반대로 레오에게 줄 선물을 바리아와 함께 고르기도 했다.
펠리오의 삶엔 가족이 가득했다.
그 어느 날, 마차 밖으로 유난히 가족이 많이 보였던 그 거리를 홀로 지켜보던 펠리오에게는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외로웠나 보군.’
그것도 아주 많이.
부끄러운 사실을 인정하는 건 의외로 괜찮은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걸음을 멈춘 펠리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의 눈에 흩날리는 탁한 분홍색 머리가 들어왔다.
“펠리오!”
바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리워했던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그녀의 발밑에는 쓰러진 채 헐떡이는 레무스가 덤으로 있었다.
* * *
암사자는 바리아를 정상까지 안내했다. 바리아는 이상하게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젠 스스로 이상할 정도였다. 그냥 몸이 자연히 암사자를 따라갔다.
‘두려움이 없어졌나?’
아니면 둔감해졌나?
펠리오와 레오니에, 그토록 강한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니 어지간한 일은 이제 심드렁해진 건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웃음이 살짝 삐져나왔다. 정말 배짱 하나만큼은 어느 때보다 두둑해진 듯하다.
하나 뒤에서 끈질길 정도로 자신을 따라오는 레무스의 거친 호흡에 도로 웃음이 사라졌다.
바리아는 제발 중간에 저 숨소리가 끊어지길, 하다못해 쓰러져서 굴러떨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면 마물이 저놈을 먹기라도 할 테니까
그러나 레무스는 정말 악착같이 따라왔다. 그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숨을 헐떡이며, 얼어붙은 팔다리를 삐걱거리면서도 용케 뒤따라왔다.
‘지금이라도…….’
혹여 바리아가 살의를 품고 머뭇거릴 땐, 검은 암사자가 걸음을 멈추고 바리아를 바라봤다. 그래도 바리아가 오지 않으면 아예 곁으로 다가와 주둥이로 몸을 툭툭 건드렸다.
대신 암사자가 레무스를 향해 송곳니를 내밀며 위협적으로 굴 땐 있었다. 정작 레무스는 그런 암사자가 안 보이는 듯했지만.
“……정말 신기해.”
바리아가 손을 내밀자, 역시 암사자는 친근하게 들러붙었다.
“넌 마물이 아니지?”
암사자가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정말 레오를 닮았어.”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가 허공에서 멈췄다.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한 꼬리는 어느새 축 처졌다.
“레오는 내 딸이야. 큰딸.”
바리아는 어느새 자식 자랑이 한창이었다.
“마음씨 곱고 착한 아이야.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 거기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내 자식이지만 감탄할 때가 엄청 많아!”
바리아의 자식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암사자는 귀를 쫑긋거리며 바리아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사실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야.”
바리아가 암사자에게 비밀이라며 속삭였다.
“그래도 난 레오의 엄마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레오는 내게 새로운 기회를 준 빛이거든.”
자신에게 진짜 가족과 행복을 전해 준 신과 같은 존재.
바리아는 항상 레오니에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레지나 님도 그런 레오를 볼 수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당신이 낳은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바리아는 북부에 머물렀을 적에 종종 레지나의 무덤에 찾아가 자랑하곤 했다.
그릉그릉. 암사자가 목을 울리며 바리아의 몸에 제 몸을 비볐다.
갑작스러운 치덕거림에 바리아가 휘청거렸으나 곧 웃으며 암사자를 어루만졌다.
“……아.”
곧 바리아는 정상에 도달했다. 다시 긴장감이 전신을 감쌌다.
북부 산맥의 정상, 산꼭대기 위는 의외로 평평했다. 마냥 뾰족하고 거칠 거라 생각했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하지만 정상 너머.
“……!”
그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바리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내를 마친 암사자는 바리아의 발치에 몸을 기대듯 누웠다. 그러고는 자신들이 올라온 길을 경계 어린 눈초리로 바라봤다.
이제 곧, 저 길로 레무스가 올라올 터였다.
“저, 저게 뭐야……!”
놀란 바리아의 비명에 암사자가 고개를 위로 올렸다.
바리아는 여전히 산맥 뒤의 광경이 만들어 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아득한 북부 산맥 저 너머엔, 아주 어두운 평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 땅엔 산도, 강도, 하다못해 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살고 있었다. 바리아는 그것의 생김새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동물 중에는 저런 생김새를 한 것이 단 한 마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검은 땅 위에서 움직이는 검은 짐승이 매우 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내려다보는 바리아의 눈에도 선명히 보일 정도였으니.
게다가 저 정체불명의 검은 짐승은 하나가 아니었다.
바리아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중, 암사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덩달아 겨우 고개를 돌린 바리아가 암사자를 바라봤다.
암사자는 으르렁, 하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자신들이 올라온 길을 노려봤다.
“허억, 허억……!”
곧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바리아는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산 너머 검은 평원만이 펼쳐진 이 낭떠러지에서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서둘러 생각했다.
지금 상황이라면 제 힘으로 레무스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몸을 격하게 쓰는 건 아주 위험했다.
사실 여태 무사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게다가 몸싸움을 벌였다가 저 밑으로 떨어지면 큰일이었다.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바리아가 이곳으로 저를 부른 목소리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거센 바람 소리가 전부였다.
‘……이 망할 신이!’
바리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신을 도망칠 수도 없는 이곳까지 불러 놓고는, 정작 필요한 순간이 되었는데 아무런 말이 없다니. 심지어 이곳엔 무기로 쓸만한 바위나 나뭇가지도 없었다.
그때, 서리가 낀 듯 흐릿한 붉은 머리가 꿈틀거리며 나타났다.
바리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무사히 올라온 저와 반대로, 레무스는 거의 동사 직전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새하얗게 된 손가락이었다.
‘얼었어.’
바리아는 한눈에 알아봤다. 북부 산맥의 살벌한 추위를 온전히 겪고 있는 레무스는 이미 얼음장이었다.
붉은 머리에는 흰 머리가 난 것처럼 하얀 서리가 꼈고, 바닥을 짚은 손가락은 핏기를 잃어 창백했다. 드러난 피부는 갈라지면서 피까지 났다. 힘겹게 숨이 나오는 코와 덜덜 떨리는 입 주위엔 얼음 결정이 맺혀 있었다.
“…….”
바리아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어떻게 사람이 저 지경이 되어서까지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보통 사람은 북부 산맥에 오르는 것도 못합니다.’
분명 펠리오는 저렇게 말했다. 그래서 보레오티가 겨우내 마물 사냥을 할 때도 기사단은 중간 지점까지만 겨우 올라가고 하산한다고 했다.
그 위로 갈 수 있는 건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뿐이라고.
“…….”
가까스로 정상에 올라왔지만, 레무스는 막 북부 산맥에 넘어왔을 때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숨 쉬는 것도 힘들어 온몸을 비틀기까지 했다.
바리아가 그 틈에 슬금슬금 옆으로 비켰다. 그러자 암사자도 함께 움직였다. 사자는 레무스를 쉴 틈 없이 경계했다. 바리아가 그런 사자의 머리를 살살 만지며 칭찬해 줬다.
‘이게 벌인가?’
바리아는 레무스를 이곳까지 데려온 신의 의중을 짐작해 봤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보아하니 레무스는 딱히 손을 쓰지 않아도 죽을 판이었다.
그러나 바리아의 눈에 비친 레무스는 그리 추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바리아는 새하얗게 질린 레무스의 손끝이 어두워진 걸 발견했다. 몸속 신경이 죽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아마 신발 속 발가락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동상이 심해지면서 신경이 죽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사실 이것도 심각했지만, 실제로 레무스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희박한 공기였다.
추위야 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공기는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사람의 생명을 직접 건드려 위협하는 맹수의 송곳니처럼, 높은 산 정상의 희박한 공기는 레무스의 목숨을 직접 위협했다.
‘이렇게 죽으라는 거야?’
설마 이게 신의 뜻이야?
신이 내리는 벌?
“……고작 이게?”
바리아는 허망한 눈으로 괴로워하는 레무스를 바라봤다.
“말도 안 돼!”
바리아가 소리쳤다.
“어떻게 이딴 게 벌이야!”
신이 존재한다면, 고작 이딴 식으로 레무스를 보내선 안 되었다.
이건 벌이 아니라 자비였다. 레무스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수많은 타인에게 입힌 고통에 비해 너무도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새끼는 그것보다 더 괴로워해야 해! 그런데 고작 이딴 식으로 죽으라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바리아는 이제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눈시울이 빠르게 뜨거워지자, 바리아는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꾸욱 눌렀다.
‘울지 마!’
여기서 울어서 무얼 하겠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잠재운 바리아가 숨을 느리게 내뱉었다.
‘……이게 끝은 아닐 거야.’
어느 정도 진정한 바리아가 다시 한번 더 생각했다.
‘분명 데리고 오게 한 이유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레무스에게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는 암사자가 얌전히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암사자의 태도만 보면 당장 레무스의 목을 물어뜯고도 남을 정도였다.
바리아는 일전에 레오니에한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북부 전설에 따르면, 신은 보레오티에게 특별한 이능을 줄 만큼 이들을 편애했다.
레오니에는 신에게 있어 보레오티는 ‘최애’ 같은 거라고 말했다. 최고로 애정한다는 뜻이었다.
‘…….’
그러나 바리아는 그 이야기에 아주 조금은 회의적이었다.
지금껏 보레오티 가문에 일어난 일들, 하다못해 레지나와 레오니에의 일만 해도 딱히 신의 은덕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의 편애를 받은 것처럼 보레오티는 항상 정점에 머물렀고, 레무스는 황실의 손발이 되어 그런 보레오티가 지키는 북부를 노리고 어지럽힌 죄가 있다.
그러니 신이 레무스를 불쌍히 여겨 봐주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도대체 뭘까.’
의식 없는 레무스를 바라보는 바리아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왜 데려오게 한 걸까.’
바리아의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혹시…….’
산꼭대기 뒤에 펼쳐진 까만 평원을 바라보는 바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데려오라고, 했어.’
귀에 닿았던 목소리는 분명 자신들에게 레무스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북부 전설도 그렇고, 지금껏 겪은 상황만 보더라도 신은 바로 저 까맣고 드넓은 평원에 있는 게 분명했다.
“저기로 굴릴까?”
바리아가 암사자에게 물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암사자는 귀만 부르르 떨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의견을 무시당한 바리아가 퍽 실망하던 차였다.
“……!”
바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와 암사자가 걸어왔던 그 길, 저 아래서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안도감도 함께 느껴졌다. 암사자도 덩달아 꼬리를 흔들며 같은 곳을 바라봤다.
“바리아.”
이름이 불린 바리아는 기어코 눈물을 떨구었다.
“펠리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남편이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갑시다.”
바리아는 두 팔 벌려 저를 안아 주는 남편의 등을 꼬옥 껴안았다. 익숙한 살 내음과 체온에 그만 긴장이 풀릴 뻔했다.
“집에 가면 혼날 줄 아십시오.”
“그럴게요, 엄청 혼날게요!”
“레오한테도 혼날 각오 하시고요.”
“흐윽, 네에!”
딸한테 혼난다는 말에도 바리아는 코를 훌쩍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하나는 씩씩하군요.”
사람 속은 다 썩여 놓고는, 펠리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바리아를 살피는 두 눈과 손은 한없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혹여 어디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는지, 불안하거나 힘든 기색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쉴 틈 없는 움직임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바리아의 무사를 확인한 펠리오는 그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시선을 아래로 슬쩍 피한 바리아가 이내 펠리오를 바라보며 사과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가요?”
“호위 녀석들은 나중에 저한테 죽도록 혼날 예정이고, 인질로 잡혔던 아이들도 무사합니다.”
“레오는요?”
“우리 불효녀는 작위 찬탈하고 아빠를 북부로 내쫓았죠.”
“네?”
두서없는 펠리오의 설명에 바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하지만 흉장을 달고 나갔던 펠리오의 옷에 그 장식이 없었고, 오늘 궁에서 귀족 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떠올린 바리아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했다.
“그럼 당신은 이제 선대 공작이네요?”
“물러난 김에 실컷 놀지요, 뭐.”
잘난 딸 덕에 쉬게 되었다며 펠리오가 씩 웃었다.
“그나저나 저건.”
그러나 눈밭에 쓰러진 레무스를 보기 무섭게, 펠리오가 인상을 험상궂게 찌푸렸다.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펠리오가 구둣발로 쓰러진 레무스를 툭툭 건드렸다. 이 구두는 나중에 버려야겠다 생각하며, 겨우 숨을 내쉬는 레무스를 주의 깊게 살폈다.
레무스는 꽝꽝 언 생선처럼 딱딱했다. 새하얗게 바랬던 손가락은 이제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입 주위는 차갑게 얼어 있었고, 특히 입술이 아주 시퍼렇게 변한 채였다.
‘알아서 죽겠군.’
대충 살핀 펠리오가 단숨에 레무스의 죽음을 예측했다. 그런데 뭔가 석연찮은 점이 펠리오의 머리를 스쳤다.
“이거, 어떻게 여기까지 기어온 겁니까?”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물었다.
“저도 그게 궁금해요. 일단 여기까지 데려오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바리아가 자신이 겪은 것을 펠리오에게 알려 줬다.
어떤 목소리가 레무스를 죽이지 말라고 속삭인 것, 암사자가 나타나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 그리고 레무스가 홀로 여기까지 온 것까지.
“레무스는 이 아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
“정말 착하고 듬직한 아이예요. 솔직히 이 아이가 곁에 없었으면, 전 정말 힘들…….”
“바리아.”
아내의 말을 자른 펠리오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암사자가, 어디 있다는 겁니까.”
“그거야 여기에…….”
제 다리 바로 아래를 가리키는 바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바리아가 설마, 하는 눈으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펠리오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 눈에는 안 보입니다.”
펠리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바리아의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 하지만 분명히 여기 있어요!”
바리아가 몸을 낮춰 암사자를 껴안았다. 암사자는 괜찮다는 듯이 바리아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볐다.
“그대의 말은 믿고 있어요.”
지금 막 바리아의 볼이 살짝 눌리는 걸, 펠리오가 똑똑히 목격했다.
“위험한 존재는 아닐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착한데…….”
“그 사자는, 아마 저 뒤에서 온 것이겠죠.”
“뒤…….”
바리아가 검은 평원을 떠올렸다.
“……신, 말인가요?”
바리아가 암사자를 다시 바라봤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털이 펠리오의 머리칼만큼이나 어둡고 예뻤다.
확실히 그 말마따나 저 뒤에서, 신이 보내서 온 아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아이가 신일 가능성도 컸다.
“그 아이는 신이 아닐 겁니다.”
펠리오가 먼저 그 생각을 부정했다. 그의 시선은 암사자가 있다고 하는 바리아의 텅 빈 옆을 바라봤다. 여전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이겁니다.”
시선을 돌린 펠리오가 다시 레무스를 발로 툭툭 찼다.
“아직도 안 죽었군요.”
“…….”
“이쯤 되면 신이 일부러 살려 두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역시 그런 걸까요?”
바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들이 직접 죽이려고 이러나.”
만약 그런 거라면, 저 너머에 있는 신도 꽤나 지독하다며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지금껏 쭉 지켜본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벌을 내린다고.”
이걸 벌주는 건 보레오티여야 했다.
“펠리오…….”
“신 나부랭이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벌을 주고 싶었으면 일찍이 번개라도 내려쳤어야지.”
펠리오는 레무스의 뒷덜미 옷자락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상체가 억지로 들린 레무스는 신음도 제대로 못 냈다.
“그만 돌아…….”
그대로 하산하려던 펠리오가 멈칫하더니 뒤를 휙 돌아봤다.
“갑자기 왜 이래? 응? 우리보고 가지 말라는 거야?”
바리아가 암사자의 목을 끌어안은 채 물었다. 암사자는 그렇다는 듯이 펠리오의 옷을 더 힘껏 물어 당겼다.
“펠리오, 역시 데려가면 안 되나 봐요.”
“…….”
“하지만 계속 여기 있으면 레오가 걱정할 텐데.”
“……나?”
바리아가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찰나, 펠리오가 암사자를 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보, 보여요?”
그러나 펠리오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전혀 생각지 못한 이름 하나를 불렀다.
“……레지나?”
유감스럽게도, 펠리오의 눈엔 여전히 암사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리아가 있다고 말하는 그 사자가 제 옷을 잡아당기는 것만 대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암사자가 자신을 건드린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선명히 떠올랐다.
잊고 산 지가 벌써 십여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펠리오는 확신했다.
“레지나의 송곳니…….”
눈에 보이지 않는 암사자에게서 레지나의 송곳니가 느껴졌다.
덩달아 놀란 바리아가 암사자를 바라봤다. 암사자는 여전히 펠리오의 옷을 물고 있었지만, 그가 가 버릴 생각이 없는 걸 알았는지 슬그머니 턱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바리아가 레무스를 경멸하듯 노려봤다. 레지나는 바로 저 자 때문에 너무도 일찍 눈을 감은 비운의 보레오티였다.
“그래요.”
이 새끼 때문에 죽었죠.
그걸 알아서 더 화가 난 펠리오가 쥐고 있던 레무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레무스는 얼어붙은 생선처럼 딱딱했다. 그러나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분명 죽었어.’
펠리오는 조금 전 제가 느낀 것을 스스로 부정했다. 레지나는 죽었고, 그 유해가 북부로 올라왔을 때 두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다. 유해 옆에는 검은 머리칼도 함께 나왔다. 거기다 레무스의 목걸이까지.
“혹시 보레오티는 죽은 뒤에도 힘이 남아 있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아무리 보레오티가 특별하다 해도, 그들 역시 결국은 인간이었다.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가며, 아무도 모르는 끝을 맞이할 뿐이었다.
할아버지도, 부모님도. 사후에 대단한 현상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인 된 북부 전설에도 보레오티의 사후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전설 또한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오래전 이야기였다.
“……혹시.”
고민하던 바리아가 추측했다.
“송곳니만, 돌아가는 걸까요?”
그 말에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하나 바리아는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며 그 이유를 말했다.
“신이 주신 힘이라면서요. 그러니 죽으면 그 힘이 다시 신에게 돌아가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이 암사자는 정말 레지나 님의 송곳니일지도 몰라요!”
“아니,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던 펠리오의 입술이 멈칫했다. 너무 허황된 추측이라고 반박하려던 펠리오는 도리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빠져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 바로 너머가 신의 영역이었다.
검은 평원을 노려보는 펠리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애초에 그 신이란 존재를 잘 믿지 않았다.
실존 가능성을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보고 겪었음에도 그들에게 단 한 번도 기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믿어야 했다.
“망할 신들…….”
펠리오가 욕지거리를 읊었다. 신을 믿어 보려니,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만약 신이 이 미쳐 버릴 상황에 관여했다면,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각본가였다.
펠리오는 이 모든 게 저 빌어먹을 신들이 유도한 흐름 같다고 느껴졌다.
불현듯 떠오른 추측에 기대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바깥 상황이 어떤지 알면서도 갑자기 답답하단 이유로 뜬금없이 외출한 바리아의 안일했던 행동이라든가.
사나운 마물도 때려잡는 실력을 지닌 글라디고 기사들이 고작 아이 한 명 인질로 잡아 위협하는 범죄자 한 명 제압하지 못한 거나.
때마침 저를 찾아와 작위를 찬탈한 레오니에라든가.
바리아의 이상 행동을 목격했다는 프로보의 증언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그래.’
펠리오가 입가를 비틀었다.
‘아우스트가 이걸 봤군.’
뒤에서 남몰래 반란을 준비한 주제에, 아우스트 공작이 굳이 자신들 세 가족을 불러 예지를 가르쳐 줄 리가 없었다.
공작은 알았던 거다. 자신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갈 거란 사실을.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을 망치는 건 바로 보레오티고, 보레오티 가족이 이곳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 건지도 전부 본 거다.
아우스트 공작이 자신들에게 알려 준 예지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나는 너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전해 주었으니, 남부를 조금 봐달라는 의미였다.
“바리아.”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일전에 아우스트 공작에게서 들은 예지를 물었다. 바리아가 말했다.
“그분은 제 삶을 위로해 주셨죠.”
아우스트 공작은 바리아의 첫 번째 삶을 위로하였고, 새롭게 시작된 두 번째 삶을 축복해 줬다.
“……그리고 당기라고 했어요.”
“당긴다?”
“손에 잡히는 걸 당기라고요.”
이렇게, 라며 바리아가 직접 무언가를 잡아당기는 흉내를 냈다. 그러나 막상 말하는 바리아 역시 표정에 의문이 남아 있었다.
“무얼 당기라는 걸까요?”
“저 새끼 멱살?”
바리아가 아직도 살아 있는 레무스의 목을 가리켰다. 이 정도면 정말 신의 도움으로 숨이 붙어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더럽게 뭐하러.”
펠리오가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바리아도 굳이 레무스의 멱살을 잡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펠리오의 흉쇄유돌근을 만지고 싶었다.
“……내 예언은 오늘 실현되었습니다.”
펠리오는 아우스트의 예언대로 레오니에를 ‘믿고’ 이곳에 왔으니까.
그러니 바리아와 레오니에가 들은 예언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레오는 무슨 말을 들었을까요?”
“어쩌면 내 작위를 찬탈한 게 그 내용일지 모르죠.”
“만약 그렇다면 제가 들은 것도…….”
오늘 이뤄질 가능성이 컸다. 바리아의 표정이 심각했다. 자신이 무얼 당겨야 하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뭘 잡아당기라는 걸까?”
바리아가 암사자에게 물었다.
“혹시 아는 거 있어?”
암사자는 바리아를 물끄러미 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딱히 의미 없는 킁킁거림이 잠깐 이어진 뒤, 암사자는 바리아와 펠리오를 한 번씩 바라봤다.
그러더니 바닥에 몸을 편히 눕혔다.
“지금 사자가 무얼 하고 있습니까?”
“누웠어요.”
“저 새끼 목이나 좀 물어 버리라고 해 보세요.”
펠리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암사자가 정말 정말 레지나의 송곳니라면, 저 암사자 역시 레무스에게 맺힌 원한이 아주 많을 터였다.
으르렁.
그때, 암사자가 아주 짧게 울었다.
와작.
그리고, 정말 레무스의 목을 물어 버렸다.
* * *
“보레오티 공작.”
티그리아 황후가 레오니에를 부르는 덴 의외로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두 아들의 엄마고, 결혼이고 불륜이고 다 해 보고, 나름 연륜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음에도 아주 크고 어진 용기가 필요했다.
“그만두는 게 어떤가?”
“지금 막 그만두려 했습니다.”
사색이 된 귀족들 속에서 홀로 개운한 레오니에가 대답했다.
“내가 분명히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안 죽였잖습니까.”
레오니에가 이것 보라며, 한 손에 들린 커다란 덩어리 하나를 흔들었다. 새빨간 피가 흥건한 덩어리는 마치 사람 같은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숨은 잘 쉬고 있답니다.”
“기절해서 겨우 쉬는 거겠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폐하.”
레오니에가 덩어리를 떨어트리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납치된 어머니가 걱정되는 자식의 불안한 마음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 마음으로 사람도 죽이겠어.”
“그럼 못 죽이나?”
의아하단 듯이 물은 레오니에의 말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우리 엄마를 납치한 놈의 아빠고, 제 아들만큼 지독한 짓을 해 왔는데?”
황후는 자신이 말실수했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도를 넘는 레오니에를 봐주고 넘기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좀 지나치긴 했군요.”
다행히 레오니에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황후는 내심 속으로 안도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저 미친 맹수 새끼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올로르 자작도 이제 자리에 앉는 게 좋겠어요.”
레오니에가 손에 들린 덩어리를 의자에 앉혔다.
“어이구, 똑바로 앉아야지.”
나이 먹고 칠칠치 못하긴.
레오니에가 힘없이 옆으로 떨어지려는 몸을 도로 일으켜 의자에 기대앉게 했다.
피투성이가 된 올로르 자작은 눈이 새하얗게 뒤집힌 채 기절해 있었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 금이 간 이마 쪽은 퉁퉁 부어 있었고, 옷 여기저기엔 검에 뚫리거나 베인 상처가 빼곡했다.
그렇게 흘린 피가 바닥에 조금 고인 건 애교였다.
“어휴, 내가 이래서 고문이 싫다니까.”
피 튄 거 보라면서, 자리로 돌아가는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역시 고문은 내 취향이 아니야.”
“공작님, 고운 얼굴에 더러운 게 묻었네요.”
보스그루니 백작이 손수건으로 레오니에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줬다. 진하게 묻은 피가 손수건으로 완전히 닦이지 않아 연하게 번졌는데, 도리어 그게 얼굴 혈색을 도드라지게 했다.
“……첫 번째 안건으로.”
황후가 귀족들의 시선을 제게로 모았다.
“이상하게 오래 걸린 기분이지만.”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황후는 어째 이 첫 번째 안건 하나를 끝내는 데만 며칠이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올로르 자작의 작위 몰수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들어 보지.”
곧 거수가 시작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 중, 올로르 자작의 작위 몰수에 찬성하지 않는 거수는 딱 한 명, 바로 기절한 올로르 자작이었다.
“이로써 첫 번째 안건은 통과되었군.”
황후가 서류에 서명했다. 올로르 가문의 작위는 몰수되었다. 이제 자작이었던 올로르는 귀족 회의에 참석할 자격마저 잃어버렸다.
황후가 밖에서 대기 중이던 황실 기사단을 불렀다.
“저 죄인을 밖에 있는 레보오 기사단에게 넘겨라.”
“황실 감옥에 가두시는 게 아닙니까?”
“그들이 황실 감옥에 죄인을 넣을 거다.”
어느 귀족의 물음에 황후가 코웃음을 쳤다.
“……물갈이를 해야지.”
너희도.
그 말에 황실 기사단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인의 입김이 너무 들어간 황실 기사단 역시 황후에겐 똑같은 족속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올로르의 추천을 받은 기사들이 많은지라 그들에게 죄인 이송을 맡겼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잘들 감시해요.”
레오니에가 밖에 있던 제 호위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죄인 올로르가 질질 끌려 밖으로 나간 뒤. 귀족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뒤이어 나오는 안건들은 속전속결로 해결되었다. 2황자의 황태자 책봉 인정, 황후의 대리청정까지 수월하게 통과되었다.
“…….”
회의가 끝에 가까워질수록, 레오니에의 마음도 덩달아 성급해졌다. 팔짱 위에 걸쳐진 손가락이 미친 듯이 까딱거렸다.
애써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레오니에의 두 눈이 창밖과 문을 빠르게 번갈아 봤다.
“……그럼 마지막 안건도 통과됐으니.”
황후가 마지막 안건 서류에 서명하며 말했다. 긴장감으로 꽉 졸려 있던 회의실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렸다.
“회의를 이만 마치도록 하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지켰다.
“보레오티 공작.”
그대로 돌아서려던 황후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아무래도 급한 용건이 있는 것 같던데.”
“…….”
“먼저 나가 보게.”
황후가 활짝 열린 문 옆으로 몸을 비키며 말했다.
“펠리오를 부탁합니다.”
카니스가 레오니에에게 부탁했다.
“가족들 전부 무사히 오셔야 합니다.”
진심 어린 부탁에 레오니에가 그러겠다며 싱긋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다며, 레오니에가 카수스 궁을 먼저 나섰다.
뒤에서 황후가 ‘무사히 안 오면 올로르는 여기서 끝낼 거다!’라는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빨리 가야겠어.’
레오니에의 발걸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수비테오 황제의 목숨도 빼앗겼는데, 올로르까지 놓칠 순 없었다.
카수스 궁을 나가자, 하얀 제복을 입은 레보오 기사단이 고개를 짧게 숙였다. 레오니에는 제 호위기사들과 함께 그들을 지나쳐 북부 게이트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가면 됩니다.”
길을 외워 둔 프로보가 앞장섰다.
“보레오티 공작.”
그때, 누군가가 레오니에를 불러세웠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은발의 청년이 숨을 작게 헐떡이며 다가왔다.
“게이트로 가시는 것이지요?”
“그것 때문에 제가 지금 갈 길이 좀 바빠서…….”
“제가 지름길을 압니다.”
지금 가는 길보다 더 빠른 길이 있다며, 은발의 기사가 저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믿어도 되나요?”
레오니에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제가 당신께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은발의 기사가 손목에 찬 시계를 소중히 감싼 채 말했다.
“……레비페스 경!”
레오니에가 멜레스에게 명했다.
“나는 이 기사와 함께 가겠다. 그대는 궁에 남은 글라디고 기사단을 모아 북부 게이트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의원도 부르겠습니다.”
멜레스가 돌아올 바리아의 상태를 염려해 눈치껏 답했다.
“부탁해요, 언니.”
레오니에가 여느 때처럼 친근한 말투로 말했다.
“이쪽입니다.”
은발의 기사가 길을 안내했다. 레오니에는 왔던 길을 다시 뒤돌아 나무가 우거진 샛길로 향했다.
“프로보 오빠가 안내한 길이 틀린 건가요?”
레오니에가 점점 수풀로 우거지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요, 그 길도 맞는 길입니다.”
카수스 궁에서는 그쪽으로 가는 방향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기사가 설명했다.
“대신, 여긴 게이트 바로 뒤쪽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숲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탓에 길이 험하지만 이쪽이 더 빠릅니다.”
“잘 아네요?”
“괜히 여기서 산 게 아니니까요.”
은발의 기사, 스칸디아 황녀가 앞에 난 가지를 치며 대답했다. 앞서가는 황녀의 발치로 뾰족한 가지가 툭툭 떨어졌다. 뒤따라 가는 레오니에는 덕분에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간 잘 지냈어요?”
레오니에가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스칸디아 황녀는 퍽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잘 지낸 것 같습니다.”
“잘 지냈으면 잘 지낸 거지, 뭐가 또 그런 것 같아요.”
대답이 마음에 안 든 레오니에가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황녀는 투덜거리는 레오니에의 모습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입술을 삐죽이며 재잘재잘 떠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제 뒤통수를 노려보는 모습이 어쩐지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잘 지냈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님이 잘 보살펴 주셨거든요.”
“그럼 다행이고요.”
레오니에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엔 황녀가 안부를 물었다.
“공작께선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어요.”
오늘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덧붙이는 레오니에의 대답이 꼭 욕설처럼 들렸다. 스칸디아 황녀는 레오니에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나랑 있어도 괜찮아요?”
레오니에는 새삼 크리세토스 황자가 걱정이었다.
“메리디오가 황자 전하를 죽이려 들 텐데?”
“형님은 괜찮습니다.”
황자궁엔 티그리아 황후가 보낸 엄선된 레보오 기사들이 있었다.
“거기다 할아버님과 아버지도 계시고요.”
“아아, 어쩐지 회의실에 헤스페리 후작이 안 보인다더니.”
레오니에가 적당히 놀라는 척했다. 회의 내내 황후가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기에 황후궁에 강한 기사 몇몇을 보냈나, 싶었다. 하지만 그 기사 중에 이벡스가 있을 줄은 몰랐다.
“형님과 아버지는 사이가 좋습니다.”
“오, 그래요?”
오히려 레오니에는 그 사실이 더 의외였다. 황녀 말로는 둘은 이미 서로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벡스 경은 속도 좋지.’
레오니에가 빈정거렸다. 하지만 친자식이 아닌, 그것도 올로르의 피가 흐르는 저를 소중히 여기는 바리아가 떠오르기 무섭게 빈정거리던 자신을 반성했다.
“……가족은 핏줄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요.”
피가 통하지 않아도 행복한 가족은 많았다.
‘내가 그렇잖아.’
펠리오와는 원래 삼촌 조카 관계고, 바리아와는 완전히 남남이었다. 그래도 셋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레오니에는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제게 주는 애정과 관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 둘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진실하다고 확신했다.
반면, 오히려 피가 이어진 ‘가족’이란 이름으로 상처를 주거나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멋진 가족이네요.”
레오니에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살짝 삐치려 했던 레오니에는 앞에서 묵묵히 길을 터주는 기사님의 은발 너머로 슬쩍 비치는 두 귀가 빨개진 걸 보자마자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아오, 상황만 안 이랬어도.’
놀리기 딱 좋았기에 더욱 아쉬웠다.
“여깁니다.”
황녀가 숲 옆을 가리켰다. 보레오티가 두려웠던 황실이 아예 황궁 안에 숨겨 뒀던 탓에, 북부 사람들은 건국 이후 한 번도 이용하지 못한 북부 게이트였다.
“어지간히 꽁꽁 감췄네.”
게이트 앞에 선 레오니에가 게이트 주위를 둘러봤다. 황실 기사단 건물이 바로 근처였다. 언제건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할 수 있게끔 고려한 위치 같았다.
‘그렇게 보레오티가 무서웠으면 차라리 북부 게이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궁을 지었으면 좋았을 텐데.’
괴로운 걸 즐기는 변탠가? 레오니에가 황실 대대로 이어졌을지 모를 변태 취향에 질색하던 찰나였다.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스칸디아 황녀가 물었다.
“아니요.”
레오니에가 곧장 답했다. 망설임 없는 답변에 황녀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내 대답을 오해하지 마요.”
왜 또 그리 귀엽게 풀 죽었느냐며, 레오니에가 황녀의 팔뚝을 툭툭 치며 말했다.
“당연히 혼자보다 둘이 낫죠. 내가 아직 우리 기사님 실력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주 강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아요.”
“그럼 왜…….”
“안 데려가는 게 아니에요.”
레오니에가 대답을 정정했다.
“못 데려가는 거지.”
정황상 부모님과 레무스 올로르는 북부 산맥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선 이 게이트를 통해 북부 산맥에 있는 다섯 번째 게이트로 가야 했다.
“그거 알아요?”
레오니에가 짓궂은 목소리로 비밀을 속삭였다.
“사실.”
다섯 번째 게이트는 없어요.
황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눈꺼풀마저 느리게 깜빡거렸다.
“……게이트가, 없단 겁니까?”
“저걸 봐요.”
레오니에가 눈앞에 있는 게이트를 가리켰다. 황녀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보통은 이렇게 휘어진 기둥 두 개 사이를 지나가잖아요?”
“각 지역의 게이트는 다 그렇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북부 산맥에 있는 다섯 번째 게이트는 형체가 없어요.”
기둥도 없고, 기둥이 있었던 흔적도 없다.
그곳에 있는 거라곤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들뿐이었다.
“보통 사람은 그곳에 가지도 못할뿐더러, 간다 한들 바로 얼어 죽어요.”
다섯 번째 게이트가 위치한 곳은 북부 산맥 정상 언저리였다. 글라디고 기사단이 아무리 준비해서 올라가도 중간 지점이 한계란 걸 생각하면, 그곳은 사람이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물론 난 가능하지만요.”
그 증거로 레오니에가 맹수의 송곳니를 아주 살짝 꺼냈다. 검은 두 눈 위로 피어오르는 황금빛 안개에 주변 공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맹수의 송곳니를 처음 겪어본 스칸디아 황녀는 쉬이 입을 뗄 수 없었다. 아기 앞니보다 작고 앙증맞은 힘만으로도 목숨이 덜컥 붙잡혀 죄이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황녀는 자신이 같이 가 봐야 방해가 될 거란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게 의외로 슬펐다.
“전 항상 도움만 받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늘 짐처럼 남아 있던 고마움과 미안함을 드디어 처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욱 커졌다.
‘……내가 뭘 해 줬지?’
정작 레오니에는 황녀를 놀리고 희롱했던 것만 떠올라 당혹스러웠다. 기껏해야 나중에 근육 풍성한 은발의 미남이 될 것만 알고 약간 친근하게 대한 게 전부였다. 오랜만에 양심이 아팠다.
“뭐, 어쨌건!”
도로 양심을 치워 버린 레오니에가 황녀의 처진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쑥 올렸다.
“금방 다녀올 테니 마중이나 해 줘요.”
그 예쁜 얼굴을 잘 써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전 별로 안 예쁩니다.”
“예쁜데요?”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었으면 스칸디아 황녀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겁게 놀고 싶을 정도였다. 착실하게 자라고 있는 근육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었을 테고.
정작 황녀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공작이 더 아름답습니다.”
황녀가 레오니에의 두 눈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
레오니에는 쉬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 능청스럽게 내뱉지도 못했다.
“……다녀올게요.”
기어코 무뚝뚝한 인사 한마디만 남긴 채, 레오니에는 게이트로 넘어갔다.
그러나 스칸디아 황녀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높이 묶은 머리 탓에 훤히 드러난 레오니에의 새빨간 목덜미와 두 귀가 무척 귀여웠으니.
* * *
“빌어먹을 올로르.”
게이트를 넘기 무섭게, 레오니에가 욕을 퍼부었다.
“분위기 진짜 좋았는데!”
씩씩거리며 험준한 북부 산맥을 오르는 레오니에의 모습은 한 마리의 마물이나 다름없었다. 흉악한 마물조차 지금의 레오니에와 마주친다면 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 정도였다.
“잡히면 전신에 난 털은 다 뽑아서 도로 꽂아 버릴 테다!”
저의 달콤할 뻔한 시간을 방해한 올로르에게 한참 저주를 퍼붓던 레오니에가 슬쩍 고개를 올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산맥 정상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빠랑 엄마.’
자연히 떠오르는 부모님의 얼굴에 씩씩거리던 아이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낯선 기운이 레오니에의 심기를 건드렸다.
‘……누구지?’
아기 맹수가 솜털을 바짝 세웠다.
‘맹수의 송곳니가 하나 더 있잖아.’
처음 느껴 보는 낯선 것에 자연히 경계심을 세우고 가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설마 레무스가 송곳니를 얻었나?’
그럴 리가 절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오니에는 괜히 찜찜했다. 일단 저 위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운이 맹수의 송곳니와 똑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 꺼림칙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따금 난폭한 살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레오니에는 이걸 ‘적’으로 인식해야 하는지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일단 올라가자.’
올라가서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레오니에가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정상은 이제 곧이었고, 그와 동시에 펠리오와 바리아의 기척도 점점 가까워졌다.
부모님의 무사에 안심하던 찰나.
와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레오니에의 두 귀에 선명히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레오니에가 허겁지겁 달렸다. 그러다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으나 곧장 일어나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엄마, 아빠!”
정상에 도착한 레오니에가 드디어 부모님의 무사한 상태를 확인했다.
“와, 씨 봐! 저거 뭐야!”
그러곤 눈 앞에 펼쳐진 괴상한 장면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레오!”
“다가가면 안 돼!”
펠리오와 바리아가 잽싸게 아이를 자신들의 품에 가뒀다. 양쪽으로 압박하는 부모님의 가슴에 레오니에가 꾸엑,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얼굴을 두 손으로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다친 곳은 없는 여기저기 살폈다.
피가 흠뻑 묻은 아이의 옷에 깜짝 놀랐지만, 상처 하나 없는 걸 깨달은 뒤에 나온 한숨이 겨우내 마지막 잎새처럼 파르르 떨렸다.
“엄만 괜찮아?”
“응, 엄만 괜찮아.”
“정말 다행이야. 나중에 내가 집에 가면 엄청 혼낼 거거든.”
레오니에도 크게 안도했다. 반면 바리아는 살짝 풀이 죽었다.
“떠드는 건 나중에.”
펠리오가 두 사람에게 가볍게 주의를 줬다. 그래도 그 역시 다치지 않고 자신들에게 와 준 딸에게 고맙고 기쁜 마음이었다.
“저건 도대체 뭐야?”
레오니에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암사자를 노려봤다. 정상에 발을 디디자마자 아이의 눈에 들어온 건, 쓰러진 레무스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검은 암사자였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커질수록 새하얀 눈밭이 선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레오, 넌 사자가 보이니?”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그럼 안 보여? 저렇게 살벌하게, 아니, 잠깐!”
레오니에가 당황하며 암사자에게 소리쳤다.
“죽이지 마! 저건 우리가 죽여야 해! 우리 몫이라고!”
레오니에는 혹여 레무스의 목이 떨어져 나갈까 걱정이었다.
“소금에 절여서 젓갈로 만든 다음에 제 애비한테 먹여야 한단 말이야! 으아, 거세도 내 몫이니까 깨물지 마!”
요란스러운 아이의 걱정에 암사자가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레오니에를 지그시 응시했다.
“……뭘 봐, 팍!”
아직 암사자를 향한 경계를 풀지 않은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흥분하는 딸의 머리를 다독이며, 바리아가 그 틈에 물었다.
“펠리오, 지금은 보여요?”
“난 아직도 안 보입니다.”
펠리오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보이는 건 여전히 없었고, 가끔 암사자가 흥분하면 레지나의 송곳니가 조금씩 느껴지는 게 다였다.
레무스를 입에서 떨어트린 암사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다가오는 사자를, 레오니에가 잔뜩 경계하며 노려봤다.
정작 암사자는 그런 레오니에를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몸 여기저기에 코를 가져가며 킁킁거렸다.
“……이 사자 진짜 뭐야?”
레오니에가 마구 몸을 비비적거리는 암사자를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왜 얘한테서 맹수의 송곳니가 느껴지는 거야?”
“다른 건?”
펠리오가 조금 성급하게 물었다.
“다른 건 안 보이고?”
“어? 어어…….”
레오니에가 제 턱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암사자를 세밀히 살폈다.
“눈이 초록색? 연두 같기도?”
그 말에 바리아가 펠리오를 바라봤다. 하늘색 같다는 레오의 말에 펠리오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으악, 무거!”
암사자가 번쩍 일어서더니 앞발로 레오니에의 어깨를 끌어안듯 덮쳤다. 내려찍는 앞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레오니에가 발라당 넘어졌다.
“세상에, 어떡해……!”
이를 보는 바리아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큰거리는 눈 주위로 물기가 잔잔히 어렸다. 암사자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펠리오마저도 마음이 복잡했다.
“둘 다 보지만 말고 도와줘!”
반면 암사자에게 깔린 레오니에가 눈이 덮인 바닥을 손으로 팡팡 치며 구조 신호를 보냈다.
가까스로 혼자 벗어난 레오니에가 숨을 돌리던 찰나, 암사자가 다시 몸을 일으켜 레오니에의 얼굴을 날름 핥았다.
“왜, 왜 이래? 잠깐 떨어…….”
으읍, 으읍, 레오니에가 입술을 꾸욱 다문 채로 제 얼굴을 마구 핥는 암사자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버둥거렸다.
“네가 좋은가 보다.”
“조금만 더 가만히 있어 줘.”
펠리오와 바리아가 버둥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고정해 암사자 가까이에 대줬다.
“이거 놔! 놔아!”
지독한 배신감에 레오니에가 치를 떨었다.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충신처럼 저항했지만, 레오니에는 결국 암사자의 격정적인 애정을 온몸으로 받아 버렸다.
암사자가 떨어진 뒤, 레오니에의 얼굴은 침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내 입술…….”
침울해진 아이는 훌쩍거렸다. 언젠가 마음에 드는 근육에게 입 맞추려고 고이 간직한 저의 첫 입술 뽀뽀를 저런 정체도 불분명한 암사자에게 빼앗겼단 사실이 슬프고 억울했다.
“효도했다고 생각해.”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게 무슨 효도야! 둘 다 나한테서 뜨거운 불효 맛 좀 볼래?”
“집에 가면 기사들 상반신 나체와 허벅지 아래 근육까지 허락해 주마.”
“실은 엄마가 서점에 주문한 책, 레오 너 주려고. 두 남성의 애절한 우정을 빙자한 염정 소설…….”
“성심성의껏 효도하겠습니다!”
레오니에가 아빠 옷에 침을 벅벅 닦으며 효심을 불태웠다.
“이게 효도냐…….”
펠리오가 침 범벅이 된 옷을 못마땅한 눈으로 힐끔거렸다. 바리아가 그런 펠리오의 팔을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가?”
치근덕거리는 암사자를 끙끙거리며 막던 레오니에가 물었다.
“집에 가자, 나 피곤해.”
아이는 당장 이 피범벅인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싶었다. 레오니에가 그런 간절한 바람을 담아 쓰러진 레무스를 욕했다.
“하여튼 저 쥐뿔보다 작은 새끼가 꼴에 하반신으로 지랄을 부려서 이 사달을…….”
“레오!”
펠리오가 소리쳤다.
“난 뭐 욕도 못해?”
억울한 레오니에가 따지려던 차, 바리아가 서둘러 아이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그제야 레오니에는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레오니에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움직였어…….”
바리아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레무스를 가리켰다. 암사자에게 전신을 뜯긴 레무스가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레무스는 어딜 보아도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암사자가 물어뜯은 목에선 여전히 피가 흘렀고, 심지어 송곳니에 꿰뚫린 구멍까지 선명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괴기한 소리가 났다. 추위에 굳어진 뼈와 근육을 억지로 움직인 탓이었다.
암사자에게 물린 곳은 흉측했고, 옷도 여기저기 찢어졌다. 추위에 언 손가락은 이제 새까맣게 변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도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그런데도 레무스는 움직였다.
두 발로, 스스로 선 채.
흰자가 도드라진 눈에 섬뜩한 총기가 머물렀다.
“……하하.”
레오니에가 굳어지는 입가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저 새낀 도대체 뭐야?”
“레오, 물러서.”
펠리오가 아이를 뒤로 숨겼다. 레오니에는 머뭇거리다 슬그머니 물러섰다. 천하의 아기 맹수도 레무스가 섬뜩했다.
‘무서운 게 아니야.’
그저 가까이하기 싫은 혐오감이라며, 레오니에가 괜히 변명했다. 아무리 마나니 오러니 비과학적인 현상이 자연스러운 세상이라고 해도, 저건 도저히 납득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때, 암사자가 으르렁거렸다. 발톱을 세운 채 몸을 웅크리며 다시금 레무스에게 덤비려던 찰나.
[안 돼.]
소리 없는 명령이 암사자의 귀를 간질였다. 암사자가 슬쩍 위를 올려다봤다. 펠리오와 바리아, 레오니에 셋 다 긴장감 어린 눈으로 레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을 지켜야지.]
그게 조건이잖아.
세 보레오티 중 누군가의 손이 암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다 끝나가.’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소리 없는 목소리가 암사자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암사자는 레무스를 겁에 질린 눈으로 노려보는 바리아를 힐끔 보았다.
초록색 눈에 검은 안개가 흐릿하게 낀 바리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 * *
암사자가 레무스를 물던 순간.
전신이 얼어 가며 의식을 잃어 가던 레무스의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시끄럽게 떠드는 보레오티의 소리가 들렸고. 제 피로 물든 선홍빛 눈밭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가 선명히 보였다. 동시에 몸속 어느 깊숙한 곳에서부터 열이 슬금슬금 퍼져 나갔다.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가 기어코 통각이 사라진 손가락까지 따뜻한 기운이 퍼져 갔다.
“……이거야! 이거였어!”
제게 찾아온 미지의 힘에 감탄한 레무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괴이한 웃음을 토했다. 까맣게 썩은 손가락이 서리 낀 붉은 머리를 뻣뻣하게 빗어 넘겼다.
“전설은 진짜였어!”
웃음을 멈춘 레무스가 보레오티 세 가족을 휙, 돌아봤다.
“손에 들어왔어, 그 힘이 내 손에!”
부릅뜬 레무스의 눈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상처에서 난 피가 우연히 눈가에 맺혀 눈물처럼 보였다.
“……엥?”
레오니에의 동그란 눈이 찡그려졌다. 다행히 어처구니없어하는 레오니에의 짧은 말이 레무스에겐 들리지 않았다.
“맹수의 송곳니를 손에 넣었다!”
지금의 레무스에겐 혹독한 바람 소리도, ‘저거 진짜 미쳤나 봐.’라며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는 레오니에의 비아냥도 들리지 않았다.
반면 펠리오는 레무스를 하염없이 주시했다. 하나 그 역시 레오니에처럼 한쪽 눈을 찌푸리며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데?”
레오니에는 레무스에게서 어떤 힘도 느끼지 못했다.
“아빠도 그렇지?”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래…….”
펠리오 역시 레무스에게서 맹수의 송곳니를 감지하지 못했다. 정작 맹수의 송곳니가 감지되는 건 자신들의 곁에 있는 검은 암사자였다. 하나 레무스를 노려보는 시선만큼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다 죽어 가던 인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힘을 얻었다고 소리치는 상황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레무스가 맹수의 송곳니를 손에 얻는 편이 훨씬 나을 정도였다. 적어도 어떤 연유로 강해졌는지 원인을 알고 대처할 수 있으니까.
“……아아, 알 것 같아.”
레무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잔뜩 고양된 감정을 따라 레무스의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히죽거렸다. 바싹 말랐던 입술이 억지로 늘어나더니 툭툭 소리와 함께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레무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한껏 더 경계심을 높였다.
그 반응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레무스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찢어진 입술에서 떨어지는 피가 괴기함을 더했다.
‘사우라…….’
레오니에는 레무스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광기가 사우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와 고아원 아이들을 속여 ‘코니에’로 살았던 사우라에게서도 저런 사람 같지 않은 섬뜩함이 느껴졌었다.
‘반할 만했네.’
끼리끼리였어.
레오니에는 이제야 사우라가 왜 레무스에게 푹 빠졌는지 알았다. 사우라나 레무스나 둘 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쓰레기였고, 특히 레무스는 그 정도가 훨씬 지나쳤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레무스가 장난꾸러기처럼 물었다.
“나에게도 맹수의 송곳니가 생겼으니, 나도 보레오티가 된 건가? 그럼 우린 가족인 거야!”
“저 미친놈이 뚫린 입이라고……!”
근육 풀린 괄약근처럼 지랄이라며 오만상을 찌푸리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앞에 손을 뻗었다.
레오니에가 저를 가로막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려 아빠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당혹감과 긴장감이 감돌던 펠리오의 검은 눈에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아!’
펠리오의 의도를 깨달은 레오니에도 맹수의 송곳니를 꺼냈다. 황금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레오니에의 두 눈이 레무스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가.”
레무스는 의아하단 눈으로 펠리오와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살짝 목을 기울이자, 시커멓게 썩어 가는 피부가 고스란히 보였다.
“왜 이런 힘을 지니고도 제국을 지배하지 않는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다고.”
펠리오가 피식거리며 비웃었다. 살짝 울컥한 레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새끼!”
그러다 갑자기 발작 같은 웃음을 토하며 눈을 크게 떴다. 뒤통수를 한 대 치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뜬 레무스가 침 같은 피를 토하면서 말했다.
“이 힘은 모두를 지배하고 발밑에 무릎 꿇게 할 수 있는데!”
“취향하곤.”
저급하기 짝이 없는 레무스의 표현에, 불쾌감이 펠리오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게 자신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레무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 뭐야.’
그 말에, 레오니에의 눈에는 실망감이 설핏 떠올랐다.
‘곧 죽을 악당 대사잖아!’
자신이 기억하는 원작 내용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레오니에는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흐름상 원작의 완결과 비슷하단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레무스는 지금껏 경험한 사람 중 가장 지독하고 끈질긴 적이었다. 그런데 고작 저런 유치한 대사를 해 버리다니. 레오니에는 전신에 꽉 주고 있던 힘이 스르륵 풀릴 것 같았다.
‘적의가 사라졌어.’
이는 펠리오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도 저런 수준 낮은 말이나 내뱉는 놈한테 시간을 잡아먹히는 제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맹수 부녀의 변화를 눈치챈 레무스가 괜히 소리 질렀다.
“그 건방진 눈초리는 뭐야! 지금 네 놈 새끼들이 처한 상황이……!”
“그건 내가 할 소리야.”
기어코 푸욱 한숨을 내쉰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레무스를 가리켰다.
“네가 처한 상황을 봐.”
순간, 땅 위로 무수한 얼음 가시가 마구잡이로 용솟음쳤다. 레무스는 비명을 지르며 제게 쏟아지는 얼음 가시 속에 갇히고 말았다.
“힘이 생겼다면 함 빠져나와 보든가.”
팔짱을 낀 채 여유를 부리는 레오니에의 등 뒤로 황금빛 송곳니가 반짝였다.
얼음 가시 속에 갇힌 레무스가 독살스러운 눈으로 레오니에를 노려봤다. 제 피부를 긁고 가둬 둔 얼음 가시를 붙잡고 어떻게든 부수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역시.”
이어 레무스의 눈앞으로 아주 날카롭고 가는 얼음이 뻗어졌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나타난 얼음에 레무스가 바짝 긴장했다.
얼음은 레무스의 눈을 겨누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 지점에서 멈춘 얼음이 겨눈 곳은 레무스의 목 한가운데였다.
“……뭘 한 거야?”
레무스가 으르렁거렸다.
“아무것도.”
펠리오가 붉은 기운이 감도는 손가락으로 얼음을 조종하며 말했다. 그의 등 뒤에는 하물며 송곳니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바리아의 임신으로 송곳니가 본래의 힘을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레무스 한 사람을 죽이는 데는 이 정도의 작은 힘으로도 충분했다.
“죽어 가는 네 녀석이 갑자기 움직이는 이유를,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모르겠다만.”
펠리오가 얼음을 조종하던 손을 활짝 펼쳤다.
“이것 하난 확실하군.”
허공에 뜬 얼음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펠리오의 손바닥 안에 착 들어왔다.
“네 놈에게선, 맹수의 송곳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 말에 레무스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와 얼굴 위로 드러난 한심한 당혹감에 펠리오가 조소를 금치 못했다.
“하물며 ‘공명’조차 없고.”
“고, 공명이라니…….”
“그런 것도 모르면서 우리에 대해 그리 잘 안다고 지껄였나?”
펠리오는 이제 웃음도 안 나왔다.
맹수의 송곳니는 피로써 이어진다는 특징 때문에 유사한 파동을 지니었다. 특히 어린 보레오티일 경우, 부모나 친척 어른의 송곳니에 반응해 저도 따라 발동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항상 검은 눈에 제 송곳니의 색깔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런데, 넌 공명하지 않았어.”
“…….”
“맹수의 송곳니를 몰랐던 레오조차 나한테 이끌려 공명했는데…….”
너는 왜 못 하지?
펠리오는 굳이 그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레무스는 눈치가 좋았고, 펠리오가 하지 않은 뒷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으으, 으아악!”
괴상한 소리를 내는 레무스는 마치 미친 짐승 같았다.
“분명 너에게 무슨 힘이 들어가긴 했는데…….”
가까이서 레무스를 살핀 펠리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무스의 몸은 쓰러져 명을 달리하려던 조금 전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았다.
레오니에의 얼음 가시로 찢어진 옷 사이는 동상으로 새까맣게 썩어들었고, 피비린내와는 전혀 다른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오러도, 마나도.’
하물며 맹수의 송곳니도.
펠리오는 레무스에게서 어떤 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힘을 타고난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치유 속도가 빠르고 훨씬 튼튼했다.
그러나 레무스의 동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졌고, 몸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 덕에 피부가 눈보다 창백해졌다.
‘저 힘은 독이다.’
힘의 정체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펠리오는 확신했다. 저 힘은 레무스를 돕지 않는다.
“아빠!”
확신이 내려진 동시에, 레오니에가 검을 뽑고 달려갔다.
“사자야, 엄마 좀 부탁해!”
암사자에게 바리아를 부탁한 레오니에가 검에 힘을 쏟았다. 황금빛 안개에 휩싸인 검이 반짝였다. 아이의 등 뒤로 아기 사자가 크앙, 목을 울리며 나타났다.
“이제 끝이다.”
펠리오가 얼음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붉은 기운에 휩싸인 얼음에서 파직파직, 매서운 소리가 났다. 얼음은 부서지고 다시 얼기를 반복하면서 더욱 단단하고 거칠어졌다.
붉은 얼음과 황금빛 검이 레무스를 향해 돌진했다.
곧 와장창, 소리와 함께 레무스를 감싼 얼음 가시를 무참히 부쉈다.
“……뭐야?”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펠리오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부녀는 자신들의 무기가 레무스 앞에서 멈춰 버린 이 어이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염없이 힘을 주며 검을 밀어 넣으려는 레오니에의 손바닥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이거 도대체 뭐냐고!”
기어코 레오니에가 소리쳤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레오니에의 칼과 펠리오의 얼음을 가로막았다. 팽팽하다 못해 견고하기까지 한 강대한 힘에 날카로운 얼음 끝이 부서지려 했고, 검이 주체를 못 하고 파르르 떨렸다.
“하하하!”
자신이 죽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던 레무스는 또 한 번 기적처럼 살아남은 자신에게 감탄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냐.”
얼음에 더욱 힘을 주는 펠리오의 등 뒤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반려의 임신으로 잠들어 버린 맹수의 송곳니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모았다.
레오니에도 제 모든 힘을 모아 송곳니를 발동했다. 더욱 선명해지는 황금빛 아기 사자의 몸 위로 붉은 기웃이 덧씌워졌다. 아기 사자는 더욱 포악한 울음과 함께 송곳니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을 가로막는 힘도 강해졌다. 펠리오가 기어코 분노했다.
“레지나 보레오티!”
레오니에는 그제야 암사자가 레무스 옆에서 으르렁거리며 힘을 쏟아 내고 있단 사실을 알았다. 암사자의 위로 떠오른 하늘색 송곳니가 저와 아빠를 가로막는 원흉이었다.
“……뭐?”
레오니에의 눈이 잘게 떨렸다. 아이의 검에 휘감긴 황금빛 송곳니가 일순 출렁거렸다.
퍼뜩 암사자를 돌아보는 레오니에의 얼굴은 경악에 휩싸였다.
“네가, 레지나라고?”
암사자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웅크린 채 으르렁거렸다. 둥근 귀가 살짝 처져 있었다.
‘……아니, 잠깐!’
당황하던 레오니에가 서둘러 이 상황이 이상하단 걸 알아챘다.
‘레지나가 이 정도로 강하다고?’
펠리오는 레지나를 숨기지 않았다. 레오니에가 궁금해하면 알려 주고, 오히려 먼저 레지나에 관해 말해 줄 때도 있었다. 특히 맹수의 송곳니를 다루는 훈련을 할 때 자주 알려 줬다.
‘레지나와 비슷한 점이 많군.’
‘그래도 힘은 네가 더 강해.’
분명 펠리오는 레지나의 힘이 자신들보다 약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레지나로 추정되는 저 암사자가,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힘을 너무도 쉽게 막고 있었다.
‘정말 레지나라고?’
레오니에가 그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려고 입술을 들썩이던 찰나.
“윽!”
“와악!”
매서운 눈보라가 펠리오와 레오니에를 덮쳤다. 마치 개미를 쓸어 버리는 커다란 손처럼 무자비한 강풍이었다.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강한 바람에 기어코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비틀거렸다. 동시에 송곳니가 바람에 휩쓸리듯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의 앞에 레무스는 없었다. 반쯤 부서진 얼음 가시 안엔 레무스가 흘린 피만 얼어 있었다.
그 피들은 얼음 가시를 벗어나 계속 뚝뚝 떨어진 채 이어져 있었다.
부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바리아!”
“엄마!”
뒤늦게 뒤를 돌아본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찾았다.
“아무래도 신은…….”
부러진 얼음 가시를 쥔 레무스가 바리아에게 이를 겨누며 헤벌쭉 웃었다.
“날 사랑하는 것 같지?”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눈보라로 휘청이던 사이, 레무스가 바닥에 떨어진 얼음 가시 조각을 챙긴 채 뒤에 홀로 있던 바리아를 인질로 잡았다.
“저 새끼가 또!”
레오니에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
다시금 손에 쥔 검에 송곳니를 두르려던 레오니에가 당황했다.
“왜, 왜 이래? 또 뭐야!”
맹수의 송곳니가 발동되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몸속에 깃든 송곳니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빠!”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불렀다. 하지만, 펠리오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송곳니가 발동이 안 되어 크게 당황했다. 레오니에가 망연자실한 눈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하나 그건 잠시였다.
둘은 맹수의 송곳니를 빠르게 포기했다. 레오니에는 제 손에 들린 검을 아빠에게 넘겼다.
펠리오가 이를 받았고, 레오니에는 허리에 찬 검집을 뽑아 쥐었다.
둘 다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암사자가 둘의 앞에 끼어들었다. 암사자는 레무스를 등진 채 맹수 부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비켜라, 레지나.”
펠리오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엔 아직 암사자가 보이지 않았으나, 저를 막는 힘에서 레지나의 것이 느껴졌다.
펠리오가 암사자와 대치하는 틈에 레오니에가 옆을 치고 들어가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암사자가 그마저도 막았다. 그 틈에 레무스가 바리아를 끌고 낭떠러지로 갔다.
“레지나가 여기 있나?”
검은 암사자가 보이지 않는 레무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입가에 불쾌한 미소가 걸렸다.
“모두가 날 거짓말쟁이로 몰았지만, 레지나는 죽어서도 날 지켜 주고 있잖아. 내 진심 어린 사랑을 그 아이만큼은 알아 준 거야.”
“사랑이 아니야!”
레오니에가 씩씩거렸다.
“제발 미친 소리 좀 그만해!”
악에 받친 레오니에는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네 끔찍한 죄를 사랑으로 치장해서 레지나에게 떠넘기지 마! 정말 레지나를 사랑했다면 그냥 혀 깨물고 죽어, 좀!”
황실이 오랫동안 북부를 탐했다고 해도. 제국의 시작이 북부를 경계하고 노렸기 때문이래도.
레오니에가 가장 증오하는 존재는 레무스였다. 레무스를 노려보는 레오니에의 눈엔 경멸과 살기가 가득했다.
“……건방진 것.”
그 기세에 움찔했던 레무스가 수치심에 괜히 화를 냈다. 그는 손에 쥔 얼음 가시를 바리아의 목에 더욱 가까이 가져갔다. 바리아의 하얀 목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엄마!”
레오니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겁한 새끼!”
“이건 비겁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야.”
저보다 약한 사람을 인질로 잡아 벗어날 길을 찾는 게 얼마나 대단하냐며 레무스가 자화자찬했다. 심지어 이 모든 걸 레오니에한테 가르치듯 말했다.
“나를 건드리지 마.”
계속 그랬다간 재미없을 줄 알라며, 레무스가 슬금슬금 낭떠러지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바리아를 바닥에 넘어트리며 그 아래로 떨어트리는 시늉을 했다.
“……이야.”
레무스가 킬킬거렸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이겠어.”
레무스가 저를 노려보는 펠리오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간땡이 부은 놈!’
아빠 건드리지 마! 레오니에가 레무스의 도발에 식겁했다. 저놈은 지금 펠리오를 건드려선 절대 아니 되었다.
‘와씨…….’
아이는 차마 옆을 보지 못했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 사랑받은 만큼 싸우기도 하고 혼도 났지만, 지금처럼 분노로 치를 떠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어릴 적에 말 타고 스토커 만나러 갔다고 혼을 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격한 감정이었다.
맹수의 송곳니를 꺼낼 수도 없고, 꺼내지 않았음에도 펠리오에게선 주체못할 살기가 하염없이 내뿜어졌다.
레무스를 노려보는 눈빛은 말 그대로 흉기였다. 손에 쥔 검은 분에 겨워 파르르 떨렸다. 검날 바로 아래 있는 눈밭에 미세한 균열이 날 정도였다.
‘피부가 따가워.’
옆에 있는 레오니에는 이제 숨 쉬는 게 힘들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해.”
레무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은근히 펠리오를 내려다봤던 레무스는 이제야 펠리오란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그는 맹수의 송곳니 따위가 없어도 강한 사람이었다. 펠리오의 오만함은 가문의 배경, 맹수의 송곳니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온전히 펠리오란 인간 그 자체가 완벽하고 대단했기에 자신감이 넘치고 오만했다. 만약 제 손에 바리아가 없었으면 레무스는 스스로 졸도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레무스는 바리아를 놓칠 수 없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해 볼까.”
레무스가 제 품에 조용히 잡힌 바리아를 바라봤다.
“보레오티는 참 신기하군.”
레무스의 목소리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결혼한 것만으로도 눈 색이 변하다니.”
바리아의 눈은 보레오티처럼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 * *
죽어 가던 레무스가 일어날 때, 바리아는 또 피곤함을 느꼈다.
황궁 개구멍을 넘었을 때와 비슷한 피로감이었고, 레무스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던 바리아는 이를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눈꺼풀을 반사적으로 내렸다. 그냥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깜빡임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또 피곤함이 가신 기분이었다.
‘……어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는데, 제 옆에 있던 남편과 아이가 저 멀리에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레오니에는 입까지 쩍 벌리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펠리오마저 드물게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바리아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순진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서리 낀 붉은 머리가 보였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시체보다 창백한 레무스의 얼굴이 떡하니 있었다. 레무스 역시 상당히 의아하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바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꺄아아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바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냅다 레무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예고도 없이 꽂힌 주먹에 휘청거린 레무스가 그만 손에 있던 얼음 가시를 놓쳤다.
“이 새낀 또 뭐야!”
거기서 멈추지 않은 바리아가 발로 레무스의 급소를 찍었다. 일전에 배운 호신술을 알차게 써먹은 바리아는 또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회까닥 눈이 뒤집힌 레무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그는 뒤늦게 급소를 두 손으로 가렸다.
“…….”
“아, 아이고, 엄마!”
느닷없는 상황에 얼이 나간 맹수 부녀가 그제야 후다닥 달려갔다.
“아빠, 엄마 눈이……!”
“그래…….”
수목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진하던 초록색 눈에 검은 안개가 짙게 껴 있었다.
“……그런데 저거, 레오 네가 가르쳤냐?”
“아까 엄마 기술? ‘영곳맞’?”
“그건 또 무슨 이름이냐.”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았습니다.’라는 기술이야!”
레오니에가 자신 있게 기술명을 자랑했다.
“기특한 우리 새끼.”
펠리오는 오싹한 와중에 좋은 걸 가르친 딸을 칭찬했다. 하지만 떠드는 것도 잠시였다. 둘은 또다시 자신들의 앞을 막아서는 어느 힘 앞에 멈춰 버렸다.
레오니에는 암사자를 노려봤고, 여전히 암사자가 보이지 않는 펠리오가 그런 레오니에를 통해 눈치챘다.
“아빠, 정말 레지나 맞아?”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자신이 가진 의문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강했어?”
“무언가가 돕고 있겠지.”
“……신?”
펠리오는 대답 대신 미간을 찡그렸다.
‘바뀌게 될 미래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바이니.’
레오니에가 아우스트 공작이 했던 예언 일부를 떠올렸다.
아우스트 공작의 예언은 산맥 너머에 사는 신들의 뜻이었다. 그들은 무언가가 바뀌길 원했고, 그것을 위해 레오니에가 필요하다고 했다.
‘바뀐 건 원작의 내용.’
수비테오 황제가 주된 악역이 되어 처벌을 받고, 레무스가 보레오티에 저지른 죄는 드러나지 않았던 원작의 내용. 그것은 예언대로 레오니에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바뀌었다.
수비테오 황제는 죽었고, 레무스의 죄는 모두 드러났다. 흑막이었던 우시스 황비의 정체도 밝혀졌다.
‘왜 바꾸려 했던 거지?’
레오니에가 본질을 물었다. 기억 속 원작의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이지만 펠리오와 바리아는 만족했고, 평화롭게 끝을 맺었다.
그런데 이건 평화는커녕 진흙탕보다 더한 싸움으로 바뀌었다.
‘뭘 원하는 거야!’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치고 싶을 정도였다.
“이 망할 년이!”
그때였다. 급소를 제대로 맞아 곧 죽을 듯이 신음을 흘리던 레무스가 검게 썩은 손으로 바리아의 목을 졸랐다.
놀란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뛰쳐나가려 했으나 여전히 앞을 가로막는 힘에 저지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펠리오가 허공을 주먹으로 내려찍었으나 힘은 물러섬이 없었다.
“레지나! 제발!”
레오니에가 암사자에게 외쳤다. 그러나 암사자는 물러섬이 없었다.
“이거 안 놔!”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리아의 목을 죄는 레무스의 까만 손은 신경이 다 죽어 버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랑 비교하면…….’
바리아는 문득 제 첫 번째 삶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때도 레무스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목을 졸랐다. 목을 조르는 살인자의 손은 무자비했고, 바리아는 결국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목을 조르는 레무스의 손은 검게 썩었고, 제게 조금의 아픔도 주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떨쳐 낼 수 있었다.
하나 제 등 뒤로 펼쳐진 낭떠러지 때문에 쉬이 버둥거리지도 못했다. 조금만 눈을 힐끔거려도 보이는 시커먼 평원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저기로 떨어지면 안 돼.’
본능이 알려 줬다. 저 검은 평원은 자신이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당기는 것도 아주 중요하답니다.’
바리아가 흠칫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당겨요.’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목소리에 놀라던 바리아는 문득 제 손이 무엇을 잡고 있는지 살폈다. 레무스의 옷자락이었다.
“……빌어먹을.”
바리아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 망할…….”
그러고는 있는 힘껏 손에 쥔 레무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신 같으니!”
그간 단련한 팔근육을 쥐어짜듯 힘을 내자, 바리아의 몸이 뒤로 휘청거렸다. 옷자락이 잡힌 레무스도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펠리오와 레오니에를 막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바리아!”
“엄마!”
달려나간 둘은 서둘러 떨어지는 바리아를 붙잡았다.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허리를 감쌌고, 펠리오는 그런 둘을 안아 제 쪽으로 당기면서 바리아를 붙잡으려던 레무스의 손에 검을 던져, 그의 한쪽 팔이 검에 뚫렸다. 그러나 또 다른 손이 바리아에게 뻗어졌다.
레오니에가 손에 들린 검집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뭐, 뭐야!”
제 옆을 빠르게 스친 무언가에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그것을 따라 시선을 낭떠러지로 내렸다. 낭떠러지로 뛰어내린 암사자가 레무스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으아아악!”
암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레무스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덕분에 바리아는 무사히 산 정상에 남았다.
놀란 눈으로 펠리오와 레오니에를 바라보던 바리아가 서둘러 시선을 뒤로 돌렸다. 펠리오와 레오니에도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셋은 흠칫했다.
꿀꺽.
땅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형체가 암사자와 레무스를 삼키었다.
“저건……!”
레오니에가 자신들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형체에 기함했다. 검은 평원을 뛰어다니던 아주 크고 기묘한 형상의 동물이 자신들의 코앞에 나타났다.
저 아래 검은 평원에 발을 디딘 동물의 머리는 북부 산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것만으로 저 동물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 사자?”
넋이 나간 아이의 중얼거림에 사자 머리를 한 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자가 아니야…….’
레오니에는 신의 모습을 다시 살펴봤다.
신은 여러 동물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사자의 머리, 순록의 목, 야크의 몸, 흰곰의 다리, 늑대의 꼬리. 그리고, 발치에 난 점박이 표범의 무늬까지.
하나 분명한 건, 눈앞에 나타난 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을 두르고 있었다.
* * *
레오니에는 ‘신’을 알고 있었다.
이미 원작을 통해 알고 있었고, 첫 번째 마물 사냥 때 펠리오가 데려온 이곳 정상에서 그 존재를 직접 두 눈에 담기까지 했다.
하나 원작에서 신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보레오티가 강한 이유가 신의 사랑을 받은 덕분이라는 것과 북부 산맥 너머에 신이 살고 있단 사실만 간단히 언급되었다.
그래서 제 코앞에까지 나타난 신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펠리오와 바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레오티 가족 앞에 나타난 신은 사자의 얼굴이었지만, 갈기가 없었다.
레오니에는 그래서 저 신은 저처럼 아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호기심 많은 새끼 동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신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울대가 꿀렁꿀렁 움직이더니 이윽고 입을 쩌억 벌렸다. 조금 전 레무스와 함께 삼켰던 암사자가 소리 없는 트림처럼 튀어나왔다.
“사자다!”
레오니에가 암사자를 가리켰다. 아이는 암사자의 무사함에 진심으로 안심했다.
“……정말 있었군.”
펠리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그에게도 암사자가 분명 보였다. 그리고 암사자의 푸른 눈도.
‘정말 레지나였어.’
무사히 신의 머리에 착지한 암사자가 전신을 푸르르 털었다. 그러곤 북부 산맥에서 저를 바라보는 세 사람을 내려다봤다.
암사자의 파란 눈이 레오니에를 담았다.
“레오. 한번 불러 봐.”
“기다리는 것 같아.”
펠리오와 바리아가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뭐, 뭘 불러!”
당황한 레오니에가 되었다며 퉁명스럽게 굴었다. 하지만 저를 빤히 바라보는 암사자의 시선까진 무시할 수 없었다.
“…….”
레지나, 라고 이름을 부르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난 진짜 레지나 딸이 아닌데…….’
레오니에는 새삼 자신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펠리오와 바리아의 딸이지, 레지나의 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레지나가 낳은 이 몸의 진짜 주인은 이미 세상에 없기 때문이었다.
속에 든 거라곤 근육이나 밝히는 진성 변태인데, 그런 자신이 레지나를 불러서 무얼 하겠나 싶었다.
‘레지나도 알 거야…….’
암사자가 저와 펠리오를 막을 만큼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신이 도와줬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암사자는 어쩌면 레오니에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뭐냐.”
한참을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조심히 말문을 열었다.
“어어, 잘살고 있어요.”
이 보라며, 레오니에가 제 옆에 있는 펠리오와 바리아를 가리켰다.
“아빠랑 엄마랑 나랑, 이렇게 셋이 잘 지내요. 밥도 많이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꽤 좋아하고…….”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해 줬다.
“그러니까, 그…….”
머뭇거리던 아이가 이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어, 엄마도, 잘 지내요.”
나중에 또 봐요.
“빠빠.”
어릴 적, 레지나의 무덤에 건네곤 했던 짧은 인사를 그대로 흉내 낸 레오니에가 손을 어색하게 흔들었다. 펠리오와 바리아가 잘했다며 아이의 어깨를 감쌌다.
“…….”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암사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푸르른 하늘을 쏙 빼닮은 파란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지자 암사자의 눈동자가 점점 어두워졌다.
마지막 눈물을 흘릴 때, 암사자는 작별 인사 같은 울음을 작게 흘렸다.
이윽고 제 몸처럼 까만 눈을 하게 된 암사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셋을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더니 이내 휙 뒤돌아 신의 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암사자는 평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반면, 신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보레오티 세 가족을 바라봤다. 신은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한 명, 한 명을 빤히 바라봤다.
특히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쿵쿵, 커다란 몸을 망아지처럼 폴짝거렸다.
눈사태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격한 동작인데, 신기하게도 땅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라?”
바리아가 어설피 웃었다.
“약간 레오, 를 닮았나?”
“난 안 저래!”
레오니에가 반박했다.
“북부 광공은 저렇게 촐싹거리지 않아. 내가 얼마나 냉엄하고 무게 있는데!”
“몸무게는 좀 있지.”
그렇게 먹어대는데,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천하의 아빠도 저 밑에 떨어트리면 끝이겠지?”
“변함없는 불효 고맙다.”
“천만의 말씀.”
“칭찬 아니다만.”
“나도 압니다만.”
“아아, 평화롭다…….”
바리아는 남편과 딸아이가 주고받는 말다툼에 드디어 다 끝났다고 안도했다.
한참을 혼자 폴짝폴짝 뛰며 방정을 떨던 신이 평원을 향해 달렸다. 신이 달려간 평원의 끝엔 훨씬 더 큰 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 같았다.
‘가족……?’
레오니에의 눈엔 신들이 그렇게 보였다. 그 두 신도 작은 신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둘 중 하나는 풍성한 갈기가 있었다. 하지만 덩치가 조금 더 큰 건 갈기가 없는 쪽이었다.
부모로 보이는 두 신이 달려오는 아기 신을 맞이했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살뜰히 살피는 모습이 여타 부모와 다를 게 없었다.
레오니에는 그 모습이 꼭 저와 부모님처럼 보였다. 눈을 슬쩍 올려 바라본 펠리오와 바리아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둘은 신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 맹수 가족이 살아요.”
레오니에가 어느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릴 적에 카라가 들려준 북부 민담을 주제로 한 자작곡이었다.
“엄마랑 아빠랑 아기가 오순도순.”
새하얀 눈 속을 어슬렁어슬렁.
맹수들은 산맥 뒤로 폴짝.
“산맥 뒤에는…….”
맹수의 고향.
“돌아갈 고향이, 있어요.”
노래를 다 부른 레오니에는 소름이 돋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저들이, 검은 평원에 사는 신들이 있었다.
그때, 가장 큰 신이 움직였다.
‘수고했다.’
나의 아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