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반란 진압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황실 기사단에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기사는 자신들을 죽이려고 서슴없이 휘두르는 괴한들의 검을 막는 것만으로 지쳐 갔다.
가까스로 겨우 한 놈을 떨어트린 젊은 기사는 빠르게 몸을 추스르며 주위를 살폈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아무리 보아도 숨을 곳이 없었다. 애초에 황궁은 암살자가 쉽게 숨을 수 없는 구조로 지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을 공격하는 저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들어올 틈이 황궁에 있었나 싶었다.
궁은 아비규환이었다. 괴한들은 무차별적으로 기사들을 공격했고, 궁인들은 혼비백산이었다. 기습을 당한 경비병들과 황실 기사들은 저 괴한들을 막느라 필사적이었다.
“막아라! 어서!”
특히 저 괴한들이 황족들의 거처로 향하려는 걸 알았기에 공방은 더욱 치열해졌다.
“으아악!”
그때, 저 멀리서 싸우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갔다. 단순히 쓰러졌다기엔 두려움에 떠는 발악 같은 소리였다.
“올로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을 막아라!”
“반란군들을 제압해라!”
뒤이어 울려 퍼지는 외침은 괴한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이를 주도한 세력의 이름을 크게 밝혔다.
그곳에선 검고 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괴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 반란이라고?”
“올로르가?”
정황상 자신들을 돕는 아군이 등장했음에도, 기사들은 반가워하지 못했다.
황실 기사단 중엔 올로르의 입김으로 들어온 자들이 제법 많았다. 특히 그런 이유로 부당하게 승진해 온 자들은 이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며 식은땀까지 흘렸다.
“우리는 보레오티와 레보오 기사단이다!”
레오니에가 황실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우린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반란을 주도한 올로르를 잡으러 왔다.”
“화, 황제 폐하가 돌아가셨단 말씀이신가요?”
젊은 기사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그는 황제를 찾는 밀명을 받았던 적이 있기에, 황제가 죽었단 소식에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말도 안 된다!”
황실 기사단장이 젊은 기사를 밀치며 격분한 얼굴로 레오니에를 노려봤다.
“올로르가 반란이라니! 그럴 리가 없어!”
“아오, 입 냄새.”
응아를 잡수셨나.
레오니에가 콧등을 찡그리며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이에 기사단장의 얼굴이 수치심에 시뻘겋게 붉어졌다.
옆에 있던 파보는 단장을 동정하면서도 웃겨 미치려는 제 감정을 애써 눌렀다.
욱한 기사단장이 얼굴을 붉히며 검을 쥔 손을 꿈틀거리던 차였다.
“단장님!”
그의 부하 중 한 명이 허겁지겁 다가와 충격적인 소식을 알려 줬다.
“레무스 올로르가 황제 폐하를 시해했단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
“또한 인질로 협박해 공작 부인과 북부 게이트를 통과하였단…….”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보고를 잘라먹은 레오니에가 검등으로 기사단장의 턱 끝을 툭툭 쳤다. 검에 묻은 피가 그의 턱에 난 지저분한 수염을 물들였다.
그 오싹하고 위험한 장난에 기사단장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탓에 수염 서너 가닥이 댕강 썰렸다.
“너도 끝이란 거야.”
기사단장은 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졌다. 황제를 지키지 못한 것도 큰 죄인데, 올로르의 뒷돈을 받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레오니에는 그런 기사단장을 내버려 둔 채 앞으로 나아갔다.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고, 공작 영애!”
조금 전 기사단장에게 밀쳐졌던 젊은 기사가 조심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뭐지?”
갈 길이 바쁜 레오니에가 눈꼬리를 비틀었다. 지금의 저는 ‘공작’이라고 정정해 주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저희는 무얼 하면 됩니까.”
지시를 내려달라며 젊은 기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그의 뒤로 기사 여럿이 함께 있었음을 알았다.
“전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자들입니다.”
멜레스가 설명했다.
지금 레오니에 앞에 모인 기사들은 커다란 꿈을 안고 황실 기사단에 입사하였으나, 올로르를 비롯한 몇몇 가문의 입김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주군,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마누스가 말했다.
“괴한들은 황후 폐하와 2황자 전하를 노리고 있다!”
레오니에가 망토를 휘날리며 말했다. 그 펄럭이는 소리에 기사들의 눈빛이 햇빛을 받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
“그들은 올로르가 키운 사병이다! 만일 투항하는 자가 있다면 포박하여 목숨은 살려 둬라. 그러지 않는다면 죽여도 좋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죽지 마라.”
지시를 마친 레오니에가 멋스러운 미소를 남긴 채 떠났다. 자리에 남은 기사들은 가 버리는 보레오티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크으, 나 좀 멋진 듯!”
그 시선을 느낀 레오니에가 입가를 히죽였다. 자존감 높은 아기 맹수는 자아도취에 빠지기 직전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겨우 자중하는 중이었다.
“원래도 멋지셨답니다.”
“고마워요, 언니!”
레오니에가 멜레스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지만, 언니랑 오빠들은 나중에 아빠한테 반쯤 죽겠지요.”
“굳이 말씀 안 하셔도…….”
“우리 유서 미리 쓸래?”
“저 죽거든 제 근육 그림들도 함께 태워 주세요.”
호위 기사들은 곧 저들에게 다가올 암울한 미래에 일찌감치 자가 성불을 마쳤다.
* * *
메리디오 가문은 본래 아우스트의 가신이었다.
미래를 보는 능력 때문에 여러 곤욕을 당한 아우스트는 점점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주군을 대신하여, 메리디오가 후작위를 받아 남부의 주인 행세를 했다.
그들은 제 주군을 지기키 위해 전문적인 병력이 필요하다 판단했고, 남부 기사단 창설 허가를 황실에 여러 번 요청했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북부와 서부는 각 지역의 기사단을 운영했고, 동부는 기사단 대신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남부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아우스트와 메리디오는 비밀리에 기사단을 창설했다. 기사단은 메리디오가 운영했고, 기사단과 가문은 점점 동화되어 메리디오가 곧 아우스트의 기사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러던 찰나, 젊은 황태자와 악덕 상인의 자제가 아우스트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 사건은 그간 억눌러 온 제국을 향한 분노를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황후가 저기 있다!”
“죽여라!”
메리디오 기사들은 시녀와 단둘이 있는 황후를 발견했다. 그들의 목표는 황후와 2황자의 목숨, 벨리우스 제국의 옥쇄 탈환이었다.
“뒤로 떨어지렴.”
황후의 말에 시녀가 몸을 뒤로 피했다.
“그대들,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
권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메리디오 기사들이 검을 뽑았고, 황후는 안타까워하며 달려오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쯧.”
짧게 혀를 차는 소리를 끝으로, 황후가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푸른 오러를 띤 황후의 몸이 눈 깜빡할 사이에 기사들을 스쳐 갔다.
바닥에 사뿐히 발을 내디딘 황후의 검엔 어느새 피가 흥건했다. 그 피를 떨어트리려고 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동시에, 달려들던 메리디오 기사들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젊은이들이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지.”
황비와의 짧은 우정을 생각해, 최대한 살육은 자제하려고 했던 황후는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어 줬다.
“여전히 근사하십니다.”
피해 있었던 시녀가 황후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대도.”
황후가 피식 웃으며 쓰러진 기사 중 한 명의 등에 꽂힌 단검을 쑥 뽑았다.
“여전히 대단해.”
“제가 아니었어도 폐하께서 먼저 손을 쓰셨을 겁니다.”
“그러기엔 나도 나이가 있어서.”
알아차렸어도 방어하지 못했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죽어 가는 시체 앞에서 다정히 말할 법한 주제는 아니었으나, 황후와 시녀는 봄날에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처럼 즐거워 보였다.
“나들이를 준비하러 간 아이들은?”
“황자 전하께서 계신 궁으로 가셨습니다.”
함께 있던 시녀들은 헤스페리 후작이 몰래 보낸 레보오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크리세토스 황자를 지키기 위해 엄선된 실력자들이었다.
“그럼 우리도 서둘러 갈까.”
티그리아 황후는 귀족 회의에 늦어서야 황후로서의 면목이 없다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쪽이어요!”
그때였다.
“여기에 황후 폐하가 있어요! 폐하의 오러를 느꼈습니다!”
재빨리 몸을 숨긴 황후와 시녀가 소리가 난 곳을 주시했다. 그곳엔 웬 검푸른 머리를 한 꼬마가 메리디오 기사들을 황후가 있는 곳과 정반대인 곳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저 아인…….”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 옷을 입고 있는데, 궁에선 저렇게 어린아이는 고용하지 않았다.
“아기 고양이가 왔네.”
그러나 티그리아 황후는 아는 얼굴인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르티오 후작의 딸이란다.”
“어머, 귀여운 분이시군요.”
“후작이 제 딸도 데리고 왔군. 여기나 저기나 후계 교육 엄하게 하느라 바쁘겠어.”
황후가 흥미로운 눈으로 유니시아가 하는 짓을 훔쳐봤다.
유니시아가 메리디오 기사들을 유인한 곳은 막다른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벽을 보던 기사들은 곧 자신들이 속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유니시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여러분은 방해되는 존재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유니시아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옷만 남겨 두고 갑자기 사라진 아이 때문에 당황한 기사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삐이.
바닥에 널브러진 유니시아의 옷이 꿈틀거렸다. 곧 그 안에서 조그마한 점박이 고양이가 얼굴을 뽁, 하고 내밀었다.
“삐이, 삐이.”
아기 고양이는 통통한 꼬리를 흔들며 삐삐 울었다. 맥이 빠진 기사들은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조막만 한 아기 고양이는 계속해서 울었다.
“삐이이, 삐이…….”
그리고 쩌억.
조그맣던 고양이의 입이 네 갈래로 찢어지더니 목구멍으로 굵고 징그러운 촉수가 튀어나왔다. 찢어진 입술 조각에는 뾰족한 송곳니가 수십 개씩 박혀 있었고, 그 끝에 맺혀 흐르는 침이 바닥에 떨어지자 연기를 뿜으며 부식되었다.
“뭐, 뭐야……!”
“괴물이다!”
“으아아!”
메리디오 기사들이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기 고양이의 입에서 나온 징그러운 촉수들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기사들이 버둥거리며 검으로 자신들을 묶은 촉수를 베어 내려 애를 썼지만, 촉수는 잘리기는커녕 도리어 검을 튕겨 냈다.
쩌억, 쩍, 저어억.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네 조각 난 고양이의 머리가 꽃잎처럼 펼쳐지더니 순식간에 이불보처럼 넓어졌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기사들을 덮쳤다.
“끄아아아!”
처절한 단말마를 끝으로, 메리디오 기사들이 쓰러졌다. 흉측한 몰골을 한 아기 고양이는 곧 원래의 귀여운 모습으로, 그러다가 인간 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아이참.”
유니시아가 투덜거리면서 서둘러 옷을 걸쳤다.
“나는 아직 수련이 부족해.”
어머니처럼 옷을 다 입은 채로 변신하지 못하고, 거기다 환각 마법도 어설픈 점이 많았다며 자기 평가를 냉혹하게 내렸다.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유니시아가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린 티그리아 황후가 어린 후작 영애를 칭찬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이미 황후가 근처에 있는 걸 알았던 유니시아는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서투른 마법이 불만이었다.
“수련이 부족합니다.”
유니시아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무섭게 생긴 공작을 화나게 했다. 소중한 가족이 위험에 처했으니 걱정되는 건 당연할 텐데도 그를 막아 버렸다. 그런 주제에 공작이 무서워서 바지에다 오줌을 지릴 뻔했다.
“……공작 영애는 정말 대단하셔요.”
이젠 그 공작 영애가 ‘공작’이 되어 버렸다. 유니시아는 새로운 공작이 참으로 멋있고 근사하게 느껴졌다.
“공작님은 어른도 아닌데, 어른보다 근사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건 후작이 슬퍼할 말인데…….”
황후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에는 분명 나이가 무색할 만큼 똑 부러지고 강인한 아이지만, 그건 남의 아이니까 그렇게 좋은 점만 보이는 거였다.
만약 친자식이 그랬다간 속에 천불이 나서 매일 침대에 드러눕고도 남았다.
“그래도, 어어, 제가 이분들을 물리쳤어요.”
유니시아가 자신이 해낸 일을 은근슬쩍 자랑했다. 황후는 다음 대 오르티오 후작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환각 마법과 졸음 마법을 응용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은 이대로 잘 겁니다.”
“믿음직스러운 마법사네.”
“그야 어머니와 아버지께 배웠으니까요.”
유니시아가 턱을 높이 들며 자랑했다. 그런 점이 유니시아를 아직 순수한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유니시아가 뒤늦게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황후 폐하, 저는 어머니 대신 황후 폐하를 카수스 궁까지 무사히 모시는 호위 역할을 맡았습니다.”
“오르티오 후작께서 믿음직한 호위를 보내 주셨네요.”
시녀의 말에 유니시아의 입꼬리가 광대뼈를 찔렀다.
“그러게 말이야.”
황후는 제국의 미래가 더욱 밝아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 * *
바리아는 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여, 여긴……!”
새하얀 눈이 발목까지 쌓인 완만한 설원.
그 속에서 바리아는 홀로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바리아가 두려움에 떨며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순간 헛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 몇 개가 피부에 닿자마자 차가운 물방울로 변했다. 그 생생한 감각이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알려 줬다.
‘분명 황궁이었는데.’
그 망할 개구멍을 넘으면서, 어떻게 해야 레무스를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에 눈을 잠깐 질끈 감았더니 이곳 설원이었다.
바리아는 직감했다.
이곳이 북부 산맥이란 걸.
자신이 있는 장소를 겨우 인식한 바리아가 서둘러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반사적으로 올라간 손은 배 속에 있는 아기의 무사를 살폈다. 그런다고 정말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질적인 통증이나 불쾌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단 사실에 크게 안심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바리아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프로보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도 없었다. 인질로 잡혔던 케아 역시 안 보였다.
‘주변을 살펴야 할까?’
하나 바리아는 곧 생각을 철회했다. 이곳이 ‘그’ 북부 산맥이라면, 마물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곳이었다. 무기 하나 없는 자신이 괜히 돌아다녔다가 마물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정말 끝이었다.
북부 산맥에서 벗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은 이것을 버티는 쪽이 더 시급했다.
“……어라?”
그런 생각을 할 즈음. 그제야 바리아는 무언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왜 안 춥지?”
북부는 가을부터 눈이 내리는 추운 지방이었다. 그리고 북부 산맥은 춥기로 악명 높은 북부에서도 가장 악독한 추위를 자랑했다.
북부 저택 창문에서도 보이는 북부 산맥은 사시사철 만년설을 품고 있었다.
그런 곳에 발을 딛고 있는데, 심지어 옷감이 얇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바리아는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피부에 닿는 공기라든가, 숨을 내쉴 때마다 나오는 하얀 입김, 기어코 신발을 적시는 발밑의 눈은 이곳이 얼마나 추운지 알려 줬다.
그러나 바리아는 추위보다 포근함을 느꼈다. 마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바리아는 제 팔 위를 조심조심 더듬어 봤다. 손에 닿은 건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기묘한 감각은 꼭 열 많은 동물 같은 것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것 같았다.
“……!”
그때, 바리아의 눈에 붉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피인 줄 알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나서야 저것이 머리칼이란 사실을 알았다.
바로 레무스였다.
‘저자가 왜……!’
바리아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기억나진 않아도, 분명 북부 게이트를 통과했단 사실 정도는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일전에 북부 산맥과 통하는 다섯 번째 게이트는 오직 보레오티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바리아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배 속에 있는 아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레무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보레오티 한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다.
‘만약 그 전설이 진짜라면, 신이 저자를 어찌 통과시켜!’
큰 충격에 휩싸인 바리아의 눈에 곧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로 레무스가 어린 인질을 위협할 때 쓴 칼이었다. 바리아는 바로 그 칼을 주웠다. 기절한 레무스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죽여야 해.’
여기서 죽여야 해.
생각이 들기 무섭게 바리아가 칼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쉬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지금 저 기절한 모습이 연기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북부 저택에서 근육을 키웠다고 해도 전직 황실 기사였던 레무스를 쉬이 제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바리아는 레무스를 주의 깊게 살폈다.
꽤 오랫동안 보았음에도 레무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따금 바람이 그의 주변에만 매섭게 불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레무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혹시 죽었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바리아가 레무스의 가슴을 보았다. 눈이 드문드문 쌓인 그의 가슴은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기절했어.’
죽었으면 좋았을걸.
바리아는 아쉬웠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다.
곧장 몸을 숙인 바리아가 칼을 높이 들었다. 어디를 찔러야 숨이 단번에 끊어지는지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레무스의 손에 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게 죽이는 게 아깝지만.’
바리아는 레무스가 살아서 끔찍한 죗값을 받았으면 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겐 그딴 걸 재고할 여유가 없었다.
이 자를 죽이고 서둘러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소중한 일상을 떠올리며, 바리아가 칼을 힘차게 내리꽂았다.
그러나 칼은 레무스의 옷 바로 위에서 멈췄다.
“뭐, 뭐야……!”
그 상황에 당황한 건 바리아였다. 그녀는 칼을 쥔 채 파르르 떠는 제 손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분명 온 힘을 담아 칼을 내리꽂았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없었다. 레무스는 사람의 범주를 넘어선 괴물이었고, 그 때문에 너무도 많은 사람이 힘들어했다.
특히 레오니에와 레지나가.
바리아는 다시 한번 더 칼을 높이 들었다. 이번엔 아예 두 손으로 쥐어 힘을 더 실었다. 하나 이번에도 칼은 레무스를 죽이지 못했다.
“제발, 제발, 제발……!”
바리아가 거의 울먹였다. 수도 없이 팔에 힘을 주고, 하다 못에 상체까지 숙여 칼을 가슴에 박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칼은 내려가지 않았다.
칼과 바리아의 줄다리기는 팽팽한 긴장감 따윈 없었다. 이미 칼과 팔이 허공에 그대로 굳어진 채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바리아를 억압했다.
결국 지쳐 버린 바리아가 몸에 힘을 빼 버렸다. 그제야 칼이 움직였고, 바리아는 이를 내동댕이쳤다.
“흑, 흐윽……!”
진이 빠져 버린 바리아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겨우 손에 쥔 기회인데, 자신은 이 기회마저 제대로 쓰지 못했다. 마치 하늘이 레무스를 죽이지 말라고 보호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바리아는 원통한 나머지 눈이 소복한 땅을 주먹 쥔 손으로 쾅 내려쳤다. 모든 것이 억울했다. 이건 정말 하늘에다 무심하다고 욕을 퍼부어도 시원찮은 일이었다.
도대체 이 자가 뭐라고.
내가 그를 죽이는 게 뭐 어떻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리아는 적어도 자신에겐 레무스를 죽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런 놈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딴 게 뭐라고 죽이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안 돼.]
순간,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 바리아가 몸을 떨었다.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서둘러 주위를 살폈지만, 제 주위에 있는 거라곤 망할 붉은 백조가 전부였다.
[죽이면 안 돼.]
목소리는 또다시 바리아에게 말했다.
“……왜 죽이면 안 되나요?”
바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절 방해하지 마세요! 이 자는 절 죽였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한테는 이 자를 죽일 자격이 있단 말이야!”
악에 받친 목소리가 허공을 향해 쏟아졌다. 귓가에 들린 목소리가 광장에서부터 꾹 참았던 두려움과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힘껏 소리를 내지른 바리아가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많이 맺혔구나.’
바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첫 번째 삶에서 자신이 레무스에게 살해당할 때, 자신은 그를 향한 두려움만큼이나 엄청난 살의를 지니게 되었다는 걸.
[안 돼.]
그러나 정체 모를 목소리는 여전히 레무스의 죽음을 용서치 않았다. 단호하기까지 한 어조에 바리아는 좌절을 느꼈다.
[대신 데려와.]
순간 강한 바람이 바리아의 등 언저리로 불어왔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바리아가 작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잘게 깜빡였다. 바람은 모든 걸 포기하려던 바리아의 등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우리에게 데려와.]
눈이 반쯤 감기는 찰나의 순간, 바리아는 그 좁고 흐릿한 시야 너머로 까맣고 작은 무언가를 보았다.
[이 아이를 따라가.]
곧 바람이 잠잠해졌다. 겨우 눈을 뜬 바리아의 눈앞에 나타난 건, 덩치가 제법 있는 암사자였다.
바리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암사자를 보았다. 새끼라기엔 너무 크고, 성체라기엔 아직 작은 암사자는 바리아를 빤히 바라봤다.
그 검은 눈동자는 순진무구하고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맹수답지 않은 순진한 눈망울이, 바리아는 유독 슬프게 느껴졌다.
유난히 깨끗한 검은 눈동자가 꼭 눈물을 머금은 것 같았다. 살짝 처진 둥그런 귀가 안타까워 보였다.
그래서 바리아는 암사자가 무언가를 후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봤다. 자신을 깨물거나 해치지 않을 거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암사자는 한 번도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거나 발톱을 바닥에 긁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예상대로, 암사자는 내밀어진 바리아의 손에 대고 코를 킁킁거릴 뿐이었다. 그러더니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눈을 편안히 감았다.
“…….”
바리아는 그런 암사자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레오?’
딸아이도 어리광을 부릴 때면 항상 이런 식으로 얼굴을 비볐다. 귀여운 고양이 같아서 바리아도 무척 좋아하던 애교였다.
“으으…….”
그때,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흔들렸고, 그곳엔 쓰러진 레무스가 있었다.
바리아가 서둘러 거리를 두었다. 너무 놀란 탓에 그만 칼을 주워야 한단 걸 잊어버렸다. 하나 어차피 저 칼로 레무스를 죽이지도 못하니 쓸모가 없었다.
바리아는 그나마 눈이 저 칼을 뒤덮고 있단 사실에 위안했다. 레무스 또한 칼을 찾지 못할 터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레무스는 눈을 뜨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돌로 머리를 찍을까?’
주위에 널린 게 바위이고 돌이니, 바리아는 레무스가 엉기적거리는 틈에 저놈의 뒤통수를 찍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는 레오니에가 가르쳐 준 기술로, 기술명은 ‘뚝배기 깨기’였다.
“……하하, 하하하!”
괜찮은 돌이 있나 살피려던 바리아가 흠칫했다.
“진짜였어! 진짜였다고!”
몸을 휘청이는 레무스는 주변을 바라보며 광기 어린 웃음을 내질렀다. 바리아는 레무스의 웃음과 함께 튀어나오는 허연 입김이 꼭 독기처럼 보였다.
“북부 산맥이야! 그 전설은 진짜였어!”
하나 레무스의 격렬한 반응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량한 설원을 보던 그는 곧 바리아를 발견했다.
그러자 암사자가 바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처럼 순하기만 했던 암사자의 돌발 행동에 바리아가 당황했다.
그러나 암사자는 레무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에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한껏 경계할 뿐이었다.
“……보레오티는 참 대단하군.”
레무스가 느린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겨우 결혼해서 성씨 하나 바뀐 것뿐인데도 이런 힘을 지니다니.”
“도박에 성공해서 기분 좋겠어.”
바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속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레무스는 그런 바리아를 묘한 시선으로 보았다. 바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하단 듯이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아까는, 뭐였지?”
“뭐가.”
“날 여기로 데려온 너.”
“……글쎄.”
그게 무언지, 바리아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애초에 황궁에 들어온 뒤부터 게이트를 통과할 무렵의 기억 자체가 완전히 암전이었다.
그러나 바리아는 전부 다 계획이었던 것처럼 애써 태연히 굴었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기억이 없는 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레무스를 당혹케 만들었단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점이었다.
“와 본 소감이 어때?”
바리아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앞을 막은 암사자는 여전히 레무스를 경계하고 있었다. 덕분에 얼마나 듬직한지 모른다.
“……황실이, 옳았군.”
한결 가라앉은 레무스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죽은 황제놈이 불쌍하게 되었어. 그렇게 바라던 것을…….”
레무스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입술은 점점 움직임이 줄어들었고, 그의 몸 역시 점점 동그랗게 굽어졌다.
‘추위에 떨고 있잖아……?’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느끼고 있음에도 두 사람의 움직임은 확연히 달랐다.
바리아는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 추위는커녕 도리어 포근하기까지 했다. 몸도 이상할 정도 가벼워 구두만 벗으면 힘껏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레무스는 아니었다. 그는 뼈가 아리는 추위에 몸을 떨었고, 입술조차 얼어 그 잘난 말 한마디 쉬이 내뱉지 못했다. 거기다 숨 쉬는 것도 상당히 힘겨워 헐떡거렸다.
‘여긴 북부 산맥……!’
바리아가 자신이 있는 곳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곳은 보레오티에게 맹수의 송곳니란 이능을 선물한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신은 바리아와 레무스의 입장을 허락했다. 하지만 반기는 것은 오직 ‘보레오티’였다. 바리아는 자신이 제 배 속에 있는 아이 덕에 무사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레무스는 아니었다. 뼈가 아릴 만큼의 추위, 희박한 공기. 그는 북부 산맥의 진정한 혹독함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툭.
묵묵히 이를 지켜보던 암사자가 콧등으로 바리아를 건드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렸다.
바리아가 암사자를 따라 산맥을 올랐다. 바리아는 최대한 낮은 굽의 구두를 신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바리아를 겨우 본 레무스가 욕을 읊으며 힘겹게 뒤를 따라갔다.
바리아가 다섯 걸음을 걸을 때, 레무스는 겨우 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기습당할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한 바리아는 안도함과 동시에, 암사자가 안내해 주는 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 그 끝엔 구름에 가리어진 뿌연 하늘만이 있었다.
‘저기에 있구나.’
바리아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누군가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의 주인이 저 하늘 아래 있음을 알았다.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 바리아의 손에 암사자의 꼬리가 닿았다.
‘……네가 안 보이는 걸까?’
조금 전 보았던 레무스의 행동으로 짐작건대, 그의 눈엔 이 아름다운 암사자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 *
약속된 귀족 회의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
티그리아 황후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고, 잠깐 자리를 비운다던 보레오티 공작 역시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리 안 오시지?”
“그나저나 궁 밖이 계속 소란스럽네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귀족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특히 궁 밖에서 들리는 소란이 점점 커짐에 따라 불안감 또한 점점 커졌다.
조금 전까지 체면을 위해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 대부분이 창가에 서서 밖을 살폈다.
“생각보다 늦는군요.”
오르티오 후작이 카니스에게만 들리게끔 말했다. 카니스는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인지했다.
카니스는 펠리오가 머물렀던 자리를 힐끔 보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인데.’
그 변수 중 하나는 유니시아 오르티오의 등장이었다.
본래 그 아이는 마법으로 메리디오의 발목을 잡아 황후를 이곳까지 모셔오는 역할을 맡았다. 즉, 유니시아는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유니시아는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난데없이 펠리오를 데려갔다.
옆을 슬쩍 보면 오르티오 후작도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녀도 짐작되는 바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렇게 생겨난 예상치 못한 변수 중 가장 큰 타격은 역시 펠리오의 부재였다.
“그 녀석, 상태가 좀 이상했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몸이 편찮으실까요?”
“펠리오가 아팠단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이따금 딸아이 교육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불평은 본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도, 펠리오가 보통 사람들처럼 열이 나거나 몸살로 앓았단 이야기를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분명 펠리오는 이상한 낌새를 보였다. 식은땀을 흘렸고, 가슴 언저리에 손을 계속 올렸다.
“……이거야 원!”
지금껏 조용히 입 다물고 있던 올로르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사람을 모아 놓고 이렇게 가두기만 하다니!”
“자작이야말로 무슨 경우지요?”
오르티오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아직 회의를 진행하실 황후 폐하께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황후 폐하가 자리에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그 망할 황후는 도대체 언제 온단 말입니까!”
“자작!”
깜짝 놀란 오르티오 후작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 또한 믿기지 않는단 눈으로 올로르 자작을 돌아봤다.
“지금 그게 무슨 망언입니까!”
오르티오 후작은 기가 막혔다.
“이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본인의 상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까? 어디서 감히 지엄하신 제국의 어머니께 그런 표현을……!”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지옥 같은 시간을 기다리다 못한 올로르 자작은 정신을 살짝 놓은 것처럼 굴었다.
“내 작위와 목숨을 잃을 판인데, 뭐가 지엄이고 지랄이야!”
“자, 자작! 이게 무슨 무례한……!”
“진정하고 품위를 지키게!”
보다못한 귀족들 몇몇이 올로르 자작을 자리에 앉히며 말렸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올로르 자작은 저를 붙잡은 귀족들을 바닥으로 밀쳐 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어차피 다 끝이야!”
눈에 핏줄이 선연히 드러난 올로르 자작이 해괴한 웃음을 흘렸다.
“내 아들이 신을 만난다면, 그땐 너희 모두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야!”
“실성했군.”
카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당신도 북부의 미신을 믿는 건가? 그건 보레오티조차 안 믿는…….”
“저, 저길 보시게!”
그때, 어느 귀족이 창밖을 가리켰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카수스 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는데도 그들의 검과 제복에 피가 흥건히 묻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검은 머리를 가진 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펠리오?’
반사적으로 제 친우를 떠올렸던 카니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보레오티 영애!”
카수스 궁으로 들어오는 인물의 정체는 바로 레오니에였다. 레오니에가 궁으로 들어와 귀족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군요.”
전혀 죄송치 않은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레오니에가 피 묻은 검을 가볍게 흔든 뒤에 검집에 넣었다. 벽에 튄 핏방울은 한바탕 쏟아지는 폭우 속 빗방울 같았다.
“영애, 이게 도대체 어찌 된…….”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카니스는 레오니에의 가슴에 달린 흉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역대 보레오티 공작만이 가슴에 달았던 장식이었다.
“내 자리는 어디지요?”
레오니에가 어수선한 회의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쪽입니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오르티오 후작이 펠리오가 앉았던 자리를 알려 줬다.
“흐음.”
레오니에는 곧장 자리에 앉았다.
“이제 다 모인 건가요?”
“아, 그건…….”
“황후 폐하만 오시면 됩니다.”
말을 더듬는 카니스를 대신해, 오르티오 후작이 대신 알려 줬다.
황후를 제외한 나머지 참석자는 전부 모였다는 후작의 말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로르 자작도 있었군?”
레오니에가 멍청하게 굳은 올로르 자작에게 싱긋 웃었다.
“우리 오늘 잘해 봅시다.”
“…….”
“그래도 귀족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내 친히 뜻깊은 날로 만들어 줘야지.”
살벌한 예고가 끝나기 무섭게, 곧이어 황후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늦어서 미안하네.”
안으로 들어오는 티그리아 황후의 손에도 피 묻은 검이 들려 있었다. 황후는 그 검과 검집을 함께 온 시녀에게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예를 갖춰 황후의 안부를 걱정했다. 충성심 강한 파르두스의 태도가 마음에 든 황후가 그렇다며 싱긋 웃었다.
볼에 묻은 핏자국도 함께 움직였다.
“늦어서들 미안하네.”
황후가 솔직하게 사과했다.
“반란군을 진압한다고 말이야.”
“바, 반란군이라니요!”
어느 귀족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궁은 괜찮은 겁니까?”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폐하! 제대로 된 설명을……!”
쾅!
소란스럽던 회의실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다들 조용히.”
레오니에가 테이블을 찍어 내린 검집을 도로 내렸다. 저 혼자 여유로운 보레오티 공작은 검은 눈을 번뜩이며 회의장 내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찬찬히 바라봤다.
“황후 폐하께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보레오티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레오니에의 말에 동의했다. 정작 레오니에는 후작 영식이 편을 들어줌에도 영 마땅찮은 표정이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황후 폐하께 예를 갖추고, 늦어진 귀족 회의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귀족으로서의 소임을 잊어선 안 된다는 파르두스 후작 영식의 얼굴은 진지했다. 항상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밖이 정말 반란으로 소란스러운 것이라면, 여기서 태연히 회의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다른 귀족이 반론을 제시했다.
“그건 너무 걱정 않아도 됩니다.”
레오니에가 한쪽 입가를 비틀며 한껏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왜 또 질질 끌고 있어!’
정작 레오니에의 속은 바싹 말라 가고 있었다. 서둘러 이걸 끝내야 북부 게이트를 넘어 아빠랑 엄마를 도우러 갈 수 있었다.
‘진정해라, 북부 광공…….’
나는 북부 광공.
북부 광공은 쉬이 흥분하지 않아.
광공이 흥분할 땐 오로지 자신의 반려가 위험에 빠졌을 때. 레오니에는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여기서 자신이 흥분해서 난리 친다면 그게 훨씬 더 시간을 끌게 되는 꼴이었다.
다행히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수없이 즐겼던 광공 놀이와 진짜 북부 광공이신 아빠 덕분에 자기 최면이 쉬이 되었다.
“반란에 대해선 귀족 회의에서 논의하면 됩니다.”
“하나……!”
“아까 못 들었습니까?”
반란군을 진압하느라 늦었다는 황후의 말을, 레오니에가 똑같이 따라 말했다.
“황후 폐하와 제가 반란군을 다 진압했습니다.”
귀족들이 믿기지 않는단 눈으로 황후와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두 손가락으로 손수 제 눈을 가리키고는, 아래로 팍 내렸다. 작작하란 뜻이었다.
다행히 광공의 친절은 잘 받아들여졌다.
“그, 그럼 밖에 있는 저 기사들은 뭡니까?”
창가에 앉아 있던 귀족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머무는 궁을 무장한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단 사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새 카수스 궁을 포위한 기사의 수가 늘었다.
“글라디고와 레보오다.”
티그리아 황후가 말했다.
“반란의 주모자를 잡으러 왔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황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레오니에도, 카니스도, 오르티오 후작도.
비밀리에 사냥을 도모한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엔 곧 죽을 것처럼 창백한 안색을 띤 붉은 머리의 노인이 있었다.
“……으, 음모야!”
올로르 자작은 자신이 앉은 자리를 발로 차며 소리쳤다. 핏줄이 도드라진 그의 주름진 목은 창백해진 얼굴과 달리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건 음모야!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그러신가?”
레오니에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반박해 보게.”
어린 공작의 희미한 미소는 마치 진혼곡처럼 차분하고 암울했다.
‘펠리오 판박이…….’
카니스는 그런 레오니에를 보며 펠리오를 빼다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귀족들도 다 똑같은 생각이었다.
오히려 보레오티는 대를 지날수록 더 무서워진다고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황후가 귀족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동시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본래라면 시종들이 들어와 회의 안건과 관련 자료들을 배포해야 했으나, 지금 회의실에 들어오는 이들은 무장을 한 기사들이었다.
그것도 보레오티가 이끄는 글라디고 기사단이었다.
“첫 번째 안건부터.”
황후가 첫 번째 안건을 소리 내어 말했다.
“올로르 자작의 작위 몰수.”
드디어 보레오티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연극의 막이 올랐다.
* * *
‘왜 당장 안 죽여?’
어느 날엔가.
검은 머리를 양 갈래로 예쁘게 나눠 묶은 레오니에가 집무실 책상 위로 얼굴을 뽁 내밀며 물었다.
‘무어를?’
펠리오가 아이의 머리를 묶은 방울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봤다. 얼마 전에 선물로 준, 파란 사파이어로 만든 머리 방울이 검은 머리와 잘 어울렸다.
‘에이, 알면서!’
‘내 완벽한 외모?’
‘어어, 아빠…….’
레오니에가 진정 안타까운 눈으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동정하는 아이의 눈빛이 괜히 불편해진 펠리오가 애먼 곳에 화풀이했다.
‘너 나가.’
‘전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건너 보조 책상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던 루페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 말은, 왜 올로르를 당장 잡아다 족치지 않으냐는 뜻이야.’
‘레오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당연히 고아원이지!’
앙증맞은 두 주먹으로 턱을 받친 아기 맹수가 까만 눈을 초롱초롱 반짝였다. 애교 섞인 칭얼거림이 뒤이어 따라왔다.
‘……왜 당장 안 잡느냐면.’
펠리오가 아이의 양 볼을 손가락으로 눌러 물고기 입술로 만들었다. 못된 말을 한 벌이었으나, 정작 레오니에는 재밌다는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냥 잡으면 재미가 없잖아.’
‘……아빠 무슨 변태 취향 있어?’
‘내가 너한테 변태 소리를 듣다니.’
내일은 폭설이 쏟아지겠군. 펠리오가 드물게 화창한 봄 날씨인 창밖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이익, 레오니에가 씩씩거리며 조그만 주먹으로 아빠의 허벅지를 툭툭 때렸다.
‘사냥은.’
하루하루 주먹에 실리는 힘이 부쩍 늘어나는 딸아이를 다리에 앉힌 펠리오가 동화책을 읽어 주듯 가르쳐 줬다.
‘후환을 만들지 말아야 해.’
‘그냥 다 잡아 죽이면 안 돼?’
‘그건 너무 금방 끝나잖아.’
펠리오가 지하 감옥에 가뒀던 고아원 어른들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북부에 끌려온 뒤로 1년 가까이 살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다만 동부에다 실험에 쓰라고 선물로 준 몇몇의 생존 여부는 아직 모른다.
‘언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그들의 정신을 파먹어야 해.’
‘오오.’
레오니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 어떤 인간과 연관이 있는지도 알아내야 해. 알아낼 수 있는 걸 전부 알아내기 전까진 죽여선 안 돼.’
죽이는 건 필요가 없어질 때.
모든 것이 끝날 때.
펠리오는 그런 식으로 고아원 어른들에게서 코니에의 정체를 알아냈고, 그 뒤로 올로르 가문이 연관되었단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럼 지금은?’
묵묵히 듣던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빠의 가르침은 항상 자신의 유약한 면을 더욱 단단하게 해 줬다.
‘아빤 지금 뭘 알아내려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콧방울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괜히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코를 가리며 몸을 흔들었다.
‘후환을 없애야 하니, 관련된 모든 걸 알아내야지.’
‘덕분에 제가 죽습니다만…….’
내려 준 명령에 따라야 하는 루페의 눈 밑만 점점 시커멓게 변해 가고 있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맹수 부녀는 그의 괴로움에 관심이 없었다.
레오니에는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을 긁적이다 은근슬쩍 의자에 묻은 걸 닦았다.
‘사냥감은 둘.’
올로르와 황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새끼손가락을 아이의 입술로 가져갔다. 레오니에가 질색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두 쓰레기가 저지른 것만 찾아내선 안 돼.’
그들의 혈연, 연줄.
더 나아가 혈연의 혈연, 연줄의 연줄까지 사냥터 안으로 넣어 줘야 한다. 혹여 그들이 어떤 이득을 취했다면 그 이득이 사냥감과 관련이 있는지까지 알아내야 했다. 만약 조사 대상이 죽었다면 그 가족과 연인까지.
타국에 있더라도 샅샅이.
누구든 관련된 자는 다.
지독하고 끔찍할 만큼.
그래야 사냥감이 궁지에 몰리더라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더불어 이 모든 건 아주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했다. 너무 눈에 띄게 움직였다간 사냥감이 이를 눈치채고 몸을 사리거나 주제도 모르고 반항할 수 있었다.
‘특히나 우린 조심해야지.’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검은색을 품은 맹수가 너무 잘나고 멋진 탓에 눈에 쉬이 띈단 뜻이었다.
‘그러니 인내해야 해.’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 검고 아름다운 자태를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사냥감이 안심하고 날뛸 때까지.
‘…….’
레오니에가 묵묵히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건 너무 지겨워!’
아기 맹수는 그렇게 기다리다가 레무스 올로르랑 수비테오 황제가 눈 맞아서 결혼하겠다며 짜증을 냈다. 펠리오는 눈살을 찌푸렸고, 루페는 헛구역질했다.
하나 수년이 지나고.
‘……그래.’
하극상으로 공작 작위를 찬탈한 레오니에는 그제야 아빠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인신매매, 부녀자 성폭행 및 청부 살인 다수, 상습 도박…….”
오랫동안 준비해 온 올가미는 이 순간을 기다렸단 듯이 올로르 자작의 운명을 위협적으로 조였다.
올로르 자작은 죄목 하나가 밝혀질 때마다 주름이 하나씩 늘어났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났던 붉은 머리는 그 변화가 눈에 띌 정도로 희게 바래졌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살기 어린 자작의 도끼눈이 레오니에를 노려봤다. 흰자가 번뜩이는 자작의 눈엔 당장이라도 네 목을 졸라 죽여 버리겠단 생각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정작 레오니에는 싱긋 웃으며 친히 손까지 흔들어 줬다.
“감금, 횡령, 자금 세탁, 방화 청부…….”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올로르 자작의 죄목을 읊던 티그리아 황후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읽어도 읽어도 죄목이 끝이 없으니 목이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목을 축이는 물 한 잔이 꿀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대단하군.”
기어코 황후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내가 지금 소법전을 읽고 있나? 아니, 소법전도 이것보단 더 축소되었지.”
“참으로 부지런하죠?”
레오니에가 방긋 웃었다.
“……정말 대단해.”
황후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말한 ‘대단한 존재’는 올로르가 아니라 보레오티였다.
이 죄들을 다 저지른 올로르도 올로르지만, 그걸 다 알아내어 증거까지 확실하게 내민 보레오티의 진심 어린 노력에 학을 뗐다.
역시 보레오티야 말로 가장 위험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적으로 둔 올로르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고.
“올로르 자작.”
레오니에가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렸다. 눈웃음엔 조롱이 가득했다.
“참고로 댁 아드님과 지인분들의 죄는 언급도 안 되었습니다.”
심지어 수비테오 황제와 함께한 것 역시도.
그 말에 올로르 자작 옆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신생 귀족 중엔 올로르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했던 자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당장 졸도할 것처럼 바들바들 떠는 에르바누 같은.
“고, 공작님……!”
그때, 서부 귀족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적힌 것이 전부 올로르 자작이 저지른 죄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이것도…….”
차마 죄명을 입에 담지 못한 귀족을 대신하여, 레오니에가 친히 의심되는 몇 가지를 상세하게 알려 줬다.
“영아 살해는 자작의 사생아라 주장했던 여인들의 아기들을 대상으로 했고, 추행은 저택 하녀들이 주 피해자고, 으음, 과실 치사는 뭐였더라.”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들기던 레오니에가 퍼뜩 떠오른 것을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자작 부인이 맞아 죽었지.”
“올로르 자작 부인은 병환으로 죽은 게 아니었습니까?”
오르티오 후작이 적절히 끼어들었다.
올로르 자작 부인은 가문이 작위를 받고 얼마 안 있어서 사망했는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는 오랫동안 앓아온 병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레오티가 알아낸 진짜 사망 원인은 남편의 폭행이었다.
“그, 그건 거짓입니다!”
부정하는 올로르 자작의 입가엔 허연 거품이 일어났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죄에 눈앞이 혼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곳엔 자작의 변명을 믿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죽은 부인께서 마지막에 입었던 옷이, 수수한 진주 장식이 달린 노란 옷이었다지?”
“……!”
“그리고 자작 그대는 이리 말했고.”
꼴에 이딴 거나 입어서.
“‘내 주먹에 상처나 내고, 마지막까지 마음에 안 드는 년’, 이라고.”
레오니에의 증언에 모두 자작을 노려봤다. 멸시와 경멸로 가득한 그들의 눈빛이 올로르 자작을 난도질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나마, 보레오티의 먹잇감이 된 올로르를 동정했던 소수마저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이 죄상들이 그간 드러나지 않은 겁니까?”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지친 어조로 물었다. 그 역시 보레오티를 비밀리에 도왔지만, 올로르 자작의 추악함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 점은 참으로 부끄러워.”
황후가 시선을 내렸다.
“황제 폐하께서 뒤를 봐주고 계셨던 모양이네. 아무래도 올로르 자작과 워낙 친분이 있고, 우시스 황비도 옆에 있고 말이야.”
비난의 흐름이 자연히 수비테오 황제에게로 향했다.
“황후 폐하.”
카니스가 말했다.
“이런 상황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송구하오나, 지금이기에 더욱 황태자 책봉이 중요하다 여겨집니다.”
카니스의 말에 귀족들이 동의했다.
“서둘러 책봉식을 열어야 합니다.”
“2황자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하십시오.”
“하나 황제 폐하께서 아직 병상에…….”
“어차피 황후 폐하께서 대리청정 중이신데!”
“황제는 죽었어.”
황태자 책봉에 대해 너도나도 떠들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황제 폐하께서 시해되셨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네.”
귀가 따가웠던 회의실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귀족들의 입을 단숨에 다물게 한 황후가 충격적인 사실을 이어 말했다.
“그리고, 범인이 레무스 올로르란 사실도.”
“그럼 설마 조금 전 반란이……?”
파르두스 후작 영식의 물음에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야!”
올로르 자작이 테이블을 쾅, 치며 다시금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자작이 저지른 끔찍한 죄들이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편견을 가진 상태였다.
“반란을 도모했단 증거가 있어.”
시시때때로 분위기가 바뀌는 회의실 속에서 홀로 평온한 황후가 증거를 제시했다. 바로 올로르의 인장이 찍힌 사병 모집 계획과 반란 내용이 담긴 계획서였다.
“그대의 며느리가 제보했지.”
올로르 자작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말 반란만은 자신의 죄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주모자란 증거를 며느리가 줬단 사실에 머리로 피가 솟구칠 지경이었다.
‘……당연히 뻥이지.’
레오니에가 아주 작게 혀를 날름거렸다. 저 증거는 보레오티가 손수 만든 가짜였다.
재정부에서 근무하면서 올로르의 문서를 여러 번 보았던 바리아가 형식을 갖추면, 올로르 자작의 필체와 특유의 습관까지 외운 인세레아가 문서를 작성했다.
올로르 가문의 인장은 레지나의 유골과 함께 나왔던 레무스의 목걸이와 바리아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었다.
‘다 되어 간다.’
조금만 더.
레오니에가 배 속에서부터 끌어 올린 숨을 깊이 내쉬며 스스로를 달랬다. 이제 정말 끝이 보였다.
“저는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올로르 자작이 침을 튀기면서까지 제 무죄를 주장했다.
“황제를 죽인 건 제 아들의 독단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 미친놈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명예의 의식에서 다들 보지 않았습니까!”
발악이나 다름없는 항변이었다. 이제 자작의 말은 전부 소음에 불과했다. 듣고 있어 봐야 귀만 아프고, 차라리 귀만 아프면 다행이지, 머리까지 지끈거릴 만큼 한심했다.
“이, 이 반란도 제가 주도한 게 아닙니다! 이 역시 제 아들이……!”
“자작.”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어딘가 분에 겨운 섬뜩한 부름이었다. 내키는 대로 떠들던 올로르 자작이 멈칫했다.
“그대의 아들놈이, 내 어머니를 납치했어.”
“뭐, 뭐라고요?”
카니스가 앞으로 고꾸라지듯 상체를 들썩였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펠리오가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다.
모두 보다 자세한 상황이 듣고 싶어 레오니에를 바라봤지만, 정작 공작의 시선은 올로르 자작에게만 고정된 채였다. 그 탓에 다른 이들 역시 자연히 자작을 돌아봤다.
“……정말 지치는군.”
그러다 레오니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어린애들 동화나 다름없는 없는 미신 하나로 이 지경까지 오다니.”
올가을에 열네 살이 되는 공작은 모든 것이 우스웠다.
“미신이라면…….”
“명예의 의식에서 들은 그거?”
“북부 전설 말인가요?”
“세상에, 또 그 미신이라고?”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뒤로한 채, 레오니에가 이어 말했다.
“미신에 현혹되는 것엔 내 뭐라 하진 않겠어.”
미신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 주기도 하며, 기댈 곳 없거나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지탱할 때도 있으니까.
나쁜 건 그걸 악용하는 사람뿐.
“그런데, 그대들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레오니에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하나는 해석 오류.”
북부 전설에서 등장하는 ‘신’은 보레오티에게만 맹수의 송곳니란 특별한 이능을 선물한 존재로 나온다.
“보레오티가 아닌 그대들에게, 과연 신이 무슨 선물을 한다고.”
소위 말해 ‘헛짓거리’를 했단 뜻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레오니에는 또 다른 손가락을 들어 두 번째를 말하는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올로르 자작에게로 향했다.
“……죽이진 말게.”
황후가 경고하기 무섭게, 올로르 자작의 손등에 검이 푹, 박혔다.
“크아아아!”
올로르 자작이 고통 어린 비명을 질렀다. 검은 자작의 손을 테이블에 완전히 박아 버렸다.
“입 닥쳐.”
시끄러운 비명을 참지 못한 레오니에가 구둣발로 자작의 턱을 찼다. 근처에 있던 에르바누 백작이 덜덜 떨며 기어가듯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끄으, 크으으……!”
겁에 질린 올로르 자작은 그저 아이처럼 울었다. 무엇이 그리 억울하고 서운한지 이를 악물며 훌쩍이는 꼴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너는 울 자격도 없어.”
이 쓰레기 때문에 억울하게 아파하거나 죽은 사람들은 마음껏 울지도 못했다.
“잘 들어라, 올로르.”
레오니에가 자작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컥컥,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작의 입에선 피와 침이 툭툭 떨어졌다. 조금 전 레오니에에게 맞았던 턱은 한눈에 봐도 엉망이었다.
지켜보던 카니스가 저건 무조건 골절이라고, 옆에 있던 서부 귀족에게 알려 줬다.
“너희가 저지른 마지막 실수는.”
자작의 머리칼을 쥔 레오니에의 손등에 핏줄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왔다.
“‘나’를 건드린 거야.”
보레오티를 건드린 마지막 실수가, 이들을 지옥으로 떨어트릴 최악의 원흉이었다.
“이제 난 북부로 가서 네 아들놈을 직접 데려올 거야.”
그리고 데려온 네 아들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친절히 설명해 줬다.
“어느 이국에서는 죄인의 살과 내장을 소금에 절여 음식으로 만든다더군.”
취향하곤, 황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토록 사이좋은 부자인데, 예전처럼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때?”
먹다 보면 네 놈의 원천으로 일부분은 스며들지 않겠냐고,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경고하는 레오니에는 가히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이었다.
“이, 이 악독한 것……!”
올로르 자작이 눈을 부라렸다.
“잘 아네.”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올로르 자작의 머리를 테이블로 내려쳤다. 이번엔 이마가 깨지는 소리가 타종처럼 맑고 경쾌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