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레오니에의 하극상
펠리오가 게이트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곳엔 바리아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건 여타 다를 바 없는 게이트였고, 웬 꼬마 하나를 등에 업은 채 달래는 프로보가 있었다.
“주군!”
그런 펠리오를 발견한 프로보가 서둘러 달려갔다.
“으아아아앙! 무서! 무셔!”
등에 업힌 케아가 펠리오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자지러졌다. 당황한 프로보가 다가가던 걸음을 서둘러 멈췄다.
“……보고해.”
당장 게이트로 뛰어 들어가려는 발걸음을 애써 억누른 채, 펠리오가 서슬 퍼런 눈빛을 드러내며 프로보에게 물었다.
“그, 그것이…….”
이젠 프로보가 울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의 펠리오에게 조금이라도 잘못 보고했다간 진정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제가 설명할게요.”
뒤늦게 유니시아가 가쁜 숨을 겨우 달래며 말했다. 펠리오의 어마무시한 달리기 속도를 따라 맞추려고 마력을 썼더니 조금 지쳐 버렸다.
“저는 어머니께서 이번 사냥에 참여하라 하셨어요.”
어머니를 보필하러 따라왔다는 건 당연히 핑계였다.
유니시아는 오르티오 후작이 카수스 궁에 들어가기 무섭게 바깥 주변을 살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기 위해 이동 경로를 두 눈으로 익히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처음 느껴 보는 기이한 것이 유니시아를 유혹했다. 그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어린 유니시아는 그것이 참으로 맑고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아주 무섭고, 섬뜩한 무엇이었어요. 너무 깨끗해서 저를 그대로 덮쳐 목을 조를 것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말에 펠리오가 인상을 험상궂게 썼다.
‘설마…….’
문득 떠오르는 어떤 생각 때문이었으나, 의도치 않게 주변 공기를 더욱 매섭게 만들었다. 이젠 유니시아마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아빠!”
후작 영애가 정말 울기 직전.
어디선가 위협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레오니에가 검은 준마를 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기막힌 등장 덕에 유니시아는 가까스로 울음을 참을 수 있었다.
“아가씨!”
프로보가 엄마를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반갑게 외쳤다.
“아가씨!”
그러나 말에서 내린 레오니에의 하얀 셔츠와 짙은 망토에 묻은 피를 보며 기겁했다.
“괜찮으십니까? 이 피들은 도대체…….”
“내 피 아니니까 괜찮아요!”
걱정하는 프로보를 대충 안심시킨 레오니에는 곧장 펠리오에게 향했다.
“상황은 기사들에게 대충 들었어, 아빠.”
레오니에가 제 뒤를 따라온 기사들을 가리켰다. 멜레스와 파보, 마누스는 프로보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모르는 상황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엄마는? 넘어갔어?”
“그래.”
“그 빌어먹을 새끼가!”
레오니에가 게이트 기둥을 주먹으로 쾅 쳤다.
“진작 죽여 버려야 했는데!”
“당장 북부로 간다.”
“나도 갈게!”
“주군! 아가씨!”
보레오티 부녀가 당장 게이트를 넘으려던 찰나, 멜레스가 둘을 다급히 붙잡았다.
“프로보가 전할 말씀이 있답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레오니에가 날 선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평소 기사들을 공경하면서 꼬박꼬박 해 온 존대도 잊어버렸다.
“반드시 들으셔야 합니다.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프로보가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간략하게 보고했다.
“마님의 눈이 검게 변했습니다.”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로보는 자신이 절대 착각하지 않았음을, 바리아의 눈이 검게 변한 것을 인질이었던 아이도 함께 보았음을 강조했다.
“마님의 상태도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펠리오가 다소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행동이 꼭…….”
말하려던 프로보가 레오니에를 힐끔거렸다.
“어렸을 적 아가씨 같았습니다,”
“나?”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이없어했다.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황궁에 발을 딛기 무섭게 사람이 변했습니다. 알 수 없는 말도 중얼거리시고, 싱긋 웃기도 하고…….”
프로보의 증언 속 바리아는 도저히 협박을 당해 끌려온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무서워서 정신 놓은 거 아냐?”
효심 가득한 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레무스를 반드시 제 손으로 댕강댕강 조각을 내버려서, 그 조각들을 그의 아비에게 집어 던져 온 구멍에다 넣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반면 펠리오는 침착했다. 조금 전까지 흥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펠리오는 무언가를 한참 생각했다. 그 진지한 모습에 다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로지 레오니에만이 조급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다행히 펠리오의 사색은 빨리 끝났다.
“북부로 간다.”
“역시!”
레오니에가 내 그럴 줄 알았다며 주먹을 쥐고 환호하던 찰나.
“아, 안 됩니다!”
유니시아가 게이트 앞을 막아섰다.
“공작님은 가시면 안 됩니다!”
“오르티오 후작 영애. 어서 비키십시오.”
갈 길이 급한 펠리오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유니시아에게 말했다.
그러나 유니시아는 단호했다.
“제 말씀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압니다. 그러나 이번 사냥에 보레오티 공작님이 없으면 안 됩니다!”
곧 시작될 사냥엔 많은 맹수가 참가했고,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었다.
그중에서 펠리오는 실질적인 사냥의 주체였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올로르를 완전히 몰락시키고, 크리세토스 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안건을 통과시켜야 했다.
그 자리에서 보레오티는 이 모든 걸 직접 주도해 귀족파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기둥 역할이었다.
그런 펠리오가 자리를 비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그딴 게 중요……!”
참다못한 펠리오가 소리치자 겁에 질린 유니시아가 그대로 굳어졌다.
그 모습에 펠리오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에게 소리를 쳐 버리다니.
하지만 지금 그의 감정은 매우 불안정했다. 눈앞이 아찔했고, 불안하고 초조했다.
잠들어 버린 맹수의 송곳니가 사라진 반려와 아이를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유니시아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이 ‘상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많이 미숙하지만, 공작님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잘…….”
“……하하!”
그때.
“겁나 뭐 같아서.”
아주 그냥 기분도 뭐 같다면서, 레오니에가 힘이 쭉 빠진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까지 놀아나는군.’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레오니에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오르티오 후작 영애.”
“네, 네!”
“귀족 회의에 필요한 건 ‘공작님’이지?”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멱살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아빠의 몸이 워낙 튼튼하고 묵직한 탓에 도리어 끌려갔다.
“아이씨…….”
소위 ‘쪽’이 팔린 레오니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돼.”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옷에 달린 흉장을 움켜쥐었다. 펠리오가 보레오티 공작으로서 업무를 볼 때마다 착용하던 장식이었다.
‘빌어먹을 예언.’
흉장을 뜯어낸 레오니에가 조소했다.
‘‘아비의 작위를 빼앗으세요.’
드디어 아우스트 공작이 알려 준 예언이 실현되었다. 뜯어낸 흉장을 제 옷에 단 레오니에가 뒤로 물러섰다.
“바로 하극상이지.”
“레오 너……!”
“지금부터 공작은 바로 나다!”
공사 구분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 따위가 보레오티의 주인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외치던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손을 잡고 게이트까지 끌고 갔다.
“후환이 없게 응당 추운 북부로 추방해야 하극상이 마무리되지.”
게이트 안으로 펠리오를 떠밀기 직전, 레오니에가 소리 낮춰 속삭였다.
“아빠, 가.”
나도 곧 따라갈게.
그 말을 끝으로, 레오니에는 몸을 돌렸다.
펠리오는 제게서 떨어지는 아이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대로 먹지 못해 뼈가 앙상했던 고아의 손.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서 어여쁘고 곱디 고와졌던 어린 딸의 손.
힘든 훈련과 연습을 반복하느라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하던 후계자의 손.
그리고 이제는.
“오르티오 후작 영애.”
“……네? 네!”
“갑시다.”
모두를 이끄는 맹수의 손이 되었다.
펠리오는 웃음이 짧게 터졌다. 벅차오르는 감정은 기특함과 대견함, 아주 약간의 쓸쓸함이었다.
아직도 철부지인 줄 알았던 딸은 모두를 아우르는 정점, 그 위에 서 있었다.
‘믿고 가도 괜찮단다.’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맹수이니.’
머릿속에서 스쳐 가는 아우스트 공작의 예언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는가.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군.’
펠리오가 게이트 너머로 몸을 돌렸다.
‘바리아에게 맞는 족쇄를 채워야지.’
그리고 아내에게 쏟아부을 잔소리를 떠올렸다.
* * *
집무실에서 막 나온 티그리아 황후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길 보렴.”
뒤따르던 시녀들이 창밖을 보았다.
“하늘이 정말 푸르지 않니?”
황후의 나른한 목소리에 시녀들이 절로 미소를 지었다. 무덥던 날씨가 한결 가라앉은 지금이야말로 나들이 가기 딱 좋은 날이었다.
“나들이를 준비해 줄래?”
준비가 다 되면 부르라고 황후가 명했다. 그 말에 시녀들이 예를 갖추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후 폐하.”
오랫동안 황후의 곁을 지켜온 중년의 시녀 한 명만 빼고.
“황제가 죽었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한 황후의 한쪽 눈이 작게 꿈틀거렸다.
“조금 전 광장에서 그것의 시체를 확인했습니다. 황제라고 합니다.”
“누가 그 영광을 가로챘니?”
황후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자의 숨통을 직접 끊어내는 상상을 수도 없이 펼치고 각오를 다졌기에 원통하기까지 했다.
“레무스 올로르입니다.”
“아무래도 그쪽이 더한 폐기물인 모양이야.”
내 뭐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는 황후의 목소리엔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시녀가 황후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어머나.”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나 그것도 아주 찰나였다. 황후는 곧 어느 문 앞에 도착했다. 시녀가 문을 열자, 달콤한 차 향기가 훅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안으로 들어간 황후가 자리에 앉았다.
“아니어요. 저도 막 왔답니다.”
맞은 편에 앉은 우시스 황비가 눈을 둥글게 휘었다.
“하나 송구하게도, 제가 먼저 차 한 잔을 마셨답니다.”
“잘했어요.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차도 안 마셔.”
“황후 폐하의 것도 제가 먼저 준비했답니다.”
“어머, 기특하기도 하지.”
티그리아 황후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봤다. 안으로 들어올 때 코를 자극했던 달콤한 향은 바로 이 찻물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찻물에 비친 황후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황비.”
황후가 찻잔을 뒤집었다.
“도가 좀, 지나쳤어.”
뒤집힌 찻잔은 바로 그 아래 찻잔 받침에 엎어졌다. 거꾸로 쏟아진 찻물은 받침을 흥건히 채우다 못해 테이블까지 흘렀다.
“향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우시스 황비가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만졌다. 곤란하고 미안해하는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전혀 곤란하고 미안하지 않단 진심이.
“……뭐, 그건 되었고.”
티그리아 황후가 몸을 편히 기대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어떨까?”
“무엇을요?”
“난 그대가 제법 마음에 들었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찻물을 한 번 응시한 뒤, 황후는 시선을 오로지 황비에게 고정했다. 떨어지는 찻물은 이제 바닥에 깔린 융단까지 적시어 갔다.
“저도 황후 폐하가 좋아요.”
황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폐하가 포기하세요.”
“그렇게도 제국이 싫은가?”
“황후 폐하.”
우시스 황비가 시선을 내렸다. 마치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저는 올로르의 사생아였고, 제 어미는 그 작자에게 살해당했지요.”
“이런, 어쩌다?”
“목걸이 때문에요.”
올로르에겐 정말 많은 사생아가 있었으나, 그들 중 친자라 인정받은 건 백조 목걸이를 지닌 여자아이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이의 모친은 살해당했다.
“그 작자는 저를 아주 싫어했죠.”
꼴에 만인의 존경을 받고 싶었던 아비란 놈은 제가 저지른 결과에 치를 떨었다. 그렇게 해서 사생아에게 주어진 이름은 ‘우시스’였다.
“기생충이란 뜻이죠.”
올로르는 제 딸을 기생충 취급했고, 사용인들은 그런 자신을 동정하면서도 괜히 불똥이 튈까 무서워 피해 다녔다.
그나마 오빠란 작자는 사이좋게 지내 줬지만, 나중엔 제 욕심을 채우려고 나쁜 손을 뻗으려는 발정 난 쓰레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전 참지 못하고 집을 나왔고, 다행히 올로르는 절 찾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처음엔 정말 놀랐죠. 하지만 그분과 그분의 가족들은 절 위로해 줬어요. 엄마가 죽고 나서 처음 느껴 보는 따스함이었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태어났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아우스트 공작저로 들어갈 날이 점점 다가왔고, 전 행복했죠.”
“…….”
“다음 말은 굳이 안 해도 되겠지요?”
“……그래.”
황후에게는 굳이 타인의 불행을 고집스레 듣는 악취미가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티그리아 황후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가 이내 반대로 꼬았다. 그리곤 한쪽 얼굴을 감싼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황후를 탐색하듯 응시하던 황비가 물었다.
“황후 폐하는 싫은 적 없었나요?”
“무어가?”
“제국이, 황실이.”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가.
그 질문에 황후의 손이 멈추었다.
“……원망은 수도 없이 했지.”
끝나는 말과 함께 튀어나온 묵직한 숨은 오랫동안 인내해 온 힘겨움을 대변했다.
“내 진심을 무시하시고, 나의 아름다운 청춘을 그딴 놈과 함께 보내게 했으니.”
“황후 폐하의 인생은 망가졌어요.”
“……하하하!”
황후가 우습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제 딴엔 나름 진심으로 황후를 걱정했던 황비의 미간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황후가 황비를 귀엽단 듯이 보았다.
“그건 그대가 쉬이 판단할 게 아닌데?”
웃음을 싹 지운 티그리아 황후가 몸을 등받이 뒤로 스윽 기대었다.
“그래, 솔직히 힘들었지.”
그래도 황후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크리세토스를 임신했을 땐 마음을 굳게 먹고 이벡스와 헤어지자고 다짐했다. 하나 사람 마음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스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나?”
“저야 모르죠.”
“보레오티 공작 덕분이야.”
그 말에 황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참 신기하지? 그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덕분에 난 이벡스와 재회했어.”
그렇게 배 속에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
“보레오티 공작은 우리 둘째의 대부 같은 존재지.”
그래서 자신은 보레오티의 사냥을 도울 책임이 있다며,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황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느리면서도 위압적인 동작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메리디오가 황궁에 침투했어요.”
우시스 황비의 어조가 살짝 변했다. 긴장으로 고양된 목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황후 폐하는 실수하셨어요! 당신은 그들에게 위험 지역을 보수하는 사업을 시키지 말아야 했어요.”
“어머, 그 덕에 이 궁에 쉬이 들어온 거잖아?”
티그리아 황후가 메리디오에게 보수 사업을 맡긴 건, 그들이 보고를 틈타 궁에 쉬이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충수예요. 그들은 강하고, 설령 보레오티가 와서 막는다고 해도……!”
“황비.”
묵묵히 들어주던 황후가 말을 잘랐다.
“조금 실망이야.”
“…….”
“나름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런 천진난만한 생각을 하다니.”
자리에서 일어난 황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레오티가 멍청해서 몇 년이나 참고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그놈의 잘난 ‘사냥’ 준비한다고 겉멋만 잔뜩 부렸죠.”
“아니야.”
황후가 또 한 번 정정했다.
“보레오티는, 그들은 한 번 정한 사냥감은 반드시 끝을 본단다.”
“그 끝이 죽음밖에 더 될까요?”
“정말?”
크나큰 포부를 지닌 아이에게 잔혹한 현실을 알려 주듯, 황후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은 자비에 불과해.”
“…….”
“세상 물정도 모르지. 보레오티는 겨우 그렇게 끝내지 않아.”
그들은 ‘모든’ 것을 끝낸단다.
“올로르와 관련된 것, 조금이라도 연관된 것, 올로르의 도움을 받았거나 일말의 친분이라도 있는 자들은 전부.”
보레오티는 ‘올로르’란 존재 그 자체를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지울 준비를 마쳤다.
“……이제야 오는군.”
황후가 싱긋 웃었다. 그 말에 황비는 문 너머가 소란스럽단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대의 계획을 망가트릴 맹수가.”
동시에 문이 떼어질 정도로 크게 열렸다.
우시스 황비가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뒤늦게 알아채기 직전. 그녀는 드디어 황실이 무너진다는 데에서 아주 짧은 환희를 느꼈다.
하지만 이어 찾아온 건 절망이었다.
왜냐하면, 곧 문짝이 떨어질 정도로 힘껏 발로 찬 레오니에가 성큼성큼 제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레오니에의 한 손에는 피가 흥건한 검이, 다른 손에는 피를 쿨럭쿨럭 토하는 기절 직전인 남자가 있었다.
황비가 벌떡 일어났다.
“아는 놈이지?”
레오니에가 손에 든 남자를 황비의 발치에 던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시스 황비는 저도 모르게 널브러진 남자 옆에 주저앉았다.
“역시…….”
레오니에가 내 그럴 줄 알았단 듯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피투성이인 채 신음을 흘리는 사내의 정체는 바로 메리디오 가문의 일원, 즉 아우스트 가문의 병력 중 한 사람이었다.
“공작 영애도 오기로 했던가?”
티그리아 황후가 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속내는 레오니에의 등장에 꽤 놀라는 중이었다. 펠리오가 제 딸은 아직 어려서 참석시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기 때문이었다.
“공작 영애가 아닙니다.”
레오니에가 제 가슴에 달린 흉장을 가리켰다.
“공작이지요.”
황후가 채 놀라기도 전에, 레오니에가 바닥에 쓰러진 메리디오의 멱살을 다시 잡아 옆으로 내던졌다. 다친 사람을 전혀 배려치 않는 행동이었다.
“우시스 올로르.”
레오니에의 검이 황비의 치맛자락을 찍었다. 흠칫 놀란 황비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지만, 바닥에 검이 단단히 박힌 탓에 움직이지 못했다. 오히려 옷자락만 죽죽 찢어졌다.
“내가 그래도 너는 봐주려고 했어.”
어딜 도망치냐며 황비의 손목을 낚아채는 레오니에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댁 인생이 안쓰러워서, 그래도 버티고 복수하는 그 꼴이 참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당신은 내가 못 본 척 넘어갔어.”
“그럼 지금도 넘어가면 안 될까?”
황비가 욱신거리는 손목을 애써 무시한 채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어림도 없다며 황비의 손목을 쥔 제 손에 힘을 실었다.
“이건 오로지 내 추측이지만.”
레오니에의 낮은 목소리는 꼭 맹수의 위협처럼 섬찟했다.
“레무스가 황제를 숨겼던 거, 당신은 알고 있었지?”
“그건 우리 잘나신 보레오티도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알고야 있었지.”
하지만, 이라고 말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레오니에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만약 레무스가 무슨 짓을 벌이려 했단 것도 알고 있었다면.”
레오니에가 검을 뽑아 그 서슬 퍼런 검날을 우시스 황비의 목에 겨누었다.
“이야기는 달라져.”
“…….”
“……역시 알았네.”
그쪽으로 눈을 돌리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았음을, 레오니에는 잘게 떨리는 황비의 눈을 통해 알아냈다.
“이젠 황비 전하도 들리시죠?”
비아냥거리는 레오니에의 목소리 너머로 아수라장이 연상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 공포에 질린 비명, 피비린내 섞인 단말마까지.
“정말 용케도 많은 메리디오를 숨겨 놨더군요. 하여튼 아무도 모르게 음침하게 숨어 지내는 건 남부 집안 종특인가 봐요? 댁네 애 아빠처럼?”
레오니에의 신랄한 비난은 그칠 줄 몰랐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욕이었지만, 우시스 황비의 자존심을 긁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황비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졌다.
“지금 글라디고는 아주 예민한데.”
글라디고 기사단은 수치스러운 불명예를 지니었다. 그들은 레무스에게서 바리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란 명성을 지키지 못했고, 주군과 아가씨의 발목을 붙잡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 기사들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이를 어쩐담.”
레오니에가 사악하게 웃었다.
“메리디오와 아우스트도 오늘 사라질 가문에 포함되겠네.”
울컥한 우시스가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레오니에에게 뻗었다. 그러나 재빨리 피한 레오니에가 그대로 황비의 팔을 뒤로 꺾어, 그대로 황비의 머리를 테이블로 내리꽂았다.
지켜보던 황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왜 건드려서!”
끝없이 올라간 레오니에의 고성이 우시스 황비의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왜 너희들 복수에 애먼 내 가족을 끌어들여서!”
“윽……!”
“애초에 너희끼리 해결하지 못할 일이었으면 시도조차 하지 말았어야지!”
하다못해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했다면, 보레오티는 분명 도와줬을 거라고 레오니에는 확신했다. 펠리오가 곤란해하는 아우스트 가문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도와주면서 여러 이득을 챙겼겠지만, 그래도 분명 그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을 거다.
“애초에 너희가 올로르를 제대로 처리했었다면……!”
“그래서 죽이려고 하잖아!”
우시스 황비가 기어코 언성을 높였다. 자지러지는 분노에 레오니에는 물론이고 황후조차 놀랐다.
“두 쓰레기를 동시에 처리하려고 하잖아!”
바보처럼 순진하고 천연덕스럽던 미소가 깨지자, 그 뒤로 드러난 건 오랫동안 견디어 온 사생아의 격분이었다.
“그게 뭐가 문제야? 모두가 증오하는 새끼들을 족치려는 건데, 그게 뭐가 나빠!”
원통한 눈물을 흘리는 황비의 모습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 토하지 못한 서글픈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이를 멍하니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천천히 손의 힘을 풀었다.
겨우 빠져나온 황비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테이블에 부딪힌 탓에 머리엔 혹이 생겼고, 입술은 이에 찍혀 피가 났고, 곱게 빗었던 머리칼은 엉망이었다. 아름다운 드레스가 피와 구멍으로 더러워진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 많지.”
레오니에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댁도 그렇게 분노했으면서, 지금의 내 심정은 전혀 이해가 안 가?”
“…….”
“너도 지금 똑같은 짓을 하는 거야.”
누군가의 엄마를, 누군가의 정인을 위험에 빠트리는 이기적인 짓.
뒤로 물러서며 검을 치운 레오니에가 한쪽 입가를 비틀었다.
“너도 별반 차이 없구나.”
얼굴만 닮은 줄 알았더니, 제 목표를 이루고자 타인의 희생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역겨운 성품마저 똑 닮았다.
“가족끼리 닮아서 좋겠어.”
우시스 황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모욕에 숨이 가빠지고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정작 심한 말을 내뱉은 레오니에는 그러건 말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군!”
그때, 마누스가 나타났다. 그의 옷도 피로 흥건했다.
“귀족 회의에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그럼 가야지.”
“레보오 기사단이 카수스 궁을 장악했습니다.”
“우리 뿜뿜 기사님도 왔을까?”
레오니에가 들뜬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티그리아 황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저 ‘뿜뿜 기사님’이 제 둘째 아들인 스칸디아인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아참참, 내 정신 좀 봐.”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레오니에가 우시스 황비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난 당한 건 반드시 수백 곱절로 갚아야 하는 성미에요. 아빠가 나한테 그렇게 가르쳤거든요.”
은혜는 적당한 선에서.
복수는 최선을 다해 최악으로.
그 말을 끝으로, 레오니에는 마누스에게로 향했다. 밖으로 나간 레오니에가 기사들에게 ‘카수스 궁으로 간다!’라고 외쳤다.
“……어휴.”
잠깐 방관자가 되었던 황후가 참았던 숨을 토했다.
“보레오티는 어째 가면 갈수록 저러는지.”
성질머리만 더 나빠지는 것 같다며, 티그리아 황후가 꽤나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작년까진 영악한 모습이 참 귀여웠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황후가 엉망이 된 황비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저들은 모든 것을 끝낸다고.”
“태평하시네요.”
황비가 황후의 손을 내치며 퉁명스레 말했다. 앙칼진 그 모습에 황후가 눈웃음을 지었다. 가식 부리며 웃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보레오티는 지금부터 메리디오를 올로르의 사병이라고 주장할 거야.”
황후의 다정한 설명은 우시스 황비에게 아주 잔혹한 예고였다.
“뭐, 뭐라고……!”
동그랗게 뜬 눈에 또다시 절망이 피어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는 황비에게, 메리디오와 아우스트에게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다.
“올로르는 수많은 죄목에 반란이란 죄목을 또 얹겠지. 메리디오는 자칫하다간 올로르와 반란을 도모했단 누명을 쓰고…….”
그렇게 된다면 아우스트 역시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참 대단하지?”
황후는 다른 이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하는 보레오티의 악랄함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그들이야말로 척을 져서는 안 될 위험 분자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제국의 멸망을 바란 적이 있어.”
황후가 뒤에 있던 시녀에게 눈짓했다.
시녀는 곧장 벽에 걸린 어느 커다란 그림 아래로 향했다.
“그런데 보레오티 공작, 아, 지금은 선대 공작이라 해야 하나?”
가슴에 가문의 흉장을 당당히 달고 있던 아기 맹수를 떠올린 황후가 어깨를 잘게 떨었다.
“어쨌건 그가 그러더군.”
황후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윗대가리를 가지고 노는 음험한 게 더 좋답니다.’
제국의 존망은 그날, 일곱 살 꼬마의 영악한 취향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니 보레오티는 내 은인이지.”
황금빛 검독수리가 창공을 날아가는 그림을, 시녀가 액자 틀을 잡아 회전시켰다.
추락하는 검독수리로 그림이 바뀌자 철커덩,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그림 아래 벽에 네모난 실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금은 점점 뒤로 물러가더니 네모난 문이 되었다.
시녀가 그 문을 열자, 돌벽으로 이어진 조그만 통로가 드러났다.
“나도 일단은 황후라서, 제국의 유지가 중요하거든.”
그래야 내 아들에게 황위를 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저기로 들어가. 저 부상자도 함께 데려가고.”
어서, 라며 황후가 턱짓으로 황비와 통로를 번갈아 가리켰다.
황비는 쓰러진 부상자를 끙끙거리며 부축했다. 다행히 기사는 보이는 것처럼 크게 다치진 않았는지 두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황비는 쉬이 터널로 들어가지 못했다.
“저건…….”
“황궁에 흔히 있는 비밀 통로지.”
“저보고, 도망치란 건가요?”
“내가 그대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야.”
그리 말하는 황후의 손엔 어느샌가 검이 들려 있었다.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검날이 스치는 공기마저도 베어 버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계속해서 쭉 가면 밖으로 나가게 될 거야. 그곳에 그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황후 폐하…….”
“그리 부른다고 내가 검을 안 쓸 건 아닌데?”
우리의 이별이 이렇게 애절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며, 황후가 호호 웃었다.
“아, 그전에.”
툭.
순식간에 지나간 황후의 검날 아래로 초록색 머리칼이 후두둑 떨어졌다.
깜짝 놀란 황비가 저도 모르게 황후를 표독스레 노려봤다. 이제 황비는, 아니, 우시스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며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그간 내 속을 썩인 벌이란다.”
“……속은 댁 남편이 더 썩였을 텐데요?”
“너도 썩였어.”
말을 마친 황후가 등을 돌렸다.
이제 자신의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 모든 건 저와 관련 없는 일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