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이상한 납치 (35/51)

#35. 이상한 납치

오물오물.

“오늘.”

오물오물.

“정원에 보니까.”

오물오물.

“나풋잎 하나가.”

“다 삼키고 말해라.”

‘나풋잎’은 도대체 뭔지. 펠리오가 기어코 잔소리했다. 그제야 레오니에는 입에 한가득 넣었던 오믈렛을 오물오물 씹어 꿀꺽 삼켰다.

“나뭇잎 하나가 빨갛게 물들려고 하더라.”

그러고는 즐거운 목소리로 계절의 변화를 떠들었다.

“드디어 여름이 가는구나……!”

바리아가 샐러드가 찍힌 포크를 든 채 감격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남부 출신은 다가오는 서늘한 계절에 환호했다.

“엄마는 이번 여름에 저택 밖에 한 번도 안 나갔지?”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바람직해!”

그리고 칭찬했다.

“그것이 바로 돈 많은 귀족의 여름 나기지!”

“레오 너도 안 나갔다만.”

펠리오가 한입 크기로 자른 소시지를 아이의 입에 넣어 줬다. 얼떨결에 소시지를 받아먹은 레오니에는 야무지게 꼭꼭 씹어먹었다.

“그래도 덕분에 전 안 지루하고 재미있었어요.”

이번엔 바리아가 반으로 자른 방울토마토를 아이의 입에 넣어 줬다. 이번에도 레오니에는 우물우물 열심히 씹어 먹었다.

그리곤 인상을 와락 썼다.

“……셔!”

바리아가 먹여 준 방울토마토에 묻은 샐러드 소스가 미쳤다 싶을 정도로 셨다. 덕분에 찡그린 눈코입이 얼굴 중앙에 모여 다과회를 할 정도였다.

“어, 어떡해!”

깜짝 놀란 바리아가 서둘러 물이 든 잔을 건네주며 사과했다.

“엄마가 미안해! 삼키지 말고 뱉어! 어서!”

하지만 레오니에는 고집스레 꿀꺽 삼켰다. 어찌나 시큼한지, 배 속에 떨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이걸 어떻게 먹는 거야? 이러다 속 다 상해!”

물을 한 잔 다 마셨는데도 여전히 속이 쓰리고 입에서 침이 흥건했다.

“요즘은 그냥 신 게…….”

바리아가 머뭇머뭇 변명했다. 한마디 더 하려던 레오니에는 입술만 들썩이다 포기하듯 한숨을 후, 내뱉었다. 잘 빗은 앞머리가 흔들렸다.

“의원이 뭐랬어? 몸에 좋은 것 위주로 챙겨 먹으랬잖아.”

레오니에는 이때다, 싶은 것처럼 잔소리를 마구 퍼부었다. 할 말 없는 바리아는 풀이 죽은 얼굴로 아이의 걱정 어린 말을 들어야 했다.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면서 바리아의 샐러드를 펠리오의 접시에 손수 덜어 줬다. 나 혼자 속 쓰리고 아픈 건 억울하니 아빠도 함께 경험하자는 딸아이의 갸륵하고 치졸한 속셈이었다.

“…….”

펠리오는 시큼한 드레싱 냄새가 올라오는 샐러드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북부로 돌아갈까, 싶은데.”

그리곤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뒤에 있던 하녀에게 넘겨줬다. 하녀는 레오니에가 뭐라고 하기 전에 서둘러 접시를 치웠다.

“북부로? 진짜?”

정작 레오니에는 드디어 북부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환호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괜찮아?”

그러던 중에 바리아에게 물었다.

“엄마도 북부로 가게 되어서 좋은데?”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사실 며칠 전에 펠리오에게서 먼저 이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레오니에만큼 그 소식에 기뻐했다.

일전에 북부에서 보낸 시간은 무척 짧았지만, 바리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젠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으음, 뭐 그렇다면…….”

레오니에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빨리 가는 게 좋긴 하겠다.”

아이는 곧 고개를 주억거리며 씩 웃었다. 무언가 홀로 생각을 정리했는지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어쨌건 오늘이면 급한 건 다 끝나니까!”

“그러게. 아, 펠리오 당신,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요.”

식사를 마친 세 가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페가 보레오티 가족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세 분 모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루페 아저씨! 우리 이제 북부 간대요!”

먼저 쪼르르 달려간 레오니에가 루페의 두 손을 잡고 즐거운 발재간을 선보였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에 루페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레오니에의 아이 같은 모습은 정말 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귀한 것을 보아도 이상할 게 없는 날이었다.

“저도 이제야 한숨 돌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귀족 회의만 끝나면 다 끝인 거죠?”

“예. 오늘이면 끝입니다.”

오늘 열리는 귀족 회의.

그곳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황태자 책봉과 올로르 가문의 존망 여부.’

마지막으로는 감히 보레오티를 이용하려 한 시건방진 남부의 버릇 고치기까지.

“나도 가고 싶은데에.”

레오니에가 끝말을 늘리며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어림도 없단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얌전히 집에나 있어라.”

“결국 재미는 아빠만 다 보고.”

입술이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위험하니까 걱정하는 거야.”

바리아가 삐친 레오니에를 달래며 쓰게 웃었다.

사실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그는 항상 저를 걱정하고 보살피려 할 거다.

그런 사실이 기쁘면서도 조금 답답했다.

“……다녀와서 다 이야기해 줘.”

결국 얌전히 포기한 레오니에가 아빠를 배웅했다.

“빨리 다녀와! 아니면 사고 친다?”

“속 터지는 우리 새끼.”

“별말씀을!”

“칭찬 아니다.

펠리오는 그만 철 좀 들라며, 아이의 볼을 가볍게 쓸었다.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펠리오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이어 바리아도 펠리오와 인사를 나눴다.

“조심히 다녀와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무사히 와야 해요?”

바리아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무사를 부탁했다. 손수 남편의 옷매무새를 살피는 아내의 손길은 조심스럽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입가가 느슨해진 펠리오는 그대로 아내의 손등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동시에 그의 다른 손이 바리아의 배를 조심히 어루만졌다.

아주 조심스럽고 찰나인 순간이라 근처에 있던 루페나 사용인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애 생기겠네.”

중간에서 멀뚱히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한마디 툭 내던졌다.

그제야 무안해진 부모가 스르륵 떨어지며 거리를 두었다. 아이는 혀를 끌끌 찼다.

“하여튼 젊은것들이 해가 아직 동녘인데도 시도 때도 없이 저리 붙어서…….”

“……할머니?”

루페는 오랜만에 아가씨에게 돌아가신 할머니를 투영했다.

“그럼 다녀오지.”

가족들과 인사를 마친 펠리오는 루페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섰다.

“다녀와!”

“다녀오세요.”

레오니에와 바리아는 펠리오를 배웅했다.

“……아아, 이제야 북부네.”

배웅을 마친 레오니에가 기지개를 쭉 켜며 지금 이 시기의 북부를 떠올렸다.

“엄청 서늘하겠지? 늦가을엔 눈이 내릴 거고.”

“눈이 내리면 곧 레오 생일이네?”

“이번에는 어떤 선물을 받을까!”

레오니에가 폴짝폴짝 뛰며 아직 받지도 않은 선물을 기대했다.

“갖고 싶은 거 있어?”

물어봄과 동시에, 바리아가 서둘러 딸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나가고 화려한 것들은 전부 레오니에에게 둘러 줘야 할 판이었다.

“……가족사진.”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어?”

골똘히 고민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한 바리아가 한 번 더 물었다.

“아니, 그, 초상화? 그런 거!”

“초상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바리아가 한 번 더 물었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자신이 가장 바라는 걸 말했다.

“아빠랑 엄마랑 나, 이렇게 가족 그림 그리면 좋겠어.”

그래서 역대 보레오티의 초상들이 걸린 복도에 큼지막하게 걸어 두고 싶다며, 레오니에는 손으로 큼지막한 액자를 그리며 말했다.

“그렇게 매년 가족들끼리 그리면 좋겠는데…….”

“…….”

“싫어?”

레오니에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싫을 수 있어.”

감동한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꼬옥 껴안았다. 레오니에도 바리아를 꼭 껴안았다. 사용인들은 그런 모녀를 감동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레오는 정말 착하구나.”

바리아가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넘겨주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랬어. 레오 넌 항상 나를 구해 주고 기쁘게 해 줬단다.”

바리아의 두 번째 삶에 찬란한 희망과 빛을 가져다준 건 레오니에였다.

보레오티 저택으로 데리고 와 준 것도, 낯선 이곳에 쉽게 적응하게 도와준 것도, 제게 소중한 사랑을 전해 준 것도. 전부 이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당신을 향한 사랑보다, 레오를 향한 사랑이 더 큽니다.’

언젠가 펠리오가 했던 청혼이 떠올랐다. 그는 저와 아이를 향한 사랑 모두 진심이지만, 부모로서 자식을 먼저 생각할 때가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바리아는 그때 무척 감격했었다. 그토록 진심 어리고 신중한 고백은 태어나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식보다 저를 더 우선시했다면, 그땐 바리아가 더 실망하고 마음이 식었을 거다.

‘나도 이젠 알겠어.’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우선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따금 적정선을 대놓고 넘나드는 성희롱 발언과 과도한 근육 박애가 근심이고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런 건 다 상관없었다. 레오니에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사랑스럽고 소중한 저희의 딸이었다. 그거면 다 용서되었다.

‘……용기를 내자.’

바리아가 슬쩍 배를 만졌다.

‘레오는 기뻐해 줄 거야.’

그리고 각오했다. 레오니에가 결코 동생 때문에 섭섭한 마음을 느끼지 않도록, 혹여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쏟아질 헛된 말들 속에서 레오니에를 꼭 지켜 주겠다고.

“어서 펠리오가 오면 좋겠다.”

“아빠? 아까 갔는데?”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그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 *

“저는 일단 휴가를 내고 싶습니다.”

마차가 궁에 도착하고,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루페가 품에 고이 간직했던 소망 하나를 꺼내었다.

“폭설이 쏟아지고 공작님과 아가씨께서 마물 사냥 다녀오시는 동안만이라도요.”

“누가 들으면 내가 막 부리는 줄 알겠군.”

펠리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작 루페는 ‘그럼 안 부려 먹었냐?’라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펠리오의 뒤통수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하지만 그 패기도 펠리오의 눈짓 한 번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자본주의 비서가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 한결 공손해진 목소리로 요청했다.

“공작님도 가족분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실 것 아닙니까.”

그런 자리에 자신이 있어 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며 물었다.

다행히 펠리오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한 손으로 턱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는 상사의 모습에서 루페는 희망을 느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소중하지.”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요즘 바빠서 아내와 딸에게 좀 소홀했군.”

“그 정도는 아니십니다.”

“한동안 그네들이 바쁘겠어.”

“……예?”

루페의 미소가 굳은 진흙처럼 쩍쩍 갈라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소한지, 펠리오가 입꼬리 한쪽을 비틀어 올렸다.

“나 쉴 동안 일해야지.”

너희까지 쉬게? 그 말에 루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제 무덤을 제가 팠음을 알아챘다.

펠리오는 제 비서가 자괴감에 빠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신경은 평화롭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한 궁에 쏠려 있었다.

“……놈들의 행방은?”

귀족 회의가 열리는 카수스 궁을 코앞에 둔 펠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흐느적거리며 힘없이 뒤따르던 루페가 겨우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황제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했다. 황실 기사단과 보레오티, 레보오 세 기사단이 황성 내를 샅샅이 뒤지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자 펠리오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자살했나?’

하지만 그 가능성은 곧 철회했다. 황제는 스스로를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워하는 족속이었다. 거기다 겁도 많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할 만큼 배짱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누군가 숨겨 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올로르일 게 뻔하고.

펠리오는 곧 올로르의 행적을 물었다.

“올로르 저택 내 사용인의 증언에 따르면 상당히 예민하다고 합니다. 자작의 분풀이로 다친 하녀만 벌써 넷이랍니다.”

“역겨운 짓만 골라 하긴.”

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자였다.

저보다 약한 사람에게만 손을 대는 꼴이 스스로 나약하고 한심한 놈이라고 소리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지만 올로르 자작 영식은 차분하다고 합니다.”

“……차분?”

그 말에 펠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루페 역시 조금 전 자신의 말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숨김없이 상사에게 보고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명예의 의식 이후론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내에게 손을 올리는 건 일상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이런.”

펠리오는 제 처제의 안타까운 일을 짧게 동정했다.

‘바리아는 모르게 해야겠군.’

마음씨 약한 아내가 이 사실을 알고 혹여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바리아의 상냥한 성품은 그런 놈들에게 쓰일 정도로 값싼 것이 아니었으니.

“그랬는데, 말씀드린 것처럼 얼마 전부터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졌다고 합니다.”

“약물 가능성은?”

루페가 고개를 저었다.

‘잔꾀라도 떠올렸나?’

멈추었던 펠리오의 다리가 다시 움직였다.

‘추락한 독수리 한 마리를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기껏 올로르의 손에 들어간 거라곤 스스로 날개를 꺾은 황제뿐이었다. 그를 다시 궁에 데려오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이미 궁내 힘의 흐름은 황후에게 쥐여 진 상태였다. 쥐여 진 상태였다.

그렇게 둘은 카수스 궁에 도착했다.

귀족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 내부에는 먼저 도착한 귀족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펠리오가 나타나자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리오는 사뭇 부담스러운 그들의 인사를 당연하단 듯이 받았다.

“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루페가 펠리오에게 말했다. 귀족 회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루페는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북부로 돌아가면.”

나서려는 루페의 등 뒤로, 펠리오가 넌지시 말했다.

“휴가 정도는 챙겨 주지.”

“공작님……!”

감동한 루페는 연신 꾸벅거린 뒤에야 궁을 나갔다.

“제 남동생을 너무 부려 드시는 것 아닙니까?”

이를 지켜보던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유가 넘치시는군.”

펠리오가 가소롭단 듯이 입가를 비틀었다.

“독립한 막내한테 신경 쓸 여유가, 오늘은 없을 터인데?”

비아냥 가득한 웃음은 주변에 있던 귀족들을 움츠리게 했다.

의도치 않은 성과였지만, 펠리오 본인은 아주 만족했다. 이제야 저 치들이 보레오티의 무서움을 다시 깨달은 듯했다.

‘그래야 조용하지.’

나중에 둘째가 태어났을 때, 또 겁을 상실하고 이상한 헛소문을 퍼트려 레오니에를 곤란하게 해선 안 될 일이었다.

혹여 겁을 상실하고 또 그랬다간.

‘……꽃꽂이를 해 볼까.’

북부 산맥 기슭에 ‘머리’ 꽃을 예쁘게 꽂아 장식해 두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본디 꽃이란 사람의 심신을 달래 주는 효능이 있다고 하니, 꽃꽂이로 마음을 달랜 뒤에 태교에 집중하면 딱 좋을 듯했다.

‘그리고 근육 타령은 금지하고.’

사실, 펠리오의 가장 큰 골치는 이제 황제나 올로르가 아니었다.

바로 장녀의 동생 교육이었다.

근육에 미치다 못해 환장한 자칭 ‘근육 박애자’가 기어코 동생까지 변태로 만들려고 아주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펠리오는 그날 레오니에가 들려준 동생 육아 계획에 머리가 아찔했다. 쫄쫄이 훈련복을 입고 싶다고 제 눈에 흙을 뿌리려던 덩어리 시절이 겹쳐 떠올랐었다.

‘그 변태를 어쩐담.’

말로 타이른다고 근육 탐미를 멈출 아이가 아니었다.

‘둘째는 꼭 정상으로 키워야 해.’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넘쳐났다. 향기로운 꽃, 훌륭한 명화.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해괴한 걸, 근세포의 집합 조직들을 연약한 생명에게 보여 주고 중독시킨단 말인가.

펠리오는 언젠가 태어날 아기가 기사들의 울퉁불퉁한 근육을 보며 까르르 웃는 모습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레오니에의 전파력은 가히 엄청났다. 바리아가 멋모르고 레오니에를 정화해 보겠다고 나섰지만, 결국엔 본인이 근육에 눈을 떠 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다 펠리오에게 반했고.

‘……괜찮은가?’

펠리오는 순간 흔들렸다.

“너 얼굴이 왜 그래?”

그런 친구의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카니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아도 되느냔 카니스의 요구에, 펠리오는 흔쾌히 허락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회의가 열릴 때까지 여유가 있었다.

“내 얼굴이 어땠는데?”

“그 잘난 얼굴에 섬뜩한 웃음이 걸렸더라.”

“……웃음?”

“난 ‘섬뜩’에 조금 더 힘을 주고 싶다만.”

카니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뭐 좋은 일 있다고 웃어? 딸 생각했어?”

“했다면 했지.”

다만 속 터지는 육아 고민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웃고 있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리고 웃는 저를 보며 레오니에를 생각했냐는 카니스의 물음도 놀라웠다.

그런 뜻을 담아 친구를 보고 있으니, 카니스가 씩 웃었다.

“넌 네 딸 이야기할 때면 자주 웃잖아. 그래서 찍어 맞췄지.”

“…….”

“물론 영애의 유별난 취미를 걱정할 땐 세상 심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후자야.”

“오오, 그래?”

카니스가 킥킥 웃었다. 그는 자식 때문에 고뇌하는 펠리오가 여전히 신기했다. 하지만 그런 친구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친근한지 모른다.

언젠가, 카니스는 어린 레오니에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영애께서 펠리오의 가족이 되어 주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카니스는 알았다. 외로이 겨울을 보내던 검은 맹수를 ‘사람’으로 만들어 줄 사람이 바로 레오니에라는 걸.

“행복하지?”

카니스가 물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펠리오가 정색했다. 그 모습에 카니스는 웃음이 터졌다.

“이게 다 널 소중히 생각하는 내 진심 아니냐.”

“네가 그러니까 레오가 나한테 널 엮었나, 싶다…….”

“아직도 그런 짝짓기를 하시냐.”

카니스가 두 팔로 제 어깨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내지르는 소리가 얼마나 가냘픈지,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짝짓기라고 하지 마.”

그 와중에 펠리오가 자식을 편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 어느 귀족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무 늦는 거 아닙니까?”

어느새 귀족 회의가 열릴 시각이 한참 지나 버렸다. 그런데도 황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올로르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회의에 필시 참석해야 할 두 사람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자연히 펠리오에게로 향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건 보레오티 공작이었다.

“내겐 귀족 회의를 시작할 권리는 없는데?”

펠리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귀족 회의를 주최하고 진행하는 건 엄연히 황실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조언이 필요하다면.”

선심 쓴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 그가 이어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그러고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러시다면야.”

카니스도 이에 동의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조심스럽게 꺼낸 건 아이들이 그려 줬다는 초상화였다.

펠리오는 곧 제 말을 후회했다.

“우리 우피 그림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화가가 따로 없다니까? 그리고 여기 피누가 그린 것도 봐봐! 내 눈썹 색을 절묘하게…….”

그렇게 친우의 자식 자랑을 귀 따갑게 듣고 있던 중이었다.

이제 좀 작작 하라고 한마디 하려던 찰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처음엔 다들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곧 저 초췌한 몰골의 늙은이가 올로르 자작이란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

“…….”

다들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동안이었던 자작은 몰라볼 정도로 늙어 버렸다. 단기간에 늙어 버려 주름이 짙어졌고 피부마저 푸석해졌다.

그간 올로르 자작이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펠리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 흉측하고 겁먹은 노인의 얼굴이야말로, 올로르가 그간 숨겼던 추악하고 진실된 몰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빤히 보고 있던 펠리오는 자연히 올로르 자작과 눈이 마주쳤다.

자작은 펠리오를 보자마자 고개를 휙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오, 올로르 자작…….”

“안녕하십니까.”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귀족들이 다가가 조심히 인사를 건네었다. 하나 자작은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아래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야.”

카니스가 저길 보라며 자작을 가리켰다. 건네는 인사도 무시한 채 홀로 앉은 올로르 자작이 무어라 계속 중얼거렸다.

불안한 듯이 잘게 떨리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푹 빠진 광신도의 절실한 기도 같았다.

그러다 이따금 눈을 들어 펠리오를 힐끔거렸다. 섬뜩한 웃음을 히죽거리기도 하고, 겁에 떠는 것처럼 휙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 괴이한 모습에 올로르 자작이 걱정되어 곁에 있던 귀족들마저 흠칫거리며 거리를 두었다.

“드디어 실성했나?”

카니스가 중얼거렸다. 레보오의 미친개도 미친 인간은 섬뜩했다.

“저래서야 배상이나 제대로 받을지 모르겠네요.”

어느새 곁에 온 오르티오 후작이 참견했다.

“후작님, 아직 배상금을 덜 받으셨나요?”

카니스가 얼마 전에 본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올로르 가문은 막대한 금액을 여러 가문에게 배상했고, 그 가문 중엔 오르티오 후작 가문도 있었다.

“약 제조 값은 받았는데, 명예의 의식에서 저 집 아드님이 제 남편의 실력을 무시했던 명예 훼손 건은 아직 덜 받았답니다.”

오르티오 후작이 부채 뒤로 얇은 웃음을 흘렸다.

‘알차게 뜯으시네…….’

카니스가 혀를 내둘렀다. 하나 오르티오 후작의 남편 사랑이 극진한 건 워낙 유명하니, 그러려니 했다. 돈만 뜯는 것도 많이 참고 봐주는 것일 터이니.

“그나저나 상태가 이상한데.”

오르티오 후작이 가늘어진 눈초리로 올로르 자작을 보았다.

“약을 한 것 같진 않고.”

올로르 자작이 힘든 상황에 처한 거야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저렇게 늙었다는 건,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공작님.”

오르티오 후작이 속삭였다.

“곧 ‘시작’한다고 합니다.”

“황후 폐하는?”

“황비와 함께랍니다.”

그 말에 펠리오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늘 차고 온 건 레오니에가 처음 만들어 선물했던 ‘1호’ 손목시계였다.

“…….”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사실 올로르 자작이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리에 앉은 자작이 괴상한 모습을 보일 때부터, 저를 힐끔 보며 미친놈처럼 웃을 때부터.

이유 모를 불길함에 가슴 깊숙한 곳이 술렁거렸다.

‘송곳니가…….’

펠리오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바리아의 임신을 확인한 뒤로 쥐 죽은 것처럼 얌전했던 맹수의 송곳니가 들썩거렸다.

그 이유 모를 움직임은 점점 커져 가더니, 이젠 심장 박동마저 빨라질 정도였다.

“너 왜 그래?”

“공작님?”

이상함을 느낀 카니스와 오르티오 후작이 펠리오를 불렀다. 그러나 펠리오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젠 숨마저 가빠졌다.

뭔가 이상했다. 지금껏 송곳니가 많은 예측을 도와주었지만,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 처음이었다.

펠리오가 이 낯선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찰나였다.

“……뭐지?”

우연히 함께 일어난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창가로 향했다. 그는 창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어수선한 궁 밖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퍽 심각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소란스럽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렇다면 곧 이곳으로도 사람이 오겠군요.”

바깥 분위기를 따라 회의장 내부도 술렁거렸다. 오르티오 후작과 카니스가 그 순간을 이용해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펠리오만이 그 속에서 혼자였다. 귓가에서 카니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이제 부르는 목소리가 자못 심각해졌다.

그럼에도 펠리오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는 제 몸속에서 쉼 없이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송곳니에 집중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송곳니가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펠리오는 이제 불안과 함께 충격도 느꼈다. 세상 잘난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통제에 애를 먹는 경우는 레오니에와 바리아 이후로 처음이었다.

“실례합니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근처에 있던 귀족이 밖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실례합니다.”

또 한 번 목소리가 자신의 존재를 밝혔다. 그제야 귀족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엔 짙푸른 망토를 두른 어린아이가 있었다. 어른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아이의 단발머리는 어두운 푸른색이었다.

“안녕하셔요. 저는 유니시아 오르티오입니다.”

바로 오르티오 후작의 딸이었다.

아이는 후계 수업의 일환으로, 오늘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어머니를 따라와 비서직을 대신 수행하는 중이라는 설명도 야무지게 덧붙였다.

“보레오티 공작님.”

그러고는 펠리오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작님의 보좌관인 리코스 자작이 급한 용건이 있다고 합니다.”

“리코스 자작이?”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그럼 잠깐 실례하지요.”

양해를 구하고 회의실을 나서던 펠리오는 올로르 자작을 스치듯 보았다. 자작은 회의장을 나서는 펠리오를 보며 웃고 있었다.

겁에 질린 미소였다.

“공작님.”

회의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뒤, 유니시아가 펠리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리코스 자작은 공작님을 찾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무언가 일이 있는 건 확실하군요.”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빠른 걸음을 멈춘 유니시아가 심각한 얼굴로, 그러나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조금 전, 올로르 자작 영식이 궁내 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보레오티 공작 부인과 함께.

* * *

펠리오가 나가고 얼마 안 있어서 바리아도 외출 준비를 했다.

“나도 가고 싶은데!”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엎어졌다. 아르데아가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 매일 오전마다 과외를 받는 탓에 바리아와 함께 나가지 못했다.

찰거머리처럼 매달린 딸아이의 투정에 바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 다녀올 거니까, 과외 잘 받아야 한다?”

“그깟 과외 안 받아도 돼!”

“그렇게 말하면 아르데아 스승님이 슬퍼하실 거야.”

“흥, 할아버지는 오히려 좋다고 서재로 가실걸?”

어느새 일어난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옷자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날이 한결 서늘해진 덕에 바리아는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치마를 입었다. 분홍색 머리와 잘 어울리는 초록색 치마였다.

하지만 옷자락 속 구두 굽은 아주 낮았다.

“주문한 책만 받고 바로 올게.”

아침 일찍 여는 서점에서 주문한 책이 들어왔단 연락을 받았다. 바리아는 바람도 쐴 겸 펠리오가 없는 틈에 빠르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냥 사람 시켜…….”

레오니에는 그마저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펠리오가 날 보내겠어?”

최근 펠리오는 바리아의 외출에 촉각을 곤두세웠었다. 혼자 나가는 외출은 어떻게든 붙잡아 말렸고, 어쩔 수 없다면 펠리오 본인이나 레오니에와 함께하도록 했다.

“바람만 잠깐 쐬고 올게.”

여름 내내 저택 안, 기껏해야 정원 외출이 전부였던 바리아는 저택 담 너머 바깥 구경이 하고 싶었다.

“그럼 정말 빨리 와.”

그간 답답했을 바리아를 이해한 레오니에는 제 호위 기사들과의 동행을 조건으로 물러섰다. 바리아도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제야 겨우 마차에 오른 바리아는 함께 오른 멜레스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레오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걱정이 많을까요.”

“확실한 건, 주군을 빼닮았단 겁니다.”

“레비페스 경도 그렇게 생각하죠?”

“송구한 표현일 수도 있으나, 가끔은 오싹할 정도입니다.”

“후후.”

바리아가 작게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의외죠?”

그러다가 조금 전 레오니에의 고집을 떠올렸다.

“바닥에까지 엎드리다니.”

레오니에가 칭얼거리면서 떼쓰는 거야 일상이지만,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눕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제 다리를 붙잡았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렸을 적에 주군께 한 번 그런 적이 있습니다.”

멜레스가 옛날을 떠올렸다.

“아가씨께서 주군을 속이고 기사 한 명을 협박해 말을 타고 스토커를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긴 저도 알아요.”

전직 스토커 출신이자 현직 보레오티 비서실 직원인 인세레아 리코스 자작 부인의 이야기였다.

레오니에는 그 시절 자신의 용감무쌍한 영웅담을 자랑스럽게 말했었지만, 정작 이야기를 듣던 바리아는 기겁을 했었다.

“그때 펠리오가 엄청 혼냈다면서요.”

“아주 크게 혼내셨죠.”

지금까지도 그 정도로 엄하게 혼낸 적은 없었다며, 당시를 떠올린 멜레스가 몸을 작게 떨었다.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만약 자신이 그때 보레오티 저택에 있었다면, 아주 엄하게 혼냈을 거다. 어쩌면 펠리오보다 더 엄한 벌을 줬을지도 모른다.

“제 생각이지만.”

멜레스가 말했다.

“아가씨께서 주군이나 마님의 다리에 매달려 칭얼거리는 건, 일종의 불안감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안’이란 단어에 바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마님께서 아가씨께 못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멜레스가 서둘러 정정했다. 오히려 바리아는 친자식도 아닌 레오니에를 무척 잘 보살피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

아이를 애지중지 아끼는 모습은 진정한 부모의 모습이었고, 그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주군의 다리에 매달렸을 때, 아가씨께선 마음 놓고 혼날 수 있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소리치셨지요.”

“…….”

“이따금 그런 불안감을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고아원에서 견디었던 시간, 코니에란 가면을 쓴 사우라의 배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기억이 간혹 레오니에의 평온한 나날을 헤집고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저의 무지한 의견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바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레오가 가끔 어른스러울 때가 있잖아요. 아마 그때의 슬픈 기억 때문이겠죠.”

가끔 그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 걱정일 때가 많았다.

“아마 내가 레오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그런 괴로움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마님께선 지금도 훌륭하신 어머님입니다.”

“레오한테 끌려만 다녀요.”

바리아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멜레스가 정색했다.

“아가씨는 대단한 분이니까요.”

조그마한 쥐똥이 시절부터 불굴의 변태력을 자랑한 아이를 누가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거로 걱정 말란 멜레스의 위로에, 바리아가 결국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어머.”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멜레스가 휘청거리는 바리아를 서둘러 부축했다. 바리아가 놀란 눈으로 멜레스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멜레스가 험악한 인상을 한 채, 창문을 열어 함께 온 기사들에게 물었다.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와 말들을 진정시키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끼어들었어.”

파보가 상황을 보고했다.

“마님께선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친 곳 없어요?”

몸을 추스른 바리아가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말들도 놀라긴 했으나 곧 진정될 낌새입니다. 아이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요.”

그 말에 바리아가 가슴을 쓸었다.

“마부에게 난 괜찮다고 전해 줘요.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하는데.”

아마 가장 놀랐을 사람은 바로 마부였을 터다. 바리아는 자신이 탔다고 평소보다 훨씬 서행하던 마부가 고마웠기에 더욱 걱정이었다.

“아이는…….”

바리아가 창문을 통해 밖을 살폈다. 기사들이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살피고 있었다.

“……뒷골목에 붙잡힌 아이 같습니다.”

함께 보던 멜레스가 말했다. 아이가 넘어진 자리에는 바구니가 엎어져 있었다. 그 안에는 반쯤 시들시들해진 들꽃 몇 송이가 담겨 있었다. 그중 몇 송이가 말발굽에 짓이겨져 있었다.

“보호자가 없는 걸까?”

바리아가 겁에 질린 아이를 보며 안타까이 중얼거렸다.

“저런 아이들은 오히려 부모가 길거리로 내모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든 꽃을 팔아 얼마나 벌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모은 조그만 푼돈도 아이의 뒤에 도사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최악의 경우, 귀족에게 돈을 뜯기 위해 어린아이를 일부러 내던지기도 했다.

물론 이 방법에는 부작용도 많았다.

‘최근에 치안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행방불명된 황제를 찾기 위해 기사들이 황성 내부를 자주 돌아다녔었다. 그 덕에 치안이 좋아지는 부수적 효과도 얻었다.

‘하필 보레오티 마차에…….’

바리아는 저 아이 뒤에 어떤 악인이 숨었는지 몰라도, 그들이 아주 끔찍한 미래를 맞이할 거라 확신했다.

“아이를 한번 살펴야겠어요.”

“저도 함께 내리겠습니다.”

멜레스가 문을 열어 바리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마차 문을 열고 나온 바리아를 본 기사들이 아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괜찮니?”

바리아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무척 겁에 질린 상태였다. 바리아는 마차에 치일 뻔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손을 내밀어 몸을 살펴봐도 되냐고 물으니, 아이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손바닥이 까졌네.”

바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의 조그만 손바닥에는 바닥에 쓸려 생긴 상처가 선명하게 나 있었다. 시뻘건 생채기는 핏방울까지 맺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건 아이의 손에 보이는, 지금 난 생채기보다 훨씬 오래된 상처의 흔적이었다.

아이가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버티어 왔는지를 보여 줬다.

“아가씨도 이랬는데…….”

“야.”

마누스가 서둘러 프로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뒤늦게 프로보가 입을 꾹 닫았지만, 바리아는 이미 다 들어 버렸다.

‘고아원은 지옥이었어.’

언젠가 레오니에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필 레오니에가 지냈던 고아원은 본디 인신매매를 자행하던 범죄자 소굴이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방치하고 폭행하기까지 했다. 돈을 받고 팔아넘긴 건 말하기도 입 아팠다.

나중에 펠리오가 팔려간 아이들 몇몇을 찾긴 했지만, 소식이 묘연한 아이들이 더 있다고 했다.

“이름이 뭐니?”

그때 들은 이야기 탓인지, 바리아는 아이에게서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케, 켈라…….”

아이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예쁜 이름이구나.”

“…….”

“아픈 곳은 없니? 손은 괜찮아?”

“괘, 괜찮아요…….”

더듬거리며 말하던 켈라가 딸꾹질을 했다. 바리아는 그런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수 정리해 줬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지, 집에…….”

“혹시 동생이나 언니, 오빠는 있어?”

“어, 언니는, 아파서 죽었고…….”

더듬거리는 켈라의 목소리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바리아는 마음이 저리는 걸 애써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동생은, 남, 남동생인데, 배가 고프다고…….”

바리아는 아이의 더듬거리는 말을 차근차근 들어줬다. 그러나 아이의 더듬거리는 말투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근처에 있구나.’

아이의 목줄을 쥔 새끼가.

“켈라. 내가 네 소중한 꽃들을 망가트렸으니, 그 값을 대신 치를게.”

바리아가 바닥에 떨어진 꽃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꽃이 너무 예쁘구나, 향기도 무척…….”

“아, 아아!”

시든 꽃을 코 가까이 가져가려는데, 켈라가 비명을 지르며 바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하나 그보다 먼저 바리아가 동작을 멈췄었다.

‘……방금 뭐야?’

바리아가 놀란 눈으로 제 손을 보았다. 꽃을 떨어트린 손은 수전증이라도 온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기사들이 서둘러 바리아와 켈라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바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바리아의 정신은 온통 제 손으로 향했다.

‘몸이 아니라…….’

찰나의 불길함 따위를 느껴 몸이 먼저 움직인 게 아니었다. ‘무언가’가 팔을 붙잡았다.

“안 돼! 안 돼!”

멍하니 있던 바리아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켈라의 손에는 조금 전에 바리아가 놓친 꽃이 쥐어져 있었다. 켈라는 아예 꽃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마, 맡으면 안 돼요! 이거 맡으면 죽어요!”

두려움 서린 어린아이의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미안해요! 자, 잘못했어요!”

“켈라, 울지 말고 말해야지.”

바리아가 괜찮다고 다독였지만, 켈라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도, 동생이 붙잡혔어요!”

“동생이라면, 남동생?”

“시키는 대로, 아, 안 하면, 동생이 죽는다고……!”

“진정해!”

바리아가 켈라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나는 제법 높은 귀족이란다. 여기 계신 기사분들은 아주 강해. 네가 솔직하게 말해 준다면, 켈라 널 도와주겠다고 약속할게.”

“흑, 흐윽…….”

“천천히 말해. 누가 널 밀쳤니? 누가 시켰어?”

“이름은 몰라요…….”

겨우 진정한 켈라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노, 노랑? 밝은 노란색, 눈, 눈동자…….”

“밝은 노랑?”

“이, 이거…….”

켈라가 마누스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마누스가 제 피부색과 잘 어울린다며 최근 즐겨 다는 황금색 브로치였다. 바리아와 기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누나!”

그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케아!”

사색이 된 켈라가 당장 골목으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파보가 그보다 빨리 아이를 붙잡아 품에 안았다. 켈라는 버둥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동생 이름을 불렀다.

“케아! 케아!”

“……저 미친 새끼!”

파보의 입가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기사들이 바리아를 둘러싼 채 검에 손을 올렸다.

곧 골목 그림자에 가려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켈라의 동생이라는 케아였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고, 누추하게 바래진 옷이 켈라의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경악게 한 건 케아가 아니었다. 바로 케아의 목에 작은 검을 겨눈 남자였다.

“꺄악!”

골목 어귀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어수선했던 주변 분위기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저 사람……!”

“그,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몸이 안 좋아서 궁에 있다며?”

심지어 그들 중 몇몇 귀족이 아이를 위협하는 남자의 정체를 눈치챈 듯했다.

‘큰일이다……!’

바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황제가 미쳤을 거란 건 일찍이 짐작했지만, 설마 인질까지 잡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엔 바리아도 저 남자가 황제라고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시든 꽃을 파는 켈라의 옷보다 더럽고 후줄근한 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원래라면 화려한 장식이 달렸을 터나, 지금은 걸레로도 쓰지 못하는 넝마가 되었다.

수더분한 황갈색 머리는 며칠을 제대로 못 감아 뭉텅이로 나뉘었고, 옷 너머로 드러난 살갗엔 까만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초점 없는 흐릿한 눈동자만이, 이 제국의 황제만이 지닌다는 황금빛을 품고 있었다. 그 황금색 눈동자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강조하려는 발악 같기도 했다.

“마님.”

멜레스가 조용히 말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프로보가 동행할 겁니다.”

“하지만 저 아이가…….”

“저희에겐 마님이 최우선입니다.”

“멜레스!”

“괜찮습니다.”

파보가 켈라를 바리아에게 보내 주며 말했다.

“글라디고는 제국 최강의 기사단입니다. 인질범 제압은 물론이고, 아이까지 무사히 구해내겠습니다.”

“마님, 서두르십시오.”

묵직한 마누스의 재촉이 이어졌다. 그제야 바리아가 켈라와 함께 마차로 향했다. 먼저 마차 앞에 도착한 프로보가 두 사람을 마차에 태웠다.

“케, 케아! 케아!”

“걱정 마.”

프로보가 울먹이는 켈라를 위로했다.

“우리가 반드시 네 동생을 구해 줄게.”

“저분들은 아주 강한 기사님들이란다. 케아를 무사히 데려올 거야.”

바리아가 켈라를 꼭 안아 줬다. 그제야 조금 침착해진 켈라가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바리아가 장하단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출발하…….”

프로보가 이어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커헉!”

누군가의 처참한 단말마가 그들의 발을 붙잡았다. 바리아가 마차 밖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마치 세상의 모든 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 이상한 속도를 따라, 황제 역시 검붉은 피를 토하며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케아의 목에 겨눴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와 동시에 케아가 황제의 떨어지는 팔을 뿌리치며 도망쳤다.

하지만 케아는 곧 붙잡혔다.

아까보다 강한 힘을 지닌 팔에, 망설임이 없어진 칼날에.

바리아도, 기사들도, 사람들도.

모두 황망한 눈으로 황제의 죽음을, 그것을 초래케 한 범인을 보았다.

“……미친 새끼!”

바리아가 이를 갈았다.

황제의 등을 밟고 양지로 모습을 드러낸 레무스 올로르가 미친놈처럼 히죽 웃었다.

얼마나 끔찍하고 섬뜩한 웃음인지, 바리아는 한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과거의 한순간을 꺼내었다.

‘대업을 방해하는 집안의 수치를.’

죽음으로 끝을 맺었던 첫 번째 삶에서 바리아의 두 눈에 담았던 마지막 사람이 레무스였다.

‘집안의 가보로 처리해 달라고.’

그는 에르바누 백작이 건넨 가문의 가보로 바리아를 죽이기 직전, 웃으며 이런 말들을 했었다.

‘당신의 죽음은 단순 가출로 처리될 겁니다. 철없는 장녀가 자유를 꿈꾸며 가출했단 이야기는 은근히 잘 먹히거든요.’

높이 치켜든 단검은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고, 단검에 비치던 레무스는 지금처럼 역겹게 웃었었다.

사랑하는 남편, 아이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탓일까. 끔찍한 과거를 잊고 있었던 바리아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저것’은 허울 좋은 가면 뒤로 흉악한 본성을 숨기는 것만 탁월한 게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이용해 왔으며, 그러다 이용 가치를 잃으면 바로 버렸다. 버리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역겨운 사랑을 속삭인 후 버리거나.

너의 탓이라 비난하며 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죽여 버리든가.

어린 레지나는 그의 더러운 욕망을 사랑이라 믿었다가 죽었고, 영악했던 로타는 마음을 조종당해 레무스의 그른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아우스트 공작 영식은 가까스로 살았으나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살해당했다.

‘나도…….’

바리아는 죽은 황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도 저랬겠지.’

분명 조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황제의 ‘몸’은 이제 ‘시체’가 되어 갔다. 만지지 않아도 시체의 체온이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리아는 그런 황제의 시체가 레무스에게 살해당한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괴물……!”

바리아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레무스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추악해졌다. 이전 생에서는 죽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끔찍한 괴물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그 작은 욕설을 듣기라도 했는지, 레무스가 킥킥 웃으며 인질로 잡은 아이의 목에 칼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케아!”

지켜보던 켈라가 소리쳤다. 남동생인 케아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동생을 위하는 착한 누나구나.”

레무스가 켈라를 칭찬했다. 바리아는 켈라를 제 품에 가둔 채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아이는 저 끔찍한 괴물을 볼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러고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레무스에게 물었다.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쓸모없는 걸 치웠지.”

“쓸모라니…….”

바리아는 기가 막혔다.

“넌 지금 사람을 죽였어.”

“이게 사람으로 보이나?”

사람도 사람 같아야 사람이지 않으냐며, 레무스가 되물었다.

“뭐……?”

바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레무스와 수비테오 황제는 지금껏 함께해 온 동지 같은 관계였다. 저 두 사람이 지금껏 해 온 짓은 어떤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는 끔찍한 것들이었다.

손잡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도 용서받지 못할 족속들이지만, 적어도 서로에겐 일말의 배려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 멍청한 것을 데리고 다니느라 참 많이 참았지.”

레무스는 그런 바리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바닥에 쓰러진 황제의 머리를 발로 퍽퍽 찼다.

“아둔하고, 모자라고, 자격지심만 가득한 쓰레기.”

욕을 하다 욱한 레무스는 아까보다 세게 황제를 찼다. 그새 희뿌옇게 흐려진 황제의 눈이 흔들거렸다. 지켜보는 바리아의 미간에 그늘이 생겼다.

괴물이 진정 사람의 탈을 벗었다.

“덕분에 내 계획이 다 어그러졌어.”

“…….”

“아아, 아니지.”

레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말을 정정했다.

“사실 진짜 내 계획을 망친 건 바로 너지.”

레무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이 재빨리 검을 뽑았다.

하지만 누구도 레무스를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그가 잡은 어린 인질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무슨……!’

‘몸이……!’

글라디고는 마물을 사냥하는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한데 고작 인질로 위협하는 저 비루한 족속에게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몸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상황이 가장 답답한 건 글라디고였다. 레무스에게 겁을 먹은 것도 아니고,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할 것도 아니건만, 자신들의 몸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 틈에, 레무스는 바리아가 있는 마차 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레무스에게 붙잡힌 케아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했다.

케아는 이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목에 닿은 서늘한 칼날에 결국 바지에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다행히 레무스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케아는 더 큰 곤욕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가오면 이 애새끼의 목숨은 끝이야.”

레무스가 칼날을 목에 더 가까이 겨누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둬.”

바리아가 제발 아이를 놓으라고 말했다.

“이러면 당신한테만 손해야. 왜 제명을 재촉하는 거냐고.”

“이미 난 끝이야. 그러니 이 이상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달라질 건 없어.”

“적어도 죽진 않잖아!”

“난 벌써 죽은 거나 매한가지야!”

레무스가 날카롭게 외쳤다. 침까지 튀기며 발악하는 그의 붉은 눈은 희번덕거렸다.

“난 이제 얼굴도 못 들고 다녀! 사람들은 날 미성년자한테 성욕을 느끼는 쓰레기로 보고, 남의 자식을 제 자식이라 주장하는 미친놈 취급한다고!”

“…….”

“내 사랑은 깨끗했고, 그 아이는 내 핏줄인데!”

자신은 진실했다. 하지만 세상은 저를 거짓말쟁이에다 소아 성애자라고 손가락질했다. 빛나던 명성과 인기는 파도가 쓸고 간 모래성처럼 흔적조차 없어졌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신뢰받던 레무스는 처참해진 제 처지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니까…….”

어느새 레무스는 기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마지막 발악 정도는 해야지.”

바리아의 앞에 선 레무스가 마차를 가리켰다.

“안내해 주라고, 보레오티.”

비릿한 미소 너머로 광기가 느껴졌다.

“산맥 뒤에 있다는 신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 * *

“……선생님은요.”

열심히 고전 문장을 필기하던 레오니에가 문득 손을 멈췄다.

“왜 그렇게 북부 신화를 연구한 거예요?”

“으음, 갑작스러운 질문이군요.”

한창 고전 문장을 읽고 있던 아르데아가 안경을 벗었다. 책상 위에 올려 둔 모래시계를 보니 모래가 절반 정도 떨어져 있었다.

“흥미롭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르데아는 레오니에한테 쉬는 시간을 줄 겸, 대화에 참여했다.

“저는 아카데미 학생 시절부터 각 지방의 구전이나 전설 같은 것을 좋아했습니다.”

작위를 이어받아야 하니 공부는 포기해야 했지만, 아르데아는 취미 삼아 자료를 수집하고 홀로 연구했었다고.

아르데아는 그 시절을 아련히 떠올렸다.

“…….”

레오니에가 바싹 마른 눈으로 아르데아를 흘겨봤다. 기어코 연구에 미쳐서 처자식을 버리고 수도로 상경한 인간이 저리 촉촉이 젖은 눈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건 좀 탐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의문점이 들더군요.”

“의문점이요?”

“네. 지역마다 전승되는, 혹은 전승되었던 구전엔 공통되는 무언가가 등장했지요.”

바로 ‘산맥’이었다.

“지금은 남부의 바다에서 생명이 기원했다는 가설이 유력하지요. 하지만 남부의 구전과 오래된 유적지에도 산맥이 등장합니다.”

아르데아는 그 산맥이 북부에 있는 산맥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의외로 쉬웠습니다.”

아르데아가 주름진 입가를 씰룩이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3층에 그려진 거요?”

아르데아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수도 저택 집무실까지 이어져 있는, 복도 천장 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였다.

“서사가 담긴 그림이지 않습니까. 그 그림은 초대 공작이 남긴 그림이라고도 합니다.”

“초대 공작…….”

“그 그림들 밑에 오래된 기호가 있는데, 그게 유적지에 그려진 것과 같은 것이지요.”

거기서 많은 것을 알아냈다며, 아르데아가 자신의 성과를 뿌듯해하며 자랑했다.

‘……뭐야?’

그러나 레오니에는 퍽 당혹스러웠다.

‘이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연구할 수 있었던 거야?’

아르데아는 학문과 연구에 푹 빠져, 골수 귀족의 의무를 저버리고 가출까지 했다.

아내 입장에선 죽어도 시원치 않은 놈이고, 북부의 입장에선 아주 괘씸한 죄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죄인이 수도 저택에 그려진 그림을 연구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이상해.’

현 보스그루니 백작은 아르데아의 아내다. 그녀가 백작위를 이어받아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건 선대 보레오티가 편을 들어줬기 때문이었다.

아르데아와의 혼인을 유지한단 조건으로.

‘하지만 그건 편을 들어준 게 아니라...’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은 귀족은 벌레보다 못했다. 그런 점에서 아르데아는 지금도 보스그루니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즉, 선대 보레오티는 아르데아의 편을 들어준 거다.

‘……선대 공작은.’

레오니에의 숨이 잘게 떨렸다.

‘이렇게 될 걸 알았나?’

선대 공작과 선대 황제는 양 가문의 악연과 달리 제법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어린 자식들까지 대동해 여러 번 만남을 가져 우정을 나누기도 했었다.

그러나 선황은 북부 산맥을 노렸고, 이를 위해 올로르라는 체스 말을 이용해 북부에 레무스를 보냈었다.

‘그럼 선대 공작은 도대체…….’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레오니에는 제 할아버지에게조차 욕을 서슴지 않았다.

‘선황이 북부를 노리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도 사이좋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던 거야?’

레오니에는 이제 심장이 쾅쾅 뛰었다.

모두가 감탄했던 두 남자의 우정은 허울뿐인 가면이었고, 무대를 가리는 장막이었다. 둘은 가려진 무대 뒤에서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럼 레지나는?’

가출한 레지나를 수색한 건 펠리오였다. 하지만 레지나를 친자식보다 아꼈다는 선대 공작이 수색을 명했단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설마…….’

레지나와 레무스의 관계를 알았나?

두 사람이 어디 있었는지 알았나?

알았는데도 찾지 않았나?

‘……내 존재를 알았나?’

선대 공작 부부가 사고로 죽었던 해는, 레오니에가 태어났던 해이기도 했다.

“…….”

끔찍한 ‘설마’가 떠올랐고, 레오니에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레오니에가 쾅쾅 뛰는 가슴을 손으로 꾸욱 누르며 애써 침착하려 했다. 그 음울한 추측은 나중에 이 모든 게 끝나고 아빠한테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 둘 중 누가 이긴 거야?’

레오니에는 누구의 손도 들 수 없었다. 아니, 들기 싫었다.

‘패배자 새끼들.’

아기 맹수는 바닥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들은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망령이었다.

고작 망령 따위가 아직도 이 세상에 그 미련을 드러내는 게 같잖고 우습기까지 했다.

‘이기는 건 우리야.’

이 모든 사냥을 계획한 제 가족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움직이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승자였다.

망령이 된 패배자들은 손가락이나 빨며 지켜보면 되는 일이었다.

“아가씨?”

아르데아가 썩 걱정 어린 눈으로 레오니에를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냥 좀 빡쳐서요.”

레오니에가 별일 아니라며 한 손으로 앞머리를 무심히 넘기던 찰나였다.

쿵, 쿵.

“……어?”

가슴 속 쿵쿵거림이 더욱 커졌다.

“어라?”

짜증 나는 영감들을 생각하느라 피가 빠르게 도는 줄 알았는데, 가슴 속 술렁거림이 도통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기만 했다.

“……뭐야, 이건?”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놀란 레오니에가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고, 책상 위의 종이들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가씨!”

아르데아가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아가씨!”

그때, 트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레오니에를 찾았다.

“큰일입니다! 마님께서…….”

그러나 레오니에는 트라의 보고도 듣지 않고 곧장 현관으로 내려갔다. 몸 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맹수의 송곳니가 당장 밖으로 나가라고 레오니에의 몸을 이끌었다.

그곳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멜레스가 있었다. 멜레스는 차마 레오니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만으로 모든 설명이 끝났다.

“……내 검과 망토를 가져와라!”

레오니에가 뒤따라 오던 트라에게 명했다. 트라는 황급히 몸을 돌려 명령한 것을 가져왔다. 가져온 망토를 두르고, 검을 허리에 찬 레오니에가 말했다.

“지금부터 황궁으로 간다!”

* * *

바리아는 레무스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레무스는 인질을 붙잡고 있었고,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장 아이를 죽이겠다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인질의 누나에게 동생이 죽는 모습을 결코 보여 줄 수 없었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마차에 오르는 조건으로, 바리아는 기사 중 한 명과 동행하기로 했다.

“내가 너의 뭘 믿고 따라갈 수 있겠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는데.”

“자의식이 너무 과한데?”

레무스가 비웃었다. 하지만 바리아의 조건을 선심 쓰듯 허락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상황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럼 저자를 데려가.”

레무스가 고른 기사는 프로보였다.

“나도 만일을 위해야지.”

그가 말한 만일은, 혹여 기사와 자신이 대치할 경우를 대비해 그나마 만만한 상대를 고르는 편이 좋단 뜻이었다.

당연히 그 뜻을 눈치챈 프로보는 언짢고 불쾌했다. 감히 저딴 놈에게 제 실력을 우습게 취급당한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글라디고는 최강의 기사단이야.”

바리아가 조소를 지었다.

“누굴 골랐든, 네가 이길 수 있는 분은 애초에 글라디고엔 존재하지 않아.”

“마님…….”

프로보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바리아를 보았다. 바리아가 프로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신뢰감 넘쳐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프로보는 이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엘레판 경, 가죠.”

“예, 마님!”

마차에 오르기 직전, 바리아는 남겨진 기사들을 돌아봤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러면서 켈라를 기사들에게 넘겼다. 켈라는 여전히 인질로 붙잡힌 동생이 걱정이었는지 쉬이 눈을 뗄 수 없었다.

반면 남겨진 글라디고들은 마님을 지키지 못했단 것에 치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리아는 저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탄 마차가 출발했다. 마부는 처음으로 고삐를 내던지고 싶은 심정으로 말들을 몰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마차에 탄 마님의 무사를 바라며 최대한 안전하게, 천천히 말들을 모는 것뿐이었다.

레무스가 마부에게 이른 목적지는 황궁이었다.

“북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한 마차에서 홀로 여유를 부리던 레무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황궁에 있는지 알고 있나?”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바리아가 무심히 답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바리아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꼭 쥐었다. 반사적으로 배를 감싸 보호하려는 손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임신을 들켜선 안 돼.’

그랬다간 레무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지, 이젠 해야지.”

레무스가 건너 자리에 다리를 뻗어 걸치며 말했다. 그 건너 자리엔 바리아와 프로보가 있었고, 레무스의 신발은 두 사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그들은 무서웠던 거야.”

“보레오티가?”

“정확히는 그들의 힘이.”

“……그렇다면 말이 안 돼.”

보레오티의 힘이, 맹수의 송곳니가 무서웠다면 결코 황궁 안에 북부 게이트를 두지 말아야 했다.

“무서웠으니, 곁에 둔 거야.”

레무스가 어린 인질에게 겨누던 칼을 장난감처럼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다 손가락이 긁혀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정작 레무스는 아픈 줄 모르고 더 신나게 가지고 놀았다.

“사람이란 그런 거야. 무섭고 두려운 것일수록 곁에 두는 어리석은 족속이지. 곁에 두면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져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북부 게이트를 금지하는 법률이었다.

“얼마나 멍청해!”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린 레무스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손이 지나간 얼굴 위엔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은 채였다.

“…….”

프로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진짜 미쳤어.’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이성을 반쯤 놓아 버린 레무스의 모습은 괴이함을 넘어 현실감이 도통 느껴지지 않았다.

‘마님은 괜찮으신가?’

프로보는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줄어드는 바리아가 걱정이었다. 오랫동안 단련하고 험난한 마물 사냥을 수도 없이 겪은 저도 이렇게 소름이 돋는데, 평범한 사람인 마님에겐 힘든 순간일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바리아에게 보호 마법을 건 뒤, 이 마차에 폭파 마법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인질과 마부의 희생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된다. 물론 마법을 발동한 저에게도 역시. 그래도 프로보가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 바리아였다.

“죄, 죄송해요…….”

케아가 바들바들 떨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린아이는 어눌한 말투로 하염없이 죄송하다고 말했다.

케아는 기껏해야 서너 살로 보였다. 저렇게 죄송하단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부자연스러웠다.

“왜 죄송한데?”

바리아가 케아에게 물었다. 아이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최대한 상냥하게 대했다.

“누나가, 누나야가…….”

“괜찮아, 누나는 무사하잖아.”

“무서워요. 무서워……!”

“쉬이, 괜찮아.”

아가, 아가.

바리아가 케아의 젖은 볼을 어루만졌다. 손을 뻗으려던 찰나 레무스와 눈이 마주쳤지만, 레무스는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 우는 소리가 짜증 나던 차에 퍽 잘되었단 듯이 고개를 휙 돌렸다.

“너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글쎄…….”

레무스가 비아냥거렸다.

“그건 네년 하기에 달렸지.”

“아니.”

바리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빌어먹을 북부 산맥에 가서 신을 만나고 싶다면, 넌 절대 이 아이에게 상처를 입혀선 안 돼.”

“…….”

“네가 북부 산맥에 대해 뭘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리아는 저를 데려온 건 아주 똑똑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북부 산맥에 갈 수 있는 건 보레오티뿐이니까.”

“하지만 새삼 의문인 게, 이름뿐인 보레오티도 가능하냔 거지.”

레무스가 바리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차피 너에겐 선택권이 없었을 텐데?”

바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과연 네가 내 남편과 딸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레무스는 펠리오와 레오니에를 상대해서 이길 실력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아 가장 만만한 바리아를 노렸던 거다.

이쯤 되니 서점에서 온 연락도 저자의 술수란 의심이 들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엘레판 경에게 명령해 너를 베라고 할 거야.”

죽지 않는 선에서, 바닥에 질질 끌고 가더라도 숨은 붙어 있는 정도로.

“그리고 네놈 시체를 네 아비에게 고아 먹여 주마.”

“마님……!”

프로보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바리아가 강단 있는 사람이란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제 주군에게 ‘귀엽다’라고 말하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 인간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강단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속된 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레무스마저 같은 생각이었는지, 바리아를 기이하게 여겼다.

“아니, 무서워.”

바리아가 말했다.

솔직히,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바리아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뼛속 깊이 깨우치는 중이었다.

그깟 새 책이 뭐라고. 차라리 레오니에의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나갈 것을. 바깥 공기 좀 잠깐 쐬겠다고 외출하지 말 것을.

조금만 더 악독해서, 인질로 잡힌 아이를 무시하고 가 버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끔찍한 후회도 뒤따랐다.

하나 그런 후회들이 빚어낸 최강의 공포는 레무스 따위에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날 혼낼 남편과 딸이 무서워.”

두 사람에게서 쏟아질 걱정과 잔소리가 두려운 바리아가 몸을 잘게 떨었다.

“이제 난 평생 갇혀 살겠지…….”

“……머리, 괜찮으십니까?”

프로보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물어 버렸다.

레무스도 그 생각에는 동의했다.

* * *

“여긴…….”

바리아가 허탈한 웃음을 짧게 흘렸다.

레무스가 데리고 온 곳은 바리아에겐 추억의 장소였다. 바로 재정부에서 부당한 정직을 당하고 도망쳤던 개구멍이었다.

‘그랬구나.’

이 개구멍은 올로르를 위한 것이었어. 황실 기사였던 그가 언제건 눈에 띄지 않고 외출할 수 있도록 마련된 비밀 출구.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목에 손을 얹었다. 어쩐지 황궁 벽을 보수하는 예산안이 통과되었는데도 구멍이 막히지 않았다더니, 일부러 막지 않은 거였다.

“가문에 자작 작위가 내려지기 전엔 항상 여기로 드나들었지.”

본래 개구멍의 진짜 주인이었던 레무스가 바리아에게 턱짓했다.

“먼저 들어가.”

“…….”

“쓸데없는 짓 하면, 알지?”

레무스가 칼로 케아를 가리켰다. 그런 레무스를 죽일 듯이 째려보던 바리아는 어쩔 수 없이 구멍을 통과했다.

‘북부로 데려갈 순 없어.’

구멍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바리아는 어떻게 하면 레무스를 제 선에서 끝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최악의 경우엔…….’

프로보에게 이기적인 명령을 내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리아는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고민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리아가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이어 프로보가 통과했다. 그다음엔 케아 차례였는데, 구멍을 나오는 아이의 허리를 레무스가 감싼 채 뒤따라 오고 있었다.

‘악독한 새끼.’

그 모습을 보던 프로보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북부 산맥에 사는 마물도 저렇게 끔찍하진 않았다.

“게이트를 통과하려는 건가?”

프로보가 앞서가는 레무스의 등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북부 게이트는 산맥에서 꽤 떨어진…….”

“아니.”

대답하는 레무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는 궁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예민해졌다. 프로보가 슬그머니 바리아를 제 뒤로 보냈다.

“북부에는 다섯 번째 게이트가 있지.”

어느 지역이건 게이트는 총 네 개뿐이나, 북부만이 다섯 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북부 산맥에 있었다.

“다섯 번째 게이트가 북부 산맥에 위치한다지?”

“하지만 거긴……!”

프로보는 말문이 막혔다. 북부 산맥에 다섯 번째 게이트가 있단 사실이야 익히 들어서 알지만, 지금껏 마물 사냥을 위해 올랐던 산맥에서 한 번도 게이트를 본 적이 없었다.

사냥하느라 볼 정신도 없지만, 오랫동안 기사단에 머물렀던 중진 기사들도 게이트를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분명 있다고 말했으며, 제국에서도 이 다섯 번째 게이트가 실재한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다섯 번째 게이트가 바로 신과 이어졌다고 하지.”

“레무스 올로르.”

듣다 듣다 기가 막힌 프로보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레무스를 설득했다.

“나는 그 다섯 번째 게이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통과하면 어디로 향하게 되는지도 몰라.”

그러나 그 게이트가 신이란 것과 이어졌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보는 글라디고 기사단의 유일한 마검사였다. 즉, 기사이면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오로지 실험과 연구를 통해 얻어낸, 실재하는 탐구 결과만을 믿는 괴짜들이었다.

‘신 따위가 어디 있어.’

이따금 주군 부녀의 사기 같은 실력을 보면 신이 정말 있는가, 싶기도 했다. 하나 그럼에도, 프로보는 신이란 존재에 회의적이었다.

“설령 있다 한들 너에게 뭘 해 주겠어.”

“…….”

“그러니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

“생각을 고쳤으니.”

레무스가 붉은 눈을 가늘게 휘었다.

“이러는 거야.”

살짝 갈라진 목소리에서 나온 생각의 변화는 형편없었다.

“어차피 난 끝이야.”

“그거야 뭐…….”

네가 저지른 짓이 있는데, 라고 저도 모르게 답하려던 프로보가 주책스러운 입을 서둘러 다물었다.

“보레오티는 날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거야.”

우습게도, 레무스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프로보도 그 말엔 크게 공감했다. 제 주군과 아가씨가 올로르를 멸종시키려고 작심한 걸 몇 번이고 옆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숨이나 온전히 붙어 있으면 다행이거니, 싶었다.

레무스가 그것 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황실이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건국 이후부터 줄기차게 북부의 미신을 쓸데없이 연구했을 리가 없지.”

분명 어떤 확신이 있으니까 그런 미친 짓을 수백 년 동안 이어 왔을 거다. 그리고 레무스는 그 ‘확신’이 아르데아 보스그루니의 논문에 적힌 내용임을 알았다.

“그거 아나? 사실 황실은 북부 산맥을 노리는 것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어.”

그러던 찰나에 나타난 아르데아는 황실의 오랜 비원에 불을 지펴 버렸다.

“……겨우 가설일 뿐이야.”

프로보가 반박했다. 아르데아가 발표한 건 기껏해야 어느 지역의 구전을 분석한 학문적 성과에 불과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레무스의 비웃음 섞인 말투는 그것을 미신으로 취급했던 과거와 그것을 위해 이딴 짓을 저지르는 지금이 어이없어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니 너도 네 마님처럼 입 닥치고 있어.”

레무스가 꺼림칙한 미소와 함께 바리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담을 넘어온 직후부터 바리아는 입 한 번 벙끗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자신들이 가고 있는 방향, 즉 북부 게이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님…….”

프로보는 그런 바리아가 안쓰러웠다. 혹여 본인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자책이라도 할까 걱정이었다.

잘못은 아이를 인질로 붙잡고 협박한 레무스이지, 고작 책 한 권 사겠단 핑계로 바람 쐬러 나온 바리아의 잘못이 아니었다.

바리아를 위로하려고 가까이 다가간 프로보가 일순 멈칫했다.

‘어……?’

놀란 프로보가 눈가를 비비며 한 번 더 바리아를 보았다. 그와 동시에 바리아도 프로보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바리아는 싱긋 웃으며 무슨 일이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로보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바리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내가 잘못 봤나?’

긴장한 탓인가.

하나 그렇다기엔 찰나의 섬뜩함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다 왔다.”

레무스가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그들은 북부로 향하는 게이트에 도착했다.

우습게도 게이트는 개구멍에서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성벽 근처의 숲을 반쯤 통과해 샛길로 빠져나오면서 나타난 꽤 넓은 평지에 있었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게이트는 다른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세게 움켜쥔 것처럼 비틀린 커다란 기둥과 기둥. 그리고 그 뒤에 있는 평지와 멀리 있는 건물 몇 채가 기둥 사이로 고스란히 보였다.

“초대 황제의 실록에는…….”

레무스의 가라앉은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북부 산맥에 있는 다섯 번째 게이트는 오로지 보레오티만이 이용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프로보는 이제 이 제국의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초대 황제부터 저딴 걸 기록하고 있었다니, 화는커녕 허탈한 한숨만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나라의 정당성을 나라의 정점이 다 말아먹은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장들의 힘이 강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제국은 일찌감치 멸망했을 거다. 새삼 각 지역 수장들이, 특히 제 주군이 이런 멍청이한테 시달렸을 걸 생각하니 애잔함이 느껴졌다.

“자, 그럼 보레오티 부인.”

레무스가 다시금 인질의 목에 칼을 가져갔다.

“잘 부탁한다고.”

“정말로…….”

황궁에 들어온 직후부터 말이 없던 바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로 가고 싶어?”

“마, 마님?”

프로보가 놀란 눈을 했다. 바리아의 말투가 기묘했다. 목소리는 평소 그대로인데, 내뱉는 말투나 어조가 천진난만했다. 꼭 철부지 아이 같았다.

“…….”

레무스 역시 그런 바리아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는 바리아가 겁에 질리다 못해 살짝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지금 와서 못 간다고 그러는 거면…….”

“그리 가고 싶다면, 가자.”

바리아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말투는 이제 통통 튀기까지 했다.

프로보는 이제 다른 의미로 오싹했다.

“야옹이 새끼가 봐 버렸으니, 이젠 가야 해.”

“마님!”

기어코 프로보가 소리쳤다. 조금 전 바리아의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말투는 레오니에와 유사했다.

“둘 다 안 닥쳐?”

레무스가 소리쳤다. 이어 인질이 울먹이는 소리까지 들렸다.

“됐으니 어서 게이트나 들어가! 만약 도착해서 북부 산맥으로 도착하지 않으면 그땐 다 죽여……!”

땡그랑.

레무스가 멍한 눈으로 제 손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칼을 쥔 채 인질을 위협하던 손이 바리아에게 붙잡힌 채였다. 심지어 칼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으, 으아아앙!”

그 틈에 인질로 붙잡혔던 케아가 서둘러 빠져나와 프로보 뒤로 숨었다.

“……뭐, 뭐야!”

뒤늦게 정신 차린 레무스가 잡힌 손을 빼려고 버둥거렸다.

“이거 안 놔?”

하지만 손은 빠질 기미가 없었다.

프로보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바리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레무스를 제압했다. 오히려 그런 레무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씩 웃을 뿐이었다.

“저 둘은 안 돼.”

바리아가 팔을 빼내려던 레무스를 바닥으로 밀쳤다. 레무스는 그 반동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발라당 넘어졌다.

“가야 하는 건 너야.”

네가 죽였으니, 네가 대신 가야지.

“그러니 가자.”

바리아가 레무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단검도 손수 쥐여 줬다. 그리고 그대로 게이트에 들어갔다.

그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프로보의 다리 아래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까, 까매.”

“뭐?”

“눈이, 까, 까만 거…….”

케아는 조금 전 사라진 누군가의 눈을 그렇게 묘사했다.

프로보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착각이 아니었어!’

바리아의 초록색 동공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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