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조금씩 변하고 (34/51)

#34. 조금씩 변하고

레무스 올로르가 입궁했다.

사실, 처음엔 누구도 그의 입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토록 자랑하던 올로르의 웅장하고 화려한 마차 대신 허름한 짐 마차를 탔고, 고급스러운 장식은 전혀 없는 조촐한 차림새였다.

“설마 저 붉은 머리…….”

“……야, 그 사람 아니야?”

마침 지나가던 궁인들이 레무스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올로르 맞지? 올로르 영식!”

“세상에, 저게 그 사람이라고?”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동안이었던 그의 얼굴이 폭삭 늙어 버렸다. 푸석해진 피부와 갑자기 늘어난 잔주름이 가히 두려울 정도였다. 시커멓게 그늘진 눈 밑과 충혈된 두 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레무스의 몸에선 제법 오랫동안 씻지도 않았는지 역한 냄새가 풍겼는데, 그걸 지독한 향수로 덮어 더욱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그렇게 변한 레무스는 곧장 황제를 찾았다.

“황제 폐하.”

시종이 수비테오 황제를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폐하.”

시종이 조심스레 한 번 더 불렀다. 그러자 곧 안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어깨가 크게 튀려는 걸 가까스로 참은 시종이 작게 한숨을 흘렸다. 최근 황제의 심기가 좋지 않아, 찾아오는 손님을 무시하고 저렇게 난폭하게 구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돌아가심이…….”

시종이 레무스에게 권했다. 그러나 레무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문만 노려볼 뿐이었다.

‘지가 여길 왜 와.’

시종은 이 상황이 영 탐탁지 않았다. 원래도 황제는 그리 성실하거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패악질은 하지 않는 편이라, 비위만 살살 맞춰 주면 일하긴 편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였다. 심지어 황제를 저렇게 분노케 만든 건 바로 레무스 올로르였다. 와서 좋을 게 없었다.

“제가 차후 황제 폐하께 방문 사실을 고하겠습니다.”

시종은 그런 짜증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레무스에게 한 번 더 돌아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레무스는 그런 시종을 무시했다. 스쳐 지나가면서 강하게 부딪힌 어깨에 휘청거리던 시종이 말리려던 찰나, 레무스는 문을 열었다.

“윽!”

시종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문이 열리자, 악취에 가까운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어두운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은 환기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레무스는 그런 건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얼굴로 안에 들어왔다. 애초에 그의 얼굴에선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곧 레무스는 문을 닫았다.

“자, 잠깐……!”

닫히는 찰나, 조그만 문틈 사이로 시종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이는 문이 완전히 닫히면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걸어가는 길목마다 술병들이 나뒹굴었다. 레무스는 발치에 걸리는 술병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짜증이 욱 올라오면 그대로 발로 차 버렸다.

벽에 부딪힌 술병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 조각을 밟는 레무스의 발밑에서 우지끈,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레무스가 멈춘 곳은 소파였다. 내려다본 그곳엔 수비테오 황제가 쓰러져 있었다.

황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제때 깎지 못한 수염은 지저분했고, 옷 여기저기에 술이 흘러 생긴 얼룩이 가득했다. 힘없이 떨어진 손에는 텅 빈 술병이 쥐어져 있었다.

말없이 이를 응시하던 레무스는 곧 주위를 살피더니, 근처 테이블에 있던 손잡이 달린 양동이를 들었다.

안에서는 물이 찰랑거렸는데, 원래는 술잔에 넣을 얼음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무스는 그걸 황제의 얼굴에 부어 버렸다.

“……커헉!”

수비테오 황제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물벼락에 놀란 그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제 폐하.”

레무스의 부름에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리십시오.”

양동이를 대충 바닥에 내던진 레무스는 그나마 깨끗한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너!”

그제야 레무스를 알아본 황제가 크게 화를 냈다.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저라고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닙니다.”

“네 새끼 때문에 지금 내가 얼마나 곤욕을 치르는지 아느냐!”

비틀거리며 일어난 황제는 레무스의 멱살을 잡으며 따졌다.

“그게 왜 제 탓만 있죠?”

레무스는 그런 황제를 밀치며 반박했다. 얼굴에 튄 침을 닦는 레무스의 얼굴엔 역겨움과 짜증이 가득했다. 그로서도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다.

“제 탓이 없다고는 안 하겠습니다.”

레무스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명예의 의식에서 저답지 않게 흥분했었다. 하지만 레무스는 그 죗값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귀족 사회에 얼굴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

거기다 보레오티와 우르마리티가 청구한 배상금도 문제였다. 엄청난 액수를 배상하느라 가문의 재정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하나 그런 상황까지 왔음에도 배상을 다 끝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돈을 구할 수 있는 방도도 없었다. 최근 작심하고 영향력을 과시하는 보레오티가 무서워 모두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철없는 아내의 말을 믿은 제 탓이지요.”

레무스는 이 모든 것을 로타의 탓으로 돌렸다.

“에르바누를 당장 쳐내!”

황제가 테이블 위로 주먹을 쾅 내리쳤다.

백조 목걸이를 보았다는 로타도 로타지만, 기실 황제의 심기를 가장 불쾌하게 만든 건 바로 보레오티 공작 부인인 바리아였다.

“분명 그 년이 한 짓이야……!”

지금껏 드러난 비리의 증거들은 전부 재정부 출처였다. 이를 알게 된 황실은 재정부를 조사했고, 그제야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한때 재정부 직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감히 나라의 녹을 먹었던 공무원이, 제 조국과 황실을 배신하는 짓을 하다니. 무릎 위에 올려진 황제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에르바누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레무스가 말했다. 그 말에 황제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설마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게 물어보는 황제의 말에 비아냥이 가득했다. 황제는 레무스의 취향을 잘 알았다. 그래서 명예의 의식에서도 그의 말을 믿었다.

레무스는 미성년자에게만 흥분하는 쓰레기였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역시나, 레무스는 곧장 아내에 대한 사랑을 부정했다.

“에르바누는 아직 데리고 있어야 합니다. 아내의 언니가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니까요.”

“내가 보기엔, 그 여잔 제 친정을 버렸어.”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아직 파고들 여지는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리아는 지독할 땐 지독해도, 천성은 여린 사람이니까요.”

레무스는 지금 상황에서 잡을 수 있는 건 전부 잡아야 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나 빠져나갈 탈출구는 거의 없었다.

“……북부를 포기하세요.”

레무스가 말했다. 그가 입궁한 이유는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이상 보레오티를 자극하는 건 위험합니다. 이러다간 모두 죽을…….”

“그걸 어떻게 포기해!”

그러나 황제는 말도 안 된다며 반발했다. 어느 때보다 화가 난 황제의 목 위로 굵은 핏줄이 튀어나왔다.

“그걸 위해 지금껏 제국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벨리우스 황실은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었지만, 진정한 정점은 될 수 없었다.

황실은 나름 노력했다. 꾸준히 영토를 넓히고, 귀족들을 거느리고, 막강한 부를 쌓고, 강한 군사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패배감만 짙어졌다.

보레오티는 항상 저 높은 산맥에 올라앉아 모든 걸 내려다보았다. 세상의 모든 걸 하찮게 여기는 오만한 검은 눈동자는 누구보다 높이 비상하려는 독수리의 의지를 꺾었다.

“그러니 그걸 손에 넣어야 해…….”

황제가 중얼거렸다.

“아버님조차 손에 넣지 못한 것이, 드디어 내 눈앞에 도달했다고!”

“당신은 아직도…….”

레무스가 인상을 썼다.

“맹수의 송곳니를 노리는 겁니까?”

* * *

“하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하품한 바리아가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피곤하시죠?”

곁에 있던 하녀가 안쓰러운 눈으로 바리아를 살폈다.

“나는 괜찮아.”

바리아는 요새 좀 바빴던 탓이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하녀는 결코 그것만이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피곤하시면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것만 마저 하고.”

“그럼 차라도 올릴까요?”

“그래 주겠어?”

하녀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를 준비했다. 그런 하녀를 지켜보던 바리아는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너무 집중했나?”

“제가 감히 말씀드린다면.”

차를 준비하던 하녀가 용기를 내어 한마디 했다.

“주인님께서 조금 전 마님을 보셨다면 아주 크게 걱정하셨을 겁니다.”

“레오 말로 번역하면?”

“아가씨 말씀으로 번역하면, 당장 둘러업고 방으로 갔다고 말씀하시겠죠.”

그 말에 바리아가 서둘러 제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손등에 닿은 볼살이 어째 좀 굳은 것 같았다.

‘이것도 습관이 되었네…….’

굳은 볼살을 만지작거리던 바리아가 피식 웃었다. 재정부에 몸담았던 시절,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험악한 인상을 쓰며 일하던 게 아무래도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엄마는 일하면 사람이 변해.’

일전에 레오니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 아이는 ‘공수 역전’이라는 이상한 말을 썼었는데, 바리아는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나 집중하면 이상해?”

바리아가 하녀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녀가 정색하며 답했다.

“아주 멋있고 훌륭합니다.”

“우리 둘만 있는데, 솔직하게 말해 주면 안 돼?”

“……주인님을 좀 닮으셨나?”

허락해 주기 무섭게 하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마님께서 집중하실 때면 살짝 노하신 것처럼 보여요. 물론 진짜 그런 게 아니란 건 압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모습이 꼭 주인님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그래……?”

의외의 대답에 바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기분은 아주 좋았다.

펠리오는 사랑하는 남편이기 이전에, 예전부터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펠리오와 닮았다는 말은 바리아에게 있어 커다란 칭찬이었다.

“원래 부부는 닮는다잖아요.”

그런 바리아의 기분을 눈치챈 하녀가 더욱 떠들었다.

“물론 마님이 아무리 주인님과 닮으셨다고 해도, 주인님보다 몇 배나 아름답고 상냥하십니다. 마님은 보레오티의 햇살과도 같은 분이세요!”

“말 한번 잘하는군.”

“……!”

하녀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뚜벅뚜벅, 등 뒤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까 했던 말.”

새파랗게 질린 하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한 번 더 해 보지?”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하녀는 빠르게 스쳐 가는 주마등을 바라보며, 저의 짧은 인생에 작별을 고하기로 다짐했다.

“그리 물어보면 잘도 말하겠다.”

함께 따라온 레오니에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펠리오, 레오.”

바리아가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리오는 제게 다가오는 바리아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고, 레오니에는 그 틈에 불쌍한 하녀를 도망칠 수 있게 도왔다.

“조금 전에 마주쳤던 하녀는 누구입니까?”

“제 전담 하녀예요. 아까는 제가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다고 걱정해 줬어요.”

“말주변이 좋고 충성심도 좋군요.”

펠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조금 전 하녀가 했던 말을 아주 흡족하게 듣고 있었다. 봉급을 조금 더 올려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작 그 하녀 언니는 잘리게 생겼다고 엉엉 울 텐데…….’

레오니에는 나중에 트라에게 이 사실을 일러두자고 다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조금 전에 보았던 불쌍한 하녀 언니는 지레 겁먹고 사표를 먼저 낼지도 모를 판이었다.

“어쨌건 일은 적당히.”

펠리오가 조금 전 하녀가 했던 걱정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으찌근 이른 즈등흐.”

그 옆에서 레오니에가 빈정거리며 말을 따라 하다가 펠리오에게 입술을 꼬집혔다.

“입술 떨어진다! 떨어져!”

레오니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엄살을 부렸다.

“내가 그대에게 일을 많이 줬던가요?”

그리고 펠리오는 그런 레오니에를 못 본 척하며 바리아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안 줬지요.”

바리아가 입술을 붙잡고 훌쩍이는 레오니에를 보듬은 채 부정했다.

“제발 일 좀 줘요.”

오히려 바리아 입장에선 저를 믿고 조금 더 일을 줬으면 하는 게 진심이었다.

“명색이 보레오티 공작 부인인데, 먹고 놀기만 하는 건 양심이 찔려요.”

“원래 보레오티 공작 부인은 먹고 노는 게 일입니다.”

“…….”

“……미안합니다.”

농담 좀 했습니다.

바리아의 싸늘한 눈총에, 펠리오가 사과했다. 그도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 그럼 나도 공작 대신 공작 부인해도 돼?”

작위 따위는 데릴사위한테 줘도 되냐고 레오니에가 물었다. 펠리오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바리아의 마음이 그렇게 이해되었다.

“그래도 좀 쉬는 게 좋지요.”

펠리오는 저를 무시하지 말라고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레오니에를 토닥이며 말했다.

“요사이 일이 많았습니다.”

“펠리오 당신도 안 쉬잖아요.”

“나는 공작이니까요.”

“나는 공작 부인이에요.”

“아까 일하느라 피곤해서 하품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요새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일이 문제가 아니라…….”

따박따박 반박하던 바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하품한 건 어떻게 알아요?”

“봤으니까요.”

“아우, 진짜! 언제부터 훔쳐봤어요!”

바리아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오, 싸운다, 싸운다!’

부모님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레오니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입 벌리고 하품하는 거 다 봤다는 거잖아요! 아우, 어떡해! 창피해서!”

들썩이던 아이의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헛구역질도 살짝 했다.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보고 있었습니다.”

험상궂은 아빠의 얼굴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달짝지근한 애정 공세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거, 거짓말하지 마요. 그런 모습이 어디가 귀엽다고…….”

“침대에서 내가 덜 알려 줬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바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아이씨…….’

레오니에는 또 알콩달콩 붙어 애정을 과시하는 부모님에게 아주 크게 실망했다. 마치 매콤한 토마토 스튜인 줄 알고 한 입 먹었더니 딸기잼 범벅인 것과 같았다.

맛은 있는데, 실망이 크단 뜻이었다.

‘머리 쥐어뜯고 싸우지.’

부모님의 싸움을 아쉬워하며 구경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엄마도 신기해.’

어떻게 사서 일을 하지? 레오니에는 이해가 안 갔다. 생각해 보니 바리아만이 아니라 펠리오도 그랬다.

아무래도 일복이 넘치는 건 주인공들의 특징인 모양이었다.

‘나였다면 오케바리 쉐키바리 흔들면서 놀 텐데.’

레오니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꼬꼬마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땐 정말 미친 듯이 근육을 염탐하고 밝혀도 용서받던 행복한 나날이었다.

“……응?”

그런 레오니에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건 뭐야?”

“그, 그건…….!”

바리아가 허둥거리며 이를 막으려고 했지만, 펠리오와 대련할 정도로 쑥쑥 자란 레오니에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초대장?”

약오를 정도로 빠르게 집어 든 레오니에가 초대장을 살폈다. 초대장에 찍힌 초록색 촛농 인장을 살피는 아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 * *

제국은 어느새 여름이었다.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들이 하염없이 울고, 내리쬐는 햇볕에 달아오른 지열이 사람들의 진을 쏙 빠지게 했다.

무더위가 어찌나 대단한지, 한 번 숨 쉴 때마다 폐부가 찌그러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

“…….”

바로 귀족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처럼.

“다들 표정이 왜 그럽니까.”

그 속에서 펠리오 혼자 팔짱을 낀 채 여유로웠다.

‘이 미친 새끼야…….’

그의 오래된 벗인 카니스마저 어색한 미소만 겨우 지을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편하게 있어!’

카니스는 테이블 아래 숨겨진 주먹을 꼭 쥐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펠리오의 면상에 대고 외치고 싶지만, 지금 그랬다간 자신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부의 주인인 오르티오 후작도 상황이 불편해 시선을 돌린 지가 오래였다.

그나마 태연한 낯짝을 유지하는 건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유일했다. 그러나 그 또한 전과 비교하면 어색한 감이 있었다.

“별일 아니라면.”

펠리오가 다른 귀족들을 둘러보며 시선을 내렸다. 딱히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든 크게 관심이 없단 뜻이었다. 실제로도 별 관심이 없었고.

“이어 말하겠습니다.”

그리곤 멈추었던 조금 전의 발언을 이어 했다.

귀족들은 죽상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교수의 연구실이 습격당한 사건을 다시 조사해 보니 미심쩍은 점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펠리오는 다 가져왔다.

혹시라도 네놈들이 딴말할까 봐, 뭘 고를지 알아 다 준비해 놨다.

“수사 당국의 미온적이었던 태도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았던 부적절한 대처.”

이를 증명하는 당시의 신문 보도 자료와 그를 뒷받침하는 학술원 직원들의 증언 필사본.

“피해자 보스그루니 교수가 보관한 협박범의 편지와 그 당시를 기록한 수첩.”

증거들 위로 종이 뭉치들과 낡아 헤진 수첩이 얹어졌다.

“범인은 보스그루니 교수가 연구 중이던 북부 전설에 대한 자료를 전부 내놓으라 협박했습니다.”

이는 전부 명예의 의식에서 레무스가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며, 실제로 황실이 북부에서 전해지는 전설을 믿고 수작을 부렸단 증거가 되었다.

“황자 전하.”

펠리오가 황제가 항상 앉던 상석을 바라봤다.

“한번 살펴보시지요.”

그 자리엔 황제를 대신해 귀족 회의에 참석한 크리세토스 황자가 있었다.

“……그래 볼까요?”

크리세토스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시종이 이를 들고 와 황자에게 직접 건네줬다.

“그러니까, 보레오티 공작은…….”

크리세토스 황자가 증거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말했다. 신중히 움직이는 금색 눈동자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일에 황실이 연루되었다?”

“그리 추측할 뿐입니다.”

“이미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만?”

황자가 수첩을 일부러 탁, 소리를 내며 닫았다. 그의 얼굴엔 곤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보레오티 공작의 심중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회의장 내부를 쓱 둘러보던 황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이해하는 바일 테고.”

그렇지 않으냐는 그의 물음에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말투는 귀족들의 대답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사소한 속셈이지만,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그 목소리를 유지하며 이어 말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보레오티 가문은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지요. 더욱이 공작 부부가 보레오티 영애를 귀애하는 건 제국의 상식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며, 황자가 슬피 말했다.

“나 역시…….”

말끝을 흐린 황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금 행방불명 상태인 스칸디아 황녀를 언급한 것이다.

“……보레오티 공작.”

황자의 뻔뻔한 연기에 코웃음을 치던 펠리오가 시선을 들었다.

“분명 공작의 염려대로, 북부에서 무례한 자들이 설쳤던 건 확실하군요.”

그 무례한 자가 올로르란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들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자연히 한곳으로 향했다. 그 자리엔 올로르 자작이 있었다. 참으로 용감한 출석이었다.

심지어 오늘 귀족 회의에는 올로르의 자작 작위를 몰수해야 한단 의제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그나마 본인도 그것을 의식하는지, 평소와 달리 표정이 편하지는 않았다.

“분명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겁니다.”

황자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올로르 자작은 얼굴이 살짝 움찔했다. 그러나 큰 변화는 없었다.

반면 올로르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신흥 황제파가 도리어 겁에 질려 했다. 그들은 올로르에게서 나온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튈지 몰라 두려워했다.

‘자신이 있는 건가.’

이를 살피던 펠리오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황제의 약점을 쥐어서?’

올로르 자작은 사생아였던 딸을 팔아 작위를 얻은 인간이었다. 그러니 레무스와 황제가 딸의 남편을 죽이려 했단 걸 알고 있을 거다.

‘……아하.’

펠리오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야 말이 되는군.’

그간 황제가 올로르를 보호했던 이유는, 단순히 우시스 황비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과거에 저질렀던 살인 범죄가 들키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람은, 아우스트 공작 영식은 죽지 않았다. 그걸 모르니 황제도 올로르도 서로를 놓을 수 없었다.

‘정말 질려서…….’

오로지 저밖에 모르는 황제, 그런 인간을 제 뜻대로 조종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올로르.

어떻게 저런 것들끼리 모인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크리세토스 황자가 힘줘 말했다.

“황실이 여기에 연루되었단 주장은 잘못된 것 같네요.”

“증거가 이렇게 확실한데 말입니까?”

펠리오가 물었다.

“증거를 부정하는 건 아니고.”

황자가 이어 말했다.

“표현에 문제가 있군요”

“문제라 하심은?”

“‘황실’이 아니라…….”

펠리오가 제시한 증거들을 스윽 앞으로 밀며, 크리세토스 황자가 말했다.

“……‘황제’가 했지요.”

그 말에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특히 올로르 자작은 얼굴을 붉히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얼굴은 거의 경련에 가까웠다.

“황자 전하!”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힌 올로르 자작이 황자를 노려봤다.

“쯧쯧, 무례할지고.”

크리세토스 황자가 무엄한 자작의 행동을 대놓고 비난했다. 그래도 말할 기회는 주겠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번 지껄여 보란 뜻이었다.

“지금 전하께서는 감히 황제 폐하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아까부터 말이 참 예쁩니다, 자작.”

듣다못한 황자가 기어코 경고했다. 적당히 기어오르란 뜻이었다.

평소 사람 좋기로 유명한 2황자의 서슬 퍼런 눈빛과 냉엄한 태도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올로르 자작이 처음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빌어먹을……!’

올로르 자작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도 상황이지만, 이 귀족 회의에 2황자가 참석한 것 역시 아주 큰 불만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자작이 말해 보시지요.”

크리세토스 황자가 아예 몸을 자작에게로 돌렸다.

“올로르가 보스그루니 교수에게 협박성 편지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 연구실을 습격한 정황이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

“명예의 의식에서 자작의 아들이 했던 멍청한 짓은 입에 담을 필요도 없고.”

“…….”

“지금껏 국가사업을 대리로 한단 명목으로 받은 돈도 어마어마한데…….”

그것조차 불법투성이고.

조목조목 나열하는 황자의 말에, 올로르 자작은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했다.

제게 변명해 보라고 몰아붙이는 황자의 말도 말이지만, 정말로 반박할 거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올로르 혼자 했다?”

황자가 한껏 비웃었다.

“그럼 정말 큰 일일 겁니다.”

자칫하다간 작위 몰수만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지금 올로르가 저지른 짓만 보면 사형도 아쉬울 판인데…….”

“사, 사형이라니요!”

“그럼 아닌가?”

크리세토스 황자는 선량해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감히 제국의 지엄한 황실을 이딴 오명으로 더럽히고, 오랫동안 제국을 지탱해 온 대귀족을 능멸하기까지 했는데.”

“저희는 그저 시키는……!”

“그래.”

그 말을 기다렸단 듯이, 크리세토스 황자가 올로르 자작의 말을 잘랐다.

“시키는 대로.”

황제가 시키는 대로.

“……!”

올로르 자작이 뒤늦게 아차, 했다. 조금 전에 수비테오 황제가 공범이란 사실을 스스로 밝힌 꼴이었다. 자작은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하아…….”

크리세토스 황자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피곤한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이 상황이 편친 않습니다.”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쓸어 만지는 황자의 표정은 정말로 지쳐 보였다.

수비테오 황제가 연루되었다는 펠리오의 주장은 논리적이었고, 함께 제시한 증거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솔직히 이 정도라곤…….’

미리 언질을 받았던 크리세토스 황자조차 놀라울 정도였다. 허황된 미신 따위에 푹 빠져 나라를 잊어버린 황제라니.

“아비의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황제를 아버지라 여긴 적은 한사코 없으나, 정말 이건 실망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황실의 일원입니다.”

황자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서글서글하던 눈동자에 진중한 빛이 번뜩였다.

“나와 그대들이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나라이고, 가장 중시해야 하는 건 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동의했다. 곧 다른 귀족들도 따라 눈을 감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오는 이에 동의하는 대신 황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니 황제 폐하는.”

황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시고.”

머뭇거리며 입술을 몇 번인가 들썩이기를 아주 잠깐.

“물러나셔야 합니다.”

드디어 귀족 회의에서 황제의 퇴위가 언급되었다.

* * *

스칸디아 황녀가 실종되고, 티그리아 황후는 큰 상심에 빠졌다.

드레스만을 남긴 채 실종된 딸이 걱정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황후궁에 틀어박혔다.

도적들에게 납치된 황녀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수색대 파견을 여태껏 명령하지 않았다. 황녀가 도적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를 일임에도.

보다 못한 헤스페리 후작이 레보오 기사단을 이끌고 황녀가 납치된 남부 숲을 수색했지만,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황후의 슬픔은 더욱 무거워졌다. 모두 그런 황후를 동정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한 면모를 보였기에, 약해진 황후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런 탓에 황후궁에 출입하는 사람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슬픔에 잠긴 황후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황후궁에 드나드는 사람은 황후를 오랫동안 돌본 시녀를 비롯한 몇몇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따금 우시스 황비가 말동무를 자처하며 찾아왔다.

사람들은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 티그리아 황후를 힘들게 한 원인 중엔 우시스 황비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황후는 황비의 출입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황비의 방문을 반겼고, 황비가 오는 날에만 이따금 궁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었다.

“그렇지만, 저랑만 계속 만나면 재미없으실 거예요.”

우시스 황비는 가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을 거라며 빵긋 웃었다.

“그래서 제가 손님을 초대했답니다!”

“손님…….”

티그리아 황후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꽤나, 의외네요.”

그렇게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황후의 얼굴엔 내 그럴 줄 알았단 표정이 그려졌다.

“두 사람이 친분이 있었나?”

소식 없는 황녀 걱정으로 소박한 차림새를 한 황후가 어깨에 두른 숄을 추스르며 물었다. 황비가 퍽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법으로 엮인 가족이에요.”

“아아, 그랬지요.”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참 미안하네. 내가 요즘 내 정신이 아니라서.”

“아닙니다, 황후 폐하.”

초대받은 손님이 예를 갖추며 뒤늦은 인사를 올렸다.

“보레오티 가문의 바리아 보레오티,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바리아가 숙인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저는 보레오티 공작 부인께만 초대장을 보냈는데…….”

우시스 황비가 슬그머니 눈을 뜨며 바리아의 옆을 보았다. 바리아도 덩달아 시선을 움직였다. 아주 자랑스럽고 기특하다는 눈빛이었다.

“남편과 딸이 걱정을 많이 해서요.”

“어찌 아름다운 어머니를 홀로 보내겠습니까.”

검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글라디고 기사단 소속, 레오니에 보레오티가 황후 폐하와 황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오늘은 어머니를 지키는 호위 기사로 함께했습니다.”

레오니에는 그 말대로 글라디고 기사단 정복을 갖춰 입었다.

“듬직한 기사네요.”

황후가 어린 기사를 칭찬했다. 팔다리를 전부 가리는 옷을 입었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기 맹수의 기개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레오니에가 겸손을 부렸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벗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오늘 호위만 잘 마치면 마누스의 상반신 반나체를 무려 30분이나 빌려주겠다던 펠리오의 약속 덕에 참는 중이었다.

네 사람은 준비된 장소로 향했다. 정원에 설치된 새하얀 정자에는 시원한 음료와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엔 황후와 황비, 바리아가 앉았다. 레오니에는 호위라는 명목으로 마련한 자리에 앉는 대신에 바리아의 옆에 섰다.

“내가 요즘 내 정신이 아닌지라,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해.”

자리에 앉은 황후가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곧 소식이 들릴 거예요.”

우시스 황비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위로했다. 황후는 흐릿한 미소로 응수했다.

“그러니 부인만 괜찮다면, 궁 밖 소식을 들려주겠어?”

“물론입니다.”

바리아가 여름의 풍경을 전해 주었다.

“해가 무척 길어졌답니다.”

옷소매가 짧아졌고, 밤마다 정원에서 들리는 여름벌레 소리가 무척 기운차다고.

바리아가 전해 주는 수도의 여름은 꼭 수채화 속 풍경 같았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전해 주는 여름 풍경은 물에 푼 물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조용히 듣던 황후가 시선을 돌렸다.

“수도의 여름도 좋지만.”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조그마한 숲이 있었다.

“역시 이 계절엔 서부가 그리워.”

어릴 적에 후작과 숲속 별장에서 지내던 나날을 떠올린 황후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그려졌다.

“……서부 하니 드리는 말씀인데.”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최근 레보오 기사단에 들어온 신입이 아주 인재라고 했어요.”

숲을 응시하던 티그리아 황후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레오니에는 여전히 별것 아니란 듯이 말을 이어 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이벡스 경을 만났습니다. 황후 폐하도 아시는 분인가요?”

“잘 알지. 레보오 기사단의 유능한 기사란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어린 기사가 아주 출중한 실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빠른 시일 안에 소드 마스터가 될 것 같다고 칭찬하셨죠.”

“이벡스 경이, 그랬니?”

물어보는 황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이를 모르는 척하며 계속 말했다.

“아주 입이 닳도록요.”

“그랬군…….”

짧은 한숨을 끝으로, 황후의 입가에 한결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레오니에를 통해 들은 스칸디아 황녀의 무사에 크게 안도했다.

‘잘 부탁해요.’

황후는 마음속으로 이벡스에게 기도했다. 부디 떨어져 지냈던 두 부자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길 간절히 바랐다.

‘황녀 전하.’

레오니에도 함께 기도했다.

‘부디 근육으로 한껏 무장한 은발의 미남이 되셔야 해요.’

아기 맹수는 저의 투자가 헛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기껏 바쁜 시간 쪼개 가며 훔쳐 왔는데, 기대한 대로 안 자라면 이쪽이 더 곤란했다.

“그래도 저는 여름 하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말이 없었던 우시스 황비가 입을 열었다.

“남부가 떠올라요.”

“남부의 여름도 멋지죠.”

바리아가 황비의 말에 동의했다.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은 더위마저 잊게 하는 매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바리아는 더위에 무척 약했다.

“어쩜, 생각하는 게 나랑 똑같네!”

황비가 까르르 웃었다.

‘……마흔 넘은 거 맞지?’

뒤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레오니에는 괜히 섬뜩했다.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기는 싫지만, 우시스 황비는 정말 나이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정말 독한 사람이구나.’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질렸다.

천하의 아기 맹수도 자신의 인생을 저런 거짓과 연기 범벅으로 꾸미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삶을 살아온 우시스 황비에게 살짝 동정을 느꼈다.

레오니에는 그녀가 황궁에 들어오기까지 흘렸을 피눈물과 잔혹한 다짐을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진심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그렇게 살기로 결정한 건 우시스 황비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인생에 감히 보레오티를 이용하려는 개수작은 결코 있어선 아니 될 일이었다.

“어머니.”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불렀다.

“제게 해 주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어떨까요?”

“어머, 그랬지.”

바리아가 작게 놀란 채 황후를 보았다. 다행히 티그리아 황후는 관심을 보였다.

“폐하, 혹시 등대지기 귀신을 아시나요?”

바리아가 물었고, 레오니에가 우시스 황비를 빠르게 살폈다.

“사고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등대지기 귀신이, 파도가 크게 치는 날엔 절벽 가까이에 오는 사람들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참 착한 귀신이네.”

“어렸을 적엔 막연히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나?”

황후의 물음에 바리아가 그렇다고 답했다.

한 손으로 턱을 받치며 걱정하는 모습이 무척 귀엽다고, 뒤에서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그리 생각했다. 펠리오가 봤다면 꽤 안절부절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그곳에서 죽은 등대지기가 있다면 무척 슬픈 일이지요. 본래 남부는 바다가 인접한 곳이라 낭떠러지가 많습니다.”

“이런, 황실이 그런 것을 소홀히 했군.”

티그리아 황후가 곤란해했다.

“마침 공작 부인이 나를 일깨워 주는군.”

“아닙니다, 폐하.”

“나라의 어머니인 내가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레오니에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는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 번 남부를 살피고 정비할 필요가 있겠어.”

“그렇다면 아우스트 공작 가문에 연을 넣는 것이 어떨까요?”

“그런데 아우스트는…….”

워낙 두문불출한다고 중얼거리던 황후에게, 레오니에가 방안 하나를 제시했다.

“메리디오 후작 가문이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남부에선 아우스트보다 메리디오의 영향력이 더 컸다.

“보레오티는 복도 많지.”

어쩜 이리 마음씨 곱고 명석한 사람들이 많은 거냐며, 티그리아 황후가 바리아와 레오니에를 칭찬했다. 둘은 황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황비도 그리 생각하지?”

황후가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물론이죠.”

우시스 황비가 미소로 답했다. 그러나 눈은 미소 짓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니에가 대신 웃었다.

* * *

“아우스트의 병력을 잡아 뒀어.”

그날, 저택에 돌아온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자신들이 한 일을 자랑했다.

“남부의 위험 지역을 정비한다는 목적으로 메리디오를 황궁에 넘겼지.”

“여기에다 이를 제안한 저희 보레오티도 일손을 돕기로 했어요. 황후 폐하가 윤허해 주셨고, 글라디고 기사단을 파견할 명분을 얻었어요!”

함께 말하는 바리아도 들떠 있었다. 무려 황후와 황비를 상대로 기싸움을 벌였단 사실에 꽤 흥분해 있었다.

‘……강아지가 둘.’

펠리오는 그런 딸과 아내가 칭찬해 달라고 폴짝거리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조그맣고 새까만 강아지는 어서 절 칭찬하라고 앙앙 짖고, 그보다 좀 더 큰 분홍 강아지는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꼬리만 격하게 흔들고 있었다.

“정말 멋집니다.”

그래서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고, 바리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분홍 강아지는 수줍어하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펠리오는 아주 흡족했다. 오늘 밤에도 열심히 침대 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딴 건 됐어!”

그러나 검은 강아지는 달랐다.

“마누스 오빠 상반신 나체 내놔! 나 저 답답한 기사복 꾹 참고 입었잖아!”

레오니에의 손엔 벌써 크로키북과 목탄이 들려 있었다. 펠리오는 딸아이의 철저한 준비성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빠와의 약속부터.”

“함부로 근육 만지지 않고, 크로키 그릴 때만 근육 보고, 마누스 오빠의 정신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만 희롱하기!”

“다녀와라.”

“꺄아아아!”

오랜만에 흥분한 레오니에가 곧장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저기, 괜찮은 거예요?”

바리아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우리 레오가 적정선을 지킬 거란 건 잘 알지만…….”

바리아는 혹여 마누스가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었다.

“염려치 않아도 됩니다.”

펠리오가 자신했다.

“사전에 의견을 물어보고, 그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게 주기로 했습니다.”

“상사의 물음에 싫다고 말하는 부하 직원이 어디 있어요.”

바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저만해도 재정부에서 근무할 당시에 부당한 업무를 감내해야 할 때가 제법 있었다. 물론 그런 것들은 다 재정부의 맹수란 아명을 떨치기 무섭게 줄어들었지만.

“당신은 아직 글라디고를 잘 모르는군요.”

펠리오가 그런 바리아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상반신 나체 모델 건은 마누스 본인이 먼저 자처했다.

레오니에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마누스는 글라디고 내에서 가장 근육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우람한 체격은 전부 그런 애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레오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 자기 근육을 남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어머, 그 마음 잘 알죠.”

바리아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근육은 어떻게든 남겨 둬야 해요. 우리 레오가 선행하는 거였네요.”

“본심은 희롱이니 선행까진 아닙니다.”

“펠리오는 근육 안 그려요?”

“우리 변태가 틈만 나면 그려서 괜찮습니다.”

짧은 한숨을 끝으로, 펠리오는 바리아에게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등대지기 귀신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정말 놀랐어요.”

그 등대지기 귀신이 아우스트 공작 영식이란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펠리오는 그 사실로 여러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왜 우시스 황비와 알리스 1황자가 휴가 때마다 남부 별장으로 갔었는지. 왜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아우스트 공작 영식이 귀신을 자처했는지.

“등대지기 귀신이야말로 중간 다리였군요.”

우시스 황비와 알리스 황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더 나아 가선 황제와 올로르를 몰아붙이는 계략을 꾸몄을 존재.

“아우스트 영식을 알아요?”

바리아가 물었다.

“어렸을 때 몇 번 본 게 다입니다.”

“어떤 사람이었나요?”

“지금의 제 손으로 가볍게 꺾일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목이나 허리뼈가.

펠리오가 나뭇가지 부러트리는 흉내를 직접 내며 말했다. 그만큼 기억 속 아우스트 공작 영식은 무척 약한 사람이었다.

사실 펠리오는 아우스트 공자가 흑막 따위란 사실보다, 그가 사내구실을 제대로 해냈단 점이 더 놀라웠다.

“황후 폐하는 어땠나요?”

“헤어지실 적에 말씀 한마디를 하셨어요.”

“말씀이라면?”

“‘기지개를 쭉 켜고 싶다’고요.”

그 말에 펠리오가 슬그머니 웃었다.

“하긴, 답답할 만했죠.”

* * *

별조차 뜨지 않은 밤.

두건을 푹 뒤집어쓴 알리스 황자가 어둠을 틈타 으슥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굽이굽이 어지러운 골목 끝에 도달한 곳은 오래된 폐가였다. 예전에 술을 팔던 곳이었는지 문 근처에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 같단 생각과 함께, 알리스 황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루스.”

알리스가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먼저 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 누이를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러면 곤란해.”

“어머, 알리 얘가 진짜.”

살루스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표정은 덤이었다.

“누나를 보면 인사부터 해야지.”

“……잘 지냈어?”

남동생의 떨떠름한 인사를 받은 뒤에야, 살루스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물론 잘 지냈지. 알리 넌?”

“난 잘 못 지냈어.”

“어? 왜?”

“나 지금은 장난칠 기분 아니야.”

의자에 털썩 앉은 알리스가 두건을 벗었다. 헝클어진 초록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던 알리스의 눈동자가 가늘게 접혔다.

“보레오티가 허를 찔렀어.”

“그러게 말이야.”

살루스가 쓰게 웃었다.

“보레오티 엄청나지?”

“루스, 말장난하기엔 일이 너무 꼬였어.”

“그래도 뭐 어쩌겠어. 메리디오는 벌써 감시가 붙었는데.”

이미 일어난 일로 화를 내는 건 비효율적이라며 살루스가 태평히 말했다.

황후는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남부의 메리디오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리고 보레오티 측에서도 이를 지원하고자 글라디고 기사단 몇 명을 남부에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신문에서 봤어.”

살루스가 자신이 본 오늘 자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뭐랬더라? 이번 일로 북부와 남부의 어색한 사이가 풀릴 수 있다나?”

“어색한 사이는 무슨…….”

알리스 황자는 신문에 실린 내용이 하찮게만 느껴졌다.

“애초에 두 지역 간의 악감정은, 올로르를 사냥하려고 아우스트가 조장한 거였어.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곧 풀릴 일이었고.”

“그런데 문제는 보레오티가 그걸 알아 버렸다는 거야.”

살루스가 턱을 괸 채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보레오티는 우리가 무얼 하려는지 다 알아.”

우시스 황비의 정체도, 아우스트와 메리디오의 관계도. 숨어만 지내던 그들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검은 맹수들은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저들끼리 뜯어 죽이건 말건, 자신들에게 피해만 없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거다.

“보레오티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그렇게 높았나?”

알리스가 그간 보아온 보레오티의 행보를 떠올렸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레오니에의 저 잘난 듯이 행동하던 모습이었다. 펠리오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충성심 때문이 아니야.”

동생의 생각이 뻔히 보인 살루스가 키득거렸다.

“자존심 때문이지.”

오만하고 뻔뻔한 검은 맹수들에게 반란이고 충성심 따위는 다 남의 일이었다.

그들이 저토록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건, 감히 다른 이의 계획에 자신들이 체스 말로 이용당했단 사실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군.”

알리스가 혀를 찼다.

“그간 자신들이 한 일은 생각조차 못하나.”

“그래도 보레오티는 정말 대단하잖아.”

“루스, 넌 누구 편이야?”

“물론 엄마랑 네 편이지.”

하지만 살루스는 검은 머리 사촌 동생이 마음에 들어 버렸다.

맹수의 송곳니에 위협을 당했는데도 무섭기는커녕 새끼고양이한테 앙칼진 발길질 한 번 당한 것 같았다.

“가족끼리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설마 보레오티 영애?”

“어쨌건 피가 조금은 통하잖아.”

“가족은 무슨.”

알리스는 웃음도 안 나왔다. 그 ‘가족’이 가족 되기 싫어서 명예의 의식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보았던 알리스는 참 지독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세상 저 혼자 잘났지.”

“레오도 똑같이 말하던데…….”

역시 동족 혐오인가?

살루스는 속마음을 꾹 감췄다. 서로를 불편해하는 동생들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어쨌건.”

그런 몽글몽글한 감정을 잠시 집어넣은 살루스가 말했다.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메리디오가 완전히 못 움직이는 건 아니야.”

“몇이나 움직일 수 있는데?”

“확실하게는 대답 못 해. 그래도 이번 일 때문에 방해받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황후의 정무를 돕는단 명목으로 메리디오가 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문제는…….’

살루스는 자신들의 계획이 제대로 될 거란 확신이 없었다.

‘보레오티에게 달렸지만.’

이따금.

사실은 아주 자주.

어쩌면 레오니에와 이곳에서 마주한 채 비밀을 밝혔던 순간부터 계속.

살루스는 보레오티가 그런 자신들이 계획한 이 모든 것을 단숨에 망가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가소롭단 듯이 무너트리는.

‘능력으로 본 것도 아닌데…….’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우스트 자신들인데, 어째서 보레오티는 미래를 본 것처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

그저 막연한 추측일뿐임에도, 살루스는 이 생각이 지금껏 자신이 본 어떤 미래보다 확실하다고 느껴졌다.

* * *

체스판이 펼쳐졌다.

레오니에는 그 위로 알록달록한 동물 체스 말을 쏟아부었다. 와르르 쏟아지는 체스 말은 전부 값비싼 보석으로 만들어졌다. 펠리오 왈, 말 하나에 저택 한 채 값이라고.

“하얀 호랑이는?”

“새끼를 데려갔어.”

펠리오의 물음에, 레오니에가 하얀 호랑이 체스 말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그 뒤로는 굳이 펠리오의 질문이 없더라도 레오니에가 알아서 척척 말들을 움직였다.

“푸른 눈표범은 협력을 약속했고…….”

푸른 눈표범 체스 말은 붉은 백조 체스 말을 한 번 툭 치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부딪힌 붉은 백조는 바닥에 쓰러졌다.

“수도는 능글맞은 표범이 알아서 다독일 테지.”

얼룩무늬 표범이 중앙에 떡하니 나타났다. 표범 체스 말은 체스판 중앙에서 위로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그리고.”

레오니에가 쓰러진 붉은 백조 체스 말을 도로 세웠다. 그리곤 그 주위로 여러 동물을 붙였다. 그 속에 분홍색 토끼도 있었다.

“붉은 백조 옆엔…….”

노란 검독수리 체스 말을 다정히 붙였다.

“어휴, 이쁜 것들.”

같이 손잡고 줄 없이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기 딱 좋은 꼴이었다.

“취향하곤.”

펠리오가 질색했다.

“그치만 아빠.”

레오니에가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이렇게 손잡고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안 사랑스러워?”

끝이 바로 코앞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인내하였던가.

레오니에는 당장이라도 저 둘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아 숨통을 끊는 상상을 수천, 수만 번이나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제 정말 그 상상이 가능해졌다.

‘이래서 혐오 관계가 매력적인 걸까?’

레오니에는 이전 세상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취향에 눈을 뜰 것만 같았다.

물론 이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은, 저 혐오스러운 족속들을 완벽하게 사냥한 뒤에야 기분 좋게 열릴 예정이었다.

레오니에가 이제 남은 것들을 떠올렸다.

“황태자 책봉과 올로르 작위 몰수, 올로르 부자의 재판…….”

체스판 위 노란 검독수리를 바닥에 엎고, 그 위에 새로운 검독수리를 올렸다. 이번에 새로 맞춤 주문한 것으로, 훨씬 용맹하고 매서운 인상이었다.

그리고 붉은 백조를 향해 몇몇 체스 말을 돌렸다. 바로 올로르에게 소송을 건 가문들이었다.

습격 피해자인 아르데아가 속한 보스그루니, 이를 갈며 이 순간을 기다렸던 우르마리티, 올로르한테 부탁받았던 마법 약 제조 값을 받지 못한 오르티오.

여기에 올로르의 습격으로 건물 피해를 본 학술원은 부엉이 체스 말로.

“마무리는…….”

레오니에가 마지막 말 하나를 놓았다.

“보레오티.”

검은 사자 모양의 체스 말이 붉은 백조 바로 앞에 섰다.

저 많은 가문에 배상하기 위해 상단까지 팔아 버린 올로르에게 남은 건 허울에 불과한 작위와 그간 저질렀던 불명예, 평판이 좋지 않은 우시스 황비와의 연줄뿐이었다.

하물며 우시스 황비는 처음부터 등을 돌렸던 사람이었다.

“진정 남은 거라곤 절망과 지옥이겠구나.”

레오니에가 완성된 체스판을 펠리오에게 보여 줬다.

“어때?”

“백 점은 안 되겠군.”

“왜애? 잘 뒀잖아.”

아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지켜보던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붉은 백조 뒤에 있던 청옥색과 주황색 고래 체스 말 두 개를 가리켰다.

“이 둘은 어쩔 생각이고?”

“아이, 이 둘은 관심 밖이지.”

레오니에가 고래들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기껏해야 체스 말일 뿐이야.”

입꼬리를 씩 올린 아기 맹수는 고래들을 붉은 백조 뒤에 도로 붙였다.

“반역 한번 해 보라고 해.”

“감시가 붙었으니 내버려 두겠다?”

물어보는 펠리오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까짓, 반역하라고 해.”

레오니에는 이제 아우스트가 무얼 하든 상관없었다.

“이 새끼들은 이렇게…….”

레오니에가 체스 말을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쾅, 하고 열린 문 너머에서 트라가 다급한 표정으로 맹수 부녀를 찾으며 달려왔다. 심상찮은 집사의 모습에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주인님, 아가씨!”

마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안 쓰러졌어요.”

침대에 몸을 기대 누운 바리아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책 꺼내다가 살짝 휘청거린 게 다예요.”

책장 가장 위에서 책 하나 꺼내려고 의자에 올라갔다가 휘청거린 게 다였고, 바리아는 그마저도 레오니에한테 배웠던 낙법으로 무사히 내려왔다.

그런데 하필 지나가던 트라가 이를 목격하고 말았다.

요란한 낙법을 보여버린 바리아는 그게 가장 부끄럽고 창피했다. 침대에 누운 것도 트라가 하도 걱정해서 어쩔 수 없이 누운 것뿐이었다.

“이거 봐요. 다친 곳도 없고, 옷에도 흠집 하나 난 곳 없어요. 트라가 그냥 과장한 거예요.”

“도대체 책은 왜 꺼낸 겁니까.”

“책 좀 읽지 마! 그딴 거 좀 안 읽는다고 세상 무너져?”

그러나 침대에 누운 아내를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한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숨 쉴 틈도 없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나 이러다 진짜 아프겠어요.”

“어디 아픕니까? 뒤늦게 아픈가 봅니다. 트라, 가서 의원을 불러와라!”

“설마 허리? 허리 아프면 그거 큰일인데!”

“아니, 귀가.”

과보호하는 남편과 딸 때문에, 바리아는 귀에서 피가 날 것만 같았다.

“이제 진짜 그만.”

딱 잘라 말하는 바리아의 경고에, 그제야 어흥어흥 크앙크앙 울부짖던 두 맹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둘은 바리아의 손가락을 나눠 쥔 채 쫑알쫑알 걱정을 쏟아부었다.

“앞으로 책은 사람을 시켜 꺼내십시오. 사용인들 봉급을 올려 둘 테니, 그 값에 맞는 일을 시키시란 말입니다.”

“책 꺼내게 하려고 봉급을 올린다고요?”

“아니면 앞으로 내가 읽어 줄까? 엄마, 무슨 책 읽으려고 했어?”

“그럼 레오가 교양서 읽어 주는 거야?”

“경제 활성을 위해서라도 책 읽어 주는 사람을 고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쏟아지는 걱정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바리아는 이제 반쯤 체념하고 가만히 듣기로 했다. 어쨌건 걱정을 시킨 건 제 잘못이었다.

“하나 마님.”

요란스러운 주인 가족들을 지켜보던 트라가 한마디 올렸다.

“요즘 이런 일이 자주 있으시지 않았습니까.”

트라의 걱정은 최근 바리아가 저지르는 실수들의 반복으로 이뤄졌다.

“피곤하시단 말씀이 두 배가량 느셨고, 걷다 휘청이시는 것 역시 하루에 한 번이나 있지 않으십니까.”

“트라, 나 미행했어?”

듣던 바리아가 기함을 했다.

“……심각하군.”

펠리오의 미간에 어느 때보다 깊은 주름이 생겼다. 바리아가 진심이냔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봤지만, 이번만큼은 펠리오도 물러서지 않았다.

“역시 의원을 한 번 불러서 확인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일은 줄이도록 하고요.”

“사람이 걷다 보면 휘청거리는 건 당연히 있는 일이에요.”

누구보다 쌩쌩한 바리아가 마지막으로 저의 무사함을 강조했다.

“난 없습니다.”

“나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맹수 부녀에게 걷다 휘청거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래도 난 어렸을 땐 종종 그랬어.”

레오니에가 비루했던 일곱 살 시절의 체격을 떠올렸다. 그 말에 바리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펠리오가 곧장 반박했다.

“레오는 그때 작은 덩어리였고, 바리아 당신은 다 큰 성인이지 않습니까.”

바리아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아빠, 지금 나보고 덩어리랬어?”

그리고 한순간에 덩어리 취급당한 레오니에는 어이가 없었다.

“어쨌건 의원한테 검사는 받는 게 좋겠습니다.”

“펠리오, 난 정말…….”

“안 그러면 침대에 묶어 두는 수가 있습니다.”

강하게 경고하던 펠리오가 일순 말을 멈췄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기는 중이었다.

“……미쳤어, 진짜!”

레오니에가 빽 소리 질렀다.

“애새끼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별생각 안 했다만.”

“이 아빠가 딸내미 변태력을 너무 무시하네? 내가 아까 봤어, 아빠 분명 엄마 침대에 묶는 상상했잖아!”

힉, 바리아가 냉큼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지.”

펠리오가 바리아의 이불을 다시 내려 주며 말했다. 그러나 눈은 레오니에와 마주하지 않았다.

“어쨌건, 요새 피곤한 일들이 연달아 있지 않았습니까. 의원에게 한번 확인을 받아 보는 게 좋겠습니다.”

기어코 물러서지 않은 펠리오는 아예 몸에 좋은 약도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했다.

“엄마, 포기해.”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는 잔소리로 애정을 표현하거든. 이왕이면 돈으로 해 주면 좋겠건만.”

“레오 너도 엄마랑 같이 의원한테 검사 한 번 받아.”

“나도 약 챙겨 주게?”

“아무래도 양심을 자라게 하는 약은 없겠지…….”

“당연히 내가 아빠 몰아내고 작위를 빼앗는 쪽이 더 가능성 있을걸?”

하루 한 번 먹는 약처럼 아빠와 말다툼 한 번을 꼬박 해치운 아기 맹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리아가 최근 피곤한 원인인 에르바누 백작이 또 저택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내가 내쫓고 올게.”

“적당히 해 둬라.”

“누가 들으면 내가 사람 잡아먹는 줄 알겠네.”

물론 다른 의미로 잡아먹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레오니에가 대범한 장래 희망을 밝히고 떠난 후, 펠리오는 바리아의 손을 아까보다 조금 더 꽉 쥐었다.

이를 본 트라가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낀 채 온전히 밀착한 두 손은 서로를 마음껏 쓰다듬었다.

“잔소리가 귀찮습니까?”

펠리오가 좀 더 순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리아가 이마로 펠리오의 머리를 가볍게 콩, 찍었다.

“그게 아니라, 정말 아무 일도 아닌데 다들 지나치게 반응하니까 그런 거예요.”

“어쩌겠습니까. 당신이 그만큼 소중하단 건데.”

마치 짐승의 애정 표현처럼, 펠리오는 부딪혔던 머리를 바리아에게 기대며 살짝 힘을 주었다. 잘 뻗은 콧날이 바리아의 눈가에 닿았고, 곧 웃음소리가 화답처럼 들렸다.

“전 아직도 안 익숙해요.”

“뭐가 말입니까.”

“펠리오 당신이 나한테 다정하게 말해 주는 거요.”

세상 험악한 얼굴로 이토록 달콤한 말을 속삭여 줄 때마다, 바리아는 자신이 아주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간혹 무서웠다.

“……깨어나면 지옥인 건 아니겠죠?”

레무스가 저를 죽였던 그때. 가족들이 저의 죽음에 등 돌렸던 그때로 돌아갈까 봐.

“천국은 보여 줄 수 있는데.”

“어휴, 진짜! 지금 대낮이에요!”

“천국이 밤에만 갈 수 있는…….”

“요놈의 입!”

듣다못한 바리아가 빨개진 얼굴로 남편의 입술을 가볍게 찰싹였다. 펠리오도 자신이 한 말이 꽤 웃기고 능글맞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맞아 줬다.

“당신은 레오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어요.”

“내가 레오한테 옮은 겁니다.”

“제가 볼 땐 레오가 당신한테 옮은 거예요.”

밝히는 핏줄이 아주 진하다면서, 바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한참 치덕거린 뒤에야, 펠리오가 바리아에게서 떨어졌다.

“일단 한숨 푹 자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뭐…….”

피곤한 감이 아예 없지 않았던 바리아가 슬그머니 침대에 누웠다. 분명 졸음이 올 정도는 아니었는데, 누워 버리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펠리오는 그 옆에서 바리아가 잠들 때까지 지켜봤다. 낮잠이 든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정오의 순간이었다.

“…….”

검은 눈동자에 깃들었던 평화로움이 천천히 사라졌다.

펠리오는 제 오른손을 쥐고 펴기를 반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바리아가 누운 침대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깊이 잠든 바리아는 펠리오의 움직임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숨을 색색거릴 뿐이었다.

곧 펠리오의 등 뒤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붉은 안개는 점점 색이 짙어지면서 네 개의 송곳니가 되었다. 팔짱을 낀 펠리오의 검은 눈에도 붉은빛이 번진 채였다.

펠리오의 손가락이 번잡하게 제 팔을 탁탁 두드렸다. 그러다 손가락이 멈췄고, 맹수의 송곳니가 바리아를 향해 포악하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송곳니는 바리아에게 닿기도 전에 안개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를 지켜본 펠리오의 눈에서 붉은빛이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꿈나라인 아내가 덮은 이불을 고쳐 덮어 준 뒤에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아무래도.”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바리아에게조차 들리지 않게끔 속삭였다.

“또 다른 맹수가 찾아온 모양입니다.”

* * *

“요즘 수도에 나도 모르는 유행이 돌고 있나?”

해가 쨍쨍 내리쬐는 오후. 저택 밖으로 나온 레오니에는 커다란 대문 앞에 설치한 차양 아래서 얼음이 든 음료를 홀짝였다.

여름 별장에나 있을 법한 낮고 긴 의자에 누운 채 색안경을 쓴 모습이 딱 봐도 바닷가에 피서 온 관광객이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엄연히 손님맞이 중이었다.

“웬 잡것들이 계속 우리 집에 오는 거람.”

동그란 색안경을 위로 슬쩍 올린 레오니에가 대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엔 뙤약볕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에르바누 백작이 있었다.

가문의 자랑인 분홍색 머리는 거의 하얗게 새어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거렸다.

작년 연회에서 잠깐 만났던 때와 비교하면 급속한 노화였다.

“나 어릴 때도 주제 모르는 것들이 저 죽여달라고 보레오티의 심기를 건드리곤 했지.”

음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레오니에가 몸을 스윽 일으켰다.

“우리 백작께서도.”

그리고, 차양이 만든 그림자 끝에 섰다.

“죽여달라고 계속 찾아오는 건가? 아무래도 그때 그 자살법이 다시 유행인가 봐. 누가 알려 줬지? 타바누스? 메레오카? 글리스?”

레오니에가 읊은 가문의 이름은 펠리오가 6년 전에 친히 끝장을 낸 북부 귀족들이었다.

에르바누 백작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사실 그도 당시에 마물 불법 거래에 관심을 두고 투자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조금 전 레오니에가 말한 세 가문이 무슨 짓을 저질러 사라졌는지 잘 알았다. 이젠 세상에 없는 귀족들의 이름은 에르바누 백작의 목을 가볍게 쥐었다.

“보레오티 영애, 부탁입니다.”

가까스로 숨을 내뱉은 에르바누 백작이 간곡히 청했다.

“제발 제 딸과 한 번만 만나게…….”

“여기에 백작의 딸은 없어.”

레오니에는 에르바누 백작의 간청을 잘라 먹었다.

“우리 집 호구를 내가 친히 알려 줘야 하나? 이 집엔 부모님과 나, 이렇게 셋밖에 없어. 거기에 기사들과 사용인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네 놈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며, 레오니에가 빈정거렸다. 그만 떠들고 집으로 가란 뜻이었다.

그러나 백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리아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누가 공작 부인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래? 요즘 신종 자살법이 너무 유행인데, 이러나 제국 인구 전부 소멸하는 거 아냐?”

장래 광공을 꿈꾸는 아기 맹수는 이제 슬슬 지루해졌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아무리 취향이라고 해도, 그것도 상대 나름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 황녀나.’

장래에 근육 뿜뿜이가 되실 은발 미인을 저 멀리 서부에 보내놓고, 레오니에는 이런 찰거머리 같은 영감이나 상대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안타까웠다.

심지어 백작이 타고 온 마차에는 분홍색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백조고 토끼고, 다 무슨 죄람.’

레오니에는 애먼 동물들만 욕먹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어느새 대문 철장을 붙잡은 에르바누 백작이 팔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맹수의 송곳니를 꺼낼까.’

이제 진짜 귀찮아진 레오니에는 심드렁한 눈으로 백작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저게 꼭 다른 사람들이 내쫓을 때와 달리, 상대적으로 어린 저가 나올 때만 저렇게 소리치고 난리였다.

“아무리 공작 가문이래도 부모 자식 간의 연을 이리 함부로 끊어 낼 수 없습니다!”

“…….”

“바리아는 제 딸입니다! 제게는 딸을 만날 권리가……!”

“……권리?”

레오니에는 불쾌감이 치솟았다. 기어코 머리에 얹은 색안경까지 내팽개친 레오니에가 대문 철장 사이로 손을 뻗었다.

길게 뻗은 아이의 손은 단번에 백작의 멱살을 잡았다. 붙잡힌 백작이 캑캑거렸다.

“함부로 그딴 소리 하지 마.”

순식간에 낮아진 소녀의 음성에, 백작의 눈이 맥없이 흔들렸다.

“부모에겐 자식을 소중히 키울 ‘의무’만 있지, 자식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는 없어. 그 당연한 걸 아직도 몰라?”

레오니에는 잡고 있던 백작의 멱살을 뒤로 밀치듯 놓았다. 에르바누 백작은 뒤로 몇 걸음 휘청거렸다.

“제, 제 딸입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 백작은 자식을 향한 제 권리를 주장했다.

“바리아는 제가 낳은 자식입니다! 저로 인해 이 세상에서 태어난……!”

“네가!”

참다못한 레오니에가 소리쳤다.

“……백작 그대가, 정말 아빠이고 부모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레오니에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도 요즘은 감정을 많이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싶었는데, 여전히 부모님과 관련된 일엔 힘들었다.

특히 엄마를 한 번 죽게 만든 원흉에겐 더욱.

에르바누 백작은 기실 레무스만큼 끔찍한 인종이었다.

“만약 그대가 정말 떳떳하다면.”

레오니에가 물었다.

“네 딸에 대해 아는 걸 말해 봐.”

아무거나 상관없다며, 레오니에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우리 바리아는!”

이때다 싶었던 에르바누 백작이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백작은 보란 듯이 바리아의 생일을 말하려 했다.

그 아이가 태어난 순간, 자신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실상 떠오르는 기억이라곤, 태어난 아이가 딸이란 사실을 전하던 집사의 목소리뿐이었다.

심지어 그날 창문 밖의 날씨가 어떠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둘째 생일은?”

그런 에르바누 백작이 기가 막힌 레오니에가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하나 백작은 그토록 편애했던 로타의 생일도 말하지 못했다. 입에 풀이라도 칠한 듯 침묵하는 에르바누 백작의 표정은, 지금껏 레오니에가 본 사람 중 가장 멍청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딸들이 좋아하던 색깔은?”

“…….”

“바리아가 좋아한 책은?”

“…….”

“로타가 좋아한 음식은?”

백작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보는 레오니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나랑 장난해?”

레오니에는 어이가 없었다.

조금 전 물어본 질문들은 부모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사소한 것들이었다.

펠리오였다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완벽하게 맞추는 거로도 모자라, 아이 본인조차 모를 습관이나 버릇도 척척 대답했을 터였다.

그래도 자기 딸들인데, 무엇 하나 답하지 못하는 꼴이 하찮았다.

“그, 그런 건 안사람이…….”

심지어 백작은 양육은 저의 몫이 아니었다며, 자신은 가문을 돌보느라 바빴다는 핑계를 댔다.

이 대목에서 레오니에는 그가 자식을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빤히 알 수 있었다.

“당신 정말 아버지 맞아?”

백작에게 있어 자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머, 먹여 주고 재워 주지 않았습니까! 그거면 아버지로서의 몫은 확실히…….”

“그건 부모라면 응당 해야 하는 거고!”

레오니에가 그딴 걸 특혜처럼 취급하지 말라고 으르렁거렸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백작의 짓거리가 역겨웠다.

그때.

“……아빠?”

레오니에가 뒤를 돌아봤다. 돌아보는 레오니에의 검은 눈에 황금빛 이채가 번뜩였다.

아빠란 소리에 펠리오가 나오는 줄 알고, 지레 겁먹은 에르바누 백작은 서둘러 마차에 올라 도망쳤다.

정작 레오니에는 백작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빠 지금 송곳니 꺼낸 거야?’

그것도 엄마가 있는 방에서?

미쳤냐는 욕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레오니에는 조금 전 느꼈던 아빠의 송곳니가 평소와 크게 다르단 걸 느꼈다.

‘……꺼내긴 했지?’

분명 맹수의 송곳니를 느꼈다. 그런데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치 넓은 호수에 피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미세하고 애매했다.

“으응?”

뭐가 뭔지 못 알아낸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의 송곳니가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진 건 처음이었다.

* * *

티그리아 황후가 다시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첫 정무는 남부의 위험 지역 정비였다. 해안 절벽이나 숲길 등을 살펴 안전장치가 필요한 곳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중앙 황실과 남부 메리디오와의 협업, 그리고 북부 보레오티의 지원까지 끌어냈다.

신문 논평에는 드디어 남부의 진짜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적혔다. 여기에 보레오티의 지원까지 더해, 남부와 북부의 지역 갈등이 해소될 거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후의 용기에 감탄하며 그녀를 찬양했다. 여전히 소식 없는 황녀를 향한 슬픔이 클 텐데도, 한 나라를 돌봐야 하는 국모의 입장을 우선시한 황후의 결단에 존경의 뜻을 표했다.

티그리아 황후는 그렇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동시에 수비테오 황제의 존재감은 점점 옅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정무를 크리세토스 황자가 대신 도맡았다.

일각에선 황후가 서둘러 복귀한 것 역시 황제의 부재 때문이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황제를 욕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다.

어서 나와 일을 하란 소리도, 어째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소리도 없었다. 마치 모두가 황제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굴었다.

그나마 간혹 들리는 건, 어차피 황제가 그간 제대로 한 일이 있긴 있었느냔 조롱이었다.

그렇게 존재를 무시당한 황제는 매일 술에 찌들어 갔다.

‘도대체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수비테오 황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고민했다.

과거를 돌이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러했지만, 특히 황제는 저의 인생을 아주 창피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항상 술의 힘을 빌렸고, 그 탓에 매일매일 술에 취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가까스로 떠올리는 과거는 더욱 암담했다.

저보다 강하고 뛰어난 아내.

자기 이득들만 챙기는 간신들.

저를 하찮게 여기는 귀족들.

이런 저를 항상 부족하게 여기던 선황까지.

‘그래도 나는 잘해 왔다.’

황제는 나름 자신이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역대 황제들이 그토록 바라던 ‘맹수의 송곳니’가 바로 자신의 코앞까지 다다르지 않았는가.

‘그 힘만 손에 넣으면……!’

저를 비참하게 만드는 과거 따윈 한낱 먼지로 만들 수 있었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엔 저를 향한 무한한 동경과 두려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놓치게 되었다.

바로 보레오티 때문에.

‘빌어먹을…….’

홧김에 손에 쥔 술병을 입에 가져간 황제가 눈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술병엔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에 있는 다른 술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텅 빈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 사소한 것에 참았던 울분이 터진 황제가 손에 든 병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와장창 깨진 술병은 어제 깨진 술병 조각들과 뒤섞였다.

“허억, 허억……. 윽!”

황제는 돌연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깨진 술병 조각이 황제의 종아리를 찔렀다.

곧 시뻘건 것이 바지 위로 번지었지만, 황제는 따끔한 통증보다 더한 두통에 한참을 시달렸다.

최근 황제는 두통이 끊이지 않았다. 단순한 숙취라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다가 귀에선 누군가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그 환청마저 끊임없이 황제를 탓했다.

‘네가 내 남편을 해치려 했어!’

‘난 평생 너희에게 복수할 거다.’

‘너의 모든 것을 빼앗겠어.’

‘황실도, 올로르도 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황제의 목을 졸랐다.

“허억, 허억…….”

숨이 가빠진 황제의 입에선 침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정신을 반쯤 잃은 짐승처럼 보였다.

황제의 끔찍한 두통과 끊임없는 환청은 단순한 숙취 때문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우시스 황비가 사용해 온 알루키나의 부작용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었다.

숙취와 뒤엉킨 부작용은 황제의 머리를 깨트리는 수준의 고통이었다.

기어코 고통을 참지 못한 황제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행인지 몰라도, 차가운 바닥의 감촉과 살을 찌르는 유리 조각 덕분에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지친 숨을 토하는 황제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전부 무너지는 거다…….’

오랫동안 황실이 몰래 이어온 대업이 허무하게 끝나는 거다.

‘나 때문에.’

너 때문에.

귓가에 맴돌던 원망의 목소리가 천천히 바뀌었다.

‘너는 왜 이리 어리숙하느냐.’

‘보레오티 공작 영식의 반만 닮았더라도.’

‘아직도 모자라다.’

‘제발 기대의 반만이라도…….’

선황은 항상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을 탓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아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굳게 다물린 입술 속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쾅!

“……화, 황제 폐하!”

느닷없이 문이 열리자, 그 앞에서 꾸벅꾸벅 반쯤 졸며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황제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 무슨……!”

시종은 겁에 질린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실로 며칠 만에 뵙는 황제는 속된 말로 몰골이 말도 아니었다.

술만 마시느라 핼쑥해진 얼굴, 빨갛게 충혈된 눈, 파르르 떨리는 손끝, 입가에 흘러내린 침. 그리고 전신에 묻은 피까지.

이는 조금 전 유리 조각이 엎어졌던 바닥에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들에서 난 피였다.

황제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시종을 스쳐 갔다.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폐하! 어디를 가시옵니까.”

겨우 정신 차린 시종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선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나가시면 다들 놀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시종이 황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 황제가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정말로 위험했다.

시종은 저의 얼마 안 되는 충성심을 끌어모아 황제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황제에겐 그 진심이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황제는 팔을 휘둘렀고, 시종은 바닥에 쓰러졌다.

“커헉!”

쓰러진 시종은 피를 울컥 토했다. 시종은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바라봤다.

“…….”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지만, 비릿한 핏물에 잠긴 부름은 황제를 붙잡지 못했다.

황제가 지나간 길마다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품이 넓고 긴 소매 사이에 가려졌던 단도에 맺힌 시종의 피였다.

* * *

늦은 밤.

한밤중에 귀가한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복도를 지나가는 중에 눈에 띈 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 안을 살피니 레오니에가 잠옷 차림으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어어, 왔어?”

정작 아이는 가볍게 손을 들며 알은체하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다른 한 손으론 허벅지며 옆구리를 대수롭지 않게 벅벅 긁기까지 했다.

기가 막힌 펠리오는 일단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밤중에 자지도 않고.”

“그냥, 별거 아니고…….”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니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것들을 보여 줬다.

“괜히 찜찜하니 잠도 안 와서 말이야.”

바닥에는 커다란 지도들이 펼쳐져 있었다.

펼쳐진 지도 위엔 무수한 핀들이 꽂혀 있었고, 핀들 사이사이로 펜으로 그은 선이 이어져 있었다.

“……쯧.”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레오니에를 탓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밤중에 제 딸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게 한 황제에게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수비테오 황제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당연히 이는 중대한 극비로 부쳐졌다.

황후는 궁인들의 입단속을 시켰고, 황제에게 당했던 시종을 황궁 내 별궁에 데려가 치료했다.

현재 황제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상태가 위중하여 칩거 중인 상태였다. 황후는 그 틈에 황실 기사단 중 소수 정예를 뽑아 사라진 황제를 찾도록 했다.

그러나 몇몇 귀족들은 황제의 실종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를 찾는 일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예를 들어 보레오티 같은.

“찾긴 찾았대?”

레오니에가 황제의 행방을 물었다. 펠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는 그럴 줄 알았는지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벽에 붙여서 하지.”

왜 허리하고 목 아프게 바닥에서 이러느냐고 펠리오가 물었다. 그러면서 레오니에의 옆에 앉아, 아이가 해 놓은 것들을 살펴봤다.

“어디 있는지 알겠어?”

“대충 여기 있겠거니, 싶은 곳만 핀으로 찍었어.”

레오니에가 수도 지도를 가리켰다.

“우선 황제가 한 번만이라도 방문한 곳은 노란색 핀으로 표시했어. 그리고 두 번 이상 들른 곳은 파란색…….”

레오니에는 지도에 표시된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황제가 행차한 곳은 의외로 많았다. 허세 부리기 좋은 외출은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두 번 이상 방문한 곳은 확실히 그 수가 적었다.

“이 빨간색은?”

펠리오가 지도에 꽂힌 붉은 핀 세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올로르와 연관된 곳.”

황제가 여러 번 방문한 곳은 어떻게든 올로르와 관련된 장소들이었다.

“올로르와 연관되었다고?”

붉은 핀이 꽂힌 장소를 살피던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황실은 황제가 숨었을 만한 곳을 전부 뒤지는 중이었다. 그중엔 당연히 올로르 저택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곳에 없었다.

“올로르가 돈세탁한 거로 추정되는 회사, 올로르가 투자한 고급 식당, 거기는 올로르가 후원했던 갤러리 중 하나.”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았지?”

펠리오가 드물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세 장소는 펠리오도 루페에게 보고받고 나서야 알게 된 장소들이었다.

이는 황후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따로 글라디고 기사단을 보내 황제를 찾아 한 번 족칠 생각이었다.

“엄마가 가르쳐 줬어.”

레오니에가 출저를 밝혔다.

“재정부에서 근무할 적에, 올로르의 자금 흐름을 추적했었다나 봐.”

이를 기억하고 있었던 바리아는 올로르와 관련된 곳 세 군데를 척척 알려 줬다.

‘가정 교사가 아니라 비서로 채용할 걸 그랬나?’

펠리오는 새삼 바리아의 능력에 감탄했다. 확실히 그녀가 들고 온 황제파 비리 자료들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나중에 북부로 돌아가면 비서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봐야겠군.’

공작 부인으로만 있기엔 너무 아쉬운 재능이었다.

“실은 아까 엄마도 있었어.”

바리아의 재능에 감탄하던 펠리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잠이 들었어.”

잘 있다가 갑자기 잠든 바리아를, 조금 전에 레오니에가 방까지 직접 안아 데려다줬다.

“엄마가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은가?”

아기 맹수가 조금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많이 피곤해 보이고, 아까도 갑자기 잠들었고.”

“의원은 오늘 저택에 왔고?”

펠리오의 물음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전에 들렀던 의원은 바리아를 진료하곤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피로가 많이 쌓인 것뿐이래. 영양가 풍부한 음식 많이 먹고, 어지간하면 일하지 말고, 정원 산책 정도만 하고, 푹 쉬고 자면 된대.”

의원의 처방을 들은 펠리오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역시 임신이었군.’

그는 사실 훨씬 전부터 바리아의 임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늘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던 맹수의 송곳니가 어느 날부터 바리아 앞에서는 종적을 감춘 것처럼 잠잠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든 바리아를 향해 꺼냈던 송곳니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처음엔 솔직히 놀랐다. 반려가 임신하면 맹수의 송곳니가 약해진다는 사실을 알고야 있었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꽤나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펠리오는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기쁨과 함께, 혹여 레오니에가 이 일로 조금이라도 서글픈 감정을 느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걱정이었다.

바리아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는 ‘적통’이었다.

펠리오는 ‘사생아’ 출신인 레오니에를 아니꼽게 보는 인간들이 후계 자격을 운운하며 쓸데없이 시비를 걸까 봐 걱정이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그런 사실에 은근히 예민하단 걸 알고 있었다. 어릴 적에 질릴 정도로 그런 말들을 듣고 자랐음에도, 보레오티를 향한 자부심은 누구보다 강했다.

“……레오.”

펠리오가 아이에게 물었다.

“만약에 동생이 생긴다면 어떨 것 같아?”

“동생? 갑자기?”

도망친 황제를 붙잡으면 어떻게 족칠지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임신했대? 설마 피곤했던 게 그 때문이야?”

“그건 아니고.”

펠리오는 만일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말했다.

의원이 했던 말만 보면, 아마 바리아도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직 레오니에한테 말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분명 바리아도 자신의 임신 소식이 레오니에에게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는 듯했다.

사람을 가리는 레오니에가 신기할 정도로 바리아만큼은 처음 본 순간부터 잘 따랐다. 바리아도 그런 레오니에를 예뻐하고 진심으로 아끼었다.

졸음이 쏟아질 때까지 레오니에의 옆에 있었던 것도 그런 진심과 걱정 때문이었다.

바리아는 아마 누구보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조심스러워할 게 분명했다.

“동생…….”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레오니에는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하지.”

그렇게 물고 빠는데도 생기지 않는다면 아빠의 생식 능력을 의심해야 한다며, 레오니에가 은근슬쩍 펠리오를 힐끔거렸다.

“……혹시 아빠한테 없대?”

생식 능력이 없대?

아이가 측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

“너무 특출나서 자중하는 거다.”

그 와중에 자존심이 상한 펠리오가 저의 우수한 생식 능력을 자랑했다.

“자중 안 했으면 벌써 네 밑에 동생만 셋일 테지.”

“어이구, 누가 들으면 아빠가 애 낳는 줄 알겠네.”

콧방귀를 뀐 레오니에는 잠시 동생이란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

“으음…….”

그리고 답했다.

“……내가 키울 거야!”

예상치 못한 답변에 펠리오는 어이가 없어졌다.

“……네가 낳았냐? 네가 왜 키워?”

“그거야 내 동생이니까.”

레오니에는 이미 동생이 태어나면 앞으로 무엇을 할지 다 정해 둔 상태였다.

“내가 우리 쪼꼬미 아장아장 걷고 아우아우 옹알이할 때까지 돌봐줄 거야.”

그 말에 펠리오는 내심 안도했다.

‘동생은 괜찮나 보군.’

일단 동생에 대해 호감을 지닌 듯했다.

“난 나중에 아카데미 갈 거잖아.”

레오니에는 열다섯이 되면 아카데미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차기 보레오티 공작이 되기 위한 일환으로, 역대 공작들이 다녔던 아카데미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쪼꼬미랑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나 빼고 다 북부에 있을 거고 말이야…….”

그러니 쪼꼬미가 저를 잊지 못하도록, 항상 옆에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놀아 줄 거라며 저의 포부를 당당히 밝혔다.

“응당 내 동생이라면 ‘맘마, 찌찌’가 아니라 ‘유두’라는 전문 용어를 써야 하고! 내가 저술한 근육 사전으로 글을 깨우쳐야지!”

“네 동생 미래를 망치지 마라.”

펠리오는 이 이상 집안에 변태를 늘릴 수 없었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건 레오니에 하나뿐이었다. 둘째까지 그랬다간 진짜 뒷목 잡고 쓰러질 판이었다.

“혹시 유두란 단어가 불편하면, ‘다섯 번째 늑골 위에 돌출된 융기물’이란 용어도 있는데. 그거로 가르칠까?”

“난 너의 그 지식이 불편하다만.”

“왜 또 시비야!”

크아앙, 아기 맹수가 울부짖었다.

“두고 봐! 나 이상의 변태로 키울 거니까!”

“집안 말아먹을 일 있냐.”

“진짜 말아먹는 꼴을 보여 줘?”

“이제 그 이야기는 됐다.”

펠리오가 샛길로 빠져나간 이야기를 도로 되돌렸다. 제 딸이라면 진짜로 집안을 말아먹을 것 같았다. 레오니에는 한다면 하는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다시 지도를 가리킨 펠리오가 아이에게 물었다.

“저 셋 중에서, 황제가 숨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한결 마음이 놓인 펠리오가 본제에 집중했다. 그제야 레오니에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지도를 바라봤다.

“황제는…….”

그리고 지도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 * *

“요즘 기사들이 많이 보이죠?”

아침 일찍 식당에 출근한 직원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네가 봐도 그렇지?”

먼저 와 조리복으로 갈아입던 동료 한 명이 요란하게 맞장구를 쳤다.

“수도에 무슨 일이 있나?”

“범죄자라도 도망친 거 아닐까요?”

“에이, 그런 거면 우리한테 알렸겠지.”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치안 살피는 걸지도.”

기사들 덕분에 최근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편해졌다며 동료가 껄껄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창고 청소하는 날이네.”

귀찮게 되었다며 중얼거리던 동료에게, 누군가가 다가가 그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럼 제가 대신 할까요?”

아까부터 함께 있었지만,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또 다른 동료였다.

“어, 네가?”

“어제도 청소하지 않았어요?”

“내가 이번에 ‘쓰레기’ 쪽인데, 거기 힘들지 않겠어?”

“실은 집에 친척들이 와 있어서…….”

동료 직원이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게 조금 곤란하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 모습에 다른 직원들이 이해한단 듯이 따라 웃었다.

“하긴, 친척들 있으면 좀 그렇죠.”

“쓸데없는 잔소리만 읊고 말이야.”

“걱정한다고 하는 소리잖아요.”

“걱정은 무슨. 그냥 꼬장이지.”

잔소리 많은 친척치고 잘사는 사람들 못 봤다며 학을 떼던 동료가 선뜻 창고 청소를 부탁했다. 대신 하겠다고 말했던 직원이 고개를 꾸벅거렸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나야 청소 대신 해 준다는데 싫을 리가.”

“힘들면 말해요. 도와줄게요.”

그럼 잘 부탁한다며, 동료들이 먼저 나갔다.

홀로 남은 직원은 마저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서 조그만 나무 상자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청소 도구를 챙기고 창고로 갔다.

이곳 식당에서 관리하는 창고는 총 세 군데였다. 식자재 창고와 물류 창고는 식당 바로 뒤에 붙어 있어 항상 직원들이 들락거렸다. 주문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는 배달원들도 자주 보일 정도였다.

반면 안 쓰는 물건들을 모아 두는 창고는 식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직원들은 그곳을 ‘쓰레기 창고’라고 불렀다.

그 창고에 들어가게 되면 다 쓰레기로 처리되기 때문이었다.

직원은 그 쓰레기 창고를 청소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접니다.”

창고에 들어선 직원이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인데도 창고 내부가 워낙 어수선해서 괜히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창고 안쪽에서 탁탁 소리가 났다. 직원은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식당 직원은 분명히 아닌 남자 셋이 있었다.

붉은 머리를 한 남자 둘은 부자처럼 똑 닮았고, 황갈색 머리가 엉망진창인 남자는 빈말로도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었다.

“여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간 직원은 가지고 온 나무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나무 상자는 도시락통이었는데, 안에는 햄과 치즈, 채소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도시락을 거칠게 낚아챈 황갈색 머리의 사내가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었다. 두 손에 샌드위치를 쥔 채 우걱우걱 씹어먹는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거지? 미친놈?’

직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는 두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줬다.

“……바깥 상황은 어떤가?”

얼굴에 주름이 깊은 붉은 머리의 사내가 물었다. 그제야 직원이 정신 차리고 겨우 말했다.

“최근 기사들이 이 부근을 살피고 있습니다. 동료들도 기사들이 자주 보인다고 합니다. 저도 출근길에 마주쳤고요.”

“설마 여기까지…….”

붉은 머리의 사내가, 즉, 올로르 자작이 혀를 찼다.

“아마 그들일 겁니다.”

또 다른 붉은 머리의 사내가 답했다. 레무스였다.

그는 자신들을 여기까지 몰아넣은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제 옆에 있던 검은 천을 노려봤다.

바로 보레오티였다.

“그 여자가 재정부에서 일했습니다. 분명 그때 우리 집안의 자금을 꿰뚫고 추적했을 겁니다.”

“그 여자라니. 설마……!”

“바리아 말입니다.”

“빌어먹을!”

올로르 자작이 거친 욕을 내뱉었다.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던 식당 직원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올로르 자작의 욕은 거의 저주에 가까웠다.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은 꿈에라도 나올까 무서울 만큼 끔찍했다.

“애초에 그 집과 연을 맺어선 안 되었어!”

올로르 자작이 레무스를 노려봤다. 그가 에르바누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된 건, 로타에게 반했던 레무스의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

“이제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레무스가 심드렁히 답했다.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바리아가 아닌 로타를 선택할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의 로타는 정말 아름다운 소녀였으니. 지금은 그나마 보레오티에게 연민을 얻을 수 있는 끄나풀에 불과했다.

하나 그마저도 이젠 별 쓸모가 없는 듯했지만.

‘전부 내 예상을 빗나갔어.’

레무스는 그 점이 가장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고, 어긋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딴 쓰레기 창고에 숨어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넌 일단 나가 봐.”

잠시 생각하던 레무스가 식당 직원을 내보냈다.

“저놈은 어찌할 셈이냐.”

올로르 자작이 여전히 탐탁지 않은 눈으로 아들을 흘겨봤다. 그는 이제 제 아들마저 짐짝처럼 느껴졌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자의 가족들에 대한 신상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도 그걸 아니까 저희에 대해 함부로 일러바치진 않을 겁니다.”

조금 전 이들을 도왔던 식당 직원은 지난겨울 제국을 들썩이게 했던, 마약을 제조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 일로 더는 그림을 못 그리게 된 후, 식당 보조 직원으로 취직해 근근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올로르가 다시 접근했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직장과 가족들에게 너의 비밀을 떠벌리겠단 협박에 못 이겨 식당 창고에 숨겨 주었다.

“사실 우리야 저택에 돌아가도 상관없지만…….”

레무스가 제 옆을 힐끔 봤다.

“이게 문제지요.”

그가 말한 ‘이거’는 바로 수비테오 황제였다. 식당 직원이 거지라고 추측했던 남자는 바로 이 제국의 황제였다.

제대로 씻지 않아 엉망인 몰골을 한 남자는 퀴퀴한 악취를 풍겼고, 조금 전 샌드위치를 꽉 쥔 탓에 손톱 사이사이엔 찌꺼기가 가득 끼어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놓았군.”

올로르 자작은 그런 황제를 보며, 그가 제 저택에 방문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여기저기 피가 묻은 채로 찾아온 황제 때문에 그날 저택은 난리도 아니었다.

깜짝 놀란 하녀들은 소리를 질러댔고, 힘 좀 있는 하인들은 그를 쫓아내려다 단검에 베여 상처를 입었다.

뒤늦게 황제를 알아본 레무스가 미친놈을 쫓아낸단 핑계로 그를 저택 밖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곳 창고에 데려와 숨겨 뒀다.

“약이라도 했나?”

“그런 모양입니다.”

“어떻게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은 없는 건가.”

“진료를 받아 봐야 알겠지만…….”

“이대로는 힘들겠군.”

올로르 자작이 안타까이 말했다. 그의 안타까움은 결코 황제를 향한 염려가 아니었다.

현재 황제는 위중한 상태인지라, 계속해서 자리를 비우게 되면 황후의 대리청정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황후 소생의 2황자가 황태자가 되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서둘러 황제를 데려가야 하는데…….’

문제는 그 황제가 정신을 잃었다. 이 꼴로 데려가 봐야 오히려 황제의 신임만 잃고 황후에게 힘이 더 쏠릴 판이었다.

“아버지.”

레무스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믿으시나요?”

“무얼?”

“북부 전설이요.”

맹수의 송곳니란 이능을, 북부 산맥 너머에 산다는 신들이 선물했단 전설을.

“원래 황실은 그런 허황된 것에 빠져 미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야.”

올로르 자작이 비아냥거렸다. 애초에 제정신인 놈들이 어디 있었느냐는 노골적인 조롱은 덤이었다.

“시키니 하기야 했다만, 난 정말 기가 막혔다.”

북부 전설을 조사하면 할수록 자괴감만 들었다. 도대체 황실은 미신보다 신빙성이 없는 허구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레무스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북부에 잠입했던 그는 레지나에게 북부 전설에 대해 여러 번 물었지만, 보레오티조차 그 전설을 애들 동화처럼 취급했었다.

물론 맹수의 송곳니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땐 진심으로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오러’와 ‘마나’라는 초자연적인 힘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느 가문의 이능이라고 해도 그와 다를 게 없다는 게 레무스의 생각이었다.

‘적당히 구색 맞추는 척했지만.’

지금 레무스는 ‘혹시’ 했다.

혹시, 설마. 정말로.

‘어차피 나에겐…….’

그리곤 제 처지를 냉정히 판단했다.

귀족 사회에 제대로 나설 수도 없고, 집안은 무너지기 직전에, 작위까지 몰수되기 직전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레무스의 붉은 눈에 섬뜩한 무언가가 스쳤다.

* * *

“……놓쳤다고?”

티그리아 황후의 미간에 잔주름이 생겼다.

그녀의 집무실엔 수많은 서류가 들어왔다 나갔고, 그 서류만큼이나 많은 궁인이 드나들었다. 병중인 황제를 대신해서 황후가 정무를 보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대리청정이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보고하던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되었으니 이어 말해 보라 일렀다.

“알려 주셨던 식당 창고를 기사들이 수색하였으나,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미’라…….”

흥미로운 단어에 황후가 입꼬리를 조용히 올렸다.

“흔적은 찾았나?”

“머리카락을 찾았습니다. 황갈색이었습니다.”

“어지간히 급했나 봐.”

황후는 그만 참았던 웃음을 피식 흘렸다. 어쨌건 부부로 지낸 세월이 십수 년이었다. 황후는 수비테오 황제의 사치스럽고 과시욕 넘치는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황제는 결코 그런 쓰레기 창고에 자진해서 몸을 숨길 위인이 아니었다.

‘아니면 정말 미쳤거나.’

별궁에서 치료받던 시종이 어제 막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황제가 꼭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고 두려움에 떨며 회상했다.

만약 정말 미쳤다면, 도대체 어쩌다 정신을 놓은 걸까.

‘황비의 짓인가?’

순간 해맑은 아이 같은 우시스 황비가 떠올랐다.

‘앙큼하기도 하지.’

황후는 다시 생각해도 신기했다. 마냥 멍청하고 어리숙한 줄 알았더니, 그 누구보다 치밀하고 영악한 존재였다.

조금 더 일찍 그 정체를 알았더라면 기꺼이 발 벗고 나서 도와줬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안 돼.’

공동의 적을 두었지만, 서로 지향하는 방향이 달랐다. 그러니 황후가 할 일은 하나였다.

“……그 식당에 대해 또 보고받을 건 있니?”

황후가 시녀에게 물었다.

“식당 직원 중에 이전 후원 단체 비리 사건에 연루된 범인 한 명이 있었습니다.”

“약점이라도 잡혔나 보네.”

“이 자를 어찌할까요?”

“내버려 두렴.”

어떻게 봐도 전과를 숨기고 식당에서 일하는 것 같은데, 아마 그 사실로 올로르에게 약점이 잡혀 창고를 빌려줬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괜히 겁을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입막음 정도는 해야겠지.”

“적당히 입을 막아 두겠습니다.”

상황을 척척 알아서 정리하는 시녀를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황후는 약간 입맛이 썼다.

“보레오티가 또 한소리 하겠어.”

식당을 조사하라고 귀띔을 준 건 바로 보레오티였다. 떠다 먹여 준 걸 그렇게 놓치냐고,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투덜거릴 보레오티 공작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황후는 이렇게 보레오티에게 또 신세를 지게 된 게 아주 불만이었다.

“그러게 좀 일찍 알려 줬어야지요.”

시녀는 오히려 보레오티를 탓했다. 황후는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폐하.”

시녀가 다른 소식 하나를 전했다.

“메리디오 후작이 황궁에 들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황후가 반색했다.

“이번에 황실과 보레오티가 함께하는 위험 지역 보수 사업에 대한 진행 과정을 보고하러 오는 듯합니다.”

“귀한 손님들이 오시는군.”

“제가 조심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너는 항상 잘하니 내 따로 염려는 아니 한다만…….”

손가락으로 턱 언저리를 툭툭 치던 황후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렴. 아주 귀한 분들이 오시는 거야.”

“그럼 심혈을 기울여 손님들을 맞이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으마.”

티그리아 황후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걸.”

나가려던 시녀를 붙잡은 황후가, 조금 전에 막 결재를 마친 서류를 내밀었다.

“이걸 바깥에서 강아지처럼 기다리고 있을 시종에게 전해 주겠니?”

“예, 폐하.”

시녀가 은색 쟁반에 황후가 건넨 서류를 고이 올렸다.

바로 다음 귀족 회의 일정이었다.

“……이제 끝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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