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황녀의 실종
크리세토스 황자와 스칸디아 황녀가 저택에 찾아온 뒤. 그리고 우시스 황비가 올로르 가문에 들러 로타에게 기회 아닌 기회를 주기 전.
레오니에는 ‘지인’에게 연락했다. 답장은 그로부터 두 시간 뒤에 도착했고, 소녀는 그날 밤 호위 기사 둘을 데리고 어느 허름한 폐가로 향했다.
“수도에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호위로 따라온 프로보가 음산한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레오니에가 약속 장소랍시고 가르쳐 준 곳은 상업 지구 뒷골목이었다. 그것도 너무 뒤안길이라 인적은커녕 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전에도 혼자 오셨습니까?”
멜레스가 물었다. 보아하니 레오니에는 정체불명의 ‘지인’과 일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때 호위도 없이 이곳에 혼자 왔다면 펠리오가 기함을 하고 크게 혼낼 일이었다.
“그땐 대낮에 광장 카페에서 만났어요.”
레오니에가 뒤집어쓴 망토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프로보 오빠를 협박해서 말 타고 스토커 만난 이후로는 나도 조심하고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언니랑 오빠 데리고 왔지.”
“그땐 정말…….”
아찔했던 그 날, 어린 딸을 친히 마중하러 나온 지옥의 맹수를 떠올린 프로보가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런데, 누굴 만나시는 겁니까?”
“일단 여자. 나머지는 비밀.”
“위험한 분은 아니시죠?”
“위험하기론 내가 더 위험할걸요?”
프로보의 걱정에 레오니에가 피식 웃었다. 프로보는 그 말에 격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만해.”
지켜보던 멜레스가 작작 끄덕이라며 그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저희는 어디서 기다릴까요?”
멜레스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상대가 비밀 유지를 원하니, 여기 문밖에서 기다려 줘요.”
“그러나 그 상대는 기사를 대동한 것 같습니다만.”
멜레스가 근처에 묶인 말을 보며 말했다. 말 등에 올려진 안장에 검 같은 무기를 쓰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장갑이 걸려 있었다. 호위 기사들의 눈이 매서워졌다.
“상대가 비밀 유지를 원하니, 여기서 기다려요.”
그러나 레오니에는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뭔 일 생기면 내가 죽이면 되니까.”
그렇게 호위 기사들을 문 앞에 둔 채, 레오니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습하고 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바닥이 거슬렸다.
“……후우.”
레오니에는 답답함에 아주 길게 한숨을 흘렸다.
“아아, 내가 진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레오니에는 기다리고 있던 선객을 마주하기 무섭게 투덜거렸다.
“이런 식으로 휘둘리는 건 너무 싫단 말이지.”
낡아빠진 의자를 거칠게 빼내어 자리에 앉은 레오니에가 하찮단 듯 웃음을 흘렸다.
“살루스 아우스트.”
남부 차기 주인의 이름을, 레오니에가 잇새로 짓이기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머, 무서워라.”
그러나 정작 살루스의 얼굴엔 싱그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청옥색 머리칼까지 더해지니 꼭 여름날의 싱그러운 숲이 떠올랐다.
그게 더 짜증스러웠던 레오니에는 혀를 차며 양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언니가 전에 줬던 사탕 말이야.”
“사탕이 담긴 동그란 함?”
“거기 안에 있는 거, 잘 봤어.”
“도움은 되었어?”
살루스가 물었다.
‘언젠가 네게 도움이 될 거야.’
남부 아우스트 저택에서 아우스트 공작과 살루스를 만났던 날, 레오니에는 사탕이 담긴 동그란 함에서 조그마한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엔 웬 연락처 하나가 적혀 있었다.
“……뭐, 도움은 되었지.”
그러나 아주 조금밖에 안 되었다며, 레오니에가 엄지와 검지를 붙인 채 말했다. 자존심 부리는 그 모습에 살루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기분 나빠.”
“왜 기분이 나빠?”
“내가 언니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거든.”
아기 맹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저보다 앞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빠와 엄마가 유일했고,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저는 물론이고 부모님마저도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놀아나진 않았어.”
살루스가 쓴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 있는 저 오만한 소녀가 너무 귀여웠다.
“난 남부에서 함부로 나올 수 없잖아. 할머님 상태가 그렇게 좋지도 않고.”
“그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신지 몰라.”
웃음기 하나 없는 레오니에의 날 선 눈빛이 반짝였다.
“명예의 의식 땐 와 있었잖아.”
“봤니?”
“사람 눈을 콧구멍으로 아나…….”
“레오 너 진짜 말 재미있게 하는구나!”
우스꽝스러운 비유에 살루스가 깔깔 웃었다. 정작 웃길 의도가 전혀 없었던 레오니에의 입술은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심지어 이마저도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 아주 불쾌했다.
웃을 거 다 웃은 뒤에야, 살루스가 숨을 고르며 변명을 했다.
“지금은 할머님 상태가 괜찮거든. 그래서 왔어.”
“언니 이렇게 뺀질거리는 사람이었구나. 의외네.”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야.”
“그렇지만, 우리 레오도 너무 오만한 거 아냐?”
“난 오만해도 괜찮아.”
그만큼 완벽하니까, 레오니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자신만만하다 못해 소름 끼칠 만큼 자아도취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반박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잡소리는 그만하자.”
짜증이 치민 레오니에가 대화를 중단했다.
“내가 온 건, 언니한테 내 정신적 충격에 대한 피해 보상을 뜯어내려고 왔어.”
“꼭 돈 뜯을 것 같은 말투구나.”
살루스는 여전히 레오니에의 과감한 단어 선택에 감동했다.
“난 정말 너무 충격이었어.”
레오니에가 이마를 짚으며 퍽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정작 살루스는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레오니에는 저 미소 지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찰싹거리고 싶었다.
‘아빠가 이런 마음일까.’
내가 깝죽거리면 한 대 치고 싶었을까. 지금이라면 기꺼이 한 대 맞아 줄 용의가 있었다.
“……난 분명 언니한테 도움을 청했는데.”
가까스로 내적 평화를 쌓아 올린 레오니에가 살루스를 노려봤다.
“어째서 그 자리에 1황자가 나온 거야?”
살루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일까?”
“나랑 말장난할 시간은 끝났어.”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소녀는 이제 불편한 심기를 감출 생각이 없었다.
불편한 살기를 느낀 살루스의 기사가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살루스가 손을 들어 이를 저지했다.
“그런데, 너무 웃긴 게 뭔지 알아?”
“뭐가 웃겼는데?”
“1황자 보고 나니까 알겠더라.”
약속 장소에서 마주친 의외의 인물.
“둘이 닮았어.”
레오니에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작년 여름, 남부 아우스트 저택을 떠날 즈음에 살루스가 제게 했던 한마디가 스치듯 떠올랐다.
‘나중에 만나거든, 난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 줘.’
그때 레오니에는 저 안부를 누구에게 전해 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우스트 공작 가문은 사교 활동이 보레오티보다 저조한 탓에 친한 가문이 누구인지조차 함부로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알았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오랜만에 충격을 받았다.
“언니, 1황자랑 친한 사이지?”
그 충격은 제 출생의 비밀만큼이나 엄청났고.
“언니도 우시스 황비 딸이구나.”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원작 장르를 뒤집어 버릴 만큼 엄청났다.
“안부는, 전해 줬어?”
살루스는 부정하는 대신, 지난번에 부탁했던 안부의 전달 여부를 물었다.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청옥색 눈동자가 슬그머니 레오니에를 살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긍정이었다.
“본인한테는 전해 주지 못했어.”
하지만 동정심이 생기는 눈빛을 본 레오니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약속 장소에 나타났던 네…….”
“동생. 동생이야.”
살루스가 저와 알리스 황자의 관계를 알려 줬다.
“나랑 알리는 쌍둥이야.”
“……동생 통해 전해 줬어.”
“고마워.”
“고마우면 한 번 더 도와.”
“난 힘이 그리 없는데.”
살루스가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 힘 있는 알리스 황자와는 연락하잖아.”
레오니에의 물음에 살루스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으로 미소를 지운 살루스는 알리스 황자와 닮은꼴이었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제 심기가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함부로 만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레오니에가 코웃음을 쳤다. 남의 집 가정사를 배려하기엔 이쪽도 심각했다. 오히려 저 집안 때문에 이쪽이 피해를 너무 많이 입었다.
“그러게 애초에 그딴 쓰레기는 일찌감치 치웠어야지.”
“그건 할 말이 없어.”
살루스가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의미를 내비쳤다. 그녀에게도 올로르 가문은 아주 불쾌한 쓰레기였다.
“그래서 이제 치우려고 하잖아.”
“그걸 왜 우리 보레오티를 이용해서 치워?”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남부 따위가 감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북부를 이용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지금 여기서 너랑 그 기사를 당장 죽여 줘야 정신 차리지?”
그 위협이 거짓이 아니란 듯이, 레오니에의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 안개가 일렁거렸다. 정제된 살기는 오로지 살루스와 그녀의 뒤에 있는 기사에게로 향했다.
“……콜록!”
겁에 질린 살루스가 콜록거렸다. 등 뒤에 있는 기사는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였다. 둘 다 처음 경험하는 맹수의 송곳니에 몸을 떨었다.
레오니에는 송곳니를 금방 거두었다.
“그래서, 미안해서 왔잖아.”
겨우 숨을 쉬게 된 살루스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사도 숨을 크게 들이쉬며 굽혔던 몸을 겨우 펼쳤다.
“하지만 우리도 그만큼 심각하단 걸 이해해 줘.”
“남의 집 사정 이해할 정도로 난 착하지 않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언니는 아까 나한테 당하고도 뺀질거리는구나.”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걸지도.”
살루스가 아무 일 없단 듯이 싱긋 웃었다. 레오니에는 그런 살루스의 뻔뻔한 태도에 아주 조금 감동했다. 배짱 하나만큼은 확실히 인정할 만했다.
“……간단히 설명해.”
그 배짱을 보아서, 레오니에가 설명할 시간을 주었다.
“내가 알아도 되는 것까지, 하지만 더는 몰라서 답답하지 않을 만큼.”
“다 말하라는 거잖아.”
기가 막힌 살루스가 킥킥 웃었다. 레오니에는 맹수의 송곳니에 노출되고도 저렇게 해맑게 웃는 사람은 처음 봤다.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럼 남부는 내 수중인가? 그렇게 세상을 제패하는 미래를 꿈꾸던 찰나였다.
“……엄마는.”
살루스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올로르 자작의 사생아였어. 그리고 유일하게 그 집안의 상징인 백조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덕에 인정받을 수 있었지.”
“…….”
“하지만 결국 얼마 못 살고 나왔다고 했어.”
“레무스 때문에?”
“정말 위험할 뻔한 적도 있었다더라.”
살루스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으나, 레오니에는 그 ‘위험’이 어떠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존재 자체가 부끄러운 인간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한결같기도 힘들 텐데.
“그렇게 나와서 홀로 살아가다가, 우리 아빠를 만났어.”
둘은 첫눈에 반했고, 등대가 보이는 오두막에서 소소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공작의 아들이?”
레오니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레지나가 떠올랐다.
“이건 우리 가문의 전통이야.”
살루스가 말했다.
“아우스트 가문은 후계자들이 일정 나이가 되면 자립을 해.”
“결혼도 마음대로 해도 돼?”
“우린 이 능력 때문에 여타 귀족들과 함부로 만날 수 없어.”
살루스가 제 눈을 톡톡 가리켰다. 미래를 보는 능력은 악용될 가능성이 너무 커서, 아우스트 가문은 귀족보다 평민과의 결혼을 더욱 선호했다.
“어쨌든 부모님은 그렇게 만나서 결혼했어. 그리고 나랑 알리스가 태어났고.”
가족이 생긴 아우스트 공작 영식은 곧 저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어.”
아우스트 공작 영식은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
“목숨은 부지하셨지만, 다리 한쪽을 절게 되어서 걸을 때마다 지팡이가 필요해.”
살루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
“…….”
그 뒤엔 누구랄 것 없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이야기를 마친 살루스는 한결 개운한 표정이었다. 마치 레오니에한테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던 듯했다.
반면 레오니에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해졌다.
“……황비가.”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황비는, 남부에 있었을 때부터 황제의 정부였다던데. 거의 7년 정도.”
“맞아. 당시 황태자였던 황제는 엄마를 항상 찾았지.”
“그럼 공작 영식을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린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레무스와 수비테오 황제. 우시스를 손에 넣기 위해, 그녀와 함께 살던 남자를 죽이기 위한 두 남자의 계획.
“후우…….”
레오니에가 하염없이 제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소름 끼치는 과거에 답답해져 한숨만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아, 그런데.”
그런 와중에 살루스가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줬다.
“우리 엄마는 황제와 단 한 번도 잔 적이 없어.”
“뭐?”
“정말이야. 단 한 번도 그와 몸을 부딪힌 적이 없어.”
“그럼 그 소문은 뭔데?”
“그건 우리 가문의 비밀이야.”
곧바로 선을 긋는 살루스의 태도에, 레오니에는 기가 막혔다.
‘……뭐, 됐어.’
하지만 딱히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 이상 캐기엔 레오니에는 너무 피곤했다. 어서 집에 돌아가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어리광부리며 칭얼대고 싶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우시스 황비가 이제 누구의 편인지 확실해졌단 거다.
‘우리 편은 아니야.’
하지만 공공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적의 적은 동지라니까.”
“바로 그거야.”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어.”
“너 그렇게 짜증만 내면 나중에 머리 다 빠진다?”
“우리 아빠도 안 빠졌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레오니에의 손은 어느새 슬그머니 정수리 쪽을 더듬고 있었다.
“그럼, 뭘 도와줄까?”
살루스가 물었다.
“황후의 계획을 도와.”
레오니에가 말했다.
“황비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레오니에는 그제야 우시스 황비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에겐 이토록 짜증 나고 믿음직한 딸과 아들이 있었다.
“알리한테 만나서 말해 보지.”
“네가 전해.”
“우리 동생 별로야?”
“어.”
레오니에가 즉답했다. 그리곤 저 혼자 인생의 고난은 다 겪은 것 같다는 표정이 아주 볼썽사나웠다고 투덜거렸다.
살루스는 그게 동족 혐오가 아닐지, 라는 생각을 잠깐 해 봤다.
“그리고 로타 올로르도 도와줘.”
“너희 엄마 여동생?”
의외의 부탁에 살루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알기로는 너희 엄마가 그 동생한테 많이 당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엄마가 앞으로 행복하려면 그 여자도 나름 평온해야 해.”
“너희 엄마 착하시네…….”
“엄마는 나한테 부탁하지 않았어.”
조금 전 부탁은 오로지 레오니에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중에 그 여자가 끔찍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엄마는 또 죄책감에 빠져들 거야. 난 그런 거 이제 싫거든.”
그래서 레오니에는 로타를 치울 예정이었다. 엄마의 행복을 위해, 로타는 이제 바리아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했다.
“만약 본인이 싫다면 배 태워서 타국에 보내.”
레오니에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자리를 떠났다.
* * *
“아빠! 엄마!”
보레오티 저택으로 돌아온 레오니에는 곧장 펠리오와 바리아를 찾았다. 그리곤 냉큼 살루스에게 들었던 우시스 황비의 숨겨진 비밀을 들려줬다.
만약 살루스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새의 날갯짓보다 빠른 입이라고 놀렸을 정도로 재빠른 일러바침이었다.
그러나 남부 아우스트에게 단단히 화가 난 아기 맹수는 그딴 건 신경 쓰지 않고,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전부 말했다.
당연하게도, 펠리오와 바리아는 무척이나 놀랐다.
“황실도 치면서 남부도 치자!”
레오니에가 보레오티 전국 제패를 노렸다.
“일 많아져서 싫어.”
그러나 펠리오에 의해 기각되었다. 아기 맹수는 풀이 죽었다.
“그런데, 아우스트 공작께선 왜 이 일을 잠자코 지켜보시는 걸까요?”
바리아는 그 점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려 공작의 후계자가 죽을 뻔한 위험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이를 드러내지 않고 쉬쉬하는 아우스트의 태도는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나도 그 점이 이상해.”
레오니에도 동의했다.
“그리고 황비는 황제와 단 한 번도 몸을 부딪친 적이 없다는 것도.”
아이의 궁금증에 펠리오와 바리아가 헛기침을 토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며 이어 말했다.
“뭔 약을 썼나?”
“약이라면…….”
그 말에 펠리오가 무언가를 한 가지 떠올렸다.
“‘알루키나’란 약초를 썼나 보군.”
“알루키나?”
“아우스트 영지 내 바다에서 자라는 해초 중 하나다.”
그 말린 해초를 불에 태우면 아주 강력한 최면제가 된다고 한다.
어지간한 인간은 알루키나에 의해 걸린 최면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고, 오랫동안 복용할 경우엔 정신을 잃을 만큼 부작용도 컸다.
펠리오는 우시스 황비가 그 약초로 무슨 수를 쓴 건 아닐지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약초는 아우스트 가문에서 전했겠네요.”
바리아가 말했다.
“은둔자처럼 굴더니.”
뒤에선 더 약은 수를 쓰는군,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그 역시 남부의 의도대로 보레오티가 움직이는 것 같아 아주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는 레오니에처럼 짜증을 내거나 대놓고 투덜거리진 않았다.
잠시 생각에 빠진 펠리오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들과는 나중에 따로 인사하기로 하고.”
같은 공작끼리 친목을 돈독히 할 겸, 우위를 확실히 알려 줄 필요는 있을 거 같다며 펠리오가 다음을 기약했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오랫동안 계획한 이 지겨운 사냥의 마무리였다.
“황녀가 서부로 이동하기 전.”
보레오티는 본격적으로 황실을 압박할 예정이었다.
“아르데아 보스그루니가 곧 도착할 거다.”
펠리오가 찾아올 손님을 알렸다.
“스승님!”
바리아가 반색했다. 무려 7년이 넘어서야 만나는 그리운 스승의 얼굴이었다.
반면 레오니에는 달랐다.
“……또 보스그루니 백작에게 찻잔으로 무릎 얻어맞게 생겼네.”
아이는 선생님의 불길한 미래를 점지했다.
아르데아 보스그루니가 보레오티 저택에 도착한 건 바로 다음 날 오후였다.
“스승님! 잘 지내셨어요?”
“세상에나, 바리아!”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그간 나누지 못했던 안부를 물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지가 벌써 7년이 다 되어 갔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일찌감치 죽었을 거다.”
아르데아는 자신이 북부로 도망치는 데 도움을 준 바리아에게 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건강하셔서 다행이에요.”
바리아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씨 착한 제자는 못 본 사이에 많이 늙은 스승의 얼굴을 보자니 애잔하고 가슴이 미어졌다.
“대신 보스그루니 백작한테 죽을 뻔했잖아요.”
옆에서 멀뚱히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콧구멍 입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본 것만 해도 정말 저러다 죽겠구나, 싶었던 적이 네 번 정도 있었다.
그때 찻잔을 쥐고 날아다니던 보스그루니 백작은 참으로 우아했었다.
“그런데 그간 어디에 계셨어요?”
하지만 레오니에도 그간 아르데아를 조금 걱정했다. 그래서 그동안 어디서 무얼 했는지 물어봤다.
“공작님이 주신 돈으로 유적 탐구 여행을 떠났지요.”
“역시 보스그루니 백작한테 연락을…….”
“그럼 전 공작님이 찾으셔서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아르데아가 잽싸게 집무실로 올라갔다. 무릎도 성치 않다는 인간이 폴폴 뛰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레오, 우리는 유리 화원에 갈까?”
“응! 차랑 케이크도 먹을래!”
“곧 있으면 저녁 먹어야 하니까 차만 마시자.”
“케이크 먹을 배는 따로 있는데…….”
두 모녀는 단둘이 유리 화원으로 갔다. 가족들이 북부에서 지내는 동안에 지어진 커다란 유리 건물은 보레오티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처음 수도 저택에 왔을 때.”
레오니에가 고집부려 얻어낸 케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수도 저택이 너무 화사해서 놀랐거든?”
“엄마도 그런 생각 했는데.”
바리아 역시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자신이 생각한 것과 많이 달라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특히 정원에 설치된 레몬색 기둥 조각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조상들이 제 가족들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던 거 같아.”
이 유리 화원만 해도, 보레오티와 썩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건물은 펠리오가 아내와 아이가 언제든 쉬고 놀 수 있도록 마련해 준 선물이었다.
심지어 본관과 회랑으로 이어져 있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곧장 달려갈 수 있었다.
“우리 집 정말 평화롭네.”
레오니에가 포크를 문 채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이야말로 최고의 콩가루 족보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아이의 노골적인 표현에 바리아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레오니에의 입에서 포크를 뽑아 접시 위에 올려 줬다.
“그런데, 나도 이젠 우리 집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엔 레무스 올로르 때문에 족보가 엉망이 되었다고 안타깝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시스 황비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지금, 레오니에는 제 출생의 비밀이 어느 때보다 화목하고 단란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 정도 비밀은 있어야 나중에 후손들에게 들려줄 만했다.
“나도 깜짝 놀랐어.”
바리아가 놀란 속을 진정시키듯 차를 홀짝였다. 레오니에한테서 충격적인 비밀을 들은 날 밤, 침대에서 펠리오와 잠들기 전까지 그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정말 대단한 집안이야.”
레오니에가 비아냥거렸다.
“자식놈이 셋이나 있는데, 그중에 진짜 자기 핏줄은 2황자뿐이잖아.”
“다 자업자득이지.”
만약 사정을 몰랐다면 수비테오 황제를 불쌍히 여길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바리아는 황제도 레무스 못지않게 재기 불가능한 인간 말종이란 걸 알아 버렸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바리아는 이해가 안 갔다. 멀쩡히 잘 사는 사람을 낭떠러지로 밀어 버리고, 그 사람의 아내를 정부로 삼은 황제의 정신머리는 결코 정상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함께 도왔다는 레무스도.
그래도 레무스에 비하면 황제는 좀 덜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이 젊은 시절부터 함께 어울렸던 걸 떠올리면 이 상황이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껏 커다란 추문이 없었던 게 신기했다.
“선황은 어떻게 저런 똥을 두고 갔냐.”
의자 등받이에 불량스럽게 기댄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하긴, 그놈도 쓰레기지만.”
“그래도 선황은 국정은 잘 돌봤잖니.”
“그거야 그렇지.”
그 점에서만큼은 선황이 훨씬 나았다.
레오니에도 누군가를 상대한다면 차라리 선황 같은 사람을 상대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는 제 욕심과 나랏일을 구분할 정도로 멀쩡했으니까.
하지만 자식 농사를 망친 걸 보면 저쪽도 문제는 많았다.
‘내가 원작을 잘못 알고 있나?’
레오니에는 이쯤 되자 자신이 기억하는 원작 장르가 의심되었다.
분명 펠리오와 바리아의 달콤한 로맨스가 주였는데, 막상 레오니에가 실제로 겪고 있는 원작의 흐름은 밑도 끝도 없는 대반전의 향연이었다.
어지간한 서스펜스 못지않았다.
‘여기저기 내 가족이네.’
나중엔 서로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부를 판이었다.
아기 맹수는 저도 모르게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하도 얻어맞아서 얼얼했다.
“남부를 우습게 봤어.”
레오니에는 그게 가장 큰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이 모든 게 아우스트의 계략이었어.”
저런 엄청난 짓을 저질러놓고, 막상 만났을 땐 아무것도 모른다는 선한 표정을 짓던 아우스트 공작이 섬뜩했다.
거기다 이 모든 걸 적진에 들어가 실행한 우시스 황비는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다.
“어렸을 때가 속 편하고 좋았어.”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이는 순수하게 근육만 탐하며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아우스트는.”
바리아는 그런 딸의 머리를 도닥이며 본질을 물었다.
“뭘 원하는 걸까?”
“아들의 복수지, 뭐.”
나 같아도 그럴 거라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하지만 바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확실히 시작은 그랬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만약 공작 영식의 복수를 위한 거라면, 올로르 가문을 직접 노렸을 텐데.”
“황실이 걸려 있어서 이런 질긴 짓을 꾸몄나. 저 정도면 우리 보레오티보다 더한 놈들이야.”
“아니야, 뭐가 더…….”
바리아는 분명 뭐가 더 있을 것 같았다. 레오니에는 그저 여기서 또 뭐가 더 나오면 그냥 다 맹수의 송곳니로 쓸어 버릴 거라며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다 아기 맹수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보통은 메리디오 후작 가문이 남부의 주인인 걸로 알지?”
레오니에의 물음에 바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스트 가문은 남부에 영향력을 드러내진 않아. 전부 메리디오가 대신해 왔어.”
“하지만 실제로는 아우스트가 진짜 주인이고. 메리디오는 그들의 가신이고 기사…….”
순간, 레오니에의 머릿속에 주황색 머리를 지닌 기사가 떠올랐다. 그 사람은 살루스의 호위 기사로, 본래는 메리디오 후작 가문 출신이라고 한다.
“……반란?”
* * *
수비테오 황제는 숨이 막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잊어버리고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을 그대로 입에 부었다. 그마저도 살짝 취기가 도는 탓에 반이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만큼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싶어도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자신을 압박하며 달려들었다.
스칸디아 황녀의 혼인 예정은 레무스 올로르 때문에 다시 고려해야 할 판이었다.
타국에 딸을 시집보내 제국의 영향력을 퍼트리려 했던 그의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기 직전이었다.
명예의 의식에서 레무스 올로르가 떠벌린 폭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딴 식으로 날 배신해?’
지금껏 주제도 모르고 설치고 다니는 걸 봐주었더니, 이딴 식으로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황제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올로르의 작위를 빼앗고 그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니, 자신이 직접 그들의 목을 쳐서 들판에 버려 야생동물들의 먹이로 주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는 할 수 없었다. 올로르는 제 황권과 함께 성장한 신흥 세력이다. 즉, 올로르 가문은 황제의 권위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들의 몰락은 제 지지 기반의 몰락이었다.
황제는 저들 가문을 포기하기엔 너무 늦었음을 그렇게 깨달았다.
그 탓에 레무스는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보레오티와 우르마리티가 레무스에게 법적 소송을 걸고 있음에도 아직 무탈한 것은 황제의 은밀한 입김 때문이었다.
여기에 보레오티는 레무스의 북부 잠입 건에 대해 진상 조사를 요청했다. 매일 이에 대한 요청서를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자체적으로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교수의 연구실이 습격당한 사건까지 재조사에 들어갔다.
모든 상황이 황제의 목을 졸랐다. 이쯤 되니 원래부터 저를 귀찮게 굴던 정무는 이제 아기의 재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이건 황후와 2황자에게 넘기면 되는 일이니. 근래 들어선 항상 그래 왔다.
“폐하.”
그때, 시종 한 명이 발소리를 죽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눈이 시뻘게진 채 술병을 쥐고 있는 황제를 보며 겁에 질렸다.
며칠 전에 저 손에 들렸던 다른 술병으로 어느 시종 한 명이 억울하게 맞아 쓰러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전달이 끝나기 무섭게, 우시스 황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
순진무구한 목소리가 황제를 애달프게 불렀다.
“그대가 왜 여길…….”
올로르와 관련된 건 꼴도 보기 싫었던 황제가 물러나라고 소리치려던 찰나.
“정말 송구합니다, 폐하.”
우시스 황비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종은 황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황비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부디 저의 오라버니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 말에 황제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알딸딸하게 오른 취기가 아니더라도, 황비의 간청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레무스는 그대의 오라비가 아니던가.”
“그러나 폐하께 큰 죄를 지은 죄인이기도 합니다.”
우시스 황비가 소매로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물기를 훔쳤다. 얼굴에서 떨어진 소매에는 물기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더듬거리며 훌쩍이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마저 슬프게 했다.
“제가 배운 것이 많이 없어서, 도대체 오라버니가 왜 그런 짓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
“하나 확실한 건, 오라버니는 황제 폐하를 속이고 기만했단 겁니다.”
“그만 일어나.”
간청하는 황비를, 황제가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폐하.”
그때, 우시스 황비가 황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우리 침대로 가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의 금빛 눈동자가 스르르 풀렸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는 마치 녹아내린 사탕처럼 불편하고 흐릿했다.
“침대에 가서, 우리 함께 쉬어요.”
황비의 조곤조곤한 제안에 황제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황비는 싱긋 웃으며 그와 함께 집무실 뒤에 있는 조그마한 침실로 들어갔다.
곧 황제가 침대에 눕혀졌다.
“이제 저를 안아 주세요.”
황제의 품에는 사람 크기만 한 베개가 쥐어졌다.
“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 뒤에 잠깐 눈을 붙여요. 그러면 머리가 개운해지고, 피곤도 사라질 것이어요.”
속삭이는 말을 끝으로, 우시스 황비가 점점 뒤로 물러나더니 문을 닫고 집무실로 나왔다.
잠시 후, 침실 문 너머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숨을 헐떡이는 미친 짐승의 울음 같았지만, 황비는 신경 쓰지 않고 황제의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어디 보자…….”
쌓여 있는 서류를 뒤적이던 황비가 곧 활짝 웃었다.
“여기 있었네!”
황비가 찾은 건 바로 스칸디아 황녀의 국외 외출과 관련된 안건이었다. 내용은 결혼 전 타국의 왕을 만나러 가는 일정을 뒤로 미루자는 어느 충신의 대담한 충언이었다.
“이 사람 이름은 기억해 둘까?”
기분이 한결 좋아진 황비가 콧노래를 불렀다. 흥얼거리는 노래 사이로 들리는 황제의 거친 숨소리가 간간이 귀를 찔렀다.
그래도 나름 저것에 익숙해진 황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반응이 느렸지?”
조금 전 황제의 반응을 떠올리던 우시스 황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루키나에 내성이 생겼나…….”
앞으로 조금 더 양을 늘려서 최면을 걸어야겠다고 중얼거리는 우시스 황비의 얼굴엔 걱정이라곤 손톱의 때만큼도 없었다.
그녀에게 상대의 내성이나 부작용 따윈,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럼 황녀 전하.”
서류는 길게 찢겼다.
“안녕히 가세요.”
기어코 스칸디아 황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상대는 벨리우스 제국과 오랫동안 우호적으로 지낸 어느 왕국의 왕이었다. 그의 나이가 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왕에게 황녀보다 연상인 왕태자가 있단 사실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줬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우리 제국이 뭐가 모자라서 그런 늙은 놈한테 황녀 전하를 보내?”
“올로르 영식을 보고 생각나는 것도 없나.”
“황녀 전하 불쌍해서 어떡해…….”
“몸도 성치 않다고 들었는데.”
“황제가 딸을 팔아 정치하는구만.”
“올로르랑 똑같아, 똑같아.”
“하나는 소아 성애자, 하나는 딸 파는 장사꾼…….”
비난과 경멸이 가득한 광장으로, 곧 황궁에서부터 출발한 마차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번 황녀의 외출은 결혼 전 상대와 먼저 만나 친분을 쌓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어우, 세상에나……!”
“저렇게 아름답고 여린 분이…….”
“불쌍해서 어떡하누.”
느리게 달리는 마차 창문으로 보이는 스칸디아 황녀는 어딘가 처연해 보이면서도 청초한 미인이었다.
사람들은 떠나는 황녀가 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같다고 생각했다.
동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한 배웅을 뒤로하며, 마차는 게이트를 통과해 남부로 향했다. 황녀는 남부 항구에서 배로 갈아탈 예정이었다.
간소한 마차 행렬은 곧 숲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면 항구까지 빙 둘러 가는 먼 길이 되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덥네…….”
선두로 가던 기사 중 한 명이 옷깃을 펄럭이며 중얼거렸다.
“이 더운 날 뭔 고생이냐.”
또 다른 기사가 중얼거렸다.
“황녀도 불쌍하군. 나이도 어린데 벌써 시집이라니.”
“그것도 영감한테 말이야.”
“그래도 왕이 죽으면 재산은 다 가져가나?”
기사들의 속닥거림에는 동정보단 우스갯소리가 더 많았다. 그들은 황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지만 딱히 안쓰러워하진 않았다.
오히려 가는 내내 심심할 틈 없이 떠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만 여겼다.
“말조심해라.”
가장 앞에 있던 기사가 가볍게 경고했다. 호위 대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크게 먹히지 않았다.
대장 기사도 딱히 그 이상 제지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실 기사단의 기강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젊은 기사 한 명이 대장 기사에게 다가갔다.
“황녀 전하께서 조금 쉬고 싶으시답니다.”
“쯧, 갈 길이 먼데…….”
대놓고 투덜거리던 기사가 말을 돌려 마차로 갔다.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황녀의 어렴풋한 그림자가 비치었다.
“황녀 전하, 마차를 멈출까요?”
기사의 물음에 황녀의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들 멈춰라!”
마차는 숲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목을 축였다.
근처에 있던 나무에 묶인 말들은 잡초를 뜯어 먹거나 기사가 먹여 주는 물을 마셨다. 마부들은 그 틈에 마차를 점검했다.
원래 게이트를 통과하면 바로 해야 하는 일이었으나, 기사들이 갈 길이 멀다고 무작정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지금에서야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황녀는 시녀가 마차 주위에 친 가림막 안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있잖아.”
가림막을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 한 명이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녀가 그렇게 예쁘다며.”
“황후를 빼닮았으니까.”
누군가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입에 든 육포를 우물거리느라 제대로 된 목소리는 아니었다.
“늙은 왕이 죽기 전에 복이 있네.”
“그런가?”
“그럼 아니냐? 내가 전에 멀리서 황후를 본 적 있거든?”
그 순간을 떠올리는 기사의 묘사는 무척 상세했다.
“그렇게 반짝이는 은발은 처음 봤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었다니까? 진짜 내가 황제였으면 황후 한 명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포부도 없는 새끼.”
동료 기사가 한껏 비웃었다.
“황제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두고도 여럿을 거느릴 수 있는 거라고.”
“그럼 저 마차에 탄 아가씨도 아주 아름다운가 봐?”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걸?
아주 잘 되었다며 히죽히죽 웃는 목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끼어들었다.
“…….”
“…….”
기사들의 목덜미가 차갑게 식었다.
“꺄악!”
동시에, 가림막 안에서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기사들이 검을 찾았으나, 이미 그들은 뒤에서 내리치는 가격에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누, 누구냐……!”
“으윽!”
“도적이 누구냐고 밝히는 거 봤냐.”
제압당한 기사들은 곧장 포박당했다. 그들을 감시할 몇몇을 뺀 나머지 도적들은 마차를 습격했다.
도적들은 하나 같이 얼굴을 감춘 채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행동엔 빈틈이라곤 없었다.
도적들은 기사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먼저 제압하고, 말들의 눈을 가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포박된 기사들은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이 모든 상황에 얼이 나갔다. 그나마 뒤늦게 정신 차린 몇몇이 도적들을 노려봤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자가 여기 있다!”
그때, 가림막 너머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윽고 여자의 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에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감시하던 도적들에게 어깨를 밟힌 채 도로 주저앉았다.
“네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저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러는 거냐!”
“알다마다.”
눈을 제외한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도적이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들이 황녀라며.”
“그런데 감히……!”
“감히 뭐 어쩌라고.”
그러게 황녀가 있다고 떠들지 말았어야 했다며, 도적이 침묵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기사는 절대 임무 중에 함부로 떠들어선 안 돼.”
그 정도는 기본이라고 오지랖을 부리던 도적이 곧 그들의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가렸다. 약물을 묻힌 손수건이 닿기 무섭게 기사들이 의식을 잃었다.
“철수한다!”
“짐과 황녀를 챙겨라!”
“이야호! 오늘은 우리의 승리다!”
“무슨 도적이 그렇게 가벼워.”
“이 아빠가 왜 또 시비야!”
웬 부녀의 생뚱맞은 티격태격을 끝으로, 도적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소란스러웠던 자리에 남은 건 짐이 다 쏟아진 마차와 찢어진 가림막, 나무에 묶여 기절한 기사들과 시녀, 마부들.
그리고 황녀가 입었던 드레스뿐이었다.
도적들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숲을 벗어났다. 이윽고 해안가 도로에 들어선 그들은 준비된 말과 마차에 올랐다. 얼굴을 가리던 복면이나 붕대는 전부 옷 속에 숨겨 뒀다.
곧 해안가 도로 위로 어느 부유한 상인 가문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대로 리네 영지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마차 창문 너머로 밖을 살피던 헤스페리 후작이 말했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 하늘이 화창하고, 그보다 짙은 바다는 파도가 부서지면서 반짝거렸다.
“거기서 마차를 한 번 더 바꿔 탈 겁니다.”
“바로 우르베스페 상단의 마차지요.”
“레오 넌 좀 빠져라.”
펠리오가 기어코 방정맞은 딸의 이마를 꾸욱 눌렀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지지 않겠단 듯이 목에 힘을 바짝 주고 버티었다.
“내가 납치했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져야지.”
“네가 왜 책임져?”
펠리오가 정색했다.
“넌 그냥 우연히 여장 남자를 도와준 것뿐이다. 애먼 변태랑 엮일 생각 추호도 마라.”
“공작, 그 애먼 여장 남자 변태가 내 손주를 말하는 건가……?”
헤스페리 후작이 어이없단 목소리로 물어봤다.
“저는 괜찮습니다.”
여장 남자 변태로 몰린 스칸디아 황녀가 입가를 조용히 올렸다.
“공작 영애.”
드레스를 벗은 황녀는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이, 뭘요.”
레오니에가 손사래를 쳤다.
“부작용 해독제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법이 풀렸는데도 열이 나거나 아프지 않다며, 스칸디아 황녀가 말했다.
“……부작용 해독제라니?”
펠리오가 의아한 눈을 했다.
“내가 잠깐 빌렸어.”
“어디서? 누구한테?”
“……아빠한테서.”
레오니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내가 도둑을 키웠구나.”
“빌린 거라고! 뭔 도둑이야!”
“말도 안 하고 가져갔으니 훔친 거지.”
“말만 안 하고 빌렸으니 빌린 거야!”
레오니에는 나중에 오르티오 후작한테 부작용 해독제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겠노라 말했다.
“그나저나 좀 아쉽네요.”
제 관자놀이를 째려보는 아빠의 날카로운 시선을 무시한 채, 레오니에가 황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맹수 부녀의 살벌한 말다툼을 목격한 황녀와 헤스페리 후작은 살짝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태연한 건 레오니에 혼자였다.
“솔직히 보고 싶었거든요.”
마차 문을 벌컥 열었을 때, 솔직히 드레스를 입은 황녀를 내심 기대했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아기 맹수는 괜히 입술만 쭉 내밀며 삐죽였다.
“그래서 일부러 바쁜 와중에 여기 온 건데 말이죠.”
“딱히 좋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스칸디아 황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진정 아쉬웠는지 황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마법 약을 먹고 여자로 변했을 때 받은 화장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황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여장 남자가 취향일지도.”
레오니에의 썩은 동심 속에서 철컥, 하고 잠금장치 열리는 소리가 났다. 새로운 세상이 기어코 열리고 말았다.
“변태 새끼…….”
질린 듯한 펠리오의 한마디에, 레오니에가 울컥했다.
“아빠, 말이 왜 그래?”
“그럼 아니냐?”
“‘새끼’ 앞에 ‘우리’ 또는 ‘내’를 붙여야지! 소유격 어디 갔어!”
“넌 그게 마음에 걸리든?”
다른 건 안 걸리고?
뻔뻔한 딸아이의 작태에 말을 잃은 펠리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레오니에가 변태인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어지간한 건 넘치는 부성애와 저것을 데려온 저의 업보랍시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그게 힘들었다.
“빨리 내 새끼나 우리 새끼라고 불러!”
레오니에가 팔뚝을 톡톡 때리며 빽빽 반항했지만, 펠리오는 기어코 못 들은 척했다.
“아니면 엄마한테 다른 남자 근육 소개할 거야!”
“어느 누가 나보다 대단하다고.”
펠리오가 콧방귀를 뀌었다.
“마누스 오빠는 아빠보다 근육 뿜뿜이거든?”
“대신 얼굴이 안 되잖아.”
“……그 오빠는 왜 울 아빠보다 덜 잘생긴 거야!”
레오니에가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내려치며 애먼 짜증을 냈다. 물론 그 주먹은 펠리오가 미리 손을 뻗어 허벅지 대신 맞아 줬다.
스칸디아 황녀는 그런 맹수 부녀를 말없이 지켜봤다.
“부작용 해독제는.”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그러니 싸우지 말라며, 황녀가 조금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투닥거리던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살짝 어이가 없단 눈으로 황녀를 바라봤다. 옆에 있던 헤스페리 후작도 그와 엇비슷한 시선으로 손주를 보았다.
“……황녀 전하는.”
레오니에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의외로 맹하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황녀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꽤 조심스럽고 눈치가 빠릅니다. 맹했다면 일찌감치 여장을 들켰을 테죠.”
“그러게요.”
안 들킨 게 기적이네요.
레오니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탈탈 털렸다. 생각해 보니 황녀의 정체가 들키지 않은 건 정말 천운이었다.
‘황비는 알고 있었잖아.’
레오니에가 살루스와 나눈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우시스 황비는 이미 스칸디아 황녀의 정체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그녀가 침묵하지 않았다면 벌써 들키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황후는 물론이고 서부 역시 큰 치명타를 입었을 게 뻔했다.
이 모든 계획도 수포가 되었을 테고.
‘짜증 난단 말이야…….’
어느새 생각의 흐름은 우시스 황비를 비롯한 남부로 향했다.
레오니에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삐뚜름해진 입술은 살짝 튀어나왔다. 불만이 가득하단 뜻이었다.
‘남부를 한 번 족쳐야 속이 시원할 거 같단 말이지.’
감히 북부를 이용하다니.
그러면서 모르는 척 굴다니.
북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차기 공작의 자존심은 건방진 남부를 용서할 수 없었다.
“…….”
펠리오는 그런 딸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러나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그의 입꼬리는 은근히 올라가 있었다. 대견하단 눈빛은 두말할 것 없었다.
‘참 귀한 구경하는군.’
헤스페리 후작은 그런 펠리오가 참으로 신기했다. 남을 잘 믿지 않는 펠리오에게서 제 딸의 모든 걸 신뢰하고 아낀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동시에 후작은 제 딸에게 그러지 못했던 과거가 후회로 다가왔다.
“일단.”
생각을 마친 레오니에가 스칸디아 황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죽고 싶어요?”
아기 맹수는 당장 중요한 것부터 해 내기로 했다.
* * *
[이대로 괜찮은가]
신문 일 면에 떡하니 실린 기사 제목엔 주어가 빠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숨겨진 주어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다.
바로 최근 연달아 악재가 터지고 있는 벨리우스 황실이었다.
“어찌 이리 운도 없는지…….”
신문을 넘기던 누군가가 혀를 끌끌 찼다. 마치 모든 악운을 다 모은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동의했다.
“이 정도면 저주를 받은 거야.”
“저주?”
“그거야 당연히 북부지!”
누군가가 주변을 살피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실이 북부를 손에 넣으려고 수작질을 부렸단 사실이 파다하게 퍼졌잖아.”
“하긴…….”
“북부가 작심을 했더라.”
“나라도 작심하겠다.”
명예의 의식이 끝나고, 북부는 황실에 레무스 올로르의 북부 잠입을 비롯한 여러 수상한 점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황실은 이에 침묵하며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북부는 요청을 포기하고 자체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이 없었으며, 조사를 통해 알아낸 사실을 세상에 전부 공개했다.
레무스는 황실 기사단 소속이었을 때 북부에 잠입했으며, 그 이유는 북부에서 전해지는 미신 때문이란 사실.
북부에서조차 구전 취급하는 미신 때문에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교수의 연구실을 습격했고, 그의 연구 자료를 훔치려 했단 사실.
이 때문에 당시 사건 조사가 미흡했고, 끝끝내 그를 죽이려 했단 사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을지 모른단 추측까지.
“……도대체 그 미신이 뭔데?”
아직 신문을 제대로 읽지 못한 누군가가 물었다.
“그거, 검은 맹수.”
“검은 맹수?”
“맹수의 송곳니 말이야.”
황실이 집착한 북부의 미신은 그 지역에서만 전해지는 ‘창조 신화’였다.
보레오티 영지에 맞닿아 있는 북부 산맥은 아주 험하고 위험한데, 그 이유가 산맥 뒤에 사는 ‘신’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마물이 북부 산맥에만 살잖아? 그게 산맥 뒤에 있는 신이 보낸 시험자라더군.”
“시험? 무슨 시험?”
“그 뭐더라, 무슨 자격을 시험한다던데…….”
북부에서 전해지는 신화에서, 신은 자신들의 형체를 본뜬 인간들을 빚었다고 한다.
순록과 늑대, 하얀 곰, 야크.
그리고 맹수.
그중 맹수는 신이 가장 아낀 피조물이었고, 이들에게 자신의 색인 검정을 물들이며 특별한 힘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맹수의 송곳니라 불리는 이능이었다.
검게 물든 맹수들은 신의 영역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지니었다. 그들은 그 의무를 지키고자 가장 혹독한 눈보라가 끝나면 항상 북부 산맥을 올랐다.
신이 내려보낸 심판자는 끔찍한 마물의 형상으로 나타나 그들의 실력을 시험했고, 검은 맹수들은 그들을 물리침으로써 시험을 통과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정상까지 올라가 신을 마주하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평원.
그곳에서 살아가는 신들을.
짐승의 모습을 한 부모를.
“…….”
“…….”
북부에서 전해지는 창조 신화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황실은…….”
그들은 하나같이 어이가 없어 기가 막히고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신화에 목매달아 그딴 짓을 해 왔다고?”
허무맹랑한 미신 따위에 미쳐 나라고 뭐고 다 내팽개친 황실에 말을 잃었다. 후회를 넘어선 무기력이 사람들의 신뢰를 끊어 버렸다.
“이건 너무하잖아!”
그러다 누군가가 기어코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자기 딸은, 황녀 전하는 도적들에게 납치되어 생사조차 불분명하다고! 그런데 이딴 말도 안 되는 일에 세금을 낭비했다고?”
그 분노에 사람들이 동조했다.
결혼을 위해 남부로 향했던 스칸디아 황녀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했다. 도적에게 납치된 이후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남겨진 거라곤 황녀가 입었던 드레스 한 벌이 전부였다.
그 탓에 황녀의 행방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추측은 하나 같이 끔찍하고 자극적이었다.
“심지어 아직도 조사단을 보내지 않았다며?”
“미친 거 아냐? 아무리 정이 없대도 딸이잖아.”
“이것도 올로르가 막은 거 아냐?”
보레오티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내용 중엔 황실과 올로르의 협력 관계도 있었다.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재정부에서 근무한 시절에 모아 둔 비리 자료가 그 증거였다.
이미 도로 사업이 흐지부지될 적에 알려진 내용이었지만, 이번에 공개한 것은 황실과 올로르, 두 가문의 수상한 협력에 초점을 두었다.
현 황제는 국정 사업을 명목으로 올로르에 엄청난 금액을 지원했지만, 그 돈은 전부 북부를 염탐하고 정보를 빼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그 외에도 비자금 형성, 탈세, 횡령. 여기에 지금껏 감춰졌던 6년 전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까지 드러났다.
즉, 지금의 황제는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도로 사업 따위에 쓸 돈으로 도적 소탕이나 할 것이지!”
“서부 헤스페리 후작이 이를 귀족 회의에서 건의했다며?”
“그런데 황제파가 이를 막았다잖아.”
“어차피 도로는 각 지역에서 이미 다 정비하고 있었잖아!”
“저딴 게 황제라니!”
당장 내려와야 해!
사람들의 들끓는 분노는 당연히 황제를 향했다. 민심은 이제 황제의 폐위를 외쳤고, 그를 대신할 새 황제를 불렀다.
“당연히 황후 폐하의 소생이신 2황자가 황제가 되어야지!”
“올로르의 핏줄은 절대 안 돼!”
“천박한 것이 자기 딸을 팔아 작위를 얻은 거잖아.”
“황비와 1황자도 당장 폐위해야지!”
“2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해야 해.”
황태자 책봉을 원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럴수록 황제의 퇴위 요구 역시 함께 강해졌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올로르를 버리지 않았고, 황녀 수색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