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32. 끝이 보인다 (32/51)

#32. 끝이 보인다

끔찍한 출생의 비밀을 접했을 때, 레오니에는 아주 큰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힘겹게 받아들인 세상은 아주 소중한 보물이 되었고, 책 속 등장인물이었던 사람들은 둘도 없는 가족이 되어 줬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붉은 백조들이 아이의 행복을 망쳤다. 레오니에는 저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역으로 써먹자.’

그래서 저의 비밀을 과감히 이용했다. 엄청난 제안이었고, 어른들은 하나 같이 반대했다.

특히 펠리오가 가장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나 가장 진지하게 그 이유를 묻고 들어줬다.

‘계속 품어 봤자 좋을 게 없는 비밀이야.’

고결한 보레오티에 난잡한 핏줄이 섞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레오니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떨쳐 낼 수만 있다면 당장 떨치고 싶었다.

그런 개인적인 사정과 별개로, 이 비밀은 계속 숨겨 봤자 좋을 게 없는 독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 비밀을 알아내 세상에 드러내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올로르에게 뜻밖의 횡재가 될 터였다. 보레오티 입장에선 단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떨쳐 내 버리자고.’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올로르를 매장하는 동시에 이 끔찍한 비밀을 거짓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펠리오는 가장 먼저 오르티오 후작에게 접근했다.

일부러 귀족 회의에서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대외적으로 평탄치 못한 관계가 되었음을 보였다. 그 눈속임을 가림막 삼아, 두 가문은 은밀하게 접촉했다.

보레오티는 황실이 동부로 파견한 행정관들의 정보를 오르티오에게 넘겼다. 덕분에 오르티오는 사고로 위장해 행정관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르티오는 답례로 마법 약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아주 조금 특별한 마법 약을.

“세상에나……!”

그 답례가 만들어 낸 결과를 지켜본 오르티오 후작이 탄식 어린 소리를 흘렸다.

“뻔뻔하기도 하지.”

오르티오 후작의 한마디가 시발점이 되었다.

“올로르가 부, 붉은색……?”

“붉은색을 띠는 쪽이 친자 관계가 아니라고 했죠?”

“아니, 그럼 올로르가 친부가 아니란 소리잖아!”

예상치 못한 결과에 굳어 있던 귀족들이 뒤늦게 당황했다.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못해 엉망진창이었다.

다들 이 믿기지 않는 결과에 어찌 된 일이냐고 떠들었다. 명예의 의식 당일인 오늘만 해도, 대다수가 올로르의 편을 들었다. 주장이 진실되지 않고서야 명예의 의식을 신청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

잔 속에 담긴 붉은 액체를 바라보는 레무스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레무스!”

단상 위,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던 올로르 자작이 소리쳤다. 당혹스러움과 노기가 뒤엉킨 자작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뭐, 뭔가 착오가…….”

레무스가 말을 더듬거렸다. 항상 모두의 호감을 사던 미소가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한참 잔을 내려다보다가 허공을 올려다보고, 그러다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귀족들을 보았다. 제 등 뒤에 꽂힌 귀족들의 시선을 그제야 눈치챈 레무스는 등골이 서늘했다.

자칫하면 끝이다.

낭떠러지가 코앞이었다.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까스로 레무스가 변명했더니, 펠리오가 콧방귀를 뀌며 반박했다.

“그 착오를 안 만들려고 오르티오 후작에게 부탁한 것 아닌가.”

네가 무슨 생각으로 오르티오 후작에게 마법 약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지 다 안다는 듯이, 펠리오가 비아냥거렸다. 그의 손가락 끝엔 가늘고 붉은 선이 있었다. 조금 전 친자 확인을 위해 만들었던 상처였다.

“보레오티와 관계가 서먹한 걸 알고 일부러 부탁했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레무스가 불쾌한 듯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런다고 없던 혈연이 생기기라도 하나?”

펠리오가 쯧쯧, 혀를 짧게 찼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너무 실망이라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레무스의 얼굴이 수치로 물들었다. 마치 머리카락이 녹아 그의 얼굴을 뒤덮은 것 같았다.

“야, 약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레무스가 급하게 반박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결과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흥미로운 결과를 지켜보던 크리세토스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폐하, 마침 마법 약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황자는 이걸로 마법 약의 효력을 입증해 보자고 제안했다.

“어떻게 말이냐?”

수비테오 황제가 물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했다. 예상치 못한 친자 확인 검사의 결과도 결과지만, 레무스가 친자가 아니란 사실에 묘한 쾌감도 느꼈다.

‘황실도 얻지 못하는 것을.’

그 오래된 약속 하나로 황실은 보레오티와 결코 혼인을 맺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걸 저딴 놈이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을 땐 진심으로 불쾌했고, 딸아이에게 잘해 주겠다던 레무스가 속물처럼 느껴져 아니꼽기까지 했다.

“이곳에서 무작위로 가족 두 사람을 뽑아, 그들의 피로 확인해 보는 겁니다.”

“남은 양으로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황제의 의문에 오르티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그 마법 약은 소신의 부군이 제조했습니다. 그이가 만든 마법 약은 다른 것과 달리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병에 남은 소량으로도 친자 검사가 가능하단 뜻이었다.

“하지만 올로르 자작 영식.”

오르티오 후작이 레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인이 하신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

“난 내 남편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오르티오 후작은 마법 약의 효력을 무시하는 레무스의 주장에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날 선 후작의 경고에 신전 내부에 찬 바람이 불었다.

“……황자의 제안에 동감한다. 이 마법 약의 효력을 당장 입증하도록.”

곧 수비테오 황제의 명으로 또 다른 친자 검사가 시작되었다. 효능을 확인하고자 앞으로 나온 가족은 파르두스 후작 영식과 그의 아들인 테르였다.

“부디 저희 부자가 폐하의 어지러운 심중에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충성스러운 파르두스 영식의 말에, 레오니에가 비웃음을 참았다.

‘퍽이나 위로가 되겠네.’

남들 눈엔 황실을 향한 파르두스 가문의 충성심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눈엔 일부러 황제의 속을 뒤집으려고 나온 게 뻔한 모습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파르두스 후작 영식과 그의 아들인 테르가 보레오티 측을 보더니 짧게 미소 지었다.

“들키려고 환장했나…….”

“펠리오.”

펠리오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리아가 당신 때문에 들키겠다며 펠리오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어쨌거나 계획에 없었던 파르두스 부자의 친자 검사가 모두의 앞에서 진행되었다. 두 사람의 피가 섞인 마법 약은 진실된 푸른색으로 변했다.

이를 지켜본 레무스의 표정이 더욱 파리해졌다.

“……어째서!”

그때, 우시스 황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인가요, 오라버니!”

우시스 황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괴롭게 외쳤다. 신전 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황비에게로 향했다.

황비는 절규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폐하의 걸음을 낭비한 건가요?”

“…….”

“황제 폐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황비, 진정하게.”

곁에 있던 티그리아 황후가 어깨를 감싸며 위로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지.”

“그렇지만, 황후 폐하! 저는 지금 너무 죄송스러워서……!”

그러나 황비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오열하기 시작한 우시스 황비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부디 제 가족을 용서치 말아 주세요!”

그러고선 도망치듯 신전을 빠져나갔다.

“송구합니다, 폐하.”

알리스 황자도 황비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귀족들은 두 모자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봤다. 정파 여부를 떠나, 지금 이 상황이 우시스 황비에게 엄청난 치명타가 되었음은 확실했다.

“아, 아니야…….”

레무스가 고개를 저었다. 마치 고장 난 시곗바늘이 버벅거리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그는 힘이 빠지려는 다리를 가까스로 세우며 소리쳤다.

“레오는 내 딸이야! 나와 레지나의 딸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외치고 떠들어도,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심지어 몇몇은 레무스를 가리켰던 손가락을 자신의 관자놀이 근처에서 빙글빙글 돌리기까지 했다.

저놈은 미쳤어.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로, 로타!”

저를 향한 싸늘한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낀 레무스가 로타를 불렀다. 한참 떨어진 뒤에서 멍하니 이를 지켜보던 로타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네가 그랬잖아! 보레오티 영애가 백조 장신구를 지녔다고!”

“그, 그건…….”

“다른 귀부인도 목격했다고 네가 그랬잖아!”

“정말 가관이군.”

펠리오가 한심하단 듯이 한숨을 푹 흘렸다.

“미친 짓은 본인이 저질러 놓곤, 왜 그 죄를 자기 아내한테 뒤집어씌우려 하나.”

“하지만 정말이라고! 나는 결백하다고!”

레무스가 제 가슴을 퍽퍽 쳤다.

“……결백?”

바리아가 목소리를 짓이겼다.

“네가 뭐가 결백한데?”

아무리 레무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네 말이 진짜라면, 넌 열여섯밖에 안 된 어린 소녀를 겁탈한 거나 다름없다고!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계속 떠들어!”

바리아의 말에 신전 내부가 한 번 더 소란스러워졌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잖아?”

“아니, 거짓말도 저런 거짓말을 해?”

“끔찍해라……!”

“미성년자 건드린 걸 자랑이랍시고 떠들었단 말이에요?”

“보레오티 영애가 상처받았을 거예요.”

“진짜 상처 입은 사람은 따로 있죠.”

사실, 여기서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정말 따로 있었다.

“…….”

바로 우르마리티 백작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연상되는 거구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몸을 내뺐다. 당장이라도 터질 활화산 옆에 있는 것처럼 오싹했다.

“레지나와 난 서로 사랑했어!”

레무스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위협했다. 그는 이제 더는 상냥하고 다정한 미남자의 가면을 쓸 수 없었다. 당장 낭떠러지로 추락하기 직전인데, 어떻게 여유 있을 수 있을까.

“우리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너 따위가 뭐라고 더럽…….”

“그만 닥쳐라!”

대포 터지는 굉음 같은 것이 우렁차게 터졌다. 예고 없이 터진, 그러나 예견된 거나 다름없는 고성이었다. 모두가 몸을 움츠리며 귀에 통증을 느꼈다.

“네 놈 새끼야말로!”

우르마리티 백작이 핏줄 선 눈으로 레무스를 노려봤다.

“닥치는 게 좋을 거다……!”

우르마리티 백작은 당장이라도 단상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저 새끼가! 저 죽일 놈이……!’

천진난만했던 어린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흉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조금만 앞으로 나가면 그 목을 손에 쥐고 으스러트릴 수 있을 거리에 그놈이 있었다.

그러나 백작은 피눈물을 삼키며 그 충동을 참아야 했다. 저 백조 새끼를 쉽게 죽여선 안 되었다. 저놈은 고통 속에서 버둥거려야 했다.

지옥조차 혀를 내두르고 돌아설 만큼 잔혹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부짖을 때까지 괴롭혀야 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죽은 딸이 남긴 손녀가 만들고 있었다.

“죽은 내 딸에게, 그딴 오명을 씌우다니!”

하나 레무스를 향한 분노는 전부 진심이었다.

“내 딸을 모욕하지 마라!”

서슬 퍼런 눈빛과 분이 담긴 목소리가 신전을 울렸다.

“빌어먹을 네 놈 새끼의 아가리를 찢어 뜯기 전에 닥치는 게 좋을 거다! 네까짓 놈의 입에서 내 죽은 딸의 이름을 꺼내지 말란 말이다!”

우르마리티 백작의 경고는 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남의 집 죽은 딸을, 그것도 보레오티의…….”

“백작님이 안 죽이는 것도 용했죠.”

“행간의 소문으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그런데 왜 반박을 하지 않은 거죠?”

누군가의 질문에, 묵묵히 지켜보던 헤스페리 후작이 피식, 비웃었다.

“조금 전까지 올로르 영식이 친부라 믿었던 사람들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조롱 섞인 그 말에 귀족들이 헛기침을 토하며 무안해했다.

“내 말을 너무 왜곡해서 듣지는 마시게. 그저 백작의 마음을 이해하란 뜻이야.”

어차피 그 상황에서, 보레오티나 우르마리티에서 레지나는 소문과 다르다고 말해 봐야, 그건 본인 입으로 소문만 부풀려 죽은 이의 명예를 더욱 더럽히는 꼴이었다.

자극적인 소문에 이끌렸던 사람들이 담백한 외침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헤스페리 후작의 따끔한 한마디에 모두 들썩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고,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자도 있었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대다수가 레지나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녀를 재미난 얘깃거리로 취급한 죄인들이었다. 여기서 자신 있게 우르마리티 백작을 위로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고맙습니다, 후작님.”

한결 진정한 우르마리티 백작이 감사를 표했다. 후작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는 저 또한 백작을 쉬이 위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완벽한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어쨌건, 상황의 주도권은 이제 완전히 보레오티 쪽으로 돌아섰다.

멸시와 경멸 어린 시선이 레무스를 향했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것에 레무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이 악몽처럼 느껴졌다.

‘혹시 꿈인가?’

하지만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우르마리티 백작의 위협이 너무도 생생했다.

“나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경고했다.

“죽은 내 딸을 모욕한 올로르에게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그건 보레오티 역시 마찬가지다.”

펠리오 또한 가세했다. 레지나는 우르마리티 백작의 딸이기 전에, 엄연히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 가문의 일원이었다. 펠리오에겐 그 죗값을 받아낼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보레오티란 이름을 건드린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내 친히 가르쳐 주지.”

북부의 맹수는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레무스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그는 단두대 위에 제 목을 얹은 꼴이었다. 사람들의 경멸 찬 시선이 목을 겨냥하는 칼날이었고, 펠리오는 그 칼날을 내려트리는 사형 집행자였다.

레무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와 비슷한 것을 경험했다.

“아, 아니야!”

그래서 더욱 몸서리를 쳤다.

“레지나는 정말 나와 몸을 섞었다고! 네가 고아원에서 입양한 저 계집애는 내 딸이란 말이다! 내 피가 흐르는 딸이란 말이다!”

하나 레무스가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 한 명 믿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레무스를 질린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역겨운 정신머리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남의 집 딸을 자기 딸이라고 억지 주장하는 기행만으로도 충분히 오만 정이 떨어질 작태였다.

그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로타는 도망치듯 단상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내려가도 갈 곳이 없었다.

친정아버지인 에르바누 백작에게로 달려가려다 멈칫한 발걸음은 불안한 강아지처럼 동동 굴렀다.

‘도와주지 않을 거야…….’

로타는 확신했다. 에르바누 백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또 한 번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예쁜 짓을 할 때만 아껴 주는 저 사람을, 로타는 신뢰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에르바누 백작은 로타에게 관심도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혹여 저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저 소아 성애자와 당시 미성년자였던 딸을 약혼시켰던 전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바리아에게……!’

오히려 어떻게든 바리아에게 잘 보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흐름에 별 감흥 없던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네가 레지나를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조그만 혼잣말에, 레무스가 냅다 달려들었다.

“내가 직접 레지나를 보았으니까!”

“어떻게?”

펠리오가 물었다.

“레지나는 한평생 북부에만 있었고, 넌 수도와 남부에서만 지냈을 텐데.”

“그거야 내가 북부에 있었으니까!”

뒤에서 남 일처럼 지켜보던 레오니에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물었다!’

레오니에가 조용히 승리의 주먹을 쥐었다.

“북부에?”

네가 왜?

펠리오가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단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모습에 레무스가 반색했다. 그는 이 순간이 자신의 진실을 증명할 유일한 기회임을 깨달았다.

레무스의 목에 핏줄이 바짝 섰다.

“레지나는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줬어! 사랑하는 나를 믿고 많은 걸 가르쳐 줬고, 난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할 수 있다!”

“올로르 자작 영식!”

그때, 수비테오 황제가 노기 서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호통치는 황제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선명했다.

“죽은 사람을 모욕하고, 아직도 반성을 하지 않는다니. 그대는 수치란 감정도 모르는가!”

오랜만에 수비테오 황제가 멀쩡한 소리를 떠들었다. 펠리오의 눈썹이 아주 살짝 꿈틀거렸다. 살다 살다 저런 바른 소리를 황제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펠리오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꾸욱 참았다. 순간의 실수로 이 즐거운 광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군.”

실망이 크다며 황제가 레무스를 탓했다.

“명예를 잃은 그대가 떠들 말은 없다.”

자신을 버리는 황제에게, 레무스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레무스의 다물어진 잇새 사이로 바드득,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황제의 권한으로, 명예의 의식이 끝났음을…….”

황제가 서둘러 명예의 의식을 파하려 했다. 하지만 레무스가 그 말을 빠르게 막아섰다.

“황실이 나를 북부로 보냈다!”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다.

“황실은 오랫동안 보레오티를 탐했어! 당시 황실 기사단에 있던 나는 선황의 명을 받고 북부에 잠입했고, 그래서 내가 레지나와 만났던 거야!”

신전 안이 또 한 번 술렁거렸다. 앞서 나온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더욱 충격적이고 소름 돋는 내용이었다.

“무, 무슨 망발을……!”

당황한 황제가 말을 더듬었다.

“그 말을 어떻게 증명하지?”

펠리오가 물었다.

레무스가 히죽 웃었다.

“날 북부로 보낸 기록이 기사단에 남아 있을 거야. 당시 난 황실 기사단 소속이었으니까.”

“너 이 새끼!”

황제의 분노에도 레무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보레오티의 약점을 찾으라고 했지.”

레무스는 곧장 자신이 아는 보레오티의 약점을 공개적으로 떠벌리기 시작했다.

목에 너무 힘을 준 탓에 말마디 끝에 쇳소리가 났고, 역정이나 다름없는 탓에 입가로 침이 뚝뚝 흘렀다.

“검은 다이아는 맹수의 송곳니를 억누르는 힘을 지니고 있다! 검은 다이아를 가루로 만들어 먹은 보레오티는 죽는단 말이다!”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진짜 미친놈이네.’

레오니에의 눈에 비친 레무스는 미쳐 날뛰는 괴물이었다. 이제야 그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용케도 저 괴기한 성격을 숨기고 살았다, 싶었다.

레무스는 모든 상황과 흐름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두고 주물러야 만족감을 느끼는 변태였다. 그 증거가 바로 저 모습이었다. 상황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으니 바로 돌변해 버렸다.

레오니에는 저놈이 이리도 쉽게 흔들려 무너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펠리오와 바리아는 어느 정도 예상한 것 같았다.

“레무스는 그만큼 나약한 인간이었던 거야.”

바리아가 곁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해 줬다. 실성한 것처럼 소리치는 레무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약한 인간일수록, 예상치 못한 상황에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는 법이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 안에 두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도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한심한 무능력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건 나약한 게 아니라 또라이인 거잖아.”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재미 하나도 없어.”

멋있는 건 다 아빠가 가져가 버려서, 아기 맹수는 불만이었다. 자신이 한 거라곤 손가락에서 피나 몇 방울 찔끔 흘린 게 전부였다.

심지어 바리아도 레무스에게 크게 한소리 했는데, 저만 못 했다.

‘확 울어?’

옛날처럼 울면서 맹수의 송곳니를 확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젠 송곳니도 잘 다루니 딱 레무스랑 황제만 골라 발동할 자신도 있었다.

“그럼 한마디 해 줘.”

바리아가 조금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에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헛소리하지 마!’라고 멋지게 외치면 되지?”

“그러면 지금 아빠가 멋있는 순간에 깽판 치는 건데?”

“이미 지금 분위기, 깽판이잖아.”

바리아의 말에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역시 엄마는 똑똑해.”

“그럼 엄마도 멋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멋졌어!”

“레오도 처음부터 멋졌어.”

두 모녀가 서로를 꼬옥 껴안았다.

레오니에는 냅다 펠리오의 곁으로 달려갔다. 펠리오는 느닷없이 나타나 제 옆에 늠름하게 선 딸아이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곧 뒤에 있던 바리아와 눈이 마주치곤 피식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거 완전 멍청한 새끼 아냐.”

레오니에가 레무스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검은 다이아를 먹으면 보레오티가 약해지고, 임신한 보레오티는 맹수의 송곳니가 약해진다고?”

레무스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한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 한심한 또라이.”

지금껏 펠리오와 바리아가 한 방씩 먹였으니.

“거기다 이런 또라이한테 동조되어 편을 들어준 것들도…….”

그 말에 여기저기서 무안한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레오니에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제 아기 맹수가 마지막을 장식할 차례였다.

“아무래도 모두 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소녀의 기운 넘치는 말은 신전 안에 있는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보레오티는 신이 아니야.”

레오니에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에서 보레오티는 ‘검은 맹수’라는 유치한 이명으로 불렸다. 존경과 경외, 두려움과 공포로 뒤엉킨 그 이름엔 많은 이들의 착각도 담겨 있었다.

“물론 우리가 워낙 외모가 출중하고, 능력 오지게 좋고, 닷새 동안 쉴 새 없이 침대에서 운동할 정도로 허릿심이 넘칠 정도로 완벽하니 질투하는 건 이해해.”

레오니에가 어쩔 수 없단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완벽한 자신을 어쩌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는 모습이 퍽 재수 없었다.

“저 웬수…….”

펠리오가 눈을 가늘게 흘겼다.

“진짜 누굴 닮아서…….”

“진심이에요?”

옆에 있던 바리아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펠리오는 답이 없었다. 어쨌건 저들의 딸은 당찬 모습으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하지만 보레오티는 사람이야.”

‘보레오티는 결국 사람이란다.’

레오니에는 보레오티 저택에 찾아왔던 레무스가 한 말을 따라 했다.

이를 눈치챈 레무스는 울컥했다. 하지만 입술은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검은 다이아고 뭐고, 보석을 먹으면 누구나 배탈 나고 죽어. 임신하면 누구나 몸이 평소보다 약해지니까, 당연히 보레오티라고 해도 송곳니를 잘 못 쓰지.”

그런데 그게 뭐?

“다 마찬가지 아냐?”

레오니에가 어깨를 으쓱하며 단상 아래의 모두를 보았다.

“아무나 말해 봐. 보석 먹고 멀쩡한 사람 있어? 임신하면 힘이나 체력이 더 강해져?”

아기 맹수의 으르렁거림에 그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다들 몸이 짓눌린 탓도 있지만, 실제로도 레오니에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 없었다.

레무스가 말한 보레오티의 약점은 크게 이상할 구석이 없는, 그저 모든 인간이라면 똑같이 몸이 상할 이유였기 때문이다.

“망상도 정도껏 해야지.”

제 딴엔 예의를 차렸던, 물론 사람들은 이에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나름 선을 지켰던 소녀는 이제 대놓고 레무스를 경멸했다.

“쓰레기.”

그렇게 비하하는 레오니에의 시선은 아주 잠깐 황제에게 머물렀다.

눈이 마주친 황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상관 없단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주제를 파악해.”

아기 맹수는 당장이라도 맹수의 송곳니를 내밀어 레무스의 목을 꿰뚫을 듯이 위협했다. 이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저러다 진짜 죽일 거 같다며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러나 펠리오와 바리아는 말리지 않았다. 설령 여기서 레오니에가 레무스를 죽여도 다 감수하고 처리해 줄 요령이었다.

“어디 감히 네깟 게.”

젊고 아름다운 붉은 백조의 입에선 이상한 소음만 흘러나왔다.

저보다 한참 어린, 제 딸뻘이나 마찬가지인 어린 맹수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겪고 있었다.

몸이 뒤집혀 물에 잠긴 채 숨을 껄떡이고 버둥거리는 백조는 아름답지 않았다. 물결 아래서 추악하게 버둥거리던 발길질이 드러났다.

“보레오티를 건드리다니.”

레오니에의 검은 눈엔 살기가 가득 했다.

“레지나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저도 모르게 격분한 목소리가 신전 높이 울렸다.

레지나를 죽인 원흉.

바리아를 죽였던 살인자.

‘날 그 지옥에 던진 새끼.’

순간 욱해 버린 레오니에가 레무스의 정강이를 발로 힘껏 찼다. 예고 없는 폭력에 휘청거린 레무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레오니에는 그대로 쓰러지려는 레무스의 붉은 머리를 한 움큼 크게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레무스가 아픈 신음과 함께 강제로 레오니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수치와 절망이 가득했다.

“소아 성애자.”

그리 말하는 레오니에의 얼굴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역겨운 것과 시선을 마주한다는 건 썩 좋지 않았다.

“넌 끝이야.”

아기 맹수는 마지막 인내를 끌어모아, 레무스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 네 정자의 쓸모도, 내 몸뚱아리 하나로 끝내자고.”

순간, 붉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껏 레오니에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레무스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자신에게서 천천히 멀어져 가는 레오니에의 표정에 넋이 나가 있었다.

이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고, 나 잘나고 대단하단 표정이, 펠리오 보레오티를 너무도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공작의 딸은 그렇게 뒤돌아섰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저 소아 성도착증 새끼가 한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려.”

레오니에는 곧장 펠리오한테 일러바쳤다. 남들 앞에서 멋있는 척을 있는 대로 하고 온 탓에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펠리오는 그런 딸을 보며 기특하고 착잡한 양면적인 감정을 느꼈다. 쪼그마한 게 벌써 겉멋만 든 건 아닌지.

하지만 내 딸은 워낙 잘났으니 겉멋 좀 들어도 된다는 결론이 금방 나버렸다.

“아빠, 저놈이 고모님을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레지나 님은 분명 북부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잖아요.”

바리아가 도움닫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저 죽일 새끼, 아니지, 올로르 영식이 안다는 건…….”

“엄마, 그냥 욕을 해.”

욕할 거 다 해 놓고 아니라는 건 도대체 뭔지, 레오니에가 새끼손가락으로 인중을 긁적거렸다. 물론 레오니에는 칭찬으로 한 말이었다.

“확실히 그렇군.”

펠리오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레지나는 오로지 북부에서만 살다가 단명한 비운의 소녀가 되었다. 그러니 레무스가 일찍이 죽은 그녀를 그토록 상세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레무스는 레지나를 마치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잘 알고 있으니.

“……북부 잠입이 헛말은 아닌 거 같군.”

펠리오가 바닥에 거의 주저앉은 레무스를 내려다봤다. 얼굴을 숙이고 자신의 결백을 중얼거리는 모습이 꼭 고장 난 오르골 같았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 때문에 당장 폐기 처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황제 폐하.”

기어코 레무스에게서 등을 돌린 펠리오가 황제에게 말했다.

“보레오티 가문은 이번 명예의 의식에서 큰 모욕을 당했습니다. 거짓된 주장으로 제 딸은 큰 상처를…….”

“레오는 너무 슬펐졍…….”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척을 했다. 바리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웃음을 참는 입술은 꾸욱 다물렸고, 그 탓에 빵빵하게 부푼 볼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큰 상처를, 입었고.”

펠리오가 그런 모녀를 이루 말할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영면에 든 사촌 누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비테오 황제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안타까운 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펠리오가 말했다. 그깟 말로 하는 위로는 집어치우라는 뜻이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황제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지금부터 펠리오가 꺼낼 말들이 벌써 그의 목을 바짝 죄고 있었다.

“이미 올로르 영식은 귀족들 앞에서 명예를 잃었다. 그는 이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이 정도면 충분히 벌을 받았으니 물러서란 뜻이었다. 그 말에 펠리오가 마땅찮은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그건 본인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그런 걸 피해자인 우리가 왜 봐줘야 하는 거냐고, 펠리오가 물었다.

“엄연한 피해자는 이쪽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왜 봐주고 안타까이 여겨야 하는 겁니까? 그런다고 저희가 입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을 베풀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라며, 수비테오 황제가 타일렀다.

“미친 새끼…….”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실수로 제 속마음이 튀어나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바리아의 꽉 다물린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욕설이었다.

레오니에는 또 한 번 엄마에게 감동했다.

“하아…….”

역시 기가 막힌 펠리오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신전 내 공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차갑게 얼어 버렸다.

“폐하.”

펠리오가 어린아이에게 잘못을 타이르듯이 또박또박 알려 줬다.

“여기서 저희가 아량을 베풀면, 그건 용서가 아닙니다.”

자해지요.

그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멍청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싫었다. 그 역시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가족들을 챙기며 뒤돌아선 펠리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곧 두 가문에 청구서를 보내겠습니다.”

하나는 올로르에게, 즉 이 빌어먹을 소란을 일으킨 원흉에게 어마어마한 보상과 법적 책임을 물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황실이었다.

“레무스 올로르가 제 사촌누이를 알고 있는 것이 의심쩍습니다. 레지나는 북부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황상, 황실이 북부에 레무스를 첩자로 보냈단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펠리오는 이에 대한 진실 조사를 요구했다.

“보레오티 공작! 지금 황실을 의심한단 말인가!”

황제가 단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올로르 영식이 적어도 레지나가 살아 있었을 때 만났을 것 같은데, 저자는 당시에 황실 기사단 소속이었습니다.”

펠리오가 입가를 비틀었다.

“황실 측에서도 조사해서 진실을 밝히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레무스가 북부에 잠입한 건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고, 그가 당시 황실 기사였던 건 거의 상식에 가까웠다. 레무스는 항상 자신이 황실 기사였단 사실을 자랑처럼 떠벌렸기 때문이다.

만일 황실이 레무스의 북부 잠입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 그는 제 주군인 황제의 명을 어기고 무단이탈이란 중죄를 저지른 꼴이었다.

반대로 황실이 이를 알았다면, 이는 북부에 엄청난 무례를 저지른 꼴이 된다.

어느 쪽이건 황실은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아무런 답도 없는 황제에게, 펠리오는 우아한 동작으로 예를 갖췄다.

당당하게 걸으며 신전 밖으로 나아 가는 보레오티 가족을, 귀족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한참을 바라봤다. 그들의 걸음걸이마다 또각또각 울리는 신발 소리가 마치 검이 바닥을 톡톡 치는 것처럼 들렸다.

서슬 퍼런 퇴장이 끝나고도 신전은 한참이나 조용했다.

“……끝났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과연 무엇이 끝났는지, 그 서술어의 주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명예의 의식이 드디어 끝났다.

* * *

저택에 도착하기 무섭게, 펠리오는 루페와 인세레아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와 바리아도 함께 집무실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두 모녀는 머뭇거리며 양해를 구했다.

“아빠, 나 광공 놀이…….”

“전 배경음 연주…….”

레오니에는 명예의 의식 때문에 생긴 분노와 짜증 감소를 위한 심리 치료가 필요했고, 바리아는 이를 지켜보며 아이를 살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

펠리오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는 등 뒤로 레오니에가 ‘오, 예! 기사단 전원 일렬종대 해요. 내가 천국으로 간다!’라고 외치는 소리는 애써 무시했다.

집무실에 들어가고 잠시 후, 기다렸던 루페와 인세레아가 도착했다.

“공작님!”

들어오기 무섭게 루페가 소리쳤다.

“현관 홀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논단다.”

설명도 귀찮은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루페가 본 건 레오니에가 최근 푹 빠진 ‘광공 놀이’였다.

놀이 방법은 간단했다. 몸 좋은 기사들에게 정복을 입힌 뒤에 두 줄로 나란히 세운다. 그럼 레오니에는 얼음이 든 위스키 잔을 손에 든 채 그 사이로 지나간다.

레오니에는 여기서 중요한 건 느린 걸음과 세상에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이라고 말했다. 거기에 바이올린 연주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라고 했다.

“아니, 저택 내 창문은 다 커튼을 쳐서 어찌나 어두운지 아십니까!”

“광공은 어두워야 제맛이라더군.”

“공작님…….”

루페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역시 우리 아가씨!”

반면 인세레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었다.

“어쩜 그렇게 우아하고 고상한 놀이 방법을 생각하셨을까요?”

“여보, 자기야…….”

루페가 그건 결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방금 당신도 보지 않았나요? 아가씨가 입술 끝을 히죽히죽 올렸잖아요.”

기사들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좋아서 미치겠단 변태의 심정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아가씨가 근육 좋아하시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요.”

인세레아는 딱히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명예의 의식으로 힘들어하시지도 않고 저리 기운 넘치시는 모습을 보게 되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공작 부인께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시는 곡도 너무 아름다웠어요.”

레오니에가 광공에 빙의하여 걸을 때마다, 바리아가 옆에서 바이올린을 켰다.

신비롭게 느껴지는 선율이 느린 발걸음 소리와 어우러질 때, 현악기의 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고, 마침내 정점에 이를 때엔 밤하늘에 뜬 푸른 달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곡 이름이 ‘푸른 달’이라더군.”

펠리오가 초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이야기는 이제 됐다.”

펠리오는 두 사람을 부른 이유를 말했다.

“마무리 사냥을 할 때다.”

그 말에 리코스 자작 부부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펠리오가 자신들을 부른 건, 오랫동안 계획한 사냥의 끝을 맺기 위함이었다.

“오늘 일로 올로르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제 전만큼 활보하진 못할 터.”

하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레무스는 아직 살아 있고, 올로르 자작 역시 여전히 귀족 회의 명단에 속한 상태였다. 거기다 황제 또한 마지막엔 레무스를 감싸려 했다.

“정말 뻔뻔하네요!”

인세레아가 씩씩거렸다.

“올로르 영식은 아가씨께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큰 폐를 끼쳤는데, 그걸 어떻게 봐주려고 한 거죠?”

레오니에의 비밀을 모르는 인세레아의 눈에도 조금 전 황제의 태도는 이상했다.

“혼쭐을 내주세요! 팔다리 관절을 끊어 버려요!”

전직 스토커는 소아 성애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북부에 올로르 영식을 보낸 것이 거의 확실하군요.”

루페가 흥분한 아내를 달래며 펠리오에게 말했다. 그 또한 레오니에의 비밀을 모르는 척 연기했고, 펠리오도 거기에 응했다.

“시기상 레무스 올로르의 북부 잠입은 선황이 살아 있었을 때 일어났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조사를 하면 되는 것이군요.”

“무엇을 조사하면 될까요? 말만 하세요!”

리코스 자작 부부가 물었다.

펠리오는 두 가지를 명령했다.

“검은 다이아의 행방.”

선황 생전, 특히 북부 잠입을 명령했을 때를 전후로 보레오티가 경매에 내놓았던 검은 다이아가 누구의 소유였는지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두 번째는 학술원 습격 사건의 재조사였다.

“그 사건이라면…….”

인세레아가 펠리오의 눈치를 살피며 신중히 말했다.

“수사 당국이 조사를 성실히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저도 수도에서 지냈을 때 들은 적이 있어요. 신문도 읽었고요.”

“그 당시에 공개됐던 기사를 전부 기억하는가?”

“네.”

“그럼 그 기사들을 전부 다 적어 내도록.”

“알겠습니다.”

“저희가 자체적으로 조사하는 겁니까?”

루페가 물었다. 마침 그 사건은 얼마 전에 큰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그러니 이쪽에서 재조사를 시작한다면, 당시 수사 진척에 관련된 문제점도 밝혀낼 수 있었다. 심지어 이쪽엔 올로르가 아르데아를 협박하고 위협한 증거들이 있었다.

“어느 범위까지 해 둘까요?”

황실이 예민해질 정도?

알아서 기고 엎드릴 정도?

루페의 질문은 마치 스테이크 굽기의 정도를 물어보는 것처럼 잔잔했다. 나열하는 예시가 얼마나 귀여운지, 펠리오는 가소롭단 듯이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알아내서 확인된 문제나 비리는 전부 공개해라. 반박할 빈틈조차 주지 못하게 전방위로 압박해.”

스스로 제 목을 조르고 있었다는 걸 알게끔 해 주라고, 펠리오가 친절을 베풀었다.

‘세게 나가시네…….’

루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없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였다. 한참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트라가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손님?”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누가?”

누가 지금 여길 찾아와? 펠리오가 줄인 질문의 뜻이었다.

그와 동시에 펠리오는 찾아온 손님이 누구일지 대충 추려 냈다.

약속도 없이 보레오티 저택에 마음대로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었다. 특히 명예의 의식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맹수들의 소굴에 누군가 방문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니스, 우르마리티 백작…….’

기껏해야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곤 저 둘밖에 없었다.

“이걸 보여드리면 안다고 하셨습니다.”

트라가 손님들에게 받은 징표를 펠리오에게 내보였다. 새하얀 손수건 위에 올려진 건 고급스러운 흉장 두 개였다. 이를 바라보는 펠리오의 검은 눈이 날카롭게 접혔다.

집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고, 공작님?”

루페가 목구멍에서 막힌 목소리를 가까스로 꺼내어 물었다. 동시에 겁에 질린 아내를 제 품에 안으며 위로해 줬다.

“지금 맹수의 송곳니를 꺼내신 건 아니죠?”

“꺼내기 직전이니 말 걸지 마…….”

짓이겨진 한마디에 루페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뭘 보신 거야?’

트라가 가지고 온 것이 뭔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저택에 찾아온 손님은 펠리오에게 단단히 찍혀 목숨이 위태로운 자란 사실이었다.

“지금 이 새끼들은 무얼 하고 있지?”

“그, 그게…….”

트라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펠리오 앞에서 분노를 오롯이 받아 낸 그야말로 여기서 가장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그래도 전직 글라디고 기사단 출신, 현직 보레오티 가문의 집사란 자존심으로 애써 태연히 버티어 내는 중이었다.

“아가씨께 붙잡혀서, 광공 놀이를 함께 즐겨 주시고 있습니다.”

“즐기고 있다고?”

펠리오의 노기가 더욱 커졌다.

트라가 허둥거리며 다시 말했다.

“아, 그게! 거의 반강제로 하시는 거라, 즐기시는 것보단…….”

“레오가 둘을 잡고 노나?”

“어어, 잡고 노신다는 뜻이…….”

“제 발밑에 두고 노냐고.”

그렇게 말하는 펠리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가라앉았다. 트라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가씨 발밑이지요. 두 분이 머뭇거리시는 걸, 아가씨가 멱살 잡고 끌고 와서 직접 위치까지 선정하셨습니다.”

우리 아가씨가 남에게 쉽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아니지 않냐며, 트라가 아까보다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거 욕이잖아.’

루페는 기가 막혔다. 하나 여기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루페 혼자였다.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인데!”

인세레아도 여기에 크게 동의했다.

“여보…….”

루페는 그런 아내를 안타까이 바라봤다.

* * *

오늘 레오니에의 광공 놀이 주제는 ‘세상은 내 발밑’이었다.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레오니에는 옷까지 바꿔 입었다. 쇄골이 보일 정도로 단추를 푼 하얀 셔츠와 검은색 정장 조끼, 그리고 선이 바짝 선 바지에 구두까지. 장식이라곤 목에 건 펜던트 목걸이가 전부였다.

거기에 색이 진한 사과 주스가 담긴 위스키 잔도 들었다.

놀이의 시작은 바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였다. 네 개의 현 위로 활이 닿기 시작하면, 기사들이 자세를 갖추며 일동 고개를 숙인다.

그 사이로 걸어가는 아기 맹수는 세상 지루하고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손에 든 위스키 잔은 걸음을 따라 희미하게 흔들렸다.

커튼을 친 어두운 현관 홀은 더욱 분위기를 오싹하고 매혹적으로 부풀렸다.

기사들 사이를 다 지나간 레오니에의 종착지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그때 바리아의 연주도 정점에 이르렀다.

우아하고 부드럽게 뒤돌아선 레오니에는 제 발밑에 줄 맞춰 선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사과 주스를 홀짝였다.

그리고 한 번 더 아래를 내려다봤다.

“……크으으!”

만족한 레오니에가 발재간을 선보였다.

“또! 또 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흥분한 레오니에가 폴짝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손에 든 위스키 잔은 일찌감치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 넘겼다.

“저기…….”

나란히 줄 선 기사들 속에 끼어 있던 크리세토스 황자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나?”

“아가씨가 질릴 때까지입니다.”

옆에 있던 멜레스가 덤덤히 답했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기함을 했다. 이 어이없는 놀이에 강제로 참석해서 벌써 세 번이나 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말에 머리가 아찔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글라디고 기사들은 이런 일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몇몇은 아까 자신이 더 멋있지 않았냐며 이 놀이를 진심으로 즐기기까지 했다.

“야, 스칸…….”

황자가 다른 쪽에 있던 동생의 팔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넌 이걸 어떻게 생각하냐?”

“보레오티의 범상찮음에 감탄했습니다.”

덩달아 놀이에 강제 참석한 스칸디아 황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때, 레오니에가 외쳤다.

“난 광공이 꿈이었어! 난 장래에 꼭 미친 공작이 되고 말겠어!”

“히이익……!”

황자가 소스라치게 진저리를 쳤다.

‘제국이 위험하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보레오티 저택에 온 건, 오늘 있었던 명예의 의식과 관련해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들 속에 있던 레오니에 때문에 한 번 놀랐고,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붙잡혀서 두 번 놀랐으며, 이 뻔뻔하고 황망한 놀이의 반복에 세 번 놀랐다.

‘보레오티에게 잘 보이자…….’

황자는 수도 없이 다짐했다.

‘잘못 보였다간 미친 공작한테 참수당할 거야……!’

미친 공작이 된 레오니에에게 붙잡혀 낑낑거리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 황자 옆에서, 스칸디아 황녀는 그저 조용히 레오니에만을 바라보았다.

레오니에는 바리아 앞에서 폴짝거리며 이 광공 놀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고 있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바리아는 그런 레오니에의 소매를 손수 걷어 주며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 재밌어! 엄마도 할래?”

“엄마는 괜찮아. 안 해도 돼.”

엄마는 광공이 적성이 아닌 것 같다며, 바리아가 사양했다.

“하긴, 엄만 따지자면 엉뚱순진수니까.”

“그게 뭔데?”

“광공을 무찌르는 몇 안 되는 속성이야.”

썩은 동심을 떠드는 레오니에의 목에 걸린 펜던트 목걸이가 흔들렸다.

“…….”

스칸디아 황녀는 그 목걸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정말 하고 계시네.’

황녀는 레오니에가 자신이 준 목걸이를 정말로 차고 다닐 줄은 전혀 몰랐다. 동시에 오늘 이곳에 올 때 레오니에가 준 손목시계를 차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황녀는 제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넌 뭐가 좋다고 또 헤실헤실 웃어.”

반면 그런 동생의 속을 모르는 황자는 한참 구시렁거렸다.

“하여튼 여기 좀 이상해. 보레오티는 이런 자아도취가 재미있나? 이 미친 짓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약속도 없이 찾아온 놈팡이들치곤 말이 심한 것 같은데?”

“심하긴 뭐가 심해? 제정신 박힌 사람은 절대…….”

뒤에서 툭 튀어나온 물음에 자연스럽게 답하던 황자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절대?”

기척도 없이 내려온 펠리오는 떡하니 황자와 황녀 앞에 섰다.

“그다음 말씀은 어디 가시고?”

매서운 검은 눈동자가 손님들을 격하게 환영했다. 기사들은 일찌감치 도망쳐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벼, 별말 아닙니다…….”

크리세토스 황자의 입가가 지진보다 더 크게 흔들렸다.

“별말 아니어야 할 겁니다.”

“무, 물론이지요.”

“말은 잔 속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쏟으면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즉, 네가 한 말을 다 들었단 뜻이었다.

‘기절하고 싶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짧아진 저의 명줄에 안녕을 고했다.

“호위도 함께 오셨군.”

펠리오가 이번엔 스칸디아 황녀를 흘겨봤다.

반사적으로 왼손을 뒤로 숨긴 황녀가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펠리오의 심기가 한층 더 불편해졌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쪼르르 다가왔다.

“잘 놀고 있는데 왜 방해해!”

“방해는 무슨, 네가 하도 기사들 희롱한대서 내려왔지.”

“내가 언제 희롱했어!”

“기사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근육을 힐끔힐끔 훔쳐본단 제보가 여럿 있었다.”

“칫.”

자신의 은밀한 시선을 들킨 레오니에가 안타까운 혓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목에 그건 뭐야.”

펠리오는 그제야 딸의 목에 걸린 펜던트 목걸이를 발견했다. 동시에 황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섬뜩한 살기에 황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울리지?”

반면 레오니에는 히죽 웃으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이 가더라니, 이렇게 찾아올 손님 때문이었나 봐.”

레오니에가 스칸디아 황녀를 바라보며 그렇지 않으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질문을 받은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우리 기사님도 내가 준 손목시계를 하고 있네요?”

“저도 오늘은 어쩐지…….”

황녀가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사실 황녀는 손목시계를 항시 차고 다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말하려니 부끄러워져 솔직하게 말하기 힘들었다.

“기가 막히는군.”

펠리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 딸이 준 시계를, ‘오늘 어쩐지’ 생각이 나서 찼다고? 이런…….”

“……어머, 어머!”

펠리오의 입에서 흉기 같은 욕이 튀어나오기 직전, 눈치껏 끼어든 바리아가 서둘러 그 앞을 막아섰다.

“이제 놀이도 끝났는데, 슬슬 올라가실까요?”

“공작 부인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크리세토스 황자가 서둘러 맞받아쳤다.

그제야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은 겨우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 그리 좋은 대접은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차를 내주고 자리를 떠나기 무섭게, 펠리오는 차를 음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용건을 물었다. 덕분에 향 좋은 차엔 손도 대지 못했다.

“……공작, 너무 매정하네요.”

크리세토스 황자가 퍽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어렸을 땐 나름 상냥히 대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저를 보고 울었던 기억은 없나 봅니다.”

펠리오가 가소롭단 듯이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절 보자마자 울음을 토하고, 소변을 지리셨지요.”

그 말에 레오니에가 스칸디아 황녀를 바라봤다. 너도 지렸느냔 시선으로 바지를 슬쩍 바라보니, 황녀가 고개를 저으며 제 옆에 앉은 형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형님만 그랬단 뜻이었다.

“어흠, 뭐, 그런 것보다.”

어릴 적 실수를 들켜 무안해진 황자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명예의 의식이 이제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의 도움으로 말이지요.”

“생색이라도 내시게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어째 아까보다 황자의 기세가 많이 높아진 기분이 들었다.

“뭐, 조금은 내도 되지 않겠습니까?”

소파에 등을 기댄 황자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여유롭고 자신 있어 보였다.

“우리가 마법 약 제조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펠리오가 오르티오 후작을 통해 주문한 건, 레오니에와 레무스 올로르의 피만이 서로를 거부하는 친자 확인용 마법 약이었다.

주문을 받은 오르티오 후작 부군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펠리오의 주문은 아주 치밀하고 사악하면서도 복잡한 장난이었다. 마법 약 제조에 미친 것으로 유명한 후작 부군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는 보레오티 입장에선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레오니에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과 같단 뜻이었다.

오르티오 후작 부부는 주문을 받자마자 이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태연한 부부조차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었다.

후작 부부를 도와 마법 약의 재료 중 하나인 레무스의 피를 얻어 낸 크리세토스 황자와 스칸디아 황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그냥 올로르를 몰아내려는 보레오티의 비책이라고만 들었다. 둘은 그런가, 싶은 생각에 레무스를 습격했다.

그들은 부랑자로 위장해 레무스의 오른팔을 단검으로 그어 피를 뽑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 약의 정체를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좀 섬뜩하더군요.”

상황을 보아하니 레무스의 말이 진짜인 듯했다.

당시 신전에 있었던 크리세토스 황자와 호위로 위장했던 스칸디아 황녀는 아무렇지 않게 있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괜찮습니까?”

황자가 물었다. 그의 말투엔 제법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만일 저나 오르티오 측에서 이를 빌미로 협박이라도 하면…….”

“협박?”

기가 막힌 레오니에가 황자의 말을 아니꼽게 따라 했다.

“도대체 뭘 빌미로 협박하려는지 모르겠는데요?”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요?”

“자신만만한 게 아니라, 정말 뭐로 그러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죠.”

스스로 아비라고 주장하던 레무스는 망상에 빠진 역겨운 편집증 소아 성도착증 범죄자일 뿐이었고, 레오니에는 재수 없는 놈한테 걸려 아까운 피만 무려 두 방울을 소모한 보레오티일 뿐이었다.

명예의 의식에서 증명된 진실은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

거기다 올로르는 이제 파멸만이 남았다. 황실이 그들을 도와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레무스 올로르를 내쳐야만 황실이 북부를 노리고 뒤에서 공작질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었을 테니.

그리고 보레오티와 우르마리티 측에서 엄청난 배상액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올로르가 사라지면, 레오니에의 혈연을 증명할 방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제 레오니에를 위협할 협박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뭐…….”

그래도 혹여, 만에 하나.

“전하나 오르티오 후작이 그리하신다면야, 뭐.”

레오니에가 제 손을 죔죔 쥐고 펴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이쪽도 떠벌리면 되는 거고.”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만 살짝 든 아기 맹수의 입가엔 사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크리세토스 황자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뒤늦게 제 목에 걸린 단단한 목줄을 깨달았다.

“황위의 정통성이라든가.”

티그리아 황후의 불륜과 스칸디아 황녀의 비밀.

“동부의 은밀한 연구 같은.”

오르티오 후작 가문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흉악범을 대상으로 하는 인체 실험.

“과연 누가 더 손해일까요?”

레오니에가 정말 궁금하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질문 속에 담긴 뜻은 살벌한 경고나 매한가지였다.

이번 일 좀 도왔다고 우위에 섰단 착각하지 마라. 넌 그냥 닥치고 우리가 떠먹여 주는 황위 계승권이나 잘 받아 챙기면 돼.

“……아이, 영애께서도 참.”

크리세토스 황자가 활짝 웃었다. 하나 그의 입꼬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글쎄요?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생각해 보니 말도 안 꺼냈네.”

그제야 레오니에가 한결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펠리오와 바리아는 그런 딸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누구 딸인지 몰라도 아주 용맹하고 기특했다.

“…….”

그리고 스칸디아 황녀는 꼬리를 만 제 형님을 조금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래도 도움은 도움이니.”

실컷 구경한 뒤에야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신전에서 더러워졌던 기분이 레오니에의 재롱 덕에 무척 개운해졌다.

“일전에 말씀하신 걸 드리면 되겠습니까?”

펠리오는 이미 영지에서 저 두 사람의 도움에 대한 대가를 치른 상태였다.

저들은 스칸디아 황녀의 서부 탈출을 위해 어느 마법 약 하나를 구하는 중이었고, 이는 마도구 수집이 취미인 펠리오에게 마침 있던 물건이었다.

“그거 때문에 찾아오긴 했는데…….”

황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계획이 좀 틀어질 것 같습니다.”

“뒤늦게 아차 했나 보군.”

펠리오가 그 뜻을 알아채곤 비아냥거리며 조소를 흘렸다.

스칸디아 황녀가 타국으로 시집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 명예의 의식에서 드러난 레무스의 역겨운 본성 때문에 수비테오 황제가 제 발이 저려 버렸다.

그가 제 딸을 시집보내려 하는 타국의 왕도 나이가 꽤 많았다. 그리고 황녀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참 끼리끼리 노네요.”

바리아는 웃음도 안 나왔다.

수비테오 황제는 레무스의 몰락으로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물론 겨우 차린 정신은 타국으로 시집갈 황녀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라, 황녀를 시집보냄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이 걱정돼서였다.

“지금 황제는 상당히 위태롭습니다.”

연이은 정책 실패와 연루된 범죄 정황 때문에 이미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나마 저를 향한 비난 여론을 명예의 의식으로 가려 보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역풍으로 몰아쳤다.

심지어 의식이 끝나자마자 황태자 책봉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야.”

레오니에가 혀를 쯧쯧 찼다.

‘나라가 안 망한 게 용해.’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현 제국의 정치 형태에 감동했다. 만약 각 지역의 독립성이 강하지 않았다면, 벨리우스 제국은 일찌감치 무너져 내렸을 거다.

그리 생각하면 보레오티가 그간 얼마나 답답하고 황망했을지 이해가 갔다.

아기 맹수는 역대 보레오티 공작들이 북부를 지키고자 해 왔을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

“그럼 황녀 전하의 결혼은…….”

바리아가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황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늦춰질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이는 도리어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 흐름이었다. 이렇게 되면 지금껏 오랫동안 쌓아온 계획이 어긋나버리게 된다.

“황녀의 결혼은 제법 예전부터 논의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예정대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지만…….”

“방심은 금물이지요.”

황자의 걱정 어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칸디아 황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결혼 전, 친목 도모를 이유로 왕을 보러 가는 일정이 있습니다. 그때 서부와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헤스페리 후작과 이벡스, 엄선된 레보오 기사들이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마차를 덮쳐 도적의 소행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했다.

서부 측은 이미 티그리아 황후가 접촉하여 예행연습도 해 두었다고 한다.

“괜찮겠어요?”

레오니에가 황녀에게 물었다.

“그럼 그 마차에 본인이 타요? 지금껏 시녀의 딸이 당신 흉내를 냈잖아요.”

“그래서 공작에게 마법 약을 부탁받은 겁니다.”

바로 일정 시간 동안 성별을 바꾸는 약이었다. 이번만큼은 그 마차에 시녀의 딸을 태울 수 없었다. 그러니 스칸디아 황녀가 직접 약을 마시고 여자로 변신하기로 했다.

“으윽.”

레오니에가 기겁했다.

“아빠는 그런 걸 왜 갖고 있어?”

질색하는 아이의 얼굴엔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단 의문과 약간의 경멸이 담겨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펠리오가 퍽 당황했다. 그의 취미가 마도구 수집인 건 레오니에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냥 모은 거다.”

“하필 모아도 그런 걸…….”

“보레오티 영애.”

스칸디아 황녀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귀에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레오니에는 단번에 고개를 휙 돌렸다.

“성별을 바꾸는 마법 약은 아주 비쌉니다.”

고작 몇 시간 잠깐 바꾸는 게 다이고, 그마저도 통증이 심해 섭취 후에 며칠 내리 고열에 시달려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마법 약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쌌다.

“못해도 저택 열 채 값은 될 겁니다.”

“……서른 채 값은 넘지.”

펠리오가 값을 세 배나 부풀렸다. 황녀가 저를 편들어 줬는데도 그리 고마운 마음은 안 들었다. 오히려 네가 왜 끼어드느냔 괘씸한 심보만 들었다.

크리세토스 황자는 그런 공작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사람이 어째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

“거참, 돈도 이상한 데 쓰네.”

레오니에는 영 탐탁지 않았다.

“이왕이면 생산적인 취미를 가져! 근육을 키운다거나, 근육을 그린다거나…….”

“레오 네가 말하니 형량을 생산하는 취미 같구나.”

“이 아빠가 또 시비야!”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고.”

“솔직히 이상하잖아! 아빠 같은 떡대가 성별을 바꾸는 약을 가진다면, 그건 또 다른 세상을 향한 금지된 문을 여는……!”

“……잠깐만!”

격양된 레오니에가 더 외치기 전에, 바리아가 먼저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잠깐! 정말 잠깐만요!”

모두의 시선이 바리아에게 집중되었다. 그제야 다들 바리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걸 깨달았다. 예쁜 초록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가 지금, 자, 잘못 들었나요?”

어색하게 올라간 바리아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기사님이 꼭…….”

“……아.”

레오니에가 뒤늦게 아차, 했다. 그제야 자신들이 바리아를 앞에 두고 황녀의 비밀을 이야기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시간문제였어!”

아기 맹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쨌건 바리아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엄마도 알겠지만, 이 기사님이 황녀 전하셔.”

바리아가 입을 쩍 벌렸다.

“……영애, 이거 우리한텐 제법 심각한 비밀인데요?”

그걸 보물찾기에서 찾아낸 보물 자랑하듯 말하지 말라고, 크리세토스 황자가 퀭한 눈으로 부탁했다.

도움 좀 구하려고 왔다가 도리어 진만 다 빠졌다.

‘내가 보레오티랑 안 맞나?’

이상하게도 보레오티 저택에 들르기만 하면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어쨌건 도와달라는 거잖아요.”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전하들과 서부가 준비한 대로 계획이 진행되면 좋을 것 같아서, 이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거죠? 이젠 있지도 않은 내 비밀을 약점 삼아서.”

저택에 왔을 대부터 알았다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아빠.”

그리고 펠리오에게 말했다.

“내가 좀 도와줘도 될까?”

“어떻게?”

충격받은 바리아를 옆에서 진정시키고 달래던 펠리오가 물었다. 아이의 부탁에 바리아도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혹시, 전에 말했던 ‘지인’ 말이야?”

바리아가 물었다.

레오니에가 말했던 ‘지인’은 명예의 의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레오니에가 레무스의 친딸인 것 같다고 의도적으로 몰아갔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 맞아.”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할 이야기도 있고.”

그러는 김에 겸사겸사 도움을 한 번 더 받아 보겠다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 * *

거울 앞에 선 로타의 몰골은 끔찍했다.

“…….”

로타의 가는 손가락이 거울에 비친 제 몸을 찬찬히 훑었다.

항상 윤이 흐르던 머리칼은 푸석푸석했고, 제대로 빗지 않아 끝이 엉키고 갈라졌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훑던 손가락은 제 목 언저리로 향했다.

보라색 목줄이라도 찬 것처럼 선명한 멍이 있었다. 어젯밤 레무스가 남긴 상처였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집안을 말아먹을 악독한 것, 너 같은 걸 괜히 만나서! 차라리 네 언니랑 결혼해야 했는데!

‘네가 다 망쳤어!’

지금도 레무스가 했던 말이 로타의 귀에 선연히 맴돌았다.

명예의 의식 이후, 레무스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반드시 이긴다고 자신만만했던 그는 이제 끔찍하고 역겨운 망상만 하는 소아 성도착증 범죄자가 되었다.

그러나 레무스는 이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과회에서 보레오티 영애가 찼다던 백조 목걸이를 검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목걸이는 올로르 가문의 상징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판정되었다.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보레오티는 이 상황도 예상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백조 목걸이를 따로 제작해 두었다.

애당초 레무스의 목걸이는 그날 다과회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불태워 버렸다.

게다가 레무스는 레오니에가 다과회 때 착용한 백조 목걸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검증할 때 제출한 백조 목걸이가 바뀌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무너진 귀족 사회에 얼굴을 드러낼 자격조차 잃어버린 그는 그 분노와 원망을 로타에게 돌렸다.

로타의 목을 조르는 동안, 레무스는 로타의 존재를 부정했다. 함께했던 시간을 후회하고, 자신의 절망을 끊임없이 로타의 탓으로 돌렸다.

그때마다 로타의 아름다움은 금이 갔다. 이제 로타는 저를 돌보고 가꿀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모두에게 존경받고자 꾸몄던 미모는 거짓말처럼 깨졌다.

“…….”

거울 속 로타는 얼이 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치 남처럼 보고 있었다.

“……하하.”

그러다 뭐에 홀린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몸을 뒤로 꺾다가, 다시 앞으로 쓰러트린 로타는 몸을 떨며 끊임없이 웃었다.

‘역시 내가 옳았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초록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괴기스럽게 히죽이는 입꼬리는 누가 보면 가히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그러게 왜 바보처럼 보레오티를 탐한 거야!’

로타는 그간 레무스의 행보에 불안감을 느꼈다. 보레오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고, 레오니에는 그의 아이가 절대 되어선 안 되었다.

그리고, 명예의 의식에서 자신의 생각이 전부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보레오티 영애는 레무스의 아이가 될 수 없었다.

“……여기, 여기에 있어야 해.”

로타가 제 마른 배에 손을 올렸다.

“당신의 아이는, 여기서 생겨야만 해…….”

오로지 자신의 배 속에서 자라고 태어난 아이만이 레무스의 아이여야 했다.

“내가 망치지 않았어…….”

배를 어루만지며, 로타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착각한 거야. 틀린 생각을…….”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기척도 없이 열린 문에 로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았다. 혹시 남편이 제 걱정 어린 혼잣말을 들었다가 또 화를 내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로타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어쩜, 세상에나.”

우시스 황비가 서둘러 쓰러진 로타의 곁으로 다가갔다. 부축하듯 로타의 몸을 일으킨 황비는 다정한 손길로 흐트러진 분홍 머리를 정돈해 줬다.

“많이 힘들었나 봐요?”

“저따위가 뭐가 힘들어.”

로타는 그제야 문 너머에 있는 올로르 자작이 보였다. 항상 아이를 재촉하던 그는 이제 제 며느리를 철천지원수 보듯 노려봤다.

로타는 그런 시아버지를 무시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레무스는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일부러 그랬겠어요?”

그때, 우시스 황비가 로타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직 어리고 배움이 없잖아요. 그러니 그냥 별생각 없이 말한 걸 거예요.”

“저것이 말을 함부로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보레오티 영애가 백조 목걸이를 찬 건 사실이잖아요?”

우시스 황비가 자작의 말을 잘랐다.

“명예의 의식 전에, 애초에 그 백조 목걸이가 올로르 가문의 것이었는지 확인부터 했어야죠.”

“…….”

“황제 폐하께선 정말 진노하고 계세요.”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지만, 뾰족한 가시가 세워져 있었다.

“……망할!”

올로르 자작이 문 옆에 있던 화분을 바닥에 내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이후 자작은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방을 나갔다.

“성질이 참 더럽죠?”

그러건 말건, 우시스 황비가 로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끼리끼리라더니.”

우시스 황비가 어쩔 수 없단 듯이 웃었다.

“우리 새언니랑 참 비슷하네요.”

로타가 멍한 눈으로 우시스 황비를 보았다.

마치 자신이 뭘 헛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치 눈앞에 있는 황비마저도 헛것인 것 같았다.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고.”

로타의 푸석푸석한 분홍색 머리를 대충 모아 주면서, 황비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성은 전혀 안 하고.”

마침 바닥에 리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황비는 이를 주워다 하나로 묶어 주었다. 우시스 황비가 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내려 묶은 머리가 로타의 창백한 안색과 의외로 잘 어울렸다.

“거기다 멍청하기까지.”

로타는 이제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비의 말투에는 정체 모를 불편함과 섬뜩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타는 그걸 알아챌 만큼 이성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황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단 사실 하나만큼은 예민하게 알아챘다.

로타를 바라보는 황비는 단 한 순간도 웃지 않았다.

“왜 날 그렇게 봐요?”

물어보는 로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왜 그럴 것 같아?”

되려 황비가 물었다. 심지어 말까지 놓았다.

“왜냐하면, 너무 멍청하잖아.”

“나는 멍청하지 않아요.”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 거니? 우시스 황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천진난만한 그 모습이 오히려 속을 알 수 없어 답답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우리 새언니는 주제 파악을 못 하잖아.”

우시스 황비가 자세히 알려 줬다.

“제 가치는 그리 높지도 않은데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지. 만만하면 괴롭히고, 무서우면 아양 떨고 얌전한 척하고.”

“…….”

“그런데, 그게 뭐 딱히 나쁜 건 아니야.”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를 도와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뿌리치는 건 너무 바보 같잖아. 그것도 그 사람은 네가 아주 많이 괴롭혔고.”

조곤조곤 말하는 황비는 어느새 로타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로타가 팔을 힘껏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언니를.”

로타가 말을 더듬었다.

“어, 언니를 만났나요?”

“보레오티 공작 부인?”

황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난 적은 없지만 건너, 건너, 건너 알고 있지.”

무려 ‘건너’를 세 번이나 말한 황비는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타를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차이였다.

“그 아이는 정말 똑똑해서 좋아. 난 똑똑한 사람이 좋거든. 아아, 친해지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라니까?”

황비가 까르르 웃더니 이내 표정을 싹 지웠다.

“그러니 딱 한 번 도와줄게.”

그리곤 휙, 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네가 너무 멍청하고,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으니.”

곧 황비가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무언가를 계산하는 시늉을 했다.

로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꼭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레무스에게 맞았을 때보다 끔찍한 충격이 제 머릿속을 하염없이 내려쳤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생각해 봐.”

“…….”

“그럼 갈게요, 새언니!”

우시스 황비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활짝 웃었다. 얼굴에 걸린 싱그러운 미소가 초록색 머리와 어우러져 꼭 푸른 나무를 연상케 했다.

저택을 나온 황비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할 즈음에 저택에서 올로르 자작이 뛰어나오는 것 같았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으음, 으으음.”

창문 너머로 바뀌는 풍경을 보며, 우시스 황비가 어느 노래를 흥얼거렸다. 느리고 부드러운 선율이 꼭 자장가 같았다.

“아아, 드디어…….”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댄 황비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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