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진짜 아빠는
“올로르 자작 영식!”
응접실을 나오고 얼마 안 있어, 누군가가 레무스의 발을 멈춰 세웠다.
“처형.”
바로 바리아였다.
레무스가 그 뒤를 슬쩍 보았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끌어안은 채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레무스는 그 모습을 조금 전 상황에 충격받은 아이를 달래는 거라 생각했다. 그 모습은 자신이 보기에도 참 다정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겁니까?”
바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레무스의 시선을 돌렸다.
“잘 알죠. 존재조차 몰랐던 제 딸을 찾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무스는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제가 공작 영애를 데리러 가겠단 주제넘은 생각은 않습니다.”
자신이 잘 키우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다고, 레무스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냥, 저 또한 영애의 아버지란 사실을 인정받고 싶을 뿐입니다.”
“인정?”
“이따금 공작 영애와 만남을 가지면서 친해지고 싶습니다.”
바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정말, 당신 딸이야?”
바리아가 물었다.
“그래서 설마 펠리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바리아가 뒤늦게 입을 막았다.
그러나 레무스는 그 순간 보여 준 바리아의 흔들림에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역시 레지나의 딸이었어.’
솔직히 친자 확인을 하고 싶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약간의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리아에게서 확신을 얻었다.
바리아는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응접실에서 그녀가 보였던 불안함과 걱정이 레무스에게 확신을 줬다.
“……그러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바리아가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숨을 깊이 내쉬었다.
“로타는요?”
바리아가 여동생에 대해 물었다.
“로타는, 이걸 알아요?”
“얼마 전에 알려 줬습니다.”
“충격을 받진 않았나요?”
“제가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지요.”
하지만 약혼 전에 있었던 일이었고, 제 잘못을 똑바로 잡겠단 결정에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줬다고 말했다.
“로타는 보레오티 영애를 자신의 딸처럼 생각하겠다고 했어요.”
“그게 정말 말처럼 쉽겠어요?”
바리아는 레무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로타가 어떤 성격인지는, 가장 가까이서 지내온 바리아가 가장 잘 알았다.
그 악독하고 저밖에 모르는 동생이 레오니에를 제 딸처럼 여기고 사랑할 가능성은 손톱의 때만큼도 없었다.
설령 그걸 물에 희석했다고 해도, 그조차도 없을 아이였다.
“이건 두 가문에 있어 중요하고도 기쁜 일입니다.”
가볍게 한숨을 흘린 레무스가 말했다.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상대를 무척 한심하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황제파와 귀족파, 대립하는 두 가문의 화합입니다.”
“화, 화합?”
“두 정파의 대표 가문이 하나가 된 겁니다.”
“하나는 무슨! 레오는 보레오티 공작이 될 거예요!”
바리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올로르의 피도 흐릅니다.”
레무스가 싱긋 웃었다.
“저 아이가 공작이 된다고 해도, 그 아이의 자식은 올로르가 되는 겁니다.”
“그럼 로타는? 당신과 로타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는?”
“대의를 위해선 포기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
“당신이 이해하기엔 너무 큰 뜻일지도…….”
그러나 레무스는 그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더는 저 역겨운 목소리를 들어줄 수 없었던 바리아가 있는 힘껏 레무스의 정강이를 발로 찼기 때문이다.
“윽!”
레무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리아는 앞으로 몸을 고꾸라트린 레무스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근래 꾸준히 단련한 근육 덕에 쉽사리 끌어올 수 있었다. 그리곤 그대로 레무스의 볼에 주먹을 휘둘렀다.
“어, 엄마!”
뒤에서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외쳤다.
“크헉……!”
주먹을 맞고 쓰러진 레무스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바리아는 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참을 씩씩거리며 레무스를 붙잡으려고 했다.
“엄마, 진정해! 저거, 더러운 놈이야!”
“바리아, 숨을 깊이 들이마셔요.”
레오니에와 펠리오가 뒤늦게 바리아를 붙잡아 말렸다. 사실 둘은 뒤에서 몰래 구경하다가 바리아가 한 대 치는 걸 흐뭇한 미소로 지켜본 뒤에야 느릿느릿 달려온 참이었다.
“이 역겨운 소아 성애자가!”
바리아가 바닥에 쓰러진 레무스에게 욕을 퍼부었다.
레무스는 살이 까져 피가 흐르는 볼을 손으로 누른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리아가 자신을 때릴 거란 상상을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저만 보면 두려움에 질린 눈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무리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
바리아는 도저히 레무스를 저와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어떻게 내뱉는 말마다 비열하고 사악할 수 있을까. 저건 폐기물이었다. 당장 없애야 하는 불량품이었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리아가 으르렁거렸다.
“레지나 님은 열여덟에 레오를 낳은 거야! 미성년자가 임신한 거라고!”
그런데 그걸 사랑이라고 말해?
중요하고 기쁜 일이라고?
“두 가문의 화합? 이해하지 못할 큰 뜻이라고?”
바리아가 몸을 주춤거리며 일어나려는 레무스의 가슴을 발로 찼다. 레무스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입에서 튀어나온 신음이 괴상했다.
“우와…….”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저건 좀 아프겠다.”
“발 차는 솜씨가 아주 좋아.”
정작 옆에서 말리는 레오니에와 펠리오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둘은 말릴 생각조차 없었다. 심지어 펠리오는 팔짱까지 낀 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덕분에 이 소란은 궁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네가 미성년자만 건드리는 건 세상이 다 알아!”
레무스가 미성년자에게 성적인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은 매우 유명했다.
하나 모두 그걸 알고도 모르는 척 눈감았을 뿐이었다. 그의 가문은 실세 중의 실세인 올로르였으니까.
“내 여동생과 약혼하겠다고 한 것도, 나보다 로타가 더 어렸기 때문이었잖아!”
“으윽.”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설마 에르바누와 올로르 가문 간의 약혼에 그런 역겨운 비밀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때 로타는 겨우 열일곱이었어!”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레무스가 변명했다. 피가 흐르는 입가는 더는 웃지 못했다. 붉은 눈동자가 바리아를 힘껏 노려봤다. 얼굴에 쓰고 있던 사람 좋은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바리아에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약혼하질 말았어야지!”
열일곱과 서른 중반이라니. 무어라 더 소리치려던 바리아가 허공에 꽉 쥔 주먹을 올린 채 한참을 씩씩거렸다.
“너도 역겹고, 네 가문도 역겹고, 네 가문에 자식 팔아넘긴 내 부모님도 역겨워.”
결국 그 약혼이 성립된 건, 가장 어린 로타를 원한다는 레무스의 제안을 수긍한 에르바누 백작 부부의 합의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부모였다면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어른은 결코 그래선 안 됐다.
“너 같은 새끼는……!”
기어코 바리아가 손 하나를 높이 들었다.
하늘 위로 높이 솟구친 가운뎃손가락이 북부 산맥만큼 드높았다.
“엿이나 먹고 지옥에나 떨어져!”
예상치 못한 바리아의 손가락 욕에 양옆에 있던 맹수 부녀가 기함했다.
“엄마!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레오, 너 아냐?”
“이 아빠가 지금 뭔 소리야!”
그러나 당황한 부녀는 바리아를 말릴 틈도 없었다.
“너는 하나도 아까워!”
바리아가 다른 손도 번쩍 들었다.
“두 개 처먹고 지옥에 떨어져!”
가운뎃손가락 한 쌍은 지엄한 황궁 지붕마저 뚫을 기세였다.
“……풉!”
그리고 이 소란을 창문 너머에서 숨어 지켜보던 크리세토스 황자가 끝끝내 참으려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
바닥에 쓰러진 황자가 바닥을 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공작 부인, 겁나 웃기네!”
그토록 아름답고 고아하던, 그리고 동글동글한 인상이 순진하고 귀엽던 공작 부인의 거친 이면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야, 올로르가 한 방 크게 먹었네.”
“이러다 들키십니다.”
호위 기사로 위장한 스칸디아 황녀가 가볍게 주의를 줬다.
“형님, 안 말리십니까?”
크리세토스 황자가 옆에서 같이 지켜보던 알리스 황자에게 물었다.
“그래도 외숙부인데.”
“…….”
“하긴, 소아 성도착증인 외숙부는 좀 창피하지요?”
알리스 황자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돌려 자리에서 벗어났다. 돌아서는 그의 표정은 차마 저 광경을 보기도 싫단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진짜 간만에 속이 후련하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다시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사태가 조금 진정되었는지, 바리아는 손을 털며 뒤돌아섰다. 그 옆을 레오니에와 펠리오가 함께 따라갔다.
복도에 남은 레무스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보레오티가 가 버린 곳으로 침을 뱉었다. 참 지지리도 못난 짓이었다.
“아무래도 말이야…….”
크리세토스 황자가 스칸을 가까이 불렀다.
“우리가 엄청난 일에 관련된 거 같다.”
“동부 여행 때 있었던 일 말씀이십니까?”
“그런 거 같아.”
보레오티는 정말 엄청나군. 황자가 몸을 작게 떨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거야.”
“괜찮을까요?”
스칸디아 황녀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바리아의 옆에 꼭 붙어 있는 레오니에만을 향하고 있었다.
“넌 네 걱정이나 해.”
황자가 동생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너한테도 곧 일이 생길 거잖아.”
* * *
“정말 미안해, 너무 미안해…….”
저택에 돌아온 바리아는 레오니에를 껴안으며 하염없이 사과했다.
“아깐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혹시 나 때문에 뭐 망친 거 없지? 나, 말실수라도 했어?”
“아니야, 엄마.”
레오니에가 걱정하는 바리아를 위로했다.
“엄마, 아까 엄청 멋졌어!”
“훌륭했습니다.”
펠리오 역시 바리아를 위로했다. 심지어 그는 너무도 아름다웠다며 바리아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맞췄다. 쪽쪽, 입술이 찍는 야릇한 도장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저기, 나 있거든?”
레오니에가 서둘러 부모님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여튼 눈만 마주치면 운동하려는 부모님 때문에 애늙은이 딸만 고생이었다. 아이의 한숨은 무척 짙었다.
“아깐 정말 근사했습니다.”
덕분에 속이 후련했다며, 펠리오가 싱긋 웃었다. 그제야 바리아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뒤늦게 풀린 긴장 탓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런데 진짜 자신감이 넘치더라.”
레오니에가 황궁에서 보았던 올로르 부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기다 제국의 이름 아래 명예를 걸다니.”
“죽고 싶은가 보지, 뭐.”
펠리오는 이를 신박한 자살 방법이라고 명명했다.
“나 그거 배우기만 배웠지, 진짜로 하는 건 처음 봐.”
레오니에가 수업 때 배운 내용을 떠올렸다.
일명 ‘명예의 의식’.
귀족은 황제 앞에 자신의 모든 명예를 걸고, 모든 귀족 앞에서 자신이 진실이라 주장하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황제는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는 증인이 된다.
이것이 마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열렬히 기도하는 것과 닮았다고 하여 ‘명예의 의식’이라 불렸다.
만약 귀족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그는 더욱 드높은 명예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죽느니만 못한 꼴이 돼.”
겨우 진정한 바리아가 말했다.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귀족은 다시는 귀족 사회에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으음…….”
레오니에가 상상했다.
귀족 사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건, 다시는 이전처럼 살 수 없단 뜻이었다.
레오니에는 그 급격한 변화가 얼마나 충격으로 다가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그렇게 살았으니까.
‘……아니야.’
어쩌면 자신이 견디었던 고아원 생활보다 훨씬 심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무섭지?”
펠리오가 상상하느라 눈썹 사이를 찌푸린 딸에게 말했다.
“그래서 보통 귀족은 잘 안 해.”
“차라리 돈이 많이 들어도 재판을 선택하는 귀족들도 많아.”
바리아도 동의하며 최근의 추세를 말했다.
“나 같아도 그럴 거야.”
부모님 말씀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 부담이 너무 높았다.
“근데 엄마.”
레오니에가 바리에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응? 뭐가?”
“아까, 엄마 동생…….”
레오니에는 아까 황궁에서 바리아가 로타에 대해 물어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가슴 속에 연민이 조금 남은 듯했다.
펠리오도 같은 생각인지, 바리아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바리아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마님.”
그때, 하녀 한 명이 바리아를 찾았다.
“마님을 뵙고 싶단 분이 오셨습니다.”
“엄마를?”
누구냐고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 동생이란 분이…….”
하녀의 말에 바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만나겠습니까?”
펠리오가 물었다. 레오니에도 바리아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자리를 만들어 줄래?”
바리아가 하녀에게 부탁했다.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레오, 호랑이는 서부다.”
펠리오가 잘못을 정정해 줬다.
“아빠, 방금 건 비유야.”
“아까 것은 비유가 너무 틀렸어.”
“아아, 잔소리!”
맹수 부녀가 또 쓸데없는 말로 티격태격하자, 바리아가 킥킥 웃었다.
“하여튼 두 사람은 진지할 틈을 안 줘.”
“욕입니까?”
“욕이야?”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당연히 칭찬이죠!”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엄마 맹수가 두 사람의 볼에 입술을 쪽쪽 맞춰 줬다.
레오니에는 헤벌쭉 웃었고, 펠리오는 입술에 해 주지 않은 것이 불만인 듯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철 좀 들어라…….”
사랑에 빠지더니 아주 그냥 개가 되었구먼.
레오니에가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아빠의 모습에서 축 처진 강아지 귀와 힘없이 떨어진 꼬리가 보였다. 조금 끔찍했다.
“다녀올게요.”
하지만 바리아가 떠나기 전에, 자리에 앉은 펠리오를 제 가슴에 꼭 껴안아 주니 귀와 꼬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더 끔찍해졌다.
“……나, 지금이라면 세계 정복도 할 수 있어.”
아기 맹수는 독립심과 자립심이 불끈 솟아났다.
바리아는 곧장 로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갔다. 그곳에는 긴장한 채 조용히 앉아 있는 로타가 있었다.
바리아는 그 모습이 상당히 신기했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아름답던 동생이 저렇게 기가 죽어 있다니.
‘여기가 보레오티 저택이라서?’
그 이유를 대충 예상해 본 바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겨우 그 때문만은 아닐 거다.
바리아는 로타를 잘 알았다. 저 아이라면 오히려 보레오티 저택에서 손님 대접을 받는 순간을 무척 당당하게 여겼을 거다.
그도 아니면 보레오티와 결혼한 언니를 질투하거나.
“로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바리아가 이름을 불렀다. 입구를 등진 채 앉아 있던 로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본 여동생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바리아의 눈엔 이전과 다른 점이 확연하게 보였다. 전과 달리 생기가 없었다.
바리아는 처음으로 로타에게 연민을 느꼈다.
“약속도 없이 왔구나.”
그러나 ‘괜찮니?’라는 다정한 걱정의 말은 하지 않고, 말도 없이 저택에 찾아온 무례부터 지적했다. 연민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동생이 언니 좀 보러 올 수도 있는 거 아냐?”
울컥한 로타가 따지듯 받아쳤다. 자신의 무례를 지적당한 것이 창피했다.
“우린 가족이잖아.”
“그럼 더욱 지킬 건 지켜야지.”
정작 건너 자리에 앉은 바리아는 그런 로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로타는 제게 매정하게 구는 바리아에게 상처 입은 표정을 보여 줬다.
“왜 이렇게 차가워?”
마치 자신은 선의의 피해자인 것처럼,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로타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내가, 그렇게 미워?”
로타가 눈물로 먹먹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
바리아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로타, 넌.”
그리곤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뻔뻔하고.”
기가 막혀 튀어나온 웃음은 모래보다도 메말랐다.
“이기적이고.”
쏟아지는 냉혹한 말은 로타의 안쓰러운 표정을 무참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바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오로지 너만 생각하지.”
“무, 무슨 말을 그렇게……!”
“내가 열네 살 때.”
소리치려던 로타의 말을, 바리아가 빠르게 끼어들어 끊었다.
“네가 날 호수에 빠트렸을 때.”
첫 번째 삶에서 겪은 죽음이 가져와 준 두 번째 기회. 그 순간을 떠올린 바리아의 시선은 날카로워졌다.
“넌 내가 고열로 잠들어 있었을 때, 그 모든 일이 실수와 사고라고 말했지?”
“당연히 실수였어!”
“실수가 아니라 고의였지.”
네가 날 빠트렸으니까. 바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죽음을 대가로 다시 돌아온 바리아는 많은 것을 얻고 배웠다.
저만을 믿고 사랑해 주는 소중한 가족,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집.
그리고 호수에 빠졌던 당시의 진실도 그중 하나였다.
“네가 날 밀었잖아.”
첫 번째 삶에선 사고라고 여겼다. 어렸던 바리아는 로타가 저를 잡으려고 등을 만졌다고 생각했다. 열이 떨어진 후엔 놀랐을 동생에게 도리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두 번째 삶에서 확실히 알았다.
“그깟 머리 장식 하나 주지 않았다고.”
로타는 있는 힘껏 등을 밀었다. 호수에 빠졌던 바리아는 첫 번째 삶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확실히 보았다.
저를 밀칠 때, 호수에 비치던 로타의 미소를.
“넌 날 죽이려고 했어.”
“그건 사고였어!”
“사고?”
“그래! 어린애가 뭘 알고 그런다고!”
“네가 보통 아이는 아니잖아.”
저와 언니의 차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그걸 이용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많은 것을 얻어낸 아이는 ‘보통’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래, 참 바보 같았어.”
바리아가 의자에 기댄 채 한숨을 흘렸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섬뜩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 바리아는 로타의 인형을 망가트린 적이 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빠득, 소리가 났었다. 내려다보니 의자 아래에 인형이 깔려 있었다. 그건 로타가 무척 아끼는 인형이었다.
부모님은 동생의 물건을 부서트렸다고 무척 혼을 냈고, 로타는 엉엉 울면서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왜 그 인형이 자신의 방에 있었는지를 의심했어야 했다.
꼭 자신이 바쁠 때만, 로타는 저랑 놀아달라고 불렀고. 아니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물건을 빌려 가선 잃어버리거나 실수로 망가트렸다.
드물게 로타가 부모님께 혼날 때면 항상 엉엉 울며 누군가를 탓했다.
‘언니가 나랑 안 놀아 주잖아!’
‘언니가 안 빌려줬어!’
‘그치만 언니가……!’
유치하다면 유치하고.
순수하다면 순수한.
그러나 너무도 사악한.
“내 동생.”
그제야 어린 시절 속 끔찍했던 동생의 악의를 직면한 바리아가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시선을 마주친 로타가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언니의 시선에 섬찟한 두려움을 느꼈다.
“너는 날.”
바리아가 천천히 말했다.
“죽이려 했어.”
호수에 빠트렸을 때도. 레무스가 날 죽이려 했을 때도. 로타는 바리아를 두 번이나 죽였다.
“그런 너도 동생이라고…….”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그러니 분명 말이 통할 거라고 믿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바리아는 피곤했다. 딱히 긴 대화를 주고받지도 않았음에도 벌써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어서 빨리 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고 싶었다.
“용건이 뭐야.”
바리아가 물었다.
“일단 왔으니까, 들어는 줄게.”
“…….”
“만약 되지도 않는 말을 할 거면 그냥 나가…….”
“도, 도와줘!”
로타가 소리쳤다.
“제발 나 좀 도와줘……!”
테이블에 거의 쓰러질 듯이 몸을 숙인 로타가 파들파들 떨며 부탁했다.
“남편이, 레무스가…….”
로타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막상 부탁을 말하려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타의 얄팍한 자존심은 이 순간까지도 바리아에게 굽히기 싫어 버티는 중이었다.
기어코 로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억울하고 서글픈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보레오티 영애가, 자기 딸이래……!”
“그래, 나도 막 들었어.”
“내가 본 팔찌가 그 증거래!”
로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차마 그 끔찍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 저 때문이란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랬더니 나보고 뭐라는지 알아?”
그날, 다과회에서 본 것을 말하기 무섭게 레무스는 다시 저택을 나갔다. 그리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로타는 며칠 만에 돌아온 레무스에게 격정적인 입맞춤을 받았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로타 네 덕에 딸을 찾았어!’
친딸이라니.
심지어 내 덕이라니.
그러고선 지난날 자신이 안타까이 헤어졌던 연인과 그 연인이 낳은 딸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레무스는 드디어 희망을 발견했다며 기뻐했다. 정작 그의 눈엔 큰 충격을 받은 로타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로타는 절망했다.
“나는 싫어! 너무 싫어!”
로타는 지금 제게 펼쳐진 상황이 너무도 끔찍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인가? 로타는 저를 칭찬하고 안아 주는 레무스의 품에서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럴수록 점점 괴로워졌다.
이건 아니었다.
남편의 입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했단 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보레오티 영애란 말도. 존재조차 몰랐던 딸을 덕분에 찾을 수 있었다며 기뻐하는 것도.
“……그걸 왜 그 애가 가져가!”
악에 받친 외침에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너 임신했어?”
“아직은 아니야!”
그러나 반드시 할 거라며, 로타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바리아를 노려봤다.
“레무스의 아이는 내가 낳을 아이밖에 없어!”
언젠가는 생길 아이. 아이를 가지란 재촉이 짜증스러웠던 로타는 어느 때보다 임신이 간절했다.
어느새 배에 손까지 올린 로타는 기필코 올로르의 씨를 품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바리아가 경악했다.
“너 제정신이야?”
그리고 진심으로 타일렀다.
“그걸 직접 보고 들었으면서도 그 자식의 아이를 가지겠다고 말하는 거야?”
크게 충격받은 바리아는 믿을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저었다.
“레무스 그 새낀 미성년자만 건드리는 말종이란 말이야! 너도 그 피해자란 걸 왜 몰라! 제발 정신 차리고 이혼…….”
“언니가 뭘 안다고 말해!”
그러나 바리아의 진심 어린 충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언니는 몰라! 그 사람이 얼마나 다정하고 멋진데!”
초점이 어긋난 로타의 초록색 눈동자는 바리아가 기억하는 것과 달랐다. 아름답고 찬란했던 눈빛은 전부 암전되었다. 바리아는 절망이라는 건 바로 저 눈 같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차피 결혼 전 일이잖아!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어!”
“레무스는 그 상대가 미성년자였을 때 건드렸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놈이야.”
“그게 뭐가 어쨌다고.”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유혹했을 텐데.
로타의 한마디에, 바리아는 땅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우욱.”
동시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린 바리아는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니까 언니가 나 좀 도와줘.”
로타가 다시 부탁했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바리아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부디 그 부탁이 자신이 예상하는 끔찍한 바가 아니길 바랐다. 그럼 정말 뭐든 해 줄 수 있었다.
레무스와 살기 싫다고, 이혼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아무리 싫고 미운 동생이어도, 그래도 동생이니까 도와줄 수 있었다.
“제발 친자 검사 못 하게 해 줘. 언니는 이제 보레오티잖아, 할 수 있잖아!”
하지만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레무스도 몰랐댔어. 그 사람은 정말 몰랐던 거야!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레무스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여야 했다.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절대 키우고 싶지 않았다. 설령 보레오티의 피가 섞였다고 해도, 로타는 그 아이를 제 밑에 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조금만 일찍 가졌으면 되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어쩔 수 없대.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임신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않으냐며 허둥지둥 변명하는 로타의 얼굴엔 형용할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궁지에 몰려 떨어지기 직전의 절박함과 비슷했다.
“레무스는 날 사랑한다고 했어. 그 사람만이 날 사랑해……!”
쾅!
둔탁한 굉음이 두 자매 사이를 찔렀다.
“……이제.”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친 바리아가 힘겹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 줘.”
바리아는 더는 로타를 마주할 수 없었다.
용기 내 보레오티 저택에 왔지만, 로타는 결국 도움을 받지 못했다. 돌아가는 내내 바리아를 원망하고, 그러다가 다시 도와달라고 빌었으나 소용없었다.
그리고 바리아는 도망이라도 치듯이 침대에 누웠다. 동시에 급격한 피로가 전신을 덮쳤다. 뒤이어 찾아온 묵직한 근육통과 뜨거운 열이 바리아를 괴롭혔다.
펠리오는 서둘러 의원을 불렀고, 레오니에는 바리아가 잠든 침실 밖만 서성거렸다.
“아빠.”
마침 펠리오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이는 아빠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엄마 괜찮아? 많이 아파?”
“약 먹고 방금 잠들었어.”
그 말에 레오니에가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그 여자 때문이지?”
레오니에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하지만 분노가 잔잔히 깔려 있었다.
“엄마가 아픈 거.”
아기 맹수가 기어코 짜증을 드러냈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며, 한참을 투덜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욕이라도 내뱉었을 테지만, 그나마 바리아의 가족이니까 최대한 참는 중이었다.
“레오.”
그런 딸을 지켜보던 펠리오가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조금 전에 바리아에게서 들었던, 로타가 했던 충격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예상대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레오니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충격을 받은 레오니에는 한참 동안 말도 내뱉지 못했다. 하염없이 무어라 입술을 뻐끔거리다 말고, 기가 막힌 듯 한숨만 푹푹 흘릴 뿐이었다.
“미친 새끼!”
그러다 기어코 욕을 뱉었다. 이번만큼은 펠리오도 이에 동의하며 아이의 욕을 못 들은 척했다.
“어떻게, 뭐, 아니, 알고야 있었지!”
레오니에는 똑똑히 기억했다.
6년 전 연회에서, 올로르와 에르바누 두 가문의 약혼 이야기가 한창 화제였고, 당시 약혼자들의 나이 차이도 덩달아 입에 올랐다. 그때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역겨워했던가.
‘그런데 설마…….’
설마 거기서 더 끔찍한 모습이 드러날 줄이야. 레오니에가 팔을 쓸었다. 처음 느껴보는 잔혹한 인간성에 두려움이 몰아닥쳤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의 머리에서 섬뜩한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내 친모도……!”
“그래.”
떨떠름한 목소리로 수긍하는 펠리오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식으로 당했겠지.”
레지나는 보레오티답지 않게 순진한 사람이었다. 카라마저 머리에 꽃이 가득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레무스에겐 아주 쉬운 먹잇감이었을 터다.
“교묘하게 사람 마음을 건드려서…….”
굳이 어떻게 건드렸는지 궁리하지 않아도 뻔히 나왔다.
‘도망친 널 가족이 용서할까?’
‘네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야.’
‘그런데 그걸 못 참아?’
‘널 사랑하는 건 나뿐이야.’
레지나의 죽음은 확인되었지만, 그 과정이 어떠한지는 여전히 미궁이었다. 그런데 약속도 없이 찾아온 로타의 등장으로 그 실마리가 나타났다.
“역겨운 새끼!”
레오니에가 또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었다. 펠리오도 동의했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열할 수 있는지, 레무스 올로르가 직접 보여 줬으니.
‘드디어 조금씩 드러나는군.’
물론 펠리오도 이딴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하아.”
펠리오가 또 한숨을 흘렸다. 그는 다시금 후회에 빠졌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레지나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부질없는 ‘만약’이란 걸 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안다. 그런데도 후회를 쉬이 떨칠 수 없었다.
바리아도 이와 같은 이유로 괴로워한다면, 펠리오는 이를 위로할 수 없었다. 저 또한 그런 후회를 느끼는데, 당장 레무스가 채운 족쇄를 차고 있는 로타를 바라본 바리아의 심정은 어떠할까.
레무스 올로르는 그렇게 여러 사람을 시궁창에 넣어 버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아빠의 힘든 표정을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소리쳤다.
“뭘 또 나쁜 짓 한 사람 같은 얼굴이야!”
레오니에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펠리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빠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
“…….”
“잘못은 그 빌어먹을 새끼가 했는데, 뭘 또 죄책감에 빠지고 난리야!”
상체를 고꾸라트릴 정도로 크게 소리 지른 레오니에가 기어코 바리아가 누운 침실로 향했다.
말도 없이 벌컥 문을 여니, 마침 침대에 기댄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바리아가 있었다. 그 모습에 레오니에는 더 화가 났다.
“이 바보 엄마!”
“……어?”
느닷없는 비난에 바리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레, 레오? 갑자기 왜…….”
“엄마 잘못 아니야!”
그런데 그때 뭘 못 도와줬다고 우울해하는 거냐고, 레오니에가 따져 물었다. 당연히 바리아는 거기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도 마찬가지야!”
레오니에가 저를 따라온 펠리오를 노려봤다.
“그때 아빠가 뭘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솔직히 말해? 엄마나 아빠나, 둘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아무것도 못해.”
왠지 알아? 레오니에가 자신이 내뱉은 물음에 곧장 답을 꺼냈다.
“둘 다 자기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잖아!”
아이의 냉정한 평가에 두 어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레오니에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펠리오는 부모의 사랑을 레지나에게 거의 빼앗기다시피 했다. 그것이 고의였든 아니든, 어린 펠리오는 분명 그 속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
바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가족들에게 완전히 버려졌고, 무수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외면당한 채 살해당했다.
“누굴 챙길 여력도 없었는데, 뭘 못 도와줘서 그리 후회해!”
둘이 그렇게 잘났어?
그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둘 다 좀 잘났어!”
이번에도 레오니에가 자문자답했다.
“예쁘고 능력 좋으니까.”
펠리오와 바리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한테 변명할 여지도 없이 혼나던 중에 느닷없이 칭찬을 받아 버렸다.
“하지만 그때 둘도 보살핌을 받아야 했어. 아니, 솔직히, 내가 볼 땐 오히려 아빠랑 엄마도 그 두 사람 때문에 힘들었잖아. 그건 생각 안 해?”
레오니에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중요한 건 제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을 챙길 필요는 없었다.
레지나는 이미 죽었다.
로타는 도움을 뿌리쳤다.
그렇다면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바리아가 그들에게 더는 안쓰러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 부모님은 그들에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레오니에도 레지나가 불쌍했다. 마음속엔 항상 그녀를 향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리고 레무스에게 세뇌당한 것을 깨우치지 못한 로타도 조금이지만 안쓰러웠다.
‘하지만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레오니에가 느낀 연민은 딱 거기까지였다.
“두 사람 힘들 때,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도와줬어?”
오히려 미안해하고 후회해야 하는 건 당시 보호자였던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벌을 받아야 하는 놈은 따로 있었다.
“잘못은 그 새끼가 했어.”
레오니에가 확실히 말했다. 확고한 아이의 모습에 두 부모의 눈이 잘게 떨렸다.
“만약 정말 그 두 사람한테 연민을 느끼는 거면, 그 새끼 족치는 것만 생각해.”
그것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절대 그 복수가 누군가를 위한 속죄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동정은 동정으로 끝나길 바랐다. 왜냐하면 레오니에에게 중요한 건 결국 펠리오와 바리아였으니까. 부모님이 괜한 죄책감에 휩쓸리지 않기 바랐다.
레오니에는 한참을 더 씩씩거린 뒤에야 방으로 돌아갔다.
‘또 그러면 올로르에 갈 거야!’
‘가서 뭐할 거냐고? 다 죽일 거야!’
‘자식새끼 살인자 소리 듣게 할 거면 또 그래 봐!’
‘그리고 나 졸리니까 잘 거야!’
‘어쨌건 좋은 꿈 꿔!’
화는 났지만 잠은 왔기에, 레오니에는 씩씩거리면서도 펠리오와 바리아의 볼에 잘 자란 인사의 뽀뽀를 쪽쪽 했다. 문도 사뿐히 닫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서 들리는 아이의 걸음 소리는 쿵쿵, 크게 울렸다.
딸아이의 격정 어린 순간을 겪은 부모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 같았다.
하나 덕분에 두 사람의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레오가 우리보다 낫네요.”
먼저 말을 꺼낸 건 바리아였다.
“리오, 그렇죠?”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군요.”
펠리오도 순순히 동의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습니까?”
“아까 한소리 듣고 나니 이상하게 가뿐해졌어요.”
“그럴 리가.”
“정말로요. 머리가 개운해졌어요.”
신기하게도, 바리아는 레오니에에게 혼난 뒤에 근육통이 사라졌다.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복잡한 생각들도 말끔히 정리되었다.
“아까 동생을 봤을 때…….”
바리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놀랐어요.”
“그랬습니까?”
펠리오가 바리아 옆에 앉았다. 그리곤 큰 팔로 슬쩍 끌어안아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바리아는 선뜻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표정은 한결 편해졌지만, 동생을 떠올리는 초록색 눈동자엔 그늘이 살짝 졌다.
“내가 아는 로타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이용당할 아이가 아니거든요.”
“도와주고 싶습니까?”
펠리오가 물었다. 바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레오니에의 말이 맞았다. 연민이 용서가 아니듯, 연민이 죄책감으로 변질되어서도 안 됐다. 바리아는 그걸 알았으면서도 순간 실수할 뻔했다.
“전 손을 내밀었어요. 하지만 로타는 그걸 뿌리쳤죠.”
그렇다면 이제 바리아가 할 일은 없었다. 자신이 로타를 도와주기엔, 저 역시 로타에게 당한 게 많은 피해자였다.
게다가 가장 큰 잘못은 레무스에게 있었다. 그리고 차악은 그런 레무스에게 딸을 보낸 제 부모님이었다.
“……생각해 보니 오싹하군요.”
펠리오가 말했다.
“자칫했다간 당신이 그렇게 될 수 있었으니까요.”
“레무스 올로르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동감입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못된 걸까요?”
바리아가 물었다.
“그래도 동생인데…….”
“내가 그대였으면 그런 동생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펠리오가 혀를 가볍게 찼다. 그는 바리아가 너무 무르다고 생각했다.
“저기, 혹시 펠리오, 당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나요?”
바리아가 물었다. 펠리오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의 끝은 항상 레오입니다.”
“레오, 요?”
“우리 효녀는 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화를 냈지만,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자신이 조금만 더 레지나에게 신경을 썼다면, 레지나가 사라졌을 때 조금 더 찾아봤다면, 그 노력을 만년필 쥐는 힘만큼이라도 가끔 쏟아부었다면.
그랬다면 레오니에가 그 빌어먹을 고아원에서 겪었던 나날이 줄어들었을 텐데.
“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레오를 입양했죠.”
펠리오가 처음으로 레오니에를 입양할 당시를 입에 담았다.
“친구 놈의 이야기에 뭔가 홀려서, 그냥 적당히 괜찮은 게 보이면 데려가서 한번 키워 보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아주 무책임했다. 하지만 이를 말하는 펠리오는 꼭 고해 성사하는 것처럼 진지했다. 바리아는 그의 말에 계속해서 집중했다.
“카라가 그러더군요. 나보고 애완동물을 들였냐고요.”
말 그대로 가지고 놀 동물을 데려온 것 같다고 크게 나무랐었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았어요.”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진짜 가족이에요. 내가 옆에서 봤어요.”
“그렇기에 그때의 내가 멍청하고 후회스럽단 말입니다.”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에게, 나는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가.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펠리오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도망은 결국 레지나 본인이 선택했고, 그녀가 그렇게 움직이도록 교묘히 유도한 건 레무스였다.
하지만 그 피해는 온전히 어린 레오니에가 감당해야 했다. 메말랐던 몸에 선명히 남아 있던 학대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도 없지만, 펠리오의 머리와 가슴엔 잔인하게 각인되었다.
“내가 레지나를 조금 더 챙겼다면, 조금 더 찾았다면, 포기하지 않았다면.”
레오니에는 그 지옥에서 덜 버티었을 텐데.
“……그건 죄책감이 아니에요.”
바리아가 펠리오의 손을 꼭 쥐었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죠.”
그 당연하고 아름다운 것을, 바리아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신도 그걸 죄책감으로 혼동하지 말아요.”
“레오가 화를 낸 이유가 이건가 봅니다.”
펠리오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부모란 사람들이 이런 멍청한 착각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레오는 정말 똑똑하고 착한 거 같아요.”
“말하면 입 아프죠.”
보레오티 부부는 그날 밤을 내내 자식 자랑으로 불태웠다.
* * *
최근 제국에 엄청난 화제가 터졌다.
“올로르 영식이 명예의 의식을 치른다네요.”
“설마 그 소문 말이에요?”
“말도 안 돼! 거짓말 아니었어요?”
사람들의 입엔 매일 같이 보레오티와 올로르가 오르내렸다. 그들은 올로르 영식의 말이 정말일지, 그럼 보레오티 부녀는 어떤 사이인지 끊임없이 떠들고 멋대로 추리했다.
반응은 딱 절반으로 나뉘었다.
“진짜 딸인가 봐요.”
“그러지 않고서야 올로르가 저렇게 나가겠어요?”
“명예의 의식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잃는 게 얼마나 많은데.”
올로르 영식의 주장을 믿는 쪽과.
“……아니, 그래도 닮기는 보레오티 공작을 더 닮았잖아요.”
“난 두 부녀를 직접 본 적 있어요. 판으로 찍은 것처럼 닮았다니까요?”
“애초에 공작이 아이를 입양하려고 고아원을 돌아다니며 찾는 고생을 할 리가 없잖아요.”
보레오티 공작이 친부라는 쪽.
그러나 어느 쪽이건 양자 모두 한목소리로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다.
“그럼 친모는 누구지?”
바로 보레오티 영애를 진짜로 낳은 사람이었다.
“올로르 영식 말로는 보레오티 사람이라는데.”
올로르 영식이 주장하던 이야기를 그대로 말하던 누군가가 그 이름을 꺼냈다.
“이름이 레지나였어.”
“공작의 사촌 누이라죠?”
“그러면 아마…….”
어느 나이 많은 귀족이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우르마리티 백작의 딸이로군.”
선대 보레오티 공작의 누이가 우르마리티 백작과 결혼했단 이야기는 당시에 무척 유명했었다. 사이가 좋았던 부부였는데, 부인이 일찍 죽어 크게 상심했단 슬픈 이야기도 뒤따랐다.
그러나 이렇게 추측이 무성함에도, ‘레지나 보레오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세간에 도는 그녀의 정보는 전부 올로르 영식이 주장하는 것뿐이었다.
“믿을 만한지 잘 모르겠군요.”
카페르 남작 영애가 말했다. 그녀는 최근의 시끄러운 소란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 소란을 주동한 올로르 가문을 대놓고 싫어했다.
어느 날은 또래 영애들과 모인 다과회에서 대놓고 올로르를 향한 불신을 드러냈다.
“정말 사랑했다면,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저렇게 떠벌리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 사랑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잖아요.”
어느 또래 귀족 소녀는 은근슬쩍 올로르 영식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이 아가씨는 올로르 영식의 순애보에 감동까지 했다.
“글쎄요…….”
하나 카페르 남작 영애는 회의적인 미소였다.
“난 차라리 입을 다문 보레오티와 우르마리티가 현명한 것 같은데.”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흥밋거리로 전락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보레오티와 우르마리티는 입을 다물어 레지나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막았다.
반면 올로르 영식은 시도 때도 없이 떠벌렸다. 심지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레지나란 사람은 무려 미성년자였다. 올로르 영식은 자신들의 사랑이 순수하고 무구하다고 말했다.
“미성년자를 건드렸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유부남이라니.”
카페르 남작 영애가 헛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역겹기도 하죠.”
그 말에 다과회에 참석한 귀족 영애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이토록 다양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
레오니에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명예의 의식을 준비했다.
아기 맹수는 진지했다.
“……뭘 입어야 하지?”
그날 입고 갈 옷을 고르느라.
“오랜만에 수많은 귀족 앞에 서는데, 꿀릴 순 없지.”
“물론이죠!”
“옳으신 말씀입니다!”
함께 고민하던 코니와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
레오니에가 묻자, 코니와 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옷방에 가서 여러 옷가지를 가져 왔다.
가장 먼저 코니가 말했다.
“당당하게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전 이 검은 계통의 바지와 흰 블라우스, 그리고 새하얀 망토를 추천합니다!”
화려하게 세공한 보석을 망토에 잔뜩 달아 휘황찬란하게 보이는 것도 좋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얌전한 모습을 딱 보여서, 그걸로 도리어 사람들이 올로르를 비난하게 하는 건 어떨까요?”
역으로 후려치자고 주장하는 미아가 내민 옷은 다소 차분한 회색 계열의 원피스였다.
망토는 검은색, 장신구는 아주 조그만 모자 모양 머리 장식과 은 브로치였다.
“둘 다 너무 좋은데?”
레오니에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이 제안한 옷이 다 괜찮았다. 쉽게 고르지 못하는 레오니에의 한쪽 다리가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피의 축제가 열릴지도 모르니, 미아가 고른 걸 입을까?”
검은 건 피가 묻어도 티가 잘 안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사람들한테 만만하게 보이는 건 싫고.”
레오니에가 흔들렸다. 이번엔 코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셋이 어떤 옷을 입을지 진지하게 의논했다. 그러다 차라리 사슬 갑옷을 입고 피의 축제를 벌이자는 의견까지 나왔는데, 마침 트라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레오니에를 찾았다.
“아가씨, 오늘도 왔습니다.”
트라가 전한 사실은, 요즘 들어 매일 보레오티 저택 대문 앞에 방문하는 레무스 올로르에 대한 것이었다. 그놈이 오늘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출석 도장을 찍으러 왔다고.
“또?”
레오니에가 질색했다.
“미친 새끼가 왜 또 오고 지랄이에요!”
“맞아요! 뜨거운 물을 부어 버려요!”
“그리고 그 살갗에다 채찍질해요!”
“그다음엔 북부 만년설에 나뒹굴게 해요!”
그러나 정작 화를 내는 건 코니와 미아였다.
“코니, 미아……!”
울컥한 아기 맹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보다 더 화를 내주는 두 하녀 언니에게 감동했다.
반면 트라는 조금 전 두 하녀의 잔인한 말투가 아가씨한테서 옮은 것이 아닐까, 하고 덤덤히 추측했다.
“평소처럼 무시할까요?”
“아빠가 뭐래요?”
“실수로 죽이면 어떨까, 라고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엄마는 뭐래요?”
“사고로 위장하면 어떨까, 라고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에이, 평소랑 똑같잖아.”
레오니에가 내 그럴 줄 알았단 듯이 입술을 삐죽삐죽 움직였다. 그러고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화장대 옆에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나 어때 보여?”
거울 속 레오니에가 물었다.
“평소처럼 귀여우시죠.”
“사랑스럽기도 하고요.”
코니와 미아가 즉시 말했다.
“만만해 보여?”
거울 속 레오니에가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딱 시선이 멈춘 곳엔 작년 생일에 바리아에게서 선물 받은 사자 인형들이 있었다.
아빠 사자, 엄마 사자, 아기 사자까지.
“인형까지 드시면, 너무도 사랑스럽고 여린 소녀가 되실 겁니다.”
트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원 산책이나 할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레오니에가 아기 사자 인형을 품에 안았다. 가운데가 쏙 비자 아빠 사자와 엄마 사자가 서로 주둥이를 부딪쳤다.
최근 글라디고 기사단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오늘은 얼마나 버틸까?”
멜레스가 동전 하나를 꺼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기사들도 주섬주섬 동전 하나씩 꺼냈다.
그들의 내기 주제는, 오늘도 뻔뻔하게 찾아와 대문 밖에 홀로 서 있는 레무스 올로르가 얼마나 버틸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30분.”
프로보가 먼저 걸었다.
“그럼 난 40분.”
어제보단 길겠지, 파보가 이어 말했다.
“저 얼굴로 마흔이 넘었다잖아.”
그러니 20분도 힘들 거라며 마누스가 비웃었다.
“그럼 난 좀 있으면 간다는 쪽에 걸어야지.”
멜레스가 주머니를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그건 너무 빠른 거 아냐?”
생뚱맞은 멜레스의 내기에, 파보가 대놓고 비웃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호위대장께서 가련한 부하들에게 술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에 내기를 건 모양이었다.
“뭐래, 이건 이제 내 거야.”
그러나 멜레스는 돈이 든 주머니를 야무지게 허리춤에 넣었다.
“저기 봐.”
그리곤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가씨가 오잖아.”
그곳엔 머리를 반만 묶은 레오니에가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정원을 산책 중이었다.
기사들이 서둘러 태세를 갖추었다. 지금 대문 밖에 레무스 올로르가 있었다. 자신들의 소중한 아가씨를 저 무례한 놈과 만나게 할 수 없었다.
“기다려.”
하나 멜레스는 태세를 풀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지금 레오니에가 일부러 정원에 나와 레무스와 접촉하고 있단 걸 알아챘다.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집무실 창 너머로 펠리오가 보였다. 레오니에를 바라보던 주군의 검은 눈이 기사들을 바라봤다. 그리곤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였다.
레오를 내버려 둬라.
그 뜻을 알아챈 기사들이 그제야 긴장을 반쯤 풀었다. 그러나 여전히 레무스를 응시한 채였다.
“……너,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냐.”
마누스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멜레스에게 물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들이 내기로 건 돈이 모조리 멜레스 손에 들어가게 될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돈 다시 줘! 정당하지 못하잖아!”
프로보가 투덜거렸으나 멜레스는 가소롭단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다, 아가씨의 기척을 즉각 눈치채고 주변을 살핀 나란 기사의 완벽함 때문이야.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얻은 돈이라고.”
“……잘난 척이 왜 그렇게 늘었냐.”
아가씨한테 옮았냐?
파보가 물었다.
하지만 기사 넷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레오니에가 정말로 대문 근처까지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가씨가 오늘 저런 차림이셨나?”
파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마누스가 중얼거렸다.
“아가씨는 저런 따뜻한 색상에 치렁치렁한 치마를 싫어하시거든.”
색감과 의류에 민감한 마누스가 예리한 추리력을 자랑했다.
“너 나중에 은퇴하면 옷집 해라.”
장사가 잘될 거라면서, 파보가 진심으로 조언했다.
* * *
레무스는 꾸준히 보레오티 저택에 들러 레오니에를 보여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보레오티 저택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레무스는 항상 저택에 와서 한참을 서성이다 갔다.
‘이유야 뻔하지.’
레무스는 그저 친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뿐이었다. 이를 통해 동정심을 얻어 자신의 편을 얻으려는 수작이었다. 동시에 보레오티를 진짜 부녀를 생이별시킨 악당으로 만들었다.
“하찮은 새끼.”
레오니에가 기어코 입 밖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소녀는 올려 묶었던 머리를 반 묶음 머리로 고쳐 묶고, 그리 좋아하지 않는 치렁치렁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팔자에도 없는 ‘인형 두 팔로 껴안기’ 자세까지 취했다.
레오니에는 일부러 레지나와 비슷한 분위기로 자신을 꾸몄다.
아니나 다를까, 아련한 시선으로 저택을 바라보던 레무스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이 참으로 선해 보여서, 레오니에는 토악질이 올라왔다.
세상은 참 불공평했다. 어째서 저런 쓰레기들에게 저리 참하고 선한 얼굴을 주었단 말인가.
정작 레오니에가 가장 사랑하는 아빠 펠리오는 세상 흉악한 인상으로 애들을 다 울리는데.
‘그러니 이젠.’
공평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레오니에가 먼저 말했다.
“오늘도 왔네요?”
“……아, 아! 그, 그래……!”
말을 걸어 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레무스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대문 너머 레오니에를 한참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온 거예요?”
정작 레오니에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거야, 나는 네 아빠니까.”
하나뿐인 딸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레무스가 퍽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레오니에가 불쾌하단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참자……!’
가까스로 인내한 레오니에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정말 오랜만에 맹수의 송곳니가 폭주할 뻔했다. 그래도 될 법했지만, 아기 맹수는 꾹 참았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레무스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레오니에는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꼼꼼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정말, 내 아빠예요?”
그 질문에 레무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흔들리고 있구나.’
레무스는 저 아이가 친부의 존재 때문에 혼란스러워한다고 판단했다.
황궁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건방지기 짝이 없던 것이 이젠 인기척을 피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자신이 친부란 사실을 부정하고 싶단 뜻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보러 왔다.
레무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네가 지닌 그 백조 목걸이가 증거야.”
그는 자신이 진짜 아빠란 사실에 점점 확신이 생겼다.
“이건 고모님의 유품이에요.”
“그건 나와 레지나가 서로 사랑했단 증거란다.”
사실은 북부에 몰래 잠입했을 때 잃어버린 것이었다. 레무스는 목걸이가 없어진 걸 수도로 돌아온 뒤에야 알아챘다. 아무래도 그 목걸이를 레지나가 몰래 지녔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괘씸하다가도, 그 덕에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하나 레오니에는 여전히 경계 어린 시선으로 레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몸에 힘을 준 탓에 두 팔로 안은 아기 사자 인형에 주름이 잡혔다.
“어릴 적 이야기를 잠깐 해 주렴. 레지나와 어떻게 지냈니?”
“난 어릴 적 기억이 없어요.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고아원에서 지냈던 기억이에요.”
“고아원?”
“코니에 선생님이 날 돌봐줬죠.”
“코니에가 누구지?”
“고아원 선생님인데, 절 지켜 줬어요. 갈색 머리에, 인상이…….”
레오니에가 코니에의 인상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러자 레무스의 표정이 비틀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의 얼굴 근육은 파리의 날갯짓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레무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비통한 사내가 되었다.
“……그랬군.”
작게 중얼거린 레무스는 뭔가를 알아낸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오, 우린 속은 거야.”
“속다니요?”
“코니에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야.”
레무스가 자신이 아는 것을 말했다.
“그 여자가 레지나를 죽였어.”
“…….”
“코니에란 이름도 가짜야.”
진짜 이름은 ‘사우라’이며,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더러운 여자였다고 한다.
“그래도 난 사우라를 믿었어. 내가 어쩔 수 없이 레지나 곁을 떠나야 했을 때도, 그녀의 곁에 사우라를 남겨 뒀지. 사우라는 날 좋아했거든.”
한데 이런 식으로 배신할 줄 몰랐다고 말하는 레무스의 목소리는 한층 격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진심으로 사우라에게 배신당한 사실에 분노하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죽였다는 거죠?”
하나 레오니에는 쉬이 믿지 않았다.
“고모님도 맹수의 송곳니를 지녔다고 했어요.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는 아주 강해요. 쉽게 죽지 않아요.”
“그래도 죽을 순 있어.”
그렇게 대답하는 레무스의 붉은 눈에 기묘한 무언가가 스쳤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웃었다. 레오니에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섬뜩한 불쾌감이 오싹했다.
하나 동시에 환호했다.
‘저 새끼……!’
레무스가 드디어 꼬리를 드러냈다. 그것도 보통 꼬리가 아니었다.
“맹수의 송곳니는 아주 강한 힘이지. 하지만 그 힘을 지닌 보레오티는 결국 사람이란다. 다른 사람들보단 힘들어도 죽이는 게 불가능하진 않아.”
레무스가 드러낸 꼬리는 아주 컸다. 얼마나 컸냐면, 다른 사냥감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탐스럽고 훌륭한 크기였다.
레오니에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만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웃는 걸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서둘러 입 안 살을 깨물었다.
“아마 독을 썼을 거야.”
하지만 레무스의 말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웃음은 절로 사그라졌다.
“보레오티가 독으로 죽는다고요?”
레오니에의 의심은 연기가 아니었다.
원작에 묘사된 맹수의 송곳니는 작가의 편애란 편애는 다 들어간 최강의 이능이었다. 맹수의 송곳니는 그 힘을 지닌 사람의 신체까지 강하게 만들었다.
펠리오 역시 송곳니 훈련을 시킬 적에 이와 비슷한 설명을 여러 번 했었다. 어지간한 상처에 죽지 않고, 어지간한 독에도 죽지 않는다고.
‘그래, 분명 어지간해선…….’
어지간해선 안 죽는데.
분명 그랬는데, 레지나는 사우라에게 살해당했다.
순간, 레오니에의 눈이 요동치듯 떨렸다. 저도 모르게 크게 내뱉을 뻔한 숨을 한 손으로 덥석 막았다. 그 탓에 아기 사자 인형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 죽을 때까지…….’
어지간해선 죽지 않는 사람에게 사우라는 죽을 때까지 살해 시도를 했단 말이야?
“……알아, 충격이지?”
레무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하물며 두 사람 사이엔 아주 굵은 쇠로 만든 대문이 떡하니 있는데도, 그 너머에 있는 레무스의 목소리가 레오니에의 귀에 선명히 닿았다.
“맹수의 송곳니가 눈에 띄게 약해질 때가 있지.”
레무스가 비밀을 속삭였다.
“바로 임신했을 때야.”
“임신?”
레오니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배 속의 아기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 여자는 그 기간 동안 힘을 반쯤 잃어버려.”
“…….”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게 뭔지 알아? 보레오티 남자도, 자신의 아내가 임신하면 덩달아 그 힘이 약해진다는 거야.”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레오니에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레무스를 앞에 둘 때부터 예민하게 꿈틀거리던 맹수의 송곳니가 반응했다.
저 말은 진짜였다.
생각지도 못한 약점을 알게 된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직 임신은 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 와중에 레무스는 새로운 정보를 얻어 냈다.
만약 바리아가 임신을 했다면, 레오니에는 훨씬 차분한 반응을 드러냈을 거다. 하지만 아이는 처음 들어보는 사실에 눈에 띄게 충격을 받았다.
“난 많은 걸 알고 있단다.”
“…….”
“레지나는 날 사랑했고, 그랬기에 믿고 말해 준 거야.”
“…….”
“레오, 이 아빠를 믿어 주겠니?”
레무스가 철장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그 손을 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레무스가 퍽 당황했다. 레오니에는 그런 레무스를 보며 말했다.
“역시 울 엄마는 착해.”
저딴 놈에게 엿을 두 개나 주다니.
뒷말을 중얼거린 레오니에는 떨어진 인형을 챙겨 저택으로 들어갔다. 레무스는 그런 레오니에를 보며 어쩔 수 없단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절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겠어.”
아빠한테 버릇없이 구는 꼴이라니. 올로르 가문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레무스는 그제야 보레오티 저택을 떠났다.
마차에 올라선 그의 얼굴엔 곧 있을 명예의 의식에서 제 품에 들어올 이익으로 만들어진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다.
단언컨대, 존재조차 몰랐던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집무실 창문에서 지켜보던 펠리오가 한쪽 입가를 비틀었다.
“지랄도 유분수군.”
“아가씨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옆에서 쌍안경으로 바깥을 지켜보던 루페가 중얼거렸다. 펠리오는 맹수의 송곳니 덕에 창밖이 훤히 보였지만, 일반인인 루페는 쌍안경 없이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레짐작도 할 수 없었다.
“연기가 탁월하십니다.”
“못 하는 게 없지.”
내 딸인데. 펠리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창가엔 조그만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작은 돌이 있었다.
그 돌은 멀리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는 마도구였다. 한 쌍의 돌 중 하나는 레오니에가 입은 헐렁한 원피스 안에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돌을 통해 레오니에와 레무스가 나눈 대화를 전부 들었다.
“그런데 정말 부인께서 엿을 줬습니까?”
“사람이 너무 착해.”
펠리오가 투덜거렸다.
“손가락 엿을 두 개나 줬지.”
“부인…….”
루페가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역시 보레오티란 이름에 무슨 오싹한 힘이 있는 거 같았다.
강단 있는 분이 보레오티가 된 줄 알았는데, 그냥 보레오티가 보레오티를 찾아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공작님, 저 말은 사실인가요?”
“뭐가.”
“그, 임신…….”
조심스러운 루페의 질문에, 펠리오의 얼굴 위로 귀찮은 기색이 선명히 드러났다.
맹수의 송곳니는 오로지 피로써만 이어지는 신비로운 힘이었다. 그런 탓에 오러나 마나보다 덜하나, 이따금 이해가 안 가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 제약들이 있었다.
가령 송곳니의 부작용이 하찮은 약물 부작용과 비슷하다거나. 송곳니를 지닌 사람의 체력이 약하면 본래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거나.
조금 전 레무스의 말대로, 임신과 동시에 맹수의 송곳니가 약해진다거나.
특히 마지막 제약은 보레오티 내에서 가장 중요한 기밀이었다. 더욱이 이를 아는 건 보레오티 중에서도 맹수의 송곳니를 이어받은 자들뿐이었다.
왜냐하면 최강이라 불리는 검은 맹수들의 유일한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레지나도 몰랐던 걸…….’
레지나는 맹수의 송곳니를 지녔으나,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걸 가르치기 전에 가출한 탓이었다.
당시 레지나는 겨우 열여섯이었고, 선대 공작은 이를 레지나가 결혼할 즈음에 가르쳐 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걸 레무스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거지?”
“그거야 뻔하지.”
펠리오가 중얼거리던 찰나, 닫혔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새 평소 즐겨 입는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레오니에가 코웃음을 쳤다.
“저 소아 성애자가 북부에 잠입했을 때.”
선황의 명을 받아 보레오티와 북부 산맥에 대해 조사하면서, 레무스 역시 무언가를 알아챈 것이 틀림없었다.
“오히려 이득이야.”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명예의 의식 때 족칠 수 있는 건, 어쩌면 올로르만이 아니겠어.”
* * *
벨리우스 제국에서 ‘신전’은 그렇게 큰 힘을 지니지 못했다.
초대 황제가 종교의 힘을 빌려 나라를 세우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이미 건국 이전부터 각 지역에 커다란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만의 신을 모시고 있었다.
그래도 역대 황제 중에서 몇몇이 제국의 문화 통일이란 명목으로 전역에 신전을 세우고 약간의 부흥을 시켜 준 탓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듯, 역사 속 신전은 특별히 눈에 띄는 적이 별로 없었다.
하나 그런 신전이, 오늘은 유난히 분주했다. 심지어 기도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던 귀족들이 우후죽순 몰려들었고, 그 반사 효과로 어느 때보다 당일 헌금이 눈에 띄게 늘었다.
바로 이곳 신전에서, 올로르 자작 영식이 신청한 명예의 의식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곧 있으면 명예의 의식이 시작될 것입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신관들은 시끌벅적한 귀족들을 자리에 안내하고 조용히 해 줄 것을 권유했다. 오랜만에 바삐 움직이는 신관들의 얼굴엔 진땀이 가득했다.
“여러분, 그거 들으셨어요?”
그 와중에, 어느 귀족 가문의 영애가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의 친자 확인을 위해 사용할 마법 약을, 무려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직접 만드셨대요.”
그러나 조심스러운 말투치고는 목소리가 제법 컸다. 그 탓에 명예의 의식에 참석한 귀족들이 너도나도 수군거렸다.
“오르티오 부군이요?”
“그 ‘미치광이 약사’?”
“약효 하나는 보장되겠군.”
동부 마탑에는 악명 높은 마법사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오르티오 후작의 남편이자, 마법 약 제조에 엄청난 재능을 지닌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었다.
그는 약에 미쳐서, 사람마저 약의 재료로 쓸 정도라는 악명이 파다했다. 소문으로는 후작 부군이 만든 마법 약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실험에 이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위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후작 부군이 직접 마법 약을 만들었다니, 귀족들은 이를 보통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약효는 거의 확실하다고 해야겠지요?”
“후작 부군의 약 제조 실력은 후작조차 인정하니까요.”
“그런데 동부가 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네 지역 중에서 가장 중립을 지키는 곳이 바로 동부였다.
이번 명예의 의식은 어떤 의미론 귀족파와 황제파 세력 다툼의 절정이었다. 보레오티 영애의 친부가 확정되는 순간, 두 세력 중 하나는 크게 흔들릴 예정이었다. 그런 다툼에 중립인 동부가 끼어든 건 아주 의외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조금 전 동부가 마법 약을 제조했다고 말한 젊은 귀족 영애가 대답해 줬다.
“아직 동부랑 북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잖아요.”
올로르는 명예의 의식을 신청하기 무섭게 동부에 찾아가 직접 의뢰를 부탁했다. 그 이유는 바로 두 지역 간의 갈등 때문이었다.
“귀족 회의에 참석하셨던 제 친척 어른께서 해 주신 말인데, 보레오티 공작이 지난 귀족 회의에서 오르티오 후작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대요.”
그 말에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찼다.
“큰일이로군…….”
“그러게요, 동부가 작심하고 마법 약을 만들었겠어요.”
오가는 귀족들의 대화 속엔 참으로 재미난 사실이 숨어 있었다. 이들 대다수가 보레오티 영애의 친부를 올로르 자작 영식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처음만 해도 보레오티를 믿었던 사람이 반 정도는 있었건만, 아주 이상한 변화였다.
“…….”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귀담아듣던 귀족 영애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소녀는 착석하는 대신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신전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따스한 봄 햇살이 환하게 쏟아졌다. 햇살 아래로 비친 소녀의 머리칼은 마치 아주 맑은 바닷물 같았다.
푸른 청옥이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정말 대단해.’
준비된 마차에 오르기 직전, 살루스가 신전을 힐끔 바라봤다.
‘날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살루스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아기 맹수를 떠올렸다. 하지만 불쾌감은커녕 도리어 엄청난 호감을 느꼈다. 대차고 장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과연 보레오티의 딸이야.”
하는 짓이 더할 나위 없는 맹수라며, 살루스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보시지 않을 겁니까?”
살루스 옆을 줄곧 보필하던 호위 기사가 물었다. 그의 주황색 머리 또한 햇살 아래서 반짝였다.
“내가 뭐하러?”
살루스가 웃으며 말했다.
“시간 낭비야.”
너무 뻔한 결과잖아?
* * *
신전에 귀족들이 가득 찼을 즈음.
“지금부터 명예의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신관장이 시작을 알렸다. 어수선하던 신전 내부가 단번에 조용해졌다.
신관장의 알림과 동시에 벨리우스 황제 일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망토를 두른 수비테오 황제의 뒤로 티그리아 황후와 우시스 황비가 따라 들어왔다. 크리세토스 황자와 알리스 황자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곳에 스칸디아 황녀는 없었다.
“최근에 몸이 더 안 좋아졌다네요.”
“황제가 이상한 곳에 시집보내려고 작정을 했다던데…….”
“쯧쯧, 불쌍도 하지.”
짧은 수군거림을 마친 사람들의 시선은 곧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로 쏠렸다.
보레오티와 올로르, 바로 이번 명예의 의식을 치를 주인공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단상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뉜 두 가족은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었다. 둘 다 가문의 색이 입혀진 의복을 입고 있었다.
보레오티는 검게. 올로르는 붉게. 대조되는 색상의 차이만큼이나 표정도 달랐다.
“저기 봐요. 보레오티 영애가 무척 슬퍼하고 있어요.”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레오니에의 표정은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서로가 친부라 주장하는 두 아버지 사이에 끼인 소녀는 지쳐 보였다. 사람들은 저 어린 소녀를 동정했다.
반면 올로르는 무척 자신만만했다. 특히 레무스는 레오니에와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려 노력했다. 그러다 정말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손을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레오니에는 시선을 피하며 펠리오의 품에 안겼다.
“진짜 올로르가 친부인가…….”
귀족들은 그런 레오니에의 모습에서 더욱 소문을 확신했다.
“……아우, 너무 피곤해.”
다행히, 레오니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침울하지 않았다.
“저 새끼 면상 볼 때마다 내 속에 잠재된 광기가 튀어나오려는데, 이걸 봉인하기 위해서라도 집에 가서 광공 놀이 좀 해야겠어.”
“그럼 지난번처럼 엄마가 바이올린 연주해 줄까?”
바리아가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얼음 대공의 발걸음’ 연주해 줘…….”
아기 맹수가 칭얼거렸다.
“바리아, 다 받아 주지 마세요.”
애 버릇 나빠진다며, 펠리오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원수를 흘겨봤다. 그래도 하지 말라는 소리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
그런 와중에 바리아가 반대편 측을 살폈다.
“걱정됩니까?”
펠리오가 조심히 물었다. 그와 동시에 바리아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로타가 있었다. 친딸을 곧 만날 거라 기뻐하는 레무스와는 정반대였다. 이 상황에 대한 불쾌감과, 레무스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불안함이 얼굴에 뒤섞여 있었다.
“……돕고 싶다면 도와도 됩니다.”
펠리오가 말했다. 하지만 바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 건 이제 없어요.”
바리아 본인이 그렇게 말함에도, 펠리오의 시선은 한참이나 아내에게 머물렀다. 바리아는 정말이란 듯이 싱긋 웃었지만, 곧 미소를 풀며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못된 거 같아요?”
“너무 착해서 걱정입니다.”
사람이 좀 모진 면도 있어야 한다고, 펠리오는 도리어 잔소리였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만 미소를 머금었다.
곧 신관들이 은으로 만들어진 넓고 얇은 잔 두 개를 들고 왔다.
수비테오 황제가 그 앞에 섰다.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앞서.”
황제가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 가문은 각자 자신들의 명예를 증명하도록.”
본래 명예의 의식을 신청한 건 레무스 올로르이니, 명예를 걸 사람 역시 레무스 한 사람이어야 했다.
하나 이번에는 한 아이의 친권이 걸린 중요한 사안이었다. 자연히 펠리오 또한 명예의 의식에 얽히게 되었고, 그 역시 자신의 명예를 증명해야 했다.
펠리오와 레무스가 단상 앞에 올랐다. 둘은 자신들의 가슴에 달린 휘장을 떼어 내 그 위에 올렸다. 검은 사자와 붉은 백조가 나란히 놓였다. 신기하게도 사자가 백조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다.
“둘은 이번 의식에서 무엇을 걸었는가.”
“긍지 높은 제 가문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레무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긍지 높은 제 가문의 이름을.”
펠리오도 똑같이 말했다.
“그리고 내 소중한 딸을 향한 저의 진심도 함께 걸겠습니다.”
하지만 뒤에 덧붙인 말이야말로, 펠리오가 진짜로 건 명예였다.
예상치 못한 펠리오의 발언에 신전 내부가 술렁거렸다. 정작 펠리오는 그들의 반응에 관심도 없단 듯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울 아빠, 좀 재수 없어.”
뒤에서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헤벌쭉 웃으며 투덜거렸다. 바리아가 그런 레오니에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지.”
덩달아 놀랐던 수비테오 황제가 신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명예의 의식은 레무스 올로르 자작 영식이 신청하였다.”
황제가 큰 목소리로 의식을 진행했다.
“올로르 자작 영식은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자신의 친딸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진실됨에 자신의 명예를 걸었다. 그리고 보레오티 공작은 그 주장이 거짓됨에 자신의 명예를 걸었다.”
그 틈에 신관들이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유리병 속엔 아주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신관들은 그 속에 담긴 액체를 각각의 잔에 나눠 부었다.
“이번 명예의 의식은 보레오티 공작 영애의 피가 결과를 말해 줄 것이다.”
수비테오 황제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레오니에가 그 앞에 섰다. 영리한 공작 영애는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진실된 핏줄은 푸른색을, 거짓된 핏줄은 붉은색을 지닐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증인이 된다.”
이제 드디어 친자 확인의 시간이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신관이 레오니에 곁으로 다가갔다.
“손을.”
레오니에가 손을 내밀었다. 신관이 조그만 은색 단검을 손가락 끝에 가져갔다.
곧 따끔한 통증이 소녀의 손가락에 찾아왔다. 레오니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잔에 피를 떨어트리십시오.”
레오니에는 시키는 대로 자신의 피를 두 잔에 한 방울씩 떨어트렸다. 투명한 액체 위로 떨어진 붉은 핏방울은 빠르게 옅어졌다.
“이제 명예를 증명하도록.”
수비테오 황제가 말했다.
펠리오와 레무스는 스스로 손끝에 상처를 내어 피를 보였다. 이내 두 남자는 자신들 앞에 놓인 잔 위로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투명했던 액체가 순식간에 색을 입기 시작했다.
두 잔의 색은 당연히 달랐다.
한쪽은 진실된 푸른색을 띠었고, 다른 한쪽은 거짓된 붉은색을 지녔다.
“……어?”
레무스가 제 피가 떨어진 잔을 향해 멍청한 소리를 냈다.
제 머리칼처럼 붉은색이 흥건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