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어리석은 의심
“어서 옵쇼!”
호쾌한 인사와 함께, 손님 두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났고, 다른 이는 머리를 면도칼로 깎은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그리고 둘 다 햇빛에 피부가 시커멓게 탄 채였다.
“오랜만에 오는 제국이네.”
“우리 말고도 뱃사람들이 많군.”
“봄이니까 이제 출항하는 배들도 많을 테지!”
커다란 무역항에 자리 잡은 식당인지라, 손님들 대다수가 몸을 쓰는 선원들이었다.
자리에 앉은 둘은 음식들을 주문했다. 곧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들이 나왔다.
“혹시 그거 들었어?”
한참을 먹던 중. 턱수염이 지저분한 쪽이 먼저 말했다.
“이번에 우르베스페 상단이 또 크게 벌었다더군.”
“아까 항에서 난리였던 거?”
대머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배에서 내리는 녀석들, 헤벌쭉 웃는 꼴이 아주 얄미워서 한 대 치고 싶더라.”
“그럴 만도 하지. 이번에 타국에 수출한 물건이 아주 난리가 났다지.”
“어련하겠어. 보레오티 영애가 새로 내놓은 손목시곈데.”
에일을 벌컥벌컥 들이켠 대머리가 큼직한 트림을 터트렸다. 맞은 편에 있던 수염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올라올 뻔했다.
“……리네 상단이 약이 바짝 올랐을 거야.”
역겨움을 겨우 참은 수염이 이어 말했다.
“최근 우르베스페 쪽이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잖아.”
“리네 쪽도 보레오티와 손목시계 건으로 계약을 맺은 줄 아는데.”
“하지만 우선 수출은 우르베스페야. 리네는 일정 기간 이후고.”
“그것도 엄청난 벌이가 될 텐데…….”
“어쨌건 보레오티만 좋은 일이지.”
우르베스페와 리네 상단이 아무리 큰돈을 벌어도, 결국 승자는 보레오티였다.
“그런데 말이야.”
대머리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아주 낮게 깔았다.
“요즘 황실은 말이 아니라더라.”
“왜?”
수염이 의아해했다.
“우리 출항 전엔 괜찮았잖아.”
황실이 제국 전역에 도로를 구축하는 사업을 진행한다더니? 수염의 물음에 대머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큰일이래.”
그 사업이 완전히 망했거든. 대머리가 전해 주는 현 제국의 정세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 출항하고 얼마 안 있어서, 제법 큰 비리 사건이 터졌다더군.”
“비리 사건?”
“황제파 귀족들이 후원하는 예술 단체.”
알고 보니 그곳이 마약을 제조하는 등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고. 거기다 그곳에 기부한 황제파 귀족들의 후원금 역시 탈세와 비자금 융성에 쓰였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말세가!”
수염이 혀를 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여튼 가진 놈들이 더하는구먼!”
그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무역선에 타기 전, 이번에 황실이 추진한다는 도로 사업에 아주 큰 지지를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국에 돌아오자마자 이토록 배신감이 느껴지는 결과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그 사업은 어찌 되었어?”
“흐지부지됐다더라.”
대머리가 신문에서 읽은 것들을 전해 줬다.
“각 지역 수장들이 자기들 돈으로 그 지역의 도로를 정비했다는데, 이건 원래도 늘 하던 일이었대.”
“뭐야, 그럼…….”
수염이 허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로 사업은 애초부터 헛돈 들이붓는 거였나?”
“수도는 아예 시작도 못했다더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 말한 후원 단체 비리 말이야.”
아까부터 목소리를 낮춘 대머리였지만, 이번엔 훨씬 더 조심히 말했다.
“그 돈의 행방 말이지…….”
바로 황제라고 하던데?
수염은 이제 손에 든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래서 사업 시작도 못했대. 황실에 배정된 예산엔 처음부터 사업에 쓸 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더군. 그 단체 후원금으로 사업을 하려던 것 같다고 추측한다나 봐.”
“세상에나……!”
수염은 눈앞이 아찔했다. 잠깐 일 때문에 바다에 나간 동안, 황실의 권위가 그 정도로 떨어졌을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죽은 선황이 무덤에서 일어나겠어.”
혀를 끌끌 차는 수염의 중얼거림에 대머리도 크게 동의했다.
“그나저나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나야 육지에 다리 딱, 내린 순간 신문 읽고 주변 사람들한테 소식을 들었지.”
내가 자네처럼 신문 속 낱말 퍼즐만 보는 줄 알아?
대머리가 껄껄 웃었다.
* * *
“……오, 레오.”
바리아가 제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잠든 레오니에를 다정히 불렀다.
“이제 다 왔어. 일어나야지?”
“으응……!”
잠이 덜 깬 레오니에는 칭얼거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돌아간 고개는 바리아의 배에 폭 박혔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머, 어머.”
깜짝 놀란 바리아가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어리광쟁이.”
“어리광쟁이가 아니라 변태입니다.”
딱 봐도 깬 거 같은데. 건너 앉은 펠리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조그맣고 검은 뒤통수를 예리한 시선으로 흘겨보니, 아니나 다를까, 레오니에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변태, 일어나라.”
“……레오누운, 변태 아닌데에?”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칭얼거렸다.
“레오누운, 엄마가앙, 너무 조운거얼?”
“말 똑바로 안 하면 재산 없다.”
“소녀는 어머니를 은애합니다.”
흐물흐물 녹았던 레오니에의 목소리가 강철만큼 단단해졌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바리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아이의 눈에 낀 눈곱을 하나하나 손수 떼어 줬다. 바리아는 이제 레오니에와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도 참 너무하다, 그치? 좀 더 자게 두지.”
다정한 바리아의 목소리는 아기 맹수의 기분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심보 고약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에게 대들었다.
“맞아! 딸이 엄마한테 안기는 게 뭐가 나쁜 짓이고 변태 같다는 거야.”
“변태 같은 내 새끼.”
펠리오는 분명 바리아의 품에 파고들면서 히죽이던 레오니에의 입꼬리를 목격했다.
“근데 정말 다 왔네?”
깨끗해진 레오니에의 두 눈이 마차 밖을 바라봤다. 익숙한 수도 내 보레오티 저택이 바로 코앞이었다. 레오니에가 창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었다.
“나 왔어!”
우렁찬 아기 맹수의 목소리가 전해졌는지,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트라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알은척을 했다.
마차가 저택 안에 도착하고.
“끄응!”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가 전신을 길게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쭈그리고 잤던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아이고, 삭신아…….”
“누가 들으면 노인네인 줄 알겠다.”
어린 게 왜 저리 늙은이처럼 행동하는지. 펠리오가 아이의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아빠, 나 피곤하니까 어부바!”
“그건 이제 불가능해.”
“왜?”
“넌 천 근이잖아.”
펠리오가 냉정히 말했다.
“으챠!”
그러나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의 거절을 듣는 척도 안 했다. 그냥 자기 혼자 알아서 펠리오 등에 올라타 업혔다. 갑작스러운 덮침에 펠리오가 몸을 앞으로 휘청거렸다.
“스읍! 남자 허리가 그렇게 약해서야!”
등에 업힌 레오니에가 안정적인 자세를 잡으며 잔소리했다.
“레오, 너 진짜 혼난다?”
“혼내 봐라? 혼내 봐라?”
겁이라곤 재산 못 받을 때만 있는 아기 맹수가 혀를 날름 내뱉으며 놀렸다.
“엄마도 업어 줄 수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바리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도 요즘 운동 많이 해서, 이거 봐! 근육 붙은 거!”
바리아가 팔을 내밀며 힘을 바짝 줬다.
“…….”
“…….”
그리고 이를 보는 맹수 부녀의 표정은 애수에 젖어 있었다.
“엄마는 마른 근육 체질인가?”
“티가 잘 안 나는군요.”
“그래도 여기 봐. 엄마 상완이두근이 꽃 속에서 태어난 요정 같잖아.”
풀이 팍 죽은 바리아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거 없다는 뜻이잖아…….”
북부에서 펠리오와 레오니에한테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배웠는데, 막상 가지고 싶던 탄탄한 팔근육은 얻기 힘들었다.
“엄마, 그래도 배에 두 줄 나왔잖아.”
레오니에가 위로했다.
“그것도 단기간에 나온 거잖아! 엄청 대단한 거야!”
“운동이야 나중에 나랑 밤에…….”
“이 아빠가 애를 등에 업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따끔하게 혼을 냈다.
“오셨습니까.”
이를 웃으며 지켜보던 트라가 눈치껏 끼어들었다. 장장 5개월 만에 수도에 돌아온 맹수 가족은 이전보다 훨씬 시끌벅적했다.
“트라!”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인사했다.
“다녀왔어요!”
손에는 여전히 펠리오의 머리채를 쥔 채였다.
* * *
수도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
“흉쇄유돌근은 아름다워.”
레오니에가 아침 식사에 걸맞은 대화 주제를 꺼내었다. 아침 메뉴에 소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 너, 지난번엔 사각근이 좋다더니.”
펠리오가 입에 있던 음식을 다 삼킨 뒤에 물었다.
“언제 또 바뀐 거야.”
“아빠, 근육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지.”
황홀한 듯이 눈을 감은 레오니에가 근육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실은 어제 저랑 열띤 토론을 했거든요.”
바리아가 기름에 잘 구워진 소시지를 잘라 레오니에의 입에 넣어 줬다. 레오니에는 아기 새처럼 입 벌려 냠냠 얻어먹었다. 짭조름한 것이 입맛을 기분 좋게 돋우었다.
“엄마랑 의논해 보니까, 쇄골 아래쪽이 간만에 매력적이더라고.”
“엄마가 좀 열심히 쇄골 근처를 칭찬했잖아.”
“엄마는 그쪽이 좋아?”
“그게 말이야, 실은 너희 아빠도 그쪽이 엄청 멋있어!”
내가 아주 푹 빠졌다면서, 바리아가 수줍게 고백했다.
“역시 엄마는 눈이 높아. 울 아빠 근육이 탐스럽긴 하지!”
“당연한 이야기로 너무 열 올리지 마.”
펠리오가 두 모녀를 짐짓 걱정했다. 그리곤 약간의 허무감도 느꼈다.
‘이거 괜찮은가…….’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펠리오조차 지금 식탁을 앞에 두고 떠드는 대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용만 들으면 저의 근육을 희롱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않은가.
‘……됐나.’
하지만 불쾌감을 느끼지 못한 펠리오는 그냥 넘어갔다. 그는 이제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제 근육을 품평해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히려 바리아를 밤에 유혹할 땐 자신이 먼저 제 근육을 공부해 보지 않겠느냐고 덤벼들 때도 있었다.
식사를 마친 세 가족은 각자의 일정대로 움직였다. 펠리오는 수도 저택으로 올라온 서류 처리를 위해 꼼짝없이 저택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레오니에와 바리아는 초대받은 다과회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 준비가 한창이었다.
펠리오는 일하기 전에 둘을 배웅했다.
“신경에 거슬리는 것들은 이름을 다 외워둬.”
“알고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알았다니까, 진짜!”
길어지는 걱정에 아이가 귀찮은 티를 냈다.
“시비 거는 사람들은 이름 다 기억해서 아빠한테 이르라고? 알았어, 이제 됐지?”
“너, 이거 가볍게 들을 말이 아니야.”
펠리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지금 무얼 하러 가는지 알고 있을 텐데.”
“레오, 아빠 말씀 잘 듣자.”
바리아도 나서 펠리오의 편을 들어줬다. 함께 외출하는 바리아의 마음도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알았어.”
기가 한풀 꺾인 레오니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
“잘할 거라 믿는다.”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꼬옥 껴안았다. 레오니에도 아빠의 등을 힘껏 감쌌다.
“저도 잘 지켜볼게요.”
“부탁하겠습니다.”
“레오, 그만 가자.”
“응…….”
바리아가 내민 손을, 레오니에가 손을 뻗어 붙잡았다. 아이의 손목엔 금색 팔찌가 있었다. 아주 가늘고 얇은 줄이 두어 번 빙글 둘려 있었다.
조그만 백조 장식이 달린, 아주 예쁜 장신구였다.
* * *
작년 늦봄에 초대받았던 티그리아 황후의 다과회는 제국의 두 번째 권력인 ‘수도 사교계’라기엔 너무 미지근했다.
아무래도 황후가 떡하니 있으니, 다들 말을 삼가는 편이었다. 본래 수도 사교계는 그렇게 귀엽고 평온하지 않았다.
“보레오티 공작 부인, 보레오티 공작 영애.”
이번에 다과회를 연 사람은 카페르 남작 가문의 부인이었다. 카페르 가문은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 가문으로, 제법 오래된 역사를 지닌 가문이었다. 때문에 어느 가문들도 이 명망 높은 남작 가문을 쉬이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레오티와는 크게 접점이 없었다. 편을 가르자면 황제파이고, 여기서 더 가르면 올로르보다 파르두스와 친했다.
“성급한 초대였을 텐데, 이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페르 남작 부인이 자신의 다과회에 참석해 준 레오니에와 바리아에게 인사했다.
“그렇기에 더욱 기대하고 있답니다.”
바리아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 바리아가 했던 말은 절대 칭찬이 아니었다.
당신의 초대가 상당히 성급하고 빠듯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나 잘 준비되었지 한번 보겠다는, 그런 뜻이었다.
‘오오, 엄마!’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아기 맹수는 엄마 맹수의 돌려 까기에 감탄했다.
들어서자마자 크게 당한 카페르 남작 부인이 꽤 당황했다. 눈으로 그 당혹감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순한 인상을 지닌 바리아한테 예상치 못한 한 방을 먹은 게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물론이죠.”
하지만 남작 부인도 어지간한 내공을 지닌 사람이었다.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확연히 달라졌다. 바리아를 얕잡아봤던 카페르 남작 부인의 눈에 경계심이 일었다.
“그럼 들어가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다며, 카페르 남작 부인이 앞장섰다.
“레오.”
바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레오니에가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엄마, 아까 멋졌어.”
“레오 흉내를 조금 내봤어.”
바리아가 수줍은 미소로 속삭였다.
“엄마도 참.”
아기 맹수가 어깨를 파닥이며 기뻐했다.
도착한 곳은 화사한 꽃들과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꾸며진 응접실이었다.
“여러분, 보레오티 공작 부인과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카페르 남작 부인의 소개와 함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귀부인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니에는 빠르게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아주 좋아.’
레오니에가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필요한 장기 말은 다 모였다.
“공작 부인과 공작 영애는 이쪽으로.”
카페르 남작 부인은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바리아가 앞에 뒤집혀 있던 찻잔을 똑바로 올렸다. 곧 뒤에 있던 하녀가 차를 따라 주었다. 이어 레오니에의 찻잔도 채워졌다.
“따스한 봄이 찾아왔어요.”
다과회 주최자인 카페르 남작 부인이 먼저 인사했다.
“정말 어느새 봄이에요.”
바리아가 찻잔을 들며 남작 부인의 말을 받아 줬다.
“……하지만.”
차를 머금을 것처럼 굴던 바리아가 잔을 내리며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꽃샘추위가 걱정이에요.”
완연한 봄이 오려면 매서운 꽃샘추위가 지나가야만 했으니.
“어머니, 꽃잎이 많이 떨어지겠지요?”
레오니에가 올망졸망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러게. 떨어진 꽃잎은 참…….”
아이와 눈을 맞추며 대화하던 바리아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안쓰럽던데.”
시선이 머무는 곳엔 올로르 자작 영식의 부인이 있었다. 바리아의 여동생인 로타였다. 눈이 마주친 로타의 얼굴이 새하얗게 바래졌다. 테이블 아래로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로타의 옆에 앉은 귀부인들의 표정도 안 좋기는 매한가지였다.
“차향이 좋네요.”
바리아가 먼저 차를 마셨다.
“그러게요.”
레오니에도 뒤따라 차를 홀짝였다. 소매 속에 감춰진 백조 장식이 아까보단 덜 거슬렸다.
레오니에가 카페르 남작 가문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나 여기 알아!’
레오니에는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왜냐하면 카페르 가문의 영애가 원작에서 악역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카페르 영애는 펠리오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펠리오 곁에서 비서로 일하던 바리아를 질투했다. 바리아의 여동생인 로타를 편들며 작정하고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원작은 레오니에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레오니에는 단 한 번도 카페르 가문과 대면한 적이 없었다. 작년 다과회에서도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카페르 영애를 몇 년이나 까먹고 살았다.
“저희 딸이 얼마 전에 동부에서 돌아왔답니다.”
때마침, 카페르 남작 부인이 제 옆에 앉은 젊은 여인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짙은 색의 머리를 짧게 자른 카페르 영애가 의젓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보던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머리 색이 현무암 같아.”
“레오.”
바리아가 웃음을 참으며 타일렀다.
“동부 마탑에서 배움을 닦고 왔지요.”
“어머나, 대단해라.”
“마법과 관련된 재능은 귀하다지요?”
“고생 많이 했겠어요.”
귀부인들이 하나같이 대견하다고 칭찬했다. 카페르 영애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원작에 묘사된 대로, 그녀는 저를 향한 칭찬을 무척 좋아했다.
“정말 멋지네요.”
바리아도 진심으로 칭찬했다.
마법사의 필수 요건 중 하나인 마나는 선천적인 재능으로 분류되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어도 마나를 타고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작에서도 그랬나?’
레오니에가 이젠 가물가물한 원작 내용을 떠올렸다.
‘없었던 거 같은데…….’
흐릿하게 기억하는 원작 속 카페르 영애는 마법과 연관된 사람이 아니었다. 좀 더 자세한 건 어릴 때 적어둔 원작 설정과 내용을 봐야 자세히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일찍 안 갔어요?”
동부에서 온 네오펠리 백작 부인이 물었다. 그녀는 파르두스 후작의 딸이었다.
“보통 마나를 지녔다는 건, 어렸을 때 증명이 될 텐데…….”
“제가 고집을 부렸거든요.”
카페르 영애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레오니에를 힐끔 보았다. 눈이 마주친 레오니에가 당혹감을 숨긴 채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부끄럽지만, 몇 년 전에 큰 계기가 있었답니다.”
카페르 영애는 그 계기를 빌미로 동부 마탑에 들어갈 각오를 다졌다.
“괜히 미련스럽게 수도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하지만 지금은 일찍 동부로 가지 않은 스스로가 바보 같아요.”
“어머나, 슬픈 계기였나요?”
“그때는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는 그 덕에 아주 많이 자랐다고 생각해요.”
카페르 영애는 동부 마탑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남자에게 저를 봐 달라고 목매달기엔 인생이 아깝고, 지금껏 세상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야는 너무도 좁았다.
“너무도 즐겁고 행복했답니다.”
카페르 영애가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레오니에는 크게 놀랐다.
‘내가, 바꾼 거야……!’
소녀는 소름이 돋았다.
지금 카페르 영애가 말한 유학의 계기는 ‘레오니에’였다. 6년 전, 사생아를 데려와 가문에 올리고 후계까지 물려줬던 펠리오.
그의 행보는 수많은 여인에게 가슴 아픈 실연을 안겨 줬고, 카페르 영애 또한 그 실연으로 슬퍼하고 마탑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카페르 영애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대는 새로운 움직임입니다.’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지.’
레오니에는 예언을 떠올렸다. 아우스트 공작이 들려준 예언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했고, 보란 듯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레오니에에게 네가 바꾼 미래가 무엇인지 직접 보라고 가르쳐 줬다.
“최근 동부는 어떠한가요?”
남부 출신의 귀부인이 물었다. 물어보는 그녀의 시선이 보레오티 모녀를 가볍게 스쳤다. 최근 북부와 동부의 사이가 전만큼 좋지 않다는 걸 알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카페르 영애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마탑에서만 지내서…….”
영애는 동부 상황을 잘 모른다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숨은 뜻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 사이가 좋지 않다’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들었다.
자연히 그들의 시선이 레오니에를 향했다.
“어머머.”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본래 높은 산꼭대기 날씨는 함부로 예측하기 어렵죠.”
지역 수장들의 관계를, 너희 같은 꼽사리들이 알 턱이 있냐.
아기 맹수의 한 방에 다들 헛기침을 얕게 뱉으며 차를 홀짝였다. 카페르 영애는 그런 레오니에를 아주 흥미롭게 바라봤다.
“날씨가 아무리 험난한들, 산맥은 항상 높이 솟아 있죠.”
바리아가 이어 받아쳤다. 두 수장의 사이가 어쨌건 간에 북부의 위엄은 여전하단 뜻이었다.
보레오티 모녀는 도도하기 그지없었다. 그 여유롭고 자칫 오만하기까지 한 태도에 주변만 괜히 위축되어 말을 아낄 뿐이었다.
“……뭐, 그렇지요.”
“정세는 늘 바뀌는 거니까요.”
“어느 곳이건 부딪히는 곳은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들 눈치껏 보레오티의 눈치를 살피는 중에, 홀로 반박하는 용감한 이가 있었다.
“바람이 너무 세면, 조금은 지면이 깎이지 않을까요?”
로타 올로르였다.
‘좋아, 법적 이모!’
레오니에가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채 미소지었다. 적절한 때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찻잔을 내린 레오니에가 염려스러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 정도 바람이면 바다도 넘치겠는데요?”
커다란 파도가 해안을 덮칠 거란 뜻이었고, 이는 곧 남부 출신, 특히 올로르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귀족의 몰락을 비유한 말이었다.
“산맥은 우뚝 서 있기라도 하지, 바다는 어쩌려나.”
“레오도 참. 바다는 그대로란다?”
바리아가 말을 정정해 줬다.
“그리고 바다가 넘치는 것도, 그리 별로 나쁜 일이 아니야.”
“어머니, 왜 그런 건가요?”
레오니에가 모르겠단 듯이 턱에 손을 괴고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소맷자락이 스르륵 내려갔다.
“그거야 파도가 해변의 찌꺼기들을 치워주잖니.”
“그렇구나! 하긴, 바다도 산맥처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
산맥은 보레오티.
바다는 메리디오와 아우스트.
바리아는 지금 진정한 남부의 주인은 오랫동안 그 땅에 머물렀던 두 가문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그리고 올로르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잠길 찌꺼기로 비하했다.
그 뜻을 알아챈 로타가 얼굴을 붉혔다.
“어, 언니, 지금 나한테……!”
“세상에!”
네오펠리 백작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제가 지금 뭘 들은 거죠?”
백작 부인이 기겁했다.
“아무리 친자매라도 언니라니요.”
“다과회엔 응당 지켜야 할 예절이 있는데.”
“어리다고 해도 말이죠…….”
“부인은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만만한가 봐요?”
“예의가 없기로서니…….”
로타의 실수 한 번에, 보레오티와 뜻을 같이하는 가문의 귀부인들이 달려들었다.
“올로르 영식 부인은 잠깐 실수한 거예요.”
그러자 당황한 남부 귀부인들이 서둘러 로타를 변호했다.
“사이가 두둑한 자매라 그만 습관처럼 나온 거로 너무 몰아붙이네요.”
“두 사람이 가족인 걸 모르나요?”
로타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저질렀다고, 로타가 순순히 사과했다.
“언니가, 아니,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한 말이 너무 슬퍼서…….”
“부인.”
레오니에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로타를 바라봤다.
“공작 부인이 ‘한 말’이 아니라, ‘하신 말씀’이라고 하셔야죠.”
“…….”
“한 번은 실수라 치죠.”
소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마치 철딱서니 없는 동생을 타이르는 언니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두 번은 좀, 그렇죠?”
멍청하거나, 고의거나.
“내 어머니께 예의를 지켜 주세요.”
은근슬쩍 말 낮추지 마.
레오니에가 살벌한 경고를 내비쳤다.
“……죄송합니다.”
서슬 퍼런 시선에 기가 눌린 로타가 움찔거리며 사과했다. 하지만 바리아가 조금 전 했던 말을 어떻게든 지적하려는 심술은 그대로였다.
“조금 전 고, 공작 부인께서 하신, 말씀은…….”
로타는 힘겹게 지적받은 말투를 고쳤다. 입 안에 모래가 그득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발음이 끊어지고 메말랐다.
‘……정말 징하네.’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당하면 어느 정도 기가 죽어 물러설 법했다.
그런데 로타는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구박 받은 상황을 이용하려 했다. 혼이 잔뜩 난 로타는 슬픔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부인이 당신의 친정과 여동생이 시집간 가문을, 조금 살피시지 않는 것 같아서…….”
그 말에 바리아가 조용히 웃었다.
“혹시 다들 그거 아시나요?”
그리곤 말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추수 후에 항상 밭과 논을 쉬게 한답니다.”
비료를 뿌려서 영양을 공급하고, 겨우내 푹 쉬도록 내버려 두고.
“혹은 열심히 키운 농작물들을 슬픈 마음으로 갈아엎어야 할 때도 있어요.”
바리아가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내가 지금 그 농사짓는 사람들의 심경이랍니다.”
“…….”
“그런 경우는 땅보다 농작물에 문제가 많을 때지요.”
“……허억!”
로타가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 로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남부 귀족들을 비롯하여 황제파 가문의 귀부인들 모두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몇몇은 두려움에 질려 있기까지 했다.
반면 귀족파 가문의 귀부인들은 감동 어린 시선으로 바리아를 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서부 출신의 귀부인은 대견함을 감추지 못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두고 보세요.”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분명 좋은 땅이 될 거예요.”
너희가 없어질 테니까.
우아한 어머니의 한마디, 한마디 덕에 레오니에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만만하게 봤어요.”
그래서 아주 크게 당했고요.
다과회가 끝나고, 여전히 카페르 저택에 남은 귀부인들이 조금 전 보레오티 모녀의 살벌함에 혀를 내둘렀다. 남은 귀부인들은 황제파 가문 출신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거예요.”
“보레오티 공작이 괜한 사람 들였겠어요?”
“역시 사람은 비슷비슷한 부류끼리 얽히나 봐요.”
“재정부에서 근무할 적에 ‘맹수’라고 불렸잖아요.”
“살벌하기도 해라!”
그들은 보레오티 공작 부인을 함부로 봐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괜히 어쭙잖게 기 좀 꺾어 보려다 입 한 번 뻥긋 못하고 소름만 잔뜩 얻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네오펠리 백작 부인이 로타에게 물었다.
“공작 부인은 친정에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던데.”
로타를 바라보는 백작 부인의 눈빛엔 조금 전 상황에 대한 의아함이 가득했다. 어느 귀부인의 품에 안겨 훌쩍이던 로타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런 로타를 힐끔 보던 네오펠리 백작 부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애초에 로타의 대답 따윈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차별을 당했는데.”
“어머, 차별이라니요?”
카페르 남작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히에이나 백작 가문이랑 똑같다네요.”
네오펠리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오라버니인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무도회에서 본 에르바누 가문의 자식 차별을 똑똑히 들었다고 한다.
“아, 아니에요!”
로타가 눈물을 글썽이며 반박했다.
“부모님은 저와 언니를 똑같이 사랑했어요!”
“그랬는데 작년 무도회에서 그런 면박을 줬어요?”
당시 연회에 참석했던 에르바누 가문의 가족 싸움은 상당한 악재가 되었다. 마치 제 딸의 재능도 몰라보고 구박했던 히에이나 가문처럼.
에르바누 부부는 자식을 차별하는 못된 부모로, 차녀인 로타 올로르는 자기 언니 망신시키는 데 혈안이 된 동생으로 단단히 찍혔다.
“그, 그건 집안 사정상……!”
“원래 돌 던진 사람은 모르죠.”
자기가 뭘 맞췄는지.
네오펠리 백작 부인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일단 북부 출신이거든요.”
편을 든다면 너보다는 보레오티지. 백작 부인이 그런 뜻을 담아 이어 말했다.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공작 부인이 마음을 단단히 드신 듯하니.”
“전 언니의 동생이에요!”
로타가 악을 쓰듯 말했다.
“어떻게 언니가 동생을 버려요!”
“에르바누 백작 부부에게 배울 점이 참 많아요.”
자식을 저렇게 키우면 안 되는구나. 기가 막힌 네오펠리 백작 부인이 쓴 미소를 지었다.
“부인은 일곱 살인가요?”
듣다못한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같이 있다간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지금도 두통이 살짝 밀려왔다.
“그런 고집은 일곱 살에게나 통한답니다.”
“…….”
“이리 수준이 떨어져서야…….”
쯧. 부채 너머로 혀를 짧게 찬 네오펠리 백작 부인이 기어코 자리를 떠났다. 마찬가지였던 다른 귀부인들도 눈총을 던지며 자리를 비웠다.
“저도 그만 쉬어야겠습니다.”
카페르 남작 부인 역시 로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저택에서 나온 로타는 함께 참석했던 다른 귀부인의 저택에 들러 잠깐 쉬어 갔다.
“다들 너무하네요.”
“그래요, 올로르 영식 부인은 아직 어린데…….”
“왜 저렇게 악독한지.”
남부 출신 귀부인들이 로타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들의 위로는 로타에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위로하는 귀부인들은 혹시라도 보레오티의 손길이 자신들 가문에도 닿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올로르의 위세가 아무리 높대도, 감히 검은 맹수를 넘어설 순 없었다.
“흑, 흐윽…….”
소파에 거의 쓰러지듯 앉은 로타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름답게 올려 묶은 분홍 머리가 살짝 흐트러졌는데, 눈물로 젖은 얼굴과 묘하게 잘 어울려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때, 어느 부인이 입술을 머뭇거렸다.
“아까 보레오티 영애가 말이지요.”
“부인.”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줬다. 지금 로타 앞에서 보레오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썩 좋지 않았다.
“흐윽, 보레오티 영애가 왜요?”
로타가 눈물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말씀해 주세요.”
“정말 괜찮겠어요?”
“언니가 저를 그렇게 밀쳐도, 우린 가족이에요. 그러면 보레오티 영애도 저의 소중한 조카 따님이 되는 거랍니다.”
그러니 자신이 신경 쓰는 건 당연하다고, 로타가 물기로 젖은 눈을 둥글게 휘었다.
로타의 연기는 잘 먹혔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눈물과 애처로운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지금 이 상황이 살짝 귀찮아지고 있던 귀부인들이 동정심을 머금었다.
“사실 대단한 건 아니고요.”
아까 말을 꺼냈던 부인이 조심히 말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의 팔에 팔찌가 있던데…….”
그 팔찌가 조금 신경 쓰인다고.
“아.”
그 말에 로타도 자신이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 얄미운 검은 머리가 언니 옆에서 귀여운 척 재수를 떨 때, 오른팔에 가느다란 황금색 줄로 만들어진 팔찌가 걸려 있었다. 길게 풀면 목걸이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장식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 장식, 아시죠?”
부인의 물음에 로타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백조, 였었죠.”
* * *
“아씨, 손목 썩을 거 같아!”
다과회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레오니에가 오른팔에 걸어 둔 백조 목걸이를 냅다 바닥에 집어 던졌다.
“코니! 미아!”
아이는 하녀들을 불렀다.
“씻을 물 좀 준비해 줘. 그리고 이 옷은 버리고.”
“태울까요?”
옷을 받은 코니가 물었다.
“재도 남기지 말고 태워.”
“알겠습니다.”
“목욕물은 금방 받을게요.”
코니가 옷을 태우러 갔고, 미아는 곧장 욕실로 올라갔다.
“저거, 성질머리하곤.”
마중 나온 펠리오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이왕 태울 거면 올로르 저택이 있는 쪽을 향해 태우라고 했어야지.”
“헐, 아빠 천재!”
“레오 넌 자비가 너무 넘쳐.”
짜증이 날 땐 화풀이를 제대로 해야 한다며,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허술한 점을 따끔하게 지적했다. 아기 맹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뜻깊은 가르침을 새겨들었다.
“레오! 이리 와 봐.”
옷을 갈아입고 나온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찾았다.
“소독해야지.”
바리아의 뒤를 따라오던 하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은색 쟁반 위에 올려진 건 소독약이 묻은 헝겊 조각들과 조그만 집게였다.
“그런 더러운 걸 몸에 걸쳤는데, 소독 안 하면 악몽 꾸고 균 옮아.”
집게로 조그만 헝겊 조각을 집은 바리아가 아이의 손목을 깨끗하게 닦아 줬다. 알싸한 것이 손목에 닿자마자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엄마, 거기서 엄청 멋졌어!”
“멋지기는. 그냥 레오 흉내만 냈는데.”
두 모녀가 다과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펠리오에게 전해 줬다.
“내 흉내는 안 냈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펠리오가 살짝 삐친 어투로 중얼거렸다.
“아빠도! 내 흉내가 아빠 흉내지!”
내가 누굴 보고 배웠는데. 레오니에가 치켜세운 뒤에야 펠리오의 기분이 한결 풀렸다.
“……엄마는 저런 남자랑 사는 거야.”
아이는 냅다 엄마한테 일러바쳤다.
“하지만 결혼은 물릴 수 없어!”
이젠 엄마가 저 덩치를 책임져야 한다며, 레오니에가 바리아에게 칭얼거렸다.
“칭얼거리는 건 둘 다 똑같은데.”
바리아가 두 맹수 부녀를 번갈아 보며 즐겁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좀 더 귀엽죠.”
“이 아빠가 드디어 실성했군. 위스키 상한 거 마셨어? 배탈이 아니라 머리에 탈이 났나? 그러다 탈모 오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내 모근은 북부 산맥처럼 굳건하다.”
“그럼 곧 메마르겠네.”
레오니에가 깔깔 비웃었다. 바리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펠리오…….”
그리곤 힐끔 남편을 바라봤다. 딸의 거친 생각과 남편의 뜻 모를 눈빛,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아내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우리 레오.”
펠리오가 덤덤한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가 기어코 선을 넘었구나.”
아이는 감히 아빠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다. 풍성한 검은 머리는 펠리오의 자랑이고, 딱히 신경 안 쓰는 척해도 꽤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이번만큼은 펠리오도 쉬이 용서할 수 없었다.
“벌을 받아야겠어.”
펠리오는 오랫동안 봉인해 둔 끔찍한 벌을 내렸다. 바로 잘못 목걸이와 생각하는 의자였다.
그래도 펠리오는 부성애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레오니에가 다 씻고, 저녁까지 다 먹은 뒤에야 손수 잘못 목걸이를 걸어 줬다.
[아름다운 흑발을 몰라봤습니다.]
목걸이에 적힌 잘못을 읽던 레오니에의 눈이 차갑게 식어 갔다.
“……아빤 이거 쓰면서 양심 안 아프든?”
“그거, 네 엄마가 썼다.”
“어쩐지 내 양심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필체더라.”
명필이라 칭송하는 딸의 모습을, 펠리오가 ‘저걸 어쩌면 좋을까’ 하는 눈으로 안타까이 바라봤다.
바리아는 펠리오의 흑발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을 쏙 빼닮은 레오니에의 흑발도 좋아했다. 고로, 목걸이엔 서로 닮은 점은 놀리지 말자는 엄마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레오니에가 묵묵히 목걸이를 걸었다.
“여기 앉아.”
이를 지켜보던 펠리오가 준비된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를 본 레오니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너무 작잖아!”
펠리오가 준비한 의자는 레오니에가 어렸을 때 썼던 추억의 물건이었다.
“이건 너무 수치스러워!”
“그러니 벌이지.”
“좀 큰 의자로 해 줘!”
아기 맹수가 앙앙 짖었다. 이런 쥐똥만 한 의자에 앉으면 자신의 소중한 허리와 골반이 나간다며 투덜거렸다.
“내 허리는 나중을 위해 튼실하게 보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너, 역시 바리아 앞에서만 변태 발언 안 하는 거지?”
“그걸 이제 알았어?”
“한결같은 우리 새끼.”
펠리오는 살짝 안도했다.
그는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혹시라도 정말 갱생시켰다면, 그건 그것대로 조금 서운할 것 같았다.
펠리오가 아이를 위해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은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다행히 레오니에는 갱생의 여지가 없는 변태였다.
펠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육아에 정통한 저 자신도 저 변태를 갱생시키지 못했다. 바리아가 아무리 대단해도 역시 그건 무리였다.
“자, 그럼 벌 받기를 시작하자.”
결국 레오니에는 강제로 자리에 앉혀졌다.
“수치스러워…….”
창피함을 느낀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벌 받는 게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이런 조그만 의자에 앉은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진정한 수치는 지금부터였다.
“속 썩이는 불효녀에게, 이 아빠가 동화책 한 권을 읽어 주마.”
동화책, 그 단어에 레오니에가 소스라치며 반응했다.
“서, 설마!”
“그 설마다.”
“아, 안 돼!”
“돼.”
펠리오가 동화책을 펼쳤다.
“옛날, 옛날…….”
“아아악!”
레오니에가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제발 그것만큼은!”
“존재 자체가 죄악인 성범죄자, 아. 실수, 나무꾼인지 사냥꾼인지 모를 놈이…….”
“성범죄 미화 동화 읽지 마!”
아이가 자지러졌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기어코 아이의 입에서 사과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펠리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괴로운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동화책을 읽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악! 아아아악!”
레오니에의 비명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보는 바리아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상체를 떨군 바리아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트라가 다가와 살폈다. 그제야 바리아가 상체를 가누어 일으켰다. 웃음으로 가득 차 부풀었던 볼도 겨우 가라앉혔다.
“우리 남편이랑 딸, 너무 귀엽지?”
바리아가 여전히 시끌벅적한 부녀를 가리켰다.
“마님께서 그리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트라가 싱긋 웃었다. 사실 그의 눈엔 서로 잡아 죽이려고 안달 난 맹수들의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내 변태 취향에 관음과 감금 및 사기 결혼까지 넣으려는 거야? 그만 읽어!”
“어차피 고칠 수 없는 변태 취향이라면, 너의 말로가 이렇게 끔찍할 수 있다는 걸 미리 가르치려는 거지. 아빠의 깊은 뜻이다.”
“이 미친 아빠가 진짜!”
엎치락뒤치락 살벌하게 싸우는 탓에 사용인들이 주위에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 탓에 트라는 저 둘을 보며 귀엽다는 바리아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역시 마님이야.’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 * *
늦은 밤이 되었는데도, 로타는 잠들지 못했다.
‘오늘도 늦어…….’
새까만 창밖과 자정을 가리키는 시곗바늘 탓에 더욱 불안해졌다.
남편인 레무스를 기다리던 로타는 불안한 걸음으로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화장대 앞에 멈춰 서더니,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화려한 세공이 돋보이는 거울 속엔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산뜻한 분홍색 머리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자랑거리이며, 매끄럽고 고운 피부는 스스로 감탄할 정도였다.
선한 눈망울은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쉽고, 타고난 몸매는 지나가는 사내들의 시선을 항상 사로잡았다.
그러나 거울 속 로타의 표정은 행복하지 못했다.
‘레무스…….’
로타는 불안했다. 요즘 들어 부부 관계가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레무스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늘 저를 어르고 살펴 주는 다정함도 전과 달리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의무적으로 하는 행동 같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로타가 벌떡 일어났다. 괜히 거울을 봐서 그렇다. 요즘 들어 거울을 보면 제 아름다움에 대한 뿌듯함보다 불안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특히 바리아가 공작 부인이 된 뒤부터.
‘그딴 게 왜 공작 부인이 된 거야!’
바리아는 항상 말주변이 없고 음울한 언니였고, 저의 아름다움을 항상 부러워했던 언니였다. 부모님은 늘 저만 사랑했다. 소심하고 양보심 많은 언니는 그다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변해서는, 덩달아 모든 게 변했다.
부모님은 이제 어떻게든 바리아와 만나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얼마 전에 수도에 올라왔단 소식에 보레오티 저택에 찾아갔지만 문전 박대만 당했다.
‘너는 왜 언니한테 못되게 굴어서!’
그리곤 로타에게 그 화풀이를 했다.
‘네가 그때 바리아를 호수에 밀어서 저리 변한 거 아니야!’
‘동생이라는 게 언니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하니?’
‘이기적이고 지독한 것!’
로타는 기가 막혔다. 지금껏 바리아를 향했던 모질고 엄격했던 비난이 전부 제게로 되돌아왔다.
‘차별은 자기들이 해 놓고는!’
열불이 난 로타가 손부채질을 했다.
‘호수에 빠진 건, 언니가 나한테 장신구를 양보하지 않다가 빠진 거잖아!’
그땐 제 편을 들어줬으면서, 왜 이제야 비난한단 말인가.
부모님의 적나라한 변화에 로타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언니는 공작 부인이 되고.
부모님은 이제 제게 매정해졌고.
‘이리 수준이 떨어져서야…….’
쯧.
다과회에서 저를 대놓고 모욕했던 네오펠리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꺄아아악!”
기어코 로타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로타?”
그때, 때마침 레무스가 들어왔다. 그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로타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그래요? 힘든 일 있어요?”
하지만 그 찰나의 감정을 순식간에 지워 버리고, 다정하고 상냥한 남편을 가장하며 다가갔다. 로타는 그런 레무스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이 너무 미워요! 언니만 좋아하고!”
“진정해요.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그럴 리가 있나요?”
“전부 제 탓이래요! 저 때문에 언니가 그렇게 변했다고.”
“로타, 이제 뚝 하죠.”
레무스가 로타의 등을 토닥였다. 로타는 레무스의 품에서 한참을 훌쩍였다. 등을 토닥이는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하아.’
레무스가 귀찮음이 묻은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품에 안긴 로타가 차마 보지 못한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
‘허구한 날 울고 있어.’
그는 이 이상 아내의 짜증스러운 울음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주변 상황이 너무도 ‘지랄’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술가 후원 단체가 그렇게 와해 되고, 연루된 귀족들은 모두 한 차례씩 조사를 받았다.
올로르도 조사를 받았고, 그 와중에 체포된 귀족들도 있었다. 그나마 수비테오 황제의 입김으로 올로르는 조사만 받고 끝났다.
황제는 결국 몇몇 비루한 가문과 예술가들만 희생시키고 나머지를 도와줬다.
하지만 악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는 게 없었다. 투자한 사업마다 본전을 찾지 못하고, 가문이 소유한 상단에 납품되는 물건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심지어 오늘은 거래처가 다음 계약은 못 하겠다는 말까지 전했다.
하다못해 잘 달리던 마차 바퀴도 빠져서 사고가 날 뻔했다.
레무스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 와중에 부친인 올로르 자작은 아이는 언제 낳느냐고 성화였다. 레무스는 남들 다 하는 임신조차 제대로 못 하는 로타가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매력도 점점 떨어졌다.
약혼 당시의 로타는 참 예뻤다. 10대 특유의 어린 젊음이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나이를 먹더니 마음이 차차 식어 갔다.
‘……레지나도 그랬지.’
로타를 여전히 품에 안은 채, 레무스가 한때 사랑했던 소녀를 떠올렸다.
“레무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던 레무스가 시선을 내렸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로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뭔데요?”
레무스가 한결 다정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눈물을 머금은 로타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레무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올로르는 백조가 상징이잖아요?”
“그렇죠. 고고하고 아름다운 백조지요.”
“혹시 그 상징을 다른 사람이 장신구로 하고 다니면, 어떨 거 같아요?”
“상당히 불쾌하고 모욕적이겠죠.”
레무스가 말했다.
실제로 벨리우스 제국에서 동물 모양의 장신구는 보기 드물었다. 이전부터 특정 동물을 가문의 상징으로 사용한 역사가 가장 큰 이유였다.
특히 황실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수장 가문의 상징을 이용해 만들었다간 모욕죄로 아주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물어보죠?”
“그게, 다과회에서…….”
로타가 잠깐 망설였다.
“보레오티 영애가요.”
“보레오티 영애가 왜요?”
레무스가 어린아이 달래듯 말을 따라 하며 물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필 또 보레오티를 끄집어내는 로타를 욕하는 중이었다.
자상한 남편의 말투에 용기를 얻은 로타가 말했다.
“백조 팔찌를 하고 있었어요.”
로타의 등을 토닥이던 레무스의 손이 멈췄다.
“걸렸을까?”
방 침대에 홀로 누운 채, 레오니에가 공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과연, 걸렸을까…….”
통통, 탄력 좋게 튕기는 장난감 공은 곧 벽 아래에 둔 바구니 속으로 떨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포물선 낙하였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표정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다과회에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소녀는 자신의 팔에 두 바퀴 감아 걸었던 백조 목걸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로타와 그 옆에 있던 귀부인이 바라본 걸 확인했다.
로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다른 쪽은 분명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말을 안 했나?’
분명 미리 알아둔 다과회 초대 손님 중, 그 귀부인은 입이 꽤나 가벼운 편이었다. 로타에게 말을 했을 게 분명했다.
“아이씨…….”
레오니에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그 부인이 답지 않게 말을 아꼈다면 또 그 목걸이를 팔에 두르고 돌아다녀야 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올로르를 용서하는 게 속 편했다.
“아가씨.”
그때, 코니가 들어왔다.
“리코스 자작 가족들께서 도착하셨어요.”
레오니에가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언니!”
현관 홀로 빠르게 달려가니, 루페와 인세레아가 막 저택에 들어온 참이었다. 둘은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올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 아가씨, 또 멋져지셨네요.”
루페와 인세레아가 달려오는 레오니에에게 인사했다.
“루피는? 루피는 어딨어?”
레오니에가 두리번거렸다.
“우리 루피, 이리 와 볼까?”
“조금 전에 막 일어났어요.”
리코스 자작 부부가 뒤에 있던 유모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루페가 때 한 점 없는 눈망울을 끔뻑이며 처음 보는 장소를 살피고 있었다.
루페가 어린 아들을 안아 레오니에한테 보여 줬다.
“루피, 아가씨께 인사해야지.”
“우리 아기 늑대!”
아기 맹수가 호들갑을 떨며 헤벌쭉 웃었다. 이를 빤히 바라보던 루피가 까르르 웃으며 손을 뻗었다.
“넌 어째 점점 무거워지니.”
“아우, 으아아!”
“목청도 씩씩한 게 아주 좋아.”
그렇게 잘 커야 한다고, 레오니에가 루피의 볼에 부리 쪼듯 입술을 쪽쪽 부딪쳤다.
“으응, 으응.”
장래 상사가 되실 분의 뽀뽀가 귀찮아진 루피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레오니에가 바닥에 내려 주니, 아기 늑대가 부실한 걸음마를 내디뎠다.
“루피 걷는 거 봐.”
엉거주춤한 걸음과 씰룩이는 엉덩이가 너무 귀여웠다.
“난 아기 엉덩이 너무 귀엽더라. 닭 다리 두 개 붙인 것처럼 오동통하잖아.”
“우리 아가씬 정말 재미있으시다니까!”
인세레아가 찰떡같은 비유라며 호호 웃었다.
“닭 다리…….”
정작 루페는 제 아들의 엉덩이가 그런 것과 동급 취급되어 기분이 착잡했다.
“루페 아저씨.”
그때, 레오니에가 어느새 몰래 다가왔다.
“어땠어요?”
루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예상대로입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생일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아기 맹수가 그대로 집무실로 향했다.
“아빠! 엄마!”
하지만 들어가기 전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건 잊지 않았다.
“레오?”
안에서 문을 열어 준 건 바리아였다.
레오니에가 안을 살펴보니, 펠리오는 소파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부모님이 오늘은 격한 준비 운동을 하지 않은 듯했다.
“움직였대.”
레오니에가 부모님께 말했다.
드디어 올로르가 움직였다.
* * *
레무스는 몇 날 며칠 잠을 자지 못했다.
‘보레오티 영애가요, 백조 팔찌를 하고 있었어요.’
처음엔 로타가 뭘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레무스는 보레오티가 자신들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오만한 족속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올로르의 상징을 장신구로 차고 다닌다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보레오티 영애가 다과회에서 백조 장식을 팔에 걸었다. 로타와 함께 참석했던 귀부인도 똑같은 말을 했다.
레무스는 로타와 귀부인이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다.
‘보레오티 영애는 그때…….’
레무스는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딱 두 번 목격했다. 첫 번째는 선황 추모 연회에서, 두 번째는 바로 작년 1황자의 생일 연회에서.
제대로 마주했던 건 생일 연회였다. 보레오티 공작을 그대로 빼닮은 소녀는 이미 귀족들을 자신의 발아래 취급했다. 거만하고 뻔뻔한 작태에 레무스는 적잖게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저를 노려보던 검은 눈은 흉기와 같았다.
‘레지나는 그러지 않았는데.’
레무스는 자연히 저의 옛사랑을 떠올렸다. 보레오티답지 않은 어리숙한 점과 저에게만 맹목적이던 순애보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보레오티 영애도 꽤나 탐나는 미모를 지녔지만, 그렇게 표독스러운 인상은 영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레지나가 훨씬 나아.’
하지만 레지나도 스물이 가까워지니 점점 어른의 모습이 묻어나기 시작했고, 레무스는 아쉽게도 레지나를 두고 떠나는 슬픈 결정을 내렸다.
저와 그녀의 사랑은 추악한 속세에 물들기 전에, 그렇게 아름다웠던 순간으로만 남겨야 했다.
‘……레지나?’
그때, 레무스의 머릿속에 오싹한 ‘만약’이 떠올랐다.
‘아닐 거야.’
하지만 곧 레무스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성인이었던 레무스는 미성년이었던 레지나와의 관계에서 항상 예의를 갖췄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보레오티의 피가 흐르는 그녀를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날도 분명 피임을 했다.
‘사우라도 분명 임신은 안 했다고 연락했어.’
그리고 무사히 레지나를 보레오티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레무스는 레지나에게 자신의 이름과 본명을 단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보레오티에 돌아가도 자신이 걸릴 일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사우라에게 매번 연락을 보냈다.
하지만 사우라의 연락은 어느 순간 끊어졌다.
‘그게 정확히…….’
연락이 끊어졌던 때를 떠올리던 순간.
“……!”
레무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 그 사생아가…….”
보레오티 공작이 사생아를 데려온 때와, 사우라의 연락이 끊긴 때가 얼추 비슷했다. 그리고 사우라에게서 받은 마지막 연락은 근처 고아원에서 몸을 숨기며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보레오티 영애가 고아원에서 지냈었다고?
“……하!”
레무스는 자신의 추측에 감탄하며 서둘러 사람을 불렀다. 당장 이 추측을 확실히 해야 했다. 그리고 움직여야 했다.
만일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지금 일어나는 모든 악재를 떨쳐 낼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엄청난 횡재가 손에 들어오게 된다.
바로, 보레오티의 검은 피가.
* * *
“아가씨의 예상대로입니다.”
수도에 도착한 루페는 곧장 보레오티 가족들에게 보고를 올렸다.
“저희가 퍼트렸던 가짜 친모의 정보를 통해 무덤을 훼손한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셋 중 한 놈은 놓치고, 나머지 둘을 생포했습니다.”
“그럼 도망친 그 사람이…….”
바리아가 다음을 예측했다.
“……올로르가 어디까지 움직이는지 알려 주겠군요.”
“그렇습니다, 부인.”
루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친모의 무덤은 가짜답게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친 도굴꾼은 무덤 속 텅 빈 관을 똑똑히 보았다.
만약 그가 올로르가 보낸 사람이었다면, 이 사실은 분명 올로르에게 전해질 터였다.
“진짜 올로르가 보낸 사람들인가?”
펠리오가 물었다.
“잡아 둔 나머지 둘의 정체는 뭐였지?”
“돈 받으면 뭐든 하는 부랑배 같은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의뢰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주 새빨간 머리칼은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
루페의 보고를 조용히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감쌌다. 감싼 손가락 하나가 아이의 입 언저리를 톡톡 두드렸다.
“말해 봐.”
아이가 무언가를 마음에 걸려 하는 걸 알아챈 펠리오가 턱짓을 했다.
“황비, 말인데…….”
레오니에가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확실히…….”
그 점은 펠리오를 비롯한 이곳에 모인 전원이 동의하는 바였다.
오랫동안 공들인 사냥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왔다. 바로 우시스 황비였다.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정말 그 사람이 위험할까요?”
바리아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녀는 올로르 가문이 우시스 황비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었다.
“그들은 황비를 거의 도구나 수단처럼 여겼어요. 황제파 귀족들도 황비를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요.”
심한 사람들은 우시스 황비를 ‘앵무새’라고 불렀다. 자신들의 부탁을 황제에게 무조건 똑같이 말해 준다는 이유였다.
“그 정도면 황비가 흑막인 편이 더 재밌겠는데?”
레오니에가 솔직히 말했다. 만약 자신이 그런 처지였다면 그들에게 처절한 응징과 복수를 다짐했을 거다.
“……어라? 그럼 지금껏 보인 모습이 다 연기였단 거잖아.”
섬뜩한 ‘만약’에 레오니에가 팔을 쓸었다. 자신의 가정을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위험이 너무 컸다. 펠리오를 바라보니, 그 역시 아까처럼 태연한 표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조금 이해가 가지.”
펠리오가 말했다.
“지금껏 황제가 저질렀던 멍청한 사건 사고에는 항상 우시스 황비가 얽혀 있었으니.”
펠리오는 지금껏 우시스 황비와 연관된 사건들을 하나하나 말해 줬다.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에서부터…….”
아주 큰 사건부터 자잘하고 기가 막힌 것까지. 따지고 들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우시스 황비의 철없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네 연회 참석도.”
“나 어렸을 때, 그거 말이지?”
레오니에가 그때를 떠올렸다. 어릴 적에 참석했던 황실 연회도, 그 계기는 보레오티의 사생아가 보고 싶다던 우시스 황비의 부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시스 황비는 그날 연회에서 만나지도 못했다. 나중에 파르두스 후작을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조차도 황비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연회 초반에는 그 모습을 보았단 사람이 몇몇 있는 모양이지만, 레오니에가 깽판을 치기 직전부터는 아예 안 보였다고.
“예술가 후원 단체 사건도 마찬가지야.”
바리아가 말했다.
“우시스 황비가 후원받는 예술가들의 작품이 보고 싶다고 부탁했었나 봐. 그래서 황제가 사건이 터지기 전에 그들을 만나겠단 약속까지 잡았고.”
그러고 다음 날에 사건이 터졌다. 황제는 그 약속 때문에 더욱 의심을 샀었다.
“우와…….”
레오니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소름을 넘어 진심으로 무섭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원작에서도?’
멍청하고 눈치 없는 여자로 묘사되었던 우시스 황비가, 사실은 수비테오 황제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려고 작정한 배신자였단 말인가?
“그런데…….”
그러나 레오니에는 신중했다.
“우리 편이란 확신이 없어.”
“맞습니다.”
루페가 말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황비가 황제에게 그리 도움이 되는 사람은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올로르 가문과도 관계가 어떤지 확실하지 않잖아요.”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히잉, 엄마아아.”
아기 맹수는 그 틈에 엄마 맹수의 품에 폭 안겼다. 작고 검은 뒤통수 뒤로 아빠 맹수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콕콕 박혔다.
“황비는 올로르 가문 출신이에요. 그녀를 황비 자리에 올린 건 그들이에요.”
“본인은 그걸 원했을까…….”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너무 작은 웅얼거림이라서, 바리아와 루페는 알아듣지 못했다.
“…….”
그러나 레오니에는 들었다. 맹수의 송곳니로 오감이 남들보다 발달한 아이의 청각은 아빠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인지했다.
“혹시 말이야.”
펠리오의 중얼거림을 들었던 레오니에가 말했다.
“누가 있는 거 아냐?”
“누가 있다고?”
바리아가 물었다.
“누가 황비를 돕거나, 정보를 준다는 뜻이니?”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 황비가 지금껏 일어난 일에 관여했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황제를 향한 복수 때문이라면.”
그리고 이 모든 게 저를 황비 자리에까지 올린 가문에 대한 복수라면.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혼잣말에서 단서를 얻었다.
“황비는 제 가문에 기댈 리가 없잖아.”
“……그렇구나!”
바리아가 알겠단 듯이 말했다.
“황제가 목적이라면, 황제파인 올로르한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으니까.”
“황비가 혼자 이 모든 걸 계획했다는 것엔 문제가 있지요.”
루페도 새로운 가능성에 목소리를 높였다. 약간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우시스 황비는 아둔하고 멍청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연기라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실수 따윈 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황비는 어떻게 황제를 궁지로 몰았을까.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계획은 어떻게 세웠고, 계획을 세우기 위한 정보는 누구에게서 얻었는가.
“확실한 건 올로르는 아니야.”
지금껏 일어난 일들을 보면, 황실과 함께 올로르도 여러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레오니에의 손엔 이제 땀이 가득했다.
‘이것도 바뀐 흐름.’
놀라운 사실을 마주하기 직전인 아기 맹수는 숨까지 조금 거칠어졌다. 원작에선 큰 비중이 없었던 바보 같던 여자가, 이젠 가장 두렵고 속 모를 위험 요소로 떠올랐다.
아우스트 공작의 예언대로였다.
‘아비의 작위를 빼앗으세요.’
그때, 계속 마음에 걸리던 공작의 예언이 떠올랐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레오니에가 서둘러 떨쳐 냈다. 그것은 아우스트 공작의 예언 중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지만, 지금 당장 실현될 내용은 아니었다. 이것에 대한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되었다.
“그럼 누구지?”
생각을 떨칠 겸 레오니에가 물었다.
“황궁에서 우시스 황비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고, 이를 모을 수 있고, 수도 없이 접근해도 의심을 사지 않을 사람.”
그러나 문제는 이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황비의 주변에 없었다. 그녀는 수비테오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외부인과의 접촉은 자연스럽게 제약된다.
“……황자?”
그때.
바리아가 설마, 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리스, 황자 전하?”
바리아는 도서관에서 알리스 황자가 책을 읽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 * *
“황자 전하! 조금만 더 서둘러 주십시오…….”
“나도 지금 빠르게 걷고 있지 않으냐.”
“곧 있으면 수업이 시작됩니다.”
“아, 거참.”
시종의 재촉하는 소리를 기어코 참지 못한 크리세토스 황자가 한마디 했다.
“여행 갔다가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왜 이리 재촉인 게야.”
“전하께서 수업에 늦으시면 황후 폐하께서 저를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결국 혼나는 건 나이니까 괜찮다.”
“그러나 직접 혼나는 건 저이지 않습니까!”
시종은 황자의 칭얼거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이쯤 되자 크리세토스 황자도 퍽 억울했다.
“내가 늦고 싶어서 늦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크리세토스 황자는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독을 풀 시간이 없었다. 수비테오 황제가 미뤄 둔 일이 자신의 집무실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되느냐. 난 아직 황자라고.”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도 않은 자신이 황제의 업무를 대신 본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행 후 저의 책상에 쌓인 수많은 서류를 보자마자 눈앞이 아찔했다.
“도대체 폐하는 무얼 하고 계시느냔 말이다.”
“그것이…… 오늘은 중요한 손님을 만난다고 하십니다.”
“하아…….”
크리세토스 황자는 보면 볼수록 가관인 부친의 행보에 말을 잃었다.
‘나랏일보다 중요한 게 또 무어가 있다고.’
기껏 해 봐야 올로르나 에르바누처럼 자기 엉덩이나 토닥여 줄 놈들만 만날 게 뻔했다. 크리세토스 황자는 자신이 그의 아들이란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얼굴만 닮아서 다행이야…….’
속은 어머님을 닮아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던 찰나.
“……알리스?”
크리세토스 황자의 눈이 얇아졌다. 건너편에서 다가오던 알리스 황자의 눈도 가늘어졌다.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먼저 말을 건 이는 크리세토스 황자였다.
“그러는 너는?”
알리스 황자가 삐뚜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 저 자식 성질머리하곤.’
하여튼 인사 한 번 제대로 받은 기억이 없었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수업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그럼 가.”
“……어쩐 일이냐고 물었는데, 아우의 물음에 답도 안 해 줍니까?”
인내를 끌어모아 한 번 더 물었다.
“아우는 무슨.”
그러자 알리스 황자가 한껏 비웃었다.
“서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크리세토스 황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노골적인 알리스 황자의 말에 그 역시 애써 착한 아우 흉내를 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지.”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한, 어쨌건 이곳에선 똑바로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 크리세토스 황자의 신념이고 규칙이었다. 그런 것조차 지키지 못하면 황제와 똑같은 꼴이 될 뿐이었다.
“네 여동생은 잘 있고?”
알리스 황자가 크리세토스 황자의 뒤에 있는 호위 기사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어린 티가 남은 은발의 기사는 고개를 살짝 낮췄다.
“가족이라 생각 안 한다더니?”
크리세토스 황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숨는 것도 그만해야지.”
“스칸은 정말 아파.”
“여러모로 발목만 잡는 동생님이네.”
“함부로 말하지 마.”
크리세토스 황자가 목소리를 험상궂게 낮췄다. 그의 황금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칸은 나의 둘도 없는 동생이고, 친구야.”
“…….”
“누구보다 노력하는 내 동생한테,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해.”
그 말에 알리스 황자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잘 알지.”
두 황자는 서로를 한참 노려봤다.
“저, 전하…….”
그때,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시종이 크리세토스 황자를 재촉했다. 이제 정말로 가지 않으면 수업에 늦을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결국 먼저 움직인 건 크리세토스 황자였다.
“그럼 평소처럼, 아무 일 없단 듯이 지나갈까?”
크리세토스 황자가 선의를 베풀듯 물었다. 알리스 황자도 그에 동의하듯이 눈을 가볍게 감았다.
그렇게 서로 아무 일 없단 듯이 지나가려던 순간.
“이 역겨운 소아 성애자가!”
귀를 찢을 듯한 고음이 두 황자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 * *
전날.
올로르는 보레오티에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두 가문 간 긴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황제 폐하의 앞에서 서로 진실만을 털어놓자는 내용이었다.
“이 새끼, 이거……!”
편지를 받은 레오니에가 기함을 했다.
“황제한테 벌써 떠벌렸어?”
그러다 자신이 내뱉은 ‘새끼’란 단어 사용에 흠칫했다. 슬그머니 옆을 보니, 바리아는 눈 옆이 경련할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이는 안도했다.
“펠리오, 역시 그냥 지금 죽이면 안 될까요?”
바리아가 간절히 부탁했다.
“레오가 그런 곳에서, 그딴 소리를 들으며 겪을 일을 생각하니……!”
바리아는 아직 자신이 제대로 된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많이 모자라고, 서툰 점이 많았다. 여전히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새끼보단 제대로 된 부모라고 확신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분이 끓어오르고 역겨움이 치밀었다.
“정말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이렇게 해선 안 돼요!”
“그래서 이 방법을 택한 겁니다.”
답하는 펠리오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놈은 인간이 아니니까.”
하지만 편지가 담겼던 붉은 봉투를 쥔 손은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올로르의 뻔뻔한 작태에 그 역시도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지옥에 마왕이 있다면.”
레오니에는 아예 창가에 기대어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자리 하나 예약해 주세요. 한 놈 보내겠나이다.”
그렇게 살의를 가까스로 누른 세 가족은 다음 날 황궁으로 향했다.
“히익!”
길 안내를 위해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레오티 가족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전신에 두드러기 같은 닭살이 돋고 오금에 힘이 쭉 빠졌다. 시종은 저도 모르게 벽에 몸을 기대었다.
분명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데, 시종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문득 시종의 머릿속에 송곳니를 내밀며 으르렁, 위협하는 맹수가 떠올랐다.
저 세 사람이 지나가는 길마다 피가 흥건한 환각마저 보였다.
‘피비린내…….’
분명 피가 없는데, 시종은 제 코를 괴롭히는 역한 쇠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시종은 문득 자신이 앞으로 흐르게 될 피 냄새를 미리 맡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떨쳤다.
“이, 이곳입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시종이 보레오티를 안내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향하는 곳엔 황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열어.”
약속 장소인 응접실에 도착한 펠리오가 말했다.
곧 문이 열렸고, 보레오티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수비테오 황제와 레무스 올로르, 올로르 자작이 있었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로타를 찾았다. 레무스의 아내인 저의 여동생은 이곳에 없었다.
그리고 우시스 황비도 없었다.
레오니에를 본 레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아……!”
그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정말, 정말 네가……!”
“아빠, 이 새끼, 또 공화정 탐하나 봐.”
레오니에가 펠리오한테 일러바쳤다. 또 자신들을 보며 인사를 안 한다는 뜻이었다. 펠리오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로르는 이 제국의 지엄한 신분과 작위가 아주 하찮은 모양이군. 지난번 연회에서도 그러더니, 오늘도 감히 황제 폐하를 앞에 두고 그런 실수를…….”
“올로르 영식.”
수비테오 황제가 가볍게 경고했다.
“조심하도록.”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레무스가 다시금 자세를 잡고 인사했다.
“송구합니다, 보레오티 공작. 보레오티 공작 부인.”
은인을 만난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세였다.
“편지를 받았습니다.”
펠리오는 그런 레무스를 무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바리아도 레오니에를 자신의 품에 안듯이 데려가 그 옆에 앉았다.
“두 가문 간에 긴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뭐가 그리 성급하신가요.”
올로르 자작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러나 그의 붉은 시선은 레오니에를 적나라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레무스가 숨을 몇 번이고 토했다.
“공작님, 제 말을 듣고 너무 화를 내시지 않길 바랍니다.”
“황제 폐하 앞에서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없다.”
펠리오가 약속했다. 그 말에 수비테오 황제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그는 자신을 존중하는 귀족들의 태도를 무척 좋아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레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공작님께선 공작 영애를 어디서 데려오셨습니까?”
“……고아원에서 데려왔지.”
펠리오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약간의 거짓말도 섞어 가면서.
“이루지 못했던 사랑이 있었고, 그녀는 내게 임신 사실도 말하지 않고 사라졌다.”
그러다 그녀가 죽었단 소식과 함께 아이 하나가 남겨졌단 소식을 접했다고.
“그래서 난 제국의 고아원을 찾아 방문했지.”
서부 지역의 어딘가라고 덧붙여 말한 펠리오가 아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러자 굳어 있던 레오니에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두 부녀는 눈을 마주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걸 왜 묻죠?”
바리아가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다정한 모습을 멍하니 보던 레무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두 분께 정말 죄송하지만…….”
겨우 말할 것처럼 굴다가 다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레무스가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꾸욱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제 아이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레무스가 잔혹한 진실을 자신의 입으로 털어놓았다.
당연하게도.
응접실의 분위기는 어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저거, 진짜 미친놈이구나.’
레오니에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물론 자신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서 다행이긴 했다. 그러나 설마 이 정도로 레무스 올로르가 제정신이 아닐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는 아예 레오니에를 아련한 시선으로 응시하기까지 했다.
그때.
“나 참.”
레무스의 고백에 한참 말이 없던 펠리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소파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
황제의 응접실이 단번에 펠리오의 사적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의 행동에 황제고 올로르고, 바싹 긴장했다.
“아아, 기가 막혀서.”
펠리오는 기어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어깨를 떨었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같잖게 보였으면.”
기가 막힌 듯, 한숨이 옅게 흘러나왔다.
“잡것들이 이리도 기어오르지?”
웃음을 거둔 펠리오가 매서운 시선으로 붉은 백조들을 노려봤다.
“감히 내 딸을 건드려?”
펠리오는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저 붉은 백조들의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았다. 이마를 짚지 않은 반대편 손이 빠득빠득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진짜로 새 모가지를 쥐고 죄는 것처럼.
하지만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올로르 부자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서도 레오니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제 폐하.”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른 펠리오가 황제를 불렀다.
“이 일이 어찌 된 것입니까.”
그제야 덩달아 겁먹었던 수비테오 황제가 말을 꺼냈다.
“올로르 자작 영식의 말로는, 보레오티 공작 영애가 올로르 가문의 상징인 백조 장식을 지니고 있었다던데.”
“그건 틀림없이 제 것입니다.”
레무스가 단호히 말했다.
“제가 그녀에게 주었으니까요.”
“그녀?”
바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히며 반박했다.
“그게 누구죠?”
“공작님의 누이입니다.”
“공작님껜 자매가 없습니다. 저분은 외동이에요.”
“하지만 사촌 누이가 있었지요.”
레무스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인 것처럼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어떡하지……?’
이 상황을 홀로 말없이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몸을 얕게 떨었다.
‘……아빠가 못 참고 죽이면 어쩌지?’
지금 이 순간, 레오니에가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옆에 있는 펠리오였다. 말 한마디 없이 올로르 부자가 하는 짓을 바라보는 그의 주위로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뻗어 나왔다.
레오니에는 그런 펠리오의 손을 꼭 쥐었다. 바리아의 손도 꼭 쥐었다. 덕분에 아이의 모습은 지금 상황에 겁을 먹고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지나와 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올로르 자작 영식.”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꾹꾹 눌렀다 튀어나온 저음이 바닥을 긁다시피 했다.
“작작 지껄이는 게 좋을 거야.”
“그러나 사실입니다!”
“뭐가 사실이란 거지?”
이제 슬슬 펠리오의 인내심은 바닥까지 꺼져 갔다. 더는 저 새 새끼의 기막힌 헛소리를 들어줄 아량을 베풀 수 없었다.
“그대가 어떻게 레지나를 아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젠 고인 모독까지 하나?”
펠리오가 말했다.
“내 사촌 누이는 이른 나이에 병으로 눈을 감았다.”
“올로르 영식.”
펠리오의 말에 수비테오 황제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레지나가 죽었다는 건 아까 레무스에게서 전해 듣지 못한 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그건 저 역시 의문입니다.”
레무스가 추억에 젖은 시선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레오니에가 인상을 와락 썼다. 그러나 레무스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토기가 올라왔다. 맹수의 송곳니가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공작님은 어째서 거짓을 말씀하시나요?”
“무슨 거짓을?”
“레지나는 병으로 죽지 않았고, 소문이 무성하던 공작님의 첫사랑이란 평민 여자도 거짓이지 않습니까.”
펠리오를 감히 노려본 레무스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해서 아내를 둔 남편으로서 부끄러운 과거입니다만, 저는 레지나와 사랑의 도피를 했습니다.”
레무스는 레오니에가 자신의 딸이란 걸 증명하고자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저흰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레지나는 제게 헤어지자 말했고, 저는 그 말에 상처를 받고 떠났지요.”
“그리고, 증거가 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올로르 자작이 제 품에서 가느다란 줄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아시지요?”
목걸이엔 백조 모양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이건 저희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징표 같은 겁니다.”
“공작 영애가 다과회에서 이것과 똑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레오니에는 그들이 내민 목걸이를 바라봤다.
“……맞아요. 차고 갔어요.”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 레무스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돌아가신 제 고모님이 남기신 유품일 뿐이에요!”
“고모님이 아니라 낳아 주신 어머니란다.”
레무스가 몸을 살짝 낮추며 레오니에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이제 그는 아예 말까지 놓았다.
펠리오와 바리아가 레무스를 노려봤다. 몰염치한 작태에 말조차 안 나왔다.
그런 레오니에를 어쩔 수 없단 듯이 바라보던 레무스가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청이 있습니다.”
“무언가?”
지금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수비테오 황제가 물었다.
“벨리우스 제국의 이름 아래, 저의 명예를 걸겠습니다.”
레무스가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가 제 친자임을 확인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