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손님들 (29/51)

#29. 손님들

북부는 무척 평화로웠다.

다른 지역보다 시원한 여름은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새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기나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며, 덕분에 광장은 어느 때보다 북적거렸다.

“뭐랄까, 참.”

그렇게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수도랑 별 차이가 없네.”

“사람 사는 곳이 다르겠습니까.”

모자가 달린 망토를 둘러 입은 두 사내가 광장을 돌아다녔다.

사내라기엔 아직 어린 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오히려 소년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절대 소년이라 칭할 만한 게 아니었다.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어.”

눈으로 보고 나서야 깨우친다며, 어중간한 길이의 금발을 질끈 묶은 소년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진짜 춥구나.”

신기한 듯이 말하는 그의 입에서 희뿌연 입김이 나왔다.

“아직 가을이잖아. 그치?”

“북부는 겨울이 빨리 오는군요.”

“같은 제국인데 이렇게 다르다.”

심지어 자신들이 수도에서 출발했을 땐 땡볕이 따가울 정도였다.

“너무 들뜨시진 마십시오.”

은발의 소년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 여동생은 이 오라비 걱정이 태산이지.”

그러자 금발의 소년이 씩 웃으며 동행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소리만 요란한 두드림인지라 아프진 않았으나, 은발의 소년이 주변을 살피며 점잖게 타일렀다.

“여긴 북부입니다. 호칭을…….”

“……조심하라고? 다 알아.”

누구보다 가장 잘 안다며, 금발의 소년이 잔소리를 태연스럽게 넘겼다.

“우리, 점심 어쩔래?”

“그냥 가볍게 해결하죠.”

“그럼 나 과일 먹을래. 북부 과일은 한 번도 안 먹어 봤거든.”

그리 말하고선 금발의 소년이 냅다 과일을 파는 노점상으로 향했다.

“주인! 여기서 가장 맛있는 게 뭔가요?”

“어머나, 잘생긴 총각들이네.”

막 과일을 진열하던 주인이 깔깔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역시 미인은 미인을 알아보네요.”

소년의 능청스러운 언변에 노점상 주인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리 말한다고 나올 건 없는데!”

“예쁜 걸 예쁘다고 했는데, 뭘 얻겠다고요.”

“으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기분이 한껏 들뜬 주인은 과일 몇 가지를 소개해 줬다.

“특히 이게 맛있어요. 원래 북부 과일은 달지 않은 편인데, 이건 정말 달아.”

보레오티 공작 영애께서도 좋아한다며, 주인이 열심히 홍보했다. 그 말에 두 소년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럼 그거 주세요.”

곧 주인이 허름한 갈색 봉투에 과일을 담아 줬다. 거기다 값도 싸게 받았다. 기분 좋은 칭찬을 들은 대가였다.

“점심 싸게 샀다, 그치?”

소년들은 광장 한쪽에 마련된 쉼터에 앉아 과일을 나눠 먹었다. 과일은 희멀건 자주색이었다. 심지어 썩은 것처럼 쪼글거렸다. 하지만 용기 내 베어 문 한입은 아주 달콤하고 아삭거렸다.

“이 맛있는 걸 왜 황궁에선 못 먹었지?”

“형님.”

“아아, 알았어. 하여튼 잔소리.”

식욕이 왕성한 두 소년에게 과일은 아주 순식간이었다.

“잠깐 좀 쉬다 갈까?”

형의 물음에 은발의 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시끌벅적한 광장을 한참을 말없이 구경했다.

“……스칸.”

형이 입을 열었다.

“공작 영애는 어떤 사람이야?”

“보레오티 공작을 빼닮았습니다.”

‘스칸’이라 불린 은발의 아우가 답했다. 소년은 딱 두 번 만났던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회상했다.

“……그리고 변태입니다.”

“……뭐?”

형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평가였다.

“어떤 의미로 변태인 건데?”

사람 때리고 괴롭히는 거 좋아하는 쪽이냐고, 형이 물었다.

“때리진 않고, 희롱을 합니다.”

“희롱?”

“근육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거, 변태잖아.”

“그래서 아까 제가 변태라고…….”

그때, 두 형제의 눈앞에 검은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보레오티 마차다!”

근처에 있던 어린아이가 외쳤다.

“공작님이 오신 걸까요?”

“공작님은 바쁘신 분이야.”

“그럼 아가씨?”

“욘석! 영애라고 불러야지.”

대화를 훔쳐 듣던 형제들이 조용히 마차를 뒤따라갔다.

마차는 곧 어느 상점 앞에 멈춰 섰다. 호위로 따라온 기사가 마차 문을 열어 손을 내밀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탁한 분홍색 머리를 내려 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뒤이어 검은 머리를 비스듬히 올려 묶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

형이 씩 웃었다.

“…….”

반면 아우는 말없이 검은 머리의 소녀를 지켜만 보았다.

최근 보레오티 저택은 경사가 겹쳐 일어나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겹경사였다.

첫 번째는 공작의 결혼이었다. 육아에 정신이 팔려 결혼할 기미조차 없었던 공작이 드디어 아내를 맞이했다. 결혼식은 아직 치르지 않았으나, 이미 상대의 이름은 가문에 올라간 상태였다.

그리고 두 번째 경사의 주인공은 차기 공작인 보레오티 영애였다.

“우리 아가씨가, 흐윽, 드디어…….”

마차를 호위하던 파보가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너 우냐?”

마차를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에 있던 멜레스가 기함을 했다.

“그렇지만, 아가씨가…….”

파보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멜레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일주일 동안, 우릴 한 번도 희롱하지 않았잖아……!”

두 번째 경사는 바로 레오니에의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조금 더 상세히 표현하자면, 근육 희롱을 하지 않는 레오니에였다.

소녀의 취향은 유명했다. 능글맞고, 징그럽고, 소름 끼칠 정도로 근육에 진심인 변태였다. 그리고 피해자는 근육으로 똘똘 뭉친 글라디고 기사단이었다. 당연히 소녀의 부친인 펠리오도 포함이었다. 실상 그가 가장 큰 피해자였다.

“이번 건의함에 아가씨한테 희롱당했단 의견이 하나도 없었잖아.”

“그거 때문에 누가 건의함 턴 거 아니냐고 한바탕 난리였잖아.”

심지어 모노는 아가씨가 크게 아프신 게 분명하다고 난리를 쳤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건강했고, 이 모든 기적의 뒤엔 바리아의 노력이 있었다.

“주군은 아가씨를 일찌감치 포기하셨지만, 마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어.”

“야, 주군도 포기한 건 아니야.”

멜레스가 서둘러 말했다.

“주군은 아가씨를 사랑으로 포용하신 거야.”

“그게 포기라는 거지.”

파보가 냉정히 답했다.

어쨌건 레오니에의 절제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고로 오늘은 레오니에에게 상을 주기 위해 서점에 방문했다.

“마님, 아가씨.”

곧 마차가 멈추고, 멜레스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가장 먼저 바리아가 내렸다. 그리고 레오니에가 폴짝 뛰어내렸다.

“엄마, 몇 권까지 돼?”

“읽을 수 있을 만큼만 사면 어떨까요?”

“그러면 일단…….”

필요한 책들을 손가락으로 세며, 레오니에가 즐겁게 중얼거렸다.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책 제목은 대부분 그림 자료와 소설이었다. 간간이 영지 운영과 관련된 전문 서적도 튀어나왔다.

“엄마도 뭐 살 거야?”

“으음, 한번 둘러보고요.”

“‘인생 다 부질없다’ 읽어 봐!”

레오니에가 자신의 애독서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바리아가 고려해 보겠다며 싱긋 웃었다. 제목만으로도 이미 바리아의 취향이었다.

두 모녀는 서로 다 고른 뒤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으흐흠.”

책장을 누비는 레오니에의 입에선 흥얼거림이 절로 나왔다.

‘나, 연기가 타고났나 봐.’

레오니에는 최근 열연했던 ‘착한 아이’ 연기가 상당히 흡족했다.

영악한 소녀는 근육 탐미를 줄이고 자제하는 척을 했다. 한마디로 혼을 태워 연기했고, 이는 아주 잘 먹혔다.

바리아는 그런 레오니에를 예뻐했고, 주변 어른들도 장하다며 칭찬했다.

레오니에의 연기는 그만큼 완벽했다.

‘아빠한텐 안 먹혔지만.’

펠리오는 객관적이었다. 아무리 레오니에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딸을 항상 냉정하게 파악했다.

고작 교양 수업 따위로 아이의 변태성이 잠재워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튼 날 너무 잘 알아.’

투덜거리는 아이의 입술은 기쁘게 올라가 있었다.

그래도 레오니에는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교양 수업이 효과가 있었다며, 바리아가 조금만 더 하고 그만두자고 먼저 제안해 줬다.

사실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싫어하는 교양 수업을 억지로 하는 것이 매번 마음에 걸렸었다. 아이를 위해서라지만, 싫다는 아이를 계속 붙잡고 타이르는 것이 양심에 많이 찔렸다.

레오니에는 그런 엄마에게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나도 힘들었어.’

근육 박애를 자중해야 하는 건 꽤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대신 그건 공부를 핑계로 방에서 실컷 할 수 있었다.

최근 레오니에는 본격적으로 음흉한 근육 덩치들을 그려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오늘 서점에서 인체 해부도와 진득한 연애 소설을 살 생각이었다.

“……으흐흐흐!”

레오니에가 괴기한 웃음을 지었다. ‘장미 들판의 여신’, ‘근육 광공의 모신’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후우.”

망측한 계획을 실컷 세운 레오니에가 길고 깊이 호흡을 정리했다. 그리곤 뒤를 돌아봤다.

“나와.”

레오니에가 아무도 없는 책장 너머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다 눈치챘으니까, 당장 나와.”

“…….”

“안 나오면 죽여 버린다?”

소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제야 책장 뒤에서 전신을 망토로 가린 정체불명의 인물 두 사람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니에는 가장 먼저 그들의 체격을 살펴봤다. 몸에 두른 망토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으나, 훌쩍 솟은 키와 달리 체격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10대 중후반.’

레오니에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멜레스와 파보가 수상쩍은 인물을 바리아와 저가 있는 이곳에 그냥 들여보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전신을 가린 망토까지 입지 않았는가.

‘무기는 없나 보군.’

있었으면 기사들이 입구에서 막았을 거다.

‘그리고 신분도 확실하고.’

멜레스와 파보가 의심하지 않았을 정도라면 명확한 신분증을 지녔을 거다.

한참을 생각하던 레오니에가 두 사람을 향해 턱짓했다.

“벗어.”

짧고 강력한 한마디였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고, 그 말에 두 사람이 곧 망토를 벗어 모습을 드러냈다.

“…….”

그리고 이를 보는 레오니에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반갑습니다, 공작 영애.”

금발의 소년이 먼저 인사했다.

“이런 식으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공손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제 이름은 크리세토스.”

크리세토스 아킬라 벨리우스.

“제국의 2황자가, 공작 영애께 인사 올립니다.”

* * *

“…….”

펠리오는 기가 막혔다.

“서점에 간다고 안 했던가?”

펠리오의 물음에 맹수 모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서점에 갔어요! 그쵸, 레오?”

“맞아! 이것 봐!”

바리아와 레오니에는 자신들이 고른 책을 직접 보여 줬다.

“그럼 저것들은 또 뭐야.”

지난번 남부에선 새끼 곰 소동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보다 훨씬 골치 아픈 두 마리가 저택에 떡하니 들어와 있었다.

“저거라니요, 공작.”

크리세토스 황자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옆에 있는 스칸디아 황녀는 그래도 잘못한 건 아는지 시선을 아래로 슬쩍 내렸다.

“우리가 얼마나 말 잘 듣는 애들인데. 어지간한 개보다 낫다고요.”

“뭐래, 개가 더 낫지.”

레오니에가 반박했다.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우리도 이 정도면 한 미모 하지 않습니까?”

크리세토스 황자가 저와 스칸디아 황녀를 가리키며 자신 있게 말했다.

“…….”

레오니에가 둘을 빤히 바라봤다.

금발은 선하고 호감이 그냥 가는 인상이었다. 황갈색 머리는 금빛에 가까웠고, 은색 눈동자도 선명하게 반짝였다. 마치 보석을 품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수비테오 황제를 너무 닮아 비호감이었다.

반면 은발은 레오니에한텐 친숙한 얼굴이었다. 티그리아 황후를 닮아 아름답고, 이벡스를 닮아 점잖은 면모가 돋보였다.

거기다 수도에서 겁을 좀 먹였더니 알아서 얌전히 있기까지 하니.

“으음…….”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선심 쓰듯 말했다.

“난 반려동물 키울 땐 중성화는 필수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중성화하실래요?

거침없는 레오니에의 제안 덕에, 능청스럽던 황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옆에 있던 스칸디아 황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자신들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했다. 전신을 감싼 망토도 괜히 두 손으로 꼭 감쌌다.

‘어머나.’

그 모습에 바리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레오니에한테 당하는 두 사람이 너무 웃겼다. 동시에 황자에게도 지지 않는 딸아이의 기개가 아주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전하 옆에…….’

바리아가 크리세토스 황자 옆에 있는 은발의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하의 호위 기사?’

처음 보는 얼굴인데, 볼수록 누군가를 닮은 것 같았다.

“어쨌건 말입니다.”

무안해진 크리세토스 황자가 헛기침을 가볍게 토했다.

“저희를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너희가 무작정 온 거지.

펠리오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북부엔 무슨 일이십니까.”

눈앞에 있는 금발의 소년은 제국의 2황자였다. 황제파가 곧 죽어도 크리세토스 황자를 노리고 있을 텐데, 이렇게 함부로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다…….’

펠리오의 시선은 곧 은발의 소년에게로 향했다.

‘황녀까지.’

황자도 황자지만, 스칸디아 황녀는 더욱 나와선 안 될 사람이었다. 황녀가 남자란 사실은 결코 들켜선 안 될 비밀이었다.

하나만 나타나도 머리가 아픈데 둘이나 북부에 와 있다니.

“……팰 수도 없고.”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세 가족이 오순도순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이 하필 어마어마한 잡것들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아빠, 내가 패줄까?”

레오니에가 효도 한번 해 주겠다며 주먹을 상큼하게 쥐어 보였다.

“그럴까?”

펠리오가 선뜻 허락했다.

“농담이죠? 그거 농담이죠?”

예상치 못한 냉대에 크리세토스 황자가 크게 당황했다. 반면 스칸디아 황녀는 대충 이런 분위기를 예상한 듯이 덤덤히 서 있었다. 그는 이미 레오니에의 거침없는 성격을 경험했기 때문에 면역이 있었다.

“그런데 전하.”

다행히 바리아가 대화의 흐름을 제대로 잡았다.

“이곳에 어인 일이신가요?”

“아, 공작 부인!”

크리세토스 황자가 기쁘게 외쳤다.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해졌다.

“아름답고 고아하신 보레오티 공작 부인!”

황자의 요란스러운 언변에 펠리오의 한쪽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얼굴에 드리워졌던 짜증은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그 변화를 눈치챈 크리세토스 황자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저희는 그저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리곤 냅다 증거를 보여 줬다. 품에서 꺼낸 건 헤스페리 후작의 인장이 찍힌 신분증명서였다. 레오니에가 이를 낚아채 상세하게 살폈다.

“이거 위조 아냐?”

증명서를 살핀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이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크리세토스 황자가 설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하찮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딴 헛소리나 지껄이니 아직도 황태자가 못 된 거지.”

매정한 소녀의 한마디에 집무실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레오!”

놀란 바리아가 소리쳤다. 황태자 승계 문제는 아주 예민한 사안이었다. 특히 크리세토스 황자에겐 더욱 그랬다.

황후 소생이란 정당한 자격을 지녔음에도, 정부 출신인 황비의 아들과 그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

황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당혹과 수치, 동시에 이를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무력감이 드러났다.

“으음, 진짜인가?”

정작 분위기에 찬물을 뿌려버린 레오니에는 신분증명서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도 아니었다. 레오니에한테 황위 계승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왜 헤스페리 후작이 이걸 준 겁니까?”

어느새 레오니에 곁으로 다가온 펠리오가 손에서 증명서를 쏙 빼내며 물었다. 그 틈에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조용히 타일렀다.

레오니에는 입술을 삐죽이며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오히려 저 두 사람이 잘못했다며 투덜거렸다.

“엄마랑 아빠랑 같이 놀려고 했는데, 저 두 놈이 방해했잖아.”

“그래도 대놓고 말하면 안 되죠.”

“그럼 속으로 해도 돼?”

“……속으로만 해요.”

응? 바리아는 곧 자신이 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말에 모순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아채진 못했다.

“……일단.”

그 틈에 정신을 차린 크리세토스 황자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그건 진짜랍니다. 외조부께서 손주들 편히 여행하라고 애정을 베푸신 거죠.”

“손주들?”

삐친 레오니에를 품에 안고 다독이던 바리아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황녀 전하도 오셨나요?”

“오려고 했는데 못 왔죠.”

황자가 싱긋 웃었다.

“아시다시피 몸이 연약해서.”

“그럼 혼자 오셨어요?”

레오니에가 믿을 수 없단 목소리로 물었다.

“황녀 전하께선 홀로 외로이 계시고?”

그러면서 슬쩍 스칸디아 황녀를 보았다. 은발의 소년이 미간을 좁혔다.

“혹시 두 분…….”

레오니에가 크리세토스 황자와 스칸디아 황녀를 번갈아 가리켰다. 손가락질을 받은 두 형제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곤 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크리세토스 황자는 심지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구역질까지 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레오니에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제가 워낙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서요.”

“바리아, 잘 보세요.”

펠리오가 굳어 버린 바리아에게 말했다. 그녀는 딸아이의 발언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견뎌야 할 고생을.”

“…….”

“참고로 난 지금도 희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펠리오가 고자질했다.

“누, 누구랑 엮이는데요?”

바리아가 조심히 물었다.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펠리오는 바리아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어린 것을 모르는 척했다.

펠리오는 여행 중이라는 황자와 그의 호위 기사를 기꺼이 저택에 묵게 했다.

“같은 방으로 준비할까요?”

그리고 더욱 기꺼이 합방 여부를 물었다.

“무조건 따로.”

그래도 나의 호위니까, 너무 멀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크리세토스 황자가 경련하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말했다.

펠리오는 황자의 청대로 각방을 내주었다. 그렇게 마련된 손님방을, 사용인들이 빠르게 정리했다.

두 방은 아주 근사하고 훌륭했다. 바리아가 합방 전에 묵었던 손님방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역시 절경이었다.

그리고 황자의 요청대로, 두 방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에 있는 문 하나로 오고 갈 수 있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그 비밀스러운 문을 발견한 황자가 동생을 붙잡았다.

“저 사람들, 너에 대해 알잖아!”

“그렇습니다.”

양팔을 붙잡힌 스칸디아 황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팔을 죄는 형님의 손아귀 힘이 억센 탓이었다.

“그런데 아까 왜 그런 식으로 말한 거지?”

특히 레오니에가 걸렸다.

어떻게 보아도 적대적이고 경계 어린 태도였다. 소녀는 북부에 찾아온 소년들을 향해 보이지 않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나 지릴 뻔했어.”

황자가 솔직히 고백했다. 차라리 바지에 지려서라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로 무서웠다.

“저를 붙잡고 지릴 뻔했다고 고백하지 마십시오.”

황녀가 질색했다.

“그리고 아프니 좀 놔주십시오.”

“우리 둘을 그렇고 그런 관계로 엮었다고!”

크리세토스 황자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동생의 부탁대로 손을 놓아줬다.

“난 황자야!”

황제의 총애를 받지는 못해도, 어엿한 제국의 황자였다. 거기다 황태자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누가 봐도 곱게 자랐고, 다들 나에 대해 뭐라고 수군거렸어도 그건 다 뒤에서 했어! 대놓고 앞에서 안 했다고.”

그런 황자에게, 조금 전 맹수 부녀의 놀림은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너, 공작 부인 봤냐?”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는 크리세토스 황자가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부인이 아까 우리 둘을 어떻게 봤는지 아냐고!”

“봤습니다.”

스칸디아 황녀가 중얼거렸다.

“아련하게 보셨죠.”

그리 답하는 황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스칸디아 황녀가 남자란 비밀을 전혀 모르는 바리아는 두 형제, 아니, 두 연인을 동정했다.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도 내비쳤다.

“인생 최악의 경험을 여기서 하네.”

“겨우 그거 가지고 무슨 최악이래.”

“스칸, 너 말투가 왜…….”

왜 그 모양 그 꼴이냐고 투덜거리려던 크리세토스 황자가 순간 펄쩍 뛰었다.

“고, 공작 영애!”

황자가 소리쳤다.

“아오, 시끄러워.”

레오니에가 시끄럽단 듯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예의도 없이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이라니.”

“내 지금 안 놀라게 생겼습니까!”

“아까 보니 낯짝 두껍게 굴더만.”

“지금은 당연히 놀라지!”

크리세토스 황자가 자신과 스칸디아 황녀를 가리켰다.

“이 방엔 나랑 동생 둘밖에 없었지 않나요!”

“동생? 연인 아니고?”

“영애는 다 알잖아요!”

“나중에 울 엄마 앞에서는 연인인 척 좀 해 봐요.”

울 엄마 은근 궁금해하던데, 레오니에가 히죽이며 말했다. 동지가 생기는 건 아주 근사한 일이었다. 특히 가족 중에 생긴다면 더욱.

“왜 계속 괴롭힙니까?”

“그럼 안 괴롭히게 생겼어요?”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내 가족들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잖아요!”

“방해 안 했습니다!”

“엄마랑 더 놀려고 했는데 못 놀았잖아!”

“영애는 도대체 몇 살인데 모친과 놀려고 합니까?”

“열두 살!”

그리고 이제 막 열셋이 될 거라고, 레오니에가 열두 살 답지 않은 분노를 보였다.

그 기세에 눌린 크리세토스 황자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스칸디아 황녀가 물었다.

“이거.”

레오니에가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를 보여 줬다.

“여기 우리 집이에요.”

“그랬지요, 영애의 집…….”

스칸디아 황녀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럼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분위기가 살짝 풀린 틈을 타, 황자가 물었다.

레오니에가 황자와 황녀를 한 번씩 쓱 훑어봤다. 금발과 은발, 서글서글한 인상과 무뚝뚝한 인상, 두 형제는 썩 닮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눈은…….’

둘 다 티그리아 황후를 닮았다.

“아빠가 뭐 좀 물어보라고 하셨거든요.”

“공작이?”

크리세토스 황자가 겨우 놀란 심장을 추스르며 물었다.

“그럼 아까 물어보지 않고?”

“거기엔 아직 알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공작 부인?”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여행객 둘과 보레오티 세 가족뿐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배제되는 건 바리아 한 사람이었다.

“아빠의 배려에요.”

지금부터 물어볼 질문을, 펠리오는 바리아가 아직은 듣지 않기를 바랐다.

‘목을 조르고 칼로 제 배를 찔렀죠. 그때 본 미소가, 우시스 황비와 닮았거든요.’

그리고 이는 레오니에도 동의하는 바였다.

레무스 올로르와 닮은 우시스 황비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들려줄 필요가 없었다.

“혹시 두 사람.”

레오니에가 물었다.

“우시스 황비에 대해 뭐 아는 거 있나요?”

* * *

“황자 전하.”

창밖을 내다보던 청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짜증 나.’

알리스 황자의 미간이 설핏 찡그려졌다. 그러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레무스 올로르였다.

“괜찮으십니까?”

‘역겨운 새끼…….’

자연히 떠오르는 감상을 애써 누른 채, 알리스 황자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는 지금 남부로 잠시 휴양을 겸해 내려와 있는 중이었다. 별장에서 홀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자신이 남부에 있단 걸 들은 올로르 자작이 말도 없이 찾아왔다.

기어코 찾아온 그는 함께 식사하기를 권유했고, 알리스 황자는 지금 그 식사를 끝내고 올로르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레무스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한 곳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레무스의 질문에 답한 이는 건너 자리에 앉은 올로르 자작이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마차를 타고 있는데.”

그의 말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뻔뻔했다.

“북부의 보레오티 공작도 이런 걸 타보진 못했을 거다.”

“자작은 타봤나?”

알리스 황자가 물었다.

“보레오티 공작이 타는 마차를.”

“어차피 마차가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아무리 좋아봤자 크게 다를 거 없다고, 올로르 자작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알리스 황자는 조금 전 자작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마차가 다 거기서 거기지.”

자신이 한 말에 크게 당한 올로르 자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러니 딱히 불편하지 않다.”

그러니까 말 좀 걸지 마. 그런 뜻을 담아 외조부와 외숙부를 흘겨본 알리스 황자가 다시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에 슬며시 기댄 황자의 초록 머리가 부스스하게 짓눌렸다.

곧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건물들 사이사이로 하얗게 부서지는 무언가가 보였다.

“……바다로군.”

알리스 황자가 중얼거렸다.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레무스가 물어봤다.

“마차를 세워라.”

그 말에 곧 마차가 멈춰 섰다.

“전하! 어딜 가십니까!”

올로르 자작이 혼자 마차에서 내리는 알리스 황자에게 소리쳤다.

“소리를 낮춰라.”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알리스 황자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무식하게 굴지 좀 마라. 이런 광장에서 내 신분을 아주 대놓고 노출하려는 것이냐.”

알리스 황자는 자신의 외조부에게도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그 말에 올로르 자작이 울컥했다.

“그럼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레무스가 제 부친을 가까스로 말리며 제안했다.

“됐다, 둘 다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라.”

“그럼 전하께서는 어쩌시고요?”

“난 내 별장으로 돌아가마.”

“저희가 저택에서 잘 모시겠습니다.”

올로르 자작이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그래도 아까보단 한결 가라앉은 말투로 다시금 제안했다.

“……그래 봐야 자작 가문이.”

해 봤자 얼마나 한다고.

“하다못해 공작 가문은 되어야 내 비위를 맞출 텐데.”

한껏 비웃은 알리스 황자가 마차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리곤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녹음이 우거진 듯한 초록 머리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저 천하고 망할 것!”

마차가 다시 출발하면서.

올로르 자작이 욕을 퍼부었다.

“저것이 누구 덕에 황자가 되었는데!”

“아버지, 진정하세요.”

“내가 아니었으면 평생 사생아의 아들로, 과부의 자식으로 살 뻔했다고!”

주제도 모르는 무례한 것이라고, 올로르 자작은 쉴 새 없이 제 손자를 욕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알리스 황자를 낳은 제 딸인 우시스 황비가 언급되었다.

“그 빌어먹을 것이 제대로 못 키워서 그래!”

차마 맨정신으로 듣기 힘든 욕설이 이어졌다. 누가 들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를 욕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작의 욕은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딸에게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레무스는 이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물을 흘려보내듯 넘겼다.

“내가 무식하다고? 절 낳은 우시스 고것이 얼마나 무식하고 천한지도 모르고!”

“그래도 우시스는 아버지의 은혜를 알죠.”

레무스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부친을 위로했다.

“그건 그렇지.”

그제야 올로르 자작이 욕을 멈췄다.

“그나저나 황자 전하를 홀로 보내도 될까요?”

레무스가 걱정스레 말했다.

“최근 남부 치안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얼마 전에 다쳤지 않았느냐.”

자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식을 향한 걱정보다는 그런 사소한 일에 휘말려 다친 아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

“살짝 베였는데, 다행히 금세 아물었습니다.”

레무스가 오른팔을 들었다. 옷 속에 감춰진 팔 안에는 단검에 베인 흉터와 그것을 치료하고 감싼 붕대가 숨어 있었다.

“……네 몸이나 챙겨라.”

황자는 너무 걱정 말라며, 올로르 자작이 일축했다.

“따라오던 기사가 알아서 지키겠지.”

알리스 황자가 남부로 내려오면서 데려온 기사 한 명이 있었다. 그는 마차 뒤를 계속 따라다녔으니, 그가 황자의 곁을 지킬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너희는 자식을 언제 볼 생각이냐.”

자작이 레무스에게 물었다.

“곧 보겠지요.”

“그 ‘곧’이 도대체 언제냐고.”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레무스와 로타 사이엔 자식이 들어서지 않았다. 올로르 자작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아이라는 게 저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며느리한테 문제가 있는 거냐.”

자작은 로타를 의심했다. 레무스는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쯧.”

그 미소를 본 자작이 다리를 꼬며 창밖을 바라봤다.

“너도 날 닮아서 아랫도리 문제는 없을 테고…….”

올로르 자작은 제 아들의 넘치는 활력을 잘 알았다.

“애야 밖에서도 들일 수 있으니, 걱정은 딱히 없다.”

“로타가 슬퍼할 겁니다.”

레무스가 염려했다.

“자기가 못 가진 게 죄지.”

올로르 자작이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좀 자중해.”

그리곤 주의를 줬다.

“바깥 놀이도 적당히 하고.”

“조심하겠습니다.”

“하필 그 집 장녀가 보레오티한테 시집을 가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에르바누는 어쨌건 제국에서 가장 큰 가문과 연을 맺었다. 그러나 보레오티가 에르바누를 챙기고 돌볼 일은 절대 없을 거다.

하나 공작이 그 집의 장녀를 무척이나 사랑한단 사실은 유명했다. 그러니 아직 에르바누를 놓는 건 시기상조였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올로르 자작이 누군가를 떠올렸다.

“너한테 사람이 한 명 있었지?”

“사람이라면…….”

“너한테 반했던 암살자 말이다.”

“아아, 사우라 말이군요.”

레무스가 이제 막 떠올랐단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곤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우라와는 몇 년 전부터 소식이 끊겼습니다.”

“어쩌다.”

“아마 정체가 들통난 것 같습니다.”

“……혹시 그거?”

마물 불법 거래? 자작의 물음에 레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보내던 사우라의 연락이 끊기던 시점과 겹쳤습니다. 그 여자가 머무르던 영지의 주인도 작위를 잃었고요.”

그 말에 올로르 자작이 인상을 와락 썼다.

“사우라의 흔적은?”

“다 태웠습니다.”

그 말에 올로르 자작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넌 날 많이 닮았어.”

자작은 절 닮아 똑 부러진 장남이 자랑스러웠다.

“…….”

알리스 황자는 점점 멀어져 가는 마차를 잠시 지켜봤다. 곧 그의 등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조금 전 그 마차를 조용히 뒤따르던 황자의 호위 기사였다.

“도련님.”

그런데 호위 기사는 무례한 호칭으로 알리스 황자를 ‘황자 전하’라 부르지 않고, ‘도련님’이라고 낮춰 불렀다.

“그래.”

하나 알리스 황자는 기분 나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했다. 마차 안에서 짜증 내고 예민하게 굴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좀 늦었구나.”

예상치 못한 방해로 약속에 늦었다면서, 알리스 황자가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이후의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소문대로 놀아야지.”

깽판을 치고, 포악하게 굴고.

황제를 빼닮아 패악질을 일삼는다는 소문대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알리스 황자가 허무한 웃음을 곁들인 채 말했다.

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둘은 마차 한 대를 빌렸다. 올로르 자작이 자랑하던 고급 마차보다 낡고 승차감도 불편한 것을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바닷가의 절벽이었다.

그 끝엔 낡은 등대가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두둑한 삯을 챙긴 마부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요즘 등대지기 귀신이 많이 노했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얼마 전에 황실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귀신한테 홀려 바다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마부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사람을 지키는 등대지기 귀신이 그만큼 화가 났다는 거지요.”

“이런, 참 좋은 귀신인데.”

알리스 황자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렇게 마부는 혼자서 애먼 걱정을 떠든 뒤에야 떠났다.

“등대지기 귀신이 사람을 해쳤다…….”

“도련님.”

“간만에 듣기 좋은 소문이네.”

많이 좀 해치시지. 홀로 중얼거린 황자는 등대 위를 바라봤다.

“알리!”

그때, 머리 위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청옥의 머리를 풀어헤친 누군가가 팔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기다려! 내려갈게!”

“천천히 내려와.”

그러다 다친다고 이어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등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리곤 냅다 알리스 황자의 품에 안겼다.

“알리!”

“루스.”

알리스 황자가 제게 안긴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하아.”

그제야 황자의 입에서 편안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둘은 서로를 살피며 안부를 물었다.

“알리, 잘 지냈어? 거기 힘들지?”

“너는 어때?”

“나야 할머니랑 잘 지내지.”

“네가 잘 지낸다면 됐어.”

“야, 너도 잘 지내야지!”

소녀가 청옥의 머리를 흔들며 나무랐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 좋다!”

이내 싱그러운 미소가 소녀의 입가에 그려졌다. 싱그러운 웃음이, 녹음이 푸르게 진 초목 같았다.

* * *

펠리오는 오후 즈음에 손님 두 사람을 불렀다.

“북부에 온 진짜 이유가 뭡니까.”

그의 손에 쥔 위스키 잔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잔에 담긴 커다란 얼음 아래 잔잔히 깔린 주홍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우리 공작은 어쩜 그리 술도 멋들어지게 드시는지.”

크리세토스 황자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전에 말이지요.”

황자가 자신들의 궁금증을 먼저 물었다.

“왜 황비에 대해 물어본 겁니까?”

그는 얼마 전에 레오니에가 물어본 질문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레오가 전하기론 아는 것이 없으시다던데요?”

정작 펠리오는 얻어 낸 것이 딱히 없어, 반응이 꽤나 시큰둥했다.

“맞아요, 아는 건 별로 없죠.”

황자가 옆에 있던 황녀에게 그렇지 않으냐고 물었다. 스칸디아 황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시스 황비에게 뭐가 있습니까?”

“그 여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두 형제는 펠리오의 생각에 쉬이 공감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궁에서 직접 겪은 우시스 황비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좋게 말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바라는 게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떼쓰기만 했다. 그런데도 황제는 그런 황비를 감싸고 아꼈다.

“오히려 그 뒤에 있는 올로르 자작이 더 의심스럽지.”

우시스 황비는 올로르 자작이 거의 제물처럼 바친 여자였고, 그러다 수비테오 황제의 눈에 들어 지금의 자리에 올라왔다.

“소문 같은 건 없습니까?”

“공작도 다 알만한 소문일 겁니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올로르 자작의 사생아란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남부에서 그간 홀로 지냈다든가, 여러 남자 꿰차며 방탕하게 살았다든가…….”

우시스 황비에 대한 소문은 이래저래 음란하고 듣기 거북한 것이 많았다.

아무래도 수비테오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정부로 지낸 탓이 컸기 때문이다.

‘사생아라…….’

펠리오는 귀에 거슬리는 단어 하나를 붙잡았다.

“황비도 사생아였군요.”

“뭐, 올로르가 좀 많이…….”

황자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방탕하지 않은가.”

“남부엔 자신이 올로르 자작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스칸디아 황녀가 이어 말했다.

“그런 것치고는 추문이 별로 없군요.”

펠리오가 의아해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싸지르기만 싸지르고.”

크리세토스 황자가 엄지손가락을 교차해 새가 날갯짓하는 흉내를 냈다.

“책임을 안 지니, 남겨진 여자들만 고생하며 아이를 키우는 거지.”

“거기다 붉은 머리는 아주 흔합니다.”

황녀가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보레오티처럼 특정 색깔을 지니고 태어나는 핏줄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만 해도 다르잖아요.”

비록 아버지가 다르긴 해도, 둘은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였다. 그렇기에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럼 황비는 어떻게 된 겁니까?”

펠리오가 물었다. 우시스 황비의 머리칼은 초록색이었다. 올로르의 상징인 붉은색과 완전히 상반되는 보색이었다. 올로르가 그런 황비를 쉽게 자식으로 받아들였을 리가 없었다.

“증표가 있었다나, 뭐라나…….”

크리세토스 황자가 자신이 주워들은 소문 하나를 이야기했다.

“원래 올로르가 상인 가문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뭔가 증표 같은 것을 하나씩 지니고 있는데, 우시스 황비의 생모가…….”

“……그 증표를 지니고 있었다?”

펠리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야기가 아주 재밌게 되어 갔다.

“혹시 그 증표가, 백조 모양과 관련된 건가요?”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거 같다고 황자가 쉬이 수긍했다.

“올로르는 신생 귀족인지라 가문의 상징에 좀 집착하니까.”

그들이 타는 마차며 수도에 지어진 저택만 보아도 백조가 안 새겨진 곳이 없었다.

“그렇군요.”

후우, 하고 짧게 숨을 내쉰 펠리오가 책상에 몸을 기대었다.

“……그럼 이제 두 분의 이야기로 넘어가죠.”

펠리오가 다시금 두 형제에게 대화 주제를 옮겼다.

“여기 온 이유가 뭡니까?”

“우린 공작께 부탁 하나를 청하려고 왔습니다.”

“부탁?”

펠리오의 시선이 스칸디아 황녀에게로 넘어갔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어렸을 적엔 티그리아 황후를 쏙 빼닮더니, 이젠 이벡스가 뚜렷하게 보였다.

“아아.”

거기에서 펠리오가 뭔가를 떠올렸다.

“궁을 떠나실 생각이군요.”

스칸디아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제 서부로 갈 생각입니다.”

“최근 황제가 스칸을 시집보낼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런데 그 새끼가 나름 고심한다는 혼처가 전부 다 최악이라서 말입니다.”

“저도 알음알음 들었습니다.”

펠리오는 전해 들은 스칸디아 황녀의 혼처 후보지를 하나하나 읊조렸다.

“우호국의 세 번째 황비, 손버릇 안 좋은 간신의 정실부인…….”

멀쩡한 아버지라면 결코 자신의 자식에게 정해 줄 수 없는 혼처만 고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역겹고 속이 뻔한 혼처였다.

수비테오 황제는 제 딸을 도구로 여길 뿐이었다.

‘뭐, 진짜로 딸은 아니지만.’

애초에 진짜 자식도 아니다만.

그래도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펠리오는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당신들께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뭐, 우리한테만 그런 건 아니지요.”

크리세토스 황자가 덤덤히 말했다.

“황제의 최우선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내도, 자신도, 하물며 그토록 총애하는 황비도 아닙니다.”

“그에게 우리는 피로 묶어 둔 도구일 뿐이지요.”

스칸디아 황녀가 이어 말했다.

펠리오는 그런 두 형제를 말없이 지켜봤다.

“……무서운 겁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내뱉었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는 건.”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을, 펠리오는 조금 전 두 형제의 대화에서 깨달았다.

“하지만 그 반대도.”

펠리오의 긴 손가락이 위스키 잔 위에 얹어졌다.

“자식이 부모를 포기한다는 것도.”

부모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접어버린 자식들이 등을 돌린다는 것은.

“……참 잔인하군요.”

손가락은 곧 둥그런 잔을 따라 빙그르르 돌았다. 술이 살짝 묻었던 탓에 손가락 끝이 살짝 젖었다.

‘만일.’

펠리오는 상상했다.

‘만일 레오가…….’

만일 레오니에가 제게 아주 큰 상처를 입고 등을 돌린다면, 가족 간의 연을 끊고 모든 기대를 저버리는 순간이 생긴다면. 펠리오는 죽음에 버금가는 큰 상처를 입을 거라 확신했다.

“……뭐, 황제 입장에선 억울할 것도 없지요.”

끔찍한 상상에서 벗어난 펠리오가 태연히 말했다. 사실 수비테오 황제는 동정할 가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그가 뿌린 씨를 그대로 거두는 것일 뿐이었으니.

“그럼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됩니까?”

“공작이 마도구 수집이 취미라지요?”

스칸디아 황녀가 말했다.

“거기에 약도 있다지요.”

“어디서 뭘 들은 겁니까?”

펠리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했지 않습니까.”

이때다 싶은 크리세토스 황자가 히죽 웃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펠리오를 건드려서 속이 아주 후련했다.

“여행을 다녔다고요.”

북부는 최종 여행지일 뿐, 이미 두 형제는 동부고 남부고 다 돌아다녔다.

“약 하나만 빌려주세요.”

“값은 어떻게 치르게요?”

내 수집품들은 제법 비싸다며 펠리오가 먼저 으름장을 놓았다. 도와줄 생각은 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 말 들으면 그냥 줄걸요?”

그러나 황자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 동부가 만드는 거.”

손가락을 딱딱, 두 번 튕긴 크리세토스 황자가 즐겁게 말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왜냐하면 ‘동부’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펠리오의 표정이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사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저 험상궂은 얼굴에 어릴 때처럼 자지러질 뻔했지만, 크리세토스 황자는 그런 감정을 꾹 숨기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우리가 좀 도왔습니다.”

* * *

“나는 지금 ‘기부니’야!”

“‘기부니’요?”

레오니에는 빨랫감을 들고 가던 코니 옆을 쫄쫄 따라다녔다.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코니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레오니에는 자랄수록 아름답고 멋있어졌지만, 오늘은 유난히 귀여웠다. 꼭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기부니’이야! 기분이 좋거든.”

“왜 기분이 좋으실까요?”

“왜냐하면!”

오랜만에 거추장스러운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레오니에는 치맛자락을 두 손에 쥐곤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레이스가 촘촘히 박힌 치맛자락이 꽃처럼 흔들렸다.

“좀 있다가 부모님이랑 내 생일 선물을 사러 갈 거니까!”

우렁찬 아기 맹수의 자랑에 코니가 제 일처럼 기뻐했다.

“너무 좋으시겠어요! 또 선물 사러 가세요?”

“울 부모님은 날 너무 좋아해서, 내 생일날까지 만날 사 준대!”

“어휴, 이러다 미리 준비해 둔 방이 금방 차겠어요.”

코니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보레오티 공작저에선 레오니에의 생일 한 달 전부터 방 몇 개를 미리 비워 뒀다.

일명 ‘선물 모시는 방’이었다.

레오니에의 생일 몇 주 전부터, 제국 전역에선 공작 영애의 생일을 축하하는 선물이 올라온다.

문제는 선물들이 너무 많아서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심지어 몇 년 전엔 쌓아 둔 선물들이 무너져 사람이 다칠 뻔했다.

그 뒤로 펠리오는 아예 방 몇 개를 비워서 선물을 모아 놓았다. 그리고 생일날에 안전이 확인된 선물들만 추려 아이에게 직접 풀게 했다.

“매년 신기록이에요.”

코니가 제 일처럼 뿌듯해했다.

“아직 아가씨 생일까지 일주일하고 나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방을 다 채우시다니.”

“내가 낸데!”

당연한 일 아니겠냐며 레오니에가 으스댔다.

‘기부니’가 된 레오니에는 코니와 헤어졌다.

‘역시 생일은 좋아.’

들뜬 마음으로 저택을 돌아다니며, 레오니에는 자신의 생일 준비로 분주한 이 순간을 마음껏 만끽했다.

“보레오티 영애!”

그리고 여전히 북부를 떠나지 않은 황자와 황녀도 축하해 줬다.

레오니에는 제게 다가오는 금발과 은발 형제를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 자식들 설마 내 생일 때까지 죽치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곧 영애의 생일이로군요.”

“그렇답니다. 선물 있어요?”

속물은 손을 척 내밀었다.

“당연히 없죠!”

크리세토스 황자가 활짝 미소 지었다.

“에잇.”

레오니에는 능글맞은 황자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아악!”

황자가 그대로 주저앉으며 쓰라린 미간을 손으로 가렸다.

“영애는 도대체 절 뭐로 보는 겁니까! 저 이래 봬도 귀한 몸인데!”

“황궁에서나 귀한 몸이지, 여기선 그냥 손님일 뿐이지요.”

레오니에가 주저앉은 크리세토스 황자를 내려다보며 콧구멍 주변을 긁었다. 그리곤 후, 하고 불었다.

“보레오티는 손님을 이런 식으로 맞이합니까?”

크리세토스 황자가 살짝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러나 돌아온 즉답은 눈보라처럼 시리기만 했다.

“……그렇습니까.”

기선 제압을 하려던 황자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차기 황제에게 점수라도 딸 것 같았나요?”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차, 차기 황제?”

그 말에 크리세토스 황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내가 황제가 될 것 같습니까?”

“그럼 올로르의 핏줄을 내 머리 위에 올릴까요?”

그럴 일은 죽어도 없다며, 레오니에가 혀를 짧게 내두르며 어깨를 으쓱했다.

“들었냐, 스칸! 공작 영애께서 나를 지지하시는구나!”

“다행입니다, 형님.”

스칸디아 황녀가 기쁜 미소를 지었다.

“이야, 이거 어쩌면 나와 영애는 선대 황제 폐하와 선대 공작처럼 사이가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레오니에가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큰일인데…….”

아무래도 크리세토스 황자는 제 조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레오니에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속이 훤히 보이네.’

수비테오 황제는.

‘저 혼자 독식하려고 그러나?’

욕심쟁이 같으니.

레오니에는 수비테오 황제를 철부지 악동처럼 여겼다. 물론 황제는 악동이란 단어로 표현되기엔 나이도 많고 징그러운 족속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의 눈엔 마냥 철없는 아이처럼 한심하고 모자라 보였다.

그래도 선황은 수비테오 황제에게 뒤를 맡겼는데.

“그런데 영애.”

스칸디아 황녀가 차려입은 레오니에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디 나가십니까?”

“부모님이랑 외출해요.”

생일 선물 사러 간다며, 레오니에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자랑했다. 딱 열두 살 소녀다운 행동이었다.

“좋은 일이네요.”

스칸디아 황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잘생기셨네.”

레오니에는 이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여기 기사님은 좀 더 계셔도 되겠는데. 장래가 아주 기대돼서요.”

그 말에 크리세토스 황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나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난 황실과 연관된 건 아주 질색입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저도 나름 얼굴은 타고났습니다.”

황제를 닮은 게 문제지만. 한참 자기 자랑을 하던 크리세토스 황자가 처연히 중얼거렸다.

“……힘내요.”

그 모습에 살짝 연민을 느낀 레오니에가 드물게 위로를 건네었다.

“그래도 뭐, 전하께서 근육 좀 키우시면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있어요.”

“근육?”

“저 근육 좋아하거든요. 울 아빠 봐요. 얼마나 멋져요!”

레오니에가 두 손을 꼭 쥔 채 근육을 찬양했다.

“근육이야말로 인류애의 정점이죠! 근육은 배신하지 않아요. 우리의 노력에 따라 크고 아름다워지니까요. 특히 근육 골짜기 사이에 흐르는 땀방울은……!”

크하! 레오니에가 엄지를 척 내밀며 ‘따봉’을 외쳤다.

“……‘따봉’?”

크리세토스 황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부 고유어인 모양입니다.”

스칸디아 황녀가 조심히 추측했다.

“아아, 뭐 사투리 같은 건가 봐.”

“호전적인 지역이니 뭔가 강한 뜻일 겁니다.”

“그런 거 같다…….”

황자가 공감했다. 레오니에가 ‘따봉’을 외칠 때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근육 변태를 제대로 경험한 두 형제는 레오니에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특히 허리를 돌릴 때!”

레오니에는 자신의 허리를 직접 돌리며 제 옆구리를 가리켰다.

“여기 골반 근처에 튀어나온 외복사근이 접히는 모양새는 그야말로 천상의 축복을 받은 대천사의 날갯죽지……!”

“동생아.”

크리세토스 황자가 조용히, 정말 아주 조용히 말했다.

“네 말이 뭔지 알겠다.”

보통 변태가 아니구나.

“제가 말했지요?”

스칸디아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형제는 눈에 불을 켜고 근육을 외치는 레오니에를 두려워했다.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허공을 조물거릴 땐 기겁을 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기까지 했다.

“야, 스칸. 너 조심해라.”

황자가 동생을 걱정했다. 스칸디아 황녀는 이미 근육이 탄탄히 잡혀 있었다. 황자의 눈에도 자신의 동생은 앞으로 더욱 자라 크고 아름다운 몸을 지니게 될 것이 훤히 보였다.

“근육은 아주 좋은 거지요!”

으흐흐흐!

레오니에가 사악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악마보다 끔찍하구나.”

세상에 이런 말세가.

황자가 혀를 내둘렀다. 그의 두 눈은 어느새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황실이 여태 북부를 제압하지 못한 이유를 드디어 깨우쳤다.

* * *

“이, 이게……!”

쾅!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수비테오 황제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크게 내리쳤다. 테이블 위 찻잔이 흔들리면서 찻물이 출렁거렸다. 그중 몇 방울은 황제가 입은 옷에까지 튀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황제가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을 내던졌다. 씩씩거리는 수비테오 황제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지금 황궁 정원에 떨어진 단풍처럼.

황제가 내던진 신문은 찻물에 젖어 갔다. 물에 젖어 어둡고 눅눅해진 신문의 일 면엔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힌 기사가 실려 있었다.

‘유명 신예 예술가들, 마약 제조로 체포’

바로 황제파 귀족들이 운영하는 후원 단체에서 키워 주던 신예 예술가들이 마약을 제조하던 중에 현장에서 체포됐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이름을 알리던 예술가들의 범죄와 함께, 그들을 후원하던 후원 단체까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단체에 소속된 귀족들의 명단, 그들이 단체에 기부한 거액의 금액. 탈세의 정황, 비자금 형성까지.

마치 이 기사를 쓴 신문 기자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특히 올로르와 에르바누 가문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이들이 후원 가문에 가장 큰돈을 기부했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제파 귀족이란 사실은 물론이고 마지막엔 이들이 황비 소생의 1황자를 지지한다는 정보도 적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신문을 가져온 시종 한 명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가 고정하게 생겼어!”

황제가 노발대발했다.

“이걸 쓴 새끼는 아직도 잡지 못했나!”

“소, 송구합니다…….”

시종은 꼭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잔뜩 움츠러들었다.

“사람을 풀어 계속 찾는 중입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기사를 쓴 기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문사 역시 기자의 행방을 몰랐으며, 원래 오늘 발간될 신문 일 면에 올릴 내용도 이 내용이 아니었다고 했다.

즉,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처음부터 작정했단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문 기사에는 오롯이 황제파 귀족들의 범죄 혐의만 적혀 있었다.

황제파 귀족들이 주도한 탈세와 비자금 형성, 그 외 황제파 개개인의 역겹고 치졸한 사생활. 그리고 이번에 마약 제조로 체포된 예술가들의 또 다른 범죄까지.

하나 최종적으로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건 바로 수비테오 황제였다.

물론 기사는 황제를 직접 가리키지 않았다. 그러나 정황상. 이들이 예술가 후원 단체를 만든 원인과 그로 인하여 생기는 이익의 방향이 황제의 뒷주머니란 사실은 기사를 읽으면 자연히 유추할 수 있었다.

“파르두스! 파르두스는 어디 있느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떠올리지 못한 황제가 습관처럼 파르두스를 불렀다. 그러나 파르두스는 수도에 없었다.

“폐하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하고자,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얼마 전 북부로 올라갔습니다.”

“그럼 당장 수도로 오라고 불러!”

“그, 그러면 시간이…….”

북부로 향하는 게이트는 사용할 수 없으니, 아무리 빨라도 최소 일주일은 걸렸다.

하지만 시종은 그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기어코 분을 참지 못한 황제가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팔로 쓸어 떨어트렸다.

와장창 도기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고, 바닥에 깨지며 튀어 오른 파편들이 황제의 다리에 툭툭 튀겼다.

“빌어먹을……!”

수비테오 황제는 도기 조각에 베여 피가 흐르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그 역시 이곳 후원 단체에 자신의 이름으로 몇 번이고 거금을 기부했다.

즉, 이곳 예술가 후원 단체는 어떤 의미론 황제의 고고한 선행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범죄의 온상으로 추락했다.

‘나는 몰랐다고 해야 하나?’

황제가 고심했다. 어서 빨리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하단 성명을 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들을 돕지 않으면 자신의 비자금을 비롯한 그간의 몰래 저지른 또 다른 범죄가 드러날 터다.

황제파를 내치는 건 동반 자살과 마찬가지였다. 지지 기반을 잃고 허수아비 왕이 될 꼴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지금 추진하려는 제국의 도로망 건설 사업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이 기막힌 신문 기사에도 도로 사업의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당장 궁으로 불러!”

수비테오 황제가 결국 황제파 귀족들을 불렀다.

“예, 예에!”

시종이 서둘러 몸을 낮추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언제고 황제의 손에 자신이 다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허둥거리며 나오는데.

“……헉!”

겨우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나 싶었더니, 문 앞에서 예상 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티그리아 황후였다.

“화, 황후 폐하……!”

시종이 허겁지겁 인사했다.

“…….”

티그리아 황후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사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황제의 고함과 성난 분노가 새어 나오는 문에 지그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가관이군.’

그리 생각한 황후가 휙 뒤돌아섰다.

“내가 왔다는 말은 전하지 말거라.”

괜히 황제 폐하의 심중만 더 어지럽힌다며, 티그리아 황후가 시종에게 일러뒀다. 시종은 알겠다며 얼씨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배려였다.

티그리아 황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황후가 걸어가니, 그 뒤에 있던 시녀와 궁인들이 조용히 곁을 따라왔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자리를 어느 정도 벗어난 뒤에야, 티그리아 황후의 입가에 미소가 조용히 피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황후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바로 코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기쁜지, 걸어가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워서 저도 모르게 뜀박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역겨운 곳에 머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티그리아 황후는 이곳에서 제 소임을 다하며 끈덕지게 버티어 온 자신을 위로했다.

‘남은 건 이제…….’

티그리아 황후는 여행을 떠난 두 아들을 떠올렸다.

‘어머님을 먼저 생각하세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못난 어미 때문에 힘들었을 두 아들이, 그래도 부모라고 그리 생각해 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곳 궁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제게 분에 넘치도록 착한 아들들 덕분이었다.

‘이제 아이들만 자기 자리를 찾으면 돼.’

티그리아 황후가 자신의 마지막 목표를 떠올렸다. 첫째를 황제로. 둘째를 서부로.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자신은 미련 없이 궁을 떠날 것이다.

저 빌어먹을 새새끼의 목을 꺾어 버린 채.

“어머!”

그때였다.

“황후 폐하!”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티그리아 황후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돌아선 황후의 눈에 산뜻한 초록 머리가 흩날렸다.

“황비.”

“황후 폐하도 황제 폐하를 뵈러 오신 건가요?”

한껏 차려입은 우시스 황비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려고 했지요.”

티그리아 황후가 자신이 다녀온 곳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심중이 좋지 않으니, 오늘은 아니 뵙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나, 저런…….”

우시스 황비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랑 차 마시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운 표정을 짓던 황비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그럼 나와 마실까요?”

“황후 폐하랑요?”

“싫은가요?”

“아니요! 엄청 좋아요!”

잠깐이나마 의아한 표정을 짓던 우시스 황비가 기뻐하며 티그리아 황후의 팔에 자신의 팔을 꼈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잠깐 놀랐지만, 황후는 팔을 굳이 빼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황후궁으로 향했다.

“조금만 따듯했어도 정원에서 차를 마실 수 있었을 건데.”

아깝게 되었다며 황후가 창밖을 바라봤다. 완연한 가을 탓에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고, 황후가 그토록 아끼며 가꾼 정원도 여름처럼 푸르지 못했다. 그래도 수두룩 핀 가을꽃이 그나마 정취를 느끼게 했다.

“저는 이곳 응접실도 좋아요.”

우시스 황비가 싱긋 웃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아요.”

“그런가요?”

“네! 어쩐지 마구 기분이 좋은 거 있죠?”

“그럼 다행이네요.”

“황후 폐하도 기분이 좋아 보여요.”

“차 맛이 좋아서 그래요.”

눈이 마주친 두 여자는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티그리아 황후가 찻잔을 내렸다.

“어디 외출하려던 차였나요?”

우시스 황비의 차림새가 화려한 것이, 꼭 어디 나가려고 차려입은 것처럼 보였다.

“실은 오늘 폐하와 전시관에 갈 예정이었어요.”

황비가 투덜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한껏 차려입은 사실을 깨달았는지, 손으로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폐하와 귀족들이 후원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고 해서, 가서 구경도 하고 맛있는 걸 먹으려고 했어요.”

“아아…….”

적당히 반응한 황후가 다시금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예민했나.’

어째 황제의 반응이 지나치게 예민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오늘 신문에 났던 예술가들을 만나려 했던 모양이었다.

‘황제가 직접 나설 정도면 공식 방문이었을 테고…….’

여러모로 악재가 되었군. 차를 홀짝이던 티그리아 황후는 비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꾸욱 참았다.

“실은 말이죠…….”

우시스 황비가 우물거렸다.

“제가 오늘 그분들을 만나고 싶다고, 일전에 폐하께 청했거든요.”

“황비가 청했나요?”

찻잔을 쥔 황후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깥 외출이 오랜만에 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부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며 황비가 곤란하단 듯이 손으로 한쪽 볼을 감싸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덕분에 자작 가문도 난리가 아니겠죠?”

“그렇겠네요. 연락이라도 오면 어쩌나.”

“전 정치나 그런 건 머리 아파서 몰라요!”

그래서 오는 연락은 다 무시한다며, 우시스 황비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데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요즘 안 보이시던데.”

“크리스와 스칸은 서부에 갔답니다.”

티그리아 황후가 다시 찻잔을 내렸다. 어쩐지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가 스칸의 혼담을 정하고 계시는데, 그 탓인지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친정 가문에 보냈답니다.”

“두 분 사이가 너무 좋네요!”

보기 참 좋다며 황비가 칭찬했다.

“그런데 황녀 전하께 ‘스칸’은 너무 사내아이 같은 애칭이네요.”

“황녀의 몸이 약하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씩씩한 이름을 붙였다고 말했다.

“거기다 요즘 이름에 성별이 어디 있나요.”

황후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건 맞아요. 보레오티 공작 영애도 그렇잖아요.”

“레오, 였죠?”

그러나 레오니에의 애칭은 성별을 떠나 그저 보레오티다운 애칭이었다.

“전 처음에 듣고 남자아이인 줄 알았어요.”

우시스 황비가 까르르 웃었다. 두 사람의 다과는 생각보다 길게, 그리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상식적으로 이 둘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색한 기류 없이 평화롭게 대화를 이어 갔다.

“언젠가 서부에 놀러 와요.”

티그리아 황후가 흔쾌히 말했다.

“서부는 사계절을 가장 아름답게 품는 곳이에요. 난 서부의 여름을 가장 좋아하지만, 가을도 정취가 넘치고 아름답죠.”

“저도 가을 좋아해요!”

우시스 황비가 해맑게 웃었다.

“특히 낙엽이 좋아요.”

붉은 낙엽, 노란 낙엽.

“땅에 떨어진 낙엽을 보면…….”

눈앞에서 정말로 단풍이 떨어지기라도 하듯, 우시스 황비의 두 눈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밟고 싶어져요.”

테이블 아래, 자신의 발치에 시선을 고정한 황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어쩜 그렇게도 귀를 간지럽히고 마음을 즐겁게 할까요?”

“그러게요.”

티그리아 황후가 미소지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에요.”

그리곤 몸을 의자 등받이에 슬그머니 기대었다.

“우리 종종 차를 마실까요?”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할 줄 몰랐다며, 티그리아 황후가 먼저 다음 약속을 제안했다.

* * *

생일 선물을 사러 나온 레오니에는 입술이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왔다.

“이런 곳에서 다 뵙는군요.”

아기자기한 곰 인형부터 밤에 보면 섬찟한 도자기 인형까지. 다양한 인형이 가득한 가게에서, 레오니에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

“후작 할아버지…….”

행복에 겨웠던 아기 맹수가 단번에 축 처졌다.

“할아, 아니, 후작이 여긴 웬일이에요?”

평소처럼 편히 ‘할아버지’라 부르려던 레오니에가 서둘러 호칭을 정정했다.

이곳은 지금 밖이었다. 보레오티와 파르두스의 은밀한 관계는 덮어둬야 했다.

파르두스 후작이 그런 레오니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손주 생일 선물을 사러 왔습니다.”

그도 곧 진심을 감추고 대외적인 가짜 미소를 지었다.

“잘 챙겨 주세요, 후작. 그 손주는 자라서 내 비서가 될 테니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우리 손주가 뭐 아쉽다고.”

그 말에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후작의 막내아들께선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을 팔아 결혼했잖아요?”

“전 그놈을 없는 자식 취급합니다만.”

“그럼 손주도 없는 손주로 취급하셔야죠.”

레오니에가 호호 웃었다. 하지만 다 알고 있다. 파르두스 후작은 막내아들인 루페와 사이가 좋고, 새로 맞이한 며느리인 인세레아도 아주 예뻐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루피는 거의 물고 빠는 수준으로 귀여워했다.

“레오.”

그렇게 후작과 신경전을 벌이던 중.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찾았다.

“방금 주문한 선물…….”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부르던 바리아가 멈칫했다.

“후, 후작님.”

“엄마, 후작님이라니.”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주의를 줬다. 바리아도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닫고 다시 파르두스 후작을 불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뵙네요, 후작.”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파르두스 후작이 공손히 인사했다. 인사에 담긴 존경과 예의는 전부 진심이었다.

“란드 파르두스입니다.”

인사를 마친 후작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리아를 바라봤다.

“저희는 초면이지 않습니까?”

파르두스 후작의 기억엔 바리아가 없었다. 감시 차원에서 펠리오 대신 보고를 몇 번 받은 적은 있지만, 바리아를 실제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바리아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재정부에서 일할 때 저 혼자 스쳐 가며 보았습니다.”

바리아가 태연히 둘러댔다. 파르두스 후작은 그 말을 쉬이 믿었다. 수도에서 지낼 때면 몇 번이고 입궁했으니, 그때 보았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후작.”

“공작 가문에 이리 대단한 분이 오시다니.”

“과찬이네요. 제가 무슨 실력이 있다고.”

“아니요, 아니요.”

파르두스 후작이 겸손을 부리는 바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정말 대단하시죠.”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수도에서 저 난리가 나진 않았을 거다.

파르두스 후작은 일찌감치 수도에서 일어난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리고 이는 분명 보레오티 가문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준비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바리아였으니.

그리고 역시나.

후작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챈 바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게 봐줘서 감사합니다.”

바리아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평소였다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을 터나, 그런 감정을 잘 다잡아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수도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저와 관계없단 듯이.

흔들림 없는 바리아의 모습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엔 흡족함이 가득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레오니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레오티는 원래 실력 있고 대단하거든요.”

아기 맹수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씩 웃었다. 그 오만한 태도에 파르두스 후작이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호탕한지, 주변에 진열된 인형들이 움찔하는 듯했다.

“귀가 다 찢어지겠군.”

뒤늦게 펠리오가 나타났다. 그의 팔엔 아이의 선물이 포장된 상자가 두 개나 안겨 있었다.

“내 선물!”

레오니에가 우다다 달려갔다. 그리곤 펠리오를 향해 두 손을 내밀며 폴짝거렸다.

“선물! 선물!”

“선물은 생일에 풀기로 했잖아.”

펠리오가 좀 참으라며, 폴짝폴짝 튀어 오르는 레오니에의 머리를 한 손으로 꾸욱 누르며 말했다.

“이것만 지금 풀면 안 돼?”

레오니에가 동그란 눈을 하염없이 깜빡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탁했다.

인형 가게에서 준비한 선물은, 5년 전 펠리오가 선물했던 사자 인형의 가족이었다.

아이의 생일 선물을 고심하던 바리아가 까만 사자 인형을 보자마자 떠올렸다. 홀로 있는 사자 인형 옆에 엄마와 딸을 두면, 자신들 세 가족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바리아가 생각해낸 선물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히이잉, 아빠아앙!”

레오니에가 발까지 동동거리며 부탁했다.

“……그럼 집에 가서 풀자.”

간만에 보는 딸아이의 애교에 기분이 풀린 펠리오가 한발 물러섰다.

“으음, 그냥 생일에 풀래.”

그런데 잠깐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바로 생각을 바꿨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응.”

“……바리아, 그만 가죠.”

펠리오가 상자를 함께 온 하인에게 넘기며 말했다. 자유로워진 두 손은 각각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챙겼다. 이젠 한 쪽에 누가 없으면 퍽 허전했다.

“공작.”

파르두스 후작이 다가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평생 오랜만이면 좋았을 텐데.”

“농담도 잘하십니다.”

“농담은 아닌데.”

“가족끼리 참 사이가 좋으시군요.”

파르두스 후작이 꽤나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그는 펠리오가 바리아와 함께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루페를 통해 들은 ‘닷새 합방’이 진짜였는지, 보레오티 부부는 무척 다정해 보였다.

“울 부모님 너무 보지 마요. 근육이랑 예쁨이 닳으니까.”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레오니에도 아주 행복해 보였다.

사실 펠리오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후작은 레오니에가 소외감이라도 느끼면 어쩌나 싶었다.

펠리오가 자식에게 극성인 건 유명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더욱이 펠리오가 바리아를 무척 사랑한다는 소문은 이미 유명했기에 마음에 걸렸다.

하나 그 걱정들은 다 기우였다. 바리아는 레오니에와 무척 사이가 좋았고, 양 부모님 사이에 있는 레오니에 또한 여느 때처럼 씩씩하고 행복해 보였다.

‘귀인이 오셨군.’

이토록 대단한 분이 보레오티의 안주인이 되시다니.

“다정한 가족을 방해하는 것도 무어하니…….”

파르두스 후작이 근처에 있던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알록달록한 조각보를 기워 만든 조그마한 인형이었다.

“제 나름의 선물을 하나 드리죠.”

그리곤 그 인형을 계산대 위에 올렸다. 보레오티와 파르두스의 신경전을 남몰래 구경하던 가게 주인이 허둥거리며 계산했다. 값을 치른 인형은 곧 레오니에의 품에 안겨졌다.

“제가 드리는 생일 선물입니다.”

“후작, 나를 뭐로 보고.”

레오니에가 인형을 두 손가락으로 집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개들이 가지고 노는 거 아냐?”

아이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내 물건은 아무리 싸도 저택 한 채 값이 기본인데.”

“그리 막 쓰면 파산합니다.”

“보레오티는 파산 따위 안 해요.”

얼마나 부자인데. 인형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레오니에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펠리오에게 인형을 던지듯 넘겼다.

“아빠나 가져.”

“이딴 거 나 주지 마.”

“훈련용으로 써. 검 찌르기 좋네.”

레오니에가 검으로 인형을 찌르는 흉내를 냈다.

“레오 너처럼 쥐똥만 한 건 한 방이야.”

“……나보고 쥐똥이라고 했어?”

“아, 미안하다. 속으로만 놀린다는 게 그만…….”

“내가 어딜 봐서 쥐똥이야!”

“어휴, 두 사람 다 또.”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싸우지 말라고, 안 보이는 마차 안에서 싸우자며 바리아가 익숙하게 둘을 이끌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나 아니었으면 평생 홀애비로 살았을 거면서!”

“너 아니었어도 난 바리아랑 결혼했을 거야.”

“둘 다 그런 이야기를 왜 밖에서 해요!”

보레오티 세 맹수는 나가는 순간까지 시끌벅적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파르두스 후작이 싱긋 웃었다.

“그럼, 주인장.”

마차가 서둘러 떠나는 소리가 난 뒤에야, 파르두스 후작이 인형 가게에 들른 이유를 가게 주인에게 언급했다.

“돌쟁이 사내아이가 가지고 놀만 한 인형 하나 좀 추천해 주게.”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레오니에가 물었다.

“후작 할아버지가 뭐 줬어?”

“좀 진정하라니까.”

펠리오는 달려드는 아이를 옆에 앉혔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전하는 거군요…….”

그 반대편 옆에 앉은 바리아는 신기한 눈으로 후작이 준 인형을 바라봤다.

파르두스가 보레오티의 정보통이란 사실은 먼저 들었지만, 실제로 두 가문이 내통하는 장면은 처음 목격했다. 호기심이 들끓었다.

“…….”

얼떨결에 아내와 딸 사이에 낀 펠리오는 괜히 의식되었다.

“엄마, 봤지? 울 아빠 이렇게 멋져!”

“펠리오가 멋진 건 저도 많이 알아요.”

“더 알아야 해! 왜냐하면 울 아빠는 세계 최강이거든!”

“맞아요! 더 알아야 해요!”

펠리오는 스스로가 잘나고 대단한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말을 뭐 그리 입 아프게 하는지.”

하지만 양옆에서 딸과 아내가 이리 칭찬해 주니 가뜩이나 높은 코가 또 높아지려 했다. 아니, 이미 높아져서 마차 지붕을 뚫을 기세였다.

들뜬 기분을 겨우 가라앉힌 펠리오가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옷 안에 있군.”

인형이 입은 상의 안에 쪽지가 숨어 있었다.

꺼내 펼쳐 보니, 현재 수도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황실, 그리고 황제파 귀족들의 동태가 적혀 있었다.

세 맹수가 쪽지를 읽는 탓에 마차 안은 조용했다.

“……일단 황제는 모르쇠로 나가네.”

고요함을 먼저 깬 건 레오니에였다.

“뭐, 대충 그럴 줄 알았어.”

레오니에는 이번 사냥으로 황제가 잡힐 거라고 기대조차 않았다. 그깟 후원 단체 하나에 숨겨진 범죄 혐의로 황제를 끌어내리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황제파 귀족들에겐 제법 큰 타격이 되었다.

“후원 단체는 와해됐고, 황제는 자신의 지지층 일부를 잃었지.”

펠리오가 말했다.

예술 진흥을 위한 후원 단체는 범죄의 소굴로 전락했다. 후원받던 예술가들은 마약 제조로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후원하던 황제파 귀족들은 단체를 통해 탈세하고 비자금을 불렸다.

죄를 변명하기에도 늦었다. 누군가가 이를 증명하는 증거들을 광장에 붙여 놨기 때문이다.

“수사 당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잡아 처벌해야 하고, 황제 역시 그들을 도울 방법이 많이 없어. 범죄 사실이 너무 적나라하니까.”

“꼬시다, 황제파 새끼들.”

“레오.”

“……황제파 놈들.”

펠리오에게 못된 말을 지적받은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이며 보다 말을 순화시켰다.

“솔직히 ‘새끼’도 아까워.”

새끼는 귀엽기라도 하지. 레오니에는 셋이 쪼르르 앉은 좁은 자리에서 벗어나, 건너편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옆에는 아까 샀던 생일 선물 두 개가 있었다.

“엄마.”

아이가 바리아를 불렀다. 여태 계속 쪽지만 보고 있던 바리아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들어 올린 초록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초점이 불안한 것이, 쪽지에 적힌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바리아를 보는 레오니에의 가슴은 먹먹했다.

‘엄마는 이전 생에…….’

그렇게 노력하고 버티었으나.

그 끝은 배신과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엄마 덕에 가능했어.”

레오니에가 말했다.

“이게 다, 제가 그간 모았던…….”

더듬더듬 말하는 바리아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간 자신이 해 온 노력으로 이뤄낸 이 성과들을 쉬이 믿지 못했다.

“전부 그대의 공입니다.”

그래서 펠리오가 확신시켜 줬다. 그 말에 바리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북받치는 감정과 함께, 바리아는 자신이 버텼던 시간이 떠올랐다.

재정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하던 시절. 어느 날 눈을 뜨니 과거로 돌아왔고, 그 대가라기엔 너무도 끔찍했던 저의 죽음까지.

“…….”

그 시절을 떠올린 바리아는 가슴이 먹먹했다. 슬퍼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노력이 기어코 통했다. 치밀하고 악착같이 모아온 증거들이 드디어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다.

지난 생과 달리 이번엔 저를 이해해 주고 믿어 준 소중한 사람들 덕에 그 고생들이 헛되지 않았는데.

그러니 기뻐해야 하는데.

“노력했고, 고생했습니다.”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바리아를, 펠리오가 팔로 끌어안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바리아는 그제야 훌쩍이며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였다.

“…….”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괜히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멋쩍은 듯이 턱을 긁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눈치껏 비켜 줄까?’

레오니에는 부모님들의 뜨거운 침대 운동을 위해 효심을 한 번 발휘할까, 고민했다. 너무 지나친 운동은 두 사람의 뼈 건강과 저의 정신 건강을 위해 자제함이 옳았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운동 후엔 평소보다 훨씬 저를 예뻐해 주는 펠리오와 바리아가 좋았다. 심지어 예상치 못한 선물도 잔뜩 사 줬다.

“아빠, 엄마.”

떨어질 콩고물을 위해, 효녀가 광장에서 좀 놀다 오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어라?’

창밖에 낯익은 체격이 보였다.

레오니에가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나 좀 놀다 올게!”

그리곤 마차에서 내려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차차.”

그러다 대뜸 다시 돌아와서는, 함께 온 기사 중 눈에 띄는 프로보에게 달려갔다.

“프로보 오빠, 나 돈 좀 줘요.”

“예?”

“오빠가 늘 외출할 때 현금 챙기는 거 나 알아요.”

“그걸 아가씨가 왜 아십니까!”

“안 주면 뒤져서 가져갈 거예요?”

반강제로 돈을 빌려준 프로보가 슬프고 아련한 눈으로 펠리오를 보았다.

“엘레판 경…….”

펠리오는 기가 막혔다. 저놈은 5년 전에도 레오한테 협박당해 말을 끌고 밖으로 나간 전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도 저렇게 돈을 뜯겼다.

보다 못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레오, 너 어디 가는데?”

“놀러!”

“기사 돈은 왜 빼앗아?”

“빼앗은 게 아니라 빌린 거야!”

그리고 아빠가 두 배로 갚아 줄 거고. 뻔뻔하게 대답한 레오니에가 망토에 달린 모자에 자신의 머리칼을 숨겼다.

“해 지기 전엔 들어 와.”

펠리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등 뒤로 바리아도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아까 울었던 탓에 눈 밑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위험한 사람 만나면 무조건 맹수의 송곳니 꺼내요. 알았죠?”

“엄마, 그러면 그 사람은 죽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딴 것들보다 레오가 더 중요한데.

바리아가 조심히 놀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얼굴엔 같이 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아이를 챙기는 모습이 이젠 퍽 자연스러웠다.

“다녀올게!”

아기 맹수가 두 손을 부웅부웅, 크고 씩씩하게 흔들었다.

* * *

보레오티 세 가족이 외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스칸디아 황녀도 저택을 나섰다.

‘형님도 나오면 좋을 텐데.’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던 황녀가 저택에 남은 크리세토스 황자를 떠올렸다.

‘난 저택 염탐이나 하련다.’

이왕 공작저에 온 거, 약점이나 뭐라도 하나 알아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황자가 앙큼한 속셈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했다. 스칸디아 황녀도 몇 번인가 저택을 탐색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펠리오의 지시를 받은 글라디고 기사들이 나타나 이를 저지했다.

그는 자신의 형님도 그리될 거라고 확신했다. 안 봐도 뻔했다.

‘공작은 꼭대기에 있어.’

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어른들이 보레오티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뒀는지, 스칸디아 황녀는 이제 몸서리칠 정도로 알았다.

펠리오는 괴물이었다. 못 해내는 것이 없고 빈틈이 없었다. 오만하기까지 한 자신감은 그의 완벽한 실력이 뒷받침했다. 거기다 넘치다 못해 측정이 불가한 재력, 우수한 재능을 지닌 기사단까지 검은 맹수의 자리를 단단히 했다.

만일 북부가 작심하고 황실을 친다면, 지금의 황실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잡아먹힐 거다.

스칸디아 황녀가 요사이 북부에 머물며 지닌 확신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광장은 주말이 아님에도 활기가 넘쳤다. 올려다본 하늘은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희뿌옇게 흐렸다.

스칸디아 황녀는 이곳 북부만 다른 곳과 계절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걸어가던 중.

“거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예쁜 총각.”

복슬복슬 검은 털 망토를 덮어쓴 소녀가 발을 들어 벽을 찍었다.

“혼자 왔어? 이런 데 혼자 다니면 위험한데.”

“그쪽이 더 위험해 보이는데요?”

처음이었으면 퍽 당황스러운 상황일 터나, 다행인지 몰라도 황녀는 전에도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덕분에 태연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뭡니까, 방금 그건.”

황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으음, 작업?”

레오니에가 망토를 살짝 들어 얼굴을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만연했다.

“작업? 무슨 작업이요?”

황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에 레오니에가 헐,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예요?”

“대충 뜻은 알겠습니다.”

“뭐 같은데요.”

“추파 던지시네요.”

“황실은 단어도 고급스럽게 쓰네.”

“‘추파’가 언제부터 고급 단어였나요.”

스칸디아 황녀가 어이가 없단 듯이 중얼거렸다. 레오니에는 그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깔깔 웃었다.

한참을 다 웃은 뒤에야, 레오니에가 이곳에 온 연유를 물었다.

“혼자 왔어요? 댁의 형님은요.”

“저택에 혼자 계십니다.”

“우리 집 염탐이라도 하게요?”

“못 합니다. 다 아시면서.”

참으로 얄미운 물음이었다. 그런 뜻을 담아 레오니에를 바라보니, 정작 당사자는 뻔뻔할 정도로 태연히 받아쳤다.

“맞아요, 다 알아요.”

그리곤 눈웃음을 사르르 지었다.

황녀는 그런 레오니에를 아주 조금 탐탁지 않게, 그러면서도 그 자신만만한 언행을 조금 부럽단 듯이 바라봤다. 그로서는 이렇게 존재감이 강렬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오셨어요?”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해서요.”

“벌써 가요?”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난 내 생일 때까지 죽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죽치고…….”

스칸디아 황녀는 레오니에의 자유분방한 언어 사용에 조용히 감탄했다.

“그렇게 뻔뻔하진 않습니다.”

두 형제는 곧 서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대로 언제까지 북부에 신세를 질 순 없었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미리 필요한 것들을 사둘 목적으로 광장에 나왔다.

“이미 뻔뻔하게 머물러 놓고는.”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제가 아니라 제 형님이셨죠.”

“어쨌든 거기에 편승은 했잖아요.”

둘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광장을 돌아다녔다. 주로 레오니에가 묻고, 스칸디아 황녀가 대답하고, 그러면 레오니에가 웃으면서 자기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식이었다.

그러다 신기한 볼거리가 있으면 둘 다 입을 다물고 구경했다.

“아, 저기 좀 보세요.”

그때 레오니에가 어느 가게를 가리켰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에요.”

“파는 물건이 좋은가요?”

황녀가 물었다.

“파는 사람들 몸이 좋아요.”

생활 밀착형 근육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며, 레오니에가 열심히 홍보했다.

“기사들과는 달라요. 꾸준한 노동과 반복으로 이뤄진 부위 특화형 근육이죠.”

“영애는 항상 저의 예상을 깨부수네요.”

스칸디아 황녀가 가게 안으로 짐을 옮기는 사람들을 빤히 바라봤다. 레오니에의 말대로 짐을 옮기는 자들의 팔뚝과 어깨가 유난히 튼실했다.

“욕하는 거예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욕은 무서워서 못 합니다.”

욕하는 순간 레오니에에게 반격 한 번 못 하고 당할 게 뻔했다. 그리고 펠리오에겐 진정한 의미로 끝장을 보게 될 터이고.

그렇다고 진짜 욕할 만큼 불쾌한 것도 아니었다. 황녀는 레오니에의 시원시원한 언행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근육이 그렇게 좋습니까?”

스칸디아 황녀가 물었다. 그의 눈에 근육은 그저 단련하면 자연히 생기는 신체 일부에 불과했다. 그것들을 ‘잘생겼다’, ‘튼실하다’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환장하죠. 겁나 좋아요.”

“겁나…….”

“황녀 전하도 장래가 기대되어서 좋아요.”

레오니에가 황녀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스칸디아 황녀는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었다.

결국 황녀의 외출은 뭐 하나 사지 못하고 끝났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돌아오는 길, 레오니에가 사과했다.

“저도 즐겼으니 괜찮습니다.”

황녀가 웃으며 사과를 거절했다. 레오니에와 함께한 광장 구경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황궁에서 저도 모르게 쌓였던 가슴 속의 답답함과 머리 아픈 상황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아빠한테 두 분 가실 때 필요한 것들 챙겨 달라고 할게요.”

“친절에 감사합니다.”

“으음, 그래도 너무 일찍 가는 거 같네요…….”

레오니에가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막상 자신의 생일에 저 두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허전해졌다.

“든 자린 몰라도, 난 자린 안다잖아요.”

“영애는 정말 재미있어요.”

자유로운 언변을 구사하다가도, 방금처럼 오랜 풍파를 겪은 노인처럼 중얼거렸다.

‘……응?’

스칸디아 황녀가 제 볼살을 만지작거렸다. 아까부터 볼이 좀 아프다더니, 계속해서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레오니에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황녀는 그런 자신에게 꽤나 놀랐다.

“그럼 가기 전에 선물 하나 줘요.”

그런 황녀를 알아채지 못한 채, 레오니에가 철딱서니 없는 부탁을 했다.

“…….”

스칸디아는 그런 레오니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레오니에는 별 뜻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줄 거예요?”

“아니요, 드리겠습니다.”

대신 가진 돈이 별로 없으니, 저렴해도 너무 화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황녀의 조건에 레오니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 그렇게 속물 아니에요!”

소녀는 주는 건 다 기쁘게 받는다고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소년은 무얼 줘야 저 소녀가 기뻐할지, 조금 고민이었다.

황자와 황녀가 떠나는 날은 레오니에의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심술 맞기도 하지.”

배웅 나온 레오니에의 입술이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왔다.

“왜 가도 꼭 이날 가요. 차라리 내일 놀다가 다음 날에 가지.”

레오니에가 서운함을 숨기지 않고 투덜거렸다.

“이래 봬도 우리, 여기 예상보다 훨씬 오래 머문 거랍니다.”

크리세토스 황자가 사뭇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영애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기대도 안 했어요.”

“레오.”

함께 배웅하던 바리아가 조용히 타일렀다. 아이의 입술이 다시 삐죽거렸다.

“조심히 가세요.”

바리아가 떠나는 두 사람에게 진심 어린 작별을 건네었다.

“공작 부인, 그간 베풀어 주신 친절과 배려를 기억하겠습니다.”

황자가 바리아의 손등을 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손등에 입술은 맞추지 않았는데, 뒤에서 노려보는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위압에 짓눌린 탓이었다.

“기사님도 조심히 가세요.”

아직 황녀의 정체를 모르는 바리아는 그를 여전히 황자의 호위 기사로 알았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스칸디아 황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가요.”

레오니에가 손을 흔들었다.

두 소년이 준비해 준 마차에 올라탔다. 펠리오가 빌려준 마차로, 보레오티 근처에 있는 서부행 게이트 근처까지 태워줄 예정이었다.

“안 타냐?”

먼저 마차에 올라탄 크리세토스 황자가 멀뚱히 서 있는 동생을 불렀다.

“……형님, 잠깐만요.”

무언가를 고민하던 스칸디아 황녀가 도로 저택으로 몸을 돌렸다. 마차에 타야 하는 사람이 다시 다가오자, 보레오티 세 가족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공작 영애.”

레오니에 앞에 선 스칸디아 황녀가 제 목 언저리를 만졌다.

“약속은 지켜야 할 것 같아서요.”

“약속?”

“생일 선물입니다.”

그리곤 레오니에의 손을 잡았다.

“……!”

이를 지켜보는 펠리오의 눈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바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머머’하고 감탄을 질렀다.

곧, 레오니에의 손에 무언가가 올려졌다.

“어머님이 제게 주신 펜던트입니다.”

선물의 정체를 들은 레오니에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 이건 황……!”

황후, 라고 소리 지를 뻔한 레오니에가 서둘러 입을 막았다. 바리아가 아직 그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건 아직 드러나선 안 될 비밀이었다.

“떠나기 전에 드린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정작 스칸디아 황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굴었다.

“어머님이 직접 사 주신 건 아니고, 어릴 적에 어울린다고 골라 준 겁니다.”

여장이 가능했던 어린 시절, 티그리아 황후가 제 아들에게 쓸 장식품을 손수 골라 줬었다. 이 펜던트는 그중 하나였다.

“그 뒤로 습관처럼 지니고 다닌 것이니, 부담스러워 마십시오.”

“부담스럽거든요!”

“저택 한 채 값까진 안 됩니다.”

“그래도 부담이에요!”

이를 손에 쥔 레오니에는 안절부절못했다.

‘저택 한 채 값까진 아니어도…….’

황후가 직접 골랐다는 건, 이건 황실에 납품된 진귀한 물건이란 뜻이었다. 되돌려주기도 뭣한 펜던트를 주머니에 넣은 레오니에가 손목에 찬 시계를 풀었다.

“……그럼 이거 가져가요.”

그리곤 황녀의 손목에 자신이 찼던 시계를 채웠다.

“레오니에, 너……!”

“펠리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펠리오가 이를 말리려 했으나, 바리아가 서둘러 이를 말렸다. 덕분에 레오니에는 무사히 시계를 채워줄 수 있었다.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은 귀한 거예요.”

“누가 자기 생일 선물에 보답을 줍니까.”

스칸디아 황녀가 기막힌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흥미로운 눈으로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검은 외관의 시계 속에서 새하얀 바늘이 톡톡 움직이고 있었다.

“보답이 아니라, 나도 댁처럼 생일 선물로 준 거예요.”

“제 생일 선물요?”

“겨울에 생일이 있다고 아는데?”

나는 늦가을, 댁은 한겨울.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저와 황녀를 각각 가리키며 말했다.

“아님 다시 줘요.”

그러나 황녀는 답이 없었고, 레오니에는 손을 쑥 내밀었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습니까.”

손목에 감긴 시계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스칸디아 황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레오니에한테 진짜 뺏길까 봐 시계를 찬 손목을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소중히 지니겠습니다.”

“안 그러면 가만 안 둬요.”

그랬다간 손목을 꺾어 버리겠다며 레오니에가 손수 시범을 보였다.

“예, 꺾으십시오.”

그 모습에 웃음이 난 황녀가 레오니에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 또 뵙지요.”

“기사님도 그만 조심히…….”

조심히 가라고 레오니에가 인사하려던 찰나.

쪽.

스칸디아 황녀가 레오니에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저 미친……!”

“펠리오! 죽이면 안 돼요!”

기어코 참지 못한 펠리오가 욕설을 내뱉었고, 바리아가 다시 그를 붙잡고 말렸다.

“그럼 공작이 절 죽이기 전에 그만 가겠습니다.”

스칸디아 황녀는 얄미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마차에 올랐고, 마차는 흉포한 맹수의 살기에 도망이라도 치듯 서둘러 저택을 벗어났다.

“…….”

레오니에는 멍한 눈으로 마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레오니에!”

펠리오가 엄한 목소리로 불렀다.

“당장 가서 손 씻어라. 그 고물도 버려!”

“생일 선물이라잖아요.”

바리아가 그러지 말라며 레오니에를 제 등 뒤로 숨겼다.

“저게 무슨 생일 선물입니까. 발정 난 새끼가 애먼 우리 딸한테 수작 부리는 건데.”

“넓은 아량을 베풀어요. 그리고 말 예쁘게 하고.”

못된 말 쓰면 슬퍼할 거라고 바리아가 눈과 입술 끝을 축 늘어트렸다.

“……아까 그놈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레오한테 작업 부리지 않습니까.”

펠리오는 아내의 어마어마한 공격에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귄지도 모르는데, 난 절대 허락 안 합니다.”

“너무 지나친 생각이에요.”

“아까 그걸 보고도요?”

“우리 레오가 어떤 아인데!”

가지고 놀았으면 놀았지, 가지고 놀려질 아이는 아니라고 바리아가 강하게 말했다.

“그렇죠, 레오?”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히 물었다. 그제야 레오니에는 부모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놈 참.”

그리곤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크면 잡아먹을까나?”

“이거 봐요!”

바리아가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 딸은 이 세상 모든 남자를 밑에 깔고 호령할 위인이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고, 응당 그래야 합니다만.”

그럼에도 펠리오는 찝찝했다.

“하이고, 이 아빠 보소.”

가만히 들어주다가 기가 막힌 레오니에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아빤 엄마가 처음 저택에 와서 울었을 때, 손수건 한 장 안 줬으면서 무슨…….”

“그, 그건…….”

펠리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점에선 저 기사님이 훨씬 낫지! 그치, 엄마?”

“하긴, 그때 생각하면 섭섭하죠.”

바리아도 거들었다.

펠리오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바리아, 그게 아니라…….”

“레오, 나중에 기사님 이야기해 줄래요?”

“응! 엄마한테는 해 줄게!”

두 모녀는 새끼손가락을 걸며 사이좋게 약속했다.

“바리아, 내가 그땐…….”

“됐어요. 이제 와서 무슨 핑계람.”

“핑계가 아니라, 그땐 내가 낯을 좀 가렸습니다. 섬세한 마음을 지녀서.”

“지금 그거, 믿으라고 한 소리 아니죠?”

레오니에는 부모님의 첫 부부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했다.

‘아빠가 밀린다!’

펠리오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부부 싸움은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냅다 방으로 도망쳤다. 방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펠리오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레오는 아직 12살이라고.

저 어린애가 무슨 연애냐고.

‘하긴, 아직 연애는 이르지.’

방에 들어선 레오니에는 혹시 몰라 방문을 찰칵, 잠갔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으로 갔다.

딸기 우유 맛 사탕이 든 유리병, 까만 사자 인형, 아빠가 어릴 적 썼던 모자. 어릴 적부터 모아온 레오니에의 보물이 진열되어 있었다.

내일 생일을 맞이하면 바리아가 선물해 준 또 다른 사자 인형들도 여기에 추가될 예정이었다. 레오니에는 방에 굴러다니는 시계 상자에 목걸이를 넣어, 그걸 소중한 보물들 사이에 올려 뒀다.

“예뻐라.”

이를 바라보는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피어올랐다. 가슴이 괜히 간질거리는 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다음엔 언제일까?’

침대에 앉아 보물들을 뿌듯하게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손가락을 접었다.

“다음, 다음…….”

내일은 자신의 생일.

다음 날은 루페와 인세레아의 아들인 루피의 첫 번째 생일.

생일 두 개를 연달아 치르면 북부는 겨울에 접어든다. 그럼 곧 폭설이 몰아칠 테고, 그 폭설이 끝나면 북부 산맥에 올라가 마물을 사냥해야 했다.

그 뒤엔 폭설과 마물 사냥으로 못 한 정무를 해내느라 바쁘다. 그리고 정무가 끝나면 다시 수도로 올라가야 했다.

‘사냥을 끝내야 하니까.’

생각해 보니 아주 빠듯하고 머리 아픈 일정들로 가득 찼다. 어쩌면 스칸디아 황녀를 다시 만날 날은 생각보다 오래 걸려 돌아올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서운했다.

‘그래도.’

손으로 턱을 괸 채, 레오니에가 슬그머니 웃었다.

“……드디어 끝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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