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드디어, 가족
“어이구, 이 화상들아!”
레오니에는 이제 주먹이 아니라 발로 문을 쾅쾅 밟았다. 저택을 아끼는 카라가 봤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광경이었다.
“빨리 나와!”
레오니에는 자신이 봐줄 만큼 봐줬다고 확신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새끼 내버려 두고 자기들끼리 방에 처박혀 있어!”
보통 아이들이었으면 서운함을 토로하는 걸 넘어 엉엉 울고도 남았을 일이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부모님들이 닷새 동안 침대 운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다.
“내 얼굴 다 까먹었겠다!”
“까먹진 않았어.”
그때, 문 뒤에서 펠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어제와 달리 목소리에 요상한 느낌은 없었다. 그냥 평소에 잠자고 일어날 때 들을 수 있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오오, 까먹진 않았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나왔다.
“그럼 한동안 떠올리진 않았다는 거네?”
“네 이야기 많이 했어.”
“그런 건 얼굴 보고 해!”
나 없는 곳에서 두 번 더 내 이야기했다가는 침실 바닥 부서지겠다고, 레오니에가 짜증을 꾸욱 누르며 반박했다.
“……너, 뭐 알고 이야기하냐.”
문 너머에서 들리는 펠리오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짙게 묻어 있었다.
“뭘 아니까 내가 닷새를 참은 거 아냐.”
“레오, 너 이 녀석.”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이 아빠 녀석아!
레오니에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다시금 인내란 누름돌로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했다.
“내가 지금 닷새 동안 혼자 밥 먹고, 혼자 일하고, 혼자 잤어.”
레오니에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계속 혼자였어…….”
물론 그 덕에 레오니에는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
제 방에서 먹으면서 근육 사전도 정독했고, 공작 대리란 칭호를 구실 삼아 기사들이 있는 훈련장에 놀러 가 근육을 구경했다.
거기다 펠리오가 금지한 살짝 수위가 높은 소설 속 장면도 열심히 삽화로 그렸다.
즐길 거 다 즐겼으니, 이젠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때였다.
“아빠랑 엄마는, 나 안 보고 싶어?”
레오니에가 코를 후비며 말했다. 덕분에 목소리가 맹맹하게 나왔다. 뜻하지 않은 이득이었다.
“난 보고 싶어…….”
아까부터 코가 계속 근질거린다 싶더니, 뭐가 나오긴 했다. 이 또한 예상 밖의 이득이었다.
손에 묻어 나온 예상 밖의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니에는, 망설임 없이 방문 앞에 슥슥 문질렀다.
“아빠, 엄마…….”
서글픈 목소리로 웅얼거리기 무섭게, 안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레오니에는 황급히 자신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빠르게 비볐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눈약을 눈 양쪽에 뿌렸다. 눈약을 주머니 안에 막 집어넣은 찰나.
“레오!”
“아가씨!”
펠리오와 바리아가 동시에 문을 열었다.
‘얼씨구.’
레오니에는 빈정거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닷새 만에 만난 부모님은 머리도 엉망이었고, 옷도 대충 걸친 상태였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살도 좀 빠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얼굴색은 어느 때보다 좋았다.
두 어른은 눈물을 글썽이는 레오니에를 보자마자 굳어 버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별거 아니라며, 레오니에가 손등으로 눈에 맺힌 물을 무심하게 닦았다.
계획된 아이의 행동에 부모님의 가슴이 철렁 아래로 내려앉았다. 둘은 아예 무릎까지 꿇으며 레오니에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시선을 피하는 레오니에의 눈가는 빨갛게 쓸려 있었다.
“부모님 사이를 방해나 하고. 못된 딸이다, 그치?”
처연한 표정을 지은 채, 아이가 코를 괜히 훌쩍였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말씀 마시라며, 바리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레오니에의 얼굴을 슬피 바라봤다.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이렇게 외롭게 놔둘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바리아는 차마 방을 나오지 못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버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당황할 뿐이었다.
“레오. 내 딸.”
펠리오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정말 미안하다.”
“아빠…….”
“그렇다고 나와 바리아가 널 잊은 건 아니야.”
“저, 정말이에요.”
바리아도 거들었다.
“공작님께서 얼마나…….”
“왜 또 공작님이라 부릅니까.”
펠리오가 끼어들었다.
“아까까진 이름으로 잘 불렀으면서.”
“그, 그건……!”
“또 혼나고 싶은 겁니까?”
펠리오가 바리아의 손목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 가는 손목 위에 올려진 굵은 엄지가 느리게 움직였다. 겨우 식었던 바리아의 얼굴에 다시 열이 올랐다.
“…….”
레오니에는 절 두고 불타오르는 부모님을 아주 조금 역겨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닷새도 모자랐네.’
따가운 시선을 느낀 펠리오와 바리아는 다시 레오니에한테 집중했다.
“하지만 공작님께선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무슨 이야기를?”
레오니에가 물었다.
“당연히 아가씨 이야기죠.”
레오니에는 그런 것치고는 닷새나 나오지 않은 건 의외라고 생각했다.
“손을 잡아도 될까요?”
바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응.”
레오니에는 흔쾌히 손을 주었다. 바리아가 이를 소중히 감싸 쥐었다. 아이는 가슴이 괜히 근질거려 몸을 살랑살랑 비틀었다. 펠리오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아가씨.”
“왜애?”
“공작님을 펠리오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갈 데까지 갔으면서, 굳이 그걸 제게 묻는 게 이상했다.
“그거야 아가씨의 아빠니까요.”
바리아가 말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리아가 귀엽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제가 공작님과 결혼을 하게 되면, 저와 아가씨의 관계 역시 새롭게 변할 거라고.”
“그거야 그랬지만…….”
“제가 그때 했던 말은, 우리 세 사람의 주도권을 쥔 건 아가씨란 뜻이었어요.”
바리아와 펠리오가 단둘이 방에 있었을 때. 이불 아래, 살을 맞댄 채 조곤조곤 나눈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나는 바리아, 그대를 사랑하지만, 어떤 순간이건 레오니에를 먼저 선택할 겁니다.’
펠리오는 바리아에게 그리 말했다. 그리고 바리아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펠리오가 제게 보여 준 사랑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레오니에는 그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바리아가 아무리 이들 부녀와 친해졌다고 해도,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인연이 가장 오래되고 튼실한 것이었다. 바리아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는 아가씨를 정말 좋아한답니다.”
자신이 펠리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데도, 그것이 레오니에의 엄마가 될 자격을 지닌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허락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펠리오와 ‘연인’이고 ‘부부’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처럼, 레오니에와도 ‘모녀’와 ‘가족’이란 관계를 새롭게 맺어야 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공작님을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요.”
바리아는 진지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저를 정말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이어 말하려던 바리아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짧은 심호흡은 그녀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보여 줬다.
“아가씨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요.”
“난 항상 언니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어.”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꼬옥 껴안았다. 느닷없이 품에 안긴 레오니에 탓에 바리아가 뒤로 휘청거렸다. 펠리오가 서둘러 팔을 뻗어 넘어지려는 둘을 감싸 안았다.
“헤헤, 괜히 부끄럽네!”
레오니에가 쑥스럽게 웃었다.
“나는 아빠랑만 있어도 행복했어.”
펠리오는 늘 최선을 다해 줬고, 레오니에는 그의 진심과 애정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다. 엄마가 필요하단 생각을 단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
펠리오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치만 이제 엄마도 생겼어!”
아기 맹수가 힘차게 외쳤다.
“난 이제 엄청 행복한 아이야!”
이틀 뒤.
드디어 가족이 된 맹수 세 가족은 아침 일찍 우르마리티 영지로 갔다. 레지나의 무덤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던 바리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 부탁은 그 전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닷새 동안 치러진 합방 때문에 뒤로 미뤄졌다.
“아빠가 엄마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어제 가는 거였는데.”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흘겨봤다. 아이의 입에선 ‘엄마’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럴 때마다 바리아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괴롭히진 않으셨어요.”
바리아가 볼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열이 오르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바리아가 힐끔힐끔 펠리오를 훔쳐봤다.
그 시선을 눈치챈 펠리오가 왜 그러냔 듯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렇습니까?”
부끄러워진 바리아가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레오니에가 뭐 어쩌란 거냔 듯이 입술을 거칠게 뻐끔거렸다. 음소거된 욕이었다.
“양심 없는 아빠 같으니.”
레오니에가 한심하단 듯이 노려봤다. 하여튼 뻔뻔하기론 정말 제국 최강이었다.
“레오, 내가 전에도 말했지?”
펠리오가 말했다.
“네 아빠의 양심은 북부 산맥처럼 넓단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북부 산맥처럼 메말랐다고.”
레오니에가 맞받아쳤다.
“제 눈엔 두 분 다 똑같은데.”
두 부녀의 찰진 대화에 바리아가 어느새 웃음을 머금었다. 악의 없는 엄마 맹수의 한마디에 아빠와 아기 맹수가 인상을 와락 썼다.
둘은 다른 건 몰라도, 양심 하나만큼은 자신이 더 낫다고 늘 자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드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우르마리티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활기 넘치는 광장을 지나, 나무가 많고 인기척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여기야.”
먼저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가 말했다.
이곳은 우르마리티 영지민들이 생의 마지막에 모이는 공동묘지였다. 레지나는 그곳에서도 가장 안, 우르마리티 가문이 묻히는 구역에서 잠들어 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네요.”
무덤 앞에 선 바리아가 말했다.
“아마 할아버지일 거야.”
“레지나 님의 아버지이신…….”
“우르마리티 백작입니다.”
펠리오가 무덤에 조그만 꽃다발을 올리며 말했다. 레지나가 좋아하는 화려하고 큰 꽃들만 모아 카라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레지나는 방계 출신임에도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드문 경우였죠.”
펠리오는 레지나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래서 보레오티 저택에서 함께 산 건가요?”
“그런 것도 있고, 본인이 우르마리티에 가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아 했죠.”
“어째서요?”
바리아가 물었다.
“본인이 말은 안 했지만…….”
무덤을 내려다보는 펠리오의 눈은 잠시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마 새로 태어난 형제들이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죽은 모친의 하녀가 자신의 새엄마가 된다는 건, 귀족 출신인 레지나에겐 못마땅하고 떨떠름한 일이었을 거다.
그래서 우르마리티 백작이 새 부인과 낳은 저의 이복형제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었다.
“백작 부인, 좋은 사람 같던데.”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몸을 슬쩍 기대며 말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싫은 사람일 수 있어.”
펠리오가 아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빗겨 주며 말했다. 아빠의 교훈 섞인 잔소리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뻐끔거렸다.
“레지나는 어떤 분이셨나요?”
바리아가 물었다.
“철부지였죠.”
펠리오가 즉답했다.
“집사 할머니랑 루페 아저씨는 내 친모를 좋아했대요.”
레오니에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난 별로.”
펠리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모두가 사랑했던 레지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까 그 이야기는 아빠 이야기였네!”
레오니에가 깔깔 웃었다.
세 사람은 곧 눈을 감고 레지나의 영면을 위해 기도했다. 특히 바리아가 가장 열심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일찍이 눈을 떴다.
“뭐라고 기도했어?”
묘지를 나오면서, 레오니에가 물었다.
“이렇게 예쁘고 멋진 따님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요.”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손을 쥐며 말했다. 레오니에가 헤벌쭉 웃었다.
“내 이야기는요?”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반대쪽 손을 쥐며 물었다. 아름다운 그의 얼굴 위에 소심한 질투가 묻어 있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바리아는 웃음이 터졌다.
“어우, 주책이야!”
반면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가 창피했다.
“엄마가 이해해. 울 아빠가 덩치만 컸지, 속은 아직 애야.”
나잇값 못 하고 질투가 어마어마하다고 레오니에가 일러바쳤다. 좀생이라는 놀림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만 자기 칭찬 안 해도 저렇게 징징거린다니까. 하여튼 너무…….”
“우리 레오는 재산이 필요 없단 말을 꼭 저리 문학적으로 돌려 말하는군.”
“……완벽하다니깐. 엄마, 아빠 칭찬 좀 해 줘.”
내 재산을 위해서라도. 레오니에가 울먹이는 눈동자로 바리아에게 애원했다.
“하하!”
겨우 웃음을 그쳤던 바리아가 또 배꼽을 잡았다.
* * *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스는 나름 긴장한 상태였다.
‘마님이라 불러야겠지?’
며칠 전에 나름 각오하고 저택에 들어갔더니, 두 눈으로 본 게 보레오티 공작과 함께 방에서 나온 바리아였다. 심지어 닷새 동안 같이 있었단다.
그대로 굳어 버린 레스는 마침 근처에 있던 하녀 두 명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지금.
‘바리아가 아니라 마님, 마님…….’
잠시 외출한 바리아를 기다리는 레스는 열심히 ‘마님’ 호칭을 연습했다.
“레스!”
그러나 다 헛수고였다.
“바리아!”
가족들과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바리아를 보기 무섭게, 레스 본인도 모르게 이전처럼 편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오랜만이야!”
“너 진짜……!”
레스는 아주 조금 울컥했다. 바리아는 행복해 보였다. 황궁 기숙사에서 지낼 적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던 그녀 옆에 드디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생겨 너무 기뻤다.
비록 펠리오의 명 때문에 바리아를 감시했지만, 레스는 바리아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 친구이기도 했다.
“그간 잘 지냈어?”
바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레스를 껴안았다.
그 뒤로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나타났다. 레오니에는 손을 흔들며 레스에게 아는 척을 했다.
반면 펠리오는 서로 포옹 중인 두 친구를 말없이 응시했다. 작작하고 내 아내한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거란 뜻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레스가 먼저 떨어졌다.
“있지.”
여전히 레스의 손을 쥔 채, 바리아가 물었다.
“처음부터 날 감시한 거야?”
“……어우야.”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바리아의 물음에 레스는 눈앞이 아찔했다. 설마 이렇게 바로 물을 줄은 몰랐다.
“그게…….”
레스가 대답하기 전에 펠리오를 보았다. 바리아 옆에 떡하니 앉은 그는 잠시 딴청을 피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 때문이긴 했어.”
솔직하게 대답한 레스가 혹여나 바리아가 오해할까, 서둘러 덧붙였다.
“그, 그래도 널 내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어! 물론 넌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지만, 난 너랑 있으면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어.”
아무리 명령이었어도, 장장 5년이나 옆에 붙어 있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화났어?”
레스가 물었다.
“아니.”
바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신기하게도 화가 전혀 나지 않았다.
나를 속였다고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도리어 바리아는 레스에게 고마웠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힘들었던 순간마다, 옆에 있어 준 레스 덕에 버틸 수 있었다. 거기다 레스 덕에 펠리오가 자신을 알아줬다. 어떤 의미로는 정말 고마운 존재였다.
“히잉, 바리아!”
감동한 레스가 바리아를 껴안으며 훌쩍거렸다.
“엄만 사람이 너무 착해.”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레오니에가 이해가 가지 않는단 듯이 말했다.
“나 같으면 머리 가죽을 뜯어 버렸을 텐데.”
감히 날 속였냐면서, 막 이렇게 할 거라고 레오니에가 허공에다 팔을 뻗곤 진짜 누군가의 머리 가죽을 뜯는 것처럼 마구 흔들었다.
식겁한 레스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저, 전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라고요!”
“에이, 농담이야.”
“농담 아니셨잖아요.”
레스가 억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조금 전 허공을 쥐어 잡던 레오니에의 두 손은 진짜였다.
“……어쨌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펠리오가 가장 늦게 입을 열었다.
“그간 수고가 많았다.”
“별말씀을요.”
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리아란 친구도 만났고, 그 친구는 곧 공작 부인이 될 예정이었다. 거기다 이번 일로 모은 돈도 엄청났다.
제게도 그리 나쁜 명령은 아니었으니, 여러모로 행복한 결말이었다.
“그럼 그 둘은?”
펠리오가 본론을 물었다. 바로 레스가 친가에 간다고 자리를 비우자마자 북부 산맥으로 숨어든 오노켄타 남작과 불륜 관계인 행정관의 근황이었다.
“일단 살아는 있습니다.”
레스가 말했다.
‘이대로 마물 밥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책 잡힐 짓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럼 겁이라도 실컷 먹여 줘야지.’
레오니에와 루페의 짧은 의견 교환은 곧장 기사들에게 전해졌다.
북부 산맥으로 숨어든 둘을 계속 뒤쫓았던 기사들은 어느 지점에서 나타났다.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어서 하산하십시오.’
기사들은 둘을 말렸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었다.
오노켄타 남작은 황제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며 오기를 부렸다. 그나마 옆에 같이 있던 다른 행정관은 겁을 먹고 멈췄다.
결국 남작 홀로 산을 올랐다.
“남작이…….”
바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노켄타 남작과의 악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남작, 전에 엄마를 성희롱했대.”
레오니에가 냉큼 펠리오한테 일러바쳤다.
펠리오의 입술 틈 사이로 바드득,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노켄타 남작을 향한 사형 선고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마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레스가 이어 보고했다.
“하지만 남작이 산에서 굴렀습니다.”
“굴렀다고?”
바리아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작이 산을 굴렀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이내 제 생각이 조금 웃겨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아주 조금 고소했다.
“마물의 울음소리에 놀랐답니다.”
기사들이 때맞춰 나타난 곳은 종종 마물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낯선 이들의 침입을 감지한 마물이 커다란 울음소리로 경고했고, 지레 놀란 남작이 도망치다가 발을 헛디뎠다고.
“그래서 지금 남작은?”
펠리오가 물었다.
“징징거리고 있어요.”
레스가 혀를 내둘렀다.
어제 병문안을 갔더니,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그런 위험한 곳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한 글라디고 기사들을 마구 욕했었다.
그러다 레스 뒤에 있던 기사들을 보곤 얼굴이 파리해진 채 기절했다. 레스는 마물도 저런 놈은 잡아먹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펠리오가 말했다.
그는 레스와 또 다른 행정관 둘만 북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오노켄타 남작에겐 그가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황실에 묻겠다고 전할 예정이었다.
“황실이 남작을 버리지 않을까?”
레오니에가 물었다.
“가능성은 있죠.”
바리아가 말했다.
“황실은 이 모든 것을 오로지 제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홍보하고 있어요.”
대외적으로는 네 지역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려 할 거다. 그것이 설령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기로 악명 높은 북부여도.
실수를 저지른 오노켄타 남작은 이용하고 버릴 체스 말이었다. 그런 것을 다시 구하는 것도 꽤나 소모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버리지 않을 거예요.”
“우리도 그걸 이용해야죠.”
펠리오도 바리아의 의견에 동감했다. 그러니 북부는 황실에게 이 문제를 따져야 했다.
“……아아!”
레오니에가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짝 마주쳤다.
“우리가 자기들 계획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거지?”
북부는 오노켄타 남작에게 일어난 사고를 공무 집행 중에 일어난 일로 취급할 거다. 그 말인즉, 북부는 황실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겠단 뜻이었다.
황실도 당장 남작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러니 업무상 개인 과실로 이를 처리할 거다.
황실의 음모는 오노켄타 남작의 과실로 숨겨지고.
북부는 그 과실을 가면으로 써서 자신들의 무지를 연기하고.
이뿐만이 아니었다.
“북부 탐색도 막은 거야.”
황실이 북부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은 보레오티 입장에선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황실이 파견한 세 행정관에서 레스를 제외하면, 그중 가장 위험한 건 오노켄타 남작이었다.
그는 이번 일을 완수하여 수비테오 황제의 눈에 들 심상이었다. 황제에게서 밀명을 받았을 가능성도 컸다.
‘그러니 북부 산맥을 오르려고 했던 거겠지.’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건 그의 불륜 상대인 행정관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레스와 호위로 붙을 글라디고 기사단이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히려 홀로 남아 불안한 상태일 때 뭔가를 얻어 낼 수도 있겠어.”
수상한 행적이나 말실수에서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남작한테 뭔 소리를 들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잘했어.”
펠리오가 아이에게 사탕을 쥐여 주며 칭찬했다.
“으음, 달다!”
칭찬받은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곧장 사탕을 입에 넣었다. 딸기 우유 맛이 어느 때보다 진했다.
“우리 아가씨, 대견도 하지.”
바리아도 어쩔 줄 모르겠단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그럼 이름으로 불러 줘!”
레오니에가 한쪽 볼에 사탕을 넣은 채로 말했다.
“이, 이름은 아직 부끄러운데…….”
“지금 와서 뭘 부끄러워한담.”
아빠랑 갈 데까지 간 사이면서. 그래도 효심이 지극한 아기 맹수는 뒷말을 가슴 속에 묻었다.
바리아는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고 연애에 보수적이었다. 괜히 놀렸다간 또 얼굴 붉히며 저자세를 보일 것 같았다.
‘……으음.’
그리 생각하던 레오니에가 곧 멈칫했다.
‘보수, 는 아닌 것 같아.’
그리곤 제 생각을 정정했다. 보수적인 사람이 침대 운동을 닷새나 하진 않을 거다.
“그냥 다 아빠 탓이야.”
아기 맹수는 결국 만만한 아빠를 탓했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펠리오는 자식새끼 다 소용없단 걸 오늘도 깨달았다.
이야기를 마친 레스는 다시 여관으로 돌아갔다.
“바리아 너랑 친구가 돼서 정말 다행이야!”
떠나기 전까지 레스는 바리아의 손을 잡고 마구 떠들었다.
“네가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되다니! 내가 줄은 잘 잡았어!”
“레스 언니, 그 줄 계속 잡으면 아빠가 언니 손목 자를걸?”
레오니에가 미리 경고했다.
“…….”
그 말대로, 펠리오는 바리아의 손을 아직도 쥐고 있는 레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편지할게!”
레스는 후다닥 손을 떨어트리고 냉큼 저택을 떠났다.
“아빠의 질투는 무섭대요!”
레오니에가 얄밉게 놀렸다. 딱히 변명할 말이 없던 펠리오는 괜히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를 뽑았다.
이후의 저택은 평온했다.
사실, 아주 많이 들썩거렸다.
닷새간의 합방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저택 사람들은 바리아를 ‘마님’이라 불렀다. 모두 그녀가 새 공작 부인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이미 공작 부인이었다.
카라는 바리아에게 보레오티 가문의 역사를 설명해 주며, 역대 공작 부인들이 이곳 저택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들려주었다.
“그런데 마님.”
한참 열심히 듣고 있던 바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세요?”
“우선, 저를 부르실 땐 존칭을 쓰시면 안 됩니다.”
“아…….”
바리아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 자신은 아직 ‘손님’이었기에 이들에게 함부로 말을 낮출 순 없었다. 그러나 이젠 바리아도 자신이 ‘보레오티’가 되었음을 받아들였다.
“조, 조심할게.”
카라는 말투를 고친 바리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보레오티의 주인이 사용인인 저에게 존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가씨께선 집사님께 쓰시던데.”
“우리 아가씨는 항상 예외랍니다.”
카라가 말했다.
애당초 레오니에는 카라를 사용인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는 카라를 ‘할머니’처럼 대했다. 그녀는 펠리오의 유모였으며, 펠리오 또한 카라를 존중했다.
이를 어렸을 때 눈치껏 알아낸 아기 맹수는 사용인 중 카라에게만큼은 늘 예의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젠 아가씨가 아니라 따님이시지 않습니까.”
엄마가 딸을 그렇게 높여 부르는 것도 문제라며, 카라가 정중히 제기했다.
“그럼 레오라고 불러도 될까?”
“아가씨께서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카라가 소파에 앉아 책 읽는 척하는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
다 듣고 있으면서도, 레오니에는 슬금슬금 등을 돌리며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두 눈은 바리아를 힐끔거렸다. 동그란 두 귀도 꿈틀거렸다. 이름을 불러 주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레, 레오, 레오니에…….”
기세 좋게 꺼낸 첫 글자와 달리, 바리아의 목소리는 점점 사그라졌다. 때문에 마지막 글자는 거의 공기 중에 휘발되어 들리지도 않았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레오니에가 퍽 실망했다.
“아빠도 만날 공작님이라 부르더니…….”
독서 중이라던 아이의 입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랑 아빠를 버릴 생각인 게야.”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은. 레오니에는 이래서 사기 결혼을 조심해야 한다며 한참을 혼잣말로 쫑알거렸다.
“……그럴 생각이십니까?”
카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리아를 바라봤다.
“아, 아니에요!”
바리아가 억울하단 듯이 말했다.
“그냥 공작님이랑 아가씨라고 부른 시간이 더 길어서 그래요.”
“누가 들으면 천 년, 만 년 그리 부른 줄 알겠네.”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이의 눈은 여전히 책에 꽂혀 있었다.
애독서 ‘인생 다 부질없다’의 작가가 장장 5년 만에 새로 출간한 세 번째 후속작, ‘인생은 한 방이다’였다.
“어휴,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레오니에가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
“난 엄마라고 부르는데, 엄마는 날 남처럼 대하고…….”
입술이 오리 부리처럼 튀어나온 레오는 삐딱한 시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아, 아니에요!”
“거기다 아직도 존대하고.”
“이제 존대 안 할게!”
바리아가 서둘러 말투를 바꾸었다. 그제야 레오니에의 입술이 쏙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 반항기 어린 눈은 그대로였다.
“이름은?”
“레오니에.”
“…….”
“레, 레오……?”
드디어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애칭을 불렀다. 아직 어설픈 호칭이었지만, 레오니에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입술이 헤벌쭉 올라갔다.
“엄마!”
그리곤 바리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바리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작 애칭 한 번 부른 게 다인데, 이렇게 좋아해 주는 레오니에를 보니 그깟 부끄러움이 다 뭔가 싶었다.
많이 부족한 자신을 그대로 엄마라고 부르고 따라 주는 아이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앞으로 많이 부르자.’
익숙하지 않은 것쯤이야, 수도 없이 부르다 보면 자연히 입에 배일 터였다.
“레오, 레오.”
바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 등에 두른 레오니에의 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바리아는 안겨 오는 포근한 체온에 마음이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뭘 하는 거야.”
펠리오가 의아한 눈으로 두 모녀를 바라봤다.
“엄마랑 포옹!”
레오니에가 한 손을 흔들며 아빠를 반겼다.
“있잖아, 엄마가 내 이름 불러 줬다?”
“나는 한참 전에 불러 줬어.”
펠리오가 잘난척했다.
“어리석은 아빠 같으니.”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난 애칭이야.”
아무나 막 부르는 본명과 애정을 담은 애칭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펠리오가 가장 잘 알았다. 그 역시 레오니에를 항상 애칭으로 불렀고, 아이의 본명을 똑바로 부를 때는 크게 혼을 낼 때뿐이었다.
“그깟 이름이야.”
애칭에 비할쏘냐, 레오니에가 얄밉게 히죽였다.
“…….”
펠리오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딸을 노려봤다.
“두 분을 부를 땐 항상 애정을 담아 불러요.”
바리아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그러나 기 싸움 중인 부녀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애초에 아빠는 애칭도 없잖아.”
“있어.”
“뭔데? 뭔데?”
“네가 나보고 아빠라 부르는 거.”
“이 아빠가 미쳤나.”
레오니에가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펠리오도 자신의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한 손으로 괜히 턱 언저리를 쓸며 모르는 척했다.
“그건 호칭이잖아…….”
딸이 아빠를 아빠라 부르는 걸 애칭이라고 생각했다니. 또 한마디 하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펠리오가 조금 안쓰러웠다.
문득 생각해 보니, 펠리오의 삶은 참으로 삭막하고 정적이었다. 북부의 수장이란 책임감 아래 그 딴엔 최선을 다해 살아는 왔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펠리오에게 무한한 애정을 퍼부어 주고 보듬어 주진 못했다.
그러던 순간에 레오니에가 나타났고. 이젠 바리아도 함께였다.
“으음.”
놀리는 걸 멈춘 레오니에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럼 ‘리오’는 어때?”
아이가 아빠의 애칭을 지어 줬다.
“나는 레오, 아빠는 리오.”
“리오라, 귀여워서 좋네요.”
바리아도 마음에 들어 했다. 정작 펠리오는 막상 애칭으로 이름이 불리니 꽤나 어색하고 불편했다.
어쩐지 철부지 꼬마가 된 기분이었고, 모녀 둘이 애칭이랍시고 불러 주는 소리가 괜히 낯간지러웠다.
가슴도 간질거렸다.
“너무 애 같은데.”
“원래 애칭은 그런 거야.”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카라 할머니, 그렇죠?”
“애정 앞에선 모두가 어린아이지요.”
카라가 지당한 말씀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니에가 거 보라며 어깨를 기고만장하게 으쓱거렸다.
“엄마도 애칭 있었어?”
레오니에가 바리아에게 물었다. 다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바리아의 가정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리아도 있었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선 불러 주셨어요.”
몇 안 되는 소중한 과거인지, 이를 추억하는 바리아의 얼굴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반말한다더니…….’
레오니에가 다시 존대하는 바리아를 밉지 않게 흘겼다. 하지만 이것도 익숙해져야 가능한 일이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리리, 리아. 늘 바뀌었지만, 저는 그렇게 불러 주시는 게 좋았어요.”
“엄마도 우리랑 비슷하구나.”
레오, 리오, 리아.
아기 맹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우리는 가족이 될 운명이었어!”
아이는 부모님 손을 한쪽씩 잡아 힘차게 만세 했다. 얼떨결에 한쪽씩 팔이 들린 펠리오와 바리아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카라는 안경을 벗었다. 손에 들린 손수건 끄트머리가 어느새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레오니에가 각각 잡은 부모님의 양손을 흔들며 물었다.
“내가 화동하고 싶어!”
아이는 벌써 자신이 예쁜 옷을 입고 꽃을 흩뿌리는 상상에 빠졌다.
“아…….”
반면 펠리오는 드물게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그 불길한 소리에, 레오니에와 카라가 동시에 펠리오를 바라봤다.
설마 설마 하는 두 여자의 눈빛에 펠리오가 서둘러 바리아에게 말했다.
“결혼식을 좀, 늦게 해도 괜찮…….”
“당연히 안 되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레오니에와 카라가 냅다 소리쳤다. 당장 잡아먹을 듯한 두 사람의 기세에 펠리오가 인상을 와락 썼다.
그리곤 슬금슬금 바리아 뒤에 서더니,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바리아.”
이내 바리아의 머리에 턱을 괴며 웅얼거렸다.
“쟤가 나 괴롭힙니다.”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아빠의 애교는 끔찍했다. 다만 엄마에겐 잘 먹혔다.
“괴, 괴롭히시면, 안 되죠!”
바리아가 얼굴을 붉힌 채 레오니에를 타일렀다.
“아빠가 슬퍼하잖아요.”
“너무 슬픕니다.”
“제가 타일렀으니까, 슬퍼하지 마세요…….”
엄마 맹수는 제게 찰싹 달라붙어 고자질하는 아빠 맹수가 마냥 귀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욱.”
보다 못한 레오니에가 헛구역질을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이고, 아무리 멋지고 예쁜 연인이면 뭐하나. 자식에게 부모님의 애정 행각은 맹독이었다.
* * *
‘결혼은 허망하답니다.’
어느 날엔가. 보스그루니 백작이 예절 수업 중에 그렇게 말했었다.
‘일종의 과시지요.’
당시 아홉 살이었던 레오니에는 여전히 분간하기 어려운 꽃 그림을 보며 꽃말을 외우는 중이었다.
꽃말을 외우느라 짜증 나던 찰나에 들려온 백작의 말은 흥미로웠다.
‘귀족의 결혼은 그 가문의 재력과 연줄, 현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답니다.’
‘나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네요.’
어차피 보레오티에겐 다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보레오티는 이미 존재만으로 잘나고 완벽했으니까.
‘난 무조건 화려하게 해야지.’
돈 쓰는 재미를 알게 된 아기 맹수는 자신의 결혼식을 대충 떠올려봤다.
제국에서 결혼식은 보통 자택 정원이나 신전에서 하지만, 레오니에는 자신의 결혼식은 마물이 득실거리는 북부 산맥에서 하겠다고 농담했다.
하나, 말 그대로 농담이었다. 그만큼 레오니에에게 결혼은 머나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취향 타는 사람도 있겠어요.’
문득 생각해 보니, 귀족도 귀족 나름인지라, 그런 경우는 드물겠지만 화려하고 웅장한 행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바로 보레오티였다.
‘……그냥 하지 말까.’
레오니에가 치를 떨었다. 결혼식 준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다 아팠다.
‘근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오늘이 제 결혼기념일이거든요.’
‘아…….’
‘그리고 남편 새끼, 아니, 아르데아가 집을 나간 날이기도 하고요.’
그날 레오니에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보스그루니 백작의 눈치를 살피며 묵묵히 수업에만 집중했다.
“…….”
흐음.
어린 시절을 잠시 떠올린 레오니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뒤에서 레오니에의 등을 꾹꾹 눌러주던 멜레스가 물었다.
“혹시 아프세요?”
“아니. 조금 더 세게 눌러도 괜찮아요.”
“그럼 힘 더 싣겠습니다.”
멜레스가 팔에 힘을 더 넣었다. 그러자 다리를 쩍 벌린 채 상체를 앞으로 숙이던 레오니에의 몸이 더욱 납작해졌다.
소녀의 유연성은 기사단 내에서도 가장 으뜸이었다.
북부에 돌아온 뒤로, 레오니에는 꾸준히 훈련장에 나가 몸을 단련하고 검술을 익혔다.
수도에 있을 적에도 매일 해 왔지만, 북부에서 하는 게 집중도 잘 되고 성과도 쭉쭉 오르는 기분이었다.
연체동물 같은 준비 운동을 끝낸 레오니에가 목검을 쥐었다.
“멜레스 언니는 결혼할 거예요?”
레오니에가 질문과 동시에 검을 크게 내려쳤다. 멜레스는 여유롭게 목검을 받아넘기며 불쑥 레오니에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곤 반격했다.
“적령기라면 적령기네요.”
한참 목검을 주고받던 중, 멜레스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기사단 내에 좋은 사람 없어?”
“그냥 결혼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휘두르는 멜레스의 목검에 힘이 잔뜩 실렸다. 이를 받아치며 가까스로 막아 낸 레오니에가 서둘러 거리를 뒀다. 그리곤 손을 털었다. 조금 전 그 일격 때문에 손이 아렸다.
“저는 저놈들이랑 반신욕도 할 수 있습니다.”
“우와…….”
“그리고 저놈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녀에게 기사들은 못 볼 꼴 다 보고 겪으며 여기까지 함께 온 동지들이었다.
멜레스는 소중한 동료들과의 관계를 깨기도 싫었고, 애당초 두근거리며 가슴 아리는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조차 느낀 적 없었다.
“그래도 파보는 제법 인기가 많았죠.”
멜레스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엔 파보가 다른 기사와 함께 검술 대련 중이었다.
“저 오빠, 너무 변태처럼 생겼는데.”
“그래도 나름 지킬 건 지키거든요.”
생긴 것과 다르게요. 멜레스가 깔깔 웃었다.
두 사람은 한참 더 검술 대련을 한 뒤에야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갑자기 왜 물어보세요?”
“아빠랑 엄마랑 결혼식을 안 하겠다고 해서.”
레오니에가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헉헉 차오르는 숨은 그제야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안 하신대요?”
멜레스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보레오티인데요?”
상식적으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북부는 보레오티를 무서워하나, 그만큼 존경도 한다.
이제 북부 전역에는 바리아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보레오티가 될 바리아에게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보레오티의 결혼식 또한 무척이나 기대했다.
보레오티 같은 지역의 수장들이 치르는 결혼은 단순한 ‘과시’가 아니었다. 그 지역의 축제이고 명절과 같은 행사였다.
“제 남동생이 엄청 실망하겠어요.”
멜레스가 말했다.
“그런데 왜 안 하신대요?”
“귀찮다고요.”
“아아…….”
그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멜레스는 단번에 이해했다. 사람 많고 겉치장 가득한 걸 싫어하는 펠리오라면 그럴 만했다.
“마님께서 속상해하지는 않으시던가요?”
“엄마가 더 하기 싫어했어요.”
“아…….”
멜레스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나지막이 소리를 흘렸다. 어쩜 부부가 그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라는 감탄의 뜻이었다.
“심지어 아빠가 하자는 쪽이었어요.”
귀찮아도 해야 하지 않을까.
레오니에가 마저 닦지 못한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펠리오의 말을 따라 했다.
멜레스는 보레오티 가문에 정말 엄청난 사람이 왔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 * *
솔직히 결혼식 이야기는 레오니에조차 의외였다. 왜냐하면 펠리오가 예상보다 적극적이었고, 바리아가 예상보다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하기 싫어?”
기어코 레오니에가 수업 중에 물었다. 한참 ‘말은 우아할수록 강하다’란 이상한 책을 소리 내 읽던 바리아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무얼요?”
“결혼식.”
“으음, 일단 지금은 수업 중이잖아요.”
바리아가 가볍게 주의를 줬다.
“이건 수업이 아니라, 독서 시간이잖아.”
레오니에 역시 바리아가 읽는 것과 똑같은 책을 들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일전에 수도에서 하루에 30분씩 하기로 약속했던 교양 수업 중이었다.
“하지만 매일 꼬박꼬박하잖아요.”
그러니 수업이라며 바리아가 웃었다. 승자의 미소였다.
“엄마를 너무 우습게 봤어.”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패자의 굴복이었다.
이깟 교양 수업쯤이야, 라며 레오니에는 이를 아주 하찮게 생각했다. 귀찮고 따분한 예절과 교양은 보스그루니 백작에게 배우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아는 강했다.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과연 죽음을 한 번 겪은 탓인지 인내와 끈기가 대단했다.
바리아는 땡땡이치는 레오니에를 어떻게든 찾아냈고, 레오니에가 제법 수위 높은 근육 그림으로 회유해도 물러섬이 없었다.
심지어 수도에서 북부로 올라오는 여정 중에도 꼬박꼬박 수업했다.
아기 맹수는 거침없이 달렸지만, 엄마 맹수는 그 위에서 가소롭단 듯이 날았다.
결국 패배를 인정한 레오니에는 매일 꼬박꼬박 바리아에게서 교양을 배웠다.
“그래서, 왜 결혼식 안 해?”
레오니에가 다시금 물었다. 바리아는 책상 위 모래시계를 보았다. 딱 30분 분량의 모래가 아래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수업 시간이 어느새 막바지였다.
“……그냥 그래요.”
바리아가 책을 덮었다. 오늘 수업은 재량껏 끝냈다. 레오니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덮었다.
“엄마가 예쁜 드레스 입는 거 보고 싶었는데.”
“지금도 예쁜 드레스는 많아요.”
펠리오가 선물한 드레스만 벌써 방을 두 개나 채우고도 한가득했다. 바리아는 그걸 평생 다 입을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래도 결혼식 때 입는 건 다를 거 아냐.”
레오니에는 그게 퍽 아쉬웠다.
“이왕이면 아주 화려하게 해서, 다른 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이요?”
“뭐…….”
레오니에가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슬쩍 바리아를 바라봤다.
“엄마네 가족들이나…….”
레오니에는 차마 ‘할아버지’라든가, ‘이모’라고 부르기는 싫었다.
하지만 바리아가 엄마가 되었으니, 그들은 자연히 레오니에의 친척이 되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바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을 주저하는 이유가 바로 가족들 때문이었다.
귀족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기도 했다. 어쨌건 바리아는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 있으니 그들을 초대해야 했다.
“얼마나 악덕한데요.”
바리아는 결혼식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결혼으로 인해 혹여 제 가족들이 보레오티에 큰 잘못을 저지를 것 같아 무서웠다.
“으음…….”
레오니에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수업 꽤 재미있어.”
대신 바리아에게 이 교양 수업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감상을 말했다.
“정말요?”
바리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눈치 좋은 아기 맹수의 화제 전환은 역시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많이 배웠어.”
“후후, 다행이에요.”
“내가 생각이 참 짧았어.”
“그렇진 않아요.”
“아니야.”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부드럽고 우아한 화법으로 협박해야 상대방 속이 썩어난다는 걸 깨달았어.”
아무리 교양이 귀찮아도, 배울 가치는 있구나. 레오니에는 저 나름 이 수업에서 배우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
하나 이는 바리아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바리아가 씻는 동안,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 결혼식에 대해 물어봤다. 당연히 바리아가 결혼식에 회의적인 이유도 말해 줬다.
사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펠리오는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하나 이를 레오니에한테서 확인받는 것이 썩 좋진 않았다.
“아빠, 있잖아.”
그래서 레오니에가 제안을 했다.
“그 인간들 목만 따서 의자에 올리는 건 어때?”
그러면 바리아한테 싫은 소리도 하지 않을 테니, 평화로운 결혼식과 신혼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영특한 제안이다만.”
펠리오가 딸의 영민함을 칭찬했다. 그도 마음 같아서야 에르바누고 올로르고 그냥 다 목을 쳐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바리아에게서 직접 들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만 하면 그간 세웠던 계획이고 뭐고 뒤집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바리아가 싫어할 거야.”
펠리오도 이젠 바리아가 자신의 가족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이고 싶단 뜻은 아니었다.
“결혼식은 평화로워야 해.”
바리아가 마지막까지 싫어한다면, 펠리오는 결혼식을 아예 하지 않을 생각도 있었다. 그 역시도 사람이 득실거리는 건 질색이었으니까.
그래도 모두에게, 특히 어리석은 에르바누들에겐 보여 주고 싶었다.
그대들이 무시하고 낮잡아 본 이 여인은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그리고 이제부터 보레오티가 그녀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지켜보라고.
“……선전 포고?”
멀뚱히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사위는 장인어른한테 무릎 꿇고 허락을 구걸한다고!”
“그럴 바에야 그놈들 목만 가져와서 결혼하련다.”
“푸하하하!”
레오니에가 깔깔거렸다. 펠리오는 그런 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저리 웃는지 이해가 안 갔다.
요즘 애들이 많이 이상하다곤 하지만, 세상 어떤 아이도 제 딸만큼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만 웃어.”
그러다 목 상할라. 펠리오는 아이가 숨이 헐떡이는 걸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다행히 레오니에는 너무 웃어 가슴이 아프기 딱 직전에 멈췄다.
“……그래서.”
웃느라 헐떡이던 숨을 고른 레오니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젠 어떻게 할 거야?”
조금 전까지 명랑하고 웃음 많던 열두 살 소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늘하게 식은 검은 눈동자가 어둑한 창밖 너머를 바라봤다.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채, 소녀는 타고난 긴 다리를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렸다.
오만한 맹수 그 자체였다.
펠리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움직여야지.”
그는 그런 딸의 변화에 놀라지 않았다. 도리어 아주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여겼다.
아이가 점점 자신을 닮아가 어엿한 맹수가 되어 가는데, 어찌 안 기쁠 수 있을까.
곧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레오니에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제 다 모였어.”
얇게 접힌 펠리오의 검은 눈이 서슬 퍼렇게 반짝였다.
무려 5년을 준비한 사냥이었다. 펠리오는 사냥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흉내를 냈다.
그사이 사냥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설쳤다. 어리석게도 이는 제 무덤을 파는 짓이었다.
검은 맹수는 조금씩 움직였다.
아주 조금씩.
험준하기로 유명한 북부는 늘 눈이 내렸다. 검은 맹수는 이 눈이 쌓이고 쌓여 자신을 완전히 감쌀 정도로 티 나지 않게 움직였다.
기다림은 지루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끝날 때가 되었다.
“레오.”
펠리오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다.”
정말 괜찮겠어?
아이를 살피는 펠리오의 눈빛은 아까와는 또 달랐다.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는 바리아에게 보여 주는 뜨겁고 어두운 감정과는 많이 달랐다.
“아빠, 좀 실망인데?”
레오니에가 한쪽 입가를 비틀었다.
“나 보레오티야.”
아기 맹수는 물러섬 없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난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줍지 않아.”
“네 성희롱 발언은 주워야 하지 않겠냐.”
“……지금 분위기 잡았잖아!”
그걸 왜 깨!
레오니에가 또 쓸데없이 시비 거는 펠리오에게 솜방망이 주먹을 날렸다.
“아오, 아까 우리 엄청 멋있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멋있어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진 레오니에가 씩씩거렸다.
그러자 펠리오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가족은 원래 멋있어.”
“그 정돈 알아!”
보레오티는 세계 최강이었다. 레오니에는 그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래서 너한테 감탄한 거고, 마지막으로 물어보려는 거야.”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제안한 어떤 ‘사냥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 방법이 붉은 백조와 황실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는 사실엔 공감했다.
그래서 오르티오 후작에게 사탕을 줬다. 다만, 펠리오는 여전히 그 방법이 탐탁지 않았다. 마치 제 딸을 파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빠, 내 아빠.”
레오니에가 그런 펠리오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평소 그가 딸아이에게 해 주는 작은 애정 표현이었다.
“내가 왜 그런 방법을 떠올렸는지 알아?”
“글쎄다.”
“그건 내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아.”
그 말에 펠리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펠리오 보레오티의 딸이야.”
그 사실만이 지금의 레오니에를 있게 한 주춧돌이었다.
“물론 이젠 바리아 보레오티의 딸이기도 하지만.”
레오니에가 엄마도 잊지 않고 말했다.
“거기다 레지나의 딸이기도 하고.”
“…….”
“난 내 친모를 잊진 않았어.”
아무리 정이 없다고 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레오니에는 이 ‘몸’을 낳아 준 레지나의 은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시간을 내 우르마리티 백작과 함께 그녀의 무덤에 찾아갔다.
“이건 내 나름의 효도야.”
“효도라…….”
펠리오가 그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레오니에한텐 ‘효도’란 단어가 썩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무슨 의미로 저리 말하는 건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괜찮고 말고가 없어.”
“…….”
“지금 내 손에 최고의 무기가 있는데, 그걸 이용하지 말라고?”
레오니에는 그딴 어리석은 짓을 죽어도 하기 싫었다.
“영악한 내 딸.”
펠리오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걸렸다.
“하여튼 누굴 닮아 이렇게 잘났는지.”
그 말에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당연히 아빠지!”
이는 영원불변의 법칙이었다.
* * *
오노켄타 남작은 아주 큰 각오를 하고 북부로 왔었다.
그는 이번 일만 잘하면 황제의 눈에 띄어, 올로르처럼 승승장구할 거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자신도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너무도 간단했다. 그냥 북부 산맥에 올라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오는 것이었다.
남작은 드디어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겼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못했다. 뭘 제대로 알아내기도 전에 마물의 울음에 놀라 산을 굴렀다. 그 탓에 팔다리가 부러져 출장 내내 누워 있었다.
그의 신경은 점점 예민해졌다. 불륜 상대였던 행정관과도 사이가 서먹해졌다.
‘빌어먹을!’
오노켄타 남작이 부러지지 않은 손을 꽈악, 소리가 나도록 움켜쥐었다. 하늘이 내려 준 기회를 이렇게 허망하게 놓쳐 버렸다.
그는 당장 땅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들어본 마물의 울음은 아직도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자신이 조금만 못된 생각을 해도 곧장 으르렁거렸다.
‘이제 다 끝이다…….’
황제의 밀명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는데, 북부는 이 일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황실에 보상 청구까지 했다.
청구 이유는 호위하던 기사의 눈을 속여 북부 산맥으로 몰래 가서, 하산하란 경고를 무시했다가 마물의 심기를 건드려 날뛰게 했다는 것이었다.
남작은 이제 조마조마했다. 황실이 실수한 자신을 과연 지켜 줄지조차 의문이었다.
오노켄타 남작은 황실이 지닌 권력을 부러워하고 탐했다. 그러나 그들을 믿지는 못했다. 늘 황제를 찬양하던 남작의 충성심은 그만큼 빈약했다.
그러나 의외로.
황실은 남작을 버리지 않았다.
출장이 끝나는 날, 황실은 파견된 세 사람에게 마차를 보냈다.
“시원해서 좋았는데.”
“수도는 엄청 덥겠지요?”
“그러게요.”
오노켄타 남작이 움직이지 않은 동안, 북부 지역을 살폈던 레스와 다른 행정관은 사이가 제법 좋아졌다.
수도로 내려가는 내내 함께였고, 심지어 서로의 몸을 살짝살짝 치면서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남작은 그런 둘을 속으로 경멸하며 욕했다.
‘……흥, 상관없어.’
중요한 건 저런 것이 아니었다. 이제 저 불륜녀와는 아무래도 좋았다.
황실은 저를 지켜 줬고, 이는 아직 자신에게 기회가 있단 반증이었다.
남작이 희망을 불태웠다.
그래서 재만 남았다.
“…….”
먼 여정을 거쳐 수도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오노켄타 남작은 곧장 황궁에 불려갔다. 남작은 황제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알리러 온 시종의 얼굴을 보자마자 암담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심기는 어떻게 보아도 좋지 않아 보였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군.”
준수한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자글자글했다.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황제의 외모가 한순간에 늙어 버렸다.
“폐하, 많이 속상하세요?”
그리고 그의 옆엔 우시스 황비도 있었다.
“왜 이리 기분이 안 좋으세요?”
우시스 황비가 걱정 어린 눈으로 수비테오 황제를 살폈다.
“뭔가 건진 것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황제의 옆에 비서처럼 선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남작에게만 들리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남작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지금 각 지역에 파견한 행정관들이 폐하의 심중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늘 살에 파묻혀 있던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재 각 지역에서 좋지 않은 소식들이 전해져 왔다. 서부에 파견된 행정관들은 도적들을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마중하러 나갔던 레보오 기사단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들은 도적들의 손에 죽었을 거다.
“그래도 서부는 동부보단 낫지요.”
파르두스 영식의 말에, 황제의 입에서 불편한 숨이 흘러나왔다.
“전원 사망입니다.”
“……예?”
오노켄타 남작이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파르두스 영식은 상냥하게도 다시 한번 더, 심지어 이번엔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동부로 파견된 행정관들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어, 어쩌다……!”
남작이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아직 제대로 붙지 않은 다리뼈 때문이었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남작은 동부로 파견되었던 행정관 중 한 명을 떠올렸다. 저와 술을 몇 번 나눈 적 있는 자였다.
‘그놈이 죽었다고?’
남작은 망연자실했다. 아는 지인이 죽어 슬프다기보단, 제 주변에 닥친 악재에 섬뜩한 두려움을 느꼈다.
“……혹시 오르티오 후작이 무슨 수를 쓴 건 아닙니까?”
남작이 서둘러 추측했다. 하나 파르두스 영식이 고개를 저으며 그 사실을 부정했다.
“명확한 목격자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마차 바로 뒤에 있던 상단이었다. 마침 거래를 위해 동부로 가던 그들은 자신들을 앞서가던 마차의 추락 사고를 생생히 목격했다.
그나마 별 사고가 없을 거라 여긴 남부도 똑같았다.
“남부는 귀신한테 홀렸다지요.”
무난하게 지역을 살피던 파견 행정관들은, 어느 낭떠러지 근처에서 귀신을 보곤 바다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 근처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등대지기 귀신이 노했다고 수군거렸다. 사고를 방지하던 귀신이 도리어 사람을 혹하게 만들어 빠트리려고 했으니, 분명 뭔가 있다며 파견 행정관들을 수상쩍게 여겼다.
행정관들 역시 그 탓에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런 탓에 수비테오 황제의 심기가 아주 불쾌했다.
오노켄타 남작은 절망에 빠졌다. 저 역시 세 지역에 파견됐던 행정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작, 그대는.”
그때, 수비테오 황제가 물었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는가.”
남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울대가 꿀렁이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넓은 응접실에 아주 크게 울렸다.
‘여기서 말을…….’
오노켄타 남작은 짐작했다. 지금 여기서 황제가 원하는 답을 말하지 못하면, 자신의 승진이고 뭐고 다 끝일 거라고.
최악의 경우엔 인생도 끝이었다.
“저, 저는……!”
그래서 서둘러 자신이 겪은 하찮은 순간을 어떻게든 부풀려 말했다.
북부에 도착한 순간부터 시작해 산맥에 몰래 올라간 이야기를, 그는 아주 장황하게 말했다.
어찌나 심하게 과장하는지,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파르두스 영식은 마치 오래된 고전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
거기다, 수비테오 황제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없었다. 황제는 오노켄타 남작 역시 다른 파견 행정관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
남작의 장황한 이야기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황제의 금빛 눈동자가 점점 찌푸려졌다.
그럴수록 남작의 말 역시 어수선해졌다.
‘저런.’
제법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던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남몰래 고개를 내둘렀다.
이러다 밤중에 누구 한 명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물론 사라질 한 명은 오노켄타 남작이었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이제 슬슬 나설 때임을 판단한 후작 영식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어머나, 정말 대단하네요!”
우시스 황비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다들 들었어요? 마물의 울음소리래요!”
우시스 황비의 감탄은 참으로 엉뚱한 소리였다. 북부에 마물이 사는 건 상식이었고, 그곳에서 마물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것도 그리 감탄할 구절이 아니었다.
북부 사람 중에 마물 울음을 안 들어본 사람이 없고, 북부에 잠깐 머무른 사람들도 이따금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보레오티 공작은 북부 산맥에 올라가는 걸 엄격히 통제합니다. 영주민들도 마찬가지지요.”
그 말에 황제의 눈썹이 움찔했다.
“익히 아는 사실이다만.”
그러나 후작 영식의 말을 막진 않았다.
“마물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오노켄타 남작의 말과, 이를 다시금 짚어 주신 황비 전하 덕분에 수상한 점이 떠올랐습니다.”
“어머, 나 별로 한 거 없는데!”
우시스 황비가 어깨를 괜히 흔들며 수줍어했다. 파르두스 영식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확실히 북부 산맥은 통제가 엄격합니다. 보레오티가 마물의 소굴이라 불리는 것처럼, 그곳엔 위험한 마물들이 살지요.”
그러나 마물이 나타나지 않는 곳도 있었다.
그 말에 우시스 황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마물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후작 영식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 확실한 건, 보레오티 공작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곳은 바로 남작이 숨어 들어간 그곳일 겁니다.”
다른 곳은 공작의 허가만 있으면 평범한 사람도 약초나 나무를 캐러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거의 산 아래가 전부였지만.
“그, 그렇습니다!”
오노켄타 남작이 바로 그거라고 소리쳤다.
“기사들이 제게 어서 하산하라고 말렸습니다! 이 이상 올라가면 안 된다고요.”
그제야 수비테오 황제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걸려들었군.’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속으로 싱긋 웃었다. 그리곤 이를 놓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마물이 위험한 건 당연합니다. 그러니 통제도 당연하지요. 하지만 유독 마물이 득실거리는 구역이 있습니다.”
“유독 마물이 득실거리는…….”
수비테오 황제가 걸리는 부분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리곤 슬그머니 파르두스 영식을 바라봤다.
“소신이 아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황제와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예의 바른 신하처럼 보였다.
“그러나 만일 폐하께서 윤허해 주신다면, 조금 더 알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라.”
수비테오 황제가 냅다 허락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파르두스 영식을 보았다.
“폐하의 영단에 감사드립니다.”
파르두스 영식은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 없이 예를 갖추고 있었다. 황제보다 아래로 내려간 시선, 함부로 올라가지 않은 입꼬리.
그제야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늘었어.’
상황을 모면한 파르두스 영식이 내심 감탄했다.
수비테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활용할 능력은 조금 부족했다.
이성보다 본인의 욕심이 우선이었고,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인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치기만 했다. 따끔하고 쓰기만 한 충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간언에 중독되었다.
그랬던 황제가, 조금 전에 파르두스 후작 영식을 의심하듯 살폈다. 정말 엄청난 발전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란 자고로 자신의 편도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수비테오 황제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받드는 무리만 편애하며 끌어안기에 연연했다.
“우리 폐하, 대단하셔라!”
파르두스 영식이 감탄하던 중.
우시스 황비가 수비테오 황제의 한쪽 팔에 기대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럼 이제 폐하께서 제국을 위해 도로를 건설하고,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시는 거겠네요?”
“그런 거지.”
그것이 황제의 본분이라며, 수비테오 황제가 어깨에 힘주어 말했다.
“너무 멋지세요!”
간드러진 웃음을 머금은 채, 황비가 말했다.
“폐하 덕에, 북부는 큰 은혜를 받게 될 거예요!”
황제는 이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암, 그렇고말고!”
어쨌건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북부였다. 산맥 그 너머에 있는 그것. 그것만 있으면 다른 지역이고 제국, 어쩌면 이 세상마저 자신의 발아래에 무릎 꿇릴 수 있었다.
“역시 그대가 짐의 지혜의 사과로군.”
“어머나! 그런 칭찬을 하세요?”
황제의 칭찬에 황비가 웃었다.
“참, 제 친정이 후원하는 예술가들 있잖아요…….”
이야기의 흐름은 어느새 샛길로 빠져나갔다.
우시스 황비는 그들의 작품을 보고 싶다며 황제를 졸랐고, 그는 당연히 들어주겠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황제와 오노켄타 남작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전신에 힘이 다 풀린 남작은 다리를 절뚝이며 자리를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가려던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걸음을 멈췄다.
“……황비 전하.”
그리곤 홀로 응접실에 남은 우시스 황비를 불렀다.
“왜 그러시나요?”
우시스 황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비테오 황제는 급한 용무로 먼저 일어났고, 황비는 이 뒤에 일정이 없는지 차나 마시고 가겠다며 떡하니 상석에 앉은 채였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후작 영식이 인사했다.
“덕분에 폐하의 심중이 부드러워지셨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황비가 깔깔 웃었다. 싱그러운 초록 머리가 찰랑거렸다.
“……고생은 우리 후작 영식께서 하셨지요.”
순간, 후작 영식은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북부랑 황실 사이에서 어찌나 고생인지, 그 노고를 난 다 안답니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낮엔 푹푹 찌는 열기를 자랑했다.
오늘 날씨가 딱 그랬고, 북부 태생인 후작 영식은 이 열기를 꽤 열심히 견디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한기는 뭐란 말인가.
“……그게 제 역할인 것을요.”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쯤이야 그에겐 아주 쉬운 일이건만, 지금은 그것이 아주 조금 힘들었다.
“조금만 더 고생해요.”
황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떤 것이건, 끝은 항상 있답니다.”
푸르고 환한 미소였다.
인사를 마친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황궁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의 속은 여유롭지 못했다.
‘북부로 가야 한다……!’
당장 올라가서, 아니, 올라가기 전에 뭔가를 좀 더 알아봐야 했다.
그런데 뭘 알아야 하나.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뭐가 심상치 않았다. 후작 영식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는 결코 더위 탓이 아니었다.
* * *
“이것 좀 보세요.”
정원을 산책하던 바리아가 신기한 걸 발견했다.
“벌써 단풍이 져요.”
바리아의 손끝이 가리키는 건, 붉은색이 끄트머리에 살짝 물든 잎사귀였다.
“아직 여름인데…….”
“북부는 가을로 접어들 때지요.”
함께 산책하던 펠리오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이내 큼지막한 손이 바리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바리아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덩달아 손에 힘을 줬다.
“펠리오.”
바리아가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리오.”
그리곤 조금 용기를 내 애칭으로 불렀다. 펠리오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북부에서 지내는 동안, 바리아는 열심히 맹수 부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적응해 갔다. 그리고 이젠 곧잘 부르게 되었다. 부끄러움도 덜 탔다.
“가을엔 레오의 생일이 있지요?”
“알고 계셨습니까?”
펠리오가 놀란 듯이 물었다.
“딸의 생일쯤이야, 다 기억하고 있지요!”
바리아가 으스댔다.
실은 레오니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관련된 정보를 모으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
하나 그렇게 모은 정보 대부분이 가짜였다. 맹수 부녀와 친해지면서, 바리아는 자신이 그간 모은 정보가 거의 틀렸음을 알았다.
‘생각해 보면 그게 정상이야.’
허탈하긴 했지만, 바리아는 내심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보레오티 정도 되는 가문의 정보는 쉽게 모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레오의 생일에 뭔가 해 주고 싶어요.”
“무엇이든 좋아할 겁니다.”
“에이, 그런 말씀 마시고요.”
“난 거짓말 안 합니다.”
“그래도 조금만 도와주세요.”
바리아가 펠리오와 깍지 낀 손을 흔들며 부탁했다.
“엄마로서 처음 주는 선물이잖아요. 기뻐할 만한 선물을 해 주고 싶어요.”
“그럼 근육…….”
“으음, 역시 근육일까요.”
바리아가 퍽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요즘 성희롱 발언을 덜 하는 것 같아서, 괜히 아이를 흥분시킬만한 건 자제하고 싶어요.”
“…….”
“레오도 노력하는데, 괜히 부추기는 건 못된 짓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 점잖은 걸 선물하고 싶었다.
“……레오가 노력을?”
그러나 펠리오는 회의적이었다. 심지어 헛것을 들은 것처럼 어디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펠리오는 자신의 딸이 얼마나 영악한지 알고 있다.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것도 안다.
예전에 반성하는 척하면서 기사 한 명을 협박해 말을 타고 나갔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뒷골이 당겼다.
레오니에의 주특기는 허파 뒤집기라고, 펠리오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 바리아한테 보여 주는 그 참한 모습이 연기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우리 레오는 천성이 착하고 노력하는 아이예요.”
그러나 아직 바리아의 눈에선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은 듯했다.
“이젠 교양 수업 땡땡이도 안 치고, 먼저 복습까지 한다고요. 기사님들께도 물어보니 희롱하는 말도 안 한다고 해요!”
자신의 노력이 성과를 보인다며, 바리아가 즐겁게 떠들었다.
정작 그런 바리아를 바라보는 펠리오의 시선은 안쓰러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천성이 사악한 변태였다. 부모 자식 사이여도 봐줄 수 없는 지독한 사실이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저렇게 기뻐하는데.
펠리오는 이를 망치기 싫었다. 그의 촌철살인도 사랑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럼 선물은 조금 더 고민해야겠군요.”
“어서 빨리 떠올려서 준비하고 싶어요.”
둘은 한참 선물을 뭐로 할지 고민한 뒤에야 산책을 마쳤다. 그 후 펠리오는 바리아를 방에 바래다줬다.
“참, 이거요.”
바리아가 책상 서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보기만 해도 두툼한 봉투는 단추와 실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오늘 오전에 다 정리했어요.”
“힘들었을 텐데.”
이를 건네받은 펠리오가 수고했다며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힘들긴요. 재정부에선 매일 야근한 적도 있어요.”
그 이유가 바로 펠리오가 파산시킨 가문들의 회생 신청 때문이었지만, 바리아는 굳이 그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이제 집무실로 가시죠?”
“나중에 저녁 식사 때 뵙지요.”
“몸 살피면서 하세요.”
“침대에서 운동해야 하니까요?”
“어우, 정말!”
바리아가 능청스러운 펠리오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그렇게 한참을 진득거리며 붙어 있고 난 뒤에야 펠리오는 겨우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발걸음은 아쉬우나, 저녁 식사 때까지 해 둬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아빠!”
그러던 중.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어? 들어가도 돼?”
“이미 들어와 놓고는 무슨.”
펠리오가 들어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레오니에는 혼자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팔에는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이거 다 읽었어.”
며칠 전에 펠리오가 후계 수업 과제로 빌려준 책이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어.”
레오니에는 알아서 다음 권을 찾아갔다.
“생각보다 웃기더라고.”
펠리오가 빌려준 책은 어느 선대 보레오티 공작이 적은 자서전이었다.
“그게 웃기다고?”
예상치 못한 감상에 펠리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가 앉은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약간 성격이 다 보이더라. 이 선대 공작도, 아빠처럼 자기 잘난 걸 너무 잘 알고 있더라고. 오만한 건 우리네 핏줄 특징인가 봐.”
어쩜 다들 이렇게 똑같으냐며, 레오니에가 즐겁게 말했다.
“레오, 너도 똑같아.”
펠리오는 레오니에도 남 말할 처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감 넘치고 뻔뻔하기로는 저보다도 아이가 더 대단했다.
“에이, 나는 아니지.”
“양심도 없는 내 새끼.”
“그런데 그건 뭐야?”
레오니에는 책상 위에 올려진 두툼한 서류 봉투를 가리켰다.
“사냥의 시작.”
펠리오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간 바리아가 재정부에서 모아온 황제파 귀족들의 비리 자료들이다.”
“아아, 그거 이제 풀 거야?”
“네 엄마가 마지막 정리를 다 했다더군.”
“히잉, 울 엄마 멋있어!”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볼을 감싼 채 촐싹댔다.
“그래서, 언제 끝낼 거야?”
어서 빨리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 버리고 싶다고, 레오니에가 펠리오 옆까지 다가가 치근거렸다.
펠리오는 귀찮게 구는 딸을 아예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막상 앉혀 보니 생각보다 아이가 너무 컸다.
“허벅지 나가겠는데.”
“아빠, 늙었어? 내가 얼마나 가벼운데!”
“네가 천 근이잖아.”
“그러면 엄만 만 근이야?”
누가 봐도 엄마가 나보다 무거운데? 레오니에가 물었다.
“네 엄마는 만 근이어야 해.”
“어? 왜? 보통은 깃털 같다고…….”
“그래야 어디 날아가지 않고 계속 있지.”
“……방금 진짜 토할 뻔했어.”
레오니에가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에 빠진 북부 공작의 무서움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 그럼 내가 천 근 같다는 것도?”
아이가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만큼 나를 아끼느냐는 뜻이었다.
“아니, 넌 진짜 무겁고.”
“아빠만 아니었어도…….”
쥐어팼을 거라는 말을, 레오니에가 효심을 끌어올려 가까스로 삼키었다.
“일이나 해!”
삐친 레오니에는 흥흥, 거친 콧숨을 뱉으며 뒤돌아섰다.
“아, 저녁 같이 먹을 거지?”
“그래.”
“오늘 크림에 졸인…….”
“닭고기 나온다고?”
“헤헤, 나중에 봐!”
다시 화가 풀린 레오니에가 손을 붕붕 흔들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런 레오니에가 퍽 웃겼던 펠리오는 다시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조금 전의 대화 덕에 그의 입가엔 미소가 제법 오랫동안 걸려 있었다.
똑똑.
“누구야.”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을 방문했다.
“공작님.”
들려오는 목소리에 펠리오의 입가에 걸쳐졌던 미소가 사라졌다.
“약속 없이 방문하여 죄송합니다. 파르두스입니다.”
하지만 급한 용건이라며, 파르두스 후작이 조금 흐트러진 목소리로 알현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