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드디어 합방
카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점잖은 집사의 콧등에 걸쳐진 안경은 눈에 띄게 흘러내렸다.
카라는 안경이 흘러내려서 눈앞의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고쳐 썼다. 혹시 몰라 주머니 속 손수건으로 깨끗하게 닦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레오티를 상징하는 검은 마차에선 내린 건 여전히 세 사람이었다.
일단, 저기 찰싹 붙어 있는 검은 머리의 두 사람은 카라가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빠! 북부에 눈이 없어!”
“여름엔 없잖아.”
“분명 우리 떠나기 전엔 있었는데.”
“레오 네가 다 먹었나 보지.”
“아빠, 지금 귀찮다고 너무 막 대답하는 거 아냐?”
“너도 이상한 질문을 하잖아.”
쓸데없는 농담을 나누며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는 저들은 몇 달 만에 돌아온 이곳 북부의 주인들이었다.
“세상에나, 정말 여름 맞아요?”
그리고 저 둘 사이에 끼여 있는 탁한 분홍색 머리는 처음 보는 낯선 이의 것이었다.
“수도랑 남부 날씨가 거짓 같아요.”
“언니 추워? 내 망토 줄까?”
“누가 두를 것을 가져와라.”
낯선 이가 팔을 쓸자, 맹수 부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결국 여자는 담요를 두 장이나 둘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카라의 곁에 모노가 다가왔다. 그 역시 놀란 눈으로 저 기이한 세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두 사람만이 아니라, 맹수 부녀의 귀환을 반기러 나온 사용인 전원이 같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자신들의 주인들이 저리도 곁에 붙어 있는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저 맹수 둘을 길들이고 있느냔 말인가.
“리코스 자작님!”
“꺄악! 자작님이 쓰러지셨어요!”
“정신 차리세요!”
심지어 루페는 저 모습을 보자마자 ‘이건 꿈이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쓰러졌다. 그만큼 섬뜩한 광경이었다.
검은 머리 맹수들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오만한 존재들이었다. 그나마 작은 맹수는 좀 덜하지만, 큰 맹수는 눈만 마주쳐도 죽을 수 있을 만큼 위험했다.
그런데 저 둘이 낯선 이의 옆에선 길든 개라도 된 듯이 얌전하게 있으니, 거기다 이것저것 못 챙겨 줘서 난리도 아니니.
다들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루페가 쓰러진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집사님! 집사님!”
그때, 저들과 함께 도착한 미아가 급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주인님이 정리하라고 하셨던 방이 어딘가요?”
“……어? 방?”
늘 실수하지 않는 카라가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카라가 며칠 전에 깨끗하게 치우고 가구를 새로 넣어 둔 방의 위치를 가리켰다.
방의 위치를 안 미아는 다른 사용인들에게 이를 전해 줬다. 곧 그들은 마차에서 내린 짐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카라는 그제야 얼마 전 깨끗하게 치웠던 방이 펠리오의 침실 근처란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그제야 카라의 머릿속에 엄청난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
“카라 할머니!”
레오니에가 굳은 카라를 와락 껴안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나날이 힘이 세지는 포옹 덕에, 카라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시 정신을 차린 집사는 본래의 노련함을 되찾았다. 카라는 제 주인들의 무사 귀환을 반기었다.
“그런데 아가씨.”
“응?”
“실례지만 저분은…….”
카라가 드디어 낯선 이에 대해 물었다. 레오니에는 카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곤, 이내 알겠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아빠! 언니!”
곧 펠리오와 바리아가 다가왔다. 카라에게서 떨어진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팔에 제 팔을 끼며 말했다.
“할머니, 이 분은 내 엄마가 되실 귀한 분이에요.”
“말은 정정하자.”
반대편에서 서 있던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내 아내가 되실 분이지.”
“내가 데려왔으니까 내 엄마야!”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자신의 쪽으로 끌며 소리쳤다.
“그러기 위해선 나랑 결혼해야 하지.”
은근슬쩍 바리아의 등을 팔로 감싼 펠리오가 제 쪽으로 끌며 말했다.
“아빠가 내 양육권을 포기하고 언니가 나 입양하면 되지!”
“그와 동시에 레오 넌 보레오티 재산을 포기…….”
“……아빠.”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그깟 돈으로 계속 협박할래?”
그게 언제까지 먹힐 것 같으냐며 레오니에가 고개를 휙 돌렸다.
“할머니, 우리 아버님의 아내가 되실 귀한 분이에요.”
그 뒤에 내 엄마가 될 거고. 효녀는 빠르게 사실을 정정했다. 돈 때문은 아니었다.
“……제 생각은요?”
시끄러운 두 부녀 사이에 끼인 바리아가 중얼거렸다. 야단스러운 두 맹수가 주고받던 말 때문에 바리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터지기 직전이었다.
“…….”
카라가 바리아를 잠깐 바라보곤 이내 다시 펠리오를 바라봤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부인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으음?”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았다.
곧 아이는 이 상황이 5년 전, 자신이 이곳 보레오티 저택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도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품에 떡하니 안고 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리아를 데려와 대뜸 저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헤헤.”
레오니에는 괜히 웃음이 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곧 카라가 예를 갖춰 바리아에게 인사했다.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그렇게 말했다면, 집사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였다.
“저는 보레오티를 모시는 집사, 카라입니다.”
보레오티의 새 안주인이 되실 분을 성심성의껏 모시는 것.
“편히 카라라 불러 주십시오.”
“반겨 주셔서 고마워요.”
바리아가 수줍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카라는 그제야 바리아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탁한 분홍색 머리를 지닌 그녀는 참으로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새침한 보레오티 부녀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다.
이런 표현이 부적절할지도 모르나, 카라는 자신들의 주인이 저 순진무구하고 수줍은 아가씨를 납치해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와아, 정말 엄청 크네요…….”
“우리 집, 꼭 살인 사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지하 감옥이 있다면, 거기서 열댓은 죽었을 것 같아요.”
“지하 감옥이 있긴 합니다.”
“진짜 있어요? 대단해라!”
하나 막상 저 셋이 떠드는 것을 보면, 물에 물을 섞은 것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언니, 내가 집 소개해 줄게!”
“그럼 카라도 데리고 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너보다야 카라가 더 잘 알지.”
펠리오는 카라에게 눈짓했다. 바리아를 소중히 모시고, 혹시나 저 둘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즉시 챙겨 주란 뜻이었다.
카라는 고개를 까딱, 끄덕이며 저택 안으로 바리아를 모셔갔다.
“먼저 바리아 님께서 지내실 방부터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 이제 막 도착했는데요?”
“우리 아빠가 미리 연락해서 언니 방 만들라고 했을걸?”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세 여자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펠리오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 주군.”
그 틈에 모노가 다가갔다. 그는 상당히 당황하는 중이었다.
“뭐지?”
펠리오의 시선은 바리아와 레오니에가 계단을 올라 복도 너머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야 겨우 움직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도 괜찮습니까?”
“내용에 따라선 안 괜찮을 거다.”
“결혼하실 거냐고 묻고 싶습니다만.”
“그건 물어도 돼.”
펠리오의 허락하에 모노가 서둘러 물었다.
“저분과 결혼하실 겁니까?”
“저 사람이 허락하면.”
모노를 비롯한 저택 사람들이 모두 기함하며 움찔했다. 누군가는 심지어 두 손 모아 기도까지 중얼거렸다. 어릴 적 펠리오를 훈련시켰던 중진 기사였다.
“아니, 어떻게 주군은, 이렇게 늘 갑자기…….”
“갑자기 뭐?”
“어째서 늘 갑자기 이렇게 엄청난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5년 전에는 레오니에를 떡하니 데려와 딸로 삼더니, 이번엔 바리아를 데려와 결혼하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터트렸다.
“그래서 반대하나?”
“반대는 무슨 반대를 합니까!”
후계가 레오니에로 결정된 지는 오래였다. 이 점에 대해선 누구도 반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보레오티의 안주인이 생기는 건 다른 문제였다.
펠리오가 육아에 푹 빠져 연애를 일절 하지 않으니, 모노를 비롯한 대부분이 이번 대 보레오티는 공작 부인이 생기지 않을 거라 잠정 결론까지 지었다.
그럴 때, 바리아가 나타났다.
심지어 펠리오는 바리아를 소중하다 못해 아주 그냥 사랑해 미칠 것 같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레오니에를 자상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과는 사뭇 달랐다.
“드디어 마님이…….”
모노는 감개가 무량했다.
“감축드립니다, 주군.”
“벌써 오지랖은.”
펠리오가 제게 고개 숙여 진심으로 축하하는 모노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수도에서 사람들이 올 거다.”
하지만 웃음은 곧 사라졌다. 펠리오가 모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어찌할까요?”
모노가 물었다. 저 질문은 언제든 소리소문없이 죽여 북부 산맥에 던져버릴 수 있단 뜻이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황실에 북부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보낼 거고, 황제는 지도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기 사람을 파견할 테지.”
“역시 처리하는 편이…….”
“난 내 기사들의 손에 피를 묻힐 생각이 없다.”
펠리오가 이어 말했다.
“인내심 좋고 민첩한 놈들 둘만 미리 뽑아 둬.”
그래도 호위 정도는 기꺼이 해 줄 용의가 있었다.
* * *
바리아는 강아지처럼 북부 저택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복도 중간중간마다 걸린 명화들을 빤히 구경하고, 모퉁이마다 세워 둔 조각상이나 예쁜 꽃이 담긴 화분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언니! 뛰면 다쳐!”
뒤따라오던 레오니에가 말했다.
“아가씨, 여긴 북부예요……!”
그러나 바리아는 도저히 진정할 기미가 없었다. 아까 저택에 막 도착했을 때는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기뻐하지 못했지만, 저택을 둘러보면서 현실감을 되찾았다.
자신은 북부에 왔다.
간절히 바라던 북부에 왔다.
그 탓에 쉬이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으휴, 언니도 참.”
레오니에가 진정하라며 바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카라는 웃음을 참느라 꽤 애를 먹었다. 열두 살이 스물다섯 살을 챙기는 모습이 어찌나 웃긴지 몰랐다.
“너무 예쁘고 근사해요.”
“그치? 우리 집 멋지지?”
이젠 언니 집이기도 해,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밖에서 본 저택도 북부 특유의 건축미가 웅장해서 멋졌는데, 내부도 엄청나요. 아까 그 뾰족한 지붕과 거기에 있던 특유의 무늬는…….”
바리아는 자신이 아는 건축 양식들을 언급하며 저택을 찬양했다. 카라는 바리아가 견식이 풍부하다고 생각했다. 보레오티 저택의 훌륭함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치곤 무식한 사람이 없었다.
‘훌륭한 분이 오셨구나.’
보레오티의 새 안주인이 되실 분으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왜 언니 방을 아빠 침실 바로 옆에 둔 거야.”
속셈이 너무 빤히 보인다며 레오니에가 못마땅한 듯 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주먹을 쥐며 환호했다.
이제야 저 아빠가 어울리지도 않는 순정에서 벗어나 근육에 힘을 줄 각오를 한 듯했다.
“으음, 아빠, 변태!”
아기 맹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저, 아가씨.”
어느 정도 차분해진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만일 괜찮으시다면, 부탁 하나만 청해도 될까요?”
“혹시 방 바꾸고 싶어? 내 방 옆으로?”
“바리아 님, 불편한 것이 있으시면 제가…….”
카라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리아는 그런 것이 아니라며 서둘러 부정했다.
“그, 아가씨를 낳아 주신 어머님…….”
바리아가 조심조심 말했다. 어느 때보다 작고 느린 말투였지만, 레오니에는 다 알아들었다. 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가씨의 비밀을……!’
카라는 진심으로 놀랐다.
레오니에의 출생에 얽힌 비밀은 보레오티에서 가장 중요한 기밀이었다. 그것을 바리아가 알고 있다는 건, 저들 부녀가 상의하에 직접 말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바리아를 믿고 있단 뜻이기도 했다.
“한번 뵙고 싶어요.”
바리아가 말했다.
“왜?”
“제, 제가 공작님이랑 그런 사이가 되면…….”
바리아가 우물거렸다. 아직 직접 입 밖으로 ‘결혼’, ‘아내’라는 단어를 꺼내기엔 부끄러움이 너무 컸다.
심지어 바리아는 아직 펠리오의 고백에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리아는 알았다. 그 대답은 아주 빠른 시일 내에 행해질 것이며, 자신은 펠리오와 결혼을 하게 될 거란 것도.
“제가 감히 아가씨의 엄마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그 전에 한 번 찾아뵈어서 각오를 다지고 싶었다.
“……어휴, 참.”
바리아의 진심에 레오니에는 가슴이 시큰거렸다.
“사람이 이리 착하기도 드문데.”
아이는 손을 뻗어 바리아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고맙단 뜻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카라가 코를 훌쩍이며 안경을 벗었다. 집사는 그저 조용히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내가 진짜 언니한텐 효도할게.”
“안 하셔도 괜찮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포근히 껴안았다.
“……그런데, 공작님껜 안 하세요?”
“아빠한텐 충분히 하고 있어.”
장난이 곧 효도라며, 레오니에가 익살스럽게 대답했다.
* * *
바리아는 북부에 와서 한동안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맹수 부녀는 더 기뻐했다.
“저기,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바리아는 두 부녀가 제게 선물한 옷더미들과 구두, 장신구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중얼거렸다. 처음엔 이렇게 선물을 받는 게 미안했지만, 지금은 맹수 부녀의 금전 감각에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언니는 현금이 좋아?”
“현금으로 드릴까요?”
맹수 부녀가 어긋난 금전 감각을 발동했다.
“……괜찮습니다.”
바리아가 한사코 거절했다. 물건보다 현금이 더 부담스러웠다. 저 두 사람은 진짜 현금으로 방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 그랬다간 자신은 어마어마한 돈더미에 깔려 기절할 게 분명했다.
선물 받은 물건들은 곧 하녀들이 하나하나 치워 줬다.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붙여 준 하녀들이었다.
“마님, 이것은 여기에 두어도 되겠습니까?”
“마, 마님은 아직…….”
“그럼 예비 마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예비 마님도 조금…….”
하녀들은 바리아를 성심성의껏 모셨다. 그러나 바리아는 여전히 하녀들의 적극적인 마음가짐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언니, 이러다 아빠랑 연애하기 전에 결혼부터 하겠어.”
레오니에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울 아빠랑 사귀면 손도 잡고, 뽀뽀도 할 수 있는데.”
레오니에가 다시금 두 손으로 상세하게 묘사해 줬다.
원작을 기억하는 덕에,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농밀한 뽀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다. 바리아의 다리를 휘청이게 하고,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어른들은 안 사귀어도 다 해.”
펠리오가 말했다.
“아빠, 방금 그 말은 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할 만한 건 아니라고 타이르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어?”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리곤 버릇없이 펠리오와 바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펠리오는 아주 떳떳한 표정으로 바리아를 바라봤고, 바리아는 오늘도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해요…….”
천성 자체가 거짓말을 아예 못 하는 건지, 바리아는 꼭 저렇게 티가 났다.
“말도 안 돼…….”
레오니에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곤 그대로 나가 버렸다.
“저택 사람들!”
그리곤 여기저기에 큰소리로 외치며 자신이 받은 충격을 마구 떠벌렸다.
“아빠랑 언니가 사귀지도 않는데 뽀뽀했대요! 손도 잡았대요!”
“아, 아가씨!”
당황한 바리아가 이를 막으려고 나서려는 걸, 펠리오가 붙잡아 말렸다.
“내버려 두세요.”
“그, 그렇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어차피 곧 알려질 일이지 않았느냐며, 펠리오가 능청맞게 굴었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다시 돌아왔다. 서둘러 멈춰 선 아이의 발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언제 뽀뽀했는데?”
“남부 별장에서.”
“몇 시에!”
“너 잘 때.”
“뽀뽀만 했어?”
“네 아빠는 선을 지킨다.”
“에이.”
막판에 실망한 레오니에가 다시 여기저기에 소문을 퍼트렸다.
“아빠랑 언니가! 남부 별장에서 나 잘 때 둘이 뽀뽀했대!”
새로이 추가된 외침을 듣는 펠리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나도 속이 후련하군요.”
“으으…….”
“혹시 싫으십니까?”
“공작님, 정말……!”
바리아가 열이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추며 투덜거렸다. 펠리오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때, 레오니에가 또 외쳤다.
“그런데 선은 안 넘었대!”
우리 아빠 고자인가 봐!
그 말에 펠리오가 벌떡 일어났다.
“어, 어어…….”
바리아가 곤혹스러운 눈으로 문밖과 펠리오를 빠르게 번갈아 보았다. 그리곤 저의 시선이 펠리오의 아래를 바라보려는 걸 애써 꾹 참았다.
“……아니죠?”
하지만 기어코 묻고 말았다.
“그게 아닌 건 곧 알려드리지요.”
“안 알려 주셔도 괜찮아요!”
바리아가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알려 주면 좋아할 텐데.”
“그, 그건 그렇긴 한데…….”
아니라곤 부정 않는 바리아의 눈앞에 펠리오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이제는 정말 사귀는 거지요?”
끄덕끄덕, 바리아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해 주면 더 감사할 겁니다.”
펠리오가 드물게 재촉했다.
“치사하세요.”
바리아는 지금 이 상황에서 대답을 종용하는 건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시잖아요.”
밖에선 레오니에가 아직도 두 사람이 뽀뽀했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진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거기다 펠리오는 당장이라도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바리아의 양옆에 떡하니 펼쳐져 도망칠 길을 막았다.
“하지만 사귀자는 제 고백에 대답은 안 했습니다.”
“아가씨가 왜 그리 짓궂으신지 알겠어요!”
“아무렴, 내 딸인데…….”
안 닮을 리가 있겠느냐고 펠리오가 입술을 살짝 열려던 순간.
쪽.
대뜸 촉촉하고 말랑한 무언가가 그의 딸 자랑을 막았다.
“이젠 제 딸도 될 거예요.”
공작님만의 딸이 아니라며, 바리아가 시뻘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저는 사귀지도 않는 분과 입술을 맞출 만큼 발랑 까지지 않았어요.”
“…….”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바리아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곤 굳어 버린 펠리오의 팔 아래를 슬금슬금 기어나가려고 몸을 낮췄다.
“꺄악!”
그러나 이는 실패로 끝났다.
펠리오는 제 팔 아래로 기어나가는 바리아를 그대로 번쩍 들어 포대기처럼 어깨에 얹었다. 몸을 감싼 두 팔은 우악스럽다기보단 한없이 든든하고 조심스러웠다.
갑자기 시야가 높아진 바리아가 와락, 펠리오의 목에 팔을 둘렀다.
“공작님!”
바리아가 내려달라고 소리쳤다.
본인들 일하느라 바쁘던 사용인들이 입을 쩍 벌렸다. 이 평화로운 여름날.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께서 예비 마님을 어깨에 들쳐메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몇몇 하녀들은 자신들이 바리아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레오!”
방에 들어가기 직전,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마침 레오니에가 근처에 있었다.
아이는 자신의 호위 기사들에게 요상한 춤사위와 함께 뽀뽀 이야기를 들려주던 참이었다.
“……뭐, 뭐야!”
아이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뒤에 있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누스는 커다란 몸을 휘청거렸고, 옆에 있던 프로보가 끙끙거리며 그를 부축했다.
“아빠, 무슨 일이야!”
“아빠가 이제부터 바쁠 거다.”
“왜, 왜애?”
놀란 레오니에가 말을 더듬었다.
“옜다.”
펠리오는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레오니에한테 던졌다.
“이게 뭔데?”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낸 레오니에가 손을 폈다.
“집무실 열쇠.”
그의 말대로, 펠리오가 레오니에한테 건넨 건 그의 집무실 열쇠였다.
“한동안 네가 공작 대리다.”
“어?”
“어지간한 건 루페한테 시켜.”
“아, 아빠, 잠깐만!”
당황한 레오니에가 열쇠와 펠리오, 바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었다.
“언니는 왜 둘러업어.”
“언니는 무슨.”
펠리오가 조금 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앞으로 엄마라 불러.”
그 말에 기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다 똑같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지금 여기서 가장 놀란 건 아기 맹수였다.
“어, 언니! 바리아 언니!”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불렀다. 바리아는 거의 젤리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코에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게요…….”
미약한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언니도 동의했어? 언니의 의사는 들어 있어? 지금 아빠가 언니 생각도 안 들어보고 이러는 건 아니지?”
그 말에 펠리오가 겨우 이성을 붙잡았다.
“바리아, 지금 여기서 결판을 내지요.”
펠리오가 그제야 물었다.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를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보아하니 바리아한테 허락도 안 묻고 이렇게 무작정 업고 나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걸 빠르게 눈치챘다.
“싫으면 내려드리고 정중히 사과하죠.”
그러나 만일 허락한다면.
“……각오해 두시는 게 좋습니다.”
그 말에 바리아는 펠리오의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얇은 여름옷 너머로 전해지는 펠리오의 승모근이 고스란히 얼굴에 닿았다.
다들 숨죽여 바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과, 안 하셔도 돼요…….”
바리아가 말했다.
“고자가 아니란 거, 증명해 주신다면서요.”
울음을 머금은 목소리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펠리오가 이를 바득 갈고는 그대로 곧장 걸음을 급하게 움직인 탓이었다.
“…….”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멀뚱히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뒤늦게 소리쳤다.
“합방이다!”
* * *
귀족 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지역의 수장들은 가장 최근에 발행한 지도를 황실에 제출했다. 여기에 동부는 게이트 연구 자료도 추가로 냈다.
황실은 이를 토대로 제국의 도로망을 구축하여 편리한 교통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 경제를 더욱 부흥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각 지역에 전문가들을 파견했다. 지도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여기가 북부인가…….”
게이트를 막 통과한 마차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풍채가 어찌나 큰지, 그가 내리기 무섭게 마차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오노켄타 남작님.”
뒤따라 내린 사람이 그를 불렀다.
“마물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전나무 숲을 기웃거리던 오노켄타 남작이 허둥지둥 마차로 돌아왔다.
“그, 그나저나 마을이 안 보이는군.”
무안해진 남작이 괜히 말했다.
서부를 통해 북부로 넘어온 그들 옆에는 울창한 전나무 숲이 있었다.
북부는 여름이 무색할 정도로 서늘했다. 그러나 전나무의 푸르름은 나름 더운 계절 느낌이 났다.
푸른 전나무를 옆에 둔 길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만년설을 품은 북부 산맥이 우뚝 솟아 있었다.
“게이트 주변에 인가가 없는 건 당연하잖아요.”
일행 중 가장 마지막에 내린 사람이 한심하단 듯이 둘을 노려봤다.
그녀는 앞서 내린 두 사람과 같은 일행이기 싫은 것처럼, 그들 곁으로 가기는커녕 마차만 두리번거렸다. 방금 막 게이트를 통과한 마차를 살피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혹여 게이트에 사고가 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 반경은 주거지로 사용하지 않게 법으로 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레스가 한심하단 듯이 둘을 바라봤다.
“국토부 행정관들이…….”
레스가 창피를 준 국토부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성을 냈다.
“사람이 좀 모를 수도 있는 거지!”
“댁은 국토부 행정관이잖아요.”
그 정도는 기본으로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레스가 반박했다.
“당신도 태도를 좀 고쳐요!”
오노켄타 남작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직원이 도리어 뻔뻔하게 대꾸했다.
“이왕 사이좋게 여행하면 좋은데, 왜 오는 길 내내 사사건건 시비에 딴죽을 거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 심보가 왜 그래요!”
“우리는 여행을 온 게 아닙니다.”
레스는 없던 두통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어떻게 출장이 여행이에요. 출장비는 댁들 불륜 저지르는 수단이 아니라고.”
“부, 불륜이라뇨!”
그 말에 국토부 행정관이 얼굴을 붉혔다. 오노켄타 남작은 헛기침만 토했다.
“으흠! 그, 뭐, 북부 출신이라 그런가.”
“그러게요. 괜히 신경질은.”
“사람이 좀 여유도 있어야지.”
“포악하고 저 잘난 줄 아는 게 정말 전형적인 북부 사람이네요.”
저 두 사람이 뭐라고 지껄이건, 레스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냐하면 레스에겐 저 두 벌레를 퇴치할 비장의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아는 잘 지내려나.”
아니나 다를까. 레스가 바리아를 말하기 무섭게 오노켄타 남작과 불륜을 저지른 행정관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잡소리만 떠들어대던 입도 그제야 다물어졌다.
특히 오노켄타 남작은 일전에 바리아를 통해 제대로 된 주먹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남작은 두툼한 두 손으로 입을 덥석 막았다. 그 꼴이 꼭 치아가 빠져 엉엉 놀라 우는 꼬마 같았다.
물론 귀엽지는 않았다.
“어휴, 공작님이 그렇게 잘 챙겨 준다지.”
레스는 바리아와 공작의 친분을 틈만 나면 꺼내며 평화로운 출장 분위기를 만들었다. 레스 혼자만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저 둘의 불륜을 어느 정도 눈감아줄 수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검은 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커다란 말을 타고 있었다.
“드디어 왔네.”
레스가 자신들 곁으로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환호의 주먹을 쥐었다.
“황궁에서 오셨습니까?”
“공작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절도 넘치는 기사들의 모습에 남작과 불륜 관계인 행정관이 얼굴을 붉혔다.
정갈한 제복에 나름 준수한 외모까지 더해지니, 어지간한 여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노켄타 남작은 그런 행정관을 밀치듯 놓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행정관 레스라고 합니다.”
레스가 먼저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기사들도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오노켄타 남작과 국토부 행정관과는 말로만 인사를 나누었다. 행정관은 저들과 악수하지 못해 무척 아쉬워했다.
“그럼 출발하실까요.”
기사들의 말에 행정관들이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저희는 어디에서 묵나요?”
레스가 마차 창문을 열어 물었다. 바로 마차 옆을 따라가던 기사가 답했다.
“공작님께서 지정해 주신 여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여관에서 묵으라고?”
오노켄타 남작이 말도 안 된다며 고성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된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남작은 자신이 황제의 지엄한 뜻을 받들어 이곳에 왔다며, 그런 저를 여관 따위에 묵게 하는 건 황실에 대한 모독이라며 소리쳤다.
레스는 네 놈 같은 게 행정부에서 일한다는 사실부터가 황실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저희는 공작님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남작은 속이 더 끓어올랐다.
“감히 공작 주제에 황제 폐하의 신하를 무시……!”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소리치던 남작의 목 아래로, 서슬 퍼런 검날이 들이닥쳤다.
“말을 함부로.”
눈 깜짝할 사이 검을 뽑은 기사가 짓눌린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껄이지 마십시오.”
그제야 오노켄타 남작의 입이 꾹 다물렸다. 검이 빠르게 뻗어진 순간, 그의 턱 밑으로 얇은 상처가 생겼다. 그 옆에 있던 행정관이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남작의 망언에 기사들이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숨 보전하려면 입조심하죠.”
레스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남작, 당신이 바리아한테 집적거렸던 거, 공작님이 알면 가만두시겠어요?”
“내, 내가 언제 그랬어!”
남작이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난 그런 적이 없어!”
“하지만 난 봤는걸요?”
내가 봤는데, 바리아라고 못 봤을까.
“내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한마디 하겠는데요.”
레스가 마지막 인내를 발휘했다.
“공작님 눈에 안 띄는 게 좋을 거예요. 황제 폐하와 공작님의 관계를 떠나서, 바리아한테 추파를 던졌던 당신은 완전히…….”
이거지요.
레스가 엄지로 자신의 목을 천천히 그었다.
그제야 남작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여관으로 가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고, 여관이 있는 광장은 무척 발달했다. 수도에 버금갈 만큼 훌륭한 모습에 오노켄타 남작과 행정관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도착한 여관도 생각 이상으로 너무 훌륭했다. 세 사람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오는 길 내내 투덜거리던 남작과 행정관은 조금 분해 보였다. 그들은 진짜 자신들이 묵을 여관이 허름하기를 바란 것 같았다. 그래야 트집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본격적인 일은 내일부터 하지.”
오노켄타 남작의 말에, 레스와 행정관도 이에 동의했다.
“전 집에 다녀올게요.”
오랜만에 고향에 왔으니, 한 번 들러서 얼굴 좀 비추고 오겠다며 레스가 나갔다.
“……저 둘도 곧 나갈 거예요.”
레스가 기사들에게 말했다. 오노켄타 남작과 행정관은 비협조적인 레스를 두고, 자신들끼리 먼저 북부 산맥 근처로 향할 예정이었다.
레스가 역겨운 심정 꾹 참고 출장길 내내 저 둘의 살 비비는 소리를 들으며 얻어 낸 정보였다.
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선 저택에 계세요?”
일단 그간의 상황을 보고할 겸, 레스는 보레오티 공작저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친가는 그 뒤에 가기로 했다.
‘바리아, 고게 엄청 놀라겠지?’
레스는 바리아를 가장 많이 걱정했다. 상사의 명령 때문에 감시를 목적으로 친해졌지만, 어느 순간엔 진짜 친구가 되었다. 레스는 진심으로 바리아의 행복을 바랐다.
“아…….”
“그것이…….”
그런데 기사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어딘가 머뭇거리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상당히 수상쩍고 어색해 보였다.
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어디 가셨나요?”
“가시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택에서 꼼짝을 않으시죠!”
기사들이 서둘러 답했다.
“그럼 가도 되겠네요.”
“아, 그런데…….”
“그것이 말이지요…….”
기사들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 지금은 아가씨께서 공작 대리로 계십니다.”
“아가씨가요?”
레스가 의외란 듯이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후계 수업을 열심히 하시네요.”
지난 연회에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공작 대리로 보냈단 이야기는 행정부에서도 유명했다. 어렸을 적부터 워낙 두각이 드러났으니 썩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쨌건 가도 되지요?”
레스의 은근한 재촉에, 기사들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는 근처 마차 대여소에서 작은 것을 하나 빌렸다. 마차는 빠르게 광장을 벗어나 언덕길을 올랐다.
보레오티 공작저는 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그 길을 오르는 동안, 레스의 마음도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미아!”
이내 보레오티 공작저에 도착한 레스는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어머, 레스잖아.”
마침 저택 안으로 들어가던 미아가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언제 북부에 온 거야? 오랜만이다, 야!”
“행정부 출장 때문에 왔어.”
“어우, 잘 왔어!”
“미아 넌 잘 지냈나 봐. 살찐 거 봐?”
“레스, 너도 싹수 지랄 같은 건 여전하네.”
두 친구의 다정한 인사는 한참 이어졌다.
“코니는?”
“오늘 휴일이라 친가에.”
“나도 서둘러 보고하고 친가에나 들러야겠다.”
“어, 보고?”
그 말에 미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본 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가 좀 이상하다?”
“뭐, 뭐가?”
“아까 기사분들도 표정이 묘했는데.”
레스가 물었다.
“뭔 일 있어?”
“뭐, 뭔 일은 무슨!”
미아가 두 손을 붕붕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강한 부정은 가장한 긍정이라고, 레스는 저 반응에 더욱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바리아는?”
일단 그건 둘째치고, 레스는 바리아를 찾았다. 그러자 미아가 기함했다.
“어디서 마님 이름을 함부로 불러!”
혹시나 자신들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도 있을까, 미아가 주변을 살피며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레스를 노려봤다.
“미쳤어, 진짜! 너, 그렇게 마님 이름 막 부르면 죽어!”
“마, 마님?”
레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얼굴에 난 구멍이란 구멍을 동그랗게 벌렸다.
똑똑.
“……누구야.”
집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레오니에가 물었다. 소녀의 눈은 여전히 서류와 씨름 중이었고, 손에 들린 펜은 정신 사납게 돌려지는 중이었다.
“레스입니다.”
“레스?”
그 말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당근색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레스 언니!”
레오니에가 반가운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냈어? 이번에 수도에서 지낼 땐 못 봤네!”
“아가씨께서도 잘 지내셨어요?”
인사하던 레스의 눈에 또 다른 인물도 들어왔다.
“자작님!”
육아 휴직으로 잠시 쉬고 있던 루페가 손을 가볍게 들었다.
결혼하고 한결 사람이 편안해졌다더니, 정말로 루페의 얼굴엔 윤이 잘잘 흘렀다.
“자작님, 얼굴이 엄청 피셨네요!”
전에는 죽을상이더니, 레스가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루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레스 양도 건강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야 뭐 건강 빼면 시체죠. 그런데 자작님, 육아 휴직이라고…….”
“임시 복귀입니다.”
그리 답하는 루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레스는 또 기이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언니가 북부로 온 건…….”
레오니에가 책상 위에 얹은 팔로 턱을 괴며 물었다. 책상에 엎드린 듯이 게으르고 빈둥거리는 태도인데도, 깜빡거리는 까만 눈동자는 총명하게 빛났다.
“드디어 황실이 사람을 파견했단 거네.”
책상에서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킨 레오니에가 슬쩍 레스를 바라봤다.
“그렇지?”
저를 응시하는 올곧은 눈빛에 레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모르게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습니다.”
레스는 오랜만에 긴장했다. 열두 살 소녀에게서 섬뜩한 무언가를 느꼈다.
동시에 자신이 보레오티 저택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겨우 실감했다. 수도에서 너무 오랫동안 머문 탓에, 검은 맹수의 흉포한 위압감을 잠시 잊고 있었다.
“황실이 각 지역에 전문가들을 파견했습니다.”
“파견된 전문가 명단은?”
“동부와 서부에 각각 연락해 두었습니다.”
“명단 변동은 없고?”
“없습니다.”
어느새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레스가 꼼꼼히 답했다.
“그럼…….”
레오니에가 손을 척 내밀었다. 루페가 개봉된 편지를 펼쳐 그 위에 올려 줬다. 레스가 각 지역에 파견될 전문가 명단을 입수하자마자 보낸 편지였다.
“모든 지역에 국토부 행정관이 갑니다.”
레스가 설명했다.
“몇 년 전에 크게 물갈이가 된 행정부이기도 합니다.”
루페가 덧붙여 말했다.
“황제파로 전부 바뀌었나 보네.”
레오니에가 북부로 파견되었단 두 전문가의 이름을 따라 읽었다.
“이 두 사람은 어떤 놈들이야?”
“불륜 관계입니다.”
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러바쳤다. 아직도 두 사람의 사랑 나누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루페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고, 레오니에는 재미있다는 듯이 더 말해 보라고 부추겼다.
“저 너무 힘들었어요…….”
다시는 떠올리기 싫다며 레스가 투덜거렸다. 레오니에는 고생했다며, 나중에 아빠한테 말해서 두둑이 챙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지금쯤 기사들이 이 둘을 감시하겠지?”
“제가 없는 사이에 산으로 올라갈 겁니다.”
“왜 죽음을 간청하는 걸까…….”
레오니에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마물들이 꽤 예민하지요?”
“마물은 늘 예민하죠.”
루페가 말했다.
서늘한 여름엔 마물들이 번식기를 갖는다. 루페의 말처럼 마물은 늘 예민하고 위험했다.
그러나 번식기 땐 그 정도가 심했기에, 절대 가까이 가선 안 되었다.
“이대로 마물 밥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레오니에가 손에 쥔 펜을 돌리며 말했다.
“책 잡힐 짓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루페가 조언했다.
“그럼 겁이라도 실컷 먹여 줘야지.”
우리 보레오티의 특산품이라며, 레오니에가 종이에 뭔가를 적어 루페에게 내밀었다. 이를 받아 든 루페는 바로 집무실을 나갔다.
“오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레스가 감탄했다.
“아가씨, 너무 멋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멋있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레오니에가 으쓱했다. 열두 살 소녀는 언제든 작위를 이어받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아깐 정말 깜짝 놀랐어요! 지은 죄도 없는데 주눅이 들었다니까요?”
“그렇게 말해도 이제 나올 건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저를 칭찬해 주는 말에 레오니에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공작님은요?”
레스가 아무 생각 없이 태연히 물었다.
“…….”
그러자 훈훈한 집무실 분위기가 급속도로 어긋나버렸다. 레스는 또 이 이상한 위화감에 빠져들었다.
“우리 아빠…….”
동시에 레오니에의 손에서 빠직, 금 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손에 들고 있던 펜이 부러졌다.
레스가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잉크 묻은 레오니에의 손을 닦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은데…….”
후우…….
이내 소녀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무려 10초 가까이 흘러나왔다. 부풀어 오른 저 가슴이 화가 난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웬수는 왜 찾아.”
“웬수…….”
레스는 레오니에의 표현을 멍하니 따라 말했다.
“그냥 안 계셔서 물어본 거예요.”
레스가 빠르게 덧붙였다. 어차피 필요한 보고는 공작 대리인 레오니에한테 다 했다. 그러니 굳이 펠리오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레스 언니, 말 잘했어.”
그리곤 자리에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 뒷골목 형님들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목을 이리저리 까딱였다. 허공을 괜히 죔죔 움켜쥐는 레오니에의 손에는 올가을 새로 나올 신상 손목시계가 걸려 있었다.
“내가 오늘은…….”
돈 많은 귀족 자제들을 노리고 만든 것이라 유난히 반짝거리고 유난히 화려했다. 그리고 이는 레오니에한테 아주 잘 어울렸다.
“반드시 데리고 나온다.”
“……오늘은?”
“잠깐 나갔다 올게.”
앉아서 편히 쉬고 있으라며, 레오니에가 레스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레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무슨 일이지?’
여관에서 봤던 기사들부터, 현관에서 만난 미아에, 아가씨까지.
‘수상한데.’
그렇게 따라간 곳은 어느 방문 앞이었다. 방문을 본 순간, 레스는 자신의 등골이 서늘하게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미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가 어디라고 마님 이름을 막 불러!’
미아는 바리아를 마님이라 불렀고.
‘마님 이름 막 부르면 죽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레스가 걸음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 이상 다가가면, 너의 정신이 상당히 피폐해질 것이라고 레스의 모든 이성과 본능이 그녀의 발을 멈춰 세웠다.
그러나 앞서가는 레오니에는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
“잠깐만.”
그때, 레오니에가 지나가던 하녀 한 명을 붙잡았다. 하녀의 손에는 텅 빈 식기가 올려진 쟁반이 들려 있었다. 식기를 보아하니 음식이 담겼던 것 같았다.
“그거 언제 넣었어?”
“오, 오늘 정오에 넣은 거예요…….”
그리고 문밖에 내놓아져 있는 걸 주워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아가씨.”
하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오늘로 벌써 나흘째인데…….”
“틀렸어.”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조금 전에 막 닷새로 넘어갔어.”
그리곤 하녀가 식기를 주워 왔다던 방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이 바보 부모들아!”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쳤다.
“벌써 닷새째다! 그만 부비부비하고 얼른 나와!”
* * *
펠리오와 바리아가 방에 들어간 뒤.
‘하, 합방이다!’
레오니에는 온 저택을 뛰어다니며 이 기쁜 경사를 여기저기 알렸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었다.
드디어 보레오티 공작이 안주인을 맞이했다. 이곳 북부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고, 이로써 보레오티 가문은 더욱 단단해질 터였다.
카라는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고, 펠리카는 하녀들과 함께 기뻐했다.
‘오늘 마시다 죽는 거야!’
레오니에는 공작 대리의 첫 번째 권한으로 저택에 엄청난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
그날 보레오티 저택은 밤새 축제를 열었고, 사람들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셨다. 레오니에는 오랜만에 글라디고 기사단들이 보여 주는 근육 파도에 환호하며 새로운 근육 노래까지 불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둘째 날.
펠리오와 바리아는 아직도 방에서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굶길 수는 없어서, 레오니에는 간단한 먹을 것들을 부모님이 들어가신 방에 옮기도록 지시했다.
그곳에 다녀온 사용인들은 하나 같이 얼굴을 붉힌 채 돌아왔다.
‘으휴! 저 씩씩이들!’
레오니에는 왜 카라가 자신을 그곳에 보내려 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젊어서 기운이 넘치네.’
그리곤 사용인들에게 편지 하나를 건네주며, 이것을 음식과 함께 부모님들 방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편지에는 지나가는 사용인들이 무안해하니 식사 시간 전후에는 작작하라고 야무지게 적었다.
‘나만 한 효녀 없어.’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쓱 한 레오니에는 그런 자신에게 감탄했다. 아이는 넓은 아량으로 부모님의 침대 운동을 응원해 줬다.
레오니에는 자신이 기다린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복상사했나?’
문제는 사흘째가 되면서였다.
아침을 먹던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아침 식사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다들 몰래 긍정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침실로 갔다.
‘살아 있어?’
죽은 거 아니지?
다행히 살아는 있는지, 안쪽에서 뭔가가 쑥 내밀어졌다.
‘와! 최신 근육 크로키 사전!’
이제 그만 좀 나오라고 따지려던 아이는, 뜻밖의 선물을 품에 안고 냅다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 나흘째 되는 날엔 천하의 아기 맹수도 지쳤다.
‘나와, 좀!’
기어코 그날엔 레오니에가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작작 좀 해! 그러다 뼈 삭아!’
레오니에는 덜컥 겁이 났다.
소설 주인공들의 침대 운동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 이건 명백한 실수였다. 하루 이틀이면 나올 줄 알았고, 사흘이면 역시 주인공답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나흘은 아니었다.
‘내 인생에 복상사로 부모님이 죽는 일 따윈 없어!’
그러니 어서 나오라고 문을 두드렸다.
‘……레오.’
그때.
드디어 나흘 만에,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 짜증 나게!’
레오니에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방에서 나오지 마!’
‘언제는 나오라며…….’
‘징그러우니까 나오지 마!’
레오니에가 문 너머에 있는 펠리오에게 손사래를 쳤다. 지금 펠리오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거친 침대 운동에 열중했다고 생각할 만큼 거칠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 언니는 살아 있지?’
레오니에가 황급히 바리아의 안부를 물었다.
‘언니 살아 있어? 아니지, 엄마 살아 있어? 죽은 거 아냐?’
다행히 살아는 있는지, 문 너머로 죄송하다고 웅얼거리는 쉰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
할 말이 없어진 레오니에는 포기하듯 등을 돌렸다. 어찌할 도리가 없단 듯이 하늘 위로 두 손을 올린 채였다.
아이의 입에선 이 집안의 가정 환경은 글러 먹었다고, 나니까 이렇게 넘어가는 거라고 한참을 투덜거렸다.
그리고 조금 전.
레스가 이곳 저택에 도착한 직후.
부모님들의 침대 운동이 닷새로 넘어갔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