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남부, 아우스트
북부로 출발하는 날.
“우리는 보통 서부를 통해 북부로 가.”
레오니에가 바리아 곁을 맴돌며 북부로 가는 여정을 설명해 줬다.
바리아는 제 주위를 빙그르르 도는 레오니에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다 큰 척, 어른인 척하면서 제 앞에서는 꼭 저렇게 애처럼 구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바리아가 손을 내미니, 레오니에가 덥석 잡으며 까르르 웃었다.
“북부로 통하는 게이트는 황궁에 있대. 그래서 못 써.”
“저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가씨는 그 게이트를 본 적 있나요?”
“황궁 안에 있는 거?”
“네.”
레오니에가 고래를 도리도리 저었다.
“언니는 본 적 있어?”
되돌아오는 물음에 바리아도 고개를 저었다. 이내 둘은 그늘진 곳에 있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용인들이 마차에 짐을 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레오니에는 근처에 있던 사용인에게, 짐을 다 싣고 나면 얼음이 가득 든 시원한 음료를 모두가 마시게 미리 준비하라고 말했다. 사용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갔다.
“나 처음 게이트 탔을 때 멀미 엄청 했는데.”
“정말요? 게이트 멀미는 상당히 드문 일인데…….”
바리아가 제 일처럼 걱정했다.
“근데 이젠 안 해!”
“게이트 멀미는 처음 타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고 해요.”
“언니도 겪었어?”
“아니요.”
“다행이야, 그러면.”
그거 엄청 괴로운 거라고, 레오니에가 그때를 떠올리며 질색했다. 게이트 멀미는 몸 안에 있는 모든 장기가 쏟아지는 듯한 괴로운 경험이었다.
“레오!”
그때, 출발 준비를 마친 펠리오가 아이를 불렀다.
“아빠, 언니는 안 불러?”
레오니에가 일부러 큰 소리로 불렀다.
“부끄러워서 못 부르나 보지?”
입가를 히죽이며 능글거리는 아이의 얼굴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아가씨.”
바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렸다. 레오니에가 킥킥 웃으며 다 큰 어른을 놀렸다.
이의 장난에 심통이라도 났는지,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펠리오의 인상이 험상궂게 일그러진 게 선명히 보였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부리나케 도망쳤다.
하지만 장난을 성공한 레오니에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바리아는 부끄러우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 웃었다.
그 틈에 펠리오가 두 여자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 웃었냐.”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왜 내 이름만 불러! 언니 섭섭하게!”
“안 섭섭해요.”
“아니면 나 없을 때 둘이서만 통성명하려고 그래?”
펠리오는 바리아를 이제 이름으로 부른다. 하지만 바리아는 아직도 ‘공작님’, ‘아가씨’란 호칭을 놓지 못했다.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짓궂게 놀리는 딸을 무시하며,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리아가 그 위에 저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레오니에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으이구, 언제 결혼하나 했는데!”
레오니에가 오지랖 넓은 아줌마처럼 펠리오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다 컸어, 아주 그냥!”
우쭈쭈,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등을 한참 두들겼다.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배짱에 감탄했다. 자신은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부모님께 저럴 수 없었다.
“네가 내 엄마냐.”
펠리오는 제 등을 때리는 레오니에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엄마 같은 딸이지!”
“웬수 같은 딸이겠지.”
“그거나 이거나!”
먼저 마차에 올라탄 레오니에는 신발을 벗어 제 바로 옆자리에 올렸다.
“난 이제 둘 사이에 끼기 싫어.”
답답해서 불편하다고 투덜거린 아이는 아예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 탓에 펠리오와 바리아는 자연히 둘이서 나란히 앉아야 했다. 펠리오는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딸에게 사탕을 쥐여 줬다.
“다녀올게!”
레오니에는 마차 창문에 상반신을 반쯤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트라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난 이때가 제일 슬퍼.”
도로 자리에 앉은 레오니에가 사탕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다시 또 만날 거지만, 역시 헤어지는 건 조금 서운했다.
“저놈들은 너 없으니 이제 조용하다고 기뻐할걸.”
펠리오는 아이가 괜히 사색에 잠기지 않도록 감동을 깨트려 줬다. 열불 난 아기 맹수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마차는 곧 빠르게 광장을 벗어났다. 보레오티 가문의 마차는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받았다.
바리아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한참 구경했다.
“저, 지금 북부로 가는 거지요?”
바리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드디어 자신이 북부로 향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 전에 서부부터 갈 거지만.”
레오니에가 서부에 가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바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전 수도랑 남부에만 오갔어요. 여름 휴가도 에르바누 영지에서 보냈고요.”
“앞으론 서부에서 우리랑 같이 쉬어!”
레오니에는 서부에 있는 보레오티 별장을 자랑했다.
“우리 서부로 안 가는데?”
그때, 펠리오가 끼어들었다.
그제야 레오니에는 마차 밖 풍경이 낯설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부로 통하는 게이트가 있는 성곽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분명 성곽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레오니에한테 익숙한 방향이 아니었다.
“여, 여긴……!”
반면 바리아에겐 익숙한 길이었다.
“지금 저희 남부로 가나요?”
바리아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밖을 주의 깊게 살피던 레오니에가 도끼눈을 떴다.
“왜 남부로 가?”
레오니에가 화를 내듯 물었다.
“왜긴 왜야.”
펠리오가 태연히 말했다.
“볼일이 있으니 그리로 가는 거지.”
그리고 마차는 정말로 남부로 향하는 게이트를 통과했다.
게이트를 통과하기 직전, 레오니에는 남부 게이트 앞에 나타난 보레오티 마차를 기겁하며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그만큼 보레오티의 남부행은 엄청난 일이었다.
“우와, 덥다…….”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는 냉큼 모자를 썼다. 어릴 적에 펠리오가 선물로 줬던 모자에 걸린 통풍 마법이 뜨겁게 달궈진 레오니에의 머리를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으어어.”
그제야 한숨 돌린 레오니에는 손을 눈 위에 얹어 그림자를 만들었다.
“여기가 남부.”
레오니에는 처음 와 본 남부를 신기한 듯이 두리번거렸다.
남부 게이트는 숲과 해안가의 경계선에 있었다. 짭짤한 소금기가 바람에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레오니에는 몸을 숙여 바닥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더럽게.”
펠리오가 손수건으로 아이의 손바닥을 톡톡 털어 주었다.
“흙이 북부랑 서부랑 다르네.”
촉촉한 흙 위로 모래가 꺼끌꺼끌 쌓여 있었다.
“덥진 않고?”
펠리오가 물었다.
“모자 있어서 괜찮아!”
레오니에가 머리 위에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이는 오히려 기사들과 말들이 더 걱정이었다. 실제로 말들은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에 놀랐는지 예민하게 굴었다. 펠리오는 근처 그늘에 말들을 쉬게 하면서 마차 점검을 명령했다.
“바리아, 괜찮습니까?”
펠리오는 바리아도 세심히 살폈다.
“저는 남부 귀족이잖아요.”
“이 언니도 허세만 늘었네.”
레오니에가 제 모자를 벗어 바리아의 머리에 얹어 줬다.
“지금은 언니한테 이 모자가 가장 절실해 보여.”
지금 여기서 가장 더위로 고생하는 건 바리아였다. 남부 귀족 출신이라면서 남부 게이트를 통과하기 무섭게 더위를 타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모자를 쓰기 무섭게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마치 뜨겁고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바리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더위를 많이 타시는군요.”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손을 닦았던 손수건과 다른 모양의 것을 꺼내어 물에 적시더니, 바리아의 이마를 조심조심 닦아 줬다.
레오니에는 새삼 펠리오가 소설 주인공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북부의 얼음 공작님도 사랑 앞에서는 애절하고 조신한 사내일 뿐이었다.
“으으, 무서워.”
이 더위 속에서 레오니에 혼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쨌건 같은 제국, 같은 날짜인데도 남부는 수도보다 훨씬 더웠다.
“북부는 아무리 더워도 이 정도는 아닌데.”
레오니에가 북부의 여름을 떠올렸다. 여름이 무색할 정도로 바람이 자주 불고 구름도 많았다. 그리고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도 있었다. 그날은 펠리오가 유일하게 밤을 새워도 혼을 내지 않는 날이기도 했다.
“언니는 타고난 북부 사람이었네.”
더위쯤이야 북부로 가면 완전히 까먹고 살 거라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바리아도 부디 그러길 바랐다.
펠리오는 마차 점검이 진행되는 동안 앞으로의 일정을 간단히 말해 주었다.
“남부에 보레오티 별장이 있습니다. 그곳에 머물렀다가 북부로 올라가죠.”
“얼마나 머무는 건가요?”
더위가 조금 가신 바리아가 모자를 레오니에에게 씌워 주며 물었다.
“일주일 조금 더 걸릴 겁니다. 이왕 남부에 내려온 거, 좀 놀다 가죠.”
“유후!”
레오니에가 환호했다.
“하지만 북부로 황실 사람이…….”
반면, 바리아는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황실이 각 지역에 사람을 파견하여 그곳의 땅들을 들쑤시고 다닐 게 뻔한데, 마냥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펠리오가 바리아의 볼에 제 손등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열이 제법 식었음에도 바리아의 체온은 펠리오보다 조금 더 높았다.
“……파르두스 때문인가요?”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펠리오의 손을 내렸다.
“그쪽에서 시간을 벌어 두는 걸까요?”
펠리오가 정답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바리아의 얼굴에 열이 더 올랐다.
“근데 과연 잘할까?”
달콤한 열기를 내뿜는 어른들 사이로 레오니에가 뽁, 하고 나타났다. 이제 아이는 아빠와 예비 엄마의 두둥실 구름 같은 분위기에 제법 익숙해졌다.
“올로르가 파르두스한테 경쟁심을 느끼던데.”
“주제 파악도 못하고.”
펠리오는 요즘 수도 정치계의 질서가 저렇게까지 흔들리는 걸 볼 때면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올로르가 급성장했다고 해도, 진짜 황제의 측근은 파르두스였다. 건국 시기부터 황실의 옆을 지킨 그들의 유구한 역사와 업적은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었다.
그런데 고작 딸 하나 황비 자리에 앉혀 자작 자리 얻은 것 가지고 온갖 위세는 다 부리는 꼴이라니.
펠리오는 저런 놈들을 상대해야 하는 파르두스가 태어나 처음으로 불쌍했다. 파르두스 후작이 루페와 인세레아의 아이한테 푹 빠져 있는 게 천만다행일 정도였다.
“후작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백조 새끼들 다 죽었을 거야.”
손으로 턱을 괸 레오니에가 천연덕스레 말했다. 펠리오는 저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만약 파르두스 후작이 수도에 있었다면, 올로르는 붉은 깃털이 다 뽑힌 채 통구이가 되었을 거다.
심지어 성격만 따지고 본다면,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제 아버지인 후작보다 더 거칠고 냉혹했다. 그러니 지금 올로르는 기요틴 아래 제 목을 넣고 잘라 달라고 아우성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미친놈을 보면 기운이 쭉 빠진단 말이지.”
펠리오의 말에 레오니에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빠의 말은 틀린 곳 하나 없었다.
“공작님.”
바리아가 설핏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단어를 아가씨 앞에서 쓰시면 어떡해요.”
레오니에의 거친 말투가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펠리오한테서 옮은 모양이었다. 바리아는 아이의 정서 교육을 위해 조금만 조심하자고 정중히 부탁했다.
“아빠한테 너무 그러지 마…….”
속으로는 웃겨 죽으면서, 레오니에가 애절한 표정으로 바리아에게 부탁했다. 펠리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스쳤다.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아기 맹수가 너무 얄미운데, 그런 한편 은근히 바리아의 품에 안겨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빠, 사랑해!”
바리아의 품에 안긴 레오니에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재롱을 부렸다.
정작 아이의 얼굴은 사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심술보 그득한 볼살이 광대 위로 승천했다.
펠리오는 혹시 악마가 레오니에한테 빙의한 건 아닌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제 딸은 악마한테도 근육을 전파할 변태란 사실을 깨닫고 금방 생각을 떨쳐 냈다.
* * *
남부는 휴양의 땅이었다.
서부와 함께 귀족들의 휴가용 별장이 가장 많은 곳이면서, 남부 특유의 화려함과 열정적인 분위기로 휘황찬란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드넓은 바다를 마주한 그곳엔 아주 오래전부터 땅을 지켜온 가문이 있었다.
‘그게 바로 아우스트와 메리디오지.’
레오니에가 과일 하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수도 저택에서 떠나기 전에 트라가 챙겨 준 간식이었다. 달콤한 과즙이 풍부해 목을 축이기에 딱 좋았다.
과일을 꿀꺽 삼키며, 레오니에가 창밖을 내다봤다. 보레오티 마차는 남부에 들어서기 무섭게 엄청난 이목을 받았다. 쏟아지는 시선은 놀라움이 반, 호기심이 반이었다.
“의외로 잠잠한데?”
레오니에가 의아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솔직히 달걀이나 썩은 과일 같은 거 맞을 줄 알았어.”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펠리오가 피식 웃었다.
“파보 오빠가 그랬어.”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는 남부가 요 최근 사이에 북부를 이유 없이 차별하고 욕하는 분위기가 심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레오니에가 직접 두 눈으로 본 남부는 보레오티를 신기해할 뿐이었다. 호냐 불호냐를 따지자면 호에 더 가까웠다.
바닷새가 하늘 위를 끼룩끼룩 날고, 햇볕에 피부가 그을린 사람들의 표정엔 생기가 풍부했다. 활기 넘치는 휴양지의 전형이었다.
“남부도 다 그런 건 아니에요.”
바리아가 말했다.
“아마 그 기사님이 말씀하신 곳은 올로르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귀족이 지배하는 영지 쪽일 거예요.”
에르바누도 그중 하나라며, 바리아가 조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반대로 이쪽은 조금 더 호의적이지.”
펠리오가 햇살이 쨍쨍하게 들어오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하필 또 마차가 검은색이라서,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의 열기를 온전히 흡수했다.
더위엔 장사 없다고, 북부의 추위마저 견디는 준마들도 지쳤는지 마차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다행히 곧 하늘 위로 커다란 구름이 드리워져 그늘이 만들어졌고, 바람이 불어왔다.
“여기가 바로 메리디오 영지야.”
“오오.”
보레오티 별장은 메리디오 영지 근처에 있었다.
마차가 어느 커다란 저택 앞에 멈췄다.
“아빠, 이거.”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는 먹다 남은 과일을 펠리오에게 주었다. 배불러서 먹기 싫단 뜻이었다. 펠리오는 말없이 과일을 받아 마저 베어 물었다.
바리아는 그런 맹수 부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먹다 남은 건 옛날부터 아빠가 먹어 줬어.”
레오니에가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과자 먹고 입에 묻은 것도 떼어 주고 먹어 줬어.”
“정말 다정하시네요……!”
바리아는 한 번 더 펠리오에게 반했다. 그는 정말 멋진 아버지였다.
“나중에 언니한테도 그렇게 해 줄걸?”
능글맞은 아이의 농담에 바리아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레오니에는 킥킥 웃으며 펠리오에게 달려갔다. 바리아도 겨우 정신 차리고 둘을 따라갔다.
보레오티 별장은 해안림 안에 있었다. 해안림은 해송이 가득했는데, 그 덕에 북부에서 많이 자라는 전나무가 떠올랐다.
별장 내부는 역시나 깨끗했다. 펠리오가 이곳에 들를 거란 걸 미리 전해 들은 관리인들이 먼저 청소하고 식료품들을 준비해 두었다.
사용인들은 빠르게 자기 일자리를 찾았고, 기사들은 주변을 살피러 나갔다.
“공작님은 아우스트 공작님을 뵌 적이 있나요?”
보레오티 부녀 사이에 낀 바리아가 물었다. 그때, 사용인이 커튼을 걷었다. 해안림 너머 푸른 바다가 훤히 드러났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펠리오의 입가는 둥근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만난 적은 있습니다.”
“언제?”
은근슬쩍 펠리오와 바리아의 허벅지 위에 누워 뒹굴던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이는 어느새 신발이며 양말까지 다 벗은 채였다.
“좀 되었어.”
펠리오가 똑바로 앉으라며 잔소리를 덧붙이곤 말했다.
“선대 공작 부부가 죽었을 때.”
대답하는 펠리오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주섬주섬 일어나 똑바로 앉게 하기엔 충분했다.
선대 공작 부부는 펠리오의 부모님이었다. 그가 자신의 부모님에게 아무리 정이 없다고 해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주제였다. 바리아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숨조차 조심히 쉬었다.
“그때 공작 작위 물려받고, 인사차 한 번 방문했다.”
정작 펠리오 혼자 태연했다.
“그리고 5년 전에도.”
마치 레오니에가 어렸을 때 잠재우려고 근육 사전 읽어 주는 것처럼 차분하기까지 했다.
“그럼 이번에도 만나?”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말했던 ‘볼일’을 떠올렸다. 펠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던 볼일이 바로 아우스트 공작과의 만남이었다. 그래서 메리디오 영지에 지어진 별장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 * *
별장에 도착하고 며칠 동안은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펠리오는 아우스트 공작을 만날 거라고 말했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펠리오 본인조차 모르는 듯했다.
“만남을 정하는 건 저들이야.”
연락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라는 말이 다였다. 그리곤 진짜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동안 레오니에는 그림을 그리며 취미 생활을 즐겼다. 펠리오와 바리아를 본뜬 시계도 그리고, 여기에 저까지 본뜬 가족 시계도 그렸다.
틈틈이 기사들 근육도 훔쳐보고, 그걸 그리고, 시원한 현관 홀 바닥을 뒹굴며 자다가 코니와 미아한테 잔소리도 들었다.
펠리오도 바리아와의 관계 진척에 노력했다. 바리아와 단둘이 근처 마을을 구경 가고, 레오니에와 함께 셋이서 별장 앞 해안가에 돗자리를 펼치고 유유자적한 오후를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노는 거 처음이에요!”
바리아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 말에 맹수 부녀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바리아가 그만큼 가족들 사이에서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단 뜻이었으니까.
“언니, 우리 많이 놀자. 응?”
“나와 결혼하면 평생 휴가도 가능합니다만.”
레오니에와 펠리오는 ‘다음’을 약속했다. 바리아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레오.”
사흘이 지나려는 저녁.
“오늘 밤이다.”
식탁에 앉기 무섭게, 펠리오가 말했다. 늘 그랬듯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능력껏, 아빠의 딸로 살아온 세월 덕에 단번에 알아들었다.
“오늘이구나.”
남부의 진짜 주인.
오늘 밤, 드디어 아우스트 공작을 만날 예정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별장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북부의 수장께 인사드립니다.”
주홍색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기사가 예를 갖췄다. 그의 뒤에는 청옥색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소녀가 있었다. 레오니에보다 네다섯 정도 많아 보였다.
“반갑습니다, 공작님.”
기사가 옆으로 비켜서자, 소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아우스트 공작님의 손녀, 살루스 아우스트가 보레오티 공작님을 직접 모시러 왔습니다.”
“늦은 밤 고생이 많습니다.”
펠리오가 몸을 살짝 틀어 안으로 두 사람을 데려왔다. 살루스와 기사가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펠리오는 지금 차려입은 옷에 얇은 재킷만 걸쳤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다가왔다.
“왔어?”
“늦을 테니 먼저 자라.”
“가서 기죽으면 안 돼, 알았지?”
“내가 지금 싸우러 가는 게 아닌데…….”
펠리오가 헛말 하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리아는?”
그리곤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바리아를 찾았다. 레오니에가 히죽 웃었다.
“언니 자.”
오늘 하루도 열심히 놀고 돌아다니느라 심신이 피곤하신 예비 엄마는 일찍이 꿈나라로 떠났다.
“언니말야, 꼭 강아지 같지 않아?”
“레오, 넌 좀 본받아라.”
“나는 강아지보다 귀여운걸?”
“동심보다 양심을 길렀어야 했는데…….”
펠리오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뱉었다. 덕분에 열불 난 레오니에가 솜 주먹으로 아빠의 옆구리를 통통 때렸다.
“공작님.”
그때, 맹수 부녀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살루스가 있었다. 청옥색 머리칼을 지닌 살루스가 짙은 초록색 눈을 휘었다.
“아우스트 공작님의 전언을 깜빡했네요.”
“전언……?”
레오니에가 눈에 띄게 경계했다. 정작 살루스는 그런 레오니에의 태도가 귀여워 죽겠는지 마냥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어째 저 미소가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껴졌다.
“공작님 가족분 전원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펠리오가 눈을 찌푸렸다.
“공작님과 공작 영애.”
살루스의 손가락이 천장을 가리켰다. 살짝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바리아의 방이 있었다.
“예비 공작 부인께서도 함께하시면 감사할 겁니다.”
레오니에가 숨을 헉 들이켰다.
“어떻게 안 거야?”
바리아는 저녁을 먹고 초저녁에 잠들었다. 펠리오에게 조심히 다녀오라 인사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으니, 살루스가 바리아가 있는 방향을 알아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예절에 어긋나는 태도였으나, 살루스는 크게 괴이치 않았다.
“차기 공작이신 보레오티 영애께서 힘을 물려받으신 것처럼.”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살루스의 얼굴엔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차기 공작인 저 역시도 힘을 물려받았으니까요.”
물론 보레오티만큼 대단한 힘은 아니라며, 살루스가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아우스트 공작 가문의 힘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
어느새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뒤에 숨어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아기 맹수는 경계를 쉬이 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챙겨 온 선물이 있는데.”
살루스의 말에, 뒤에 있던 기사가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 보니 안에는 진주와 산호로 장식된 동그란 함이 있었다.
살루스가 분홍빛 진주가 손잡이처럼 달린 뚜껑을 살짝 열어 보였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알사탕이 들어 있었다.
“영애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살루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레오니에가 순진무구한 미소를 곁들였다. 펠리오는 저 속물 같은 내 새끼를 어쩌면 좋을지 몰라 한참을 노려봤다.
여름날 밤은 다른 계절과 다르게 마냥 어둡지 않았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에 남색 물감을 위에서 아래로 색칠한 수채화 같았다. 위로 갈수록 짙었고, 아래로 갈수록 물을 탄 것처럼 연했다.
거기다 둥그런 보름달까지 하늘 위에 떠 있으니, 바다 위로 마치 새하얀 빛의 길이 생긴 것 같았다.
이토록 몽환적인 경치 속에서,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마차를 이끄는 말들은 어둠에 익숙한지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아빠, 우리 어디로 가?”
레오니에가 어둑한 창밖을 보며 물었다. 보레오티 세 사람은 살루스가 타고 온 마차를 함께 탔다.
“지금 가는 곳은 아우스트 영지입니다.”
펠리오에게 했던 질문에, 살루스가 대신 대답해 줬다.
“조금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우스트 영지 밖에 있는 비밀 장소랍니다. 그곳은 저희 가문의 비밀과도 관련이 있어서 가는 길을 함부로 알려 줄 수 없답니다.”
그래서 살루스는 제 마차에 세 사람을 태웠다.
“아우스트 공작님께서 여러분들을 뵙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똑 부러지게 대답한 살루스는 이윽고 바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무시는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저, 그 호칭은 좀…….”
바리아는 자다 일어났는데도 잠이 확 깨버렸다. 깊이 잠든 도중에 깨워진 것도 어안이 벙벙한데, 갑자기 나타난 아우스트 공작 손녀가 저보고 계속 ‘공작 부인’이라 부르는 것 때문에 너무 부끄러웠다.
“보레오티와 아우스트의 앞날이 밝아!”
“괜히 공작인 게 아니지.”
반면 맹수 부녀는 너무도 당연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루스가 바리아를 완전히 보레오티의 일원으로 대하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으으, 아빠 입꼬리.”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를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놀렸다. 목을 뒤로 확 빼며 정색한 탓에 이중 턱이 생겼다.
“바리아 언니가 보레오티가 되는 상상만으로 저리 좋아하다니.”
아빠는 변태라며, 레오니에가 마구 놀렸다. 옆에 있던 바리아가 붉어진 얼굴을 기어코 두 손으로 가렸다. 바리아는 이 부끄러운 상황에서 당당하게 얼굴을 내놓을 만큼 철면피가 아니었다.
“시간문젠데 뭐 어때.”
정작 펠리오는 자신만만하고 떳떳했다.
“하하하!”
시끌벅적한 보레오티 세 가족의 모습에 살루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여리여리한 인상과 달리 뱃심이 두둑한 웃음이 고막을 멍하게 할 정도였다.
“보레오티는 아주 재미나네요!”
“우리 보레오티는 인간미 넘치고 정겨운 가문이라고요!”
레오니에가 으스댔다.
“근데 살루스 언니는 근육 좋아해요?”
“초면에 그런 질문 하지 마.”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으으으응, 하고 아이의 투정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살루스가 한 손으로 턱을 감싸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보레오티 영애께서는 근육을 좋아하시나 봐요.”
“우리 엄마도 좋아하는데.”
펠리오의 손을 홱 치운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리아는 이제 호칭을 고치는 걸 그만두었다. 저 혼자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리 좋아하셨습니까.”
펠리오는 그런 바리아의 손등을 토닥였다.
“지금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는데.”
그러면서 은근히 제 팔뚝에 힘을 주어 상완 이두근을 보다 두드러지게 했다.
“공작님, 그거 성희롱입니다…….”
“바리아, 그대가 내게 복직근이 무어냐 물어본 것도 성희롱이지요.”
“저는 순수하게 물어본 거였잖아요!”
두 어른 맹수의 싸움에 살루스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반면 동행한 주홍 머리의 기사는 입꼬리 한 번 씰룩이지 않았다.
“아, 진짜 너무 재밌다!”
살루스가 눈물까지 흘리며 한참 배꼽을 부여잡고 웃던 때였다.
“살루스 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저택에서 인사한 이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마침 다 왔군요.”
살루스가 겨우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저곳이 아우스트 저택이랍니다.”
어둑한 밤, 환한 달빛이 하늘과 바다를 가로질러 내려앉은 바로 그곳에 커다란 저택 한 채가 홀로 서 있었다.
때마침 커다란 파도가 저택 뒤를 세차게 때렸다.
“세상에나…….”
레오니에가 경악했다.
아우스트 저택은 낭떠러지에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가기 직전, 레오니에는 마차가 멈춰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길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곤 고개를 밑으로 쑥 내렸다.
“이야, 이게 다 뭐다냐…….”
“아가씨는 가끔 꼭 할머니처럼 말씀하세요.”
옆에서 바리아도 쪼그려 앉아 같이 아래를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만 아득할 뿐이었다.
저 아래에서 파도가 철썩이며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만 생생히 들렸다.
“저택이 무너지지 않을까?”
“보통은 저런 곳에 등대지기의 오두막이 있다고 하죠.”
“등대지기?”
“진짜 등대지기가 아니고, 사고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등대지기의 혼이래요.”
남부 출신인 바리아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렇게 죽은 등대지기의 혼은 파도가 치는 날에 절벽에 다가오는 사람들을 겁주어 쫓아낸다고 했다.
“착한 귀신이네.”
레오니에가 조금 더 상체를 깊숙이 내렸다. 하지만 제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어느새 몸이 부웅 떴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위험하다며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반대쪽 팔에는 바리아가 일찌감치 잡혀 있었다.
“…….”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은근슬쩍 바리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흉근에 가져가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바리아도 부끄러운 척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옷감 너머의 흉근을 살피는 걸 못 본 척했다. 바리아가 근육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펠리오는 아주 철저히 이용했다.
“이 바보들…….”
레오니에는 어쩔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저었다.
“참 예쁜 곳이지요?”
마차를 먼저 저택 안으로 보낸 살루스가 물었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 헛디디면 골로 가기 딱 좋네요.”
“바다는 시체도 품는 아량을 지녔지요.”
살루스가 호호 웃었다.
“이 언니도 보통 아니네.”
역시 차기 공작, 레오니에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보레오티 저택 가까이에 북부 산맥이 있는데, 거기엔 마물이 득실거려요.”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살루스는 손님들을 곧 저택 안으로 모셨다.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레오니에는 주위를 계속 살폈다. 이곳으로 통하는 길을 찾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낭떠러지에 이토록 커다란 저택이 떡하니 있을 수 있는지, 그걸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공작 가문의 영지인데, 낭떠러지 근처엔 인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보레오티도 이 정돈 아닌데…….’
북부 저택도 인가와 제법 떨어져 있지만, 적어도 밤에는 제 방 창문으로 저 멀리 불 켜진 마을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엔 아우스트 저택 말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은근슬쩍 뒤로 떨어져 맹수의 송곳니를 꺼내 주변을 살펴봤다. 하지만 느껴지는 거라곤 저택 내에 있는 사람들의 인기척뿐이었다.
“…….”
어둑한 뒤를 한참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빠.”
앞서가던 사람들을 빠르게 쫓은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바리아 사이에 끼어들었다. 펠리오는 그런 딸아이를 말없이 지켜보다 슥슥,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으세요?”
바리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괜찮아.”
저를 걱정해 주는 두 사람 덕에, 레오니에의 기분은 금세 좋아졌다. 살루스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만 지었다.
“이쪽이에요.”
드디어 굳게 닫혔던 아우스트 저택의 문이 열렸다.
‘오오.’
레오니에는 저택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감탄했다.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아우스트 저택은 한마디로 ‘바다’였다. 마치 동화 속 바다 궁전처럼, 산호 모양의 조각들, 그리고 해양과 관련된 명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레오.”
그때, 펠리오가 높은 현관 홀 천장을 가리켰다.
“와아!”
나름 예의 차린다고 내색하지 않던 레오니에가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옆에 있던 바리아도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고래다!”
천장에는 다양한 고래 떼가 그려져 있었다. 검은 몸에 흰색 무늬가 그려진 커다란 고래 주위에 여러 고래가 뒤따르고 있었다.
“아우스트의 자랑이랍니다.”
살루스가 설명해 줬다.
“저희 가문은 아주 오랫동안 고래를 숭배했고, 이를 가문의 문장으로 삼았지요. 메리디오 후작 가문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그 말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메리디오 가문 출신이었다.
“혹시 그거 아시나요?”
살루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몇 년 전에 어느 북부 출신의 학자가 발표한 논문이요.”
그 말에 바리아가 흠칫했다. 살루스는 지금 아르데아를 언급했다.
“그 학자는 북부가 인류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지요.”
“기분 나쁘셨습니까?”
펠리오가 물었다.
“아니요, 전혀요.”
살루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저도 그 의견에 나름 동의하거든요.”
“하지만 남부 사람들은 썩 좋아하지 않았어요.”
바리아가 말했다. 자신은 크게 연연치 않았지만, 남부 출신 귀족 학생들은 말도 안 된다며 아르데아에게 거친 말도 내뱉었었다.
물론 앞에서는 못 하고 뒤에서만 중얼거렸지만, 그 밖에도 많은 파장이 있었다.
살루스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칼에 ‘검정’이 섞였군요.”
그 말에 바리아가 저도 모르게 제 머리칼을 손에 쥐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저의 탁한 분홍색 머리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다.
“북부의 피가 섞인 거예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남부 귀족인데…….”
바리아가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모든 조상님을 기억하진 않지만, 적어도 조부모님 때까지는 북부 출신이 없었다. 제 모친 또한 남부 귀족 영애였다.
“북부인의 체모는 어둡답니다.”
“오호?”
“이상한 생각 마라.”
펠리오가 히죽거리는 레오니에의 머리를 통통 쓰다듬으며 주의를 줬다. 할 말 없는 레오니에는 괜히 아빠 손만 주물럭거렸다.
“하나 제 말은 사실이랍니다. 북부인의 피는 아주 강합니다. 몇 대에 걸쳐 희석되었다고 해도 이따금 드러날 때가 있거든요.”
예를 들면, 똑같은 붉은색이어도 북부가 더 어둡고 탁하다고.
그 말에 바리아는 친구 레스를 떠올렸다. 레스도 뒤따라오는 메리디오 출신 기사처럼 주황색이었지만, 저렇게 선명하진 않았다. 오히려 흙을 뒤덮은 것처럼 어두웠다.
그러고 보면 글라디고 기사단 중 대다수가 북부인이었고, 그들의 머리칼은 확실히 어둡고 탁한 색을 지니었다.
“근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만큼 북부가 대단하단 뜻이지요.”
어느샌가 살루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의 앞에 커다란 산호를 깎아 만든 문이 있었다. 붉은색 산호 보석만 봐온 레오니에는 청옥빛이 감도는 산호 문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살루스가 문 한쪽에 손을 올렸다. 어느새 기사도 반대편 문에 손을 올렸다.
“공작님께서, 그러니까, 제 할머니께서 여러분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곧 문이 천천히 열렸다.
“우리 아우스트 가문의 능력은 한 번 사용하면 피로감이 제법 큽니다.”
방 안에는 많은 사람의 시중을 받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 청옥의 여인이 있었다.
“그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 * *
건국 이전부터, 네 지역에는 일찌감치 그 땅을 지키고 다스리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한 우두머리들은 아주 강하고 기묘한 힘을 지녔다.
“동부는 마나라 불리는 기이한 힘을.”
방 안에 사람이 들어온 기척을 느낀 아우스트 공작이 말했다. 색이 바랜 청옥색 긴 머리를 풀어헤친 노부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리고 공작의 곁에는 부축하는 하녀들이 무려 다섯 명이나 있었다.
노부인은 눈에 새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서부는 오러라 불리는 강인한 힘을.”
레오니에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펠리오와 바리아의 손을 양손에 꼭 쥐었다. 두 어른도 묵묵히 손에 힘을 주었다.
아우스트 공작은 아주 작고 가녀린 사람이었다. 앞으로 살날보다, 지금껏 살아온 날이 더 많아 보이는데, 연약한 노부인에게서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북부는 이질적인 이능을 물려받았고.”
노부인의 목소리는 아주 잔잔했다. 마치 바람이 불지 않는 바다 같았다.
그러나 바다는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그녀의 말속엔 부드러운 운율이 있었다.
레오니에는 공작의 노래에 푹 빠졌다. 그래서 왜 갑자기 그녀가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생각하지 못했다.
“남부는 예지를 통해 앞날을 읽네.”
노래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것이 드디어 끝났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펠리오가 먼저 인사했다. 그는 아우스트 공작의 이런 기이한 행위가 아주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아우스트 공작의 주름진 입가가 싱긋거렸다.
“보레오티의 꼬마 맹수가 어느새 어른이 되었군요.”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이 세상에서 펠리오에게 ‘꼬마 맹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아우스트 공작은 정말 배짱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덕분입니다.”
심지어 펠리오도 크게 연연치 않았다. 눈썹이 살짝 찡그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딱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아우스트 공작은 눈을 가렸는데도 마치 보이는 것처럼, 펠리오와 레오니에, 바리아를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바리아 양.”
“네…….”
바리아가 홀린 것처럼 답했다.
아우스트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어느새 바리아의 몸은 아우스트 공작의 다리 아래 공손히 앉아 있었다. 스스로 제 자세를 깨닫지도 못한 듯했다.
‘최면 같아…….’
레오니에도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남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바리아가 공손히 인사했다.
“내 땅의 사람을 만나는 건 아주 기쁜 일이지요.”
아우스트 공작이 반대편 손을 슬그머니 들자, 그녀를 부축하던 하녀들이 자리를 비켰다. 아우스트 공작이 살짝 비틀거리는 걸, 바리아와 펠리오가 동시에 부축했다.
“……이 능력은 까다롭지요.”
아우스트 공작이 말했다. 꼭 철딱서니 없는 아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언제 발동되는지도 모르고, 내가 보고 싶은 걸 보는 것도 아니랍니다.”
아우스트 공작 가문의 능력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였다.
“다른 지역의 힘들과 확연히 다르지요. 그네들은 직접적인 가해를 입히는 힘을 지니었지만, 우리 남부는 아니랍니다.”
“하지만 아주 대단한 것이에요.”
레오니에가 말했다.
“전 오히려 남부의 힘이 엄청 무섭다고 생각해요.”
“어째서인가요?”
“누구도 모르는 걸 안다는 건, 아주 대단하지만 무섭고 두려운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로잡힐 가능성도 컸다. 레오니에도 어렸을 땐 그런 위험에 여러 번 빠질 뻔했다. 원작의 내용을 안다고, 자신이 이 세상의 미래를 다 아는 것처럼 군 적이 있었다.
물론 펠리오 덕에 자신이 아는 것이 찰나의 순간인 것을 깨달았다.
“그 힘으로 남부를 여기까지 이끈 아우스트 가문에 경의를 표합니다.”
레오니에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런 레오니에의 진심을, 아우스트 공작이 기쁘게 받아들였다.
“바리아 양.”
그리고 자신이 본 예지를 들려줬다.
“험난한 삶을 살았군요.”
그 말에 바리아는 자신의 첫 번째 죽음을 떠올렸다.
“잘 돌아왔어요. 그리고 잘 가고 있어요.”
아우스트 공작의 한마디, 한마디가 바리아의 힘들었던 과거를 위로했다. 바리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숨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이 늙은이가 참견하자면, 당기는 것도 아주 중요하답니다.”
“당긴다는 건…….”
“손에 잡히는 것을 당겨요.”
나중에 다 알 거란다.
마지막 말투는 꼭 순진무구한 손녀를 다독이는 것처럼 상냥했다. 그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아우스트 공작이 바리아에게서 손을 천천히 빼냈다.
“그리고 우리 꼬마 맹수.”
“에헤, 꼬마 맹수!”
레오니에가 대놓고 놀렸다. 펠리오는 나가는 길에 레오니에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정말 많이 변했네요.”
공작의 목소리는 감개가 무량했다.
“세월이 세월이니까요.”
“그 세월이 꼬마 맹수를 사람으로 만들었군요.”
“…….”
펠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우스트 공작의 주름진 손이 펠리오의 검은 머리 위에 얹어졌다.
“그대도 잘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다만 홀로 짊어지려 하지 말고.”
하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레오니에는 아우스트 공작이 마치 눈을 움직여 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믿고 가도 괜찮단다.”
“…….”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맹수이니.”
“그래도 아직 어립니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펠리오와 아우스트 공작이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가 자신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가 오면, 알 겁니다.”
아우스트 공작이 펠리오에게서 손을 떼며 말했다. 그러곤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그럼 이제 나는 이 어린 아가씨와 단둘이 이야기를 해야겠군.”
아우스트 공작의 말은, 펠리오와 바리아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란 뜻이었다. 세 사람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 무언가 뜻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그러겠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괜찮을 거니 걱정 마세요.”
펠리오와 바리아가 각각 레오니에를 품에 안고 말했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가고, 커다란 산호 문이 다시 닫혔다.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아우스트 공작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조그맣지만 굳은살이 박인 손을,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천천히 감쌌다.
“고생이 많았어요.”
아우스트 공작이 먼저 말했다.
“하나 보아하니 적응을 잘한 것 같군요.”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세요?”
내가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걸? 레오니에는 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스트 공작은 숨겨진 말뜻을 이해한 것처럼 껄껄 웃었다.
“그럼 몰랐을까.”
부드러웠던 목소리에 짓궂은 성격이 뒤섞였는데, 그게 살루스를 연상케 했다. 그 덕에 레오니에는 생각 이상으로 크게 놀라지 않았다. 물론 놀라기야 했지만, 재빨리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도 했다.
‘나만 남으라 했으니까.’
레오니에는 원작 덕분에 아우스트 가문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아우스트 공작은 레오니에의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 펠리오와 바리아를 내보낸 것이었다. 레오니에는 그 친절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아우스트 공작의 눈을 가린 붕대가 스르륵 풀려 아래로 떨어졌다. 밤하늘의 달보다 총명하게 빛나는 옥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내가 본 예지는 전부 그대의 것입니다.”
“저에 대한 예지요?”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되물었다. 아우스트 공작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이고.”
“두 번이나 보았나요?”
“그댄 제법 중요한 사람이니까.”
“어어…….”
그 말엔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 보아도, 딱히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해내진 않았다.
중요한 사람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펠리오의 딸이었다. 레오니에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보레오티 영애.”
아우스트 공작이 레오니에를 불렀다.
“그대는 새로운 움직임입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괜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우스트 공작의 말은, 마치 자신이 원작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돌려 말하는 것 같았다.
다만 책망의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칭찬처럼 들렸다.
“아주 잘 지내야 합니다.”
“이미 잘 지내는데요?”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레오니에를 보며, 아우스트 공작이 미소지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공작님이 보셨다는 저에 대한 미래인가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이미 마음껏 살고 있어요.”
보레오티의 미친 딸이 바로 저라는 걸, 레오니에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막살면 우리 아빠 진짜 기절할 거 같은데…….”
그래도 펠리오가 그간 노력했던 가정 교육이 헛되진 않았는지, 레오니에가 드문 효심을 발휘했다. 저도 제가 막산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영애는 거기서 더 막살아도 돼요.”
“아우스트 공작님은 보레오티를 멸망케 하려는 건가요?”
이쯤 되니 예지가 아니라 저주 같았다.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지.”
영애 덕분에.
아우스트 공작이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레오니에가 보기엔, 저 우아하고 입담 좋은 노부인은 여전히 눈을 뜬 채 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바뀔 겁니다.”
“……무엇이요?”
“그대가 아는 미래가.”
이제 레오니에의 귀에 닿은 아우스트 공작의 목소리는 시시각각 변했다. 인자한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호탕한 장군의 큼지막한 목소리로.
“바뀌게 될 미래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바이니.”
기묘한 힘을 지닌 미확인 생물의 울음 같기도 했고, 숨소리처럼 조용하기도 했다.
“그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레오니에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북쪽 산맥 너머.”
아우스트 공작이 말했다.
“그곳에 계시는 그들이.”
소녀의 목이 꿀렁거렸다. 마른침을 삼킨 얇은 목에선 긴장의 떨림이 드러났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아우스트 공작이 미래를 말했다.
“아비의 작위를 빼앗으세요.”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미래란 말을 끝으로, 아우스트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아우스트 공작이 말을 멈춘 동시에 청옥색 문이 열렸다.
“다 끝났지요?”
마치 문 뒤에서 다 훔쳐 듣기라도 한 듯, 때맞춰 나타난 살루스는 레오니에와 아우스트 공작이 있는 곳으로 척척 걸어왔다.
“할머니?”
살루스가 조용히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능력의 부작용이에요.”
레오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살루스는 마치 네가 궁금해할 것 같단 듯이 혼자서 이것저것 말해 줬다.
“모든 능력엔 부작용이 있죠. 보레오티가 지닌 맹수의 송곳니도 마찬가지지요?”
“……두통과 오한.”
그 말에, 레오니에가 어릴 적 배운, 맹수의 송곳니가 가진 부작용을 읊었다.
“발진 및 두드러기. 근육통을 동반한 몸살 등.”
“우리 남부에도 있어요.”
남부의 능력인 예지는 힘을 쓴 후에 안구통을 느끼고 졸음이 몰려왔다. 아우스트 공작이 눈에 두른 붕대엔 안구통을 감소시키는 약물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꼭 약 부작용 같지 않아요?”
살루스가 키득거렸다.
“그것도, 본 거예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이거 무슨 약이야?’
처음 맹수의 송곳니 훈련을 받았을 때, 펠리오가 읊어 주던 부작용을 듣던 레오니에가 퍽 실망한 목소리로 저 말을 했었다.
살루스는 대답 대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죄지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예지는 다른 능력들과 다르게 내 의도대로 제어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딱히 봐서 싫지는 않아요.”
“보통은 싫지 않을까나…….”
과거에 남부 아우스트는 이 예지로 남부를 부흥시키고 지켜 왔다. 하지만 그 힘을 탐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맹수의 송곳니, 마나, 오러는 타인에게 물리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 가능한 힘이었다. 그러나 예지는 불가능했다. 그 탓에 여러모로 힘든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싫지 않아.”
레오니에는 미래를 안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고달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신 아빠한테 징징거린 모습을 보여서 조금 부끄럽네요.”
그 말에 살루스가 다시 미소 지었다. 아까보다 걱정을 덜어낸 미소였다.
살루스는 아우스트 공작을 침대에 눕혔다. 곧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 다섯 명이 다시 우르르 들어와 잠든 공작의 시중을 들었다.
레오니에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빠, 언니.”
현관 홀에서 레오니에를 기다리던 펠리오와 바리아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레오, 너 얼굴이 왜 이래?”
“아가씨, 괜찮으세요?”
둘은 아이를 보자마자 손을 뻗어 여기저기 살피고 걱정했다.
“무슨 일 있었어?”
펠리오가 물었다.
“어…….”
그제야 레오니에는 아우스트 공작이 제게 말한 미래를 떠올렸다.
‘아비의 작위를 빼앗으세요.’
충격적이다 못해 현실성이 너무 없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되묻는 걸 깜박해 버렸다.
“그냥 좀…….”
하지만 그걸 펠리오한테 말하기가 좀 그랬다.
‘아빠의 작위를 빼앗으라니.’
아우스트 공작은 분명 소녀에게 아버지의 작위를 빼앗으라고 말했다. 그녀가 보았단 미래, 그리고 거기서부터 나온 조언은 레오니에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처럼 멋진 공작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정당하게 작위를 물려받고 싶었던 거지, 개념도 없는 붉은 백조처럼 배은망덕한 짓으로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생각은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레오니에는 제 목숨을 걸고 확신했다.
“있잖아…….”
다시 마음을 다잡은 레오니에가 자신이 들은 것을 말하려던 찰나였다.
“마차가 준비되었답니다.”
어느새 나타난 살루스가 배웅하겠다며 싱긋 웃었다. 가뜩이나 아우스트 공작의 예언으로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여전히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살루스의 웃음에 더욱 복잡해졌다.
“늦은 밤, 저희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축객령이라기엔 아주 공손한 인사였다.
세 사람 역시 이를 축객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저택 밖은 자신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이젠 달마저 구름에 가려져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말 돌아갈 때였다.
“달빛이 사라진 게 전부인데…….”
바리아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는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아우스트 저택에 들어가기 직전엔 레오니에와 함께 저 아래를 구경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그랬다간 분명 구경만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저길 보십시오.”
펠리오가 가리키는 곳을, 바리아는 아우스트 저택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존하여 바라봤다.
다행히 마차가 달리는 모든 길목에 등불이 일정 거리마다 달려 있었다. 그러나 등불도 낮게 설치되어 있어, 딱 말들이 달릴 길목만 비출 뿐이었다.
“모든 게 다 감춰져 있네.”
레오니에가 말했다.
저 길을 비추는 등불들이 꼭 아우스트 가문 같았다. 아우스트 가문은 원작 소설에서도 제대로 드러나는 게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만난 저들은 보레오티보다 비밀이 더 많고 신비로운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분명, 저 낮은 등불처럼 남부를 지켜 왔다. 지금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빠.”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불렀다. 바리아를 마차에 태우고 레오니에를 부르려던 펠리오가 왜 불렀느냔 듯이 바라봤다.
“있잖아, 아까…….”
아우스트 공작에게 들었던 것을 말하려던 찰나.
“보레오티 공작 영애.”
중간에 끼어든 살루스가 잠시 실례한다며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덕분에 레오니에의 눈앞에서 펠리오가 사라졌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까도 이러더니 또.
‘오냐오냐 봐주니 진짜 기어오르네.’
같은 차기 공작들이라지만, 아무래도 기선 제압이 필요한가 싶었던 레오니에가 짜증을 감추지도 않고 한마디 하려 했다.
하지만, 뒷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살루스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생각이 맞는다고 긍정하는 듯이.
“……진짜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그제야 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긴 안 하는 게 좋아.”
“어째서?”
“왜냐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게 아니거든.”
“아빠의 작위를 빼앗는 게?”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소녀에게 아버지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족이었고, 가슴 깊이 존경하는 목표였다.
때문에 아우스트 공작의 예지는 레오니에의 심기를 아까부터 계속 건드렸다.
“난 빼앗지 않을 거야.”
“아우스트의 예지는 틀린 적이 없어.”
“그럼 내가 첫 예외가 되겠지.”
그리 말하며 레오니에가 지은 표정은, 펠리오가 하찮은 것들을 애써 상대할 때마다 드러낸 오만하고 자신감 충만한 미소였다.
“내가 아까 준 거 있지?”
그러나 살루스는 겁 먹은 티도 없이 제 할 말만 했다. 레오니에는 남부 사람도 참 별종이구나, 싶었다.
“사탕이 든 동그란 함.”
“그게 왜?”
“나중에 잘 살펴봐.”
언젠가 네게 도움이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살루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조심히 가.”
그리고 한 가지를 부탁했다.
“나중에 만나거든, 난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 줘.”
마차에 오르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누구한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미 살루스는 그대로 뒤돌아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곁을 따르던 메리디오 기사가 마지막으로 보레오티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
기가 막힌 레오니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머릿속에 어떤 극작가가 쓴 희곡 한 편이 떠올랐다. 여름밤의 꿈 같은 밤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왜 아우스트 공작을 만나러 가자고 한 걸까?’
아우스트 공작저에서 돌아온 뒤, 레오니에는 남부 별장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에나 되어서야 그 궁금증을 떠올렸다. 그리곤 냅다 펠리오를 찾았다.
“아빠.”
차양이 펼쳐진 정원 발코니에서 느긋하게 눈 감고 쉬고 있던 펠리오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듣고 있으니 말하란 뜻이었다.
레오니에는 냅다 그 옆에 앉았다.
“여기 남부엔 왜 온 거야?”
그리곤 물었다. 펠리오의 두 눈이 감긴 채 찌푸려졌다.
“……갑자기?”
아우스트 가문에 다녀온 지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참 일찍이도 묻는다.”
“빈정거리지 말고!”
“그럼 안 빈정거려?”
“확 얼굴에 낙서한다?”
레오니에가 그 잘생긴 얼굴에 지울 수 있는 흔적을 남기겠다며 어마어마한 협박을 읊조렸다. 그제야 펠리오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질문이 틀렸어.”
분명 펠리오는 아우스트 가문에 볼일이 있어서 남부에 들렀다. 하지만 그건 저쪽에서 먼저 불렀기 때문이었다.
즉, 진짜 볼일이 있었던 건 보레오티가 아닌 아우스트였다.
펠리오는 자신들에게 전해 줄 말이 있단 연락에 일부러 여정을 바꾼 것이었다.
“진짜? 그럼 우리한테 예지를…….”
“쉿.”
펠리오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말을 조심하잔 뜻이었다.
“쉬잇!”
레오니에도 따라 했다. 펠리오는 그 모습에서 어린 레오니에가 겹쳐 보였다. 매일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다녔던 꼬마 변태는 종종 제 행동을 따라 하며 장난을 치곤 했다.
“……레오 너, 많이 컸다.”
어느새 펠리오는 완전히 상체를 일으킨 채였다. 그는 두 다리에 팔을 올린 채, 몸을 살짝 숙여 레오니에와 눈을 마주했다.
“갑자기?”
느닷없는 소리에 레오니에가 피식 웃었다.
“내가 많이 큰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너도 그렇게 늙어 가는구나.”
“아, 진짜, 짜증…….”
신경질 난 아기 맹수가 눈을 도끼처럼 치켜떴다. 하여튼 감동할 기회를 주질 않았다.
레오니에는 자신의 감성이 메마른 건 다 펠리오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탓을 궁시렁거렸다.
“그런데 넌?”
“나?”
“레오 넌 아우스트 공작과 단둘이 있었잖아.”
“아…….”
레오니에가 머뭇거리며 뒷목을 손으로 쓸었다.
“그냥 별거가 아닌 건 아닌데.”
으음,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아빠가 나 있던 고아원에 들른 거, 그분이 가르쳐 줘서 그랬던 거야?”
레오니에는 아우스트 공작이 제게 했던 기묘한 예언은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당장 말하기 껄끄러운 것이기도 했고, 살루스가 말한 조언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안 빼앗을 거니까 괜찮아.’
레오니에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은 정당한 후계 계승으로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다.
그것이 저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고, 펠리오의 검은 머리가 회색으로 희뿌옇게 물들어갈 만큼 오랜 세월이 걸린대도.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따위가 징글징글한 자신들 부녀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맞아.”
펠리오가 대답했다.
“언젠가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좀처럼 말할 기회가 없어서 계속 미뤘다고 이어 말했다.
“그냥 서부로 가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한 게 다지만.”
어차피 북부로 가려면 늘 서부로 가야 했기에, 펠리오는 잠시 그걸 까먹고 있었다.
“아빠는 뭐 그런 쓸데없는 걸 신경 써.”
레오니에는 웃음이 나왔다.
“네 일이잖아.”
정작 펠리오는 진지했다. 그는 제 딸과 관련된 일을 함부로 여긴 적이 없었다. 레오니에가 아무리 어렸다고 해도 늘 아이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고 들어주었다.
“으음, 멋쟁이 아빠!”
기분이 좋아진 레오니에가 헤벌쭉 웃었다.
“그런데, 너는?”
“응, 나?”
“그게 다야?”
펠리오는 그날 레오니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뭘 듣긴 들었어.”
레오니에가 말했다.
“하지만 살루스 언니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래. 나, 그때 아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하지 말라고 말렸어.”
상황을 설명하는 아이의 말투는 꼭 고자질 같았다. 저는 아빠를 속일 생각이 없고, 그 예지대로 할 생각도 없지만, 아니꼬운 기분이 별로인지라 투덜투덜 말했다.
이를 잠자코 듣던 펠리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하지 마.”
그는 살루스의 뜻에 동의했다. 그리곤 레오니에가 알지 못한 남부의 능력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줬다.
“저들의 힘은 일종의 조언이야.”
“조언?”
“그래. 가끔 부질없는 것도 보는 모양이지만, 지금껏 아우스트가 보아온 중요한 미래는 전부 최선의 결과를 향한 방향표였어.”
그리고 이 힘으로 다른 지역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는 남부 아우스트가 수도에 모습 한 번 비추지 않고 지냄에도, 각 지역의 수장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하지 않고 도리어 보호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조언…….”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연 자신이 아빠의 작위를 뺏으라는 게 조언이라고?
불쾌하게만 느껴졌던 아우스트 공작의 예언이 아주 조금이지만,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저 말에 뭔가 숨겨진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으음, 그럼 좀 더 생각해 볼래.”
레오니에는 저들의 예지보다 펠리오의 말을 더 믿었다.
펠리오는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해하는 딸을 보며 입가를 느슨히 풀었다. 몸만 컸지, 아직 철부지인 건 변함이 없었다. 그 점이 펠리오를 조금 안심케 했다.
두 사람이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가니, 바리아가 하녀들과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리아 언니!”
호기심이 동한 레오니에가 쪼르르 다가가니, 바리아가 빵긋 웃으며 품에 안긴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 보세요.”
“와아!”
레오니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멍멍이다!”
바리아의 품 안에서 까만 강아지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보송보송한 털 속에 까만 눈과 까만 코가 촉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강아지는 앞발 두 개를 척하니 바리아의 팔에 걸어 놓고 편하게 안겨 있었다.
“귀엽지요?”
바리아가 손가락으로 강아지의 턱을 살살 긁어 주었다. 레오니에가 저도 하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뒤에 두고 온 펠리오를 떠올렸다.
“아빠, 이거 봐! 강아지!”
“공작님, 이거 보세요. 귀엽죠?”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애절한 눈으로 펠리오를 보았다.
“…….”
펠리오는 그들의 눈빛에서 일종의 부담을 느꼈다. 두 여자는 ‘너무 귀여워서 키우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누가 데려왔습니까?”
“아빠, 멍뭉이한테 이거라니!”
“아, 그게, 가베르 경이…….”
“파보 오빠가 좋은 일 했네!”
그러나 펠리오는 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강아지를 한참 응시하던 펠리오는 기어코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놓고 오라고 말했다.
“아빠, 왜? 그럼 얘 혼자잖아!”
“공작님, 제가 돈 낼 테니까 키우면 안 될까요?”
돌아온 대답이 너무 비정해서,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한 번 더 졸랐다.
“그거, 개 아닙니다.”
펠리오가 옆에 있던 하녀에게 파보를 다시 데려오라고 명한 뒤에 말했다.
“그거 새끼 곰입니다.”
때마침 강아지가 울음을 터트렸다.
“……개소리 아니네.”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바리아는 새끼 곰을 안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 * *
새끼 곰은 기사들이 도로 숲에 데려다줬다. 그것만이 아니라 어미 곰이 나타나 새끼를 데려가는 것까지 확인했다.
다행히 새끼 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주고 얼마 되지 않아, 어미 곰이 나타났다. 어미는 잃어버린 새끼를 찾기 무섭게 혀로 마구 핥으며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글라디고 기사단은 펠리오에게 아주 크게 혼이 났다.
그게 벌써 이틀 전 이야기였다.
“곰 새끼랑 개 새끼도 구분 못 하고…….”
드디어 남부를 떠나는 날.
펠리오는 여전히 그날의 일로 기가 차는지 이따금 중얼거렸다. 노기가 찬 목소리가 마차 밖으로도 전해지는지, 어느 때보다 보레오티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아빠 걱정은 당연한 거야.’
레오니에는 이번만큼은 기사들을 편들어 주기가 힘들었다. 자칫 새끼 곰을 잃어버린 어미 곰이 흥분해서 사고라도 일어났으면 정말 큰일이었다.
특히 북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그런데 남부에도 곰이 사는구나.”
그것도 바닷가 근처에.
레오니에는 기사들이 새끼 곰을 데려왔다는 사실보다, 이곳 남부에 곰이 산다는 사실이 더욱 신기했다.
별장 바로 앞에 바다가 있었고,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마차 밖으로 바다가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진짜 멍멍이 같았어.”
“그렇죠?”
바리아도 은근슬쩍 편승했다.
“조금 헷갈릴 만해요.”
바리아는 자신이 개와 곰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부끄러워 펠리오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기사들이 혼날 때 저도 같이 혼나는 기분이었다.
“……언니는 그럼 안 되지.”
남부 출신이 그걸 헷갈리면 어쩌냐며 레오니에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레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알고 살아.”
펠리오가 가볍게 나무랐다.
“사람은 다 실수를 저지르지.”
“이 아빠야. 아까랑 다르잖아.”
기사들한텐 동물도 못 알아본다고 그렇게 질질 끌며 욕을 하더니. 상대가 바리아로 바뀌자마자 세상에 둘도 없는 인자한 성인이 되었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저 아량을 조금 전 기사들에게 조금만 베풀었어도 지금 보레오티의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웠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뻔뻔한 펠리오는 아이의 딴죽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저택에 도착하면 제가 북부에 사는 동물들을 친절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약속까지 잡았다.
‘이 아빠는 꼬시는 방법도 모르나.’
레오니에는 고개를 저었다.
‘근육을 과시해야지!’
의도한 바는 아니나, 바리아는 레오니에 때문에 근육에 푹 빠졌다.
얼마나 중증이냐면, 레오니에가 가르쳐 준 근육 운동을 매일 하고, 이를 기록까지 해 둔다. 그리고 레오니에와 함께 차를 마시며 근육에 대하여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공작님 흉근이 저보다 큰 거 같단 말이지요.’
‘공작님 전완근으로 목 조르면 바로 즉사할 것 같지 않아요?’
‘최근엔 둔부가 너무…….’
이토록 펠리오의 근육에 빠져 있는데, 펠리오는 이를 이용하지 않는다.
‘쓸모없는 놈들 처리할 때만 저 좋은 머리를 쓴다니깐.’
황제 나부랭이나 남부 쓰레기들 치울 때는 대충해도 괜찮았다.
그러니 제발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멋진 모습을 더 드러낼 방안을 좀 더 영리하게 떠올리길 바랐다. 눈만 마주쳐도 침대에서 운동한다던 전작의 묘사가 아까울 정도였다.
‘나중에 내가 좀 도와줘야겠어.’
쓸데없이 순수하긴.
레오니에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여튼 나 아니면 큰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레오니에의 입꼬리가 히죽히죽 올라갔다.
“아가씨가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레오는 가끔 저렇게 혼자 실실 웃습니다.”
“귀여우셔라.”
“아직 철딱서니가 없죠.”
그리고 펠리오와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평화로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싱긋 웃었다.
“이제 다 왔군요.”
기분이 좋아진 펠리오가 밖을 보며 말했다. 어느새 바다는 사라졌다.
마차는 순식간에 게이트를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