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귀족회의 (25/51)

#25. 귀족회의

“이 배신자.”

카니스는 인사 대신 비난부터 시작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넌 참 결혼 잘했어.”

펠리오는 질린단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올해 첫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 내 카수스 궁에 모였다. 그리고 펠리오와 카니스는 귀족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말이 대화지, 주로 카니스 혼자 재잘거렸다.

듣다못한 펠리오가 기어코 말했다.

“어떻게 아비페르 님은 너랑 아직도 함께 사는 거냐.”

저였으면 벌써 이혼했을 거라며, 펠리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들을 향해 도로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전 어느 행정관 한 명이 각 자리에 배부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안 우네.”

펠리오가 대놓고 비웃었다. 카니스는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펠리오의 독설과 비아냥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전 펠리오가 내뱉은 말엔 적의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나한테 말 한 번 안 해 준 거야?”

카니스가 진심으로 서운하단 듯이 말했다.

“뭘 또 말해.”

펠리오는 모르는 척했다.

“바리아 에르바누 양.”

“그 사람이 왜.”

“사귀는 거 아니야?”

“내가 내 사생활을 다 말해야 하냐.”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 주지!”

명색이 가장 친한 친구인데, 펠리오가 저렇게 제게도 말해 주지 않고 꽁꽁 숨기는 일이 있을 때면 보통 섭섭한 게 아니었다. 저라면 그나 바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 있었다.

“……그거 연기였어?”

카니스가 물었다.

“조금은 연기였지.”

펠리오가 연회에서 보았던 바리아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조용히 올렸다.

그 모습에 카니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저의 친우를 저렇게 웃게 만드는 이는 레오니에 이후에 처음이었다.

카니스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친구인데!’

저는 자신의 연애며 결혼까지, 전부 펠리오에게 늘 먼저 말해 줬다. 유치한 이유란 건 카니스 본인도 알았다. 그래도, 펠리오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에겐 언질이라도 해 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곧 유치한 질투를 그만두었다. 어쨌건 카니스에게 중요한 건 펠리오의 행복이었다. 친구가 좋다면, 저 역시 좋은 거였다.

“다음에 한 번 소개해 줘.”

어느새 회의실 안으로 귀족들이 속속들이 모여 자리에 앉았다. 카니스도 제 자리로 가기 전에 펠리오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나중에.”

펠리오가 대충 답했다. 거절하는 뜻이 없으니, 저 말은 곧 긍정이란 걸 카니스는 잘 알았다. 그제야 카니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그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메마르게 굳어 버렸다.

“……오늘 피 터지겠군.”

카니스의 혼잣말에, 옆에 앉은 서부 귀족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요.”

그들은 행정관이 배포한 회의 자료를 미심쩍은 눈으로 내려다봤다.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카니스 역시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시종이 수비테오 황제의 도착을 알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니스는 때마침 펠리오가 눈에 들어왔다. 타고난 미모와 우월한 신체 비율 덕에 유난히 잘나 보였다.

‘역시 잘생겼어.’

자랑스러운 내 친구. 카니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들 모였군.”

그러나 이어 들어오는 수비테오 황제를 보자마자 표정을 싹 지워 버렸다.

수비테오 황제가 자리에 앉자, 이어 귀족들도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회의실 문이 닫혔다.

귀족 회의는 제국의 첫 번째 권력이라 불릴 만큼, 황제마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발언권과 정치력을 지니고 있었다.

회의는 발의된 의안이나 법안 중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것을 논의했다.

그리고 이 중대한 일이 이뤄지는 곳을 카수스(철장) 궁이라 불렀다. 이름의 유래는 회의하는 귀족들의 모습이 마치 흉포한 맹수처럼 사납게 물고 뜯는 모습 같았기에 따 왔다는 설이 유력했다.

‘참석 인원은 열일곱.’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펠리오는 자리에 모인 귀족들을 아주 빠르게 훑어봤다.

귀족 회의 의석수는 총 스물다섯이었다. 동서남북에 수도까지 총 다섯 지역에서 네 명의 귀족들이 참석했다. 여기서 황제는 제외였다.

그러나 이 수가 늘 채워져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의석수가 지금처럼 비워져 있는 때가 많았다. 8년 전 선황 서거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항상 홀수를 유지했다. 과반수로 결정되는 회의의 성격 탓이었다.

‘동부 둘, 서부 셋…….’

북부 셋까지 더해 총 여덟.

반면 수도는 넷, 여기에 남부가 다섯이니 총 아홉이었다. 남부 출신 귀족 다섯 명 중에 아우스트와 메리디오는 없었다.

대신 올로르와 에르바누는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과반수 아홉이 남부와 수도 귀족이었다. 그것도 노골적인 황제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제가 저 둘을 명단에 넣은 속셈이 너무 훤했다.

‘파르두스는 있으나 마나.’

펠리오가 수도 귀족 측에 있는 파르두스 후작 영식을 스치듯 보았다. 후작이 나이 핑계로 북부에서 아기 손주와 노는 동안, 그의 아들이 대리 자격으로 참석했다.

원래부터 파르두스는 북부에 영지를 두었음에도 수도 귀족으로 분리되었다. 이중 첩자 노릇을 해야 하니 황제의 입맛대로 움직여 줘야 했다.

“……그러하듯, 교통 정비는 중요한 사안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때, 회의 주제를 발표하는 이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는 발표 전 자신을 오노켄타 남작이라고 소개했다.

“제국은 위대한 황제 폐하의 명안을 따라, 제국 전역의 도로를 국가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 나오는 발언에 동, 서, 북부의 수장들이 동시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를 위해 각 지역에선 도로 지도 및 지적도 등을 제출하시길 바라며…….”

지도의 정확성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여 지역을 살피겠습니다.

말을 마친 오노켄타 남작의 표정은 득의양양했다. 반면 귀족파 수장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질문이 있습니다.”

오노켄타 남작이 제 말만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회의석에 앉아 있던 귀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서부 출신의 카니스 리네 백작이었다.

평소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던 얼굴 위엔 감정이라곤 전혀 드리워지지 않은 서늘함만 깔려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짜증이었다.

“이미 황궁 행정부에는 제국 전역을 그린 지도가 있지 않습니까.”

평소라면 귀족 특유의 돌려 말하기로 고상한 척 말했을 테지만, 귀족 회의에서는 절대 그래선 안 되었다. 이곳은 서로를 잡아먹는 최악의 맹수들만 모인 철장이었다.

“그런데 아까 말한 지도 제출은 무어고, 사람을 파견하여 확인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벨리우스 제국은 군주제임에도 연방제 성격이 강했다. 그렇다 보니 각 지역의 수장들이나 그 출신의 귀족들은 저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매우 예민했다.

바로 지금처럼.

특히 지도를 제출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사람을 파견한다는 건 도저히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제국의 도로는 잘 갖춰져 있지 않습니까.”

동부의 오르티오 후작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니스와 달리 아직까진 평화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완벽하지요.”

말 그대로였다.

벨리우스 제국의 발전은 바로 저 도로망에서 시작되었다. 잘 가꿔진 도로는 상업을 부흥시켰으며, 각 지역과의 통행을 원활하게 했다.

“또 지난 몇 년간 폐하의 선견으로 게이트 관리도 잘 진행되었고요.”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수비테오 황제의 노란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멍청하긴.’

펠리오는 헛웃음도 안 나왔다. 지금 오르티오 후작이 내뱉은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도로를 칭찬한 전자는 칭찬일지 몰라도, 게이트를 언급한 후자는 경고성 짙은 욕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부는 마법사들의 땅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연구와 탐구라는 분야를 사랑했고, 자부심이 강했다. 특히 게이트에 대한 자부심은 구름을 뚫을 것처럼 치솟은 마탑보다 더 높았다. 게이트의 존재를 처음 연구한 것도 동부고, 지대한 성과를 낸 것도 동부였다.

오르티오 후작은 회의 내용도 마음에 안 들뿐더러, 요 몇 년간 게이트에 끊임없이 소유욕을 내미는 황제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이를 아는 또 다른 동부 귀족 역시 내색은 안 해도 돌아가는 상황이 불편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이야기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오르티오 후작이 다른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각 지역의 수장들이 지닌 자치권은 어떻게 된 겁니까?”

건국 당시, 초대 황제는 여러 지역을 포섭하고자 그 땅의 본래 지배자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그와 함께 저들이 지닌 지배권을 어느 정도 용인해 주었는데, 그게 바로 자치권이었다.

만일 지도의 정확성을 파악하고자 사람을 파견한다면, 지역의 자치권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어허.”

올로르 자작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설마 폐하의 심중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설마 그럴 리가요.”

오르티오 후작이 찰나의 순간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그렇기에 더욱 폐하의 뜻을 받들어 실행해야지요.”

올로르 자작이 이어 말했다.

“폐하는 각 지역의 발전을 위해 친히 도로 사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이로써 제국은 더욱 부흥할 것입니다.”

“과연 폐하의 명단이십니다!”

남부 귀족들이 냅다 들러붙어 자작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특히 에르바누 백작이 가장 열심이었다. 그는 거의 목에 핏대가 불거질 정도였다.

오르티오 후작의 미소에 미세한 금이 갔다.

“하나 도로 사업은 일찍이, 각 지역이 자체적으로 해 왔습니다.”

서부의 헤스페리 후작이 끼어들었다. 불만스럽게 이를 노려보던 올로르 자작은 근엄하고 묵직한 헤스페리 후작의 위엄에 냉큼 눈을 돌렸다.

“오히려 이 사업에 들어갈 비용은 각 도적 퇴치에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헤스페리 후작의 말에 동부와 서부, 북부가 동의했다.

“공작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르마리티 백작이 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펠리오가 천천히 눈을 움직였다. 속을 읽기 힘든 검은 눈이 참석한 귀족들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것만으로도 소란스럽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취지는 나쁘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펠리오의 긍정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황제를 비롯한 수도 귀족들과 남부 귀족들도 의외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도로는 손을 떼면 금세 망가집니다. 나라에서 나서서 관리해 준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죠.”

“공작님.”

오르티오 후작이 처음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목소리에 원망이 가득했다.

“우리가 각 지역의 수장이라 불리긴 해도, 일단 제국의 귀족이고 폐하의 신하지요.”

펠리오의 칭찬은 도리어 분위기를 기묘하게 만들었다. 수비테오 황제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의 귀에는 오히려 살벌한 경고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보레오티는 제 뜻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펠리오가 배포된 자료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수도 귀족들과 함께 앉은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물었다. 미소를 곁들인 후작 영식이 손가락으로 제 손등을 가볍게 한 번 톡, 두드렸다.

“조금 전 설명과 자료에 적힌 것만 보면, 당장 실행될 것은 아닌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도 공작님을 비롯한 각 지역의 수장께서 지닌 자치권을 존중하십니다. 이번에 시행될 것은 말 그대로 예비 조사입니다.”

그렇지요, 폐하?

후작 영식의 확인에 수비테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전역의 도로망 구축을 위한 지형 확인을 시작하고, 이를 종합하여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것이다.”

“그럼…….”

펠리오가 물었다.

“이 도로 사업 안에 게이트 정비도 포함되는 겁니까?”

황실이 요 몇 년간 게이트 주변을 노골적으로 살피고 정비했다. 그러나 조금 전 설명과 제시된 자료에는 ‘게이트’가 언급되지 않았다.

“포함된다.”

수비테오 황제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테이블 위, 펠리오의 손가락이 한 번 더 까딱했다.

“그럼 이쯤에서 거수를 해 볼까요.”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말했다.

곧 거수가 진행되었다.

“보레오티 공작님.”

카수스 궁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오르티오 후작이 펠리오를 찾았다. 걸어오는 그녀의 걸음마다 바닥에 널브러진 조그만 돌조각이나 먼지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뒤따르는 동부 귀족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전에 마나부터 억누르세요.”

펠리오가 저를 당장 죽일 것처럼 찔러오는 오르티오 후작의 마나를 귀찮게 여겼다. 그러나 후작은 이를 억누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까 그건 무업니까?”

“무어긴요, 회의지요.”

“그걸 왜 통과시킵니까!”

“난 반대 거수였는데요?”

펠리오가 퍽 억울하단 듯이 말했다. 물론 진심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이번 회의는 아홉 명의 찬성과 여덟 명의 반대로 통과가 되었다.

“동부는 나의 땅이고, 제국보다도 유구한 역사를 지녔습니다.”

“그건 어느 지역이고 마찬가집니다.”

제국의 다섯 지역 중 가장 긴 역사를 지닌 북부의 수장이 검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는 후작의 뒤를 힐끔 보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취지가 좋지 않습니까.”

“취지가 좋아?”

오르티오 후작이 손으로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기막히단 표정을 지었다. 너무 짜증이 나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펠리오는 오르티오 후작이 저렇게 화가 난 모습을 처음 봤다. 물론 저리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갔다.

“늘 중립을 지키시던 동부가 왜 이러시나.”

펠리오가 태연히 물었다.

“그때까진 우리 동부의 자치권을 건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오르티오 후작은 황실 나부랭이들이 동부를 들쑤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제국’이 아니라 ‘동부’에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다. 어느 지역이 제국에 핍박당한 역사가 없겠느냐만, 동부는 그 정도가 심했다. 이국과 접한다는 이유로 특히 차별의 정도가 심했다.

그렇기에 오르티오 후작은 화가 났다. 저딴 치졸한 수법으로 제 땅을 건드리려는 황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거기다 게이트라니!”

귀족 회의에서 황제는 오르티오 후작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수장들에게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넘기라고 말했다.

“내가 거기서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합니다.”

오르티오 후작이 목소리를 낮게 읊조렸다.

“하지 그러셨습니까.”

펠리오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진심으로 도와줄 마음이 충분했다.

“어쨌건 진정하십시오.”

“지금 내가 진정하게……!”

참다못한 오르티오 후작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불쑥, 분홍색 동그라미가 후작의 눈앞에 대뜸 내밀어졌다. 펠리오가 조금 전까지 주머니에 넣어둔 손에 있던 딸기 우유 맛 사탕이었다.

“화해의 뜻으로 드리는 겁니다.”

오르티오 후작이 그런 펠리오를 어이가 없단 듯이 바라봤다.

“그럼 먼저 가지요.”

펠리오는 그대로 가 버렸다. 홀로 남은 오르티오 후작은 손에 들린 사탕을 한참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대뜸 사탕을 던져 발로 으깨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마차를 타고 황궁을 벗어났다.

“……북부와 동부가 틀어졌군요.”

이를 건물 안에서 지켜보던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자신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수비테오 황제와 올로르 자작이었다.

“동부는 말이 중립이지, 늘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비열한 곳이죠.”

올로르 자작이 기다렸단 듯이 동부를 비난했다.

“지역 차별은 조심하죠.”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느긋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러나 자작을 바라보는 두 눈은 차갑다 못해 서늘했다.

“제 어머님이 동부 출신이랍니다. 누님도 동부로 시집을 가셨고요.”

그 말에 올로르 자작이 비난을 멈추었다. 솔직히 그는 후작 영식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올로르 자작은 파르두스의 세대교체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고 했다.

그러나 파르두스 영식은 예상과 달리 냉정하고 엄격했다. 빈틈 한 점 주지 않는 그는 오로지 황제의 말만 듣고 움직이는 진정한 충신이었다.

“파르두스가 늘 고생이 많군.”

수비테오 황제 역시 파르두스를 신뢰했다. 그 모습에 올로르 자작은 일말의 조급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여유를 되찾았다.

1황자가 황태자가 되면 파르두스도 곧 저의 밑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럼 이대로 진행토록 하지.”

음험한 생각을 하던 올로르 자작이 수비테오 황제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일 내에 각 지역에 파견할 행정관들을 뽑도록.”

* * *

그 시각.

레오니에와 바리아는 과외 중이었다. 비록 펠리오와 바리아가 서로를 향한 호감을 인정했다고 해도 아직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과외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바리아는 자신의 직무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펠리오는 그런 바리아에게 훌륭하다며 더욱 진득하고 감정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수락해 줬다.

레오니에도 좋았다.

“……이게 다 뭐예요?”

하지만 오늘은 좋지 않았다.

아이는 제 눈앞에 쌓인 책더미들을 턱으로만 힐끔 가리켰다.

“저의 추천 도서입니다.”

바리아가 그중 한 권을 레오니에에게 내밀었다.

“……‘올바른 정신’?”

건전하지 못한 열두 살은 교양 도서를 테이블 저 너머로 밀어냈다.

“내 취향 아니야.”

레오니에는 교양 도서를 싫어했다. 예절 수업 때 보스그루니 백작이 숙제로 내준 것들도 억지로 꾸역꾸역 읽을 정도였다.

아이는 그때부터 이미 저가 요조숙녀 따윈 체질이 아니란 사실을 깨우쳤다. 애당초 관심도 없었지만. 그러나 귀족이기 때문에 갖춰야 할 어느 정도의 수준이 필요했다.

더욱이 귀족의 정점인 보레오티의 차기 공작으로서 하찮게 보여선 아니 되었기에 참고 읽었다.

“나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지금은 수업 중이지요?”

“안 좋아합니다, 선생님…….”

레오니에가 입술을 내밀어 숫자 3자 모양을 만들었다. 진짜 싫단 뜻이었다.

그러나 바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아가씨의 교육을 책임질 필요가 있어요.”

“울 아빠랑 사귀고 결혼하면 책임질 필요가 없어.”

“그럼 더욱 책임을 져야지요.”

결혼은 너무 앞서 나간 이야기지만, 만일 바리아가 정말로 펠리오와 결혼해 공작 부인이 된다면, 그녀는 레오니에의 새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아아…….”

레오니에가 자신의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깨우쳤다.

‘가정 교사보다 엄마가 더 중요한 위치였지!’

아오. 레오니에가 쾅쾅, 머리를 테이블에 박았다.

“그러니 아시겠지요?”

바리아가 테이블로 내려가려는 레오니에의 이마를 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앞으로 저와 하루에 30분만 이 책들을 읽으며 건전한 마음을 다져 보아요.”

바리아가 높이 쌓인 책더미를 통통 두드리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눈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는 맹수처럼 보였다. 간만에 전신에 소름이 쫙 퍼졌다.

바리아는 곧 왜 자신이 이런 공부를 계획했는지 친절히 설명해 줬다.

“아가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지금껏 바리아가 본 레오니에는 정말 우수한 수재였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검술 실력도 남달랐다. 요리도 곧잘 하는지 종종 쿠키를 구워 저택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씩씩하고, 재미있고, 착하기까지. 바리아는 이미 레오니에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걱정되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예쁜 말을 쓰셔야지요.”

레오니에의 거침없는 말투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레오니에가 이따금 내뱉는 변태성 짙은 농담이 걱정이었다.

열두 살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표현이 나올 때면 바리아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물론 지금은 좀 익숙해졌지만, 이는 익숙해지면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고민했고, 펠리오에게 허락을 받아 오늘을 준비했다.

“이 언니 귀엽네.”

그러나 바리아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누구도 날 길들일 수 없어.”

레오니에가 턱을 높이 치켜든 채 ‘뭐 어쩌라고’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짧게 으쓱한 어깨에 달린 견장 장식이 살짝 흔들렸다.

“난 뒤 따윈 보지 않아.”

내가 저지른 변태짓을 후회할 생각이 없단 뜻이었다.

“아가씨야말로 귀여우시네요.”

그러나 바리아는 오히려 잘되었단 듯이 열정을 드러냈다. 눈앞에 있는 이 귀여운 난관을 도리어 반기는 듯했다.

“저는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레오니에가 가소롭단 듯이 혀를 차며 피식 웃었다.

“우리 아빠도 일찌감치 날 포기했는데, 언니가 나를?”

펠리오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레오니에의 동심을 되살리는 것보다 역성혁명이 훨씬 더 쉽겠다고.

“저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타오른답니다.”

이전 생에서 죽음을 겪고 다시 살아 돌아온 바리아에게 열두 살 변태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반면 소녀는 호기로운 바리아의 다짐을 아주 우습게 받아들였다.

“언니는 내 손바닥 안이지. 나 때문에 근육의 세계에 눈까지 떴잖아.”

“그것과 이건 다릅니다.”

“아닌데? 똑같은데?”

“엄연히 따지자면 저는 공작님의 근육에 눈을 떴으니까요.”

바리아가 당당히 말했다.

“저는 특정 인물에게만 빠진 거지, 아가씨처럼 모든 근육을 희롱하진 않습니다.”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냐?”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조금 불쌍해졌다. 보아하니 펠리오는 바리아한테도 근육 희롱을 당할 처지였다.

정작 바리아는 그런 저의 미래를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가씨, 바리아 님.”

그때, 트라가 들어와 펠리오가 막 저택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아빠!”

레오니에가 냅다 현관 홀까지 내려갔다. 때맞춰 돌아온 펠리오 덕에 섬뜩한 교양 수업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솔직히 조금 전 바리아의 각오에 두려움을 느끼긴 했다. 도착한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우웅, 뽀뽀오.”

“갑자기 왜 이래?”

입술을 쭈욱 내미는 레오니에를 괴이한 걸 보듯 보면서도, 펠리오는 기꺼이 볼을 내밀었다. 볼 뽀뽀를 마친 부녀는 곧 계단을 내려오는 바리아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오, 오셨어요?”

다가온 바리아가 머뭇머뭇 물었다.

“다녀왔습니다.”

펠리오가 바닥에 레오니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냉큼 겉옷을 벗어 트라에게 건네었다. 트라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줬다.

“뭐하고 지내셨습니까?”

거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펠리오가 저 없는 동안 저택에 남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아가씨와 수업을 하려고 했어요.”

“언니가 교양 수업을 하겠대.”

“반드시 성공해 보겠습니다.”

“이 언니가 실패한다는 데 보레오티 전 재산을 건다, 내가.”

“아직은 네 재산이 아니야.”

그리고 시도 정도는 좀 해 보라고 펠리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머리가 마음에 들던 레오니에는 휙휙 고개를 움직여 쓰다듬으려는 손을 피했다.

“그것보다 회의!”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통과 안 되었지요?”

바리아도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귀족 회의 주제는 황실의 도로망 구축 사업이었다. 바리아는 회귀하기 전에 에르바누 백작과 올로르 측이 이를 통과시키려고 애를 쓰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때 그것이 통과했는지는 잘 모른다. 이를 보기도 전에 레무스 올로르의 손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절대 통과되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통과된다면, 황실은 노골적으로 북부 산맥을 노릴 게 뻔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하나 바리아의 예상은 빗나갔다.

“통과했습니다.”

바리아의 초록 눈동자에 암울한 절망이 드리웠다.

“그렇지!”

반면 레오니에는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마치 자신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어 아주 기쁜 것처럼 보였다.

바리아는 조금 울컥한 마음으로 말했다.

“이제 황실은 북부에 사람을 파견할 거예요. 그들은 회의 전부터 이 모든 걸 일찌감치 준비해 뒀어요. 파견된 사람들은 북부를 마구 들쑤실 거에요!”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됩니다.”

“으으, 그렇지만……!”

펠리오가 바리아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깜짝 놀란 바리아가 내뱉으려던 화를 꿀꺽 삼켰다. 냉큼 두 손으로 코를 가렸지만, 저를 다정히 바라보는 펠리오의 검은 눈은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어우, 아빠……!”

레오니에가 질린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여기에 나 있다고, 진짜!”

제발 연애는 저 없는 곳에서 둘이서만 하라고 레오니에가 신신당부했다.

“부모님들 애정 행각을 바로 앞에서 보는 건 의외로 달갑지가 않아.”

“부, 부모님들……!”

기어코 바리아의 입에서 혼란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조금 전 레오니에가 말한 ‘부모님’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우면서도 아주 조금 기뻤다.

한편으론 아이에게 못 볼 꼴을 보여 준 것 같아 미안했다.

“……너, 이런 거 안 좋아하냐.”

반면 펠리오는 그런 레오니에의 반응에 아주 의외란 듯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그가 아는 저의 딸은 남의 연애를 구경하고 못된 상상을 하는 걸 좋아했다.

“좋아는 해.”

레오니에가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애정 행각은 아닌가 봐. 나도 얼마 전에 깨달았어.”

펠리오와 바리아의 연애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어 좋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무색할 만큼, 실제로 보는 부모님들의 연애는 레오니에의 심기만 불편하게 했다.

“불쌍한 것.”

내뱉은 말과 반대로 펠리오의 얼굴엔 선명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앞으로 매일 보게 될 건데.”

“짜증 나, 진짜……!”

레오니에가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어, 어쨌건 결국 통과되었다는 거죠?”

부녀의 다툼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바리아가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이 이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이 물거품처럼 퐁퐁 터지며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인원수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귀족 회의에 참석한 인원 중 과반수가 남부와 수도 귀족이며, 이들은 모두 황제파 귀족들이었다.

“올로르와 에르바누를 최근 명단에 올린 이유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비테오 황제가 중립을 깨트렸단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랬을 이유는 뻔했다. 북부 산맥에 있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겠단 지독한 염원 때문이었다.

“하긴, 그게 아니면 올릴 이유가 없지.”

레오니에 역시 동의했다.

“혹시 올로르도 ‘그걸’ 노릴까?”

잠깐 생각에 빠졌던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물었다.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다르지.”

펠리오는 신중히 말했다.

“미친 새끼들, 하여튼 다 새대가리라 생각하는 머리가…….”

“새들 욕하지 마라. 진짜 새들은 다 무슨 죄냐.”

“그건 또 그래.”

“저기…….”

또 이야기 주제를 벗어나 욕하기 바쁘던 맹수 부녀가 고개를 휙 돌렸다.

“북부 산맥에 무어가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바리아가 지금껏 궁금했던 것을 조심히 물었다. 아무리 보아도 황실이 노리는 건 북부 산맥에 매장된 보석 등이 아닌 것 같았다.

황실과 올로르가 아르데아의 연구를 탐낸 것도, 그것을 얻기 위해 연구실을 습격했던 것도 이상했다. 거기다 황실은 게이트에도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다.

그러나 저들이 북부 산맥을 노리는 건 확실했다. 바리아는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석연찮았다.

“…….”

“…….”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부녀는 분명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북부엔 전설 하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설, 이요?”

바리아가 눈만 멀뚱히 끔뻑였다. 생뚱맞은 단어의 등장에 적잖이 놀랐다.

“구전되는 민담 같은 겁니다.”

펠리오가 그렇지 않으냐며 레오니에에게 눈짓했다. 시선을 받은 아이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정말 별것 아닌 것처럼 굴었다.

“산맥 뒤에 ‘신’이 산다는 이야기야.”

레오니에가 간단히 알려 줬다.

“시, 신이요?”

이야기를 듣는 바리아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황실이 저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고 저러는 거라면, 제국의 미래는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깟 소문에 미쳐 혈세를 낭비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라니.

바리아는 진심으로 벨리우스 제국이 연방제 성격을 지니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각 지역의 수장들이 멀쩡하니 이 나라가 돌아가는 거였다.

“……진짜 있나요?”

하나 바리아는 말도 안 될 거란 생각을 고쳤다.

‘나도 과거로 돌아왔잖아.’

바리아 스스로가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오는 기적을 체험했다. 이보다 더 이상한 일이 없다고 섣불리 단정할 순 없었다.

“보통 사람 눈엔 안 보입니다.”

그런 바리아를 물끄러미 보던 펠리오가 손을 내밀었다.

“애초에 보통 사람은 북부 산맥에 오르는 것도 못합니다.”

큼지막한 손이 바리아의 풀어 내린 머리칼을 빗처럼 어루만졌다. 구불거리는 탁한 분홍색 머리칼이 뼈마디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기다란 손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펠리오의 손짓에 시선이 팔린 바리아가 한 박자 늦게 저 말의 뜻을 이해했다.

황제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실패할 거야.’

그들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결국 실패였다. 말 그대로 비참한 결말이었다.

순간 바리아는 허무해졌다. 만약 펠리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지난 생에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저들을 막을 필요가 없었다.

“진짜 언니 덕이야.”

그때,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보며 씩 웃었다.

“언니가 아니었으면, 아빠나 나나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그렇진 않아요.”

부정하는 바리아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펠리오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사냥을 계획했고, 황제고 올로르고 보레오티의 체스판 위였다. 제국의 모든 것이 펠리오의 체스 말이었다.

‘나도 체스 말 중 하나야.’

바리아는 새삼 그의 선견에 감탄했다. 하나 뒷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바리아의 생각을 부정했다.

“어떤 의미론 바리아 양 덕분이었지요.”

“제, 제 덕이요?”

“아르데아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펠리오가 이 모든 걸 눈치채고 준비했던 건, 바로 레오니에의 가정 교사를 맡기 위해 북부로 다시 돌아온 아르데아 덕분이었다.

“그때부터 황실이 북부를 노린다는 걸 의심했지요.”

북부 출신 학자가 당한 습격, 그리고 속속들이 드러나는 이상한 정황들.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황실의 숨겨진 음모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리아였다.

“난 바리아, 그대를 5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샌가 펠리오는 바리아의 이름에서 호칭을 빼내었다.

“만약 바리아 그대가 아르데아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이쪽도 꽤 당황했을 겁니다.”

“아빠는 진짜 짜증 났을지도 모르지.”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놀렸다. 펠리오는 그런 얄미운 딸을 힐끔 보다가 이내 수긍하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나도 사람이니까.”

남들이 공포로 벌벌 떠는 보레오티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펠리오라고 모든 걸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예상 밖의 일이 닥쳤고, 그저 이를 굳은 표정으로 태연한 척 해결해 나갈 뿐이었다.

바리아는 문득 연회에서 펠리오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대가 날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아아, 바리아는 그때 펠리오가 했던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펠리오는 진심으로 바리아가 이 모든 해결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바리아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너무 기뻐서 감탄마저 못 지를 정도였다.

“……그래서.”

또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어른들 사이에 끼인 레오니에가 일부러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황실은 이제 북부에 발을 디딜 핑곗거리를 손에 얻었다.

“뭘 어쩌긴.”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반사적으로 레오니에가 메롱, 하고 혀를 길게 내밀었다.

“손님맞이를 해야지.”

* * *

“그럼 북부로 가요?”

우피클라가 서운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서 또 쉬어야 겨울에 마물 사냥을 하지.”

레오니에가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말라며 쿠키 하나를 집어 우피클라의 입에 넣어 줬다. 우피클라는 삐친 것처럼 입술을 씰룩이면서도 넙죽 받아먹었다.

“레오 누나, 나도 아앙.”

그걸 부러운 시선으로 보던 피누가 저도 달라고 입을 쩍 벌렸다. 레오니에가 깔깔 웃으며 하나를 피누의 입에 넣어 줬다. 리네 가문 막내 도련님의 눈 밑으로 토실토실한 볼살이 씰룩거렸다.

펠리오는 손님맞이를 위해 북부로 간다고 말했고, 다음날부터 진짜로 북부로 출발할 준비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레오니에는 떠나기 전에 우피클라와 피누, 플로무스를 초대했다.

“저도 곧 갈 것 같아요.”

플로무스가 얼음이 담긴 시원한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물기 젖은 유리잔 안에는 샛노란 레몬 조각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순록들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히잉, 플로 언니도 가?”

“가지 말지.”

리네 강아지 남매가 테이블에 얼굴을 기대며 실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레오니에와 플로무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덩치만 큰 아기들을 어루만졌다.

아이들의 대화는 시답잖은 이야기 투성이었다. 나는 이 간식이 가장 맛있더라. 요즘에 수도에선 이런 놀이가 유행이다.

주로 우피클라와 피누가 떠들었고, 그나마 연장자인 레오니에와 플로무스가 이를 들어주며 맞장구를 쳐줬다.

레오니에는 이런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따금 지루해 딴청을 부리다가 우피클라의 눈총에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언니, 언니.”

우피클라가 소리 죽여 물었다.

“그분 있어요?”

“그분?”

“공작님 애인이요!”

“애인!”

우피클라가 말하고, 피누가 따라 했다.

“저도 부모님께 들었어요!”

플로무스도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들은 것을 말했다.

“공작님이랑 소문의 그분이 서로 다정하고 사랑하는 분위기였다고 했어요.”

“그래도 난 조금 마음이 복잡해…….”

덩달아 들떴던 우피클라가 대뜸 슬픈 기색을 드러냈다. 깜짝 놀란 피누가 ‘누나, 왜 그래?’라며 걱정했다.

“그래도 공작님은 내가 한때 마음을 품었던 분이란 말이야.”

“에이, 누나랑 공작님은 아니지.”

공작님이 뭐 아쉽다고. 걱정하던 피누가 냉정히 말했다. 일곱 살 답지 않은 냉철한 분석이었다.

“……그분은 여기 계셔요?”

플로무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레오니에는 대답 대신에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강아지 남매들을 겨우 떨어트렸다.

“한 번 만나 볼래?”

“정말요? 근데 그분은 괜찮으실까요?”

“괜찮아, 너희 온다고 하니까 엄청 궁금해 했는걸?”

무려 레오니에의 또래 친구들이 놀러 온다는 말에, 바리아는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레오니에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아이들은 바리아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해 떠들었다.

“예쁜 언니겠지?”

“상냥하고 착한 분이면 좋겠어요.”

“그치만 그런 누나는 보레오티랑 별로 안 어울려.”

“그럼 어떤 사람이 어울려?”

“입으로 마물을 이렇게 뜯어야 해!”

피누가 직접 물어뜯는 시늉을 했다. 동생의 재롱에 누나들이 까르륵 웃었다.

“얘들아.”

그때, 레오니에가 누군가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다정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귓가에 부드럽게 울렸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리아라고 해요.”

탁한 분홍색 머리를 길게 왼쪽으로 넘긴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머리를 넘긴 탓에 훤히 드러난 오른쪽 귀엔 기다란 물방울 모양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누나 차일 만했네.”

피누가 중얼거렸다. 우피클라의 파란 눈에 시퍼런 분노가 일렁거렸다.

“싸우면 안 되어요!”

덕분에 바리아는 첫 만남부터 제게 쌈박질을 보여 준 리네 남매를 뜯어말려야 했다.

가까스로 진정된 뒤에야, 레오니에가 다시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아이들은 펠리오의 연인이란 사람을 신기한 동물처럼 구경했다.

사실 아이들 머리에 펠리오는 ‘레오 아빠’란 인상이 워낙 강하게 박혀 있었다. 그래서 펠리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 어색하면서도 조금 신기했다.

“공작님이랑 어떻게 만났어요?”

“누나는 왜 공작님이 좋아요?”

“두 분은 언제 결혼하는 거예요?”

바리아는 호기심 어린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얼굴이 빨개졌다. 거칠 것 없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은 바리아가 도망칠 구석을 완전히 차단했다.

하지만 어떤 질문 하나엔 바리아가 확실하게 답했다. 바로 펠리오의 어디가 좋으냐는 질문이었다.

“저는, 그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어하던 바리아가 나름 씩씩하게 대답했다.

“공작님의 근육에 먼저 반했답니다.”

근육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란 고백에, 레오니에가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다 내가 이어준 거야!”

오오, 아이들이 감탄했다. 일찌감치 레오니에의 근육 전파에 길든 탓에 다른 사람들보다 근육에 관해선 넓은 포용력을 지니고 있었다.

“저는 순록 좋아해요.”

플로무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말했다.

“나는 검술이랑 돈이요!”

“나도 검술! 근육도 좋아!”

우피클라와 피누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크게 외쳤다.

바리아와 아이들은 어색함 한 번 느끼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레오니에가 남몰래 안도했다.

“그럼 갈게요.”

“누나, 안녕!”

“나중에 북부에서 뵈어요.”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은 자신들을 데리러 온 가문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언니는 애들을 잘 돌보네.”

배웅을 마치고 돌아선 레오니에가 바리아에게 말했다.

“동생이 있었으니까요.”

바리아가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그녀가 지금 누구를 생각하는지, 레오니에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만의 생각이었을 거예요.”

바리아는 로타를 정말 잘 돌보았다. 동생이 떼를 쓰면 제 소중한 물건도 기꺼이 주었고, 무엇이건 최대한 동생의 취향에 맞춰 주었다.

“세상 참 말세야.”

레오니에가 혀를 끌끌 찼다.

“딱 보아하니 언니네 부모님이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그래.”

몇 번이고 생각하는 거지만,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정말 훌륭한 아버지라고 자신했다. 펠리오는 아이에게 한없이 물렀지만, 엄하게 대해야 할 땐 정말 무서웠다.

“동생을 많이 아끼시거든요.”

“그건 아끼는 게 아니라 망치는 거야.”

그 말에 바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젠 저 자신도 부모님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 어때.”

레오니에는 여기서 에르바누 이야기를 끝냈다. 아이는 남의 집 가정 교육에 훈수를 둘 만큼 착하지 않았다.

“보레오티는 바리아를 아끼니까 되었잖아.”

그리곤 �씩 웃으며 바리아를 보았다. 바리아는 기쁜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했던 저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무려 한 번의 죽음과 보레오티에서 퍼부어 주는 대가 없는 애정을 통해 깨우쳤다.

“그런데, 언니.”

레오니에가 줄곧 마음에 걸렸던 걸 물었다.

“왜 황비를 보고 그렇게 무서워했어?”

티그리아 황후가 연 다과회에서, 우시스 황비와 인사를 나누던 바리아의 안색은 누가 보아도 좋지 않았다.

“그냥 제가 혼자 불편한 거였어요.”

바리아가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왜? 말하기 그런 이유야?”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런 거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닮았거든요…….”

별거 아니라면서, 막상 그 이유를 중얼거리는 바리아의 안색은 다시 창백해졌다. 레오니에는 서둘러 소파에 바리아를 앉혔다. 안 그러면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 인간이랑, 웃는 게 닮았어요.”

“혹시, 언니네 여동생 남편?”

레오니에는 눈치껏 레무스 올로르의 이름을 돌려 말했다. 그 인간은 바리아를 죽인 사람이고, 레오니에가 지옥을 겪어야 했던 이유였다. 두 사람에게 끔찍한 존재인데, 그런 자의 이름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진짜로 있었던 일은 아니고요.”

바리아가 머뭇거렸다.

“꿈에서, 그러니까 꿈에서요.”

열두 살 아이에게 할 말이 아닌 걸 아는데도, 바리아는 지금 당장 제 속에 감춰진 비밀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답답해 쓰러질 것 같았다. 지금껏 혼자 잘 지켜온 비밀이었다. 그런데 저를 걱정해 주는 레오니에만 보면 이상하게 다 털어 내고 싶었다. 이 아이라면 자신의 비밀을 이해하고 받아 줄 것 같았다.

“꿈에서, 그 인간이 절 때렸어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단 사실을 겨우 상기해냈다. 바리아는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첫 번째 삶에서의 죽음을 꿈으로 위장했다.

“목을 조르고 칼로 제 배를 찔렀죠. 그때 본 미소가, 우시스 황비와 닮았거든요.”

동안 빼고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백조 남매였다. 그러나 바리아의 눈에는, 우시스 황비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제 목을 조르며 은근히 웃던 레무스와 똑같아 보였다.

“…….”

레오니에는 당황했다.

정말 예상 밖의 이유였다.

“언니, 미안해.”

그리곤 서둘러 사과했다.

레오니에는 저 꿈이 사실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바리아가 우시스 황비를 보며 느꼈을 공포는 가히 상상도 못할 정도였을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그러나 바리아는 도리어 이상한 말을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냥 꿈인걸요.”

“아니야…….”

그냥 꿈이 아니야.

레오니에가 슬프도록 웅얼거렸다. 바리아의 고통이 진짜인 걸 아는데도, 이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지 못하는 게 슬펐다.

“대신 공작님껜 이야기하지 말아 주세요.”

바리아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약속했다.

“……응.”

레오니에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런데, 아빠, 이미 다 들었어.”

아이는 내밀었던 새끼손가락으로 자신들의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팔짱을 낀 채 험상궂은 표정으로 문에 기대선 펠리오가 있었다.

“꺅!”

뒤늦게 알아챈 바리아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지금 가서 백조 좀 잡아 오죠.”

오늘 저녁은 백조 구이라며, 펠리오가 당장 나가려는 걸 바리아가 가까스로 붙잡아 말렸다. 펠리오는 팔에 닿은 바리아의 부드러운 몸에 뻣뻣하게 굳었다.

“그 백조들 죄다 또라이잖아.”

혼자 태연히 앉아 구경하던 레오니에가 그딴 건 줘도 안 먹는다며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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