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난 이 왈가닥의 아빠입니다.
연회가 끝난 후.
보레오티 부녀가 거실 소파에 널브러졌다. 둘 다 소파에 드러누워 게으름을 부렸다.
천하의 펠리오도 일주일 안에 북부와 수도를 왕복하고 곧장 연회에 참석한 탓에 지쳐 있었다. 레오니에 역시 연회에서 있었던 일로 제법 피곤한 상태였다.
두 부녀가 누운 소파 위로 따뜻한 햇살이 비치었다. 창문 너머로 투과되는 햇살은 나날이 열을 머금었지만, 커튼을 칠 만큼 덥지는 않았다.
“아빠, 아빠 가슴에 누워도 돼?”
레오니에가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이미 튼실한 아빠 가슴에 엎드린 채였다.
“으어어, 근육…….”
아기 맹수가 행복한 신음을 흘렸다. 단단하면서도 푹신한, 이중적인 모순을 지닌 뜨끈한 아빠의 흉근으로 연회 탓에 지친 심신을 달랬다.
“내려가.”
펠리오가 툭툭, 아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거참, 좀만 쉬다 갈게.”
“무거워.”
“언제는 좀 찌라며.”
“그게 몇 년 전 이야기냐.”
다리 언저리밖에 오지 않았던 깃털 같은 아기 맹수는, 어느새 펠리오의 가슴팍 아래까지 훌쩍 자랐다.
“천 근 같은 내 새끼.”
너무 잘 먹고 잘 자라서 품에 안고 다니는 건 힘들었다. 심지어 가슴팍에 아이를 올리고 낮잠 자는 것도 힘들었다.
“내려가라.”
“간만에 진짜 짜증 났어……!”
천 근 같은 레오니에는 일부러 팔에 힘을 줘 펠리오의 배를 꾹 눌렀다. 펠리오의 입에서 짧은 기침이 튀어나왔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속이 좀 시원해졌다.
“……저기, 아빠.”
소파 아래로 주르륵 내려앉은 레오니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그건 뭐였어?”
“뭐가.”
“바리아 언니랑.”
레오니에는 어제 자신이 본 두 사람의 기묘한 분위기를 물었다.
“뭐가 있었는데?”
펠리오가 모르겠단 듯이 물었다. 어울리지 않게 순진무구한 아빠의 태도에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무수한 변태 경력을 자랑하는 저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꽃이 있었어!”
소싯적 회지 좀 그려본 근육 변태의 눈엔,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 사이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밭이 보였다. 레오니에는 그 어두운 밤에도 흩날리는 꽃잎들을 볼 수 있었다.
펠리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꽃이 어디 있었어.”
연회장 바깥 발코니는 잠깐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만 있었다. 혹여나 황실에 숨어드는 첩자나 위험한 폭탄 등을 감추지 못하도록 화분 따위는 다 치워 두었기 때문이다.
그때 세 사람이 바람 쐬러 나갔던 발코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오 너 눈 아프냐.”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가 몸을 낮춰 레오니에의 눈을 신중히 살폈다.
“그런 거 아니야!”
레오니에가 소리를 빽 지르며 제 눈가를 잡아당기는 아빠의 손을 밀어냈다.
“말 돌리지 마! 나는 알아!”
“아까부터 너 혼자 뭘 말하는 거야.”
“바리아 언니를 보는 아빠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고!”
기어코 레오니에가 효심으로 묻지 않았던 질문을 내뱉었다.
“둘이 했지?”
펠리오는 대답 대신 한쪽 눈을 삐뚜름하게 움직였다. 지금 그는 제 딸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했는지 빠르게 파악 중이었다.
“……뭘 했다고 생각하는데?”
대답 여부에 따라 레오니에의 교육이 혹독해질 예정이었다.
“남녀 사이에 뭐가 더 있겠어!”
레오니에가 자신의 오른손과 왼손을 깍지꼈다. 그리곤 양손 엄지손가락끼리 서로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나 몰래 둘이 손잡고 그런 거 아냐?”
다행히 아이의 대답은 펠리오의 예상 이상으로 건전했다.
“……압수한 크로키 줄게.”
펠리오는 대답 대신 선심을 썼다. 간만에 그 나이다운 동심을 보여 준 딸에 대한 보상이었다.
“오예!”
레오니에가 기쁨의 주먹질을 허공에 마구 찔렀다.
‘실은 둘이 눈 맞아서 침대 운동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영악한 열두 살은 눈치껏 노골적인 질문을 피했다. 그리고 그 덕에 압수당한 근육 크로키를 손에 다시 넣었다.
“내 보물 잘 있었졍?”
레오니에가 쪽쪽 소리를 내며 도로 되찾은 크로키에 입술 도장을 진하게 찍었다. 펠리오는 다시 크로키를 빼앗아야 하나, 싶었다.
“나 이제 갈래.”
레오니에가 크로키를 챙기고 거실을 나섰다.
“방에?”
소파에 도로 누운 펠리오가 나가는 딸의 등에다 대고 물었다.
“바리아 언니한테 갈 거야.”
레오니에는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다. 어차피 펠리오한테 물어봐야 나올 것도 없었다. 레오니에가 정보를 캐낼 상대는 일찌감치 바리아로 정해져 있었다.
“그럼 빠빠.”
입에 버릇처럼 밴 어린 시절의 인사를 남기고, 레오니에는 휙 돌아섰다.
“…….”
소파에 드러누운 펠리오의 감긴 눈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와아, 아가씨 대단하세요!”
“언니가 좋아할 줄 알았지.”
바리아의 방으로 놀러 간 레오니에는 자신의 근육 크로키를 자랑했다. 예상대로 바리아는 아주 좋아했다. 거의 코를 책에 박는 수준으로 크로키를 탐독했고, 신이 난 레오니에는 이것저것 설명해 줬다.
신작 크로키에는 펠리오를 비롯한 글라디고 기사단들의 근육이 그려져 있었다.
“이 분은 누구세요? 뵌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모노 아저씨인데, 부기사단장이야. 아빠가 없는 동안 북부를 대신 지켜 주고 있어.”
“근사한 분이시네요.”
“그래 봐야 우리 아빠가 가장 세지만!”
레오니에의 기사단 설명은 항상 펠리오의 자랑으로 끝났다. 바리아는 그런 레오니에가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어른스럽고 멋있으면서, 펠리오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자랑으로 여념이 없었다.
“아가씨는 공작님이 너무 좋으신가 봐요.”
“뭐, 아빠니까…….”
하지만 직접적으로 물으면 귀를 붉히며 아닌 척 쑥스러워했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바리아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이익, 웃지 마!”
“그렇지만, 귀여우신걸요.”
“내가 귀여운 건 당연한 거고.”
“물론이죠.”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싱긋 웃었다.
“우리 아가씨만큼 멋있는 분은 어디에도 없답니다.”
“으응, 역시 눈이 높아.”
칭찬받아 기분 좋아진 레오니에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중에 바리아에게 자신이 개사한 노래들을 가르쳐 줘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언니가 보기엔 누구 흉근이 멋진 거 같아?”
레오니에가 크로키 속 그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히 공작님이죠.”
바리아가 정색했다.
“다른 분들께 너무 죄송하지만, 전 공작님 것만큼 완벽한 근육을 본 적이 없어요.”
처음 접한 근육이 너무 수준 높아서, 다른 크로키 속 근육들은 성에 차지도 않았다.
“특히 앞판이…….”
와아, 하고 감탄하면서 제 가슴부터 배 언저리를 서너 번 훑는 손짓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특히 바리아가 감동했던 펠리오의 근육 부위는 흉근과 복직근이었다. 흉근은 연회에서 직접 옷 너머로 체험했고. 복직근은 펠리오가 직접 손을 이끌어 가르쳐 줬다.
“…….”
바리아의 얼굴에 연분홍빛 열기가 피어올랐다. 펠리오의 근육을 보니 연회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연회 당시엔 여러모로 정신없고 놀라서 나름 견딜 만했던 충격들이, 하룻밤 자고 주변 환경이 편안해지니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래.’
바리아는 이 뒤늦은 열감을 어느새 가까워진 여름 탓으로 돌렸다. 하나 그러기엔 어젯밤의 모든 것이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공작님은 정말 멋지세요.”
바리아가 어느새 다 넘겨 본 크로키를 다시 처음부터 보았다.
“정말…….”
찬찬히 넘겨지던 크로키가 멈칫했다.
“어쩜 그렇게…….”
흐려진 바리아의 두 눈은 크로키 속 펠리오의 모습에 꽂혀 있었다. 흘려 그린 크로키인지라 선이나 표현이 날 것처럼 거칠기만 한데, 바리아의 눈엔 이보다 아름답고 근사한 그림이 없었다.
팔을 뻗어 손목시계를 보고 있는 크로키 속 펠리오의 모습은, 연회장에서 제 허리에 팔을 두르며 싱긋 웃던 그와 똑같이 겹쳐 보였다.
여름을 핑계 삼아 열이 오른 강아지는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언니, 자?”
보다 못한 레오니에가 손을 바리아의 눈앞에까지 가져가 휙휙 저었다. 그제야 겨우 정신 차린 바리아가 크로키를 덮었다.
“어, 어쨌든 그렇습니다!”
뒤늦게 바리아가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허리까지 꼿꼿이 세웠지만, 이미 레오니에의 눈은 가늘게 접혀 있었다.
“그, 그냥 멋있으시니까!”
괜히 찔린 바리아가 소리쳤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레오니에가 히죽 웃었다.
“그냥 저 혼자 혼잣말 한 거예요……!”
“혼잣말을 누가 그렇게 한담.”
눈치 빠른 열두 살은 감이 슬슬 잡혔다. 지금이라면 한번 찔러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몸속에 깃든 맹수의 송곳니마저 지금이 주접의 기회라고 으르렁, 울었다.
“우리 아빠랑 뭐 있었지?”
소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작 바리아는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있다는 건…….”
“이런 거.”
레오니에가 이번에는 오른손과 왼손으로 꽤나 어지러운 뒤엉킴을 선보였다.
“참고로 왼쪽이 아빠 혀, 오른쪽이 언니 혀.”
즉, 레오니에의 손동작은 농밀한 입맞춤을 묘사한 것이었다.
“혀, 혀라니요!”
놀란 바리아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소녀의 손놀림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거의 뱀과 뱀이 서로 뒤엉켜 똬리를 트는 꼴이었다.
“그럼 입술 뽀뽀는?”
굳어 버린 바리아를 힐끔 본 레오니에가 손수 손바닥을 마주 대며 물었다.
“그, 그런 거 없었어요!”
뒤늦게 바리아가 반박했다.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럼 뭐가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뭐야, 우리 아빠 진짜 고자야?”
단호한 바리아의 부정에 도리어 레오니에가 충격을 받았다. 이 아빠가 저를 키우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 잘난 얼굴과 몸, 기타 조건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까먹은 모양이었다. 딸내미는 기막힐 따름이었다.
“아오…….”
답답해진 레오니에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염없이 했다.
만약 두 사람이 전처럼 사무적인 관계에 그쳤다면, 적어도 연회 준비 전까지 서로를 보고도 태연히 대화를 나누던 그때였다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어제 연회에서 본 두 사람은 분명 달랐다. 레오니에는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분홍색 분위기를 읽었다.
분명 펠리오와 바리아 사이에 주인공인 연인들 뒤에만 활짝 피던 꽃밭이 있었다.
‘절대 착각이 아니야.’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도 둘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펠리오는 바리아를 눈이 빠져라 응시했고, 바리아는 그런 펠리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이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힐끔, 그를 훔쳐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둘은 휙 고개를 돌렸다.
이 유치한 짓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건 사랑의 시작이야!’
레오니에는 자신의 변태 취향을 걸고 확신했다. 저 둘은 이제 서로에게 평범한 호감이 아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왜 모르냐고!’
그런데 이 중요한 변화를, 저 당사자 둘만 눈치채지 못했다.
‘소설 주인공처럼 굴지 마!’
이미 원작이 한참 뒤바뀐 지가 오래인데, 왜 꼭 이런 중요할 때 소설 주인공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놈의 북부 대공……!’
펠리오는 분명 바리아를 의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깨닫지 못했다. 상대를 향한 연애 감정에 스스로 둔한 건 전형적인 북부 대공의 특징이었다.
바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이 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사랑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는 게 딱 여주인공이었다.
물론 지금의 바리아는 정말로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쪽은 펠리오를 ‘이성’이 아닌 ‘근육’으로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괜히 근육을 가르쳐 줘서!’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바리아가 그런 레오니에를 걱정하며 물었다. 레오니에는 어딘가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무언가 잘못되어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건 많이 이상했다.
“……나 방에 갈래.”
그렇게 한참을 혼자 요란을 떨던 레오니에가 불쑥 말했다.
“피곤해서 방에 가서 자야겠어.”
진짜 너무 피곤했다.
“아, 그럼 제가 방까지…….”
“됐어. 그냥 여기 있어.”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아를 꼭 껴안았다.
“나중에 봐.”
“조심히 가세요.”
“조심히 갈 것까지 있나.”
어차피 같은 집 안에 있는데, 레오니에가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섰다. 동시에 폭풍 같던 방 안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홀로 남은 바리아는 닫힌 문을 잠깐 바라보다 도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엔 레오니에와 함께 마신 차와 펠리오가 그려진 크로키가 놓여 있었다. 펼쳐진 곳엔 펠리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즐거웠던 순간이 그대로 멈춰졌다.
바리아는 그게 조금 슬펐다.
‘놓고 가셨네.’
바리아가 크로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탁한 분홍색 머리가 왼쪽으로 슬그머니 기울어졌다.
“……경고, 인가?”
조금 전에 겪었던 레오니에의 감정 변화를 도저히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공작님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뜻이겠지.’
하아, 바리아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찔리는 게 많았다. 특히 어제 연회에서 보인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그날 자신은 분명 펠리오에게 거의 홀려 있었다. 이성에 면역이 없는 바리아에겐 폭력이나 다름없는 매력이었다. 지금껏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해 오던 재정부의 맹수가 맛있는 고기 앞에 침 흘리는 강아지가 되었다.
‘싫을 만해.’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그런 저의 모습에 실망했을 거라 여겼다. 평소에야 저에게 ‘장난’처럼 종종 엄마라고 부르지만, 그건 엄마란 존재가 그리운 어린아이의 투정일 뿐이었다. 그게 진짜 새엄마가 되어달라는 뜻은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착한 분이야.’
바리아는 평소처럼 제게 대해 주던 레오니에에게 감동했다.
레오니에가 가장 걱정하던 여주인공의 특징 중 하나인 헛물 켜기를, 바리아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세요?”
자기 비하에 푹 빠져 있던 바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레오니에가 놓고 간 크로키를 가지러 온 것 같았다.
“그냥 들어오셔도 괜찮은데.”
바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에는 허울 없이 친근하게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늘 저렇게 예의를 지켰다.
“혹시 놓고 가신 크로키…….”
챙기러 오셨느냐는 물음은, 문을 연 바리아의 눈이 점점 커질수록 점점 작아졌다.
큼지막해진 초록색 눈 위로 거대한 인영이 드리워졌다.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문을 너무 함부로 열어 주는 것 아닙니까?”
조심성도 없이.
펠리오는 다짜고짜 화를 냈다.
* * *
“그럼 빠빠.”
입에 버릇처럼 밴 어린 시절의 인사를 남기고, 레오니에는 휙 돌아섰다.
“…….”
소파에 드러누운 펠리오의 감긴 눈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펠리오는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제 가슴을 술렁거리게 하는 기묘한 감정의 이름을 채 밝히지 못한 탓이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저 인정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펠리오는 자신이 바리아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부정할 정도로 미숙하거나 어리석진 않았다.
다만 바리아를 향한 저의 감정이 너무 낯설었다. 레오니에의 입에서 고작 바리아란 이름 한 번 들었을 뿐인데 가슴이 쾅쾅 뛰었다. 배 속으로는 주체 못 할 열이 차오르려 했다. 정말 풋내기 소년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펠리오는 그런 자신이 유치했다. 자신의 나이가 서른이 훌쩍 넘었고, 하물며 열두 살 된 딸도 있었다. 누가 봐도 펠리오는 점잖음을 지켜야 할 어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제 감정이 기가 막혀 쉬이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하아.”
기어코 고개를 떨군 펠리오가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제 연회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단번에 바리아를 찾았다. 평소에도 눈에 띄던 탁한 분홍색 머리가, 그 수많은 인파를 뚫고 펠리오의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본 바리아는 펠리오의 모든 감각을 사로잡았다. 마냥 맹하고 순하기만 했던 그녀의 고혹적인 모습에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에 빠졌다.
‘밝고 따뜻한 색이 어울릴 줄 알았더니…….’
어느새 손으로 턱까지 받친 펠리오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던 바리아를 수도 없이 떠올렸다. 검은색이 그렇게까지 매혹적으로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
한참을 고민하던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리아의 방으로 갔다.
‘착각일지도 몰라.’
펠리오는 자신의 감정에 신중하기로 했다. 연회에서 보았던 바리아가 평소와 너무도 달랐던 탓에 순간 혹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한텐 레오니에가 있어.’
하나뿐인 딸은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펠리오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였다. 자신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흔드는 사람은 레오니에 한 명이면 족했다.
그러나 바리아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에 벌써 바리아의 방에 도착했다.
똑똑.
문을 두드린 펠리오는 조금 전보다 침착해졌다.
‘별거 아닐 수도 있겠군.’
잠깐 찾아온 평온함에 펠리오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어쩌면 정말 잠깐의 설렘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평소의 수수한 모습을 보면 이 술렁이는 마음도 가라앉을 거다.
펠리오는 자신이 있었다.
“아가씨세요?”
곧 바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펠리오는 문고리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지금 이 문이 열리면, 또 한 번 자신의 인생이 크게 변할 것 같았다.
“그냥 들어오셔도 괜찮은데.”
이 여자가 미쳤나, 누군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래.
그 와중에 펠리오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아하니 지금 자길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 기세였다. 조심성 없는 태도에 화가 났다.
펠리오는 이곳이 자신의 저택이란 사실을 잠깐 망각했다.
“혹시 놓고 가신 크로키…….”
문이 열리는 동시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펠리오의 귀를 간지럽히듯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나타난 탁한 분홍색 머리는 길게 풀린 채 흔들렸다.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문을 너무 함부로 열어 주는 것 아닙니까?”
눈앞에 나타난 바리아를 보자마자,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조심성도 없이.”
“……네에?”
느닷없이 찾아온 펠리오에게 놀라 굳었던 바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여긴 공작님 집인데요?”
“…….”
“그런데 무얼 조심하란 건지…….”
“매사 조심하란 뜻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데. 펠리오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잔소리에 뒤늦게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진짜 미쳤군.’
펠리오는 저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제 가슴을 술렁이게 하고 배 속에 열을 들끓게 하는 이 감정을 피할 수 없단 사실도 인정했다.
자신은 바리아에게 반했다.
조금 전 잔소리가 증거였다. 펠리오에게 잔소리는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레오니에한테 늘 그러했듯.
이젠 바리아에게도 늘 그럴 것이다.
이렇게 또 한 번, 펠리오의 세상은 아주 크게 뒤흔들리고 변했다.
* * *
레오니에는 요즘 저택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코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더위가 성큼 가까워진 늦봄.
레오니에는 거울 앞에 서서 차려입은 옷을 이리저리 살폈다. 옷감이 얇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가문의 상징인 검은 맹수가 새겨진 브로치를 목깃 아래에 달았다.
“내 차림새 어때?”
레오니에가 옆에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코니에게 물었다.
“얼굴이 다 하셨습니다.”
코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옷은 별로란 소리로군.”
레오니에가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고, 그 옆에 준비되어 있던 하얀 반소매 셔츠와 검붉은 반바지로 바꿔 갈아입었다. 그제야 코니의 표정이 흡족하게 바뀌었다.
“역시 아가씨는 바지가 잘 어울리세요.”
“그래도 더울 땐 치마가 최고야.”
치마 안으로 부채질하면 그만한 천국이 없다며, 레오니에가 벌써부터 더위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분위기라는 건 무언가요?”
코니가 머리를 빗겨 주며 물었다.
“그냥 저택 분위기가 좀 이상한 거 같아서.”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정말? 사용인들끼리 따로 떠드는 소문 없어?”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사이 결 좋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여진 채 묶였다.
“전혀요.”
“그래?”
머리를 다 묶은 레오니에는 셔츠 목깃에 타이 대신 조금 전 원피스에 달았던 브로치를 달았다. 그리고 즐겨 입는 짧은 망토를 두르고 둥그런 모자를 썼다.
모자는 펠리오에게 물려받았던 통풍 마법이 걸린 모자였다.
“혹시 염려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세요?”
코니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으으응, 그런 건 아니고.”
없으면 되었다며, 레오니에가 준비된 양말을 신었다. 그리고 신발은 광택이 많이 나지 않는 빨간색 구두로 바꿔 신었다.
준비를 마치기 무섭게 미아가 찾아왔다.
“어머, 우리 아가씨 멋지셔라!”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알리러 온 미아의 칭찬에 레오니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목욕물 준비해 둘게요.”
하녀 언니들의 배웅을 받은 레오니에는 곧장 현관 홀까지 내려갔다. 중간중간에 만난 사용인들과도 즐겁게 인사했고, 주방에서 일하는 하인에겐 오늘 조금 매콤한 요리가 먹고 싶다고 부탁해 뒀다.
사실 레오니에의 일상은 이토록 평범했다. 늘 그랬듯 평화롭고 잔잔했다.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리십니다.”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께서 손수 골라주셨어요.”
“그래도 어깨가 너무 드러난 것 같은데…….”
“이 정도는 누구나 다 드러내요.”
“……보레오티는 노출 금지입니다.”
“네? 저, 정말인가요? 전혀 몰랐어요!”
“앞으로 그럴 겁니다.”
저기 멍청한 대화를 나누는 펠리오와 바리아, 두 사람만 빼고.
다과회 초대장은 두 장이 왔다.
하나는 레오니에에게.
다른 하나는 바리아에게.
“너무 오랜만이라 긴장되네요.”
마차에 올라탄 바리아는 연신 숨을 길게 내쉬며 긴장을 털어 내려 노력했다. 어렸을 적엔 또래 영애들끼리 모이는 다과회에 종종 참석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재정부에 취직한 뒤론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함께 동석한 펠리오가 말했다.
“가서 즐겁게 놀다 오십시오.”
“하지만 그냥 다과회가 아닌걸요.”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며, 바리아가 또 한 번 숨을 길게 내쉬면서 제 앞에 온 초대장을 바라봤다.
황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란색 봉투, 검독수리 인장이 박힌 편지지.
티그리아 황후가 보낸 초대장이었다.
그러니 지금 바리아가 가는 곳은 평범한 다과회가 아니었다.
‘제국의 두 번째 권력.’
다리 위에 올린 두 손에 바리아 본인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지금 수도 사교계에 발을 디디러 가는 길이었다.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지난 연회 이후, 사람들은 바리아를 보레오티 공작 부인이 될 사람처럼 대우했다. 바리아는 가족들을 떨쳐내려다가 엄청난 헛소문에 휩쓸렸다고 자책했다. 저 때문에 괜히 보레오티까지 입장이 나빠지면 어쩌나 싶었다.
‘특히…….’
바리아가 힐끔 옆을 바라봤다. 저와 조금 떨어진 옆자리, 창틀에 팔을 괸 채 밖을 보고 있는 펠리오가 바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한순간 눈이 마주쳤고, 바리아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어떡해……!’
고작 눈 한 번 짧게 마주쳤을 뿐인데, 심장이 쾅쾅 뛰고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그날’ 이후.
바리아는 펠리오를 이전처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공사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자신만만하던 과거의 소신 가득한 발언이 얼굴에 침을 뱉고 비웃는 것 같았다.
“보, 보레오티에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바리아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얼굴에 오른 열을 제 손등으로 식히려고 문지르던 때였다.
“바리아 양은 보레오티에 폐가 되는 인물이 아닙니다.”
펠리오가 바리아의 손을 잡아 내렸다. 여전히 열이 아직 남아 있는 바리아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앞으로 머리칼은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느닷없는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뜬금없는 말에 바리아가 눈만 끔뻑거렸다.
“바람 불면 쌀쌀하고 추운데, 그렇게 머리를 올려 묶어서 귀와 목을 다 드러내는 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저기, 이제 여름인데요?”
달리는 마차 밖은 수풀이 우거지다 못해 묵직하기까지 한 청록의 여름이었다.
“……북부는 여름에도 춥습니다.”
펠리오가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
“북부라면 그럴 수 있지요.”
바리아는 그 말에 의심 한 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어, 둘이?”
그리고.
“도대체 뭐하는 거야!”
지금껏 펠리오와 바리아 사이에 끼여 어깨 한 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레오니에가 기어코 짜증을 터트렸다.
“답답하게, 진짜!”
보레오티 마차는 아주 넓고 쾌적했다.
그런데 이 넓은 마차 안에서 어른 둘이 애 하나를 가운데 끼고 붙어 있으려니, 사이에 낀 열두 살 아이만 생고생이었다.
“좀 떨어져!”
레오니에가 마당을 나온 암탉처럼 어깨를 푸다닥 흔들었다. 그제야 양 옆에 철썩 붙어 있던 펠리오와 바리아의 몸이 살짝 떨어졌다.
레오니에는 그 틈에 갑갑했던 숨을 빠르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이도 아주 잠깐이었다.
“떨어지긴 어딜 떨어져.”
“그럼요! 아가씨는 어리잖아요.”
레오니에가 넓은 앞자리로 이동하려 하자, 펠리오와 바리아가 서둘러 말렸다.
“애는 어른 옆에 붙어 있어야지.”
“혹시라도 마차가 전복되면 어쩌려고요.”
펠리오가 스읍, 숨까지 들이마시며 혼을 냈다. 옆에 있던 바리아도 동참했다.
“우리가 널 감싸고 지킬 거니 걱정 마라.”
“아가씨는 제 목숨을 바쳐서 지킬게요!”
둘은 레오니에를 싸고돌다 못해,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며 자기들 목숨까지 걸겠다고 쓸데없는 비장함을 보였다.
“혹시 지금 수도에 마약 같은 게 유행이야?”
레오니에가 인상을 썼다.
“둘이 약했어?”
그러지 않고서야 이 두 어른이 동시에 저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진 비난과 짜증에도 불구하고, 레오니에는 저 둘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로도 모자랐는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레오니에의 양팔에 자신을 팔을 껴 넣어 원천 봉쇄를 했다.
“팔, 팔짱을?”
아빠가?
레오니에는 천하의 펠리오가 저와 팔짱을 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쯤 되자 진짜로 펠리오의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닌지, 걱정을 넘어서 두려움이 몰아닥쳤다.
그러나 펠리오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무심하고 세상만사 따분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레오니에는 아직도 제 팔을 놓지 않는 펠리오와 바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다과회고 사교계고.’
지랄이고 뭔들 간에.
레오니에는 이 답답하고 어색한 마차에서 도망만 칠 수 있다면, 당장 아빠에게 근육 크로키를 자진 압수당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마차는 처절한 아기 맹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 채 빠르게 달려갈 뿐이었다.
황후가 주최하는 다과회였기 때문에, 검은 마차는 약속 시각에 딱 맞춰 황궁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서니 초대받은 다른 가문의 마차들도 여럿 보였다. 그들은 검은 마차를 보자마자 멈춰 서거나 옆으로 길을 비켜 줬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린 건 레오니에도, 공작 부인이 될 거란 소문이 자자한 바리아도 아니었다.
바로 펠리오였다.
먼저 내린 펠리오는 마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곧 레오니에가 익숙하게 펠리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바리아도 머뭇거리며 그 손을 잡고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결혼이 코앞인가 봐요.”
“공작님 눈빛 봤어요?”
“검은 맹수도 저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군요.”
수군거리던 귀부인들이 일순 환호성을 터트렸다.
“어머머!”
“저기 보세요!”
펠리오가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와락 껴안았다. 세 사람은 사이좋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짧지만 아쉬운 이별을 붙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가족이었다.
한편.
“아빠.”
레오니에가 조용히 물었다.
“우리 왜 이래야 해?”
아이는 제 등을 와락 감싼 제 아빠의 팔을 흘겨보았다.
“다른 사람들한테 괜한 오해를 사면 안 되니까. 앞으론 종종 이렇게 안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레오니에가 보기엔 이미 펠리오가 마차에서 내리는 저와 바리아에게 손을 내민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치밀했다.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선 안 돼. 내가 레오 너한테도 말했을 텐데?”
“그놈의 의심.”
정작 레오니에는 쓸데없는 신중이라며 입술을 삐죽이고는 대꾸했다.
‘두 번 신중했다간 숨 막혀 기절하겠네.’
그놈의 의심과 신중 때문에, 펠리오는 지금 5년이 넘도록 황실과 올로르를 손보지도 않고 있다.
물론 저들을 손봐줄 사냥은 저쪽이 먼저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레오니에는 이상하게 펠리오의 말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렇지요, 바리아 양?”
“무, 물론이고요! 이건 다 연기랍니다.”
바리아는 저 말도 안 되는 주장에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혹시 싸웠어?”
어색한 두 사람의 대화가 마음에 걸린 레오니에가 한 번 더 물었다.
“안 싸웠어.”
“진짜 안 싸웠어요.”
다행히 돌아온 대답엔 거짓이 없었다. 레오니에는 안도했다. 하지만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럼 이만 갈게.”
겨우 연기를 멈춘 펠리오가 마차에 올랐다. 다과회가 끝날 즈음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며, 펠리오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껴안았다.
레오니에와는 가벼운 포옹과 볼 뽀뽀, 바리아와는 삐그덕 소리가 날 것 같은 어색한 포옹과 손등 뽀뽀를 나누었다.
“바리아 언니.”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태우고 가 버리는 마차를 수상쩍게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울 아빠랑 아무 일 없었어?”
“없었어요…….”
바리아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오니에는 저 대답때문에 더욱 수상했다. 언제나 저와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눈까지 피하고, 목소리엔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정말이야?”
짐짓 엄한 목소리로 떠보았지만, 바리아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보였다.
‘어째 고구마 먹은 기분이야.’
저런 바리아를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심정은, 마치 저 혼자 오해하고 괴로워하는 전형적인 여주의 착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혹시 아빠한테 고백받았어?”
레오니에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직 고백은 좀 이르지.’
하지만 물어보면서도 설마, 했다. 연회에서 분명 꽃을 피웠음에도 서로에게 둔한 두 사람은 여전히 사무적인 관계였다.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야.”
됐다, 싶은 레오니에가 농담처럼 넘기려던 찰나였다.
“아, 그, 그게……!”
바리아가 얼굴을 물들이며 우물거렸다.
덩달아 레오니에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 * *
‘그날’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여름을 코앞에 둔 포근한 늦봄. 레오니에가 진척 없는 펠리오와 바리아의 관계에 질려 방으로 돌아가 낮잠을 잘 때.
평범했던 어느 날은 펠리오와 바리아에게 아주 특별한 ‘그날’이 되었다.
펠리오는 예고 없이 바리아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 레오니에와 펠리오 이야기를 나누던 바리아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펠리오의 잔소리엔 더 놀랐다.
‘세상은 넓고 짐승은 많습니다.’
‘우리 북부는 동부식 드레스는 일절 수입하지 않습니다.’
‘옷을 껴입어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앞으로 몸에 좋은 약차를…….’
펠리오는 바리아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퍼부었고, 이는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바리아는 적잖게 당황했다. 자신이 아는 펠리오는 말이 적고 필요한 말만 하는 편이었다. 그나마 말이 많을 때라곤 레오니에와 대화를 나누고 놀아 줄 때가 다였다. 그래서 저렇게 떠드는 펠리오의 모습이 제법 신기했다. 하지만 귀는 좀 아팠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잔소리하려고 왔을 리는 없을 테고, 바리아가 그리 생각하며 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레오니에와 읽었던 근육 크로키를 제 옆에 숨기듯 치웠다.
그런데 정작 펠리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정말 잔소리만 하려고 온 거였나, 라고 바리아가 당황하려던 찰나였다.
‘바리아 양.’
어느새 바리아의 코앞에 펠리오의 검은 눈이 불쑥 침입했다. 펠리오와 바리아는 코가 거의 닿기 직전이었다.
만약 둘 중 누군가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다면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틈만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깜짝 놀란 바리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는 걸, 펠리오가 빠르게 팔을 붙잡아 막았다. 그러나 팔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은 아주 미약했다. 바리아가 뿌리치면 바로 떨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바리아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여자는 남자의 검은 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아득한 어둠보다 깊은 심연에 전신이 잠식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뭉근하고 뜨끈한 무언가가 심장 언저리부터 퍼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색이 탁한 분홍색 머리칼이 넝쿨이 되어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아주 달콤한 고통이었다. 등줄기부터 섬뜩한 감각이 콕콕 찔러왔다.
‘……만약에.’
펠리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니.’
그러다 문득 피식 웃으며 말을 정정했다.
‘만약 따윈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 느리고 조심스럽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바리아를 또렷이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분명 내가.’
펠리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바리아 양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낍니다.’
순간, 바리아가 입을 작게 열었다. 펠리오는 그녀가 숨을 짧게 들이마시는 걸 선명히 느꼈다. 약간 변태가 된 기분이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펠리오가 저를 보며 웃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멋없는 고백이라 죄송합니다.’
도리도리, 바리아가 고개를 흔들자 두 사람의 콧등이 스치듯 부딪혔다.
‘저, 저는……!’
후다닥 뒤로 고개를 내뺀 바리아가 차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대답은 나중에 해 주십시오.’
그러나 펠리오는 당황한 바리아를 다독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리아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부끄러움에 물든 얼굴은 어쩐지 너무 무거워서 차마 들 수가 없었다.
‘나도 레오를 탓할 자격이 없군요.’
그 순간, 바리아의 뜨겁던 마음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었다.
펠리오에겐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는, 레오니에의 친모였다던 여자가 있었단 소문을 떠올렸다.
* * *
“다들 와 주어서 정말 고맙네.”
티그리아 황후의 다과회는 그녀가 평소 아끼는 화원에서 열렸다. 알록달록 예쁜 꽃들은 전부 황후가 직접 돌보고 가꾼 것들이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은은한 꽃향기를 품었다. 아름다운 차양이 넓게 펼쳐졌고, 그 아래 동그란 테이블 세 개가 준비되었다.
“이제 봄이 다 지나가니.”
황후는 자리에 앉은 귀부인들을 한 명씩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그 아쉬움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어 이 자리를 만들었네.”
곧 황후가 먼저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희고 가는 목이 조그맣게 울렁거렸다.
“황후 폐하의 뜻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벨리우스 제국에 무구한 영광이 있기를, 뒤이어 말한 레오니에가 차를 머금었다.
황후 다음으로 직위가 높은 공작 영애의 찻잔을 드는 자세는 뭇 어른들조차 감탄할 정도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레오니에의 자리는 세 테이블 중 가장 신분이 높은 귀부인들이 앉은 첫 번째 테이블, 그것도 티그리아 황후의 바로 오른쪽이었다.
반면 황후의 왼쪽 자리는 비어 있었다.
곧 다른 귀부인들도 따라 차를 마셨다. 티그리아 황후가 이를 흐뭇한 시선으로 보았다.
“즐거운 시간이 되길.”
다과회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황후가 일어났다. 그러자 곧 다른 귀족들도 일어났다. 자리는 지정석이나, 다과회가 시작되니 귀부인들은 자연히 아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초대받은 귀부인들을 가볍게 훑어본 레오니에는 조용히 감탄했다. 황후가 초대한 이들의 정치 성향이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제파만 많이 초대한 것도 아니고, 귀족파만 몰아 초대한 것도 아니었다.
“언니, 그거 진짜야?”
그러나 레오니에는 지금 그딴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가 정말 언니한테 고백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들키지 않도록, 레오니에가 최대한 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러나 워낙 급한 마음으로 물어보는 거라 의도치 않게 닦달하는 느낌이 들었다.
“…….”
하지만, 바리아는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심지어 사과까지 했다.
“왜 사과해?”
놀란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렇지만, 기분 나쁘실 거 아니에요…….”
풀이 팍 죽은 바리아는 차마 레오니에를 보지 못하고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전혀?”
레오니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리아를 끌고 다과회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나무 뒤로 끌고 갔다. 귀부인들이 저와 바리아에게 말을 걸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라 은밀한 자리가 필요했다.
“언니는 울 아빠 싫어?”
“싫진 않아요.”
물론 당장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성급한 감이 있었다. 자신은 펠리오의 ‘근육’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펠리오’란 인간 자체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엔 확실한 답을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고백을 받았을 땐, 심장이 미친 것처럼 쾅쾅 뛰었다. 정말 이상한 약이라도 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변이 단번에 황홀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공작님껜 가슴에 품은 정인이 있잖아요.”
그 생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기분이 낭떠러지 저 아래로 추락했다. 동시에 잠깐이나마 두근거렸던 스스로가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레오니에한테 미안했다.
“아빠한테?”
정작 레오니에는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거두고 키운 뒤론 그 누구와도 그런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설마 루페 아저씨?’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옛날이었으면 몰라도, 루페는 인세레아와 결혼해 자식까지 떡하니 있는 유부남이 되었다. 근육 변태는 나름 기준선이 확실했다. 레오니에는 임자 있는 사람은 사양이었다.
“아가씨 어머님이요.”
바리아가 쓰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뜬금없는 인물 언급에 레오니에는 다리에 힘이 빠졌다. 멀쩡히 서 있었는데도 휘청거릴 정도였다.
“나 엄마 없는데?”
왜냐하면 레오니에의 친모는 지금 우르마리티 영지에서 영면에 들고 있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바리아가 비통하게 외쳤다.
“그분은 아가씨를 사랑하셨어요.”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는 레오니에는 레지나가 과연 제 딸을 사랑했는지에 회의적이었다. 하물며 사랑하지 않았더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사랑했고 배신당했던 남자는 쓰레기라 부르기도 아까울 존재였으니까. 그런 놈의 피가 흐르는 애를 사랑하라는 것도 나름 고문이라고, 당사자인 레오니에는 태연히 생각했다.
‘……아.’
혹시 바리아가 실성을 했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려던 레오니에의 눈이 번뜩 떠졌다.
‘이 언니, 지금!’
레오니에는 바리아가 무슨 착각을 하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어쩐지 답답하더라!’
펠리오와 바리아의 어색했던 관계를 보며 왜 이리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가 했더니. 바리아가 소설 여주인공 특유의 멍청한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레오니에의 미래를 위해 펠리오가 퍼트렸던 가짜 소문이었다.
‘펠리오 보레오티는 평민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공작이 진심으로 사랑한 평민. 어린 딸 하나 남기고 죽은 여자. 그러나 본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간.
“이 바보 언니!”
그제야 답답함을 풀어낸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꺅!”
생애 처음 맞아보는 엉덩이 맴매에 바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레오니에는 그거로도 답답함이 안 풀려 두 번이나 더 바리아의 엉덩이를 맴매했다.
“그거 거짓말이야!”
바리아가 또 엉뚱한 착각이라도 할까, 레오니에가 서둘러 진실을 말해줬다.
“그 사람은 사실……!”
진실을 가르쳐 주려던 레오니에가 퍼뜩 입을 다물었다.
“어머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싱그럽게 울렸다.
“여기서 다정히 무얼 하시나요?”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전까지 오만상을 쓰며 진솔한 감정을 드러내던 레오니에가 가면 같은 미소를 쓰며 뒤를 돌아봤다.
“저희가 시끄러웠군요.”
레오니에가 둥글게 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에요, 덕분에 보레오티 영애와 바리아 양을 찾았는걸요?”
상록의 푸른 숲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가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향했다.
레오니에는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바리아의 손을 힐끔 바라봤다. 바리아의 희게 질린 손이 레오니에를 지키듯이 자신의 뒤로 은근슬쩍 밀었다.
“오랜만입니다.”
바리아가 먼저 인사했다.
“황비 전하.”
우시스 황비가 으흥, 하고 귀여운 코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요, 바리아 양!”
비어 있던 티그리아 황후의 왼쪽 자리의 주인은 바로 우시스 황비였다.
“죄송해요, 황후 폐하.”
우시스 황비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티그리아 황후 앞에 섰다.
“일찍 오려고 했는데, 황제 폐하가 안 놓아주셔서요.”
시선을 내린 채 핑계를 둘러대는 황비는 꼭 엄마한테 혼나는 철부지 아이 같았다. 거기다 타고난 동안 덕에 더욱 내일모레 마흔이라는 나이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미안할 일이 아니에요.”
티그리아 황후가 고개 숙인 우시스 황비를 용서했다. 애초에 용서랄 것도 없었다. 황후는 황제에게 마음조차 없었으니. 오히려 제게서 눈을 떼게 해 주는 황비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폐하의 곁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다음부터는 황제 폐하께 빨리 놓아달라고 부탁드릴게요!”
“어쨌든 와서 다행이에요.”
레오니에가 묘한 눈으로 황후와 황비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사정을 다 알고 들어도, 저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대화였다.
티그리아 황후는 일단 황제의 본처였고, 우시스 황비는 총애 하나만으로 황비가 된 정부였다. 소위 말하는 처첩 싸움인데, 두 사람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신기하네.’
눈만 마주치면 머리 가죽 뜯고 싸울 줄 알았더니.
‘아니면 다른 귀부인 앞이라 그런 건가?’
레오니에는 그런가, 싶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황후와 이야기를 마친 우시스 황비가 총총걸음으로 레오니에에게 다가왔다.
“황비 전하.”
레오니에가 예의를 갖췄다. 하지만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
우시스 황비만 가까이 오면, 바리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레오니에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살펴도 바리아는 어색한 웃음만 지으며 괜찮다고 말할 뿐이었다.
“보레오티 영애랑은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런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우시스 황비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영애.”
“저 역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이, 좋아라!”
코웃음을 짓던 우시스 황비는 곧 바리아에게도 다시 한번 인사했다.
“잘 지낸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바리아 양.”
우시스 황비의 인사는 퍽 다정했다.
“황비 전하께서도 건강하셔서 다행이에요.”
“나야 건강 빼면 시체지요.”
황비의 단어 선택은 상당히 격식 없었다. 좋은 말로는 친근했고, 나쁜 말로는 싸구려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부 출신이라 해도, 엄연한 황실의 일원이었다. 말투에 신경을 쓰고 예의를 갖추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우시스 황비는 그런 것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혹 그런 황비의 자유로움이 수비테오 황제를 사로잡은 매력이라고 추측했다. 레오니에도 그 추측에 동의했다.
“바리아 양은 정말 대단해요!”
바리아를 칭찬하는 우시스 황비는 정말로 청량한 바람 같았다. 결코 열여섯 아들을 둔, 내일모레 마흔으론 보이지 않았다.
만약 레오니에가 이곳 세상의 일부를 적어 놓았던 원작 내용을 모르는 채 만났더라면, 분명 그녀를 착하고 예쁘지만 눈치없는 언니라고 확신했을 거다.
“아카데미도 그렇게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재정부에도 떡하니 취직했는데,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보레오티에도 취직했잖아요.”
“과찬이십니다.”
바리아가 고개를 짧게 숙였다.
“에이, 과찬은 무슨!”
우시스 황비가 어느샌가 바리아의 손을 꼭 쥐었다. 바리아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난 똑똑한 사람이 좋아요.”
“…….”
“바리아 양이 참 부러워요. 나도 그렇게 똑똑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움이 그득한 말을 끝으로, 우시스 황비는 바리아의 손을 놓았다.
“나중에 동생한테 안부 전해 줘요.”
돌아서는 우시스 황비가 어느 무리를 가리켰다. 화려한 차림새를 한 로타가 귀부인들 사이에 있었다.
로타는 다과회에서 레오니에, 바리아와 눈까지 마주쳤음에도 한 번도 다가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적의가 담긴 눈빛을 띠기만 해도, 레오니에의 협박 담긴 미소 한 번에 꼬리를 말았다.
지난 연회 이후로 몸을 사리는지, 늘 연기하던 사랑스러움도 조금 덜한 기분이었다.
“왜 직접 안 전하고요?”
마찬가지로 로타를 보던 레오니에가 물었다.
“으음, 그거야.”
우시스 황비가 태연히 말했다.
“바보는 아주 싫어하거든요.”
* * *
후계 수업 중.
‘황실에서 누가 가장 위험할 것 같아?’
그날,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낸 문제를 무려 반이나 맞은 날이었다.
펠리오는 평소엔 아이에게 물러도, 후계 수업만큼은 엄격하게 했다. 당연히 그가 내는 문제들도 처음부터 아예 틀리도록 작정하고 만든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이었다.
‘당연히 황제지!’
처음으로 반이나 맞추고 기분이 좋았던 레오니에는 술술 답했다.
황실이 심심찮게 북부를 탐하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북부 산맥,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고 있단 건 그것과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선황한테서 많은 걸 들었을 거야.’
북부의 적은 수비테오 황제였다. 이는 명확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펠리오는 틀렸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예상외의 인물을 언급했다.
‘우시스 황비를 조심해.’
‘황비를? 왜?’
레오니에는 이해가 안 갔다. 원작에서 우시스 황비는 수비테오 황제의 옆에서 아양 떨며 티그리아 황후의 심기를 몇 번이고 건드리는 얄미운 인물이었다. 그러다 결국 원작 끝에는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하지만 독자들 대다수는 저 행방불명이 죽음을 암시한다는 걸 알았다. 바리아가 첫 번째 삶에서 그런 식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즉, 우시스 황비는 눈치 없이 굴다 죽어 버리는 첩이었다.
그런데 펠리오는 우시스 황비야말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
‘황제의 눈과 귀를 막았어.’
‘그것밖에 못 하는 거잖아.’
‘아직 네가 어려서 그런가.’
이번만큼은 쉬이 제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레오니에를, 펠리오는 아주 조금 안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눈과 귀를 막았다는 건, 단순히 그 말 그대로를 뜻하는 게 아니야.’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눈 옆에 자신의 손을 세워 시야의 일부를 가렸다.
‘조종하는 거야.’
우시스 황비는 수비테오 황제에게 입김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펠리오는 지난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에서부터 우시스 황비를 의심했다.
수비테오 황제를 조금이나마 이성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올로르와 황제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 평범한 상인 가문을 떠오르는 실세로 만든 사람.
‘우시스 올로르…….’
레오니에는 어느덧 다른 귀부인들과 즐겁게 떠드는 우시스 황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펠리오가 했던 말 때문인지, 조금 전 우시스 황비가 한 말이 영 마음에 걸렸다.
‘난 똑똑한 사람이 좋아요.’
‘바보는 아주 싫어하거든요.’
조금 전, 우시스 황비가 바리아에게 했던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그리고 로타를 비난한 말도 진심이었다.
우시스 황비의 입장에선 바리아를 밀어내고 로타를 편들어야 했다. 하지만 황비는 바리아를 상당히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맹수의 송곳니는 감이 좋았다. 레오니에는 자신이 느낀 것을 확신했다. 분명 우시스 황비는 조금 전에 저와 바리아에게는 일말의 애정을, 로타에겐 무한한 경멸을 내비쳤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이어서, 바리아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바리아도 조금 이상했고.’
우시스 황비와 이야기를 나누던 바리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귀부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다과회에서 잘 해낼지 걱정하던 것과 달리, 바리아는 능수능란했다. 특히 보스그루니 백작과 좋은 분위기였다.
“보스그루니 백작님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백작님께서 찻잔만 쥐시면 뭇 영식들이 쓰러졌다는 전설은 유명하죠.”
“오호호! 부끄러운 이야기네요.”
기분이 좋아진 백작은 다음에 가르쳐 주겠다며 바리아에게 호감을 보였다.
보스그루니 백작만이 아니었다. 귀부인들은 어떻게든 바리아와 대화 한마디 나누고 연을 이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미 바리아를 보레오티 공작 부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황후궁 앞에서 목격한 펠리오의 사심 담긴 연기도 크게 한몫했다.
물론 그 속에 로타와 남부 귀족은 없었다. 레오니에는 분에 겨워하는 로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보레오티 영애.”
그때, 티그리아 황후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다과회는 재미있니?”
“물론이죠.”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잠깐 나랑 함께하겠니?”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양해를 구한 레오니에가 서둘러 바리아에게 갔다. 이야기를 들은 바리아는 흔쾌히 다녀오시라고 말했다. 레오니에는 혹시 몰라 저와 친한 귀부인들에게 바리아를 부탁했다. 아비페르와 보스그루니 백작, 케라타 자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여름을 참 좋아한단다.”
티그리아 황후는 레오니에와 함께 자신이 직접 가꾼 화원 안으로 향했다.
“서부의 여름은 무척 시원해. 그늘진 숲속에 잔잔한 바람이 불면, 아주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는 것보다 짜릿하지.”
“저도 서부의 숲을 좋아해요.”
“서부에 자주 놀러 가니?”
“아빠가 여기저기 데려가 줘요.”
화원에 도착해 단둘이 되자,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새 격식이 없어졌다.
“어디를 놀러 갔니?”
“서부 숲이랑 바다도 갔고, 동부에도 한번 가 봤어요.”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함께 놀러 갔던 곳을 즐겁게 설명했다. 그것만으로도 레오니에는 숨을 편히 내쉴 수 있었다.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치밀하게 눈치를 보는 사교계 탓에 쌓인 피곤함이 싹 날아갔다.
“정말 성실한 아버지구나.”
티그리아 황후가 의외란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레오니에는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펠리오 자랑이라면 밤을 새면서도 할 수 있었다.
황후는 그런 레오니에가 처음으로 그 나이 때 소녀로 보였다.
“사교계가 피곤하지?”
“그래도 오늘은 덜하네요.”
“내가 있으니까.”
“거기다 저도 있고요.”
제국의 황후와 차기 공작이 떡하니 있으니, 입에 칼을 문 귀부인들도 여느 때와는 달리 몸을 사렸다. 그들 중 몇몇은 레오니에를 우습게 봤다가 된통 당한 전적이 있었다.
“넌 정말 네 아빠를 많이 닮았구나.”
“욕이지요?”
“물론 칭찬은 아니란다.”
티그리아 황후가 깔깔 웃었다. 황후의 시원한 웃음은 조금 전 그녀가 추억하던 서부의 숲속 그늘을 흔드는 바람과 닮았다.
“……우리 황녀를 안다지?”
티그리아 황후가 나지막이 말했다.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5년 전에 우연히 만난 것이 다입니다.”
폐부를 찌를 듯한 날 선 공기임에도, 레오니에는 태연히 답했다. 마침 제 옆에 분홍색 꽃이 활짝 만개해 있었다. 장미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리시안셔스였다.
‘꽃말이…….’
황후가 보냈던 선물 때문에 억지로 배운 꽃말이 쉽게 떠올랐다.
변치 않는 사랑.
일전에 서부에 놀러 갔을 때, 인사차 헤스페리 후작저에 들른 적이 있었다. 거기서 우연히 구경했던 이벡스의 방에도 저 꽃이 있었다.
‘이래서 불륜이 무서운 거야.’
레오니에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보레오티 영애.”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레오니에가 도로 황후를 바라봤다.
“정말 우리 스칸을 몸만 보고 알아챘니?”
“스칸?”
“황녀 말이다.”
“아아…….”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본래는 아들이니, 애칭을 ‘디아’가 아닌 ‘스칸’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정확히는 골격이었습니다.”
소녀는 저를 향한 오해를 굳이 풀려고 하지 않았다. 황후가 저를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면 오히려 아주 좋을 일이었다.
“대단하지요?”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티그리아 황후는 드물게 놀라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게 바로 레오니에가 가장 원하던 반응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은 황후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다. 황녀의 비밀을 알고, 지금껏 잘 숨긴 맞바람도 알고.
이제 티그리아 황후는 레오니에를 만만히 볼 수 없게 되었다. 관계의 우위는 레오니에였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 때문인가요?”
기분이 한결 좋아진 레오니에가 물었다. 고작 황녀의 정체를 아는지 확인하려고 따로 불렀다기엔 너무 시간 낭비였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란 경고라면, 굳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레오니에가 리시안셔스 꽃잎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티그리아 황후는 같은 사냥감을 목표로 둔 동지였다. 같은 편을 배신하는 짓은 보레오티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영악한 것.”
싹둑.
어느새 레오니에 옆으로 다가온 황후가 리시안셔스 줄기를 잘랐다. 화원 옆에 있던 조그만 테이블 위에 올려진 가위가 티그리아 황후의 손에 들려 있었다.
“넌 네 아빠보다 더한 공작이 되겠어.”
“칭찬이로군요.”
“그래, 이번엔 칭찬이란다.”
티그리아 황후가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레오니에 같은 아이를 썩 좋아했다.
“공작에게 전해 주렴.”
그리고 레오니에를 부른 진짜 이유를 꺼냈다.
“곧 귀족 회의가 시작될 거라고.”
* * *
다과회가 끝나고.
약속한 대로 펠리오는 다시 마차를 타고 직접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데리러 왔다. 이번에도 세 사람은 각자의 사심이 복잡하게 얽힌 다정한 연기를 모두에게 보였다.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곧장 황궁을 벗어났다. 그리고 역시나, 셋은 또 마찬가지로 이 넓은 마차에 쪼르르 붙어 앉았다.
‘숨 막혀……!’
사이에 낀 레오니에가 소리 없는 짜증을 쫑알거리던 중이었다.
“황후 폐하는 잘 계시던?”
펠리오가 물었다.
“아빠한테 곧 귀족 회의가 시작될 거라고 전해 달래.”
레오니에가 답답한 어깨를 파닥거리며 티그리아 황후에게 들었던 말을 전해 주었다. 그제야 펠리오와 바리아가 슬그머니 떨어졌다. 하지만 곧 둘은 다시 레오니에 옆에 찰싹 붙었다.
“나 저 앞에 앉아도 돼?”
“마차 전복되면 어쩌려고.”
“혼자는 아니 돼요.”
이번에도 펠리오와 바리아가 동시에 말렸다.
“혼자 있게 해 줘……!”
레오니에는 사춘기가 절실했다.
“그런데, 그럼 그 말은…….”
바리아가 조금 전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귀족 회의가 열리는 건가요?”
“그럴 겁니다.”
“이제 움직이는군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바리아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황실은 북부를 노리고자 움직일 거고, 그 시작이 바로 이번에 열리는 귀족 회의였다.
이번에 새로 개정될 귀족 회의 명단을 확인한 바리아는 솔직히 걱정이 컸다. 몇 년간 공석이던 자리에 올로르와 에르바누가 채워졌다. 황실의 추천을 받은 그들은 당연히 황제의 입맛대로 움직일 거다. 보레오티라고 해도 막기 힘들 수가 있었다.
“……바리아 양.”
툭.
“무슨 생각을 그리 합니까.”
펠리오가 바리아의 주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문질렀다. 어둡게 가라앉았던 바리아의 기분이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올랐다.
“어차피 우리가 이길 겁니다.”
바리아가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걱정은 새까만 검정에 뒤덮여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러니 마음 편한 생각만 하세요.”
“마음 편한 생각이라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라든가.”
북부에 올라갈 때 가져갈 겨울옷 준비라든가. 아침에 일어날 때 창가에 놀러 오는 새들이라든가. 레오니에랑 같이 먹을 간식이라든가.
하찮기 그지없는 예시가 펠리오의 입에서 태연히 흘러나왔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 중간에 있다고.”
이 미친 어른들이 진짜.
레오니에가 어느새 저를 잊고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펠리오와 바리아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제야 두 어른이 슬그머니 눈을 떼고 몸을 돌렸다.
‘아오, 짜증 나.’
연인 사이에 낀 외로운 아기 맹수는 조금 전 제 허파를 뒤집었던 바리아의 씁쓸한 모습을 떠올렸다.
“참, 아빠.”
그래서 화풀이를 할 겸, 후딱 털어놓았다.
“아까 바리아 언니가 아빠의 고백을 거절할 것처럼 굴었어.”
“아가씨!”
“뭐?”
깜짝 놀란 바리아가 허둥거렸고, 펠리오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바리아를 바라봤다.
“저 언니가, 아빠가 내 친모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더라고.”
답답한 건 질색인 레오니에가 다 일러바쳤다.
“내가 레지나를?”
펠리오의 입에서 낯선 여자의 이름이 나오자, 바리아의 안색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진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괜히 그의 입에서 레오니에의 친모가 언급되니 기분이 도로 무거워졌다.
“내가 걜 왜 좋아해.”
그것도 한집에서 남매처럼 자란 사촌 동생을. 펠리오는 진심으로 정색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단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 동생이요?”
반면 바리아의 눈은 믿기지 않는단 듯이 점점 커졌다.
“평민이었던 여성분을 사랑하셨다면서요!”
“누가 그렇답니까.”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왔냐고 펠리오가 도로 되물었다.
“아빠가 퍼트린 소문이잖아.”
그것도 기억 못 하냐며, 레오니에가 한심하단 시선으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펠리오는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토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바리아 언니.”
결국 레오니에가 나섰다.
“나 우리 아빠 친딸 아니야.”
아기 맹수는 아빠의 연애를 위해 기꺼이 제 출생의 비밀을 밝혔다.
‘진짜 나 같은 효녀 없지.’
너무 놀라 굳어 버린 바리아의 턱을 손수 닫아 주면서, 레오니에는 저의 희생과 효심에 스스로 감탄했다. 정말 세상 어디에도 저 같은 아이는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한 레오니에가 빵긋 웃으며 펠리오를 바라봤다.
“……진짜 너 같은 애 없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와 똑같은 생각을 아주 다른 의미로 내뱉으며 한숨을 흘렸다.
그날 밤.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자신들의 비밀을 바리아에게 알려 줬다. 숨겨진 진실을 전해 듣는 바리아의 표정은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했다.
레지나가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와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고 했을 땐 걱정 어린 표정을, 그러다 고아원에서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만났단 말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리고 고아원 어른들의 악행에 도끼눈을 떴고. 코니에의 탈을 쓴 사우라의 정체엔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중 바리아를 가장 큰 충격으로 몰아넣은 건, 바로 레지나와 함께 도망쳤다던 수수께끼 방랑 기사의 진짜 정체였다.
“레, 레무스 올로르가…….”
무척 놀란 바리아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일단은 정자 기증자야.”
진실을 말하는 레오니에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특히 연회에서 보았던 레무스의 가식이 계속 떠올라 속에서 짜증이 부글부글 끓었다. 진짜 잡히면 목을 돌려 꺾어 버리고 싶었다.
“기증자는 무슨.”
범죄자 새끼지.
펠리오가 말을 바로 하자며 정정했다.
“그놈이 한 짓 중에 가장 잘한 건 네 존재를 모른다는 거야.”
“수도꼭지를 뽑아 입에 넣어 버리고 싶어.”
“더러운 거 만질 생각도 마.”
펠리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괜히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손을 닦아 주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펠리오는 좋은 고문 방법들을 가르쳐 줬다.
“오오!”
레오니에의 눈이 반짝였다.
“아빠는 역시 똑똑해!”
“당연한 사실에 왜 또 놀라.”
“좋아, 지금부터 검으로 회 뜨는 방법을 익히겠어!”
레오니에가 새로운 필살기 훈련을 다짐하던 찰나였다.
“두 분은 왜 이리 태연하세요?”
바리아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두 부녀를 바라봤다. 사실을 들은 바리아는 자신이 그 일을 겪은 것처럼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를 가까스로 쥐어 짜야 겨우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작 진실의 당사자 둘은 태연하다 못해 평화로웠다.
“안 괴로우세요?”
바리아는 마치 제 일처럼 화가 났다. 잔뜩 찌푸린 두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고, 분에 겨워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화가 치민 숨결이 토해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두 손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죽이고 싶어……!’
바리아는 살의가 치밀었다.
죽음을 넘어 다시 과거로 되돌아 왔을 때도, 저를 배신한 가족들과 제게 검을 찌른 레무스를 다시 만났을 때도 이렇게까진 아니었다. 죽이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진짜 제 손으로 죽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끓어오르는 살의는 진심이었다. 만약 눈앞에 레무스가 있다면, 그 빌어먹을 붉은 백조의 목을 쥐고 숨통을 끊었을 거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뒤로 회까닥 뒤집히는 걸 기쁜 마음으로 지켜볼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죽은 몸뚱이를 제 손으로 직접 다져 아무도 찾지 못하게 남부 바다에 뿌려 버리고 싶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바리아가 소리쳤다. 레무스 올로르는 저질러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 사람의 마음을 속였고, 저를 사랑한다 말한 사람을 버렸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끔찍한 지옥을 겪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겁니다.”
펠리오가 명쾌히 답했다. 커다란 손이 희게 질린 바리아의 주먹을 감쌌다.
“내 딸의 일에 진심으로 화를 내주어 고맙습니다.”
그제야 바리아의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곧 레오니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리아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안아 줬다.
“화내줘서 고마워, 언니.”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기뻤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 깊이 찡한 감동이 넘실거렸다. 자신이 바리아의 일을 걱정했던 것처럼, 바리아도 제 일에 화를 내주고 걱정해 줬다.
“나는 이제 괜찮아.”
물론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었다. 연회에서 레무스 올로르를 만났을 때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욱하는 실수를 저질렀었다.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나았다.
‘미안해, 아빠!’
처음 자신의 비밀을 알았을 때, 어린 레오니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울었다.
‘보레오티가 더러워졌어!’
그때의 충격을 이렇게 덤덤히 떠올릴 수 있기까지, 정말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펠리오 역시 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두 부녀는 서로를 지탱하며 일어섰다.
“나는 아빠 딸이니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이 세상엔 수많은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맹수 부녀는 그중 가장 독특하고 기이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견고하고 신뢰가 깊은 ‘진짜’ 가족이었다.
레오니에는 행복했다.
세 사람은 한참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를 껴안은 채 있었다.
먼저 몸을 움직인 건 펠리오였다. 그는 레오니에의 안색을 먼저 살폈다. 아이는 상처 하나 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에 안도한 펠리오가 이윽고 바리아를 살폈다. 바리아도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슬렀는지 아까보단 편안해 보였다.
“바리아 양.”
펠리오가 말했다.
“지난번에 했던 고백을 다시 한번 더 해도 되겠습니까?”
느닷없는 말에 바리아가 눈을 빠른 속도로 깜빡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좀 성급한 감이 있었지요.”
다시 돌이켜본 고백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쳐 있었다. 펠리오는 자신의 고백에 틀린 점이 아주 많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바리아 양에게 느끼는 호감엔 거짓 하나 없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아주 짧았지만, 서로의 마음에 서로가 깊이 새겨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펠리오는 자신의 연심이 결단코 흔들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나는 레오가 있습니다.”
만약 레오니에와 바리아, 두 사람에게 똑같이 위기가 닥친다면, 펠리오는 망설임 없이 레오니에부터 구할 것이다.
“당신을 향한 사랑보다, 레오를 향한 사랑이 더 큽니다.”
“아빠……!”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왜 내 핑계를 대! 나 때문에 그런 말 하지…….”
“아니야.”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말을 막았다. 그가 다시 시도하는 고백 이전에 레오니에를 언급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난 이 왈가닥의 아빠입니다.”
바리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펠리오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채 이어 말했다. 천하의 검은 맹수도 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바리아 양이 섭섭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겁니다. 두 사람에게 지닌 내 마음은 분명 다르고 우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소중하지요.”
그래도 펠리오는 우위를 따져야 했다. 자신은 아빠였고, 그 때문에 감수해야 할 것이 분명 있었다. 레오니에가 지금보다 더 자라 제 몫을 다하는 어른이 되기 전까지, 펠리오는 오롯이 레오를 지키고 돌보아야 했다.
“그래도 나는 바리아 양에게 감히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펠리오의 고백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리아에게 이 고백을 없던 일로 물리거나 질색을 하며 차 버려도 괜찮다는 여지를 건네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고백이 성사될 경우, 가장 힘들 수 있는 건 바리아였기 때문이다.
“…….”
바리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은 어색한 고요함이 세 사람 사이에 가라앉았다. 펠리오는 조용히 기다렸고, 레오니에는 불안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드물게 겁에 질린 손이 자연히 펠리오의 옷자락을 쥐었다.
“……공작님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천천히 입을 연 바리아가 드디어 고백에 대한 답을 꺼냈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대단하세요.”
처음에는 젊은 나이에 북부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에, 천하의 황제마저 함부로 하지 못하는 위압감을 내뿜는 자태에 감탄했다.
그러나 막상 만난 펠리오는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그는 하나뿐인 딸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였고, 사용인들이 존경하는 상사였으며, 의외로 잔걱정이 많은 잔소리꾼이었다.
아닌 척해도 자신의 사람을 살뜰히 챙겼고, 제국의 앞날을 나름 챙기는 위정자였다.
바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토록 대단한 북부의 검은 맹수도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저는 공작님처럼 멋진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지금껏 많은 고백을 들어 보진 못했지만, 저는 단연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펠리오의 고백은 바리아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쥐고 흔들었다. 심지어 전에 들었던 고백보다도 훨씬 감동적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바리아가 물기 어린 초록 눈을 가늘게 휘었다.
“저도 공작님과 같은 마음이랍니다.”
“바리아 언니!”
레오니에가 환호성을 터트렸다.
“아빠, 들었어? 언니가 고백을 받아 줬어!”
“…….”
“우와! 와아아!”
아이는 폴짝폴짝 뛰었고, 펠리오는 제 귀로 듣고도 쉬이 믿지 못해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러나 바리아는 이 기쁜 순간에 안타까운 목소리로 제동을 걸었다. 기뻐하던 레오니에의 표정이 굳어졌고,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시간을 조금 주셨으면 해요.”
“어째서입니까?”
펠리오가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로 같은 마음인데 왜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펠리오는 쉬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레오니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면 주둥이 박치기하고 이런저런 짓도 해야지!”
“너 또 크로키 빼앗기고 싶냐.”
펠리오의 엄중한 경고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저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무슨 마음의 준비 말입니까?”
“공작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준비요.”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 마음이 아니라, 아가씨를 향한 마음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맹수 부녀의 눈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의아하단 듯이 커졌다. 특히 레오니에의 까맣고 동그란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작님과 마음을 함께하는 건, 아가씨와의 관계도 변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바리아는 펠리오의 고백에 담긴 진심이 기뻤다. 그는 자신의 마음 때문에 딸을 외면하지 않았다. 바리아는 레오니에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모습에 또 한 번 깊이 감동했다.
그러니 그 진심에 제대로 된 태도를 보여야 했다.
“공작님만큼은 아닐 테지만, 저 역시 아가씨를 무척 좋아해요.”
자애로운 미소에 레오니에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그러니 공작님과 함께 아가씨와도 새로운 관계를 맺을 준비를 하고 싶어요. 아, 물론 이게 아가씨의 엄마 자리를 꿰차겠단 이상한 뜻이 아닙니다!”
주제넘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며, 바리아가 서둘러 말했다. 레오니에는 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꾸욱 참았다. 바리아가 저만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바리아가 물었다. 어느새 펠리오도 레오니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가 그렇다면야, 뭐.”
시선을 내린 채 한참을 쑥스러운 듯이 우물거리던 아이가 은근슬쩍 말했다.
“그래도 난 빨리 언니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
레오니에는 간질거리는 가슴을 애써 무시한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이의 격한 대답에 바리아가 얼굴을 수줍게 물들였다. 하지만 이윽고 기쁜 미소를 지으며 두 팔로 레오니에의 등을 감쌌다.
“너무 긴 시간이 아니면 좋겠군요.”
펠리오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