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우리 집 여자들은
바리아는 펠리오와 레오니에 부녀를 볼 때마다 확신했다.
이 세상엔 수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었고, 그중 보레오티는 꽤 파격적이고 신선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진짜였다.
조금 짓궂은 듯한 장난도,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농담들도 서로를 향한 신뢰와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리아에게 ‘진짜’ 가족은 보레오티였다. 강압적인 아버지와 모든 것을 피하려는 어머니, 제 욕심만 우선하는 여동생은 결코 제 가족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가까스로 분을 가라앉힌 바리아가 물었다. 저 없는 곳에서 아버지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궁금했다.
흥분한 감정을 애써 참아내는 바리아를 물끄러미 구경하던 펠리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리아가 점점 화가 난 것과 반대로, 펠리오는 제법 이성을 되찾고 진정했다.
애초에 그는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 짜증 나고 불쾌해서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내가 아주 몹쓸 놈이 되었지요.”
펠리오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는, 에르바누 백작이 저를 보며 내뱉던 말을 떠올렸다.
‘내 딸은 왜 데려간 겁니까!’
‘아직 시집도 안 간 내 장녀를!’
‘당장 내 딸을 내놓으십시오!’
에르바누 백작은 입술이 바싹 마를 때까지 바리아를 내놓으라고 따졌다.
펠리오는 그저 ‘내 딸’, ‘내 장녀’라고 외치는 백작이 역겹게 느껴졌다. 그는 마치 자기 딸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펠리오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보통 아버지들에게 딸은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왜냐하면 제게 레오니에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시집 안 간 딸을 데려가지.”
시집간 딸을 데려가나? 레오니에가 이 자리에 없는 에르바누 백작을 한껏 비웃었다.
“시집간 딸을 데려가는 게 더 문제잖아.”
“이야기의 요점은 그게 아니다만.”
펠리오가 씩씩거리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을 보니, 역시 에르바누 백작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럼 올로르는?”
레오니에가 물었다.
“설마 에르바누를 말렸을까?”
펠리오가 대놓고 비웃었다.
올로르는 에르바누와 사돈지간이었다. 당연히 에르바누 백작의 역성을 편들어 줬다.
“미친 백조 새끼!”
목을 확 꺾어 버려!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진짜 백조의 목을 잡아 꺾는 흉내를 냈다. 제법 여러 번 했는지 목을 잡고 고개를 휙 돌려 꺾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빠는 그걸 그냥 보고 있었어?”
“오냐, 보고만 왔다.”
“맹수의 송곳니는 장식으로 들고 다녀?”
그걸로 찍어 버려야 했다고, 레오니에가 화를 냈다.
“뒷감당은 누가 하고?”
“실수였다고 둘러대!”
“무슨 실수?”
“요새 대소변 실수가 잦다는 소문을 퍼트리면 다들 이해할 거야.”
“넌 이 아빠를 아주 진창까지 떨어트릴 생각이냐.”
어느새 맹수 부녀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으르렁거렸다.
“…….”
두 부녀 사이에 낀 바리아는 홀로 진지하게 무언가를 고민했다.
“저기.”
그리곤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랑 올로르 자작이, 공작님이 저를 강제로 데려갔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나요?”
“내가 거의 파렴치가 되었죠.”
시집도 안 간 딸을 데려가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따지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어디 좋은 혼처라도 준비해 둔 모양입니다.”
펠리오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바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역시 정직당하던 날에 집으로 끌려갔다면, 정말로 제 의사와 상관없는 결혼을 당할 뻔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럼 이번 연회에 저희 아버지나 올로르도 참석하겠군요.”
“그렇겠지요.”
그것만 생각하면 펠리오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저도 갈게요.”
바리아가 펠리오에게 제안했다.
“저를 공작님의 연회 파트너로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바리아의 제안은 아주 간단했다.
이번에 열리는 황실 연회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당연하게도 제국이며 각 지역이며 큰 영향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바리아는 그들 앞에서 저 스스로 펠리오를 찾아갔음을 밝힐 생각이었다.
“당사자인 제가 나서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계속해서 공작님을 괴롭힐 거예요.”
“그냥 내가 밟으면 됩니다만?”
“그것도 상관은 없지만, 귀찮으실 거 아니에요.”
바리아는 펠리오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지만, 어지간한 일은 성가셔하며 내버려 두는 면모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관대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한낱 잡스러운 벌레를 잡는 게 하찮고 귀찮아서 무시하는 거였다.
바리아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5년 전, 재정부에서 막 일을 배우기 시작했던 바리아는 몇 달을 내리 밤새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바로 지금 제 옆에 있는 펠리오였다.
그는 여러 귀족의 돈줄을 막아 버렸다. 숨통 트일 쥐구멍 하나 내버려 두지 않고 전부 막아둔 탓에, 그들 가문이 줄지어 파산 신청을 해 버린 탓이었다.
당시 그 일은 바리아가 있던 부서와 연관도 없는 일이었으나, 워낙 일이 컸던 탓에 모두 꽤나 고생했다.
나중에 사태가 진정된 뒤. 레스가 가르쳐 준 야근의 원인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보레오티 영애를 욕했던 가문이잖아.’
어미도 없는 천한 태생, 고아원 출신, 사생아 따위가.
보레오티는 이토록 악질적인 말을 뿌리고 다녔던 귀족들을 전부 찾아냈다. 그리고 감히 보레오티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손수 가르쳐 줬다.
“……뭐, 귀찮긴 하죠.”
펠리오가 아주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레오니에도 바리아가 그런 말을 해서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그러니 자신이 끝을 내야 했다.
“연회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족들과 연을 끊겠습니다.”
매정한 말을 너무도 단호하게 꺼내는 바리아의 표정은 초연했다. 선연하게 번뜩이는 초록 눈동자엔 망설임이 없었다.
펠리오는 그 모습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요.”
펠리오가 솔직히 말했다. 귀찮은 놈들이 자연히 떨어지고, 그 일로 공개 망신을 당한 저들이 잠깐 흔들리는 사이에 미리 계획해 둔 일들로 저들을 치워 버릴 수 있었으니.
“그럼 역시 연회에서……!”
레오니에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임신은 안 된다.”
“임신은 안 돼요.”
하지만 레오니에가 할 말을 눈치챈 펠리오와 바리아가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동시에 같은 말을 던진 둘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어쨌든, 괜찮을까요?”
먼저 시선을 피한 바리아가 물었다. 뒤늦게 시선을 피한 펠리오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겐 아주 고마운 일입니다.”
“언니, 그러면 집에서 완전히 쫓겨날 텐데?”
레오니에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바리아가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엔 거짓이나 두려움 따윈 없었다.
“전 이제 북부 사람이잖아요!”
당찬 바리아의 대답에 펠리오의 입가에 희미한 곡선이 그려졌다.
“바로 그 기세입니다.”
펠리오가 대견하단 목소리로 답했다.
“북부의 수장은 긍지를 지닌 북부인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지요.”
“맞아! 보레오티는 북부의 수호 요정인걸!”
북부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며 레오니에가 거들었다.
“요정까진 아니고.”
물론 그 거듦이 썩 펠리오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빠는 근육 요정!”
“그러니까 아니라고.”
심각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사르르 풀어졌다. 바리아는 평소처럼 시끌벅적 떠드는 보레오티 부녀를 행복한 미소로 지켜봤다.
“저는 근육 요정 멋진데요?”
바리아가 조심히 끼어들었다.
“역시 언니는 뭘 좀 알아!”
“뭐가 멋있습니까, 징그럽지.”
괜히 아이 편들지 않아도 된다고,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잔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근육은 멋져요.”
노력의 결정체라며 바리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
펠리오가 그런 바리아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레오한테 휩쓸리지 말라고 그리 말했는데.”
기어코 바리아도 근육의 파도에 휩쓸린 모양이었다.
* * *
바리아의 제안은 아주 좋았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레오니에가 조금 초조하게 말했다. 이제 황실 연회까지 여드레가 남았다.
“장신구나 뭐 이런 건 사면 되니까 크게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드레스였다.
현재 보레오티에서 여자라곤 레오니에가 유일했다. 그 말인즉, 바리아에게 빌려줄 드레스가 한 벌도 없단 뜻이었다.
두 사람의 체격 차도 그랬지만, 레오니에가 가지고 있는 드레스는 대부분 다과회 용이라 연회에 입고 가기엔 지나치게 수수했다.
“기성품을 사면 안 될까요?”
바리아는 드레스에 딱히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아니었다.
“울 아빠 옆에서 기성품을?”
경악 어린 검은 눈동자의 주인은 그딴 걸 죽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
“바리아 언니한테는 뭐든 어울리지만! 그래도 보레오티 역사에 기성품은 없어!”
“그, 그래요……?”
“으음, 당장 디자이너들을 납치하면…….”
“납치는 범죄에요!”
깜짝 놀란 바리아가 만류했다.
“에이, 당연히 농담이지!”
레오니에가 태연히 웃었다. 그러나 뒤따라 중얼거리는 ‘돈으로 입막음을…….’이란 말에 바리아는 지금 레오니에가 진짜 납치를 계획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때였다.
“아가씨, 바리아 님.”
트라가 자신을 따라오라며 둘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드레스 때문에 걱정이시라고요?”
“아무래도 디자이너를 납치해야 할까 봐요.”
“아가씨!”
“괜찮아. 세상은 돈으로 다 되는걸.”
특히 보레오티가 그렇다며, 레오니에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며 히히 웃었다. 수전노의 미소였다.
“물론 보레오티는 못할 게 없지요.”
트라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트라는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보레오티다운 것이 어떨까요?”
곧 그는 주머니에서 커다란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 안에 넣고 돌렸다.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선대 보레오티께서 사용하신 물건들이 보관된 창고입니다.”
“북부에 있는 보물 창고 같은 거?”
레오니에가 어두컴컴한 창고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발을 들이기 무섭게 수북이 쌓인 먼지 때문에 재채기가 콜록콜록 터졌다. 바리아가 손수건을 꺼내 레오니에의 코와 입을 가려 줬다.
“그냥 선조분들이 남기신 추억의 물건 같은 것입니다.”
보물까지는 아니라며 트라가 말했다.
“아마 여기에…….”
무언가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던 트라가 곧 오래된 옷장 앞에 섰다. 먼지가 수북한 천을 조심조심 벗긴 뒤, 트라가 옷장 서랍을 신중히 당겼다.
“여기 있군요.”
안에는 누군가의 드레스가 여러 벌 보관되어 있었다.
“옛날 옷이긴 하지만, 수선하면 지금 입어도 괜찮을 겁니다.”
“와아…….”
“세상에나…….”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연이어 감탄했다. 트라는 드레스를 꺼내 구경하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말씀으론, 선선대 마님께서 입으셨던 드레스라고 합니다.”
“선선대 마님……?”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님의 할머님이십니다.”
“아, 그 거실 시계!”
트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레오니에는 이 드레스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북부 저택에 태엽이 없어서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시계가 하나 있었다. 그 시계를 선물 받은 사람이 선선대 공작, 즉 레오니에의 증조부였다.
그러니 이 드레스는 그 괴짜 증조부의 아내였던 증조모의 유품이었다. 그러니 드레스는 못해도 6, 70년을 훌쩍 넘겼단 뜻이었다. 지금 창고에 모인 레오니에와 바리아, 트라의 나이를 합쳐도 드레스들의 나이보다 어렸다.
그러나 드레스들은 세월의 흔적이 무색할 정도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입고 광장을 돌아다녀도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레오니에는 어느 드레스 한 벌을 빤히 살폈다.
“요즘 것들보다 나은데?”
별이 한가득 반짝이는 밤하늘을 그대로 잘라 만든 것 같은 드레스가 유독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 선이 고스란히 드러남에도 천박해 보이지 않았고, 목부터 두 팔까지 전신을 거의 가렸음에도 갑갑해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치마였다.
‘드레스를 동부에서 만들었나?’
오른쪽 치맛자락이 허벅지까지 과감하게 트여 있었다.
펠리오는 일전에 레오니에한테 동부에서 판매하는 다리 트인 드레스를 입었다간 유산이고 뭐고 없다고 엄중히 말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내가 입을까?’
아빠가 하지 말라면 꼭 하고 싶은 못된 딸이었다.
“주인님께서 이 옷들을 바리아 님께 주셨습니다.”
“뭐?”
“뭐요?”
트라의 말에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동시에 놀랐다.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주었다’는 말에 아기 맹수와 가정 교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아무리 오래된 드레스래도, 그 가치는 지금 유행하는 것들보다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트라가 전해 주는 펠리오의 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 옷을 준비해 주지 못해 미안하단 말씀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하, 하지만 이건……!”
당황한 바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바리아는 도저히 받을 수 없다며 부담스러워했다. 일개 가정 교사인 자신이 선선대 보레오티의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간다니.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바리아는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분명 터무니없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게 뻔했다.
그런 민폐를 끼칠 바에야 차라리 기성품을 사서 입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옷은 제게 어울릴 리가 없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장식품도 이미 제공받기로 했는걸요.”
“아니야…….”
“그래요, 아가씨도 아니라잖아요.”
“아니, 이걸 입어야 해.”
그러나 레오니에의 생각은 바리아의 생각과 아주 많이 달랐다.
“언니, 이거 입어!”
레오니에가 계속 만지작거렸던 검은 드레스를 쑥 내밀었다.
“내가 입으려고 꿍쳐 두려고 했는데, 바리아 언니 줄게!”
영악한 아기 맹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레오니에는 곧장 저택으로 테온 남작을 불렀다. 소녀는 남작의 앞에 창고에서 가져온 드레스를 내려놓았다.
밝은 조명 아래 펼쳐진 검은 드레스는 훨씬 더 아름다웠다. 뒤에서 구경하던 트라마저 오오, 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이 무슨 걸작입니까!”
당연히 드레스에 해박한 테온 남작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의 눈에서 열정이 번뜩였다.
“내 증조모님께서 입으셨다는 드레스예요.”
레오니에가 드레스에 대한 정보를 대충 알려 줬다.
“아주 귀한 것이로군요.”
“당장 입어도 괜찮을 정도로?”
“물론입니다! 보관이 아주 잘 되어 있어 굳이 손 볼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코에 조그만 안경을 얹은 테온 남작이 드레스를 신중히 살폈다. 이물질이 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손에는 장갑을 꼈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는 드레스를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처럼 다루었다. 물론 진짜 둘도 없는 드레스라 보물처럼 값지긴 했다.
“확실히 오래된 유행이군요.”
드레스를 살핀 남작이 말했다.
“60년 전 즈음에 동부식 드레스가 유행했습니다. 드레스가 몸에 달라붙고, 한쪽 다리를 드러내는 것이 유행이었지요.”
“남성용은 없었나요?”
“예?”
“농담이에요.”
그만 욕망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레오니에가 미안하다며 가볍게 손짓했다. 나중에 남성용을 하나 만들어 아빠나 기사단 오빠 중 한 명에게 입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옛날에 유행했던 옷인데…….”
뒤에서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바리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지금 입기엔 좀 그렇죠?”
“아니요?”
테온 남작이 정색했다.
바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드레스야말로 세간의 유행을 타지 않는 고전의 정석이지요.”
보통 드레스를 만들 땐 검은색은 자연히 피하게 되어 있다. 검은색이 보레오티의 상징인 탓도 있지만, 이 색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도 많이 없어서였다.
상복이 아니고서야 검은 드레스를 화려한 연회에서 입고 활보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오래된 드레스는 검은색의 단점을 완벽히 보완했다. 반짝이는 검은색 원단은 조명이 밝을수록 아름답게 빛났다. 동부에서 특수 처리한 비단 옷감 덕분이었다. 피부에 닿는 안감은 부드러우면서 통기성이 좋았다. 덕분에 상의 부분은 목부터 손목까지 전신을 다 가려도 부담이 없었다. 소매 처리도 깔끔해서 단아하고 고풍스러웠다.
“특히 이 하반신 부분이 최고입니다.”
테온 남작이 칭찬한 곳은 바로 다리가 트인 치마 부분이었다. 물 흐르듯 내려오는 통이 좁은 치맛자락은 전형적인 동부식 의상이었다.
“이 무늬 보이세요?”
테온 남작이 치맛자락을 조심히 들었다. 조명을 받은 검은 치마 위로 무언가가 물결치듯 출렁거렸다.
“……용?”
레오니에가 놀라 중얼거렸다.
“이거 ‘조폭’ 마님 옷이야?”
“‘조폭’?”
바리아가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오니에는 말실수였다고 서둘러 대충 둘러댔다.
“용이 아니라, 물결무늬입니다.”
테온 남작이 조금 더 치마를 흔들었다. 그제야 치마에 숨겨진 무늬가 드러났다. 아주 탁한 은빛 물결이 새겨져 있었다. 남작은 이는 아주 정교한 기술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남작은 못 만들어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못 만듭니다.”
남작이 솔직히 말했다.
“지금 수도에서 과연 이런 걸작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과연 보레오티라며, 테온 남작이 칭찬했다.
“그럼 이 드레스는 누가 입습니까?”
테온 남작의 물음에 레오니에와 트라가 동시에 바리아를 가리켰다.
“어어,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우리 엄마.”
레오니에가 꺄륵 웃으며 바리아의 허리를 껴안았다.
“공작님께서 마님을 들이셨나요?”
깜짝 놀란 테온 남작의 안경이 콧대에서 떨어졌다.
“아니에요!”
바리아가 그런 거 아니라며 황급히 부정했다.
“히잉, 내 엄마 해죵.”
레오니에가 상체를 부르르 떨며 애교를 부렸다. 안색이 파리해진 바리아가 벌벌 떨었다.
“아가씨! 이러다 제가 공작님께 죽어요!”
“침대 위에서?”
“공작님께 이를 거예요, 정말.”
얼굴이 빨개진 바리아가 최종 수단을 꺼냈다. 그제야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떨어졌다. 겨우 숨을 돌린 바리아는 테온 남작에게 부탁했다.
“그냥 평범하게 입을 수 있게 해 주세요.”
“평범은 무슨.”
레오니에가 냅다 끼어들었다.
“그날 연회에서 가장 눈부신 주인공이 되도록 꾸며 줘요.”
“여부가 있을까요.”
테온 남작이 중대한 임무를 받은 기사처럼 묵직한 고갯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으아아, 아가씨…….”
바리아가 안절부절못했다.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레오니에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지금 우리 아빠랑 같이 연회에 갈 거잖아.”
레오니에는 마냥 바리아를 놀리거나 곤란하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모든 귀족 앞에서 언니가 우리 편으로 자진해서 들어왔다고 말할 거잖아.”
황실 연회에는 귀족 중 가장 귀족다운 이들만 초대받는다. 그런 곳에 펠리오와 함께 가는데, 기성품 따위를 입고 아무런 꾸밈 없이 보낼 순 없었다.
바리아는 그곳에서 가장 완벽해야 했다. 보레오티와 함께 있는 바리아가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보여 줘야 했다.
“언니는 언니네 가족들한테 복수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
“내가 너희 없이도 이렇게 잘 산다는 거, 당당하게 보여 줘야지!”
아기 맹수가 드레스를 척 가리켰다.
“군말 말고 입어!”
레오니에의 으르렁거림에 바리아가 흠칫했다.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저 작은 몸에서 해일처럼 흘러넘쳤다.
그러나 바리아는 두려움보다 든든함을 느꼈다.
“보레오티는 언니 편이야!”
힘이 넘치는 한마디, 한마디가 바리아의 자신감을 북돋워 줬다. 기어코 바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앞으로 모아 쥔 두 손엔 울컥하는 감정을 꾹 참으려는 듯이 힘이 바짝 들어갔다.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아가씨.”
바리아가 숙였던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럼 잘 입겠습니다.”
친절에 정말 감사하다며, 바리아가 드디어 거절 대신 감사함을 입에 담았다.
“들었지요, 남작?”
레오니에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돈은 얼마든 주겠어요! 이 아름다운 여성분께 어울리도록 수선해 줘요!”
* * *
바리아의 드레스 문제가 해결되니, 다른 건 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테온 남작은 바리아의 치수를 잰 뒤에 서둘러 가게로 떠났다. 그 뒤엔 트라가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테이블 위에 수많은 보석과 장신구를 펼쳤다.
“이, 이게 다 뭔가요?”
바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앞에 펼쳐진 무수한 보석들의 반짝임 때문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주인님께서 바리아 님께 선물하신 것들입니다.”
“이, 이걸 다요?”
“연회 전까지는 외출을 삼가시는 게 좋다면서, 광장에 있는 보석점 물건들을 전부 다 사 오셨습니다.”
트라는 부담 없이 고르시면 된다고 친절히 말했다. 그러나 바리아는 도저히 부담을 안 느낄 수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차마 보석을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트라, 아빠가 내건 안 사 줬어?”
레오니에가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물었다. 트라가 레오니에를 보며 살짝 웃었다.
“공작님께서 어서 빨리 시계 도안을 그려 내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아빠 짜증 나……!”
신경질 난 레오니에가 바닥을 발로 쾅쾅 찍으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그래도 곧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와, 바리아에게 뭐가 어울릴지 하나하나 가져다 대며 골라 줬다.
“드레스가 검정이니까, 보석은 색이 별로 없는 은색이나 흰색으로…….”
레오니에는 즐겁게 보석을 골랐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것보다 남의 것을 골라 줄 때가 가장 즐거운 법이었다. 소녀는 왜 하녀 언니들이 저를 그렇게 꾸며 주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작 바리아는 보석이 몸에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창백해졌다. 하지만 보레오티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도와준 보레오티를 위해 부담감과 죄송한 마음을 꾸욱 참았다.
“보석을 다 정하면 남은 건 어떻게 하나요?”
바리아가 저와 레오니에를 지켜보던 트라에게 물었다.
“다시 돌려주는 거지요?”
“보레오티 사전에 반품은 없습니다.”
트라가 확실히 말했다.
“맞아, 반품은 없어!”
레오니에가 따라 말했다.
“대신 보레오티를 가지고 사기를 칠 경우엔 그것들 목숨이 없지.”
얼떨결에 어마어마한 보석을 손에 쥐게 된 바리아는 혼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레오니에는 그 틈에 얌전해진 바리아의 머리 위로 다양한 장신구를 얹으며 꺄륵꺄륵 즐겁게 놀았다.
“그런데 언니.”
그렇게 한참 놀던 중.
“언니는 귀족이면서 왜 이렇게 놀라?”
레오니에가 물었다.
소녀는 바리아의 반응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아원에서 자란 저도 보레오티의 재력에 여러 번 놀랐지만, 이젠 익숙해지다 못해 아주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바리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쪽은 태생이 귀족인데 보석 같은 귀중품에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
“그게…….”
바리아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이런 건 보통 동생이…….”
에르바누 백작 가문은 나름의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재력을 지녔다. 하지만 백작 부부는 큰딸인 바리아보다 작은 딸인 로타를 더 챙겼다. 어쩌다 바리아에게 질 좋은 보석이나 선물이 들어와도, 로타가 항상 울고불고 떼를 쓰며 빼앗아 갔다.
“아이씨, 진짜.”
우물거리는 바리아의 말에 레오니에가 진심으로 짜증을 부렸다.
“미친 인간들 같으니!”
“괜찮아요, 전.”
바리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딴 것에 미련 같은 거 없었다. 물론 저도 처음에야 부럽고 로타에게 주기 싫은 욕심을 지니었다. 하지만 한 번 죽고 나니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런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조차 역겨웠다.
“히잉, 우리 언니…….”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꼬옥 껴안았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리아가 저를 걱정해 주는 레오니에의 팔뚝을 조심히 도닥였다.
“그래도 이 많은 건 부담스러워요. 그냥 빌리는 식으로 하면 안 되나요?”
“에이, 그건 우리…….”
“보레오티 이름에 먹칠이지요.”
어느새 나타난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말을 싹둑 잘라 끼어들었다.
“아빠!”
아기 맹수가 뾰로통 심통이 잔뜩 난 볼을 부풀렸다. 자기가 하려고 했던 말을 빼앗은 거로도 모자라 멋진 척까지 하며 끼어드는 아빠가 아주 얄미웠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펠리오가 테이블 위에 펼쳐진 보석 위에서 머뭇거리는 바리아의 손을 바라봤다.
“그, 그럴 리가요!”
바리아가 서둘러 손을 숨겼다.
“내 생각이 짧았군요.”
테이블 위의 보석들을 살피던 펠리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바리아는 찡그려진 그의 미간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보석을 너무 적게 준비했군요. 이 정도면 고를 맛도 없지.”
“아니야, 아빠.”
다행히 이번엔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도와줬다.
“언니가 너무 많아서 부담스럽대.”
“이게?”
펠리오가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는 레오니에의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드레스도 도움을 받았는데, 이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아직 구두도 안 왔는데?”
“구, 구두요?”
“언니 그럼 맨발로 가려고 했어?”
“거 취향 참…….”
맹수 부녀가 바리아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쯤 되자 바리아는 좀 억울했다.
‘내가 당신 둘을 그런 눈으로 봐야 한다고요…….’
제게 호감을 보여 주는 건 너무 고맙지만, 바리아는 이런 대가 없는 선물들을 이유 없이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감히 자신이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보레오티가 자신을 받아 주었다고 해도, 저는 엄연히 이방인이었다. 바리아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다짐했다.
저 사이좋은 부녀 사이에 끼어들어선 아니 되었다. 괜히 익숙해져 주제 파악 못 하고 친한 척 굴다가 되레 미움받을 수도 있었다. 괜한 기대에 홀로 상처 입는 경험은 죽음을 선물로 준 제 가족을 겪은 것으로 충분했다.
바리아는 문득 쓸쓸해졌다. 보레오티에 와서 마냥 기뻤던 감정이 폭삭 사그라들었다.
“머리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때, 커다란 손이 쑥 튀어나왔다.
“이런 건 잘 모르는데.”
어느새 바리아의 뒤에 선 펠리오가 상체를 숙여 보석들을 살폈다.
바리아의 초록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얀 셔츠로 덮인 그의 복부가 바로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얇은 옷감 너머로 무언가 불끈불끈한 것이 희미하게 비쳤다.
‘에구머니나!’
바리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근육의 아름다움을 몰랐던 시절, 복직근을 배꼽이라고 착각했던 저의 멍청함이 떠올랐다.
동시에 펠리오가 직접 저의 손을 잡아 그의 복직근을 하나하나 세어 주던 순간도 떠올랐다.
“눈은 어째서 감고 있습니까?”
펠리오는 그런 바리아를 이상하단 눈으로 바라봤다.
“누, 눈 부셔서요!”
“보석이요?”
“그, 그런 것 같습니다!”
태연한 척 대답하는 바리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진짜 맹하네…….’
펠리오는 오늘도 바리아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사람이 참 듬직하고 똑 부러진 것 같다가도 종종 어설프고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그 모습이 영 답답하거나 싫은 건 아니었다.
“잠깐 실례하지요.”
펠리오가 바리아의 머리칼을 쓸어 위로 올렸다.
숱 많은 머리 뒤에 감춰져 있던 귀가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살짝 열이 올랐던 둥글고 작은 귀가 아주 잠깐이나마 시원해졌다.
“만약 머리를 올린다면…….”
펠리오는 아까 눈여겨본 귀걸이 한 쌍을 집었다.
“이게 좋을 것 같은데.”
도톰한 귓불 아래에 길고 가는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가 닿았다.
“잘 어울리시네요.”
소곤거리는 듯한 펠리오의 낮은 음성이 바리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허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두 귀에 다시 열이 오르려고 했다.
“뭔데, 뭔데?”
레오니에가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와아, 예쁘다!”
“내 안목이 좋지.”
“하여튼 무슨 말을 못 해.”
조금만 치켜세워도 저렇게 자화자찬을 하니,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가볍게 노려봤다. 하지만 펠리오의 안목은 정말 좋았다. 레오니에도 그 점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언니, 머리 묶을까?”
“머, 머리요?”
“원래는 풀려고 했잖아.”
옷이 하도 까매서, 바리아는 조금이라도 덜 어색하게 평소처럼 머리를 풀고 싶다고 말했다. 레오니에도 거기엔 동의했다.
“풀지 말고.”
하지만 펠리오는 아니었다.
“묶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 아래를 쓸듯이 머리를 올렸다. 잔머리가 촘촘히 남은 가느다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바리아는 이제 허벅지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아빠! 숙녀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다니!”
그때 레오니에가 떽, 하며 펠리오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그러는 거 아냐! 언니가 곤란해하잖아.”
“내 의견을 구했잖아.”
“그렇다고 막 만지란 게 아니야.”
레오니에가 어서 사과하라며 엄하게 말했다. 딸아이의 잔소리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사과했다. 바리아는 괜찮다며 애써 미소지었다.
“하지만 어울린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어느새 바리아 옆에 떡하니 자리 잡은 펠리오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난 안 어울리면 안 어울린다고 합니다.”
“어휴, 재수.”
레오니에의 삐친 소리에 펠리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레오 넌 크로키 일주일 더 압수다.”
“우리 아버님 재수 있다고용.”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며 레오니에가 어깨를 마구 떨며 애교를 피웠다. 펠리오는 아주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마지막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
바리아는 두 부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역시 가족이구나.’
전에는 신경을 안 썼는데, 오늘 다시 보니 무척이나 부러워졌다. 바리아는 이런 자신의 속마음이 아주 더럽고 치졸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보석에 욕심을 내는 게 훨씬 덜 속물적일 것 같았다.
“언니! 바리아 언니!”
그때,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연회 다녀오면 어떻게 엿 먹였는지 들려줘요!”
“여, 엿이요?”
“에르바누랑 올로르 골탕 먹이는 거요!”
기다리고 있겠다며 레오니에가 방실방실 웃었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다. 그만 레오니에를 꼭 껴안아 줄 뻔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두 부녀가 부러워 서글펐는데, 제게 이렇게 웃어 주는 아이를 보니 또 가슴이 뭉클해졌다.
“별로 재미없을 텐데요?”
바리아가 용기를 내어 레오니에의 삐져나온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난 이런 거 엄청 좋아해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걸 아주 좋아한다며, 아이가 해맑은 미소로 잔인한 취향을 드러냈다.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펠리오가 남의 집 애를 보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바리아는 그런 펠리오를 말없이 응시했다. 할 말은 많으나, 차마 지금 제 입장이 입장인지라 주제넘게 참견은 하지 않겠단 뜻이었다.
세 사람은 그 뒤로 장신구를 이것저것 고르며 구경했다. 주로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어울릴 법한 것들을 골라 건넸고, 바리아는 반쯤 체념한 채로 꾸역꾸역 그걸 받았다.
“으흐흥, 흐음.”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긴 머리를 땋아 주며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괜찮겠지?’
바리아가 손에 들린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쓸어 만졌다. 그녀는 여전히 저에겐 부담스럽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니 조금은 뻔뻔해져도 될 것 같았다.
어느샌가 흐물흐물 풀린 입가는 철딱서니 없게도 계속 올라갔다.
‘이럴 수가…….’
한 발치 떨어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트라는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 펼쳐진 이 모든 걸 직접 보고 있는데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너무 충격이라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트라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전에도 한 번 겪은 바 있었다.
바로 레오니에였다.
기척을 죽인 침묵과 허전함만 있던 보레오티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맹랑한 꼬마 아가씨는 따뜻한 온기와 시끌벅적한 웃음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트라는 그때 겪었던 행복한 기적을 또 한 번 경험했다.
“언니, 이것도 어울리겠다.”
“레오 넌 참 보는 눈도 없다.”
“아빠가 고른 건 너무 고지식해.”
“기품 넘치고 우아한 거지.”
“두 분 다 보는 눈이 참 좋으세요.”
맹수 부녀는 바리아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바리아는 그 속에서 둘을 중재하며 조곤조곤 무언가를 말했다. 두 보레오티는 그에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곧 레오니에는 까르르 웃으며 바리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펠리오는 은근슬쩍 바리아 곁으로 몸을 더 가까이 숙였다.
‘이거 어쩌면…….’
세 사람을 한참 바라보던 트라의 가슴 속에 작은 희망 하나가 싹텄다.
“정말 어쩌면……!”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희망을 말하려던 찰나였다.
“공작님!”
벌컥, 하고 열린 문 너머로 멜레스가 나타났다. 다급한 부름과 함께 나타난 멜레스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고 왔다.
“눈사태……?”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멜레스에게로 향했다. 바리아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펠리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오니에가 괜찮을 거란 듯이 바리아의 손을 꼭 잡아 줬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도 그리 썩 밝진 않았다.
‘눈사태라니.’
레오니에가 서둘러 머리를 움직였다.
‘지금 눈사태가 생길 만한 곳은 북부밖에 없잖아.’
당장 1황자의 생일 연회가 일주일이 채 남지 않은 지금, 제국은 완연한 봄이었다. 수도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은, 이 따뜻한 봄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찬 바람이 부는 북부뿐이었다.
그리고 북부에서 눈사태는 아주 심각한 사안이었다.
역시나, 이를 전해 들은 펠리오의 표정도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 느긋하기만 했던 그의 여유로움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보고하는 멜레스 또한 얼굴 근육이 굳은 채였다.
“피해 지역은?”
“보레오티 영지 서북 지역입니다.”
펠리오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생겼다.
“주민들은 서둘러 대피시켰으나, 마물이 언제건 내려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
북부에서 눈사태는 곧 북부 산맥에 사는 마물들이 인가로 내려와 난동을 부릴 기회였다. 자칫하면 걷잡을 수 없는 큰 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북부로 출발할 준비를 지시하려던 펠리오가 멈칫했다.
‘빌어먹을……!’
그가 붉은 입술을 짓이겼다.
황실 연회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군.’
그깟 대수롭지 않은 황실 연회 때문에 수도로 내려온 것도, 황실 때문에 북부로 직행하는 게이트를 쓰지 못하는 것도.
“공작님!”
그때였다.
“어서 가세요!”
바리아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펠리오가 잠깐 망설인 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리아는 이를 매섭게 알아차렸다.
“뭐하시는 거예요! 당장 가지 않으시고!”
보레오티 맹수들에게 둘러싸여 수줍게 짓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재정부의 맹수가 그 자리에 있었다.
“……연회에 못 갈 수도 있습니다.”
펠리오가 말했다. 수도에서 북부까지 왕복으로 오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아슬아슬하게 일주일이 조금 안 되었다. 서둘러 다녀온다고 해도 연회에 늦는 건 각오해야 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바리아는 도리어 화를 냈다.
“그까짓 연회가 이번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기어코 바리아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당장 가세요.”
찰나의 망설임으로 고민하던 펠리오가 이내 결심한 듯이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합니다.”
“사과하실 이유 없습니다.”
걱정 말고 어서 다녀오라 말하는 바리아의 얼굴 위로 싱긋,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정말 괜찮고, 이 일로 마음 상할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 미소가 펠리오의 발목에 묵직한 족쇄를 채웠다. 이는 바리아가 원하지도 않은, 그리고 펠리오 본인조차 채워졌는지 모를 것이었다.
북부로 가야 하는 발걸음이 미련으로 머뭇거렸다.
“……아빠!”
그때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레오니에가 냉큼 손을 번쩍 들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자신 있는 소녀의 눈웃음은 아주 짓궂었지만,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 * *
펠리오는 곧장 북부로 향했다.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 바리아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바리아 역시 배웅하는 순간까지 자신은 괜찮으니 몸조심해서 다녀오라며 펠리오를 걱정했다.
“결혼이나 하고 그래!”
보다 못한 레오니에가 작작 좀 하라고 둘을 갈라놓을 정도였다. 평소였다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온갖 상상을 하며 기뻐했을 터나, 지금은 일이 일인지라 그럴 수 없었다.
결국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떠미는 등쌀에 말 위에 올라탔다. 그제야 기사들도 뒤따라 말 위에 올랐다. 바리아의 얼굴은 희미하게 붉어졌다. 레오니에가 외쳤던 ‘결혼’ 소리 때문에 괜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레오.”
펠리오는 마지막으로 레오니에에게 말했다.
“잘 부탁한다.”
“응!”
“힘들다 싶으면 깽판 치고.”
“진짜 그래도 돼?”
레오니에가 눈을 반짝였다.
“이젠 안 돼.”
치잇, 레오니에가 알겠다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알겠단 말은 제대로 뱉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한 번씩 눈에 담은 뒤에야 출발했다. 뿌연 흙먼지를 남기고 떠난 그들의 뒷모습은 빠르게 사라졌다.
레오니에와 바리아는 한참을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괜찮을까요…….”
바리아는 펠리오와 기사들을 걱정했다. 부디 북부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당연히 괜찮죠.”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저택 안으로 다시 데려가며 말했다.
“아빠랑 나, 기사들이 이번 겨울에 마물 사냥을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요.”
겨우내 했던 마물 사냥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정례 행사였다. 인가를 덮쳐 피해를 입힐 만한 마물의 수를 줄이고, 특히 사람을 잡아먹을 위험이 큰 마물 같은 경우는 산맥 안쪽으로 더욱 몰아넣는다.
눈사태로 사람이 다쳤으면 다쳤지, 마물로 피해를 입을 경우는 적었다. 그래도 항상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했다.
펠리오는 북부의 수장으로서 현장에서 이 모든 걸 지휘하고 살필 필요가 있었다. 잠깐의 방심이 큰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우리 아빠가 갔으니까, 금방 해결될 거예요.”
레오니에는 펠리오를 믿었다.
“우리 아빤 세계 최강이니까!”
아이는 아빠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지녔다. 바리아가 안도의 숨을 흘렸다. 레오니에가 저렇게 말해 준 덕분에 저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레스네 가족분들은 괜찮을까.’
다만, 보레오티 영지에 살고 있다는 레스의 가족들이 마음에 걸렸다. 주민들을 다 대피시켰다던 멜레스의 보고가 그나마 한시름 놓게 해 주었다.
‘그래도 편지를 쓸까.’
레스는 과연 이를 알고 있을까?
‘……편지는 위험해.’
하지만 바리아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자신은 보레오티에 있었다. 황실 내 기숙사에 기거하는 레스에게 보레오티 측에서 보내는 편지는 아주 위험할 수 있었다.
나중에 펠리오가 도착하면, 그때 조금 더 자세히 물어서 전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가씨.”
바리아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그, 아까 그 계획 말인데요.”
“응!”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제 바리아의 걱정은 펠리오가 아닌 레오니에를 향했다.
“안 괜찮을 리가 있나!”
레오니에가 씩씩한 미소로 답했다.
아이는 바리아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 마냥 좋았다. 펠리오가 저를 걱정해 주는 것처럼 가슴이 간질거리고 헤실헤실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언니, 내가 전에 뭐했는지 알아?”
“글쎄요…….”
애초에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바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기 맹수가 씩씩하게 말했다.
“내가 왕년에 황실 연회에서 맹수의 송곳니를 꺼냈단 말이지!”
레오니에는 자신의 소싯적을 자랑스럽게 들려줬다.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정작 이야기를 들은 바리아는 걱정이 배가 되어 갔다.
“이 언니는 만날 걱정만 하네.”
레오니에는 곧장 코니와 미아를 불렀다.
“내 옷들 전부 다 꺼내 줘!”
그것도 정장 위주로!
보레오티는 다시 연회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 * *
수비테오 황제에겐 세 자녀가 있었다.
티그리아 황후 소생의 2황자와 1황녀, 우시스 황비 소생의 1황자를 슬하에 두었다.
2황자는 매사 성실하여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성과나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
황녀는 어렸을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아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다. 다만 황후를 닮아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1황자는 태생부터 아주 기구한 인물이었다. 황후의 소생인 2황자보다 1년 먼저 태어났음에도, 8년 가까이 존재조차 인정되지 않은 혼외자로 바깥에서 지내었다.
“황제는 1황자를 아주 많이 아낀다고 해요.”
황실 연회가 열리기 전날. 바리아는 레오니에에게 황실의 복잡한 가정사를 들려주었다.
“언니는 1황자 본 적 있어?”
레오니에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호호 불며 물었다.
“딱 한 번 뵌 적 있어요.”
“어땠어? 난 아직 본 적 없어.”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황실과 깊게 연을 맺지 않기를 바랐고, 레오니에 역시 머리 아픈 건 질색인지라 황실과 벽을 두고 지냈다.
“황자 전하는…….”
바리아가 그때를 떠올렸다.
“상당히 묘한 분이셨어요.”
“묘해?”
예상 밖의 말에, 레오니에가 우유가 든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바리아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자 함이었다.
“저도 소문은 알고 있어요.”
1황자에 대한 소문은 빈말로도 좋은 내용이 없었다. 난폭하다는 사람도 있고, 글도 제대로 못 읽어서 편지조차 못 쓴다는 뒷말이 하수구 속 생쥐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그나마 유일한 칭찬이라면 난잡한 밤놀이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 사람들은 그 이유마저 못되게 말했다. 혼외자로 무시당하며 지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결혼 전에는 저와 같은 혼외자는 만들지 않는 거라고.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지만 바리아가 본 1황자는 소문과 아주 달랐다.
“바다, 같달까.”
“바다?”
바리아가 빗댄 표현은 아주 아름다웠다.
“아주 깊은 바다 같았어요.”
재정부에서 일할 적에, 바리아는 정말 우연히 1황자를 목격했다. 구석진 책장 사이에 자리 잡은 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바리아가 한참 도서관에서 자료를 반납하고, 새로운 것들을 대여하는 동안에도 1황자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어요.”
다시 떠올려 봐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신기한 광경이었다.
“진짜 다른 사람인 거 아냐?”
정작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원작 속 1황자는 ‘알고 보니 심성 고운 깡패’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깡패’였다.
그러나 바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정말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1황자가 있었던 곳에서 그가 읽었던 책을 확인해 봤다. 어느 철학가가 쓴 바다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문처럼 못된 분은 아닌 것 같았어요.”
“미친놈도 가끔 제정신인 척을 할 때가 있는 법이지.”
“아가씨.”
바리아가 쓴 미소를 지었다.
“소문에 휩쓸리는 건 좋지 않아요.”
바리아의 충고는 레오니에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본인 역시 악질적인 소문으로 꽤나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엔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었다.
“알았어…….”
레오니에가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슬그머니 삐져나온 입술은 그래도 영 못 미덥다는 뜻이었다. 바리아는 그거면 되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어쨌건, 드디어 내일이네요.”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내일은 바로 그 1황자의 생일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빠는 결국 못 왔네.”
삐죽 나와 있던 레오니에의 입술이 더욱 튀어나왔다.
일주일 전에 북부로 올라간 펠리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올라오겠다고 말했지만, 펠리오는 연회 전날인 오늘까지도 도착하지 못했다. 이미 밖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무사히 돌아오시는 게 중요하죠.”
바리아가 괜찮을 거라며 레오니에를 다독였다. 씩씩한 척은 다 했지만, 사실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매일매일 보고 싶었다.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쓸쓸함을 알아채고 밤마다 찾아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줬다.
“언니, 오늘도 같이 자.”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온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손가락을 쥐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
바리아가 흔쾌히 말했다. 레오니에와 함께 자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바리아의 마음에 든 건 커다란 침대였다. 지금껏 바리아가 본 침대 중에서 가장 넓고 포근했다. 어지간한 성인 네 사람도 거뜬히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방에 있는 침대는 이보다 더 크다고 말해 줬다.
“나 어렸을 때는 아빠랑 종종 같이 잤었는데.”
이불 속에 들어간 둘은 잠들 때까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나 다 컸다고 같이 안 자.”
아이는 저랑 같이 자주지 않는 아빠가 조금 밉다고 말했다.
“공작님은 항상 아가씨를 생각하세요.”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손바닥 아래 아이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가씨는 이제 많이 크셨으니까, 공작님이 혹여 아가씨가 불편하실까 봐 조심하시는 거예요.”
“아는데, 그래도 조금 속상해.”
“공작님도 그만큼 속상하실 거예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바리아는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그 사람이 무섭기로 소문난 북부의 검은 맹수가 맞는지 의문이었다.
“……부러워요.”
잠이 조금씩 찾아오는지, 바리아의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았다. 살짝 흐려지는 정신은 저도 모르는 새 제 가족들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전 제 가족이 너무 미워요…….”
“많이, 미워?”
조용히 듣던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끌었다. 바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을 따라 이불이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왜 그랬던 걸까요?”
“뭐가?”
“부모님은 제 머리 색이 잘못되었다고 했어요.”
“이렇게 예쁜데?”
“부모님은 잘못되었다고 했어요.”
선명한 분홍색 머리는 에르바누 가문의 상징이었다. 아버지인 에르바누 백작도, 여동생인 로타도 아주 예쁜 분홍색을 지니었다. 하지만 바리아는 아니었다. 마치 잿가루나 석탄 부스러기가 묻은 것처럼 탁하고 어두운 분홍색이었다.
“저는 늘 덜된 아이였죠.”
잠결에 생각해도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상한 차별 이유였다. 그깟 머리 색이 도대체 무어라고 저와 여동생을 그렇게 차별했던 걸까.
사람들은 종종 이상한 기준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맹목은 사람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끝내 죽일 때도 있었다.
바리아가 그랬다.
바리아는 그렇게 죽었다.
“다시 생각하니 너무 부끄러워요.”
“뭐가?”
“처음 만났을 때요.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잖아요.”
바리아는 로타와의 다툼을 레오니에에게 보인 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다.
“언니 동생, 대단하긴 했어.”
원작으로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악랄해서 깜짝 놀라긴 했다. 그 기력을 조금 더 긍정적인 곳에 썼으면 세상은 더욱 발달했을 거다.
“정말 대단한 동생이죠.”
기어코 졸음을 참지 못한 바리아가 눈을 감았다. 레오니에는 이불을 끌어 바리아의 어깨까지 덮어 주며 등 언저리를 토닥거려 줬다.
통통, 느리게 두드려 주는 손짓에 바리아의 의식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 머리 장식이 갖고 싶어서, 그런데 그걸 제가 안 줘서…….”
완전히 잠들기 전, 바리아가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절 호수에 빠트렸었죠…….”
곧 바리아는 깊은 잠에 빠졌다.
“……고생 많았어, 언니.”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잠든 얼굴을 복잡한 시선으로 잠시 바라본 뒤, 저도 그 옆에 꼭 붙어 눈을 감았다. 연회에서 로타를 만나면, 머리 가죽을 뜯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난 어린걸.’
영악한 열두 살은 로타의 머리를 쥐어뜯는 상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연회 당일은 선선한 날씨였다.
“비가 안 와서 다행이에요.”
하늘을 올려다본 바리아는 크게 안도했다. 적어도 펠리오가 수도로 돌아올 때는 날씨가 험상궂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가 연회에서 깽판 치기에도 딱 좋은 날이고!”
“아가씨…….”
바리아가 그럼 안 된다고 타일렀다. 펠리오는 떠나기 전에 분명 깽판은 안 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아기 맹수는 아빠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때처럼 송곳니로 황제 쓰러트리고 그러진 않을 거예요.”
“황제를 쓰러트리셨어요?”
“금방 일어났어요.”
팔다리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되었다며 레오니에가 딴청을 부렸다. 태연한 척 휙휙 부는 휘파람 소리가 아주 얄미웠다.
1황자의 생일 연회는 해가 느지막이 지는 오후부터였다. 레오니에와 바리아는 점심을 다 챙겨 먹고 소화까지 시킨 뒤에야 연회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가씨는 괜찮을까요?”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던 바리아가 중얼거렸다.
“연회가 너무 늦게 열리니까, 혹시라도 졸리거나 피곤하시면…….”
“괜찮습니다.”
시중을 들던 하녀가 싱긋 웃었다.
“아가씨께선 5년 전 연회에도 무사히 참석하셨답니다.”
레오니에는 이미 밤늦게 열리는 연회에 참석한 경력이 있었다. 철저하게 사악했던 일곱 살 꼬꼬마는 황제에게 똥을 투척하기 위해 낮잠도 실컷 자두었다.
다행히 오늘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날의 연회는 늦은 밤에 열렸지만, 오늘은 느지막한 오후부터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레오니에도 열두 살이 되어 밤늦게 움직이는 게 전만큼 무리되는 일이 아니었다.
“바리아 양!”
그때, 레오니에가 찾아왔다.
“숙녀의 방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똑똑, 문을 두드린 소녀는 정중한 신사 흉내를 내며 바리아를 불렀다. 방 안에 있던 바리아와 하녀들이 소리 죽여 웃었다.
“물론이죠.”
“그럼 염치 불고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레오니에의 까만 눈이 점점 커졌다.
“와아! 언니 너무 예쁘다!”
레오니에가 발꿈치까지 높이 들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머나, 아가씨.”
놀란 건 바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헤헤, 멋지지?”
한껏 힘줘 차려입은 레오니에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레오니에는 그야말로 펠리오의 축소판이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연회에 입고 갈만한 건 이것뿐이더라고.”
머쓱한 미소와 함께 만지작거리는 정장엔, 희미한 빛이 나는 자수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전신을 덮은 검정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이라곤 목에 맨 새하얀 타이와 브로치뿐이었다.
“공작님보다 더 멋있으세요.”
바리아가 진심으로 말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좀 낫지!”
레오니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덕분에 아래로 내려 묶은 머리가 흔들거렸다. 레오니에가 평소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언니도 예뻐!”
바리아 곁으로 쫄쫄 다가간 레오니에가 헤벌쭉 웃었다.
“너무 예뻐서 아빠한테 보이기 싫을 정도야.”
소녀는 테이블 위에 준비된 보석과 장신구들을 둘러봤다. 전부 다 펠리오가 떠나기 전에 손수 골라준 것이었다.
레오니에는 그중 귀걸이 한 쌍을 들었다. 펠리오가 가장 먼저 골라줬던 물방울 모양 귀걸이였다.
“하여튼 아빠 안목은 진짜…….”
짜증 날 정도로 좋았다.
펠리오가 고른 귀걸이는 소름 끼칠 정도로 바리아와 잘 어울렸다. 바리아도 이젠 다른 건 몰라도 이 귀걸이만큼은 저와 가장 어울린다고 자신했다.
“1황자한테는 미안하지만.”
레오니에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바리아 양이 주인공일 겁니다.”
“말투가 어쩐지 익숙한데요?”
바리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의 손을 레오니에에게 내밀었다.
“아빠 흉내를 좀 냈지.”
레오니에가 아는 신사 중, 가장 멋지고 근사한 이는 누가 뭐라 해도 펠리오였다.
* * *
1황자의 생일 연회는 아주 성대하게 열렸다.
황제의 편애 박힌 자식 사랑을 증명하는 꼴이었고, 덕분에 1황자를 지지하는 황제파 귀족들의 어깨엔 힘이 잔뜩 실렸다. 그들은 연회장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채 연회를 마음껏 즐기었다.
정작 생일 연회의 주인공인 1황자를 비롯한 황실 일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탓에 황제파는 여기가 진짜 자기 세상인 것처럼 굴었다.
반면 나머지 귀족들은 가장자리에 모여 황제의 자식 차별을 몰래몰래 욕하며 음료만 홀짝거렸다. 그들에게 오늘 이 자리는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보레오티 공작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까?”
파르두스 후작 영식과 우르마리티 백작이 구석 발코니에 모여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발코니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연회장을 보며 물었다.
유독 사람이 많이 모인 무리가 눈에 들어왔는데, 역시나 새빨간 머리가 가운데에 떡하니 있었다. 레무스 올로르가 또 입을 놀리며 자랑질을 하는 모양인 듯했다.
나중에 저 머저리와 친한 척해야 한단 생각에 벌써부터 연회장을 떠나고 싶었다.
“오늘 저택에 사람을 보내 보니 아직 도착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상황을 전달했다.
“아무래도 북부와 수도 간 오고 가는 시간 문제가 가장 클 터이지.”
“여기나 저기나 다들 고생이군요.”
“피해는 생각보다 적은 모양이라 하더이다.”
“그럼 다행입니다.”
후작 영식이 고개를 가볍게 움직였다. 북부에 남은 막냇동생과 그 가족들이 너무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결혼해서 행복해 죽겠다던 루페의 얼굴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연회를 제집 안방처럼 돌아다니는 올로르를 보자니 흐뭇했던 마음이 차게 식어 갔다. 특히 그 옆에 착 달라붙어 떠드는 분홍 토끼도 영 거슬렸다.
“요새 너무 기어오른단 말이죠.”
“에르바누?”
“지난 모임에서 특히 그랬죠.”
아직 귀족 회의 명단에 정식적으로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으면서, 에르바누는 감히 보레오티에게 제 딸을 내놓으라고 공개적으로 역정을 냈다. 그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주제 파악 못 하는 붉은 백조와 어울리더니 그런 점도 배운 모양이었다.
아니면 원래부터 주제 파악을 하지 못했든가.
‘후자일 쪽이 크지.’
그러니 성인도 안 된 딸을 서른이 훌쩍 넘은 남자와 약혼시키는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을 테고.
‘그 딸도 보통이 아닌 것 같지만.’
파르두스 후작이 붉은 머리 백조 옆에 있는 또 다른 분홍 머리를 찾아냈다.
길 한복판에서 제 언니인 바리아를 붙잡아 난동을 부리고, 보레오티 영애에게 악담을 퍼부었단 건 이미 파르두스 후작 영식의 귀에 다 전해진 뒤였다.
이쯤 되니 정말 저런 집안에서 바리아가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라 여겨졌다.
그때였다.
“……소란스럽군요.”
우르마리티 백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말한 소란이 벌어진 곳은, 올로르와 에르바누가 있는 중앙이 아니었다. 후작 영식도 무언가를 눈치채고 그 너머를 바라봤다.
“보, 보레오티……!”
문 앞을 지키던 궁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공작 대리, 바리아 에르바누 백작 영애이십니다!”
* * *
“후우…….”
“언니, 괜찮아?”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걱정했다.
둘은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는 연회장 문 앞에서 잠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가 열린 지 좀 되어서, 문 앞을 지나가는 귀족들은 없었다. 그 말인즉, 저 앞에 어지간한 귀족들이 다 모여 있단 뜻이었다.
“조금 떨리네요.”
“등 좀 쓸어 줘?”
“괜찮아요.”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원래 무슨 일이든, 주인공이 등장할 때가 가장 두근거리는 법이지요.”
“오오! 언니 멋진데!”
“공작님 흉내를 조금 내봤어요.”
“우리 아빠 흉내 안 내어도.”
레오니에가 오른팔을 내밀었다. 바리아가 자연히 왼팔을 그 위에 얹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꼬옥 쥐었다.
“언니는 주인공이야.”
“아가씨도요.”
“난 늘 주인공이야!”
둘은 눈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곧장 연회장 문을 바라봤다. 문 밑으로 쏟아지는 화려한 빛과 시끌벅적한 소리가 그들의 발끝을 적셨다.
“시끄럽게도 노는군.”
레오니에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했다.
“어디 한번 놀라게 해 볼까?”
문밖을 지키던 기사들이 소녀의 말 한마디에 굳게 닫혔던 문을 허겁지겁 열어 주었다.
동시에 사람들의 이목이 입구를 향했다.
수많은 시선이 레오니에와 바리아를 향했다. 바리아는 움찔했지만, 옆에 있던 레오니에가 잡아 준 손 덕에 들썩이는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그때, 바싹 올려 묶은 머리 덕에 훤히 드러난 귀걸이가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바리아를 안심시켜 주는 이는 레오니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펠리오도 귀걸이를 통해 바리아를 진정시켜 주고 있었다.
바리아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문 앞을 지키던 궁인이 머뭇거리며 앞을 막아섰다.
“이 연회에 영애께서는…….”
“영애로 온 게 아니라.”
궁인이 하는 말을 다 이해한 레오니에가 말을 싹둑 자르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떡하니 내밀었다. 바로 펠리오가 떠나기 전에 쥐여 준 공작 대리 위임장이었다.
“보레오티 공작님의 대리로 이곳에 왔다. 그러니 아무 문제 없어.”
눈앞까지 친히 와 준 위임장을 읽는 궁인의 눈이 점점 커졌다.
“문제라도 있나?”
“어,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왔다고 알려.”
레오니에가 연회장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올로르를 아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불쾌감 가득한 날 선 눈빛에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정자 기증자가 계시네.’
붉은 머리 백조.
레무스 올로르.
그리고 옆에는 아주 예쁜 분홍 머리도 함께였다.
“저, 그럼 옆에 계시는 분은…….”
궁인이 레오니에 옆에 있는 바리아를 흘깃거렸다. 바리아를 살피는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갔다.
“아버님의 소중한 분이시지.”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바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동시에 귀에 달린 물방울 모양 귀걸이가 흔들렸다. 바리아의 뽀얀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바리아 에르바누 백작 영애시다.”
“저…….”
바리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주 크게, 말씀해 주세요.”
모두가 들어줬으면 싶다. 바리아 에르바누는, 스스로 가족을 버리고 보레오티로 향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보, 보레오티……!”
“레오니에 보레오티.”
더듬거리며 시원찮게 외치는 기사의 말을, 레오니에가 친절히 바로 잡아 주었다. 기사는 움찔했으나 아까보다 훨씬 좋은 발성으로 실수 없이 이름을 불렀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공작 대리, 바리아 에르바누 백작 영애이십니다!”
두 사람은 궁인의 우렁찬 소개와 함께 화려하게 등장했다. 뚜벅뚜벅 연회장을 걸어가는 두 사람에게로 무수한 시선이 꽂혔다.
“보레오티 영애잖아?”
“영애가 여긴 어떻게…….”
“아까 못 들었나? 공작 대리라잖아!”
귀족들은 조금 전 궁인이 외친 ‘공작 대리’란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럼 공작님은 안 오시는 건가?”
“북부에 눈사태가 났다고 들었어요.”
“그걸 처리하러 가셨나 보군.”
“한데 영애에게 벌써 대리를 맡겼다고?”
“후계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시겠군.”
레오니에의 등장은,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후계 계승이 무탈하다 못해 너무도 잘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보레오티 공작이 당장 어린 딸에게 작위를 물려줘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보레오티가 탄탄하단 것을 증명해 냈다.
그러나 공작 대리란 주제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에르바누 백작 영애?”
어느 귀부인에 바리아를 알아보았다.
“올로르 자작한테 시집간?”
“그건 둘째예요.”
“에르바누한테 딸이 둘이나 있었소?”
사람들의 시선은 레오니에 옆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향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는 주로 감탄과 의문이 가득했다.
“어머, 진짜 놀랄 일이야…….”
조금 전 바리아를 알아본 귀부인이 부채로 제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저렇게 예뻤나?”
에르바누 가문의 딸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둘째 딸 로타를 먼저 떠올린다. 선명한 분홍 머리가 탐스러운 로타는 누가 보아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인이었다.
거기다 실세 중의 실세인 올로르 자작 가문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르바누의 첫째 딸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에르바누 백작이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다. 그저 입만 열면 자랑하는 것이 둘째 딸 로타일 뿐이었다.
그나마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큰딸이 머리가 비상해 재정부 행정관으로 취직했단 사실만 알뿐이었다.
그래서 오늘 나타난 바리아는 실로 충격이었다.
“소문이 잘못된 모양인데요?”
누군가가 감탄을 내질렀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그 말에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가장 먼저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바리아의 탁한 분홍색 머리였다. 한껏 올려 묶은 머리가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무언가를 뿌리거나 손을 쓴 것이 아닌, 바리아 본연의 머리 색이 만든 아름다움이었다.
곧장 눈을 아래로 내리면, 전신을 휘감은 검은 드레스가 고결한 자태를 뽐내었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드레스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짙은 검정은 바리아의 몸의 윤곽을 전부 다 드러냈으나,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바리아의 온몸을 감싼 검은 드레스에서 유일한 노출이라곤, 트인 치마 사이로 걸을 때마다 드러나는 오른쪽 다리뿐이었다.
“저 안 이상하죠?”
긴장한 바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다들 언니가 예뻐서 쳐다보는 거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요.”
후우, 바리아가 긴 호흡으로 긴장을 애써 풀려고 노력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모습에 뭇 귀족 남성들이 헛기침을 토하며 귀를 붉혔다.
‘주제에 보는 눈은 있어서.’
레오니에가 그들을 같잖아하며 흘겨봤다.
“튀어나오면 내가 다시 입 안으로 넣어 줄게.”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니에가 지나치게 굳은 바리아를 힐끔 살폈다.
“언니 너무 긴장했는데?”
“당연하죠…….”
바리아의 손바닥엔 땀이 그득했다. 막상 연회장에 들어설 땐 의외로 괜찮았는데, 중앙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언니.”
레오니에가 살짝 걸음을 틀었다. 자신들을 발견하고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에르바누 백작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인 사냥감이 알아서 다가오곤 있지만, 바리아가 너무 긴장해서 당장 그와 만나기엔 좀 그랬다.
“이거 정말 의외네요.”
그때, 가까이서 지켜보던 오르티오 후작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티오 후작!”
레오니에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 오르티, 오 후작님……!”
그러나 바리아는 너무 긴장한 탓에 말을 더듬었다. 다행히 크게 눈에 띄는 모습은 아닌지라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는 못했다.
“후작 부군도 오셨군요!”
레오니에가 오르티오 후작 부부를 기쁘게 반기자, 다가오던 에르바누 백작이 걸음을 주춤했다.
“제 남편이 공작 영애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혹여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닐까요?”
여전히 부드럽고 고운 얼굴을 지닌 후작 부군이 조심히 물었다.
“그럴 리가요.”
레오니에가 방긋 웃었다. 오히려 덕분에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오르티오 후작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리아를 바라봤다. 후작 부군 역시 바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소개가 늦었네요.”
레오니에가 먼저 바리아를 소개했다.
“후작, 후작 부군. 저의 파트너인 바리아 양이랍니다. 바리아 양. 이분들은 오르티오 후작과 그 부군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제게 친절히 대해 주셨답니다.”
레오니에는 일부러 바리아에게 후작 부부를 먼저 소개했다. 그에 후작 부부는 적잖이 놀랐다.
본래라면 작위가 높은 자신들이 먼저 바리아에게 소개되어야 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작위가 높은 후작 부부에게 먼저 바리아를 소개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점이었다.
“원래 바리아 양은 아버지의 파트너로 여기 올 예정이었답니다.”
레오니에가 마저 바리아를 소개했다.
“그런데 아버님이 바쁘셔서, 부족하나마 제가 함께 왔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리아라고 합니다.”
바리아의 인사에 후작 부부의 표정이 더욱 오묘해졌다. 두 부부는 바리아가 상당히 궁금해졌다.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바리아를 정조준했다.
“공작님의 파트너셨군요.”
“네, 네에.”
긴장을 채 풀지 못한 바리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에르바누 백작의 딸이고…….”
끝말을 흐린 오르티오 후작의 입가에 곧 요염한 미소가 지어졌다.
“여보,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웃으면 어떡해요.”
질투 나게.
후작 부군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당신도 정말. 여기가 누구 앞이라고.”
나중에 돌아가면 혼내줄 거라며, 후작이 은근슬쩍 부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시네요.”
레오니에가 호호 웃었다. 영악한 공작 대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실은 저희 아버님께서도 바리아 양과 사이가 좋으시답니다. 이 귀걸이 보이시지요?”
“그럼요. 아마 여기 있는 귀부인들이라면 다들 보았을걸요?”
후작의 말은 정말이었다. 바리아의 존재, 탁한 분홍색 머리, 검은 드레스 다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저 물방울 모양 귀걸이였다.
“아버님께서 선물하셨답니다.”
“어머나, 공작님께서 선물하셨다고요?”
레오니에의 의도를 눈치챈 후작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곁눈질과 귀동냥으로 힐끔 살피기만 했던 귀족들이 너도나도 술렁거렸다.
“드레스도 너무 아름답지요?”
“물론이죠. 동부식 드레스군요.”
멋지게 소화했다며 후작이 바리아를 칭찬했다. 바리아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수줍어했다. 오르티오 후작은 같은 여자가 보아도 심장이 콩콩 뛸 만큼 근사한 분이었다.
“제 증조모님의 드레스랍니다.”
레오니에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바리아가 입은 검은 드레스를 손으로 척척 가리키며 마구 자랑했다.
“대대로 이어져 온 드레스인데, 이 역시 아버님께서 바리아 양께 선물하셨지요.”
“어머, 세상에나…….”
오르티오 후작이 이번엔 진심으로 놀랐다. 가문 대대로 이어져 온 드레스를 가문의 여자가 아닌 다른 이가 입었다는 건 놓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헛소문을 좋아하지 않는 후작조차도 머릿속에서 펠리오와 바리아에 대한 기묘한 상상을 펼치고 있었다.
‘아주 좋아.’
레오니에는 그런 후작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천하의 오르티오 후작까지 이러한데, 다른 귀족들은 오죽할까.
‘난 거짓말은 안 했어.’
레오니에는 오로지 진실만 말했다.
펠리오와 바리아는 사이가 제법 괜찮았다. 바리아의 드레스도 선물로 준 것이고, 귀걸이며 장신구까지 다 펠리오의 선물이었다. 바리아의 원래 파트너도 펠리오였다.
하지만 사귀지는 않았다.
레오니에는 이걸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 * *
“이게 도대체…….”
에르바누 백작은 말을 잃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이 화려한 연회가 오롯이 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제게 잘 보이려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귀족들의 태도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미 마음만큼은 대귀족이었다.
각 지역의 수장들도 그의 눈치를 보며 가장자리에서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이를 힐끔 훔쳐보던 에르바누 백작은 토끼처럼 폴짝 뛰고 싶었다. 주책인 건 아나, 정말 나이를 잊어버리고 그리 오두방정을 부릴 뻔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공작 대리, 바리아 에르바누 백작 영애이십니다!”
궁인의 우렁찬 외침만 없었다면.
백작은 처음에 무언갈 헛들은 줄 알았다. 보레오티 공작이 급히 북부로 올라갔단 이야기는 들었다.
그 틈을 타 보레오티 공작저에 있는 딸을 데려오고 싶었으나, 공작보다 더하다는 공작 영애가 마음에 걸려 그러지도 못했다.
거기다 일전에 수도에 방문했던 로타가 공작 영애에게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했다며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백작은 공작 영애가 제 아비를 닮아 독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며 혀를 찼었다. 과연 어미 없이 자란 것답다고 욕도 했었다.
그리고 그런 것과 함께 가 버린 바리아를 매우 탓했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그딴 곳으로 간 큰딸을 혼내 주려고 벼르던 참이었다.
그래도 백작은 자칭 인자한 아버지라서, 올로르와 함께 참석한 모임에서 만난 보레오티 공작에게 용감하게 분노하며 딸을 내놓으라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에르바누 백작은 그때 보레오티 공작이 짓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한심하고, 기가 막히고. 마치 벌레보다 못한 것을 보는 듯한 경멸 어린 눈빛.
그 시선 하나에 곧장 기가 눌린 에르바누 백작은 입을 다물고 술만 연신 퍼부어 마셨다. 그의 입에서는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란 말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바리아……!”
에르바누 백작은 기어코 이를 갈았다. 자신은 그런 취급까지 당하면서 제 딸을 걱정하고 챙겨 줬는데, 저 망할 것이 기어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다.
어쩌자고 보레오티와 함께 연회에 나타난 것인가. 그것도 보레오티를 상징하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공작 대리랍시고 등장한 저 어린 것과 팔을 걸고 시시덕거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아버지!”
어느새 곁에 다가온 로타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제 둘째 딸의 표독스러운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바리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보레오티 공작 대리?”
“영애가 공작 대신 왔나 봐요.”
“그럼 옆에 계신 분은…….”
“왜요, 그 에르바누의…….”
귀족들의 속닥거림은 전부 바리아를 향했다.
“장인어른.”
그때, 레무스 올로르가 에르바누 백작을 조심히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붉은 머리가 눈이 부신 레무스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의 인상은 단숨에 백작의 노기를 가라앉혔다.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레무스는 백작을 챙기는 동시에 로타도 자신의 곁에 불렀다. 사람들의 이목이 제 언니에게 쏠려 화가 난 로타는 화풀이를 하듯 레무스의 허리를 껴안았다.
“언니가 너무 미워요!”
“로타, 그래도 언니잖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언니를 걱정했는데…….”
어떻게 보레오티와 함께 나타날 수 있느냐며, 로타는 자신의 질투 어린 사심은 쏙 뺀 채 고자질했다.
“사정이 있을 거예요.”
레무스는 어린 아내의 등을 은근히 토닥거렸다. 장인과 아내를 살피는 젊은 백조는 마흔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동안 덕에 그는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긴 청년처럼 보였다.
“가서 자초지종을 물어보심이 어떨까요?”
“그, 그래야겠군.”
“그래도 딸이니, 아버님 말씀에 대답해 주실 겁니다.”
레무스의 은근한 재촉 탓에, 에르바누 백작은 얼떨결에 바리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리아는 에르바누 백작이 섣불리 접근하기 힘든 사람들과 계속 함께였다.
오르티오 후작 부부를 시작해 헤스페리 후작 부부, 북부의 골수 귀족들까지 두루두루 만나 인사를 나누며 대화를 꾸려 갔다.
덕분에 에르바누 백작은 이 넓은 연회장에서 혼자 처량히 서 있었다. 특히 커다란 산만 한 우르마리티 백작이 저를 힐끔 노려볼 때면 괜히 움츠러들었다.
“공작 영애 아니신가요?”
그때,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바리아의 곁으로 갔다. 에르바누 백작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비교적 다른 귀족들보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만만했기 때문이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
아니나 다를까. 레오니에는 후작 영식이 다가오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반갑습니다, 공작 영애.”
“공작 대리거든요, 지금은?”
“예, 공작 영애.”
“짜증 나…….”
하여튼 이놈의 파르두스는 볼 때마다 제 속을 박박 긁었다. 싱글벙글 올라간 입꼬리가 어찌나 능글맞은지, 진짜 가끔은 손가락으로 올라간 입가를 축 내려버리고 싶었다.
‘저 집안은 능글이 유전인가?’
후작만이 아니라 그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인 테르조차 얄미웠다.
이쯤 되니 저들과 한 핏줄인 루페가 참 대단했다. 그는 전혀 능글거리거나 얄밉게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펠리오와 저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잘해 주자.’
레오니에는 나중에 북부로 돌아가면 궁디팡팡을 해 주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파르두스 후작이 레오니에 옆에 있던 바리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둥글게 휜 눈웃음이 곧 사르르 풀렸다.
“오랜만이군요, 바리아 양.”
“파르두스 후작 영식…….”
바리아가 경계하듯 그 이름을 불렀다.
“재정부에서 정직당하고 일을 그만둔 것치고는 잘 지내시는군요.”
“……누구 덕분에요.”
이젠 보레오티와 파르두스의 은밀한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바리아는 여전히 파르두스가 어려웠다. 오랫동안 저들을 황실의 충신으로 알고 지낸 시간 탓이었다.
“아버님의 귀한 분이십니다.”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쌌다. 후작 영식이 그 모습을 신기하단 듯이 바라봤다.
제 딴엔 바리아를 지켜 주려고 그런 것 같지만, 도리어 엄마한테 칭얼거리는 딸처럼 보였다.
“그러십니까?”
“그렇답니다.”
“흐음, 확실히 그렇게 보이는군요.”
후작 영식이 바리아의 검은 드레스를 가볍게 흘겨봤다.
“잘 어울리십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등 뒤에 숨긴 주먹은 좀 풀어 줬으면 싶었다. 후작 영식의 시선을 느낀 레오니에도 똑같은 것을 보았다.
‘이 언니 성깔 있네.’
이 와중에 주먹을 쥘 줄이야. 레오니에는 그런 바리아가 그냥 너무 귀엽고 멋졌다.
“공작 대리.”
그때, 후작 영식이 웃음을 지우고 어느 한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바리아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후작 영식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 곧 그가 뜻하는 바를 알아채곤 인상을 썼다.
“아버지…….”
에르바누 백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후작 영식이 얼마나 만만하면 저럴까.”
레오니에가 고소하단 듯이 비웃었다. 할 말 없는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으음, 하고 심히 불쾌한 기색으로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도 에르바누 백작에게 자신이 만만히 보였다는 것이 심히 충격이었다.
“저도 아직 멀었군요.”
“구경이나 하고 가요.”
“그러지요, 뭐.”
그래도 만만히 보인 덕에 즐거운 구경을 하게 되었다. 에르바누 백작에게 경고하는 건 나중에 해도 괜찮았다.
“바리아 언니.”
레오니에가 미리 경고했다.
“나 지금부터 언니 아빠 가지고 놀 거예요.”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려도 된다고, 레오니에가 아주 크게 배려했다.
“……공작 대리.”
바리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오기에 찬 미소를 지었다.
“전 이미 패륜아랍니다.”
“그럼 마음 놓고!”
큰따님의 허락까지 받은 아기 맹수가 기분 좋게 으르렁, 울었다.
“바리아!”
에르바누 백작은 오자마자 다짜고짜 바리아를 사납게 불렀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어라? 이게 무슨 소리지?”
레오니에가 귀에다 손을 고깔처럼 얹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바누 백작이 없는 것처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웬 50대 아저씨가 자기 발가락을 입에다 쪽쪽 무는 소리가 들리는데?”
“푸하!”
방심하고 있던 후작 영식이 냅다 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입술을 꾹 깨문 그는 어깨를 파르르 떨며 등을 돌렸다.
바리아는 경악으로 굳어졌다. 제 아버지를 저런 식으로 모욕하는 사람은 태어나 처음 봤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대체로 바리아와 후작 영식을 반씩 섞은 반응이었다.
레오니에의 모욕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작 당사자인 에르바누 백작만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채였다.
“요즘 황실 하수가 문제인가.”
수질이 너무 안 좋네, 레오니에가 알코올이 없는 음료를 홀짝였다. 정작 소녀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에르바누 백작을 향하지 않았다.
“……윽!”
에르바누 백작이 뒤늦게 반응했다.
“고, 공작 영애! 지금 뭐라……!”
“파르두스 후작 영식.”
시끄러운 소리에 인상을 와락 쓴 채, 레오니에가 파르두스 후작 영식을 불렀다. 가까스로 웃음을 진정시킨 그가 겨우 허리를 들었다.
“지금 내가 누구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요?”
“저, 그리고 바리아 양과 안부를 주고받고 계셨습니다.”
후작 영식이 친절히 설명해 줬다.
“그런데 이상하다.”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어디서 이리 환청이 들리나.”
그리고 냅다 에르바누 백작이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후우, 불었다. 수치스러워진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요즘 수도가 혁명적이네.”
홀로 여유로운 레오니에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러다 공화정 되는 거 아냐?”
툭 던진 농담 한마디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레오니에가 말한 공화정은 신분을 막론하고 만민이 평등한 상태에서 우두머리를 선출하는 제도를 뜻했다.
귀족도 없고, 황실도 없는.
모두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레오니에는 조금 전 저와 파르두스 후작 영식을 보고도 인사하지 않던 에르바누 백작의 작태를 완벽하게 꼬집었다.
“그럼 우리 모두 통성명을 해 볼까요?”
레오니에는 에르바누 백작의 무례함을 황권에 반하는 행위처럼 몰아갔다.
“아니지, 나이 어린 내가 그대들께 먼저 인사를 해야겠군요.”
팔을 활짝 벌리며 레오니에가 자신들을 지켜보던 모두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해맑은 목소리로 제안하는 소녀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여기서 눈치 없이 통성명하자고 대답하는 건, 제국에 반하는 역도가 되는 꼴이었다. 레오니에가 만들어 낸 흐름에 연회에 초대받은 모두가 휘말리고 말았다.
‘와…….’
바로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바리아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생애에서, 이토록 강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었다. 나이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레오니에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이 마구 샘솟았다.
“왜 그러죠, 백작?”
레오니에가 물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매섭게 번뜩이는 검은 눈이 에르바누 백작을 향했다.
“그, 그건…….”
에르바누 백작이 몸을 잘게 떨었다. 순간 그는 크고 까만 맹수가 자신의 숨통을 꿰뚫고 씹어 버리는 환각을 겪었다. 그러나 떨리는 손으로 더듬거린 몸은 멀쩡했다.
착각임을 알았음에도,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백작은 그제야 알아챘다. 자신은 지금 저보다 한참 어린 열두 살 꼬마에게 겁을 먹은 상태였다.
“……보레오티 공작 대리.”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그도 레오니에의 살벌한 농에 꽤나 당황한 상태였다. 그 탓에 에르바누 백작을 돕는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좋은 날 왜 이러십니까.”
“좋은 날이라 더욱 이러는 겁니다.”
레오니에는 오늘 열린 연회가 1황자의 열여섯 번째 생일 연회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 말에 백작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바리아는 저러다 아버지가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지,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공작 대리의 깊은 뜻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깨우쳤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냐는 후작 영식의 물음에, 숨죽이던 귀족들이 그제야 어설프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던 정적은 그렇게 사라졌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합시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에르바누 백작의 팔뚝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백작에게 저나 공작 대리는 자식뻘이지 않습니까. 다 친근한 마음에서 그런 것일 테지요. 그렇지요, 백작?”
그러니 나한테도 인사를 안 했지.
물어오는 말에 에르바누 백작이 흠칫했다. 말 그대로 제 자식뻘인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혼이 난 뒤에야 그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에르바누 백작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레오니에는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바라봤다.
“귀, 귀빈 여러분……!”
그때였다.
심상치 않던 연회 분위기를 살피던 시종이 겨우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시종이 이번 연회에 참석하는 황실 일가를 차례차례 불렀다. 불리는 이름 중엔 예상대로 ‘황녀 전하’는 빠져 있었다.
“……때맞춰 오네.”
레오니에는 처음으로 황제에게 감사했다. 정신이 사납던 와중에 때맞춰 등장해 줘서 끓어오른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바리아가 아이의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 주며 물었다.
“언니야말로 괜찮아?”
“저요?”
“내가 아까 언니 아빠 막 대했는데?”
사람이 아무리 가족을 미워해도, 그놈의 핏줄이 뭐라고 안쓰러워하고 용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레오니에만 해도 펠리오와 아무리 물고 뜯어도 마지막은 항상 화해하고 용서했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바리아는 자기 자신을 ‘패륜아’라고 칭했을 만큼 가족을 증오했다. 원작을 아는 레오니에는 바리아가 얼마나 가족을 미워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혹시 모르는 것이었다.
“뭐랄까…….”
바리아가 말을 조심히 골랐다.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답하는 바리아 스스로조차 놀란 것처럼 보였다.
“연민을 조금 느꼈지만, 그건 정말 한순간이었어요.”
“…….”
“전 아주 못됐어요.”
그들의 처절한 밑바닥을 보고 온 후로, 이따금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언니, 그건 못된 게 아니야.”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아주 독한 거지.”
못된 것과 독한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못된 건 나쁜 거였다. 선악으로 따지자면 대체로 ‘악’이었다. 하지만 독한 건 수단이었다. 사람들이 착하다고 말하는 ‘선’도 독할 수 있었다.
“북부는 독한 걸 좋아하지.”
레오니에가 바리아와 함께 위층 발코니를 바라봤다. 곧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언니 뒤에 항상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
“……이러다 저 버릇 나빠져요.”
“까짓 나빠져.”
레오니에가 생각하기엔, 바리아는 조금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았다.
“난 그런 언니도 좋아할 거야.”
무한한 신뢰를 받은 바리아는 기분 좋은 울컥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보레오티와 함께한 이후, 바리아의 두 다리가 디딘 자리는 점점 단단해졌다.
곧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가 시작되었다.
* * *
“……공작 대리?”
수비테오 황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보레오티 공작은 영지에 난 눈사태 때문에 북부로 향했다고 합니다. 대신에 공작 영애가 자리했다고 합니다.”
궁인이 전하는 말을 듣던 황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5년 전, 저 간사하고 영악한 공작 영애에게 맹수의 송곳니로 크게 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수치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제 아비를 닮아 지독한 것.’
한참 속으로 레오니에를 욕하던 수비테오 황제의 입가에 곧 히죽, 미소가 걸쳐졌다.
‘저러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자신들의 오래된 계획이 이제 바로 코앞이었다. 북부 산맥에 숨겨진 ‘그것’만 손에 넣는다면, 저 천한 놈들을 제 발밑에 무릎 꿇게 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래서, 뭘 하고 있다지?”
기분이 조금 나아진 수비테오 황제가 물었다.
“함께 온 일행분과 연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일행?”
“에르바누 백작 영애입니다.”
“에르바누?”
황제의 되물음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에르바누는 수비테오 황제에게 새 비자금을 바칠 가문이었다. 얼마 전 올로르 자작의 추천으로 선심 쓰듯 명단에 끼워둔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가문의 영애가 보레오티와 함께 나타났다니. 수비테오 황제의 의문을 눈치챈 궁인이 재빨리 사정을 설명했다.
이를 듣는 황제의 얼굴엔 언짢음이 가득했다.
“자식 하나 다루지 못해서야.”
이제 황제에게 에르바누 백작은 한심한 놈으로 분류되었다. 황제는 백작이 자신을 아주 조금만 닮았어도 그럴 일은 없었을 거라 자부했다.
한편.
“…….”
옆에 있던 티그리아 황후의 표정은 상당히 기묘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쓰레기들이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황제에게서 금세 눈을 뗀 황후는 연회장을 장악한 검은 꼬마 신사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지난번 리네 백작저에서 만날 때도 느꼈지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제가 남자인 것을 알더군요.’
황궁으로 돌아가던 길.
스칸디아는 제게 공작 영애와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들려주는 이야기는 티그리스 황후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특히 가장 놀랐던 점은, 레오니에가 5년 전 황실 연회를 몰래 훔쳐보러 왔던 아홉 살 스칸디아의 몸을 보고 단번에 그를 알았단 점이었다.
“그럼 저도 일어나 보지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티그리아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오, 황후?”
수비테오 황제가 물었다.
“1황자의 생일 연회를, 황후인 제가 그냥 구경만 하며 있을 수는 없지요.”
나름 선심 쓴단 듯이 대답한 황후는 곧장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황후 폐하는 정말 넓은 마음씨를 지니셨네요.”
조용히 싱글벙글 웃고만 있던 우시스 황비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사람이 조금 더 살가워야지.”
덕분에 황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황제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초록 머리가 싱그러운 우시스 황비는 사랑스러운 애교로 황제의 애간장을 살살 녹였다.
“알리스.”
그가 오늘 열린 연회의 주인공인 제 아들을 바라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황후 폐하는 좋은 분이시지?
묘한 표정으로 연회장을 내려보기만 하던 알리스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황비는 그런 아들을 마냥 웃으며 지켜봤다.
1황자 알리스.
알리스 벨리우스.
오늘로 열여섯이 된 그는 황실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아킬라’라는 중간 이름을 받지 못했다. 그는 황실 밖에서 태어난 혼외자였고, 지금도 여러 귀족파가 그 존재를 감히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를 닮진 않았네?’
레오니에는 귀족들 앞에서 인사하는 알리스 황자를 구경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초록색 머리칼이었다. 황제를 빼닮은 황금빛 머리를 지녔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우시스 황비 판박이였다.
‘성질머리 겁나 더럽다던데.’
알리스 황자는 제 부친인 황제를 닮아 인상만큼은 청량했다. 마치 산뜻한 레모네이드만 마시고 사는 숲속 요정 같았다.
“……아무쪼록 즐기시길.”
성의라곤 바닥에 뱉는 침보다 없는 인사였다. 그래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알리스 황자는 심드렁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생일 연회를 반기지 않는 듯했다.
“배가 불렀어.”
레오니에가 혀를 끌끌 차며 바리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생일을 무척 좋아하는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생일 파티 이야기만 꺼내도 여전히 방방 뛸 정도였다.
“저거 내 새끼였으면 패서 키운다.”
“아가씨…….”
바리아가 그런 말씀 말라며 다독였다. 누군가 들으면 큰일이었다.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훨씬 생기가 넘쳤다.
하하 호호 떠드는 귀족들 속에서, 레오니에와 바리아도 연회에 섞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력했다.
“바리아 양은 아버님의 소중한 분이시죠.”
레오니에는 만나는 귀족마다 바리아를 펠리오의 ‘소중한’ 사람이라 소개했다.
“공작님께 항상 배우고 있습니다.”
이어 바리아가 스스로 펠리오에게 찾아갔단 듯이 말했다. 동시에 자칫 오해를 살법한 레오니에의 모호한 표현을 ‘사무적’ 관계로 서둘러 고쳤다. 그럴 때마다 레오니에의 입술은 미세하게 삐죽거렸다.
“아.”
잠시 숨을 돌리던 중.
“왜 그러세요?”
“저기.”
레오니에가 가리킨 곳에 티그리아 황후가 있었다. 그녀는 친정아버지인 헤스페리 후작과 함께 있었다. 두 부녀는 의외로 평범하게 대화 중이었다.
그러다 레오니에와 티그리아 황후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둘은 곧장 고개를 휙 돌리고는 모르는 척했다.
“인사는 안 하시나요?”
바리아가 걸음을 옮기는 레오니에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직은 대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니까.”
아기 맹수는 위층 발코니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검독수리를 노려봤다.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수비테오 황제를 조심한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은 만나 봤자 좋을 게 없군요.”
“황후 폐하는 아군이야.”
그런 황후를 곤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바리아는 소녀의 깊은 뜻에 적잖게 감탄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목표 달성인가?”
레오니에가 목 언저리를 주물렀다.
“언니가 우리 편인 거 다 안 것 같은데.”
“많이 피곤하시죠?”
“피곤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레오니에가 저를 걱정해 주는 바리아에게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할 만큼 했으니…….”
바리아가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언니!”
“바리아.”
마치 두 사람만 있을 때를 기다린 것처럼, 붉은 머리와 분홍 머리가 다가왔다.
“아놔, 저 씨…….”
레오니에가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었다. ‘시’로 시작해서 ‘발’로 끝나는 걸쭉한 욕을 읊조리는 열두 살 아이를 보며, 바리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언니……!”
하지만 곧 눈물을 머금은 채 저를 부르는 로타를 보니, 바리아는 저도 레오니에가 했던 욕을 내뱉고 싶어졌다.
“올로르 자작 영식의 부인은 연극을 참 좋아하나 봐요.”
이거 연기하는 거 보소. 레오니에는 일전에 제 언니에게 손톱을 세우고 악을 쓰던 로타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 공작 대리…….”
“공작 대리께 인사드립니다.”
로타와 레무스는 우선 레오니에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조금 전 에르바누 백작이 당한 걸 전부 다 지켜봤기 때문이다.
“공작 대리.”
레무스가 먼저 말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바리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지나칠 정도로 공손한 저자세였다. 거기에 레무스의 어리고 선한, 심지어 조심스럽기까지 한 얼굴이 더해지니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
그러나 레오니에한텐 아니었다.
‘어지간하면…….’
마주하기 싫었다.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원작의 흐름이 가장 강한 지금, 레오니에라도 차마 막지 못하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이 있었다.
바리아가 그랬고.
레무스가 그랬다.
“저, 공작 대리?”
레무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노골적으로 빤히 응시하는 레오니에의 시선이 조금 불편해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대답 없이 여전히 레무스를 응시할 뿐이었다.
북부에 몰래 숨어들어 미성년자를 꼬드기고 데려갔던 도둑놈. 가짜 사랑을 속삭여 미성년자를 건드리곤 냅다 도망가 버린 천하의 쓰레기. 그래놓곤 아무 일 없단 듯이 또 미성년자랑 약혼해 태연히 살아가던 인간 말종.
‘정자 기증자.’
소녀는 그를 생물학적 친부라 부르기도 싫었다.
레오니에는 제 몸의 세포 분열에 딱 정자 크기만큼만 도움을 준 붉은 머리 기증자를 한참 노려봤다.
마음은 의외로 평온했다. 보자마자 얼굴 가죽을 뜯어 버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했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뭐.’
펠리오는 언젠가 레무스를 잘게 다져 마물의 먹이로 삼을 거라고 말했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잘 가라.’
레오니에가 일찌감치 명복을 빌어주었다. 저놈에겐 진혼곡도 아까웠다.
“바리아 양.”
그래도 더는 쳐다보기 싫어서, 레오니에가 시선을 휙 돌려 바리아를 불렀다.
“어떻게 하실래요?”
레오니에는 온전히 바리아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레오니에의 생각에 두 자매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저도 로타에겐 풀어야 할 앙금이 있었지만, 바리아를 위해 잠시 미뤄둘 수 있었다.
“……그럼 잠시만.”
바리아가 양해를 구하듯 레오니에에게 말했다.
레오니에는 흔쾌히 하란 듯이 손으로 올로르 자작 영식 부부를 가리켰다. 그리곤 한 발 물러섰다.
“저, 언니…….”
그제야 더듬더듬 말문을 연 로타가 바리아를 힐끔 바라봤다.
“그게 있잖아, 보고…….”
“용건만.”
바리아가 쓸데없는 동정을 얻어내려던 로타의 군말을 단번에 잘랐다.
“용건만 짧게 말해.”
“…….”
“아니면 갈 거야.”
“……너무한 거 아냐?”
매정한 언니의 태도에 상처 입은 로타가 기어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난 그냥, 언니한테 사과하려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로타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당연하게도,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단번에 모였다.
‘이것 봐라.’
레오니에는 이것이 로타가 의도한 바임을 알아차렸다. 로타는 조금 전 레오니에가 에르바누 백작을 몰아넣던 짓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자기 아빠가 나한테 당할 땐 가만히 있더니.’
헛웃음도 안 나왔다.
“우린 가족이잖아!”
“로타, 그만 울어…….”
“레무스…….”
“바리아도 다 이해할 거야.”
레무스가 로타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 줬다. 울먹이는 아내와 다정히 다독이는 남편의 모습은 만인의 동정을 받기에 딱 좋았다.
“무슨 일이래요?”
“가족끼리 싸웠나 봐요.”
“에르바누 백작 영애잖아요.”
“거 언니가 참 매정하네…….”
여동생이 저렇게 우는데, 그래도 언니인데 용서 좀 해 주지. 누군가의 탓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요. 그러니 가족을 버리고 공작한테 갔나 봐요.”
“재정부까지 들어간 인재라더니…….”
“지독하기도 하지.”
“아까 제 아버지인 백작한테도…….”
역시 곧 바리아를 탓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두 손으로 감춰진 로타의 입술이 헤벌쭉 올라갔다.
‘이야, 이 미친 것!’
그리고 이를 알아챈 레오니에의 전신에 간만에 닭살이 돋았다. 세상은 넓고 미친 자는 많다더니, 바로 눈앞에 미친 자가 있었다. 거의 코니에의 가면을 썼던 사우라 급이었다.
“로타.”
그런 술렁거림 속에서.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니?”
바리아가 물었다.
“그치만, 언니가 너무했잖아!”
“너 나한테 사과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 그건 맞지만…….”
로타가 머뭇거렸다.
“그런데, 왜 내가 너무한 거니?”
솔직히 바리아는 잘못이 없었다. 그냥 말 질질 끌면서 대화하는 게 귀찮아서, 간략히 용건만 말하라고 한 게 다였다. 로타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으니 말이 좀 격하게 나왔을 수도 있지만, 그게 잘못까진 아니었다.
오히려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바리아가 받아야 할 판이었다.
‘……거짓말.’
이딴 감정 팔이로 무작정 저를 나쁜 사람으로 몰고 가는 주제에 잘도 저를 가족이라고 불렀다.
‘가족도 아닌 주제에……!’
바리아는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저들은 ‘가족’이란 단어를 쓸 자격이 없었다.
“……그럼 나는?”
그때 레오니에가 끼어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려고 했는데, 바리아가 생각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를 빠르게 눈치챈 레오니에가 로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게는 사과하지 않는 건가?”
“고, 공작 대리…….”
예상치 못한 참견에 로타가 뒷걸음질 쳤다. 레오니에는 그저 질문 하나만 했을 뿐인데, 로타는 고작 그것만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작 대리.”
그때, 레무스가 끼어들었다. 겁에 질린 아내를 품에 숨기는 동작이 퍽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주변 분위기가 더욱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레오니에까지 바리아와 같이 묶었다.
물론 바리아만큼은 아니어도 ‘나이도 어린데…….’라는 마땅찮은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아아, 이놈의 나이.’
레오니에는 짜증이 났다. 살아온 세월만 합치면, 자신은 펠리오보다 연상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몸 때문에 공작 대리란 명칭마저 우습게 취급당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가족들의 일입니다.”
레무스가 미안한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레무스가 제게 ‘참견 말고 꺼지라’고 말했다.
“……와아, 진짜.”
순간 속에서 열불이 일어난 레오니에가 호흡을 한참 길게 내뱉었다.
“어디 찻잔 없나?”
있으면 당장 보스그루니 백작에게 배운 대로 저 두 치에게 차를 대접할 뻔했다.
“바리아.”
레오니에가 진심으로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며 찻잔을 찾는 동안, 레무스는 바리아를 바라봤다. 퍽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는 바리아의 전신에 소름을 돋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안 돼.”
“…….”
“미워도 가족이랬잖아요.”
레무스의 촉촉한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바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당장 저 역겨운 이상을 내뱉은 주둥이에 주먹을 찍어 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마저도 아까웠다. 저를 바라보는 눈을, 뭐든 좋으니 뾰족한 거로 찍어 버리고 싶었다.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표현해야지요.”
바리아는 기가 막혔다.
“터놓고 말하면 모두 이해하고 용서해 줄 거예요.”
터놓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고, 용서는커녕 살해당했다.
“우린 가족이잖아요.”
바로 저 말을 지껄이는 레무스에게 죽었다.
“언니…….”
그 틈에 로타까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바리아를 불렀다.
상황은 점점 바리아에게 불리해졌다.
지켜보는 귀족들은 이 소란을 구경하기 딱 좋은 집안 문제로 취급했다. 그것도 바리아가 나잇값 못하고 반항했단 쪽으로 몰아졌다. 저들은 이 소란을 연회의 구경거리 취급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변했어?”
로타가 바리아의 손을 꼭 쥐었다. 바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마치 다리 많은 벌레들이 피부를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돋아났다.
바리아가 기겁을 하며 손등을 털어 냈다. 그 탓에 바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안 좋아졌다.
“그만 집으로 돌아와.”
바라던 바를 이룬 로타는 마지막 피날레로 눈물까지 떨구었다.
“내가 사과할게!”
“……!”
기어코 울컥한 바리아가 주먹을 올리려던 찰나였다.
“……미친 새끼.”
레오니에의 한마디와 동시에, 어수선했던 장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로타 올로르.”
그래도 여태껏 보스그루니 백작에게 배운 예법을 지키고자 꾸욱 참고 있던 성질머리를, 아기 맹수는 끝끝내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주먹을 슬그머니 내리며 로타를 노려봤다.
“내가 그때 분명히 말했지?”
두 사람 사이엔 약속 하나가 있었다.
‘기대해도 좋아.’
‘이 사생아가 무얼 할지 지켜봐.’
얼어붙은 분위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제야 로타는 무언가가 이상하단 걸 알아챘다. 저와 남편이 몰고 갔던 동정 어린 분위기가 저의 연기로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보여 주마.”
흉포한 위압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네놈들에게 너무 만만하게 보여 어쩔 수 없이 물러서지만.”
레오니에에게서 풍기는 불쾌감과는 질이 전혀 다른, 저의 본능마저 쥐어짜는 공포.
“다음엔 네 머리 가죽을 친히 뜯어…….”
기대감 어린 소녀의 미소에 로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레오니에 탓도 있지만, 레오니에 탓만은 아니었다.
“……난리 났군.”
피곤이 느껴지는, 그러나 애정이 듬뿍 담긴 저음이 연회장에 울렸다.
동시에 바리아의 허리에 굵은 팔이 둘렸다. 힘이 바짝 실린 팔에 이끌린 바리아는 곧장 누군가의 품에 안기었다. 쾅쾅 뛰는 심장 소리가 귀를 두들겼고, 코로 훅 들어오는 짙은 체향에 머리가 아찔했다.
“우리 집 여자들은 어떻게 나만 없으면 깽판인지.”
펠리오가 혀를 가볍게 찼다.
* * *
“아빠아앙!”
레오니에가 남은 펠리오의 팔을 꼬옥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너흰 끝이야, 이제.’
큭큭큭.
조금 전까지 공작 대리로서 지니고 있던 예절은 다 던지고, 레오니에가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사악한 아기 맹수는 제국 최강이자 최흉인 아빠 맹수에게 차례를 떠넘겼다.
그리고 다짐했다.
반드시 훌륭한 맹수가 되어, 저에게 꽂히던 은근한 무시들을 전부 다 되갚겠다고.
“고, 공작님……!”
반면 바리아는 예상치 못한 펠리오의 등장에 눈만 한참을 끔뻑였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미친 듯이 달렸지요.”
덕분에 몰골이 말이 아니라며, 펠리오가 바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펠리오는 이곳 연회에서 가장 빛을 내고 있었다. 한껏 차려입은 정장은 평소 저택에서 입는 차림새와 분명 달랐다.
하지만 달려왔다는 말은 사실인지, 목에 두른 타이와 뒤로 넘긴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숨소리도 제법 거칠었다. 바리아가 그의 가슴 너머로 들은 빠른 심장 소리가 그 증거였다.
“옆에 있기 미안할 정도로군요.”
“네에?”
“바리아 그대가 아름답단 뜻입니다.”
남들에게 보여 주기 아깝군요.
제법 다정한 시선으로 바리아를 응시하던 펠리오가 눈꺼풀 한 번 내리기 무섭게 서슬 퍼런 맹수로 돌변했다.
연이어 터진 칭찬 세례와 다정한 호칭에 맥을 못 추던 바리아가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이, 이건 다 연기야!’
눈앞에 있는 공동의 적을 노리기 위한 사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타와 레무스는 펠리오가 등장하기 무섭게 굳어 버렸다. 정제되지 않은 펠리오의 위압감에 짓눌린 둘은 입 한 번 쉬이 뻥긋하지 못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는데.”
펠리오가 굳어 버린 연회 분위기를 살피며 말했다.
“1황자 전하의 생일 연회를 이런 식으로 망치다니.”
그리곤 이 모든 탓을 눈앞에 있는 레무스와 로타에게 돌렸다. 두 부부의 얼굴이 뒤늦게 수치심에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집안 문제면 말 그대로 집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왜 굳이 이 좋은 날에 끄집어내어 이 난리를 치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건 그렇지.”
군중 속에서 지켜보던 우르마리티 백작이 거들었다.
“황자 전하의 생일 연회에서 왜 굳이 집안일을 끄집어내는 건지.”
꾸지람 같은 우르마리티 백작의 한마디에 근처에 있던 케라타 자작이 타일렀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여기가 어딘지 잊을 만큼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케라타 자작의 말은 우르마리티 백작의 말에 반대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더한 지적이었다. 그는 올로르 자작 영식 부부가 황실이 준비한 연회를 저들 가족 문제보다 못한 취급을 했다고 몰아갔다.
‘오오, 자작 아저씨!’
레오니에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저 푸근한 순록 아저씨가 저런 고난이도의 돌려 까기를 선보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역시 북부인에게 예절은 쌈박질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그, 그건 그렇죠…….”
“이 좋은 날 왜 저런 소란을 만드는 걸까요.”
“에르바누 백작도 그러더니.”
“아빠랑 딸이 똑같네요.”
구경하던 귀족들이 너도나도 수군거렸다.
분위기는 다시 바뀌었다.
이제 흐름은 1황자 전하의 생일 연회를 망친 로타와 레무스를 향했다. 더욱이 이번엔 1황자 전하를 지지하는 황제파 귀족들마저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거참, 그걸 못 참고…….”
“부끄러워라. 예절도 못 배웠나 봐요.”
“태생이 좀 그렇잖아요.”
특히, 올로르의 비약적인 성장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들이 기다렸단 듯이 비웃었다.
‘역겨워라.’
정작 레오니에가 보기엔 저놈들이나 이놈들이나 똑같은 수준이었다. 펠리오가 왜 연회를 싫어하는지 또 한 번 깨달았다.
‘어쨌든 아빠는 대단해.’
레오니에는 새삼 펠리오를 다시 보았다. 그는 연회에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걸 장악했다. 펠리오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에 그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상황은 다 끝났다.
‘조금 짜증 나.’
레오니에는 자신도 펠리오처럼 멋지게 사람들을 휘어잡고 싶었다. 당당한 보레오티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엔 펠리오의 도움을 받고 말았다.
레오니에는 때맞춰 등장한 아빠가 고마우면서도 질투가 났다. 앞으로 자신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커서 위가 보이지 않았다.
‘……흥, 두고 봐라.’
그러나 아기 맹수는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엔 더 잘해 보겠단 투지를 몰래 불태웠다.
“그래서 뭐…….”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다정한 손길이 나 없는 동안 잘 해내겠다는 칭찬처럼 느껴졌다.
“히잉, 아빠아앙.”
감동한 아이는 조금 전 투지도 다 잊어버린 채 펠리오의 팔뚝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무슨 일로 이러는 겁니까?”
펠리오가 로타와 레무스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제야 굳었던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그, 그냥 가족 문제입니다.”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레무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반면 옆에 있는 로타는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허옇게 질린 안색이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 제 언니를 몰아붙이던 악바리 근성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사람과 장인어른께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바리아를 걱정…….”
“거참.”
펠리오가 기어코 헛웃음을 터트렸다.
“시간도 많지.”
펠리오는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처형의 거처에 쓸데없이 간섭하느냐고 레무스를 비꼬았다.
레무스가 얼굴을 붉혔다.
“……가족들에겐 중요한 문제입니다.”
레무스의 목소리가 한결 날카로워졌다.
“큰딸이 좋은 직장 구해서 일하는 게?”
펠리오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단 듯이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건지.”
바리아는 대외적으로 재정부 행정관직을 그만두고 보레오티 저택에 취직했다고 알려져 있다. 보레오티 저택의 직장 대우는 황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바리아 역시 보레오티에 취직한 직후엔 깜짝 놀랐었다. 저택 내 상주하는 가정 교사로 들어왔는데도 대우가 황실 행정관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몹쓸 짓이라도 할까 봐?”
펠리오가 피식 웃으며 바리아의 관자놀이에 코를 비볐다. 순간 비명을 지르려던 바리아의 귓가로 ‘미안합니다.’라는 펠리오의 사과가 전해졌다. 덕분에 입을 꾹 다물 수 있었다.
“우리 아빤 신사라서 그런 짓 안 하는데!”
누구랑은 다르게.
레오니에가 맞장구를 치며 레무스를 힐끔 노려봤다. 적의가 가득한 소녀의 눈빛에 레무스가 적잖게 당황했다. 그 스스로 찔리는 것도 많았다.
“……그래도 모르지.”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용주와 가정 교사라니.”
부드럽게 휘어진 미소가 온전히 바리아만을 향했다.
“너무도 매력적인 관계라서.”
* * *
“세상에, 방금 봤어요?”
“공작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다니!”
“정말 잘생기셨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이지요…….”
“제 심장은 아직도 쿵쿵 뛰어요.”
“어휴, 정말 주책이셔!”
펠리오가 바리아와 레오니에를 데리고 잠시 발코니로 나간 사이.
귀부인들은 조금 전 자신들이 보고도 믿지 못했던 광경을 열심히 떠들었다. 상상치도 못한 펠리오의 미소는 뭇 여성분들의 심장을 강하게 쳤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달려왔다는 말을 증명하듯 흐트러졌던 소매라든가, 흘러내렸던 앞머리를 도로 쓸어 넘기던 손짓이라든가. 무엇 하나 시선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인다던 검은 맹수는 또 다른 의미로도 사람을 죽였다. 과연 자식이 있어도 여전히 신랑감 후보 일 순위다운 미모였다.
“그런데 아까 그건…….”
누군가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심상치 않았지요?”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바누 가문의 큰딸이었지요?”
“머리가 탁한 분홍색이었죠.”
“아까 보니까, 공작님이 푹 빠지셨더라고요.”
“보레오티 영애도 엄청 따르고요.”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조만간 보레오티에 좋은 소식이 들리겠어요.”
어느새 모두 바리아가 보레오티의 새 안주인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조금 전 그 세 사람이 보여 준 모습은 사이좋은 가족 그 자체였다.
“그런데 에르바누 백작은…….”
여기까지 흐름이 이어지자, 귀족들은 조금 전 보았던 에르바누 백작과 올로르 자작 영식 부부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거죠?”
“먼저 사돈을 맺은 올로르의 눈치라도 보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보레오티인데?”
올로르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보레오티에 버금갈 바는 아니었다.
“……사실 비밀인데.”
무심히 듣고 있던 아비페르가 조심히 끼어들었다.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보레오티와 친분이 깊은 리네 백작 가문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신뢰감이 있었다.
“에르바누 백작 부부가, 둘째 영애 칭찬은 항상 하셨잖아요.”
그런데 누구 여기서 큰 영애 칭찬은 들어본 적 있으세요? 아비페르의 숨겨진 말뜻에 귀족들의 눈이 바쁘게 굴러갔다.
“마치 히에이나 백작 가문 같지 않아요?”
5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부모마저 등을 돌리고 포기했다던 하찮은 히에이나 백작 영애는 보레오티 공작의 비서진으로 취직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골수 가문인 리코스 자작의 부인이 되어, 얼마 전에 자식을 낳았다.
이후 히에이나 백작 가문은 딸의 재능도 몰라본 무능한 부모로 낙인이 찍혔다. 큰딸에게 은근히 가했던 정신적 학대도 알려져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런데 정말 의외네.’
귀족들이 알아서 소문을 부풀리는 모습을 부채 너머로 흐뭇하게 지켜보던 아비페르는, 문득 의구심을 품었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가?’
아비페르가 알기론, 바리아는 레오니에를 가르치는 평범한 가정 교사였다. 펠리오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카니스도 펠리오 본인에게 그렇게 들었다고 했다.
아마 조금 전 행동은 올로르와 에르바누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고 그런 연기를 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비.”
같은 생각이었던 카니스가 조심히 아내를 불렀다.
“뭐가 있어 보이지?”
다행이라면, 이전과 달리 카니스는 울 기색은 아니었다.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연회장을 나오자마자, 바리아가 펠리오를 탓했다.
“방금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가뜩이나 뜬소문 만드는 걸 좋아하는 족속들인데!”
바리아는 펠리오가 제게 치근거렸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쾅쾅 뛰고 얼굴 위로 피가 쏠려 눈앞이 아찔했다. 아직도 바리아의 코는 펠리오의 체향을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알아서 떠들겠지요, 뭐.”
“맞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정작 맹수 부녀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레오니에는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 주변을 긁적이다 펠리오의 옷에 슬그머니 닦는 여유로움까지 보였다.
그러다 들켜서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리는 벌을 받았지만.
“보레오티 사람들이라면 다 한 번씩 소문을 겪는걸.”
레오니에는 욱신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쓸며 펠리오를 가볍게 흘겼다.
“나도 어릴 적에 당했어!”
“그때 기분 나쁘셨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맹수의 송곳니로 다 죽여 버렸지롱.”
“네?”
“안 죽였습니다.”
펠리오가 딸아이의 허세를 빠르게 수정했다.
“그냥 죽을 것 같은 통증을 줬달까?”
그게 그거잖아. 뻔뻔한 두 부녀의 대화를 듣는 바리아의 얼굴은 싸늘히 식어 갔다.
“……일단,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드리지요.”
펠리오가 순순히 사과를 입에 담았다. 어쨌건 허락 없이 바리아의 몸을 건드렸으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바리아가 불쾌하게 느꼈다면, 펠리오는 아주 조금 서운할 것 같았다.
“기분은 안 나빴어요.”
바리아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냥 조금 놀랐습니다. 오히려…….”
공작님이 입으신 옷 위로도 선명히 드러난 흉근의 굴곡에 깜짝 놀랐다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고.
“…….”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뻔한 바리아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 언니 겁나 좋았나 봐.”
레오니에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거, ‘겁나’까지는 아니에요.”
바리아가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어쨌건 좋았네!”
“그, 그거야 공작님은 근사하시니까요!”
“그거 고백입니까?”
펠리오가 퍽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그는 저의 식지 않는 인기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놀라는 중이었다.
“역시 난 애가 있어도 대단하군.”
“뭐라는 거야, 이 아빠가.”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얼굴 잘생기고 근육 많이 있고 재산 측정 불가에 권력 지녔다고 자만하지 마.”
듣던 바리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 정도면 자만해도 아주 괜찮았다.
“아니, 어쨌건 말이지요.”
바리아가 산으로 가려던 대화를 서둘러 멈추었다. 이내 짧은 호흡과 함께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한 바리아가 펠리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펠리오의 방법은 조금 과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에르바누의 입을 완전히 다물게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자신을 둘러싼 오해가 마음에 걸리긴 해도, 그 덕에 바리아는 이전보다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걸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건 조금 분했지만, 분명 펠리오는 큰 도움을 주었다.
“고개 숙일 일은 아닙니다.”
펠리오가 바리아의 이마와 턱을 두 손으로 조심히 감싸 들어 올렸다.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어둠보다 짙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 모든 건 바리아 양 덕에 시작한 일입니다. 난 거기에 동의했을 뿐이고.”
“그렇지만, 저 혼자였다면…….”
“그 손으로 올로르 영식을 때렸을 테죠.”
꽤 볼만 했을 거란 펠리오의 은근한 놀림에 바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대가 날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펠리오는 바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았다. 원래도 맹수의 송곳니 때문에 사람의 생각을 잘 읽었지만, 바리아는 특히나 그 감정이나 눈빛이 잘 느껴졌다.
“오늘.”
사실, 펠리오는 바리아를 보자마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바리아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이거 뭐야.’
두 어른 사이에 끼어 있던 아기 맹수가 입을 쩍 벌렸다.
‘둘이 언제 나 몰래……!’
레오니에는 자기 몰래 진도를 나가신 아빠와 새엄마 후보를 한참을 번갈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