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황녀의 정체
“……아이씨.”
문득 레오니에가 짜증을 냈다.
“언니, 왜 그래요?”
레오니에를 마중하러 나온 우피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냥 기분이 나빠져서.”
“어디 아파요?”
“귀가 간지러워서.”
뜬금없는 말에 우피클라가 더욱 모를 표정을 지었다.
“누가 내 욕하는 것 같단 말이지.”
레오니에는 괜히 오른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귀가 간지러우면 누가 자신을 욕하고 있는 거라는 속설은 이곳 제국에도 퍼져 있었다.
‘아빠 같은데…….’
몸속에 깃든 맹수의 송곳니가 삐친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펠리오가 저에게 잔소리하러 오거나 뒤에서 변태라고 말할 때면 늘 이랬다.
‘욕은 지금 내가 할 판인데.’
레오니에는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걱정이 북부 산맥처럼 높아져 갔다. 펠리오와 바리아의 관계가 너무 메마른 것 같아 걱정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침대에서 운동한다던 두 주인공이, 열두 살 소녀의 교육에 마음이 맞아 전우가 되어 버렸다.
열두 살 소녀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내가 나설까?’
하지만 레오니에는 곧 포기했다. 연애라는 게, 옆에서 작전을 짜주고 도와준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결국은 다 당사자들의 몫이었다.
‘정 안 되면 울어야지.’
최악의 경우, 레오니에는 바닥에 드러누워 둘이 결혼하라고 울어 버릴 각오도 했다.
“언니 욕하는 사람 많을걸요?”
그때, 우피클라가 딴생각에 빠져 있던 레오니에를 불렀다.
“왜냐하면 보레오티잖아요.”
레오니에는 보레오티의 후계자로서 나날이 그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특히나 펠리오를 빼닮은 잘난 외모와 이기적인 뻔뻔함은 많은 이들의 찬양과 함께 비난도 받았다.
물론 그딴 건 레오니에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대놓고 하지도 못하는데, 뒤에서라도 하게 내버려 둬야지.”
“으음, 멋져!”
우피클라가 까르르 웃었다.
“그나저나 너 또 컸네?”
겨우 귀에서 손을 뗀 레오니에가 말했다.
“그래도 언니보다는 작아요.”
우피클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옛날엔 내가 더 컸는데.”
올해 열한 살이 되는 우피클라 리네 백작 영애가 투덜거렸다. 레오니에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넌 지금도 커.”
“더 크고 싶은걸요?”
“아니, 너 진짜 크다고.”
레오니에와 우피클라는 손가락 한 마디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레오니에가 열두 살 또래보다 월등히 크다는 점에서 볼 때, 우피클라도 만만치 않은 성장기를 겪는 중이었다.
“너흰 어렸을 때부터 컸어.”
오늘은 친구네에 놀러 간 우피클라의 남동생 피누도 쑥쑥 크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레오니에는 이들 리네 남매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우피, 너 기억 나?”
“뭐가요?”
“너 처음 우리 북부에 왔을 때, 나한테 잘 보이라고…….”
“으아아! 아아아!”
흑역사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우피클라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레오니에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놀렸다.
“새엄마, 왜 이래! 그때의 당당함은 어디 갔어!”
“언니, 진짜 창피하게!”
“지금이라도 잘 보일까? 으응?”
“너무해! 놀리지 마요!”
어느새 두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저택 안을 뛰어다녔다.
“이 왈가닥들.”
그러다 결국 아비페르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이들을 데리러 나왔다. 나무라는 말투와 달리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아비페르 님!”
레오니에가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어요?”
“레오니에 님도 잘 지내셨나요?”
“물론이죠. 어휴, 저 아까 우피한테 숨겨 둔 언니가 있는 줄 알았어요.”
어쩜 볼 때마다 이렇게 아름다워지시는지, 레오니에가 능청을 부렸다. 아비페르가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그렇게 칭찬하지 마요. 진짜라고 믿겠어요.”
“내가 언제 빈말하나요?”
“언닌 왜 또 우리 엄마 꼬셔요.”
우피클라가 슬그머니 아비페르 앞을 가로막으며 경계했다.
“임자 있는 분은 안 건드려.”
세 사람은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칠이 되어 있는 이곳은 유리창 너머로, 아름다운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이 보이는 응접실이었다.
그곳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송구합니다.”
레오니에가 치맛자락을 잡아 다소곳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은발의 여인에게 인사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제국의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 * *
레오니에와 티그리아 황후의 연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황 서거 이후 처음 열린 황실 연회에서, 레오니에는 맹수의 송곳니로 자신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렸다.
그때 몇 명에겐 딸기 우유 맛 사탕을 건네 미리 언질을 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송곳니에 당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황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티그리아 황후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레오니에의 여덟 번째 생일 때 선물을 보내 이에 대해 보답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참 이상하지?”
티그리아 황후가 찻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둥글고 넓은 찻잔 위로 향긋한 꽃내음이 솔솔 피어올랐다.
찻잔을 내려다보던 시선은 곧 레오니에를 향했다. 화사한 은발을 올려 묶은 황후는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빈말로라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지 못함에도 그런 어두운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연회에서 봤을 때는 그리도 처연하더만.’
달라진 인상이 신기했지만, 레오니에는 이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그깟 결혼은 감히 황후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보레오티 영애를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반갑고 기쁘구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오니에가 티 한 점 없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늘 존경해 오던 황후 폐하를 뵙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식…….”
옆에 있던 우피클라가 감탄하다가 아비페르에게 눈짓으로 주의를 받았다.
“그래도.”
레오니에가 조금 아쉽단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동그란 검은색 눈은 자신의 차림새를 어색하게 살폈다.
“지금 제 차림새가 감히 폐하의 곁에 있어도 될 정도인지…….”
내가 지금 황후 폐하를 만나서 좋긴 한데, 그래도 사람이 지켜야 할 게 있는 거 아니겠어요? 아오, 응접실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네.
수줍어하는 레오니에의 말엔 저만큼 긴 속뜻이 숨어 있었다.
“보레오티 영애는 부친을 닮아 무슨 옷이든 다 잘 어울리는데 무슨 걱정이니.”
넌 네 아빠 판박이구나.
티그리아 황후가 우아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멋진 모습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엔 연락하고 만나죠.
“오늘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마.”
다음에도 연락 안 할 거야.
응접실에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가득 퍼져 갔다. 꼬마 맹수와 호랑이 황후의 교양 넘치는 기 싸움이었다.
“우피, 잘 들어 두렴.”
사교는 저렇게 하는 거란다, 아비페르가 제 딸에게만 들리도록 속닥거렸다.
우피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피가 낭자한 전쟁터보다 무섭다는 사교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지?’
레오니에가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그러나 감히 제국의 황후에게 이곳에 온 이유가 무어냐고 함부로 물을 수도 없었다.
“리네 백작 부인과 친분이 있단다.”
마치 레오니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티그리아 황후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했다.
“친정이 그리울 때면 이곳 저택에 와서 차를 마시기도 한단다.”
아주 가끔만 그런다고 말하는 황후의 눈엔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레오니에는 저 그리움이 단순히 서부나 헤스페리 후작 저택을 향하지 않는다는 걸 빠르게 눈치챘다.
‘이벡스.’
황후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 레오니에는 티그리아 황후가 아직도 그를 잊지 못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황후의 애틋한 감정은 아주 잠깐이었다. 티그리아 황후는 곧 감정을 지우고 레오니에와 우피클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침 오늘 귀여운 두 손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뭐니. 그래서 살짝 고집을 부렸단다.”
“저는 황후 폐하와 함께해서 기뻐요.”
우피클라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의 순수한 대답에 티그리아 황후 역시 진심으로 고맙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폐하.”
레오니에가 아까부터 시선이 가는 곳을 가볍게 눈짓했다.
“뒤에 계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어머, 소개가 늦었구나.”
티그리아 황후가 줄곧 자신의 뒤를 지키던 젊은 기사를 소개해 줬다.
“내 호위란다. 같은 서부 출신이라 이따금 외출할 때 데리고 다니지.”
젊은 기사가 고개를 짧게 숙여 인사했다. 재가 섞인 듯한 은발이 찰랑거렸다. 레오니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체격을 보아하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성실한 성격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앳된 얼굴이 아직 어린 나이라는 걸 방증했다.
“…….”
곧 레오니에가 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응접실은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서로에게 호의가 가득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보통의 사교 모임과 다르게 편안한 분위기였다.
반면, 기사는 간단한 인사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폐하.”
잠시 후 기사가 티그리아 황후를 불렀다. 간단한 귓속말을 나눈 뒤, 기사는 양해를 구한다는 듯이 고개를 짧게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툭.
“어머나.”
레오니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괜찮아요?”
우피클라도 덩달아 놀라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티그리아 황후가 물었다.
“보레오티 영애가 차를 흘렸네요.”
“이런, 찻물에 데이진 않았는가?”
“괜찮습니다.”
레오니에가 별일 아니라며 손수건으로 얼룩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새하얀 손수건으로 찻물이 옮아 젖어 갔다. 그러나 노란 원피스에 남은 얼룩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황후 폐하, 실례지만 자리를 잠시 비워도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게.”
티그리아 황후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럼 하녀랑 같이…….”
“제가 여기 한두 번 오나요.”
무엇이 어디 있는지 다 안다며, 레오니에가 아비페르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홀로 응접실을 나왔다.
포근한 햇살과 향긋한 차향으로 가득한 응접실을 벗어나니 봄인데도 한기가 으슬으슬 느껴졌다. 소녀는 몸을 가볍게 떨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제법 빠른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갔다.
리네 저택에 몇 번이고 방문한 덕에, 레오니에의 걸음은 막힘이 없었다.
동시에, 복도에 있는 문 하나가 천천히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황후의 뒤에 있던 젊은 기사였다.
“여기 계셨네요, 기사님.”
레오니에가 다가가 기사에게 아는 척을 했다. 긴장을 풀고 있었던 건지, 기사가 어깨까지 움찔하며 깜짝 놀라 했다. 그러나 금세 자세를 고치곤 고개를 끄덕이며 편히 지나가란 듯이 몸을 옆으로 비켰다.
“잠깐만요.”
하나 레오니에는 가지 않았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소녀는 자신을 지나쳐 가려는 기사를 불러세웠다.
“전혀요.”
기사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변성기가 막 찾아온 소년의 목소리였다.
“저는 오늘 영애를 처음 뵙습니다.”
“정말요?”
“혹시 누군가와 착각하신 건 아니신지.”
“설마요.”
내 눈썰미를 뭐로 보고.
어느새 젊은 기사를 앞질러 온 레오니에가 발로 벽을 찍어 길을 막았다. 기사는 느닷없는 레오니에의 행동에 놀랐다가, 레오니에가 들어 올린 다리 위로 원피스 자락이 흘러내리는 걸 보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저기, 보입니다만…….”
“속바지 입었는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레오니에와의 대화는 지나치게 일방통행이었다. 기사가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푹 흘리며 눈앞의 소녀를 힐끔 바라봤다. 뭘 원하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저희가 초면은 아니잖아요.”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그렇죠? 황녀 전하?”
* * *
저택에 도착한 직후.
마중 나온 우피클라는 인사와 함께 레오니에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계셔요.’
원래라면 리네 모녀와 함께 셋이서 다과를 즐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손님이 갑자기 찾아와 버렸다.
‘괜찮아.’
레오니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티그리아 황후와 아비페르가 같은 서부 출신인 덕에 연이 깊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놀라긴 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를 진짜 당혹스럽게 한 건, 황후의 뒤를 지키던 젊은 기사였다.
‘스칸디아 황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어릴 적에 스치듯 만났던 스칸디아 황녀가 기사 정복을 입은 채 그 뒤에 서 있었다. 레오니에가 놀란 것처럼, 황녀 역시 응접실에 들어오는 소녀를 보자마자 눈을 움찔했다. 하지만 곧 태연히 굴었다.
“황후 폐하도 대범하시네요.”
레오니에가 팔짱을 낀 채 떠보듯이 물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이시는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답했다. 레오니에는 그 어쭙잖은 연기가 가소로웠다.
“황후 폐하께선 2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어머니이십니다.”
“대외적으론 그렇게 소문이 났죠.”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자칭 기사님께선 저에 대해 잘 모르시나 본데.”
레오니에가 대놓고 비웃었다. 살짝 삐져나온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행동에선 여유로움이 흘러넘쳤다.
누가 봐도 이 대화의 승자는 레오니에였다. 패배를 예감한 기사가, 아니, 스칸디아 황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녀 당신이 남자인 거, 난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
“우리 꼬마 황녀는 그때부터 골격 구조가 남달랐는걸?”
“그런 거로 알았다고요?”
황녀가 기겁했다.
“아하! 역시나.”
레오니에가 내 이럴 줄 알았다며 씩 웃었다. 스칸디아 황녀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걸 깨달았다. 패배감 짙은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레오니에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승리의 미소를 띤 레오니에의 표정이 얄미웠으나, 싫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황녀는 늘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살아왔기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봐 준 레오니에에게 일말의 감사함을 느꼈다. 물론 절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자리 좀 이동할까요?”
레오니에가 먼저 말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황녀가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엿들으면 곤란했다.
비어 있는 방 중 아무 곳에나 들어가자마자, 레오니에가 문을 잠갔다. 찰칵, 하고 고리가 걸리는 소리에 스칸디아 황녀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내가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잡아먹을 것 같은데요.”
스칸디아 황녀가 말했다.
“그래서, 뭘 원하십니까.”
“원하는 거 없어요.”
레오니에는 이미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스칸디아 황녀가 원래 남자인 것도, 그런 행색을 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부친을 많이 닮았네요.”
아니나 다를까.
“이벡스 경은 잘 지내시나요?”
‘부친’ 이야기에 스칸디아 황녀가 허리춤에 찬 검을 쥐었다. 어색했으나 나름 잔잔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살기로 뒤범벅되었다. 마물을 사냥해 본 레오니에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실력이었다.
하나 거기까지였다.
레오니에는 자신을 경계하는 황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흔들림 하나 없는 소녀의 눈빛에 도리어 스칸디아 황녀가 더 당황했다. 그깟 살기야, 검은 맹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건가?’
검을 쥔 모습이나 범상찮은 기운을 보아하니 저 나이에 벌써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소드마스터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건 확실했다.
‘나랑 두 살 차이였지?’
고작 열네 살에 저 정도 체격에 실력이라니.
레오니에는 장차 훌륭한 근육 덩어리가 되어 줄 스칸디아 황녀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얼굴도 반반한 것이 딱 제 취향이었다.
‘친하게 지내야지.’
으흐흐흐, 어딘가 섬뜩한 레오니에의 미소에 황녀가 주춤거렸다.
“왜 그런 식으로 보십니까?”
스칸디아 황녀가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보는데요?”
레오니에가 천연덕스레 물었다.
“꼭 저를 잡아먹을 것 같군요.”
“글쎄, 안 잡아먹는다니까.”
나중에 잘생긴 근육이 되면 모를 일이지만. 레오니에가 속내를 감추었다.
“그나저나 괜찮아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외출이 힘든 입장일 것 같은데.”
스칸디아 황녀는 말 그대로 ‘황녀’였다. 남자인 걸 숨기고 여자로 위장해 살아가는 그에겐 이런 외출은 위험 부담이 높았다.
“……그래서 이렇게 나온 겁니다.”
어느 정도 경계를 풀었는지, 스칸디아 황녀가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는 자신이 입은 기사복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었다.
“안에만 있으면 갑갑할 거라면서, 어머님께선 종종 저를 호위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럼 황녀 궁엔 누가 있어요?”
“대행이 있습니다.”
티그리아 황후를 모시는 시녀의 딸이 연기 중이었다.
“중요한 사실 같은데, 말해 줘도 돼요?”
“영애는 이미 다 아시지 않습니까.”
스칸디아 황녀가 기사복 목깃을 풀며 말했다. 풀어헤친 목깃 사이로 툭 튀어나온 울대가 보였다. 열네 살이라고 해도 어엿한 남자였다.
“여장도 이젠 힘들고요.”
중얼거리는 황녀의 목소리를 따라 흔들리는 울대가 그 증거였다.
레오니에는 문득 황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펠리오를 보고도 울지 않던 그날의 아이는 황후처럼 투명한 은발이었는데, 지금은 잿빛이 섞여 제법 흐려졌다. 그래도 귀엽고 예쁘장했던 인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 집만 난장판인 줄 알았더니.’
레오니에는 무심결에 스칸디아 황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서슴없는 소녀의 행동에 황녀가 당황했다. 질끈 동여맨 잿빛 은발이 레오니에의 손가락 사이로 찰랑거렸다.
‘황후 폐하도 대단하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부정에는 부정이란 걸까.’
스칸디아 황녀는 티그리아 황후의 옛 정인이었던 이벡스와 한순간의 만남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럼 2황자 전하께선…….”
“형님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스칸디아 황녀가 정색했다. 그때 처음으로 레오니에가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형님께선 떳떳하십니다.”
2황자의 핏줄은 의심할 바가 없단 뜻이었다.
“그건 아니지.”
레오니에가 은발을 놓으며 말했다.
“황후 폐하랑 당신 때문에.”
황제의 핏줄이라고 해도, 그 어미가 부정을 저질러 다른 사내의 핏줄을 낳고 말았다. 제아무리 황후의 소생이라고 해도 정통성이 뿌리째 흔들릴 일이었다.
그래서 티그리아 황후는 둘째 아들을 딸로 위장했다. 거기다 일부러 몸이 약하고 픽하면 쓰러지는 딸로 키웠다.
이유는 하나였다.
두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은 황궁에서, 서부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은 서부에서 살 수 있도록.
‘원작에서 황녀는…….’
레오니에가 자신이 기억하는 원작 내용을 떠올렸다.
스칸디아 황녀는 요양을 이유로 어머니의 고향인 서부 헤스페리 영지로 간다. 그리고 얼마 뒤 2황자가 황위를 잇게 되면서, 황녀는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다.
서부의 새로운 수장, 차기 헤스페리 후작의 탄생이었다.
* * *
즐거운 다과회를 마치고 돌아온 레오니에는 곧장 펠리오를 찾았다.
“아빠! 아빠! 아빠!”
“왜, 왜, 왜.”
레오니에가 펠리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마구 불렀다. 펠리오는 그걸 또 하나하나 대답해 주며 흥분한 딸아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어우, 나 아까 리네 저택에서 혼났어.”
“너 설마 부인한테…….”
“그런 거 아니거든!”
여러모로 전적이 많은 레오니에가 괜히 찔려 빼액 소리 질렀다. 펠리오는 아니면 되었다는 식으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레오니에는 아빠의 탄탄한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발라당 누웠다. 치마 위에는 근처에 있던 담요를 대충 둘렀다.
“다 나가라고 해 줘.”
“다들 나가.”
펠리오의 지시에 거실에서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이 전부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까지 완벽하게 들린 뒤에야, 레오니에가 리네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
반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펠리오의 얼굴은 점점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레오 너도 참 재주다.”
이야기를 다 들은 펠리오가 혀를 가볍게 찼다. 물론 이 탄식은 제 딸에게 이 모든 걸 들킨 스칸디아 황녀와 티그리아 황후를 향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티그리아 황후를 향한 불만이었다.
‘일부러 갔군.’
레오가 오는 걸 알고서.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앞머리를 넘겼다. 훌러덩 까진 아이의 이마는 둥글고 반질반질했다. 아빠 무릎을 베고 누운 레오니에는 철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가 좋아서 웃어.”
속도 없는 녀석.
펠리오가 괜히 레오니에를 타박했다.
“황후랑 무슨 이야길 나눴는데?”
“으응…….”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킨 레오니에가 다과회에서 나눈 이야기를 조금 더 간추렸다.
“아빠 안부 묻고, 시계 사업 묻고, 이번 연회에 오는지 물었어.”
레오니에가 헝클어진 앞머리를 제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정리했다.
“처음엔 아비페르 님과 친분이 있어서 놀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줄 알았는데…….”
잠깐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이내 말했다.
“역시 내가 목적인 듯?”
펠리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후가 그런 무례를 아무 뜻 없이 저지를 리가 없었다. 거기다 황녀까지 동행한 채로 말이다.
‘무슨 속셈이지?’
세간은 티그리아 황후를 가리켜 불쌍하다고 말한다. 황제에게 버림받고 첩 따위에게 지고 만 비운의 여인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황후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펠리오가 그러했다. 황후는 아주 사나운 맹수였다.
티그리아 황후의 결혼 그 자체는 불행이었으나, 그녀는 이를 그저 참고 지내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무인의 기개를 품고 자란 그녀는 일찌감치 황제를 포기하였다. 그녀가 황실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과 제게 주어진 황후란 입장 때문이었다.
스스로에게도 냉정했던 티그리아 황후는 의무를 다하고자 황제의 아이를 낳았다. 2황자는 그렇게 태어났다. 펠리오는 그것만으로도 티그리아 황후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 황후가 레오니에를 보기 위해 일부러 백작가에 찾아왔으니, 펠리오 입장에선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날 결혼 상대로 삼으려나?”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보레오티는 황족과 결혼 금지야.”
생각에 잠겼던 펠리오가 정색했다. 애써 무시했던 최악의 가정을 레오니에가 기필코 꺼내고 말았다.
그는 아직 아이를 결혼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래전 보레오티와 황실이 나누었던 ‘두 가문 간 결혼 금지’란 약속 따위가 없다고 해도, 결코 안 될 일이었다.
“근데 황녀는 황족 아니잖아.”
레오니에가 엄청난 사실을 먼지 털듯 가볍게 말했다. 만약 스칸디아 황녀가 원작대로 서부로 내려가고, 헤스페리 후작의 후계자가 된다면 레오니에와의 혼담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음에 들든?”
펠리오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아빠.”
레오니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걘 겨우 열네 살이야.”
그런 꼬맹이랑 무슨 짓을 하겠느냐며,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잘생긴 근육 미남이 된다면 모를 일이지만.”
야무진 변태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런 놈은 세상에 없어.”
펠리오가 단언했다.
“하지만 아빠는 근육 미남이잖아.”
“나 빼고 없어.”
펠리오가 곧장 말을 고쳤다. 어쨌건 레오니에는 평생 결혼이 불가능하단 소리였다.
“애만 가지고, 남자는 버려.”
“이 아빠가 오늘도 최악의 육아를 기록하시네.”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얼굴로 저런 헛소리를 내뱉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레오니에에게 당장 중요한 건 확실하지도 않은 자신의 혼인 따위가 아니었다.
‘아빠는 바리아한테 느끼는 게 없나?’
진짜 고자인가?
소녀는 아빠와 가정 교사의 부적절한 만남을 적극 계획하느라 바빴다.
* * *
레오니에가 저리 바쁜 동안.
“…….”
바리아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눈앞에는 펠리오에게 받은, 레오니에가 아홉 살에 그렸다는 근육 그림 사전이 펼쳐져 있었다.
사전 속 펠리오는 셔츠와 바지를 차려입은 채, 똑바로 서 있는 상태에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탓에 자연히 돌아간 허리춤이 강조되었는데, 레오니에는 그 부근만 나체로 그렸다.
투영된 근육 옆에는 부위별 명칭이 적혀 있었다.
‘그림 정말 잘 그리시는구나.’
바리아는 보는 내내 감탄했다. 이건 결코 아홉 살의 실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열두 살의 실력도 아니었다.
진짜 근육 위에 잉크를 찍어 누른 것보다 섬세한 화풍은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했다. 어지간한 예술가도 이렇게 정교한 근육은 그릴 수 없을 거다.
‘역시 배운 변태…….’
바리아는 며칠 새 저택 사용인들과 나름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특히 레오니에의 전담 하녀인 코니, 미아와 조금 친해지면서 중요한 말을 들었다.
‘아가씨는 배운 변태예요.’
‘배운 변태는 무섭답니다.’
둘은 자신들이 모시는 아가씨를 감히 ‘변태’라고 말했다. 바리아는 괜히 목이 서늘해졌다. 에르바누 저택에선 사용인이 모시는 주인을 저런 식으로 말했다간 큰 벌을 받고 추천장 하나 없이 쫓겨날 터였다.
그러나 코니와 미아는 눈치를 살피는 것도 없었다.
‘내가 좀 많이 배웠지!’
심지어 그 옆에 있던 레오니에가 변태라 자칭하며 거들먹거렸다.
바리아는 이런 취향을 용납하다 못해 이해하고 받아 주는 펠리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임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바리아의 고민은 그런 애달프고 서정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육은 멋있구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버렸다.
처음엔 레오니에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근육을 공부했다. 그런데 어느샌가 사전 속 펠리오의 근육에 푹 빠져서는, 정신을 차리니 근육 이름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이두근’을 읊조리며 자신의 팔 앞쪽 이두근을 찾아냈을 때의 쾌감이 잊히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짜릿했다. 공부와 체력 단련이 전부였던 바리아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래서 문제였다.
자신은 황실과 올로르, 에르바누가 앞으로 저지를 짓을 막기 위해 계획을 짜야 했다. 정보도 수집해야 하고, 펠리오에게 이를 건의해야 했다. 레오니에의 과외 수업도 준비해야 했다.
이토록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만큼 바쁜 와중이건만.
‘아가씨 마음을 알겠어.’
바리아가 사전 속 펠리오의 허벅지 그림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정말 아름다워.’
근육이란 노력을 거름 삼아 피어나는 꽃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몸을 관리하고 정성을 들였느냐에 따라, 근육은 그만큼 아름답게 부풀어 오른다.
바리아는 노력을 좋아했다. 헛된 희망에 들이붓는 노력은 싫어했지만, 근육은 결코 이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러니 바리아가 근육에 빠지는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님 몸 정말 좋구나.’
근육에 막 빠진 바리아는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이젠 누구를 보아도 자연히 펠리오의 몸과 비교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펠리오를 떠올리면 그의 탄탄한 몸도 떠올랐다.
‘……미쳤어, 진짜!’
자괴감에 빠진 바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공작님은 날 도와주셨어!’
느닷없이 찾아와 다짜고짜 거래하자는 인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고마운 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지경인데, 이렇게 못된 짓이나 숨어서 하고 있다.
바리아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펠리오를 볼 면목이 없었다.
‘공사는 철저히 구별한다더니.’
바리아는 일전에 그딴 말을 했던 자신의 입을 때려 주고 싶었다. 공사 구분은커녕 저를 도와준 분께 무례한 짓만 저지르는 중이었다.
문득, 자신을 이상한 인간을 보듯 바라보던 펠리오의 검은 눈이 떠올랐다. 자신을 기묘한 생물 취급하던 그 눈에는 적어도 경멸이나 실망은 없었다.
펠리오는 생각 이상으로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저를 보면 분명 한심하다고 생각할 거다. 만약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본다면 정말 슬프고 힘들 것 같았다.
‘아니야…….’
그냥 슬픈 거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주 괴롭고 외로워질 것 같았다.
“하아…….”
바리아의 한숨은 무거웠다.
“너무 싫다…….”
“뭐가요?”
“꺅!”
예고 없이 귓가에 들린 목소리에 바리아가 화들짝 몸을 떨었다.
“헤헤, 놀랐어요?”
냉큼 한 발자국 물러선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마치 장난에 성공한 꼬마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어라?”
그때, 레오니에의 눈에 익숙한 책이 보였다. 바리아가 서둘러 치우려고 했지만, 빠르게 소파를 뛰어넘은 레오니에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이건…….”
레오니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바로 자신이 아홉 살 때 완성했던 근육 사전이었다. 루페가 선물해 줬던 근육 크로키 사전에 영향을 받아 그렸던 자신의 ‘이쪽 세상’ 첫 회지였다.
그리고 모델인 펠리오에게 생일 선물로 줬었다. 레오니에는 그때 책 내용을 확인한 펠리오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널 어쩌면 좋을까.
책 내용을 지적하고 싶은데, 그림을 또 너무 잘 그려서 칭찬도 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고뇌하던 아빠의 표정은 참으로 웃겼다.
“그, 그게!”
오랜만에 추억에 빠졌던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바라봤다.
바리아는 허둥거리며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라고 말을 더듬거렸다.
“제, 제가 근육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까, 고, 공작님께서 잠깐 빌려주신 거예요! 정말 아주 잠깐이에요!”
이제 돌려주려고 했다며 바리아가 서둘러 덧붙였다. 사실 사전에 푹 빠져서 돌려줘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아빠가요?”
놀란 레오니에가 사전과 바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럴수록 바리아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미쳤나 봐, 진짜.”
레오니에가 후우, 한숨을 흘리며 조용히 화를 냈다.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는 행동에서 진득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바리아는 크게 후회했다.
‘빌리지 말걸.’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무척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저를 보살펴 주었다. 바리아도 덕분에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과 조금 친해졌다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그리고 바리아는 자신이 사전을 빌린 행동이, 그 선을 넘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생각해 그린 소중한 선물은 생판 남인 자신이 지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화가 날 만한 행동이었다.
“저거 3년 전 거잖아!”
레오니에가 짜증을 냈다.
“저 어설픈 걸 보여 줘서 어쩌자는 거야!”
“……네?”
예상치 못한 레오니에의 분노에, 바리아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바리아 언니, 이거 내가 어렸을 때 그린 거라서 엄청 서툴러요.”
“어, 엄청 잘 그리셨어요.”
그렇지 않다고 바리아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바리아는 살면서 이렇게 잘 그린 그림은 처음 봤다. 근육들이 당장 튀어나와 씰룩거릴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러나 레오니에는 창피했다.
“이건 아홉 살 때 그린 거라 서툴러요. 근육 굴곡이랑 휘어지는 유연성 표현이 너무 빈약하잖아요.”
“…….”
“다시 보니 너무 못 그렸네.”
이딴 걸 남에게 보여 주다니.
“아빠 진짜 짜증 나.”
레오니에의 불쾌감은 바로 펠리오를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기어코 자신이 그린 사전을 빼앗아간 레오니에가 어디론가 후다닥 가 버렸다.
얼떨결에 혼자 남은 바리아는 멀뚱히 기다렸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하나 분명한 건, 레오니에는 저에게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바리아는 뒤늦게 안도했다.
“이거 빌려줄게요.”
곧 다시 나타난 레오니에는 새로운 책을 바리아에게 건네었다.
“아주 좋은 거예요.”
책을 몰래 건네며 속삭이는 소녀의 얼굴은 사악하고 음흉했다. 순간 바리아는, 제국의 미래 따위보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랑스러운 소녀의 정서 안정이 먼저인 것 같다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뭔데요?”
그러나 건네준 책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갔다. 책에 대해 물어보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이제 막 근육의 아름다움을 깨우친 바리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나눈 대화의 흐름을 보건대, 이건 아주 엄청난 것이었다.
“신간이에요.”
“신간…….”
바리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굳이 ‘무엇’의 신간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곧 하얀 두 손이 조심히 책을 감싸 안았다. 감히 한 손으로 무식하게 들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바리아는 제 손에 들린 검붉은 양장본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고서적처럼 보였다.
“언니 이제 밤잠 다 잤네.”
레오니에가 어둡고 심각한 물건을 파는 뒷골목 사람처럼 음흉하게 속삭였다. 으흐흐흐, 새어 나온 웃음이 바리아의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특히 여길 추천하겠어.”
어느새 말을 편하게 낮춘 레오니에가 책갈피가 꽂힌 곳을 펼쳤다. 펼쳐진 곳을 바라보던 바리아의 초록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세, 세상에……!”
새로 받은 사전 속 그림은, 레오니에가 아홉 살에 그렸던 것과 감히 비교조차 못 할 정도였다.
“끝내주지?”
“아가씨, 이러다 지옥 가요…….”
바리아가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사전에 꽂혀 있었다.
“한 번 갔다 와서 괜찮아요.”
레오니에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은 이미 끔찍한 지옥을 2년이나 경험했다. 그러니 이 정도 변태 짓은 일전의 고아원 생활로 대충 퉁치면 되는 것이었다. 어떤 지옥도 고아원보다 더하진 않을 터였다.
레오니에는 신간을 바리아에게 흔쾌히 빌려줬다. 바리아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우왕좌왕 몸을 움직였다.
“공작님께서 실망하실 거예요.”
바리아가 풀이 팍 죽은 채 웅얼거렸다.
“저는 공작님께 도움을 받는 몸이에요. 그런데 이런 음험한 눈으로 그분의 근육을 바라보고 그러는 건, 정말 못된 짓이에요.”
“딸인 나도 밝히는데, 뭐.”
그런 양심 따위는 버리라며 레오니에가 못된 말을 당당히 내뱉었다.
“이거 보고, 우리 근육의 세계에 함께 빠지는 거야.”
“근육의 세계…….”
바리아가 군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손을 잡고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반짝이는 레오니에가 너무도 근사해 보였다.
그리고 아이의 모습에서 자연히 펠리오가 겹쳐 보였다. 제게 반하지 말라고 농담하며 피식 웃던 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레오니에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언니에겐 소질이 있어.”
“제, 제가 감히요?”
바리아가 망설였다.
“난 언니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팔뚝을 서너 번 주물럭거렸다. 그럴수록 소녀의 얼굴에 걸린 확신에 찬 미소는 점점 커졌다. 젤라또를 들고 있던 제 팔을 끌어당겼을 때, 레오니에는 단숨에 알았다.
“체력 단련을 좀 한 것 같은데?”
바리아의 팔뚝은 마냥 여려 보여도 잔근육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집안일을 하느라 팔뚝이 다부진 하녀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주 좋아.”
근육 부모님이라니.
“너무 좋아.”
심지어 바리아가 펠리오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정말 좋아!”
거기다 바리아가 근육을 좋아했다.
“겁나 좋아!”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다못한 레오니에가 환호했다.
동시에, 왜 원작에서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을 ‘침대에서 운동’이란 말로 비유적으로 표현했는지도 깨달았다.
단순히 ‘검은 맹수의 바리아’란 소설이 전연령 작품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원작에서 드러나지 않은 바리아의 숨겨진 취향 때문이었다.
‘바로 근육!’
레오니에는 운명을 직감했다.
‘근육을 밝히는 내가 근육 덩어리 아빠의 딸이 된 것도, 바리아가 나 때문에 잠겨 있던 근육 취향의 문을 연 것도!’
근육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니.
‘완벽해!’
레오니에는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토록 완벽한 가족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소녀는 다시 각오했다.
바리아를 반드시 자신의 엄마로 삼겠다고. 부모님의 침대 위 운동이 이루어질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안 남은 거 아니었어?’
그러나 세상은 천하의 아기 맹수조차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오니에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여자는 남자보다 근육이 생기기 어렵군요.”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빌려준 사전을 보며 깊이 고민했다. 한 손엔 책을, 다른 손은 자신의 평평한 배를 쓸고 있었다. 분홍빛 입술에선 ‘신체적 차이인가…….’라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노력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 분홍 맹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굽히지 아니하는 바리아의 패기에 레오니에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덕에 많은 걸 깨우쳤어요.”
깨우치게 도와주지 말걸.
“제가 공작님의 근육에 빠졌던 건, 그분의 노력에 감동했기 때문이에요.”
아니야, 이 바보 언니야.
“공작님의 근육은 잠시 늘어졌던 저의 의욕에 새로운 불씨를 심어 주셨어요.”
음탕한 욕망에 불씨를 심었어야지.
레오니에는 허망한 눈으로 의욕에 불타는 바리아를 바라봤다.
“앞으로 제게 주어진 일에 성실히 최선을 다하면서, 저의 근육도 틈틈이 단련하겠습니다!”
“하지 마…….”
레오니에가 이마를 손으로 찰싹 쳤다.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근육 전도가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자신은 괴물을 깨우고 말았다.
기껏 바리아가 펠리오를 의식하게 했는데, 레오니에는 그 의식을 이성을 향한 두근거림이 아닌 존경과 동경으로 바꿔 버리고 말았다.
‘이 미친 것!’
레오니에는 만약 지금 저 혼자였다면 당장 제 손으로 제 뺨을 때렸을 거다.
“이거 보세요.”
그런 애타는 소녀의 속도 모른 채, 바리아가 자신이 쓴 계획표를 보여 줬다.
“이번에 새로 짜본 운동 계획표에요.”
“운동……?”
힘 빠진 눈동자가 계획표를 향했다.
“저는 그간 달리기나 많이 걷는 것만 해 왔거든요. 그런데 기사님들께 물어보니 근육 단련을 위한 운동이 따로 있더라고요.”
“기사님들?”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레비페스 경이랑 여자 기사님들이요.”
“언제 친해진 거야?”
“저택을 운동 삼아 돌던 중에 만났어요.”
바리아는 재정부를 그만둔 뒤, 처음으로 동년배 여자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저의 절친한 레스와 마음 터놓고 떠들었던 것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분들이 나중에 훈련장에서 운동 봐주시겠다고 했어요.”
“…….”
“아, 가면 안 되나요?”
바리아가 답 없는 레오니에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레오니에가 뒤늦게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했다.
“나도 언니가 근육 되는 거 좋은데…….”
당연히 좋았다. 저와 함께 근육이 되어 갈 동지가 생겼으니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운동할 거면, 아빠랑 운동했으면 했다.
“울 아빠도 운동 잘 아는데.”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훈련을 봐주었다. 지금은 레오니에가 혼자 알아서 잘하지만, 시간이 나면 항상 직접 대련을 해 주고 있었다.
“바쁘신 분께 어떻게 부탁해요.”
야무진 바리아는 그럴 수 없다며 냉정하게 답했다.
“근육을 키우고 체력을 단련해서, 공작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아가씨는 제게 희망을 주셨어요.”
“아니야…….”
난 모든 걸 망쳤어.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역시 끼어들면 안 되는 거였어!’
괜히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나대다가 인연을 꼬아 버리고 말았다.
둘은 여전히 서로에게 사무적이었고, 심지어 바리아는 ‘펠리오’가 아니라 펠리오의 ‘근육’을 추종하게 됐다.
“아오, 진짜!”
성질이 난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찰나였다.
“아가씨.”
트라가 급한 표정으로 찾아왔다.
“주인님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잔뜩 찌푸렸던 표정이 반쯤 풀렸다. 펠리오가 와서 기뻐서 그렇다기보단, 예상한 것보다 이른 그의 도착 때문이었다.
그리고 트라가 자신을 찾은 것도 조금 이상했다.
오늘 펠리오는 카니스와 함께 어느 모임에 참석하고 온다고 말했다. 펠리오는 집을 나서기 전에 늦게 올 거니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레오니에한테 일러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레오니에가 잠들기에 이른 시간이었다.
“……혹시 피투성이로 왔어요?”
아빠가 누구를 홧김에 죽였냐는 뜻의 물음이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트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기분이 편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누가 또 아빠 앞에서 죽여달라고 재촉했나 보네.”
그놈이 누군지 몰라도, 트라가 걱정되어 레오니에를 찾아올 정도인 걸 보면 앞으로 편하게 살 생각은 접어야 할 터였다.
“한번 나가 보시는 게 어떠하실지요.”
결국 트라가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펠리오의 기분이 너무 저조해서, 그의 젖형제인 트라조차 함부로 다가가지 못할 정도였다.
“나도 지금 기분 별로 안 좋은데.”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이쪽도 지금 펠리오와 바리아의 인연을 망친 것 같아 아주 불쾌했다.
“에휴, 기다려요.”
그래도 저택의 평화를 위해 레오니에가 움직였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분위기를 살핀 바리아가 꾸벅 인사했다.
“에이, 같이 가지.”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저는 가 봤자 방해만 될 거예요.”
“나는 안 심심하고 좋으니 괜찮아.”
레오니에가 바리아의 손을 꼭 쥔 채 현관 홀로 향했다. 바리아가 과연 이래도 괜찮을지 걱정되는 마음에 트라를 힐끔 바라봤다.
고양이 눈을 한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의 결정에 자신이 뭐라 관여할 자격이 없단 뜻이었다.
“아빠!”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아빠 왔…….”
태연히 인사하려던 레오니에가 턱을 스윽 뒤로 당겼다. 턱 아래 젖살이 두툼하게 접혔다.
펠리오는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저조했다. 덕분에 레오니에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누가 울 아빠를 ‘광공’으로 만들었어.”
“미친 공작의 줄임말이냐?”
“대충 그런 건데, 진짜 누구야?”
레오니에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게 아닌데?”
누가 보아도 펠리오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날카로운 눈초리가 지금은 관자놀이를 뚫을 정도였다. 잔뜩 다물린 채 비스듬히 올라간 입술 사이로 짓이겨지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리네 가문 똥강아지 남매도 이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때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매서운 검은 눈이 닿은 곳에 바리아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바리아 양?”
“고, 공작님 오셨습니까.”
긴장한 바리아가 꾸벅 고개를 수였다. 저렇게 화가 난 펠리오는 처음 봤다.
“나랑 아까까지 같이 있었어.”
레오니에가 바리아를 지켜 주듯 제 뒤로 보내며 말했다. 그러나 펠리오의 시선은 여전히 바리아를 향했다. 바리아는 자신이 무언가를 크게 잘못했나 싶었다. 하지만 그 몰래 근육을 찬양한 것 말고는 큰 잘못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그걸 들켰나?’
근육을 밝히는 걸?
덜컥 겁먹은 바리아가 사과하려던 찰나였다.
“오늘.”
펠리오가 한숨으로 제 속에서 들끓는 화를 꾸욱 누르며 말했다.
“모임에 그대의 아버지가 있더군요.”
“아, 아버지요?”
“에르바누 백작이?”
바리아와 레오니에가 동시에 놀랐다.
“아빠가 간 모임, 싸구려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레오니에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펠리오가 이따금 카니스와 함께 참여하는 모임은 제국에서 명망 높은 귀족들이 모여 제국의 정세를 의논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참여하는 귀족들은, 첫 번째 권력이라 불리는 귀족 회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었다.
펠리오는 아무리 귀찮아도 수도에 머무를 때면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는 안 가도, 모임만큼은 꾸역꾸역 참석해 얼굴을 내비쳤다.
그러니 펠리오는 화가 난 거다. 에르바누 백작은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귀족 회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러나 바리아는 이 모든 흐름을 빠르게 파악했다.
“올로르? 올로르야?”
그리고 뒤이어 상황을 깨우친 레오니에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리아를 사색으로 만든 ‘설마’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올로르가 명단에 올랐어?”
“그래.”
펠리오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전, 펠리오가 타바누스 백작 가문을 완전히 끝장내면서 자연히 귀족 회의 명단에서 타바누스의 이름이 지워졌다. 서부의 헤스페리 후작 역시 몇몇 귀족 가문을 멸했고, 그들 역시 명단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귀족 회의 명단이 채워지지 않고 이어지던 중.
오늘 모임에 올로르가 나타났다.
에르바누와 함께.
* * *
세 사람은 곧장 집무실로 갔다.
“메, 메리디오 후작은요? 아우스트 공작은요?”
당황한 바리아가 급한 마음에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펠리오에게 물었다. 맹수 부녀는 소파에 앉았지만, 바리아 혼자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언니, 왜 그러고 있어.”
“다리 아프니 일단 앉으세요.”
뒤늦게 바리아를 못 챙긴 걸 확인한 맹수 부녀가 서둘러 자신들 사이에 바리아를 앉혔다. 바리아는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면서도 서둘러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귀족 회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려면, 조건을 갖춰야 하잖아요.”
귀족 회의가 괜히 제국의 첫 번째 권력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명단에 오를 후보를 추리는 데만 여러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는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돈을 내야 했다. 그것도 아주 큰 돈을 내야 했다.
일종의 입회비인데, 어지간한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3년 치 수익이었다. 그리고 매년 제국 부흥을 위해 일정 금액을 기부해야 했으며, 그 귀족이 소속된 지역의 수장과 명단에 먼저 이름을 올린 동향 귀족들의 추천장이 필요했다.
이토록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어지간한 귀족들은 귀족 회의에 참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는 귀족 회의 명단에 공석이 생겨도 이번처럼 몇 년간 채워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드디어 공석을 채울 새 귀족이 나타났다. 바로 올로르와 에르바누였다.
“에르바누 재산은 제가 알아요.”
얼마 전까지 재정부에서 일했던 바리아는 항상 제 가문을 주시했다.
에르바누 가문은 나름 괜찮은 수준의 재산을 소유했으나 감히 귀족 명단에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부친인 에르바누 백작이 예전부터 귀족 회의에 욕심을 지니긴 했지만,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항상 포기했었다.
“그 집엔 그럴 돈이 없어요.”
그런 에르바누가 귀족 회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니.
“돈이야 올로르가 대준다고 해도…….”
레오니에도 같은 생각이었다. 에르바누가 올로르와 손을 잡았단 이야기는 제국 수도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다.
“아빠, 그럼 추천장은?”
그러나 추천장은 다른 문제였다.
올로르가 아무리 남부의 주인 행세를 한다 해도, 진짜 주인은 메리디오 후작과 아우스트 공작이었다. 그들이 저 두 가문을 위해 추천장을 써 줄 리가 없었다.
“황제가 써 줬다는군.”
펠리오의 대답에 레오니에와 바리아가 기함을 했다. 대답하는 펠리오도 기가 막히긴 마찬가지였다.
수비테오 황제는 엄연히 따지면 중앙 수도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정치 중립을 위해 어지간한 정쟁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추천장을 직접 써 줬다는 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황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단 뜻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정작 펠리오가 화가 난 건 다른 이유였다.
“에르바누 백작이 제게 와서 요구하더군요.”
“뭐, 뭐를요?”
“내 소중한 딸을 돌려달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바리아의 가슴에서 억울한 덩어리 하나가 울컥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소리 지르려던 바리아가 멈칫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딸이었으면 제 사위에게 검을 주고 죽음을 사주하지 말았어야 했다.
바리아는 이곳 보레오티 저택에 오고 나서 더욱 확신했다.
아버지는 자식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