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새 가정 교사 (21/51)

#21. 새 가정 교사

“…….”

레오니에가 입술을 오리처럼 쭈욱 내밀었다.

“어머, 아가씨.”

지나가던 사용인 한 명이 깜짝 놀라며 레오니에 곁으로 다가갔다.

“왜 문밖에 쪼그려 앉아 계시나요?”

“아빠가 쫓아냈어.”

잔뜩 성이 난 아기 맹수는 바로 등 뒤에 있는 문짝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지금부터 어른들끼리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꼬맹이는 빠지라는 것이 펠리오의 이유였다.

당연히 레오니에는 자신도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드디어 그 장면을 보는 건데!’

바리아가 펠리오에게 황실과 올로르의 숨겨 둔 계획을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거래를 진행하는 장면은, 원작 소설에서도 아주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바로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펠리오는 훗날, 그날의 바리아를 아주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호감을 느꼈다는 것을 언젠가 제 옆에 누운 바리아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바리아 역시 당시의 펠리오를 재수 없어도 멋진 남자였다고 추억했다.

그 엄청난 순간이 바로 저 문 뒤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도 보고 싶다고!”

쾅쾅쾅!

레오니에가 문을 두들겼다.

“문 열어 줘!”

그러나 펠리오는 듣는 척도 안 했다.

“저기, 괜찮을까요?”

바리아가 굳게 닫힌 문과 펠리오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러다 부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괜히 저 때문에 사이라도 어긋날까 걱정이었다.

“저러다 맙니다.”

정작 펠리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훔쳐 들을 인재였다.

“저는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습니다.”

지금은 오롯이 바리아에게 집중해야 했다. 펠리오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는 지금껏 바리아에게 감시를 붙이고 그녀의 행적을 보고받았다. 아르데아를 도와 북부로 도망치게 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만, 그것만으로 바리아를 아군이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를 빌미로 북부에 환심을 사 역으로 정보를 빼돌릴 수도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5년 전에도 실제로 일어났기에 조심해야 했다. 바로 타바누스를 비롯한 세 가문이 북부를 배신하고 정보를 빼돌려 올로르에게 넘겼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보고 받은 바리아의 행적은 정말 깨끗했다. 그녀는 거의 인생에 아무런 재미가 없는 사람처럼 지내 왔다. 일과 운동밖에 모르는지, 매번 들려오는 그녀의 행적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변화가 전혀 없는 바리아의 일상 보고에 펠리오마저 독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무슨 재미로 산 거지?’

천하의 펠리오조차 궁금했다.

그는 삶이 재미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지금도 펠리오만 보면 건조하고 지루한 삶을 살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펠리오의 삶은 분명 얼마 전까지 그러했다.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레오니에와 함께 살아온 지난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풍족한 순간들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

이런 저조차도 인생의 재미를 아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메마르게 만든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가족에게 등을 돌리려는 건지도.

“이야기를 시작하죠.”

지금부터 나눌 대화가 이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 줄 것이다.

시작하기에 앞서, 펠리오가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바리아가 바짝 긴장했다. 검은 맹수의 나른하고 여유로운 움직임은 상대방의 여유를 빼앗고 주도권마저 앗아갔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요?”

“…….”

“무엇입니까.”

“할 말이라기보단.”

바리아가 말을 정정했다.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거래?”

펠리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눈에 띄게 긴장한 주제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말하는 근성은 대단했다. 거기다 천하의 보레오티에게 감히 먼저 ‘거래’를 제안하다니.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며칠 전 제게 말했던 ‘배짱 있는 성격’이란 말은 바로 저런 걸 뜻하는 모양이었다. 짐짓 여유로운 척 짓는 어색한 미소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특히 저 눈…….’

영롱한 초록색 눈동자가 아까부터 자꾸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엇을 거래할 겁니까?”

펠리오가 테이블에 차려진 간단한 다과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러다 계속 저 눈만 볼 것 같았다. 아까부터 달콤한 향이 난다고 했더니, 아무래도 이 다과들 때문인 모양이었다.

“공작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펠리오가 입가를 느슨히 풀었다.

“가장 원하는 정보라…….”

어쩐지 보지 않아도 바리아가 어떤 표정일지 알 것만 같았다. 긴장을 애써 감춘 채 태연하게 구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레오니에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의 딸도 이따금 고집을 부릴 땐 저렇게 애써 속을 감추며 태연하게 굴고는 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바리아의 말에, 기어코 펠리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죠?”

“확신합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인데.”

“그럼 한 번 보시죠.”

바리아가 숄처럼 걸쳤던 망토를 벗었다. 멜레스가 기사도를 발휘해 건넸던 망토 안엔 젤라또로 범벅이 된 셔츠가 있었다. 조금 전 펠리오가 맡았던 달콤한 향의 정체였다.

“저기,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양해를 구한 바리아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펠리오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 * *

닫힌 응접실 문을 한참 노려보던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꼈다.

“내가 포기할 줄 알고?”

이래 봬도 펠리오의 딸로 무려 5년을 살았다. 그 말인즉, 이 정도로 무너진다면 보레오티가 아니란 뜻이었다. 아빠의 허파를 뒤집는 재능만큼은 아주 타고났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 바로 위!’

그곳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빈방 하나가 있었다. 손님용으로 쓰이는 건지, 침대와 옷장이 하나씩 덩그러니 있는 게 전부였다.

레오니에는 창문을 열고 그 아래를 내려다봤다.

“후후.”

내려다보는 소녀의 미소는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응접실엔 바깥 정원을 내려다보며 쉴 수 있는 발코니가 있었다. 그 장소가 바로 자신이 있는 이곳 방 아래에 있었다.

보레오티 저택은 어느 층이건 천장이 높아서, 바닥과 천장의 차이가 어지간한 건물 2층 높이와 비슷했다.

“아주 좋아.”

하지만 훌쩍 자란 아기 맹수에게 이 정도는 식은 수프 마시기였다. 맹수의 송곳니로 신체를 강화하면 침대에서 폴짝 뛰는 정도밖에 안 되었다.

레오니에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니,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 안개가 일렁거렸다. 맹수의 송곳니는 천천히 레오니에의 몸을 감쌌다. 송곳니를 너무 많이 쓰면 펠리오에게 들킬 수 있으니 아주 조금만 꺼냈다.

다리와 손목에 황금빛이 반짝이더니 곧 피부에 스며들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레오니에는 곧장 창 아래로 뛰어내렸다. 소리도 내지 않고 무사히 착지한 레오니에는 잠깐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느꼈다.

‘너무 멋져.’

송곳니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스스로가 너무 멋지고 완벽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이래서야 어디 제 수준에 맞는 남자가 있겠나, 싶었다.

‘이래서 사람은 단점이 하나 정돈 있어야 해.’

그래서 아빠는 오만하고.

‘나는 변태인 거지.’

레오니에는 히죽거리며 창문 너머로 응접실을 훔쳐봤다. 그리고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바리아가 옷을 벗고 있었다.

“어, 언니!”

놀란 레오니에가 벌컥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 공작 영애?”

도리어 놀란 바리아가 흠칫거렸다. 그 바람에 손에 쥐고 있던 옷자락이 떨어졌고, 펠리오는 서둘러 고개를 휙 돌렸다.

이게 무슨 난장판인가 싶었다.

“왜 갑자기 옷을 벗어요!”

사색이 된 레오니에가 이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아빠는 은근히 보수적이라서 이렇게 벗으면서 유혹하는 여자 싫어해요!”

“제가 공작님을 왜 유혹해요!”

깜짝 놀란 바리아가 서둘러 부정했다.

“유혹할 이유가 없는데!”

“아, 그건 아니죠.”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이유가 얼마나 많은데.”

고개를 슬쩍 돌렸던 펠리오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역시 애가 참 똑똑했다.

“울 아빠 졸, 아니, 엄청 잘 생기고 근육 많고 돈도 많고 권력 있는데요?”

“그건 그렇지만…….”

바리아가 머뭇거렸다.

“……제 취향이 아닌걸요.”

펠리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고백도 안 했는데 차였다.

하지만 그 말에 더 열을 내는 건 바로 레오니에였다.

“언니 미쳤어요? 어디 아파요?”

레오니에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곤 곧장 펠리오의 가슴과 얼굴을 더듬으며 격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이 근육! 이 얼굴! 이 슴가!”

이것들을 자세히 보라며, 특히 아빠의 가슴을 힘차게 강조했다.

“언니는 지금 제국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을 차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다정한 분이…….”

“우리 아빠 다정해요! 이런 변태인 나조차 사랑으로 감싸 키운다고요!”

“그렇지만 얼굴이…….”

바리아가 말을 더듬거렸다.

“무, 무섭잖아요…….”

레오니에가 손으로 제 이마를 때렸다. 찰싹 소리가 날 정도였다.

“이 언니가 뭘 모르네.”

가르칠 게 산더미구먼.

레오니에가 한탄했다.

“남자는 다정한 얼굴이 아니라! 거사를 일주일 내내 치르고도 남을 만큼 절륜한 허릿심……!”

“작작해라.”

결국 펠리오가 나섰다.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레오니에의 입을 막았다. 읍읍읍, 레오니에가 버둥거렸다.

“바리아 양.”

그리고 펠리오가 바리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차마 제대로 바라보진 못했고, 탁한 분홍색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동그란 귀에 시선을 고정했다.

“옷을 제대로 입으세요.”

“하지만 거래는 하셔야지요.”

“설마 몸을 거래한다는 건 아니지요?”

“아니에요!”

당황한 바리아가 서둘러 셔츠를 벗었다. 당황한 펠리오가 눈을 피하려던 찰나였다.

“여기에 정보가 있어요!”

바리아가 훌러덩 벗은 셔츠 안에는, 또 한 벌의 얇은 셔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등 뒤에, 붕대로 칭칭 감긴 채 고정된 서류 봉투가 있었다.

“직장 기숙사에서 나온 뒤로 계속 이렇게 몸에 묶고 다녔어요.”

바리아가 끙끙거리며 등에 매달린 서류 봉투를 빼냈다. 잘 보니 배에다 복대처럼 붕대를 감았는데, 거기에 두툼한 봉투를 아기 업듯 끼워 넣었다.

“…….”

“…….”

맹수 부녀가 황망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바리아 언니.”

레오니에가 잠시 머뭇거렸다.

“언니는,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잠시 머릿속에서 저의 생각을 정중한 단어로 정리한 후, 레오니에가 말했다.

“약간, 독특하네요.”

반면 펠리오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턱을 가볍게 손으로 매만졌다.

“레오 너랑 좀 닮았는데?”

그리곤 말했다.

“살짝 미친 구석이.”

“내가 오늘 아빠 암살한다.”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 * *

원작에서 묘사되는 회귀 전 바리아는 유순하고 평화로운 성격이었다. 특히 싸움을 아주 싫어했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한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조차 ‘내가 더 잘하면 사랑해 줄 거야.’라는 안타까운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엔 버림받았고, 기어코 살해당했다.

그 후 다시 과거로 돌아온 바리아는 거의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걸 의심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노력만 믿었다. 타인에게 정조차 쉽게 붙이지 않았다. 답 없는 놈에겐 주먹이 답이란 것도 깨달았다.

첫 번째 삶에서 겪었던 배신은 바리아의 가슴에 아주 큰 흉터로 남았다. 그러나 성격이 바뀌었다고, 그 본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맞아, 그랬어.’

레오니에는 등에 업은 서류 봉투를 끙끙거리며 빼는 바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저 언니는 좀 이상했어.’

조금 더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상당히 엉뚱했다.

바리아의 삶이 험난하긴 했다. 그러나 태생은 귀족이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첫 번째 삶에선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버둥거렸다.

회귀한 두 번째 삶에선 복수만을 위해 달렸다. 이 탓에 자신이 집중하는 목표 이외의 것에서는 맹한 구석이 튀어나왔다. 회귀 전에도 바리아의 친부모인 에르바누 백작 부부는 그런 딸을 참 이상하다고 늘 대놓고 농담거리로 삼았다.

하지만 펠리오는 그런 바리아를 귀엽다며, 당신 덕에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러려나?’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힐끔 보았다. 마침 바리아가 펠리오에게 증거가 담긴 서류 봉투를 건네고 있었다. 증거를 내미는 바리아의 표정은 신중했고, 이를 받는 펠리오의 표정은 상당히 오묘했다.

“……따뜻하군요.”

펠리오가 봉투를 보며 말했다.

“기숙사에서 나온 뒤로, 제가 계속 몸에 지니고 다녔어요.”

그러니 증거는 무사하다면서, 바리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 바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리오가 다시금 서류 봉투로 시선을 고정했다. 확실히 품에 계속 지니고 다닌 건지, 손에 닿은 봉투가 따뜻했다.

진짜 기분이 묘했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체온을 느끼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거의 레오니에가 ‘근육 박애자’라고 스스로 지칭하던 때 느낀 충격과 똑같았다.

어쨌건 거래는 다시 진행되었다.

레오니에도 분위기에 편승해 펠리오 옆에 앉았다.

“나도 여기 있어도 되지?”

“마음대로 해라.”

펠리오가 포기하듯 말했다. 또 내쫓았다간 이번에는 천장에 구멍을 뚫어서라도 들어올 딸이었다.

“바리아 언니, 그래도 되죠?”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바리아 입장에선 레오니에가 있는 편이 더 좋았다. 펠리오와 단둘이 있으면 평소보다 훨씬 긴장하게 되는데, 레오니에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헤헤.”

레오니에가 히죽 웃었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에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밖에서 봤던 레오니에의 멋진 모습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딱 저 나이 때 소녀의 순박한 미소 같아서 보기 좋았다. 어느새 바리아도 입꼬리를 올렸다.

둘은 서로를 보며 싱글벙글 미소지었다.

‘애가 둘…….’

펠리오는 그런 둘이 묘하게 닮아 보였다.

“일단.”

펠리오가 봉투 속 증거들을 꺼냈다.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톡톡, 하고 증거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바리아가 퍼뜩 정신을 다잡았다.

“제가 재정부에서 그간 모은 황실과 올로르 가문의 행적들입니다.”

“재정부에서 두 가문의 행적을 모아 봤자 얼마나 모은다는 겁니까?”

기껏해야 나랏돈 배분하는 일밖에 더하냐며, 펠리오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증거들을 살피는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마디마디가 굵은 기다란 손가락들도 수상쩍은 정황이 보이는 곳을 빠르게 가리키며 움직였다. 레오니에도 그 옆에서 증거들을 힐끔거리며 이것들이 말하는 바를 찾아냈다.

‘올로르가 엄청 있네.’

증거를 보자마자 입 안이 텁텁해졌다.

바리아가 증거라고 가지고 온 건 몇 년간 통과된 예산 기획들이었다. 황실은 올로르 가문을 비롯하여 황제파 귀족들에게 여러 행정이나 사업 등을 위임하여 도맡게 했다.

증거를 세심하게 살피는 두 부녀를 보며, 바리아는 다시금 긴장감을 되찾았다.

그리고 말했다.

“지난 몇 년간.”

어쩌면 그보다 오랫동안.

“황실은 게이트를 노리고 있습니다.”

바리아는 그간 자신이 조사하고 손에 넣은 증거들을 토대로 알아낸 것들을 설명했다.

펠리오가 긍정하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증거에 꽂혀 있었지만, 두 귀는 바리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보시면 알겠지만, 황실은 여러 귀족을 시켜 도로 정비와 게이트 보수 등에 매해 많은 돈을 쏟고 있습니다.”

“바리아 양.”

증거에서 드디어 눈을 뗀 펠리오가 바리아를 바라봤다.

“황실이 게이트를 노리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요?”

펠리오가 떠보듯이 물었다.

그러자 바리아가 미소지었다.

“많지요.”

오히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바리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펠리오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풉.”

이를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서둘러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아이는 아빠가 놀라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빠 바보.”

레오니에가 아빠를 놀렸다.

“게이트는 수단일 뿐이야.”

“……나도 알아.”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가볍게 흘겨봤다. 그는 바리아를 시험할 겸 가볍게 떠보려는 의도였는데, 요 얄미운 딸이 방해하고 나섰다.

“내 말이 맞죠?”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물었다.

“……맞습니다.”

이번엔 바리아가 놀랄 차례였다. 어쩌면 보레오티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 거래를 무를 순 없었다. 바리아는 여기에 모든 걸 걸었다.

“분명 황실과 올로르는 게이트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수단일 뿐.

“게이트를 장악하여 제국의 네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수단.

황실의 최종 목표는 지금 바리아의 눈앞에 있었다.

검은 맹수.

저들의 고향.

“황실은 북부를 노립니다.”

* * *

바리아가 황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증거를 모으던 중,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왜 북부를 노리지?’

황실은 정말 차근차근 북부를 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로 사업과 게이트 연구 및 관리는 대외적으론 나라의 부흥과 연결되는 것이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호응도 제법 얻었다.

문제는 이를 토대로 네 지역을 억압하고 손아귀에 넣으려는 수비테오 황제의 속셈이었다. 군주 국가가 지역을 통제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각 지역을 잘 다스려온 대귀족들을 전부 죽이고 가문을 멸문시키는 방법은 아주 큰 문제였다.

그나마 여기까진 바리아가 쉬이 추측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바리아가 어느새 테이블 가득 펼쳐진 증거들을 보며 말했다.

“왜 황실이 북부를 노리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본질 같은데?”

펠리오는 바리아의 솔직함에 감탄했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 점은 꽤나 호감을 샀다.

“나름 추리를 해 봤는데…….”

말해도 되겠냐며, 바리아가 펠리오와 레오니에에게 허락을 구했다. 두 부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허락 안 받고 그냥 말해도 되는데.”

“그렇긴 한데…….”

바리아가 머뭇거렸다.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이, 조금 이상할지도 몰라서요.”

만일을 위해서라고 바리아가 말했다. 천성은 착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북부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보석과 귀한 금속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간엔 보레오티 가문이 황실보다 부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으니까요.”

그거 진짜인데.

레오니에가 인중을 긁적이며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제 스승님, 그러니까 보스그루니 교수님의 연구실 습격 사건이 조사되는 과정을 보니 이상한 점이 보이더군요.”

바리아의 표정이 점점 의아해졌다. 정작 말하는 자신도 쉬이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란 뜻이었다.

“황실은 스승님의 연구에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인류의 기원은 북부라는, 그것 말인가요?”

펠리오가 물었다. 바리아는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스승님께 수상한 편지와 사람들이 찾아왔죠.”

바리아는 그중 한 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올로르 자작이 어느 날엔가 찾아왔었죠.”

펠리오가 그만 웃음을 흘렸다.

“붉은 백조가 말이지요?”

그가 아는 올로르 자작은 학술원과 거리가 아주 먼 인물이었다. 파르두스 후작은 일전에 올로르 자작을 머릿속에 허영심만 가득 찬 무식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평했었다.

“와서 무어라고 했습니까?”

“스승님 말로는, 연구비를 지원해 줄 테니, 연구 자료를 넘겨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르데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랬더니 협박 편지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아르데아의 제자였던 바리아는 그 편지들을 손수 모아 책장 뒤에 숨겨 두었다.

바로 5년 전에 펠리오가 찾아낸 것들이었다.

“그 후 스승님의 연구실이 습격을 당했지요.”

아르데아는 곧장 북부로 도망쳤다. 그리고 바리아는 수사 정황을 계속 주시했다.

제국의 세 번째 권력이라고 불리는 학술원이 침입을 당했는데, 수사 당국은 이를 제대로 조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를 최대한 감추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의심만 하기를 몇 년 후. 재정부에서 모은 증거들을 훑어보던 때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바로 황실의 게이트 연구 지원 및 조사단 파견 예산 청구서였다.

“황실은 게이트 목록에 북부와 수도를 잇는 두 게이트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획서에 적힌 예산 청구서에는 두 게이트를 조사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 확실히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간, 아르데아에게 닥쳤던 사건들이 떠올랐고, 바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당시 스승님은 인류의 기원이 북부라는 새로운 가설을 발표하셨죠.”

그때 아르데아가 이를 뒷받침할 증거로 각 지역에 있는 고대 유적지마다 남아 있는 어떤 특정한 무늬와 기호들을 제시했다. 이것들은 전부 북부의 어느 지역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함께했다.

“후우.”

바리아가 잠시 숨을 골랐다.

“북부 산맥.”

그리고 말했다.

“그곳에 있는 무언가.”

바리아의 초록색 눈이 반짝였다.

“뭔지는 몰라도, 황실은 이를 노리는 중입니다.”

응접실은 적막했다.

바리아는 자신이 내보일 패를 다 보였기에, 펠리오는 바리아가 제시한 것들을 전부 다 듣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기에 침묵을 지켰다.

‘…….’

레오니에도 서둘러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느라 나름 바빴다.

‘큰 틀은 변함이 없구나.’

레오니에는 새삼 운명이란 게 참 무언가, 싶었다.

자신은 이 세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증거였다. 펠리오와 바리아가 원작보다 훨씬 빨리 마주하게 된 것도 이야기의 흐름을 크게 바꾼 저의 탓이 컸을 거다.

반면 바리아는 정해진 운명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레오니에란 커다란 변수가 나타났다고 해도, 바리아는 결국 펠리오를 만나 거래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것도 바리아가 노력해서 바꾼 운명인걸.’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흐름을 정해진 운명이라 함부로 말하기 힘들었다. 지금껏 노력해 온 바리아에게도 미안한 소리였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이런저런 것들은 둘째치고.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준비성과 추리력에 상당히 감탄했다. 아카데미 입학 1년 전, 그러니 바리아는 못해도 열네 살 때부터 이 모든 걸 혼자 준비해 왔다니.

그간 그녀가 홀로 견디어냈을 고통을 생각하면 마냥 대견했다.

“……확실히.”

펠리오가 입술을 움직였다.

“대단하군요.”

바리아가 건넨 증거들은 분명 대단했다. 그녀 혼자 이 많은 것들을 조사하고 추리해 냈다는 사실에 찬사마저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펠리오가 바리아를 바라봤다. 자신의 입에서 나올, 거래에 관한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저 분홍 머리 아가씨에게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이것들은 다 펠리오가 아는 것들이었다.

그는 레무스 올로르가 레오니에의 생물학적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황실, 올로르를 비롯한 남부를 예의 주시해 왔다.

이쪽은 황실의 총애를 받는 파르두스를 정보원으로 두고 있으며, 수도 행정부에도 여러 사람을 심어 두었다. 즉, 펠리오는 이 거래를 승낙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는 당장 바리아를 이곳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나만.”

무엇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물어봅시다.”

펠리오는 증거 중에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 하나를 가리켰다. 가장 손때가 많이 탄 서류였고, 이를 가리키기 무섭게 바리아의 무릎 위에 올려졌던 손이 빠르게 주먹을 쥐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간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바리아 언니…….”

레오니에는 이를 안타까이 바라봤다.

반면 펠리오는 못 본 체했다.

“이 증거엔 바리아 양의 가문이 저지른 비리도 있습니다.”

펠리오가 가리킨 건, 에르바누 가문을 비롯한 황제파 귀족들이 모여 만든 예술가 후원 단체 모임에 대한 자료였다.

무명의 예술가를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조금씩 모은 돈은 전부 황제의 뒷돈으로 들어갔다. 비자금과 탈세의 흔적이었다.

“괜찮겠습니까?”

펠리오가 물었다. 이 사실들이 밝혀지면 황실과 올로르, 그리고 저들과 관련된 모든 이들은 결코 편안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저는……!”

무어라 말하려던 바리아가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울음이 왈칵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아주 힘겹게 참아냈다.

“……만약에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이 거래가 성사된다면, 제 부탁을 딱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말입니까?”

“공작님께는 별것 아닐 겁니다.”

바리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북부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주세요.”

아주 소박한 부탁이었다. 그러나 바리아에겐 아주 간절했다.

“저는 수도를 떠나고 싶어요.”

살해당한 바리아는 열넷이란 어린 나이로 회귀했다. 그 일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이었던 동시에, 가족들 속에서 버티어야 하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들은 딸이고 자매였던 가족의 죽음을 방조했다. 오히려 검까지 주며 사주했었다.

바리아는 그들과 연을 끊고 싶었다.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지냈는데도, 에르바누 가문은 여전히 바리아의 뒤에 있었다.

특히 이번 징계 사건으로 다시금 깨달았다. 이곳 수도에 있는 한, 자신은 여전히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아빠.”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바라봤다. 바리아의 간절함은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더욱이 레오니에는 바리아의 사정을 원작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펠리오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후회 없습니까?”

“후회라고 하면…….”

“무엇이든.”

가족을 등지는 것도, 고향을 버리는 것도.

펠리오는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만약.”

바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가족들을 한 번 더 믿고 기회를 준다고 한다면.”

지금껏 영롱하게 반짝이던 초록색 눈동자가 단숨에 생기를 잃었다.

“그건 제 목을 스스로 조르는 꼴이겠죠.”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가족과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그것에 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바리아를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만 볼 뿐이었다.

“내가 이 거래를 차 버리면 어떻게 할 겁니까?”

“이대로 북부로 도망치겠습니다.”

“그렇게나 북부가 좋습니까?”

의아해하는 펠리오의 물음에, 바리아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 같아요.”

첫 번째 생에서, 바리아는 북부로 가려다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그 탓인지 몰라도 다시 회귀한 후에도 줄곧 북부를 그리워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집보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북부가 애틋했다.

“그렇게 좋다니, 뭐.”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레오니에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마침 레오 가정 교사도 필요했고.”

여행 간 아르데아가 남긴 숙제만으론 레오니에의 공부에 차질이 있었다.

바리아는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 역시 수석을 차지했다. 거기다 그 어려운 재정부에 당당히 취직까지 했다.

“조건은 재정부를 그만두고, 우리 딸의 가정 교사로 들어오는 겁니다.”

“…….”

“장담컨대 봉급은 이쪽이 더 많으니 걱정 마시고요.”

“……네?”

바리아가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급변한 저의 상황에 머리가 아찔했다.

“언니!”

그때, 레오니에가 불쑥 앞에 나타났다. 소녀는 바리아의 손을 꼭 쥐었다.

“이제 다 됐어요!”

“다, 다 됐다는 건…….”

“울 아빠가 언니와의 거래를 승낙했어요!”

그 말에 바리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 꼭 쥐고 있던 긴장이 와르르 풀려 버리며 그대로 휘청거렸다. 옆에 있던 레오니에가 서둘러 부축했고, 펠리오도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붙잡아 줬다.

“…….”

어지러이 떨어진 분홍 머리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축하던 맹수 부녀가 움찔했다.

“고맙습니다……!”

바리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힘겹게 감사를 표현한 바리아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빠.”

레오니에가 훌쩍이는 바리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펠리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라는 뜻이었다. 지금 그는 제 앞에서 우는 바리아 때문에 아주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위로 좀 해.’

레오니에가 입을 뻐끔거렸다.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제 잘못 때문에 우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빨리 안 해?’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살짝 짜증이 난 펠리오가 기어코 바리아의 손을 놓으려던 찰나였다.

“공작님…….”

바리아가 고개를 들어 펠리오를 바라봤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친 펠리오는 적잖게 당황했다. 다 큰 성인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우는 모습은 상당히 껄끄러웠다.

하지만 손수건은 꺼내지 않았다. 펠리오의 바지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은, 오로지 레오니에의 뒤치다꺼리를 할 때만 쓰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바리아는 그 껄끄러운 얼굴로 히죽 웃었다.

“……울지나 마십시오.”

못생겼으니까. 펠리오가 퉁명하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손수건이 있는 쪽의 다리가 갑자기 따끔거렸다. 그래도 펠리오는 손수건을 꺼내지 않았고, 바리아는 결국 레오니에가 건넨 것으로 눈물을 훔쳤다.

펠리오는 아주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이 순간을, 그는 아주 뼈저리게 후회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내가 미쳤지, 진짜!’

바리아는 30분째 방문 손잡이만 쥐고 있었다. 다시금 떠오르는 어제의 추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가까스로 거래가 성사된 후, 바리아는 그간 혼자 참고 견디었던 힘든 순간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엉엉 울었다.

‘두 분 얼굴을 어떻게 본담.’

하필 울어도 보레오티 공작 부녀 앞에서 그렇게 애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그 두 사람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해도 할 말이 없었다.

‘특히 공작님은 이미 날…….’

바리아가 어제 저를 보던 펠리오의 시선을 떠올렸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바리아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차라리 파르두스 후작 영식에게 황궁 개구멍에 들어가는 모습을 다시 보여 주는 게 덜 창피할 것 같았다.

‘진정하자.’

후우, 후우.

숨을 몇 번이고 들이켠 뒤에야, 바리아는 겨우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사용인들조차 아직 돌아다니지 않는 복도를, 바리아는 아침 산책 삼아 돌아다녔다.

“여기가 보레오티…….”

바리아는 손가락으로 벽을 가볍게 만져 봤다. 마냥 꿈 같았다. 보레오티의 영역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손끝으로 전해지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바리아는 아예 신발에 양말까지 벗고 복도에 깔린 융단을 밟아 봤다. 꼬물거리는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맨발을 감쌌다.

바리아는 이내 다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부드러운 털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바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짜 보레오티……!”

그제야 뒤늦게 현실을 실감한 바리아가 콩콩, 발을 요란스럽게 폴짝거렸다. 거래가 성사되었을 때, 안도감은 해일처럼 몰아쳤다.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엉엉 울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안도감은 잔잔한 파도였다. 발바닥을 간질이는 이 융단처럼, 안도 그 자체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좋아!”

기어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허공에 마구 흔들었다.

“……저기, 아빠.”

새벽 훈련을 위해 평소처럼 기상한 레오니에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내버려 둬.”

자기 좋다고 하는 건데.

펠리오는 말리려는 레오니에를 붙잡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했더니, 바리아가 ‘보레오티’를 마구 외치며 복도에서 해괴한 짓을 하고 있었다.

“에휴, 젊은 사람이…….”

레오니에가 안쓰러운 시선을 내비쳤다. 열두 살 소녀는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

“레오 네가 드디어 이 아빠의 심정을 이해하는구나.”

나도 널 보면 항상 그런 마음이라며, 펠리오가 아직도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방방 뛰며 기뻐하는 바리아를 구경했다.

“눈밭을 뛰어다니는 망아지 같군.”

“아빠는 꼭 예쁜 표현 두고 그런 걸 쓰더라.”

“망아지가 뭐 어때서.”

“이왕이면 강아지라고 해.”

“망아지 차별하냐.”

하지만 곧 아이의 의견을 따라 ‘망’을 ‘강’이라고 바꿔 보았다.

“……개새끼?”

“아빠, 내가 말했지?”

단어랑 순서 바꾸지 말라고.

“이제 보니 고의구먼.”

레오니에는 서른이 넘고도 인간이 덜된 제 아빠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어젯밤에 잘 잔 것 같더군요.”

“…….”

“새벽부터 운동도 열심이고.”

“공작님…….”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인 바리아가 제발 그만하라며 손을 뻗었다. 설마 복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줄이야.

그때 바리아는 뒤에서 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두 쌍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까지야.”

“남의 집에서 이런 무례를…….”

“무례까진 아니었습니다.”

펠리오는 바리아가 창피해 쓰러질 지경임에도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얄미울 정도로 덤덤히 내뱉은 말투치고는 눈꼬리 끝이 미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변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니에는 고개를 저었다.

세 사람은 아침 식사 후, 어제 하다 만 이야기를 마저 나누기 위해 모였다. 바로 바리아의 채용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장은 불가능하죠.”

펠리오는 가지고 온 근로 계약서를 바리아에게 내밀며 말했다.

“바리아 양이 아직은 재정부 소속이시니.”

“언니, 사표 때리고 와요!”

“때, 때리고?”

상상을 뛰어넘는 레오니에의 표현에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때려도 될까요?”

하지만 곧 제 상사의 얼굴을 떠올리니, 사표를 던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왕이면 얼굴에 주먹도 갈기고 싶은데.”

“이 언니가 나랑 좀 통하네!”

레오니에가 주먹을 내밀었다. 바리아도 따라서 슬그머니 주먹을 내밀었다. 레오니에는 씩 웃으며 자신의 주먹을 바리아의 주먹에 콩 부딪쳤다. 기분 좋은 전율이 주먹을 타고 전해졌다.

“보레오티식 인사에요.”

“북부만의 예절인가요?”

바리아가 신기하단 듯이 물어봤다.

“아닙니다.”

펠리오는 서둘러 북부의 명예를 지켜냈다.

그제야 겨우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우선 바리아 양을 내가 고용하려면, 그쪽이 먼저 황궁에서 나와야 합니다.”

황궁 공무원은 겸직이 금지였다. 펠리오가 바리아를 가정 교사로 채용하려면, 일단 바리아가 행정관 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건 어렵지 않은데…….”

바리아가 머뭇거렸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당장 자신이 맡은 일도 처리해야 하고,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도 해야 했다. 정직당했을 때에 이미 그만둘 각오를 했다. 하지만 막상 그만두려고 하니 여러모로 걸리는 게 많았다.

저 없이 혼자 남을 레스라든가.

나름 잘 지냈던 동료들이나.

“안 걸립니다.”

펠리오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식으로 계약서 밑부분을 가리켰다.

“서명만 하면 제가 다 처리해드리죠.”

“공작님께서요?”

바리아가 못 미덥다는 듯이 바라봤다.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를 믿지 못하는 바리아의 시선이 아주 불쾌했다.

“나를 못 믿습니까?”

“거긴 황궁이에요.”

“그렇지요.”

“아무리 공작님이 대단하시다고 해도, 거긴 엄연히 황제 폐하의…….”

“언제 제가 한답니까?”

기가 막힌 펠리오가 코웃음을 쳤다.

“파르두스 후작이 할 겁니다.”

그러고는 펜을 들어 바리아의 손에 척, 하니 쥐여 줬다. 얼떨결에 펜을 쥔 바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바리아 양도 아셨을 겁니다. 보레오티와 파르두스의 관계를.”

파르두스는 아주 오래전에 보레오티의 밑에 들어왔다. 대외적으로 상하 관계를 내보일 순 없지만, 검은 맹수를 향한 파르두스의 충성심은 어지간한 골수 귀족보다 더했다.

펠리오의 명령 한마디면, 바리아의 퇴직 정도야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그리고 어제.”

사실 펠리오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진짜 이유가 있었다.

“여동생분이 레오에게 꽤나 실례를 범했다지요?”

펠리오는 어제 멜레스에게서 작은 소동을 전해 들었다.

“그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에르바누와 올로르 측에도 알려졌겠군요.”

그렇다면 두 가문이 이곳에 있는 바리아를 빌미로 어떤 식으로든 접근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바리아가 퇴직 신청을 하러 황궁에 들어갈 때 나타나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펠리오는 자신의 영역에 웬 잡것들이 어슬렁거리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특히 올로르는 더욱.’

펠리오가 사탕을 하나 까서 레오니에의 입에 넣었다. 얌전히 받아먹는 딸아이의 표정도 저처럼 썩 좋지만은 않았다.

저들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보레오티가 나서야 했다. 바리아 에르바누가 완전히 보레오티의 사람이 되었다는 걸 보여야 했다. 그래야 저 두 가문이 괜히 다가와서 자신들의 신경을 긁는 일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 당신은.”

펠리오가 또 다른 사탕 하나를 꺼냈다.

“편안히 기다리세요.”

“…….”

“아니면 지금이라도 바리아 양의 가족들에게…….”

“……정 따윈 없습니다.”

바리아가 냉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만, 공작님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사표 내고 일을 그만두는 것쯤이야 자신이 직접 해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펠리오의 말대로 저 혼자로는 가족들과 연을 확실히 끊는 것마저 녹록지 않았다.

그놈의 혈연이 무어라고.

그 탓에 보레오티에 폐를 끼쳐 미안했다.

“……이 정도가 무슨 폐라고.”

펠리오는 풀이 죽은 바리아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바리아는 사탕을 보며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레 집었다. 분홍색 사탕 껍질이 괜히 눈에 들어왔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됐어.”

펠리오가 바로 기각시켰다.

“왜!”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 질렀다. 깜짝 놀란 바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어 보고 거절해!”

“안 들어 봐도 뻔하지.”

“진짜 좋아!”

“안 좋으면 어떻게 할래?”

“좋으면 어떻게 할래?”

두 부녀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으르렁거렸다. 아직 보레오티 부녀의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바리아는 한참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저러다 공작님이 영애에게 손찌검이라도 하거나 큰 벌을 내리면 큰일이었다.

“진짜 좋은 생각이면 아빠 팔뚝 근육 그리게 해 줘!”

“안 좋으면 크로키 일주일 압수다.”

“그깟 걸로 무슨 일주일이나 압수야!”

하지만 두 맹수의 대화는 싸움이라고 느껴지기는커녕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가운데 낀 바리아는 멍했다. 어제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부녀지간에 저렇게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바리아가 아는 아버지와 딸은 결코 저렇게 사이좋을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늘 저와 여동생에게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만 자라기를 명했다. 만약 자신이 아버지에게 저렇게 큰소리로 대들었다간 방에 며칠 갇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는 온갖 물건을 깨고, 어머니는 방으로 도망쳤을 거다.

결국 펠리오가 포기했다.

“일단 말이나 해 봐.”

“요는 언니네 가족이 군말 못 하게 만드는 거잖아.”

“정말 간단히 말하면 그렇지.”

“그럼 이 방법이 제격이야.”

레오니에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이리와 봐.”

그리곤 냅다 펠리오를 불렀다.

레오니에는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를 바리아 옆에 앉혔다. 그리곤 팔 위치를 손수 잡아 줬다. 왼팔은 바리아의 허리에. 오른팔은 바리아의 배에.

“그리고 머리는 요로코롬.”

레오니에가 시키는 대로 하니, 펠리오는 어느샌가 바리아를 지탱한 채로 그녀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펠리오와 바리아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마지막은 이거야.”

이 세상 모든 여자의 부모님이 뒷목을 잡은 채 말을 잊게 할 최강의 주문.

“‘우리 아기, 엄마 힘들게 하면 나중에 아빠가 혼낸다?’”

“…….”

“…….”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펠리오와 바리아 두 사람 중 누구도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둘은 거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매품으로 구역질도 있어.”

욱, 우웁!

레오니에가 손수 입덧 연기를 선보였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허리 동작이며 입을 가리는 손짓이 섬세했다.

“여기서 ‘아기가 딸기가 먹고 싶대요.’라고 바리아 언니가 수줍게 배를 만지면서……!”

“공작님.”

바리아가 끼어들었다.

“일주일 압수하세요.”

“그럼 계약서에 서명하시죠.”

펠리오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바리아는 계약서도 읽지 않고 서명했다.

“서둘러 퇴직 처리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우리 딸 교육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정부의 맹수가 눈을 반짝였다. 펠리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휩쓸리지 않길 바랍니다.”

고용주와 피고용주가 악수했다.

“……어?”

레오니에는 무언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 *

재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바리아 에르바누 양의 자리가 어디지요?”

외부인 출입증을 달고 온 웬 낯선 인물들이 재정부에 나타나, 느닷없이 바리아의 자리를 찾았다.

“일단 이쪽이긴 한데…….”

레스가 비어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곧 그들은 책상에서 바리아의 개인 용품만 빼내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른 직원이 자기가 필요해서 몰래 가져가 쓰던 메모지까지 빼앗아 담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직원 중 한 명이 레스에게 물었다.

“보레오티예요.”

“보레오티?”

깜짝 놀란 직원이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그 탓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며 동시에 레스를 바라봤다.

“나도 잘은 몰라요.”

레스가 자신을 그렇게 보지 말라며 손을 억울하단 듯이 흔들었다.

“그렇지만, 바리아랑 친하잖아.”

“걔도 그냥 편지에다가 보레오티에 취직했단 한마디만 적었다고요.”

“보레오티에 취직했다고?”

“취직했다는군요.”

술렁거리는 직원들 속에서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어느 남자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재정부 차관이었다.

“과연 재정부의 맹수답네요.”

정직당하기 무섭게 보레오티에 취직이라니,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며 후작 영식이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정작 재정부 직원들은 저 웃음이 섬뜩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따라 웃는 이가 없었다.

“저 같아도 퇴직하죠.”

후작 영식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직 불이익이 얼마나 큰데.”

그렇지 않으냐는 후작 영식의 물음에, 재정부 차관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에르바누 백작에게 뒷돈을 받고 인사과에 바리아의 정직을 제의한 장본인이었다.

“하긴…….”

레스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승진은 힘들지.”

“그건 그렇지, 뭐.”

“돌아와도 전처럼 일하는 것도 어려울 거고.”

직원들은 점점 바리아의 퇴직과 이직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되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보레오티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바리아의 짐을 상자에 다 담았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잘 가라며 직접 문까지 열어 배웅해 줬다.

“진짜 사악하다…….”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죽였다.

“이거로 바리아는 완전히 파르두스와 척을 뒀네.”

“파르두스만이겠어?”

황제파 가문 출신이 귀족파의 수장인 보레오티로 넘어가 버렸으니.

“진영 이탈이지.”

“진영 이탈까지야.”

레스가 콧방귀를 피식, 뀌었다.

‘원래부터 저쪽 편이었는 걸.’

오랫동안 바리아를 감시한 레스에겐 이 모든 것이 예상했던 결과였다.

* * *

레오니에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이게 아닌데…….’

뭐가 좀 많이 이상했다.

“바리아 언니.”

“지금은 선생님입니다.”

“……선생님.”

“네, 아가씨.”

바리아가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재를 섞은 듯한 분홍색 머리는 하나로 단정히 올려 묶고 있었다.

근로 계약서를 작성한 후, 바리아는 레오니에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레오니에도 수업 시간 때만큼은 선생님이라고 확실히 호칭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둘은 오늘 처음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바리아는 미리 건네받은 레오니에의 수업 진도를 확인하고 밤새 문제를 만들었다. 레오니에의 수준은 이미 아카데미생과 맞먹었다. 당장 입학시험을 보아도 수석을 거머쥘 수 있을 정도였다.

“이상하지 않아요?”

정작 소녀는 공부에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상한 점이 있나요?”

바리아는 괜히 모르는 척 문제를 살폈다. 다행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해요.”

기어코 레오니에가 펜까지 내려놓았다. 그리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평화롭죠?”

“그거야 아가씨께서 문제를 안 푸시니까요.”

“우리 아빤 잘생겼잖아요.”

“아가씨께서 문제를 푸시면 공작님은 더욱 잘생겨지실 거예요.”

“그럼 이것만 풀고…….”

효녀 레오니에가 다시 펜을 들어 문제를 풀었다.

“아빠를 못난이로 만들 순 없지.”

세상에 이런 효녀 없다며, 레오니에는 문제를 푸는 내내 자화자찬했다. 바리아는 그런 레오니에를 정말 신기하단 듯이 바라보았다. 자신의 인간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레오니에만큼 엉뚱하고 재미난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나 변태인 아이도.

“공작님께서 잘생긴 것과 평화로운 게 무슨 상관인가요?”

바리아는 레오니에가 문제를 다 푼 걸 확인한 뒤에야 물었다. 푸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때도 짐작했지만, 역시나 레오니에가 푼 문제는 전부 다 맞았다. 머리가 정말 좋은지 가르치는 것마다 빠르게 흡수했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고용주와 가정 교사.”

그리곤 스스로 감탄했다.

“크으, 얼마나 좋은 울림이에요!”

레오니에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가씨.”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곤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조언했다.

“다른 곳에서 그런 말씀 하시면 변태라고 잡혀가요.”

아이의 손등을 토닥이는 바리아의 눈빛은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공작님 쓰러지세요.”

“……진심이에요?”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요.”

바리아가 곧장 말을 바꾸었다. 천하의 펠리오가 고작 딸아이의 변태스러운 언동으로 쓰러질 일은 없었다.

“어쨌건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레오니에가 또 한 번 강조했다.

“고용주와 가정 교사의 은밀한 만남이라니. 멋지지 않아요?”

“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네요.”

바리아가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는, 자신은 펠리오와 그런 관계가 될 생각이 죽어도 없다는 뜻이었다.

“평범한 게 최고랍니다.”

심지어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지금껏 바리아가 본 가정은 결단코 행복하지 않았다. 저를 사랑한다고 여기었던 부모님조차 결국엔 등을 돌리고 죽음을 사주하지 않았던가. 하나뿐인 여동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바리아로선 과연 자신이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연애도 영 떨떠름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도전 정신이 그렇게 없어서야.”

열두 살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바리아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꾸욱 참았다. 레오니에의 애늙은이 발언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휴, 속 타.”

레오니에가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드디어 만났는데!’

한 지붕 아래 원작 속 주인공이 모였다. 눈만 마주쳐도 사랑의 운동을 으쌰으쌰 힘내서 하던 그 둘이 이곳 보레오티에 모였는데.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한가.

레오니에는 평화로운 주종 관계를 유지하는 두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원작대로 돼야 해.’

원작의 흐름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껏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지가 벌써 5년이고, 그 다짐은 변함이 없었다.

하나 레오니에도 이번만큼은 원작의 힘을 절실히 깨달았다.

‘넌 내 엄마가 되어야 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펠리오의 짝은 바리아였다. 눈앞에 있는 저 여자가 바로 자신의 새엄마가 될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초면에 ‘엄마’라는 호칭이 튀어나올 리가 없었다.

‘내가 엄마로 만들 거야!’

바리아를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검은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런데 왜 아빠는 가만히 있냐고!’

당장 노력을 쏟아부어도 부족한데, 펠리오는 너무 건전했다. 아이는 육아에만 전념하는 아빠가 불만이었다.

‘……설마 진짜 고자라서?’

섬뜩한 추측에 불효녀는 흠칫했다.

“그럼 수업은 이 정도로만 할까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바리아가 수업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서로 처음 가르치고 배우는 날이니 적응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언니, 언니.”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레오니에가 귀 좀 대보라며 바리아에게 손짓했다. 이대로는 큰일이다 싶어서,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서 서로를 이성으로 의식하게끔 등을 밀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러다간 정말로 북부의 검은 맹수가 고자 소리를 듣게 생겼다. 맹수의 딸로서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었다.

“우리 아빠는…….”

그래서 바리아에게 특별히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 줬다.

“무려 열 개나 있어요.”

레오니에가 손으로 배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바리아의 시선도 내려갔다. 채도가 낮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레오니에의 배는 평평했다.

여기에 뭐가 열 개나 있을 수 있지, 라고 고민하던 바리아의 얼굴 근육이 점점 굳어져 갔다.

“배꼽이요?”

바리아가 경악했다.

“세상에나! 공작님한테 배꼽이 열 개나 있어요?”

“언니 지금 나랑 장난해요?”

이번엔 레오니에가 경악했다.

수업을 마친 바리아는 펠리오의 집무실로 갔다. 레오니에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마침 또 리네 백작 가문에 놀러 가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레오니에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바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맛있는 거 사 올게요!”

배웅을 마친 바리아는 그대로 집무실로 올라갔다.

“공작님.”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펠리오는 의자에 기댄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표정은 귀찮고 지루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냈지만, 몸은 군더더기 없이 똑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제법 바쁜 상태였다. 이것들을 서둘러 해 두어야 곧 있을 1황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짐이 도착했습니다.”

펠리오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엔 바리아가 기숙사에서 차마 챙겨 오지 못한 짐들이 있었다. 뚜껑이 없는 상자 안에는 재정부에서 쓰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아는 동료에게 빌려주고 몇 개월 동안 까먹었던 펜도 있었다.

“빠진 물건은 없습니까?”

짐을 확인하던 바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 속 짐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바리아는 전부 다 있다고 확신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바리아는 보레오티가 제게 제공해 주는 편의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거래가 성사되었다곤 해도 바리아는 제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어떤 의미론 상당히 골 아플 존재일지도 모른다. 가문과 척을 두었다고 해도 결국은 에르바누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점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습니까?”

펠리오는 바리아를 흘끔 보다가 다시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귀는 바리아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전혀 없어요!”

바리아가 힘주어 말했다.

“지금 내주신 방도 너무 감사할 정도입니다.”

처음 바리아가 잤던 방은 조그마한 손님방이었다. 하지만 다음날에는 펠리오가 직접 큰 방으로 바꾸어 주었다. 내 딸의 가정 교사가 고작 그런 방에서 잘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 오늘 수업에서…….”

바리아는 레오니에와 함께한 수업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이의 영특함을 칭찬한 바리아는 수업 수준을 조금 더 높이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엔 그냥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오늘 레오니에를 가르쳐 보니 조금 더 많이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도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책을 구할 수 있을까요?”

“나중에 트라에게 말하지요.”

펠리오는 흔쾌히 들어줬다.

“……그런데.”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리아가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복직근이 뭐지?”

배웅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뭘 들은 겁니까?”

펠리오의 머릿속에 요물 같은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얄미운 웃음소리까지 귓가에 선명히 들렸다.

“벼, 별건 아니고요!”

깜짝 놀란 바리아가 손까지 흔들며 부정했다.

“……별건가?”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쳤다.

“실은 수업이 끝나고 아가씨께서…….”

바리아는 레오니에한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런 용기가 생길 수 있었던 건, 의외로 펠리오가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상은 험악하기 그지없으나, 자세히 보니 오금이 저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은 펠리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 배꼽이 어떻게 열 개나 있습니까.”

펠리오가 조금 안쓰럽단 시선으로 바리아를 바라봤다.

“의외로 맹하군요.”

“매, 맹한……!”

바리아는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어떻게 복직근을 모릅니까?”

“저, 저도 모르는 게 있어요……!”

억울해진 바리아가 소심하게 대들었다.

“…….”

순간 펠리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게 정상이었군.’

바리아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복직근’ 같은 단어는 몸을 단련하는 기사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펠리오가 그 단어를 아는 건, 유난히 근육을 밝히는 제 딸의 취향에 맞춰 주려고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범상치 않은 근육 변태를 키우다 보니 자신도 기준이 좀 이상해졌다.

“바리아 양.”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다가갔다.

“복직근은 여깁니다.”

그리곤 친히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진짜 배꼽이 열 개나 있는 건가요?”

바리아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경악했다. 그녀는 펠리오의 배 위를 덮은 옷을 바라보며 보고도 믿기지 않는단 눈을 했다.

“어머 어떡해! 제가 공작님의 치부를……!”

“뭐 이런…….”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입을, 펠리오가 서둘러 꾹 다물었다.

‘맹수란 이름이 울겠군.’

바리아는 재정부에서 ‘맹수’라 불릴 정도로 엄격하고 무서운 행정관이었다. 그런데 지금 펠리오 앞에 있는 바리아는 어딘가 상당히 맹한 강아지 같은 인상이었다.

경계심은 많은데 이따금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강아지.

펠리오는 아직도 제게 배꼽 열 개가 있는 거냐며 걱정하는 바리아를 빤히 바라봤다. 제 속을 이렇게 뒤집는 사람은 레오니에 이후로 처음이었다.

“손.”

보다 못한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한번 줘 보십시오.”

“소, 손이요?”

“일단 줘 보십시오.”

펠리오가 혀를 가볍게 찼다.

움찔한 바리아는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조심조심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 위에 그보다 훨씬 작은 손이 맞닿았다. 순간 찌릿한 전율이 바리아의 전신을 훑었다.

펠리오의 손은 크고 두꺼웠다.

“크시네요.”

바리아가 무심결에 말했다. 제 손이 아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바리아는 호기심에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봤다. 손끝을 스친 펠리오의 손바닥은 단단했다. 전에 본 레오니에의 손에 박인 굳은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주 따뜻했다.

“그런데 손은 왜…….”

무엇 때문에 달라고 했는지 물어보려던 바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이내 말을 멈췄다.

“…….”

펠리오는 아주 신중한 시선으로 바리아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강아지를 처음 보는 아이처럼 신기해하는 듯했다. 심지어 엄지손가락으로 바리아의 손등을 가볍게 건드리기까지 했다.

깜짝 놀란 바리아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펠리오가 바리아의 손을 아예 대놓고 만졌다. 그는 바리아의 검지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다 접었다.

“여기서부터 하나.”

그는 바리아의 손가락을 자신의 옷 위로 가져왔다.

“둘, 셋…….”

펠리오는 바리아의 손가락으로 자신의 갈라진 복근을 하나하나 알려 줬다. 가슴 아래서부터 숫자를 따라 천천히 내려온 손가락은 이윽고 ‘여덟’에서 멈췄다.

바로 골반 언저리였다.

“복직근은 근육 이름입니다.”

여기 배에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 근육의 형태들을 통틀어 그렇게 부른다며, 펠리오는 제 딴엔 아주 친절하게 알려 줬다.

“이 이상은…….”

만약 펠리오가 아홉 번째를 가리킨다면, 그땐 바지 아래였다.

“……안 하는 게 좋겠지요?”

실컷 다 가르치곤, 펠리오가 신사처럼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속은 전혀 신사답지 않았다.

‘미쳤나……?’

내가 미쳤나?

펠리오는 자신이 갑자기 왜 이딴 짓을 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저답지 않게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튀어나와 버렸다.

애당초 바리아에게 손을 달라고 말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다. 그냥 제 손으로 배를 가리키는 방법도 있었고, 하다못해 말로 가르쳐도 되었을 일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착각을 하는 바리아를 보자니 이상하게 장난기가 솟구쳤다.

‘내가 레오도 아니고.’

이런 변태 짓을 하다니. 나름 신사라고 스스로 자부했던 펠리오는 양심이 찔렸다.

“바리아 양.”

사과하려던 펠리오가 멈칫했다.

“…….”

바리아는 여전히 제게 손이 잡힌 채, 펠리오의 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옷 너머를 꿰뚫어 보는 듯한 초록색 눈동자는 한 번도 끔뻑이지 않았다.

“바리아 양?”

“네? 아, 네에!”

뒤늦게 알아챈 바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말간 두 볼에 불그스름한 열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 그랬군요. 그러니까, 근육! 그러니까, 근육 이름이었군요!”

“기분 나쁘시진 않았습니까?”

“네? 제가요?”

바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진심입니까?”

이쯤 되자 펠리오가 의아했다.

“방금 제가 바리아 양의 손으로 제 배를 가리켰는데요?”

“하지만 그게 전부였잖아요.”

물론 바리아도 처음엔 놀라긴 했다. 갑자기 손이 잡혀 그대로 끌려가는데, 어느 누가 안 놀랄까. 하물며 그 상대가 제국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한 북부의 주인님이신데.

바리아도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근사한 남자가 바로 코앞에 있으니 얼굴에 열이 사르르 피어올랐다. 특히 복직근이 배에 있는 근육 이름이란 사실을 알려 줄 땐 심장이 쿵쿵거렸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공작님이 잘생기셔서 심장이 조금 떨리긴 했습니다.”

바리아는 자신의 두근거림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방긋 웃었다. 펠리오의 표정이 일순 부드럽게 풀렸다. 상당히 당연한 말을 듣는 건데도 괜히 우쭐해졌다.

“그래도 안심하세요.”

바리아가 이어 말했다.

“결단코 반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펠리오는 아주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전혀?”

“전혀!”

“정말입니까?”

“전 공사 구분 확실합니다!”

바리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재정부에서도 추문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일만 했던 자신의 과거를 무척 자랑스럽게 알려 줬다.

“절 신뢰하셔도 괜찮습니다!”

씩씩하게 말하는 바리아의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펠리오는 떳떳하기 그지없는 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늘게 접힌 검은 눈동자 속엔 아주 약간의 실망감이 어려 있었다. 그 이유는 펠리오 본인조차 몰랐다.

자존심도 상했다.

‘나도 미쳤나 보군.’

마치 무언가를 기대한 것 같지 않은가.

“그럼 되었습니다.”

찝찝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펠리오가 몸을 휙 돌렸다.

“조언 한마디를 하자면.”

책상 뒤로 넘어간 펠리오가 서랍에서 공책 두 권을 꺼냈다.

“우리 레오가 근육을 많이 좋아합니다.”

“그러신 것 같습니다.”

“부정은 안 하십니까?”

“하지만 좋아하시잖아요.”

바리아가 이곳 저택에 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레오니에의 근육을 향한 뜨거운 애정이었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레오티 공작 영애의 숨겨진 비밀이었다.

“저는 아가씨의 취미가 그림이라고 들었어요.”

“그거 근육 그리려고 생긴 취미입니다.”

펠리오가 숨겨진 사실을 알려 줬다.

“본인 말로는 창조형 변태라는군요.”

“차, 창조형 변태요?”

바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신박한 표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퍼다 마실 우물이 없으니 자기가 직접 판다는군요.”

“아가씨께서 우물을 파세요?”

깜짝 놀란 바리아가 입을 쩍 벌렸다.

“진짜 판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펠리오가 설핏 눈을 찡그렸다. 어쩐지 바리아에게서 레오니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왜 제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허파를 이리도 뒤집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그러다 펠리오가 멈칫했다. 레오니에는 딸이니까 그렇다 쳐도, 바리아는 거래로 이뤄진 고용 관계일뿐이었다.

‘일 때문에 피곤한가 보군.’

펠리오는 지금 자신이 이렇게 이상해진 이유를 전부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수도에 올라온 뒤로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그래서 이 별거 아닌 상황에도 마음이 괜히 어수선해진 거라고 스스로 결론지었다.

“어쨌건 근육에 대해 알아 두면 좋습니다.”

상당히 친절한 조언이었다.

바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걸 빌려드리지요.”

선심 쓰듯 펠리오가 내민 건 아까 꺼내둔 공책 두 권 중 한 권이었다. 바로 그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날, 당시 아홉 살이었던 레오니에한테 강제로 받은 선물이었다.

책상에 홀로 남은 것은 얼마 전에 레오니에한테 압수했던 크로키 연습장이었다.

“이게 무언가요?”

건네받은 바리아가 물었다.

“레오가 그린 그림 사전입니다.”

“어머나!”

깜찍한 효심에 미소가 피어났다.

“제 근육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머나…….”

끔찍한 효심에 미소가 사라졌다.

살짝 열어 본 사전 안에는 다양한 펠리오가 그려져 있었다. 책상에서 업무를 보는 모습이나 포크와 나이프를 우아하게 쥔 자태,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순간이며 검을 쥐고 단련하는 동작까지.

거기다 화풍이 너무도 섬세했다. 마치 지금 눈앞에 있는 펠리오를 그대로 옮겨 담은 듯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림이 움직일 것만 같았다.

바리아는 이 그림을 레오니에가 그렸단 사실을 잠깐 망각해 버렸다.

“보면 제 팔뚝 옆에 근육 명칭이 적혀 있지요?”

곁에 다가간 펠리오가 사전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제 일정을 시간 순서대로 그렸습니다. 근육 명칭도 위에서 아래로 쭈욱 내려오니, 찬찬히 읽으면서 공부하세요.”

“그래도 되나요?”

바리아가 물었다.

“아가씨께서 공작님께 선물로 주신 거고…….”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내 건데. 펠리오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농담 같은 경고를 날렸다.

“보고 반하지나 마세요.”

“공작님도 그런 농담을 하세요?”

응접실을 막 나가려던 바리아가 설핏 웃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작 농담을 던진 펠리오도 꽤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레오한테 옮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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