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첫 만남
그리고 그보다 조금 먼저.
‘움직이는구나.’
수도에 있는 바리아도 생각했다.
평소처럼 재정부에 출근하는데, 어째선지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다 자신을 기다리던 레스가 급한 목소리로 이리 와 보라며 서둘러 끌고 갔다.
게시판에 공고문 하나가 새로 걸려 있었다. 그곳에 모여 있던 직원들이 바리아를 보자마자 우르르 비켰다.
“저거 봐!”
레스가 제 일처럼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직]
공고문을 본 바리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너 정직당했어!”
바리아의 정직에 모든 재정부 직원이 충격을 받았다. 다들 이유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공고문에도 적혀 있듯이, 바리아의 정직 이유는 바로 폭행이었다. 아마 어제 있었던, 오노켄타 남작의 입에 주먹을 친히 넣었던 그 일이 위에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어떤 의미론 당연한 정직 사유였다. 그러나 직원들이 받은 충격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왜 정직인데 기숙사도 퇴실해야 하는 건데?”
레스가 화를 냈다.
이건 아주 부당한 벌이었다. 애당초 그렇게 행정부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오노켄타 남작이 다른 직원들을 희롱하고 비난하는 일말의 작태도 일찌감치 벌했어야 한다. 솔직히 바리아가 심한 폭력을 썼지만, 충분히 정당방위였다.
그런 일말의 사정을 무시한 채, 바리아에게만 이토록 부당한 처우를 내린 건 누가 봐도 차별적인 잣대였다.
“지금 겨울이라고! 지금 이 엄동설한에 밖으로 나가면 얼어 죽는단 말이야.”
레스는 당장이라도 위에 올라가 따질 것처럼 이를 바드득 갈았다.
“됐어.”
하나 그걸 바리아가 말렸다.
‘결국 날 쫓아냈구나.’
그래야 그 이상한 기획이 통과될 테니까.
바리아의 별명인 ‘재정부의 맹수’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었다. 하나는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에서. 다른 하나는 절대 통과시켜선 안 될 기획들을 어떻게든 막아내는, 재정부의 양심이자 최후의 보루란 뜻에서.
그런 바리아가 정직이 되어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이제 재정부는 오노켄타 남작이 밀어붙이던 이유 모를 게이트 정비 사업 기획을 통과시킬 것이다.
“후우…….”
바리아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했다. 물론 자신도 이 상황이 조금은 억울했다. 정직은 이해가 가나, 기숙사 퇴실은 솔직히 말이 안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여러 추측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건 부친인 에르바누 백작이 어떻게 손을 써 기숙사 퇴실까지 만들어냈단 것이었다.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고, 가문의 ‘대업’이란 것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큰딸이 눈엣가시였을 테다.
아마 이번 일로 도로 집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지금 황실 정문에 에르바누 가문의 마차가 떡하니 있을지도 모른다.
‘……거긴 죽어도 안 돼.’
바리아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노숙할지언정.’
다시는 그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최소 감금이고, 최악의 경우엔 자신도 올로르와 연이 있는 어느 가문에 강제로 시집가게 될지도 모를 판이다.
‘모아 둔 증거는 어쩌지?’
당장 그것들을 어디에 숨겨야 할지도 문제였다. 10년도 넘게 노력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길 순 없었다.
“바리아…….”
레스가 말이 없는 바리아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봤다. 나름 친했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한 명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괜찮아.”
너무 걱정 말라며 바리아가 도리어 레스와 동료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바리아 본인이 가장 심각한 표정이었다. 괜찮은 척하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으음, 다들 일 안 하나요?”
그때였다.
“왜 이렇게 모여 있죠?”
그때였다. 낯선 목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아봤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람 좋아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파, 파르두스 후작 영식!”
재정부 직원 중 나름 고위 귀족 출신인 사람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저 남자가 파르두스 후작의 아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미친, 저 사람이 왜…….”
레스가 인상을 와락 쓰며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를 잠깐 뵙는 김에 들렀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행정관들이 모인 곳이지 않습니까.”
눈도장 찍으러 왔다고 후작 영식이 싱긋거렸다.
“오오, 그런데…….”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게시판에 걸린 공고문을 보며 슬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군요.”
그리곤 단번에 바리아를 돌아봤다.
‘뭐지……?’
어떻게 날 바로 알아본 거지? 바리아는 긴장한 와중에 어안이 벙벙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북부에 늘 머물렀기 때문에, 같은 황제파 가문이어도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후작 영식은 단번에 바리아를 찾아냈다.
“그러게 왜 사람을 때립니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나무라듯 말했다.
“물론 오노켄타 남작이 썩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주먹질은 참았어야지요. 그 예쁘고 고운 손으로 뭐하러 그런 짓을 한 건지.”
“……네?”
“결국엔 본인만 손해지 않습니까.”
얼떨결에 혼이 난 바리아는 이번에도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지금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남작에게 폭력을 가한 바리아를 훈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탓을 하는 말들이 오히려 오노켄타 남작을 욕하는 것처럼 들렸다. 꼭 때릴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비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뭐하고 계시나요?”
“저, 저요?”
“그럼 제가 뭐 다른 사람한테 묻나요?”
내 눈앞엔 당신뿐인데? 후작 영식이 싱긋 웃었다.
바리아는 슬슬 저 남자의 말투가 짜증 나기 시작했다. 아주 대놓고 비아냥이었다.
“그게 출근을, 하러 왔는데…….”
“하러 왔지만.”
후작 영식은 공고문을 가리켰다.
“정직이네요.”
“…….”
“거기다 기숙사 퇴실까지.”
“…….”
“그럼 어서 돌아가세요.”
여긴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친절하게도,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바리아에게 닥친 현실을 다시금 일깨워 줬다.
‘이왕 정직인 거.’
사고 한 번 더 칠까?
바리아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와, 진짜 짜증!”
레스가 침대에 주먹을 날리며 열불을 토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의 친절한 퇴장 명령 덕에, 바리아는 기숙사로 돌아가 퇴실을 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혼자는 힘들 수 있으니 옆에 있는 친구도 함께 가라며 후작 영식이 친히 레스까지 붙여 줬다.
“누가 보면 자기가 상사인 줄 알겠어!”
“상사랑 비슷한 거지…….”
여러모로 지친 바리아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가방에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손도 마찬가지였다.
“파르두스잖아…….”
파르두스 후작 가문은 황실의 총애를 받는 가문이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가 곧 황실의 뜻이며, 천하의 보레오티 공작도 그들을 예의 주시할 정도라고 했다.
나라의 재상도 파르두스 후작을 못 이겼다. 그러니 기껏 행정부 산하 중 하나인 재정부 전 직원이 파르두스 후작 영식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너 어떻게 할 거야?”
레스는 한참 고민하다가 자신의 기숙사 방에 몰래 숨어 지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바리아가 이를 거절했다.
“들키면 네가 잘릴 거야.”
저 때문에 친구가 위험을 감수하게 둘 순 없었다.
‘어쩌면…….’
바리아는 생각을 고쳤다. 그래, 어쩌면 이 상황은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북부로 가는 거야.’
수도만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지금 수중에 있는 돈으로 북부까지 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직장이야 딱히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퇴직하면 그만이었다.
보레오티 공작을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나러 가는 거였다.
‘괜찮은 것 같은데?’
무모한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가득해졌다.
“……레스.”
바리아가 유일한 희망에게 물었다.
“너 전에 다른 사람들하고 몰래 술집에 간 적 있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생뚱맞은 물음에 레스가 흠칫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바리아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레스는 기가 눌렸다.
“기숙사 통금 시간 지나고도 술집에 놀러……!”
“쉬, 쉬잇!”
누가 듣는다며 레스가 서둘러 바리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바리아는 냉큼 손을 떨어트리며 이어 말했다.
“그거, 어떻게 간 거야?”
행정관들이 사는 기숙사는 황궁 내에 있었다. 그런 탓에 황궁 경비와 안전 등을 위해 통금 시간 이후엔 외출이 금지였다. 하지만 레스는 다녀왔었다.
마주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환해졌다.
기숙사 뒷문으로 나오면서, 레스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개구멍이 하나 있어.”
두 사람의 품에는 바리아의 짐이 담긴 가방이 꼭 안겨 있었다. 오랫동안 모아 둔 증거는 봉투에 넣어 옷 속 등에 묶어 뒀다. 흘러내리지 않게 붕대로 칭칭 감기까지 했다.
레스가 무슨 미친 짓이냐고 경악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봤지만, 바리아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이것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여기야.”
한참을 숨어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어느 담 앞이었다. 구석진 담벼락 아래, 수풀에 가려진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뒤를 해쳐 보니 분명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구멍 하나가 있었다.
“황궁에 개구멍이라니…….”
바리아가 경악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제와 그 가족들이 거주하는 곳인데 개구멍이 있단 말인가.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어.”
레스도 동의했다. 도대체 왜 이런 구멍을 수리하지 않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심지어 황궁 보수 공사 비용을 레스의 손으로 직접 통과시켰기에 더욱 기가 막혔다.
어쨌건 덕분에 이렇게 도망칠 길이 생겼으니, 바리아로선 고마운 일이었다.
“저 앞은 어디야?”
바리아가 물었다.
“광장에서 좀 떨어진 숲이야.”
“숲…….”
따라 중얼거리는 바리아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숲이라면 당장 지나갈 사람이 없단 뜻이었다.
“기사들 올라.”
레스가 서두르라며 부추겼다. 바리아는 서둘러 가방 두 개를 구멍 밖으로 밀어 넣었다. 가방은 쑥쑥 밀려갔다.
“이거, 우리 집 주소야.”
레스가 쪽지를 건넸다.
“만약에 잃어버려도, 일단 보레오티 영지로 가. 거기서 내 이름 대면 누구든 우리 집을 찾아 줄 거야.”
“레스…….”
바리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고생하는 친구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울지 말고 어서 가.”
영원히 이별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주책이냐며 레스가 등을 밀었다. 이젠 정말 벽을 통과해서 떠나야 할 때였다.
“정말 고마워.”
바리아는 젖은 눈가를 소매로 벅벅 닦았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조심히 가.”
“응……!”
바리아는 두툼한 겉옷을 벗어 구멍에 마저 밀어 넣었다. 긴 머리도 방해가 될까 질끈 묶었다. 얇은 옷감과 드러난 목에 싸늘한 추위가 온몸을 덮쳤지만, 긴장감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곧 바리아가 몸을 낮췄다.
‘의외로 구멍이…….’
바닥을 기어 벽을 통과하던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구멍이 생각보다 컸다. 어지간히 몸 좋은 기사라도 노력만 하면 나올 수 있을 크기였다.
바리아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황실 재정이…….’
“바리아, 괜찮아?”
재정부로서 걱정하던 중, 벽 너머에서 레스가 물었다.
“어, 어!”
마저 몸을 뺀 바리아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이제 겨우 황궁에서 나왔을 뿐인데, 바리아는 큰 고비를 하나 넘긴 것처럼 기운이 쭉 빠졌다. 하지만 가슴은 어느 때보다 두근거렸다.
“나 나왔어. 이제 괜찮아.”
“그럼 어서 가. 조심하고.”
“레스, 정말 고마워…….”
바리아가 벽에 손을 얹으며 인사했다.
한 고비 넘기고 나니 뒤늦게 추위가 느껴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짐을 찾았다. 가방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방해될까 따로 밀어 넣었던 외투도 없었다.
바리아는 공포에 휩싸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짐들이 조금 떨어진 나무 기둥 아래에 다소곳이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방과 겉옷에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집에서 보낸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던 거야? 순간, 바리아의 머릿속엔 집으로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피가 차게 식었다.
‘절대 안 돼!’
뒤늦게 정신 차린 바리아가 다시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숙였다. 등에 숨겨 둔 증거들이 부스럭거렸다. 이것들만큼은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던 바리아가 흠칫했다.
“파, 파르두스 후작 영식?”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이곳에 있었다. 바리아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웠다. 조금 전 재정부에서 자신을 쫓아냈던 그 얄미운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파르두스 후작 영식은 바리아가 담 아래 개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바닥에 누운 모습을 상당히 신기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꼴이 어찌나 웃긴지, 그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조용히 깨물고 있었다.
바리아의 얼굴이 수치심에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수치심보다 더한 감정이 빠르게 심장을 옭아맸다.
바로 공포였다.
“사, 산책 중이신가요……?”
애써 태연한 척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영애를 기다렸지요.”
물론 그런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다며, 후작 영식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러모로 재밌었다고 말하는 그의 웃음은 조금 전 재정부에서 본 얄미운 미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바리아에겐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아버지인가요?”
바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아버지가, 부탁한 건가요?”
“진심으로 물어보시는 건 아니지요?”
역으로 되묻는 후작 영식의 말투에 약간의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영애의 집안을 무시할 생각은 손톱의 때만큼도 없습니다만.”
나름 예의를 갖춘 채, 후작 영식이 이어 말했다.
“그래도 어찌 그깟 에르바누 따위가, 감히 파르두스에게 명령을 합니까.”
기어코 파르두스 후작 영식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상상 속에서도 없을 일이지요.”
“그럼 올로르인가요?”
“농담에 소질이 많이 없으시네요.”
후작 영식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빠르게 채웠다.
바리아는 조심히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왼손으로 덮은 오른손은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최악의 경우, 후작 영식을 치고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일단.”
다시 서글서글한 미소로 얼굴을 덮은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몸을 살짝 틀었다.
“가실까요?”
그러나 바리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감춘 주먹에 힘을 주며 언제든 칠 준비를 했다.
“어, 어디로요?”
“저희 집으로요.”
“……네?”
바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왜, 왜요?”
바리아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면 본인의 집에 가고 싶으신가요?”
“아니요!”
후작 영식의 물음에 바리아가 바로 답했다. 후작 영식이 그것 보라며 눈썹을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그리곤 자신을 따라오란 듯이 가볍게 턱짓했다.
그가 몸을 튼 방향은 광장 쪽이 아니라, 숲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는 샛길이었다.
“일단 옷부터 입으시죠.”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바리아에게 겉옷을 넘겼다.
“……왜 저를 돕는 건가요?”
겉옷을 넘겨받은 바리아가 물었다.
“의심은 아주 좋은 행동입니다.”
그래야 당하지 않고 산다며,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바리아의 가방을 두 손으로 직접 들었다. 겉옷을 걸친 바리아가 자신이 들겠다고 팔을 내밀었지만, 후작 영식은 되었다며 발을 움직였다.
“영식께서 제게 이러실…….”
“이유는 없죠.”
후작 영식이 바리아가 하고픈 말을 똑같이 말했다.
“맞습니다, 당신은 일단 나를 계속 의심해야 해요.”
바리아는 슬슬 머리가 아파졌다. 그는 이상할 만큼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바리아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주변을 살폈지만, 곧 숲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보곤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벌써 의심을 멈추셨나요?”
마차에 먼저 오른 후작 영식이 기운 빠진 미소를 지었다.
“하, 하지만 이건…….”
바리아가 마차에 새겨진 그림을 따라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얼룩무늬가 짙은 표범은 파르두스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후작 영식은 가문의 마차를 타고 온 거다.
이 마차는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눈에 띄게 될 것이다. 특히 수도라면 더욱.
즉, 바리아에게 해코지할 가능성은 아주 드물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마차를 타고 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럼.”
후작 영식이 손을 내밀었다. 바리아는 그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숲을 빠져나온 마차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광장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곳으로 나온 건 잘한 행동입니다.”
창문 밖을 살피던 후작 영식이 싱긋 웃었다. 그가 바라보던 곳에는 웬 마차 한 대가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부터 나오는 중이었다. 분홍색 토끼가 문짝에 새겨진 걸 보니, 제 딸을 마중하기 위한 에르바누 백작이 타고 있는 듯했다.
바리아는 숨이 턱 막혔다. 추측만 했지, 정말로 아버지가 자신의 징계 처분에 손을 썼을 줄이야.
황궁 정문으로 나갔다간 정말로 끌려갈 뻔했다.
“참 다정한 아버지군요.”
“영식께서도 농담엔 소질이 없으시네요.”
미친 소리 하고 있네.
바리아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자신이 했던 말로 반격당한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피식 웃었다.
그 유명한 ‘재정부의 맹수’를 처음 봤을 땐, 정말 얼굴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단 사실을 또다시 가슴 깊이 깨우쳤다. 남들 싸우는 것만 봐도 울 것 같은 순진한 얼굴로, 재정부에서 가장 무서운 직원으로 불리고 있다.
탁한 분홍색 머리가 조금만 보여도 행정관들이 몸을 떨며 자리를 피할 정도라더니.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격.
‘……에르바누 백작이 골 좀 아팠겠어.’
어쩌다 그런 토끼 집안에서 저런 맹수가 태어난 건지.
후작 영식은 조금 즐거워졌다. 그로서도 올로르와 사돈지간이 된 뒤로 제 세상인 것처럼 으스대는 토끼 백작이 썩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는 바리아 양이 마음에 드는군요.”
“유부남은 됐습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셨습니까?”
제겐 멋진 아내와 귀여운 자식이 있다며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안타까이 말했다.
“이제 농담은 그만하시고 가르쳐 주시죠.”
마치까지 탄 이상, 바리아는 알아야 했다.
“왜 저를 도우시는 겁니까?”
바리아가 주먹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다. 만약 여기서까지 농담을 한다면, 도움이고 뭐고 그냥 한 대 치고 북부로 당장 도망갈 생각이었다.
“……명령입니다.”
후작 영식이 순순히 답했다. 바리아가 감춘 주먹은 무섭지 않았지만, 저를 노려보는 초록색 눈동자는 솔직히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뜩했다. 그는 아직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바리아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느꼈다.
“보레오티 공작님께서 곧 수도로 올라오실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부디 저의 집에서 편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아는 눈앞에 아버지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후작 영식이 싱긋 웃었다.
* * *
쾅!
“그 빌어먹을 것 같으니!”
에르바누 백작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멀끔하게 뒤로 넘겼던 머리 몇 가닥이 툭툭 이마 아래로 떨어졌다. 흰머리가 드문드문 났음에도 화사한 분홍색 머리는 에르바누 가문의 특징이었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흘러내린 머리를 정돈하며, 백작이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가뜩이나 말 안 듣는 장녀가 골치 아팠던 찰나였는데, 겨우 집으로 끌고 올 기회가 생겼다 싶었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놓쳐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행방조차 묘연했다.
그래도 자신은 인자한 아버지라고, 가문과 연을 끊은 것처럼 지내는 못된 딸을 직접 집으로 데려오려고 마차까지 끌고 황궁 앞까지 갔었다.
하지만 바리아는 몇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재정부에 연락해 물어보니 일찌감치 짐을 빼 기숙사를 나간 지 오래라고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온 게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후우, 후우…….”
에르바누 백작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책장에 넣어 둔 술병과 잔을 가져왔다. 대낮부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백작의 눈이 토끼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애가 너무 변했어.’
입가에 살짝 흘린 술을 대충 소매로 닦으면서, 에르바누 백작이 생각했다.
그는 이해가 안 갔다. 그렇게 순종적이던 아이가 왜 저렇게 변했을까.
바리아는 착한 아이였다. 비록 에르바누 특유의 화사한 분홍색 머리는 지니지 못했지만, 아이는 그런 자신의 모자람을 일찍이 깨달았다.
스스로 집안에 도움이 되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다. 뒤이어 태어난 여동생 로타에게도 질투 한 번 하지 않고 양보하는 착한 언니였다.
그랬던 아이가 갑자기 변했다.
‘집히는 거라곤…….’
물론 그것도 이해가 안 갔지만.
집히는 일이 딱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 두 딸이 호숫가에서 놀다가, 바리아가 실수로 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겨우 구해낸 딸은 생사를 헤맬 정도로 고열에 시달렸다.
그 뒤에 아이가 변했다.
딱히 반항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장녀는 가족들과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그 이유를 당시엔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그 나이 특유의 예민함으로만 여기며 따끔하게 타이르기만 했다.
‘배은망덕한 것……!’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에르바누 백작은 결백했다. 그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했다.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아카데미 수석 입학을 따냈을 땐 성대한 파티를 열어 축하해 줬다. 하지만 바리아는 그 파티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바리아는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둘째 딸 로타의 약혼 파티였다.
똑똑.
“아버지.”
그때, 애교 어린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타!”
백작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의 사랑스러운 둘째 딸, 로타 에르바누였다.
“이 대낮부터 술이에요?”
로타는 에르바누 백작의 손에 있는 잔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콧잔등을 살짝 꿈틀거리며 눈을 위로 살짝 흘겨 뜬 모습이 누가 보아도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몸 상할까 걱정이에요.”
로타가 아버지의 손에서 잔을 천천히 빼내며 말했다.
“친정에 올 때마다 이렇게 걱정시키실 거예요?”
투덜거리는 딸의 모습에 에르바누 백작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미안하구나.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알면 술을 조금만 줄이세요.”
“그래도 네 언니 때문에 말이지…….”
“아…….”
착한 둘째 딸은 아버지의 말에 곧장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아직 소식이 없나요?”
로타가 백작을 이끌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네 언니는 정말 답이 없어.”
에르바누 백작이 말했다.
“재정부에 취직했다고 했을 때, 드디어 집안에 도움이 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났다.
바리아는 재정부에 취직한 직후 사사건건 에르바누 백작을 방해했다. 올로르 자작을 비롯하여 중요 가문들이 모여 시행해야 할 대업에 늘 제동을 걸었다. 거의 작심을 하고 집안을 말아먹으려는 꼴이었다.
“언니도 정말…….”
로타가 한 손으로 턱을 감쌌다.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야.”
에르바누 백작이 로타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결 풀린 미소를 지었다. 로타가 쑥스러운 듯이 눈웃음을 쳤다. 그 뒤로 두 부녀는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직 아이 소식은 없고?”
백작이 물었다. 그때, 처음으로 로타의 화사한 미소에 금이 갔다.
“……아무래도, 바쁘시잖아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로타는 간접적으로 제 남편인 레무스 올로르에게 돌렸다. 백작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네가 잘해야지.”
“네, 아버지…….”
로타가 순순히 답했다.
대화를 어느 정도 나눈 뒤, 로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도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래 있으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선뜻 가라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매번 편지로 아버지 이야기를 하세요.”
“네 엄마는 걱정이 너무 많아.”
“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그런 거죠.”
로타가 백작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저 그럼 갈게요.”
“사돈이랑 레모스에게 안부 전해 주고.”
“네, 들어가세요!”
로타가 분홍 머리를 흩날리며 돌아섰다. 화사한 미소는 단숨에 사라졌다.
“아, 진짜…….”
마차에 오르고 혼자가 된 뒤에야, 로타가 끼고 있던 장갑을 툭툭 던지며 온갖 짜증을 부렸다. 거의 패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아아아악!”
그러고도 화가 안 풀린 로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럼 자기가 애를 낳든가!”
분노의 대상은 조금 전까지 함께 웃으며 대화한 에르바누 백작이었다.
“하여튼 자기만 잘난 줄 알지.”
로타는 손수건으로 입술을 벅벅 닦았다. 조금 전에 아버지의 볼에 입을 맞춘 것만 생각하면 그가 간절히 원하던 임신이라도 한 것 같았다. 입덧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나저나 언니는 왜 또 저 지랄이야.”
누구 하나 저한테 도움이 안 된다며 로타가 애먼 마차 바닥을 발로 쾅쾅 밟았다. 마차 안에서 일어나는 난동을, 마부는 이제 익숙해졌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잠깐.”
그때였다. 달아오른 화를 식히려고 창문을 열었던 로타의 눈에 낯익은 색이 비쳤다.
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탁한 분홍색이 군중 속에서 흔들거렸다.
“……언니?”
* * *
“트라! 잘 있었어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레오니에는 트라에게 달려갔다. 눈 빼고 카라를 쏙 빼닮은 트라가 반가운 미소와 함께 훌쩍 자란 아가씨를 반겼다. 그는 여전히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오시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고요?”
“지루한 것 빼곤 다 괜찮았어요.”
“다행입니다.”
트라와 인사를 나눈 레오니에는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아침에 방 청소를 마쳤답니다.”
“간단한 다과를 올려드릴까요?”
방으로 올라가니 저택 하녀들이 레오니에에게 인사하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었다.
아이는 그들이 제게 ‘다녀오셨어요’라고 말해 주는 것이 좋았다. 이곳 수도도, 북부 저택도 둘 다 소중한 집이었다.
레오니에는 가장 먼저 옷 방문을 열었다.
“역시.”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방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옷과 신발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지금의 레오니에의 치수에 딱 맞는 옷들이었다.
수도에 올 때마다 매번 이랬다. 수도에서 북부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돈이 좋아.’
부잣집 딸이 되어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레오니에는 말할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레오니에는 움직이기 편한 셔츠와 바지, 가죽신을 챙겨 나왔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가볍게 씻은 뒤에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편해서 좋네.”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살피던 레오니에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입었던 옷처럼 제게 딱 맞아 들었다.
“아빠, 아빠.”
레오니에는 그대로 펠리오를 찾았다.
펠리오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밀려드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아이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아빠가 안타까웠다. 동시에 저것이 나의 미래구나, 싶어 조금 무섭기도 했다.
“나 나갔다 와도 돼?”
“레오 너 안 피곤하냐?”
펠리오가 어느새 나갈 준비를 마친 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며칠 동안 마차를 타고 달려서 피곤할 법도 한데, 이놈의 딸은 그런 것도 없는지 기운이 쌩쌩했다.
“우리 아빠는 피곤한가 봐?”
레오니에가 손으로 입을 슬쩍 가리며 얄밉게 물었다.
“서른 넘었더니 전 같지가 않아?”
“네 말대로 여든에도 애 만들 수 있을 정도니 걱정하지 마라.”
“그럼 다녀와도 돼?”
그러나 펠리오는 선뜻 허락을 내리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지 한참 동안 제 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광장에.”
근처에 있던 트라를 손짓으로 부르며, 펠리오가 말했다.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 하나가 유명하다더라.”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였다. 곧 펠리오는 트라가 건넨 주머니를 레오니에한테 주었다. 돈이 든 주머니였다. 나가서 놀다 오란 허락의 뜻이었다.
“가서 하나 먹고 와.”
“아자! 고마워, 아빠!”
“이럴 때만 고맙다지.”
“이렇게 부모 허파 뒤집는 것이야말로 자식의 의무지.”
뻔뻔한 레오니에의 대꾸에 펠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상체를 숙였다. 레오니에는 알아서 펠리오의 볼 양쪽에다 입을 쪽쪽 맞췄다.
“조심히 다녀와.”
펠리오도 아이의 볼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호위 한 명 데려가고.”
“네에.”
“싸우지 말고.”
“내가 왜 싸워!”
저택을 나서려던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 질렀다.
“근데 아빠, 나 말 타고…….”
“마차 타라.”
“칫.”
펠리오는 기어코 레오니에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벗어나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트라.”
그리곤 트라를 불렀다.
“손님이 오실 거다.”
미리 준비해 두라고 일러둔 뒤, 그는 홀로 집무실로 향했다.
* * *
바리아는 지금 제 상황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한 번 죽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도 이상하고, 이전 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레오니에’라는 인물의 등장도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이상했다.
‘내가 어쩌다 파르두스의 도움을 받는 거지?’
정직당하고 기숙사에서 나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다.
파르두스 저택은 지금껏 바리아가 본 귀족 저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에르바누 저택도 나름 귀족이라고 한껏 귀중한 예술품을 복도 여기저기에 걸어 두었지만, 이곳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마치 박물관에 사람이 사는 것 같았다. 과연 황실의 총애를 받는 가문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바리아는 그토록 대단한 곳에서 귀빈 대접을 받았다. 물론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어.’
황궁에서 자신을 저택으로 데려올 때, 분명 후작 영식은 보레오티 공작이 수도로 오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리아가 보레오티 공작에게 용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탓에 극진한 대우를 받고 지냄에도 바리아는 편치 않았다. 틈만 나면 저택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사용인들에게 발각되어 다시 방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에르바누 가문에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알리진 않은 것 같았다.
‘……혹시 같은 편인가?’
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파르두스는 보레오티와 사이가 좋은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후작 영식이 보레오티 공작이 내려오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럼 공작님은 알고 있는 걸까?’
내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바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황제파의 선두가 보레오티의 편이라는 건, 현 황제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후우.”
겨우 정신을 차린 바리아가 냉정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했다.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가슴을 따라 탁한 분홍색 머리칼도 함께 흔들렸다.
‘확실한 건 없어.’
그러나, 보레오티와 파르두스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감시했구나.’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해, 이를 파르두스나 보레오티 측에 보고했다는 정황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불쾌한 기분은 없었다. 그저 피부 속 모근까지 빠릿, 하고 설 만큼 놀랄 뿐이었다.
죽음을 경험하고 과거로 돌아왔을 때, 바리아는 어떤 일도 자신을 놀라게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다.
보레오티는 항상 자신을 놀라게 했다. 공작 영애의 존재도 그러했고, 자신이 공작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아는 것 역시. 심지어 앞으로 또 그럴 일이 있을 거란 석연찮은 예감마저 들었다.
“바리아 양.”
똑똑.
그때, 문밖에서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바리아를 찾았다.
“쉬는 중에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만,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손님께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정작 그렇게 말하는 후작 영식의 얼굴에선 썩 미안한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바리아가 수상쩍단 시선을 내비쳤다.
“혹시 외출 괜찮으십니까?”
“외출, 이요?”
바리아는 이곳 저택에 들어선 뒤로 바깥 외출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 선택이었다. 자신이 파르두스 저택에 머문다는 것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큰일은 아니고.”
후작 영식이 싱긋 웃었다.
“제 아들이 이번에 새로 연 디저트 가게에 가고 싶다네요.”
“……디저트요?”
바리아는 자신이 헛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진짜로 후작 영식의 아들과 함께 디저트 가게로 외출했다. 얼이 다 빠진 바리아는 후작 영식의 아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소년은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지, 인기 있다는 맛을 무려 세 가지나 골랐다.
“바리아 님도 드세요.”
소년은 조그만 디저트 스푼까지 챙겨 바리아에게 건넸다.
“실은 어머니가 차가운 간식은 일주일에 한 번만 주시거든요. 그래서 조금 슬펐는데, 바리아 님과 함께 나오게 되어서 기뻐요.”
“그렇군요…….”
“바리아 님은 무슨 맛을 좋아하세요?”
“저는 이곳에 처음 와 봐요.”
바리아는 그제야 얼떨결에 쥔 스푼을 움직였다. 어쨌건 눈앞에 있는 젤라또는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삼 색 젤라또는 따뜻한 봄 날씨 탓에 표면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바리아는 조심조심 녹기 시작하는 표면을 살살 긁듯이 떴다.
“……맛있어.”
갈색 젤라또를 한 스푼 입에 넣은 바리아의 말간 볼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은은한 홍차 향이 느껴지는 달콤한 차가움이 기분을 부웅 떠오르게 했다.
“맛있지요?”
후작 영식의 아들이 기쁘게 웃었다.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바리아도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무래도 이 착한 소년은 저택에서만 계속 지내는 손님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안 닮아서 다행이야.’
젤라또를 전부 먹고 나온 둘은 잠깐 광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활기 넘치는 광장을 보고 있으니, 바리아는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바리아가 후작 영식의 아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헉!”
놀란 바리아가 서둘러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함께 온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전 들렀던 디저트 카페에도 가 봤지만, 후작 영식의 아들은 그곳에 있지도 않았다.
“마, 마차!”
뒤늦게 마차를 떠올린 바리아가 파르두스 가문의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에도 소년은 없었다. 마차도 없었다.
바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심장이 싸해졌다.
그때였다.
“윽!”
누군가가 바리아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사람을 찾느라 잠깐 제정신이 아니던 바리아는 그대로 끌려갔다. 하지만 겨우 정신 차리고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례하게 군 사람을 노려봤다.
“……로타?”
바로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언니,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로타는 반갑다는 말보다 지금의 상황을 매섭게 따졌다.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알아? 어머니도 언니 때문에 또 자리에 누웠다잖아.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바리아는 그제야 손목에 남은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슬쩍 내려다보니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심지어 조그만 생채기도 있었다. 여동생의 손톱자국이었다.
“성질나면 손톱부터 세우는 그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니?”
“언니!”
로타가 그만 큰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자연히 에르바누 자매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이목이 불편한 로타가 다시금 바리아의 손목을 잡고 인적 드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바리아 역시 눈에 띄는 건 싫어 말없이 따라갔다.
단둘이 된 뒤에야 로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발 철 좀 들어! 언니는 왜 그렇게 자기 생각밖에 안 해?”
“그럼 내가 이 나이에 부모님께 끌려다니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하라며 바리아가 매정하게 대답했다.
“난 독립했고, 그딴 백작 작위에 관심도 없어.”
“언니!”
“너야말로 참견하지 마.”
바리아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노려봤다. 기세 좋게 따지려던 로타가 일순 움찔했다.
늘 이랬다.
이따금 언니가 화를 낼 때면, 로타는 마치 무기나 방패 하나 없이 맹수의 앞에 선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 유난히 조용해지는 저 목소리가 사람의 기를 꺾다 못해 바닥에 완전히 못질을 했다.
로타는 이번에도 그랬다. 그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잘난 사람이.”
결국 로타가 도끼눈을 했다.
“가문의 대업을 방해해?”
“대업이라고 아버지가 그래?”
“그게 대업이 아니면 뭐야!”
로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 좀 다시 해.”
머리가 안 돌아가냐며 로타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이 일이 잘되면 에르바누도 커지고, 올로르도 커질 거야.”
어느새 로타의 얼굴 위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특히 올로르는 지금 황실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어쩌면 파르두스를 밀어내고 후작이 될지도 모를 일이잖아!”
그뿐만이 아니라 남부의 새로운 주인인 공작 가문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올로르 가문에 시집을 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기껏 공무원 나부랭이나 하고 있는 언니를 낮잡아 생긴 우월감이 우뚝 솟아올랐다.
“그럼 언니도 덕 좀 볼 거라고.”
“난 그런 덕 필요 없어.”
바리아가 되었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쓸데없는 이야기에 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서둘러 후작 영식의 아들을 찾아야 했고, 사라진 마차의 행방도 알아야 했다.
“나 바쁘니까 그만…….”
“혼자만 잘났지!”
돌아서는 바리아를, 로타가 다시 붙잡았다.
“언니는 늘 그랬어!”
항상 자기만 착하고 잘났지!
바리아가 눈을 찡그렸다. 제 손목을 잡는 로타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래 봐야 언니는 이제 내 밑이야.”
한참 욕을 퍼붓던 로타가 느닷없이 피식 웃었다.
“난 올로르 자작 영식의 아내야.”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
로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황비 전하의 새언니야.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은 그분보다, 내가 감히 높다고. 어쩌면 황후보다도 내가 대단할지도 몰라.”
“말조심해.”
바리아가 경고했다. 그러나 로타는 듣는 척도 안 했다. 오히려 더 즐겁게 떠들었다.
“솔직히 지금 제국에서 작위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 잘난 북부도 마찬가지야!”
기어코 로타는 보레오티까지 건드렸다.
“그깟 사생아 출신 따위가 뭘 할 줄 알겠어? 겨우 꼬맹인데.”
“많이 하는데?”
레오니에가 기꺼이 대답해 줬다.
동시에 로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초록 눈동자가 힘겹게 뒤를 돌아봤다.
바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우리 아빠 업무도 도와주고, 이번 겨울엔 마물 사냥도 다녀왔는데?”
골목 입구에 기대선 레오니에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소녀는 품이 넉넉한 검은 셔츠에 배꼽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새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길게 자란 검은 머리는 높이 올려 하나로 묶은 채였다.
“노래도 좀 부르고.”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젤라또가 들려 있었다.
“그림 솜씨도 제법 좋고.”
자기 자랑을 마친 레오니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입은 웃고 있었다.
“사생아치고 제법이지?”
하지만 검은 눈동자는 웃지 않았다.
* * *
광장에 도착한 레오니에는 곧장 펠리오가 가르쳐 준 디저트 카페로 갔다. 정말 유명한 곳인지 손님들로 북적북적했다.
레오니에는 젤라또를 포장해 걸으면서 먹기로 했다. 일단 모자로 검은 머리를 감추긴 했지만, 혹여나 저 때문에 장사가 방해되면 미안한 일이었다.
주문한 딸기 맛 젤라또는 바삭한 고깔 모양 과자에 담긴 채 나왔다.
“멜레스 언니도 하나?”
레오니에가 사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멜레스는 거절했다.
“근무 중입니다.”
“나만 먹으면 미안한데…….”
결국 혼자 젤라또를 사 먹던 레오니에의 눈에 낯익은 인물이 들어왔다.
“……테르잖아?”
바로 파르두스 후작의 손자였다. 파르두스 후작의 장남 가족이 수도로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설마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은 몰랐다.
아는 얼굴이라고 내심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러 가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테르는 혼자가 아니었다. 웬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 여자의 탁한 분홍색 머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서둘러 멜레스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바리아!’
한눈에 알아봤다. 여자는 바리아였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는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걱정된 멜레스가 괜찮으냐고 물으며 상태를 살폈다. 레오니에는 괜찮다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거 괜찮은 거야?’
원작은 바리아와 펠리오가 처음 만나는 황실 연회가 시작이었다.
‘물론 난 아빠가 아니니까.’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바리아는 수도에 줄곧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주인공을 만나니 꽤나 당혹스러웠다.
“레오니에 님.”
그런 찰나에 테르가 다가왔다.
“와 씨, 깜짝이야!”
“그간 잘 지내셨어요?”
“너 인기척 안 낼래?”
이게 자라면서 파르두스 후작만 닮아 가네!
레오니에는 서글서글 미소 짓는 테르에게 으르렁거렸다. 어렸을 땐 자기 할아버지가 웃음 참는 거 보고 죽지 말라고 엉엉 울던 꼬꼬마가, 이젠 젖살이 쭉 빠져서 매끄러운 턱선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 봤자 레오니에 눈에는 여전히 쥐똥이었다.
“아버지 심부름입니다.”
“후작 영식?”
“공작님께 전해 달래요.”
그러면서 군중 속을 가리켰다. 거기엔 사라진 테르, 그러니까 후작 영식의 아들을 찾으려고 다시 카페로 돌아오는 바리아가 있었다.
“부탁하신 대로 잘 보살폈습니다, 라는 말도 전해 달래요.”
“……아빠가 부탁했다고?”
레오니에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저도 잘은 몰라요.”
테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공작님께 중요한 손님이시긴 한 모양이에요.”
“…….”
“그럼 전 이만 갈게요.”
자기 말만 끝낸 테르는 그대로 마차를 타고 가 버렸다.
잠시 후 카페를 나온 바리아는 테르가 타고 간 마차가 있던 곳으로 갔다. 당연히 마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미쳤어, 진짜!’
이를 숨어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속으로 비명을 빼액 질렀다.
‘아빠가 바리아를 감시했다고?’
게다가 파르두스 가문에게 시켜서 그녀를 데리고 있으라고 시키기까지? 레오니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전부 아빠 계획대로잖아!’
펠리오가 선뜻 외출을 허락한 것도, 웬일로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알려 준다 했더니 다 속셈이 있었던 거였다.
레오니에는 소름이 돋았다. 원래라면 펠리오와 바리아는 1황자의 생일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에 처음 만나야 했다. 그땐 바리아의 계획으로 성사된 만남이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지금은 펠리오가 바리아를 만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이제 세상은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원작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와……!”
오싹한 전율이 소녀의 몸을 훑었다. 레오니에는 어쩐지 자신도 펠리오의 손에 놀아난 건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솔직히 놀아났지.’
하지만 그건 이 세상의 일부를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자신의 착각이었다.
펠리오는 그냥 가장 믿을 만한 딸을 시켜 중요한 손님을 모시려는 것뿐이었다.
바리아 에르바누.
원작의 진정한 주인공.
레오니에는 바리아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끼어든 웬 분홍 머리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바리아는 그 사람을 ‘로타’라고 불렀다.
“언니!”
그리고 로타란 사람은 바리아를 보고 ‘언니’라고 불렀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또 한 명의 소설 속 인물을 떠올렸다.
로타 올로르. 레무스 올로르 자작 영식과 결혼한 에르바누 백작 가문의 둘째 딸이자, 바리아의 여동생이었다.
레오니에는 그들의 뒤를 따라 숨어 이동했다. 그러다가 조금 전 로타의 기가 막힌 말을 들었다.
티그리아 황후까지 우습게 보던 로타는 기어코 레오니에까지 언급했다. 사생아라고 레오니에를 욕보일 땐, 멜레스가 조용히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레오니에가 자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아닌 척하곤 있었만, 소녀는 화가 많이 났다.
“더 말해 보지?”
레오니에가 로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역시, 로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차마 검은 맹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그게…….”
“그런데 말이야.”
가까스로 변명하려던 로타의 말을, 레오니에가 툭 잘랐다.
“너 누구야?”
레오니에가 의아하단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제국의 어머니이신 황후 폐하보다 대단하다고 스스로 말하고.”
뚜벅뚜벅, 레오니에가 천천히 걸어왔다.
“보레오티의 차기 후계자인 나를 사생아라고 말하는 걸 보니.”
어느새 로타의 옆까지 온 레오니에가 친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법 대단한 신분인가 봐?”
“…….”
“네깟 게 나보다?”
내가 기억도 못하는데?
로타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졌다. 레오니에는 그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옆에 있기도 싫다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슬그머니 바리아 쪽으로 향했다.
바리아 역시 갑작스러운 레오니에의 등장에 많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제 여동생처럼 바들바들 떨 정도는 아니었다.
“바…….”
바리아의 이름을 부르려던 레오니에가 잠깐 멈칫했다.
‘반말? 존대? 호칭은?’
저야 바리아에 대해 잘 알지만, 일단 자신들은 생판 초면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문득 떠오르는 호칭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엄마?”
“……네?”
이젠 바리아도 굳어 버렸다. 레오니에의 헛소리는 제법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소리야?”
로타가 바리아에게 물었다. 치켜뜬 초록색 눈동자 옆에 새빨간 핏줄이 도드라졌다. 만약 여기에 레오니에와 검을 쥔 멜레스가 없었다면, 로타는 당장 손톱을 세워 바리아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왜 보레오티 영애가 언니보고 엄마라고 불러?”
“나, 나도 몰라!”
당황하기는 바리아도 매한가지였다. 놀란 것으로 따진다면 로타보다 바리아가 더 했다. 가족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았던 첫 번째 인생에서도,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달려온 이 두 번째 인생에서도 자신은 남자와 연 한 번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결백했다.
거기다 보레오티 공작은 딸을 낳은 평민 여자를 너무도 사랑해,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로타는 달랐다.
‘설마 보레오티랑 연이 있어?’
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혹여 보레오티 공작과 무슨 관계라도 되는 건 아닐까, 진심으로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레오티의 공녀가 바리아를 엄마라고 부를 리가 없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아무리 올로르가 잘나간다고 해도, 보레오티는 괴물 같은 존재들이었다.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골수 가문들만 보레오티를 포함해 다섯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어마어마한 권력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로타는 올로르 가문에 시집간 뒤에야 검은 맹수가 다스리는 북부의 위압적인 장벽을 몇 번이고 느꼈다.
그런 곳에 언니가 간다면.
정말로 공작과 결혼한다면.
공작 부인이 된다면.
‘……절대 안 돼!’
로타가 이를 바득 갈았다.
“아아, 이거 미안합니다.”
그때였다. 레오니에가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사과했다. 바리아와 로타는 각자 다른 의미로 당황하던 찰나, 소녀 혼자 여유로웠다.
“바리아, 어어, 편하게 불러도 될까요?”
“네? 아, 네. 물론이죠.”
바리아가 놀란 와중에 흔쾌히 허락했다. 레오니에가 고맙다며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 바리아 양을 뵙는 건 처음인데, 어쩐지…….”
능청스럽게 처음 만난 사이라는 걸 먼저 언급한 레오니에가 문득 서글픈 미소와 함께 눈을 슬그머니 내렸다.
“엄마가, 생각나서요…….”
그 말에 바리아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죽은 엄마를 이야기하는 레오니에를 보자니 마음 깊이 동정심이 샘솟았다.
“제가 무례했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레오니에가 고개 숙여 사과하자, 바리아가 허둥거리며 그러지 마시라고 말렸다.
반면 로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이 내뱉었던 ‘사생아’ 발언에만 신경이 쏠린 채였다. 잘못을 반성한다기보단 잘못 걸려서 재수가 털렸다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멜레스만 레오니에의 흔들림 없는 거짓말에 감탄했다.
‘사기꾼…….’
어쩜 자라면 자랄수록 주군을 닮아 뻔뻔해지시는지.
레오니에가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는 건 보레오티 가문에서도 몇몇 사람들만이 아는 큰 비밀이었다. 그리고 멜레스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만 멜레스 역시 레오니에가 왜 처음 보는 바리아에게 ‘엄마’라고 불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아가씨의 평소 성격을 고려해 보면 그냥 가벼운 장난을 치시는 것 같았다.
어쨌건, 거짓말은 잘 먹혔다. 바리아는 도리어 레오니에를 위로하며 웃어 보였고, 로타는 레오니에의 눈치를 살피는 동시에 내심 안도했다.
‘……자매 맞지?’
멜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두 자매의 엇비슷한 분홍색 머리카락이나 순한 인상은 둘 다 많이 닮았다. 하지만 저리 닮은 구석이 많은 자매가 저렇게까지 극심하게 대조되기도 쉽지 않았다.
“어쨌건 처음 뵙겠어요.”
레오니에가 다시금 인사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입니다. 만나서 기뻐요.”
드디어 원작의 주인공을 만난 레오니에는 그 모든 말이 진심이었다. 바리아도 뒤늦게 인사했다.
“바리아입니다. 처음…….”
그러다가 퍼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물론 바리아 자신은 레오니에를 몰래 조사했기 때문에, 검은 머리는 당연지사고, 이름이며 좋아하는 음식, 취향, 어울리는 색깔 등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자신을 아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기 때문이다.
“읽은, 아니,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저를 아시나요?”
바리아가 놀라며 물었다.
“그럼 모르나요?”
레오니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 스승님이 아르데아 선생님이세요. 바리아 양의 이야기는 선생님을 통해 몇 번 들었습니다.”
바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은 잘 지내시나요?”
“쌩쌩하다 못해 지금은 휴가받고 전국을 여행 중이세요.”
“그래요?”
바리아가 안도했다. 지난 생애선 비명횡사했던 스승님이, 이번엔 여행까지 다닐 정도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레오니에가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도 충분히 이해했다.
‘흐음…….’
레오니에는 그런 바리아를 찬찬히 구경했다.
‘진짜 예쁘구나.’
지금껏 레오니에는 수많은 미인을 보았다. 그리고 단연코 저의 아빠인 펠리오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 생각을 철회해야 할 것 같았다.
바리아는 아름다웠다. 결이 좋은 새하얀 얼굴 위에 눈코입이 명당에 잘 자리 잡아 아름다운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완벽했다.
‘그리고 저 머리.’
바리아의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리는 분홍색 머리는 재가 섞인 것처럼 색이 조금 탁했다. 하나 그 덕에 바리아의 미모를 보다 화사하게 했다. 때마침 골목 아래로 조금씩 내리쬐는 햇살에 탁한 분홍색이 반짝였다.
특히 눈이 가장 아름다웠다. 초록색 눈동자는 제국에서 흔했지만, 바리아의 것은 지금껏 레오니에가 본 눈 중에서 가장 찬란했다. 투명한 물속에서 반짝이는 동그란 보석을 보는 기분이었다.
원작에서 펠리오도 늘 바라보고 싶다며 바리아의 귓가에 종종 속삭였던 것이 떠올랐다.
‘……으으.’
레오니에가 질색했다. 순간 펠리오가 진짜로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토할 뻔했다.
역시 아무리 그가 잘난 주인공이어도, 레오니에에겐 그저 아빠였다.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흥분이나 감정이 생기기는커녕 웬 잘생긴 생선 대가리가 뻐끔거리는 거나 다름없단 뜻이었다.
‘조금 아까운데?’
바리아는 아빠한테 조금 아까운 미인이었다.
‘……아니, 진짜 아까운데?’
이 언니가 지금 뭐가 아쉬워서 애 딸린 남자랑 결혼해.
‘물론 울 아빠는 애가 딸려도 세상에서 가장 잘났지만!’
그리고 그 딸도 무척 귀엽고!
레오니에가 스스로 자부했다.
“그럼 가실까요?”
실컷 감상을 마친 뒤에야, 레오니에가 손을 내밀었다. 바리아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그건 아빠가 시킨 심부름을 끝낸 뒤에 해도 괜찮았다.
“…….”
바리아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거구나.’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갑자기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외출하라 했던 것도, 그 아들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보레오티 영애가 바통을 이어받아 나타난 것도.
그제야 알았다.
전부 잘 짜인 각본이었다. 이 모든 게 보레오티와 파르두스의 합작품이었다. 이를 깨달은 바리아는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본인조차 모르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언니!”
그때, 로타가 끼어들었다. 바리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지금 어딜 가겠다는 거야!”
로타가 마치 질책하듯 따졌다. 그 모습에 레오니에가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후후 불었다. 소녀는 불쾌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삐딱하게 짝다리로 선 채 로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로타.”
기어코 그 입에서 로타의 이름이 나오고 말았다.
“로타 올로르.”
그리고 그녀가 제 입장을 충분히 자각할 수 있도록, 레오니에는 그녀의 현재 이름을 다시금 또박또박 불러 줬다.
“올로르 자작 영식의 부인인, 로타 올로르.”
주인공의 여동생.
레무스 올로르의 아내.
아직 자작 영식에 불과한 후계자의 아내.
“지금 누구를 막는 거지?”
“…….”
“설마 당신이 정말로 나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그런 건……!”
반박하려던 로타가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치맛자락 뒤로 숨겨진 로타의 손이 분에 겨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리아는 그런 여동생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그러나 도와주진 않았다. 아까 말조심하라고 경고했던 것만으로 충분했다.
레오니에 또한 그런 로타에게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웃음도 안 나왔다.
‘그러고 보니…….’
두 자매를 보고 있자니, 문득 여기 모인 자신들 셋의 관계가 아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타는 레오니에의 친부와 결혼했고, 바리아는 원작에서 레오니에의 양부와 결혼한 사이였다. 현재에도 가장 유력한 새엄마 후보였다.
즉, 둘은 레오니에의 엄마였다.
‘난장판이구먼.’
도박판도 이러진 않을 텐데.
천하의 레오니에마저 질리는 상황이었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나 로타를 보고 있자니, 떠올리기도 싫은 붉은 백조가 자꾸 아른거려서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푹.
그때였다.
바리아가 레오니에의 손목을 쥐더니 느닷없이 제 가슴으로 끌고 왔다.
“……이를 어쩌나.”
바리아가 어설피 웃었다.
“묻었네요?”
그녀의 옷에, 레오니에가 들고 있던 젤라또가 그대로 묻어 버렸다. 거의 짓이겨지듯 문질러진 젤라또 탓에 하얀 셔츠가 거의 다 젖어 버렸다.
“……하!”
레오니에가 웃고 말았다.
‘이 언니 보소?’
원작에서 본 회귀 후의 바리아는 분명 이전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버리고 화끈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강행 돌파를 해 버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바리아는 지금 아주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애써 오기를 부리는 미소가 역설적이었다.
처음 대면하는 바리아는 기대 이상으로 레오니에의 취향이었다.
“내 젤라또가 옷을 더럽혔네요.”
그럼 책임져야지.
레오니에는 바리아가 손수 만들어 준 핑계를 냉큼 붙잡았다. 설마 첫 만남부터 이렇게 죽이 잘 맞을 줄 누가 알았을까. 로타 때문에 불쾌했던 기분이, 흐린 날 구름이 전부 개인 것처럼 환해졌다.
“멜레스 언니.”
“이리 오시겠습니까?”
멜레스가 어깨에 걸쳤던 망토를 벗어 젤라또가 묻은 바리아의 상체를 멋지게 가려 줬다. 망토를 길게 접어 둘러 주니 간단한 숄이 되었다.
“언니!”
로타가 돌아서는 바리아를 불렀다. 하지만 바리아는 잠깐 돌아볼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읍, 또 그런다.”
대신 레오니에가 남았다.
“……도대체 뭐 하는 거죠?”
로타가 악에 받쳐 물었다.
“뭐 하는 거 같아?”
레오니에가 마냥 즐거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지금은 로타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검은 맹수로서.
“기대해도 좋아.”
떠나기 전에 경고 한 번쯤은 남겨도 괜찮을 듯싶었다. 레오니에는 그런 스스로가 너무 친절하고 깊은 아량을 가졌다고 자화자찬했다.
“이 사생아가 무얼 할지 지켜봐.”
로타가 그렇게나 우습게 취급했던 보레오티의 사생아는, 황금빛 송곳니를 아주 슬쩍 내비쳐 줬다.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는 올로르 가문의 며느리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목숨을 곧장 건드리는 공포와 서늘함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최대한 보지 말자고.”
차기 공작에게 잘 보이란 깊은 뜻을 손수 가르쳐 준 뒤에야, 레오니에는 골목을 벗어났다.
* * *
마차에 먼저 오른 레오니에가 손을 내밀었다.
“……신이 나 보이세요.”
바리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전 늘 신이 나 있답니다.”
레오니에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가슴 두근거리는 예상치 못한 만남은 이제 곧 소설 속 장면을 볼 수 있겠단 기대감으로 변했다.
‘잘만 하면 아빠랑 거래하는 걸 보는 거 아냐!’
들뜬 소녀는 어서 제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바리아는 열두 살 소녀의 도움을 받으면서 마차에 오를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리아가 역으로 손을 내밀어야 했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에,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 올랐다.
“손이…….”
마차에 오른 바리아가 조금 전 잡은 레오니에의 손바닥 감촉을 떠올렸다. 아까 골목에서도 보았지만, 레오니에의 손바닥엔 굳은살이 가득했다. 직접 만져 보니 거친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검술을 열심히 배우거든요.”
그 시선을 느낀 레오니에가 손바닥을 직접 보여 주며 말했다. 울퉁불퉁, 단단하게 박인 굳은살이 도저히 열두 살의 손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아직 아빠한테는 못 이기지만요.”
“고, 공작님과 대련하세요?”
바리아는 깜짝 놀랐다.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도 맥을 못 추린다는 그분과 대련이라니.
놀라는 바리아의 얼굴에 레오니에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래 봬도 수도에 오기 전에 마물 사냥에도 참여했답니다.”
“와아!”
“제가 무려 여섯 마리나 잡았어요!”
신이 난 레오니에가 마물을 사냥하면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기사들이 몰아주면 자신이 검으로 마무리를 했던 것, 야영할 때는 아빠가 끓여 준 수프로 몸을 데웠던 것, 씻는 게 힘들어 징징거리다가 철퍼덕 넘어진 것까지.
“영애께선 사랑받으시네요.”
이야기를 다 들은 바리아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그건 아주 좋은 일이예요.”
“아…….”
레오니에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바리아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겉으로야 평범한 가정처럼 보여도, 그 내부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조금 전에도 그 불화의 일부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는가.
너무 들뜬 나머지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다.
“저기, 있잖아요.”
레오니에가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바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토끼가 깜짝 놀라 퍼뜩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는 것만 같았다.
“우린 아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레오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바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하지만 바리아는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는 에르바누 가문의 사람이에요.”
“알아요.”
“아무리 미워도, 로타는 제 여동생이에요. 그 아이는 올로르 가문에 시집을 갔어요.”
바리아는 스스로 말하고도 우울해졌다. 어떻게 보아도 자신은 보레오티에 득이 아니었다. 괜히 저랑 엮였다가 친가와 사돈 가문이 이를 이용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러고도 남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비참해졌다.
“그래서요?”
하지만 레오니에는 그런 고민을 무심하게 넘겨 버렸다.
“누가 보면 언니가 진짜로 우리 아빠랑 결혼할 사이인 줄 알겠어요.”
심지어 바리아를 친근히 불렀다.
“나는 언니 한 사람만을 보는 거예요.”
소녀는 그 누구보다 바리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저 역시도 자신의 진짜 친부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 온몸의 피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했다. 덩달아 자존감도 추락해서, 보레오티에 아주 큰 폐를 끼쳤고 심지어 가문의 이름을 더럽혀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펠리오는 그 사과를 거절했다.
너는 너일 뿐이니 주변에 휩쓸리지 말라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정의 내린 것만 바라보라며 구원해 줬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요.”
레오니에는 자신이 과연 바리아에게도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을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 바리아를 보자니, 조금은 그럴 수 있겠단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 아빠도 바리아란 인간 그 자체만을 볼 거예요.”
“…….”
“그러니 기대해도 좋아요.”
“……네에.”
바리아가 힘겹게 답했다. 뜨거워진 눈시울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꼭 쥐는 것으로 힘겹게 참아 냈다.
보레오티 저택에 도착한 바리아는 그대로 곧장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펠리오가 미리 말해 둔 덕에, 트라는 갑자기 저택을 찾아온 바리아를 완벽하게 응대했다.
그 모습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역시 아빤 알고 있었구나.”
“주인님은 모르시는 게 없죠.”
“나중에 통수 제대로 맞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레오니에와 트라는 둘이서 몰래 펠리오를 놀렸다. 바리아는 격식 없는 두 주종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아주 잠깐이었다.
곧 바리아는 드디어 보레오티 저택에 도착했단 놀라움과 긴장감에 몸이 천천히 굳어 버렸다. 그리곤 커다란 저택의 위용과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늘까지 대단하다고 감탄했던 파르두스 저택은 벌써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담하고 예쁘죠?”
“아, 아담이요?”
바리아는 뭘 헛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이 크고 웅장한 저택 부지를 정말 작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북부 저택은 이것보다 커요. 저도 처음 여기 왔을 땐 생각보다 아기자기해서 놀랐다니까요? 물론 여기도 소중한 집이지만요.”
“아기자기…….”
바리아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아무리 귀족이 잘산다고 해도, 그들이 소유한 재산은 어느 정도 현실성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바리아는 나랏돈을 직접 만지고 분배하는 재정부 직원이었다. 큰돈을 직접 만져 봤기에, 어느 귀족이 제 가문의 부귀를 자랑해도 콧방귀만 나올 정도였다. 파르두스 후작 가문의 저택도 대단하다고 감탄만 할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긴…….’
하지만 보레오티는 예외였다.
지금 바리아가 본 거라곤, 고작 들어올 때 잠깐 본 정원과 저택 일부가 다였다. 하나 그 ‘고작’이, 많은 것을 압도했다.
무엇 하나 허투루 있는 게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위해 활짝 열린 두 문부터 시작해서, 저택의 모든 곳과 이어진 크고 화려한 현관 홀, 그 위에 달린 크고 화려한 샹들리에.
응접실로 안내하겠다는 젊은 집사의 완벽한 태도, 그를 따라 걸어가는 복도마다 깔린 검붉은 융단, 벽마다 걸린 오래된 명화와 곳곳에 놓인 고풍스러운 도자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그럼에도 화려한 위엄이 느껴졌다.
바리아는 응접실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그녀의 앞에, 트라가 향긋한 꽃차를 내밀었다. 그리고 함께 먹을 다과도 가져왔다.
‘라벤더 향…….’
긴장을 풀어 주는 효능이 있는 라벤더 차였다. 바리아는 자신을 신경 써 준 트라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레오니에도 떡하니 한 자리 차지했다.
“이거 맛있어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거라며, 바리아에게 슈크림을 건네었다.
“아빠가 오기 전까지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
“고맙습니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바리아는 레오니에의 친절을 감사히 받았다. 레오니에가 건넨 슈크림도 맛있게 먹었다. 끝이 깔끔한 단맛에 초록색 눈이 흐물흐물 녹았다.
“너무 맛있어요!”
“단 거 좋아해요?”
“엄청 좋아해요.”
바리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자주 못 먹었어요.”
에르바누 친가에선 마음이 편치 못해 그런 걸 느낄 여유도 없었고, 재정부 직원이 되어 기숙 생활을 시작할 땐 돈을 아끼느라 참아야 했다.
“나도 단 거 좋아해요!”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둥그런 볼살이 눈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바리아도 따라 웃었다.
어쩐지 이 아이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냥 레오니에란 존재가 저에게 커다란 위안처럼 느껴졌다. 소녀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자신에게 무한의 애정과 신뢰를 퍼다 주는 것 같았다. 가족에게조차 못 느껴본 깊은 감정이었다.
“그럼 딸기 우유 좋아해요?”
레오니에가 바지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이건……!”
바리아가 깜짝 놀랐다. 보레오티 공작이 자신의 어린 딸을 위해 독점 계약까지 맺었던 그 딸기 우유 사탕이었다. 무려 사탕 한 알에 케이크 한 판 값이었다. 자신도 레오니에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저 사탕 몇 알을 사 먹었다가 그달 생활비를 다 써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하나 줄게요.”
레오니에가 건넨 사탕을, 바리아는 마치 보물처럼 조심조심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껍질이 찢어지지 않게 벗기곤 입에 쏙 넣었다.
바리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 맛있어……!’
딸기 우유 맛 사탕은 그냥 단 게 아니었다. 딸기의 싱싱한 달콤함 속에 우유의 부드러운 고소함이 스며들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를 먹으면 또 하나를 더 먹고 싶은, 결코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재료를 아낌없이 썼다던 사탕 개발자인 파티시에의 말이 떠올랐다.
“맛있어요?”
아직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바리아의 귀에, 잔뜩 들뜬 레오니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맛있어요…….”
너무 맛있어서 울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요? 아빠, 들었어?”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닐 텐데?”
고작 사탕 하나로 저렇게 좋아하다니.
사탕의 황홀함과 달콤함에 푹 빠져 있던 바리아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제야 분홍 머리 아가씨는 이곳 응접실에 저와 레오니에 말고 또 한 사람이 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죄송하다고 짧게 사과하는 목소리는, 지금껏 바리아가 들은 것 중 가장 무덤덤했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더 들어 보고 싶을 정도로 감미롭고 기분 좋은 저음이었다.
바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시간을 거슬러 와 지금에서야 만났다.
“펠리오 보레오티입니다.”
검은 맹수가 눈앞에 있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바리아가 울음을 애써 참으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 끝을 힘겹게 올렸다.
“바리아…….”
그리고 수백, 수천 번을 연습했던 그 말을 드디어 꺼내었다.
“바리아 에르바누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