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레오니에, 12살
“헉, 허억!”
바리아는 미친 듯이 달렸다.
눈앞을 가로막는 수풀을 치우는 팔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질끈 올려 묶었던 탁한 분홍색 머리카락은 어느새 반이나 풀려 시야를 가로막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거친 숨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하지만 바리아는 멈출 수 없었다.
“바로 코앞이다!”
“잡아!”
“절대 살려 두면 안 돼!”
등 뒤로 점점 저를 추격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리아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숲 뒤로 활활 타오르는 횃불 서너 개가 자신을 쫓아왔다. 흔들리는 불빛에 비치는 그들의 얼굴엔 잔혹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아주 낯익은 존재였다.
횃불보다 붉은 빨간 머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레무스……!’
바리아가 악에 받쳐 입술을 깨물었다. 턱 끝까지 찬 숨을 토한 탓에 건조해진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이제 바리아의 코에선 피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아무리 달리고 도망쳐도 자신의 끝은 피로 적셔질 거란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옭아매는 듯했다.
“아악!”
그러다 바리아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공포에 질린 탓에 그만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뛰어 봤자 벼룩이지.”
킬킬킬, 음습한 웃음이 어느새 바리아를 둘러쌌다.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야 이 세상 살겠어요?”
레무스 올로르가 바리아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단검 끝날이 횃불에 반사되어 새하얗게 반짝거렸다.
“이 대업을 방해하려고 하다니.”
“대업 같은 소리!”
바리아가 악을 썼다.
“이건 제국을 망치는 길이에요! 당신들은 지금 잘못된 길을 가는 거라고!”
“이거 참 말이 안 통하는 처형이네.”
“레무스 올로르!”
한껏 비웃던 레무스가 멈칫했다. 뒤에 있던 다른 추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리아는 지금 위험한 상황이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 상황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눈물 콧물을 쏟으며 살려달라고 버둥거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바리아는 도리어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절대 당신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흘러내린 탁한 분홍색 머리 사이로 이채가 스쳤다. 단검보다 번뜩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그들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하하!”
레무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명색이 황실 기사였는데, 그런 자신이 검 한 번 쥐어 본 적 없는 약한 여자에게 눈빛만으로 제압당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따라온 추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짜증 나게.”
레무스는 수치스러웠다.
“커헉……!”
순간, 바리아가 콜록거렸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레무스가 손을 뻗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통이 막힌 새하얀 목 위로 핏줄이 살기 위해 요동쳤다.
‘수, 숨을……!’
바리아가 레무스의 손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본능적인 발악이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숨이 제대로 돌지 않는 몸에선 점점 힘이 빠졌고, 눈앞이 흐릿하게 변하다가 이내 노랗게 물들었다. 귀에선 삐이이, 소리가 났다.
“그래도 나는 신사라서요.”
레무스가 손에 든 단검을 슬쩍 보여 줬다. 흐릿해진 바리야의 시야에, 아주 익숙한 장식이 보였다.
“…….”
바리아가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단검에 달린 장식은 에르바누 가문의 상징인 토끼였다.
아버지의 물건이었다.
“나보다도 우리 처형이 잘 알 겁니다. 아버님께서 소중히 여기시지 않았습니까.”
레무스가 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제게 직접 주시더군요.”
이제 바리아는 전신에 힘이 다 빠졌다. 레무스의 손등을 긁던 두 팔은 일찌감치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마지막 필사의 힘을 담아 바닥에 난 풀을 동아줄처럼 붙잡았다.
가족의 배신에 대한 피 끓는 분노였다.
“대업을 방해하는 집안의 수치를, 집안의 가보로 처리해 달라고.”
높이 치켜든 단검이 서슬 퍼렇게 반짝였다.
“물론 어머님과 로타도 압니다.”
“…….”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레무스가 속닥였다.
“당신의 죽음은 단순 가출로 처리될 겁니다. 철없는 장녀가 자유를 꿈꾸며 가출했단 이야기는 은근히 잘 먹히거든요.”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으냐며 싱긋 웃는 모습이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제 처형이지 않습니까.”
레무스가 단검을 높이 들었다.
“단숨에 죽여드리죠.”
바리아의 마지막은 아버지의 단검이 내리꽂히는 찰나였다.
* * *
“……허억!”
턱 막히는 숨을 토하며, 바리아가 눈을 떴다.
동시에 몸이 차게 식어 갔다.
‘또 그날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꿔온 악몽임에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악몽을 꾸는 동안 흘린 땀들이 차가운 공기에 다 식어 버렸다. 바리아는 마치 그 꿈에서 도망이라도 치듯 이불 속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나는 살아 있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온몸을 더듬었다. 두 팔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목엔 어떤 통증도 없으며, 배에도 단검에 찔린 흉터 따윈 없었다.
그렇게 겨우 현실로 돌아온 바리아가 느릿느릿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후우.”
바리아는 눈을 끔뻑거렸다. 간밤에 또 늦게 잤더니 그새를 못 참고 악몽이 찾아왔다. 이 빌어먹을 반복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신 차리자.”
흘러내린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바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끔찍한 악몽이 출근까지 어찌 해 주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차가운 물로 세수를 좀 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제야 창밖에서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빗고 말끔하게 올려 묶은 뒤, 곧장 행정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오전에 재정부 회의가 있고…….’
오늘 일과를 머릿속으로 확인하며 출근 준비를 마쳤다.
“바리아!”
때마침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레스?”
바리아가 얇은 겉옷을 둘렀다.
“일어났지? 밥 먹으러 가자!”
“지금 나가!”
방을 나서자 레스가 눈을 삐죽 흘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다 또 줄 서서 늦게 먹으면 다 너 때문이야.”
“미안해.”
머쓱해진 바리아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사과했다.
“하여튼 사과는 잘해.”
순순히 사과를 받은 레스는 한결 화가 풀린 모습이었다. 사실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아침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나와서 한껏 들떠 있었을 뿐이었다.
“어디 아파?”
그러던 중, 레스가 바리아의 파리한 안색을 걱정스레 살폈다.
“바리아, 너 또 악몽 꿨어?”
“그냥 좀 피곤했나 봐.”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이 이상 물어보지 말아 달라는 듯한 곤란한 미소였다.
“……너 그러다 골로 간다?”
레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그렇게 끝냈다.
다행히 식당엔 줄 선 사람이 많이 없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가?”
레스가 평소보다 텅 빈 식당을 두리번거렸다. 손에 들린 식판엔 버터에 버무리듯 구운 감자가 산더미였다. 다른 음식은 보이지도 않았다.
“확실히 추워졌네.”
바리아가 따로 챙겨온 수프를 내밀었다. 그러곤 자신은 빵을 조금씩 뜯어 제 몫의 수프가 담긴 그릇에 넣었다. 식당에서 나오는 빵은 유달리 딱딱해서, 이렇게 적셔 먹는 게 삼키기 편했다.
“그래도 레스 넌 괜찮지 않아?”
바리아가 수프에 적신 빵 조각을 떠먹으며 물었다.
“북부 출신이잖아.”
이 정도 추위야 별거 아니지 않으냔 물음에, 레스가 으쓱했다.
“당연하지.”
고향 이야기에 레스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에게 북부 출신이란 사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이었다. 바리아는 그런 레스가 아주 조금 부러웠다. 저는 자신의 집과 고향을 저렇게 자랑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고 보니 이맘때려나.”
레스가 포크로 감자를 자르며 중얼거렸다. 포크에 짓눌린 감자에서 고소한 버터기름이 흘러나왔다. 매콤한 양념 가루 냄새도 살짝 풍겼다.
“뭐가 이맘때야?”
바리아가 모르는 척 물었다.
이미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지만, 레스가 들려주는 북부 이야기는 질리지 않았다.
“내가 전에 말 안 했던가?”
레스가 감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북부는 겨울에 엄청 매서운 폭설이 내려. 밖에 못 나갈 정도라서, 사람들이 전부 집에서만 지내.”
“그럼 북부는 지금 폭설이 내리겠네?”
“아니, 폭설은 이제 끝났을걸?”
포크로 버터기름까지 벅벅 긁은 레스가 이를 한입에 넣었다.
“마물 사냥을 할 거야.”
매년 겨울이면, 보레오티 공작이 글라디고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 사냥을 시작했다.
“올해는 공작 영애께서도 참여한다던데.”
한 스푼을 다시 뜨려던 바리아가 멈칫했다. 다행히 바리아가 고개를 숙인 상태라, 레스는 저의 친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또다시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을 터다.
“……공작 영애라면.”
바리아가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공작님, 따님이시지?”
“그럼 아드님이니?”
레스가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깔깔 웃었다.
“그분도 벌써 열두 살이시네.”
감회 깊은 표정을 지은 채, 레스는 두 번째 감자를 포크로 푹 찍었다.
* * *
북부는 올해도 폭설이 쏟아졌다.
매서운 폭설이 그치기 무섭게, 보레오티 공작은 글라디고 기사단을 이끌고 북부 산맥으로 향했다. 매년 있는 연례행사였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저쪽으로 몰아!”
“그림자를 보이지 마라!”
글라디고 기사들이 어느 마물과 대치 중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마물은 흡사 거대한 늑대나 개처럼 생겼다. 하지만 그 입에서 흘러내리는 끈적한 침은 산성이 강해 조금만 스쳐도 피부를 부식시킬 정도였다.
“……레오.”
그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던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저 마물의 이름은?”
단단한 갑옷을 걸친 검은 맹수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이노파코.”
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소녀가 곧장 대답했다.
“개처럼 생긴 마물로, 저것에서 나는 부속물이 아주 비싼 값에 팔리는 마물이지.”
“사냥 방법은?”
“사냥하는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이노파코에게 보여선 안 돼.”
이노파코란 마물은 사냥감의 그림자에 들어가 기척을 숨기는 위험한 능력을 지녔다. 그 탓에 기사단들이 조심하는 마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큰 덩치 때문에 속도는 느려.”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손에 쥔 검에도 황금빛 기운이 스멀스멀 휘감기기 시작했다.
“주군! 아가씨!”
모노가 큰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마물이 두 부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마물이 달려들길 기다리는 듯이 여유로운 태도를 취했다.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하지?”
펠리오가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거야 뭐…….”
레오니에가 몸을 낮춘 채 자세를 취했다. 지척까지 달려온 마물이 도약하며 레오니에를 향해 입을 벌렸다.
소녀는 가소로웠다. 겨우 저딴 이빨을 위협이랍시고 자신에게 들이밀다니.
곧 쾅,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그 충격에 뿌연 눈안개가 흩날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무기를 쥐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흩날리던 눈이 다시금 잠잠해질 때,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약간 묵직한 물건이 눈밭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 너머로, 레오니에와 마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레오니에는 피가 묻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후두둑, 피가 떨어진 눈밭 위엔 어느새 목이 잘린 이노파코가 쓰러진 채였다.
“……이렇게 하면 되지.”
소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레오니에가 처음 참여한 마물 사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가씨 정말 처음 맞으세요?”
파보가 매끄럽게 잘린 이노파코의 목을 보며 감탄했다.
글라디고 기사들이 사냥할 때조차 신중히 대하는 마물을, 어린 소녀가 혼자 사냥했다. 멀리서 지켜볼 때 심장이 조마조마하던 순간이 어리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검은 맹수…….’
파보는 괜히 마음이 시큰했다. 그러곤 그 마음 그대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비쩍 메마른 채 공작저로 왔던 일곱 살 꼬꼬마가 어느새 열두 살이 되었다. 또래보다 한참 작았던 아이는 이제 그 반대가 되었다.
12살 레오니에는 어지간한 또래보다 한참 컸다. 균형 잡힌 몸과 길게 쭉쭉 뻗은 팔다리는 메말랐던 그 시절을 떠올리기 힘들게 할 정도였다.
더욱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표정은,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단 증거였다.
“훌륭하셨습니다.”
“어지간한 황실 기사보다 나은데요?”
“역시 차기 보레오티!”
파보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도 레오니에를 칭찬했다.
“뭘 잘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찬물을 부었다. 펠리오였다.
“……왜, 또.”
칭찬받고 기분 좋아진 레오니에가 짜증을 냈다.
“잘 죽였잖아.”
자신이 사냥한 마물을 보라면서, 레오니에가 검을 든 손으로 죽은 이노파코를 가리켰다.
“사냥할 땐 그 자존심 좀 버려라.”
“무슨 자존심.”
“오만한 자존심.”
펠리오는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을 쉽게 가지지 말라며 잔소리했다.
레오니에는 기가 막혔다.
“그건 아빠잖아!”
“난 원래 잘나서 괜찮아.”
“아아, 그러세요오?”
기가 막힌 레오니에가 말끝을 늘리며 비아냥거렸다. 하나 유감스럽게도, 펠리오는 그의 말마따나 뭐든 잘하는 잘난 인간이라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게다가 레오니에도 펠리오가 말하려는 바를 어느 정도 눈치챘다.
“여길 봐라.”
펠리오가 이노파코의 잘린 목을 가리켰다.
“레오 네가 일부러 검을 크게 휘두른 흔적이 있잖아.”
“…….”
“이 녀석들은 혈관도 중요한 부속물이야. 괜히 이런 식으로 상처를 내면 가치가 떨어져. 아마 이건 제대로 팔리지도 못할 거다.”
펠리오는 냉정하게 레오니에의 사냥을 평가했다. 발돋움할 때의 자세나, 검을 휘두를 때 쥐던 손의 악력까지.
아빠의 걱정 어린 조언은 한참 이어졌다. 레오니에는 삐친 척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쨌건 펠리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뭐, 그래도.”
잔소리를 마친 펠리오가 풀 죽은 레오니에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처음치곤 잘했어.”
마지막엔 짧게 칭찬했다. 레오니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펼쳐졌다.
“그래서, 힘든 건 없고?”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짓던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아이는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가죽 갑옷을 몸에 걸쳤다. 하지만 값비싼 마물이 재료로 쓰인 거라 어지간한 철갑옷보다도 방어력이 좋았다. 그 덕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재미있어.”
레오니에가 말했다.
그 말 그대로, 첫 마물 사냥은 여러모로 신기한 점이 많았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좋은 감정만 있었다.
하지만 날이 점점 지나면서. 레오니에는 피로감을 느꼈다. 펠리오를 따라 야생 동물을 사냥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생명의 목숨을 빼앗자니 정신적인 피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해?”
야영하는 어느 밤, 근처 동굴에서 침낭을 펼친 레오니에가 물었다. 펠리오는 아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이 속도면 며칠 내에 끝나.”
“아니이, 마물 사냥 그 자체.”
이 지겨운 마물 사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했다.
“설마 매년 해야 해?”
“그럼 안 해?”
펠리오가 별 하찮은 농담을 다 듣는다는 눈을 했다. 레오니에는 순간 자신이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매년 하는 건 귀찮잖아…….”
“넌 귀찮으면 숨은 왜 쉬냐.”
“그거랑 이거랑 같아?”
“내 귀에는 같게 들려.”
“그럼 귀를 파.”
귀에서 아주 큰 덩어리가 나올 거라며, 아기 맹수가 악담 아닌 악담을 퍼부었다.
“하나 확실한 건.”
펠리오가 효심 없는 딸아이의 콧잔등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난 네가 작위를 받을 때까지만 하면 돼.”
하지만 레오니에는 자신의 다음 후계자를 낳아 기르고, 그 아이에게 작위를 물려줄 때까진 계속 마물 사냥에 나와야 했다. 즉, 앞으로 몇십 년은 어림도 없단 뜻이었다.
“……지금이라도 후계 자리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에게 물려줄 생각이 있는데.”
레오니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네 아빠는 지금 너 말고 자식이 없단다.”
펠리오가 아이의 침낭을 토닥였다. 괜한 소리 말고 열심히 내 뒤를 이을 준비나 하란 뜻이었다.
“참고로 난 너한테 일찍 작위를 물려줄 거다.”
펠리오가 놀리듯 말했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50년만 더해.”
“넌 네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어도 일 시킬 거냐.”
이런 신박한 불효자식 같으니. 펠리오가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딸을 가볍게 흘겨봤다. 아이가 나이를 먹을수록 아주 그냥 뻔뻔해졌다.
“아빤 북부의 얼음 절륜 대공이잖아! 여든에도 막둥이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게다가 말투는 더욱 변태스러워졌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대공이 아니다.”
“어쨌건 똑같은 ‘공’이잖아!”
“난 가끔 네가 미쳤나, 싶어.”
그러나 자신을 절륜하다고 말하는 아이의 의견엔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마물 사냥에 나선 지 정확히 17일 째 되는 날이었다.
펠리오는 지금껏 사냥한 마물의 종류와 그 수를 확인하곤 모노를 비롯한 중진 기사들과 간단한 회의를 했다. 이를 지켜보는 기사들의 눈이 간절하게 빛났다.
“제발 여기까지, 제발……!”
심지어 레오니에는 무릎까지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럼 이쯤에서 끝내지.”
“예에!”
레오니에가 환호했다.
드디어 마물 사냥이 끝났다.
“하산 준비를 하도록.”
펠리오가 기사들에게 명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들이 서둘러 짐들을 모아 둔 바위 근처로 달려갔다.
“와! 드디어 집에 간다!”
그들의 뒤를 따라 레오니에도 부리나케 달려가려던 찰나였다.
“레오 너 빼고.”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어깨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산을 굴러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레오니에의 얼굴이 암울해졌다.
“……왜?”
소녀는 당장이라도 울 기세였다.
“그럼 아가씨, 고생하세요!”
“저희는 먼저 하산하겠습니다.”
“이야,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근 채 차가운 술 한 잔!”
“듣기만 해도 좋은데?”
어느새 하산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레오니에에게 인사했다. 말이 인사지, 거의 놀리는 수준이었다.
“내려가면 다 가만 안 둬!”
내려가다 새똥이나 맞아라!
레오니에가 하산하는 기사들에게 빽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시선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홀로 남은 소녀의 등은 허무함이 가득해 보였다.
“힝, 나도 가고 싶어…….”
레오니에가 훌쩍거리며 펠리오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뭐 때문인데?”
“우린…….”
펠리오는 기사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대답했다.
“꼭대기로 간다.”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신기하게도 눈발이 섞여 불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훨씬 깨끗해진 시야 너머로 펠리오의 훤칠한 미모가 더욱 선명해졌다.
“꼭대기? 거긴…….”
거긴 갑자기 왜 가는 거냐고 따지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왜?”
그리곤 조심히 물었다.
펠리오는 갑자기 차분해진 딸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얼굴에 가득 묻어 있는 짜증스러운 감정은 그대로였기에, 애가 그냥 귀찮아서 저러는 거라고 넘겼다.
“보여 줄 게 있어.”
“뭔데?”
“엄청난 거라고 해 두지.”
둘러 대답한 펠리오가 짐을 멨다. 이를 지켜보던 레오니에도 묵묵히 가방을 멨다.
두 부녀는 꼭대기로 향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조금 전에 바람이 멈춘 것을 시작으로, 장기간의 야영과 사냥으로 지쳤던 몸이 점차 회복되어 갔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어깨도 점점 가벼워졌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가방을 대신 받쳐 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렇게 뻔질나게 보이던 마물이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레오니에는 이제 신기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 끝이 보이지 않던 꼭대기가 어느새 코앞이었다. 레오니에는 이젠 귀신에게 홀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펠리오의 손을 꼭 쥐었다.
펠리오는 묵묵히 아이가 잡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레오니에는 안심했다.
“레오.”
“응?”
“네가 전에 불렀던 노래.”
“노래야 많이 불렀지.”
레오니에는 보레오티 저택의 당당한 디바로 불렸다. 어떤 노래건 변태스러운 가사로 고쳐서,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게 불렀기 때문이다.
“하나 불러 볼래?”
생뚱맞은 부탁에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상관은 없는데…….”
몸이 어느새 가뿐해져서 노래 부르며 산을 오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선곡해 주십시오, 아버지.”
레오니에가 지금껏 자신이 열심히 부른 노래들을 하나하나 언급했다.
“혹시 ‘근육이 제일 좋아’?”
“그거 부르지 마라.”
“아니면 ‘아버님이 누구게’?”
“그거 말고.”
“그럼 ‘효도’ 노래?”
레오니에의 선곡은 하나같이 소녀의 변태 취향과 장난기 그득한 노래뿐이었다. 역시나 노래를 고르는 소녀의 얼굴엔 짓궂은 웃음이 피었다.
“재산 상속받기 싫다고?”
펠리오가 조용히 물었다. 작작 까불라는 뜻이었다.
“……아빤 또 돈으로 협박하지?”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그딴 협박이 먹힐 것 같아?”
“먹힐걸?”
“맞아!”
유감스럽게도, 레오니에에게 보레오티의 재산은 여전히 매혹적인 단어였다.
“알았어, 알았어.”
실컷 장난친 뒤에야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원하는 노래를 불렀다. 아이는 눈치껏, 아빠가 무슨 노래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검은 맹수 가족이 살아요.”
바로 어렸을 때, 펠리오와 함께 헤스페리 후작을 만나러 가는 마차 안에서 흥얼거렸던 자작곡이었다.
“엄마랑 아빠랑 아기가 오순도순.”
노래 가사는 일전에 카라에게서 들었던 북부의 옛 민담 줄거리였다.
새하얀 눈 속을 어슬렁어슬렁. 맹수들은 산맥 뒤로 폴짝.
“산맥 뒤에는…….”
즐겁게 흥얼거리던 레오니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느새 도착한 꼭대기 너머로, 상상도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레오니에는 기어코 입을 다물었다.
“레오.”
펠리오가 조용히 말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펠리오의 검은 눈동자에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꼭대기 너머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 맹수의 송곳니였다. 그건 레오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검은 눈에도 황금빛이 일렁거렸다.
“지금 저 앞에 펼쳐진 것이, 보레오티가 존재하는 의의야.”
“……응.”
레오니에가 겨우 대답했다.
사실 레오니에는 꼭대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일부를 담았던 원작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깟 글자 따위로 묘사하고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경이로움에 몸속의 피가 부글부글 끓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벅찬 감정은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었다.
새하얀 북부 산맥 너머.
새까만 평원이 있었다.
“잘 봐 둬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저 익숙한 어둠은, 보레오티의 상징인 검은색을 빼닮았다.
“우리 보레오티가 이곳 북부에 터를 잡고 산맥을 등진 채 살아가는 이유를.”
두 부녀는 한참을 말없이 너머를 바라봤다.
* * *
“안 됩니다.”
바리아는 애원하는 행정관에게 서류를 도로 내밀며 말했다.
“이런 허점 많은 기획에다 국가 예산을 함부로 내줄 수 없습니다. 나랏돈이 장난인 줄 아십니까? 조금 더 구체적인 방안과 이에 대한…….”
바리아는 행정관이 울기 직전까지 기획의 반려 이유를 또박또박 알려 줬다.
“그리고.”
후우, 하고 숨 한 번 돌린 바리아가 행정관을 바라보며 눈을 치켜떴다.
“이딴 걸 당신께 넘긴 그 빌어먹을 상사한테, 엿이나 잡수라고 전해 줘요.”
그리곤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결국 돌아서는 행정관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우와, 역시 맹수.”
이를 지켜보던 동료들이 혀를 내둘렀다.
“아주 그냥 잡아먹네, 먹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겉보기엔 얌전하게 생겨서 말이야…….”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돼.”
누군가가 그 말을 한 동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조심을 시켰다.
“예전에, 그러니까 바리아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말이야.”
이곳 재정부에는 아주 유명한 일화 하나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었다.
바리아가 이곳에 처음 배치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번처럼 내용이 부실한 기획을 반려하자 이를 가지고 온 행정관이 비아냥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행정관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바리아의 주먹에.
“……정말요?”
작년에 부임한 막내가 설마 하는 눈으로 바리아를 바라봤다. 워낙 일을 엄격하게 해서 주변에서까지 진저리를 치는 건 알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래 보여도 엄청 강해.”
레스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강아지처럼 순하게 생겼잖아?”
하지만 성질머리는 어엿한 맹수였다.
“아주 질 생각이 없어. 거기다 어지간한 독해서, 바쁜 와중에도 매일 체력 단련을 했다니깐?”
레스는 언젠가 한 번,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둘은 이곳 재정부에 함께 들어온 동기 사이였다. 재정부는 행정부처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녔다. 나랏돈을 분배하는 곳인 만큼 시달리는 일도 많지만, 그만큼 출세가 보장되는 곳이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해?’
그런 곳에 취직했으니 바랄 것도 없을 텐데, 바리아는 항상 스스로에게 혹독했다.
그러자 바리아가 대답했다.
‘……당하기 싫어서.’
그때부터 레스와 바리아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선배는 그게 좋으세요?”
“난 좋은데?”
북부 출신은 원래 호전적이란다, 라며 레스가 막내에게 보란 듯이 콧방귀를 꼈다.
그때.
“바리아가 누구야!”
문 뒤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벌컥, 하고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이 열렸다. 웬 커다란 남자가 씩씩거리며 재정부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든 채 화를 내는 꼴이 꼭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결국 왔네…….”
레스가 시끄럽다는 듯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다른 직원들이 너도나도 눈을 피하거나 몸을 사리는 반면, 바리아 홀로 조용히 손에 손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오노켄타 남작님.”
바리아가 차분한 어조로 불렀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나요?”
“네가 바리아냐?”
조금 전까지 성질을 부리던 오노켄타 남작이 멈칫했다. 바리아(맹수)란 이름을 들었을 땐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는데, 당장 눈앞에 있는 본인은 예상과 달리 여자였다. 심지어 상당한 미인이었다.
“크흠.”
화를 내려던 남작이 일부러 점잖은 목소리를 냈다.
“거어, 여자가 말이야.”
그리곤 바리아를 슬쩍 훑어봤다. 바리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엔 불쾌하고 음습한 생각이 가득했다.
“생긴 건 나름 반반한데.”
“…….”
“그렇게 꽉 막혀서야 뭐가 되겠어?”
오노켄타 남작이 뭐라고 지껄이건, 바리아는 그저 묵묵히 손수건을 손에 감쌀 뿐이었다. 그러다 다 묶었는지, 손수건 매듭을 야무지게 꽉 묶었다.
“여자가 좀 부드러운 맛도 있어야지.”
“그러세요?”
바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럼 한번 맛보실래요?”
“허허, 그제야 말이…… 커헉!”
말을 하려던 남작의 입에, 대뜸 바리아의 주먹이 들어갔다. 동시에 그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발로 차 무릎을 바닥에 꿇게 했다.
“헉!”
“바리아!”
설마설마하며 지켜보던 동료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레스 혼자 환호하며 힘찬 응원을 던졌다. 심지어 아무도 말리지 말라며 으름장을 던졌다. 그러나 굳이 레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바리아를 말리지 못했다.
“우리 남작님 머리엔 아무것도 없는 모양인데.”
발로 오노켄타 남작의 허벅지를 밟고, 손으로 그의 턱주가리를 움켜쥔 채.
“왜 당신의 기획이 반려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리아가 상세히 설명해 줬다.
“첫 번째론 자료 부족입니다.”
오노켄타 남작의 기획엔 얼토당토않은 점이 너무 많았다.
“당신께선 얼마만큼의 돈을 달라고 주장하는데, 그러기 위한 자료를 좀 상세히 준비하세요. 적어도 출처를 밝히란 뜻입니다.”
출처조차 불명확한 자료만 적혀 있으니 예산을 쉽게 내줄 수가 없었다.
“자료 왜곡도 금지입니다.”
그나마 멀쩡한 출저가 있는 것도 내용이 전부 조작되어 있었다.
“왜 제가 바로 어제 읽은 신문 내용과 정반대인 내용이 적혀 있는 거죠?”
바리아가 물었다. 하지만 남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입에 들어간 바리아의 주먹이나 턱을 쥔 손 때문이 아니었다. 저를 당장 찢어 죽일 것처럼 응시하는 바리아의 눈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리아는 기획 내용을 언급했다.
“바로 작년에.”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마다 칼날이라도 박혔는지, 오노켄타 남작은 바리아의 말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흠칫거렸다.
“게이트 도로 구역을 재포장하는 공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또 그곳을 정비하는 공사가 필요하단 기획을 가져와서, 이전 예산보다 더 큰 돈을 요구하는 거냐고 물었다.
“어디 뭐.”
바리아가 입에서 손을 빼내며 물었다.
“콜록! 커헉……!”
오노켄타 남작이 그제야 콜록거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비자금 조성이라도 하세요?”
물어보는 바리아의 입술은 둥근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려다보는 눈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있잖아, 바리아…….”
쏴아아,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레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들어온 바리아는 몇 번이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손수건 너머로 닿았던 오노켄타 남작의 입 안은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손에 감았던 손수건은 일찌감치 풀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너 그러다 집에서 부르는 거 아냐?”
“부르려면 부르라고 해.”
무려 다섯 번이나 씻고 나서야 바리아가 손을 털었다.
“집이랑 연 끊은 지가 언젠데.”
“그런데 너희 아빠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시잖아.”
레스는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었고, 바리아는 이를 고맙게 받아 썼다.
“혼자 그렇게 생각하시라지.”
거울에 비치는 바리아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너도 고생이 많다.”
레스가 힘내란 듯이 바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바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돌아온 재정부엔 적막이 감돌았다. 일하는 재정부 동료들도, 일이 있어 재정부에 온 타 부서 사람들도 묵묵히 제 할 일만 했다.
조금 전 바리아와 오노켄타 남작의 싸움을 보고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바리아.”
그때, 근처에 있던 동료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잘했다곤 말 못 하겠는데, 솔직히 속은 시원했어.”
그리곤 킥킥 웃었다.
“아까 그 새끼 얼굴 봤냐? 아주 그냥 내 체증이 쏴악 내려갔어!”
“요즘 더 저러지요?”
원래도 평소 행실 때문에 소문이 좋지 않았던 오노켄타 남작이 근래 들어 더욱 제 세상처럼 오만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야.”
“발정제라도 먹은 거 아냐?”
여자만 봤다 하면 껄떡이는 게 아주 꼴불견이라며, 일전에 그에게 희롱을 당했던 직원이 욕을 퍼부었다.
“여기저기서 지랄이더라, 진짜.”
“어머, 자기들 다 모르고 있어?”
그때 선배 한 사람이 그 이유를 말해 줬다.
“올로르 자작이 뒤를 봐준다잖아.”
뒤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지금 저기서 계속 제출하는 기획도 올로르 자작이 관여한다던데.”
저 문제 많은 오노켄타 남작이 아직도 잘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아주 가관이라며, 선배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 바리아 자기는 조심해.”
선배가 진심으로 걱정했다.
“저러다 나중에 올로르 자작이라도 여기로 올라오면 자기 정말 큰일이야. 파르두스 후작도 올로르를 제법 마음에 두는 듯하다고 소문이 자자해.”
바리아가 미소지었다.
“걱정 감사합니다.”
덕분에 또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 * *
바리아는 퇴근하기 무섭게 곧장 기숙사로 돌아갔다.
황실 행정관들이 지내는 기숙사는 근무지인 황궁 바깥에 존재하지만, 엄연히 황실이 다스리는 관할 구역이었다. 즉, 행정관 이외의 사람은 들어올 수 없었다. 바리아는 그 때문에 기숙사를 신청했고, 이후 집안과 연을 끊었다.
지금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에도 기숙사 생활을 했고, 방학이 되었어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저택에 최대한 돌아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때가 여동생의 약혼 파티였다. 성인도 되지 않았던 여동생 옆에 서 점잖은 척하던 서른 중반의 남자를 참고 지켜보느라 힘들었던 기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여동생을 진심으로 축하할 생각도 없었다.
“오노켄타 남작…….”
서둘러 씻고 나온 바리아가 책상에 앉았다. 씻기 전에 미리 켜둔 조그만 간이 난로 덕에 방 안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했다.
‘역시 올로르와 관련이 있어.’
젖은 머리를 닦으며, 바리아가 서랍 하나를 완전히 빼냈다. 그리곤 손을 넣어 안쪽 모서리 부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밑에 깔린 판자가 달깍 흔들리면서 숨겨 둔 공간이 나타났다.
바리아는 거기에 넣어 둔 서류들을 꺼냈다. 그간 재정부에서 일하면서 몰래 가져온, 황실과 올로르의 동태가 기록된 증거들이었다. 바리아는 거기에 오늘 가져온 오노켄타 남작의 기획 자료도 포함시켰다.
‘많이 모은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자료를 살피는 초록색 눈은 작은 허점이라도 찾아내려고 필사적이었다.
‘절대 실수해선 안 돼.’
바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번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허무하게 죽어 버렸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 바리아는 노력했다.
아카데미 수석 입학과 졸업을 둘 다 쟁취하고, 황궁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재정부에 취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실과 올로르가 꾸미는 일들의 정황들을 몰래 알아내 조금씩 모았다.
그러기를 벌써 5년.
‘보레오티 공작을 만나기만 하면…….’
바리아는 드디어 희망을 보았다.
이 정도의 자료면 황실과 올로르가 꾸미는 끔찍한 계획을 보레오티 공작도 믿어 줄 거다. 역대 최강의 보레오티라 불리는 검은 맹수라면, 반드시 이를 저지해 줄 거다.
‘그런데…….’
희망으로 가득 차오르던 초록색 눈동자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그 아이는 도대체 누구지?’
바리아는 이전 생에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레오니에 보레오티’를 떠올렸다.
5년 전. 보레오티 공작의 사생아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당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북부를 향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나 귀족들은 아이를 향한 악의적인 소문이나 험담을 속닥거리면서도 보레오티 공작의 사생아를 예의 주시했다.
하지만 이는 당사자 부녀가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보레오티 공작은 아이를 더없이 소중히 여겼다. 품에서 아이를 떼놓는 순간이 없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비일비재했다. 젊은 공작의 부성애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그 덕에 보레오티의 실질적인 권세는 저 어린 공작 영애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당시 바리아도 레오니에의 등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물론 다른 의미로.
바리아는 이전 생에 등장하지 않았던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수상하게 여겼다.
‘존재하지 않은 아이였어…….’
수백, 수천 번을 생각해도 공작 영애는 바리아의 이전 생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제국에서 하루에 한 번은 필히 언급되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레오니에’는 우상이었다.
보레오티 공작을 빼닮은 아름다운 미모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확연히 드러났다. 수도에 잠깐 들를 때면 그 모습을 보려고 공작 영애가 자주 들른다는 찻집이나 서점에 철부지 소년들이 진을 칠 정도였다.
거기다 뭐든 해내는 천재란 이야기도 파다했다. 학문이면 학문. 검술이면 검술. 한때 제국에 큰 파란을 일으킨 어느 교수가 직접 가르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또 고작 일곱 살 때 손목시계라는 발상을 떠올려, 커다란 사업으로까지 만든 장본인이라고 한다.
손목시계는 현재 엄청난 유행을 넘어 회중시계를 밀어낼 정도였다. 수도 제국에선 결혼식 예물로 보레오티 산 손목시계를 구매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였다. 특히 보레오티 공작 영애가 직접 구상했다고 알려진 시계 같은 경우는 어지간한 보석보다 비싸게 팔렸다. 못해도 저택 서너 채 가격 수준이었다.
이처럼 레오니에 보레오티는 차기 공작으로써의 위상을 나날이 드높였다. 그럴수록 바리아는 혼란스러웠다. 도리어 그런 레오니에의 행보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 나 때문일까?”
바리아가 중얼거렸다.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온 자신 때문에, 동시에 미래를 바꾸기 위해 해 온 자신의 행보가 어떤 식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그런 생각 때문에, 바리아는 공작 영애를 주시했다. 보레오티 공작에게 어떻게든 다가가 자신이 모은 증거를 내밀고 대화를 나누어야 했는데, 도리어 공작보다 그의 딸을 더 예의 주시했다.
바리아는 공작 영애가 무서웠다. 그 아이는 자신의 기억에 유일하게 없었던 미지의 존재였다. 그래서 공작 영애를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쩌면 보레오티 공작보다 공작 영애에게 접근하는 편이 훨씬 쉬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바리아는 연구했다. 신문에서 레오니에와 관련된 기사가 올라오면 잘라서 보관했고, 공작 영애가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하면 반드시 사서 읽었다. 공작 영애가 즐겨 먹는다는 그 비싼 딸기 우유 맛 사탕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사 먹어 보기도 했다. 검은 머리에 어울릴 법한 액세서리도 틈틈이 봐두었다. 심지어 공작 영애가 구상했다는 손목시계를 사기 위해 적금까지 꼬박꼬박 넣었다.
덕분에 바리아의 월급 태반이 공작 영애 조사에 쓰였다.
“바리아아.”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레스였다.
“오늘 자 신문에 보레오티 공작 영애 소식이 실렸는데.”
“자, 잠깐만!”
바리아가 허겁지겁 증거들을 비밀 공간에 도로 숨겼다. 판자를 다시 덮고 서랍을 닫은 뒤에야 문을 열어 레스를 맞이했다. 레스는 편안한 옷차림을 한 채 기사가 실렸던 신문을 들고 있었다.
“여기에 공작 영애가 실렸어.”
“고마워, 정말!”
바리아는 신문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리곤 가위로 조심조심 기사를 잘라 공책에 붙여두는 모습을, 레스가 신기하단 듯이 바라봤다.
그런 꾸준한 노력 탓에.
“진짜 좋아하네.”
바리아는 어느샌가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보레오티 공작 영애의 추종자로 불렸다.
* * *
“우리 집!”
며칠 후.
산꼭대기까지 다녀온 후에야, 레오니에는 겨우 저택으로 돌아왔다.
“내 집, 우리 집…….”
언젠가 내가 물려받을 부동산. 레오니에는 현관문에 입술을 쪽쪽 찍으며 반가운 마음을 표현했다. 오늘만큼 이 암울한 외관이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천국은 항상 가까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네가 드디어 실성했구나.”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그래, 다 내 탓이지.”
펠리오는 그만 되었으니 어서 가서 씻으라고 아이의 등을 툭 밀었다.
“아가씨, 다녀오셨어요?”
“딱 맞춰서 목욕물 준비했답니다.”
“코니, 미아!”
레오니에는 저를 반기는 두 하녀에게 달려가려다 멈칫했다. 아직 자신은 피 묻은 갑옷을 벗지 않은 상태였다.
두 하녀가 목욕물에 입욕제를 풀고 꽃잎을 풀어내는 동안, 레오니에는 홀로 갑옷을 벗었다. 그리곤 따뜻한 물로 가볍게 몸을 헹군 뒤에야 욕조에 들어갔다.
“으어어…….”
향기롭고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자, 레오니에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았다.
“으매, 좋은 것!”
레오니에는 이제야 사람처럼 사는 기분이었다.
“많이 힘드셨죠?”
코니가 뜨거운 물을 조금 더 부어 주며 물었다.
“아가씬 아직 열두 살이신데, 너무 일찍 나가신 거 아니에요?”
미아가 입욕제를 조금 더 풀며 물었다.
“아빠는 열한 살 때 했는걸?”
“그것도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난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간 거니까 괜찮아.”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사실 펠리오는 이번 사냥에 레오니에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레오니에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인 스물에 마물 사냥에 참여시킬 예정이었다.
‘나도 마물 사냥 갈래!’
하지만 레오니에가 고집을 부렸고, 결국 그 고집에 지고 말았다.
레오니에가 고집을 부린 이유는 하나였다.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펠리오의 뒤를 이어 보레오티 공작이 되었을 때, 아빠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실력을 다지기 위해 조금이라도 일찍 수련하고 싶었다.
‘……나도 많이 변했어.’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는데.
레오니에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새하얗게 변한 목욕물 위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지만, 그간 쑥쑥 자란 자신의 모습쯤이야 금방 기억해냈다.
변한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성격도 상당히 변했다. 본래의 저라면, 후계자니 뭐니 그런 귀찮은 것 따위야 그냥 포기하고 한량처럼 노는 것을 택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누구보다 강한 보레오티를 꿈꿨다. 어느샌가 자신은 보레오티와 북부 위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건 조금 기쁜 변화였다.
“내가 어떻게 사냥했냐면…….”
그 기세로, 레오니에는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했다. 코니와 미아는 그저 흐뭇하고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줬다.
“참, 아가씨.”
개운하게 씻고 나온 레오니에에게, 코니가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레오니에는 그 손님이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해 주는 코니의 얼굴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이는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인세레아 언니!”
역시나 예상대로. 인세레아가 벽난로 가득 불을 지핀 거실에서 레오니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바구니 하나와 중년의 여인이 함께였다.
“아가씨!”
“으아아, 언니!”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그간 많이 걱정했다며, 인세레아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푸른빛이 도는 은발을 단발로 짧게 자른 인세레아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이 많이 붙은 상태였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레오니에가 인세레아와 함께 온 중년 여인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래서 우리 아기 늑대는?”
“지금 막 잠에서 깼어요.”
인세레아가 바구니 속을 바라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곧 함께 온 중년의 여인이 바구니 속에서 무언가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으으, 으아앙.”
바로 아기였다.
푸른 은발을 지닌 아기가 입술을 옹알거리며 울듯이 칭얼거렸다. 그러다 옆에 있던 인세레아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레오니에는 그대로 쓰러졌다.
“너무 귀여워……!”
“우리 아기가 아가씨를 무찔렀네요.”
“백 번이고 져 준다, 진짜…….”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레오니에가 두 팔을 벌렸다.
“안을 준비 완료!”
그 모습에 인세레아가 작게 웃으며 함께 온 유모에게 말했다.
“아가씨께 루피를 안겨 줘.”
“예, 마님.”
“우리 루피, 아기 늑대애.”
레오니에는 조심조심 아기를 받았다. 아기는 칭얼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안겼다.
“어우, 신이시여…….”
레오니에가 기어코 신을 찾았다. 따끈따끈하고 우유 냄새 폴폴 풍기는 이 귀엽고 포동포동한 생명을 창조한 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 루피.”
레오니에가 아기를 보며 아주 조금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너 진짜 네 할아버지 판박이구나.”
“그렇지요?”
인세레아가 크게 동의했다.
“저도 낳고 나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성격까지 닮으면 큰일인데.”
“그래도 성격은 저 닮아서 순해요.”
인세레아가 걱정 말라며 싱긋 웃었다. 레오니에는 그것도 좀 많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로 하진 않았다.
“우리 아기 늑대.”
레오니에가 작게 속삭였다.
“루피 리코스.”
그리고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넌 네 할아버지처럼 능글맞은 변태가 되면 안 된다, 알았지?”
파르두스 후작 같은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만 있어도 충분했다.
루페와 인세레아는 3년 전에 결혼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의 여정은 의외로 힘들었다. 루페는 인세레아에게 일찌감치 반했지만, 보레오티에 푹 빠져 일 중독이 되어 버린 전직 스토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루페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도박을 했다.
‘저와 결혼하면, 우리의 자식이 훗날 아가씨의 비서가 될 겁니다!’
마음이 급했던 루페는 펠리오의 집무실에서, 그것도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버젓이 지켜보는 그 앞에서 인세레아에게 청혼했다.
맹수 부녀는 기가 막혔다. 최악의 청혼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뺨 맞고 차일 각이었다.
‘너무 감동적이에요!’
하지만 인세레아는 승낙했다.
‘저희 힘을 내봐요!’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 보레오티를 향한 끊임없는 동경심이, 보레오티 비서관이 된 지금은 충성심까지 얹어져서 더욱 깊고 진득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맹수 부녀가 최악이라고 평했던 청혼은, 인세레아를 옆에서 지켜본 루페의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 미친 것들.’
펠리오는 제 눈앞에서 결혼을 약속한 두 직원을 당장 내쫓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줬다. 둘이 결혼할 때 엄청난 금액을 축의금으로 냈으며, 마차와 값비싼 옷감, 술 창고에 오랫동안 묵힌 포도주까지 축하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바로 작년 늦가을. 두 사람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그것도 레오니에의 생일보다 딱 하루 늦게 태어난, 리코스 자작 가문의 장남이었다.
“우리 루피는 태어날 때부터 보레오티를 좋아하나 봐요. 아가씨 생일에 안 겹쳐서 태어난 것부터 보세요.”
인세레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요 아기가 뭘 안다고.”
레오니에가 피식 웃었다.
“아기한테 너무 짐 주지 마요.”
“절대 안 그럴 거예요.”
인세레아가 주먹까지 불끈 쥐며,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 저는 우리 루피가 보레오티를 진심으로 좋아하길 바라요.”
루피는 언젠가 레오니에를 보필할 차기 리코스 자작이 될 거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지니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부디 자연스럽게 생겼으면 했다.
“저는 제가 힘들었으니까…….”
인세레아가 오랫동안 가 보지 않은 친정을 떠올렸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그녀는 더욱 친정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작고 어린 아기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일단은 우리 루피가 하고 싶은 걸 잔뜩 해 주고 싶어요.”
“언니…….”
“물론 보레오티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매일 가르칠 거랍니다.”
훌륭한 비서로 만들겠다며, 인세레아가 각오를 다졌다.
“하하…….”
레오니에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안 되었다. 인세레아는 아기를 정말 소중히 여겼다. 아마 본인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을 경험하게 하지 않을 거다. 이제 인세레아 옆에는 루페가 있었다.
거기다 든든한 시아버지도 있었다.
“실은 어제 아버님이 오셨어요.”
인세레아가 비밀처럼 속삭였다.
“오셔서 루피 기저귀도 갈아 주시고, 손수 씻겨 주셨다니까요?”
“저보다 잘하셔서 깜짝 놀랐답니다.”
함께 온 유모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 그 할아버진…….”
레오니에가 혀를 내둘렀다. 그 능글맞은 영감이 손주들만 옆에 있으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저랑 루피한테 얼마나 잘해 주신다고요.”
“뭐, 그거야…….”
그 점은 레오니에도 동의했다.
같이 일하는 입장에선 여러모로 짜증 나지만, 파르두스 후작은 아이들에겐 최고의 할아버지였다. 후작은 새로 태어난 손주에게 푹 빠져 틈만 나면 찾아가는 중이었다. 루페는 아내가 눈치를 보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지만,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후작 할아버지도 보레오티를 많이 좋아하니까…….’
레오니에는 파르두스 후작과 인세레아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보레오티란 공통점 아래 뭉친 두 사람은 아주 친하게 지냈다.
“레오.”
그때 펠리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도 막 씻고 나왔는지, 단정치 못한 앞머리 끝이 촉촉이 적셔져 있었다. 유모가 어머, 어머 요란을 떨며 얼굴을 붉혔다.
“아빠.”
“공작님.”
인세레아가 일어나 인사하려는 걸, 펠리오가 괜찮다고 도로 앉혔다.
“몸은 괜찮은가?”
펠리오가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는 인세레아가 출산한 이후부터 매번 볼 때마다 같은 말을 물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해 주신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졌어요.”
“아이를 낳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고생했군.”
“공작님은 정말 상냥하시네요.”
인세레아의 칭찬에 펠리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를 보고 상냥하다고 하는 사람이 레오니에 말고 또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온 거지?”
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은 펠리오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아가씨께 루피도 보여드릴 겸, 복직 이야기를 하려고요.”
“아직 출산 휴가가 남았을 텐데?”
“그렇긴 한데…….”
인세레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루피가 유모도 잘 따르고, 저도 이제 슬슬 일하고 싶어서요.”
펠리오는 그런 인세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말했다.
“반려하지.”
그는 이번 휴직 날짜는 다 채운 뒤에 복귀하라고 말했다. 거의 명령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래야 다른 직원들도 나중에 눈치 보지 않고 쓸 거 아닌가.”
인세레아는 직장에선 그렇게 높은 직위가 아니었지만, 루페와 결혼하면서 리코스 자작 부인이 되었다. 거기다 본래도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신분이 높은 그녀가 출산 및 육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복귀한다면, 나중에 다른 직원들도 눈치를 보며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휴가를 다 쓰는 것도 윗사람의 일이지.”
곧 있으면 루페도 육아 휴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바쁘지 않으세요?”
인세레아가 듣기론 요즈음 보레오티가 많이 바쁘다고 들었다.
“바쁘지만 직원들 휴가를 빼앗을 정도는 아니야.”
펠리오는 인세레아에게 휴가 때까지 몸조리 잘하라고 말했다. 결국 인세레아가 알겠다며 물러섰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다가왔다.
“아빠도 한번 안아 볼래?”
“뭐를?”
“뭐라니, 당연히 루피지.”
그치 루피야, 레오니에가 품에 안은 아기를 우쭈쭈 예뻐하며 물었다.
“우리 아기 늑대도오, 공작님 품에 한번 안겨 볼까요오?”
혀짧은 목소리로 우쭈쭈 물어보니, 루피가 까르르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마치 펠리오에게 가고 싶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나는…….”
펠리오가 거절하려던 찰나.
“어머, 그럼 저희 루피도 무척 기뻐할 거예요!”
인세레아가 자신이 안기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기뻐했다.
“분명 공작님의 은덕을 받아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랄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닐 텐데.”
펠리오는 ‘은덕’이란 단어가 퍽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그는 두 팔에 아기를 안고 말았다. 불편해하는 얼굴과 달리 아기를 안고 어르는 손길이 능숙했다.
“아빠 잘하네?”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내가 레오 널 키운 시간이 몇 년인데.”
아기를 안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태연히 말했다.
“…….”
루피는 생각보다 얌전했다. 오히려 펠리오를 보고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역시 차기 따까리.”
아빠를 보고도 울지 않다니,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말본새 하곤.”
애한테 따까리라니. 펠리오는 그런 딸의 발등을 꾸욱 눌렀다. 으윽, 레오니에가 몸서리를 쳤고, 아기는 까르르 웃었다.
그는 곧 아기를 인세레아에게 다시 넘겼다.
“일곱 살부터 키워 놓고 무슨 소리람.”
“일곱 살이나 3개월이나 같지.”
“다르거든? 얜 기저귀 찼잖아.”
“너도 마찬가지였어.”
기억 안 나냐고, 펠리오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한 번 쌌잖아.”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유일한 밤 실수를 언급했다.
“역시 보레오티는 격이 다르다고 카라가 칭찬했었지.”
빨랫줄에 널려 펄럭이던 이불을, 아빠는 아직도 기억했다.
“그걸 왜 말해!”
수치스러운 과거사 등장에 레오니에가 그만 빼액 소리를 질렀다.
“헉!”
뒤늦게 아차 했지만, 이미 루피가 다 듣고 깜짝 놀라 버렸다.
“으아아앙!”
유모가 서둘러 루피를 안았다. 그럼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결국엔 인세레아 품에까지 옮겨졌다. 그제야 아기는 조금씩 울음을 그쳤다.
보레오티 부녀는 아기의 진정을 위해 자리를 비켜 줬다. 레오니에는 미안하다고 인세레아에게 사과했다.
“아빠 때문이야.”
“너 때문이지.”
“아빠가 나 놀려서 그런 거잖아.”
“애들은 원래 그렇게 자라는 거야.”
이불에 실수 좀 한 게 무슨 대수냐며 펠리오가 심드렁히 말했다.
“그럼 아빠도 오줌 쌌어?”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니.”
펠리오가 즉답했다.
“거짓…….”
“거짓말 같으면 카라한테 물어봐.”
펠리오는 단 한 번도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인생에 실수란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짜증 나, 진짜…….”
구시렁거리던 레오니에가 대화 주제를 바꿨다.
“아기 귀여웠지?”
“새끼는 뭐든 귀여워.”
“내가 전에도 말했지?”
제발 단어 좀 함부로 바꾸지 마. 레오니에가 확 달라진 어감에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아빠는, 나중에 결혼해서 진짜 애가 생겨 봐야 그 버릇 고칠 거야.”
“넌 날 결혼 시키려고 작정했냐.”
듣다못한 펠리오가 물었다.
“아니?”
레오니에가 바로 대답했다.
“그건 아빠 마음이지.”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 때문에 연애나 결혼을 포기하지 말란 뜻이야.”
전만큼은 아니어도 펠리오에게 오는 연서나 청혼서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그는 서른이 넘었음에도 전과 다름없이 완벽한 인간이었다. 심지어 육아 덕에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도리어 인상이 부드러워졌단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런데도 펠리오는 누구와도 그런 염문이 퍼질 만한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레오니에를 거둔 뒤로, 그는 항상 아이에게만 집중했다.
“연애 좀 해.”
레오니에가 집무실을 제 방처럼 들어가며 말했다.
“아빤 그 얼굴이랑 근육을 썩힐 거야? 그거야말로 인류에게 슬픈 일이라고.”
“쓸데없는 소리.”
펠리오가 손등으로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 안 되면 나 진짜 아빠 상반신 나체 한 번만 그리게 해 줘.”
“유산은 필요 없다고?”
“어휴, 우리 아버님 감기 걸릴라.”
상반신을 함부로 노출하면 안 된다고 레오니에가 제 실내용 망토를 벗어 펠리오의 어깨에 살포시 얹었다. 만수무강하시란 아부 섞인 애교는 덤이었다.
“속물 짓은 됐고.”
“이잉, 효도지.”
“효도 두 번 했다가 쪄 죽겠다.”
그러면서 어깨에 걸쳐진 망토를 도로 레오니에의 어깨에 얹어 줬다.
“옛날엔 애교 좀 부리라고 난리더니.”
레오니에가 미운 콧소리를 냈다.
“네 입에서 ‘옛날’이 나오면, 이 아빠가 좀 많이 웃기다.”
“흥.”
“어쨌건.”
이래저래 다 떠들고 난 뒤에야,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집무실에 데려온 이유를 말했다.
“아무래도 수도에 올라가 봐야 할 것 같다.”
“언제?”
“못해도 일주일 안에.”
동시에 무언가를 꺼냈다.
“수도에서 초대장이 왔다.”
노란색 봉투를 보자마자 레오니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1황자의 열여섯 번째 생일 연회가 봄에 열릴 거다.”
초대장을 받은 레오니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드디어 원작이 시작되었다.
검은 맹수의 바리아.
이곳 세상의 일부를 보여 주는 소설로, 레오니에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그 책 속으로 들어와 남주 펠리오의 입양딸이 되었다.
그리곤 원작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살아갔다. 소설에 적힌 내용은 이 세상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단 사실을 아빠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 레오니에는 단 한 순간도 이 원작의 주인공을 잊지 않았다.
‘바리아……!’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드디어 만날 수 있겠구나!’
레오니에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와, 이거 왜 이러지?’
마치 선물을 뜯는 아이처럼 기분이 들떴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바리아는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성격인지 궁금했다. 펠리오처럼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여도 좋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어도 나름 신기할 것 같았다.
‘회귀한 바리아는 조금 무서웠지.’
본래 바리아는 평화주의자였다. 싸움과 투쟁 없이, 오롯이 대화만으로 서로의 뜻을 이해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신념은 결국 가족들의 배신과 죽음으로 박살이 났고, 다시 과거로 돌아온 바리아는 물렀던 자신의 신념을 버렸다.
“……오, 레오.”
“……어? 어?”
한참 원작 속 바리아를 떠올리던 레오니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펠리오가 영 마땅찮은 표정을 지은 채 제 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도 좋으냐?”
“뭐가?”
“그거.”
펠리오가 턱짓으로 초대장을 가리켰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자신이 두 손으로 노란 봉투를 꼬옥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으으……!”
기겁한 레오니에가 서둘러 봉투를 치웠다. 그리곤 입고 있던 바지에 손바닥을 박박 닦았다.
“그런 거 아니야.”
아이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고 서둘러 변명했다.
“뭔 생각을 했길래 불러도 답이 없어.”
“그야 뭐, 오랜만에 트라랑 수도 저택 식구들 만나는 게 기쁘길래.”
“별 시답잖은 소리.”
펠리오가 딸아이의 앞머리를 가볍게 헝클이며 그 옆에 앉았다.
“그런데, 아빠 괜찮아?”
레오니에는 손으로 대충 제 앞머리를 빗으며 펠리오에게 물었다.
“지금 바쁘잖아.”
“글쎄다…….”
태연한 척하는 펠리오도 사실 꽤나 곤란해하는 중이었다. 폭설이 끝나자마자 마물 사냥을 하러 떠났고, 거의 3주 만에 돌아와 이제 겨우 밀린 일들을 해내나 싶었는데 느닷없이 수도행이라니.
“지랄도 유분수지.”
기어코 펠리오가 욕을 했다.
“아빠, 옛날에 3년 동안 수도에 머물렀을 때는 어떻게 했어?”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예전에 선황 서거 후 3년 동안 수도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땐 급한 일들을 본인들이 가져왔지.”
“그럼 이번에도…….”
그러면 되지 않냐고 물으려던 레오니에가 아차, 했다.
“전원 참석……!”
선황 서거 당시에는 귀족 회의 명단에 올라간 자들만 모였지만, 이번 연회에는 초대장을 받은 귀족 전원이 참석해야 했다. 북부의 골수 가문은 전부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명성 높은 가문들이었다. 그 말은, 그들 역시 이번에 수도로 올라갈 게 뻔하단 소리였다.
3년 전처럼은 불가능했다.
“정 그러면 나만 수도에 갈까?”
레오니에가 걱정스레 물었다.
“너만 어떻게 보내.”
펠리오가 어쩔 수 없단 듯이 중얼거렸다.
“루페를 남기고 가야지.”
“아아, 아저씨…….”
레오니에가 오늘도 부려지는 루페를 동정했다.
보레오티 부녀가 황실 연회에 초대받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레오니에가 어렸을 적에 거하게 깽판을 친 이후, 황제는 그때 일로 단단히 삐쳤는지 초대장을 보내지도 않았다.
“속 좁은 놈들.”
레오니에가 비아냥거렸다.
드디어 수도로 출발하는 날.
레오니에는 작게 하품하며 사용인들이 마차를 점검하며 출발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촉박한 일정에 저택은 며칠 내내 부산했다.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말이야, 으응? 고작 일곱 살짜리가 징징거렸던 거로 그렇게 속 좁게 살면 되겠냐고.”
분명 초대장 일부러 늦게 준 거야.
보송보송 새하얀 털로 짠 긴 망토를 두른 레오니에가 혀를 찼다.
“카라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리곤 마중을 나온 카라의 팔을 껴안으며 혀 짧은 소리로 물었다. 카라는 그런 레오니에가 마냥 귀여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가씨 이제 겨우 돌아오셨는데, 이렇게 또 금방 가시네요.”
“그러니까요.”
할머니랑 같이 있고 싶은데. 철없는 칭얼거림에 카라가 마냥 미소 지었다. 아무리 전보다 컸다고 해도, 카라의 눈엔 여전히 작고 어린 아가씨였다.
“속상해서 어쩌나 몰라요.”
“나 그냥 가지 말까요?”
“그래도 가셔야지요.”
카라는 어차피 레오니에가 수도에 갈 마음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레오니에도 그 이상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대신 슬그머니 카라의 팔을 놓으며 애먼 바닥만 발로 툭툭 때렸다.
“카라 할머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후후, 가시면 트라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할머니는 트라 안 보고 싶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랍니다.”
잘할 거라 믿고 있으니, 굳이 걱정하지 않는다며 연륜이 묻은 여유를 보였다.
“레오.”
그때,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새까만 망토를 두른 펠리오는 새하얀 눈밭에 홀로 서 있었다. 딸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입에선 희뿌연 입김이 나왔다.
“울 아빠 잘생겼네!”
레오니에가 배시시 웃으며 품에 안겼다. 검은 망토를 커튼 삼아 안에 쏙 들어간 소녀는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덕분에 펠리오의 커다란 체구가 더욱 두툼해졌다.
“넌 입도 안 아프냐.”
“왜?”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하잖아.”
“하여튼 칭찬을 못 해요.”
레오니에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저놈의 잘난 척은 아주 그냥 뼛속까지 박힌 모양이었다.
“많이 컸네.”
펠리오는 투덜거리는 딸아이의 머리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쥐똥만 할 때가 어제 같은데.”
“쥐똥보단 컸어.”
“허구한 날 내 다리에 붙어서 조물거리던 변태가 말이지…….”
레오니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펠리오의 목소리는 감회에 젖은 채였다. 그렇게 작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이젠 제 가슴까지 닿았다.
“사나흘에 한 번씩 만졌어.”
“사나흘에 열여섯 번을 만졌지.”
그러나 속은 아직도 철부지였다.
“넌 언제 철들래.”
“평생 안 들 건데?”
레오니에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망토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유도 없이 신이 난 아기 맹수는 아빠 맹수 주위를 빙그르르 돌았다.
펠리오는 아직 철없는 딸의 모습이 내심 안도했다. 너무 빨리 철이 들어 어른이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서운할 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가지.”
두 부녀가 마차에 올랐다.
“공작님, 아가씨.”
루페가 다가와 인사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펠리오가 북부를 떠나 있는 동안, 루페가 남아 공작의 권리를 대행하여 일을 대신하기로 했다. 펠리오는 그를 위해 인세레아와 루피도 저택에서 지내도록 배려해 줬다.
“도착하면 연락하지.”
“루페 아저씨도 잘 있어요.”
“물론입니다.”
배웅하는 루페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했다. 비록 저택에 남아 대신 일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으나, 그는 초대장을 받았음에도 수도로 가는 길에 오르지 않아 무척 기뻤다. 거기다 가족들과 함께 있게 되었으니 더욱 행복했다.
“……아저씨 얄밉네.”
자기 혼자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다니. 레오니에는 약이 올랐다.
“그럼 월급을 깎을까.”
펠리오의 혼잣말에 루페가 울상을 지었다.
“아빠가 만날 그러니까 루페 아저씨가 저렇게 된 거잖아.”
레오니에는 최악의 상사 밑에서 버티는 루페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펠리오는 곧장 가지고 온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옆에 쌓인 수북한 것들은 서둘러 처리해야 할 급한 것들이었다.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좀 도와줄까?”
펠리오는 그 손을 빤히 보다가 이내 서류 몇 개를 골라 넘겼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
“응.”
“서류에 서명할 땐 내 이름 쓰고, 그 뒤에는…….”
“‘레오니에 보레오티’라고 대리 서명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맞지?
레오니에가 중간에 말을 싹둑 잘랐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소리였다.
아이는 이미 후계 수업의 일환으로, 공작 대행으로 간단한 서류 작업을 대신한 적이 많았다. 펠리오도 레오니에가 실수 없이 해내는 걸 보곤 이따금 일을 맡기기도 했다. 펠리오는 그때만큼 아이가 많이 컸음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어느새 일을 도와줄 만큼 자랐단 방증이었다.
마차는 이내 침묵으로 가득했다. 이따금 종이를 넘기는 소리나, 사각사각 펜 움직이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응?”
그때. 한참 서류를 보던 레오니에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걸 또 한다고?”
“뭔데.”
레오니에가 서류 하나를 펠리오에게 건넸다. 이를 받아 곧장 읽던 펠리오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류에 적힌 건, 제국 전역에 있는 게이트 구역 정비 공사 안내였다.
“이거 작년에도 했던 거잖아.”
레오니에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이트 안전을 확인할 겸 주변 도로를 정비하고 포장한다며 황실 행정관들이 북부를 방문했었다. 자신들은 황명으로 나랏일을 수행한다며 떵떵거리던 모습이 선했다.
그리고 펠리오는 황실에서 온 귀한 분들에게 북부에서 가장 값싼 여관을 소개해 줬다. 당연히 보레오티 저택에서 묵을 거라고 여겼던 행정관들이 어찌나 황당해하던지, 레오니에는 그 표정을 보고 박장대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름 적응을 했는지, 행정관들이 수도로 돌아갈 땐 반려동물로 벼룩들을 함께 데려갔었다.
어쨌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비 공사를 왜 또 해?”
심지어 이 정비 공사는 각 지역의 수장들이 사비를 직접 들여서 하는 것이었다. 나랏돈은 보조금 형식으로 아주 일부만 지원했다.
작년에야 게이트 안전 확인 겸 이래저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지만, 이 짓을 올해 또 반복해서 하는 건 돈 낭비였다.
“황제가 드디어 실성했나?”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릴 리가 없었다.
“수상하지 않아?”
“그게 한두 번도 아니고.”
펠리오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이 상황이 탐탁지 않은 건 확실했다. 레오니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부녀는 도로 서류 작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수상함 가득한 서류는 빈자리에 내동댕이쳤다.
마차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러나 두 부녀는 동시에 생각했다.
‘원작이 진짜 시작된다.’
‘황실이 움직이려 하는군.’
다르지만, 같은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