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생일 (18/51)

#18. 생일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날. 드디어 레오니에의 생일이 왔다.

아이는 아침부터 행복했다.

“생일 축하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펠리오가 직접 깨우며 가장 먼저 축하 인사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잠이 덜 깬 와중에도 레오니에는 헤벌쭉 웃으며 펠리오를 와락 껴안았다.

“아빠, 고마워!”

“말로만?”

“우웅, 뽀뽀오!”

레오니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펠리오의 양 볼에 번갈아 입술을 쪽 맞췄다.

“아빠, 밖에 눈 와.”

레오니에가 제 방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가리켰다. 굵직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마차가 못 다니면 어쩌지?”

곧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제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눈 때문에 못 오면 어쩌나 마음에 걸렸다.

“마차가 못 다닐 정도는 아니야.”

펠리오가 잠옷 바람인 아이의 몸에 가벼운 겉옷을 걸쳐 주며 말했다.

“북부는 저것보다 더한 날에도 마차가 돌아다녀.”

“정말?”

살짝 내려앉았던 아이의 눈꼬리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펠리오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줬다. 커다란 손바닥 아래로 까르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코니와 미아가 들어왔다.

“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

“오늘로 여덟 살이 되셨네요.”

축하 인사를 받은 레오니에는 또 입꼬리가 스르륵 풀렸다.

“오늘 레오 머리는 이걸로 묶도록.”

펠리오는 두 하녀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그리곤 먼저 식당에 내려가 있겠다며 레오니에의 볼에 입을 쪽, 맞추고 가 버렸다.

“뭔데, 뭔데?”

펠리오가 주고 간 게 궁금한 레오니에가 몸을 들썩거리며 물었다. 코니와 미아가 싱긋 웃었다.

“세상에나, 이것 좀 보세요!”

“주인님이 주신 첫 번째 생일 선물이에요.”

바로 머리 장식이었다. 알록달록 화사한 보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꽃밭을 연상케 하는 사랑스러운 장식이었다. 그것도 전부 보레오티에서만 나는 값진 보석들로 꾸며져 있었다.

“예쁘다!”

레오니에가 볼을 수줍게 붉혔다. 두 손 가득 감싼 볼살이 기쁜 미소로 출렁거렸다. 머리 장식을 슬쩍 얹어 보는 것만으로도 레오니에는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다.

“아가씨, 겨우 이거로 좋아하시면 안 돼요!”

코니가 자신이 생일 주인공인 것처럼 들뜬 채로 말했다.

“오늘 아가씨께서 받을 선물로만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답니다!”

식당에 내려가기 전에. 레오니에는 코니, 미아와 함께 선물이 가득 쌓였다는 방을 몰래 보러 가기로 했다. 원래는 생일 파티 전까지 비밀로 해야 했지만, 방 구경 정도야 괜찮을 거라고 레오니에가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복도를 총총 걸어가는 아이의 머리엔 펠리오가 선물한 첫 번째 생일 선물이 장식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에 한쪽씩 꽂힌 장식이 화사하게 반짝였다.

선물이 있다는 방앞에 도착한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집에 이런 곳이 있었어?”

굳게 닫힌 문이 천장까지 높이 솟아 있었다.

북부 저택에 머문 지 1년도 안 되었지만, 그래도 레오니에는 이곳 저택을 나름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심심하면 산책이랍시고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곳은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사실 지나간 적은 있었다. 다만 여기에 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구석진 곳에 숨겨진 정체불명의 문짝은 바로 옆에 있는 벽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색깔이며 몰딩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래서 몰랐나?’

레오니에가 문을 조심히 만지작거렸다. 미세하게 난 금을 그제야 알아봤다.

아이는 슬그머니 손에 힘을 줘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은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힘껏 밀어붙이는 레오니에의 몸이 반동으로 주르륵 밀릴 만큼 굳건했다.

“아가씨께서 모를 만도 해요.”

“여긴 창고용으로 쓰이는 곳이랍니다.”

“창고?”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부는 겨울이면 외출이 어렵잖아요.”

코니가 설명해 줬다.

북부의 겨울은 무척 살벌한데, 특히 눈보라가 거센 날은 외출은커녕 창문을 여는 것도 위험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식량이나 생필품을 저장하는 창고가 설치된 저택 구조가 발달했다. 이런 전통 구조는 오래된 보레오티 저택에도 적용되었다.

“그런데 우리 창고는 밖에 있잖아.”

레오니에는 일전에 카라랑 같이 회랑을 통해 바깥에 있는 창고용 별관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공작이 거주하는 본 저택은 실내 훈련장이나 창고 등을 비롯한 중요한 곳들과 연결되어 있어 겨울에도 불편함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구경하러 갔던 창고엔 무수히 쌓인 식량들과 생필품으로 가득했다.

“여기는 보물 창고 같은 곳이에요.”

“보, 보물?”

아기 맹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벽이나 다름없던 문이 새삼 달라 보였다.

“여긴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선택받은 사용인들만 아주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던 코니와 미아가 일순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저희는 얼마 전에 이곳에 들어갔답니다!”

“아가씨의 선물을 옮기기 위해서 말이지요!”

바로 자신들이 ‘선택’받은 사용인이라며 으스댔다. 펠리오가 기운 없는 레오니에를 걱정해서 불렀던 그 날, 그는 두 사람에게 보물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바로 여기에 아가씨의 선물이 한가득 쌓여 있답니다.”

“주인님께서 전부 여기에 모아 두라고 하셨거든요.”

보물 창고는 1층부터 첨탑 꼭대기까지 이어진 독특한 구조를 지녔는데, 내부는 저택과 똑같이 방과 복도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리고 펠리오는 그중 가장 큰 방에 레오니에의 선물을 모아 뒀다고 한다. 그것도 무려 작년 겨울부터.

“그, 그렇게 전부터?”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주인님이 아가씨의 생일 선물을 항상 보물이라고 부르셨답니다.”

코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심지어 두 부녀가 수도에서 지낼 때도, 펠리오는 틈틈이 선물을 사서 북부 저택으로 몰래 보냈다고 한다.

“…….”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레오니에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지금 이대로 식당에 가면 펠리오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작년 이맘때면 레오니에가 입양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때다. 거기다 펠리오가 어색해서 ‘아저씨’라고 부르던 시기였다.

“어휴, 이게 무슨 주책이람.”

레오니에게 괜히 투덜거렸다. 그러나 사실은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을 먹을 때처럼 달콤한 기분이 전신에 사르르 퍼졌다. 옷자락을 꼬물꼬물 매만지는 손가락이 아이의 부끄러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코니와 미아가 서로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생일이 행복한 날이라는 걸, 레오니에는 정말 오랜만에 떠올렸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여덟 살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오전에는 저택 사용인들끼리 모여 만든 작은 축하 자리가 마련되었다. 레오니에는 예쁜 화관을 쓴 채 사용인들이 전하는 축하 인사와 선물들을 한가득 받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느라 목이 다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아이는 기뻤다. 자신의 존재가 다시금 무사히 이 세상에 정착했음을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아기 맹수가 디딘 땅은 이렇게 또 한 번 단단하게 굳어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가씨.”

루페가 포장된 선물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루페 아저씨!”

레오니에가 루페를 꼭 껴안았다. 깜짝 놀란 루페가 멈칫하더니 곧 기쁘게 아이를 껴안았다. 아이의 고아원 시절을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루페 또한 오늘 감개가 무량했다.

루페가 준 선물은 아주 묵직했다.

“이, 이건!”

포장지 위를 손으로 대충 더듬거리던 레오니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윽고 포장을 뜯어낸 직후엔 환호성을 내질렀다.

선물의 정체는 근육 크로키 사전이었다.

그것도 무려 두 권이었다.

“전에 약속드린 것과 함께 선물했습니다.”

루페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일손이 모자랄 때 우수한 인재를 소개해 준 아가씨께 보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루페 아찌……!”

감격한 레오니에가 루페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순간 뒤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의 근원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펠리오의 손이었다. 그가 걸터앉은 의자의 팔걸이가 보기 좋게 으스러졌다.

루페는 순간 자신이 저렇게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불쌍한 비서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철없는 아이는 선물 받은 사전에만 몰두했다. 책장을 넘기는 아이의 손이 흥분에 겨워 바들바들 떨렸다.

“하아, 하아……!”

영롱한 근육 크로키를 눈에 담은 여덟 살 아이의 숨결은 거칠고 뜨거웠다. 레오니에를 훈훈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어른들이 순간 움찔했다.

그 외에도 아이는 많은 선물을 받았다. 코니와 미아를 비롯한 하녀 일동은 예쁜 옷을 만들어 줬고, 하인들은 십시일반 돈을 조금씩 모아 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다.

정원사들은 온실에서 몰래 가꾼 노란 꽃 화분을 선물했고, 요리사들은 레오니에가 좋아하는 딸기 우유 맛 초콜릿을 만들어 줬다.

“저는 시를 썼어요.”

인세레아가 머뭇거리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북부에 온 뒤로 아가씨를 생각하며 쓴 시집이랍니다.”

무려 두꺼운 양장본에 직접 쓴 자작 시집이었다.

‘이야, 이 언니는 진짜……!’

레오니에는 잠깐 잊고 있었던 인세레아의 과거를 떠올렸다. 보레오티 공작을 당당히 스토킹하던 그 시절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고, 고마워요.”

어색한 미소로 인사한 레오니에가 슬그머니 뒤에 있던 펠리오를 바라봤다.

‘……우, 웃어?’

펠리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는 인세레아가 레오니에한테 바친 정성 어린 자작시를 흡족해하고 있었다. 어린 딸에게 충성스러운 부하가 생겨 아주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어휴, 저놈의 아빠.’

레오니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일 주인공의 피곤한 태도에 모두 일순 긴장했다. 특히 조금 전 선물을 건넸던 인세레아는 거의 죽을상이었다.

“서, 선물이 마음에 안 드세요?”

인세레아가 바들바들 떨었다.

“그게 아니라.”

레오니에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 속물적인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번에 기대해요.”

장담컨대, 이번 달 인세레아의 월급은 풍족할 터이었다.

해가 중천을 살짝 지나자, 보레오티 저택에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레오니에는 생일 주인공답게 현관까지 직접 나가 초대 손님들을 맞이했다.

“영애, 생일 축하드려요.”

“어쩜 이렇게 야무지고 귀여우실까요.”

“이러니 공작님께서 아끼시지요.”

쪼그마한 아이가 오늘 파티의 주인이랍시고 어른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손님들의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어머나.”

보스그루니 백작이 활짝 펼친 부채로 입가를 막으며 싱긋 웃었다.

“아주 귀여운 파티 주인이시네요.”

“보스그루니 백작!”

“으음…….”

그때, 백작이 아주 살짝 아쉽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 눈짓에 잠시 머뭇거렸던 레오니에가 서둘러 자세를 고쳤다.

“보스그루니 백작.”

아이는 치마 끝자락을 살짝 잡은 뒤에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오늘 저의 생일 파티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제야 보스그루니 백작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그래도 제가 명색이 영애의 예절 선생님이잖아요.”

“항상 백작께 많은 걸 배운답니다.”

“우리 영애께선 정말 말씀 하나는 예쁘게 하신다니까요.”

스승과 제자는 서로 정답게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인간은 여기 있나요?”

문득 아르데아의 존재를 떠올린 보스그루니 백작이 곱던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도 선생님을 못 뵌 지 꽤 되었어요.”

“그럼 공부는 어찌하시고요?”

“아르데아 선생님이 주고 가신 숙제를 풀어요.”

풀다가 모르는 건 표시를 따로 해 둔 뒤에 복습하고, 그렇게 하고도 모르는 건 펠리오나 루페 같은 어른들에게 물어봤다고.

사정을 들은 보스그루니 백작이 답답하단 듯이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 새끼 진짜…….”

부채를 쥔 백작의 손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레오니에는 이 자리에 찻잔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있었다면, 이 자리에 없는 아르데아는 보스그루니 백작이 찻잔을 쥔 것만으로도 쓰러졌을 거다.

“어머, 저도 참…….”

뒤늦게 정신 차린 보스그루니 백작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레오니에는 그러기엔 많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아빠 말로는요, 무슨 일 때문에 없는 거래요.”

“그 새끼, 아니, 그 인간이 일이라고 해 봐야 뭐 있겠어요.”

기껏해야 유적지 조사 말고 더 없을 거라며 피곤하단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거렸다.

“……아세요?”

“당연히 알죠.”

보스그루니 백작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아르데아에게 반했다며 숨겨 두었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해 줬다.

“그땐 저도 젊었지요. 그렇게 공부하는 모습이 뭐가 멋지다고 반했는지…….”

“오오!”

“덕분에 저 혼자 가문 지키고 애들을 다 키웠죠.”

“이혼은 왜 안 하시고요?”

“이혼을 안 하는 조건으로 가주와 작위를 준다고 했거든요.”

선대 보레오티 공작이 골수 가문의 유지를 위해 그렇게 정해 뒀다고 한다.

으음?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대 공작은 아르데아 선생님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레오니에는 일전에 수도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보스그루니 교수님이 공작님이 졸업하신 이후에 채용된 거로 알고 있습니다. 뭐랄까, 북부에서 눈치를 줬다는 소문도 있고…….’

파보의 동생이던 보파의 말이었다. 확실한 것 없는 소문이라고 보파 또한 그리 말했지만, 레오니에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골수 귀족 가문이면서 처자식 다 내팽개치고 수도로 올라갔으니, 북부의 수장으로서 엄하게 대할 일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은…….’

조금 전 보스그루니 백작의 말만 들어보면, 아르데아를 내쫓기는커녕 오히려 지키려는 것처럼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부부는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 그 덕에 아르데아는 여전히 보스그루니 백작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천하의 귀족도 가문이 뒤에 있고 없고는 아주 중요했다. 가문에게 버림받은 귀족 출신은 속된 말로 벌레보다 못할 정도랬다.

‘보면 아빠도 아르데아 선생님을 저택에 데려왔고.’

으으음, 레오니에가 팔짱을 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멈췄다. 즐거운 생일날에 꼬장꼬장 아르데아 선생님을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즐거운 내 생일!’

레오니에는 복잡한 건 다 집어치우고, 보스그루니 백작을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다정한 백작의 미소를 보니 아르데아는 순식간에 지워졌다.

* * *

생일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엔 어느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손님들은 레오니에와 차 모임에 함께하는 귀부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린 친구를 위해 누구보다도 빠르게 저택을 찾았다. 레오니에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귀부인들을 손수 안내했다.

“어머나, 저기 좀 보세요!”

올봄 새로 시집왔던 테드로스 백작 부인이 어느 곳을 가리켰다. 연회장 중앙에 알록달록 예쁘게 포장된 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사용인들이 선물을 옮기는 중이었다.

“전부 공작님이 영애를 위해 준비하신 거래요.”

케라타 자작 부인이 말했다.

“보레오티 영애께서 오늘 선물 확인하느라 팔이 많이 아프시겠어요.”

“생각만 해도 귀여우시네요.”

“공작님이 영애를 그만큼 아끼신단 증거잖아요.”

귀부인들은 자기 일처럼 까르르 웃었다.

“그럼 공작님께선 결혼은 안 하시는 걸까요?”

어느 남자 귀족이 무알코올 음료를 가볍게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거야 공작님 마음이시지요.”

이젠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우르마리티 백작이 말했다.

“후계자도 다 결정하셨으니 결혼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닐 겁니다.”

“으음, 그래도…….”

그러나 남자 귀족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혹시 무언가 염려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너 설마 공작님 결정에 반대하냐? 우르마리티 백작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정말로 반대한다면, 우르마리티 백작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놈의 목을 제 손으로 직접 돌릴 작정이었다.

다행히 그 뜻을 빠르게 눈치챈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런 것이 아니고!”

“아니면?”

“그러니까, 공작님은 아직 젊으시잖아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남자 귀족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단 뜻이었다.

“물론 제 걱정이 감히 보레오티 영애의 후계 확정을 반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남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그만이 아니라, 북부에서 펠리오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레오니에가 황실 연회에서 스스로 ‘유일한 후계자’라고 당당히 밝힌 일화는 제국 전역에 전해졌다. 이제 누구도 레오니에를 사생아니 뭐니 뒤에서 수군거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귀족이 결혼하지 않는 건 역시 눈에 띄니까요.”

“요즘 세상에 무슨 그런 뒤떨어진 소리인가요.”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데…….”

“귀족이지만, 이미 후계가 결정 난 귀족입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남자 귀족의 말을 잘랐다.

“애당초 결혼은 후계를 잇기 위한 수단이지요.”

그래서 귀족에게 결혼은 중요했다. 하지만 반대로 후계가 있다면, 결혼은 굳이 필수 조건이 아니었다.

거기다 전해지는 소문으론 공작이 아이의 친모였던 평민 여자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도 아예 안 할 거라는 말도 파다하게 퍼졌다. 예상치 못한 보레오티 공작의 순애보는 비어 있는 안주인 자리를 노리던 귀족들의 의지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계속 공작님을 걱정했다간, 도리어 공작님이 그대를 걱정할지 모르지요.”

목숨이나 수명 같은 것.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지만, 상대방은 그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어색한 웃음만 남긴 채 후다닥 도망쳤다.

“쯧.”

우르마리티 백작이 가볍게 혀를 내둘렀다. 각본처럼 짜 맞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함에도 아직 저런 의문을 지닌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저런 것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군.’

백작은 조금 전 귀족의 말이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레오니에의 후계 확정과 펠리오의 결혼 여부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보레오티 안주인이 공석이었다. 당장이야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어쨌건 제국에서 황후와 황녀 다음가는 위치다.

‘안 했으면 좋겠는데.’

솔직한 심정으론, 우르마리티 백작은 펠리오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혹시라도 레오니에가 새엄마란 사람과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힘들게 살까, 그리고 펠리오도 나중에 결혼 후 낳은 자식에게 후계 자리를 넘길까 걱정이었다.

물론 전부 백작의 욕심이었다. 거기다 펠리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다 괜한 걱정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할아버지로서, 그 정도 오지랖은 괜찮을 성싶었다.

‘하지만 있는 것도 좋지.’

솔직히 펠리오 혼자선 레오니에를 완벽하게 돌볼 거란 확신이 없었다. 지금이야 사람 냄새가 조금씩 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점이 많았다. 카라나 펠리카처럼 유능한 집사와 하녀장이 있지만, 그런 사용인들이 귀족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좋은 사람이 있다면야…….’

펠리오와 레오니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었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레오니에의 행복이지.’

* * *

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가볍게 두드리는 포크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여러분.”

똘망똘망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을 불렀다. 덕분에 시끌벅적하던 연회장 분위기가 단숨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샹들리에를 칠 것처럼 우뚝 쌓인 선물 앞에, 오늘의 주인공이 싱긋 웃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새하얀 망토를 둘렀다. 그 옆에는 검은 정장에 빨간 브로치로 볼로 타이를 맨 펠리오가 있었다.

그는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잔과 포크를 당연하다는 듯 손수 받아 근처 테이블에 올려 뒀다. 거기다 펠리오에게 물건을 건네는 레오니에의 행동에도 망설임 하나 없었다. 손짓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하단 뜻이었다. 그리고 보레오티 공작이 영애를 귀히 아낀다는 방증이었다.

귀족들은 이제 익히 아는 사실임에도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 생일을 축하하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니에가 모두에게 인사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카라가 또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많이 자라셨구나…….’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금 쓰는 손수건만 벌써 석 장째였다.

오늘따라 유독 작년 이맘때의 레오니에가 떠올랐다. 정말 작고 왜소한 아이였다. 거기가 평균보다 월등히 큰 펠리오의 품에 안겨 있으니 더욱 안타까워 보였다. 속된 말로 커다란 바위에 얹어진 겨울 나뭇가지 같았다. 푸석푸석한 머리칼이며 상처투성이였던 피부는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졌다.

“레오니에 보레오티가,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저 많은 사람에게 당당하게 인사하는 꼬마 숙녀는, 도저히 그때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포동포동 살이 붙은 둥근 볼살엔 혈색이 돌았고, 동그란 검은 눈엔 언제나 총명한 빛이 반짝였다. 검은 머리는 윤이 자르르 흘렀고, 품위에 걸맞은 옷과 장신구가 아이의 깨끗한 피부를 감싸고 꾸몄다.

‘여전히 작으시지만…….’

아직도 몸은 또래보다 작지만, 상당히 많이 따라잡았다. 아마 몇 년 뒤엔 반대로 어느 또래보다 월등하게 클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카라는 감격스러웠다. 레오니에는 그 누구보다 당당한 보레오티가 되었다.

“우리 아가씨가 저렇게나 컸네요…….”

옆에 있던 펠리카도 훌쩍였다. 그들에게도 오늘은 아주 기쁜 날이었다.

“주인님 좀 보세요.”

펠리카가 펠리오를 가리켰다.

“저렇게 기뻐하세요.”

그녀의 말대로, 펠리오는 어느 때보다 흐뭇한 시선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없을 만큼 선명했다.

레오니에는 자주 보는 웃음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니었다. 거의 쥐구멍에 볕 들다가 갑자기 구름이 끼고 번개가 칠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다. 덕분에 초대받은 귀부인들과 어린 소녀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와아…….”

하물며 펠리오만 봤다 하면 엉엉 울던 플로무스도 얼굴을 붉혔다.

‘공작님이 저렇게 멋진 분이셨구나.’

어쩌면 다음부터는 펠리오를 보고도 울지 않을 자신이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오니에의 감사 인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생일 파티를 시작하기 전에.”

레오니에가 선물 더미 구석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엉성하게 포장된 것이 여타의 선물들과 눈에 띄게 달랐다.

“아빠, 아니,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포동포동 단풍잎 같은 두 손이 조금 전에 꺼냈던 그 엉성한 것을 아빠에게 내밀었다.

“아버지.”

펠리오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설핏 찡그렸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적잖게 놀랐다는 뜻이었다. 느닷없이 존대에 선물이라니. 그에게도 이 상황은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펠리오가 진짜 놀란 건 바로 이다음이었다.

“저를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레오니에는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 몰래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펠리오에게 줄 선물이었다.

‘아빠가 아니었으면 난…….’

아주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레오니에는 반사적으로 제 몸을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 너머로 선명해지는 건 코니에의 미소였다. 다정하고 상냥한 선생님의 얼굴은 얼음처럼 뚝뚝 녹았다. 흘러내린 얼굴 위론 섬뜩한 미소로 목을 조르려는 사우라가 나타났다.

‘괜찮아.’

하지만 언제나 악몽의 끝엔 항상 펠리오가 나타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진 아빠는 항상 겁에 질린 딸을 지켜 줬다.

펠리오 덕에 레오니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생일을 즐길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다 아빠 덕분이었다.

‘뭔가 보답하고 싶어.’

생각해 보면 받기만 받았지, 무언가 제대로 해 준 게 없었다. 쿠키를 구워다 주는 것 말고 진짜 선물을 하나 떡하니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이미 펠리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물질적으로 모자람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하물며 레오니에가 쓸 수 있는 돈도 원래는 다 펠리오가 주는 것이었다. 쿠키도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엔 모자람이 많았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한참 고민하던 아이의 뇌리에 얼마 전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실력을 왜 숨기셨담.’

‘그러게. 너무 아깝잖아.’

바로 코니, 미아와 카페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레오니에의 그림을 보고 입술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그림…….’

뭐에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니에는 곧장 종이와 펜을 찾아 미친 듯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잘 그렸다고 생각한 것을 돌돌 말아 리본으로 포장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다 싶었던 아이는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그간 전하지 못한 쑥스러운 속마음을 적었다.

그게 바로 조금 전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준 선물의 정체였다.

“아버지 덕에 오늘 제 생일이 너무도 행복한 거예요.”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레오니에가 몸을 스리슬쩍 비틀었다.

“어어,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

펠리오는 말을 잃었다. 아이에게 그간 못 만났던 날만큼 가득 챙겨 줄 생각만 했던 그는, 자신이 이런 선물을 받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안 풀어 봐?”

레오니에가 굳어 버린 펠리오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제야 펠리오가 머뭇머뭇 선물을 풀었다.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와 꽃이 그려진 편지 봉투가 있었다. 펠리오는 종이를 먼저 펼쳤다.

“세상에, 이게 뭐야!”

한 발치 떨어진 곳에서 슬쩍 도둑 구경하던 루페가 먼저 감탄을 내질렀다.

그림 속 펠리오는 집무실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펠리오 본인과 소름 끼칠 만큼 흡사했다. 무뚝뚝한 눈매라든가, 넓은 어깨와 가슴이라든가, 짜증 나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습관까지.

“여, 열심히 그렸어!”

반응 없는 펠리오 때문에 무안했던 레오니에가 어느새 존대를 잊고 평소처럼 말했다.

“…….”

그러나 펠리오는 여전히 그림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반응 없는 그의 모습에 괜히 연회장 분위기만 차갑게 식어 갔다.

펠리오의 감정을 잘 읽는다고 자부하는 레오니에조차 그가 무슨 생각인지 읽지 못했다.

곧 펠리오가 편지를 꺼냈다. 거기엔 레오니에가 최대한 또박또박 바르게 쓰려고 노력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빠, 항상 고마워.

고아원에서 나를 찾아 준 것도 고맙고, 반성할 생각이 없는 이런 변태를 예뻐해 줘서 고마워.

나 같은 딸을 키우느라 고생이 많지만,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

그래도 나름 즐겁잖아.

뭐든 즐거우면 된 거야.

앞으로도 우리 행복하자.

아빠 사랑해!]

편지에 적힌 내용은 진지하다가 갑자기 어딘가로 훅 빠져 버리는 내용이었다. 평소 두 부녀가 주고받는 평범한 대화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충분히 전해졌다.

“……고, 공작님?”

조심스럽게 펠리오를 살피던 루페가 흠칫했다. 그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우시는…… 아악!”

우는 거냐고 물으려던 루페가 느닷없이 왼쪽 정강이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조금 전 펠리오가 제 딴엔 힘 조절해서 한 발길질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면 루페가 말실수하기 전에 펠리오가 빠르게 막아 그 헛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다들 펠리오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걸 지켜보았다.

“……레오니에.”

깊이 숨을 들이쉰 펠리오의 목소리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애칭도 아닌 본명을 불린 레오니에는 괜히 긴장해 몸을 움찔했다. 아이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속에서 홀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펠리오였다. 그 혼자 멀쩡한 얼굴이지만, 눈은 평소보다 촉촉했다.

“내가 지금껏 받아 본 선물 중.”

“…….”

“사실 선물 같은 걸 제대로 받아 본 기억도 없지만.”

조금 전 자신의 말에 바로 반박하는 펠리오가 순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곧 그는 아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가장 근사한 선물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펠리오는 모든 얼굴 근육을 사용해 자신의 진심 어린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고맙구나.”

덩달아 레오니에의 눈이 커졌다.

“나 역시 네가 내 딸이라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몰라.”

“아빠…….”

“한번 안아 보자.”

이리 오라며 펠리오가 팔을 벌리기 무섭게 레오니에가 와락 뛰어들었다.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단단히 준 아이가 시큰거리는 코를 괜히 훌쩍였다.

“……너무 감동적이에요!”

지켜보던 인세레아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저, 정말! 정말이지 너무도 축하드려요!”

인세레아를 시작으로, 너도나도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무슨 신기루 같은 꿈을 본 것 같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참으로 마음이 포근해지는 장면이었다. 설마 이곳 보레오티에서 이렇게 가슴 훈훈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을 목격하게 될 줄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멀리 떨어져 지켜보던 사용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어코 카라는 주저앉아 손수건이 흠뻑 적셔질 정도로 훌쩍거렸다.

“정말 다정한 부녀지간이세요.”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 설마 내 나체 그림 같은 건 안 그렸지?”

“그릴까 싶었는데, 효도 차원에서 아직 안 그렸어.”

“부탁인데 그 효도 평생 가자.”

“안타깝게도 효도 유통 기한이 오늘로 다 됐지롱.”

“이 불효녀가 진짜…….”

정작 맹수 부녀는 일찌감치 감동 다 말아먹고, 서로의 귓가에 허파 뒤집히는 소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레오니에의 깜짝 선물 덕에, 생일 파티는 훈훈하게 시작되었다.

파티 중간엔 펠리오가 깜짝 손님이라며 고아원 아이들을 직접 데려왔다. 초대받은 아이들 속엔 유벤을 비롯해 코니에한테 속아 팔려 갔던 아이 4명도 있었다. 펠리오와 루페를 비롯한 어른들이 전부 다 찾아와 북부 고아원으로 데려왔었다.

서로를 알아본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레오니에는 아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손으로 살피며 그들의 무사함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 기쁜 선물을 준비해 준 펠리오에게도 고맙다며 몇 번이고 말했다.

“공작님도 사람이었군요.”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린 파르두스 후작 영식이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편지를 받고 감동하고, 이런 자리까지 만들다니요.”

그렇게 흐물흐물 녹은 표정을 짓는 펠리오 보레오티는 생애 처음이었다.

“아들아.”

옆에 있던 파르두스 후작이 제 손주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답했다.

그의 손주를 비롯한 아이들은 레오니에가 선물을 뜯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커다란 보석함과 아이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옷, 유행하는 소설 전집까지.

펠리오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선물했다. 덕분에 선물을 뜯는 레오니에의 얼굴엔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이의 등 뒤에 크게 걸린 ‘레오니에 생일 축하해’ 종이 팻말은 고아원 아이들이 몰래 준비해 준 선물이라고 했다.

“보레오티도 사람이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파르두스 후작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그는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소복소복 내리던 함박눈이 어느새 잦아든 상태였다. 저 눈이 그치면 한동안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이후엔 본격적인 폭설이 쏟아질 거다.

북부는 늘 그랬듯이, 올해도 침묵의 겨울을 보내게 될 거다.

“나는 저런 변화가 아주 기쁘구나.”

“아버지는 보레오티 영애께서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아주 마음에 들지.”

후작이 작게 웃었다.

“저분은 맹수를 더욱 맹수답게 만드셨으니.”

“글쎄요…….”

후작 영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는 맹수의 송곳니가 반쯤 갈려 뭉툭해진 것 같았다. 물론 펠리오는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손수 데려온 고아원 아이들이 전부 겁에 질려 몇 걸음이나 뒤에서 따라올 정도니까.

하지만 천하의 보레오티가 저렇게나 다정해지다니.

“……실망이더냐?”

파르두스 후작이 물었다.

“실망은 아니고요.”

그의 아들이 곧바로 답했다.

“그저 신기하고 어색할 뿐입니다.”

“저들도 얼마나 힘들었겠냐.”

파르두스 후작도 그의 아들처럼 보레오티를 마냥 무섭고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지고, 나이를 점점 먹음에 따라 보레오티가 지닌 불안한 이면을 알게 되었다.

“모두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불리는 건 아주 힘든 일이란다.”

“…….”

“그리고 그렇게 불리기 위해 노력하는 매 순간은 아주 곤혹이고.”

후작은 언젠가 그렇게 생각했다.

선대 공작이 펠리오를 엄하게 가르치는 모습을 볼 때. 공작이란 응당 모두의 위에 서야 한다며 혹독하게 대할 때. 그런 동시에 죽은 여동생이 남긴 딸에겐 다정하게 대할 때.

그 모습을 뒤에서 홀로 훔쳐보던 어린 펠리오를 우연히 목격했을 때.

‘……상처 입은 맹수였지.’

그런 유년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펠리오는 사람들이 흠칫거릴 정도로 흉포한 위압감을 내보였을 거라고. 심지어 펠리오 그 자신조차 모르게.

하지만 펠리오는 레오니에와 함께 지내면서 그가 진정 어린 시절에 경험해야 했던 것들을 뒤늦게 겪게 되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따뜻한 가정을, 어린 딸이 선물했다.

‘남들은 다들 공작님이 멋진 아버지라고 생각하겠지만.’

파르두스 후작의 눈에는 달랐다. 그의 눈에 비친 두 부녀의 주도권은 레오니에한테 있었다. 저 아이가 펠리오의 상처를 보듬고 어엿한 어른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아주 대단한 분이란다.”

파르두스 후작의 주름진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그때였다.

“공작님.”

사용인 한 명이 곤란한 표정과 함께 연회장에 나타났다. 표정이 좋지 않은 사용인 탓에, 연회장 분위기도 어수선하게 술렁거렸다.

“황실에서 무언가를 보냈습니다.”

사용인은 조심스럽게 펠리오에게만 말을 전했다. 레오니에가 선물을 푸는 걸 지켜보던 펠리오가 인상을 험악하게 썼다. 황실에서 보냈다는 말만으로도 내내 평온하던 기분이 거칠게 일렁였다.

“으아아앙!”

“무서워! 으아아!”

그 얼굴을 본 아이들 몇 명이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낸 거지?”

아이들한테서 살짝 떨어진 뒤에야 펠리오가 발신인을 물었다. 황제가 보낸 거라면 당장 벽난로 땔감으로 쓸 생각이었다. 그리곤 파르두스 후작을 흘겨봤다.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모르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황후 폐하이십니다.”

다행히 선물을 보낸 사람은 티그리아 황후였다. 펠리오는 선물을 안으로 들이라고 말하며 레오니에를 불렀다.

‘황후가 보낸 거라면…….’

펠리오는 들어오는 선물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보낸 물건이라면 파르두스 후작이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레오.”

펠리오가 아이를 불렀다. 슬그머니 상황을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쪼르르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황실에서 네게 선물을 보냈단다.”

“으엑.”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버려. 몰래 태워 버려.”

“황후 폐하께서 보냈다는데?”

“유후!”

레오니에가 선물을 보며 까르륵 웃었다. 펠리오는 저 속물의 태세 전환을 보고, 나중에 훌륭한 처세술을 지닌 어른이 될 것 같다고 확신했다. 보레오티의 미래가 든든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보냈지?’

선물을 뜯으려던 레오니에가 일순 동작을 멈칫했다.

‘보낼 이유가 있나?’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레오니에와 황후는 접점이 없었다. 지난 황실 연회에서는 같은 공간에 있기는 했으나 만나지는 못했다.

‘혹시 그건가?’

집히는 게 있다면, 파르두스 후작을 통해 건네준 사탕이었다. 자신이 맹수의 송곳니를 쓸 거니까 최대한 멀리 떨어지라는 쪽지를 적었었다. 아무래도 그 덕에 화를 무사히 면한 모양이었다.

티그리아 황후가 보낸 선물은 목검과 튼튼한 재질의 옷감이었다.

“네가 검술을 배운다는 걸 아시는 모양이다.”

펠리오가 선물들을 살피며 말했다.

“좋은 거야?”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검 따위야 휘두르는 게 전부고, 훈련복도 근육이 드러나는 거면 최고라고 여기는 검술 초보자는 아직 모를 것들이었다.

하지만 펠리오 눈에는 선물로 온 목검과 옷감의 가치가 보였다. 그리고 이를 딱 한마디로 설명해 줬다.

“비싼 거야.”

“황후 폐하께 영원한 충성을…….”

“이 속물 같은 녀석.”

펠리오가 피곤하단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선물 위에는 황후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있었다. 새하얀 편지지에는 아무 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두 송이의 꽃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는 붉은색이 짙은 커다란 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나리처럼 조그만 노란 꽃들이었다.

“……이게 뭐지?”

황실의 상징 같은 건가? 레오니에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끙끙거리던 찰나였다.

“고맙구나. 그리고 조심하렴.”

어느새 뒤에 선 파르두스 후작이 뜻 모를 소리를 작게 속삭이며 가르쳐 줬다. 또 제 등 뒤에 기척 없이 나타난 후작에게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으어어,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파르두스 후작이 얄밉게 웃었다.

“근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꽃말이랍니다.”

“꽃말?”

“그 편지에 적힌 꽃들의 의미지요.”

“의미? 아아……!”

그제야 레오니에는 편지가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황후 폐하께선 꽃을 참 좋아하신답니다. 손수 황후궁에 화원을 가꿀 정도시지요.”

“그럼 이건 역시…….”

“사탕에 대한 보답이신가 봅니다.”

사탕 덕에 레오니에가 꺼낸 송곳니에 다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답례인 듯했다.

파르두스 후작은, 황후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겐 종종 꽃으로 편지를 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크게 와닿진 않았다. 제 속에 든 거야 많이 부패한 변태 어른이지만, 겉보기엔 꽃말 따윈 전혀 모르는 꼬꼬마였다. 그런 애한테 꽃말로 편지를 보내다니.

‘조금 짓궂은 면이 있네.’

마냥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장난꾸러기 같은 면모가 있었다.

‘어쨌건 고맙다는 건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어.’

레오니에는 그다음 꽃말을 떠올렸다.

조심하렴.

하필 또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꽃으로 그런 꽃말을 전했다.

‘역시 황제가 독이 바짝 올랐나 봐.’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모두가 지켜보는 연회 자리에서 제 자식보다 어린 꼬꼬마한테 크게 당한 것이 원통한 모양이었다. 아마 이 꽃이 전하는 경고는, 레오니에뿐만이 아니라 펠리오에게도 해당할 거다.

황실은 지금 보레오티한테 열이 바짝 오른 상태다. 그러니 조심하란 뜻이었다.

펠리오는 차마 건드리지 못해도, 어린 레오니에는 상대적으로 만만하니 무슨 해코지를 저지를지 모르니까.

‘흥.’

아이는 콧방귀를 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니에는 저의 생물학적 친부인 레무스 올로르가 북부에 잠입했던 이유에 황실이 연관되었을 거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금 당장은 모르는 척하지만, 펠리오는 모든 인내를 끌어모아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레오티에 싸움을 걸다니.’

여태껏 수많은 미친 짓을 목격했지만, 이번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이건 거의 목을 내놓고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꼴이었다.

레오니에는 일찌감치 그들의 영면을 기도했다.

‘꽃말 공부도 좀 해야겠어.’

그들에게 죽음을 뜻하는 꽃을 선물로 보내고 싶어졌다.

* * *

펠리오는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생일 파티를 끝냈다. 눈이 쌓인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멀리서 달려온 영지 귀족들을 배려한 결정이었다.

“레오니에 님, 다음에 또 뵈어요.”

“오늘 와 줘서 고마웠어!”

레오니에는 플로무스와 케라타 자작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배웅했다.

그들 가족이 탄 마차가 저택을 벗어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야 레오니에가 후우,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러고는 힘 빠진 걸음으로 파티가 열렸던 연회장에 다시 돌아갔다.

화려했던 내부는 초라하게 져버렸다. 사용인들이 장식을 치우기 시작했고, 샹들리에 불도 하나 빼고는 다 꺼져서 어둑어둑했다. 레오니에가 신나게 뜯었던 선물 포장지는 한데 모아 버릴 준비를 했다. 케이크랑 음식이 가득했던 테이블은 어느새 사라졌다.

“레오.”

그때, 펠리오가 아이를 발견했다. 이름이 불린 레오니에는 흐느적거리며 펠리오의 다리에 기댔다. 펠리오는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품에 안아 들었다.

“피곤해?”

펠리오가 아이를 살피며 물었다.

“그냥, 뭐…….”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피곤한 것보다는 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시끌벅적하게 놀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기분이 허전했다. 그만큼 생일 파티가 무척 즐겁고 행복했단 뜻이었다.

두 부녀는 정리되는 연회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복도를 말없이 걷던 둘은 북부 산맥이 저 멀리 보이는 어느 창 앞에 멈춰 섰다.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창틀에 조심히 앉혔다.

“……아빠.”

“응?”

“아빠는 나를 딸로 둬서 행복해?”

아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아빠가 내 아빠라서 아주 많이 행복한데.”

레오니에는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이어 말했다.

“사실, 오늘 너무 행복해서 몇 번이고 울고 싶었어.”

“너 울었잖아.”

“고아원 동지들은 예외야.”

레오니에가 반박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너무 행복했던 건 사실이었다.

입술을 몇 번 움찔거리던 레오니에는 이내 두 손을 깍지 끼듯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머뭇머뭇 고백했다.

“아빠를 만나서 다행이야.”

레오니에가 오늘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용기 내 꺼냈다.

“편지에 적은 것보다 몇백 배나 행복해.”

펠리오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열심히 말하는 딸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부끄러워 히죽거리는 아이의 미소가 무뚝뚝한 아빠의 얼굴마저 조금씩 녹여 갔다.

“……나는.”

그러다 펠리오도 무언가를 고백했다.

“이런 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바로 여태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다.

레오니에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게다가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펠리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잔뜩 기대했다.

하지만 곧 실망하고 말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슬펐다. 선대 공작 부부는 아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따뜻한 사랑 대신에 엄격한 태도와 힘든 공부, 훈련만 주었다. 동물을 사육하는 것보다도 못 했다.

“왜, 왜 그랬대?”

레오니에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다.”

그 시절을 덤덤히 떠올리는 펠리오조차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레오니에를 내 딸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걸 마음에 확실히 새긴 순간부터 사랑스럽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님은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대 공작 부부에게 어린 펠리오는 완벽한 차기 보레오티일 뿐이었다. 그것만이 선대 부부가 자신들의 아들에게 느꼈던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말도 안 돼!”

레오니에가 화를 냈다.

“아빠는 이렇게 멋진데?”

이렇게 잘난 아들에게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만약 자신이 그들 부부 중 한 사람이었다면,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어 펠리오를 아끼고 예뻐했을 거다.

“나였으면 허구한 날 아빠 궁디를 팡팡했을 거야!”

“그건 그것대로 싫은데…….”

펠리오가 한쪽 눈썹을 살짝 비틀었다. 하지만 곧 웃음이 터졌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외로움과 소외감이 녹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레지나한테는 잘해 줬지.”

그래서 펠리오는 그답지 않게 고자질을 했다.

“미쳤구먼, 아주 진짜.”

예상대로 아이는 제 일처럼 화를 냈다. 특히 선대 공작 부부가 펠리오는 빼고 레지나만 데리고 소풍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팔다리를 허공에 휘두르기까지 했다.

화를 내는 아이에겐 미안했지만, 펠리오는 무척 위로받았다.

“내 친모를 모욕할 생각은 없는데, 아빠가 레지나보다 훨씬 나아.”

레오니에가 팔짱을 끼며 씩씩거렸다.

친자식은 홀대하면서 데려온 조카딸은 그렇게 예뻐했다니. 선대 공작 부부의 멍청한 차별에 넌더리가 났다. 그들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

“저승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레오니에는 확신했다. 그렇게 예뻐했던 레지나가 친 사고에 뒷목을 잡았을 거고, 예쁜 저를 거둬 소중히 키우는 펠리오를 보며 대견하게 여길 거다.

하나 그럼 뭐하나. 이제 그 잘난 아들은 레오니에만의 가족이었다.

“나중에 아빠 생일 파티도 해.”

아이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거의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내가 아주 완벽하게 축하해 주겠어.”

“뭘 또 완벽하게 하려고.”

펠리오는 아이의 말이 기쁘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나 용돈 받은 거 많잖아!”

펠리오가 용돈이란 이름으로 레오니에 앞으로 돌려둔 자산이 제법 되었다. 거기다 손목시계 사업이 시작되면 엄청난 돈이 들어올 거다.

레오니에는 그것들로 세상에서 가장 큰 생일 파티를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고깔모자도 쓰고, 케이크 초도 불게 해 줄게!”

“그건 됐어.”

펠리오가 진심으로 거부했다. 이 나이에 유치한 고깔모자를 쓰고 케이크에 꽂힌 초까지 부는 건 선뜻 하기 어려웠다.

대신 다른 하나를 부탁했다.

“편지랑 그림이 좋았어.”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펠리오가 기분 좋은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레오니에는 그런 펠리오가 새까만 갈기가 수북한, 보레오티 가문의 문장에 새겨진 커다란 사자 같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그 탓에 그가 목을 울리며 기분 좋게 그릉그릉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다음에도 그 선물을 해 줘.”

“에이, 고작 편지?”

그런 건 매일매일 써 줄 수 있다며 레오니에가 활짝 웃었다.

“아빠한테 내가 그것도 못해 줄까!”

“그 정도로 충분해.”

“다음엔 아빠 나체 그림도 그려 줄게!”

“진짜 그것만 하라고.”

두 부녀의 시끌벅적한 대화의 끝은 평소와 똑같았다. 한마디도 안 지려고 말꼬리를 물고 물다가, 결국엔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레오니에 보레오티의 여덟 번째 생일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 * *

늦은 밤.

불이 켜진 집무실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아직 안 주무셨군요.”

안으로 들어온 인물은 두꺼운 겉옷을 단단히 여민 채였다. 얼굴을 반이나 가린 털모자를 벗자, 주름진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데아였다.

“내일 온다고 들었는데.”

펠리오가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꽂은 채 말했다. 그는 레오니에의 생일에 함께한다고 미뤄 둔 일을 뒤늦게 처리하고 있었다.

“조금 무리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런다고 나올 건 없다만.”

“이제 슬슬 다시 아가씨께 수업을 해드려야지요.”

그 말에 펠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 봐도 아르데아는 상당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펠리오는 고갯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노신사는 겉옷을 대충 벗은 뒤에 자리에 앉았다. 으으,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아르데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느라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수업은 일주일 뒤로 하지.”

지금 아르데아의 상태론 아이를 가르치다 쓰러질 게 뻔했다. 아르데아는 그 배려를 고맙게 받기로 했다.

“그래도 아가씨 생일이지 않습니까.”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아르데아가 미안하단 듯이 중얼거렸다.

“그대가 걱정하지 않아도 레오는 오늘 즐겁게 놀았어.”

펠리오가 별걱정을 다한다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레오니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내내 행복하다고 노래를 불렀다. 펠리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삭막한 침실엔 레오니에가 선물한 편지와 그림이 담긴 액자 두 개가 새롭게 들어왔다. 넓은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진 액자들은 지금도 아이의 훈훈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펠리오는 올겨울을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 펠리오를 바라보던 아르데아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님이 저렇게 웃다니…….’

피곤해서 헛것을 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리고 정말 헛것인 것처럼, 펠리오는 평소처럼 무감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놀란 감정을 빠르게 추스른 아르데아가 외투에서 조심조심 무언가를 꺼냈다.

“우선 레지나 아가씨의 일에 대해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아르데아는 품에서 꺼낸 편지 다발을 내밀며 그리 말했다.

“그대도 고생이 많았지.”

펠리오가 편지들을 받으며 말했다.

아르데아는 고아원 뒷산에 묻힌 레지나의 시신을 찾아내고 감별해 냈다. 뼈의 크기 등으로 성별이 여자임을 감별했고, 흙더미 속에 섞인 검은 머리칼을 찾아냈다.

함께 있었던 기사들은 우르마리티 백작과 함께 북부로 올라갔지만, 아르데아는 그곳에 홀로 남았다.

“저택 안에 비밀 금고가 있었습니다.”

아르데아는 그 고아원이 속한 영지를 다스렸던 서부 귀족의 저택을 조사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 귀족이 올로르 가문과 내통한 증거를 찾아왔다. 조금 전 펠리오에게 건넸던 편지 뭉치가 그 증거였다.

“…….”

조용히 편지 뭉치를 바라보던 펠리오가 서랍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편지들을 꺼냈다. 바로 학술원에 있는 아르데아의 연구실에서 몰래 가져온 편지들이었는데, 아르데아를 향한 모종의 회유와 협박이 적혀 있었다.

“똑같군.”

펠리오가 편지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건지, 둘 다 똑같은 편지 봉투와 촛농 인장을 쓰고 있었다. 펠리오는 필체도 똑같을 거라고 거의 자신했다.

죽은 서부 귀족은 편지들이 도착한 날을 꼼꼼히 기록해 뒀다. 편지들을 태우지 않고 보관해 둔 것 역시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걸 막기 위해 쥐고 있던 저들의 약점이었다. 저택에서 가져왔다는 편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20년도 전의 것이었다.

덕분에 펠리오는 확신했다.

“선황이군.”

이 모든 건 선황이 살아 있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제야 이상하다 느꼈던 점들이 조금씩 명쾌해졌다.

당시 황태자였던 수비테오가 황태자비를 두고도 올로르 가문의 딸을 끼고 다니는데도 별말이 없었다는 것이. 심지어 그때 올로르는 작위조차 없었다.

서부 귀족이 20년도 전부터 올로르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버리는 패인가?’

올로르는 선황이 심사숙고해 고른 ‘버리는 패’일지도 모른다. 황실 대신 더러운 일을 도맡게 하며, 만일 일이 틀어지더라도 바로 연을 끊고 돌아서도 될 만큼 하찮은 수족들.

“죽은 영감이 재밌는 짓을 벌였군.”

펠리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과연 머저리들이 즐비하던 새 둥지에서 홀로 날아다니던 맹금류다웠다.

펠리오는 선황을 나름 존경했기에, 지금 이 상황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단 사실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확실히 이런 일들이 현 황제의 머리에서 나올 계획은 아니었다.

선대 공작과 나름 잘 지낸 줄 알았더니, 적을 염탐하기 위한 연기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쩌면 선대 공작인 부친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진 펠리오의 손가락이 까딱, 움직였다.

‘……뭘 얼마나 아는 거지?’

검은 눈동자에 다시금 의문스러운 안개가 꼈다. 펠리오는 수도에서 산 아르데아의 논문을 전부 다 읽었다. 아르데아는 인류의 기원이 북부라고 주장했으며, 증거로 제국 전역에 있는 고대 유적지를 제시했다. 유적지마다 남아 있는 어떤 특정한 무늬와 기호들이 북부의 어느 지역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함께 했다.

‘정황만 보면…….’

선황이 노리는 건 아르데아가 저술한 논문 속 북부의 ‘어느 지역’이었다.

북부 산맥.

딱딱,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아르데아가 관련 연구를 오래 해 왔다지만, 논문은 나온 지 1년이 채 안 됐다.

선황이 이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북부 산맥을 노린다는 건 확실했다. 당시 황실 기사였던 레무스 올로르가 북부에 잠입한 것도 이 때문일 테고. 아르데아에게 보낸 편지와 연구실 습격도 연구 상세 자료를 얻기 위한 취지인 게 뻔했다.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돌아가는 상황이 귀찮았다.

“……그런데.”

펠리오는 복잡한 생각을 잠시 뒤로 치워 뒀다.

“그대는 어떻게 그 습격에서 무탈했던 거지?”

아르데아의 연구실은 정말 무자비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용케 도망쳐 북부로 올라온 아르데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사람을 죽일 각오로 습격한 꼴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제자가 도와줬습니다.”

아르데아가 기묘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스승님! 절대 안 돼요!’

필사적이던 제자의 이유 모를 고집에 아르데아는 영문을 몰랐지만, 결국엔 그 고집을 못 이겨 연구실에 며칠 들어가지 않았었다.

그런 중에 습격이 있었다. 심지어 그가 북부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그 제자 덕이었다.

반면 펠리오는 그 제자란 사람을 미심쩍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제자가 누구지?”

펠리오가 물었다.

“바리아입니다.”

펠리오가 손가락을 움찔했다.

“……올로르 자작 영식과 약혼하다는 백작 영애의 언니?”

“아십니까?”

아르데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은 기억하고 있어.”

펠리오가 무심히 대답했다.

“거기도 주시해야겠군.”

“제자를 파는 것 같아 슬픕니다.”

아르데아가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리아 덕에 자신은 무사했는데, 반대로 바리아는 저 때문에 펠리오의 사냥감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내가 당장 죽이는 것도 아니고.”

펠리오가 혀를 가볍게 찼다.

어쨌건 바리아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일단 지켜보지.”

바리아 에르바누.

펠리오가 그 이름을 느릿느릿 불렀다.

“……언젠간 만날 것 같군.”

검은 맹수가 입꼬리를 느슨히 올렸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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