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결단의 조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후.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다시 보레오티 저택으로 모였다. 레오니에 빼고.
“왜!”
혼자 참석하지 못한 레오니에가 불만을 표출했다.
“아빠가 나도 당사자라고 그랬잖아!”
지금껏 잔뜩 들려주고는, 이렇게 갑자기 빼버리는 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펠리오도 강경했다.
“나중에 다 말해 줄게.”
지금부터 어른들이 꺼낼 이야기는 아이가 듣기엔 무척 자극적이고 부적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또 우는 것을 보기 싫었다.
“……알았어.”
레오니에는 결국 순순히 물러섰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펠리오를 도저히 꺾을 엄두가 안 났다. 대신 멜레스가 레오니에의 곁에 함께 있기로 했다. 카라도 저택을 돌보기 위해 참석하지 않았다. 능숙한 집사는 자신이 끼고 빠질 자리를 눈치껏 판단했다.
덕분에 한결 마음을 놓은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거실에서 책을 읽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에야 응접실로 돌아왔다.
“얻어낸 건 있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펠리오가 우르마리티 백작에게 물었다.
“공작님께서 준비해 주신 선물 덕에 입은 열었지만, 성과 있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죄송하다며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펠리오가 준비해 줬다는 선물은 사우라의 목이었다.
레지나의 유해가 북부로 돌아오기 직전, 펠리오는 결국 사우라의 숨통을 직접 끊었다. 그가 사우라의 옷 안에 검은 다이아를 숨겨 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혹시라도 레오니에가 실수로 송곳니를 폭주해 죽이지 않도록.
제 손으로 죽이기 위해.
그리고 그 목을 손수 도려내 백작에게 넘겼다. 백작이 레지나의 유골과 함께 데려온 서부 귀족의 입을 열기 위해선,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이는 잘 먹혔다.
서부 귀족은 바들바들 떨면서 자신이 아는 건 전부 말했다.
‘나, 나는 시키는 대로만 했어!’
하지만 그 대부분은 사우라가 자백제를 통해 털어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귀족은 별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우르마리티 백작의 커다란 손에 목이 한 바퀴 돌려진 채로 죽었다.
“다만 그 귀족 역시 레지나의 존재 자체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펠리오는 사우라가 약에 취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쓰레기가 널 임신한 것도 내가 속였고, 네가 태어난 것도 속였어!’
악에 받친 사우라의 목소리가 다시 떠오르자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역시 숨통을 너무 일찍 끊었나, 싶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우라가 외쳤던 ‘속였다’라는 말이었다.
“리코스 자작.”
펠리오가 루페에게 물었다.
“연회 이후, 올로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던가?”
“없었습니다.”
루페가 말했다.
“연회 당시에도 아가씨에게 시선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다른 귀족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문의 공작 영애에게 호기심을 비춘 거지, 레오니에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단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단 뜻이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는 손목시계 사업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자신들도 투자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미친놈들.”
펠리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욕을 읊조렸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레오니에가 자신의 딸인 걸 모르고 있었다. 사우라의 애증 어린 배신이 뜻밖의 도움이 되었다.
거기다 펠리오를 소스라치게 빼닮은 레오니에의 외모도 한몫했다. 이건 아주 중요하고 다행스러운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쪽에서 당장 아이의 친권을 주장하는 뻔뻔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다.
“선조들 볼 낯이 없군.”
펠리오는 기가 막혔다. 감히 그딴 잡것들이 보레오티를 우습게 보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는 다 가문의 수장인 저의 잘못이라며 드물게 한탄했다.
펠리오의 자조에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올로르 가문이 북부에 저지른 짓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짜증을 가까스로 억누른 펠리오에게, 모노가 근본적인 물음을 꺼냈다.
“그자는, 올로르 영식은 왜 북부에 잠입했을까요?”
“당시 보레오티를 비롯해 타 영지에서 기록된 사건이나 보고 중에선 특별히 이상한 점이 없었습니다.”
루페 역시 모노의 의견에 동의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올로르와 연이 있던 메레오카와 글리스, 타바누스 가문을 중심으로 찾아봤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다만.”
파르두스 후작이 루페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전달했다.
“올로르 영식이 당시 황실 기사단 소속이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실도 개입했다?”
“물증은 없습니다만, 의심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혹시 그때부터 마물을 잡아들일 계획을 세웠던 거라면, 그건 효율 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내통했던 북부 세 가문에서 자체적으로 정보를 조금씩 빼돌려 계획을 저질렀다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단 증거도 나왔다.
‘황실의 개입이라…….’
톡톡톡, 펠리오의 손가락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일개 기사가 함부로 움직일 순 없어.’
올로르 자작이 과연 명예로운 기사직에 자긍심을 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황실 기사단 소속이 제 주군인 황제의 명 없이 지역을 벗어나 이동할 수는 없다.
‘누구일까.’
당시 황태자였던 현 황제일까.
아니면 지금은 죽은 선황일까.
올로르 영식이 북부에 잠입했던 시기엔 아직 선황이 건재했다. 이제 현 황제만이 아니라 죽은 선황도 의심해야 했다.
전부 다 짜증 나고 불쾌한 것들이었다. 펠리오는 차라리 역성혁명을 해 버리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머리 아픈 고민 따윈 피의 숙청으로 깨끗하게 지워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오가 싫댔지.’
아이가 황족이 되는 걸 싫어하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펠리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뭉쳐진 손수건이었다. 살짝 벌어진 손수건 틈으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펠리오가 살짝 손을 기울이자, 그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레지나의 유해와 함께 발견된 거다.”
바로 사우라에게 보여 줬던 목걸이였다. 손수건 사이로 흘러나온 가느다란 실 목걸이엔 백조 장식이 달려 있었다.
“올로르 가문의 목걸이지.”
펠리오는 쓰레기를 버리듯 테이블 위에 손수건 채 목걸이를 던졌다.
“유골을 찾으면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죽기 전에 삼킨 것 같군.”
레지나가 도대체 어떻게 사우라에게 살해당한 건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하나 분명한 건, 레지나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를 이 꼴로 만든 남자에게 복수하고자 단서를 남겼을 거고.
이 목걸이는 올로르 가문을 옥죌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백작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레지나의 사망 원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양해를 부탁한다며, 펠리오가 우르마리티 백작을 보며 말했다.
“동감입니다.”
백작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 된 자로서 슬픈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북부에 침입한 붉은 백조 새끼가 더욱 시급합니다.”
“그놈을 족치면 레지나를 어떻게 죽였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테지.”
그 말을 끝으로, 피부를 아리게 할 만큼 심각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주변을 감돌았다. 펠리오는 상당히 피곤하단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무심했던 걸 인정하지.”
피곤하단 듯이 미간과 콧대 사이를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느리게 말했다.
“그 탓에 북부가 이딴 취급을 당했군.”
펠리오가 묵직한 한숨을 길게, 그리고 살벌하게 토했다. 북부와 보레오티에 대해 무어라 떠들건 귀찮다는 이유로 관심도 끊고 내팽개쳤더니 기어코 이 사달이 났다.
“손수 가르쳐 줘야지.”
드디어 잠자코 누워 있던 검은 맹수가 제국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려 했다. 마치 전쟁 선포처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선언이었다. 그를 따르는 북부의 짐승들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주 길고, 느린 사냥이 될 터.”
고작 단숨에 붉은 백조를 치기엔, 검은 맹수는 아주 깊은 분노를 지니었다.
펠리오는 이 제국에서 감히 건드려선 안 될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가르쳐 줄 심상이었다.
* * *
코니는 요즘 걱정이었다. 늘 씩씩하고 야무지던 레오니에가 너무 기운이 없어서였다.
“어쩌면 좋을까.”
“그러게.”
미아도 함께 고민했다.
사실, 둘 다 알고 있었다.
어린 아가씨가 평소보다 축 처진 건 바로 믿었던 코니에의 배신 때문이란 걸. 그리고 그 탓에 꺼냈던 맹수의 송곳니가 저택 사람들을 아프게 한 것도 한몫했다.
때문에 저택 내에선 코니에를 비롯해 그와 관련된 언급은 전부 금기시되었다.
“고아원 선생님들 엄청 혼났다던데.”
코니가 자리에 누웠을 때 들은 이야기를 조심히 꺼냈다. 북부 고아원 선생님들은 입을 함부로 놀린 탓에 이 사달이 났다며, 펠리오에게 아주 크게 혼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를 소중히 여기는 펠리오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설마 죽이신 건 아니겠지?”
“주인님이라면 하고도 남지.”
두 하녀가 살벌한 가능성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곤 굳게 닫힌 부엌문을 바라봤다.
지금 저 안에서 레오니에가 아팠던 사용인들을 위해 쿠키를 홀로 굽는 중이었다. 혼자서 하는 건 위험하니 자신들도 돕겠다고 나섰지만, 한사코 거절해서 결국 문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신 호위 기사인 마누스가 함께였다.
“그 커다란 기사분?”
미아가 보레오티 저택에서 가장 작은 아가씨와 가장 큰 기사님 둘이서 단란하게 쿠키를 굽는 모습을 떠올렸다.
“……좋은데?”
마음이 포근해지는 장면이었다.
“네가 드디어 아가씨께 취향이 옮았구나.”
코니가 주인님 앞에서 그런 말 절대 하지 말라고 입조심을 시켰다. 펠리오가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레오니에의 부패한 취향이었다.
“훈훈하고 좋네!”
미아가 즉각 반박했다.
“내가 상상한 건 커다란 곰이랑 조그마한 다람쥐 같은 모습이었다고!”
너야말로 뭘 상상한 거냐며 미아가 따졌다.
“코니 네가 더 옮았잖아.”
“아, 아니거든!”
두 하녀가 서로 부패했다며 티격태격하던 참이었다.
“코니, 미아.”
하녀장 펠리카가 두 사람을 발견하곤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주인님께서 너희를 부르셨다.”
코니와 미아가 깜짝 놀랐다.
“주인님께서요?”
“하지만 지금 아가씨께서…….”
미아가 굳게 닫힌 부엌문을 힐끔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마침 문 아래 틈으로 잘 구운 쿠키 냄새가 솔솔 풍겼다.
“내가 있을 테니 어서 가 보렴.”
펠리카가 머뭇거리는 두 하녀의 등을 떠밀었다. 코니와 미아는 차마 싫은 내색도 못하고 어기적어기적 집무실로 향했다.
“우리 그냥 뛰어내릴래?”
미아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밖을 가리켰다. 코니는 순간 혹했지만, 죽상인 미아를 끌고 겨우겨우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눈밭에 떨어지는 것보다, 펠리오의 명을 어기는 게 더 무서웠다.
“주, 주인님.”
똑똑, 문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도착을 알렸다. 곧 문 너머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렸다. 코니와 미아는 들어가기 전에 두 손 꼭 쥐며 기도했다. 제발 두 발로 멀쩡히 살아 나올 수 있기를 기도했다.
“편하게 앉도록.”
펠리오가 안으로 들어온 두 하녀를 보며 한쪽 소파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먼저 온 카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코니와 미아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후다닥 카라 옆에 달라붙었다.
“집사님……!”
“히잉…….”
“괜찮아, 안 죽어.”
카라는 겁에 질린 하녀들의 손을 다독이며 괜찮다고 달랬다.
집무실에는 카라만 먼저 온 게 아니었다. 루페와 모노가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보레오티 저택의 중심인물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일개 사용인일 뿐인 코니와 미아는 도저히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부른 사람들이 전부 모인 걸 확인한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책상 앞에 나아가 몸을 가볍게 기대섰다.
“레오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펠리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요 며칠 동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펠리오가 중대한 사실을 발표했다.
“내 허벅지를 더듬지 않았다.”
“……예?”
루페가 멍청한 소리로 되물었다. 순간 자신이 뭔가를 헛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걱정이 드리워진 펠리오의 얼굴을 보니 전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빌어먹을 것들!”
그때였다.
모노가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쾅 쳤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루페의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단단한 모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상심하셨으면 주군의 허벅지를 만지지 않는단 말입니까!”
글라디고 기사단의 부단장이 이를 바드득 갈며 분노했다.
“심지어 훈련장에 몰래 숨어들지도 않으셨습니다. 평소라면 기사들 훈련하는 모습을 훔쳐보려고 하루에 두 번 정도는 잠입하셨는데!”
“말도 안 돼!”
“우리 아가씨 어떡해……!”
코니와 미아가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며 슬퍼했다.
“그, 그러고 보니…….”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던 미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펠리오가 무섭다고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치자고 했던 조금 전과 상반되는 용감한 행동이었다.
“아가씨께서 근육 명칭을 입에 담지 않으셨어요.”
코니도 맞장구를 쳤다.
“척추 기립근의 중요성을 알려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러고는 약속하며 걸었던 새끼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친 코니가 눈물을 흘렸다. 괜히 레오니에를 더 곤란하게 만들까 걱정을 숨기고 있었는데,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우리 아가씨, 마음은 여리신 분인데!”
코니가 미아의 어깨에 기대며 꺼이꺼이 울었다. 미아도 훌쩍이며 코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 역시.”
카라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유능한 집사가 안경을 벗는 순간은, 오로지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칠 때뿐이었다. 카라 역시 레오니에의 이상 행동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질색하시던 인형 놀이를 하시고, 애독서 두 권 대신 동화책을 찾아 읽으세요.”
모두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같이 말을 아끼며 레오니에를 걱정했다.
‘……뭐지?’
그 속에서 루페 혼자 당혹스러워했다. 지금 여기서 홀로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이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내가 이상한 거야?’
하지만 루페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다. 보통 아이들은 근육을 밝히지 않고, 기사들을 훔쳐보지도 않고, 아빠 허벅지를 만지지도 않는다.
레오니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부패한 취향을 지녔다. 오히려 지금이 정상이건만, 다들 이 상황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너희가 이상한 거라고 말했다간 눈 속에 생매장당하기 딱 좋았다.
“곧 있으면 레오 생일이다.”
펠리오가 말했다. 보레오티 저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사가 이제 나흘도 채 안 남았다.
“고작 그깟 일로 아이의 생일을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보내게 할 수는 없지.”
검은 맹수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페는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역성혁명을 앞두고 작전을 점검하는 반란군이라 착각할 거라고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어떻게든 레오의 기분을 풀어 줘야 한다.”
레오니에가 보레오티에서 맞이하는 첫 생일이었다. 펠리오는 그날 레오니에가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랐다. 생일날만이 아니라, 매일 행복했으면 했다.
“코니, 미아.”
펠리오가 두 하녀를 불렀다.
“그대들은 평소 레오와 자주 지내니, 무얼 하면 아이가 기뻐할지 좋은 의견을 낼 것 같아서 불렀다.”
두 하녀는 그제야 자신들이 이곳에 불린 이유를 알았다. 자세를 바로 고친 둘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코니였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걸 보여드리면 어떨까요?”
바로 근육이었다.
“다행히 아가씨께선 생각이 깊고 용감하세요.”
“마, 맞아요. 지금도 혼자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 중이세요.”
사용인들에게 쿠키를 건네며 사과하는 행동이야말로, 레오니에가 다시 기운을 내려고 노력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상으로 근육과 관련된 걸 아가씨께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리가 있군.”
펠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가 전혀 없는데.’
루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케레스 경.”
펠리오가 모노를 불렀다.
“내일.”
기사단 전원을 집합시켜라.
* * *
레오니에는 마누스와 함께 쿠키를 손수 정성껏 포장했다.
“도와드릴까요?”
“내가 다 할 거예요.”
처음엔 혼자서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결국엔 속도가 느려져 마누스의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 솜씨도 마누스가 훨씬 좋았다. 굵다란 손가락이 야무지게 쿠키들을 종이 포장지에 담아, 앙증맞은 리본을 맺었다.
‘가정적인 떡대수…….’
레오니에는 그런 마누스를 썩은 동심으로 바라봤다.
과자를 다 포장한 뒤엔 저택을 돌아다니며 사용인들에게 과자를 선물하고 사과했다.
“몸 괜찮아? 정말 미안해.”
사용인들은 풀이 죽은 아기 맹수를 하나 같이 안타깝게 여겼다.
“아가씨, 저희는 괜찮아요.”
“이거 보세요! 멀쩡하잖아요.”
그래서 괜히 목에 힘을 주며 말했고, 다친 곳이 없다는 걸 보여 주려고 애먼 팔뚝을 걷어 살을 드러냈다. 과장 섞인 그들의 배려에 레오니에의 마음도 조금씩 치유되었다.
특히 펠리오가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펠리오는 그날 이후 레오니에를 제 침실에 데려와 함께 잠을 청했다.
‘아빠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
아이가 잠들 때까지 토닥토닥 두드려 줬고,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찾아와 얼굴을 꼭 보고 갔다. 아빠 맹수의 더없는 보살핌으로 아기 맹수는 기운을 되찾았다.
‘정말 조심해야지.’
레오니에는 또 한 번 실감했다. 맹수의 송곳니는 마냥 강하고 멋진 것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소중한 사람을 해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힘이었다. 어서 빨리 이 힘을 제대로 다루고 싶었다. 소중한 보레오티 식구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에게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당차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열심히 훈련할 거야.”
레오니에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꼭 껴안았다. 쿠키가 수북하게 쌓였던 안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그와 반대로 레오니에의 가슴 속엔 용기가 가득 차올랐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마누스가 각오를 다지는 어린 아가씨를 대견함을 담아 바라봤다. 이번 일로 한층 성장한 것 같아 기쁘면서도 조금 안타까웠다. 이왕 성장할 거, 그런 나쁜 일이 계기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마누스 역시 레오니에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기사단 언니 오빠들한테도 쿠키 줄게요.”
레오니에가 조금만 기다리라며 마누스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저 혼자 쿠키를 다 구워서 준비하고 싶었다. 마누스는 싱긋 웃으며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근데 아빠한테는 뭐 주지?”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는 보다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주군께선 아가씨가 건강하고 씩씩하시다면 그거로 충분하실 겁니다.”
마누스가 말했다. 펠리오가 가장 바라는 건 레오니에의 행복이었다.
“그래도 멋진 선물을 해 주고 싶어요.”
“볼에 뽀뽀만 해 주셔도 천장에 머리를 박으실 만큼 폴짝 뛰실 겁니다.”
“우리 아빠가……?”
얼핏 상상한 레오니에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우리 아빠는 그런 짓 안 해!”
레오니에가 씩씩거렸다.
“북부의 얼음 대공은 뛰지 않아요!”
“주군도 뛰는데요?”
마누스가 조용히 반박했다. 그전에 ‘북부의 얼음 대공’은 도대체 뉘신지 궁금했다.
“우리 아빠가 얼음 대공이잖아요.”
“주군은 공작님이신데요.”
“그쪽 부류에 속하니까 괜찮아요.”
“아가씨 혹시 졸리세요?”
마누스는 슬슬 레오니에가 낮잠을 잘 시간임을 눈치챘다. 쿠키를 그렇게 굽고 직접 발품 팔아 나눠 줬으니 피곤할 만했다. 그래서 저런 헛소리를 하는 걸 테고.
“나 안 졸린데…….”
하지만 레오니에는 선 채로 휘청거렸다. 마누스가 아이를 안고 방으로 데려갔다.
“우리 아빠는 다정하고, 절륜하고 존댓말 쓰는 강공…….”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레오니에가 침대에 누웠다.
‘기운을 차리셨구나.’
주군께 절륜하다고 말씀하시다니.
마누스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레오니에는 비장한 표정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코니, 어떤 움직임에도 흘러내리지 않게 묶어 줘!”
“맡겨 주세요!”
덩달아 비장해진 코니가 최선을 다해 빗질했다.
“미아, 아주 튼튼한 훈련복을 준비해 줘!”
“준비해 둘게요!”
미아 역시 최선을 다해 골랐다.
“최근 동부에서 유행한다는 머리로 묶어 드릴게요.”
코니가 오늘 묶을 머리를 소개했다. 까만 머리를 양 갈래로 나눠 동글동글 말더니, 그 위에 새하얀 천을 덮었다. 마무리로 끈으로 천을 꽁꽁 싸맸다.
“최근 동부에서 유행한다는 동글동글 머리에요!”
“동글동글!”
“이국에서 몸 쓰는 분들이 이렇게 머리를 묶으신대요!”
“그건 한번 보고 싶다!”
이윽고 레오니에는 미아의 도움을 받아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이것도 동부에서 유행하는 훈련복이에요!”
“훈련복!”
“동부 너머 시나국에서 입는 ‘도복’이래요!”
“도복!”
머리도 묶고, 옷도 갈아입은 레오니에가 제자리를 빙그르르 돌았다.
“준비 완료!”
그리곤 가슴을 활짝 펼쳤다.
“난 오늘부터 새로운 레오니에 보레오티가 될 거야!”
코니와 미아가 환호했다.
“어떤 새로운 보레오티가 되실 건가요?”
“강하고 근사한 근육 뿜뿜!”
“우리 아가씨라면 당연히 할 수 있답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멜레스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세 사람을 지켜봤다.
‘……목 안 아프나?’
저 셋이 사이가 좋은 거야 잘 알고 있지만, 굳이 저렇게까지 크게 외칠 대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켜보는 저도 괜히 목이 아플 정도였다. 듣는 귀가 아픈 건 당연했고.
아니나 다를까.
“콜록! 케에엑!”
대차게 외치던 레오니에가 사레가 들려 한참을 콜록거렸다. 기어코 물 한 잔 들이켜고 화장실까지 다녀온 후에야, 레오니에는 훈련장으로 갔다.
“나 훈련 열심히 할 거예요!”
아기 맹수는 용맹한 걸음걸이를 선보이며 포부를 밝혔다. 멜레스는 그 모습이 꼭 호두 깎는 병정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레오니에의 품에는 기사단들에게 줄 쿠키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멜레스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에요.”
마음은 고마우나 정중히 사양하겠다며, 레오니에가 겸손을 부렸다. 멜레스는 점잖은 척하는 어린 아가씨가 퍽 웃겼다.
“나는 오늘부터 새로운 보레오티가 될 거예요.”
“아까도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보레오티가 되실 건가요?”
‘역시 근육질이 되고 싶으신 건가.’
멜레스는 근육으로 똘똘 뭉친 레오니에의 몸을 떠올려 봤다. 떠올리는 건 간단했다. 펠리오의 몸에 레오니에의 얼굴을 붙이기만 하면 완벽했다. 두 부녀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았으니까.
“……풉!”
멜레스가 터지려는 웃음을 꾸욱 참았다. 솔직히 안 어울렸다. 그리고 너무 웃겼다.
“강한 사람이 될 거예요.”
그때, 레오니에가 말했다. 바구니를 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엄청 강해져서, 그 누구도 북부와 보레오티를 우습게 보지 않도록 만들 거예요.”
멜레스가 움찔했다. 레오니에의 비장한 각오는 조금 전에 얼핏 들은 큼지막한 외침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왔다.
“보레오티 공작이 될 거예요.”
아이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앞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빠만큼 강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내가 사랑하는 이곳을 지키겠어요.”
언제나 후계 따윈 귀찮다고, 그런 건 정실부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에게 물려주라고 코 후비며 말했다. 레오니에는 책임을 지기 싫었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기도 귀찮았다. 지금까지는 펠리오의 체면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해 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굳건해져야 해요.”
레오니에가 자신의 작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항상, 언제나. 아이는 자신의 몸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보레오티가 된 이후로도 몇 번이고 어른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꿈을 꾸고 했다.
‘이제 필요 없어.’
토실토실한 손이 주먹을 쥐었다.
‘내 세상은 여기야.’
레오니에는 드디어 이 작은 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여전히 걷는 속도가 느리고, 두 팔로 겨우 쿠키가 든 바구니를 들 정도로 나약한 몸이었다. 그래도 레오니에는 이 몸으로 보레오티가 되어야 했다.
‘이 몸에 흐르는…….’
레오니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몸에 비록 올로르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오히려 그 피가 흐르기에 더욱 레오니에는 완벽한 보레오티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 아빠한테 폐가 안 될 테니.
“…….”
멜레스는 그런 레오니에를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셨어.’
어린아이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장함이었다. 평소보다 굳은 어깨 위에 올려진 잔인한 현실이 아이를 단숨에 어른으로 만들었다.
멜레스는 그런 레오니에에게 괜찮다고 위로조차 하지 못했다. 만일 자신이 그 입장이었어도, 저렇게 발버둥 치며 최대한 이겨내려고 노력했을 거다. 거기다 레오니에는 저래 봬도 의젓한 성격이었다. 싫다고 투정을 부릴지언정, 단 한 번도 도망친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부담이 갈 거다.
‘그래서 주군이…….’
멜레스가 곧 도착할 훈련장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펠리오는 아이를 위해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
선물이라기엔 문제가 많았지만, 어쨌건 레오니에의 취향에는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진지한 레오니에한테, 과연 그 선물이 효과가 있을지 걱정이었다.
‘역효과가 나면 어쩌지?’
멜레스는 진심으로 걱정이었다.
다행히 걱정은 걱정으로 끝났다.
레오니에는 훈련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환호 섞인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레오니에는 연무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기사들에게 나눠 주겠다던 쿠키가 든 바구니는 멜레스에게 거의 던지다시피 넘겨줬다.
“꺄아아! 아아아!”
씩씩하다 못해 호들갑스러운 환호성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철퍼덕 바닥에 넘어졌는데, 아이는 넘어지는 몸을 그대로 앞구르기로 전환해서 두 다리의 추진력으로 삼았다.
“…….”
바구니를 넘겨받은 멜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미래의 주군을 바라봤다.
‘신기루를 본 건가…….’
멜레스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았던, 진지하게 각오를 다지던 아기 맹수는 전부 찰나의 아지랑이였나 싶었다. 여름이 아닌데도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다음 대 보레오티 공작께선 역대 최강의 추문을 뿌리고 다니실 거란 확신도 들었다.
‘역시 주군.’
멜레스가 새삼 감탄했다. 검은 맹수는 어떻게 해야 아기 맹수가 기운이 날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 진정한 아버지였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뭐야!”
연무장 바로 아래까지 힘껏 달려온 레오니에가 거친 숨을 골랐다. 달리느라 거칠어진 숨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리사욕이 섞여 있었다.
“이얍!”
연무장으로 오르는 계단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레오니에는 그냥 바로 폴짝 뛰어올랐다. 기합도 어느 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감기 걸리잖아요!”
걱정하는 말투와 달리 동그란 까만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흉측하게 다들 뭘 입고 있는 거예요!”
파르르 떨리는 아이의 손이 기사들이 입고 있는 훈련복을 가리켰다.
“왜 다들 웃통을 깠어!”
“안 깠어.”
듣다 못한 펠리오가 진정하라며 아이의 몸을 냅다 들어 서너 번 부웅부웅 흔들었다.
“으어어어!”
괴상한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다 온 레오니에는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 이게 다 뭐야?”
레오니에가 감동 어린 시선으로 다시금 기사들을 바라봤다. 기사들은 평소 튜닉처럼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훈련했다. 글라디고 기사단은 딱히 규정된 훈련복은 없지만 대체로 그런 차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전부 다 똑같은 차림새였다. 아주 얇으면서 몸에 착 달라붙는 소재로 만들어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였다. 거기다 소매도 없었다.
“아, 아빠도 입었어?”
심지어 펠리오도 똑같은 차림이었다. 넓은 흉근 덕에 팽팽하게 늘어난 옷은 그의 단단한 근육들을 고스란히 보여 줬다. 특히 레오니에의 눈을 사로잡은 건 흉근 아래 복직근이었다.
“열 개잖아!”
펠리오가 숨을 한 번 가볍게 들이켜니 허리춤 근처 장골을 덮은 복직근이 나타났다. 덕분에 옷 위로 열 개의 선명한 복근 굴곡이 도드라졌다.
레오니에를 훈련장까지 데려다준 멜레스도 어느새 같은 옷으로 갈아입고 연무장 위에 섰다.
“기운 좀 났어?”
몸을 낮춘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조그만 코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물었다.
“네, 아버님!”
레오니에의 까만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설마 날 위해서……?”
감격한 아이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기어코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 사랑해!”
그리곤 그대로 펠리오에게 안겼다.
“내 새끼. 우리 변태.”
펠리오가 품에 안긴 딸아이를 토닥였다.
“나 이제 훈련 여, 열심히 할게!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다 잘할게!”
레오니에가 훌쩍이며 약속했다.
“나 엄청 멋진 보레오티가 될 거야!”
“레오 넌 이미 멋진 보레오티야.”
“더 멋지고 강한 맹수가 될게!”
레오니에가 코를 훌쩍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빠보다 훨씬 멋진 보레오티가 될 거야!”
우렁찬 외침이 훈련장 가득 울렸다. 곧 기사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아가씨는 할 수 있다고, 우리 함께 해내자며 힘찬 응원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게 결국 먹힌 거야?”
함께 박수 치던 파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 새 훈련복을 받고 계획을 들었을 땐 설마설마했는데, 이 어이없는 계획이 정말로 통할 줄이야. 아무래도 어린 아가씨의 변태력은 자신들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듯했다.
“그런데 이거 직장 내 성희롱 아냐?”
옆에 있던 프로보가 새 훈련복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몸에 착 달라붙어 신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상의를 벗는 것보다 훨씬 헐벗은 기분이었다.
“아가씨 기운 나게 해 주려고 이딴 걸 입는 발상은 누가 떠올린 거야?”
“주군이 명하셨잖아.”
불만 있으면 직접 가서 따지라고 파보가 말했다.
“아니, 어쩐지 명안이더라고.”
프로보가 서둘러 태세를 전환했다. 파보는 그런 제 동료를 한심하단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자신도 저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그 역시 새로 입은 옷이 영 피부에 익지 않았다.
“그런데 난 좀…….”
그때, 마누스가 홀로 용감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글라디고 기사단 내에서 가장 큰 체격을 가진 기사답게, 새로 제공된 훈련복이 팽팽하게 늘어나다 못해 찢어질 판이었다.
“아가씨 훈련할 때만 잠깐 입는 거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파보와 프로보가 마누스를 말렸다. 하지만 그라면 충분히 불편을 토로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누스는 참지 않고 불만을 토로했다.
“내 피부색이랑 안 어울리잖아.”
얼굴이 너무 칙칙해 보인다며 굵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아, 그쪽?”
“그, 뭐다냐…….”
파보와 프로보가 말을 잃었다. 둘은 칙칙한 훈련복 색상에 대해 투덜거리는 글라디고 최장신 근육질을 멍하니 바라봤다.
“자, 잘 어울려!”
“그래! 너한테 딱이야!”
뒤늦게 정신 차린 둘은 서둘러 마누스를 위로했다. 그래도 이 커다란 친구는 제 몸을 옥죄는 기묘한 훈련복에 큰 불만이 없는 듯했다. 참 다행이었다.
비단 이는 마누스만이 아니었다. 의외로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은근 편하지 않아?”
“그러니까.”
“생각보다 괜찮아.”
새 훈련복은 큰 호평을 받았다. 평소 입던 튜닉은 편하긴 해도 이따금 헐렁한 품 때문에 검을 휘두르거나 몸을 움직일 때 어려운 점이 많았다. 반면 이번에 새로 내놓은 훈련복은 몸에 착 달라붙어도 쭉쭉 늘어나는 소재라 움직임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
“주군.”
모노가 펠리오 옆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도 새 훈련복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변태, 아니, 새 훈련복 반응이 좋습니다.”
“그대, 지금 변태라고 했나?”
펠리오가 제 다리에 착 달라붙은 레오니에를 살피며 말했다. 가늘어진 눈초리는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번데기가 변태를 해서 나비가 된 것처럼 근사하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모노가 솜씨 좋게 말을 바꿨다.
“말 바꾸는 솜씨는 루페한테 배웠나 보군.”
펠리오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결정한 것 중에서 반응이 안 좋았던 것이 있던가?”
있었으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며, 펠리오가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이 모든 것이 다 계산된 것처럼 뻔뻔하게 굴었다. 모노는 그런 주군을 여러 가지 의미로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저렇게 오만하기도 쉽지 않았다.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정말 잔혹한 현실이 보레오티 부녀에게 불어닥쳤다. 하지만 결국엔 그조차 검은 맹수의 고고한 자존심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오히려 화를 부추겼지.’
모노는 펠리오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손수 가르쳐 줘야지.’
제 딴엔 관대하게 굴었다는 검은 맹수가 기어코 송곳니를 내밀었다.
‘아주 길고, 느린 사냥이 될 터.’
펠리오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사냥을 예고했고, 그의 말대로 길고 느린 준비가 시작되었다. 북부는, 보레오티는 이 일을 결코 쉽게 끝내지 않을 거다.
모노는 장담했다. 올로르와 황제는 레오니에를 학대했던 고아원 어른들이나 사우라란 여자보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란 걸.
그렇게 모노 혼자 심각한 동안.
“레오, 기사들하고 훈련장 두 바퀴만 돌고 와.”
“천국으로 내가 간다!”
“아니다, 너 여기 있어라.”
“아, 또 왜!”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일과나 다름없는 말다툼을 티격태격 벌이는 중이었다. 뒷덜미를 붙잡힌 레오니에가 씩씩거리며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동부에서 유행한다는 훈련복이 얼마나 튼튼한지, 아기 맹수의 몸부림에도 멀쩡했다.
기어코 근육들을 놓친 레오니에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빠도 루페 아저씨한테 말 바꾸는 솜씨 배웠나 보네.”
그리곤 조금 전 펠리오가 모노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말했다. 결국엔 펠리오 말대로 기사들이 훈련장을 다 돌고 난 뒤에야, 레오니에도 투덜투덜 뛸 수 있었다.
어쨌건 다시 찾아온 평범하고 변태스러운 일상이었다. 레오니에는 힘찬 발걸음으로 훈련장을 무려 세 바퀴나 돌았다. 평소 한 바퀴만 돌아도 힘들다고 투덜거리던 때와 달랐다. 아이의 몸 상태는 최고였다.
“여기가 천국! 천국!”
“이상한 구호 붙이지 마.”
펠리오는 지나치게 들뜬 레오니에를 진정시키며 준비 운동을 도왔다. 아이는 목검 휘두르기도 무려 50번씩 세 차례나 반복했고, 무릎을 살짝 낮춘 채 검을 쥐고 버티는 자세도 평소보다 오래 버티었다. 심지어 어디 하나 지적할 곳 없이 완벽하게 해내었다.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열심이었다.
그 기특한 모습을 지켜보던 펠리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너 설마……!”
펠리오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껏 레오니에는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모든 실력을 숨기고 전부 대충해 왔다는 것을.
폭력에 버금가는 충격이 펠리오를 찾아왔다. 모노 역시 매우 놀랐다.
“그걸 이제 알았어?”
정작 영악한 아이는 심드렁했다. 뻔뻔하게도 변명할 생각조차 없었다.
“아니, 솔직히.”
레오니에가 콧구멍 입구를 새끼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며 얄밉게 말했다.
“그동안은 딱히 후계자 될 마음도 없었고, 그래서 그냥 아빠 체면 때문에 해 주는 척했지. 근데 이제는 아니잖아.”
전엔 펠리오한테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훈련에 임했다면, 지금은 레오니에 스스로 차기 공작이 되겠단 각오로 임했다.
“요컨대 마음가짐이란 거지.”
대답을 마친 아이는 코 근처를 긁었던 새끼손가락을 물끄러미 보다가 제 바짓자락에 슥슥 닦았다.
펠리오가 인상을 썼다.
“이 속물 봐라, 진짜.”
“내가 뭐 하루 이틀 속물이야?”
“넌 그것도 뛰어넘었어.”
펠리오는 허를 찔린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세상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돌아간다지만, 이 사악한 꼬꼬마만큼은 언제나 펠리오의 예상을 벗어났다. 천하의 검은 맹수마저 종잡을 수 없는 아기 맹수였다.
“도대체 누굴 닮아 그러는지.”
“진심이야?”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어이가 없단 듯이 빤히 응시했다.
“내가 아무리 이래도, 아직 아빠만큼은 아니야.”
“레오 네가 더하거든.”
“아니거든, 아빠가 더 하거든?”
“네가 더 심해.”
“아니거든요오.”
두 맹수 부녀가 서로가 더 뻔뻔하다며 또다시 유치한 말다툼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어느 기사가 한마디 했다.
“씨도둑질 무서워서 하겠어?”
그 기사가 말하는 건 당연히 무서울 정도로 서로를 빼닮은 맹수 부녀였다. 어떻게든 서로를 이겨 먹으려고 싸우는 모습이 유치하면서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아가씨도 참 대단해.”
“그러니까. 주군을 저렇게까지 만들었잖아.”
“설마 내 생애에 주군이 애랑 말싸움하는 걸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말다툼 중에 짜증이 난 레오니에는 빼액 소리 지르며 펠리오를 향해 이를 딱딱 부딪치며 위협까지 했다. 거기에 펠리오는 손가락을 넣었다 빼는 시늉까지 했다. 그게 아이의 화를 더 돋우었다.
그러다 두 부녀는 뭐가 또 재미있는지 느닷없이 웃었다. 수군거리는 기사들의 얼굴엔 놀라움과 안도의 웃음이 서려 있었다.
“아가씨가 기운 차려서 다행이야.”
“이제야 좀 평소 같네.”
“한동안 걱정 많았는데.”
어쨌건 다들 아기 맹수의 씩씩함에 크게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야.’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멜레스가 남몰래 미소지었다. 역시 저들 맹수 부녀는 진짜 ‘가족’이었다. 그 누구도 그들 사이를 오해하지 않을 만큼 정을 두텁게 쌓고 있었다.
“근데,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말했다. 아이는 기사들의 새 훈련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저거 입고 싶어.”
“그건 안 돼.”
펠리오가 엄한 목소리로 금지했다.
“왜? 나도 입고 싶어.”
“몸매 다 드러나잖아.”
“그치만 멋지잖아.”
레오니에가 올챙이배를 볼록 내밀며 말했다.
“나도 나중에 근육 뿜뿜이 되면 저런 거 입고 싶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 돼.”
“왜애! 기사 언니 오빠들은 입었잖아!”
“쟤들은 내 자식이 아니잖아.”
“우와아…….”
기사들에게서 탄식이 쏟아졌다. 저런 비논리적인 이유가 주군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볼을 부풀렸다.
“…….”
그러다가 훈련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이 불효자식아.”
펠리오는 진짜로 흙을 찾으려는 딸아이의 고갯짓을 붙잡았다. 아이의 손은 당장이라도 흙을 쥐어 제 아빠의 눈에 뿌릴 듯이 꿈틀거렸다.
“역시 씨도둑질은 함부로 못 하는구만.”
파보가 멜레스의 귓가에 속닥였다.
“그러게…….”
멜레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자신은 저 두 사람이 사실은 친 부녀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듯했다.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그 잔혹한 사실을 부술 만큼 행복한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