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6. 아빠 미안해 (16/51)

#16. 아빠 미안해

“……그런데 그 망할 계집 때문에!”

그러다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놀란 레오니에가 움찔하자, 펠리오가 몸을 낮춰 아이의 몸을 두 팔로 감쌌다.

“고작 그분의 노리개에 불과한 천한 것이! 고귀한 그분의 씨를 품어서!”

모노와 멜레스가 서둘러 검을 빼냈다. 하지만 사우라는 흰자만 희번덕거리며 제자리에서만 발악했다. 입가로 허연 거품이 흘러나왔다.

‘이제 한계로군.’

펠리오가 조용히 눈을 찡그렸다. 자백제의 부작용으로, 사우라는 드디어 미쳐 가기 시작했다.

“내가 오랫동안 그분의 곁에 있었는데! 그분이 말했어! 항상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건 나라고!”

바닥에 쿵 쓰러진 사우라는 뱀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돌아온다고 그랬어. 반드시 날 데리러 온다고 하셨는걸, 그 망할 보레오티는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일 뿐이라 했어…….”

쓰러진 사우라는 느닷없이 몸을 활처럼 휘었다. 그 몸에서 어딘가 어긋나서 삐거덕거리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컥! 커억……!”

사우라의 입에서 초록색 무언가가 토해졌다.

“보지 마.”

펠리오가 황급히 레오니에의 눈을 가렸다. 레오니에도 아빠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보기 싫어!’

더는 코니에 선생님을, 사우라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끄윽, 끄으으……!”

괴로운 듯 바닥에 얼굴을 문지르는 사우라는 이제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검을 쥐고 경계하는 모노와 멜레스마저 인상을 쓸 정도였다. 매 겨울이면 마물 사냥을 나서는 최고의 기사들마저 질색할 만큼 징그러웠다.

“온다고, 분명 온다고, 그래서 기다렸는데…….”

오지 않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우라의 눈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피눈물이었다.

몸을 일그러트리는 고통이 잠깐 가라앉았는지, 사우라는 목청껏 울음을 토했다. 넓고 텅 빈 별관 내부를 그녀의 울음과 광기가 가득 채워 갔다.

그러다 갑자기 울음이 멈췄다.

“으흐흐.”

그리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다시 몸을 비틀며 정신 나간 웃음을 토하는 사우라의 핏빛 어린 시선이 레오니에를 향했다.

“그래서 내가 복수했어!”

악을 쓰며 외치는 사우라의 입에선 초록색 토사물과 함께 붉은 피도 섞여 나왔다.

“날 배신한 그분과 천한 노리개에게 복수했다고!”

“…….”

“내가 감히 그분을 속였어! 그 쓰레기가 널 임신한 것도 내가 속였고, 네가 태어난 것도 속였어!”

악에 북받친 절규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레오니에는 이제 자신이 무얼 듣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귀에서 삐이, 하고 주전자가 팔팔 끓는 듯한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는 저에게 악담을 퍼붓는 괴물의 모습이 선명히 담겼다.

“내가 널 키웠어! 내가 네 엄마라고!”

“엄마 같은 소리……!”

참다못한 레오니에가 이를 바득 갈았다.

“도대체 왜 그랬어!”

그리고 줄곧 참았던 배신감과 울분을 전부 토했다.

“다들 믿었어! 다들 널 믿고 그 지옥 같은 고아원에서 버텼다고!”

레오니에만이 아니었다. 유벤도, 다른 아이들도. 모두 힘을 내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유일하게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코니에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

‘코니에 선생님이 우리를 판 거야!’

사우라는 ‘코니에’라는 상냥한 가면 뒤로 아이들을 팔았다. 행복한 미소로 떠났던 유벤은 그때와 변함없이 마른 몸으로 다시 고아원에 돌아왔다.

“도대체 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던 레오니에가 헉헉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었다. 떨쳐낼 수 없는 분노에 치가 떨렸다.

“그래야 돈이 생기잖니?”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섬뜩할 정도로 차분했다.

“너희는 그 돈으로 생활한 거야.”

사우라가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설마 그 고아원에 정말로 돈이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거긴 아주 예전에 망해서, 고아원의 탈만 쓴 인신매매 가게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뭐가 잘못인지 모르는 듯이.

그리곤 입꼬리가 찢어져라 헤벌쭉 웃었다.

“너흰 네 친구들 몸값으로 먹고산 거야.”

그마저 없었으면 벌써 죽었어.

“그러니 내게 고마워해야지.”

악마처럼 속닥이는 사우라가 레오니에를 보며 히죽거렸다.

그 순간, 펠리오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한 것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모노와 멜레스는 당장이라도 저 살아 있는 괴물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건 사람의 탈을 쓴 ‘무언가’였다. 괴물도 저것과 비교하기 아까울 정도였다.

“……우웩.”

레오니에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게워냈다. 펠리오는 서둘러 아이의 손을 치우고 등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던 사우라는 기어코 모노의 발에 짓밟혀 비명을 질렀다.

“하하하하!”

하지만 사우라는 기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다 속였어!”

킥킥킥, 목청이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고음이 비명처럼 들렸다.

“그분도! 그 여자도! 공작도!”

“미쳤어…….”

멜레스가 참지 못하고 욕을 중얼거렸다. 모노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정작 사우라는 그 욕이 달콤한 칭찬처럼 들렸다. 차가운 비늘이 촘촘히 새겨진 웃음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니아, 너도 속였지.”

비틀거리는 아이를 향해, 사우라는 낄낄 웃으며 잔혹한 진실을 계속 쏟아부었다.

“제 어미가 내 손에 죽은 것도 모르는 채, 나한테 달라붙어 좋아한다고 말하는 널 볼 때마다 얼마나 같잖고 역겹던지.”

황홀한 표정을 짓는 사우라는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피에 젖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널 키운 건 나야!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그런……!”

“……그만.”

음산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이를 품에 안은 펠리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자락 여기저기에 아이의 토사물이 엉망으로 묻어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둘 다 나가.”

펠리오는 모노와 멜레스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모노에게 검 한 자루를 받았다.

“듣자 하니 기가 막히는군.”

펠리오는 무감한 시선으로 사우라를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마구잡이로 떠들던 사우라의 입은 자백제의 약효가 다 떨어진 것처럼 꾸욱 다물렸다.

“어디 한번 계속.”

광기 어렸던 눈동자에 공포가 휘몰아쳤다.

“지껄여 봐라.”

“끄아아아!”

펠리오는 마침 가지런히 바닥에 모여 있던 사우라의 두 손을 검으로 찔렀다. 손바닥을 뚫고 바닥을 찍은 검 아래로 검붉은 피가 흘렀다.

“네까짓 게 참 잘도 속였겠군.”

“으, 으으윽……!”

“분명 레지나가 좀 멍청한 구석이 있었지.”

그러니 너 같은 머저리한테 속아 죽은 걸 테고.

펠리오가 어느 정도는 수긍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레지나도 결국은 보레오티의 피를 이은 맹수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펠리오가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금으로 만든 목걸이 줄이었다.

“이걸 기억하나?”

얇은 실처럼 생긴 목걸이 끝에는 어떤 장식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사우라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서, 설마……!”

크게 벌려진 동공은 마치 컴컴한 어둠을 직면한 뱀과 비슷했다. 그 겨울밤 같은 어둠은 결코 사우라에게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펠리오는 목걸이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사우라의 손에 꽂았던 검을 뽑아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아빠!”

레오니에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아이는 바닥에 자신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레오.”

펠리오가 묵직한 한숨을 토했다.

“나는 지금도 널 여기 데려온 걸 후회하고 있다.”

“후회하지 마.”

힘없는 딸꾹질을 토하며, 레오니에가 마저 말했다.

“내가, 할 거야.”

“…….”

“내려 줘.”

레오니에가 힘줘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펠리오는 검을 도로 사우라의 손에 꽂았다. 뚫린 곳을 또 뚫린 사우라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 앞으로 레오니에가 가까이 다가갔다. 핏물 속으로 걸어들어온 에나멜 구두가 피로 질척였다.

“선생님.”

바닥에 쓰러진 사우라를, 레오니에가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아무런 것도 느끼지 않는단 듯이.

“나도 뭐 하나 가르쳐 줄까?”

그리곤 힘없는 미소를 지은 채 사우라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뭐?”

사우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조금 전 펠리오가 보여 준 목걸이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난 그 아이가 아니야.’

다른 세상에서 왔거든.

한 걸음 뒤로 떨어진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고마워, 선생님.”

눈물로 젖은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 이채가 떠올랐다. 등 뒤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황금빛 안개는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덕분에 완성했어.”

황금빛 안개는 점점 퍼져 가 어느덧 맹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린 새끼의 모습을 한 맹수가 크게 입을 벌렸다. 그 안에는 네 개의 송곳니가 뾰족하게 드러나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네 개의 송곳니를 동시에 드러낸 적 없었던 레오니에가, 처음으로 성공했다.

“안녕, 선생님.”

작은 손을 흔들기 무섭게, 맹수의 송곳니가 사우라를 꿰뚫었다.

* * *

“일단, 안 죽었습니다.”

루페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보고를 이어 갔다.

“숨이 아직 붙어 있는 걸 조금 전 케레스 경이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보고했던 모노 역시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마치 전날 술을 거하게 마시고 숙취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우라의 옷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검은 다이아 덕입니다.”

“죽느니만 못한 처지로군.”

“그렇지요.”

펠리오가 손에 들린 검은 다이아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기사단들이 쓰러진 사우라에게서 가져온 조그마한 녀석이었다. 세공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아 윤곽이 울퉁불퉁한 다이아는 그대로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케레나 전 메레오카 영애보다도 못한 처지지요.”

루페는 아직도 가시지 않는 두통과 싸우는 중이었다. 두통의 원인은 저녁에 레오니에가 만든 맹수의 송곳니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완성한 송곳니는 그 위력을 온 저택에 내뿜었다. 밖에 있던 기사들만이 아니라 본 저택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정제되지 않은 위압감은 모든 걸 봐주지 않았다. 그나마 검은 다이아를 지닌 루페와 카라 같은 사람들은 두통으로 겨우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북부에 와 처음 맹수의 송곳니를 겪은 인세레아는 열까지 났다.

펠리오의 송곳니에 나름 면역이 있던 기사들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체면을 차렸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레오니에의 송곳니에 큰 피해를 입었다.

마구간 말들은 경기를 일으켰고, 하녀들이 몰래 키우던 새끼 고양이들은 기절까지 했다. 가까스로 눈을 뜨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울음을 토한다고.

“좀 말리지 그러셨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말려.”

펠리오가 장난하냐는 눈으로 루페를 노려봤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루페도 할 말을 해야 했다.

“아가씨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에 치우쳐 맹수의 송곳니로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레오니에한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루페의 충언은 진지했다.

“지난번 폭주도 그랬지만,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입니다.”

맹수의 송곳니는 사람을 죽이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오니에는 그 힘으로 무려 두 번이나 사고를 쳤다.

“만약 정말로 그 정도 인명 피해가 났더라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잠깐 욱해 큰 소리로 외치던 루페가 뒤늦게 말을 아꼈다. 그 역시 아직 어린 아가씨가 상처 입기를 바라지 않았다. 루페만의 생각이 아니라, 보레오티에 몸담은 대부분이 똑같은 생각이었다. 이 살벌한 북부에 다시금 온기를 불어넣은 아기 맹수는 소중한 존재였다.

“죄송합니다.”

루페가 일순 격하게 반응한 점을 사과했다.

“…….”

펠리오는 별말 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그 또한 루페와 같은 생각이었다. 어두운 창문 위로 비치는 펠리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를 보고 만 루페는 그 이상 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아가씨는, 어떠십니까.”

“자고 있다.”

지금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방에 있었다.

사용인들이 전부 쓰러진 탓에, 그가 아이를 직접 제 방에 데려와 재웠다. 혹시라도 레오니에가 자다 일어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사탕을 저금한 유리병과 선물 받았던 모자를 침대 옆 협탁에 두었다. 잠든 아이의 품에는 사자 인형도 안겨 있었다.

“그나저나 그 힘은…….”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했던 루페가 마른세수를 하며 화제를 잠깐 돌렸다.

“공작님도 그랬습니까?”

“뭐가.”

“맹수의 송곳니 말입니다.”

듣기로는 레오니에가 송곳니 네 개를 전부 완벽하게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송곳니를 한 번도 꺼내 보지 못했던 아이는 감정의 폭발로 폭주해, 본 저택 현관 홀을 전부 얼려 버렸다. 그리고 송곳니 네 개를 전부 꺼낸 이번에는 레오니에가 있던 별관만이 아니라, 저택 부지 자체에 피해를 줬다.

“난 실수 따윈 안 해.”

펠리오가 바로 답했다.

“해 본 적도 없고.”

펠리오는 레오니에보다 조금 어린 나이에 송곳니를 처음 꺼냈다. 그리고, 그의 의도를 벗어난 사고 따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인생에서 후회라고 해 봐야, 레오니에를 키우면서 자신의 육아 방식이 옳은가를 고민하는 순간밖에 없었다.

“아, 예에…….”

정색하는 펠리오 덕에 루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덕분에 분위기는 좀 나아졌다.

“위력은 나보다 약해.”

역대 최강의 보레오티라 불리는 펠리오가 냉혹하게 평가했다.

“물론 그 정도면 강하지.”

힘만 따진다면, 레지나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부친인 선대 공작보다 강했다. 나이가 어릴수록 송곳니 힘이 약하다는 걸 고려해도 레오니에는 분명 강했다.

문제는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거였다. 조금 전 루페가 한 말대로, 이번에만 벌써 두 번째 사고였다.

‘훈련 방법을 바꿔야겠어.’

지금껏 송곳니를 잘 꺼내고 힘을 기르는 방식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그 힘을 의지대로 쓰는 쪽으로 중심을 둘 필요가 있었다.

펠리오는 심경이 복잡했다. 레오니에가 맹수의 송곳니를 완성한 건 기뻤다. 하지만 그런 여자 때문에 완성한 것이 싫었고, 아이가 그 송곳니로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작심한 것도 그랬다.

‘죽이려고 했어.’

분명 그때. 레오니에는 자신의 송곳니로 사우라를 죽이려고 했다.

보레오티 사용인들이 피해를 입은 이유는 면밀하게 따진다면 레오니에의 송곳니 때문이 아니었다. 송곳니에서 흘러넘친 ‘살기’때문이었다. 그토록 믿고 신뢰했던 ‘코니에’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그만큼 컸단 뜻이었다.

‘보레오티 공작의 입장에선 그렇게나 강한 힘은 대견하지만.’

아버지로선 안타까웠다.

레오니에가 지금보다 더 자라면 마물 사냥에도 데려가야 했다. 그땐 본인이 싫다고 해도 살아 있는 마물을 직접 죽여야 한다. 보레오티 공작이 짊어질 의무를 배운다는 것엔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는 상황도 포함되어 있다.

펠리오는 아직 어린 것이 벌써 그런 각오를 지녔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아.”

여러모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창문에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눈이 오는군.”

새하얀 눈송이가 펑펑 내리고 있었다.

“늦가을이네요.”

따라 창밖을 보던 루페가 말했다.

북부의 첫눈은 항상 늦가을에 찾아왔다.

이제 레오니에의 생일까지 앞으로 아흐레가 남았다.

* * *

다음날.

‘해가 중천…….’

레오니에가 입이 찢길 만큼 크게 하품했다.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엉거주춤 일어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부스스한 산발이었고, 눈은 팅팅 부어서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체온 탓에 몸이 땀범벅이었다.

무거운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돌아보는데, 방 안이 조금 낯설었다.

‘……아빠 없네.’

조막만 한 손이 주인 없는 빈자리를 더듬거렸다.

‘아, 맞아.’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였다.

‘여기 아빠 방이지.’

어제 그 일이 일어나고 난 후,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자신의 방에 데려와 재웠다.

사자 인형도 챙겨와 품에 안겨 주고, 딸기 우유 사탕을 모아 둔 유리병과 선물 받았던 모자도 협탁 옆에 따로 챙겨 주었다.

아이의 시선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펠리오의 방은 휑했다. 있는 거라곤 커다란 침대와 창가 옆 조그만 테이블과 의자 하나가 다였다.

레오니에는 그런 방에 저 혼자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어색했다. 마치 북부의 냉혹한 공작님이 뜨거운 수프를 ‘아 뜨거라, 후우, 호로록.’ 하고 방정맞게 마시는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아, 좀 웃겼다.’

혼자 피식거리던 레오니에가 사자 인형을 조용히 껴안았다.

“…….”

갑작스러운 침묵을 틈타, 아이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울지 마……!”

레오니에가 짜증스럽게 눈가를 벅벅 닦았다. 이딴 일로 울고 싶지 않았다. 속은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그 배신감에 하염없이 질질 끌려가는 건 질색이었다.

‘그렇지만…….’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상실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사우라는, 아니, 코니에는 레오니에가 이 세상에서 처음 의지한 사람이었다.

평범하게 잘 살다가 갑자기 지옥에 떨어졌던 레오니에는 모든 것이 두렵고 괴로웠다. 스스로 인지하는 ‘저’와 완전히 다른 모습에 끝끝내 자살도 고민해 봤다. 속된 말로 맛이 갈 뻔했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 지옥에서 버티었던 건 코니에의 상냥함 덕분이었다.

하지만 다 거짓이었다. 이 몸을 낳아 준 친모를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속였다. 거기다 인신 매매로 벌어들인 돈으로 남은 아이들을 먹여 키우는 잔인한 짓까지 했다. 그것만 생각하면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똑똑.

슬픈 현실에 짓눌리려던 레오니에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았다.

“레오.”

소리를 따라 레오니에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

반쯤 열린 문에 기댄 채, 펠리오가 벽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빠아…….”

레오니에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피곤할 법도 하지.”

펠리오가 이리 오라며 팔을 뻗었다. 레오니에는 우물쭈물 망설이다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파?”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펠리오가 퍽 심각하게 물었다.

“아니…….”

“그럼 열이 있나.”

커다란 손이 아이의 이마 위에 얹어졌다. 약간의 미열이 느껴졌지만, 레오니에가 원래 펠리오보다 체온이 높기도 했고, 아이가 자다 일어난 터라 확신을 못 했다.

“아프면 말해.”

펠리오가 실내용 망토를 걸쳐 주며 말했다.

“밥 먹을까?”

“입맛이 없어.”

“그래도 조금만 먹어.”

“으응.”

순순히 품에 안긴 레오니에를 뜻 모를 시선으로 응시하던 펠리오가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늘 밥을 먹던 식당이 아니었다.

“부엌?”

의자에 앉혀진 레오니에가 부엌을 두리번거렸다. 아이가 앉은 의자는 식당에서 쓰는 아이 전용 의자였다. 펠리오가 미리 가져온 것이었다. 늘 요리하느라 분주한 곳이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했다.

“오늘까진 사용인들이 쉴 거다.”

펠리오가 등을 보인 채 대답했다. 무언가를 차리는 손이 분주했다.

“아…….”

레오니에가 미안한 마음에 앓는 소리를 냈다. 사용인들은 지금 레오니에의 송곳니 때문에 전원 병가였다.

“코니랑 미아도?”

레오니에가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래.”

“기사단 언니 오빠들은?”

“그놈들은 괜찮아.”

글라디고 기사단들은 펠리오와 함께 마물 사냥을 하면서 맹수의 송곳니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었다. 거기다 체력도 남들의 몇 배나 좋았기에 크게 다친 이는 없었다. 견습 기사들이나 시동들도 마침 외부에서 훈련 중이라 피해를 면했다.

곧 펠리오가 묽은 수프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맛은 장담 못 해.”

“아빠가 만든 거야?”

수프를 눈앞에 둔 레오니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펠리오는 제 몫을 덜어 아이의 옆에 앉았다. 부엌 사용인들이 쓰는 의자는 펠리오가 앉기엔 상당히 작았다. 그래도 그는 큰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물 사냥할 때 야영을 하니까.”

그때 가끔 끓여서 기사들에게 나눠 준다며 태연히 말했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수프를 번갈아 보더니 인형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조심히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

“……따뜻해.”

솔직히 맛있진 않았다. 간이 너무 밍밍했다. 시선을 슬쩍 돌리니, 펠리오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한테 먹이려고 간을 싱겁게 맞추다 보니 물을 너무 넣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생각하고 만들었단 뜻이었다. 수프 속 작게 다진 건더기도 그랬다. 너무 크면 레오니에가 못 먹으니까, 일부러 손수 잘게 다진 거였다.

“맛있어…….”

레오니에가 코를 훌쩍였다.

“너무 맛있어……!”

큰 소리로 수프를 칭찬한 레오니에는 숨도 쉬지 않고 흡입했다. 저를 깨우기 전에 부엌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수프를 끓였을 펠리오의 뒷모습을 떠올리니 마냥 미안하고 고마웠다.

“천천히 먹어.”

“으응.”

“이것도 먹고.”

펠리오가 바구니에 대충 넣어 가져온 동그란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줬다. 레오니에는 남김없이 먹었다.

배가 따뜻하게 차오르니 아까보다 기운도 났다. 아이를 돌볼 하녀들이 병가라, 오늘은 펠리오가 직접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을 닦아 주고 머리를 빗겨 줬다.

“아빠 잘하네…….”

레오니에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펠리오가 빗겨 주고 묶어 준 머리는 이대로 밖에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난 다 잘하거든.”

“겸손 빼고 말이야.”

“하여튼 한마디를 안 져.”

펠리오가 입가를 올렸다. 거울 속 레오니에도 웃었다.

“아빠, 오늘은 일 안 해?”

가림막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이는 얼마 전 맞춤 제작한 갈색 원피스에 도톰한 까만색 스타킹 차림이었다.

“오늘은 휴일이야.”

보레오티 부녀를 제외한 모두가 병가 상태라, 이 저택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펠리오도 휴가였다.

“아…….”

레오니에가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저 때문에 저택 사람들이 다 아프다는 걸 다시 떠올렸다.

“어차피 오늘은 종일 레오 너랑 있으려고 했어.”

말실수를 깨달은 펠리오가 머뭇거리며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풀이 팍 죽은 아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더 알고 싶지?”

사자 인형을 건네며, 펠리오가 말했다.

“……말해 줄 거야?”

사자 인형을 받으며,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래.”

펠리오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네가 당사자니까.”

벽난로 속 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말 안 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

벽난로 앞에 앉은 펠리오가 부지깽이를 움직이며 말했다. 분명 보통의 부모들이라면, 제 아이에게 잔혹한 진실을 감추려고 노력할 거다. 그 점은 펠리오도 일찍이 직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당사자였다. 펠리오는 아무리 아이가 어리다고 해도 이를 숨기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빠, 그전에…….”

레오니에가 힘없이 외쳤다.

“……더워!”

실내용 망토 위에 무려 담요를 석 장이나 두른 레오니에는 볼이 벌겋게 익었다.

“쪄 죽겠어!”

“추운 것보다야 낫지.”

“아빤 정도를 좀 알아!”

부녀는 결국 담요 한 장만 두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뭐부터 말할까.”

드디어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시작은 코니에의 정체였다.

“너도 이젠 알겠지만, 그 이름은 가짜야.”

레오니에도 어제 있었던 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머릿속 뇌를 꺼내 벅벅 씻어서 떨쳐내고 싶은 끔찍한 이름이었다.

“진짜 이름은 사우라 페르딕스.”

하지만 일찌감치 사망 처리가 된 신원이었다.

“사, 사망 처리?”

깜짝 놀란 레오니에에게, 펠리오가 조금 더 상세히 말했다.

“아마 그쪽 종사자인 모양이야.”

“그쪽 종사자라면…….”

“호위나 잠입 정도.”

펠리오가 나름 점잖은 예시를 들었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자백제를 먹고도 오랫동안 버틴 건…….’

오르티오 후작이 선물한 자백제는 거의 독약 수준이었다. 약과 함께 보낸 설명서에도 정제수에 희석해서 쓰는 방법을 추천할 정도였다. 하지만 펠리오는 희석은커녕 병째 사우라에게 먹였다. 자백 도중에 죽든 말든 상관없단 뜻이었다. 그러나 사우라는 반나절 가까이 제정신을 유지했다.

“……암살자이거나 첩자.”

펠리오가 떠올린 생각을,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아니, 사우라란 사람은 적어도 그런 일을 했던 사람 같아.”

어제 보았던 광기 어린 모습은 도저히 평범한 사람에게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암살자나 첩자처럼, 적어도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섬뜩하고 비릿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신원을 없앤 것도 그런 위험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 다른 선생님들도?”

레오니에가 저택에 끌려왔던 원장과 다른 선생들을 떠올렸다.

“그쪽은 아니야.”

펠리오가 말했다.

이전 고아원 어른들은 레오니에가 그곳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린아이를 인신매매했던 쓰레기들이었다. 하지만 사우라는 그 급을 넘어섰다.

“진짜 실세는 그 여자였지.”

인신매매 단체가 그나마 고아원으로 가장하게 된 것도 사우라 때문이었고, 포주에게 아이를 팔자는 제안을 먼저 한 것도 사우라였다.

“…….”

레오니에는 말없이 인형을 껴안았다. 힘을 주는 팔이 파르르 떨렸다. 냉정히 들으려고 해도 들끓는 속은 어쩔 수가 없었다. 치밀어오르는 배신감과 그로 인한 공허함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믿었기에 더욱 아팠다.

“그리고 네가 머물렀던 고아원.”

펠리오는 아이가 조금이나마 진정된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이어 말했다.

“서부의 외곽 지역에 있었는데.”

“서부?”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에 가담했던 서부 귀족 중 한 명이 다스렸던 곳이지.”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 아빠. 조금만 있어 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내가 있었던 그 고아원이 서부에 있는데…….’

고아원이 있던 곳은 서부. 그리고 그 지역을 다스린 귀족은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에 가담한 죄가 있다.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은 황제의 암묵적 동의와 지원 아래, 올로르 자작 가문이 은밀히 진행한 사건이었다.

올로르 가문과 연이 있는 귀족.

‘아름다운 백조.’

사우라가 반쯤 미친 상태에서 자백했던 방랑 기사의 정체.

“그럼 역시…….”

레오니에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제 변태 취향을 당당하게 즐겨온 낯짝 두꺼운 아기 맹수가 분에 겨운 듯이 몸을 떨었다. 애써 못 들은 척했던 그 사실을 직시할 때였다.

“그 방랑 기사란 놈은……!”

“레무스.”

펠리오가 아이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레무스 올로르.”

마지못해 꺼낸 이름은, 천하의 펠리오조차 구토감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들은 레오니에는 독버섯을 강제로 삼킨 듯한 몰골이 되었다. 내리막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비열한 쓰레기.’

레오니에는 올로르 영식의 이름을 듣자마자, 원작에서 묘사된 그를 떠올렸다.

레무스 올로르.

올로르 자작 가문의 장남이자, 우시스 황비의 오라버니. 그리고 수비테오 황제와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비열한 쓰레기.

레무스는 전연령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지독한 일들을 취미인 듯이 저지르고 다녔다. 그 일들을 말하는 입이며 듣는 귀며 둘 다 썩을 정도였다. 그리고 에르바누 백작 가문의 둘째 딸인 로타와 약혼하였고.

‘……바리아를 죽였어.’

여주인공을 살해했다.

기실 레무스 올로르야말로 원작 ‘검은 맹수의 바리아’의 시작점이었다. 그가 바리아를 죽임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되니까.

레오니에의 표정이 썩어 가던 찰나였다.

“토하고 싶으면 토해도 돼.”

걱정 어린 표정을 한 채,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는 드물게 얼굴 위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잔인한 현실을 꾸역꾸역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애처로웠다.

“……안 할 거야.”

다행히 레오니에는 금방 속을 다스릴 수 있었다. 오히려 사우라의 실체를 알게 된 어제보다 훨씬 속은 편했다.

“난 원래 친부가 쓰레기라는 걸 알았잖아.”

레오니에는 처음부터 친부를 욕했다. 애초부터 그 작자가 레지나를 임신시킨 뒤에 떠났을 거라고 현실성 있게 추리까지 했었다.

“그냥 쓰레긴 줄 알았는데, 너무 상쓰레기라서 놀랐어.”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진짜 너무 짜증 나!”

레오니에가 진심을 담아 허공에 발길질했다. 덕분에 발라당 뒤로 넘어지는 몸을, 펠리오가 팔을 뻗어 막아 줬다.

“진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한번 짜증 난다고 털어놓으니, 무얼 손 쓸 새도 없이 짜증이 솟구쳤다.

“이익! 이이익!”

기어코 레오니에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아아악!”

그리곤 뜻 모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고작 이런 버둥거림으로 눈앞에 떨어진 끔찍한 현실이 도망치거나 사라지진 않았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끝끝내 떨쳐내지 못한 억울함은 기어코 눈물이 되었다. 레오니에는 엉엉 울었다.

“으아아앙!”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동그란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미안해, 아빠!”

그리고 사과했다.

“보레오티가 더러워졌어!”

아이는 고꾸라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울음으로 헐떡이는 숨과 들썩이는 어깨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통곡이었다.

레오니에는 자신의 출생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게도 보레오티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남몰래 자부심을 느꼈다.

‘나 보레오티야.’

나중엔 자신을 보레오티라 부를 정도로 가문에 애정이 생겼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그런 역겨운 피가 흐른다는 걸 알기 무섭게 두려움이 몰아닥쳤다. 아이는 도저히 펠리오를 바라볼 자신이 없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레오니에가 목 놓아 울부짖었다.

“바보 같긴.”

묵묵히 지켜보던 펠리오가 짓이겨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꼭 상처받은 짐승의 울음 같았다.

“아빠가 전에도 말했지?”

펠리오는 동그랗게 움츠린 아이의 몸을 그대로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레오니에의 얼굴을 억지로 올렸다.

아이의 새빨개진 얼굴은 엉망이었다. 얼굴에서 나올 수 있는 액체란 액체는 다 쏟아내는 듯했다. 심지어 콧물은 비눗방울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펠리오가 그만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너 진짜 못생겼다.”

“으아아아!”

가뜩이나 심란한 레오니에가 더 절규했다. 뒤늦게 펠리오가 다독였다. 다행히 이젠 좀 지치는 모양인지, 흐느낌이 점점 잦아들었다. 걸리는 점이라면 울음소리도 살짝 걸걸한 게 목이 쉰 것 같았다.

“레오.”

이후, 아이가 진정한 걸 확인한 펠리오가 조금 더 제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가 누구인 걸로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어.”

이전에도 아이는 어느 가정 교사의 비아냥에 크게 상처 입었었다. 그리고 그때도 펠리오는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레오 넌 그냥 내 딸이야.”

“흑, 흐윽…….”

“너와 나 사이엔 그 사실 하나만 있어.”

“그치만, 그치만 내 친부가…….”

“넌 그딴 놈을 친부라고 계속 부를 거냐.”

펠리오가 엄한 얼굴로 타일렀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그가 얼마나 ‘친부’란 호칭을 불편해하는지 보여 줬다.

“내가 네 아빠야.”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다시는 잊어버리지 말라는 듯이.

“그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부정해선 안 돼.”

“아, 아빠…….”

레오니에가 얼떨결에 펠리오를 불렀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나온 호칭이었음에도, 펠리오는 한결 안도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지 마.”

사생아, 고아원 출신. 여기에 친부가 올로르 자작 영식이란 끔찍한 사실까지.

이것들은 전부 레오니에가 스스로 선택해 내린 정의가 아니었다.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혹은 비열한 어른들 때문에 강제로 얻게 된 것뿐이었다.

“우린 가족이야.”

하지만 ‘가족’은 레오니에가 직접 선택하고 만들어 간 정의이고 관계였다. 펠리오와 함께 만든 둘만의 소중한 것이었다. 주변에서 무어라 수군거리든 결코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진리였다.

레오니에는 ‘아빠’ 덕에 이 세상에 발을 내디뎠고, 펠리오는 ‘딸’ 덕에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또 잊으면 혼난다.”

가볍게 혀를 내두른 펠리오가 옷소매로 아이의 젖은 얼굴을 직접 닦아 줬다. 소매가 더러워질수록, 레오니에의 얼굴은 점점 깨끗해졌다. 하지만 그 위로 다시 닭똥 같은 눈물이 구슬피 떨어졌다.

“아빠아아……!”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다시 시작된 구슬픈 흐느낌은 레오니에가 지쳐 잠들 때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펠리오는 묵묵히 아이의 등을 쓸어 주었다.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한 뒤에도 펠리오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올로르…….’

잠든 아이를 도닥이던 손가락이 톡톡, 빠르게 움직였다.

가늘게 뜬 검은 눈동자 속에 벽난로 속 장작불이 비치었다. 붉은 핏빛을 연상케 하는 눈빛은 붉은 백조들의 목을 쥐려는 참이었다.

‘감히 보레오티를 건드리다니.’

북부에 몰래 숨어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레지나를 죽게 만들고 레오니에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혔다. 마물을 훔쳐다 팔려던 속셈은 다시 보니 애들 장난이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먼지를 털어 청한다거나, 건방진 짐승을 사냥하는 가벼운 정리로는 결코 끝내지 못할 일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귀찮아진 펠리오가 눈을 감았다. 붉게 빛나던 검은 눈동자가 사라졌고, 그는 그대로 일어나 소파에 드러누웠다.

“으응…….”

레오니에가 가볍게 칭얼거렸다. 그렇게 좋아하는 아빠 흉근에 얼굴을 묻었는데도 기뻐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이는 피곤했고, 아빠도 피곤했다.

두 부녀는 그렇게 이른 낮잠을 청했다.

* * *

며칠 후.

레지나 보레오티가 돌아왔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버지의 품에서 조용히 잠든 채였다.

“집으로 왔구나.”

백작이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딸에게 속삭였다. 아버지의 재킷에 포근히 감싸인 레지나의 유골은 마치 갓난아기 같았다. 한 팔에 다 안기고도 남을 만큼 작고 가벼웠다.

장례식은 간소히 진행됐다.

레지나는 우르마리티 영지에 묻혔다. 미리 준비된 자리에 레지나가 눕고, 그 위로 장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한 줌의 흙을 뿌리며 인사를 남겼다.

가장 먼저 우르마리티 백작 부부가 흙을 뿌렸다. 레지나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렇게 오열했던 백작은 의연한 표정으로 딸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새하얗게 샌 그의 굵은 눈썹은 슬픔을 억누르듯 꿈틀거렸다.

“아가씨…….”

우르마리티 백작 부인은 눈물 한 방울과 함께 흙을 뿌렸다. 그녀는 전 백작 부인의 시중을 들던 하녀였기에 레지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복잡할 테지.’

울먹이는 백작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시선을 내렸다.

백작 부인과 레지나가 어떤 관계였는지는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해 듣기로는 부인이 레지나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레오니에는 부디 백작 부인의 눈물이 거짓이 아니길 바랐다. 저와 같은 일을, 제 친모가 죽어서까지 당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우르마리티 백작 부부가 끝난 다음은 보레오티 공작 부녀 차례였다. 장식이 없는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무덤 앞에 나란히 섰다.

“레지나.”

펠리오가 흙을 뿌리며 말했다.

“걱정 마라.”

짧고 간결한 인사였다. 그리고 맹세였다.

네가 남기고 간 레오니에를 나의 딸로서 소중히 돌볼 것이며, 너를 그 꼴로 만들며 북부를 모욕한 ‘그것’들을 끝장내겠다는 각오였다.

펠리오가 옆으로 물러서고, 레오니에가 무덤 앞에 섰다.

“고모님.”

레오니에가 레지나를 불렀다. 둘은 모녀 관계이지만, 대외적으론 오촌 고모와 조카 관계였다. 모녀 관계란 사실은 이 무덤과 함께 덮어 두어야 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하는 아이의 머리는 드물게 반만 묶여 있었다. 카라가 직접 묶어 준 머리로, 레지나가 생전에 즐겼다는 머리 모양이었다. 머리에는 검은색 천으로 만든 리본이 묶여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실 처음이 아니겠지만, 지금의 레오니에한테는 레지나와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그 자리가 장례식장이라는 건 참 기묘했다.

“저는 레오니에에요.”

아빠가 지어 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후에 천천히 흙을 뿌렸다.

‘뭘 말해야 하지?’

인사 말고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 연민과 동정은 품고 있지만, 친모를 향한 그리운 마음은 여전히 없었다.

레오니에는 잠깐 고민한 후에 흙을 뿌리고 더러워진 손을 작게 흔들었다.

“……빠빠.”

마음에 든 사람과 다음에 또 만나자고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였다. 아마 다시 방문할 땐 우르마리티 백작과 함께 오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레지나의 무덤에 방문하는 모습을 그려본 레오니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그래도 이 몸을 낳아 준 사람을 만나는 것인지라, 썩 나쁜 기분은 안 들었다.

자리로 돌아온 레오니에는 펠리오 옆에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차례를 지켜봤다.

루페는 서글픈 미소와 함께 인사를 했고, 카라는 손수건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다. 모노와 멜레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영면을 기도했다.

어느새 레지나의 장례식도 막바지였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마지막으로 레지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잘 자거라, 내 딸…….”

그때야 백작이 눈물을 떨어트렸다. 레오니에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고개를 휙 돌렸다.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백작이 부인의 부축을 받아 자리를 비키자 펠리오와 루페, 모노가 삽을 들었다. 그러고는 무덤을 덮었다.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는 장례식인지라 이런 일을 할 사람을 고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지나와 연이 있는 남자 셋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세 남자는 묵묵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문득 고개를 올렸다. 요 며칠 눈만 내리던 흐릿한 하늘은 오랜만에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레지나는 그렇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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