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선생님 (15/51)

#15. 선생님

고아들은 언제 태어났는지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경우는 보통 고아원에 들어온 날을 기준으로 서류에 생일을 작성한다.

레오니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류상 기록된 레오니에의 생일은 초가을이었다. 단풍조차 들락 말락 하는 선선한 날씨를, 레오니에는 무척 싫어했다.

저에게 소설 속 매춘부 이름을 붙여 준 고아원 선생님들을 향한 분노와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단 바람만 더욱 들끓는 날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이제 열흘 남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조그마한 달력을 만지작거리며, 레오니에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로 내 생일!’

신이 난 레오니에가 혼자 두 팔 뻗어 상체를 흔들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뒤로 처음 기다려 보는 생일이었다.

펠리오는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날을 레오니에의 생일로 삼자고 말했다. 레오니에는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수긍했다. 비록 같은 가을이었지만, 펠리오와 만났던 날은 겨울의 초입인 늦가을이었다.

레오니에는 보레오티에서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 점점 기대되었다.

‘아빠는 분명 엄청난 선물을 주겠지?’

얼마나 대단한 걸 받을지 고민하는 사치도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내일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따뜻한 물을 받아 씻을 수 있을까 고민했던 작년과 완전히 달랐다.

‘광산 소유권? 보석?’

레오니에의 얼굴 위로 욕망에 번지르르 적셔진 미소가 사라질 틈이 없었다. 펠리오가 일전에 말한 ‘속물’ 같은 표정이었다.

“아가씨.”

그때, 코니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미아도 함께였다.

“마차가 준비되었어요.”

“이제 나가실까요?”

“응!”

레오니에가 쪼르르르 다가갔다. 걸어갈 때마다 양 갈래로 묶인 검은 머리가 토끼처럼 깡충거렸다.

“북부가 확실히 춥네요.”

코니가 들고 온 망토를 꼼꼼히 입혀 줬다. 새하얀 솜으로 마감된 검은 망토가 레오니에와 잘 어울렸다.

푹푹 찌던 수도 날씨는 게이트를 통과해 북부로 도착하기 무섭게 서늘해졌다. 그리고 북부는 가을에 접어들기 무섭게 날씨가 추워졌다. 나뭇잎은 일찌감치 단풍이 들었고, 해가 떠 있는 낮도 눈에 띄게 짧아졌다. 레오니에도 여름 내내 입던 민소매나 반소매 옷 대신 긴 소매 옷을 갖춰 입었다.

“어디로 놀러 가실 건가요?”

미아가 망토 주름을 손으로 펴주며 물었다. 레오니에가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놀러 가는 거 아니야!”

아기 맹수가 크앙, 짖었다.

오늘은 광장을 둘러보며 손목시계 아이디어를 얻어갈 계획이었다.

“이건 엄연한 일이야.”

이거 보라며 따로 챙겨 온 수첩과 만년필을 보여 줬다. 레오니에는 나름 진지하게 자신의 각오를 보인 거지만, 코니와 미아의 눈에는 마냥 귀여운 아기 맹수일 뿐이었다.

“레오.”

그때 지나가던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펠리오 뒤엔 루페와 프로보가 있었다.

“어디 나가나?”

“광장에 일하러 가.”

레오니에가 콧김을 뿜으며 으스댔다.

“큭!”

프로보가 웃음을 터트릴 뻔한 걸, 루페가 팔꿈치로 배를 거세게 찍어 가까스로 막았다. 덕분에 괴상한 신음이 터져 버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레오니에가 인상을 와락 썼다.

“아빠, 프로보 오빠가 나 일한다고 하니까 웃겨 죽나 봐. 그래서 루페 아저씨가 팔꿈치로 프로보 오빠 배 찔렀어.”

“저놈은 곧 내 검에도 배가 찔릴 거다.”

펠리오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프로보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가늘게 토했다. 루페는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심하단 듯이 흘겨봤다.

“적당히 일하고 와.”

펠리오가 몸을 숙여 아이의 망토를 한 번 더 점검해 줬다.

“우리 보레오티에 초과 근무는 없어.”

“루페 아저씨는 만날 초과 근무하잖아.”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야.”

루페는 스스로 저를 안쓰러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쩐지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프로보가 루페의 등을 두드리며 동정했다.

“갔다 올게.”

레오니에는 아빠 볼에 입을 쪽 맞췄다. 펠리오도 무사히 다녀오라며 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이가 현관을 나서 마차에 오르고, 그 마차가 저택 대문을 벗어나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펠리오가 몸을 돌렸다.

“엘레판 경.”

“예, 예!”

조금 전에 죽음을 경고받았던 프로보가 흠칫거렸다.

“오르티오 후작이 보낸 약병이 하나 있는 거로 아는데.”

동부의 수장께서 남편을 아끼는 거로 유명한데, 그 남편의 취미가 마법 약 제조였다. 얼마 전 펠리오는 지하 감옥 손님 중 몇 명을 부군께 선물로 보내고 싶다고 연락하니, 긍정의 대가로 약 하나를 선물로 보내었다.

“자백제, 말씀이십니까?”

프로보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펠리오의 시선은 정답이라고 말했다.

“가지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도록.”

“공작님.”

루페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아직 우르마리티 백작이 북부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백작이 이곳으로 데리고 올 놈과 함께 대질 심문을 하시는 것이 훨씬…….”

“루페 리코스 자작.”

펠리오가 조용히 말을 잘랐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왜 그 둘이 마주하는 꼴을 봐야 하는 거지?”

“…….”

“둘 중 하나가 나의 북부에 있는 것도 역겨워 죽겠는데, 그 망할 것들이 무려 둘이나 살아 있는 꼴을 지켜보라고?”

어디 한번 대답해 보라며 펠리오는 드물게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루페는 답할 수 없었다.

‘화가 나셨다.’

루페가 뒤늦게 눈치챘다. 펠리오가 최근 레오니에 덕에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지만, 그의 근본은 제 영역을 건드리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잔혹한 맹수였다.

지금 검은 맹수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내가 늘 말하지만.”

하지만 펠리오 보레오티는 어느 때보다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인내심이 기어코 분기점을 맞이한 거다. 분기점 너머가 지옥이라는 걸, 루페와 프로보는 잘 알고 있었다.

“날 우습게 보는 건 레오 한 명이면 족하다.”

오로지 아기 맹수만이, 검은 맹수의 주변을 까불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의 수염을 건드리고 귀를 물어 당기며 노는 것 역시 레오니에만이 할 수 있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데려올 놈은 어차피 죽을 놈이야.”

이미 증거는 펠리오의 손에 전부 있었다.

“그리고 백작의 사냥감이지.”

대질 심문은 꿈도 꾸지 말란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나섰다며 루페가 고개를 숙였다. 떨어진 고개 아래로 식은땀이 눈물처럼 흘렀다. 펠리오의 언짢음을 잠깐 겪었을 뿐인데도 몸이 공포로 비명을 질렀다.

한동안 잊었던 보레오티 공작의 진정한 두려움을 직시한 결과였다.

* * *

“으음, 이건 이렇게 하고…….”

밖이 잘 보이는 카페 창가 자리에 앉은 레오니에가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그들에게 어울릴 만한 다양한 손목시계를 그렸다. 만년필로 대충 슥슥 그리는 건데도 꽤나 구체적인 묘사였다.

“아가씨 정말 잘 그리시네요.”

구경하던 코니가 감탄했다.

“별거 아니야.”

칭찬받은 레오니에가 부끄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이것보다 더 잘 그릴 수 있었지만, 여물지 않은 아이의 손이나 불편한 필기구 탓에 본인은 제 그림체가 아쉽기만 했다.

“혹시 다른 것도 그릴 수 있으세요?”

미아가 물었다.

“사람이나 강아지 같은 거요.”

“그러고 보니 저희가 아가씨 그림을 제대로 본 적이 없네요.”

“한 번 그려 주시면 안 돼요?”

코니까지 가세해 부탁했다.

“진짜 별거 아닌데.”

레오니에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곧 다시 펜을 움직였다. 조그만 종이 위에 번진 잉크는 곧 둥근 선으로 변했고, 선은 곧 어떤 형체로 바뀌었다.

코니와 미아가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으음…….”

어느새 그림을 다 그린 레오니에가 둘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어때?”

종이 위에 그려진 건 차를 마시는 코니와 미아를 표현한 크로키였다. 그림을 본 둘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아까 두 사람이 차 마시는 모습을 그려 봤어. 근데 많이 이상하지?”

“하나도 안 이상해요! 세상에, 너무 잘 그리셨잖아!”

“이게 이상한 거면 저는 죽어야 해요!”

코니와 미아가 큰소리로 반박했다. 얼마나 목소리가 큰지,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였다. 코니와 미아가 뒤늦게 목소리를 낮췄다.

“너무 똑같아요!”

“그림 속 코니가 더 예쁘잖아요.”

“미아 너도 마찬가지거든?”

그림 칭찬은 어느새 두 하녀의 얼굴 놀림으로 이어졌지만, 요는 레오니에의 크로키가 대상의 특징을 잘 잡았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묘하게 귀여웠다.

“나 사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레오니에가 수줍게 진실을 고백했다.

“그런데 왜 안 그리셨어요? 좀 자주 그리시지.”

코니는 마냥 안타까웠다. 레오니에가 책 읽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사람 없을 때는 그렸어.”

“이 실력을 왜 숨기셨담.”

“그러게. 너무 아깝잖아.”

“그렇지만…….”

레오니에는 자신의 실력이 많이 퇴화했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어린아이의 몸이 된 것도 문제였지만, 열악한 고아원 환경 탓에 그림을 그리지 못한 탓이 컸다. 그래서 보레오티 저택에서 살게 된 후로 조금씩 연습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을 때 남몰래 눈물을 흘렸던 건 지금도 비밀이었다. 그때의 감동이 지금도 선명했다.

‘정말 옛날 생각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며 칭찬해 주는 코니와 미아를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밤을 불태우며 회지를 그렸지.’

평범한 직장인치고는 나름 재미있고 특별한 취미라고 자부했다.

스스로 자랑하기 무엇하지만, 레오니에는 다른 세상에서 제법 유명한 동인 작가였다. ‘장미 들판의 여신’, ‘근육 광공의 모신’이란 이명이 늘 함께였다.

레오니에가 근육에 환장하는 건 그 시절부터 줄곧 파온 취향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빠가 가장 아쉬워.’

가장 취향에 부합하는 남자가 가족이라니, 레오니에는 다시 생각해도 안타까웠다. 그래도 기사단에 멋진 근육을 지닌 기사분들이 많아 조금 다행이었다.

“아.”

그때 레오니에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고아원에 들러도 돼?”

문득 그림을 그리니 고아원 식구들에게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물론이죠.”

“다들 기뻐할 거예요.”

코니와 미아도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세 사람은 잡화점에 들어가 여러 그림 도구를 샀다. 종이부터 시작해 염료를 밀랍에 녹여 굳힌 크레용, 연필과 연필 깎는 칼까지.

여기에 제과점에서 맛있는 빵과 과자도 듬뿍 샀다.

북부에 올라오고 며칠 지나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고아원의 선생님과 아이들이 가져갔던 쿠키와 설탕 꽃잎을 맛있게 먹었던 걸 떠올렸다.

“다들 깜짝 놀라겠지?”

마차에 올라탄 레오니에가 어깨를 들썩였다. 마치 자신이 선물을 받는 것처럼 잔뜩 기대했다. 코니와 미아가 싱긋 웃었다.

“물론이죠. 다들 아가씨가 그리울 거예요.”

“그러고 보니 곧 아가씨 생일이신데…….”

“야!”

미아의 입방정에 코니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내 생일이 왜?”

그러나 이미 다 들은 레오니에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으이구, 코니가 미아를 가볍게 째려봤다. 미아가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실은, 고아원 친구들께서 아가씨께 선물을 준비하고 있대요.”

레오니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어휴! 걔들은 아직 어리면서 무슨 선물을 다 챙겨!”

어린 것들이 주책이라며 레오니에가 마차 의자에 누워 뒹굴었다.

“다들 열심히 준비 중이시니까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내가 또 한 연기 하잖아.”

레오니에가 거드름을 피웠다. 이래 봬도 황실 연회에서 수비테오 황제와 수도 귀족들에게 아주 큰 엿을 먹인 전적이 있었다. 아빠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 딸아이 연기를 수준급으로 해낸 덕이었다.

어느새 마차가 고아원에 도착했다.

“그럼 먼저 다녀올게요.”

코니는 먼저 내려 레오니에의 도착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아이들이 준비하는 선물을 숨길 수 있었다. 그동안 레오니에는 미아와 함께 마차에서 기다렸다.

“코니에 선생님은 돌아오셨을까?”

레오니에가 발을 흔들며 물었다. 움직일 때마다 에나멜 구두가 반짝였다.

“고향에 내려가셨다니까, 좀 걸릴지도 모르죠.”

“보고 싶다.”

“무척 좋아하시는 분이신가 봐요.”

“유일하게 우리를 챙겨 주셨거든.”

얼마 전에 방문했을 때는 코니에가 고향에 내려갔다는 말을 듣고 무척 슬퍼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들 때문에 고향에 가지 못했던 선생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나중에 아빠한테 부탁해서 도움을 많이 드려야지.’

이젠 가족들과 정인을 만나 행복할 때도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성함이 코니랑 비슷하네요.”

코니와 코니에, 미아가 두 이름을 번갈아 말했다.

“응, 그래서 코니가 금방 좋아졌어.”

레오니에가 많은 하녀 중에서 코니와 먼저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코 이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거 상관없이 좋았다.

“살짝 부러운데요?”

미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장난처럼 삐쳤다.

“미아도 좋아해. 미아 이름도 예뻐!”

저택 사람들은 다 좋다며 레오니에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제야 미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가씨의 진심은 일찌감치 다 알고 있었다.

곧 코니가 돌아왔다.

“가실까요?”

예상대로 고아원 아이들이 레오니에의 생일 선물을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레오니에는 괜히 언질 없이 온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했다.

“레오다!”

“레오야!”

“레오 언니!”

“누나아!”

하지만 아이들은 선물을 가득 들고 온 레오니에를 기뻐하며 반겼다. 역시 과자가 가장 인기가 많았지만, 그림을 좋아하는 몇몇은 새 크레용에 관심을 가졌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고아원 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곳 원장도 예전 고아원 원장처럼 살집이 있고 인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살피는 마음은 진심인 훌륭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레오니에는 크게 마음 놓았다.

“말도 없이 와서 미안해요.”

“저희야말로 받기만 해서 죄송하지요.”

거기다 제대로 된 대접도 못했다며, 원장이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괜찮아요. 난 여기 친구들 보러 온 거니까.”

코니에게 망토를 건넨 레오니에는 자연스럽게 아이들 속으로 들어갔다. 홀로 귀티가 잘잘 흐르는 탓에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지만, 꺼리지 않고 어울리는 모습은 그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니아!”

그때였다.

“야, 내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욕을 내뱉으려던 레오니에가 눈을 크게 떴다.

“유벤 오빠!”

고아원에서 지낼 때 사이좋게 지냈던 유벤이란 소년이 이곳에 있었다. 그는 레오니에가 고아원에 있었을 때 처음 그곳을 떠났던 아이였다.

“너, 너 정말 니아야?”

“오빠야말로 여긴 왜 있는 거야.”

레오니에는 웃는 얼굴로 새 가족과 함께 떠나던 유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났던 유벤은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그게 무슨 뜻인지 레오니에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파양이었다.

“그 미친놈들이!”

데려갔으면 책임을 져야지!

레오니에가 제 일처럼 분개했다. 그 지옥 같은 고아원을 탈출하는 유벤이 너무도 부러웠고, 그런 한편 괴로웠던 만큼 행복하라고 진심으로 바랐다. 레오니에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 입양된 다른 아이들을 위해 늘 그렇게 기도했다.

‘그렇게 바랐는데…….’

레오니에는 이렇게 다시 만난 유벤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난 괜찮아.”

정작 유벤은 흥분한 레오니에를 달래며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다시 돌아와서 기뻐.”

“오빠…….”

“진짜로. 정말로 기뻐.”

레오니에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입양된 그곳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다시 고아원에 돌아오고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떠났었는데.

“…….”

레오니에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만약 묻는다면 그것이 유벤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 될 수도 있었고, 막상 고아원에 돌아와 기쁘다는 유벤의 얼굴엔 거짓 하나 비치지 않았다.

“남은 애들이 걱정이었는데, 다들 이렇게 모여 지내서 다행이야.”

“아빠가 전부 데려다줬어.”

펠리오가 말해 줬다.

레오니에가 있었던 고아원은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고 전원 사망으로 처리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이들과 코니에 선생님은 다들 북부의 고아원으로 이동해 전보다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펠리오도 전보다 더 많은 금액을 고아원에 기부했다.

“정말이었구나…….”

유벤이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애들이 니아가 귀족이 되었다고 그랬거든.”

처음엔 안 믿었지만, 오늘 만난 레오니에를 보고서야 비로소 믿을 수 있었다.

비쩍 마른 몸은 상처투성이에, 오기만 남은 눈초리가 사나웠던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눈에 보아도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피부도 고와졌고, 말랐던 몸엔 살이 쪘고, 값비싼 옷까지 몸에 걸쳤다.

거기다 하녀를 무려 두 명이나 거느리고 왔는데, 그게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오빠, 나 이제 니아 아니야.”

레오니에가 피식 웃으며 새로운 저의 이름을 알려 줬다.

“난 이제 레오니에야.”

“에이, 너한테는 너무 멋있는 이름인 것 같은데?”

“뭐, 이 오빠야.”

레오니에가 주먹을 쥐며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유벤이 하하, 크게 웃었다.

“그래도 너랑 좀 비슷하다.”

용감한 느낌이 닮았다며, 아주 잘 어울린다고 유벤이 솔직하게 칭찬했다. 그제야 레오니에가 주먹을 치우며 싱긋 미소 지었다.

“자, 여러분.”

그때 원장이 아이들을 불렀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께서 맛있는 간식을 가지고 와 주셨으니, 우리 모두 손 씻고 함께 먹을까요?”

“와아!”

“네!”

아이들이 너도나도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오빠, 나중에 말해.”

레오니에가 손 씻으러 가자고 달려드는 어린 동생들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유벤도 알겠다는 듯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벤이란 친구분과 사이가 좋으셨나요?”

아이들 손 씻는 걸 도와주러 온 코니가 물었다.

“응. 그런데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건 아니야. 나 고아원에 들어오고 몇 달 안 돼서 나갔거든.”

“그랬군요.”

코니가 조심히 대답했다. 아가씨의 슬픈 기억 속에 있는 친구분들은 모두 비슷한 괴로움을 겪었다. 나름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코니로선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유벤이란 소년이 파양되어 고아원에 다시 돌아왔을 기분도 쉬이 상상하기 어려웠다.

“코니.”

어린 동생의 옷소매를 걷어 주던 레오니에가 말했다.

“우린 이제 괜찮아.”

이제 아이들은 배 굶주릴 일이 없고, 추위와 더위에 고생할 일도 없다. 다 같이 커다란 탕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유벤 역시 파양 당해 다시 고아원에 돌아온 것이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만난 덕이었다.

“역시 아빠가 최고야!”

“후후, 정말이네요.”

주인님만 한 사람이 없다며 코니가 미소로 동의했다.

손을 다 씻고 나온 아이들은 간식을 받기 위해 쪼르르 줄을 섰다. 제 접시를 손에 쥔 채, 선생님들이 나눠 주는 빵과 과자를 받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코니와 미아는 간식을 받고 돌아오는 아이들 자리에 우유 컵을 놓아주었다.

‘오늘도 안 계시나?’

제 몫을 어린 동생들에게 다 나눠 주고 우유만 홀짝이던 레오니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코니에 선생님은 언제 오시지?’

지난번에 왔을 땐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고 들었었다.

‘아예 내려가신 건가.’

우유를 다 마신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니, 미아.”

그리곤 둘에게 원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둘은 자신들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지만, 레오니에는 바로 옆이니 괜찮다고 사양했다.

‘그러고 보니 아르데아 선생님도 없고.’

북부에 도착하고 나서 두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펠리오 말로는 아르데아가 중요한 일로 서부에 내려갔다고 한다. 아이는 선생님이 썼다는 논문이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기에 그의 부재가 아쉽기만 했다.

‘선생님이 둘 다 없어.’

설마 눈 맞았나?

레오니에는 바로 못된 생각을 떠올렸지만,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 치웠다. 둘은 접점도 없고, 나이 차가 너무 많았다. 거기다 아르데아는 아직도 보스그루니 백작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다.

‘뻔뻔하긴.’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났으면서 참 대단하다고 중얼거렸다. 역시 공부 빼고는 본받을 구석이 없는 어른이었다.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합니다.”

원장실 문을 열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영애께서 놀라실 겁니다.”

심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원장의 것이었다.

‘내가 놀라?’

레오니에는 슬그머니 문에 귀를 가져갔다. 어느새 숨도 느리게 내쉬었다.

“충격이 클 거예요.”

“그러니까요.”

원장실에는 다른 선생님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 모두 레오니에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작 문 뒤에서 숨을 죽인 당사자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설마 코니에 선생님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며 누군가가 거칠게 욕을 읊조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아이들에게 항상 기분 좋은 노래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었다.

‘들으면 안 돼.’

듣는 순간 후회할 거야.

레오니에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신발이 바닥에 찰싹 붙어서, 마치 강력한 접착제를 발랐거나 신발 밑창에 못질이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레오니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 여자가 이전에 일했던 고아원 아이들을 팔아넘겼다면서요!”

레오니에는 다리를 휘청거렸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런 문 뒤의 상황을 모르는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얼마 전 들어온 유벤은, 어느 술집에서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었다더군요.”

레오니에는 그제야 유벤의 몸이 이전에 보았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건데도 단번에 알아본 것도 바로 그 탓이었다.

“공작님께서 올봄부터 그 고아원에서 입양된 아이들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요?”

“2년 전까지 입양된 아이 넷은 찾았지만…….”

원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 이후에 입양된 아이들은 찾을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그 고아원은 제대로 운영조차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나마 기록을 적기 시작한 것도 3년 전부터였다고.

‘3년…….’

레오니에가 느릿느릿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신이 보레오티에 입양된 지 이제 거의 1년. 그리고 자신이 고아원에서 보낸 끔찍한 시간이 얼추 2년.

“어쨌건 다들 조심합시다.”

원장이 몇 번이고 말조심을 당부하던 찰나였다.

“으, 으으……!”

선생님들이 문 너머에서 들리는 희미한 기척을 감지했다. 뒤늦게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문 가까이 있던 선생님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레오니에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이죠?”

당장이라도 쓰러져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경련이라도 하듯 파르르 떨렸다.

“코니에 선생님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나 누구도 이 절박한 애원에 답하지 못했다.

“제발 말 좀 해 봐요!”

레오니에가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이에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원장님은 죄송하다며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도망쳤다.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오니에는 겨우 움직이게 된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가씨?”

“아가씨, 어디 가세요!”

간식을 다 나눠 주고 레오니에를 찾으러 나온 코니와 미아가 서둘러 뒤쫓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그러세요!”

둘 중 다리가 가장 빨랐던 미아가 레오니에를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아빠한테 가야 해.”

레오니에가 울먹거렸다.

“서, 선생님들이 전부 착각한 거야.”

“아가씨, 진정하세요.”

“가서 물어봐야 해!”

“알겠으니까, 우선 숨부터…….”

미아가 울먹이는 레오니에를 품에 안고 몇 번이고 등을 쓸었다. 그제야 레오니에도 몸에 힘이 빠져 천천히 미아에게 기대었다.

“니아!”

그때 유벤이 레오니에를 부르며 빠르게 달려왔다. 겉옷을 챙긴 코니가 그 뒤를 따라왔다.

“니아, 아니, 레오니에!”

달리느라 거칠어진 숨을 헉헉 내쉬던 유벤이 멈칫했다. 어른들한테 맞아도 이를 악물며 버티던 레오니에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직 다른 애들은 몰라.”

유벤은 결국 레오니에가 알아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왜 저렇게 절망하는지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녀를 믿었으니까.

“난 입양된 게 아니었어.”

유벤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자신이 직접 겪고도 믿지 못할 일을, 그 누구보다 그 사람을 믿고 따른 레오니에에게 말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팔려 간 거야.”

유벤만이 아니었다. 레오니에가 있는 동안 입양된 나머지 세 아이도 그렇게 팔려 갔다.

“술을 파는 집에서 매일 일만 했어. 잠도 거의 못 자고, 굶는 건 고아원에서 지냈던 날보다 더 굶었어.”

“…….”

“그러다가 코니에 선생님이 집에 왔어.”

유벤이 울먹거렸다.

“내 양부모가 코니에 선생님한테 돈을 쥐여 줬어.”

선생님 나 좀 구해 줘요, 여기 너무 힘들어요, 그렇게 빌고 빌며 코니에를 불렀다. 하지만 코니에는 변함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유벤을 떨어트렸다.

‘아주 잘 어울려.’

너 같은 거지가 일하기엔 딱 좋은 곳이지?

유벤이 눈물 젖은 목소리로 잔인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코니에 선생님이 우리를 판 거야!”

달리는 마차는 조용했다.

말발굽이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 마부가 말들을 타이르는 소리, 바퀴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리. 그 모든 소음이 환청인 것처럼, 마차 안은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

“…….”

“…….”

코니와 미아는 입조차 벙긋거리지 못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위로하기엔 엄청난 비밀이 밝혀졌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욕하기엔 레오니에가 지닌 상처가 너무 컸다.

두 하녀는 이도 저도 못한 채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늘 씩씩하고 밝게 웃는 아가씨가, 기운이 넘치다 못해 천하의 주인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장난을 치시는 아가씨가 절망에 빠졌다.

어린아이에게 절망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차라리 그 단어 하나로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두 하녀는 생각했다.

이건 절망 그 이상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코니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망가질 것처럼 위태로운 레오니에를 더는 바라볼 수 없었다.

‘이럴 수는 없어.’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등골을 스쳤던 오싹한 감각이 사라질 기미조차 없었다.

코니는 저도 모르게 팔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그 사람이……!’

코니는 심지어 코니에와 차까지 마신 사이였다. 레오니에를 따라 고아원에 몇 번 들른 적이 있는데, 이름이 비슷하단 이유로 서로 친하게 지내자며 즐겁게 떠들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가짜였다니. 심지어 자신이 돌봐야 할 고아원 아이들을 팔아 버렸다니.

‘그럼 지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펠리오가 저택 지하 감옥에 가둔 고아원 원장과 선생님, 관계자들도 분명 아이들을 학대한 정황이 있었다. 그들도 분명 죽을죄를 지었는데.

순간,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코니에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우욱.”

코니는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입을 서둘러 막았다. 옆을 슬쩍 보니 미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충격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었다.

아니, 공포였다.

그때까지 레오니에는 여전히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았다. 아이의 검은 눈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퀭하게 말라 있었다.

조그만 두 손을 꼭 쥐고 무릎 위에 올린 채.

“아빠……!”

레오니에는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을 불렀다.

* * *

“집사님!”

하인 한 명이 카라를 찾았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마차가 도착했어요.”

“저녁 식사 전에 맞춰 오셨군.”

“그럼 주방장한테 물 좀 끓이라고 해야겠어요.”

함께 있던 펠리카가 싱긋 웃으며 부엌으로 갔다. 저녁 식사 전에 외출하고 돌아온 몸을 따뜻하게 덥힐 차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대는 나와 함께 가지.”

카라는 하인과 함께 현관 밖으로 나가 마중을 준비했다. 마차에서 내려올 때 디딜 작은 계단을 미리 가져다 놓고, 밖을 돌아다니면서 입은 망토 대신 실내에서 걸치는 얇은 망토를 챙겼다.

“오늘은 많이 늦으셨네요.”

하인이 점점 가까워지는 마차를 보며 즐겁게 말했다.

“저녁 식사 전에 너무 많이 군것질하고 오신 거면 어쩌나, 싶어요.”

“그건 조금 곤란한데.”

카라가 쓰게 웃었다. 주방장이 오늘은 아가씨가 가장 좋아한다는 크림소스에 뭉근하게 끓인 닭고기를 만들 거라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주방장님이 울지도 모르겠어요.”

하인도 따라 웃었다.

곧 마차가 도착했고, 하인이 마차 바로 아래에 작은 계단을 내려놓았다.

“아가씨 다녀…… 으악!”

문을 열어 주고 인사하던 하인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작은 덩어리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뛰쳐나온 레오니에는 곧장 저택 안으로 달렸다.

“아가씨, 잠시만요!”

“뛰면 다치세요!”

“누가 아가씨 좀 잡아 주세요!”

미아가 놀라 넘어진 하인을 부축하는 사이에 코니가 외쳤다. 카라 역시 당황해 얼떨결에 현관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그대로 집사의 다리 사이를 미끄러지듯 엎드려 통과했다.

“제발 아가씨 좀 붙잡아요!”

코니가 목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외쳤다.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채 레오니에한테 손을 뻗었다. 하나 레오니에는 민첩하게 피했다. 한때 고아원에서 선생님들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솜씨에 건강해진 체력까지 더해지니 누구도 아이를 잡을 수 없었다.

“아빠! 아빠!”

어른들한테서 도망친 틈을 타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찾았다.

집무실에도 가 보고, 거실에도 가 보고, 서재에도 가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페의 침실에도 가 봤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아빠…….”

저택에 도착한 뒤로 계속 뜀박질 한 레오니에가 뒤늦게 거친 숨을 토했다. 헉헉, 내쉬는 숨에서 피 맛이 올라왔다.

이 넓은 저택을, 어른들 손을 피하며 몇 층이나 오르내렸으니 당연히 힘들 만했다.

“아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애타게 불렀다.

“제발, 아빠…….”

“이 사고뭉치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오니에가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루페 방 앞에서 뭐하는 거야.”

펠리오가 흐트러진 숨을 내쉬며 레오니에를 내려다봤다. 평소처럼 단정한 차림새인데, 자세히 보면 손목 소매와 바짓자락에 주름이 가득했다. 쿰쿰한 곰팡내와 비릿한 피 냄새도 났다.

“아빠…….”

레오니에가 울먹였다.

“거짓말이지?”

펠리오가 표정을 굳혔다. 그는 기어코 레오니에가 알게 되었음을 알아챘다.

“코, 코니에 선생님, 아니지?”

“레오.”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 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간절히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긍정을 뜻하는 침묵뿐이었다.

그제야 몸에 힘이 풀린 레오니에가 주저앉았다. 고아원에서부터 지금까지 붙잡았던 긴장이 풀려 버렸다. 펠리오가 서둘러 팔을 뻗어 아이를 받았다. 손에 닿은 아이의 체온이 차가웠다.

“레오.”

말하기에 앞서, 펠리오가 숨을 골랐다.

두 부녀 사이에 어느 때보다 무겁고 심각한 공기가 흘렀다. 펠리오는 차게 식은 아이의 몸을 조심히 끌어안았다.

“레오.”

그리고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망설이는 진실 대신, 레오니에의 이름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불렀다.

펠리오는 고민이었다. 과연 지금껏 알게 된 이 모든 것을 레오니에한테 말해야 할지, 아니면 괜찮다고 덮어야 할지 망설였다.

입양조차 충동에 이끌려 저질러 버린 펠리오마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빠…….”

기어코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옷자락을 꼭 쥐며 훌쩍였다. 예고 없이 몰아닥친 진실이 겨우 행복한 가정을 되찾은 아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레오.”

펠리오가 각오를 다졌다.

“내 딸.”

그리고 말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해.”

모든 걸 말하기 전에, 레오니에한테 결코 잊어선 안 되는 사실 하나를 상기시켰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레오 넌 이 펠리오 보레오티 공작이 유일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딸이라는 걸 기억해야 해.”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

레오니에가 펠리오한테 부탁한 건 딱 하나였다.

“코니에 선생님 입으로, 전부 다 듣고 싶어.”

젖은 눈가를 소매로 스윽 닦으며, 레오니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펠리오는 짧은 한숨과 함께 허락했다.

“하지만 지하 감옥에 내려가는 건 안 돼.”

대신에 안 쓰는 별관에서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지금 지하 감옥은 레오니에한테 보여 줄 환경이 결코 아니었다.

“글라디고 기사단도 안팎으로 배치할 거다.”

“기사단…….”

“모노와 멜레스가 안에 들어갈 거다.”

기사단 중 유일하게 레오니에의 사정을 아는 두 사람만 함께 들어갈 거라고 했다. 나머지는 전부 밖에서 대기할 예정이었다.

레오니에가 조용히 펠리오의 손을 잡았다.

“언제부터, 알았어?”

그리고 물었다. 보아하니 펠리오는 이 모든 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지.”

“어째서?”

“검은색.”

펠리오가 품에 안긴 아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작게 느껴지는 레오니에가 유난히 안쓰럽고 애틋했다.

“네가 품은 검은색.”

어느새 두 사람의 앞에 조그만 별관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본 저택과 달리, 별관은 동화책에 나오는 벽돌 주택 같은 느낌이었다.

“검은색은 보레오티의 피가 흐르는 사람만이 몸에 지닐 수 있는 색이야.”

이젠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자주 들었던 상식을 듣는 순간, 레오니에의 머릿속에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몸속에 있는 맹수의 송곳니를 확인하던 날.

그리고 네가 나의 조카라고 밝혔던 날.

‘검은색은 보레오티 가문에서만 유전되는 특징이다’.

“검은색은 보레오티 가문에서만 유전되는 특징이다.”

똑같은 목소리가 겹쳐졌다.

레오니에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펠리오는 그런 레오니에의 볼을 조심히 어루만지며 눈을 마주쳤다. 아이는 당장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보레오티가 아니어도 검은색을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어.”

제국의 역사에도 극히 드물게 기록되는 일이었다. 지금껏 기록된 보레오티 이외의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이는 다섯 명도 채 안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나량이 아주 많거나, 소드 마스터가 될 자질을 지니었다.

펠리오는 처음엔 레오니에가 그런 부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드문 경우지.”

보통은 검은색을 보면 대부분 보레오티 가문을 먼저 떠올린다. 벨리우스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통용되어 오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에 기록된 저 극소수는 모두 당대 보레오티 공작에게 혈연이 맞는지 확인을 받았다. 펠리오가 레오니에한테 그랬듯, 송곳니 간의 공명을 통해 확인했다.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보레오티는 맹수의 송곳니를 지녔으니까.

“그런데 왜.”

그만큼 검은색은 보레오티라는 상식이 일반적이었다.

“하나 왜.”

펠리오를 의문에 들게 한 건 바로 그 점이었다.

“레오 네가 있던 고아원은 단 한 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내포한 의미는 무척 많았다.

펠리오는 고아원에서 보았던 원장의 책상 위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인간이 대낮부터 책상 위에 위스키 병이라니.

“운영 비용을 제 술값과 유흥비로 탕진하던 놈들이, 왜 레오 너를 보고도 내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을까.”

“…….”

“연락했으면 분명 큰돈을 받았을 텐데.”

펠리오가 그렇지 않으냐며 레오니에의 볼에 코를 살며시 문질렀다. 그리고 슬그머니 눈을 맞췄다. 역시나, 불쌍할 정도로 영특한 저의 딸은 드디어 자신의 출생과 고아원이 아주 깊게 연관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가까이 닿는 체온이 차갑고, 얼굴에 난 솜털이 쭈뼛 서 있었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검은 눈은 평소와 달리 빛이 덜했다. 레오니에는 어느 때보다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 제 상태를 들킨 아기 맹수는 도망치듯 아빠 맹수의 어깨에 얼굴을 숨겼다. 펠리오는 그런 딸을 못 본 척하며 계속해서 등을 도닥였다.

“나도 처음엔 그 여자가 뒷배였을 줄은 생각 못 했지.”

“…….”

“레오 널 무척 아껴서, 그래서 널 데려가는 네게 적의를 보이는 줄 알았더니.”

“……이제 됐어.”

조그만 손이 펠리오의 입을 막았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는.”

어느새 별관에 도착한 두 부녀는 잠깐 문 앞에 멈춰 섰다. 곧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글라디고 기사단이 둘러싼 별관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음에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내가 직접 물을게.”

그 안에서는 모노와 멜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죄인 한 명을 사이에 둔 채.

“코니에 선생님한테.”

펠리오와 레오니에가 안으로 들어간 직후, 별관 문이 굳게 닫혔다.

이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건 오로지 그 안에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 * *

사람이 살지 않는 별관임에도 내부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보레오티 사용인들이 매일 쓸고 닦고 세심하게 관리한 덕이었다.

덕분에 펠리오는 굳이 창문을 열어 싸늘한 공기를 들게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몰라 자신의 재킷을 벗어 아이에게 손수 입혔다.

“아빠.”

“응.”

“저기…….”

아이의 팔 길이에 맞게 소매를 걷어 주던 펠리오가 물끄러미 어느 곳을 바라봤다.

레오니에가 가리킨 그곳엔, 모노와 멜레스가 양옆에 서서 감시하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고, 그 틈으로 진물이 흐르는 흉터가 보였다. 머리는 뻣뻣한 돼지 털처럼 엉망이었고, 오랫동안 씻지 않은 몸에선 역한 냄새가 풍겼다. 그런데도 모노와 멜레스는 표정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같이 갈까?”

펠리오의 물음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부녀는 손을 잡고 걸었다. 코니에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레오니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결국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칫했다.

“선생님……!”

원망스러운 부름이 아이의 입에서 기어코 새어 나왔다.

레오니에는 이제 저 만신창이 죄인이 코니에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받아들였다. 유난히 색이 밝은 갈색 머리 틈으로 보이는 마른 얼굴은 아이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있는 코니에 선생님과 똑같았다.

레오니에는 곧 떨리는 숨을 억지로 내뱉으며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여기까지.”

어느 지점에서 펠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모노와 멜레스의 검이 딱 닿기 직전의 거리였다.

혹시나 코니에가 덤벼들면 당장 저 둘이 검으로 베어 죽이더라도 레오니에한테 닿지 않을 안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

레오니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코니에, 선생님.”

레오니에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코니에를 바라봤다. 약에 취해 미친 사람처럼 풀어헤친 머리 틈으로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레오니에는 점점 슬픔이 사라져 갔다. 자신이 아는 코니에는 언제나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먹을 것을 몰래 아이들에게 나눠 주는 사람이었다. 읽고 쓸 줄 알아야 살 수 있다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추운 날에는 함께 붙어 자신의 체온을 기꺼이 나눠 준 사람이었다.

저렇게 도끼눈을 뜬 채 노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펠리오의 시선이 감히 레오니에를 건방지게 노려보는 코니에를 향했다. 전신을 억누르는 위압감에 코니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자백제 효과는?”

펠리오가 모노에게 물었다. 레오니에가 외출하는 동안, 그는 오르티오 후작에게 받은 자백제를 코니에한테 먹였다. 그리고 여러 정보를 알아냈다.

“반나절이라고 하니, 아직 한두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지독하군.”

보통 자백제는 길어도 한 시간밖에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상의 지속 효과를 보려면 약이 강해야 하고, 그런 약은 마신 사람의 정신을 망가트린다.

즉, 오르티오 후작이 선물한 자백제는 거의 독약 수준이었다.

“그 약을 먹고도 저렇게 버틴다고?”

천하의 펠리오도 대단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과연 훈련받은 전문가는 다르단 건가.”

“저, 전문가? 훈련?”

레오니에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알고 싶으면, 본인에게 물어봐.”

펠리오가 머뭇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묻기 싫으면 안 물어도 돼.”

충분히 이해한다며, 펠리오가 다정히 속삭였다. 코니에를 잠시 살피던 레오니에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데, 이 상황은 교육적으로 문제가 많아.”

“하지만 넌 물어볼 거잖아.”

“아빤 진짜 내가 보통 애가 아니어서 다행인 줄 알아.”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은 레오니에가 평소처럼 투덜거리듯이 푸념했다. 펠리오는 그 건방진 말대꾸에 크게 안도했다.

그러곤 모노와 멜레스에게 고갯짓을 했다. 곧 코니에의 입에 물렸던 재갈이 풀렸다. 동시에 레오니에가 짧게 숨을 골랐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레오니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처음엔 그렇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울부짖었는데, 지금의 레오니에는 태연하다 못해 지금 이 순간이 누군가 그린 그림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다 꿈 같았다. 그 탓에, 덤덤히 건넨 인사엔 온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돌려 묻지 않을게요.”

문득 레오니에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건 뭣도 없는 것들이 있는 척하려고 지랄하는 거나 똑같아.’

작년 겨울, 저에게 친모에 대해 말해 주던 펠리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을 저렇게 털어놓는 인간이 다 있나, 싶어 기가 막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딴 식으로 돌려 말하는 건 뭣도 없는 거들이 있는 척하려고 지랄하는 거니까요.”

아기 맹수는 아빠 맹수와 똑같은 대사를 입 밖으로 꺼냈다.

“선생님은 누구예요?”

“…….”

“언제부터 우릴 속인 건가요?”

“……흐흐!”

음산한 웃음이 들렸다. 광기가 스며든 눈웃음이 한밤중의 뱀처럼 선연하게 번뜩였다.

“니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아이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이곳에 ‘니아’라는 이름을 지닌 아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레오니에는 또 하나를 깨달았다. 코니에는 단 한 번도 레오니에를 ‘레오니에’라고 부르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단 핑계로 늘 ‘니아’라고 불렀다.

“내 이름은 코니에가 아니란다.”

코니에는 실없는 웃음과 함께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지독한 심문 탓에 몸이 성치 않아 고개 한 번 드는 데도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결국 코니에는 고개를 들었다.

“사우라, 라고 해.”

자백제의 효과 덕에, 코니에는 별 저항 없이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난 널 ‘언제부터’ 속인 게 아니야.”

코니에가, 아니, 사우라가 싱긋 웃었다.

“처음부터였어.”

“처음부터?”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느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은, 레오니에가 이전에 알던 코니에 선생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 광기가 스며들어 오싹함을 자아냈다.

“내가 네 친모를 죽였단다.”

시작은 아주 흔한 연애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귀족 영애는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와 사랑에 빠졌고, 가문의 반대를 뿌리치고 그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다. 때마침 하늘에서도 폭우가 내렸고, 사랑하는 두 연인은 범람하는 강물을 이용해 무사히 북부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강을 따라 달리던 마차를 멈춰 세우고, 그대로 마차를 강에 빠트렸지.”

사우라는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상세하게 설명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마차를 몰았거든.”

즐거운 어린 시절을 추억하듯, 사우라는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 옆을 지키고 있던 모노와 멜레스는 소름이 끼쳤다. 이미 당사자의 입에서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지만, 다시 들어도 오싹한 감각이 몸을 기어올랐다.

‘사람인가?’

멜레스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렇게나 인자한 미소로 아이들을 돌보았던 모습은 분명 진짜였다. 그런데 실상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라니.

오히려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결코 저런 짓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나뭇잎 속에 숨어 똬리를 튼 발칙한 뱀을 보는 기분이었다.

뱀은 쉴 틈 없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나의 주인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셨어.”

“……주인님?”

“그래, 나의 하나뿐인 정인이란다.”

니아 너도 알지?

사우라가 초점이 맞지 않은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 사람이, 내 친부야?”

레오니에는 토기가 밀려들어, 마른침을 억지로 꿀꺽 넘기며 물었다. 어느새 레오니에는 상대에게 선생님이란 호칭도, 존대도 다 집어치웠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사람이 아닌 것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섬찟한 소름에 펠리오가 걸쳐 준 재킷을 꼭 쥐었다.

“니아의 친부지.”

사우라는 거의 혼잣말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자백제의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자백제의 강력한 효과 덕에 물어보는 질문에는 반드시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듣는 이의 속을 후련하게 해 주는 건 아니었다. 레오니에는 점점 속이 울렁거렸다.

“내 친부는 어떤 사람이야?”

“근사하고 멋진 분이셨지.”

마치 오랫동안 가슴에 품은 첫사랑을 고백하는 소녀처럼, 사우라는 볼을 수줍게 물들이며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아, 근사한 분.

아름다운 백조.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한참을 중얼거리는 사우라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다음 권에 계속.]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