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함께 북부로
4개월.
레오니에가 북부를 떠나 서부와 수도에 머물렀던 기간이었다.
‘잠깐 머물다가 다시 북부로 갈 줄 알았는데.’
거울 앞에 선 레오니에가 자신의 옷차림을 가볍게 살피며 생각했다. 북부를 떠났을 땐 잠옷 바람이었지만, 그땐 꽃망울이 피기 직전이었던 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운 여름이었다. 아이가 입은 얇은 셔츠와 반바지가 그 증거였다.
‘수도에서 오래 머물렀네.’
북부를 떠난 지 벌써 4개월이 넘었지만, 수도에서만 지낸 기간은 서부에서 지낸 1개월을 빼면 딱 3개월이었다. 무려 1년 중 4분의 1을 이곳에서 지낸 거였다.
“아가씨, 햇살이 뜨거우니 모자 쓰실까요?”
“어차피 마차 타는데?”
“그래도요.”
“에이…….”
레오니에가 투덜거리면서도 코니가 씌워 주는 모자를 얌전히 썼다. 신문 파는 아이들이 쓸법한 둥글고 얇은 모자였다. 모자를 쓰기 무섭게 레오니에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정수리 위로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시원해!”
“주인님이 챙겨 주셨습니다.”
“아빠가?”
“마법이 걸린 모자랍니다.”
귀족 아이들은 더운 여름에는 이렇게 머리에 통풍 마법이 걸린 모자 같은 걸 쓰고 다닌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상류층 귀족 자제들만 가능할 만큼 값비싸다고.
“와아…….”
레오니에가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코니는 흐뭇한 모습으로 이를 지켜봤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주인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끼시는 모양이었다. 일개 하녀인 자신도 주인님의 아가씨 사랑에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는 마도구 수집가인가?”
왜 이렇게 많이 사는 거래?
레오니에가 괜히 툴툴거렸다. 코니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레오니에가 저렇게 투덜거려도 무슨 마음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간 옆에서 아가씨를 돌봤기에 자신 있었다.
‘아가씨께선 기뻐하시는구나.’
슬그머니 올라간 입꼬리와 모자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이 증거였다.
“하여튼, 떠날 거면 미리 말을 해 줘야지.”
레오니에가 흥흥, 거리며 코니에게 그렇지 않냐고 물었다.
“수도에 정이 많이 드셨죠?”
코니가 어떤 마음인지 다 안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조금?”
레오니에는 코니의 다리에 기댄 채 애꿎은 바닥을 신발로 통통 찍었다. 사실은 아주 많이 정이 들었다.
“트라도 보고 싶을 것 같고, 다른 하녀 언니들도 보고 싶을 것 같아.”
“저도요.”
“그리고 주방 요리사들도 보고 싶고, 정원사들도 보고 싶을 거야.”
다들 레오니에에게 무척 잘해 준 사람들이었다.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레오니에는 벌써부터 쓸쓸했다.
“편지를 써 주면 좋아할 거예요.”
코니가 말했다.
“모두한테 다?”
“트라 집사님께만 따로 써서, 모두의 안부를 묻는 건 어떨까요?”
“그럼 섭섭하지 않을까?”
“전혀요!”
그럴 사람은 이곳 저택에 한 명도 없다며 코니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모습에 레오니에도 곧 안심한 듯이 씩 웃었다.
“그럼 내려가실까요?”
“응.”
두 사람은 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방을 둘러봤다.
“여기도 내 방이야.”
레오니에가 자주 앉아서 책을 읽었던 테이블과 의자를 손으로 매만졌다.
“나중에 또 올게.”
그리고 포옹하듯 꼬옥 안았다. 코니가 따스한 눈길로 사랑스러운 꼬마 아가씨를 지켜봤다.
방을 나서 1층 현관 홀로 내려가니,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이 나와 있었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영차영차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코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넘어지면 당장 잡을 준비를 했다.
“아가씨.”
계단 바로 밑에서 트라가 손을 내밀었다.
“떠나시는 날까지 씩씩하십니다.”
“그냥 다들 나와 있는 게 신기해서요.”
“그거야 주인님과 아가씨가 수도 저택을 떠나시는 날이지 않습니까.”
트라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특히 다들 아가씨가 가시는 걸 서운해하신답니다.”
“아빠는 안 서운하고요?”
“그건 비밀이랍니다.”
들켜서는 안 된다며 트라가 손으로 입까지 가리며 소곤거렸다. 레오니에가 깔깔 웃었다.
그때였다.
“레오.”
펠리오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아빠 맹수가 활짝 열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레오니에가 쪼르르 달려갔다.
“이거 아빠가 준 거!”
아빠의 시선이 모자에 닿아 있다는 걸 알아챈 레오니에가 모자를 벗어 보여 줬다. 모자를 벗자마자 문 바깥의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모자를 건네받은 펠리오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레오니에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응?”
아기 맹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울리네.”
한마디 툭, 내던진 펠리오가 모자를 도로 씌워 주며 말했다.
“너 줄게.”
“원래 나 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
“안 어울리면 도로 가져가려 했지.”
“우와…….”
줬다 빼앗는 게 가장 치졸한 짓인데, 레오니에가 오만상을 썼다. 그래도 모자는 뺏기기 싫어서 두 손으로 철통같이 방어했다. 그 모습에 펠리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빼앗아.”
“그걸 어떻게 알아.”
“진짜야.”
“그럼 안아 줘.”
레오니에가 팔을 뻗으며 칭얼거렸다.
“…….”
펠리오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를 번쩍 안았다. 과거의 연애가 마음에 걸렸던 펠리오는 괜히 레오니에한테 미안해서, 그만 애정 표현을 스스로 자제했다. 심지어 밤중에 찬물 샤워만 무려 세 번이나 했다.
“헤헤, 아빠다. 아빠.”
레오니에는 떨어질세라 아빠 목에 냅다 팔을 걸었다.
“그렇게 좋으냐.”
“응!”
허공에 두둥실 뜬 다리가 들썩거렸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려고 한참 머뭇거리던 커다란 손이 이내 체념한 것처럼 토닥거렸다. 레오니에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너,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 줄은 알아?”
펠리오가 물었다. 그는 오밤중 자신의 과거를 수도 없이 되돌아봤다. 저는 아이에게 변태라고, 제발 근육 좀 작작 밝히라고 탓할 자격이 없었다. 전부 핏줄이었던 거다.
“쓸데없는 생각이겠지.”
레오니가 바로 반박했다.
“……너 그 말투 누구한테 배웠어.”
“누굴 것 같아?”
한 사람밖에 더 있겠어?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이 저택에서 레오니에한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를 안고 있는 펠리오가 유일무이했다.
할 말 없는 아빠는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다고 나를 피했어?”
어제 하루 내내 이상했던 아빠를 떠올리던 레오니에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도 안 잡아 주고, 안아 주지도 않고, 볼 뽀뽀도 안 해 주고…….”
너무 서운했다며 솔직히 말했다.
“가족인데.”
아기 맹수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미안했다.”
섭섭한 생각이 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펠리오가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저 혼자 진지하게 고민했던 하루 동안 아이가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그거 봐, 미안했지?
“이제 슬슬 가자.”
“말 돌리긴.”
레오니에가 아빠 이마를 가볍게 찰싹 때렸다.
하지만 펠리오 말대로 이제 슬슬 가야 할 때였다. 여기서 더 지체하다간 날이 더워져서 말들이 달리기 힘들어질 수 있었다. 특히 추운 북부에서 나고 자란 저 큰 말들은 더욱 그랬다.
“주인님, 아가씨.”
트라가 사용인들을 대표해서 인사했다.
“부디 조심히 가십시오.”
“나 없는 동안 저택을 부탁한다.”
“우리 없는 동안!”
레오니에가 저를 잊지 말라며 잔소리했다.
“……우리 없는 동안, 저택을 부탁한다.”
주어를 복수형으로 고친 펠리오가 이제 되었냐는 듯이 눈을 가볍게 흘겼다. 그제야 만족한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티격태격이 저택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못 볼 생각에 트라는 벌써 서운했다.
“그대도 취향 참 이상하군.”
펠리오가 입꼬리를 짓궂게 비틀었다. 트라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아가씨.”
트라의 시선이 레오니에를 향했다.
“그 모자는 주인님께서 어린 시절에 즐겨 쓰셨던 모자랍니다.”
“아빠 거였어요?”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모자를 만지며 펠리오를 바라봤다. 그게 정말이냐는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펠리오는 기어코 시선을 피해 버리고는, 왜 그런 걸 굳이 아이한테 말하냐며 트라를 노려봤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트라가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그의 젖형제다운 배짱이었다.
“모자를 쓰신 아가씨를 보니, 그 시절의 주인님이 떠오릅니다.”
“마, 많이 닮았어요……?”
레오니에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가족이시니까요.”
트라가 말했다.
“가족은 닮는 법이지요.”
“…….”
“주인님의 하나뿐인 따님이신데, 안 닮을 리가 있겠습니까.”
진심 어린 말에 레오니에는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샌들 덕에 밖으로 삐져나온 발가락도 꼬물꼬물 움직였고, 괜히 부끄러워 얼굴을 아빠의 어깨에 숨기며 몸을 흔들었다.
‘내가 아빠 닮은 건 당연한데!’
오늘따라 그 말이 왜 이렇게도 기쁜지, 레오니에는 유난히 수줍어했다. 아무래도 펠리오가 즐겨 썼다는 모자를 물려받아서 그런 것 같았다. 왜냐하면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원작인 소설에서도 그의 과거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솔직히,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펠리오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옛날이야기를 듣기도 뭐했고, 본인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 보니 레오니에도 굳이 물어볼 생각을 안 했다. 그래도 역시 이렇게나마 간접적으로 아빠의 옛날을 알게 되니 조금은 기뻤다.
레오니에는 모자를 소중히 쓰다듬었다. 딸기 우유 맛 사탕과 검은 사자 인형 다음으로 소중한 보물이 생겼다.
“다음에 더 좋은 거 사 줄게.”
괜히 무안해진 펠리오가 낡은 모자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며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아이가 모자를 소중히 여겨 주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트라의 입가에 진심으로 다행이란 생각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아아, 주인님께도…….’
드디어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가족이 생기셨구나.
“아가씨를 뵙게 되어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며, 트라가 허리를 숙였다.
“부디 가시는 길 조심하십시오.”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트라를 따라, 다른 사용인들도 주인님 부녀가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두 부녀는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이 탄 마차 뒤로 북부에서 함께 온 사용인들이 따로 타는 마차와 짐을 싣는 마차가 여러 대 있었다. 레오니에는 얼핏 본 짐마차가 올 때보다 훨씬 많은 짐을 실었다는 걸 알아챘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미니,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가는 길을 지켜봤다.
“…….”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바라봤다. 펠리오가 눈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문을 벌컥 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아주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 다녀올게!”
우렁찬 아기 맹수의 울부짖음에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북부도 집이고, 여기 수도 저택도 집이야!”
어느새 레오니에한테는 이렇게 크고 훌륭한 집이 두 채나 생겼다. 북부와 수도, 어느 곳을 저울질하며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곳이었다.
“잘 보살펴 줘서 고마워!”
레오니에가 열심히 팔을 흔들었다.
“편지 쓸게! 나중에 또 봐!”
건강해야 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레오니에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외쳤다.
“고마웠어!”
빠빠!
곧 마차가 출발했다.
사용인들은 레오니에가 탄 마차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몇몇은 손까지 흔들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
그 속에서 트라가 눈물을 조용히 훔치고 있었던 건 모두의 비밀이었다.
* * *
보레오티 마차가 수도를 벗어나 출입 관리소에 도착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레오니에는 빠르게 지나가는 마차 밖 풍경을 조용히 바라봤다. 드문드문 있던 귀족 저택들을 지나니 빼곡하게 붙은 상가 건물들과 주택들이 나타났다. 거기까지 와 보니 어느새 수도 성벽이 코앞이었다. 그리고 곧장 출입 관리소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관리소 직원들과 경비경들이 보레오티 마차를 보자마자 지레 겁을 먹고 허둥거렸다. 말이 푸르르, 투레질하는 것만으로도 흠칫거렸다.
‘학습 능력이 없나?’
레오니에는 한심하단 듯이 바라봤다. 몇 달 전에도 보았을 말이고, 그때 직원들이 다 바뀌었을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어설프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인세레아 언니가 일을 정말 잘하는 거구나.’
그 깐깐한 자칭 상식인 루페마저 인정할 정도니, 인세레아의 실력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스토커로 타락해 버린 게 신기할 정도였다.
‘북부에선 잘 지냈으면 좋겠다.’
자식의 재능을 알아채지 못한 부모 밑에서 벗어났으니, 보레오티에서 그 실력을 한껏 펼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곧 마차가 출입 관리소를 통과했다.
“이번에도 서부로 가?”
레오니에가 독서 중이던 펠리오에게 물었다.
“지체할 틈이 있나.”
펠리오가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수도에서 북부로 곧장 가는 게이트는 황궁 안에 있으니 쓰기도 싫고, 남부로 가자니 찜통더위는 질색이고, 동부는 이 마차로 가기엔 길이 좁고.”
친절한 아빠는 서부 게이트로 통과하는 이유를 차근히 설명했다. 그런 와중에 황궁 안에 있다는 북부 게이트를 쓰지 ‘못한다’가 아니라,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참으로 뻔뻔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마음만 먹으면 황궁 안 게이트도 사용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저 황궁에 사는 황제나 이런저런 것들이 걸리적거리니까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정답일 터였다.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게이트에 도착했다. 넓은 들판 가운데에 떡하니 세워진 기둥 두 개가 누군가의 손에 잡아 비틀린 것처럼 휘어져 있었다.
“손잡아 줄까?”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펠리오가 얄궂게 질문했다.
“뭐래, 나랑 손잡고 싶으면 솔직하게 말해.”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꼈다. 펠리오는 그 모습이 가소롭고 귀여웠다.
“또 멀미한다고 겁먹지나 말고.”
“나 이제 멀미 안 하거든?”
“괜히 마차 더럽히지나 마.”
“내가 설령 한다고 해도, 아빠 옷에 조준해서 토할 거야.”
두고 보라며 레오니에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하필 허세를 떨어도 저런 더러운 표현을 쓰다니, 펠리오가 한숨을 작게 흘렸다. 하여튼 말 한마디를 질 생각이 없었다. 물론 펠리오는 그 당돌함이 아주 좋았다.
“그러면서 내 옆으로 왜 오는데?”
펠리오가 은근슬쩍 자신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레오니에를 내려다봤다.
“아빠가 나랑 너무 앉고 싶은 것 같아서.”
흥흥, 레오니에가 아빠 팔뚝에 슬그머니 기대며 아닌 척 투덜거렸다.
“나랑 같이 앉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
“그런 건 아니고.”
레오니에가 새침을 떠는 사이, 마차는 게이트를 수월하게 통과했다. 펠리오는 아이가 제게 기댄 채 안심하는 모습을 못 본 척했다. 역시 처음 게이트를 넘을 때 멀미했던 것이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커다란 손이 조용히 레오니에의 등을 느릿느릿 쓸었다.
출입 관리소가 있던 들판은 순식간에 수풀이 우거진 숲으로 바뀌었다. 레오니에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울창해진 숲은 더운 여름을 실감하게 했다. 하지만 반대로 나뭇잎이 무성해진 덕에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을 피할 수 있었다. 말들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펠리오는 다시 출발하는 대신,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이상이 생긴 곳은 없는지 마차를 살피라고 지시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말들도 무사했고, 짐도 뭐 하나 잃어버린 것 없이 그대로였다.
다만 사용인들이 탄 마차 창문 틈 쪽으로 금이 살짝 나버렸다. 크게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서 북부에 돌아가면 수리하기로 결정했다.
“오오, 이게…….”
레오니에는 파보의 도움을 받아 번쩍 들린 채 금이 갔다는 마차 창문을 살폈다.
“이게 그거지요? 게이트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
“맞습니다.”
게이트 내부 작용 중 하나인 일그러짐이라고 파보가 설명했다.
“사실 작용이라는 말보다는, 부작용이라는 표현이 더 옳지만요.”
“부작용?”
“게이트를 통과할 때 생기는 좋지 않은 작용들이니까요.”
게이트가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지 밝혀지지 않은 기현상인 만큼,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들 역시 밝혀진 바가 크게 없었다.
“하지만 아주 위험하단 건 확실하죠.”
파보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일그러짐, 정지, 존재 부정.”
“일그러짐은 이거죠?”
레오니에가 금이 간 마차 창문을 가리켰다. 파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는…….”
“……쉽게 말해 시공이 연결된 장소입니다.”
그때 프로보가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다가 바로 때맞춰 나타난 것이다.
“야.”
파보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정작 프로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게이트의 작용에 대해 신이 난 채 설명했다.
“동부 마법사들은 게이트에 관심이 많답니다. 지금 이렇게 게이트를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전부 마법사들의 연구 덕분이지요.”
“이 자식 진짜…….”
파보가 혀를 내둘렀다.
“야, 넌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야. 글라디고 기사단 기사!”
“정확히는 글라디고에 하나뿐인 마검사지.”
“미친놈, 그래 봐야 송곳니 앞에서는 다 같은 미물일 뿐이야.”
“그래도 내가 너보단 세지.”
“하, 이 무슨 황제가 개과천선하는 소리야.”
어느새 두 기사가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봤다.
“쯧쯧.”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마침 근처에서 펠리오가 바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새 아빠가 책 읽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저렇게 독서를 좋아했나?’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책 읽는 모습 여러 번 보았지만, 저렇게 책에서 손을 떼지 않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아빠, 뭐해?”
아기 맹수가 은근슬쩍 아빠 맹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독서 중이니까 조용히.”
귀찮은 척 말하면서도 펠리오는 책을 들고 있던 팔을 살짝 벌려 레오니에가 쉽게 들어오게 배려해 줬다. 심지어 아이가 무릎 위에 앉고 싶어 하니 군말 없이 허리를 감싸 올려 줬다.
아빠의 듬직한 가슴에 기댄 레오니에가 헤실헤실 웃었다. 펠리오가 책등으로 아이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파보하고 다 놀고 왔어?”
“그 오빠가 갑자기 프로보 오빠랑 눈 맞았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표현은 내가 좀 삼가라고 했지?”
펠리오가 가볍게 경고했다.
비록 지금 수도 저택을 떠났다고 해도, 여전히 보레오티 가문은 레오니에의 정서 교육을 위한 바른말 실천을 시행하고 있었다. 여기엔 레오니에가 죽어라 좋아하는 그런 부류의 표현 자제도 포함되었다.
“그치만, 저기 봐.”
레오니에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곳을 가리켰다. 펠리오도 그제야 책에서 눈을 떼고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파보와 프로보가 서로의 몸을 더듬거리며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더니 와락 껴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저게 보통 일이야?”
“보통 일인데.”
한참 바라보던 펠리오는 오히려 레오 널 이해 못 하겠다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에는 그저 기사들이 서로의 근육을 자랑하면서 우정을 도모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열린 마음으로 다시 봐.”
레오니에가 조금 더 집중해 보라며 두 기사를 가리켰다. 탐탁지 않지만 펠리오는 딸이 원하는 대로 파보와 프로보를 다시 바라봤다.
둘은 나름 쾌활한 표정을 지은 채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프로보, 난 너의 근육이 항상 부러웠어.”
“파보,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런데 목소리가 많이 이상했다. 상당히 톤이 높고, 귀여웠다.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프로보가 파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씩 웃었다.
“사실 난 너의 상완근의 일부가 되고 싶어…….”
“이 멍청이! 그럼 우린 함께 근육을 단련할 수 없잖아!”
“하지만……!”
“아무 말 하지 마, 나의 아기 공작새.”
“은빛 코끼리…….”
두 기사는 곧 마차 뒤로 들어갔다.
“…….”
지금까지 펠리오가 들은 대화 내용과 저 두 기사의 표정이나 행동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목소리도 완전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펠리오가 착잡한 시선으로 아이를 내려다봤다. 혼자 마음대로 엉망진창인 대사를 연기하던 레오니에가 입술을 쭉 내밀어 쪽쪽, 뽀뽀하는 소리까지 완벽하게 흉내 내더니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어때?”
아빠와 눈이 마주친 아기 맹수가 빵긋 웃었다. 공감을 기대하는 눈이었다.
“충분히 의심되지?”
“그러게.”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이마를 쓸어 주며 말했다.
“네 인성이 의심된다.”
“아니, 진짜 열린 마음으로 보라니깐?”
“레오 네가 너무 열려 있는 거야.”
넌 좀 닫을 필요가 있다며, 펠리오가 폐쇄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개방이라고 다 좋진 않았다.
* * *
숲을 벗어난 보레오티 마차가 멈춘 곳은 그 근처에 새워진 저택 앞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가 물었다. 달리는 동안 잠시 졸았던 아이의 뒤통수가 엉망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간에 펠리오를 바라봤다. 그런 와중에도 손에는 아빠가 선물해 줬던 동그란 모자를 꼭 쥔 채였다.
“별장.”
“별장?”
“보레오티 소유지.”
“소머리?”
편육 만들게? 잠결에 제대로 못 들은 레오니에가 입맛을 다시며 웅얼거렸다. 펠리오는 다시 말하려다가 그냥 아이를 번쩍 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락받고 준비해 두었습니다.”
별장 안으로 들어서니 웬 중년 부부가 사람들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별장 관리인이었다.
“아이 방은 어디 있지?”
펠리오는 가장 먼저 레오니에의 잠자리부터 챙겼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손님방 중 하나를 아가씨께서 지낼 방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 연락이 급했으니 어쩔 수 없지.”
펠리오는 크게 상관치 않았다. 애초에 수도를 떠나기 바로 전날에 별장에 들를 테니 준비하라고 지시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방을 확인한 펠리오는 그대로 침대에 레오니에를 눕혔다.
“편육엔 소주지…….”
자리에 눕자마자 몇 번 뒤척이던 레오니에는 알 수 없는 잠꼬대와 함께 곯아떨어졌다. 아이가 더는 잠꼬대하지 않는 걸 확인한 펠리오는 코니와 미아를 불렀다.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깨우지 말도록.”
그리고 레오니에가 조금 더 자기 편하도록 옷을 갈아입히라고 말하며 방을 나왔다. 식사가 준비될 동안 그도 잠깐 쉴 겸 소파에 앉으려던 찰나였다.
“주군.”
멜레스가 다가왔다.
“부단장으로부터 온 연락입니다.”
“모노한테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고 합니다.”
주어를 비롯해 많은 것이 생략된 보고였다. 하지만 펠리오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충분하다 못해 ‘이제야 겨우’라는 듯이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대들은 수고했어.”
오히려 예상 이상으로 지독한 게 그쪽이었다며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일이 많군.’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문지르는 동작이 느릿했다.
펠리오는 자신이 보레오티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들을 빠르게 떠올렸다.
‘서류는…….’
수도에 있을 때부터 중요한 일들을 조금씩 처리했으니 올라가면 의외로 쌓인 일들은 별로 없을 거다. 마물 사냥이 시작될 겨울까진 조금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거기다 의도치 않은 새 직원까지 고용했으니 루페의 효율도 올라갈 테고. 즉, 서류 따위로 펠리오가 힘들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손목시계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특허를 이미 수도에서 전부 다 해결하고 왔다. 서두르는 편이 좋지만, 다른 것과 비교해 급할 건 아니었다.
거기다 이 사업은 레오니에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판매나 유통 관련 일이야 펠리오와 어른들이 한다지만, 손목시계 도안 등을 비롯한 중요 아이디어는 전부 레오니에가 주도해서 낼 예정이었다.
그러니 이 역시도 펠리오가 당장 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마물 사냥도 연례행사와 같고, 그 외의 일도 전부 저의 상정 아래 해결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이런 게 아니었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라…….’
조금 전 멜레스가 보고했던 그 연락, 북부에서 조용히 진행 중인 그것이 펠리오의 심기를 거스르는 가장 큰 문제였다.
“후우…….”
문득 멈춰 선 펠리오가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에 자신이 들어갔던, 레오니에가 세상 모른 채 쿨쿨 잠이 든 방이었다.
“레비페스 경.”
여전히 시선을 아이가 잠든 방에 둔 채, 펠리오가 말했다.
“북부엔 언제쯤 도착할 것 같나?”
“최소 닷새 후라 예상됩니다.”
멜레스는 레오니에가 함께한다는 점을 상정하고 말했다. 많이 건강해졌다곤 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보레오티 마차가 아무리 편하더라도 오랫동안 승차하는 건 아이에게 힘든 일이었다.
레오니에가 고아원에서 입양되고 북부로 갈 때도 그 정도 걸렸고, 이후 북부에서 리네 영지로 갈 때도 사나흘 정도 걸렸다.
“……그렇군.”
펠리오는 멜레스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했다.
“그럼 좀 놀다 갈까.”
며칠 정도는 서부에서 놀다 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레오니에가 서부 바다와 숲을 좋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차피 북부로 가도 아이가 할 놀이가 많지 않았다. 겨울은 금방 오고, 폭설이 쏟아지면 외출은 꿈도 못 꾼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번 더 들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연락을 전하러 온 기사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책을 집으며 펠리오가 물었다.
“아직 있습니다.”
“그럼 가서 이렇게 전하게.”
절대 죽여선 안 된다고.
소파에 기대 누운 펠리오가 책을 펼치며 말했다. 멜레스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후 자리를 떠났다.
곧 책장이 느릿하게 펄럭거리며 넘겨지는 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조금 전 나누었던 대화가 찰나의 신기루였던 것처럼.
실컷 자고 일어난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서 반가운 제안을 들었다.
“소풍 갈래?”
“응!”
북부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저기 들러 놀다 오자며, 펠리오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레오니에는 환한 미소와 함께 흔쾌히 승낙했다.
아이는 곧장 책장에서 ‘서부의 관광 명소’라는 제목의 책을 뽑아 왔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같이 보자며 책을 스윽 내밀었다.
“그렇게 좋으냐.”
살짝 어이가 없어진 펠리오가 웃음을 점잖게 흘렸다.
“아빠랑 놀러 가는 건 귀한 거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해.”
시간 날 때면 자주 광장에 데려가 주지 않았냐며 펠리오가 반박했다. 거기다 리네 백작저에서 머물 때는 단둘이 바다에도 놀러 갔었다. 그러나 아기 맹수는 손가락을 얄밉게 흔들며 쯧쯧, 혀를 찼다.
“일곱 살 꼬꼬마의 놀이 욕망을 우습게 보지 마.”
고작 동네 마실과 바다 나들이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레오 넌 꼭 그런 단어를 쓰고 싶냐.”
“뭐? 욕망?”
레오니에가 책을 펼치며 물었다.
“아빠, 진짜 그런 사소한 거로 징징거리면 멋없어. 그리고 욕망이란 건 나쁜 단어가 아니야. 삶의 원동력이라고.”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욕망을 품고 있다며, 레오니에가 가슴에 손을 얹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엄중히 말했다.
“핑계도 좋다.”
하나 펠리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그저 자신의 변태 취향을 변명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으응, 남자가 좀스럽게.”
“섬세한 거야.”
“북부의 남자라면! 시원시원하게 넘기는 대범함도 있어야 해.”
“그랬다간 최악의 변태가 태어날 것 같아서 말이다.”
이미 늦은 걸지도 모르지만.
펠리오는 어딘가 아련한 시선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아이씨…….”
시선에 짜증이 난 레오니에가 윗입술을 불만스럽게 씰룩거렸다. 그런데 더 짜증 나는 건, 뭐라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다는 거였다. 불행하게도 아기 맹수는 자신의 취향이 조금 독특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 진짜 아빠가 너무 좋은데, 놀리는 건 싫어.”
“놀리다니. 걱정이지.”
“얄미운데 잘생겨서 더 짜증 나.”
“짜증 나면 집 나가.”
“그건 싫어.”
레오니에가 펠리오 팔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재산은 받아야지.”
“속물 같은 내 새끼…….”
나 아니면 누가 널 이렇게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키울까. 펠리오는 산림욕을 마치고 돌아올 때 구경할 마을을 확인하며 아이의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 * *
북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운 여행길이 되었다.
두 부녀는 호위도 없이 둘이서 산림욕을 하러 숲에 왔다. 도시락은 별장의 사용인들이 샌드위치와 마실 것을 바구니에 담아 준비해 줬다. 그리고 이대로 숲을 통과해 가까운 마을에서 기념품을 살 예정이었다. 별장으로 돌아갈 때 탈 마차는 그곳 마을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숲 엄청 크다!”
“쉿, 조용히.”
맹수 부녀는 말을 멈추고 온전히 숲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했다. 펠리오가 아이의 귀에 손을 가져가 깔때기처럼 둥글게 모았다.
“귀를 기울여 봐.”
레오니에는 아빠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와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작은 동물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 저 높이 있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까지.
아까까지는 전혀 듣지 못했던 다양한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꼭 맛있는 음식을 먹은 기분이야.”
소리를 감상한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음식을 먹어?”
“귀가 입이고, 소리는 맛있는 음식 같아.”
귀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엄청 행복해졌다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아빠, 나 수도 저택에 편지 쓰고 싶은데.”
“밥 먹고 마을에 들러서 한 통 쓸까.”
“그럼 선물도 살래!”
실컷 떠든 맹수 부녀는 곧 커다란 나무 기둥 아래서 점심을 먹었다. 펠리오가 돗자리를 펼치자, 그 위로 레오니에가 데구루루 굴렀다. 그리고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아빠한테 내밀었다.
“아빠 먼저.”
“네가 웬일로…….”
이리 착하게 구느냐고 칭찬하려던 찰나였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손에 쥔 샌드위치와 은근슬쩍 뒤로 숨겨 둔 샌드위치를 번갈아 바라봤다. 하나는 예뻤고, 하나는 살짝 눌려서 소스가 포장지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래, 예쁜 건 너 먹어라.”
“원래 뭐든지 터진 게 맛있어.”
김밥도 옆구리가 살짝 터진 게 맛있다며 레오니에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김밥’은 뭔데.”
못생긴 샌드위치를 순순히 받은 펠리오가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음식 이름이었다.
“어어, 꿈에서 본 건데, 바싹 말린 해초에 간을 한 밥이랑 채소, 햄 같은 걸 넣어서 돌돌 만 거야. 나 엄청 맛있게 먹었어.”
레오니에가 샌드위치 포장지를 열심히 벗기며 설명했다. 곧 조그마한 입 속으로 달콤한 겨자 소스에 절인 닭고기 샌드위치가 한 입 들어갔다.
“해초를 밥에 싼다고?”
해초는 남부에서 종종 샐러드에 넣어 먹고, 밥이란 건 동부가 이국에서 수입해 먹는 별미 중 하나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독특한 조합이었다.
펠리오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맛은 좋았다.
도시락을 해치운 둘은 조금 더 걸어 숲 근처 마을로 갔다. 마을은 작고 소박했지만, 휴양지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 나름 북적거렸다. 펠리오 말로는 리네 영지가 근처에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두 부녀는 검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눌러썼다. 차림새도 평소보다 단출했다.
그러나 아무리 검은색을 감추고 후줄근하게 차려입어도,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맹수 부녀에게로 향했다. 펠리오는 마치 저 혼자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반짝이는 미모를 지녔고,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아빠, 편지지하고 펜 살래.”
“가게 들어갈까?”
“저기에 가 볼래.”
하지만, 정작 맹수 부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상당히 편안하게 돌아다녔다. 수도에서처럼 자신들을 알아보고 쑥덕거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가게에 들어가 숲이 그려진 편지지 세트와 펜, 잉크를 샀다. 그리고 근처 노점 카페에 들렸다. 햇살을 가려 주는 차양 아래 줄지어 세워진 테이블 중에서도, 단연코 저들 부녀가 앉은 자리가 가장 눈에 띄었다.
“……귀족처럼 안 써도 되지?”
편지를 쓰기 전에 레오니에가 물어봤다. 수도 저택 사람들에게 귀족들의 허례허식 같은 표현은 쓰기 싫었다.
“가족이라며.”
마음 편안하게 쓰라며 펠리오가 근처 빈자리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리곤 도시락 바구니를 올려 뒀다.
“그러면…….”
자신들은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했고, 벌써 보고 싶고, 가을 지나면 곧 겨울이니 옷 단단히 입고, 따뜻한 국물 많이 마시고…….
레오니에는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펠리오는 주문한 커피와 함께 챙겨 온 책을 읽었다. 그러다 힐끔 레오니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근데 아빠.”
어느새 편지지 석 장째에 돌입하던 레오니에가 문득 떠오른 사실을 입에 담았다.
“요새 책 많이 읽네.”
레오니에는 서부 게이트를 통과할 때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잠깐 했었다.
‘아빠가 독서를 저렇게 좋아했나?’
북부에서 지낼 적에도 쉰다고 하면 소파에 기대 누워 책을 종종 읽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책을 종일 손에 쥐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잠깐 볼 때마다 독서 중이었다.
“뭐 읽어? 재미있어?”
“편지는 다 썼고?”
“어어, 두 장만 더 쓰고.”
“너 혹시 인세레아한테 옮은 거냐.”
인세레아랑 사이 좋게 지내더니 편지 많이 쓰는 버릇이라도 옮았나 싶었다.
“……아니이!”
다시 편지를 쓰려던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흘겨봤다.
“무슨 책을 그리 읽냐고.”
은근슬쩍 말 돌리지 말라고 가볍게 핀잔을 준 레오니에가 손을 쭉 내밀었다. 읽고 있는 책을 구경하고 싶단 뜻이었다. 아이의 손과 책을 번갈아 보던 펠리오가 이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책갈피 빼지 마라.”
“헤헤, 다른 데 옮겨야지.”
“하여튼 심보하곤.”
펠리오가 책을 건네주었다. 레오니에는 책을 받자마자 표지 제목을 읽었다.
“고대 유적지 조사 보고서.”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런 것도 읽어?”
“독서는 편식하면 안 돼.”
“하여튼 아빠는 잔소리를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지…….”
“너는 내 말에 대꾸를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고.”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책을 마저 살폈다. 책은 산 지 얼마 안 되었는지 표지가 깨끗했다.
“어라?”
그때,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아르데아 선생님?”
“아르데아가 쓴 논문이니까.”
“진짜? 와아!”
생각지 못한 책의 정체에 레오니에가 흥분했다. 일전에 학술원과 아카데미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르데아가 가정사는 문제가 많아도 실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그리고 그가 가르친 수제자는 크게 성공한다고 했다.
‘마지막 제자가 바리아였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떠오른 바리아의 행복을 바라며, 레오니에가 책장을 대충 훑어봤다.
“무슨 내용이야?”
“아르데아가 발표한 논문.”
“논문?”
“작년에 나온 건데, 제법 세간을 들썩이게 했지.”
펠리오의 설명에 레오니에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집안만 들썩인 게 아니구나.”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말이 많은 선생님이네. 레오니에가 살짝 냉소적인 눈으로 책을 바라봤다. 선생님으로선 존경하나 어른으로선 조금 본받기 싫은 사람이었다.
“무슨 내용이야?”
“말 그대로 고대 유적지를 조사한 내용.”
“아아, 맞아. 역사 선생님이셨지.”
전공이 아예 이쪽이었구나,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근데 여기도 유적지가 있구나…….’
레오니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건 바로 ‘유적지’란 단어였다. 이곳 세상에도 고대 유적지가 있다고 하니 새삼 현실감이 피부에 와닿았다.
호기심이 살짝 생긴 레오니에는 책갈피가 꽂혀 있지 않은 책장 어느 곳을 펼쳐 첫머리를 읽었다.
‘여러 나라마다 인류의 기원을…….’
요는 이거였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학설이 각양각색인데, 그중 벨리우스 제국에서는 인류의 기원이 바다가 드넓은 남부에서 시작되었단 학설을 믿고 있다고. 레오니에는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진화설 같은 느낌이야.’
물론 완전한 진화설이 아니라, 신이 바다에서부터 생명을 창조하시어 그 마지막 피조물이 인간이라는 창조설도 약간 가미되었다.
“자.”
레오니에가 책을 건네줬다.
“흥미롭네.”
나중에 다 읽으면 저도 빌려 달라며, 내일모레 여덟 살이 유명 교수의 논문에 흥미를 보였다.
“근데 그게 왜 세간을 들썩이게 했어?”
아르데아의 논문은 세간을 들썩이게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다 읽은 건 아니지만, 겨우 인류의 기원 학설과 고대 유적지 조사 보고가 사람들을 술렁이게 할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혹시 무신론자야?”
레오니에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히 물었다. 벨리우스 제국은 신전의 힘이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건 제법 큰 문제로 치부되었다.
보레오티 가문도 신전에 기도하러 가진 않는 불량 신도이긴 해도, 매년 상당한 성금을 기부했다. 그래서 보레오티는 신전이 가장 좋아하는 가문 중 하나였다.
“무신론자는 아니고.”
펠리오가 잔에 얼핏 남은 식은 커피를 전부 마신 뒤에 대답했다.
“내용이 좀 파격적이어서.”
“설마 논문에 보스그루니 백작 욕 썼어?”
그래서 백작이 그걸 알고 선생님한테 찻잔을 휘두른 건가? 레오니에가 두 부부가 재회했을 때 보았던 난장판을 떠올렸다. 찻잔으로 뭇 영식들을 쓰러트렸다던 보스그루니 백작의 진면목을 처음 보았었다.
“너도 참 남의 집안 사정 엉망인 거 좋아해.”
펠리오가 혀를 끌끌 찼다.
“……아빠가 그 집안 사정을 보여 주게 해 놓고는 무슨.”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레오니에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간 어린 딸 앞에 데리고 온 가정 교사 중에 제정신이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주제 파악 못 하고 까불다가 사람 구실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집안 사정은 우리가 더하지.”
레오니에가 그렇지 않으냐며 깔깔 웃었다.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사실 오촌 관계이며, 아이의 친모는 정체 모를 방랑 기사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 버렸다.
“우리 집 이야기로 소설 쓰면 잘 팔릴걸?”
“시답잖은 소리.”
펠리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확실히 그가 듣기에도 보레오티 집안이 좀 난장판이긴 했다. 그래도 다른 가문과 비교하면 큰 분란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레오니에가 편지를 다 쓴 걸 확인한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니에를 품에 안고, 다른 팔에는 도시락 바구니를 들었다.
“아빠, 안 피곤해?”
피곤하면 걸어가겠다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이게 더 편해.”
펠리오는 다음 가게에 들를 때까지 아이를 품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괜히 바닥에 내려놨다가 인파에 쓸려 레오니에를 잃어버리거나, 반대로 레오니에가 여기저기 구경한다며 돌아다니는 것보다 나았다. 또 이런 작은 마을이 은근히 치안이 불안한 경우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두 부녀가 들른 곳은 제과점이었다. 레오니에는 그곳에서 나무 모양을 한 쿠키 상자와 그 지역 특산품인 들꽃 잎을 설탕에 버무려 굳힌 것을 샀다. 그리고 선물로 산 것들을 편지와 함께 수도로 부쳤다.
“나머지는?”
펠리오가 수도에 보내고 남은 쿠키 상자와 설탕 꽃잎을 가리켰다.
“북부 식구들이랑, 고아원 애들이랑 선생님들 거.”
야무지게 설명하던 레오니에가 그중 하나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설탕 꽃잎 중 가장 모양이 예쁘고 색도 선명했다.
“이건 코니에 선생님한테 줄 거야.”
설탕 꽃잎이 든 병을 마치 보물처럼 어루만졌다.
“생각해 보니까 선생님한테 뭘 해 준 게 없더라고.”
레오니에한테 코니에는 생명의 은인, 그 이상이었다. 비록 성격이 강하지 않아 고아원에서 큰 힘을 쓰지는 못했지만, 그 열악한 곳에서 아이들이 죽어 나가지 않은 건 전부 코니에의 덕이었다.
원장과 다른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아이들한테 멀쩡한 음식을 구해 주고, 아픈 아이들은 사비로 약을 사서 치료까지 해 주며, 글자를 가르쳐 미래를 대비하게 해 주었다.
어느 날 눈뜨니 지옥이었던 레오니에한테는 유일한 구원자였다.
“……그러고 보니.”
펠리오가 남은 선물들을 포장해 달라고 가게 직원에게 부탁하며 중얼거렸다.
“널 데려올 때 유일하게 날 노려봤지.”
“그거야 갑자기 애를 이유도 없이 데려가니 그러지.”
“코니에 선생님이 좋으냐.”
“좋아!”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그러자 펠리오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보다?”
조그만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물어보는 펠리오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파였다. 아기 맹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가 더 좋지!”
하지만 곧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코니에 선생님은 약간, 전우? 함께 그 지독한 곳에서 버티고 기댄 동지 같은 느낌이라서 조금 더 애틋해.”
레오니에는 예전에 고향에 못 간 지 오래되었다던 코니에의 말이 떠올랐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쓸쓸히 말하는 모습은 참으로 애틋하고 안타까웠다.
분명 고아원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당장 정인에게 달려갔을 것처럼 보였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레오니에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
펠리오는 그런 딸의 등을 묵묵히 토닥거렸다.
* * *
북부로 통하는 게이트로 가는 동안, 레오니에는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았다.
산림욕도 즐기고, 바닷가에서 모래 장난도 하고,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상점에 들러 귀족다운 쇼핑도 해 봤다.
덕분에 일주일로 잡았던 귀갓길이 열흘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제 보레오티 마차는 북부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난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
레오니에는 말 그대로 몽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그런 말도 해 보다니.”
조금 전 들렀던 어느 영지의 보석상에 가서, 레오니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고 말해 봤다. 보레오티 가문이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단 사실을 알곤 있었지만, 그 사실을 실제로 처음 겪어본 아기 맹수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어색해.”
“그럼 자주 해.”
그래야 익숙해지지. 펠리오가 피식 웃었다.
“아까 보니 손이 작더라.”
“당연하지. 나 아직 생일 안 지나서 일곱이잖아.”
“그 손 말고.”
돈을 쓰는 씀씀이가 작다는 뜻이었다. 아빠 맹수는 지금 아기 맹수에게 돈을 적게 썼다며 핀잔을 주는 중이었다.
“겨우 이런 거로 충격이면 나중에는 어쩌려는 건지.”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겨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고 말한 게 탐탁지 않았다.
“이야, 아빠 진짜…….”
재수 없는데 너무 멋졌다.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어쩌면 펠리오의 차원을 초월한 눈부심은 비단 외모 탓이 아니라, 보레오티 가문의 엄청난 재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조심히 해 봤다.
펠리오의 잔소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 건 공방 장인을 따로 불러서 맞춤 주문을 해.”
아까 보니 썩 질이 좋은 재료로 만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펠리오는 제 딸이 그런 품질의 장신구를 머리에 달고 다니는 게 불만이었다.
“코니가 집 두 채 값 나왔다던데?”
계산 영수증을 챙겨 온 코니가 엄청난 가격이라고 몸서리를 치며 알려 줬었다. 그러자 펠리오가 콧방귀를 뀌었다. 마치 ‘겨우 그 정도로?’라며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네가 머리에 단 장식 하나가 저택 한 채 값은 될걸.”
“……으응?”
기겁한 레오니에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머리에 달린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장미꽃 모양 보석이 세 송이씩, 총 여섯 송이로 만들어진 머리 방울 두 개는 레오니에가 가장 좋아하는 장식이었다.
“아, 아빠가 준 이거 말이야?”
“참고로 꽃 하나당 집 한 채다.”
“어매야…….”
아기 맹수가 낑낑거렸다. 지금 자기 머리 위에 저택 여섯 채가 얹어졌단 상상이 들자 목이 아팠다.
“붉은 루비를 장미꽃잎 모양으로 하나하나 섬세하게 깎아서, 그걸 일일이 붙인 거다. 거기다 보석 무게를 가볍게 하는 기술도 들어갔지.”
펠리오의 상세한 설명은, 네 머리 방울은 보석 본래의 값에다 장인의 손길과 수준 높은 기술까지 더해져 저택 일곱 채 값은 할 거란 뜻이었다.
“에구머니나!”
기어코 레오니에가 방울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아니, 우리 집은 무슨 물건값이 기본으로 저택 한 채 값이야!”
분명 제국에는 ‘펜나’라는 어엿한 화폐가 있었다. 그런데 레오니에는 펜나란 화폐 단위보다, 집이나 저택 한 채 값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들었다.
옷 한 벌이 저택 한 채 값, 리본 하나가 집 한 채 값.
‘……설마 그때!’
문득, 레오니에가 북부 저택에서 펠리오와 나누었던 대화 하나를 떠올렸다. 언젠가 체스를 가르쳐 주겠다며, 펠리오가 웬 체스 세트와 체스 전용 테이블, 의자를 레오니에한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체스 말 예쁘다. 보석 같아.’
‘보석 맞아. 보레오티산이지.’
‘진짜? 대단하다!’
‘그거 하나에 저택 한 채 값이다.’
보레오티에서만 나는 보석으로 만들었다며,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에 레오니에는 허풍도 심하다며 우스갯소리로 넘겼었다.
‘체스 말 하나에 저택 한 채…….’
얼추 계산한 레오니에가 입을 크게 벌렸다. 체스 세트에 체스 전용 테이블과 의자 두 개까지 합치면 못해도 저택 서른여섯 채 값이라는 비현실적인 값이 나왔다.
“……으음, 혹시 보레오티만 진짜로 화폐 단위가 ‘한 채’야?”
레오니에가 바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늘 똑 부러지던 표정도 살짝 맹했다. 계산하다 머리가 살짝 멈칫해 버린 탓이었다.
“이번엔 좀 웃겼다.”
펠리오가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비틀어 올렸다. 저런 말을 하는 내 딸이 너무 가소롭고 귀엽다는 뜻이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펠리오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익숙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작년 가을, 레오니에를 고아원에서 만나 입양하고 올라오던 길을 때마침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북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코앞이었다.
“우리가 숨을 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보레오티는 돈을 벌고 있다고.”
“그게 얼만데?”
영혼이 반쯤 나갔던 레오니에가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물었다. 뭘 얼마나 벌면, 제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저택 단위로 값이 매겨지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나도 모를 정도로 벌어.”
펠리오가 말했다.
“꽤 오래전부터 ‘측정 불가’라고 기록되고 있지.”
레오니에는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보레오티에게 아주 당연한 일이라며,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 하고 건드렸다.
“……아버님.”
레오니에가 마차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펠리오의 손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 미천한 소녀, 아버님께 영원한 효도를 약속드립니다.”
그러곤 크고 굵은 아빠의 손등에 입술을 경건하게 맞추었다. 펠리오가 어이가 없단 시선으로 아이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내려다봤다.
“속물적이고 찜찜한 효도구나.”
“그렇사옵니다, 아버님.”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군.”
보레오티 가문의 측정 불가 재산은 천하의 아기 맹수마저 효녀로 만들었다.
“이 불효녀 같으니.”
기어코 펠리오가 아이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쭉 뻗은 팔을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부르르르 움직여 흔들어 줬다. 딸내미가 하는 짓이 너무 얄미운데, 그런데도 귀엽고 웃겨서 차마 혼도 못 내는 아빠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 놀이였다.
“으어어어! 어어어!”
레오니에가 제 몸 진동에 맞춰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북부 게이트를 통과하기 직전.
작년 이맘때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평화로운 보레오티의 일상이었다.
* * *
“스읍…….”
조그만 콧구멍이 쪼그라졌다가.
“……하아.”
다시 커졌다.
가슴이 터질 정도로 숨을 깊이 들이마신 레오니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북부로 돌아왔다. 무려 4개월이 넘게 걸린 귀향이었다.
게이트를 통과한 마차를 점검하는 동안에 레오니에는 멜레스와 함께 주변을 돌아다녔다. 작년 늦가을에도 지나왔지만, 유감스럽게도 레오니에는 이곳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아가씨.”
그래서 멜레스가 추억 찾기를 도와주었다.
“이 나무예요.”
멜레스가 가리킨 건 숲 입구에 세워진 어느 나무였다. 다른 곳을 돌아보던 레오니에가 쪼르르 다가갔다.
“이게 그 나무예요?”
“네, 여기서 토하셨죠.”
상냥한 설명치곤 더러운 내용이었다.
레오니에가 나무껍질에 새겨진 희미한 얼룩을 쓸어내리며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나무가 바로 아기 맹수가 처음 북부에 발을 내디딘 직후, 거하게 속을 게워낸 장소였다.
“……어쩐지 이 나무만 좀 큰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유난히 크네요.”
“역시 내가 거름이 되어 준 거야!”
“어어…….”
멜레스는 그건 나무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기사는 그런 진심을 감춘 채 미소만 싱긋 지었다.
“레오!”
그때,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무사히 점검을 마친 마차는 이제 쉬지 않고 북부로 향할 예정이었다.
“아빠!”
기운차게 달려온 레오니에가 펠리오 주변을 빙그르르 한 바퀴 돌더니 착, 하고 멈춰 서곤 자신이 달려온 나무를 가리켰다.
“내가 토했던 나무 있잖아, 그거 엄청 커졌어.”
아이가 온몸을 하늘 높이 쭈욱 뻗으며 강조했다. 펠리오의 시선이 나무를 향했다.
그 순간. 펠리오만이 아니라, 모두가 작년 늦가을에 처음 보았던 레오니에를 떠올렸다.
당시의 레오니에는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몸에는 학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탓에 냄새가 났고, 게이트를 넘었을 땐 멀미까지 해서 시든 잡초보다 생기가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레오니에는 그때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건강해졌다.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컸어.”
아이는 몰라볼 정도로 컸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와 함께 보내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묘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지낸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레오니에와 만난 지 아직도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레오니에가 끼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단 뜻이었다. 이제 아기 맹수가 없는 보레오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레오니에가 없었던 이전이 오히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치? 저 나무만 큰 거 보이지?”
반면 어른들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아기 맹수는 저 혼자 빵긋 웃고 있었다.
“내 덕에 무럭무럭 자랐군.”
레오니에는 역시 나는 토사물도 남다르다며 더러운 자화자찬을 했다.
“……아니, 그건 나무 입장도 들어봐야지.”
그 와중에 펠리오가 반박했다.
“짜증 나, 진짜…….”
잔뜩 삐친 레오니에가 솜 주먹으로 아빠의 허벅지를 통통 두드렸다.
“주군!”
그때 기사 한 명이 펠리오를 불렀다. 마차 점검이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럼 이제 출발하지.”
잠깐의 감상을 뒤로하고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익숙한 길목과 광장을 지나,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딱 좋은 어둑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 창문에 얼굴을 붙인 채 구경 중이던 레오니에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집이다!”
드디어 보레오티 영지에 도착했다.
* * *
“세상에, 우리 아가씨…….”
마중 나온 카라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기어코 울음이 터진 집사는 안경을 벗고 훌쩍거렸다. 몇 개월 만에 다시 뵙는 어린 아가씨가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흑, 흐윽……!”
곁에 함께 있던 펠리카 역시 눈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앞치마로 젖은 눈가를 훔치며 어린 아가씨를 반갑게 맞이했다.
“울지 마, 응? 둘 다 뚝 해요…….”
레오니에가 허둥거리며 두 어른을 달랬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저를 보자마자 엉엉 울어 버리니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저를 위하는 마음임을 알기에, 레오니에는 가슴이 간질거렸다.
자신의 성장을 이렇게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부끄럽지만 분명 행복한 일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펠리오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인자한 눈빛이 아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눈이 마주친 부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정말 숙녀가 다 되셨네요.”
가까스로 울음을 멈춘 펠리카가 레오니에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많이 컸지?”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몸을 살랑살랑 비틀었다.
“이제 옛날 옷 하나도 못 입을 것 같은데.”
“그건 아주 반가운 소식이로군요.”
젖은 눈가를 훔치고 안경을 고쳐 쓴 카라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카라는 근처에 있던 사용인에게 의상실 사람을 불러오라고 일렀다. 명령을 받은 사용인은 빠르게 나갔다.
“머리 장식도 사야 할 것 같네요.”
펠리카는 눈에 띄게 길어진 레오니에의 검은 머리를 보며 말했다.
“그건 괜찮아! 나 오는 길에 엄청 많이 샀어!”
“잘하셨어요.”
“처음으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고 말했어.”
“아주 잘하셨어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직접 공방 장인이나 가게 주인을 불러서 사는 게 더 좋다며, 펠리카가 다정한 미소로 조언했다.
“우리 아가씨께선 더 좋은 물건을 지니셔야지요.”
“아빠도 그렇게 말했는데!”
레오니에는 아빠한테 들었던 말을 또 들어서 살짝 충격이었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펠리카가 카라에게 말했다.
“아가씨께 돈 쓰는 방법을 가르쳐 드려야겠어요.”
“공감합니다. 그럼 하녀장과 내가…….”
집사와 하녀장이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아가씨.”
그때, 모노가 반가운 인사와 함께 다가왔다.
“모노 아저씨!”
“세상에, 정말 몰라볼 정도로 크셨군요!”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모노가 눈을 크게 뜨며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이러다 금방 시집가시겠어요.”
“걔가 시집을 왜 가.”
아닌 척 듣고 있던 펠리오가 모노를 노려봤다.
“남자가 레오한테 시집을 와야지.”
펠리오는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설령 레오니에가 남자를 데려온다고 해도 허락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근데 아빠가 나보고 결혼은 됐으니 애만 가지라고 그랬는데.”
“주군…….”
모노가 펠리오를 안타까이 불렀다. 어지간한 아빠는 생각도 하지 않을 끔찍한 말을 저리 쉽게 내뱉었다니.
“잠깐 안 본 사이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펠리오가 어디 한 번 더 떠들어 보라며 모노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었다.
“오랜만에 뵙는 거라 기쁜 마음에 농이 나온 모양입니다.”
모노는 싱긋 웃으며 주군과 아가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도 속물이네요.”
“너만 할까.”
“아빤 시비나 걸지 마.”
레오니에가 눈을 샐쭉거렸다.
“그럼 나 저기 갈래.”
레오니에는 다른 사용인들과 인사를 나누겠다며 자리를 떴다. 모노가 하녀들과 오랜만이라며 떠드는 레오니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부러 가 주신 거겠죠?”
“저래 봬도 눈치는 좋으니까.”
펠리오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이는 모노가 인사를 하고도 계속 펠리오 곁에 있는 걸 빤히 보더니 냉큼 자리를 비켜 줬다.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아챈 거다.
“그래서.”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건 지금 어디 있지?”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깨어 있나?”
“그렇습니다.”
두 사람만이 아는 대화가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펠리오는 모노에게 가볍게 턱짓했고, 곧 둘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이동했다.
“우리 딸 손님들은 잘 지내고 계시던가.”
펠리오가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원인 모를 음험한 공기가 피부를 서늘하게 스쳤다. 그러나 펠리오와 모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항상 잘 지내시지요.”
모노가 말했다.
“하지만 요즈음엔 조용하십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여기서 나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욕을 내뱉고 심심찮게 반항했다. 하지만 글라디고 기사단의 갸륵한 보살핌 덕에,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하겠다며 순순히 굴었다.
이내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둑한 공간이 발밑에 나타났다. 모노가 근처에 있던 등불에 불을 지폈다. 어둠 속에 숨겨졌던 감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이 켜지자마자 으으, 으으,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정체는 보레오티 가문이 극진히 모시고 있는 고아원 선생님들이었다.
“잘 지내고 계셔서 다행이군.”
펠리오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쇠창살 너머에 널브러져 있는 선생님들을 대충 훑어봤다.
“히익!”
“으아아아!”
“사, 살려 줘!”
공포에 질린 고아원 선생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사렸다.
“찾으시는 분은 가장 끝에 있습니다.”
그들의 애원을 무시한 채, 모노가 그곳으로 안내하려던 찰나였다.
“자, 잠깐만!”
쇠창살 틈으로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너는…….”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누구인가 잠깐 고민했으나, 곧 누구인지 깨달았다. 레오니에한테 니아라는, 소설 속 매춘부의 이름을 붙여 준 고아원 원장이었다.
펠리오가 고아원 원장을 바로 알아채지 못한 건, 후덕하다 못해 심술궂게 쪘던 그의 살집이 몰라보게 쏙 빠졌기 때문이다.
“살이 많이 빠졌군.”
마치 오랜만에 아는 지인을 만난 것처럼 여상히 중얼거렸다.
“보기 좋은데?”
펠리오가 사람 속 뒤집힐 만큼 태연히 아는 척을 했다. 옆에 있던 모노는 저것도 참 재주라며, 아가씨의 뻔뻔함이 누구를 닮았는지 또 한 번 깨달았다.
레오는 토실토실 살이 쪘고, 고아원 놈들은 비쩍 말랐고.
“아주 바람직해.”
펠리오는 이제야 고아원 선생님들을 바라봐줄 마음이 생겼다.
“아는 걸 전부 말했습니다!”
고아원 원장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 저희는 이제 아는 게 없습니다! 이제 그만 여기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비쩍 마른 손이 쇠창살 사이로 뻗어졌다. 고문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손은 오랫동안 씻지 않아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레오도…….”
펠리오가 온기라곤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버둥거렸을 테지.”
그 어린 것이 살기 위해 고아원에서 어떻게 버티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펠리오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검은 맹수는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손수 몸을 낮춘 그는 쇠창살 안에 있는 놈들을 전부 한 명씩, 찬찬히 노려봤다. 서슬 퍼런 검은 눈이 위협적이었다.
“이제 겨우 1년이다.”
레오니에가 고아원에서 고통받고 지낸 시절이 무려 2년이었다. 즉, 그들은 최소한 1년은 여기서 더 버티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때만 지나면, 싫다고 해도 나가게 해 주지.”
펠리오도 이런 것들을 저택에 계속 가둬 둘 생각은 없었다.
‘물론 살려둘 생각도 없지만.’
저들이 이곳 저택을 나간다는 건, 죽어서 나간다는 뜻이었다. 펠리오는 아이를 학대한 저 극악무도한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홀로 생각을 마친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으아아아아!”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차라리 죽여 줘요!”
“그, 그래! 그냥 죽여 줘!”
절망 어린 비명을 뒤로하며, 펠리오와 모노가 자리를 떴다.
“벌레들이 시끄럽군.”
“다음엔 성대를 건드릴까요?”
모노가 물었다.
“아니, 그렇게까진 하지 말고.”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펠리오가 어떤 제안 하나를 했다.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마법 약 개발에 푹 빠졌다는데…….”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될 만큼 비인륜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동부 마탑에서는 죄인들을 사들여 인체 실험을 한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 있었다.
“……몇 놈 보내 볼까.”
그리고 펠리오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르티오 후작은 멀끔한 생김새와 달리, 은근히 뒤가 더러운 인물이었다. 펠리오는 그런 오르티오 후작이 싫지는 않았다.
“후작께서 부군을 지극히 아끼시죠.”
좋아할 거라며 모노가 맞장구쳤다.
“일단 연락만 해 봐.”
“예, 알겠습니다.”
“그럼 우린 이제…….”
말을 잠깐 멈춘 그 찰나에, 펠리오가 어느 쇠창살 앞에 섰다. 그곳엔 단 한 사람만이 의자에 묶인 채 갇혀 있었다.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하하.”
그리곤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내가 정말 살면서…….”
펠리오는 정말 기가 막혔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없는데 말이야.”
지금 이 순간이, 천하의 펠리오 보레오티는 스스로가 한심할 정도였다. 메마른 웃음을 몇 번 토한 그는 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가 아주 우습지.”
그 아래 드러난 건, 당장 저 안에 갇힌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순수한 살의였다.
“그렇지 않나?”
곧 펠리오의 입술 사이로 누군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 * *
북부로 돌아오고 며칠 뒤.
“공작 영애!”
레오니에는 저를 찾아왔다는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가 흠칫거렸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바로 저를 보며 두 팔 벌려 환영하는 파르두스 후작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이곳 보레오티 집무실이 자기 집인 것처럼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레오니에가 등장하니, 두 팔 크게 벌려 환영했다.
“…….”
레오니에는 조용히 응접실 문을 닫았다.
“코니, 내 손님 아니야.”
그리고 저를 여기까지 데려온 코니를 원망스레 바라봤다.
“아빠가 나보고 파르두스 후작은 진짜 변태니까 함부로 만나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주인님께서 아가씨께 손님 대접을 맡으라고 명하셨는걸요.”
당황한 코니가 서둘러 말하던 찰나였다.
“그렇습니다, 공작 영애.”
어느새 문을 열고 나타난 파르두스 후작이 싱긋 웃었다. 레오니에가 오만상을 썼다.
“……오랜만이에요, 후작 할아버지.”
그리고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정작 파르두스 후작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북부에서 다시 영애를 뵈니 이리도 좋군요. 저는 어제 막 북부에 도착했답니다.”
“그럼 좀 쉬시지 그러셨어요.”
나이도 있으신데 뭣 하러 찾아와 남의 허파를 뒤집냐며 레오니에가 물었다.
“근데 진짜 아빠가 나보고 후작 할아버지 대접하래요?”
결국 응접실에 들어선 레오니에가 물었다. 파르두스 후작이 앉아 있던 자리에 익숙한 상자가 보였다.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 포장 상자였다.
“보레오티 저택에서 공작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멍청이는 없답니다.”
파르두스 후작이 코니에게 상자를 건넸다. 곧 코니가 상자에서 슈크림을 꺼내 접시 위에 예쁘게 얹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아빠 보러 온 거 아니에요?”
파르두스는 보레오티의 숨겨진 정보통이다. 레오니에는 저 능글맞은 할아버지가 저택에 고작 애 하나 놀리려고 온 게 아니란 걸 알았다.
“…….”
파르두스 후작은 말이 없었다. 조용히 찻잔을 머금는 입꼬리만 느슨하게 올라가 있을 뿐이었다. 그 태도가 레오니에를 더욱 의심케 했다.
“사실 저도 쉬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펠리오가 직접 그를 불렀다. 그리고 레오니에와 함께 있으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사안이 사안이니까.’
후작이 가면처럼 뒤덮은 미소 뒤로 나지막이 한탄했다. 지금 집무실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니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레오니에의 발목을 최대한 오랫동안 잡는 일이었다.
“있잖아요.”
그때, 레오니에가 말했다.
“전에 연회에서…….”
이 이상 파르두스 후작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기 어렵다는 걸 인정한 레오니에는, 얼마 전 수도 황실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봤다.
“어떻게 제 뒤에 선 건가요?”
레오니에가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이 올려진 접시를 제 무릎 위에 놓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큼직한 노란빛 슈가 입맛을 다시게 했다. 슈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 물자, 샛노란 크림이 김밥 옆구리 터지듯 삐져나왔다.
“아아, 그때 말이군요.”
파르두스 후작이 입가에 크림을 묻힌 레오니에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난 그때 후작 할아버지 기척을 못 느꼈어요.”
맹수의 송곳니가 발달한 뒤, 레오니에는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기척을 잘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파르두스 후작이 제 뒤에 서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솔직히 무서울 정도였다.
“제가 또 기척 하난 잘 숨기지요.”
“거짓말.”
레오니에가 얄밉다는 듯이 노려봤다. 아기 맹수의 경계에 파르두스 후작이 껄껄 웃었다.
“사실 별 건 아니고…….”
후작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직 영애께선 모르시는 것 같으니, 제가 알려드리지요.”
“마도구 같은 거예요?”
“제가 공작님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사다 모으진 않는다며 후작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뭐야. 아빠 진짜 마도구 수집하는 거야?’
얼마 전에 통풍 마법이 걸린 모자를 선물 받으면서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만.
‘설마 그게 진짜였어?’
파르두스 후작이 농담처럼 말할 정도로?
레오니에가 놀란 속을 애써 감추며 후작이 꺼낸 걸 바라봤다. 새까만 보석이 박힌 만년필이었다.
“……어라? 이건 그거잖아요.”
만년필을 살펴보던 레오니에가 뚜껑 위에 달린 보석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보레오티 광산에서만 난다는 검은 다이아몬드였다.
“후작 할아버지는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예요?”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거야 공작님이 주셨으니까요.”
“아, 아빠가 줬다고요……?”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 오만 상상이 뒤엉켰다. 그럴수록 레오니에의 얼굴은 생기를 잃어 갔다. 개방적인 근육 변태조차 끔찍하게 여길 무언가였다.
“싫어어……!”
이내 레오니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절규했다. 그 좋아하는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을 바닥에 떨어트릴 정도로 끔찍해서였다.
“제가 영애의 취향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홀로 태연한 파르두스 후작이 서둘러 찻잔을 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찻잔 너머로 간신히 숨겼다.
“아닙니다, 그런 거.”
아무리 보레오티를 좋아해도 그런 오해는 질색인 후작이 서둘러 설명했다.
“이건 그냥 보석이 아닙니다.”
힘이 있지요.
파르두스 후작의 말에 레오니에가 가까스로 충격에서 되돌아왔다.
“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펠리오는 아이에게 그런 것에 대해 일절 말해 주지 않았다.
“영애께서 이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왜요?”
“어차피 보레오티 사람에겐, 특히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분들에겐 그냥 검은 돌덩어리일 뿐이거든요.”
검은 다이아몬드는 말 그대로 색이 검은 다이아몬드였다. 다만, 오로지 보레오티 광산에서만 나는 귀한 것으로, 시중에는 잘 나오지도 않는다.
“마법에 도움이 되는 보석도 아니고, 오러를 증진케 하는 힘도 없지요.”
하나 그 희귀성 하나만으로 제국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이 되었다. 가장 최근에 시중에 풀린 것은 몇십 년 전, 선대 보레오티 공작이 심심풀이로 내놓은 일 캐럿짜리가 다였다.
그리고 그 검은 다이아는 역대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 심지어 그 기록이 아직도 깨지지 않는 중이었다.
“이 검은 다이아는 보레오티가 신뢰하는 자에게만 선물하는 겁니다.”
“신뢰…….”
“왜냐하면, 이 다이아는 맹수의 송곳니가 지닌 힘을 감소시키거든요.”
레오니에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러곤 서둘러 코니를 돌아봤다.
‘이거 코니가 알아도 돼?’
그런데 정말 예상외로, 코니는 아주 태연했다. 오히려 조금 전에 레오니에가 이상한 망상으로 슬퍼할 때가 더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알아?”
레오니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부모님이 그 광산에서 일하세요.”
그래서 알고 있었다며, 코니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큰 비밀은 아닙니다.”
파르두스 후작이 이어 말했다.
“북부에서는 조금만 알려고 노력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변두리 마을에 사는 꼬마도 구전으로 전해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파르두스 후작의 태연함에 살짝 화가 났다. 별거 아닌 사실이라기엔 무척 귀중한 정보였다. 만약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진다면 보레오티 가문을 좋지 않게 보는 귀족들이 너도나도 검은 다이아를 탐내려 할 거다.
‘특히 지금의 황제라면…….’
레오니에가 몸을 작게 떨었다. 황궁에 북부와 연결된 게이트가 존재했다. 만약 수비테오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탐을 낸다면, 언제든 틈을 보아 북부에 침입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레오니에는 진지하게 걱정하는데, 파르두스 후작과 코니는 너무도 멀쩡했다.
“걱정 안 돼요?”
답답해진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러다 황제 놈이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공작님이 죽이겠죠.”
그 전에 죽을 가능성도 있고요. 파르두스 후작이 짜증 날 정도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에는 아까 떨어트린 슈크림을 집어다 저 면상에 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이 보석이 힘을 감소시킨다고 해도.”
실컷 아기 맹수를 건드린 뒤에야, 파르두스 후작이 보석에 대해 더 설명했다.
“정말 극소량입니다.”
“얼마나요?”
“굳이 비유하자면, 즉사를 즉사 3초 직전으로 바꿀 정도랄까요.”
“그게 뭔 차이여?”
레오니에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물음표를 던졌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하면, 오히려 저 비유 때문에 검은 다이아가 지닌 힘이 더욱 잔인하게 다가왔다.
“차라리 훅 가는 게 낫겠는데?”
“그래도 죽는 것보다야 그렇게라도 사는 게 좋지요.”
“아니, 뭐…….”
그거야 그렇지만. 레오니에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혹시 저 다이아가,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비슷한 겁니다.”
파르두스 후작이 만년필을 도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레오니에는 그 모습이 어째선지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검은 다이아는 보레오티 공작이 선물하는 신뢰의 증표입니다.”
“배신하면 편히 죽을 생각하지 말란 거잖아요.”
“얼마나 보레오티답고 근사합니까!”
조금 전 만년필을 넣은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은 파르두스 후작의 주름진 눈가가 둥그렇게 휘었다.
“저는 이왕이면 맹수의 송곳니에 꿰뚫려 죽고 싶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노신사의 볼에 붉은 생기가 피어올랐다.
‘히익!’
레오니에가 기겁을 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더욱 바싹 붙였다. 뒤에 있던 코니도 섬뜩한 기분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저건 진짜야!’
아기 맹수가 솜털을 바짝 세우고 경계했다. 진성 변태가 바로 여기 있었다.
순간 펠리오가 자신이 근육을 밝힐 때마다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면 미안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효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하지만.”
홀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파르두스 후작이 말했다.
“즉사를 즉사 3초 직전으로 바꾼다는 건 무시 못 할 힘입니다.”
표현이 너무 극에 치우쳐서 그렇지, 적어도 맹수의 송곳니가 아직 여물지 않은 레오니에의 예민해진 기척을 잠깐이나마 속일 정도는 되었다.
“에이, 괜히 걱정했잖아요.”
긴장이 쭉 빠진 레오니에가 소파에 축 늘어졌다. 그리곤 그대로 드러누웠다. 코니가 작게 웃으며 레오니에의 치마를 정리해 줬다.
“어라?”
그때, 레오니에가 제 방에 있는 인형을 떠올렸다. 펠리오가 선물해 준 검은 사자 인형.
“내 인형 눈도 검은 다이아로 만들었는데?”
“오오, 대단하군요.”
아이 장난감에 그 귀한 걸 쓰시다니, 파르두스 후작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펠리오의 진심 어린 부성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아니었다.
“검은 다이아는, 배신하면 가만 안 둔단 뜻이잖아요…….”
아기 맹수가 점점 침울해졌다.
“근데 아빠는 내 인형이랑 옷 만들 때도 검은 다이아를 썼어…….”
그 말인즉.
“나도 가만 안 둔다는 거잖아!”
레오니에가 기어코 울상을 지었다. 마치 돼지를 잡아먹으려고 키운다는 걸 새롭게 배운 어린아이가, 혹시 자기 부모님도 저를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거냐고 겁먹은 꼴이었다.
“푸하하하!”
웃음을 참지 못한 파르두스 후작은 결국 박장대소했다. 얼마나 웃긴지 허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웃었다. 호흡이 불가능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뒤에 있던 코니도 손등으로 입을 꾸욱 누른 채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적당히 깝죽거려야지.’
불효녀는 오늘도 작심삼일로 끝날 다짐을 했다.
레오니에가 파르두스 후작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
우르마리티 백작은 펠리오의 집무실에서 홀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파르두스 후작과 함께 북부에 도착한 그는 홀로 조용히 오라는 펠리오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보레오티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슴에 묻어 두었던 레지나의 비보를 접했다.
“우리 레지나가, 제 딸이……!”
우람한 산맥을 연상케 했던 커다란 몸이 흐느낌을 토하며 들썩거렸다. 얼굴을 가린 굵직한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수도에서 이제 막 올라왔는데.”
펠리오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이런 비보를 전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손수건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펠리오 덕에 겨우 딸아이의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 소식이 세상이 무너질 만큼 끔찍하대도, 여태껏 홀로 그리워했던 딸아이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우르마리티 백작은 레지나의 죽음에 속이 타들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죄책감이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펠리오는 그런 백작을 복잡한 심경으로 조용히 바라봤다. 그에게도 이 자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펠리오는 자신의 머리 위에 다른 사람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만큼 잘난 인간이었다. 레오니에조차 재수 없다고 대놓고 욕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펠리오는 우르마리티 백작의 고통을 상당 부분 이해했다.
같은 아버지로서, 딸을 둔 부모로서. 딸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작의 흐느낌은 제법 가슴이 아팠다.
펠리오는 수도에서 레오니에가 인세레아를 만난다고 몰래 도망쳤던 일이 떠올랐다. 그 일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했는데, 과연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부모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백작.”
펠리오가 조심히 말을 걸었다.
“또 하나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던 우르마리티 백작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레지나가 남긴 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펠리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몸을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놀란 펠리오가 서둘러 그의 상체를 부축했다.
“아, 아이라니요!”
백작이 펠리오의 팔을 움켜쥔 채 물었다. 무례한 행동이었음에도 펠리오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나무랄 이유도 없었다.
“백작도 이미 만났습니다.”
펠리오는 굳이 그 아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설마!”
예상대로, 우르마리티 백작은 레지나가 남긴 아이의 정체를 알아챘다.
‘레오니에라고 해요.’
괴상한 근육 노래를 부르며 까르르 웃던 아이. 펠리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아이는 티 한 점 없이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아아……!”
펠리오를 빼닮은 레오니에의 얼굴 위로, 그제야 레지나가 겹쳐 보였다.
충격으로 굳어 버린 백작의 얼굴 위로 다시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짓이겨진 채 토해내는 흐느낌은, 커다란 곰이 구슬피 토하는 울음과 똑같았다.
그러기를 한참.
“……공작님.”
가까스로 울음을 그친 우르마리티 백작이 떨리는 숨을 토했다.
“누굽니까.”
백작이 물어보는 사람은 레지나의 딸이 아니었다.
“제 딸을 그 꼴로 만든 빌어먹을 새끼가, 어린아이를 혼자 남기고 죽게 만든 그 쳐죽일 새끼가 누구입니까!”
백작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 새끼의 목을 손으로 뜯어 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펠리오는 우르마리티 백작이 진짜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찾는 중입니다.”
그래서 펠리오는 우르마리티 백작을 불렀다. 마냥 레오니에가 당신의 손주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겨우 북부로 돌아온 그를 저택에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의 찾았습니다.”
쾅! 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펠리오의 말을 듣기 무섭게 우르마리티 백작이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내려쳤기 때문이다. 단단한 원목으로 짠 팔걸이는 그렇게 맥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우르마리티 백작.”
펠리오가 눈이 시뻘겋게 물든 백작을 조용히 불렀다. 그 한마디에 백작은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한숨을 부들부들 떨며 내뱉고 있었다.
하나 분노를 가라앉혔을 뿐이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레오를 앞으로도 계속 내 딸로 키울 겁니다.”
“그러셔야 합니다.”
“그리고 레지나는…….”
“드러내지 마십시오.”
우르마리티 백작이 먼저 말했다.
“레지나는 제겐 지금도 소중한 딸입니다. 그러나 보레오티 가문에겐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정체조차 불분명한 방랑 기사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 보레오티 가문에 큰 추태를 부렸다. 이는 변명할 여지도 없는 잘못이었다.
“그리고.”
우르마리티 백작이 말을 아꼈다.
“……영애가 더 중요합니다.”
그는 레오니에를 차마 손녀라고 부르지 못했다. 레지나가 보레오티 가문에 저지른 짓은 배신에 가까웠고, 그런 딸을 둔 우르마리티 백작은 그 배신에 책임을 져야 했다.
“레지나는 그날 죽은 겁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밤.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와 함께 그대로 급류에 휩쓸려 죽었다고 추정되던 레지나는, 이곳 집무실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편이 좋습니다.”
레오니에의 미래를 위해서.
레지나의 영면을 위해서.
“……방랑 기사의 죽음을 위해서.”
펠리오가 쪽지 하나를 우르마리티 백작에게 건네었다.
“글라디고 기사단 몇 명이 서부에 내려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헤스페리 후작의 도움으로 어느 영지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곳에서 젊은 여자의 유골을 찾았다고 한다. 숲속에 대충 파묻은 탓에 빈말로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야생 동물들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백골은 살아생전의 모습을 알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펠리오는 굳이 이런 것까지 우르마리티 백작에게 전하지 않았다.
“유골이 묻힌 흙더미에 검은색 머리카락이 나왔습니다.”
레지나의 시신이었다.
쪽지를 거머쥔 우르마리티 백작이 기어코 오열했다. 소파에서 무너지듯 내려와 테이블에 큰 몸을 기댄 채, 목청이 떠나가라 우는 백작은 도저히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식의 죽음을 겪는 부모의 슬픔은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신이 발견된 곳은.”
펠리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레오가 지낸 고아원 바로 뒷산입니다.”
* * *
“아빠아아…….”
똑똑.
집무실을 찾은 레오니에가 문을 두드렸다.
“아빠, 괜찮아?”
조금 전까지 파르두스 후작과 체스를 두며 아빠를 기다리던 레오니에는,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우리 아빠가 우는 거예요?’
‘남다른 울음이긴 하군요.’
울음소리에 놀란 레오니에는 당황했고, 펠리오를 만나러 왔다는 파르두스 후작은 은근슬쩍 자리를 떴다. 대신에 소리가 나는 장소를 가르쳐줬다.
레오니에는 곧장 펠리오의 집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집무실 너머로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서글프게 하는 소리였다.
‘근데 아빠 목소리가 아니야.’
게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아.”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순간, 집무실 문이 열렸다. 펠리오는 집무실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문을 최소한만 연 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우르마리티 백작, 아니, 할아버지 있어?”
레오니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레오니에는 이미 그 좁은 틈으로 우르마리티 백작을 보고 말았다.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아까까지 파르두스 후작 할아버지랑 같이 있었어.”
“그래.”
“후작 할아버지가, 오늘따라 유난히 나랑 같이 있으려고 하더라고.”
펠리오가 조용히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오니에는 저를 살펴 주는 머리 위의 손을 꼭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많이 힘들어해?”
펠리오는 쉬이 답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평소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레오니에의 머리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펠리오가 파르두스 후작에게 레오니에를 맡긴 건, 우르마리티 백작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레오니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함도 있었다.
아이의 출생은 보레오티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었다. 혹여 우르마리티 백작이 사용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레오니에를 보자마자 울어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군.’
백작이 저렇게까지 무너질 줄은 몰랐다. 집무실이 있는 층에는 사용인을 두지 말라고 카라에게 지시했지만, 아래층 거실에서 놀던 레오니에가 소리를 들었다는 건 별 소용이 없었단 뜻이었다.
“…….”
펠리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느낄 슬픔을 너무 가볍게 재단한 것만 같았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레지나를 조금만 더 찾을걸.
관심을 조금만 더 줄걸.
과거에 그가 결정했던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듯했다.
“아빠 탓이 아니야.”
그때, 레오니에가 단호히 말했다. 살이 잘 오른 포동포동한 얼굴이 씰룩거렸다.
“아빠 탓이 아니야.”
“…….”
“굳이 잘못한 놈을 찾는다면, 내 친모를 꼬드긴 그 망할 방랑 기사지.”
레오니에의 까만 눈에 섬뜩할 정도로 냉혹한 이채가 스쳤다.
‘그러고 보니.’
펠리오는 깨달았다. 아이는 기억에조차 없는 레지나를 친모라 불렀다. 하지만 친부로 추정되는 놈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네 말이 맞아.”
펠리오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우르마리티 백작의 슬픔에 잠깐 동화된 모양이었다. 다행히 똑똑한 아기 맹수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백작의 슬픔은 동정하나, 거기에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레오.”
펠리오가 신중히 말했다.
“만약 네가 괜찮다면, 우르마리티 백작을 위로해 줄 수 있겠어?”
“물론!”
레오니에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할아버지인데!”
“부담스러우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난 정말 괜찮아.”
신기하게도 우르마리티 백작에게선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근육 때문일까?”
처음부터 몸매 덕에 호감이 갔다며, 아기 맹수가 어깨를 넓게 펼치며 불끈불끈 흉내를 냈다.
“지금은 그런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야.”
펠리오가 적어도 백작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평소보다 강하게 타이르고 경고했다.
“나도 그 정돈 알아.”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가볍게 풀어 볼 겸 했다며 레오니에가 머쓱하게 변명했다. 그리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우르마리티 백작은 아직도 울고 있었다. 아까처럼 저택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소리는 아니었지만,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레지나의 이름은 너무도 애처롭게 들렸다. 슬픔에 빠진 백작은 레오니에가 바로 옆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아…….’
레오니에는 가슴이 저렸다.
아이는 여전히 친모에 대한 정은 없고, 기껏해야 안타깝다는 연민이 전부였다. 하지만 저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는 백작을 보니, 저 역시도 슬픔이 전염된 것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레오니에는 감히 자신이 그의 슬픔을 경감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다. 저 슬픔은 고작 위로 한마디로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저 레오니에에요.”
그러니 그냥 옆에 있기로 했다.
“아빠가 지어 준 이름이에요.”
그리고 들려줬다.
“저는 아빠가 주는 딸기 우유 맛 사탕이 가장 좋아요. 옛날에는 예쁜 짓 해야 줬는데, 요즘에는 그냥 틈만 나면 줘요.”
나는 사랑 받고 산다고.
“요새는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쪘어요.”
무척 건강하다고.
“맹수의 송곳니 훈련을 할 때, 아빠가 그랬어요. 송곳니 네 개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걸 서툴러 하는 게 레지나랑 똑같다고요.”
레지나를 닮은 구석도 있다고.
레오니에는 우르마리티 백작의 젖은 손을 천천히 잡았다. 검을 쥐었던 사람인지, 거칠고 두꺼운 손이 펠리오와 비슷했다.
“흑, 흐윽……!”
우르마리티 백작은 레오니에가 잡은 저의 손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이마에 아이의 손을 가져다 댄 채, 그는 몇 번이고 죽은 딸의 이름을 불렀다.
‘불쌍한 사람.’
레오니에는 묵묵히 그 품에 안겨 주었다. 곧 굵은 팔이 아이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마저도 조심스러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이를 위한 배려였다.
‘미안해요, 할아버지.’
당신의 ‘진짜’ 손녀는 내가 아니에요. 내용물은 아빠랑 동년배인 변태예요.
복잡한 심경을 애써 무시한 채, 레오니에는 백작의 팔을 토닥토닥 다독여 줬다.
레오니에는 백작이 진정할 때까지 팔을 도닥거려 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팔이 살짝 저리기 직전에 백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추태를 보였군요.”
우르마리티 백작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 멋쩍게 웃어 보였다.
“추태 아니에요.”
레오니에가 손수건을 내밀어 줬다. 백작은 아까 펠리오한테 손수건을 받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부녀가 이리 똑같다니, 실소가 터졌다.
백작은 건네주는 손수건을 기쁘게 받았다. 하지만 그는 손수건으로 레오니에의 젖은 볼과 손을 닦아 주었다. 조금 전 백작의 품에 안겼을 때 묻은 그의 눈물들이었다.
“다 큰 어른이 이렇게나 울고.”
징그러운 꼴이라며 우르마리티 백작이 자조했다.
“별로 안 징그러워요.”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눈물 흘리는 미남 노중년은 새로운 문을 열어버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저 그 상대가 혈육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안타까울 뿐이었고, 지금 분위기가 그런 농담을 할 때가 아닌지라 꾸욱 참을 뿐이었다.
“어른도 울 수 있어요.”
그 말에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진짜 징그러운 건 따로 있어요.”
“그게 무엇인가요?”
“고아원 선생님들이요.”
본분을 잊어버리고 어린아이들을 학대한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징그럽고 쓸데없는 존재들이었다.
“…….”
우르마리티 백작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레지나의 죽음에만 정신이 팔려, 홀로 남은 손녀가 어떻게 지냈을지 생각도 못했다.
“힘들었습니까?”
백작이 안타까이 물었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레오니에가 고아원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다는 건 이미 대부분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실이었다.
우르마리티 백작은 후회스러웠다. 자신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아이를 금방 찾을 수 있었을 거다. 어쩌면 레지나도 살아 있을 때 만났을지도 모른다. 지금 백작은 모든 것이 ‘조금만 더’라는 후회의 사슬에 묶였다.
그러나 아이는 마냥 해맑았다.
“힘들었는데, 괜찮아요.”
그리고 빵긋 웃었다.
“아빠가 지하 감옥에 그 선생 놈들 다 가두고 고문해 주고 있거든요!”
심지어 이번 가을에, 작년 겨울에 내렸던 폭설 때문에 하지 못했던 신종 고문 ‘대롱대롱’을 생일 선물로 구경시켜 주겠다고 약속까지 받았다.
“줄로 묶어서 절벽에 매단 뒤에 떨어트리는 거예요! 제가 제안한 거예요!”
레오니에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롱대롱 고문을 설명했다.
“우리 아빤 내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줘요!”
세상 가장 멋쟁이라며, 레오니에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
백작은 잠시 말을 잊었다.
“……흐하하하!”
그리곤 호쾌한 웃음을 토했다. 방심하고 있던 레오니에가 몸을 화들짝 튕길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다.
그렇게 한참 웃던 백작이 고개를 휙 돌렸다. 조금 전까지 승전한 장군처럼 껄껄거리던 웃음은 사라지고, 다정하고 인자한 미소만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공작님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 같은 것보다 훌륭한 아버지시군요.”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행복하셔서 다행입니다.”
백작은 진심으로 기뻤다.
“…….”
그 시선에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은 머리 너머로 붉게 달아오른 둥그런 귀가 선명히 드러났다.
저택을 떠나기 전, 우르마리티 백작이 레오니에에게 약속 하나를 부탁했다.
“전에 저희 저택에 놀러 오라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네, 기억하고 있어요.”
“만약 영애께서 괜찮으시다면, 하룻밤 정도만 묵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된다고 우르마리티 백작이 상냥히 말했다.
“으음…….”
레오니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작의 제안은 고마웠다. 부담스러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르마리티 백작의 저택에는 이미 새로 재혼한 부인이 있고, 그들의 자식들도 있었다.
레오니에는 일전에 카라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당시 카라는 레지나에게 형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때는 대충 넘겨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재혼한 아빠에게서 태어난 형제들과 사이가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차 모임에서 만난 우르마리티 백작 부인은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보스그루니 백작과도 친하게 지낼 정도였고.
“으음…….”
고민 끝에 레오니에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가족분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지만, 제가 할아버지 집에 가서 머무르는 건 여러모로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요.”
레오니에가 레지나의 딸이라는 사실은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이었다. 조그마한 오해의 씨앗도 남겨 둬선 안 된다는 게 레오니에의 생각이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이의 영민한 판단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참으로 영특하십니다.”
“대신 다음에 놀러 갈게요. 그때 재미있게 놀아요.”
우르마리티 백작은 조금 아쉬워했지만, 레오니에가 다음에 같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하자 금방 입꼬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할아버지 빠빠!”
레오니에는 저택을 떠나는 우르마리티 백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봤다.
“에휴…….”
배웅을 마친 레오니에는 진이 다 빠졌다. 그대로 터벅터벅 돌아서다가 부웅, 하고 공중에 납치되었다.
“아빠…….”
아기 맹수는 그대로 아빠 맹수의 품에 안겼다.
“고생했어.”
펠리오가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긋나긋한 위로에 레오니에가 더욱 찡찡거리며 아빠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좀 슬펐어.”
울부짖으며 죽은 딸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도, 그 딸이 남기고 간 하나뿐인 손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그 상황도 모두 서글펐다.
거기다 슬퍼하는 백작을 보고 있으니, 다른 세상에 있는 ‘가족’들이 계속 떠올랐다.
“……많이 슬펐어.”
레오니에는 아예 펠리오의 어깨에 코를 파묻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킁킁거렸다. 은은한 비누 향인 섞인 아빠 냄새는 무척이나 큰 안도감을 선사했다. 이제 여기가 나의 집이고 고향이라는 사실과 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줬다.
익숙한 현실감을 되찾을 무렵.
“다들 괜찮았으면 좋겠어.”
레오니에가 소박한 소원을 진심으로 빌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들에게, 행복해지라는 말은 잔인한 명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디 앞으로는 그때의 슬픔에서 조금만 더 벗어나길 바랐다.
그냥 전날보다 조금씩 괜찮아지길 바랐다. 우르마리티 백작만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있는 그들도 괜찮기를 바랐다.
“착한 녀석.”
펠리오가 아이의 관자놀이 근처에 입을 쪽, 맞췄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해.”
“아빠 닮았지.”
“난 안 착해.”
남들 다 알 정도로 착하면 보레오티 공작 따위는 해 먹지도 못한다고 피식 웃었다.
“그럼 나는?”
조금 전까지 착하다고 칭찬받았던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후계자 시킨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저런 소리였다.
펠리오가 걱정 말라는 듯이 아이를 받친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넌 착하면서도 성질이 지랄 맞아서 괜찮아.”
“딸한테 지랄이라니…….”
“칭찬이야.”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 지랄 맞은 구석이 있다며, 펠리오가 은근한 미소를 곁들여 설명했다.
“누가 봐도 칭찬 아니야.”
살짝 짜증이 난 레오니에가 아빠의 볼을 옆으로 쭈욱 잡아당겼다. 막힘없이 늘어나는 피부는 과연 소설 주인공다운 탱탱한 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잡티나 주름 하나 없는 것이 과연 전형적인 북부 공작님이었다.
‘그럼 내 피부도?’
공작의 딸이니 끝내주려나.
“아이 좋아!”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꽃받침처럼 감쌌다. 축 처졌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뭐가 좋다는 건지.”
슬펐다가 기쁘다가.
“혼자 바쁘군.”
펠리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며칠 후.
펠리오가 집무실에 루페와 인세레아를 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했다.
“우리 애가 너무 비범해.”
“물론입니다, 공작님!”
인세레아가 지극히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루페는 왜 또 저러시나 싶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레오니에 아가씨께선 못하시는 게 없으시죠.”
자신은 일찍이 알았다며 인세레아가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역시 내가 직원 하나는 잘 뽑았어.”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인세레아를 좋게 평가했다. 북부에 빠르게 적응한 인세레아는 이제 유능한 직원으로 활약 중이었다. 천직을 찾은 것처럼 바쁜 나날 중에도 얼굴엔 항상 생기가 가득했다.
처음엔 모두가 반신반의했지만, 곧 인세레아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뒤로는 다들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거기다 한때 펠리오를 스토킹했다는 전적이 이상할 정도로 환호를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레오티 공작을 동경해 짝사랑했다는 건 누가 들어도 저를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살아남아, 심지어 그로도 모자라 직원으로 채용되기까지 했다. 인세레아가 유명인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저희는 왜 부른 겁니까.”
루페가 피곤한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물었다.
‘월급 세 배, 휴가 한 달.’
일에 찌든 직장인은 이제 곧 제게 떨어질 귀한 대가를 주문처럼 외웠다. 카페인이 지독한 커피나 홍차보다도 강력한 각성제였다.
“레오가 손목시계 도안 몇 가지를 그려서 제출했다.”
펠리오는 두 비서에게 도안들을 내밀었다. 요 며칠 동안 레오니에가 간식을 먹으면서 그린 손목시계 도안들이었다. 그 탓에 도안 여기저기에 크림이나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어머나!”
도안을 받기 무섭게, 인세레아가 황홀경을 자아냈다.
“너무 예뻐요!”
다양한 모양의 손목시계들이 정성껏 색칠되어 있었다. 펠리오가 처음 찼던 가죽끈 말고도 쇠 같은 금속으로 만든 손목시계도 있고, 여인들의 팔찌처럼 가늘고 화려한 모양도 있었다.
레오니에가 심심풀이로 그렸다는 손목시계 도안만 얼추 10장이 넘었다. 하지만 루페가 놀란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게 어린애 솜씨라고?’
도안 속 그림들이 하나 같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조금 전 인세레아가 내뱉은 감탄도 단순히 보레오티 추종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섬세한 그림체와 부품별 비율, 명암의 차이 등. 거의 전문 화가 수준이었다.
루페는 저의 큰 형 부부가 낳은 조카의 그림을 몇 번이나 본 적 있다. 레오니에와 나이가 비슷한 조카는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거기다 도안에는 시계를 이런 식으로 만들면 좋겠다며, 주의해야 할 사항 같은 상세한 설명도 함께 적혀 있었다.
“와아…….”
루페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역시 레오니에 아가씨는 예술에도 소질이 있으셨어요.”
인세레아만 당연한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펠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을 한번 가르쳐 볼까 싶은데.”
“하지만 감히 아가씨를 가르칠 만한 예술가가 존재할까요?”
인세레아가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것도 그렇군…….”
펠리오도 크게 동의했다.
“일단 그건 레오 본인에게 먼저 물어보기로 하고.”
펠리오는 도안들을 전부 인세레아에게 넘겼다.
“앞으로 레오가 그리는 모든 도안은 전부 외우도록.”
“네.”
“그리고 이 책도 완전히 외워서 익혀 두도록 해.”
펠리오가 도안과 함께 건넨 건 시계 제작과 설비 등에 관해 저술된 전문 서적이었다. 파보가 아카데미에서 시계 제작을 배우는 동생 보파에게서 구해 온 교과서들이었다.
“이, 이건 왜…….”
인세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 좋게 루페를 보좌하는 자리에 취직했지만, 인세레아는 보레오티 비서진 중에서는 가장 말단이고 신참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손목시계 사업에 참여하기엔 경험도 실력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오랫동안 눈칫밥 먹고 자란 경력으로 알 수 있었다.
제 손에 들린 것들을 설마, 설마 하며 조심스레 추측하는 인세레아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레오는 발상이 뛰어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펠리오가 말했다.
“반면 전문 지식은 없어.”
괴상한 노래를 부른다든지, 동화책을 현실 감각으로 비판한다든지.
레오니에의 발상은 가히 천부적이라 할 만큼 독특하고 창의적이었다. 펠리오도 이따금 놀라서 말문이 막힐 때가 많았다. 주로 아이가 저질스러운 노래를 부를 때 종종 그랬다.
어쨌건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아직 어리다 보니 전문적인 지식이 많이 부족했다. 펠리오는 그런 점을 인세레아가 옆에서 채워 주길 바랐다.
인세레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렇게 대단한 일을 제가……!”
말단 신입 사원은 느닷없이 주어진 막중한 임무에 바들바들 떨었다. 갑자기 제게 닥친 커다란 기대와 부담감에 눈앞이 아찔했다.
‘실망이구나. 이런 것도 못해?’
‘책만 베껴 쓰지 말고 생각이란 걸 좀 해 봐!’
‘하여튼 하찮은 짓만 골라서…….’
잔혹한 환청이 인세레아의 귀를 때렸다.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숨통을 조여오는 환청 너머로 루페의 목소리가 구원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인세레아는 그제야 멈추었던 숨을 헐떡였다.
“이건 인세레아 양이 가장 잘하는 겁니다.”
“자, 잘하는 거요……?”
“기억력이요.”
루페가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이미 비서진들 사이에서 인세레아의 기억력은 신의 선물이라 불릴 정도 유명했다.
“이 책 내용쯤이야 다 외울 수 있잖습니까.”
“그건 할 수 있지만…….”
“저는 인세레아 양의 실력을 압니다.”
루페는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그 재능을 직접 지켜봤다.
“저는 처음에 인세레아 양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게 보여 준 실력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다고요.”
진심 어린 응원에 인세레아의 손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루페가 인세레아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틀리게 말해도 아가씨는 눈치 못 챕니다.”
어차피 시계 제작 같은 건 새로 영입한 전문가들의 분야였다. 조금 틀린 지식으로 도안으로 그리고 의견을 낸다고 해도 그들이 잘 처리할 문제였다.
“……둘이 뭐하는 거지.”
펠리오가 제 앞에서 찰싹 달라붙어 시시덕거리는 비서들을 꼴불견이란 눈초리로 노려봤다. 그제야 둘은 서로의 간격을 알아차리고 거리를 벌렸다.
“그, 그럼 힘내겠습니다!”
최선도 다하겠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인세레아가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갔다. 그 와중에 고개까지 꾸벅 숙인 그녀의 팔에는 레오니에의 도안과 루페가 힘내라며 손수 안겨 준 책이 들려 있었다.
“정말 열심이죠.”
루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
펠리오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움직였다. 그는 루페의 눈에 깃든 감정을 읽고 말았다. 짜증이 났고, 기가 막혔다. 펠리오는 부하의 사적 감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재작년 겨울.”
그 말에 루페가 흠칫했다.
“인세레아가 나한테 쓴 연서를 벽난로에 던졌던 건 기억에도 없나 보지?”
“그, 그건…….”
루페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분명 겨우내 따뜻했단 소리를 몇 번이고 들었다.”
그래놓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치근덕거리는 건 무슨 꼴인지. 펠리오가 진심으로 한심하단 시선으로 루페를 응시했다.
애써 모르는 척했던 예전의 행동들이 루페의 양심을 퍽퍽 찔렀다. 하지만 그에게도 나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인세레아 양은 공작님을 스토킹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엔 누가 보아도 인세레아의 잘못이 컸다. 본인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자 리네 백작 저택까지 찾아가 사과했고, 펠리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어쨌건 편지는 태웠지.”
누군가가 정성을 담아 쓴 연서를, 너는 네 겨울 따뜻하게 보내려고 태웠어.
펠리오가 비아냥거렸다. 지금 와서 관계가 개선된다고 해도, 네가 한 짓이 사라지진 않는단 것을 보레오티 공작이 상냥할 정도로 명확하게 짚어 줬다. 거의 폭력 수준이었다.
망연자실한 루페가 결국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곤 답답한 마음을 풀듯 제 머리를 벅벅 헝클였다.
“저렇게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으면 편지는 태우지 말걸!”
“너 지금 나한테 말 낮추냐.”
“혼잣말입니다!”
“하여튼 주변에 저런 속물들만…….”
펠리오는 제 주변에 제정신인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다. 만약 레오니에가 들었다면, 그 제정신 아닌 사람 중에 단연코 아빠가 으뜸이라고 말했을 거다.
그러나 요즘 아기 맹수는 측정 불가라는 보레오티 재산 덕에 전보다 덜 까불고 있었다. 나름 절찬리 효도하는 중이었다.
“나 없는 데서 징징거려.”
집무실 밖에서 둘이 무얼 하건, 펠리오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설령 그 둘이 눈 맞아서 결혼한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생각이었다. 보레오티 공작은 직원들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고민을 들어줄 만큼 자비롭지 않단 뜻이기도 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서부로 내려갔다.”
펠리오는 인세레아를 먼저 내보내고 루페만 남긴 이유를 드디어 말했다.
“레지나가 올 거다.”
“아…….”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루페가 자세를 바로 고쳤다. 혼잡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무거워졌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제 가문의 땅에 아이를 묻고 싶다고 하더군.”
“알겠습니다.”
“무슨 지원이든 다 해 준다고 해.”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루페의 얼굴에 슬픔이 어렸다. 레지나는 늘 해맑은 미소만 짓는 사람이었다. 머릿속에 꽃밭이 화사하게 피긴 했지만, 보레오티 저택에 따스한 생기를 불어넣어 줬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앙상한 백골만 남아 수년 만에 고향 땅에 돌아왔다.
“그럼 아가씨껜…….”
“내가 말한다.”
별말 없이 짧게 대답한 펠리오는 다시 손을 움직여 서류를 만졌다.
“……이왕 가출한 거, 잘 살 것이지.”
이런 식으로 다시 돌아오는 건 또 무언지, 펠리오가 짧게 혀를 쳤다. 유감스럽게도 펠리오는 여전히 사촌 누이에게 큰 연민이나 어떤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레오니에만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인생 다 산 것처럼 굴기는 하지만, 어리고 가슴에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거기다 하필이면 친모의 유해가 고아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그 경과를 설명하는 것도 여러모로 문제였다.
“일단은…….”
펠리오가 복잡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레오의 엄마는 평민 출신이었어.”
펠리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상당히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루페는 곧장 알아들었다.
지금 펠리오는 앞으로 레오니에의 대외적 친모가 될 어느 여성의 인적 사항과 그 흔적을 조작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말은, 레지나의 사망 신고서에도 손을 대란 뜻이었다.
‘아가씨의 미래를 위해서야.’
안타까운 일이나, 루페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자신이 레지나에게 지닌 호감은 둘째치고, 그 존재가 아이에겐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 뻔했다.
펠리오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레지나는 수년 전에 병으로 요절한 인물이 되어야 했고, 레오니에는 추적도 힘들 정도로 평범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여야 했다.
‘공작님도 대단하시군.’
루페는 내심 감탄했다. 레오니에를 위해 자신의 사생활마저 조작하는 결단력이 놀랍기만 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이 사생아를 인정하고 추문을 품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난 절대 저렇게 못 해.’
오랫동안 곁을 지켜본 루페조차 펠리오의 부성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가씨의 모친은 사망으로 처리할까요?”
가까스로 정신 차린 루페가 물었다.
“그래야지.”
펠리오가 동의했다.
각본은 순식간에 맞춰졌다.
어느 날 우연히 품에 스쳐 갔던 평민 여자가 임신했단 연락이 들어왔는데, 수소문하니 여자는 죽고 아이는 고아원에 들어갔다. 그 아이가 바로 레오니에였다.
펠리오는 거기에 부가 설정도 넣었다.
“내가 그 여자를 꽤 사랑했다고 해.”
지난번 수도에서 레오니에한테 아빠는 건전한 편이라고 엄지손가락 응원을 받은 이후, 펠리오는 이성 교제를 최대한 자제하자고 다짐했다. 지금은 그냥 레오니에만 잘 키우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 게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펠리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존재하지도 않는 평민 여자를 사랑했다는 설정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