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연회가 끝나고
며칠 뒤.
신문에 수비테오 황제가 주최한 연회에 대한 평가가 실렸다. 그의 즉위 이후 처음 열리는 연회였으며, 돌아가신 선황을 추모하는 자리였다는 둥.
초대받은 주요 귀족 가문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보레오티가 가장 먼저였다. 특히 시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보레오티 공작이 선보인 손목시계는 새로운 유행을 선도한 것이란 찬사가 가득했다.
“……이게 끝?”
큼지막하게 펼쳐진 신문 너머로 레오니에가 나타났다.
즐겨 묶는 양 갈래를 큼지막한 초록색 세모 방울로 장식했고, 연분홍색 반소매 셔츠에 남색 반바지를 입었다.
“진짜 이게 다야?”
실망한 레오니에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폭신한 소파는 흔들림에도 거뜬했다.
“누가 신문 읽으면서 떠들래.”
건너편 소파에 앉은 펠리오가 가볍게 주의를 줬다. 그는 기다란 소파 위에 홀로 기대듯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월등한 긴 다리가 기어코 소파 밖으로 삐져나갔다.
연분홍색 반소매 셔츠에 남색 바지를 입은 모습이 레오니에와 똑같았다. 머리맡에는 펠리오가 즐겨 마시는 진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커피는 리네 상단이 타국에서 사들이는 귀한 수입품이었다. 덕분에 두 부녀가 머무르는 거실에는 진한 원두 향이 가득했다.
“흥, 분홍이 아빠가 시끄러워.”
“너도 오늘 분홍이 딸이잖아.”
“나는 귀엽지만, 아빠는 야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지.”
오늘도 한마디 지는 법이 없는 부녀가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였다. 흔한 일상이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책을 테이블에서 치운 펠리오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까부터 듣고 있자니 고작 깽판 문제로 저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뾰로통 튀어나온 아이의 입술이 아주 고집스러웠다.
“아니, 아빠 가서 황제랑 담판 떴다며. 내 깽판 처리 문제로.”
“가서 내가 고생 좀 했지.”
연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 펠리오는 입궁해서 황제와 전날 있었던 레오니에의 ‘실수’를 해결하러 갔다. 당연히도 황제는 화가 무척 많이 난 상태였다. 펠리오는 그가 방심하다가 꼬마한테 치욕을 당한 것이 꽤나 뼈 아플 것이라고 조금은 동정했다. 물론 동정만 했다.
“그런데 저놈의 딸은 아빠의 노력도 모르고 저렇게 투덜거리고.”
“아쉽잖아…….”
“뭐가 아쉬워.”
“아쉽지!”
레오니에가 울컥하며 소리쳤다.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을 덮는 조건으로 내 깽판을 덮은 거잖아.”
레오니에는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고 미안했다. 황제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버릴 수 있는 커다란 약점을 고작 어린 애의 실수를 감추려고 쓰다니,
“난 아빠가 그런 식으로…….”
말하다 또 한 번 울컥한 레오니에가 기어코 고개를 추욱 떨구었다.
“……그런 식으로, 도와주는 거였다면 그딴 깽판 안 쳤어.”
차라리 잠 온다고 징징거리다가 집에 갔을 거다. 최악의 경우엔 펠리오가 말했던 대로 지리는 게 나았다.
“내 딸.”
아직 어린 내 딸.
풀이 팍 죽어 버린 레오니에 옆으로 펠리오가 이동했다. 그는 그대로 레오니에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아기 맹수는 내려달라고 버둥거렸지만, 펠리오는 가만히 있으라며 두 팔로 아이를 꼭 안았다.
“변태! 이거 놔!”
“변태는 너지.”
이 근육 박애 변태야. 펠리오가 아이의 손을 꼭 쥐며 조금만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레오니에는 입술을 삐죽이며 뒤통수로 아빠의 가슴을 툭툭 쳤다. 하지만 부탁한 대로 조용히 있었다.
“그건 네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한 게 아니야.”
펠리오가 말했다.
“네 말대로, 그 사건은 분명 황제를 압박할 약점이지.”
“거봐. 중요한…….”
“하지만 결국 미수야.”
그들은 분명 마물을 몰래 잡아들여 이를 불법 경매에 내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도 모르게 끝난 일이고, 펠리오는 이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이 약점이 지닌 힘은 레오니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미약했다.
펠리오는 이를 우유에 비교했다. 쏟으면 확실히 눈에 띄는 것. 그러나 서둘러 쓰지 않으면 빠르게 부패해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
펠리오의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오히려 이번에 쓴 게 시기적절하니 딱 좋아.”
“그, 그런 거야?”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레오니에가 우물쭈물 망설이다 물었다. 펠리오의 설명 덕에 이해는 했지만, 여전히 아까운 마음이었다.
“듣다 보니 조금 실망인데?”
그러자 갑자기 펠리오가 서운하단 식으로 중얼거렸다.
“이 아빠와 보레오티가 고작 그딴 거 없다고 황제를 상대하지 못하나? 설마 저 노란 새 새끼를 우리 보레오티와 같은 취급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레오니에가 주먹을 꽉 쥔 채 소리쳤다.
“누구도 보레오티를 이길 수 없어!”
“그래, 그거야.”
“그리고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잘생기고 근육 짱짱한 절륜 파파인걸!”
쏟아지는 칭찬을 흐뭇하게 듣던 펠리오가 ‘절륜’이란 단어에 미간을 꿈틀거렸다.
“너 그 말은 어디서 배웠어?”
“고아원!”
“…….”
펠리오는 요새 레오니에가 말하는 ‘고아원에서 배웠다’라는 말이 점점 믿기 어려워졌다. 핑계처럼 들렸다. 하지만 고아원이 악질이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 고로 오늘도 북부에 있는 고아원 선생님들의 접대 강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어쨌든 알고 있네.”
보레오티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주인 펠리오는 역대 보레오티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칭송받는 존재였다.
“그러니 알겠지?”
펠리오가 몸을 숙여 아이의 이마에 제 머리를 콩콩 박았다.
“……아빠는 날 너무 좋아해.”
멋쩍은 듯 투덜거린 레오니에가 몸을 돌려 펠리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팔이 짧아 단단한 허리를 전부 다 안지 못했지만, 있는 힘껏 힘을 줬다. 곧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니까 고작 어린애 깽판에 그렇게 큰 약점을 써 버리지.”
“큰 약점 아니라고 했잖아.”
“하지만 아빠라면 크게 쓸 수 있었잖아.”
어쩌면 자신이 연회에서 피운 깽판보다 더 크고, 더 확실하게 황실에 아주 큰 엿을 날릴 수 있었을 거다.
“뭐…….”
펠리오가 입술 한 쪽을 비틀었다. 레오니에의 말대로,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야 나름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용할지 나름 즐겁게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다.
“거봐. 수지 안 맞잖아.”
“그렇진 않아.”
이번 거래는 예상한 것보다 이득이 많았다. 펠리오는 이를 아이에게 차근히 가르쳐 줬다.
“귀족들은 이제 알 거야.”
네가 누구인지.
그들은 노골적으로 레오니에를 비웃고 험담했으며, 막상 수도에 아이가 떡하니 나타나니 은근슬쩍 가치를 가늠하며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어제의 연회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레오니에는 송곳니와 떠나기 전에 남긴 인사로 그들을 두려움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펠리오는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무마하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이제 모두가 레오니에를, 보레오티 공작이 사랑하는 그의 하나뿐인 딸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럼 두 번째는 뭘까?”
“몰라.”
“한 번 생각해 봐.”
으음, 레오니에가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여전히 모르겠어.”
그러나 평소보다 기운은 쭉 빠진 탓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기 맹수는 아직도 자신이 큰 실수를 범한 것만 같았다.
“미안해.”
“미안할 일은 아니지.”
답을 잘하는 아이도 예쁘지만, 그게 꼭 펠리오가 레오니에한테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니 답을 하지 못해도 여전히 예뻤다.
“맹수의 송곳니가 무서운 힘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지.”
펠리오가 말했다.
“하지만 막상 그 힘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아는 일반인은 없어.”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는 그 힘을 평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걸 극히 지양했다. 사람의 목숨 그 자체를 위협하는 힘인 만큼 신중해야 했다. 레오니에가 깽판 전에 명단에 적힌 사람들의 임신 여부나 건강 상태를 살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근데 아빠…….”
레오니에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북부에서 막 쓰지 않았어?”
“내가 언제 막 썼어.”
“메레오카 백작 영애랑, 그 마물 불법 거래 소탕할 때…….”
“그건 예외야.”
주제도 모르고 맹수의 구역을 더럽힌 놈들은 제외라며 펠리오가 말했다.
“어쨌건 송곳니를 남에게 쓸 일이 별로 없어.”
“…….”
“……좀 짜증 나면 써도 돼.”
결국 펠리오가 송곳니의 사용 규제를 관대하게 풀었다. 레오니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철딱서니 없는 아빠를 응시했다.
“여하튼 그 힘을, 황제 폐하가 이번에 몸소 겪으셨지.”
나름 단서를 많이 줬다.
펠리오는 한번 말해 보라며 레오니에한테 순서를 넘겼다. 아이는 조금 전부터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눈에 생기가 반짝였다.
“겁을 먹었구나.”
“그래.”
“황제는 한동안 보레오티를 건드리지 않을 거네?”
레오니에의 송곳니는 황제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남겼다.
“하지만 얼마 못 갈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수비테오 황제는 속이 좁고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은 분명 수치와 치욕으로 변할 게 틀림없다.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거다.
“뭔 짓을 할 것 같은데.”
“그래?”
“응.”
“그럼 나중에 황제가 무슨 치졸한 방법으로 보레오티를 괴롭힐지 석 장 이상의 분량으로 적어서 이 아빠한테 제출하도록.”
아기 맹수가 입을 쩍 벌렸다.
“숙제다.”
“이 잔인한 아빠야! 숙제를 이딴 식으로 내는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지.”
후계 수업의 일환이라며 펠리오가 오만방자하게 웃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레오니에는 콧김만 뿡뿡 뿜어낼 뿐이었다.
“아, 이이……!”
분에 찬 아기 맹수가 기어코 욕을 내뱉었다.
“애 딸린 아빠처럼 생겨서는! 평생 나 키우면서 살아라!”
아쉽게도 그 말은 사실이어서, 펠리오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아빠한테 나쁜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라는 잘못 목걸이를 저녁 식사 때까지 걸고 있으라는 앙증맞은 벌을 받아야 했다.
* * *
후계 수업이니 숙제니 뭐로 흐지부지되었지만.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깽판을 무마하면서 얻은 이득에는 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시계였다.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덮기로 합의를 본 후, 파르두스 후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황제가 자신이 송곳니에 당해 쓰러진 것이 절대 세간에 퍼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어찌하시겠습니까?’
‘들어주지, 뭐.’
펠리오는 그 정도야 해 줄 수 있다고 말하며, 이번 연회에 초대되어 신문에 평론을 올리기로 했던 사람을 찾아가 약간의 양해를 구했다. 그 ‘약간의 양해’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모르나, 평론가는 펠리오의 뜻을 존중하고 따랐다.
실제로 신문에 실린 평론은 연회에 대해서는 크게 서술되지 않았다. 대신 손목시계에 대한 부분은 거의 광고처럼 찬양했다. 덕분에 손목시계가 크게 부각 되었다.
신문이 발간된 당일부터 시작해 오늘까지, 손목시계에 대해 물어보고 투자를 통해 함께하고 싶다는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일손이 부족하군.”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펠리오의 입에서 인력 부족이 언급되었다. 원래도 밀려드는 서류와 북부 지역을 다스리는 큰일이 많아 바쁜 거야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 시작한 손목시계 사업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심지어 레오니에도 서류를 순서대로 정리해 주거나, 손목시계와 시곗줄 도안을 자신이 직접 그리며 조금이나마 일손을 도와주는 지경까지 왔다.
원래라면 펠리오도 레오니에한테 그런 걸 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바빴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부족해?”
레오니에가 물었다.
“루페 그놈이 결국 울더라.”
제발 한 사람만 더 고용하라고, 잡일만이라도 도와줄 사람을 구해 달라며 펠리오의 바짓자락을 부여잡았다고 한다. 북부에 있는 부하 중 두 명만 데리고 온 탓이 컸다.
“아저씨…….”
레오니에가 오늘도 죽어 가는 아빠의 비서를 동정했다.
“하지만 걱정 마!”
아기 맹수가 깡충깡충 뛰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 인력 부족을 채워줄 인재를 소개해 줄 테니까.”
오늘 막 그 사람이 저택에 와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펠리오는 그 사람을 직접 마중하러 레오니에와 함께 현관으로 가는 중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야?”
“보레오티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대단하지!”
“너 설마…….”
스치듯 떠오르는 누군가의 형상에 펠리오가 눈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짜잔!”
레오니에가 마침 도착한 인재를 소개했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입니다!”
면접은 응접실에서 이뤄졌다.
“어디 보자…….”
알 없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슥 올리며, 레오니에가 이력서를 읽었다.
“이름이 인세레아 히에이나.”
퍽, 이름을 읽다만 레오니에가 테이블을 요란 법석하게 때렸다.
“이름부터 너무 예뻐! 인세레아라니! 딱 우리 저택에서 일할 이름……!”
“적당히 해라.”
듣다못한 펠리오가 부정 인사하려는 레오니에의 볼살을 눌러 말을 멈추게 했다. 눌린 볼살 탓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물고기처럼 뻐끔거렸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
“네, 네에……!”
히에이나 영애가 온몸에 힘을 바짝 줬다. 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훔쳐만 봤던 분을 바로 코앞에서 보자 전신이 굳어 버렸다.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일단 다른 건 다 둘째치고 말입니다.”
펠리오는 그런 히에이나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살다 살다 저를 쫓아다닌 스토커와 면접을 보게 될 줄이야.
그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웬수를 가볍게 흘겨봤다.
“뭐? 뭐?”
정작 이 웬수는 나 잘났다는 얼굴로 뺀질거릴 뿐이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펠리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온 겁니까?”
“고, 공작 영애께서, 면접을 보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면접…….”
머리가 지끈거렸다. 면접 오라고 부른 레오니에나, 또 거기에 응해서 나온 히에이나 백작 영애나. 그냥 둘 다 잠깐만 제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래도 레오는 두자.’
딸 등신은 그런 와중에 또 레오니에가 옆에 없는 건 싫었다.
“지금 우리 공작저가 구하는 사람은 비서직입니다.”
“네, 네!”
“조금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 비서인 리코스 자작을 도울 비서입니다.”
보레오티 공작의 업무를 돕는 건 그의 가신인 리코스 자작만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직원들은 리코스 자작을 보필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그리고, 최소 학력이 아카데미입니다.”
“아…….”
히에이나 백작 영애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테이블 아래,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영애께선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으셨군요.”
“그, 그게…….”
“자격 조건이 미달입니다.”
면접 자체가 안 된다는 소리였다.
“이 바보 아빠!”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 질렀다. 깜짝 놀란 히에이나 영애가 몸을 뒤로 주춤거렸다.
“이 편협하고 폐쇄적인 아빠!”
“그런 게 아니라…….”
“아카데미 졸업 좀 못 했다고 면접 기회까지 박탈하는 건 그렇잖아!”
“그게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펠리오가 흥분한 딸아이의 머리를 꾸욱 누르며 설명했다. 레오니에는 이 손 치우라며 이를 딱딱 맞부딪혔다. 안 치우면 깨물 거란 뜻이었다. 홀로 남은 히에이나 백작 영애만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이 언니 재능 엄청 많아!”
“언제부터 스토커랑 언니 동생하고 지낸 거냐.”
“편지 주고받으면서!”
“너 진짜 편지 주고받냐?”
펠리오가 기어코 뒷목을 잡았다. 혈압이 오르기 직전이었다. 이 겁도 없는 게 맹랑한 짓은 다 저지르고 있었다.
“내가 혈압으로 쓰러지면 다 레오, 네 탓이다.”
“역시 내가 세계 최강이군.”
“잡소리는 이제 그만.”
펠리오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럼 레오를 봐서, 물어는 보죠.”
다시금 제게 쏠린 시선에 히에이나 영애가 자세를 똑바로 했다.
“무얼 할 수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히에이나 영애는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레오니에를 보았다. 레오니에는 주먹을 불끈 쥐며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응원했다.
“……저는.”
후우, 짧게 숨을 고른 히에이나 영애가 이어 말했다.
“글을 잘 씁니다.”
그 증거를 가져왔다며, 히에이나 영애가 저택에 들어올 때부터 들고 온 조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거기에 수많은 편지가 보관되어 있었다.
“전부 공작님께 보낸 연서의 필사본입니다.”
상자를 살피려던 펠리오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제가 많이 모자라지만, 필기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빠르게 할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책을 필사하는 게 취미였거든요.”
“이거 봐, 아빠.”
레오니에가 편지 하나를 뜯어 보여 줬다. 펼쳐진 편지지에는 아주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내용은 전부 펠리오를 향한 찬양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토씨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다. 맞춤법이 전부 다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다.
“언니, 이거 다 쓰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레오니에가 펼친 편지지는 총 다섯 장이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편지가 상자 안에 무려 열 통이나 있었다.
“그건 안 재 봐서 모르지만, 한 권 필사에 두 시간이 조금 안 걸립니다.”
“필사했던 책 이름은?”
펠리오가 큰 기대감 없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래도 한 번은 물어봐 주겠단 뜻이었다.
“철학자 로소피아의 세 번째 저서였습니다.”
“그거 엄청 두꺼운 거잖아요!”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철학자 로소피아의 세 번째 저서는 두께가 펠리오의 팔뚝만 했다. 레오니에도 이전에 읽으려고 무릎 위에 올렸다가 피가 안 통해 쩔쩔맬 정도였다. 그걸 두 시간이 조금 안 걸려 필사했단 건 정말 대단한 증거였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펠리오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을 흔들었다. 곧 트라가 들어왔고, 펠리오는 그에게 필기할 도구와 그 철학자의 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러면 종이랑 펜만 주시면 되는데…….”
“책이 있어야 필사를 하지요.”
“한 번 필사한 건 다 기억하거든요.”
히에이나 백작 영애가 우물거리며 답했다. 그 말에 맹수 부녀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내 따까리, 아니, 언니야!”
레오니에가 멋지다며 손뼉을 짝짝 크게 쳤다. 칭찬받은 히에이나 영애가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와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두목과 부하였군.’
펠리오는 그제야 레오니에가 저 스토커를 살뜰히 챙기는 이유를 알았다. 아무래도 어찌어찌 동정하게 되면서 자기가 돌봐 줘야 한다고 여기게 된 모양이었다.
잠시 후, 트라가 부탁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쟁반에 책을 담아 오는 그의 팔뚝에 힘이 가득 실린 걸, 레오니에는 빈틈없이 포착했다.
‘역시 전직 기사 출신!’
근육이 전보다 줄었다곤 해도 옷 너머로 보이는 전완근은 옛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곧 히에이나 영애가 펜을 들었고, 펠리오는 책을 펼쳤다.
“한석봉 같네.”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그건 또 뭔데.”
“밤에 불 끄고 빵을 썬 엄마랑 필기하는 아들.”
“엄마란 사람은 손가락 괜찮으시다냐.”
“응, 멀쩡하시대.”
“그럼 됐고.”
책을 계속 넘기던 펠리오가 어느 부분에서 멈췄다.
“240쪽.”
펠리오가 부르기 무섭게, 히에이나 영애가 막힘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와아……!”
레오니에가 순식간에 채워지는 종이를 보며 감탄했다. 펠리오 역시 평소보다 커진 눈으로 바라봤다.
책 내용을 기억한다는 히에이나 백작 영애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쪽수만 듣고도 완벽하게 필사했고, 그 속도는 거의 야생마가 초원을 뛰어다니는 수준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글씨는 어디 하나 삐뚤어진 데가 없었다.
다 쓴 종이는 펠리오가 직접 확인했다.
“아빠 어때? 맞아?”
레오니에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부 다 맞아.”
확인을 마친 펠리오는 맥이 빠졌다. 뭐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심지어 원본에 잘못 표기된 오타도 히에이나 영애는 이를 고쳐 필사했다.
“이 실력을 지니고도 왜 아카데미에 못 간 겁니까?”
이쯤 되니 펠리오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필사 속도도 속도지만, 한 번 필사한 책 내용을 전부 기억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 그게…….”
예상치 못한 칭찬만 계속 받아 부끄러워진 히에이나 영애가 말을 더듬었다.
“제, 제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 그러니까 긴장, 긴장을…….”
요는 지닌 재능은 출중하나, 타고난 성격이 재능을 방해했단 뜻이었다.
“그럼 오늘은 긴장 안 했습니까?”
“오늘은, 영애께서 옆에 계셔서요.”
히에이나 영애가 수줍게 말했다.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저를 하찮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고, 제 몇 안 되는 재주도 좋게 봐주셨어요. 부끄럽게도 저는 이렇게 칭찬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부모님이 기뻐할 것 같은데?”
“부모님은…….”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에게 부모님은 무서운 분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지금 눈앞에 있는 펠리오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펠리오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그런데.”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우리 딸한테 따까리, 아니, 부하 소리 듣고 싶습니까?”
“안 되나요?”
히에이나 영애가 도리어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께선 대단하신 분이세요. 저는 지금껏 영애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레오티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처음으로 목에 힘주어 발언했다.
“저는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는 보레오티를 동경해요!”
툭툭.
펠리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들겼다.
면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저, 공작님.”
저택을 나서기 전. 히에이나 백작 영애가 펠리오를 불렀다.
“그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요…….”
그러고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레오니에의 성화에 못 이겨 현관까지 나온 펠리오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반성은 정말 했습니까?”
“네.”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로, 히에이나 영애가 사과했다.
“사실 편지를 쓰고, 공작님을 따라다닐 때부터 계속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공작님을 동경했어요.”
사람들 눈치가 무서워 뭐든 제대로 하지 못하고 늘 뒤처지는 저에게 보레오티는 멀리서나마 마음껏 동경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늘 동경하고, 그래서 공작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선을 많이 넘었죠.”
조용히 듣고 있던 펠리오가 한마디 했다. 할 말 없는 히에이나 영애가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난 내 딸을 몰래 훔쳐본 건 결코 용서 못 합니다.”
싸늘한 시선이 히에이나 백작 영애를 노려보았다. 배꼽 근처에 꼬옥 모았던 히에이나 영애의 두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은 죄가 있는 탓에 할 말이 없었다.
“그때의 일 때문에 영애를 고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히에이나 영애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사실, 이 면접도 보레오티 영애께서 해 보지 않으시겠냐고 먼저 제안하셨어요.”
펠리오도 아까 들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제야 왜 레오니에가 면접을 권했는지도 알았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는 천하의 보레오티를 스토킹한 것 치고는 자존감이 너무 낮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질 못했다.
“솔직히 제 실력으로는 당연히 못 붙을 거란 걸 잘 알아요.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염치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건?”
“이제 공작님을 그만 동경하려고 합니다.”
고개를 천천히 든 히에이나 백작 영애는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운 얼굴을 했다.
“죄송했습니다, 공작님.”
히에이나 영애가 다시금 사과했다.
“저도 오늘을 계기로 조금씩 노력하겠습니다.”
“무엇을 노력할 건가요?”
“영애께서 그러셨어요. 저는 하찮지 않다고.”
그러니 가장 먼저 스스로 하찮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려 했다.
“다른 사람들 눈엔 미흡하겠지만…….”
“…….”
“그리고 리네 백작 영애께도 사과하려고요.”
“잘 생각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색한 미소를 끝으로 히에이나 영애가 감사하단 인사를 남기고 저택을 떠났다.
“……레오.”
아까부터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레오니에가 아빠의 손을 꼭 쥐었다.
“응, 아빠.”
“히에이나 영애가 우피클라한테 사과했다는 연락이 오면.”
펠리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로 다시 오라고 해.”
면접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아빠!”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대신 영애의 월급은 네 돈에서 차감될 거다.”
“……어?”
제 일처럼 기뻐하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나 돈 없는데?”
레오니에는 용돈을 받지 않았다. 그냥 펠리오에게 가지고 싶은 게 있다고 말하면 알아서 눈앞에 대령하기 때문에 필요성을 딱히 못 느꼈다.
“거기다 저 언니는 보레오티 직원으로 채용되는 거잖아.”
그러니 월급은 보레오티 공작이 챙기는 것이 당연했다.
“레오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히에이나 영애가 부하라고.
“부하를 챙기는 건 상사의 몫이지.”
“레, 레오는, 돈 없는데?”
사악한 심보를 느낀 레오니에가 긴급 애교를 발동했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어 최대한 순진무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자신을 삼인칭으로 칭했다.
펠리오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손목시계 사업 시작하면 그게 다 네 돈이 될 거잖아.”
정식 직원이 되면 지금은 보레오티의 재산으로 월급을 따로 대줄 테니, 나중에 수익이 생기면 도로 갚으라며 펠리오가 말했다.
레오니에가 깜짝 놀라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그냥 저 언니 짤라.”
“진심이냐.”
“아니, 고용해…….”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사기당한 기분이야…….”
괜히 짜증 난 레오니에가 애먼 아빠의 장딴지만 꾹꾹 눌렀다.
“……진짜로 고용하셨어요?”
며칠 후.
루페는 이번에 새로 채용된 직원이란 소개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히에이나 백작 영애를 보자마자 굳어 버렸다. 그리고 바로 펠리오를 찾았다.
“그렇게 바쁘다고 노래하더니.”
서류를 처리 중이던 펠리오가 불청객을 노려봤다.
“네 놈이 원하는 대로 직원 채용했으니 이제 일해.”
“그래도 저 사람은 좀……!”
“좀, 뭐?”
펠리오가 서류를 보다 말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봤다. 루페는 무척 황당했다. 펠리오는 저와 제 딸이 스토킹을 당한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공작님이랑 아가씨를 스토킹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지.”
펠리오가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하는 말만 들으면 어딘가에 통달한 현자의 명언 같았다.
“그럼 황제도 용서하실 겁니까?”
“뭐든 예외가 있는 법이다.”
죄가 곧 사람인 경우도 있다며 펠리오가 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다음 서류를 집어 들던 펠리오가 살짝 짜증 어린 눈으로 루페를 노려봤다.
“일단 써 봐.”
“아니 그래도……!”
“그래도 아니면 레오 돌려줘.”
“아가씨한테요?”
루페가 황망한 눈으로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레오가 자기 부하로 쓰겠다고 데려왔는데, 실력이 좋아서 내가 빌렸어.”
“진짭니까?”
“어느 정도는.”
실력은 자신도 보증한다며 펠리오가 말했다. 그제야 루페도 정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히에이나 영애는 아카데미에도 입학하지 못했고, 공작 부녀를 스토킹한 전적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직 미성년이었다.
그렇게 걸리는 점을 조목조목 따지니, 펠리오가 답답하단 듯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루페 리코스 자작.”
그리고 한마디 했다.
“사람이 그렇게 편협하고 폐쇄적인 마음을 지녀서 어쩌자는 건가.”
어제 자신이 레오니에한테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히에이나 영애는 그대의 일을 도울 만큼 괜찮은 실력을 지녔다. 보레오티가 고작 그런 사소한 문제로 인재를 거부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야.”
“사소하다니요…….”
상식인 루페에겐 중요했다.
“그리고 히에이나 영애는 어제 막 생일을 넘겨 성인이 되었다.”
스토킹 문제도 본인이 충분히 반성하고 있으니 지켜보면 되는 문제였다.
“그러니 가 봐.”
바빠 죽겠는데 방해하지 말고. 펠리오의 축객령에 그제야 루페도 어쩔 도리 없이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뭐하는 겁니까.”
눈에 들어온 건, 아까 자신이 황급히 방을 나설 때 그대로 서 있는 히에이나 영애였다.
“앉아 있지 않고.”
“앉으시란 말씀이 없어서…….”
“그럼 계속 서 있었단 건가요?”
당황한 루페가 일단 히에이나 영애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서툰 솜씨로 차를 내렸다. 일단은 혼자 기다리게 둔 것이 미안해서였다.
“영애, 우선은…….”
“여, 영애라고 안 부르셨으면 좋겠어요.”
다급하게 끼어든 히에이나 영애가 자신의 바람을 용기 내어 말했다.
“실은 공작저에 오면서 가출했거든요.”
“가, 가출이요?”
콜록, 깜짝 놀란 루페가 차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덕분에 입가가 찻물로 흥건해졌다.
“앞으로 제 삶을 새롭게 시작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무작정 짐만 들고 나왔어요.”
“그럼 잠은 어디서 잡니까?”
“직원분들이 지내는 별관이요.”
보레오티는 수도든 북부든 어느 저택에나 직원들이 지낼 수 있는 별관을 따로 마련해 뒀다. 저택 사용인들이 지내는 별관과는 다른 곳이었다.
“안 불편합니까?”
그래도 명색이 백작 영애로 지내온 세월이 있는데, 직원들이 모여 기숙하는 곳이 불편할 게 뻔했다.
“너무 편하고 행복해요.”
그러나 그렇게 답하는 히에이나 영애의 얼굴에는 거짓 한 점 없었다. 루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일전에 보았던 히에이나 백작 부부가 떠올랐다. 눈칫밥 먹는 그 집보다야 여기가 마음은 편할 터였다.
“……그럼, 인세레아.”
“아, 네에!”
히에이나 백작 영애가, 인세레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영애를 쉽게 믿지 못하겠습니다.”
“네, 당연합니다.”
인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야 예상한 바였다.
“그래도 공작님과 아가씨의 추천이 있으니, 며칠 동안은 지켜보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 완벽하게 해 주는 편이 좋습니다.”
“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세레아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각오를 다졌다.
“그럼 일단…….”
루페는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줬다.
* * *
“어떻게 저 실력으로 아카데미를 못 간 거죠?”
그날 저녁.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된 루페가 펠리오에게 말도 안 된다며 열변을 토했다.
“전 그렇게 글을 정교하고 빠르게 쓰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식사 때 누가 떠들래.”
“루페 아저씨, 조용히 좀 해요.”
정작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시끄럽다고 인상을 와락 썼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루페가 제 밑으로 새로 들어온 직원인 인세레아 자랑을 틈만 날 때마다 떠들고 있었다. 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인세레아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했다. 루페가 찾는 서류를 전부 기억해내 필요한 내용을 그 자리에서 바로 전달하고, 여기저기 보내야 할 편지나 서류를 빠르게 대필했다. 거기다 펠리오를 스토킹한 탓에 보레오티의 일정을 어느 정도 파악해 둔 상태라 가르칠 내용 자체가 생각보다 적었다.
“애당초 그런 능력도 없으면 공작님을 어떻게 쫓아다녔겠습니까.”
루페의 칭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을 잘해서 다행이군.”
펠리오가 빵을 뜯어 먹으며 말했다. 그래도 약간의 우려가 있긴 했는데, 루페가 저렇게 미친놈처럼 몇 번이고 자랑하는 걸 보니 진짜 실력 하나는 출중한 모양이었다.
“그 언니는 내가 찾아낸 인재야!”
레오니에가 고기를 씹다 말고 으스댔다.
“두 사람 다 나한테 고마워해!”
“아가씨, 감사합니다.”
저렇게 일 잘하는 사람 찾아 줘서 고맙다며 루페가 진심을 전했다. 그는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음에 근육 크로키 사전 사서 선물하겠습니다.”
“루페 아찌…….”
감동한 레오니에가 울먹거렸다.
“이 속물아.”
그딴 거로 감동하지 말라며 펠리오가 냅킨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 줬다. 입가에 묻은 소스와 부스러기가 냅킨으로 전부 옮겨졌다.
“근데 저도 좀 안 되었다, 싶긴 했습니다.”
루페가 히에이나 백작 부부를 떠올리며 한쪽 눈썹을 비틀었다.
“저런 재능을 가졌는데도 인정을 못 받다니.”
“형편없는 부모지.”
“부모 복도 없는 거지.”
아앙, 레오니에가 샐러드를 크게 먹으며 우물거렸다. 아삭아삭 씹히는 채소 사이로 새콤한 소스 맛이 퍼져 갔다.
“자식이야 부모가 계획하고 낳는 거라지만, 부모는 자식이 고를 수도 없는 거니까. 인세레아 언니가 고생 좀 했겠더라고.”
에휴, 레오니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세상이 말세야…….”
어디서든 그런 못된 부모가 있는 법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자식만 부모 학대하면 패륜인가? 그런 것도 패륜이야.”
그러고는 저러다 자식한테 버림받아도 할 말 없다며 씁쓸히 말했다.
“…….”
“…….”
펠리오와 루페는 쫑알쫑알 투덜거리는 레오니에를 조용히 바라만 봤다.
“네 안에는 꼭 70대 할아버지가 있는 것 같구나.”
“식사 중엔 시비 걸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리고 왜 또 하필이면 할아버지냐고 레오니에가 물었다.
“네가 근육을 좋아하는 모습이, 괜히 젊은 여자 희롱하려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끓어다 시시덕거리는 변태 영감들을 닮았거든.”
“이야, 여기서 나와 아빠가 친자 관계가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군.”
레오니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자식이면 저런 말 안 하지.”
“네가 그렇게 남들 들으면 가슴 아파할 이야기를 막 하는 점도 영감 같고.”
펠리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 있으면 어쩌려고.”
마침 식사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이 후식을 가지러 갔기에 다행이었다.
“이렇게까지 자기 출생에 연연치 않는 놈은 처음이군.”
대물도 보통 대물이 아니었다.
“저는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정작 사정을 다 아는 루페만 괜히 껄끄러웠다.
“그냥 그러려니 들어.”
“맞아. 나랑 아빠가 이러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럼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죠.”
밥 먹으면서 나눌 대화 주제라기엔 좀 많이 무거웠다.
“으음, 그러면…….”
레오니에가 빵으로 접시에 남은 소스를 한데 모아 찍으며 물었다.
“왜 황녀 전하는 남잔데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거야?”
딸그락.
수저가 식기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 남……!”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한 루페가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펠리오가 빵을 던져 그의 입에 정확히 명중시켰다. 빵으로 얻어맞은 루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어라? 루페 아저씨 몰랐…….”
“레오.”
쉿, 펠리오가 아이의 입에 손가락을 얹으며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줬다. 때마침 사용인들이 후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식사 중에는 조용해야지.”
펠리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남은 와인을 조용히 들이켰다. 아까까지 같이 떠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조용히 해야 할 분위기였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말없이 끄덕이며 제 앞에 차려진 후식에 눈을 돌렸다. 오늘의 후식은 꿀에 흠뻑 적신 동그란 치즈였다.
식사 중에 못다 한 이야기는 거실에서 이뤄졌다. 이야기 내용이 내용인 만큼, 펠리오는 사용인들이 거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레오니에는 방에 있던 까만 사자 인형을 꼬옥 껴안은 채 두 어른 사이에 앉았다.
“아빠가 둘 있는 것 같네.”
혼자 태연한 아기 맹수가 농담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라면 제발 그런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펠리오와 루페가 각각 한마디씩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둘 다 말을 심각하게 아꼈다.
특히 루페는 아직도 식당에서 잃어버린 정신머리를 찿아오지 못한 듯했다. 일 잘하는 부하 직원이 들어와 만족하던 모습과 완전 딴판이었다.
“……그, 정말입니까?”
그러다 겨우 정신 차린 루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녀 전하께서 남, 그러니까, 여인이라기보다는, 저처럼…….”
“뭐 하나 달렸냐고요?”
보다 못한 아기 맹수가 루페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줬다.
“예에…….”
루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좋은 표현이 분명 있었을 텐데, 굳이 그걸 생물학적으로 콕 집어 말해 주시는 아가씨의 섬세한 친절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넌 어떻게 안 거야?”
펠리오가 물었다. 그 역시 레오니에가 사실을 알아챘다는 데서 크게 놀라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골격이 딱 봐도 소년이잖아.”
레오니에가 제 몸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며칠 전 보았던 스칸디아 황녀의 골격이 저와 다르단 뜻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압니까?”
“내가 또 그런 건 잘 보잖아요!”
“그거 자랑 아니다.”
이번만큼은 펠리오도 혀를 내둘렀다.
“레오 네가 드디어…….”
“드디어, 뭐?”
“……경지에 올랐구나.”
펠리오가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그는 제 딸이 드디어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도 성별을 판별할 수 있는 변태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펠리오에겐 황녀의 비밀이 밝혀진 것보다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이 아빠가 아까 식당에서부터 계속 시비네.”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붕붕 휘둘렀다. 까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 내지 협박이었으나, 정작 펠리오와 루페의 눈에는 깝죽거리는 꼬꼬마의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루페는 중대한 사실을 펠리오가 알고 있었다는 것도 의아했다.
“알고 있었지.”
펠리오가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경위는 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알았는지, 그리고 알고 있었다면 그간 황후와 어떤 상황이었는지까지, 모든 것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루페는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자신이 함부로 끼어들 자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알면 다쳐?”
레오니에가 대신 물었다.
“다치진 않고 귀찮아져.”
“에이, 그럼 됐어.”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며 레오니에가 물러섰다. 대화는 결국 그렇게 끝났다.
루페는 야근하러 돌아갔고,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방에까지 데려다줬다. 두 부녀는 손을 꼭 잡고 느릿느릿 복도를 걸었다.
“레오 너, 또 키가 컸군.”
“정말?”
레오니에가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펠리오는 아이의 손을 잡을 때마다 살짝 숙였던 허리가 전보다 덜 굽혀진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허리를 쭉 편 상태에서도 아이와 나란히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
펠리오는 문득 떠오르는 복잡한 감정에 의아함을 느꼈다. 기쁘면서도 서운했다. 아이가 건강해져서 무럭무럭 자라는 건 기쁜 일이었다. 비쩍 말랐던 첫 모습만 떠올려도 당장 지하 감옥에 있는 고아원 놈들의 사지를 도륙 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 작던 아이가 잠깐 눈 돌릴 때마다 자란다고 하니 서운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작게 있어 줬으면 하는 욕심이 들썩거렸다.
“겨울옷 다 작겠다!”
그런 아빠의 복잡한 마음도 모르는 채, 레오니에는 마냥 자기가 컸다는 사실에 까르륵 웃으며 폴짝거렸다. 어느새 펠리오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전부 다시 맞춰야지.”
아이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제 생각이 다 뭐겠나, 싶었다. 안 아프고 건강하면 된 것을.
펠리오는 북부로 돌아가기 전에 테온 남작을 불러 겨울옷 한두 벌 정도만 주문하고 가자고 말했다. 북부의 겨울은 다른 곳보다 매섭기 때문에 북부에서 직접 짓는 게 정답이었다.
“근데 루페 아저씨한테는 말해도 되지 않아?”
침대에 누운 레오니에가 제 옆에 사자 인형을 눕히며 물었다. 머리맡에는 딸기 우유 사탕을 저금하는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알아서 좋을 게 없어.”
펠리오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며 말했다.
“더워.”
레오니에가 답답하다며 이불을 발로 퍽 찼다. 맥없이 떨어진 이불은 아이의 다리까지 밀려났다.
“덮어.”
펠리오는 그걸 또다시 목까지 덮어 줬다. 여름 감기가 무섭다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아빠, 나 이제 건강해져서 쉽게 안 아파.”
“뭐든 모르는 일이야.”
“어휴, 잔소리.”
레오니에가 덮어 준 이불을 슬그머니 가슴까지만 내렸다. 두 부녀는 이불의 위치를 그렇게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아빠, 잘자…….”
작게 하품한 레오니에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레오 너도 잘 자렴.”
“좋은 꿈 꿔. 내 꿈 알지?”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나도 꿈에서는 쉬자고.
펠리오는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며 피식 웃었다. 레오니에도 아빠 볼에 입을 쪽 맞추며 배시시 웃었다.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잠자리 인사였다.
토닥토닥, 손 두들김 몇 번 해 주고, 침대에 누운 레오니에를 한 번 꼬옥 안아 준 뒤에야 펠리오가 방을 나섰다. 그러고도 뭐가 아쉬웠는지, 그는 문이 닫히는 중에도 레오니에를 살폈다.
“아빠, 어서 가.”
여전히 발을 떼지 못하는 아빠에게, 레오니에가 인형 손을 잡아 흔들며 내일 보자고 인사했다.
“빠빠. 내일 봐.”
“잘 자라.”
“알았어. 아빠도 잘 자.”
레오니에는 애정의 표시로 손에다 입술을 쭈왑 찍어 후- 불어 줬다. 펠리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작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레오니에를 찾아왔다. 옆으로 돌렸던 몸을 똑바로 눕힌 레오니에는 인형을 토닥이며 위를 바라봤다. 지금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환한 불빛이 들어오면 휘황찬란한 침대 천장 무늬가 바로 저 위에 훤히 보였다.
‘황녀가 남자라…….’
레오니에는 그날 잠깐 만났던 스칸디아 황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레오니에는 스칸디아 황녀의 외견만 보고 성별을 맞춘 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보는 눈이 좋아도, 그 정도는 아니지.’
골격을 보는 눈은 몸 좋은 기사들을 보면서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아직 그 경지까진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원작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게 진짜였음을 확인한 게 전부였다.
물론 티그리아 황후가 저의 둘째 아들을 여자로 둔갑시킨 이유도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그 이유는 레오니에한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댔어.’
레오니에는 스스로 효녀라 자부했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으니, 굳이 그 사실을 괜히 떠올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기특한 나!’
역시 나만큼 착한 아이는 없다며 자화자찬했다. 어차피 그 문제는 원작이 시작되는 5년 후에나 중요한 사건이 될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나중에 어떻게 자라려나.’
원작에서는 스칸디아 황녀가 근육 짱짱한 은발 미남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히히, 너무 좋아!’
레오니에는 그 모습을 망상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황녀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아기 맹수는 흐뭇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 * *
수도에 굵은 장대비가 내렸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겁니다.”
트라가 비 오는 바깥을 구경하는 레오니에한테 말했다. 아이는 돌출된 창문 아래에 설치한 소파에서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많이 더워요? 얼마나 더워요?”
“북부보다 덥습니다.”
“나 북부에선 여름 안 지내봐서 몰라요.”
레오니에는 작년 늦가을에 펠리오를 만났다. 그와 함께 처음 보았던 북부는 이미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럼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트라가 겁 아닌 겁을 줬다.
“북부는 여름에는 덥지만, 수도와 비교하면 서늘한 편이지요.”
“오오.”
“수도 여름은 햇살이 아주 뜨겁습니다. 외출하실 땐 꼭 모자와 양산이 필요하지요.”
“벌레도 많아요?”
레오니에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이가 알고 있는 제국의 여름은 고아원에서 겪었던 날들이 다였다. 더위도 더위지만, 열악한 고아원 환경 때문에 하루하루가 사경을 헤매는 나날이였다. 고아원 자체가 워낙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 여기저기 썩어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폈다. 몇 년째 깨져 있는 유리창 때문에 벌레가 틈만 나면 들어왔다.
저것만 있어도 보통 문제가 아니건만. 고아원 선생님들이란 새끼들은 시설 운영 비용을 전부 자기들 유흥에 탕진했다.
덕분에 죄 없는 아이들만 고생했다. 모기나 파리가 들끓었고, 음식도 금방 상해서 배앓이도 걸핏하면 했다.
레오니에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대한 청결을 유지하고, 틈틈이 눈에 보이는 벌레들을 때려죽이는 거였다. 더운 여름에 불 지펴 물을 끓여 마시고, 고아원 선생들이 먹는 질 좋은 음식을 빼돌려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러다 들키면 얻어맞기 일쑤였지만.
‘진짜 힘들었지…….’
레오니에는 새삼 자신의 인생 역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작년 여름만 해도 살기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버텼는데. 지금은 커다란 저택에서 비싼 옷 입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 사색에 잠기는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 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며 초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트라는 오늘도 우리 아가씨께서 애늙은이 발언을 하시는구나, 하는 통달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 위에 얇은 담요를 걸쳐 주었다.
“아가씨께선 벌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벌레를 퇴치하는 마도구를 많이 사두었다고 트라가 말했다.
“공작님께서 지시해 두셨습니다.”
“아빠가?”
“아가씨를 위하는 마음이시죠.”
더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보레오티 저택 내부에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게 해 주는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마도구가 쾌적한 생활을 위해 작동 중이었다.
“나 보레오티 너무 좋아!”
기분 좋아진 레오니에가 소파에 엎드려 파닥거렸다. 이제 아기 맹수는 셔벗이나 아이스크림 때문에 배탈을 걱정해야 했고, 해충 따위가 아니라 달팽이가 꾸물거리는 정원을 구경했다. 더위는 걱정할 거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거침없이 쏟아지던 빗줄기도 어느새 잠잠해질 즈음. 보레오티 저택이 아이 동반 다과회를 열었다.
“플로!”
손님을 직접 맞이하러 현관까지 나온 레오니에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레오니에 님.”
부모님을 따라 수도에 처음 와 본 플로무스가 드디어 레오니에를 만나러 왔다. 그간 연회 준비니 뭐니 귀찮은 일들 때문에 미뤄졌던 뜻깊은 만남이었다. 두 아이는 서로 와락 껴안으며 그간 못 나눈 인사를 즐겁게 재잘거렸다.
“플로, 많이 컸구나!”
레오니에가 여전히 저보다 큰 플로무스를 기특하단 눈으로 바라봤다.
“애들은 잠깐 안 보는 사이에 이렇게 금방 커버려서 섭섭해.”
단풍잎 손 위로 그보다 더 작은 단풍잎 손이 얹어졌다.
“레, 레오니에 님도 많이 크셨어요…….”
여전히 자기를 아기 취급하는 레오니에가 당혹스럽지만, 그래도 플로무스는 이제 적당히 넘기며 대답할 줄 알게 되었다.
“애늙은이, 적당히 해라.”
케라타 자작 부부를 응대하던 펠리오가 조용히 속삭였다.
“내 맘이거든?”
말 한마디 질 생각이 없는 아기 맹수는 메롱메롱, 혀를 날름거리며 까불거렸다. 그러고는 아니꼬운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아빠를 깔끔하게 무시한 채 케라타 자작 부부에게도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비가 많이 와서 오시는 길이 힘들었지요?”
레오니에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했다. 다소곳한 모습이 조금 전 아빠를 능욕하던 얄미운 모습과 딴판이었다. 그 모습을 전부 다 보고 있던 케라타 자작 부부는 레오니에가 마냥 귀엽기만 했다.
“영애께서 초청해 주셨는데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못 본 사이에 너무 예뻐지셨어요. 키도 많이 크셨네요.”
레오니에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열린 아이 동반 다과회는 어른과 아이가 각자 다른 공간에서 지내도록 준비되었다. 펠리오는 케라타 자작 부부와 함께 따로 준비된 방으로 먼저 이동했다.
“레오니에 님, 오늘은 오빠도 같이 왔어요.”
플로무스가 그제야 함께 온 오빠를 소개해 줬다. 뻘쭘하게 동생 옆에 서 있던 소년이 허둥거리며 인사했다.
“알체스 케라타입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처음 뵙습니다.”
자신을 알체스라 소개한 소년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짧게 친 밤색 머리는 여동생과 똑같았지만,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플로무스와 달리 알체스의 눈동자는 짙은 고동색이었다. 전형적인 개구쟁이 인상이었다.
“네가 플로 오빠구나.”
레오니에가 만나서 반갑다며 빙긋 웃었다. 해말간 미소에 알체스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플로무스는 그런 오빠를 경계했다. 오빠한테 레오니에 님은 백 배나 아까운 사람이었다.
“근데 너, 플로 너무 괴롭히지 마라.”
레오니에가 장난처럼 눈을 흘기며 가볍게 말했다.
“내가 들은 게 많아.”
그 말에 알체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플로무스는 언제나 오빠한테 장난을 당하는 힘없는 동생이었다. 애가 순해서 덤비지를 못하는 거지, 속에 쌓인 건 무척 많았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레오니에한테 조금씩 일러바치는 거로 풀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오빤데, 라며 살짝 망설였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입 털 거리’라는 어려운 말을 쓰면서 어서 말해 보라고 상냥하게 다독였다.
그 덕에 알체스의 짓궂은 장난들은 전부 레오니에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괴롭힐 거야?”
레오니에가 여전히 답이 없는 알체스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겁에 질려 굳어 있던 알체스가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목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나한테 미안할 건 없고.”
“플로, 미안해!”
“어? 어어…….”
목숨이 달린 사과를 받은 플로무스는 얼떨떨했다.
“그럼 둘이 서로 안아.”
레오니에가 두 남매를 끌어다 강제 포옹을 시켰다. 둘을 엉거주춤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사랑해, 해.”
“오빠, 사랑해.”
“나도 너 사랑해.”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케라타 남매는 지금 이게 뭔가 싶었다.
“좋아!”
반면 레오니에는 이 모든 걸 아주 흡족하게 지켜봤다.
“이제 가서 놀자.”
레오니에는 양손에 플로무스와 알체스의 손을 잡고 거실로 갔다. 다과가 차려진 거실에는 먼저 와 놀고 있는 손님들이 있었다.
“플로 언니다!”
강아지 인형을 가지고 노는 중이던 우피클라가 번쩍 일어났다. 누나랑 같이 인형 놀이 중이던 피누는 후다닥 등 뒤로 숨었다. 플로 누나는 반가운데, 그 옆에 있는 형아가 낯선 탓이었다.
“와아!”
“굉장하다!”
안으로 들어선 케라타 남매가 감탄했다. 거실에는 다양한 간식들과 시원한 얼음 동동 뜬 음료수, 거기에 수도에서 유행하는 장난감이란 장난감은 다 갖춰 있었다.
“좀 많이 이상하지?”
레오니에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한껏 꾸민 거실을 둘러봤다.
“이번엔 내가 직접 준비했거든.”
“레오니에 님이요?”
이걸 다요? 깜짝 놀란 플로무스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영애께서 이걸 다 하셨어요?”
우피클라와 피누에게 넌 누구냐고 질문 공세를 받던 알체스도 뒤늦게 반응했다.
“대단하세요! 이런 건 어른들이 준비하는 거잖아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레오니에가 부끄러워했다.
이번 다과회는 펠리오가 후계 수업의 일환으로 레오니에한테 내본 숙제였다. 한 가문의 주인이라면 이런 모임도 직접 운영해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펠리오는 본인이 그딴 걸 질색해서 잘 안 할 뿐이지, 지난겨울 북부 저택에서 열렸던 어른들의 다과회는 전부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언니 대단하다!”
우피클라가 제 일처럼 감탄했다.
“멋쟁이!”
피누는 멋도 모르고 그냥 제 누나를 따라 박수쳤다.
“아이들은 우리가 전부예요?”
알체스가 자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응.”
이번 아이 동반 다과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케라타 가족과 리네 가족이 다였다. 사람이 많으면 독이라는 사실을 이번 연회에서 뼛속까지 깨우친 탓이었다. 한동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싶은 게 레오니에의 진심이었다.
“레오.”
그때 펠리오가 나타났다.
“꺄야아!”
알체스가 플로무스의 등 뒤로 재빨리 숨었다. 레오니에와 플로무스가 차게 식어 버린 눈으로 알체스를 바라봤다. 머쓱해진 알체스가 꾸물꾸물 도로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여동생의 옷자락을 여전히 꼭 쥔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다들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까?”
펠리오는 아이들을 잠깐 살피러 왔다. 그는 플로무스가 이번엔 저를 보고 울지 않는 것이 기특해 머리를 토닥여 줬다. 예상치 못한 칭찬을 받은 플로무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빠랑 어른들은 한 시간 뒤에 내려올게.”
“응. 걱정 마.”
다과회 주최자인 만큼, 자신이 잘 돌보겠다며 가슴을 팡팡 쳤다.
“…….”
펠리오는 여기서 네가 가장 문제라고, 네가 애들한테 이상한 걸 가르칠까 걱정이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대신 레오니에의 볼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레오니에도 찐하게 펠리오의 볼에 쭈압, 하고 뽀뽀했다. 입술이 떨어진 자리로 시뻘겋고 축축한 흔적이 남았다.
“아빠, 빠빠!”
떠나는 아빠에게 레오니에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안 무서우세요?”
펠리오가 나갔는데도 알체스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이었다. 어떻게 검은 맹수한테 저렇게 뽀뽀도 하고, 유치한 말투로 인사도 할 수 있지?
알체스가 상상한 보레오티는 아기부터 노인까지 다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펠리오는 보레오티 역사상 최강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에한테 보여 주는 다정한 모습은 조금 전 흉포했던 위압감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솔직히 아주 큰 충격이었다.
“넌 네 아빠가 무서워?”
“아니요.”
“나도 그런 거야.”
딸이 아빠를 무서워하는 게 말이 돼? 역으로 레오니에가 물었다. 알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시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어쩌면 검은 맹수들도 자신들 가족들과 똑같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 * *
어른들의 다과회는 바로 위층 응접실에서 열렸다. 다만 여기는 다과회라고 말하기가 무안했다. 차려진 거라곤 손님들 취향에 맞춰 준비된 차들과 거기에 어울리는 다과 몇 접시가 전부였다.
“제국엔 육아 서적이 많이 없더군요.”
펠리오가 차를 넘기며 말했다. 그의 찻잔에는 작년부터 마시기 시작한 레이디 그레이란 홍차가 따라져 있었다. 차를 잘 즐기지 않는 펠리오가 유일하게 찾아 마시는 종류였다.
“공작님, 시나국 번역 육아서는 읽어보셨어요?”
“요즘은 레아국 육아 방법도 유행하는 것 같더라고요.”
어른들의 대화 주제는 육아였다. 사실 이 때문에 어른들과 아이들의 다과회 자리가 잠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아이들 앞에서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면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육아 서적의 조언을 펠리오가 참고했다.
“……난 여전히 신기해.”
카니스는 아직도 팔불출 아빠가 된 친구가 어색했다. 그래도 무척 기뻤다. 당연하게도 여기선 가장 후배격인 펠리오가 여러 가지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보통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훈육해야 효과를 보지?”
“훈육? 무슨 벌? 체벌?”
카니스가 설마, 하며 물었다. 그러자 펠리오가 정색했다.
“때릴 구석이 어디 있다고.”
일전에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이마에 딱밤 한 번 때렸다가 혹이 난 걸 보고 기겁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체벌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코를 잡고 가볍게 흔들거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누르는 게 다였다. 심지어 그나마도 안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럼 무슨 벌을 주는데?”
“생각하는 의자랑 잘못 목걸이.”
천하의 검은 맹수가 ‘생각하는 의자’와 ‘잘못 목걸이’를 입에 담았다.
“…….”
다들 내색은 안 했지만, 솔직히 그의 입에서 저런 단어가 나오니 좀 많이 웃겼다. 그만큼 레오니에가 대단하단 방증이기도 했다. 오만하고 세상 저 잘난 맛에 사는 펠리오를 바꾸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했냐?”
카니스가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어.”
정작 대답하는 펠리오 혼자 심각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카니스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말하는 그, 생각하는 의자가, 꼬챙이 박혀 있고 피 묻어 있는 그런 거 아니지?”
“널 거기에 앉힐 순 있는데.”
“친구 사이에 농담도 못하냐.”
아니면 되었다며 카니스가 빠르게 말을 철회했다.
어쨌건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훈육 방식에 고민이 많았다. 그의 딸은 영악한 애늙은이였다. 어지간한 것엔 눈도 꿈쩍하지 않고, 한 소리를 들으면 두 소리를 내뱉는다.
그런 애한테 생각하는 의자나 잘못 목걸이로 훈육해도 효과를 볼 리가 없었다. 의자에 앉혔더니 반성은커녕 벽지 무늬 개수나 세고, 잘못이 적힌 목걸이를 걸었더니 사용인들 붙잡고는 내 잘못 좀 보라며 자랑을 해 댔다.
“그런 건 똑똑한 아이들한테는 딱히 효과가 없죠.”
케라타 자작 부인이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펠리오도 내 딸이 너무 똑똑해서 안 먹히는 것 같다고 일찌감치 결론을 내렸다. 영악하다는 건 곧 너무 뛰어나단 뜻이었다.
‘레오가 잘나긴 했지.’
그 와중에 아빠는 뿌듯했다.
“차라리 말로 타일러서 이해시키는 건 어떨까요?”
케라타 자작이 말했다. 보통 아이들에겐 힘들지 몰라도, 레오니에는 무척 영민하니 차분히 설명하면 이해할 거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펠리오는 회의적이었다.
“애가 너무 똑똑해서 내 말에 늘 반박한단 말이지요.”
“지금 저희 공작님의 고민을 듣는 거 맞지요?”
아비페르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육아 고민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밑도 끝도 없는 남의 집 애 자랑을 듣는 듯한 기분에 두통이 밀려왔다.
“레오가 너무 똑똑하고 섬세한 것을 어쩌란 겁니까.”
그렇다고 거짓말로 부족한 점을 지어내는 것도 못할 짓이라며 펠리오가 너무도 당당하게 대꾸했다. 오뚝한 콧대가 유난히 오만방자했다.
아비페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또 틀린 말은 아니라서 더 짜증이 났다.
“……아.”
그때, 펠리오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검은 맹수의 자식 자랑에 혀를 내두르던 이들의 이목이 한데 모였다.
“뭐 하나 있었네요.”
자신의 허락도 없이 몰래 말을 타고 인세레아를 만나러 갔을 때. 그때 레오니에를 엄하게 타이르면서 협박 비슷하게 경고했던 것이 있었다.
“근육 탐미를 막아 버리고, 방을 꽃무늬 분홍으로 꾸미고, 그 벽에다 ‘천사와 나무꾼’ 삽화를 그리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차라리 한 대 치라고 자지러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영애께서 싫어하셨나요?”
케라타 자작이 의아해했다. 레오니에의 취향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케라타 자작은 근육 탐미는 무어지, 하며 고민했다.
‘그리고 협박이라기엔…….’
케라타 자작이 듣기엔, 뒤에 나온 협박이란 건 딱히 협박도 아니었다. 오히려 귀엽기만 했다.
“꽃무늬 분홍이나 동화책 삽화는 괜찮지 않나요? 여자아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비페르와 케라타 자작 부인이 질색했다.
“미친놈 방도 아니고……!”
“너무 잔인하네요.”
“그, 그러게!”
“좀 잔인하네요.”
두 부인이 학을 떼자 남편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데, 동화책은 왜?”
카니스가 물었다.
“우리 애들도 그거 좋아하는데?”
천사와 사냥꾼은 누구나 어릴 적에 한 번쯤은 읽어 본 동화책이었다.
“그거 정신 나간 성범죄자 새끼가 목욕하는 처자 옷 빼앗아 겁박하고 임신시키는 성범죄 미화 동화잖아.”
그걸 자식한테 읽힌다고?
펠리오가 질색했다. 그는 레오니에한테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장작을 지피는 벽난로에 동화책을 던져 태워 버렸다.
이에 부모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건 두말할 것 없었다.
그날 이후, 리네와 케라타 두 가문의 저택에선 ‘천사와 사냥꾼’ 동화책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이야기를 마친 어른들이 1층 거실로 내려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 같이 모여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기척을 느낀 레오니에가 고개를 들었다.
“아빠!”
레오니에가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뒤따라 다른 아이들도 제 부모님을 찾아 손을 흔들었다. 피누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피누야, 다쳐.”
“으응.”
“우리 다시 그림 그릴까?”
“응!”
레오니에가 피누를 도로 앉히며 손에 크레용을 쥐여 줬다.
“제가 보레오티 영애 덕에 한숨 크게 돌렸어요.”
아비페르는 얌전히 놀고 있는 제 딸 아들을 보며 크게 안도했다. 천성이 워낙 씩씩해서 틈만 나면 사고 치기 일쑤였다. 며칠 전에도 저택 안에서 뛰어다니며 놀다가 도자기를 깨트리는 사고를 쳤다.
‘그러고 보니 영애가 서부 저택에서 지내실 적엔 아이들이 사고를 안 쳤었지.’
역시 영애 덕분이었구나!
울컥한 아비페르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레오니에한테 이루 말 못 할 감동과 고마움을 느꼈다. 케라타 자작 부부도 이에 동의했다.
“오늘은 저희 아이들도 잘 어울리네요.”
“항상 큰애가 작은애를 많이 괴롭혔는데…….”
“영애와 친하게 지내면서는 많이 안 당하게 되었어요.”
“플로도 씩씩해졌지요. 의사 표현도 강해졌어요.”
“역시 보레오티 영애예요.”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다며 레오니에를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 애입니다.”
그렇게 치켜세워 봐야 떨어지는 건 없다며 펠리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웃지나 마시죠, 공작님?”
카니스가 킥킥 웃으며 펠리오의 느슨해진 입가를 놀렸다. 아주 그냥 미소가 만개하기 직전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이 훈육 문제로 걱정하던 모습과 상반되었다.
어른들은 곧 준비된 자리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이들은 레오니에의 지휘 아래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색칠했다. 어찌나 진지한지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켜보는 어른들도 혹여 방해될까,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좋아!”
그때, 레오니에가 힘찬 목소리로 침묵을 깨트렸다.
“그럼 이제 부모님께 보여드리자.”
아이들이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가지고 각자의 부모님 앞에 섰다.
“오늘 제가 준비한 다과회 주제가 ‘재미있는 공부’입니다.”
레오니에가 수줍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주제에 걸맞게, 자녀분들과 함께 놀이를 병행한 공부를 해 보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대단하셔라!”
“역시 보레오티 영애예요.”
“아빠 엄청 기대되는데?”
부모들이 아이들을 옆에 앉히며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레오니에도 펠리오 옆에 앉아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건네었다. 그림이 그려진 종이는 마치 비밀문서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뭘 공부했는데?”
펠리오가 흐뭇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여튼 요 맹랑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어 놀라게 했다.
“이야, 우리 아들 잘 그렸는데!”
건너 소파에 앉아 있던 카니스가 가장 먼저 그림을 펼쳤다.
“복숭아? 살구? 동그란 과일이 두 개나 있네? 맛있겠다!”
“으으응!”
피누가 속상하단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뱃살도 따라 흔들렸다.
“우피는 뭘 그린 거지? 빨간 소시지 엮은 건가?”
“아니에요!”
우피클라도 엄마가 뭘 그렸는지 못 맞춰서 실망이란 듯이 입가를 축 늘어트렸다.
“대흉근이랑 소흉근이잖아요.”
그리곤 자신이 무얼 그렸는지 가르쳐 줬다.
“여기까지가 흉근 상부, 중부, 하부. 그리고 이거는 외측 흉근이랑 내측 흉근…….”
아비페르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 그럼 이건 뭐야?”
카니스가 다시 피누의 그림을 살폈다. 다시 보니까 이 살구색 두 덩어리가 조금 이상했다. 양쪽 가운데에 분홍색 작은 덩어리가 쪼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살구나 복숭아 무늬 껍질인 줄 알았던 카니스는 순간 등골이 시렸다.
“피부가 덮인 대흉근.”
피누가 또박또박 답했다.
“너 말을 그렇게 잘했어?”
카니스가 깜짝 놀랐다.
피누 리네, 올해 세 살이 된 그의 짧은 생애 중 가장 또렷한 발음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비단 리네 가족만 덮친 게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케라타 가족들도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저는 허벅지 근육을 그렸어요.”
플로무스가 자신이 그린 대퇴근을 자랑했다. 빨간색과 분홍색을 다양하게 섞어 색칠한 대퇴근은 아이의 솜씨치곤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여기 전체가 대퇴근인데, 여기 가운데가 대퇴직근이에요. 그리고 양옆에 내광근이랑 외광근…….”
“저는 팔을 그렸어요.”
알체스는 머뭇머뭇 그림을 설명했다.
“여기가 ‘상완’이 붙는 근육들이고요, 겨드랑이 아래는 광배근이래요.”
“이, 이걸 어떻게 알았니?”
“영애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케라타 자작 부인이 아찔한 두통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 기분이 나쁘다든가 혐오스럽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까지 생동감 넘치는 공부였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너무 생동감이 넘쳐서 괜히 자신의 팔을 만지작거릴 정도였다. 심지어 팔뚝을 주물럭거리면서 ‘상완 이두근…….’이라며 중얼거릴 정도였다.
“보레오티 영애께서 참으로 똑똑하시구나.”
이 많은 근육을 죄다 외우신 건가, 케라타 자작은 그 점이 더 놀라웠다.
그리고.
“…….”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펠리오가 아주 느리게, 그리고 무척 피곤한 눈으로 제 옆에서 칭찬을 기다리는 웬수 같은 딸을 바라봤다.
“아빠, 어때?”
나 잘했지? 천연덕스러운 아이의 얼굴에서는 순진무구한 결백이 느껴졌다. 레오니에는 정말로 아이들과 놀이 같은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근육을 가르쳐 주며 그리는 놀이를 했다.
“넌 양심 안 아프냐.”
펠리오가 레오니에가 그린 대둔근 덩어리를 보며 말했다. 저 착하고 깨끗한 동심을 지닌 아이들한테 이딴 걸 가르치고 그리게 하다니, 펠리오는 태어나 처음으로 죄짓는 기분이 들었다.
저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과학 공부잖아.”
레오니에는 퍽 억울했다.
“근육은 사람의 일부! 사람은 곧 생명! 생명은 아주 중요하지.”
“네 입에서 나오는 근육은 타락했잖아.”
아빠 맹수는 아기 맹수의 말을 쉬이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니에는 내일모레 여덟 살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제 욕망 실현에 충실한 아이였다.
“늘 사리사욕에 찌든 근육만 외치면서.”
“오늘은 아니거든.”
“애들이 안 징그러워했어?”
펠리오가 물었다. 솔직히 근육이 피부에 덮였을 때나 근사하지, 그 아래 숨겨진 진짜 근육은 미관상 썩 보기 좋지 않았다. 펠리오는 오랫동안 해 온 마물 사냥을 통해 이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레오니에가 저렇게까지 근육을 좋아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소시지 엮은 것 같다고 좋아하던데.”
애들이 소시지 먹고 싶다고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
레오니에가 진지하게 말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장난기 없는 진중한 태도에 펠리오도 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졌다.
“근육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법이야.”
그깟 각질 덩어리 표피에 뒤덮인 겉모습만 탐하는 것은 진정한 근육 박애가 아니야.
레오니에가 자신의 소신을 가슴에 손을 얹어 가며 고백했다.
“…….”
맞는 말이었다.
펠리오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 역시 레오니에를 저런 마음으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말하는 근육 ‘사랑’은 너무도 불건전하게 들렸다. 그리고 펠리오는 자신의 부성애는 결코 저렇게 불건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확신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몸속에 있는 응가도 사랑해야지.”
“그래서 너는 그게 근육이라는 거고?”
“그럼!”
“이 미…….”
기가 막혔던 펠리오가 저도 모르게 내뱉으려던 못된 말을 서둘러 멈췄다.
“아빠 지금 나보고 미쳤냐고 말하려고 했어?”
레오니에가 믿기지 않는단 눈으로 물었다.
“……미칠 정도로 사랑하는 내 딸, 이라고.”
“뻥 치지 마! 분명 욕이었잖아!”
내가 다 들었다며 레오니에가 의자 위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걸 펠리오가 도로 앉혔다.
“소파 위에 서지 마.”
“응.”
티격태격 싸우는 와중에도 아이는 말을 잘 들었다. 심지어 자신이 밟고 선 자리를 손수건으로 톡톡 털어 깨끗하게 했다.
“…….”
케라타 자작 부인이 부채로 제 허벅지를 조용히 찔렀다.
보레오티 부녀의 만담 같은 말싸움이 너무 웃겨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조용해진 사람들은 맹수 부녀의 티격태격을 구경하느라 배꼽이 도망칠 지경이었다.
다만 아이들은 간식에 눈이 팔려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뭐, 그 발언은 내가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지.”
사람은 다 실수하는 법이니. 레오니에가 눈을 가볍게 흘기며 용서해 줬다. 대신 두 번은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쨌건 아빠는 나를 그만큼 사랑하니까, 내가 설사병 걸려서 지리면 다 닦아 주겠네?”
“아니.”
펠리오가 정색했다.
“하녀들한테 시켜야지.”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몸을 만지는 것을 조심히 했다. 만져도 무조건 옷 위로, 그리고 손이나 등, 머리처럼 아이가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부위만 토닥거리는 정도로 만졌다. 아빠들은 딸과의 신체 접촉은 신중해야 한다는 육아 서적의 조언을 참고했고, 펠리오도 여기에 크게 동의하는 바였다.
레오니에가 들었다면 눈물 찔끔 흘리며 감동할 배려심이었다.
“내가 널 왜 만져.”
그러나 문제는 펠리오가 이 모든 걸 다 생략하고 본론만 던졌다는 점이다.
충격받은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재미나게 구경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술렁거렸다.
“그리고 비유가 왜 그렇게 더러워.”
좀 깨끗하고 건전한 건 없냐고 펠리오가 물었다. 차라리 지난번에 들었던 꽃 따러 간다는 표현이 훨씬 나았다.
“……아빠 진짜 짜증 나.”
짜증이 제대로 난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내가 진짜 언젠가 아빠 등에 한 번 지릴 거야.”
“그 순간 네게 떨어질 재산은 없는 거지.”
“진짜 짜증 나아!”
으아아아!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통통 때렸다. 귀한 허벅지라고 그 와중에 힘 빼서 때리는 건 잊지 않았다.
레오니에가 처음 기획한 다과회는 그렇게 끝났다. 참으로 어수선한 마무리였다.
* * *
다과회가 그렇게 끝나고.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낸 숙제 겸 반성문으로 다과회를 직접 운영해 본 감상을 적었다. 감히 아빠 등에 지리겠다고 협박한 죄였다.
“내가 지리겠다고 어디 한두 번 말해?”
진짜 지릴 것도 아닌데.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몇 번이고 생각하는 거지만, 레오니에는 남을 엿 먹이기 위해 자신을 더럽힐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진짜 확 지려 버려?’
술 마시고 미친 척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체념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이 몸으로는 술을 구하기도 힘들고, 요새는 과연 술을 구해도 마실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겨우 건강해진 몸을 술 님으로 망치고 싶진 않았다.
‘술 님도 아니지.’
내가 못 마시는 것 따위에 ‘님’자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술레기, 술레기!”
감상문을 다 쓴 레오니에가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펠리오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아빠!”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기대 책을 읽고 있던 펠리오가 이리 오라며 팔을 내밀었다. 펠리오 곁으로 우다다다 달려가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
그러고는 아주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흥!”
잔뜩 삐친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렸다.
“레오 넌 굳이 나를 찾아와서 그렇게 삐쳐야겠냐.”
힐끔 바라보던 펠리오가 무심히 책장을 넘겼다. 그 반응에 레오니에가 더 화를 내며 노려봤다.
“미운 걸 어떡해!”
“너도 참 부지런하다.”
미운 사람 찾아와 자기 삐쳤다고 광고하는 건 너밖에 없지. 말은 얄밉게 하면서도, 펠리오가 읽던 책을 치우며 양팔을 내밀었다. 그만 삐치고 이리 와서 안기란 뜻이었다.
“흥.”
레오니에가 투덜거리면서 은근슬쩍 다가가 품에 안겼다. 그러나 자존심 탓에 얼굴은 최대한 바깥으로 빼냈다.
‘하여튼 혼자 잘났지.’
조금 전 들어오면서 보았던 펠리오는, 자신의 아빠라는 사실이 너무 원통할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품이 여유로운 셔츠 한 벌 입었을 뿐인데 위태로운 반항아 느낌이 물씬 풍겼다. 대충 걷어 올린 소매 밑단 아래로 탄탄한 팔뚝이 드러났고, 셔츠를 바지 안에 대충 쑤셔 넣은 덕에 아찔한 허리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덕에 넓은 어깨와 가슴 근육이 무척 도드라졌다.
심지어 길게 뻗은 다리는, 레오니에가 가장 사랑하는 근육 중 하나인 허벅지 대퇴근 덕에, 바지 위로 자기 주장을 매우 강하게 드러내는 중이었다. 거의 성난 황소 수준이었다.
그런 모습을 하고 세상 무심한 표정으로 독서하던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진짜 펠리오 혼자 다른 세상의 멋짐을 지니고 있었다.
‘……내 아빠만 아니면 말이지.’
레오니에는 순식간에 기분이 저하되었다. 이렇게 근사하고 멋진 아빠인데, 이놈의 가족 관계가 뭐라고 그림의 떡이란 말인가. 그가 자신의 아빠라는 사실만 떠올려도 설레던 두근거림이 바싹 메말라 갔다.
‘별수 있나, 아빤데.’
괜히 심통이 난 레오니에는 제 허리를 감싼 펠리오의 팔을 통통 때렸다.
“나 안 만진다면서.”
“내가 언제 그랬어.”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심술을 묵묵히 받아 주며 물었다.
“아빠가 나 안 만질 거라고 했잖아. 왜 만지냐고 그랬잖아.”
“내가? 언제? 헛들었겠지.”
“다과회에서 그랬잖아!”
덕분에 너무 창피하고 상처 입었다며 레오니에가 씩씩거렸다. 그제야 펠리오가 무슨 이야기인지 떠올렸다.
“그 비유 더럽던 거?”
“어우, 내 혈압!”
레오니에가 뒷목을 퍽 잡았다.
“오늘 이 아빠가 딸내미 잡으려고 작정을 했구만.”
“작정은 안 했는데.”
“내가 진짜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녀! 내가 다음에 리네 백작 부부랑 케라타 자작 부부를 어떻게 봐!”
“잘 보면 되지.”
대충 맞받아치는 펠리오의 대꾸에 레오니에가 발을 파닥거렸다. 어찌나 파닥거리는지 날개만 달렸어도 하늘 위로 날아갈 정도였다.
펠리오는 아이가 진정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다행히 레오니에는 곧 제풀에 지쳐 축 늘어졌다. 그러곤 흐느적거리며 아빠의 허벅지에 엎드려 누워 얼굴을 숨겼다.
“……왜 나 안 만지려는 거야?”
레오니에가 물었다. 솔직히 화가 난 것보다 서운한 감정이 더 컸다.
“그럼 이제 내 손도 안 잡아 주고, 안아 주지도 않고, 뽀뽀도 안 할 거야?”
“그걸 왜 안 해?”
펠리오가 바로 되물었다.
“나 만지는 거 싫다며…….”
“싫다곤 안 했다.”
“그거나 이거나!”
다를 게 없다며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 질렀다.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펠리오는 딸아이가 무척 풀이 죽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레오.”
펠리오가 양 갈래로 머리를 묶어 드러난 아이의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아기 맹수가 만지지 말라며 머리를 푸르르 흔들다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커다란 손은 다시 아이를 조심히 어루만졌다.
“네가 싫어서 안 만지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그랬으면 벌써 일찌감치 내쫓았을 거라며 살벌한 말을 무심히 했다.
“……어?”
괜히 오싹해진 레오니에가 슬금슬금 상체를 일으켰다.
“나 쫓겨날 뻔했어?”
“솔직히 여러 번 있었다.”
“진짜?”
“레오 네가 내 애가 아니었으면 쫓아냈을 거라고.”
그 말은 즉, 네가 무슨 사고를 쳐도 쫓아내지 않을 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펠리오에게 레오니에는 하나뿐인 가족이자 사랑하는 딸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만지는 걸 조심하고 있었다.
“너는 여자아이니까, 아빠인 내가 조심해야 할 점이 많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내심 놀란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거렸다. 가정 교사 채용 문제처럼, 워낙 자기 입맛대로 사는 인간인지라 그런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레오니에는 살짝 감탄했다.
“만일에라도 내가 무심코 레오 네게 불쾌하다고 느끼는 행동을 할 수도 있어. 설령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나는 아빠로서 조심할 필요가 있고.”
“아빠…….”
감동한 레오니에가 아래턱을 부르르 떨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사랑해……!”
아기 맹수가 아빠를 와락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 서운하고 미웠던 감정이 햇살 아래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난 그래도 아빠라면 궁디팡팡 정도는 언제든 허락할 수 있는데.”
오른쪽 궁디를 두드리신다면, 왼쪽 궁디도 내 줄 수 있었다. 펠리오는 제 엉덩이를 두드려달라는 레오니에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
그리고 말했다.
“네가 이러니까 내가 조심하려는 거 아니겠어.”
펠리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희롱당하는 기분이었다. 엉덩이를 토닥이는 건 분명 저일 텐데, 심지어 아직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벌써 섬뜩했다.
“짜증 나, 진짜…….”
레오니에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숙제 다 했어.”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꺼냈다.
“다과회 운영 과정이랑 개최 후 느낀 점들 다 썼어.”
“그래서 느낀 점은?”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묶은 머리 한쪽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돈.”
레오니에가 아주 짧게 말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다과회 준비 비용을 아빠한테 일일이 허락받아 쓰는 게 불편했어.”
이번 다과회를 준비할 때.
펠리오는 레오니에한테 필요한 경비는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와 구매 물품 명단을 반드시 작성해 올린 뒤에야 제공했다.
거기다 예산도 딱 정해 놨다. 물론 펠리오가 정해 준 비용은 다과회를 충분히 준비하고도 남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대신 그 비용을 얻어내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힘들었어.”
레오니에는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겨우 일곱 살이야.”
왜 이렇게 머리 아픈 걸 지금 하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네가 진짜 애처럼 굴었으면 시키지도 않았어.”
그 한마디에 레오니에가 움찔했다. 정작 펠리오는 깊은 생각 없이 내뱉은 게 다였다.
오히려 그는 어지간하면 레오니에한테 후계 교육을 서둘러 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워낙 똑똑하고 어른처럼 구니까, 그 수준에 맞춰서 이것저것 간소하게 시켜 보면서 대충 간을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이러니 펠리오도 은근슬쩍 괜히 더 시켜 보고 얼마나 잘하는지 보게 되었다.
“……괜히 열심히 했어.”
불량스럽게 소파 등받이에 기댄 레오니에가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수도에 와서 공부만 더하는 것 같아!”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야!”
이익, 아기 맹수가 주먹 쥔 손을 허공에 마구 휘두르며 투정했다.
“난 놀고 싶어! 백수가 꿈이야!”
“그 꿈은 내 딸이 되면서 끝났지.”
“아빠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해결되는 문제야.”
그것도 싫으면 애만 데리고 오라며 레오니에가 봐준다는 식으로 권유했다.
“아빠도 나한테 그랬잖아.”
결혼은 허락 못 해도 애만 가지고 오는 건 허락하겠다고.
“……내가 많이 쓰레기였군.”
“괜찮아. 알고 있었어.”
레오니에는 이미 원작에서 펠리오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고 있었다. 오는 여자, 떠나는 여자 막거나 잡지도 않는다는 건 이미 유명했다. 펠리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래도 아빠는 개쓰레기까진 아니었잖아.”
펠리오는 어디까지 자신과 교제하는 여성과 어울렸을 뿐이었다. 그는 결코 준법정신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사실 쓰레기도 아니었다.
‘진짜 쓰레기는 따로 있지.’
원작에서 개쓰레기로 선두를 다투던 놈들 둘이 있었다. 바로 수비테오 황제와 올로르 자작 영식. 그놈들은 정말 입에도 담기 힘든 범죄를 취미 생활이라도 된 것처럼 저질렀다. 과연 ‘검은 맹수의 바리아’가 전연령 소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역겨운 상황이 은유적으로 종종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니 펠리오는 결백했다. 심지어 그는 레오니에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마치 득도라도 한 것처럼, 어떤 여자와도 오해를 살 법한 관계를 지니지 않았다.
“괜찮아, 아빠!”
레오니에가 힘차게 응원했다.
“아빠는 건전한 편이라고!”
엄지손가락도 척 내밀었다.
“…….”
정작 응원받은 펠리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제 딴에는 나름 건전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딸아이 입에서 과거 이야기가 나오니 스스로가 더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손도 슬그머니 치웠다.
“어서 방으로 가라.”
“응? 저녁 안 먹어?”
레오니에가 물었다. 검은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순진무구해서, 펠리오의 양심을 더욱 아프게 했다. 자신은 레오니에의 근육 취향을 변태라고 놀릴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저야말로 아이에게 본보기도 되지 못할 인간 말종이었다.
‘내게 아이의 아빠가 될 자격이란 게 존재하는 걸까.’
펠리오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무감했던 저의 교제 생활이 아이에게 악영향을 줄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아빠아아.”
그런 아빠의 심정도 모르고.
“같이 먹으러 가자.”
레오니에가 식당에 같이 가자며 아빠 손을 잡고 빵실 웃었다.
“아까 내가 코니한테 부탁해서 소시지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거 아빠한테도…….”
한 입 주겠다고 으스대던 레오니에의 머리가 느닷없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아, 아빠?”
레오니에가 허둥거리며 펠리오를 불렀다. 그러나 펠리오는 그대로 아이를 들쳐메고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어?”
얼떨결에 쫓겨난 레오니에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조금 전까지 펠리오에게 눌렸던 뒤통수의 감각만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레오.”
그때, 문 너머로 펠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니에는 어째선지 아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이 없고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아빠? 왜 안 나와?”
“지금은 식욕이 없어…….”
“왜? 배 아파?”
화장실?
레오니에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빠아아!”
한참을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던 레오니에가 기어코 열쇠 구멍에다 눈을 가져다 대며 내부를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거라곤 새까만 구멍뿐이었다.
“아빠!”
똑 또똑 똑똑!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나랑 눈사람 만들래?”
또 다른 세상에서 살았을 적에 본 만화 영화 노래를 불렀다.
“어서 좀 나와 봐!”
“지금은 여름이다.”
“아빠, 딴죽은 얼굴 보면서 걸면 안 될까?”
레오니에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대꾸했다.
“나중에 북부에서 눈사람 만들면 되지! 아빠 뭐 평생 수도에 살 거야? 어차피 이번 겨울도 마물 사냥하러 가야 하잖아.”
마물 사냥은 보레오티가 북부의 주인으로서 해내야 하는 의무였다. 레오니에는 이제 슬슬 북부로 갈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제 겨우 수도에 적응했는데, 트라나 다른 사용인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조금 아쉬웠다.
“근데 우리 언제 북부 가?”
문짝에 기댄 채 레오니에가 물었다.
“이틀 뒤.”
펠리오가 말했다.
놀란 레오니에는 그대로 쪼르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렇게 중요한 건 얼굴 보고 말하라고!”
기어코 레오니에가 문짝을 발로 쾅쾅 찼다.
“어서 나와, 이 아빠야!”
고작 이틀 남겨 두고 말하는 게 어디 있냐고, 아기 맹수가 한참을 집무실 앞에서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