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2. 연회 (12/51)

#12. 연회

눈앞에 나타난 황성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황권이 약한 나라라고 해도, 벨리우스 제국은 엄연히 대륙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다. 황성은 제국의 명성에 걸맞은 웅장함을 자랑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성벽 너머로 커다란 첨탑들이 하늘을 찔렀다.

마차가 천천히 성벽을 통과하니, 역시나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이곳 황궁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를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도로 넣은 레오니에가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깽판!’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열심히 계획을 짰고, 나름 연습도 했다. 완벽한 깽판을 칠 준비가 갖춰졌다.

“레오.”

머리 위로 들리는 목소리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 깽판.”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억지로 할 필요 없어.”

커다란 손이 조그만 손을 꼭 쥐었다.

처음에야 그 역시 황실의 치졸한 행동에 화가 나서 레오니에의 깽판 계획을 허락했다. 물론 제겐 그걸 수습할 능력도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펠리오는 지금도 자신이 현 황실과 원만한 관계를 꾸려갈 생각이 없었다.

다만, 굳이 황제에게 레오니에가 밉보여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쪽에서 크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귀찮은 짓으로 훗날 아이의 앞길에 제동을 걸지도 모른다.

“아빠,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레오니에가 감동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그럼 안 해?”

펠리오가 혀를 가볍게 차며 말했다. 아빠기에 당연히 하는 걱정이었다.

“괜찮아, 아빠.”

자신은 그깟 황제한테 고작 시비가 붙었다고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밤늦게 초대된 연회 정도야 넓은 아량으로 별거 아닌 것처럼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인사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누구한테?”

“모두에게.”

그렇게 말하는 레오니에의 입가엔 오만한 미소가 걸렸다. 일곱 살 아이라곤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섬뜩한 모습이었다.

“다들 내가 궁금했잖아.”

엄마 없는 사생아, 근본 없는 고아원 출신, 천한 핏줄이 흐르는 아이.

레오니에는 진즉에 저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수도 전역에 펼쳐졌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기억해 뒀다.

“사실 황제가 아주 조금은 고마워.”

이렇게 모두에게 친히 인사할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아기 맹수는 제게 주어진 기회를 허투루 쓸 생각이 없었다.

“친히 가르쳐 줘야지.”

내가 누구인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보레오티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냐며 레오니에가 방긋 웃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유난히 뾰족했다.

펠리오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맺힌 인자한 미소는, 그가 지금 얼마나 흡족한지를 여과 없이 보여 줬다.

* * *

일찌감치 연회장에 도착한 카니스는 꽤 지친 상태였다.

‘진짜 힘드네.’

샴페인 잔을 챙기는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아비페르와 함께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귀족들이 몰려왔다. 이거야 매번 겪는 일이니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큰 항구를 지닌 귀족의 숙명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은 무례하고 예의가 없었다.

‘보레오티 공작님은 언제 오시나요?’

‘정말 영애도 오는 것인지요?’

‘백작 부부께서는 공작님과 오랜 친분을 지니셨지요?’

평소 고상한 척 우아함을 뽐내며 돌려 말하기를 선호하는 귀족들께서 호기심이 잔뜩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둘은 몰려드는 질문에 적당한 선에서 대답해 주며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다. 어느 때보다 힘든 연회였다.

“자기, 괜찮아?”

카니스가 아비페르에게 잔을 넘기며 물었다.

“힘들어 죽겠어.”

잔을 받기 무섭게 들이킨 아비페르가 짜증을 냈다.

둘은 숨도 돌릴 겸 발코니로 향했다. 겨우 두 사람만 있게 되자, 아비페르가 줄곧 참았던 불쾌감을 토로했다.

“여기가 무슨 동물원이야? 영애 구경하려고 아주 그냥 작정했더라.”

물어오는 질문마다 레오니에를 구경거리 취급하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못 배워서 그래.”

펠리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입도 뻥긋 못할 이들이었다. 그러니 겉보기에 만만한 리네 백작 부부에게 접근한 거다.

“만만한 게 우리지.”

오늘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 보레오티와 가장 친밀한 관계이면서 다가가기 편한 인상을 지닌 이들이 바로 리네 백작 부부였다.

“고생이 많아.”

카니스가 미안하다며 아내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리고 기대라는 듯이 허리에 팔을 둘러 받쳐 줬다. 아비페르가 고마움을 담아 싱긋 웃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나오니, 누군가가 후덕한 턱살을 출렁이며 리네 백작 부부를 반겼다. 케라타 자작이었다.

“자작!”

카니스가 연회에 와서 처음으로 기쁨의 인사를 건네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희야 잘 지냈지요.”

케라타 자작이 껄껄 웃었다. 그는 정말로 잘 지내는 중이었다. 타바누스 상단이 몰락한 이후, 그동안 그쪽과 가졌던 거래가 전부 리네 상단과 우르베스페 상단으로 쪽으로 넘어갔다. 그 덕에 케라타 가문도 큰 이득을 보았다. 그간 타바누스 상단이 중간에서 얼마나 빼먹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펠리오가 수도로 가기 전에 북부를 한 번 깔끔하게 청소해 준 덕에, 북부는 골수와 이주 귀족 간의 서열이 다시금 정리되었다. 골수 귀족은 더욱 탄탄해졌고, 이주 귀족은 몸을 사리게 되었다.

“어느 때보다 평화롭지요.”

사람 좋은 미소로 응수하는 케라타 자작 역시 뼛속까지 골수 귀족이었다.

곧 보스그루니 백작과 우르마리티 백작도 다가왔다. 귀족들의 시선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북부의 골수 가문도 귀족 세계에서는 나름 유명했다. 그들의 역사는 보레오티와 함께하니, 제국 이전부터 존재해 온 명망 깊은 가문이었다. 작위를 뛰어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그들에게 함부로 다가갈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카니스와 아비페르가 가까스로 한숨 돌렸다.

“이거 억울하네. 우리도 골수 가문 시켜 줘요.”

카니스가 농담조로 투덜거리니, 케라타 자작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헤스페리 후작님께서 들으시면 섭섭할 소리군요.”

“리네 백작이라면 공작님께서도 언제든지 환영하실 겁니다.”

보스그루니 백작이 기쁘게 말했다.

“그나저나 공작님은 아직이신가요?”

“여전히 지각이시네요.”

우르마리티 백작과 케라타 자작이 연회장 문을 바라봤다. 반쯤 닫힌 연회장 문만이 아직 명단에 적힌 사람이 오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이미 연회장은 초대받은 귀족들로 가득했고, 악단의 연주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며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대로 보레오티 공작이 오지 않는다면, 문은 곧 닫힐 터다.

“오실 겁니다.”

보스그루니 백작이 우아한 자태로 잔을 들었다. 나이를 지긋이 먹었음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고고한 모습이었다.

“공작님도 공작님이지만, 영애께서 걸어 온 싸움을 피할 분은 아니시죠.”

“영애께선 잘 지내고 계십니까?”

케라타 자작이 레오니에의 근황을 물었다.

“저희 딸도 같이 수도에 왔는데, 영애가 보고 싶다고 어찌나 난리인지.”

“어머, 귀여워라.”

“제 딸도 영애한테 푹 빠졌죠. 다음에 아이들 셋이 같이 놀 자리를 마련하죠.”

“리네 백작 영애도요?”

영애께서 벌써 인기라며, 보스그루니 백작이 호호 웃었다.

그때였다. 연회장 입구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보레오티가 도착했다.

* * *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루페에게 자신의 깽판 계획을 다시 한번 더 설명했다.

“일곱 살 흉내를 낼 거야.”

“일곱 살이시잖아요.”

루페가 조용히 반박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 겁먹은 꼬꼬마 흉내를 내겠단 뜻이에요.”

오로지 펠리오의 곁에만 찰싹 달라붙어 낯을 가리는 예민한 일곱 살 흉내. 이것이 바로 깽판 계획의 첫 단계였다.

“황제 앞에서 지려 봐.”

그 와중에 펠리오가 놀림이 다분한 조언을 건넸다.

“아빠 등에 지리는 수가 있어.”

살벌한 경고를 끝으로, 레오니에가 두 팔을 벌렸다. 펠리오는 언제나처럼 안정감 넘치는 자세로 아이를 안았고, 레오니에는 아빠의 목을 꼬옥 감쌌다.

“준비됐어?”

펠리오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언제든지 덤비라고 해.”

“허세하곤.”

“허세 아니야.”

아기 맹수가 턱을 높이 치켜들며 거만하게 대답했다.

“자신감이지.”

도도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펠리오는 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두 부녀는 눈을 마주하며 서로를 향한 신뢰와 애정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굳건했고 그 무엇도 그것을 부수지 못했다.

“리코스 자작.”

곧 표정을 갈무리한 펠리오가 루페를 불렀다. 딸아이를 소중히 여기던 검은 눈동자가 모든 감정을 숨겼다.

오로지 드러난 것이라곤 사나운 맹수의 흉포함 뿐이었다. 그러나 제 어깨에 기댄 레오니에의 등을 느리게 쓸어 주는 손만큼은 다정했다.

“예, 공작님.”

심호흡 한 번 작게 내쉰 루페 역시 표정을 다듬었다. 설산의 늑대가 떠오르는 묵직한 시선이 주군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들어가지.”

펠리오가 발을 내디뎠다.

약간의 술과 잔잔히 흐르는 음악 덕에 적당히 열기를 띠던 연회장 내부가 술렁거렸다. 이윽고 펠리오의 눈짓 한 번에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단숨에 정적에 휩싸였다.

뚜벅뚜벅, 선명한 발걸음 소리만이 사람들 귀에 선명히 박혔다. 단번에 분위기가 뒤바뀐 연회장의 모든 이목이 그들에게 향했다.

“……보레오티 공작님이에요.”

누군가가 용기 내 꺼낸 한마디 덕에, 굳었던 귀족들이 기다렸단 듯이 입을 열었다.

“몇 번을 보아도 오싹한 인상이군요.”

“저렇게 당당하게 지각하다니.”

“세상이 만만한 거겠지요.”

“옆에는 리코스 자작인가요?”

수군거림은 기다렸다는 듯이 루페를 잡아 물었다.

“공작님께 귀족 작위를 받았다던데.”

“북부의 골수 가문이라지요?”

“파르두스 후작님의 막내아들이군요.”

“후작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북부의 골수 귀족이 되었다니.”

“출세했다면 출세한 거군요.”

서로 아는 정보가 있다면 빠르게 교환하고, 헐뜯을 것이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찾아내 동시에 물었다.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시선은 덤이었다.

펠리오가 미간을 찡그렸다. 화려한 겉모습으로 포장된 연회의 비열한 이면이야말로 대중의 본질이었다. 그것은 펠리오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는?”

누군가 말했다.

펠리오와 루페는 보이는데, 소문의 공작 영애는 보이지 않았다.

“……아.”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공작님 품에…….”

동시에 펠리오의 품에 안긴 작은 무언가가 꼬물거렸다. 곧 넓은 어깨 너머로 동그란 까만 무언가가 뽁,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득한 어둠을 품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눈만 빼꼼 내민 채 불안한 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주변을 조심하는 숲속의 다람쥐 같았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였다.

사람들이 아이를 눈치채지 못한 건 너무도 당연했다. 펠리오가 너무 크고, 아이는 너무 작다 보니 품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설마 다들 공작 본인이 직접 아이를 품에 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작이 아이를 안고 왔다고?”

“진짜 작다. 도대체 몇 살이야?”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그사이 펠리오와 루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으로 리네 백작 부부와 북부 골수 귀족들이 다가갔다. 펠리오는 그들과 가볍게 응수하는 와중에도 아이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의외로 사이가 좋은데요?”

“소문으로는 어쩔 수 없이 거두었다고 하던데.”

“광장에 저 둘이 함께 외출한 걸 목격한 사람이 많아요.”

“공작이 아주 아낀다더군요.”

수군거림은 점점 커졌다. 그런 와중에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계속 안고 있었다. 팔이 아플 법한데도 흔들림 없이 아이를 떠받쳤다.

거기까지면 놀랄 일도 없었다.

펠리오는 대화를 나누는 틈틈이 아이를 살폈다.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며 둘이 무언가를 속삭이기도 했고, 그러다 아이가 웃으면 따라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아이의 말간 볼에 코나 입술을 비비며 애정을 듬뿍 쏟아부었다.

그때마다 여인들이 안타까운 신음을 내뱉었다.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고 쉴 틈 없이 부채질하거나 애타는 목을 술로 겨우 적셨다.

누군가는 저 사람이 공작이 맞는지 의심했다. 북부의 검은 맹수는 결코 저렇게 다정한 미소를 짓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한테 뭘 먹이려고 연회 음식을 직접 살피거나, 그중 과일 같은 것을 하나 집어 직접 입에 먹여 주는 다정한 아빠 따위도 아니었다.

“…….”

모두 입을 조심했다.

그리고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문들을 빠르게 잊어버렸다.

이제 그 누구도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천대받는 사생아라느니, 고아원에서 자란 미천한 출신이라며 뒷말하지 못했다.

* * *

“너 제발 좀 일찍 다녀라.”

카니스가 투덜거렸다. 펠리오가 없는 동안 수많은 질문 공세를 받았던 카니스는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새끼보단 먼저 왔잖아.”

“여기서는 말도 좀 조심하고.”

황실 연회에서 황제를 ‘새끼’라고 지칭하는 건 위험했다.

그때, 펠리오가 왼쪽 팔을 스윽 들었다. 당겨지는 팔 근육 때문에 소매가 자연히 뒤로 밀리면서 감춰졌던 황금빛 외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안 늦었네.”

시각을 확인한 펠리오가 도로 팔을 내렸다. 손목시계는 다시 소매 안으로 숨었다.

“……너, 너 그거 뭐야?”

카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긴, 시계지.”

“시계라고? 그게?”

“손목에 시계를 찼다고요?”

아비페르가 다시 한번 더 보여 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펠리오를 레오니에를 한 번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잠깐만.”

허락이 떨어지고,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바닥에 내려 줬다. 아이는 아빠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귀찮다는 듯이 시계를 선보이는 펠리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루페 역시 제 일인 것처럼 괜히 우쭐했다. 시계를 먼저 접했던 우르마리티 백작 역시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이번에 새로 시작할 사업.”

손목시계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니, 모두 신기한 눈으로 이를 구경했다.

“대단합니다. 발상의 전환이로군요.”

케라타 자작이 감탄했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것이, 마침 품에 있던 회중시계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크게 불편하단 생각 없이 썼는데도 말이다.

“판매 대상은 어떻게 됩니까?”

보스그루니 백작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펠리오가 손목에 두른 시계는 분명 근사했다. 하지만 이런 외형은 여성보다 남성이 선호할 가능성이 컸다.

본래 시계가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최근엔 시계를 휴대하는 여성들도 많이 늘어났다. 그쪽 시장을 간과해선 안 되었다. 한때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전설의 여인은 매서운 눈초리를 지녔다.

“과연 백작입니다.”

중요한 지적이라며 펠리오도 수긍했다.

“다양한 계층을 노리고 있습니다. 성별은 물론이거니와 나이도 가리지 않을 겁니다. 특히 손목시계는 이 줄만 바뀌어도 분위기가 달라질 겁니다.”

여성분들의 팔찌처럼 말이지요.

펠리오가 제 시곗줄을 가리키며 답했다.

어느새 간이 사업 설명회가 열렸다. 펠리오의 주위로 어느새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아닌 척 몰래 도둑 듣기를 하고 있던 귀족들이 대놓고 다가와 손목시계를 보며 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공작님.”

여태 조용하던 카니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느 상단과 함께하실 겁니까?”

리네 백작 부부는 아까부터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시계를 노려봤다. 서부의 개가 손목시계에서 엄청난 돈 냄새를 맡았다. 어떻게든 여기에 참여해야 했다. 유통은 물론이거니와, 리네 상단 소유의 보석점도 몇 개 있으니 그곳에 판매처를 구비할 계획도 빠르게 구상했다.

“서부와의 거래는 늘 환영이지요.”

펠리오가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카니스가 눈을 반짝였다. 역시 자신들의 우정은 헛된 것이 아니라며 홀로 감격하던 찰나였다.

“그래서 우르베스페 상단과 함께할 겁니다.”

“어……?”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상상까지 하고 있던 카니스가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굳어 버린 그의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죄송하게 됐군요, 리네 백작.”

우르마리티 백작이었다. 승자의 미소를 지은 거대한 노신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제가 우르베스페 상단과 연결해드렸습니다. 아주 좋은 거래가 되었다며 우르베스페 상단주가 기뻐하더군요.”

역시 북부와 서부의 인연은 이토록 돈독하다며 얄밉게 말했다.

“물론 리네 상단과도 할 겁니다.”

펠리오가 가뭄의 단비처럼 말했다.

“저, 정말이지? 아니, 정말입니까?”

크게 실망했던 카니스가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리네 상단은 보레오티의 중요한 동반자입니다.”

주 거래처는 우르베스페가 될 테지만, 다른 상단들을 완전히 배척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 리네 상단은 타국으로 수출까지 하는 거대 상단이었다.

“그럼 투자는 받으시나요?”

아비페르가 재빨리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럼 나중에 따로 뵈어 이야기를 진행해도 될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펠리오와 아비페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약속을 잡았다. 한숨 돌린 아비페르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어쨌건 저 엄청난 것에 한 다리 걸쳤으니 한숨 놓았다.

“공작님도 참 대단하시군요.”

누군가가 말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시계를 손목에 찬다니…….”

모두 입을 모아 펠리오를 치켜세웠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무섭다고 욕하고, 잘났다고 욕하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그러나 펠리오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며, 이 기발한 발상은 다른 사람이 제게 선물한 것이라고 바로 고쳐 말했다.

“마침 잘 되었군요.”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펠리오가 말했다.

“이미 다들 알겠지만.”

네놈들은 어차피 악의적인 소문을 부풀리며 온갖 더러운 말들을 주고받았을 테지만. 숨겨진 말뜻을 이해한 몇몇 귀족들이 얼굴을 붉혔다. 헛기침을 콜록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펠리오는 그들을 가볍게 노려보곤 이내 시선을 거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좌중을 조용히 시키고도 남았다.

“내 딸입니다.”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이 손목시계라는 것을 처음 떠올렸지요.”

전부 딸아이의 발상이라며, 펠리오가 이 모든 공을 레오니에한테 돌렸다.

“영애께서요?”

“어머나, 세상에나!”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이에 관해 아무런 말도 못 들은 보스그루니 백작과 케라타 자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고작 여섯은 된 것 같은 꼬마가 이런 발상을 떠올렸다니. 분명 선뜻 신뢰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부분은 공작이 애를 너무 아껴서 과하게 말하는 거라 여겼다.

하나 펠리오는 그 말이 진짜임을 확실시하고자, 다시금 말했다.

“우리 딸이 아빠가 일하느라 바쁘다며,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손목시계를 만들어 왔더군요.”

그 이상은 기밀이라며 펠리오가 입술 위로 손가락을 천천히 세웠다. 아이를 바라보며 한 행동인데, 여인들의 속 끓는 신음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레오, 인사할까?”

펠리오가 아이의 잔머리를 대충 정리해 주며 물었다.

“…….”

레오니에는 동글동글한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살폈다.

공개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아이는 펠리오를 쏙 빼닮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은 호기심 어린 빛을 내며 깜빡거렸다. 토실토실한 볼살은 말간 빛을 띠었고, 아빠의 옷자락을 살짝 쥔 손은 순진무구했다.

아이는 보레오티의 딸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어리고 약해 보였다. 그러나 몸에 지닌 아득한 검은색은 분명 보레오티의 것이었다.

“……으으응.”

레오니에는 저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곤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징징거렸다.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서.”

알아서 눈 깔라는 소리였다. 그제야 귀족들이 몸을 사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많이 피곤하실 거예요.”

아비페르가 다 이해한다며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걱정했다.

“지금쯤 주무실 시각이시죠?”

연회라는 게 원래 해가 지고 어두운 밤에 열리는 것이 보통이라지만, 아이들은 그때 즈음이면 대부분 잠자리에 든다.

즉, 이 오밤중에 어린아이를 초대한 황제를 향한 노골적인 비아냥이었다.

“어머, 죄송해요.”

아비페르가 서둘러 사과했다.

“제 걱정이 혹여 민폐가 되는 거면 어쩌지요?”

“아이를 염려해 주시는 그 마음이 어찌 민폐이겠습니까.”

나도 그 새끼 싫어합니다.

펠리오가 이해한다며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짤막하게 선보인 손목시계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연하지.’

낯가리는 척 수줍은 연기를 하던 레오니에가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아빠가 모델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근사하신 보레오티 공작께서 직접 손목을 노출하셨다. 단련된 근육으로 둘러싸인 탄탄한 손목. 그 위를 품격있게 감싼 손목시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시곗줄에 살짝 가려진 피부는 어느 때보다 자극적이었다.

“크으으으!”

아빠의 멋짐에 반한 아기 맹수가 참았던 감탄을 터트렸다.

“너 술 마셨냐.”

품에 안고 있던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가볍게 노려봤다. 아까 목마르다고 해서 건넸던 유리잔을 다시 확인했다. 술 냄새는 딱히 나지 않았다.

“아빠의 멋짐에 취했어.”

“너는 당연한 말을 늘 입 아프게 하는구나.”

“방금 그 말, 좀 짜증 났어.”

하지만 실제로도 멋지니 넘어가 주겠다며 레오니에가 잘난체하듯 말했다. 허공에 붕 뜬 레오니에의 두 발이 파닥파닥 흔들렸다.

“연기는 다 끝났어?”

펠리오가 과일 하나를 건네 아이 입에 물렸다. 수줍음 많은 일곱 살 흉내를 낸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까불거리고 있었다.

“우웅! 으응 우우웅…….”

레오니에는 과일을 오물오물 씹으며 못 알아들을 소리를 웅얼거렸다.

“다 먹고 말해.”

“……설마.”

다 씹고 꿀꺽 삼킨 레오니에가 손가락을 얄밉게 흔들었다.

“본 무대는 시작도 안 했어.”

그리곤 시선을 위로 올렸다. 검독수리가 그려진 노란 깃발이 연회장의 가장 높은 자리에 걸려 있었다. 아기 맹수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은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레오니에는 연회를 모른다.

지금껏 참여해 본 사교 모임이라곤 부모님들끼리 모여 번갈아 여는 자녀 동반 다과회나, 귀부인들끼리 모여 뒷담화 까며 스트레스를 푸는 건전한 차 모임이 다였다.

그래서 황실 연회는 다른 모임과 많이 다른 건가, 싶었다.

“황제는 왜 안 와?”

레오니에가 여전히 공석인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성이 덜 돼서 그래.”

“아가씨, 이건 정말 예외입니다.”

펠리오는 황제를 욕했고, 루페는 절대 이 경우를 표준으로 삼아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원래라면 한참 전에 등장했을 겁니다. 더욱이 선황 폐하의 추모 연회도 겸하는 자리이니까요.”

“얼굴 안 보니 속은 편하다만.”

문제는 레오니에였다. 낮잠을 많이 자서 아직 쌩쌩하다고는 해도, 평소 일찍 잠드는 아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씨, 내 깽판 계획…….”

레오니에도 그런 저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무럭무럭 자라려는 건지, 요새 잠이 무척 많아져서 살짝 불안했다. 레오니에는 제 몸 상태를 가늠해 봤다. 체감상 앞으로 한 시간이 한계일 것 같았다.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 하나?’

성질 더러운 잠투정을 보여 주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보레오티 공작님.”

“아까는 대단했습니다.”

오르티오 후작과 헤스페리 후작이 다가와 인사했다.

동과 서, 그리고 북. 제국의 다섯 지역 중 세 곳을 다스리는 주인들이 모였다. 그것만으로도 또 다시 이곳으로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 탓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자연히 거리를 벌렸다.

“안녕하세요, 영애?”

오르티오 후작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때 뵙고 처음이네요.”

푸른 머리를 반쯤 뒤로 넘긴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지었다. 후작은 일전에 북부 저택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때를 언급했다.

“영애와 안면이 있으셨나요?”

헤스페리 후작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곧 레오니에한테 푸근한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레오니에는 두 사람에게 반갑다는 뜻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비밀이랍니다.”

오르티오 후작이 작게 웃었다.

북부에서 눈표범으로 변했을 때 잠깐 만난 게 다였지만, 후작은 어린 영애께서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서로의 안부를 짧게 묻는 것을 끝으로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 이후의 처리 과정에 대해 논의했다. 아직 세간에 발표된 사건이 아니라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레오니에는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

그 틈에 레오니에가 아빠 품에서 내려왔다. 저를 계속 안고 있을 펠리오 팔이 걱정되었다.

“남부는 이번에도 안 왔군요.”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이는 아빠의 다리를 인형처럼 꼬옥 껴안았다.

“그쪽은 어떤 의미로는 북부보다 훨씬 폐쇄적이죠.”

오르티오 후작은 딱히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대꾸했다.

“메리디오 후작도 그렇습니다만, 아우스트 공작도…….”

이야기 주제는 남부로 이동했다.

‘메리디오와 아우스트.’

레오니에가 귀를 쫑긋했다.

벨리우스 제국에는 예부터 두 공작 가문이 있었다.

검은 맹수라 불리는 보레오티.

‘그리고 청옥의 고래.’

레오니에가 또 다른 공작 가문의 이명을 떠올렸다.

제국에 단 둘뿐인 공작 가문은 각각 북부와 남부에 자리했다. 둘 다 대외 활동을 최소한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폐쇄성만 따진다면 아우스트가 보레오티를 훨씬 앞질렀다.

아우스트 공작 가문은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알려진 게 전혀 없었다. 적어도 보레오티는 북부를 직접 다스리며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서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했다.

그러나 아우스트는 그런 게 일절 없었다. 공작이라는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행보가 불가사의였다. 정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지, 먼 옛날에 남부의 주인이란 이명을 메리디오 후작 가문에게 물려준 것 아니냐는 기록까지 있다. 실제로 사람들도 남부의 주인이라고 하면 죄다 메리디오 가문이라 대답한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알고 있다.

‘그건 다 속임수야.’

보레오티가 맹수의 송곳니란 이능을 지닌 것처럼, 아우스트 역시 대대로 신비한 힘을 이어오고 있다. 메리디오 가문은 그런 아우스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가신 가문이었다. 두 가문이 상징으로 색만 다른 고래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나 이 사실을 아는 건 오로지 같은 공작 가문인 보레오티뿐이었다. 아우스트 가문의 신비한 힘은 황실조차 모르는 비밀이었다.

“안 오고 좋지요, 뭐.”

여기가 뭐 좋은 곳이라고.

헤스페리 후작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렇죠.”

솔직히 가장 부럽다며 펠리오도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메리디오와 아우스트 쪽으로 흘러가려는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기실 지금 중요한 건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남부의 주인들이 아니었다.

“그보다 올로르는?”

“저쪽입니다.”

루페가 살짝 떨어진 거리에 모인 무리를 가리켰다. 무리 속 중심에 붉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 두 사람이 붙어 있었다.

올르르 자작과 그의 영식이었다.

“파르두스 후작 할아버지.”

레오니에가 그 무리에서 파르두스 후작을 찾아냈다. 그는 그들과 즐거운 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불쌍해…….’

그러나 레오니에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분명 겉모습은 저들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레오니에의 눈에는 어떻게든 참고 버티는 모습처럼 비치었다. 마치 상종도 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것 같았다.

펠리오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버지…….”

하물며 루페마저 부친의 노고에 안쓰러움을 지니었다.

‘늙어서 고생이 많군.’

어쩌면 후작의 능글맞은 성격은 저런 것들과 어울리느라 생긴 부작용이 아닐지, 펠리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짧게나마 후작을 동정한 펠리오는 곧장 올로르 부자를 짧게 바라보곤 고개를 휙 돌렸다. 얼굴을 기억해 뒀으니 이 이상 쳐다볼 필요가 없었다. 괜히 꿈자리만 사나울 일이다.

“올로르 자작이군요.”

같을 곳을 보고 있던 헤스페리 후작이 조용히 말했다. 마치 커다란 날붙이가 흙을 퍽퍽 긁는 것처럼 따끔한 목소리였다. 그만큼 헤스페리 후작의 심기가 불편하단 뜻이었다. 심지어 분노를 최대한 억누른 것이 저 정도였다.

다행히 레오니에가 놀란 걸 보고 서둘러 감정을 다스렸다. 레오니에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스페리 후작이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뻔뻔하기도 하지.”

오르티오 후작도 붉은 백조가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였다.

만약 여기가 황궁만 아니었다면, 당장 가서 마법으로 해코지할 생각이었다. 저들 때문에 자신들 세 지역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올로르…….”

아빠 다리 뒤에서 훔쳐보던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스읍, 더러운 말이다.”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며 펠리오가 주의를 줬다. 루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레오니에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올로르 자작을 훔쳐보는 건 그만두지 않았다.

‘얼굴은 반반하군.’

특히 올로르 자작 영식은 선이 부드러운 미남이었다. 사람이 너무 착해서 힘든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전형적인 호구 인상이었다.

‘역시 사람은 얼굴만 보고는 모르는구나.’

인상 날카로운 펠리오는 착하진 않아도 지킬 건 지키는 인간이었다. 반면 착한 미남 상인 올로르 자작은 소설에서 손꼽히는 악역이었다.

레오니에는 또 하나 배웠다. 관상은 과학이 아니다.

‘으음…….’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남부는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올로르는 남부의 주인인 메리디오가 있는데도 주인처럼 활보하는 오만한 백조였다. 그런데 아무도 이 점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우스트야 그러려니 해도, 메리디오까지 이를 방관하는 건 이상했다.

‘우리 아빠라면 반 죽였을 텐데.’

실제로도 그랬고.

레오니에는 북부를 어지럽히려던 세 가문의 말로를 떠올렸다. 보레오티는 제 영역을 건드리고 더럽히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마치 가문의 문장에 새겨진 맹수처럼 영역 동물의 습성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올로르는 감히 검은 맹수의 땅에 장난질을 쳤다.

‘네놈들은 곧 죽을 거야.’

우리 아빠한테.

아무도 몰래 콧방귀를 뿡뿡 뀐 레오니에는 마치 제가 혼낼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레오니에는 올로르 부자의 뻔뻔한 행보에 기가 막혔다. 저놈들 때문에 자칫하면 마물이 제국 곳곳에 퍼져 커다란 인명 피해가 날 뻔했다. 그런데 아직 사건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연회에 떡하니 얼굴을 내비치다니.

‘생긴 건 멀쩡한데 말이지.’

레오니에는 속으로 저들을 실컷 욕한 뒤에야 시선을 돌렸다.

“아까 공작님이 손목시계를 보이셨을 때, 올로르 영식이 뒤에서 몰래 보고 있었답니다.”

오르티오 후작이 내가 다 봤다며, 고자질하듯 얄밉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었는데, 올로르 영식이 약혼한다지요?”

헤스페리 후작이 레오니에한테 안주로 나온 포도를 내밀며 말했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은 레오니에가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맛있다!’

엄청 달콤한 청포도였다. 아이가 맛있게 먹는 걸 본 헤스페리 후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 때문에 다들 축하하고 있답니다.”

“아직도 결혼을 안 했나요?”

펠리오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의 기억 속 올로르 영식은 저보다도 나이가 많은 거로 알고 있다.

“어느 가문과 한답니까?”

펠리오가 제발 북부 가문은 아니길 빌었다.

“남부 귀족입니다.”

에르바누 백작 가문이라네요.

레오니에의 귀에 중요한 단어가 꽂혔다.

‘에르바누?’

아예 포도 세 알을 손에 쥔 채 먹고 있던 레오니에가 움찔했다. 에르바누는 바리아의 집안이었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서둘러 포도를 꿀꺽 삼켰다.

설마 여기서 바리아와 연관된 이야기를 들을 줄 몰랐다. 레오니에는 맛있는 포도를 먹는 걸 잠시 미뤄 두고 어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에르바누…….”

그러자 펠리오가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터트렸다.

“그 집 장녀가 작년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 아니던가?”

펠리오가 바리아를 언급했다. 레오니에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혔다. 이름은 모르는 투였지만, 분명 그의 머릿속에 바리아란 존재가 확실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루페가 물었다.

“이름까지는 몰라.”

예상대로 펠리오는 바리아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럼 약혼은 장녀와 하나?”

그건 안 돼! 레오니에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

“상대는 차녀입니다.”

휴우, 레오니에가 안도했다.

‘아 참, 나 알고 있었지.’

괜한 호들갑을 떨었다며 혼자 부끄러워했다. 사실 원작을 기억하고 있기에 대충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저라는 변수가 끼어들었기에 마냥 안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표정은 아주 빠르게 일그러져갔다.

“……그 집 차녀가 올해 열일곱이라지요.”

오르티오 후작이 기어코 모두가 역겨워하는 사실을 입에 담았다. 레오니에가 오만상을 썼다.

‘더러워! 역겨워!’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이야기였다.

벨리우스 제국은 남녀 모두 스무 살 이상부터 법적 혼인이 가능했다. 이 탓에 귀족 세계에서는 스물 이전의 자녀를 둔 가문끼리 약혼을 맺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서로 나이가 엇비슷한, 그것도 성인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끼리 하는 것이 도의로 여겨졌다.

열일곱인 에르바누 영애의 약혼은 크게 문제가 되는 점이 아니다. 그 상대인 올로르 영식의 나이가 아주 큰 문제였다.

“자식 팔아서 장사하는 쓰레기가 거기도 있었나.”

펠리오는 제 다리를 꼭 붙들고 있는 레오니에를 보며 가까스로 불쾌감을 추슬렀다. 아이는 고아원 어른들을 욕할 때면 보이는 썩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확실히 그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쓰레기들이었다.

“끼리끼리 어울리네요.”

오르티오 후작이 기어코 술잔을 내렸다. 입맛이 확 떨어졌다.

그때, 머리 위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연회장 바로 위층 발코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연주는 굵고 짧았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을 단번에 조용히 만들어 집중케 했다.

곧 시종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그 시종이 아니네요.”

“너무 관심 가지지 마.”

펠리오와 루페가 몰래 속닥거렸다.

그들이 말하는 시종은 일전에 잘못된 정보를 황제에게 일러 타바누스 가문을 황천길로 인도하게 했던 사람이었다.

“귀빈 여러분.”

시종이 큰 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시종이 숨을 짧게 골랐다.

“……황비 마마께서 납시었습니다.”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레오니에는 헤스페리 후작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걸 알아챘다.

* * *

벨리우스 제국.

일명 동물의 왕국.

그 이름처럼 특정 동물을 가문의 상징으로 쓰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 관습의 시작이 바로 각 지역의 수장 가문이라고 한다.

건국 이전부터 그들이 성스럽게 여긴 동물 신앙이 현재는 가문의 상징으로 이어진 거라는 어느 학자의 추측이 가장 유력했다.

동부인 오르티오는 파란 눈표범.

서부인 헤스페리는 하얀 호랑이.

남부인 메리디오는 주홍 고래. 만약 원 주인인 아우스트로 바꾼다면 청옥 고래.

북부인 보레오티는 검은 사자.

마지막으로 중앙 황실인 벨리우스는 검독수리.

검독수리는 오래전부터 황실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이는 건국 신화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초대 황제가 어느 곳을 수도로 삼을지 고민하던 중, 우연히 하늘을 날아다니던 검독수리가 방향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별 헛소리.’

레오니에가 남몰래 인중을 긁적였다.

아기 맹수는 다른 건 몰라도, 황실의 건국 신화는 불신했다. 그냥 자기들 건국에 정당성과 신비로움을 부여하려고 급조해낸 느낌이 팍팍 들었다.

어쨌건 황실이 자신들의 상징이라 여기는 노란 검독수리 깃발이 연회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깃발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깃발 속 검독수리가 전부 보석을 꿰매어 만든 것이라는 걸, 레오니에는 한참 바라본 뒤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깃발 아래.

황제와 황후가 앉을 자리가 나란히 마련되었다. 한 층 낮은 자리에는 황비가 앉을 자리도 준비되었다.

높은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지각해 놓고 생색은 더럽게 내네.”

“쓰레기라 그래.”

펠리오가 조용히 가르쳐 줬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입니다.”

루페가 저택에 돌아가서 같이 욕하자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도 황제가 싫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지금은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필 상사랑 그 딸내미가 쌍으로 황실 모독에 재미 들려 심장이 오싹했다. 루페는 잠깐만이라도 말을 조심하자며 신신당부했다.

곧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레오니에가 적잖게 당황했다.

‘나름 잘 생겼네?’

상당히 의외였다.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원작에서는 황제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펠리오와 바리아,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만 근사한 외모를 지녔다는 묘사가 적혔지, 그 외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대충이었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니에는 아는 것이 있다 보니 황제에 대한 기대치가 밑바닥이었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심술 궂은 인상의 영감님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황제는 인물이 훤했다.

‘훈훈한 교회 오빠?’

예상과 다르게 다정하고 포근한 인상이었다. 콧대가 오뚝하게 세워졌고,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윤이 나 반짝이는 황갈색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었다. 멀리서 보는데도 단단한 체격이 보였다.

‘그런데 근육보단 골격이…….’

타고난 골격 탓에 커 보이는 것 같다고, 레오니에의 근육 탐지기가 매섭게 작동해 숨겨진 비밀을 알아냈다. 다만 살짝 아쉬운 점이, 예쁜 금빛 눈동자에 힘이 어설프게 들어가 있었다. 그 탓에 외모가 살짝 조화를 이루지 못한 느낌이었다.

‘……어째 좀 그러네.’

얼굴에 잠시 혹했던 레오니에가 빠르게 정신을 찾았다. 입맛이 썼다.

원작에서는 재기 불가능한 쓰레기 1, 2위를 다투는 올로르와 황제가 하나 같이 외모가 출중해서야 어쩌자는 말인가.

하필 또 너무 선한 인상이었다. 앞으로 저 면상에 속을 피해자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너무도 부조리하단 걸 느끼게 된다.

황제에게 질린 레오니에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저 사람이 황후구나.’

감탄이 절로 나오는 미인이었다. 우아하게 올려 묶은 은발은 보석 가루를 솔솔 뿌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깐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초연한 인상을 남겼다.

‘와아……!’

레오니에는 지금껏 많은 미인을 봤다. 펠리오만 해도 세계관 최고 미남이란 설정이고, 루페도 남부럽지 않은 미모를 지녔다. 글라디고 기사단은 물론이고 보레오티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얼굴 예쁜 사람들에게 면역이 생겼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황후는 그런 레오니에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꼭 잎사귀에 맺힌 이슬 같았다. 투명하고 맑은, 자신감이 넘치는.

그러나 어딘가 위태로운 곳에 있는 사람.

‘황제랑 사니까, 뭐…….’

그런 느낌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실제로도 저 부부는 서로를 단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황제는 이따금 힐끔거리긴 했지만, 황후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짝퉁 도금과 순은 같았다.

‘그리고 저 초록색이…….’

이제 시선은 황제 황후 부부보다 한 층 아래 있는 황비에게로 향했다.

‘……범죄 아니지?’

레오니에는 멈칫했다. 우시스 황비는 엄청난 동안이었다. 얼굴만 보면 히에이나 영애와 동년배처럼 보였다. 초록색 머리가 탐스러웠고, 머리 중간중간에 달린 푸른 옥구슬이 꽃잎처럼 보였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천진난만한 숲속의 요정님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우시스 황비는 저래 봬도 서른을 훌쩍 넘긴, 올봄에 열두 살이 된 1 황자를 낳은 유부녀였다.

‘진창이 저기 있네.’

본부인과 첩을 공식 석상에 당당히 데리고 나온 남편이라니.

“……나보다 개쓰레기잖아.”

레오니에가 기어코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난 그래도 근육만 희롱하는데. 그리고 저렇게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고.”

“…….”

“…….”

여태껏 수도 없이 근육 희롱을 당해 온 펠리오와, 이를 수도 없이 목격한 루페는 말문이 막혔다.

마침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펠리오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레오니에는 그런 어른들을 멀뚱히 구경하다가 이내 저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걸려라, 오해해라.’

이런 나를 보고 어수룩한 아이라고 착각해라. 이 어설픈 행동도 레오니에의 치밀한 깽판 계획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게 먹혔는지, 곧 머리 위로 시선 하나가 쏟아졌다. 감이 발달한 덕에 레오니에는 저 시선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높은 자리.

‘걸렸다!’

먹잇감이 걸려들었다.

레오니에가 조용히 웃었다. 황제가 레오니에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건 레오니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던 펠리오가 이를 느꼈다. 그는 황제가 제 딸을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혀를 몇 번이고 작게 찼다. 레오니에는 슬쩍 펠리오 곁으로 갔다. 펠리오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저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레오.”

그리고 작게 속닥였다.

“너의 첫 사냥이다.”

아빠가 지켜볼 테니까.

“재밌게 놀다 와.”

감동한 아기 맹수는 아빠 맹수를 꼬옥 끌어안았다.

* * *

“오늘 이 연회는 아주 뜻깊은 자리라네.”

황제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연설은 의외로 짧게 끝났다. 일단 와 줘서 고맙고, 이번 연회가 선황 사후 처음 열리는 자리이니만큼 추모의 뜻을 지녔다며 어쩌고저쩌고.

돌아가신 부친을 추모한다기엔 너무 화려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 점에 대해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곧 짧은 묵념 시간을 가졌다. 모두 눈을 감고 돌아가신 선황을 애도했다. 이때만큼은 펠리오도 진지하게 임했다. 그는 선황을 진정한 황제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레오니에도 따라 눈을 감고 애도했다.

‘자식 농사가 힘든 법이지요.’

나라는 잘 다스려도 자식은 제대로 못 가르친 선황을 동정했다.

묵념이 끝나고, 다시 연회가 시작되었다. 감미로운 음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도 그제야 다시 활기를 띠며 움직였다. 춤을 추러 중앙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나.”

벽에 기대 조용히 술을 즐기던 오르티오 후작이 제게 다가오는 귀한 손님에게 미소를 지었다.

“보레오티 영애.”

“또 뵙네요, 후작.”

혼자 나타난 레오니에가 무릎을 짧게 숙였다.

“얌전히 계시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오르티오 후작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저는 원래 얌전한데요?”

“글쎄요, 제가 생각하는 영애는 그럴 분이 아니신데요?”

일전에 북부 저택 집무실에서 펠리오를 기다리고 있었던 오르티오 후작은 문밖에서 타바누스 영식과 기 싸움을 벌이던 레오니에를 떠올렸다.

“마냥 연약한 분은 아니시잖아요.”

당돌한 말투와 투쟁심이 아주 인상 깊었다.

후작이 정곡을 찌르자 레오니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말 혼자이신가요?”

왜 공작님이나 리코스 자작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거냐고 물어봤다. 오르티오 후작이 고개를 들어 펠리오를 찾았다. 그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이가 없어진 걸 모르는 듯했다.

‘……아니야.’

딸을 지극히 아끼는 펠리오가 이 적지에 아이를 홀로 보낼 리가 없었다. 분명 일부러 아이를 홀로 보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오르티오 후작의 심중을 읽었는지, 레오니에가 비밀이라며 작게 속삭였다.

“실은 사냥 중이에요.”

“사냥이요?”

“네. 아빠가 가르쳐 줬어요.”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먹잇감이 방심하도록 만드는 거라고.

“저는 지금 그렇게 보이려고 혼자 다니는 거예요.”

예상치 못한 대화에 오르티오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칫 샴페인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제 곧 걸릴 거예요.”

레오니에가 먹잇감이 있는 곳을 올려다봤다.

‘……아아.’

오르티오 후작은 등골이 섬뜩했다. 레오니에는 그저 노란 검독수리 깃발이 매달린 저곳을 응시할 뿐인데, 고작 그것만으로 피부를 찌르는 위압감에 압도당했다.

“그럼 후작, 다음에 뵈어요.”

레오니에는 후작에게 사탕을 건네고는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오르티오 후작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가까스로 손에 쥔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종이?’

사탕 겉면 위에 종이가 휘감겨 있었다. 딸기 우유 향이 진하게 배인 종이에는 짧은 쪽지가 적혀 있었다.

“…….”

오르티오 후작은 조용히 쪽지를 마법으로 태웠다. 그리고 저 대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보, 우리 발코니에 갈까요?”

“어…….”

후작 부군이 얼굴을 슬그머니 붉혔다.

“여, 여긴 밖이지 않습니까…….”

밖은 부끄럽다며 남편이 수줍게 중얼거렸다. 오르티오 후작은 변함없이 귀여운 제 남편의 손을 잡고 이끌어 발코니로 데려갔다.

* * *

사냥은 맹수의 본능이다.

‘몰이를 신중히 해야 해.’

아빠 맹수는 아기 맹수의 첫 사냥을 기쁜 마음으로 도와줬다.

‘의심받을 행동을 해선 안 돼.’

레오니에는 연회장에 들어온 뒤로 계속 낯을 가리는 수줍은 아이처럼 행동했다. 펠리오가 없으면 불안한 것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방심하게 만들고.’

그리고 펠리오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중에 혼자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연회가 지겨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철부지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방해되는 건 치워 버려.’

그래서 몇몇 사람들에게 쪽지를 적은 사탕을 건넸다. 북부 골수 귀족들과 오르티오 후작은 지금쯤 제 주변 사람들을 챙겨 몸을 사리고 있을 거다.

‘루페 아저씨 곁에는 아빠가 있으니 걱정 없고.’

레오니에가 망토 속에 넣어 둔 사탕들을 만지작거렸다. 네 개 정도 남은 것 같았다.

아기 맹수는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사소한 것에 집중력을 흩트리지 말라고 아빠가 그랬다. 불편하긴 했지만 떨쳐내야 했다.

‘남은 사람은…….’

헤스페리 후작과 리네 백작 부부. 다행히 그들은 함께 모여 이야기는 나누는 중이었다. 목표를 포착한 레오니에가 그곳으로 앙증맞게 달리려던 참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파, 파르두스 후작…….”

레오니에는 있는 힘껏 달리려던 다리를 가까스로 멈췄다.

‘기척을 못 느꼈어!’

이 할아버지 뭐야?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멍한 눈으로 후작을 바라봤다. 소리 소문도 없이 등 뒤로 나타난 파르두스 후작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펠리오 왈, 짜증 나는 영감의 얼굴이었다.

“파르두스 후작입니다.”

“……레오니에예요.”

예의 바른 인사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이며 답례했다.

‘이미 아는 사이에 무슨.’

우연인 것처럼 다가와 인사하는 모습이 너무도 능글맞았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보레오티와 파르두스는 사이가 좋지 않은 척 연기해야 했다. 레오니에는 연기 반, 사심 반을 담아 파르두스 후작을 경계하는 척했다.

‘아, 사탕.’

일단 저 할아버지도 나름 소중한 사람이긴 했다. 아빠를 위해 열심히 이중 첩자 노릇을 하고 계시니 말이다.

레오니에가 망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응.”

그리고 생색내며 줬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파르두스 후작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평소 얼굴에 두르는 가면 웃음 따위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레오니에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호감을 느꼈다.

“특별히 주는 거예요.”

“이를 어찌 감사하다 해야 할지.”

“그러면 아빠 괴롭히지 마요.”

“제 인생의 유일한 재미인데.”

그것을 어찌 포기하겠냐며 후작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아…….”

레오니에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러니 아빠가 후작 할아버지를 싫어하지.

레오니에는 저 노신사의 타고난 취향이 저의 변태성을 뛰어넘었음을 깨달았다. 잠깐이나마 느꼈던 호감은 단번에 짜증으로 바뀌었다.

“흥, 사탕이나 먹어요.”

투덜거린 레오니에는 다시 움직였다. 파르두스 후작은 그 뒤를 태연히 따라갔다. 레오니에가 힐끔 째려봐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후작이 사탕을 한입 먹었다.

“…….”

그리곤 포장지를 감싸던 종이에 적힌 글을 보았다.

“달콤하네요.”

“이제 안 줄 거예요.”

“같은 북부 주민인데 사이좋게 지내는 건 어떨지요.”

레오니에는 대답 대신 발걸음을 더욱 씩씩하게 움직였다. 뒤에서 파르두스 후작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저를 놀리려고 작정을 한 듯하다.

하지만 그 덕에 레오니에를 훔쳐보던 시선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파르두스 후작이 주변을 가볍게 훑어봤기 때문이다. 그는 웃으며 돌아볼 뿐인데, 다른 귀족들은 알아서 눈을 피했다.

파르두스가 보레오티한테서야 이런 취급을 받지만, 기실 그들 가문 역시 제국의 시작을 함께해 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영향력만 따지면 수도에선 보레오티보다 파르두스의 힘이 훨씬 강했다.

‘이제야 편하군.’

주변을 적당히 치운 파르두스 후작이 제 앞을 걸어가는 레오니에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귀엽고 당차신 분.’

살아생전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보레오티를 뵙게 될 줄이야. 북부에서 처음 뵈었을 땐 그렇게 작고 말랐는데, 이젠 올려 묶은 머리 너머로 볼살이 삐죽 튀어나올 정도였다.

‘이러니 공작님이 껴안고 사시지.’

파르두스 후작은 펠리오의 명을 받고 레오니에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아이의 주변을 살피고 이상한 점이 있으면 뭐든 보고하라고. 대신 아이의 행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거기에 꼬투리를 잡는 미숙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이라…….’

확실히 수상한 낌새가 보였다.

아이가 움직이는 곳마다 누군가의 시선들이 계속 따라붙었다. 조금 전 눈치를 주며 사람들을 조용히 시킬 때 확실히 알아냈다. 연회 시중을 돕는 사용인 중 황제가 따로 지시한 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눈치챈 파르두스 후작은 혀를 작게 찼다. 저 어리석은 독수리는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사이, 레오니에는 헤스페리 후작이 있는 무리에 도착했다. 헤스페리 후작은 아기 맹수의 방문에 기뻐하면서도 혼자 온 것을 염려했다.

“대신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파르두스 후작이 자연히 끼어들었다.

“서부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이군요, 후작.”

두 후작은 딱히 어색한 기류 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다른 귀족들과도 크게 불편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카니스와 아비페르는 호호 웃으며 파르두스 후작과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레오니에는 그런 어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긴.’

이상할 건 아니었다. 파르두스가 황제파로 알려졌지만, 그게 북부와 친하게 지내는 귀족들과 척을 져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왜 후작님께서 우리 영애와 함께 오셨나요.”

다만 카니스는 은근슬쩍 레오니에의 앞을 막아서며 파르두스 후작을 경계했다.

‘오오, 아저씨!’

레오니에가 감동 어린 시선으로 카니스의 등을 바라봤다. 유부남만 아니었어도 새아빠 후보 일 순위였는데, 참으로 아까운 인재였다.

“괜찮으세요?”

혹시 불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느냐고 아비페르가 물었다. 레오니에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망토 속에 있던 사탕을 건넸다.

아비페르는 사탕을 받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겉을 싼 종이를 수상쩍게 응시하며 조용히 펼쳤다.

“……!”

놀란 그녀가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비밀이라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가까스로 비명을 죽인 아비페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 할아버지.”

레오니에는 헤스페리 후작에게 아는 척을 했다. 후작이 기쁜 미소로 아이를 반겼다. 심지어 레오니에가 팔까지 뻗어 안아 달라고 투정하니, 미소가 꽃망울 터지듯 피어올랐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후작 할아버지 보려고요.”

“우리 영애께선 낯도 안 가리시고.”

참으로 대견하다고 칭찬하는 헤스페리 후작은 꼭 친손주를 예뻐하듯 레오니에를 대했다. 그에게도 피를 나눈 손주가 있지만, 황자와 황녀란 신분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제게 살갑게 다가오는 레오니에가 무척 반가웠다.

“저도 저렇게 좋아해 주시지.”

파르두스 후작이 살짝 질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니스가 별 해괴한 소리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후작을 응시했다.

‘이벡스 아저씨가 없네.’

시야가 높아진 레오니에가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황후의 옛 정인이었던 이벡스는 이곳에 없었다. 근처를 둘러보던 레오니에는 곧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봐서 뭘 하겠나.

서로 가슴만 찢어질 텐데.

소설 ‘검은 맹수의 바리아’에서 가장 서글픈 연애사를 가진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레오니에는 괜히 마음이 시큰거렸다.

‘나쁜 영감님.’

레오니에는 은근슬쩍 헤스페리 후작의 귓불을 잡아 꾸욱 눌렀다. 후작이 제법 아팠는지 인상을 슬쩍 썼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놓지 않았다.

이깟 통증이야 그 두 사람이 겪었을 고통과 비교가 될까. 오랜만에 독자의 마음으로 후작을 괴롭힌 뒤에야, 레오니에는 그에게 사탕을 건넸다. 밉긴 한데 솔직히 제겐 피해를 준 게 없으니 한 번 봐주기로 했다.

‘이제 하나 남았네.’

남아 있던 네 개 중 세 개를 파르두스 후작과 아비페르, 지금 막 헤스페리 후작에게도 건넸다. 망토 주머니에 남은 사탕은 하나밖에 없었다.

‘누구 주지?’

레오니에가 떠오르는 사람들을 간추려냈다.

‘카니스 아저씨는 아비페르 님이 계시니 문제없고, 황후 폐하를 드리면 어떨까 싶었는데.’

티그리아 황후는 헤스페리 후작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지도 않았다. 은발의 여인은 저 높은 곳에서 제 시녀로 보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 같아도 안 내려오지.’

황제한테 시집 보낸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하고 마주할 수 있을까. 레오니에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헤스페리 후작이 사탕 겉면을 감싼 쪽지를 알아챘다. 거기에 적힌 내용을 보고는 놀라는 기색이 다분했다. 안정적으로 안겨 있던 레오니에의 몸이 움찔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노련한 무인은 곧 감정을 갈무리하며 아이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나름 화목하게 두런거리는 무리 속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낯선 이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헤스페리 후작이 느닷없이 끼어든 불청객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그의 왼팔에 둘린 완장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시종, 인가.”

하물며 그냥 시종이 아니었다. 시종 중에서도 황족의 곁을 지키는 우수한 시종이 단다는 완장이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검독수리의 깃털이 수놓여 있었다.

“……황제 폐하의 시종이로군.”

먼저 입을 연 건 파르두스 후작이었다. 그렇다고 답하는 시종의 얼굴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레오니에는 웃음이 삐져나올 뻔한 걸 꾹 참았다.

‘왔다!’

드디어 제 발로 왔구나!

아기 맹수는 흥분되는 속내를 애써 가라앉혔다. 드디어 멍청한 사냥감이 바로 코앞까지 왔다. 인파 속에 몸을 웅크리며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찾아왔다.

“전에 있던 시종은 어떻게 되었나?”

“사정이 있어 물러나셨습니다.”

“그런가…….”

대충 대답한 파르두스 후작은 이전 시종을 떠올렸다. 그는 펠리오와 루페가 흘렸던 거짓 정보를 황제에게 전했고, 그리고 곧장 타바누스 백작에게도 알렸다. 하지만 그 탓에 타바누스 백작은 글라디고 기사단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황제는 그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이전 시종을 내쫓았다.

‘내쫓기만 했다면 다행이지.’

지금쯤 어느 이름 모를 숲속에서 희멀겋게 눈을 뜬 채 썩어 가고 있을 거다.

“황제 폐하께서 영애를 뵙기를 요청합니다.”

시종은 모두가 예상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했다. 당연히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이를 반대했다.

“공작님께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어찌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에 공작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보레오티 영애께선 어립니다!”

카니스가 기어이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그의 분노는 너무도 적절했다.

“아직 어리신 분입니다. 응당 보호자가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여 영애가 겁을 먹고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겁니까”

보레오티 공작이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며, 카니스는 열이 뻗친 와중에도 최대한 타당한 이유를 들이댔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기에, 시종이 머뭇거렸다. 여기서 말을 잘못 꺼냈다간 큰일이 날 수 있었다.

이곳엔 서부의 주인이 있고, 제국에서 가장 큰 무역항을 지닌 리네도 있다. 시종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보레오티 공작을 부를 것이냐, 황제의 명을 따라 아이를 데려가느냐.

다행히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백작 아저씨.”

레오니에가 카니스의 손을 잡았다. 화가 나다 못해 광기가 돌 지경이던 카니스가 흠칫했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그의 손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그리곤 아비페르를 슬그머니 바라봤다. 그 시선을 짐작한 아비페르는 제 남편을 진정시키듯 팔을 껴안았다.

“갈게.”

레오니에가 말했다.

“대신 나, 파르두스 후작이랑 갈래.”

“그러시겠습니까.”

저야 영광이라며 파르두스 후작이 싱긋 웃었다.

“후작, 나 다리 아파요.”

“그럼 제가 안아…….”

“후작이 나 안아요.”

가까이 다가오던 시종을 무시한 채, 레오니에가 후작 품에 안겼다. 파르두스 후작은 기꺼운 마음으로 아기 맹수를 능숙하게 안았다.

레오니에가 의외라는 눈으로 파르두스 후작을 바라봤다. 안긴 품은 불편함이 없었다. 그가 어린 손주들을 직접 돌본 덕이었다.

시종이 먼저 앞서가고, 레오니에가 그 뒤를 따라갔다.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이제 제게 꽂히는 시선에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짜증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평소라면 뭘 꼬나보냐고 으르렁거렸을 거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후작.”

레오니에는 마지막 남은 사탕을 그에게 몰래 건네며 부탁했다.

이걸 ‘그 사람’에게 전하라고.

파르두스 후작은 말이 없었다. 하나 그는 아기 맹수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다. 강한 자를 숭상하는 파르두스는 결코 아기 맹수의 사냥을 방해하지 않을 터다.

곧 저 높은 계단 앞에 도착했다. 황제는 바로 저 앞에 있었다. 파르두스 후작이 레오니에를 내려 주며 시종을 향해 말했다.

“내가 올라가서 황제 폐하께 전하겠네.”

“그건 제 일…….”

“괜찮아, 괜찮아.”

후작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시종을 남겨 두고 홀로 계단 위를 올라갔다. 이제 레오니에와 시종, 단둘이 남았다. 레오니에는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바닥만 보고 있었고, 시종은 그런 아이를 조용히 지켜만 봤다. 아이를 다루는 일이 서툰 시종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재미없어.”

그때, 레오니에가 말했다.

“졸려.”

진짜 졸린 것처럼 하품도 크게 했다.

“아빠한테 갈래.”

그리고는 진짜 몸을 돌렸다. 깜짝 놀란 시종이 황급히 레오니에의 앞을 막아섰다.

“황제 폐하를 만나셔야지요.”

“싫어. 재미 하나도 없어.”

“뵙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간다’고 했지, ‘본다’고는 안 했어.”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명령하지 마.”

황제의 개 주제에.

불쾌감이 진득하게 묻은 시선과 오싹한 말투가 시종의 목을 날카롭게 훑었다. 공포에 찬 신음을 흘린 그가 가까스로 목을 더듬거렸다. 움직이는 손은 술병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조금 전까지 철부지처럼 굴던 어린아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몸을 바닥에 낮춰 도약을 준비 중인 검은 맹수가 눈을 선연하게 빛내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이제 철부지 흉내를 낼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갖춰졌다.

“……그래.”

곧 저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아이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혐오감 같은 것이 아기 맹수의 속을 불쾌하게 했다. 진하게 뿌린 향수 냄새까지 더해지니 역겨움이 더했다.

“그 사생아로군.”

레오니에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담담하게 말하면서 은근히 깔보는 말투가 참으로 거슬렸다.

“황제 폐하, 보레오티 공작 영애입니다.”

파르두스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예를 갖춰 레오니에를 불렀다. 황제가 보레오티를 낮잡아 부르는 것이 아주 불쾌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

레오니에는 저를 내려다보는 황금빛 눈동자를 똑같이 마주했다.

제국의 황제.

수비테오 아킬라 벨리우스.

‘나의 먹잇감.’

아기 맹수가 으르렁거렸다.

송곳니를 드러낼 때였다.

* * *

“황제 폐하와 보레오티 영애예요.”

“설마 했는데…….”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그러고 보니 공작이 안 보이네요”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어린아이를 이 늦은 연회에 초대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지만, 설마 레오니에와 황제가 저렇게 단둘이 마주하게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알현실이나 사람들의 눈을 가릴 만한 장소에서 따로 만날 거라 여겼다. 실제로 황제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것을 막은 건 파르두스 후작이었다.

‘어린아이와 단둘이 있는 것은 세간의 눈에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후작은 지금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가?’

당연히 기분 나쁜 조언이었고, 수비테오 황제는 파르두스 후작을 노려봤다.

‘절대 아닙니다.’

파르두스 후작은 조금 더 몸을 낮추었다. 신하 된 도리를 더욱 강조하는 모습에서 황제의 기분이 살짝 풀렸다.

‘공작이 악용할 수 있습니다.’

보레오티 공작은 이제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위 ‘딸 바보’가 되었다. 그에게 어린 딸은 가장 소중한 존재였고,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역린이기도 했다.

‘조그마한 틈도 안됩니다.’

‘…….’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폐하, 차라리 영애를 만나는 것은 다음으로…….’

‘그럼 폐하께서 직접 내려가시면 안 되나요?’

보다 못한 티그리아 황후가 말리려 했다. 그러자 우시스 황비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두에게 보여 주는 거예요!’

나는 보레오티의 어린 사생아에게 이토록 관대하다고. 직접 계단을 내려가 마주할 정도로 자비로운 분이라고.

‘너무 멋질 것 같아요!’

황비는 두 손을 꼭 쥐며 눈을 깜빡였다. 그 누구도 그녀가 열두 살 된 황자의 모친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다.

설마 저 말을 따른다고?

티그리아 황후와 파르두스 후작은 그래도 혹시, 설마 했다.

그러나 황제는 생각보다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귀가 얇고, 저를 높여 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기가 막히는군.’

조금 전 일을 다시 떠올린 파르두스 후작은 여전히 기가 막혔다. 실수로 표정을 일그러트려 감정을 드러낼 뻔했다.

황제는 우시스 황비에게 기생 당하는 숙주 같았다. 예부터 왕이 첩에게 홀려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 존재했다지만, 그런 인간이 제 나라의 황제라고 하니 한탄스러웠다.

‘……우시스 황비도 대단하군.’

황제 위에 군림하는 첩이라니.

어쨌건 후작은 쓴 속을 삼키며 레오니에를 소개했다. 수비테오 황제는 레오니에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공작 판박이로군.’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생아 주제에, 보레오티의 피는 진하게 이어받았다. 아득한 검은색으로 물든 검은 머리와 눈동자, 살짝 올라간 눈초리, 꾹 다물린 일자 입술. 거기다 겁도 없이 저를 응시하는 못 배워 먹은 불충까지.

“보레오티 영애, 제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때, 파르두스 후작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수비테오 황제가 어깨를 넓게 펴며 아이를 내려다봤다. 파르두스 후작은 비둘기가 가슴 털을 부풀리는 꼴 같다고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

레오니에와 수비테오 황제는 서로를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황제를 응시했고, 황제는 아이가 언제 먼저 입을 열지 아주 작심하고 기다렸다. 그가 조금 더 아량이 넓었다면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비테오 황제는 그 정도의 위인이 되지 못했다.

“……아저씨가 황제?”

레오니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라는 호칭에 지켜보던 몇몇 귀족들이 사색이 되었다. 누군가는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까지 냈다.

“황제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배웠어요.”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그런가?”

그제야 황제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사생아라곤 해도 엄연히 보레오티인데, 그 입에서 설마 자신의 찬양하는 말이 나올 줄은 기대조차 못했다.

“짐이 바로 제국의 황제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나긋한 목소리로 저를 소개했다. 펠리오만 상대했던 터라 레오니에가 상대적으로 무척 약해 보였다. 제 입맛대로 가지고 놀며 위엄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는 동시에 귀족들에게 저의 인자함을 남길 수도 있고.

“연회는 어떠했는가?”

수비테오 황제가 선심 쓰듯 물었다.

“재미 하나도 없어.”

아기 맹수가 냅다 똥을 던졌다.

“먹을 것도 없고, 놀 것도 없고…….”

레오니에는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했다. 깐깐하게 걸고넘어지는 모습이 성질 고약한 시부모 뺨칠 정도였다. 수비테오 황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겁 없는 아기 맹수의 행보에 지켜보는 사람이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누군가가 제발 누가 좀 말리라고, 어서 공작님을 찾아 데려오라고 소리까지 냈다.

“그리고 나 원래 이 시간에 코오, 자는데.”

레오니에가 두 손을 베개처럼 만들더니 제 머리에 대고 잠자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연회장이 싸하게 얼어붙었다. 지금 레오니에가 한 말은, 수비테오 황제가 자신을 이 시간에 부른 것을 명백하게 탓하는 것이었다. 황실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수비테오 황제의 이마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만만하게 봤던 것에게 된통 당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 떠들던 레오니에가 문득 말을 멈췄다.

“……나 집에 갈래.”

집에 가서 인형 안고 잘래.

“아저씨보다 인형이 좋아.”

우리 아빠가 사 준 거! 두서없는 한마디를 끝으로, 아빠에게 가겠다며 레오니에가 손을 흔들었다.

“황제 아저씨, 빠빠.”

경악스러울 만큼 무례한 언행이었다.

“저, 저……!”

수비테오 황제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모욕적이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무례합니다!”

그때 시종이 레오니에한테 소리쳤다.

“아무리 못 배우셨어도 제국의 황제 폐하께 그런 언동이라니요!”

불호령이 떨어지자 레오니에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만 되었다.”

수비테오 황제가 손을 들어 시종을 말렸다. 시종은 씩씩거리는 숨을 겨우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어린 것의 실수이다. 이런 것 하나 이해하지 못하면 어른도 아니지.”

“송구하옵니다.”

말리는 황제의 표정은 아까보다 나아져 있었다. 저를 위해 나선 시종의 행동이 나쁠 리가 없었다.

“…….”

레오니에는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아이가 놀라지 않았느냐.”

황제가 허리를 살짝 낮췄다. 정작 무릎은 굽힐 의지가 없어 보였다.

“괜찮으냐.”

손을 뻗으며 아이를 살폈다.

“으, 으으…….”

레오니에의 턱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이 동산처럼 쭈욱 올라 윗입술을 살짝 덮었다.

“소, 소리쳤어…….”

레오니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으아아앙!”

연회장 천장까지 닿을 커다란 울음이 터졌다. 깜짝 놀란 황제가 내밀었던 손을 멈칫하며 거뒀다.

“윽!”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으앙! 아아아앙! 아빠아아!”

“윽!”

“커헉……!”

“그, 그만……!”

수비테오 황제만이 아니었다.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 너머로, 고통스러운 비명이 섞이기 시작했다. 소리를 치던 시종도, 주변에서 구경하던 귀족들도,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도. 그들 모두 목이나 가슴 언저리를 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형용할 수 없는 날카로운 것이 자신들의 목숨, 생명 그 자체를 위협했다.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공포였다.

“으아앙! 아빠아아!”

아이가 자지러질수록, 등 뒤로 황금빛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안개처럼 희뿌연 것이 점점 기묘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약간은 흐릿하고,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짐승의 입. 그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섬뜩한 무언가.

보레오티의 상징.

맹수의 송곳니였다.

* * *

‘송곳니를 쓸까 하는데.’

연회에 가기 전. 레오니에는 저를 연회에 초대한 황제에게 큰 엿을 먹이고자 깽판을 계획했다. 그리고 개중 하나를 펠리오에게 물어봤다.

‘어떻게 생각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으응, 그러니까…….’

아기 맹수는 발표를 시작했다. 상황을 예측해 보고, 여기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 거고, 혹시 모를 변수와 그 모든 걸 고려하였을 때 나타날 최종 결과를 꼼꼼하게 설명했다. 또 다른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회사 생활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해 봐.’

잠시 고민하던 펠리오는 의외로 쉽게 허락해 줬다.

‘그래도 돼?’

‘하고 싶다며.’

확실히 깽판 치려면 그 정도 규모는 해야 하지 않겠냐며 펠리오가 말했다.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황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리고 그간 농담처럼 말한 역성혁명이 진심이었음을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나 아직 송곳니도 서툴고, 그래도 일단은 황실이니까…….’

용감하게 포부를 밝혔지만,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았다. 괜히 깽판 치겠다고 설치다가 보레오티가 책잡히면 아빠한테 너무 미안했다.

‘문제없어.’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아이는 제 왼쪽 귀에 닿은 단단 폭신한 흉근 너머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에 안정을 느꼈다.

‘원래 자식이 실수하면, 그 뒷감당은 부모가 하는 법이야.’

딸아이가 뭘 느끼는지도 모르는 채, 펠리오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주며 말했다.

‘그런데 송곳니가 실수는…….’

실수라기엔 너무 고의성이 짙고, 효과도 너무 잔인했다.

‘실수야.’

아빠 맹수가 오만하게 말했다.

‘실수로 만들 수 있어.’

그러고는 레오니에의 깽판 계획에 아주 조금이나마 동참해 주기로 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그냥 도와줄 것이지, 레오니에가 투덜거리면서 그 조건이 무어냐고 물었다.

‘이걸로 한번 확인해 보자.’

펠리오는 연회장 깽판 계획을 레오니에가 송곳니를 얼마나 잘 다루게 되었는지 확인해 볼 시험으로 결정했다.

‘흐트러지면 안 돼.’

레오니에는 완전한 맹수의 송곳니를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 여전히 어설프고 불명확한 형체였다. 하지만 전보다 오랫동안 네 개의 송곳니를 유지했고, 다룰 수 있는 힘의 범위도 확연히 늘어났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폭주하지 않는 선에서, 레오니에는 최대한 송곳니의 힘을 끌어올렸다.

어느새 가짜 울음도 잊어버린 채, 레오니에는 맹수의 송곳니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넓은 연회장을 가득 채운 황금빛 살기는 아기 맹수가 제어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레오.”

그때, 아이의 몸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들었다.

“천천히.”

송곳니를 집어넣어.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동시에 새빨간 송곳니가 연회장을 휩쓴 황금빛 송곳니를 감싸며 진압하기 시작했다.

“잘했어.”

폭주하지 않아 잘했고, 시험을 통과해서 잘했다.

“착하지?”

“아빠아아…….”

“그래, 무서웠지?”

어느새 송곳니를 거둔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품에 와락 안겼다.

“별로 안 무서웠는데?”

그리고 아빠에게만 들리도록 몰래 속닥거렸다. 펠리오는 아이의 머리를 가슴팍에 끌어당기며 조용히 하라고 중얼거렸다.

“잇힝!”

흉근에 짓눌린 아이의 입가가 헤벌쭉 올라갔다. 펠리오가 까불거리는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조용하란 뜻이었다. 이젠 아빠가 나설 차례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펠리오가 바닥에 쓰러진 수비테오 황제를 살폈다. 살펴만 봤다.

펠리오는 황제를 부축할 손조차 내밀지 않았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괜찮은지 물어만 봤다. 결국 수비테오 황제를 부축한 건 조금 먼 곳에 있던 시종들이었다. 송곳니에 꿰뚫렸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몸을 추슬렀다.

“이, 이게……!”

부축을 받아 일어나긴 했지만, 조금 전까지 제 목숨을 위협했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황제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입에선 침까지 흘러나왔다. 그래도 황제는 가까이 있던 것 치고는 나았다. 바로 옆에 있던 시종은 눈을 뜬 채 기절했다. 심지어 오줌까지 지렸다.

“아이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시, 실수라니……!”

수비테오 황제가 소리쳤다. 굳어 버린 혀 탓에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자칫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 정도론 안 죽습니다.”

레오니에가 최대한 조절해서 겁만 준 걸, 펠리오는 멀리서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제 딸이 폐하와 있는 겁니까?”

펠리오의 물음에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어디로 갔나 찾아보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송곳니의 기운을 느껴서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폐하와 함께 있을 줄이야…….”

말을 마친 펠리오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슬그머니 노려봤다.

“왜 누구도 내게 이 일을 알리지 않은 것이지요?”

겨우 몸을 추슬렀던 귀족들이 흠칫하며 겁을 먹었다. 지금 펠리오는 송곳니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조금 전 레오니에의 ‘실수’보다 훨씬 흉포한 것이 전신을 휘감았다.

누가 봐도 레오니에가 큰 잘못을 저지른 상황이다. 그런데 분위기는 황제와 이를 방관한 귀족들의 잘못으로 몰아지는 중이었다.

오직 딱 한 명.

“누가 말씀 좀 해 주시죠.”

펠리오 단 한 사람 때문에.

“고작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내 딸이, 왜 나 없이 이 많은 사람 속에서 홀로 있었던 건지. 제대로 된 설명이 없으면…….”

피의 연회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 주겠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보레오티 공작.”

어느새 나타난 파르두스 후작이 끼어들었다. 그는 송곳니에 꿰뚫리지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후작은 먼저 황제의 안색을 살핀 뒤, 펠리오에게 지나치다며 점잖게 타일렀다.

“공작도 잘못은 했습니다.”

그는 펠리오가 아이가 홀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둔 점을 지적했다.

“폐하께선 그저 어린 영애께 연회에 와 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던 것이 다입니다. 진짜 잘못이라면 영애께 언성을 높인 시종의 잘못이지요.”

파르두스 후작은 바지를 적신 채 기절한 시종에게 덤터기를 씌웠다.

“두 분은 그만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연회는 이미 엉망이 되었다. 설령 다시 연회를 시작한다고 해도, 보레오티 부녀가 머무른다면 누구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할 거다. 마음 편히 떠들지도 못할 테고. 그러면 파르두스 후작은 다양한 정보를 얻어내지도 못한다.

“영애께서도 졸린 것 같으시고.”

파르두스 후작의 말에 펠리오에게 안겨 있던 레오니에가 움찔했다. 아빠의 가슴을 느끼며 히죽거리던 아이는 뒤늦게 졸린 척 연기했다.

“……그렇게 하지요.”

펠리오는 황제에게 그만 가 보겠다고 짧게 인사했다.

“나중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단순한 인사말일 뿐이었다. 그러나 수비테오 황제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마치 ‘나중에 단둘이 제대로 이야기해 보자고.’라고 협박하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도 펠리오는 그런 의도를 담기는 했다.

정적에 휩싸인 연회장에 펠리오의 구두 소리만이 뚜벅뚜벅 크게 울렸다. 어느새 연회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페가 두 부녀를 반겼다.

그렇게 세 사람이 나가려던 찰나.

“여러분.”

낭랑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또랑또랑 채웠다.

펠리오의 품에서 내려온 레오니에가 치맛자락을 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보스그루니 백작께 배운 우아한 몸짓은 조금 전까지 빽빽 울며 송곳니를 폭주했던 맹수로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 이 뜻깊은 자리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 너무도 영광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 사냥하려고 아주 그냥 벼르고 왔다는 거야.

“보레오티 공작님의 하나뿐인 딸, 유일한 후계자.”

이런 나한테 감히 천한 출생이니, 사생아니. 그딴 소문을 퍼트려?

“레오니에가 인사드립니다.”

내 이름 똑똑히 기억해 둬라.

“다음에 또 뵈어요.”

다음은 곧 끝일 테니.

레오니에가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뒤돌아섰다. 펠리오는 그런 딸을 세상에서 가장 대견하단 눈으로 바라봤다.

* * *

“와아아…….”

연회장 바깥 발코니에 대피 중이던 카니스가 헛웃음만 피식피식 내뱉었다.

“일곱 살 보면서 오금이 저리긴 처음이야.”

내가 저 시종처럼 지릴 뻔했다고 카니스가 진심으로 고백했다.

“괜히 보레오티가 아닌 거겠지.”

아비페르가 오싹한 팔뚝을 벅벅 쓸었다. 연회장 바깥까지 나왔는데, 거기다 문까지 닫았는데도 레오니에의 송곳니는 이곳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숨이 멎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바로 직전까지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진땀 흘릴 만큼 아찔한 공포였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아비페르는 자신들 부부 말고도 함께 대피한 사람들을 살폈다. 모두 레오니에가 사탕을 쥐여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 덕에 정말 운 좋게 도움을 받아 대피한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오싹했다.

‘맹수의 송곳니를 쓸 거니까, 발코니로 도망쳐요.’

만약 레오니에가 준 사탕에 적힌 쪽지가 아니었다면, 자신들도 저 안에서 숨통을 꿰뚫는 공포에 몸을 떨며 쓰러졌을 거다. 그 만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설마 저게 다 계획된 겁니까?”

오르티오 후작 부군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아내에게 물었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끼잉끼잉 훌쩍였다.

“아까 보레오티 영애께서 하신 인사 들었지요?”

“우리 남편님은 귀도 좋지.”

“고마워요, 여보.”

칭찬받은 후작 부군이 목을 쓸며 수줍게 인사했다.

“확실히 나도 놀랐어요.”

레오니에가 일부러 만만한 아이처럼 행동한 것도. 혼자 돌아다니며 황제의 눈들을 끌어모은 것도. 송곳니를 마음껏 내밀기 위해 방해되는 자신들을 내쫓은 것도. 거기다 황제에게 송곳니를 겨눈 것까지.

이 모든 게 저 아이의 계획이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어요.”

오르티오 후작이 남편을 도닥이며 말했다. 이 와중에 제게 기대는 남편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도 어서 보레오티 부녀처럼 빨리 연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황후 폐하께선……!”

그러나 헤스페리 후작은 제 딸이 걱정이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말했다.

“제가 그분이 연회장을 나서는 걸 보았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제가 이곳 발코니로 들어온 마지막 사람입니다.”

혹시나 해서 위를 봤는데, 황후가 시녀와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그제야 헤스페리 후작의 얼굴 위로 안도가 서렸다.

사실, 우르마리티 백작은 파르두스 후작이 미리 알려 주고 대피시킨 걸 보았다. 여기서 파르두스 후작의 정체를 아는 건 그가 유일했다. 보레오티와 파르두스 두 가문의 관계는 기밀이었기에 함부로 밝혀서는 안 되었다.

“그나저나 제대로 깽판을 치셨네요.”

보스그루니 백작이 즐겁게 웃었다.

“웃을 일은 아닙니다.”

케라타 자작은 혹여 이 일로 레오니에한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어찌 되었건 상대는 제국의 황제였으니까.

“공작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보스그루니 백작이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과연 펠리오가 이를 어떻게 대처할지, 케라타 자작은 그 점이 궁금했다.

* * *

연회장을 나서는 길.

“아빠, 오늘 연회에 초대된 사람 중에 정말 임산부 없었지?”

“없었어.”

“지병을 앓던 사람도 없었지?”

“애초에 그런 사람들은 여기 참석 안 해.”

“내 송곳니로 대소변 지린 거 말고 아픈 사람 진짜 없는 거지?”

레오니에는 제 송곳니 깽판으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깽판 계획을 짠 직후, 펠리오에게 초대 명단에 오른 중 사람 중 몸이 약하거나 임신한 사람은 없는지 확인을 부탁했다. 맹수의 송곳니는 사람의 생명 그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에 자칫했다간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겁이 날 거면 쓰지를 말든가.”

펠리오는 이제 귀찮으니 되었다며 아이의 등을 몇 번 두드렸다.

“아빠, 있잖아아.”

“왜, 또.”

“실은 나 아까, 황제한테 반말했다?”

레오니에가 킥킥 웃었다. 실제로 아이는 황제에게 단 한 번도 말을 높이지 않았다. 은근슬쩍 말을 낮추며 놀렸다.

“요 영악한 것.”

펠리오가 칭찬했다.

“근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내 깽판을 어떻게 무마할 거야?

믿고 설치긴 했는데, 과연 아빠가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물어보던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이제 진짜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깽판을 치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공작님이 알아서 하시지 않을까요?”

“루페 아저씨는 왜 대답에 성의가 없어요?”

평소라면 먼저 나서서 설명해 줄 사람이 유난히 축 처져 있다.

“기운이 없을 수밖에요…….”

파르두스 후작의 막내로 태어나, 펠리오와 연을 쌓고 그의 비서가 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고 자부하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오늘이 그 정점을 찍었다. 황제에게 송곳니를 겨누다니. 루페는 심장이 목구멍을 통과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남의 돈 벌기가 쉬운 게 아니죠.”

레오니에가 다 안다며 동정했다. 닿지도 않는 짧은 팔을 허공에다 움직이며 토닥이듯 흔들었다.

“아가씨…….”

루페가 제 노고를 이해해 준 아가씨에게 깊이 감동했다. 기실 그가 오늘 이렇게 힘든 건 다 레오니에 탓이었지만 이미 그건 다 까먹어 버렸다.

“근데 여긴 어디야?”

레오니에가 주변을 둘러봤다. 연회장에 들어갈 때는 지나오지 않은 길이었다. 벌레 우는 소리가 찌르르르 들리는 여름 정원이 대리석 기둥을 세워 만든 회랑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지름길.”

펠리오가 말했다.

“일전에 파르두스 후작이 가르쳐 줬지.”

“그런데 원래는 황족이 아니고서야 여길 지나가는 건 금지입니다.”

루페의 설명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발설해선 안 될 비밀인 듯했다.

“왜냐하면 여기 근처에…….”

“공작, 이에요?”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회랑 기둥 뒤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예기치 못한 등장에 루페는 많이 놀랐지만, 곧 침착하게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펠리오는 이미 기척을 인지하고 있어서 일말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레오니에도 마찬가지였다.

“연회장에서 나온 거예요?”

다만, 곧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의 정체를 알고는 깜짝 놀랐다.

“황녀 전하.”

펠리오도 놀랐는지 드물게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스칸디아 황녀는 모후인 티그리아 황후를 빼닮은 아름다운 소녀였다. 풀어 내린 은발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조심히 움직이는 행동은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스칸디아 황녀 전하.”

“응. 보레오티 공작.”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펠리오가 인사를 올렸다. 황제에게 했던 것보다 더 예의 바른 자세였다.

“그리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머님이 걱정되어서…….”

스칸디아 황녀는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화려한 불이 켜진 건물을 가리켰다.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는지, 떠들썩한 소리가 제법 멀리 걸어온 이곳까지 들렸다.

“황비도, 왔다고 해서…….”

황녀는 우시스 황비와 함께 있을 티그리아 황후가 걱정되어 몰래 빠져나온 거였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바로 그 증거였다.

“혼자 오셨습니까?”

물어보나 마나였다.

“응.”

그렇다고 대답하는 스칸디아 황녀는 괜히 오른발을 왼발 뒤로 숨겼다.

“……공작의 딸인가요?”

스칸디아 황녀가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엉거주춤 바닥에 내려왔다. 그리고 예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오니에 보레오티 입니다.”

“스칸디아 아킬라 벨리우스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인사를 마친 두 아이가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루페.”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펠리오가 스칸디아 황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황녀 전하를 모셔다드리고 오마. 먼저 마차에 가 있어라.”

“예. 자아, 아가씨.”

루페가 레오니에를 대신 품에 안았다. 어른의 품에 벌떡 안기고도 두 아이는 서로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빠빠.”

레오니에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스칸디아 황녀가 눈을 끔뻑거렸다.

“……빠빠?”

“잘 가라는 인사입니다.”

친구끼리 하는 말이라며 펠리오가 가르쳐 줬다. 친구라는 말에 황녀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빠, 빠빠아.”

손을 흔들며 인사하니, 레오니에가 빙그레 웃었다.

두 아이는 이제 서로 제 갈 길을 갔다. 레오니에는 루페의 품에 안겨 먼저 마차에 올라탔고, 스칸디아 황녀는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많이 졸리시죠?”

마차에 올라탄 루페가 레오니에를 조심히 내려 줬다. 레오니에는 하품을 하며 꾸벅거렸다. 루페가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제 무릎 위에 머리를 베게 했다.

그리고 겉옷을 덮어 줬다.

“있죠, 아저씨…….”

“예, 아가씨.”

“아까 그 황녀요…….”

“스칸디아 황녀 전하 말씀이신가요?”

“예뻤어요…….”

솔직한 감상평에 루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후 폐하를 많이 닮으셨지요.”

“으응…….”

“물론 아가씨께서도 아름다우십니다.”

“아는데…….”

알고 계십니까? 루페가 당황하던 차였다.

“왜 드레스를…….”

그 말을 끝으로 레오니에는 눈을 감았다. 그 탓에 루페는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 * *

“왜 드레스를 입으셨습니까?”

펠리오가 스칸디아 황녀를 데려다주며 물었다.

“어머님이 입으라고 하셨어요.”

스칸디아 황녀는 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셨어요.”

“…….”

“나보고 미안하대요.”

“미안해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응…….”

스칸디아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님은 제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늘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고, 저와 형님을 진심으로 아껴 주신다.

“나도 알아요.”

“그럼 되었습니다.”

펠리오는 황녀를 내려다 주었다. 그들의 앞에 조그마한 궁이 있었다. 2 황자와 1 황녀가 사는 궁이었다. 마침 궁 밖으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보였다. 모습을 감춘 황녀를 찾는 것 같았다.

“이젠 저를 보고 울지도 않으시고.”

보레오티 공작이 황녀를 찾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제 나는 아홉 살인걸요. 겨울이 지나면 열 살이에요.”

자신은 어리지 않단 뜻이었다. 정작 살짝 삐친 투로 중얼거리는 모습은 어린 애 그 자체였다.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황녀가 레오니에와 겹쳐 보인 탓이었다.

“……그럼 갈게요.”

황녀는 아까 레오니에한테 했던 것처럼, 펠리오에게도 손을 흔들며 ‘빠빠’라고 인사했다. 펠리오도 손을 흔들어 줬다. 대신 ‘빠빠’라는 인사말은 하지 않았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스칸디아 황녀의 눈을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기쁜 미소가 그려졌다.

티그리아 황후를 꼭 빼닮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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