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연회준비 (11/51)

#11. 연회준비

완성된 시계가 도착한 건 연회 전날이었다.

“아가씨.”

똑똑, 하고 트라가 레오니에를 찾았다. 내일 황궁에 입고 갈 드레스 등을 점검하던 레오니에가 코니를 바라봤다. 뜻을 알아챈 코니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 온 것입니다.”

트라의 손에는 조그마한 벨벳 상자가 들려 있었다.

“완성됐구나!”

레오니에가 상자를 받으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슬아슬했지만 결국 제시간에 딱 맞춰 만든 모양이었다.

일단 확인 차, 상자를 살짝 열어 봤다.

“어이구야! 요 예쁜 것!”

완성된 시계를 확인한 레오니에가 입술을 뽀뽀하듯 내밀며 기쁨을 표현했다. 아주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서둘러 닫았다.

“이게 그것인가요?”

트라가 물었다. 레오니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무사히 완성된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이제 아빠한테 줄 거예요.”

“주인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면 좋겠다…….”

레오니에가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사용인들이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그리고 주인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아빠가요?”

마침 줄 것도 있겠다, 레오니에는 참으로 시기적절한 호출이라 생각했다.

“이거 들어주세요.”

레오니에가 상자를 트라에게 맡겼다. 중요한 물건인지라 혹시라도 걷다 넘어지면 곤란했다. 트라는 알겠다며 안주머니 깊숙이 상자를 넣었다.

복도를 걷는 아기 맹수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내일 황궁에 가는데도 즐겁네.’

드디어 연회가 내일이었다.

황제가 고의로 저를 부른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대가로 황제를 엿 먹일 방법도 생각해 뒀고, 펠리오의 허락도 받았다. 거기다 선물로 줄 시계도 완성되어 도착했다. 괜히 꿀꿀해질 필요가 없었다.

“발걸음이 가벼우시네요.”

뒤따라가는 트라가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처음 뵈었을 때보다 점점 아이처럼 명랑해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거야 기분이 좋으니까요.”

“콧노래도 듣기 좋습니다.”

“그럼 내가 특별히 노래도 불러 줄게요.”

이왕 흥이 오른 김에, 레오니에는 특별히 즉흥곡을 불러 주기로 했다.

“복근만 짱짱해선 남자가 아냐! 갑바만 탱탱해도 남자가 아냐, 난!”

외모도 꽤 밝혀.

“쿨럭! 커헉!”

깜짝 놀란 트라가 숨이 넘어갈 만큼 콜록거렸다. 욕망을 숨기기는커녕 검열 없이 드러낸 노래에 너무 놀라서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아, 아가씨…….”

더는 부르시면 안 된다고 트라가 서둘러 말렸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노래에 심취한 레오니에는 트라의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크게 냈다.

“앉아 있을 땐 허벅지 불끈, 일어난 뒤태 보고 나는 코피가 빵빵!”

난 근육이 좋아.

노래에 맞춰 사뿐거리는 발걸음이 쾌활했다.

‘주인님…….’

트라가 펠리오를 동정했다. 정말 아이를 키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어머니인 카라에게 효도했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그리고 노래가 절정에 들어섰다.

통통 튀던 걸음을 멈춘 레오니에가 이목구비를 얼굴 한가운데로 집합시켰다.

“우리 아빠가 누구게!”

도대체 어떻게 그런 근육을 키우셨대.

순간 레오니에의 등 뒤로 투명한 바지를 입은 고릴라가 겹쳐 보였다. 트라는 왜 하필 떠올라도 그런 동물이 떠오르는지 몰랐으나, 어쨌건 그 묘한 동물이 아가씨와 닮아 보였다.

“……크으, 완벽했다.”

완곡한 레오니에가 코밑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지르며 수줍어했다. 즉흥곡치곤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것 같았다. 일기에 적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트라, 어땠어요?”

“저, 아가씨.”

“별로였어요?”

“솔직히 정말 대단했습니다.”

음정이나 박자는 골 때릴 정도로 신선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트라가 기어코 레오니에를 붙잡아 뒤를 돌아보게 했다. 거기엔 펠리오가 있었다. 그리고 함께 뒤따르던 손님 두 사람도 함께였다.

“와 씨 봐라!”

깜짝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 질렀다.

“다 불렀냐.”

펠리오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시선으로 레오니에를 응시했다. 웬수도 저런 웬수가 없단 눈빛이었다. 속이 답답해 흘러나온 한숨은 바닥을 짓눌렀다.

손님들은 각각 손등과 부채로 입가를 막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만 봐도 저들이 웃음을 꾹 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빠도 참!”

레오니에가 볼을 부풀렸다.

“놀랐잖아!”

인기척 좀 내라며 투덜거렸다.

“그런 노래는 방에서 혼자 불러라. 남 들려주기 민망하다.”

“아닌데? 난 당당한데?”

레오니에가 살찐 비둘기처럼 가슴을 넓게 펴며 으스댔다. 펠리오는 한탄스러웠다. 아마 세상에서 저만큼 육아로 고생하는 부모도 없을 거였다.

“수치심 좀 가져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라지만, 오늘은 눈에 넣으면 많이 아플 것 같았다.

“보스그루니 백작!”

아빠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듣던 레오니에가 손님들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까스로 웃음을 삼킨 노부인이 잔기침을 일부러 콜록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간 잘 지내셨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레오니에는 키도 컸고, 살집도 많이 붙었다. 작년 겨우내 보았던 비쩍 마른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제 나이대의 아이처럼 보였다. 보레오티 가문이 그간 아이를 얼마나 정성껏 돌봤는지 알 수 있었다.

보스그루니 백작은 진심으로 기뻤다. 노부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아주 대범하시군요.”

한참 레오니에가 보스그루니 백작과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중, 저 위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레오니에가 목을 한참 뒤로 젖히고 나서야 얼굴이 보였다. 덩치가 북부 산맥만큼 커다란 노신사가 허리를 굽혔다.

“레오, 우르마리티 백작이다.”

펠리오가 소개했다.

“아르티크라고 합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손바닥이 내밀었다. 레오니에의 얼굴을 다 가릴 만큼 거대했다. 레오니에는 그 위에 제 조그만 손을 착 올렸다. 큼지막한 바위에 붙은 작은 단풍잎 꼴이었다.

“안녕하세요, 레오니에라고 해요.”

“영애를 뵈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의 노래를 들은 것도요, 우르마리티 백작이 껄껄 웃었다.

“근육은 대단한 것이지요.”

노신사는 레오니에가 불렀던 노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 역시 옷감이 찢어질 것처럼 탄탄한 근육을 자랑했다. 레오니에가 빵긋 웃었다. 제 노래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은 누구든 좋은 사람이었다.

‘근육이 있으면 더 좋고.’

그런 의미에서 우르마리티 백작은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두 분 다 저택에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레오니에가 뒤늦게 저택에 방문한 이유를 물었다. 수도에서 골수 귀족을 둘이나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저희도 내일 황실 연회에 참석합니다. 미리 인사를 드리러 왔답니다.”

보스그루니 백작이 말했다.

“이번 연회에는 북부 골수 귀족 전원이 초대를 받았더군.”

펠리오는 이 사실이 영 탐탁지 않았다. 감히 북부의 귀족을 황제 따위가 오라 가라 부르는 게 무척 불쾌했다.

“그럼 케라타 자작도? 플로도 왔어?”

레오니에가 눈을 반짝였다. 플로무스는 안 본 지가 오래라 살짝 그리웠다.

“그래.”

“근데 자작 아저씨는 왜 안 왔어?”

“내가 안 불렀어.”

펠리오가 저택에 부른 건 보스그루니와 우르마리티 백작 둘뿐이었다. 따로 전할 말이 있다고 말하니, 레오니에가 눈치껏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보스그루니 백작이 먼저 저택을 나섰다.

“시계가 왔다지?”

펠리오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난 모르는 게 없어.”

“내 코털 개수는 모르잖아.”

“한마디를 안 지지.”

기어코 펠리오가 구레나룻을 잡아당긴 뒤에야 레오니에가 입을 다물었다.

“영애께선 정말 유쾌하시군요!”

우르마리티 백작이 호걸처럼 웃었다.

* * *

시계 증정식은 펠리오의 집무실에서 열렸다.

“근데 백작은 왜?”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자리에 루페와 트라가 있는 건 이해가 가지만, 초면인 우르마리티 백작이 함께하는 건 좀 이해가 안 갔다.

“백작이 손목시계를 팔 거야.”

펠리오가 이어 말했다.

“내가 이 시계를 차고 연회에 가면 어떻게 될까?”

“아아!”

잘난 척하는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뜻을 이해했다. 완벽한 외모의 보레오티 공작이 생전 처음 보는 시계를 손목에 찼다. 얼마나 멋있는지 설명하는 건 입 아픈 일이었다. 연회 직후, 손목시계를 찾을 인간들이 넘쳐날 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러니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시곗줄 특허권부터 시작해 시계 자체 생산을 위한 기술 인력 모집, 판매처 확보 등등, 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이 모든 걸 한 단어로 압축했다.

“우르베스페 상단!”

보레오티 공작은 서부의 우르베스페 상단의 숨겨진 실소유주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는 건 우르베스페의 직계 가문인 북부의 우르마리티였다.

눈앞에 있는 근육 할아버지는 우르마리티 가문의 주인이었다.

“백작이 돕는 거군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허허……!”

우르마리티 백작이 헛숨처럼 감탄을 자아냈다.

설마 조금 전 펠리오의 짧은 한마디로 이 모든 걸 전부 알아내다니. 영특하단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보통 영민하신 게 아니야.’

우르마리티 백작은 레오니에한테서 펠리오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두 부녀는 얼굴만이 아니라 뛰어난 재능도 빼닮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백작은 그리운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해 줬다.

“그렇습니다. 저희 가문과 연결된 서부의 우르베스페 상단이 시계 제작과 유통, 판매 등에 관여할 예정입니다.”

“무척 바쁘겠네요.”

“저와 리코스 자작이 죽어 갈 예정이죠.”

백작이 껄껄 웃으며 농담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악덕 상사인 줄 알겠군요.”

펠리오가 비아냥거렸다.

“맞잖아요…….”

뒤에서 잠자코 듣던 루페 리코스 자작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는 얼마 전 월급 감봉으로 충성심이 살짝 비틀렸다. 그러건 말건 펠리오는 하등의 관심도 없었다.

“아빠, 나 이제 상자 연다?”

어른들 이야기가 슬슬 귀찮아진 레오니에가 벨벳 상자 뚜껑을 활짝 열었다.

“짜잔!”

둥글고 작은 시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중에 파는 회중시계보다 눈에 띄게 작은 크기였다.

“아빠한테 주는 선물!”

레오니에가 상자를 펠리오 쪽으로 밀었다. 상자 속 시계를 빤히 바라보던 펠리오가 손을 움직였다. 시계를 들어 올리는 펠리오의 손동작은 평소보다 느렸다.

매끄럽게 세공된 황금빛 외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음각으로 새겨 넣은 점잖은 문양이 도리어 고아함을 풍겼다. 크기는 일반적인 것보다는 상당히 작았다.

다음은 내관이었다.

내부는 일반 회중시계와 똑같았다. 새하얀 끄트머리에는 시각을 알리는 숫자 장식이 박혀 있고, 검고 가는 바늘이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손목을 감쌀 검은색 가죽 시곗줄이 위아래로 달려 있었다. 이 시곗줄이 히에이나 영애가 직접 재단한 가죽이었다.

“시곗줄은 벨트에서 착안했어.”

허리띠처럼 구멍이 뚫려 있고, 손목 크기에 맞춰 고리를 걸도록 만들었다.

“아빠, 손 줘 봐.”

레오니에가 직접 펠리오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줬다. 핏줄이 살짝 도드라진 피부 위로 차가운 금속이 얹어졌다. 검은 가죽 시곗줄은 굵은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세상에……!”

구경하던 루페가 크게 감탄했다.

“아가씨, 대단하십니다! 이거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근사하네요!”

“에헴!”

레오니에가 허리춤에 손을 댄 채 턱을 높이 추켜세웠다.

“근사하죠? 멋있죠?”

“공작님도 기쁘시죠?”

아가씨가 이렇게 훌륭하다며 루페가 제 일처럼 자랑했다.

“아빠, 어때?”

레오니에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물었다.

“……그냥 뭐.”

퉁명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아기 맹수가 삐친 숨소리를 드릉드릉 내었다.

펠리오가 손목에 찬 시계를 찬찬히 어루만졌다.

“봐줄 만해.”

봐줄 만했다. 너무 잘 만들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펠리오에게 시계는 보물 그 자체였다. 레오니에가 제게 선물한 것이니.

곧 펠리오가 시계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손목을 감싼 금빛 시계와 검은 가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음각으로 새긴 무늬를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은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나긋나긋했다. 단순한 동작인데도 보는 사람이 아찔할 만큼 요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

저도 모르게 입 벌리고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우리 아빠야! 아빠라고!’

레오니에가 타락할 뻔한 저의 영혼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몰래 흘린 침도 닦았다.

“공작님께서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펠리오의 의중을 통역해 줬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아.”

펠리오가 아닌 척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사뭇 신중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가보로 삼을 정도는 되네.”

루페와 트라, 우르마리티 백작이 소리 없는 탄식을 내질렀다. 펠리오는 이제 자신이 딸 등신이라는 걸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자칭 상식인 루페도 동의했다. 우르마리티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 식사는 신경 쓰라 일러 두겠습니다.”

트라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보레오티의 새 가보가 탄생한 날을 마땅히 축하해야 했다.

“이 바보 아저씨들…….”

레오니에가 한심하단 눈으로 세 남자를 바라봤다.

“이걸 무슨 가보로 삼아!”

그래도 기분은 좋은지라, 레오니에가 몸을 배배 꼬며 퉁명스레 소리쳤다.

“하여튼 아빠가 가장 주책이야. 그게 뭐 대수라고 가보로 삼는담. 흥,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나중에 뽀뽀 한 번 해 줄게!”

한참을 흥흥거리던 레오니에가 결국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가 시계를 좋아해 줘서 다행이었다. 판매고 뭐고, 레오니에한텐 그게 가장 중요했다.

어쨌건 좋은 평가를 받은 손목시계는 보레오티 가문과 우르마리티 가문, 우르베스테 상단이 셋이서 협업하여 상품으로 판매할 계획을 갖췄다.

“그럼 나는 뭐 해?”

“내가 대신 벌어다 주는 돈을 잘 받아먹는 거?”

딱히 네가 할 일은 없단 뜻이었다. 실제로도 펠리오는 이 사업으로 벌어들일 돈을 전부 레오니에 이름으로 돌려둘 생각이었다.

“아빠, 사랑해!”

예상대로 아기 맹수는 감격에 겨워 울컥했다.

“하지만 나중엔 네가 이 사업을 이어받게 할 거다.”

나중에 후계 수업 중 하나로 가문의 사업 하나를 맡겨 볼 심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손목시계는 아주 좋을 때 나왔다.

“그럼 저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르마리티 백작의 팔에는 산더미 같은 서류가 들려 있었다. 내일 연회가 끝나자마자 해치워야 할 업무들이었다.

“백작, 몸 생각하면서 하세요.”

배웅을 따라 나온 레오니에가 걱정스레 말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 영애를 뵙게 되어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저도요.”

“다음엔 저희 저택에도 한 번 들러 주십시오.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보다 훨씬 맛있는 간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네에!”

레오니에가 해맑게 대답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떠나고,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손을 잡고 복도를 가볍게 걸었다.

“우르마리티 백작은 좋은 할아버지 같아.”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아빠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야.”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고 펠리오가 말했다. 레오니에가 말없이 미소지었다. 그건 무척 신뢰하고 믿는다는 펠리오 나름의 표현이었다. 아기 맹수는 이제 아빠 맹수의 속뜻을 알아맞히는 정도야 누워서 슈크림 먹기였다.

‘근데 누워서 슈크림 먹으면 다 흘리겠지?’

하릴없는 생각에 정신 팔리던 찰나였다.

“레오.”

조그만 몸뚱이가 부웅 공중에 떠올랐다. 어느새 아빠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왜?”

레오니에가 익숙하게 아빠의 목에 팔을 두르며 싱글벙글 웃었다. 펠리오가 이렇게 불쑥 저를 안아 올리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가 놀랄 게 있을까?’

문득 떠오른 호기심은 꽤나 싱거웠다.

‘이제 없을 것 같은데.’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소설 속 세상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은 평생 놀랄 일은 다 끌어모아 쓴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마음에 들었나?”

펠리오가 아이의 등을 두세 번 도닥거리며 물었다.

“응.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

“나쁜 사람이야?”

레오니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느낌은 전혀 못 받았다. 맹수의 송곳니가 발달한 뒤로, 아기 맹수의 예감은 어느 때보다 정확했다.

“그건 아니고.”

펠리오가 이어 말했다.

“어쨌건 다행이군.”

“왜?”

“백작이 네 외조부거든.”

레오니에의 눈과 콧구멍이 동시에 커졌다. 눈알은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고, 콧구멍은 산소 공급을 위해 한참을 벌렁거렸다.

그러기를 아주 잠깐. 레오니에가 후우, 하고 겨우 숨을 내쉬었다. 덩달아 앞머리가 흔들거렸다.

“아빠는, 정말, 진짜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레오니에가 겨우 한마디 했다.

“……배려라는 게, 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집에서는 그런 거 감추려고 안달인데!”

물론 감추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래도 황실 연회가 바로 내일인데, 거기다 우르마리티 백작을 바로 조금 전까지 만나고 헤어진 이 판국에 꼭 이야기해야 했을까.

“그래서 지금껏 비밀로 해 줬잖아.”

정작 펠리오는 당당했다.

“아빠 친척 없다며!”

“없어.”

“백작 할아버지는 고모부가 되는 거잖아!”

레오니에가 혹여 누가 들을까 소리 죽여 으르렁거렸다.

“고모님 돌아가시고 재혼했으니 남이지.”

지금 슬하에 있는 자식들도 레지나와 배다른 형제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전 고모부를 남처럼 말하는 펠리오의 눈에 악의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으휴.”

내가 아빠한테 뭘 바라.

“아빤 건강하게 장수하슈.”

괜히 효심 그득해진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 * *

연회 당일이 되었다.

제국 모든 귀족의 관심이 수도 황궁으로 쏠렸다. 무려 선황 사후 3년이 지나고 나서야 열리는 추모 연회이자, 황위에 오른 수비테오 황제가 주최한 첫 번째 연회였다. 무척이나 중요한 자리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보레오티 공작이 소중히 아끼는 영애도 참석한다.

당시 이 소식이 알려졌을 때, 많은 왈가왈부로 수도가 한참 떠들썩했다. 수비테오 황제가 어린 공작 영애를 황실 연회에 초대한 이유를 두고 많은 추측이 오갔다. 어린 영애를 빌미로 공작이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다느니, 자신의 첫 연회에 많은 이목을 집중케 하기 위해서라느니.

하지만 귀족들은 소문의 진위 따위야 상관없었다. 어쨌건 그들에게 황실과 북부의 대립은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물론 누구도 대놓고 그리 말하지 못했다. 황실보다 북부의 주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쨌건 그 유명한 보레오티 영애를 직접 볼 수 있으니, 이만한 기회도 없었다.

정작 그 보레오티는 조용하기만 했다. 연회 당일임에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평온했다. 황궁에 간다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조차 없었다.

맹수 부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의 신경은 연회가 아닌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우르마리티 백작 할아버지 이야기 좀 해 봐.”

낮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운 레오니에가 말했다. 품에는 까만 사자 인형이 안겨 있었다.

“어서 자라.”

재우러 온 펠리오가 동화책을 펼쳤다. 아이가 자기 전에 종종 읽어 주는 훈훈한 내용이 적힌 동화책이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읽지 못한 새것이었다.

“지금 푹 자야 연회에서 안 졸지.”

“가서 조는 것도 나의 깽판 계획 중 하나에 들어가는데.”

“차라리 오줌을 싸.”

여분의 속옷이랑 옷 정도야 챙겨 가면 된다며, 펠리오가 쓸데없는 배려를 내비쳤다.

“이 아빠가 미쳤나…….”

레오니에가 얼음처럼 시린 눈을 했다. 황실을 엿 먹이겠다고 저 자신을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뭐, 농담이고.”

결국 펠리오가 동화책을 치웠다. 오늘도 훈훈한 동화책은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궁금하냐?”

“응!”

“뭐가 궁금한데?”

“다!”

아기 맹수가 눈을 반짝였다. 펠리오는 그런 아이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백작에게 가고 싶어?”

물어보는 말 속에 혹시, 하는 염려가 가득했다.

“아니야!”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이불까지 내치며 몸을 일으켰다.

“난 그냥 내 친모랑 그 가족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래! 내가 왜 아빠 곁을 떠나.”

절대 그런 거 아니라며 레오니에가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제야 펠리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재산도 보레오티가 더 많잖아.”

그거 받을 때까진 죽어도 보레오티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속물적인 이유 고맙다.”

“그러니 말해 줘. 어떤 분이야?”

“고모님을 많이 좋아하셨지.”

펠리오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너무 좋아해서…….”

그가 레오니에보다 한두 살 많았던 시절이었다.

“……고모님이 돌아가시고 한동안 방황을 많이 했던 거로 안다.”

“어라? 고모님이면…….”

“네 할머니.”

“아아…….”

돌아가셨구나.

레오니에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기가 조금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어제 펠리오에게 우르마리티 백작이 재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대충 짐작은 했다만, 막상 사실을 접하니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다.

“그럼 재혼한 사람은?”

“네 할머니 말동무였던 하녀.”

“우와!”

순간 레오니에의 머리에서 금단의 상상이 떠올랐다.

“하녀를 둘러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삼각 구도……!”

“이 불효막심한 녀석.”

펠리오가 정색했다. 그리고 레오니에가 이 이상 패륜과 불효가 뒤섞인 상상을 이어 가는 걸 막고자, 서둘러 대화 주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고모님은 원래 몸이 많이 약하셨어.”

레지나를 낳고 얼마 안 있어 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그 탓에 우르마리티 백작은 무척 괴로워했고, 자연히 태어난 레지나에게도 애정을 쏟을 여유 따윈 없었다.

“내 친모를 싫어했어?”

“그건 아니야.”

그저 당장 아이를 볼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른 우르마리티 백작은 레지나가 송곳니 때문에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지내게 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만남을 가졌다.

“레지나를 많이 좋아했어.”

어렸던 그는 백작과 레지나가 만나는 모습을 몰래 숨어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두 부녀는 언제나 밝은 햇살이 가득한 정원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걸 바라보는 어린 펠리오는 회랑 기둥 뒤, 그림자 속에 있었다. 소년은 그 모습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부모님과 단 한 번도 저런 관계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펠리오가 눈 끝을 살짝 비틀었다.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그때 느꼈던 쓸쓸한 감정이 함께 찾아왔다. 가슴 한구석이 아리는 이 기분이 ‘외로움’이라는 걸, 펠리오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

“아빠?”

조그만 체온이 톡, 하고 펠리오의 손등을 건드렸다. 차갑게 식어 가던 기분이 놀라운 속도로 온화하게 따뜻해져 갔다.

“왜 그래?”

레오니에가 갑자기 말이 없어진 펠리오를 빤히 바라봤다.

“쉬 마려우면 화병 빌려줘?”

“……쓸데없는 배려 고맙다.”

“싸고 씻어서 돌려줘.”

“됐다고.”

기가 막혔지만, 덕분에 우울했던 기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할아버지는 내가 그 사람 딸인 거 알아?”

“몰라.”

펠리오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 레오니에의 출생과 관련된 건 항상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했다.

“현재 레오 네 출생에 대해 아는 건 나를 제외하곤 딱 다섯뿐이야.”

가장 먼저 눈치챈 카라와 루페, 모노와 멜레스. 그리고 파르두스 후작.

“후작 할아버지가 결국 알았대?”

레오니에가 질색했다. 능글맞은 후작의 미소가 생생했다.

“근데 아빠.”

“왜.”

“백작 할아버지는 슬펐대?”

레오니에는 우르마리티 백작이 언제 슬퍼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 ‘언제’가 레지나가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와 사랑의 도피를 떠났을 때라는 걸, 두 부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보레오티 가문이 레지나의 수색을 포기한 뒤에도, 백작은 홀로 몰래 찾았지.”

“그랬구나…….”

답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슬퍼?”

펠리오가 물었다.

“그냥, 불쌍해서…….”

레오니에는 아직도 레지나에 대해 깊은 정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사라진 딸을 찾았을 우르마리티 백작은 불쌍했다. 일찍 죽은 레지나도, 혼자 남겨진 ‘원래’ 레오니에도 불쌍했다.

‘저쪽도 그럴까?’

어쩌면 또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을 저토록 애타게 찾고 있지 않을까.

“…….”

문득 떠올린 생각이 순식간에 슬픔으로 바뀌었다. 소름 돋는 격정에 인형을 품은 팔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

레오니에가 도움을 청하듯 펠리오를 불렀다.

“나 잠들 때까지 있어 줘.”

누운 제 자리 옆을 툭툭 두드렸다. 곧 부스럭, 이불 스치는 소리가 났다. 펠리오는 아이 옆에 누워, 팔 한쪽을 내밀어 줬다. 레오니에가 슬금슬금 기어가 팔을 베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토닥토닥도 해 줘.”

토닥토닥, 커다란 손이 아이의 등을 쓸었다. 안도가 느껴지는 작은 한숨이 펠리오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펠리오는 그런 딸을 묵묵히 살폈다.

“괜찮아?”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지금은 좀 슬퍼.”

그 이유가 레지나와 우르마리티 백작 때문은 아니었지만, 레오니에는 그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저를 보듬어 주는 아빠의 손길과 체온, 심장 소리에 집중했다.

겨우 진정한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백작 할아버지한테는, 나중에 아빠가 말해 줘.”

“그러마.”

“고마워, 아빠.”

“내가 괜히 말했나?”

“아니.”

레오니에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안도와 함께 몰려온 졸음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눈동자도 반쯤 뒤집혔다.

“이제 자자.”

곧 커다란 손이 아이의 눈 위에 얹어졌다. 따뜻한 체온이 기어코 레오니에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이제 졸음이 손 쓸 틈 없이 몰아닥쳤다. 사실 레오니에는 잠투정 없이 금방 자 버리는 잠순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잠들기 직전, 레오니에가 마지막 힘을 짜내 말했다.

“나처럼, 아빠가 있었네…….”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렇게 한마디 남긴 레오니에는 그대로 잠들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잠들고도 잠시 그 옆을 지켰다. 토닥이는 손길도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문 앞에는 코니와 미아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깨우러 오지.”

그때까지 깨우지 말고 잘 자도록 지켜보라는 뜻이었다. 코니와 미아가 알겠단 듯이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펠리오가 집무실로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루페가 다가왔다.

“이번 연회 참석 명단입니다.”

“파르두스 후작이 줬나?”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그대의 아버지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군.”

파르두스 후작은 수도에 내려온 뒤로 두 번이나 황제와 차를 마셨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뼛속까지 황제파 행세를 해야 하는 후작이 지금만큼은 안쓰러웠다.

이 명단이 그 노고의 증거였다.

건네받은 참석 명단을 쭉 훑던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올로르…….”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붉은 백조가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한참 그 이름을 노려보던 펠리오가 느닷없이 북부의 근황을 물었다.

“연락 온 건 없나?”

“모노 경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얼마 전 북부 산맥에 풀어놓은 새끼 마물들이 드디어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보고였다. 최근에는 인가를 습격하는 일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루페가 자신들 둘밖에 없는 집무실을 스윽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펠리오가 입가를 비틀었다.

“모노의 심문은 꽤 독할 텐데.”

그걸 버틴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펠리오는 결국엔 헛웃음까지 터트렸다.

“어디까지 가나 보지.”

느리게 감았다 뜬 검은 눈동자 너머로 섬뜩한 감정이 맺혔다. ‘그것’을 향한 경멸과 비아냥, 그리고 아주 약간의 존경이 담겨 있었다. 긍정적인 의미의 존경은 아니었다.

루페는 감당하기 버거운 펠리오의 오싹한 기운에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요사이 드는 생각인데.”

그러다 문득, 펠리오가 제 책상 위에 올려진 책들을 바라봤다. 얼마 전 레오니에와 수도 구경을 하면서 들렀던 서점에서 산 것들이었다.

작년에 세간을 들썩이게 한 학자의 논문, 작년에 신설되거나 개정된 법안을 정리한 책자.

오랫동안 사랑받은 경영론과 아카데미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의 책.

그리고 펠리오가 마지막으로 주문했던 책.

“내가 너무 가볍게 여긴 걸지도 모르겠어.”

고대 유적지 조사 보고서.

‘참 조화가 없는 것들이군.’

펠리오는 자신이 산 책들을 보고 기가 막혔다.

다섯 권 다 서로 관련조차 없는 주제였다. 사실 저 다섯 중 경영론과 철학서는 당시 떠오르는 대로 질러 버린 책들이었다. 아카데미 시절에 제법 괜찮게 읽었던 것들이었는데, 눈속임용으로 사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펠리오가 그 다섯 권 중 하나를 들었다. 발표와 동시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어느 학자의 논문이었다.

“어느 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둘 다.”

붉은 백조도, 노란 새 새끼도. 책 표지를 스윽 살피던 펠리오가 도로 책을 책상 위에 얹었다.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그의 손이 설핏 스친 곳에 적혀 있던 학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올로르가 북부를 건드린 것도, 황제가 그것을 용인하고 힘을 빌려준 것도. 거기다 은근슬쩍 황후와 서부에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용의주도함까지.”

이전의 그들이라면 결코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확실히…….”

루페도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동의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수비테오 황제와 올로르 가문은 이렇게까지 과감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난…….”

어느 시점을 말하려던 루페가 멈칫했다. 동시에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졌다.

“그래, 그 3년.”

펠리오가 대신 이어 말했다.

“내가 수도에 발이 묶였던 그때.”

그때부터 이상했다.

황실이고 올로르고, 이런 커다란 사건을 일으킬 만한 배짱을 지닌 자들이 아니었다. 이전에 이런 걸 계획해낼 머리도 없었고.

그렇다면 누가.

누가 저 둘을 변하게 했는가.

펠리오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미천한 가문을 단번에 귀족으로 상승시킨, 붉은 백조 속에서 유일하게 초록을 머금은, 황실과 올로르 가문의 유일한 교차점.

“우시스 황비.”

기어코 내뱉은 이름은, 펠리오조차 드물게 섬뜩하다고 느꼈다.

“만만치 않은 분이셨군.”

어딘가를 응시하는 검은 맹수의 눈동자 위로 섬뜩한 이채가 빠르게 스쳐 갔다.

* * *

레오니에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점차 기울고 있었다.

“너무 잔 거 아냐?”

“연회가 늦게 시작되니 괜찮아. 그리고 입 다물어.”

펠리오가 손수 물에 젖은 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아 줬다. 왜 이렇게 여유롭냐고 따지려던 레오니에는 수건에 볼이 눌린 탓에 우웅우웅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제 밥 먹자.”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안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빠.”

“응?”

“우리 오늘 연회 가는 거 맞지?”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여유롭게 느껴졌다. 아무리 연회가 밤에 열린다고 해도 이건 너무 태연자약했다.

“밥은 먹고 갈 거야.”

연회에 가면 네가 먹을 건 없다고 펠리오가 말했다. 밤에 열리는 연회에 나오는 음식은 주로 술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가끔 도수가 없는 것이 나오긴 해도 레오니에가 편하게 식사할 장소는 아니었다.

“괜히 거기서 먹고 체할라.”

내가 이래서 네가 연회에 가는 게 싫다며, 펠리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오오…….”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러고는 씩 웃었다.

“아빤 정말 아빠 다 됐구나.”

“내가 네 아빠 아닌 적이 있었나?”

“육아의 달인이 된 것 같다고.”

키득키득 터지는 아이의 웃음이 선물처럼 따라왔다. 펠리오는 대답 대신 등을 한 번 작게 두드리는 거로 대신했다. 레오니에의 웃음이 더욱 풍부해졌다. 결국 펠리오도 미소를 짓고 말았다. 답답했던 속이 가벼워졌다. 이래저래 귀찮은 상황에 짜증만 쌓였는데, 아이의 웃음이 이를 단번에 지워 버렸다.

“대단한 녀석.”

“응? 뭐라 말했어?”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펠리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넘겨 버렸다. 저녁 식사는 속이 편안한, 그럼에도 오랫동안 힘을 낼 수 있는 음식들로 차려졌다. 온전히 레오니에를 생각해서 만든 음식이었다.

정성껏 차려 준 음식을 맛있게 먹은 레오니에는 식후 한 시간 동안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고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연회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전신에 보습 효과가 있는 화장수를 발랐다. 젖은 머리는 수건으로 꼼꼼히 닦고, 머릿기름을 바른 뒤에 여러 번 빗질했다.

‘어라?’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평소랑 똑같잖아!”

이러고 나중에 아빠랑 놀다가 잠자리에 들면 어제랑 똑같았다.

펠리오가 황실 연회를 매번 ‘따위’라며 낮잡아 부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긴장감 없는 외출 준비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광장에 외출할 때조차 이것보다는 더 신경 썼던 것 같은데.

“이렇게 여유로워도 돼?”

레오니에가 뒤에서 빗질해 주는 미아에게 물었다. 마침 코니가 침대 위에 연회 때 입고 갈 드레스를 조심조심 얹었다. 그걸 본 레오니에는 그제야 좀 연회 준비 중이라는 게 실감 났다.

“저희 마음 같아서야……!”

빗질하던 미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크게 아쉬워했다.

“아가씨께 이것저것 한 벌씩 입혀드리고 싶죠!”

“머리도 여러 방법으로 묶어 드리면서 뭐가 어울릴지 비교하고 싶고요!”

“구두에 장신구까지! 전부 다요!”

어느새 코니도 동참했다.

하지만 둘은 곧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얼굴 위로 떨치지 못한 공포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주인님께서, 이딴 연회로 아가씨를 힘들게 하면 저희의 피로 연회를 열겠다고 하셨거든요…….”

“그 눈빛은 진짜였어요.”

원래도 무서운 분인데, 이번엔 진짜로 졸도할 뻔했다며 코니가 훌쩍였다.

“아빠가 그랬다고?”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후다닥 몸을 뒤로 돌렸다.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펠리오가 아무리 그래도 사용인들한테 그런 위협적인 언사를 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미아와 코니의 얼굴이 명백한 증거였다.

“이 아빠가 무슨 말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

나중에 한마디 해 주겠다며 레오니에가 허공에 쪼그마한 주먹을 마구 흔들었다.

“그렇죠? 실은 아가씨께서도 많은 드레스를 입고 싶으시죠?”

“구두도 여러 켤레 신어 보고 싶고, 목걸이나 머리 장식도 가득 해 보고 싶으시죠?”

코니와 미아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어어…….”

레오니에가 도리질을 했다.

“아니.”

그리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기서 코니와 미아 편을 들었다간 큰일 날 것 같았다. 하녀 언니들에게 인형 놀이 당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송곳니 덕에 감이 발달한 레오니에는 가까스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난 단벌 숙녀가 꿈이야.”

레오니에는 아빠의 깊은 뜻을 깨우쳤다. 펠리오는 일전에 레오니에가 하녀들에게 인형 놀이 당하고 힘들어하던 걸 잊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미리 하녀들에게 주의를 준 것이었다.

참된 부성애를 깨달은 레오니에는 울컥했다. 그리곤 앞으로 아빠 근육은 조금 덜 희롱하자고 다짐했다.

반면 코니와 미아는 풀이 팍 죽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너무도 귀여우시고 사랑스러우신걸요.”

“예쁜 옷도 입혀드리고 싶고, 멋지게 꾸며드리고도 싶고요.”

“대신 언니들은 죽겠지…….”

우리 아빠는 한다면 진짜 하는 사람이라고, 피의 연회라는 것도 이미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려져 있을 거라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그제야 두 하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 아쉬운 표정까진 지우지 못했다. 레오니에가 어쩔 수 없단 듯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대신 나 옷 맞추는 날에는 한 번 당해 줄게.”

내가 봐준다, 는 듯이 레오니에가 웃었다. 마치 다음 주말에 꽃동산에 가자고 약속하는 부모님 같았다.

깜짝 약속이 기쁜 코니와 미아가 활짝 미소 지었다.

“이제 옷 입으실 차례에요.”

레오니에가 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드레스를 입었다.

“와아……!”

거울 앞에 선 레오니에가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넓게 잡아 펼쳤다. 그리고 몸을 살짝살짝 돌려보며 제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봤다.

“너무 예뻐!”

“아가씨는 원래 예쁘세요.”

“이제 아신 건 아니지요?”

“아니, 정색하진 말고…….”

레오니에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저의 외모를 찬양해 주는 코니와 미아를 가볍게 흘겼다. 그러나 입꼬리는 이미 광대뼈를 뚫을 만큼 올라간 상태였다.

“내가 예쁘다고 말한 건 이 드레스인데.”

테온 남작이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든 드레스는 시선을 사로잡는 접착제인 것 같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레오니에는 반성했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결국 예뻐 봐야 유아복일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테온 남작, 아비페르와 함께 드레스를 주문할 때, 레오니에는 참으로 재미없는 드레스가 완성될 거라 생각했다. 어깨에 거대한 뽕이나 안 들어가면 다행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완성된 드레스는 빈정거렸던 아기 맹수의 뒤통수를 크게 후려쳤다.

디자인은 자체는 간소했다.

소매가 없고, 허리선이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평범한 드레스였다.

그러나 테온 남작은 마법 같은 손재주로 걸작을 탄생시켰다. 허리선 바로 아래에 나팔꽃처럼 너울거리는 옷감을 대고, 그 위로 새하얀 깃털을 촘촘하게 여몄다. 입은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깃털 치마가 날개처럼 살랑거렸다. 어떤 움직임에도 깃털 한 톨 떨어지지 않았다.

“코니, 미아! 이거 봐!”

깃털 치마에 푹 빠져 있던 레오니에가 제 허리를 가리켰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색 레이스가 본래 허리선부터 깃털 치마가 펼쳐지는 치마 윗단을 살포시 덮었다. 덕분에 자칫 길어 보일 수 있는 허리를 잘 감쌌지만, 레오니에의 시선은 오로지 검은 레이스를 향했다.

“레이스에 보석 박혀 있어.”

왜 이렇게 반짝이나 했더니, 레이스에 진짜 보석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바로 보레오티 가문이 소유한 광산에서만 채굴되는 검은색 다이아몬드였다. 레오니에의 사자 인형 눈 장식과 똑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깃털 치마도 반짝거렸는데, 깃털 사이로 조그만 보석들이 숨어 있었다.

“테온 남작이 드레스 만들려고 악마한테 혼을 팔았나 봐!”

“잘 만들었단 뜻이지요?”

코니가 눈치껏 해석했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표현은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가 탄생할 리가 없었다. 검정과 하양의 조화가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다.

북부의 설산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테온 남작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이 드레스는 오로지 검정을 품은 보레오티만이 소화할 수 있는, 레오니에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머리 묶으실까요?”

겨우 정신 차린 코니가 빗을 들었다.

“둥글게 올려 묶고 티아라 장식을 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양 갈래 안 해 줘?”

레오니에가 물었다.

“양 갈래는 늘 하시는 거잖아요.”

모처럼의 연회인데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묶는 게 어떠냐고 미아가 물었다. 미아가 가지고 온 머리 장식은 전부 큼지막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류였다.

“양 갈래가 어려 보이잖아.”

그래야 상대가 방심하고, 레오니에는 그 틈을 타 깽판을 칠 작정이었다.

“아가씨는 충분히 어리세요.”

코니가 조심히 말했다.

“올가을 지나시면 여덟이시니, 그 정도면 많이 어리지 않을까요?”

“아, 그러네.”

잠시 나이를 잊었던 레오니에가 코니에게 머리를 맡겼다.

“대신 순둥이처럼 보이게 해 줘.”

“충분히 순둥이세요.”

“나 만만해 보여?”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요…….”

요새 볼살이 많이 올라서 여느 때보다 아기 동물처럼 보인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누구한테 깽판을 치시려는 건가요?”

미아가 장신구 몇 개를 미리 꺼내놓으며 물었다.

“으응.”

레오니에가 콧구멍 입구를 긁으며 대충 대답했다.

“그냥 황제.”

거울 속 코니와 미아의 표정은 경악을 넘어 공포심에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 * *

“선배, 저길 보세요.”

모퉁이 뒤에 숨어 있던 하녀가 주근깨 콕콕 박힌 볼을 붉게 물들였다.

“아아, 근사하지?”

뒤에 있던 선배 하녀가 네 마음 다 안다는 듯이, 후배의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올해 봄에 들어온 신입 하녀는 뭐에 홀린 듯한 눈으로 현관 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엔 보레오티 공작과 리코스 자작이 연회에 갈 채비를 마치고 곧 내려오실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남자 역시 연회에 가기 위해 어느 때보다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

“주인님이 무섭긴 하지만, 눈 호강은 확실하지.”

“너무 잘 생기셨어요.”

“어쭈, 이것 보소.”

선배 하녀가 껄껄 웃었다. 저 역시도 주인님 외모에 빠져 저렇게 겁 없이 홀렸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뿐이니 실컷 즐겨라.’

선배는 굳이 일러 주지 않았다. 곧 있으면 이 신참도 깨닫게 될 거다. 주인님의 근사한 외모에 홀리는 건 아주 잠깐이란 걸. 분명 빠른 시일 내에 진정한 공포를 깨우치고 어떻게든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지.

“근데 저건 무어죠?”

신참의 눈에 묘한 것이 포착되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펠리오의 팔에 새하얀 천 같은 것이 걸쳐진 채였다.

그 호기심에 대한 답은, 우연히도 동시에 하얀 것을 발견한 루페가 말했다.

“아가씨 겉옷 아닌가요?”

루페가 물었다. 펠리오의 팔에 걸린 하얀 건, 레오니에가 연회에 갈 때 걸칠 망토였다.

“그걸 왜 공작님이 들고 계십니까?”

“그럼 이 밤중에 애 겉옷도 안 입히고 외출하라고?”

펠리오가 한심하단 듯이 루페를 바라봤다.

“밤공기는 아이한테 좋지 않다. 이 정도 상식도 내가 일일이 말해 줘야 하나?”

“그게 아니라…….”

당황한 루페가 서둘러 덧붙였다.

“하녀한테 맡기시지 않고.”

아가씨 옆에는 코니와 미아라는 훌륭한 하녀가 무려 둘이나 붙어 있었다. 루페는 왜 굳이 그걸 공작님 하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내가 내 딸 겉옷 챙기겠다는데, 네가 왜 신경을 써.”

그러나 그 질문이 검은 맹수에겐 불쾌하게 다가왔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리코스 자작, 요사이 건방이 물이 올랐어.”

“저는 정말 입을 꿰맬까요?”

억울해진 루페가 결국 먼저 입을 다물었다. 요샌 무슨 말만 꺼내도 잡으려고 난리다. 그러나 여기서 더 따진다면 진짜 족쳐질 수도 있기 때문에, 유능한 비서인 루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으시네.’

북부에서 지낼 적엔 그래도 레오니에를 은근슬쩍 챙겼던 펠리오가, 이제는 남들 시선 상관 않고 어화둥둥 품에 안고 다니는 중이었다.

설마 검은 맹수가 딸 등신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건 또 아닌가?’

루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돌이켜 보면, 펠리오는 처음부터 레오니에를 많이 아꼈다.

새삼 신기했다. 검은 맹수가 사람의 온정을 지니게 되었으니, 이는 분명 좋은 변화였다. 그러나 펠리오의 과거를 아는 루페의 눈에는 종종 서글프게 비치기도 했다. 비단 저뿐 아니라 그의 과거를 아는 몇몇 사람들은 다 그렇게 느낄 거다.

‘정이 그리우셨던 걸까.’

선대 공작 부부는 어린 펠리오를 혹독하게 키웠다. 반면 레지나는 친자식보다 더 살뜰하게 보살폈다. 어린 루페의 눈에도 그 모습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다. 오죽하면 파르두스 후작조차 불쌍한 분이라고 혼잣말을 했을까.

“…….”

묘한 동정심이 느껴지던 루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펠리오가 셔츠 소매에 장식된 커프스를 만지작거리면서 손목을 드러내는데, 그 위에 눈에 익숙한 것이 떡하니 있었다.

바로 손목시계였다.

힘줄이 도드라진 손목 위로 금빛 시계와 검은 가죽 줄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시계가 잘 어울리십니다.”

루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시계를 구경했다. 아까 커프스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고의가 다분해 보였으나, 굳이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냥 봐줄 만해.”

펠리오는 처음 손목시계를 봤을 때와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솔직하지 못하시긴.’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린 게 다 보인다며, 루페가 몰래 이죽거렸다. 이제 저 ‘봐줄 만하다’는 말이 보레오티의 가보로 삼을 만하다는 뜻이라는 걸 이 저택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시계를 받은 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 하루 동안 오만 목격담이 쏟아졌다.

펠리오가 틈만 나면 시계가 든 상자를 꺼내 바라본다든가, 유난히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린다든가. 우연히 지나가던 레오니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때 나오겠네.’라며 놀렸었다. 물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굉장해.’

루페는 다시금 이 손목시계의 가치를 계산해 봤다.

시계는 귀중품 중에서도 남성들이 선호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상당한 고가품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그 탓에 귀족 남성들의 은근한 과시욕을 부추겼다.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

과시욕.

실용성과 더불어 손목시계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회중시계는 품에 넣고 다니는 소지품인지라 남에게 보여 줄 기회가 적지만, 손목시계는 소매만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은근히 자랑할 수가 있다.

‘보레오티는 저렇게 또…….’

또 이렇게 돈을 버는구나.

루페는 순간 기가 팍 죽었다.

이젠 저도 리코스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골수 귀족이 되었는데, 못해도 보레오티의 발톱의 때를 희석한 물 한 방울 만큼은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루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리오가 한마디 툭 내던졌다.

“너무 부러워 마라.”

“……예?”

“시계가 가지고 싶거든 나중에 레오한테 부탁해 봐.”

펠리오가 선심 쓰듯 말했다. 할인 정도는 해 줄지도 모른다며 오만한 배려를 베풀었다.

루페는 기가 막혔다.

‘아가씨께서 선물로 하나 주신다고 했는데.’

점심때 만난 레오니에가 나중에 루페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계를 선물해 주겠다며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이건 비밀로 해야겠군.’

루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원래 펠리오는 연회나 사람 북적이는 곳에 갈 때면 기분이 극도로 저하되고 예민해진다. 평소였다면 감히 말도 건네지 못하고 알아서 입 꾹 다물고 몸을 사렸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까지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누가 봐도 레오니에가 선물한 시계 덕이었다.

‘우리의 구세주.’

루페가 몰래 두 손 모아 보레오티에 평화를 가져다주신 아가씨께 감사 기도를 올리던 참이었다.

“아빠! 아저씨!”

펠리오와 루페가 자연히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2층 난간 틈으로 레오니에가 머리만 내민 채 손을 흔들었다. 루페는 바로 옆에서 ‘위험하게 또.’라며 잔소리를 연설하는 펠리오를 가볍게 무시했다.

곧 레오니에가 계단을 내려왔다. 다행히 내려올 때는 멜레스의 품에 안긴 채였다.

“많이 기다렸어?”

레오니에가 총총걸음으로 펠리오의 곁으로 다가갔다. 펠리오는 놀란 눈으로 제 곁으로 다가오는 작은 덩어리를 바라봤다.

처음엔 저 조그만 덩어리가 뭔가 싶었더니, 점점 가까워질수록 저의 하나뿐인 딸인 레오니에를 빼닮아 갔다. 그제야 펠리오는 이 작고 예쁜 숙녀가 레오니에라는 걸 알아챘다. 그의 인생에서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이가 저를 보며 방긋 미소를 짓자, 거짓말처럼 주변이 암전되었다. 오로지 레오니에 주변에만 새하얀 빛이 부시었다.

루페 역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역시 그의 생에서 지었던 표정 중 가장 멍청한 표정이었다.

“와아…….”

레오니에도 마찬가지였다. 동글동글 커진 눈으로 한껏 차려입은 펠리오와 루페를 번갈아 구경하더니, 이내 두 손으로 제 눈을 찰싹, 가렸다. 소리가 어찌나 찰진지 넋이 나가 있던 펠리오와 루페도 그제야 정신을 되찾았다.

“너무 눈부셔!”

레오니에가 흐느꼈다.

“둘 다 잘생겼어……!”

“아가씨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상투적인 칭찬이군.”

조금 더 진심을 담아 칭찬하라고 펠리오가 투덜거렸다.

“그냥 제 입을 꿰매세요.”

상사 딸을 칭찬하고도 욕먹는 부하는 저밖에 없다고 루페가 한탄했다. 심지어 조금 전 칭찬은 거짓 하나 안 보태고 진심이었는데.

“아빠랑 아저씨가 너무 근사해서, 동네 처자들이랑 몇몇 총각들이 홀딱 반하겠어!”

레오니에가 발까지 동동 굴렀다.

“황제도 반하면 어떡해?”

진심으로 걱정된다며 레오니에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펠리오와 루페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정색했다. 둘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모욕을 당한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섭섭한 게 있으면 말로 해.”

“말로 하시지, 왜 욕을 하세요.”

“에이, 칭찬이었는데.”

아무리 레오니에가 짓궂은 농담을 해도 넘겨 버리던 둘이었다만, 지금은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아이를 타박했다. 무안해진 레오니에가 구두코로 바닥을 통통 두드렸다. 그러고는 힐끔 펠리오를 올려다봤다.

“아빠, 어때? 나 예뻐?”

레오니에가 손을 뒤로 내뺀 채 어깨를 수줍게 흔들었다. 몸을 살짝살짝 움직일 때마다, 머리에 꽂은 화관이 반짝였다. 초록색 줄기부터 앙증맞은 꽃송이까지 전부 보석이었다.

“…….”

펠리오는 한참을 말없이 레오니에를 응시했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만이 그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말이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레오니에는 괜히 울적했다.

‘안 예쁜가?’

평소에는 예쁘다고 칭찬도 제법 해 주는데.

기운 빠진 아기 맹수가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흔들어 봤다. 아기 맹수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 멜레스를 바라봤다. 풀이 팍 죽은 레오니에와 눈이 마주친 멜레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레오니에를 데리고 나오면서, 지나가는 길마다 마주친 사용인들이 너도나도 앞다퉈 칭찬했다. 심지어 그 장난기 넘치는 파보마저 놀라 굳어 버리지 않았던가.

멜레스는 확신했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레오니에가 될 터였다. 비록 이딴 식으로 연회에 가야 하는 어린 아가씨의 상황은 퍽 불쾌했지만 말이다.

그 마음을 홀로 삼킨 채, 멜레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뒤를 보세요.’라고.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 뒤에 뭐가 있……!”

말한 대로 돌아보니, 어느새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춘 펠리오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와 씨 봐라! 깜짝이야!”

“레오 너 지금 욕했냐?”

펠리오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레오니에가 붕붕 고개를 내저었다.

최근 보레오티 저택 내에선 아이의 정서 교육을 위해 바른말 사용하기 기간이란 걸 만든 탓에 말을 조심해야 했다.

“씨를 보라고. 아빠의 훌륭한 씨를 보라고. 완벽하다 이거지.”

“내가 지금 씨가 어딨어?”

“있잖아.”

“어디에?”

“그거야 당연히……!”

씩씩하게 대답하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동시에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위, 위험했다!’

이건 진짜 위험했다. 식겁한 레오니에가 서둘러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내려 바라볼 뻔한 곳은 진짜 패륜아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어?”

그때, 어깨 위로 얇고 보드라운 것이 얹어졌다. 레오니에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아직 밤이 춥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얇은 망토를, 펠리오가 손수 입혀 줬다. 드레스를 맞출 때 함께 제작한 비단 망토였다. 매끄러운 겉면과 달리 안감은 포근한 면으로 되어 있어 맨살이 닿아도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펠리오는 보송보송한 방울이 달린 끈을 솜씨 좋게 리본으로 묶어 줬다.

“네가 예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흡족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칭찬하는 말투가 태양은 동에서 서로 움직인다는 세상의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들렸다.

“말하면 입만 아프지.”

긴 손가락이 아이의 삐져나온 애교머리의 모양을 따라 매만졌다.

“잘 어울린다.”

온화한 미소와 진심 어린 칭찬이 레오니에의 썩은 정신머리를 정화했다.

“…….”

레오니에는 조용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고해 성사를 했다.

“난 개쓰레기야.”

느닷없는 자기 비하에 펠리오와 루페가 움찔했다.

“불효자식이야.”

이토록 저를 아껴 주고 보살펴 주는 아빠한테 그딴 저질스러운 농담이나 내뱉다니.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자신이 썩어 빠진 인간임을 깨우쳤다. 조금 늦은 깨우침이었다.

“그리고 난 아마 변하지 않을 거야…….”

아기 맹수는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 * *

레오니에가 황궁으로 출발한 시각은 평소 잠자리에 드는 시간과 비슷했다. 하늘 위에 뜬 커다란 달과 총총 박힌 별들이 아니었다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두컴컴한 건 매한가지인지라, 레오니에는 과연 마차가 잘 달릴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마차에는 어두운 밤에도 앞을 볼 수 있는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부가 마차 위에 달린 물건을 건드리자, 딸깍 소리와 함께 새하얀 불빛이 어두운 밤길을 비추었다. 마차 내부에도 잔잔한 등 하나가 내부를 밝혔다.

“이 밤중에 날 부르다니.”

레오니에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조금 전 저택에서 저 자신을 욕하며 반성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심이 썩을 대로 썩은 아기 맹수는 뒤 따위는 돌아보지 않는 씩씩함을 지니었다.

“졸리면 말해.”

옆에 같이 앉은 펠리오가 아이의 토실토실한 볼을 가볍게 눌렀다. 공기 빠지는 소리가 피시식- 났다. 곧 삐죽 나온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응.”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낮잠을 많이 잔 덕에 아직 크게 졸리진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예의가 없는 초대군요.”

루페가 새까만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제도 분명 레오니에가 어리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이 늦은 밤중에 열리는 연회에 아이를 초대한다는 것 자체가 몰상식하고 무례한 짓이었다.

그것도 일개 황비가 아이를 보고 싶다고 졸랐다는 이유 때문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레오니에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씩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서 다시는 날 초대하지 못할 만큼 깽판을 칠 거니까요!”

“부디 합법적인 선에서 해 주세요.”

루페는 자신의 살아생전에 보레오티 가문에서 역적이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역적을 돕는 일까지 목숨 걸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닥치면 하겠지…….’

누구보다 열심히 도울 거란 걸, 루페는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그리고 레오니에가 역적이 된다면 펠리오도 뒤따라 역적이 될 테지. 이제 딸 등신의 행동 예측 정도야 이전보다 훨씬 쉬웠다.

“……건방진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기묘한 불쾌감을 기민하게 눈치챈 펠리오가 루페를 가볍게 노려봤다. 루페는 싱긋 웃으며 그런 거 아니라고, 그저 보레오티에 대한 충성심을 다졌을 뿐이라며 변명했다.

“이제 루페 아저씨도 골수 귀족이야! 아빠가 믿어야지.”

“믿음을 먼저 보여야지.”

“제가 여태 해 온 것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펠리오 밑에서 온갖 일을 도맡았던 루페는 퍽 억울했다.

사실 펠리오도 조금 전 그 말이 진심은 아니었다. 새 골수 귀족으로 선점할 사람 중에 루페만큼 최적의 조건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훌륭한 업무 능력과 보레오티를 향한 충성심. 거기다 정보통인 파르두스 후작 가문을 친가로 두고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파르두스 후작의 아들이란 점 때문에, 황실과 몇몇 귀족들은 루페의 리코스 자작 승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지난번에야 황궁에 갔을 때는 마물 밀거래 밀수 사건을 처리한답시고 황제를 몰아붙여서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루페의 리코스 자작 승계로 괜한 시비를 걸 불온한 자들이 많을 수도 있다.

‘역시 불쾌한 곳이야.’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은 언제나 음험하고 불손한 분위기만 가득했다.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모여 별 시답잖은 이유로 서로를 깎아내리고 탐색하는 인간 특유의 본성이 늘 불편했다. 그 탓에 펠리오는 사람이 들끓는 곳은 질색이었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

늘 해가 떠 있는 밝은 날에만 외출했던 레오니에는 늦은 밤의 외출이 나름 신선했다. 시끌벅적한 대낮의 활기는 거짓말 같았다. 지금은 오로지 어둠과 정적만이 가득했다. 마차 굴러가는 소리도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그러나 아이는 어둑한 거리도 나름 마음에 들었다. 빛이라곤 마차의 앞길을 밝히는 마도구 빼고는 간간이 세워진 가로등 같은 것들이 유일했다.

레오니에는 저 가로등처럼 생긴 것도 마도구라는 걸 북부에 있을 때 배웠다. 이 세상에서 마법은 레오니에가 아는 과학과 같은 맥락이었다.

“캄캄한 밖이 꼭 황제의 미래 같아.”

레오니에가 막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똑똑한 녀석.”

펠리오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문학에 소질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내 가슴을 울릴 줄은 몰랐다.”

“정말? 감동했어?”

“아주 훌륭했어.”

나중에 집에 가면 딸기 우유 맛 사탕 한 봉지를 주겠다며 펠리오가 약속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기사단 훈련 중 자유 방문도 한 번 허락해 주기로 했다.

“아자!”

아기 맹수가 포효했다.

하도 근육을 밝힌 탓에, 펠리오가 자신의 동행 없이는 기사단 훈련장에 함부로 가지 못하게 했다. 송곳니 훈련을 받을 때도 기사들을 전부 내보내기 때문에 레오니에가 실제로 기사들 근육을 훔쳐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즉, 이것은 엄청난 선물이었다.

“아빠, 사랑해……!”

감동한 아이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었다.

“괜찮습니까?”

루페가 조심히 물었다.

“기사단이 놀랄 것 같은데요.”

“내가 당하는 것도 아닌데, 뭐.”

“무슨 그런 방관자 같은 말씀을 하세요.”

“네가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거야.”

이쯤 되니 펠리오도 슬슬 짜증이 났다.

“레오가 기사들 몸을 막 더듬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훔쳐보면서 침 좀 흘리는 거 가지고 뭘 그리 따박따박 따지는 건지.”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굳이 따지면 성희롱은 내가 기사들보다 더 당해.”

펠리오가 당당하게 반박했다. 사실 그야말로 딸아이의 변태 취향으로 고생하는 최대 피해자였다.

“너 왜 이 녀석이 내 다리에 안기는지 알아?”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살살 밀었다.

“그거야 공작님이 좋아서지요.”

커다란 아빠 다리에 착 달라붙은 조그마한 딸이라니, 루페는 두 부녀가 그렇게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이 훈훈했다.

그러나 펠리오는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대퇴근 희롱을 위해서야.”

다리에 매달릴 때면, 레오니에는 열에 다섯은 대퇴근을 콕콕 찌르며 희롱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품에 안으면 가슴 근육에 얼굴을 기대며 히죽거렸으며, 씻고 나오면 변태 영감 같은 미소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고는 했다.

경악에 찬 루페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으흥!”

레오니에가 한쪽 눈을 어색하게 찡그리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두 손은 앙증맞게 오므려 턱을 받쳤다.

“아가씨 제발……!”

루페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 와중에 또 세상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변태가 어디 있나, 싶었다.

“그러시다 정말 잡혀갑니다.”

“나 애라서 안 잡혀요.”

“이 영악하신 분……!”

“게다가 난 선은 지켜요.”

레오니에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왜 자신이 정당한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요목조목 설명했다.

“근육은 눈으로만 보지, 만지고 싶으면 허락받지, 상대가 싫어하면 안 만지지…….”

기어코 루페가 머리를 쥐어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속닥거렸다.

“루페 아저씨 왜 저래? 변비야?”

“제 딴엔 널 걱정해서 저러는 거다.”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텐데.”

아기 맹수는 변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여하튼 가는 길이 안 지루하니 즐겁고 좋네!”

“넌 좀 미안해해라.”

펠리오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레오니에의 말대로 마차가 달리는 내내 지루할 틈은 없었다.

3년 전만 해도 이 길을 여러 번 지나갔지만, 마차 안은 필요한 최소한의 이야기만 나눌 정도로 삭막하고 갑갑한 장소였다. 펠리오에게 황궁으로 가는 순간 자체가 억지로 견디어야 할 고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루페 아저씨, ‘푸른 하늘 은하수’ 할래요?”

“그게 뭔가요?”

“이렇게 손을 잡고…….”

심지어 레오니에와 루페는 손잡고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펠리오는 창틀에 팔을 기댄 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이것도 나쁘진 않네.”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에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역시 루페 아저씨가 새 아빠가 되는 거야?”

그리곤 진지하게 물었다.

“…….”

“…….”

펠리오와 루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선을 마주쳤다간 이 변태 꼬마에게 또 오해할 틈을 주는 꼴이었다.

“너 빨리 결혼해라.”

기어코 펠리오가 막말을 던졌다.

“네놈이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지내니까 애가 오해하잖아.”

“공작님이 결혼하시면 되잖아요! 마님을 들이셔야죠!”

“난 육아로 바빠.”

“전 일로 바빠요!”

“유후, 사랑싸움!”

그 속에서 아기 맹수 혼자 해맑았다. 결국 펠리오가 까불거리는 딸아이의 입술을 서너 대 찰싹, 토닥였다. 물론 아프지 않게.

때마침 어둡던 바깥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차의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아가씨, 다 왔나 봅니다.”

루페가 창밖을 가리켰다. 오늘만큼 황궁이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 말에 레오니에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펠리오가 혹시 몰라 뒤에서 팔을 뻗어 아이를 보호하듯 감쌌다.

“와아…….”

순진한 감탄이 터졌다.

“돈을 더럽게 처발랐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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