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하찮은 스토커 (10/51)

#10. 하찮은 스토커

히에이나 영애는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원작 내용에선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펠리오를 광적으로 사랑하면서, 제 동생뻘인 우피클라에게 하찮다고 경계하던 명실상부 자타 공인 스토커.

오늘도 히에이나 백작 영애는 공작저에 편지를 보냈었고, 레오니에는 그걸 두 눈으로 또 확인했다. 도착한 편지는 총 열네 통이었다. 전부 상자에 들어가 버렸지만 말이다.

레오니에는 이제 편지가 안 보이면 살짝 허전할 정도였다.

‘참 이상하단 말이지…….’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개성 넘치는 인물인데.’

어째서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은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마차가 세워진 곳에서 살짝 떨어진 건물 너머를 응시했다.

푸른색이 도는 은발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마치 막 해가 진 어둑한 하늘을 머금은 강물 같았다. 히에이나 영애는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히 차분하고 이지적인 미인이었다.

‘어른은 아니라고 했지?’

레오니에는 우피클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벨리우스 제국은 스무 살이 법적 성인 나이였다. 그러니 아마 못해도 열아홉 이하일 거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고.

‘왜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마친 레오니에가 보다 자세히 히에이나 영애를 응시했다.

“하아, 하아……!”

건물 모퉁이 뒤에 몸의 절반을 숨긴 채,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열띤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히에이나 영애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겉은 멀쩡한 사람이 저러니 더욱 보기 힘들었다.

“우와, 진짜 변태잖아?”

레오니에가 징글징글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원작을 쓴 작가가 히에이나 영애의 변태적인 성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서술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이유라면, 레오니에는 충분히 이해했다.

반면 아비페르를 비롯한 기사들은 히에이나 영애를 변태라 욕하는 레오니에를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근육에 환장하는 레오니에도 사실 히에이나 영애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물론 그걸 말했다간 자신들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할까요?”

멜레스가 조심히 물었다.

“모르는 척하고 가야죠.”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변태 처음 다뤄 봐요? 저런 집착 변태랑은 상종도 말아야 해요! 관심을 조금이라도 주면 더 달라고 난리란 말이에요.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에 속지 마요!”

멜레스는 어째 그 모든 이야기가 레오니에 본인을 향하는 것 같았다.

“근데 아가씨도 변태잖아요.”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파보는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는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대단한 녀석, 프로보가 동료의 용기 어린 희생에 감동했다.

“뭐래. 난 정정당당한 근육 박애자예요.”

레오니에가 꺼릴 것 없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아비페르는 일행이 아닌 척 슬그머니 물러섰다. 정말이지 맨정신으로 듣기 힘들 만큼 창피한 대화였다.

“대신 허공에다가 주물럭거리시잖아요.”

파보는 얼마 전 아카데미에서 제 동생을 훔쳐보던 레오니에를 떠올렸다. 삐친 레오니에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그리고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파보 오빠가 나 계속 놀린다고 이를 거야. 아빠 앞에서 엉엉 울 거야. 내가 울면 우리 아빠는 엄청 안절부절못하는 거 다 알죠?”

레오니에가 기사들을 쭈욱 훑어봤다. 아까부터 저들이 자신을 건물 뒤 스토커와 동류 취급하고 있단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지옥을 보여 줘요?”

아기 맹수가 크앙, 하고 울었다.

“그만 출발하시지요.”

파보가 어느 때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예를 갖췄다. 심지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을 내밀어 레오니에가 마차에 올라가기 편하게끔 도왔다.

“흥.”

그제야 레오니에가 화를 거두고 마차에 성큼 올라갔다.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있던 아비페르도 뒤따라 올라갔다.

그제야 기사들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야 이 미친놈아. 그러게 왜 아가씨를 놀려!”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죽으라고 프로보가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솔직히 변태 맞으시잖아.”

“그건 그렇지만, 말하지 말아야지.”

가뜩이나 성숙하신 애늙은이가 상처라도 입으면 어쪄냐고 멜레스가 타일렀다.

“멜레스 너도 만만치 않아.”

프로보가 한마디 덧붙였다. 멜레스가 평소 레오니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나 그래도 아까 아가씨 별로 안 무서웠거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파보가 중얼거렸다. 사실 조금 전 레오니에는 진심으로 화를 낸 게 아니었다. 그냥 재미난 농담을 주고받다가 살짝 울컥했을 뿐이었다. 이미 본인도 티격태격 다퉜던 걸 다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파보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주군은 무서워.”

레오니에가 홧김에 꺼낸 최종 병기가 너무 끔찍했다. 아기 맹수가 아무리 화를 내며 앙앙 짖는다고 해도, 기사들 눈에는 아기 고양이가 앙증맞은 발톱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떡하니 자리 잡은 검은 맹수가 너무 흉악했다. 아기 맹수가 조금이라도 화가 나거나 풀이 죽었다면 바로 송곳니를 내밀고 숨통을 꿰뚫을 분이셨다.

“일단 히에이나 영애에 대해서는 보고를 드릴 거야.”

호위대 대장인 멜레스가 말했다. 파보와 프로보도 동의했다. 어쨌건 레오니에는 히에이나 영애로 인해 불쾌감을 느꼈다. 펠리오에게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보다 그 영애가 죽겠는데?”

파보가 중얼거렸다.

다들 똑같은 생각이었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선을 넘었군.”

히에이나 영애가 레오니에를 몰래 엿봤다는 보고를 들은 펠리오는 무척이나 불쾌해했다. 주름이 깊이 파인 미간 덕에 검은 눈썹이 중간에서 거의 만날 정도였다. 사실 ‘불쾌하다’는 표현도 아주 순화한 거라고, 일과를 보고하던 멜레스가 남몰래 생각했다. 왜냐하면, 펠리오는 당장이라도 히에이나 가문을 찾아갈 것처럼 의자에서 몸을 슬그머니 떼고 있었다.

뒤에서는 루페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누군가의 영면을 바라는 추도문도 외웠다.

“하나 아가씨께서.”

사태가 더욱 심해지기 전에, 멜레스가 서둘러 뒷말을 이어붙였다.

“이 사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셨습니다.”

“뭐?”

펠리오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레오니에가 자기를 몰래 지켜보는 변태를 용서할 아량을 베풀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점만큼은 저를 쏙 빼닮아 자비가 없었다.

하지만 멜레스의 얼굴에는 거짓 한 점이 없었다.

“이유는?”

물어보는 눈빛이 칼날보다 섬뜩했다. 멜레스가 짧게 심호흡한 뒤에 그 이유를 전달했다. 그리고 이를 들은 펠리오의 얼굴에 괴상한 의문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 보게.”

그래서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일단 얻어낼 게 있으니, 한 번은 봐주시겠다고 합니다.”

“무얼 얻어내겠다는 거지?”

“그건 내가 말해 주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하고 집무실 문이 열렸다. 펠리오와 멜레스가 열린 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슬그머니 내렸다.

“짜잔!”

레오니에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은 아까 테온 남작에게서 먼저 받아 온 새 옷이었다. 엉덩이 부분이 펑퍼짐한 호박 바지였다. 멜빵도 있어서 귀여움이 배가 되었다.

“아가씨, 너무 귀여우세요!”

멜레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유난을 떨었다.

“정말로 귀여우십니다. 테온 남작이 만든 옷인가요?”

루페도 잘 어울린다며 칭찬했다. 기분 좋아진 레오니에가 괜히 몸을 비비 꼬았다.

“아빠는 어때? 나 귀여워?”

“말 잘 들으면 귀엽지.”

“짜증 나, 진짜.”

“어쨌건 잘 왔다.”

펠리오가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쪼르르 다가오는 아이의 한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네가 아까 말한다고 했지?”

펠리오가 도대체 왜 히에이나 영애를 봐주는 거냐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레오니에가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나 이거 만들고 싶어.”

종이의 정체는 어설픈 솜씨로 그려진 설계도였다. 하지만 펠리오는 이 설계도에 그려진 게 뭔지 단번에 눈치챘다.

“……시계?”

시계는 시계였다. 그러나 익히 아는 줄 달린 회중시계는 아니었다.

“손목시계야.”

툭툭, 레오니에가 제 손목을 가리켰다.

“이건 손목에 차는 거야.”

“손목에요?”

깜짝 놀란 루페가 설계도를 다시 살폈다. 그제야 그의 눈에 시계 양쪽 고리에 걸린 줄이 보였다. 애들 낙서인 줄 알았더니 설계도는 생각보다 자세했다.

“아빠 회중시계 보고 떠올랐어.”

그 말에 펠리오가 문득 어느 날을 떠올렸다. 수도로 가는 마차 안에서,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시계를 신기하단 듯이 만지작거리며 구경했었다. 한참을 빤히 바라보기에 시계를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마침 파보 오빠 남동생이 시계를 만들고, 히에이나 가문 영지에서 나는 특산품 중에 무두질한 가죽이 있네? 심지어 맞춤 재단도 한다네?”

히에이나 가문은 가죽 공정으로 유명하다. 영지 대대로 내려지는 비법으로 동물의 원피를 무두질하여 최상급의 가죽 원단을 만들어냈다. 거기다 재단 솜씨도 월등하다고 한다. 품질이 무척 좋아서 타국으로 수출까지 할 정도고, 거기다 다양한 공방과도 연이 깊어 가죽 재단에서도 특출 나다고 한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레오니에가 손뼉을 크게 마주쳤다.

“내 주문대로 시계 만들어 줄 인재가 생겼고, 최상급 가죽을 공짜로 후려칠 수…….”

“레오.”

펠리오가 설명하느라 흥분한 레오니에의 이마에 손가락을 툭 얹었다.

“진정.”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공짜로 받아낼 기회도 생겼고.”

흥분을 가라앉힌 레오니에가 마지막 말만큼은 차분히 말했다.

“발상의 전환이네요.”

루페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회중시계는 품에 차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으니까요.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꺼내는 것도 가끔은 번거롭고요.”

종종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만년필이 터지기라도 하면 회중시계도 덩달아 더러워지곤 했다. 손목시계는 분명 회중시계의 불편함을 해소해 줄 좋은 방안이었다.

“상품성이 있어요.”

루페가 확신했다. 레오니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아빠도 잘 생각해 봐.”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허벅지를 통통 두드리며 집중케 했다.

“아빠가 집무 중에 지금 몇 시인지 궁금해. 그럼 어떻게 할래?”

“루페 불러야지.”

만만한 게 저지요, 루페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장난치지 말고오오!”

레오니에가 짜증을 냈다. 제 흐름을 따라오지 않는 아빠가 미웠다. 그제야 펠리오가 피식 웃으며 아이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시계를 꺼내겠지.”

“하지만 손목시계는 그럴 필요가 없어!”

레오니에가 엉금엉금 펠리오의 다리 위로 등단했다. 아빠의 무릎 위에 앉은 아기 맹수는 이거 보라며 만년필 한 자루를 쥐었다.

업무를 살피는 펠리오 흉내였다.

“이렇게 일하다가, 갑자기 시각이 궁금해. 그러면 그때 이렇게!”

레오니에가 왼쪽 손목을 슬쩍 바라봤다. 토실토실 하얀 피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마치 시계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으음, 세 시 반이군.”

목소리를 낮게 깐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목소리를 따라 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레오의 간식 시간이네. 그러고 보니 우리 딸한테 재산을 좀 물려줘야 할 것 같단 말이지.”

어설픈 흉내에 멜레스와 루페가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가 그렇게 촐싹거린다고?”

반면 펠리오는 그런 딸이 하찮기만 했다. 그래도 귀여우니 봐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 자세.”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손목을 돌리며 감탄했다.

“아빠 같은 미남이 이렇게 손목을 돌리면, 여기서 다들 코피 팡팡 터트리면서 홀딱 반하는 거지. 핏줄 살짝 튀어나온 손목을 감춘 은밀한 시계! 속옷보다 야하다!”

“네 변태 취향은 둘째 치고.”

펠리오는 중간부터 나오는 레오니에의 헛소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분명 괜찮은 이야기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펠리오가 툭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사실 얼마 전부터 진지하게 고민하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레오니에가 아직 어려서 잠시 미뤄 뒀던 사안이었다. 바로 후계 수업이었다.

아직 아이가 어리고, 이제 겨우 건강해졌는데 조금 더 놀게 내버려 두고 싶은 것이 아빠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굳이 이걸 미룰 필요는 없어 보였다.

“후계 수업을 일찍 해 볼까.”

보통 귀족들이 후계 수업을 받는 평균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펠리오조차 열 살 때 본격적인 후계 수업을 시작했고, 사람들이 이를 두고 무척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

즐겁게 떠들던 레오니에의 미소에 파사삭 금이 갔다.

“몇 년 뒤에 하시려던 것 아니셨습니까?”

루페가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레오니에의 후계 수업 준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펠리오와 함께 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레오 하는 거 보니 굳이 미룰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이미 성인에 버금가는 지적 능력을 갖췄으니, 미리 배워 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진짜 진지하게 시작하려는 건 아니었다. 수영하기 전에 발목을 먼저 물에 적시는 것처럼, 딱 그 정도 수준부터 시킬 생각이었다.

“어어…….”

레오니에가 엉거주춤 펠리오에게서 떨어졌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시계가 후계 수업으로 건너가는 거지? 나 진짜 해야 하나?’

이렇게 갑자기?

“……그럼 내 청춘은?”

레오니에가 비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청춘을 말하기엔 아직 멀었다고 본다만.”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왔다. 펠리오는 청춘을 찾는 일곱 살 딸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통통 두드렸다. 레오니에가 칭얼거리며 빠져나왔다.

“시계만 만들면 안 돼?”

“이왕 하는 거면 좀 크게 해.”

“싫어. 귀찮아.”

“귀찮으면 숨도 쉬지 마.”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손에서 설계도를 다시 빼냈다.

“이걸 아예 사업으로 돌려 볼까.”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계 끈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펠리오와 루페는 말릴 틈도 없이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의견은 점점 구체화 되어 갔다. 우선 설계도에 그린 대로 물건을 만들고, 반응이 괜찮으면 본격적으로 사업을 구상하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잡혔다.

“아니면 이 사업 진행을 레오의 첫 후계 수업으로 시켜 볼까?”

펠리오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어른들의 기세와 정반대로 레오니에는 절망에 빠졌다. 아빠한테 시계 선물을 하고 싶던 착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 듣는 것만으로도 골 아픈 후계 수업으로 변질되었다.

레오니에는 서글픈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책상 너머 소파에 엎드렸다. 그리고 두 팔에 얼굴을 숨기며 빼액 소리 질렀다.

“어쩐지 내가 너무 열심이었어!”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이 난다더니. 일곱 살 애늙은이가 꺼이꺼이 통곡했다.

전부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 * *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히에이나 백작이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저희 딸아이가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매번 그러지 말라 주의시키고 크게 혼을 냈음에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죄는 반드시 하겠다며, 히에이나 백작과 남편이 끊임없이 사과했다. 보는 사람이 미안할 정도였다.

“사과를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레오니에가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며 두 사람을 말렸다. 솔직히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다.

어떡하지? 그런 마음으로 함께 온 루페를 힐끔 바라봤다. 펠리오가 시종으로 쓰라며 붙여 준 루페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참으셔야 한다.

레오니에가 알겠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나라서 그런 건가?’

보레오티라서?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사과하는 백작과 부군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히에이나 영애 때문에 많이 힘든 것 같았다.

레오니에는 저를 훔쳐보던 히에이나 영애를 떠올렸다.

“…….”

백작 부부를 충분히 이해했다.

가까스로 진정한 백작 부부는 여전히 레오니에의 눈치를 보았다.

‘나도 순수하게 온 건 아닌데.’

히에이나 영애를 빌미로 팔목에 찰 시곗줄을 구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게 되었다. 분위기는 점점 어색해지고 무거워졌다. 레오니에가 별말 없이 미소만 짓고 있으니, 백작 부부가 또 눈치를 살폈다.

“저기…….”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레오니에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저희 아이가 예전부터 많이 모자랐습니다.”

죄인처럼 움츠렸던 히에이나 백작이 다시 딸아이를 책망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둔하고 느렸지요.”

“특출나게 재능있는 점도 없었고…….”

순간 레오니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 왜 기분 나쁘지?’

불쾌할 상황이 아닌데. 레오니에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부모가 잘못을 저지른 자식을 혼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히에이나 백작 부부는 지금 뭔가 한참 잘못된 것 같았다. 물론 자식을 마냥 감싸는 것도 문제지만, 이건 뭔가 아니었다.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었다.

혹시 저만 그렇게 느끼나, 싶어 루페를 바라봤다. 루페는 완벽하게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 역시도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불쾌한 거다.

‘동정심 유발인가?’

이 모든 게 다 계획된 건가? 딸아이의 불쌍함을 돋보이게 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끝맺으려는 건가?

“하찮은 짓만 늘 골라서 했지요.”

백작이 투정하듯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예전에 저보고 비웃었어요.’

순간 우피클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펠리오를 좋아하던 어린 우피클라에게, 한참 나이 많은 히에이나 영애가 비웃으며 했던 말.

‘하찮다고요.’

레오니에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설마 그 말을…….”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레오니에가 히에이나 백작 부부에게 물었다.

“……그 말을, 하찮다는 말을 따님한테도 직접 하셨던 건가요?”

그때, 레오니에의 귀에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다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맹수의 송곳니 덕에 감각이 발달한 레오니에의 귀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둠을 머금은 은발이 흩날렸다.

지난번에 밖에서 자신을 훔쳐봤던 것처럼, 히에이나 백작 영애는 제집에서조차 몸을 숨기고 이 모든 것을 훔쳐 들었다. 그러고는 레오니에가 자신의 부모를 탓하자,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었다.

* * *

“으어어…….”

저택으로 돌아온 레오니에는 그대로 침대에 뻗어 버렸다. 피곤이 물밀듯 찾아왔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레오니에는 외출할 때 입었던 옷보다 편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묶었던 머리도 풀어졌고, 몸도 상쾌했다. 레오니에가 잠든 사이에 하녀들이 손수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아 준 덕분이었다.

평소라면 하녀 언니들을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하겠지만,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다. 낮잠을 자고도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 없었다.

창밖은 아직도 밝았다. 하지만 탁상 위에 놓인 시계는 작은 바늘이 무려 두 바퀴가 돌아갔다.

“하아…….”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레오니에가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침대 위에서는 캐노피가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무 소득 없는 방문이었다.

‘소득만 없었다면 나았어.’

정말 최악의 방문이었다.

히에이나 백작 가문은 생각 이상으로 암울했다. 부모는 오로지 제 딸만 탓하며 그 아이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듯이 부정했다. 내 자식만 잘났다고 편드는 것만큼이나 역겨웠다.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딸에게 하찮다는 폭언을 했었냐고 물어봤을 때, 그때 본 백작 부부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역겨움이 치밀었다.

‘그런데 우피클라는 그 집 아들이랑 친하게 지냈어.’

우피클라랑 어울릴 정도면 아들놈은 멀쩡한 것 같은데, 아마 그 아들놈은 히에이나 영애와 달리 우수한 모양이었다.

기대에 부합하는 아들.

그리고 부합하지 못한 딸.

“아이씨.”

짜증이 울컥 치민 레오니에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풀어헤친 머리를 엉망이 될 때까지 벅벅 긁었다.

레오니에는 어른이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자신이 무려 2년 동안 고아원 어른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당해 왔기에. 다시 떠올려도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이야 무사히 구출되어 펠리오와 잘살고 있지만, 레오니에는 아직도 그 당시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힘 있는 어른의 부당한 폭력은, 힘없는 아이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긴다.

백작 가문의 숨겨진 가정 상황을 알게 된 이상, 레오니에는 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 딸을 학대하는 부모들이었다.

‘어쩌면 히에이나 영애가 그렇게 스토커 짓을 하는 것도…….’

애정 결핍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너무 아팠다.

히에이나 영애는 항상 펠리오에게 하루에 평균 열 통 이상씩 연서를 썼다. 보레오티 사용인들은 그 편지들을 장작이라고 불렀다. 레오니에조차 편지가 오면 바로 상자에 넣어 버렸다.

그런데 만일 그 편지들이 영애의 유일한 숨통이었다면.

부모님께 하찮다고 무시당하던 여자아이가 용기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수단이었다면.

‘……아, 그래도 아니지.’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그렇다고 스토커 짓을 용서하려는 건 아니었다. 잘못은 잘못이고, 불쌍한 건 불쌍한 거였다.

다만 정말로 이 모든 것이 히에이나 영애의 애정 결핍 때문이라면, 그리고 그 원인이 부모한테서 들었던 말 때문이라면 이는 비단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말로써 다친 마음은 쉽게 낫지 않는답니다.’

에전에 아르데아가 말을 교묘하게 꼬아 자신을 비웃던 케레나 메레오카를 조심하라고 충고했을 때 했던 말이다.

그 말이 맞았다. 말로써 다친 마음은 쉽게 낫지 않는 법이다.

‘조금 위험한 수단이긴 한데.’

할지 말지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조그만 주먹을 꼬옥 쥐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일단 해 보자고 결심한 거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은색 종을 흔들었다. 예전에 코니가 설명해 줬던, 당김 줄이 없는데도 사용인들을 부를 수 있다는 마도구였다.

“코니!”

곧 문이 열리고, 코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나 머리 묶어 줘.”

그리고 편지도 준비해 줘.

화장대 앞에 선 레오니에의 표정이 비장했다.

* * *

어느새 연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레오니에는 보레오티가 된 이후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연회에 갈 준비를 비롯해 그날 연회장에서 황실을 엿 먹일 방법 연구, 아르데아가 꾸준히 보내 주는 숙제, 기사들 근육 훔쳐보기, 애독서 탐미, 아빠와 함께하는 체력 단련 및 송곳니 훈련까지. 거기다 리네 저택에도 가끔 방문해 우피클라와 피누와도 놀아 줬다.

북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플로무스와 차 모임 부인들에게도 안부 편지와 수도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보내면서 나름 북부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새로운 일정이 하나 추가되었는데, 바로 후계 수업이었다. 덕분에 바리아는 물론이거니와 히에이나 영애에 관해서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후계 수업은 생각보다 아주 쉬웠다.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집무실에 불러 매일 한 시간씩 옆에 두고 책을 읽히는 게 다였다.

책은 펠리오와 루페가 손수 골라 줬다. 책에는 본격적으로 후계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익혀두어야 할 기본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재미 하나도 없어.”

트라가 옮겨 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던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 기사단 훈련을 구경하러 가야 했었다.

“그럼 공부를 재미로 하냐.”

펠리오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잔소리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서류를 살피고 서명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했다.

“너무 싫어…….”

반면 레오니에는 테이블 위에 상체를 엎드린 채 흐느적거렸다. 불량과 반항의 끝이었다. 책 내용도 재미없고, 지루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내려고 다시 다른 책을 찾아 읽어야 하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딴 거 폰만 있으면!’

레오니에는 또 다른 세상에서 매번 접했던 문명의 이기가 간절했다.

“그냥 아빠가 결혼해서 애 한 명 더 낳으면 안 돼?”

“네 인성의 바닥은 그만 보고 싶은데.”

“정실부인 데려와서 정실 자식 낳아…….”

역시 후계자란 자리는 너무 버거웠다. 레오니에는 그냥 부모님 재산 일부 좀 탕진하면서 누구보다도 게으르게 살고 싶었다.

“나도 그 덕 좀 보고 살자. 나 진짜 입 다물고 조용히 돈만 쓰고 살 자신 있어.”

“…….”

“아빠? 응? 안 돼?”

“내가 왜 말 안 했는지 알지?”

펠리오는 하나뿐인 자식을 뭐 저런 게 다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생아란 출신 때문에 좌절을 맛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저렇게나 뻔뻔하게 그걸 악용하는 놈은 태어나 처음 봤다. 참으로 신박한 불효자식이었다.

보다 못한 펠리오가 비장의 수를 꺼냈다.

“일단 그 책들 다 읽고, 내가 낸 시험에서 만점 받아.”

“히잉…….”

“그러면 기사단 근…….”

“아빠, 조용히 좀 할래?”

나 지금 집중하잖아, 레오니에가 곧장 정색했다.

“공부 방해돼.”

그리곤 조금 전 게으름이 거짓말인 것처럼 독서에 집중했다. 흐리멍덩하던 검은 눈동자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허리까지 똑바로 펴니, 태생이 성실한 학생 그 자체였다.

“…….”

펠리오는 입술을 잠깐 멈칫했다.

‘난 뒷말은 안 했다.’

‘기사단 근’까지라고 말했다. 펠리오는 절대 근육을 구경시켜 주겠다든가, 만지게 해주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기사단 근력 운동 체험을 하게 해 주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레오니에가 근육이라면 환장을 하니까 한 번쯤은 체험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본인도 근육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고.

‘그렇게 근육이 좋은가?’

펠리오가 옷 위를 더듬거렸다. 레오니에에게 희롱당했던 가슴 근육이 잡혔다. 제 손으로 만져도 단단하게 갈라진 피부가 느껴졌다. 손을 더 내리면 가슴보다 더 많이 갈라진 복근이 있었다.

하지만 펠리오는 이에 별 감흥을 못 느꼈다. 내 몸이라 그런 건지, 제 취향이 아니라 그런 건지, 아니면 제 몸이라선지 그냥 평범했다.

그때,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빠 너무해!”

레오니에가 실망이 가득한, 그것도 무척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만지고 싶을 땐 못 만지게 하면서!”

자기도 만지게 해 달라며 징징거렸다.

“책이나 읽어라.”

펠리오는 듣는 척도 안 했다. 레오니에가 저러는 것도 이젠 그러려니 했다. 자식이란 곧 웬수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젠 허파가 뒤집히는 저런 희롱 따위야 애교에 불과했다.

이렇게 펠리오가 통달하며 사리를 쌓던 중.

“실례합니다.”

구세주처럼 트라가 등장했다.

“주인님.”

트라가 레오니에를 힐끔 살피면서 펠리오를 불렀다. 그의 손에는 편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거 내 거죠?”

뭔가를 눈치챈 레오니에가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왔다.

“나 줘요.”

“하지만 아가씨…….”

“줘요!”

레오니에가 드물게 소리를 질렀다. 기세에 눌린 트라가 얼떨결에 편지를 건넸다. 레오니에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었다. 트라가 편지용 칼을 건넬 틈도 주지 않았다.

“누구한테서 온 거지?”

설마 남자는 아니겠지, 펠리오가 트라에게 물었다. 트라가 잠깐 머뭇거렸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입니다.”

“뭐?”

맹수의 두 눈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얼마 전에 레오니에를 훔쳐봤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걸렸는데, 설마 스토커 대상을 제 딸로 바꿨을 줄이야.

펠리오가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트라! 마차 준비해 줘요!”

레오니에가 편지를 주머니에 챙기더니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레오니에!”

펠리오의 부름에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아이를 붙잡은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했다.

“지금 어딜 가려는 거지?”

펠리오가 처음으로 아이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 본인이 더 놀랐다.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레오니에가 흠칫거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무리 네가 겁이 없기로서니.”

그래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상대는 제게 매일 연서를 보내고, 가는 길을 쫓아오던 사람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레오니에마저 훔쳐봤다고 했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는 두말할 것 없는 위험인물이었다.

“널 몰래 훔쳐보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네가 왜 만나는 거냐고.”

레오니에가 혼을 내는 펠리오를 멍하니 바라봤다.

‘혼났어…….’

꿀밤이나 코를 잡히는 거랑은 차원이 달랐다. 등골에 얼음 조각이 떨어진 것처럼 전신이 싸늘해졌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곧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였다.

‘아빠가 옳아.’

이건 누가 봐도 펠리오가 정답이었다. 자기 딸이 위험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데, 어느 부모가 좋아할까. 어쨌건 히에이나 영애는 펠리오를 스토킹한 전적이 있다. 레오니에도 그것까지 봐줄 생각은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

그리곤 힘없는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펠리오와 트라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괜찮으실까요?”

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혼이 난 아가씨도 아가씨지만, 혼을 낸 주인님도 썩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자기 얼굴에 주먹을 날릴 것처럼 비관적이었다.

“매번 오냐오냐할 수는 없지.”

펠리오가 짧은 한숨을 흘렸다. 워낙 애늙은이라 잔속은 썩여도 크게 걱정 끼친 적은 없는 아이였다. 그래서 아까처럼 아이를 겁줄 만큼 혼을 내본 적도 없었다.

“너무 심했나?”

펠리오는 자신이 보통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 모습에 레오니에가 크게 놀랐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트라가 진심으로 펠리오를 위로했다. 주인의 육아 고민을 들어줄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말이다.

“아가씨께선 현명하신 분입니다. 주인님께서 화를 내신 이유를 충분히 아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트라가 볼 땐,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혼낸 건 혼낸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수선한 집무실 분위기가 겨우 풀려 가던 중에, 창문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큼직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짐과 동시에 멜레스가 황급히 펠리오를 찾았다.

“주군! 아가씨께서 기사 한 명을 협박하여 말을 끌고 나가셨습니다!”

펠리오가 이마를 짚었다.

“하아…….”

속이 타들어 가는 한숨이 바닥을 뚫을 정도로 무거웠다.

‘아가씨 대단하시네……!’

트라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모든 것이 연기였다. 풀죽은 채 고개를 숙인 것도,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던 것도. 전부 계산된 행동이었다.

트라는 순간 레오니에의 사악한 웃음이 들렸다. 영악한 재능과 뻔뻔한 연기력은 더할 나위 없는 보레오티의 차기 후계자다운 면모였다.

* * *

“아가씨…….”

프로보가 울먹거렸다. 그의 손에는 반강제로 쥔 말고삐가 있었다.

“저 진짜 나중에 주군께 죽습니다. 아가씨 이거 허락받은 외출 아니시죠?”

“그러니까 오빠를 협박했죠.”

“너무하세요, 진짜!”

그러나 레오니에는 코웃음도 안 나왔다.

“그러게 누가 럼주 쌔비래요.”

“쌔비다니요…….”

어디서 그런 상스러운 단어를 배워오셨는지, 프로보가 진땀을 흘렸다.

“이왕이면 훔쳤다고 말씀하세요.”

펠리오가 들었다면 또 뒷목 잡고 한참 굳어 있을 단어였다. 거기다 프로보는 럼주를 훔치지도 않았다.

“이거 봐! 훔쳤잖아요!”

“안 훔쳤습니다! 주방장님께 허락받고 가져간 거예요!”

요리용으로 사 놓은 것 중 한 병 받아온 게 다였다. 근무가 끝나면 동료들하고 가볍게 즐기려고 가져온 건데, 보레오티 저택은 요리에 쓰는 럼주도 최고급으로 사다 썼다. 거기에 흔들렸던 프로보가 근무 중에 살짝 한 모금 홀짝했다. 그리고 그걸 레오니에가 우연한 기회에 엿보았다.

“이 오빠는 겁도 많으면서 왜 그런 짓을 했담.”

“제발 주군께는 말씀하시지 말아 주세요.”

프로보가 간청했다.

“그럼 나 내려 줘요.”

협박을 빌미로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한 레오니에는, 후우, 하고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생각을 정리했는데도 머리가 아찔했다.

“누구를 만나시는 겁니까?”

프로보가 근처에 말을 둘 곳이 없는지 살피며 물었다. 레오니에가 가야 한다고 말한 곳은 한적한 찻집이었고, 프로보도 아는 곳이었다. 이곳은 개인실이 마련되어 있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히에이나 영애요.”

“아아, 히에이나…… 예에?”

깜짝 놀란 프로보가 큰 소리를 냈다. 그 탓에 말도 흥분해 푸르르, 거친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발을 움직였다.

“아가씨, 잠깐만요!”

프로보가 놀란 말을 진정시키는 사이, 레오니에가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편지에 적힌 호수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영애. 나예요.”

곧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으로 은색 눈동자가 끔뻑거렸다. 히에이나 영애였다.

“호, 혼자 오신 건가요?”

처음 듣는 히에이나 영애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소심한 성정이 느껴졌다. 레오니에는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스토킹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오시는 건 좋지 않아요.”

히에이나 영애가 조심히 말했다. 레오니에도 거기엔 동감했다.

“지금 밑에 기사 한 명이 있어요.”

곧 올라온다는 레오니에의 말대로,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진이 쭉 빠진 프로보가 히에이나 영애를 보고는 다시금 경계를 내비쳤다. 문을 쥔 히에이나 영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오니에 혼자 태연했다.

* * *

카페에 마련된 개인실은 무척 협소했다.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 거기다 의자가 너무 낮아서, 레오니에가 앉으니 눈앞이 바로 테이블이었다. 아기 맹수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결국 프로보가 카페 주인한테 받아온 방석 세 개를 받아 왔다. 그제야 레오니에는 겨우 히에이나 영애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기사님은…….”

히에이나 영애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시선은 굳게 닫힌 문을 가리켰다. 문밖에는 프로보가 대기 중이었다. 사실 그도 이곳에 있겠다고 말했지만, 레오니에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밖에 있기로 했다.

“지금은 우리 둘 이야기가 중요해요.”

“그래도요…….”

“만일 영애가 이상한 짓을 한다면…….”

톡톡, 레오니에가 제 입 안 송곳니를 가리켰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맹수의 송곳니를 꺼내 꿰뚫어 버리겠단 뜻이었다. 뜻을 알아챈 히에이나 영애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괴상한 만남이야.’

문득 지금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혀서, 레오니에가 설핏 웃었다.

스토커와 피해자라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러니 일단 대화를 위한 전제 조건은 확실히 해야 했다.

“나는 영애가 우리 아빠한테 한 짓을 용서할 생각은 없어요.”

“…….”

“얼마 전에 나를 훔쳐본 것 역시도요.”

비록 히에이나 백작가의 암울한 순간을 목격하고야 말았지만, 레오니에는 그런 동정으로 히에이나 영애를 용서할 마음을 추호도 없었다.

“…….”

히에이나 영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은 알고 있나 봐.’

맹수의 송곳니가 발달한 덕에 그 정도는 제법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반성의 기미를 보여 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바로 아빠한테 이르려고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히에이나 영애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레오니에가 그런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야기가 아예 안 통할 것 같진 않았다.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분명 공작님과 영애께 민폐를 끼쳤어요.”

“그랬지요.”

“…….”

히에이나 백작 영애가 죄송한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오가는 대화가 없자, 어색한 침묵이 순식간에 퍼졌다. 양쪽 다 함부로 말을 꺼내기 불편한 상황이었다.

“실은 말이지요.”

보다 못한 레오니에가 콜록, 헛기침을 토하며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눈치 보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유일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다.

“영애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에. 그래서 제게 편지를 보내셨지요?”

히에이나 영애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테이블 아래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레오니에는 그녀가 손에 힘을 꽉 쥐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마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이걸 부탁하고 싶어요.”

레오니에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손수건으로 소중히 감싼 건 크기가 작은 시계와 웬 종이 하나였다. 종이를 펼치니, 거기엔 시계 양쪽에 연결할 끈이 그려져 있었다.

“혹시 이거 만들어 줄 수 있어요?”

레오니에가 슥, 종이를 건넸다. 그러자 히에이나 영애가 허둥거렸다. 눈에 띄게 놀란 듯했다.

“저, 저기, 이게 무언가요?”

“영애께 부탁할 거요.”

“하지만 저는……!”

히에이나 영애가 각오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분명 며칠 전 저택에서 드러난 자신의 치부에 대해 말할 거라 예상했다.

“히에이나 영애.”

느긋이 팔짱을 낀 채, 레오니에가 한마디 툭 던졌다.

“당신은 자신을 진정 하찮다고 생각하나요?”

“……!”

히에이나 영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불안한 듯 살짝 깨문 입술은 새하얗게 질려 갔다.

“내가 볼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레오니에는 결코 스토커를 편들 생각이 없었다.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할까. 그럴 바에야 고아원 선생들한테 과자 부스러기를 주지.

하지만, 분명한 건 히에이나 영애는 하찮다는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우리 아빠를 동경했던 그 깡다구는 엄청나다고 생각해요.”

어지간한 깡과 끈기가 없으면 못 할 짓이었다. 그런 재능을 스토킹에 쓴 게 문제다만, 적어도 레오니에는 그 점만큼은 인정했다.

예상치 못한 칭찬을 받자, 히에이나 영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님 뭐, 우리 아빠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감탄하려던 찰나였다.

“아니에요.”

그러자 히에이나 영애가 서둘러 답했다. 진지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하지만 곧 흠칫하고는 고개를 팍 숙였다. 레오니에는 그런 히에이나 영애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자신의 확신대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크게 결여된 사람이었다.

“미, 믿어 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로 공작님을 존경하고 은애하고 있어요.”

“어째서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빠의 어딜 보고요? 얼굴? 돈? 역시 돈?”

절레절레, 히에이나 영애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영애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리곤 조용히 품었던 마음을 조심조심 꺼내었다.

“저는 남보다 느려서, 가족들에게 늘 걱정만 끼쳤어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지요.”

거기다 뒤에 태어난 남동생은 한참 어린데도 무엇이든 잘 해내는 아이였다. 부모님의 기대와 관심은 자연히 동생에게로 향했다.

“사람 사귀는 것도 서툴러서, 좀 많이 겉돌았어요.”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내는 이야기치고는 음울했다.

레오니에는 후회했다.

‘이씨, 괜히 물었어.’

괜한 걸 물어서 애먼 동정심만 듬뿍 생기고 말았다. 히에이나 영애의 가정사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우울할 줄은 몰랐다. 이건 우울에 젖은 게 아니라, 빠진 수준이었다.

‘그런다고 저 언니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만.’

레오니에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눈앞에 있는 스토커는 하루에 열 통 전후로 꾸준히 편지를 보내고, 저보다 한참 어린 우피클라에게 하찮다고 욕한 사람이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레오니에가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히에이나 영애가 이제 막 펠리오에게 반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공작님은 대단하세요.”

펠리오를 떠올리자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많은 귀족이 그분을 무서워해 늘 뒤에서 수군거리지요. 하지만 공작님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셨어요.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세요!”

레오니에의 눈썹이 꿈틀댔다.

“마지막 말은 욕인데요……?”

“저는 그 점에 반했어요.”

“언니, 내 말 안 들려요?”

레오니에가 다시 불렀다. 그러나 이미 히에이나 영애는 저만의 세상에 푹 빠져 있었다.

‘스토커란…….’

이래서 무서운 거군, 레오니에가 결국 테이블을 쾅쾅 쳤다. 그제야 히에이나 영애가 정신을 차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두 찻잔도 들썩거렸다. 마시지 않아 그대로인 찻물이 출렁거렸다.

다시금 조용함이 내려앉은 뒤에야,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언니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어느새 레오니에는 히에이나 영애를 편하게 불렀다.

“그리고 이해도 했어요.”

자칫 모든 걸 용서할 만큼 안타까운 사정이었다. 물론 영특한 아기 맹수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살짝 그럴 뻔했지만, 야무지게 정신을 다잡았다.

“용서까지는 아니어도,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네요.”

레오니에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기회를 한 번 줄게요.”

레오니에가 아까 보여 줬던 종이를 다시 내밀었다.

“이거, 할 수 있겠어요?”

* * *

카페를 나서기 전에.

“내 말 명심해야 해요.”

레오니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맞은 편에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히에이나 영애의 손에는, 아까 레오니에가 내밀었던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건 날 훔쳐본 걸 용서받을 기회예요.”

그동안 펠리오에게 저지른 잘못까지 싸잡아 취급하는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우피클라한테도 사과해요.”

“……네.”

“그럼 조심히 가요.”

“저, 저기!”

프로보에게 안겨 말에 올라타려던 레오니에를, 히에이나 영애가 황급히 불렀다.

“그러니까, 저기…….”

히에이나 영애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호, 혹시, 그러니까, 편지를…….”

“…….”

“영애에게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나한테요?”

끄덕끄덕, 푸른 은발이 맥없이 흔들렸다. 본인이 말하고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든 모양이었다. 히에이나 영애는 레오니에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흔쾌히 말했다.

“정상적인 편지라면, 좋아요.”

편지를 한 통씩 주고받는 형식이라면 상관없었다. 레오니에는 편지를 쓰는 걸 좋아했다. 편지 친구가 늘어나는 건 환영할 일이었다.

히에이나 영애의 표정이 밝아졌다. 레오니에는 꼭 개 한 마리를 주운 기분이었다.

히에이나 영애가 먼저 가고, 레오니에는 프로보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올 때야 급한 마음에 말을 타고 왔지만, 아직 레오니에가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마차를 빌려 탔다. 몰고 온 말은 프로보가 대신 타고 갔다.

가는 길에 프로보가 마차 창문을 열었다.

“아가씨 대단하시네요.”

그리고 꾹 참았던 말을 겨우 꺼내었다.

“저 같으면 저런 사람이랑 말도 안 섞을 건데.”

프로보는 아직도 히에이나 영애가 탐탁지 않았다.

“이야기해 보니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서요.”

정작 레오니에는 태연하다 못해 멀쩡했다. 겁먹은 기색조차 없었다.

“정말 간도 크십니다.”

프로보가 혀를 내둘렀다. 보레오티가 ‘일반’이란 기준을 벗어났다는 건 이미 경험한 바였다. 그러나 저를 스토킹한 사람까지 저렇게 포용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안 찝찝하세요?”

프로보는 혹여 히에이나 영애가 주군 가족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특히 어린 아가씨께서 배신이라도 당하면 큰 상처를 입을 게 틀림없었다.

“왜 걱정을 해요?”

반면 레오니에는 도리어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또 그러면 그땐 죽을걸요?”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야 뭐, 내가 기회 주고 속은 거니 할 말 없지만서도.”

“서도?”

“아빠는 아닐걸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빠는 딸과 관련된 일이라면 지극했다. 용서나 기회 따위는 꿈에서도 얻지 못할 거다. 검은 맹수는 철저한 응징과 후회만을 선사할 거다.

프로보가 침묵으로 동의를 대신했다.

“하지만 말이지요.”

레오니에가 크게 간과한 사실 하나가 있었다.

“이번엔 아가씨께서 주군께 크게 혼나지 않을까요?”

프로보는 이미 오싹했다. 저택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흉포한 기운이 도사라기 시작했다.

“……워워!”

순간, 마부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달리던 녀석들이 갑자기 왜 이래?”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말들이 느닷없이 속도를 줄였다. 그리곤 겁에 질린 것처럼 푸르르, 입술을 떨며 안절부절못했다.

“저, 기사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말들이…….”

“아니. 괜찮습니다.”

프로보가 사과하려는 마부를 말렸다. 왜냐하면, 봤기 때문이다. 검은 맹수가 저택 입구에 떡하니 서서 딸내미를 마중 나온 모습을.

훗날 프로보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동료 기사들에게 이렇게 표현했다.

지옥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고.

* * *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레오’라 불렀다.

이는 두 부녀가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는 증거였고, 펠리오가 이 세상에서 레오니에에게만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가 누군가를 애칭으로 부르는 건 제 딸이 유일했다.

레오니에는 그 사실이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무서운 아빠가, 저에게만 친근하게 애칭으로 불러 준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가끔은 괜히 이름만 불러 보라고 조를 때도 있었다. 부드러운 저음으로 불리는 저의 이름은 마치 자장가 같았다.

“레오니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잘근잘근 이름을 씹어 부르는 목소리에서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북부 산맥처럼 커다란 펠리오의 발치 아래, 레오니에가 콩 벌레처럼 어깨를 웅크린 채 섰다.

이름에다 성까지 완벽하게 다 불렸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빠…….”

레오니에가 힐끔힐끔 펠리오 눈치를 살폈다.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동자가 봐주는 것 없었다.

“……헤헤.”

슬쩍 눈치를 살피던 레오니에가 헤벌쭉 웃었다.

“내가 잘못했어.”

팔다리를 배배 꼬면서 혀짧은 소리를 냈다. 평소라면 목에 검이 들어와야 했을 애교였다. 하나 지금은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아빠아앙.”

그리곤 슬금슬금 펠리오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제 안 그럴게엥.”

어엉어엉, 레오니에가 어깨까지 떨며 아양을 부렸다.

“……진기한 광경이네.”

“그러게요.”

2층 계단 난간에서 몰래 내려다보고 있던 루페와 트라가 속닥거렸다.

천하의 검은 맹수에게 온갖 애교와 아양을 떨며 용서를 구하는 아기 맹수라니. 이만한 구경거리는 제국 어디에도 없었다.

“공작님이 여기서 용서한다는 데 술 한 잔 걸까?”

“저도 그쪽에 걸고 싶었는데.”

“이건 먼저 하는 게 임자지.”

은밀한 내기가 시작되던 찰나였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펠리오가 제 다리에 달라붙은 레오니에를 잡아 떨어트렸다.

“어…….”

순식간에 아빠에게서 떨어진 아기 맹수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 막 자신한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건 난간 위에서 구경하던 루페와 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닐 텐데.”

차가운 목소리가 현관 홀을 가득 채웠다. 레오니에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숨어 지켜보던 사용인들마저 숨을 헉, 하고 멈출 정도였다.

“너는 내가 진짜 우습지?”

레오니에가 멍하니 있다가 이내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했다간 평소처럼 우습게 보인다고 농담할 뻔했다.

“분명히 내가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말했지?”

“아빠…….”

“그런데 내 허락도 없이 나가?”

“…….”

“그것도 아직 안 익숙한 말까지 타고?”

모두가 예상치 못한 흐름이었다.

펠리오는 앞에서는 딸 바보, 뒤에서는 딸 등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레오니에를 편애했다. 이 사실은 이제 북부를 넘어 제국의 상식으로 자리잡혔다.

솔직히 다들 펠리오가 마지못해 레오니에를 용서할 줄 알았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레오니에는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였다. 송곳니가 어설프다고 한들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하니,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레오니에랑 같이 있었던 프로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히에이나 영애가 레오니에의 기회를 배신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걱정했지, 결단코 아가씨에게 위해를 가할 거라곤 생각도 않았다.

그 탓에 다들 펠리오가 평소처럼 적당히 혼낼 거라고 여겼다. 레오니에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히에이나 영애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하지만 펠리오는 아니었다.

“내 속이 어땠는 줄 알아?”

펠리오가 아이를 울릴 것처럼 작정하고 화를 냈다. 그러나 단순히 제 말을 듣지 않은 아이를 향한 힐책 따위가 아니었다. 아이를 응시하는 검은 눈에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놀람, 당혹, 걱정, 안심.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들은 전부 레오니에를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펠리오는 그저 소중한 딸이 위험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는 그 사실 자체에 신경이 곤두섰다. 레오니에가 얼마나 강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자식을 위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너는……!”

격양된 목소리가 일순 끊어졌다.

펠리오는 너무도 답답했다. 이 애늙은이는 아빠가 한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애교나 징징 부리고 있다. 펠리오의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건 당연했다.

레오니에가 돌아오기 전까지 펠리오는 돛단배나 다름없었다. 언제 파도가 멈출지 모르는 거센 바다 위에 뜬 나무 돛단배.

“……히끅.”

레오니에가 딸꾹질을 했다. 동그랗게 커진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걱정했어?”

가까스로 딸꾹질을 멈춘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럼 안 해?”

펠리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질문 자체가 기가 막혔다.

“딸인데 당연히 걱정하지.”

“…….”

“내가 진짜, 아까만 생각하면…….”

뭐라 말하려던 펠리오가 결국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했다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될 짓이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고아원에서 당했던 부조리를 잊지 않았다. 그러니 결코 아이에게 큰소리로 겁박하거나 어떤 체벌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감정 기복이 너무 커서 자칫하단 큰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후우.”

묵직한 한숨을 뒤로한 채, 펠리오가 몸을 돌렸다.

“저녁 먹을 때까지 방에 있어.”

그때 즈음엔 자신도 어느 정도 진정할 것 같았다. 지금 상태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못 할 것이 분명했다. 펠리오 자신조차 믿기지 않을 만큼 정신이 산만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아, 아빠!”

레오니에가 후다닥 달려와 불쑥 앞을 가로막더니, 냅다 펠리오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곤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사랑한다고 말해!”

쿨럭! 위쪽 난간에서 사레들린 소리가 났다. 루페였다.

“……뭐?”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장난 아니야!”

이거 보라며, 레오니에가 다리에 매달린 전신에 힘을 꽈악 주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단 각오였다. 펠리오는 억세어진 압박감에 입술 끝을 살짝 비틀었다. 조금 아팠다. 레오니에가 그간 해 온 꾸준한 체력 단련 덕이었다. 물론 펠리오는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두 번 안 말한다. 내려.”

“사랑한다고 말하면.”

“레오니에. 너 지금 나한테 혼나는 중이다.”

“그러니까 말해!”

오기 어린 목소리가 빼액, 시끄러웠다.

“혼나도 마음 놓고 혼날 수 있게 사랑한다고 말해 줘!”

레오니에는 히에이나 영애와 만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론 자신이 아빠 속을 썩였다는 자각은 했다. 다만 평소처럼 농담 몇 번 주고받으며 넘어갈 수준이라 여겼다.

혼나 봐야 얼마나 혼날까. 약간만 애교를 부리면 늘 그러했듯 넘어갈 거란 자신이 있었다. 펠리오는 제게 물렀다. 기껏 혼내는 것도 언제나 코를 살짝 잡는 게 전부이지 않았던가.

이게 패착이었다.

초보 아빠는 혹여 아이가 겁먹을까, 쉽사리 화도 내지 못한 거였다. 그만큼 아이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펠리오가 작심을 하고 혼을 냈다. 위험한 사람을 만나고 온 것도 모자라, 아직 익숙하지 않은 승마까지 멋대로 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펠리오의 걱정은 인내심을 넘겨 버리고 말았다.

사납게 일그러진 아빠의 얼굴은 무척 괴로워 보였고, 레오니에는 마음이 아팠다. 미안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뒤늦게 불안감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혹시 엄청 실망했으면 어쩌지.

저러다 화가 안 풀리면 어쩌지.

아빠한테 미움받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안심하고 마음을 잡게 해 준 유일무이한 가족이었다. 미움받는 상상만으로도 레오니에는 발밑이 꺼진 것처럼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래서 무작정 고집을 부렸다.

“아무 벌이나 받을 테니까, 나 안 싫어한다고 해 줘!”

얼마나 유치한 소리인지, 레오니에 본인도 말해 놓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정말로 펠리오에게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진짜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레오니에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동안.

“넌 도대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말하려던 펠리오가 멈칫했다. 자신은 지금 딸아이가 걱정되어서 혼을 내는 거지, 싫고 미워서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레오니에를 걱정해서 독한 마음을 먹고 지른 훈육이, 아이가 고아원에서 받았을 끔찍한 상처를 건드린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펠리오는 등골이 섬뜩하게 식어 갔다. 얼굴이 험악한 저를 보고도 태연한 이 애늙은이가, 지금 혼을 내는 자신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낀다면 아주 큰 충격이었다. 누가 목 뒤를 얼음송곳으로 찌른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조물조물.

“…….”

그러나 다행히도.

조물조물.

저의 하나뿐인 딸은 심각할 틈을 안 줬다.

“레오.”

펠리오가 조용히 아이를 불렀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애칭을 불렀다. 허벅지를 더듬던 손길이 움찔 멈췄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넌 징해.”

혼나는 순간에도 근육을 탐하다니. 이 정도면 정말 장인 정신에 버금가는 변태 취향이었다.

덕분에 아찔했던 설마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레오니에의 근육 희롱이 처음으로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 안 더듬었어…….”

“그럼 내가 느낀 건 뭔데?”

“먼지 떼 준 거야.”

레오니에가 허둥거리며 핑계를 댔다. 평소 당당히 희롱하는 모습과 사뭇 달랐다.

“기가 막혀서…….”

말끝을 흐린 펠리오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에 자신이 걱정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레오니에도 똑같은 단어를 쓰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사르르 풀렸다.

“……헤헤.”

레오니에의 얼굴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뭘 잘했다고 웃어.”

“헤헤, 이제 화 풀렸지?”

“아니.”

펠리오의 즉답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좀생이.”

“이게 혼이 덜 났군.”

커다란 손이 아이의 콧등을 툭툭 건드렸다.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코를 가렸다.

“아니야, 다 혼났어.”

“너는 반성의 기미가 안 보여.”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반성한 게 아빠 허벅지를 더듬어?”

자식 교육을 한참 잘못했다며, 펠리오가 저 자신을 탓했다.

“맞아, 다 아빠 탓이야.”

레오니에가 위로랍시고 허벅지를 도닥였다.

“원래 검은 머리 짐승은 데려오는 게 아니랬어. 자업자득이지, 뭐.”

“그게 네 입으로 할 말이냐.”

펠리오가 눈을 가볍게 흘겼다. 하여튼 한마디를 안 졌다. 게다가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온 건지, 보레오티가 보레오티를 부정하는 궤변을 어르신처럼 중얼거리고 있다.

어디 한 대 쥐어박으면 속이라도 풀릴까 싶지만,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저를 바라볼 때면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왔으니 됐다.”

무사히 돌아왔다.

정말 그거면 됐다.

부녀 싸움의 패자는 펠리오였다. 어차피 뻔한 결과였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이리 와.”

펠리오가 몸을 낮춰 두 팔을 벌렸다. 레오니에가 활짝 웃으며 품에 안겼다. 번쩍 들린 아이는 떨어질세라 냉큼 아빠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빠, 사랑해.”

품에 안긴 레오니에가 혀 짧은 소리로 아부했다.

“너도 솔직히 찔리긴 하지?”

그러니 네가 이렇게 아양을 떠는 거지,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입술을 가볍게 찰싹였다.

“어쨌건 설교는 있을 거다.”

“짧게 해 줘.”

“벌도 있을 거고.”

“에이, 설교가 벌 아냐?”

“그럴 리가.”

펠리오가 같잖다는 듯이 피식했다.

“내가 공부 좀 했지.”

기대해도 좋다는 펠리오의 미소가 흉흉했다.

“……그리고.”

펠리오의 시선이 2층 난간 위를 향했다.

“네놈들 둘은 감봉이다.”

감히 내 딸로 술 내기를 해? 검은 맹수가 눈을 서슬 퍼렇게 반짝였다.

“……루페 아저씨 운다.”

레오니에가 흐느끼는 소리가 나는 난간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 * *

설교는 저녁 식사 후에 짧게 끝났다.

다시는 그런 위험한 사람을 함부로 만나지 말 것, 만일 가더라도 호위 기사를 대동할 것. 그리고 말을 타고 이동하는 건 아빠 허락 없이는 절대 하지 않을 것.

“만약 또 그러면, 네 근육 탐미를 어떤 식으로든 금지할 거다.”

“아악!”

레오니에가 절규했다. 너무도 끔찍한 벌이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여기서 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네 방을 꽃무늬가 만발한 분홍색으로 꾸밀 거다.”

“싫어! 너무 싫어!”

“벽에는 ‘천사와 사냥꾼’ 동화책을 벽화로 그릴 테다.”

성범죄 미화 동화책으로 방을 꾸미고 싶거든 또 그래 보라며 펠리오가 말했다.

레오니에가 기어코 주저앉았다.

“그냥 패! 한 대 치라고!”

펠리오가 그런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 때보다 인자한 그 모습이 사악하게만 느껴졌다.

“다 널 위한 아빠의 마음이다.”

펠리오는 저의 설교가 통해서 뿌듯했다. 역시 체벌이 능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곧장 벌이 내려졌다. 준비물은 자그마한 어린이용 의자였다. 펠리오는 손수 의자를 거실 한쪽 구석에 두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질문하는 레오니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 맞아.”

펠리오가 의자를 가리켰다. 어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레오니에는 죽상인 채 의자에 앉았다. 바로 앞에는 평소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벽지가 있었다. 기분이 참담했다.

“그리고 이것까지.”

이내 아이의 목에 웬 끈이 걸렸다. 끈에는 커다란 종이가 매달려 있었다. 레오니에는 찬찬히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아빠 말을, 듣……!”

적힌 문장을 읽다 만 레오니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빠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럽게 이게 뭐야!”

“뭐긴. 네 벌이지.”

“둘 중 하나만 해!”

생각하는 의자와 잘못 목걸이 두 개를 동시에 하다니, 사악해도 너무 사악했다.

“벌줄 거면 내 방에서 줘!”

심지어 이곳 거실에는 여러 사용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레오니에가 앉은 의자 뒤로 펠리오의 술상이 차려졌다. 레오니에가 뒷목을 붙잡았다.

‘온더록스잖아!’

양주와 얼음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안주는 없었다.

“아빠아아.”

레오니에가 앉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양주엔 생선도 괜찮은데. 밀가루 옷 입혀서 기름에 튀긴 듯이 구워 먹어봐. 그땐 잔에 얼음 빼고 마시는 게 더 좋아!”

기름을 살짝 머금은 담백한 생선 한 입 먹고, 그 뒤에 음식을 양주로 씻어 내릴 때 찾아오는 행복이란.

레오니에가 군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자신이 지금 저 술을 마시는 것처럼 짜릿한 표정을 지었다. 반쯤 감긴 눈초리가 주정뱅이 뺨칠 정도였다.

“너 그건 또 누구한테 배웠어?”

펠리오가 못마땅한 눈빛을 지었다. 쪼그마한 게 틈만 나면 술타령을 하고 있으니 문제가 심각했다. 북부에서도 종종 기사들을 찔러 술 한 모금 얻어 마시려고 꼼수를 부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물론 다 실패로 끝났지만.

“……고아원?”

레오니에가 변명했다.

“말끝이 왜 물음표지?”

“내가 거기서 배운 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

실제로 레오니에는 고아원 선생님들한테서 많은 걸 배웠다. 악이며 깡이며, 지저분하고 사악한 건 전부 그곳에서 경험했다.

“하여튼 그…….”

뒷말이 짓이겨져 제대로 안 들렸지만, 펠리오는 분명 고아원 선생님들을 욕했다. 북부 지하 감옥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목숨이 더욱 위험해졌다.

“잡담은 이 정도로 하고.”

어느 정도 투덜거림을 다 받아 준 뒤에야, 펠리오가 술상과 함께 온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조그만 시계 속 모래가 다 떨어질 동안 벽보고 반성하는 게 오늘의 벌이었다.

“어휴, 내 팔자야.”

레오니에가 반쯤 체념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래야 한담.”

“말이 많다, 일곱 살.”

술과 함께 서류를 살피던 펠리오가 잔소리했다.

“네가 오늘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대로 반성해.”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하면.

레오니에가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친 채 불량스럽게 앉았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들어갈 줄을 몰랐다. 등받이에 상체를 거의 눕힌 레오니에는 벽지에 그려진 무늬를 하나씩 세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기를 아주 잠깐.

“……레오.”

펠리오가 한 손을 소파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내가 벌서라고 했지?”

손에 잡힌 아이의 볼살이 쭈욱 늘어났다. 레오니에는 어느새 펠리오가 기대 누운 소파까지 다가왔다. 잘못 목걸이는 의자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아야야야.”

볼을 잡힌 레오니에가 아픈 소리를 냈다. 하지만 펠리오가 힘 조절을 한 덕에 크게 아프지 않았다. 일종의 엄살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내려오다니.”

“그치만 재미없는걸!”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다.”

이깟 것도 못 참아서 나중에 뭘 하겠냐며 잔소리했다. 하지만 펠리오는 그 이상 강하게 나가지 못했다. 그는 언제고 아이에겐 약한 아빠였다.

심지어 배 위로 레오니에가 철퍼덕 눕는 것까지 눈 감고 봐주었다. 나날이 묵직해지는 아이의 무게는 펠리오에게 무척이나 반가운 변화였다.

“반성은 했냐.”

펠리오가 모래시계를 힐끔 보며 말했다. 유리관 속 모래는 반도 채 흐르지 않았다.

“……조금?”

레오니에가 엄지와 검지를 아주 살짝 떨어트리며 말했다.

“이 뻔뻔한 녀석.”

딱 봐도 안 한 티가 났다. 그런 생각이 담긴 눈으로 물끄러미 아이를 응시했다. 레오니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애들은 다 이렇게 크는 거야. 부모님 속을 적당히 썩이는 맛도 있어야 키우는 재미가 있지.”

“그걸 네가 말하지 마.”

이 애늙은이를 도대체 어떻게 키워야 하나, 펠리오는 새삼 머리가 아팠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하! 재밌어!”

레오니에가 꺅꺅 웃었다. 한숨으로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 덕에 아이의 몸이 들썩거렸다. 펠리오가 시끄럽다며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아빠, 화는 다 풀렸어?”

아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레오니에가 물었다.

“……그래.”

펠리오가 아이의 손가락을 잡아 막으며 말했다. 풀린 지 오래였다. 애초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걱정되어 평소보다 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뭐하고 온 거야.”

펠리오가 뒤늦게 레오니에의 외출에 대해 물었다.

“손목시계 만들고 왔어.”

레오니에가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틈에 소파 아래까지 쪼르르 물 흐르듯 내려왔다.

“손목에 찰 시곗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 히에이나 백작한테 직접 부탁하느니, 차라리 영애한테 조용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

“그건 그렇군.”

펠리오도 동의했다.

손목에 시계를 찬다는 발상은 기발했다. 상업적으로도 가치가 높았다. 이런 귀한 것을 히에이나 백작 부부 같은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차라리 히에니아 영애한테 맡기는 게 나았다. 스토커 전적이 마음에 걸리지만, 적어도 그간 저지른 일이 있으니 입을 함부로 나불대지 않을 테다.

“난 그 사람들 싫어.”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말했다.

“자기 딸한테 하찮다고 욕하는 건 나쁜 짓이야.”

“그런 말을 했다고?”

펠리오가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그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자식 차별을 많이 해.”

이때다 싶은 레오니에가, 자신이 아는 걸 전부 말해 줬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야기를 전부 들은 펠리오가 딱 한마디 했다. 혐오가 가득한 감상이었다.

히에이나 백작 가문에서 늦둥이 장남을 애지중지하는 사실은 귀족 사회에서 유명했다. 그 집 장남이 우피클라와 친구인지라, 카니스에게서도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똑똑하고 착한 아들이라며 백작 부부가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고.

반면 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펠리오는 그게 단순히 저를 스토킹하는 딸이 부끄러워 말을 아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오니에의 말을 들으니, 그 이전부터 딸에게 몹쓸 짓을 해 온 모양이다.

“나는 그 언니가 그렇게 된 건, 부모 탓이 많다고 생각해.”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부모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치, 아빠?”

“당연하지.”

펠리오가 아이의 머리를 찬찬히 넘겨주며 말했다.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앞머리를 힘줘 바싹 쓸어버리니 레오니에가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곧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났다. 폭신폭신한 융단 덕에 넘어져도 아프지 않았다.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군.’

그간 했던 짓들을 쉬이 용서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면 어느 정도는 봐줄 생각은 있었다.

물론 그러고도 잘못을 반복한다면 모든 것이 끝날 테지만.

“그래서, 잘 될 것 같아?”

그 손목시계라는 거.

펠리오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날 뭐로 보고.”

레오니에가 씨익 웃었다.

“보고 놀라지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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