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외출
벨리우스 제국 수도에는 무척 유명한 서점 하나가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커다란 서점인 그곳에는 이른 오전부터 손님들이 꾸준하게 찾아왔다.
매일 발간되는 신문부터 취향껏 발간된 잡지, 건물 전체에 진열된 수많은 서책까지. 거기다 독서를 위한 용품도 따로 판매 중이었다.
항상 사람이 들끓는 이곳에, 검은 마차 한 대가 정차했다.
“……야, 야아!”
서점 가판대를 구경하던 누군가가 동행의 옆구리를 퍽퍽퍽 찔렀다.
“아씨, 왜……!”
짜증을 내던 동행의 손에서 막 사려고 집어 들었던 잡지가 툭 떨어졌다.
바로 어제 들어온 따끈따끈한 잡지이고, 팔려고 내놓은 새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검은 마차는 전장을 헤집고 돌아온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차를 끌고 온 커다란 흑마 역시 어지간한 군마와 비교해도 훨씬 크고 우람했다. 말이 가볍게 말발굽을 구르며 푸르르, 소리를 내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히익, 하며 움찔거렸다.
“보레오티 공작…….”
숨을 죽인 목소리가 조용한 서점 앞에 홀로 울렸다. 마차에 새겨진 문장, 입을 크게 벌린 채 포효하는 검은 사자는 북부의 주인이신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상징이었다.
곧 펠리오가 마차에서 내렸다.
한껏 뒤로 넘긴 검은 머리, 그 아래 제대로 자리 잡은 훤칠한 이목구비는 잘생기다 못해 저 혼자 다른 세상 미모였다.
아득한 검정을 품은 눈동자는 날카로웠고, 색이 옅은 입술이 훔치고 싶을 정도로 도톰했다. 거기다 날씨가 점점 더워진 탓에 얇게 차려입은 옷 위로 다부진 체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걸을 때마다 옷이 짱짱하게 당겨졌다.
“어쩜…….”
“세상에나……!”
젊은 귀부인들이 애절한 신음을 흘렸다.
“유모! 유모오오!”
“무서워! 으아앙!”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빼액, 울부짖으며 자지러지기 바빴다.
그때, 펠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따뜻하고 시끌벅적한 광장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힐끔힐끔 지켜보던 사람들이 시선을 황급히 돌리며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모두 아이의 울음에 공작이 신경이 거슬려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빠.”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공작의 발치로 향했다. 아무도 눈치 못 챘던 작고 귀여운 존재가 토끼처럼 묶은 머리를 총총 흔들었다. 보레오티 공작을 빼닮은 어린아이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천이 부드럽고 얇은 망토에 하얀 셔츠, 파란 반바지를 입은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까만 눈동자에는 위풍당당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여기가 서점이야?”
레오니에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점 건물을 1층에서부터 건물 끝까지 쭈욱 올려다봤다. 그러다 뒤로 휘청거렸고, 펠리오가 재빠르게 아이의 뒤통수와 등을 받쳤다.
“까불지 말고 조심히.”
“안 까불었어. 건물 본 거야.”
“쯧, 이리 와.”
펠리오가 몸을 낮춘 채 팔을 넓게 벌렸다. 그 속에 쏙 들어간 레오니에는 곧 부웅 하고 높이 떴다. 보레오티 공작은 아이의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넘겨주며 정리했다.
레오니에는 그동안 자신들에게 꽂힌 수많은 시선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눈.’
오동통한 손가락이 상대의 눈을 가리키더니.
‘깔아.’
휙, 하고 아래를 가리켰다. 가리킴을 당한 사람들이 후다닥 눈을 깔았다.
조금 전까지 아빠 옆에서 방실방실 웃고 있던 아기 고양이는 사라졌다. 대신 쓸데없이 자신들을 쳐다보는 과도한 시선이 귀찮고 짜증 나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맹수 한 마리만이 있었다.
“레오.”
“응?”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지 마.”
펠리오가 등을 도닥이며 한마디 했다. 그는 이미 이런 시선에 학을 뗀 지 오래였다.
“그치만 우린 구경거리가 아닌걸.”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보레오티 광장에서도 외출하면 종종 겪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구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부의 주인께 예의가 아니라며 일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정말 대놓고 사람을 관찰하고 구경했다.
“수준이 낮아서 저래.”
펠리오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렇다고 네가 이해하란 뜻은 아니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과 상종하지 마. 턱을 세우고 당당하게 걸어. 시비 거는 놈들은 기사들을 시켜 신원 파악해서 나한테 보고하고.”
“그 사람은 아빠한테 죽겠구나.”
누군지 모르겠으나, 레오니에는 부디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한테 걸리면 그놈은 죽는 것보다 못한 경험을 겪게 될 테니까.
양심을 오지게 패버리는 대화에 굳은 사람들을 뒤로한 채, 맹수 부녀는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내딛기 무섭게 서점 직원들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넌 가서 책 구경하고 있어.”
품에서 내려온 레오니에는 호위로 따라온 멜레스의 손을 잡았다. 레오니에가 나중에 보자며 손을 짧게 흔들었다.
펠리오는 아이가 기사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까까진 사람들 시선에 예민하더니, 벌써 기분이 풀렸는지 재잘재잘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고, 공작님…….”
그때, 슬그머니 서점 주인이 다가왔다. 보레오티 공작의 행차에 서둘러 달려온 서점 주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땀을 손수건으로 대충 훔친 주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인사했다.
“차, 찾으시는 거 있으십니까?”
서점 주인의 공손한 물음에도 펠리오는 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 레오니에가 올라간 계단을 바라보던 펠리오가 느릿느릿 고개를 움직였다.
“책을 몇 권 주문하지.”
“아, 예!”
주인이 계산대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펠리오가 책 이름 몇 권을 곧장 불렀고, 주인은 빠르게 받아 적으며 이 책들이 서점에 있는지 겨우겨우 기억해냈다.
작년에 세간을 들뜨게 한 어느 학자의 논문, 작년에 신설되거나 개정된 법안을 모아 만든 책. 오랫동안 사랑받은 경영론과 아카데미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의 책.
“그리고…….”
이것저것 주문한 펠리오가 마지막 한 권을 불렀다.
* * *
“행복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레오니에는 조금 전 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리네 백작 저택에서 무척 탐냈던 ‘인생이란 복수다’를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다.
‘너무 좋아!’
당장 이 한복판에서 덩실덩실 춤추고 싶었다. 애독서의 후속권을 가까스로 손에 넣는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진짜 길 한복판에서 춤을 추고 싶진 않았다.
‘점점 애가 되는 기분이야.’
레오니에는 이 기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진짜 어린아이 몸이기도 하지만, 주변 어른들이 하도 아이 취급을 하니 저도 모르게 어려지는 것만 같았다.
‘흥, 그럴 수는 없지.’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대신 발재간을 통통 부리는 거로 대신했다. 제 딴에는 엄청나게 참은 거지만, 파란 반바지가 역동적으로 씰룩거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때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왔다.
“그렇게 좋으냐.”
뒤따라 서점에서 나온 펠리오가 어이가 없단 듯이 입가를 올렸다. 책 한 권 산 거로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어째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겨우 책 한 권 가지고.”
펠리오는 조금 더 좋은 걸 많이 사 줘서 아이의 눈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 정말 고마워.”
애독서 후속권을 두 팔로 꼭 안은 채, 레오니에가 몇 번인지도 모를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으음…….”
펠리오가 무릎을 굽혔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아빠는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말로만?”
“그럼 뽀뽀!”
우우웅, 레오니에가 입술을 오리 주둥이처럼 쭈욱 내밀어 펠리오의 볼에 부딪혔다.
그때, 주변이 크게 술렁거렸다. 하나 맹수 부녀에겐 들리지 않았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 들은 대로 그들의 무례한 시선이나 수군거림을 무시했다. 저들은 자신들이 마냥 부럽고 시기하니까 그런 거라 여기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갈까?”
“응!”
곧 검은 마차가 서점 건물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탄 레오니에는 새로 산 책을 조심조심 옆에 두었다.
표지가 무척 단단해서 상할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싶어 제 망토를 풀어 책을 똘똘 말아 감쌌다.
“헤헤, 새 책이다.”
펠리오는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까칠한 시선이 레오니에를 콕콕 찔렀다.
“왜 또. 뭐 또.”
관자놀이가 따갑던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바라봤다.
“나한테는 그렇게 기어오르면서.”
“……어쩐지 평화로웠지.”
서점에서 잠깐이나마 다정했던 자신들 부녀는 신기루였던 모양이다. 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더랬다.
‘하여튼 잠깐이나마 시비를 안 걸면 입에서 가시가 돋나.’
으휴, 레오니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의 눈에 펠리오는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괴롭히는 꼬마나 다름없었다. 물론 펠리오가 들으면 뒷목 잡을 소리였다.
“아빠 지금 책한테 질투해?”
레오니에는 반격이라 하기에도 시시한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
그런데 펠리오가 입을 꾹 다문 채 한쪽 눈을 와락 찌푸렸다. 정곡이 찔린 거였다. 레오니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고는 이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질투한대요, 질투한대요!
천하의 보레오티가 고작 책 한 권 가지고 딸한테 질투한다니.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으면 배꼽을 잡고 쓰러질 이야기였다.
“그 책 내가 사 줬다.”
“이야, 아빠 그런…….”
상대가 가장 대응하기 어려운 치사한 대사를 읊조리다니. 레오니에는 새삼 깨달았다. 펠리오는 속이 좁은 사내였다. 정작 당사자는 뻔뻔하다 못해 자신에게 더욱 잘하라고 효도를 강요하고 있었다.
“아까 뽀뽀해 줬잖아.”
레오니에가 입술을 쭈욱 내밀며 까불었다. 펠리오가 입술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그제야 얄미운 입술 두 짝이 쏙 들어갔다.
“제발 나잇값 좀 해. 아빠랑 책이랑 같아?”
“적어도 내가 책보다는 못하다는 건 알겠다.”
“푸하하하!”
기어코 웃음이 터진 레오니에가 발라당 누워 깔깔거렸다. 숨 쉬는 게 곤란할 정도로 한참을 웃어대던 레오니에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하도 웃어서 숨이 헉헉 찼다.
“……다 웃었냐?”
그사이 진심으로 불쾌해진 펠리오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웃어서 배 아파…….”
“가지가지 한다.”
“그리고 배고파…….”
“징하다, 진짜.”
펠리오가 뒤에 난 창문을 살짝 열었다. 말을 몰던 마부가 기척을 느끼고 속도를 차차 낮추었다.
“근처에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곳이 있나?”
“과일 사탕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점심 먹기 전인데…….”
잠시 고민하던 펠리오가 마부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곧 마차가 멈추더니, 이내 마부가 노점에서 파는 사탕을 종류별로 바구니 채 담아 왔다. 계절 과일에 투명한 설탕물을 묻혀서 만든 사탕은 하나하나 누런 종이로 정성껏 포장된 채였다.
펠리오가 그중에서 가장 작은 걸 집었다.
“나 큰 거 먹을래.”
“나중에 밥 못 먹는다.”
“잔소리쟁이.”
레오니에는 투덜거리면서도 건네주는 사탕을 넙죽 받았다. 투명하게 굳은 설탕물 속에 검붉은 열매 세 알이 콕콕 박혀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야무지게 인사하고 열매 하나를 아앙, 입에 넣었다.
“……설탕 맛이 나.”
“설탕이지, 뭐.”
펠리오는 남은 것을 밖에서 따라오는 기사들에게 건넸다. 창문이 닫히기 직전, ‘이거 들고 마차 호위하라고?’라며 당황하는 파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아빠는 안 먹어?”
“너무 단 건 별로.”
“아버지는 너무 단 건 싫다고 하셨어.”
레오니에가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뜬금없는 재간에 펠리오가 설핏 웃었다.
“그건 또 무슨 노래야.”
“효도 노래.”
야이야이야,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며.
“눈물도 흘리고오오!”
흥이 붙은 레오니에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옛 노래를 흥얼거렸다.
“혼자 바쁘군.”
노래 부르랴, 사탕 먹으랴. 거기다 새로 산 책도 알뜰히 살펴야지. 슬그머니 몸을 앞으로 숙인 펠리오는 혼자서도 즐겁게 노는 어린 딸을 구경했다.
조그마한 손가락과 입술을 꼬물거리면서 떠드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특히 둥글어진 턱선이 아주 바람직했다.
“점심 먹기 전에.”
아이의 머리카락에 묻은 설탕 가루를 떼어내며, 펠리오가 말했다.
“어디 한 군데 잠깐 들를 거야.”
“어디?”
레오니에가 마지막 열매를 입에 넣은 채 물었다. 그 탓에 한쪽 볼이 툭 튀어나왔다.
“학술원.”
“학술원?”
듣고도 의아한 장소였다.
“아빠가 거길 왜?”
“뭐 좀 확인할 게 있어서.”
펠리오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마차는 이윽고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부엉이가 그려진 대문에 건물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니에가 건물 이름을 재빨리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르데아 선생님이 예전에 학술원에서 일하셨다고 했지?’
* * *
벨리우스 제국은 군주제 국가다.
그러나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연방제 성격이 매우 강한 나라이다.
황제가 기거하는 수도 중앙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지역은 제국 건국 전부터 터를 잡고 있던 세력이 존재했다.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작위를 받은 채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보레오티와 헤스페리, 오르티오 같은 대귀족들이었다.
이렇다 보니 각 지역의 독립성이 무척이나 강하고, 반대로 황권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러한 제국의 특징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나라를 움직인다는 세 가지 권력이었다.
하나는 황실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모여 의논하는 귀족 회의. 둘은 고고한 귀부인들께서 모여 정보를 탐색하는 수도 사교계.
마지막 셋이 학술원이었다.
‘여기가 학술원.’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는 근처에 세워진 기념비를 구경했다. 무려 몇백 년 전에 졸업한 아카데미생들이 자신들의 스승들인 학술회 회원들에게 바친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비석에는 학술원의 정식 명칭인 ‘벨리우스 제국 산하 학문 기술 연구 및 진흥 기관’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학술원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모이는, 학문과 기술을 연구하고 이를 발달시키는 지식의 상아탑이자 현 지식의 보고였다.
‘흐음…….’
이내 레오니에가 기념비 너머 학술원 건물을 올려다봤다. 색이 누렇게 변해 버린 건물은 그만큼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그런 만큼 건물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지붕 바로 아래 구멍이 뻥 뚫린 벽면이라든가, 신문 같은 거로 겨우 가려둔 금 간 유리라든가.
“여기 돈 없어?”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닥거렸다. 건물에서 자신들을 마중 나온 어른들이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이었다.
“건물 고칠 돈으로 자기 연구에 필요한 걸 사느라 그래.”
펠리오가 가까운 예로 아이의 가정 교사인 아르데아를 들었다.
“……아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구를 위해 처자식과 작위를 버리고 가출했던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전 백작. 레오니에는 그를 떠올리자마자 학술원이 어떤 곳인지 바로 이해했다.
“보레오티 공작님.”
때마침 학술원 사람이 도착했다. 새하얗게 센 머리를 대충 하나로 질끈 묶은 할머니였다.
“북부의 주인이신 보레오티 공작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스승님?”
레오니에가 동그란 눈을 끔뻑거렸다.
“아카데미 다닐 적에 날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시다.”
펠리오가 먼저 스승님이라는 할머니를 소개해 줬다. 레오니에는 바로 자세를 고치고 공손히 인사했다. 그가 직접 소개해 줄 정도라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보레오티 영애. 저는 스트리지 부보라고 합니다. 보레오티 공작님을 가르쳤었지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레오니에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꼭 과자를 손수 하나씩 먹여 주는 할머니 같았다.
“우리 아빠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직설적인 레오니에의 물음에 스트리지가 어머, 하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호호 웃으며 즐거워했다.
“어떤 학생이셨을 것 같나요?”
“뭐든지 잘하는 학생이요.”
그 말에 펠리오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맞습니다. 보레오티 공작께선 못 하시는 게 없는 훌륭한 학생이셨지요.”
“그런데 아빠가 그림은 못 그려요.”
레오니에는 재앙과 파멸 사이에 아빠의 그림이 있다고 일러바쳤다. 이에 스트리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펠리오는 얄미운 사족을 덧붙인 딸을 어쩌지도 못한다는 시선으로 노려봤다.
“뭐, 뭐.”
정작 고자질한 레오니에는 뻔뻔하다 못해 떳떳했다.
“공작님…….”
후우, 웃음을 겨우 삼킨 스트리지가 숨을 찬찬히 골랐다.
“정말 아이 아빠가 다 되셨군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뭐가 부끄럽습니까.”
스트리지가 서로 닮은 두 부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게 가족이지 않습니까.”
“…….”
“잘하고 계시는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아무래도 수도에 전해지는 보레오티 부녀와 관련된 소문은 악의적인 내용이 많았다. 스트리지는 설마 하면서도 혹시, 하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가족을 이룬다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랍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두 맹수 부녀를 보니, 그 모든 것이 삿된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로소 안심되고 마음이 놓였다.
“그걸 잘 해내고 계시니,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펠리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스트리지는 그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지긋한 분이 저와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사실이 낯설었지만, 펠리오는 무척이나 깊은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요…….”
레오니에가 말했다.
“아르데아 선생님은 학술원 온다고 처자식 다 버리고 가출했다던데요?”
“그 사람은 말이지요.”
스트리지가 싱긋 웃었다.
“학술원에서도 예외랍니다.”
같은 취급 하시면 곤란하다며, 스트리지가 인자한 미소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곧 세 사람은 학술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 나 학술원 구경하고 싶어.”
레오니에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마침 스트리지와 긴히 할 말이 있었던 펠리오는 흔쾌히 허락했다. 대신 호위 기사 곁에 꼭 붙어 있으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금방 끝날 거다.”
“응.”
다녀오라며 펠리오와 스트리지를 향해 손을 흔든 뒤, 레오니에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학술원 안을 구경했다.
“여기가 학술원이군요.”
프로보는 신기하단 듯 이리저리 둘러봤다. 마검사인 프로보는 지금도 마법 연구를 하는 중이라 이런 학문적인 곳에 관심이 많았다.
“저 창 너머에 있는 큰 건물이 아카데미입니다.”
멜레스가 창밖에 있는 하얀 건물을 가리켰다. 학술원 본관과 아카데미 건물 중 하나가 일 층 회랑끼리 연결되어 있었다.
“학술원 회원 중엔 아카데미 교수직도 겸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둥그스름한 돔 형태의 지붕이 높이 솟은 아카데미 건물에서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쉬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다들 어리네…….”
같이 창밖을 바라보는 파보의 시선이 아련했다.
“파보 오빠 꼭 애늙은이처럼 말해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파보는 기가 막혔다.
“애늙은이는 아가씨잖아요…….”
“오빠야말로 아직 나이가 한창인데 무슨 말투가 다 산 사람처럼 힘이 쭉 빠졌대.”
“그러니까 그런 말투가…….”
애늙은이 같다고 따지려던 파보가 지쳤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카데미 쪽을 바라봤다.
“실은 저한테 동생이 있거든요.”
“갑자기 동생?”
“남동생인데, 작년에 아카데미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럼 엄청난 거잖아요!”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수도 아카데미는 수재들만 다니는 명문 학교였다. 그곳에 합격했다는 건 가문의 자랑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카데미 졸업 여부가 훗날 사회에서 많은 차이를 가져온다.
“아니, 그런데 너 동생이 있었어?”
“왜 말 안 한 건데?”
정작 멜레스와 프로보는 처음 듣는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뭐…….”
파보가 무안하단 듯이 뒤통수를 벅벅 쓸었다.
“동생을 못 본 지 좀 된 터라…….”
분위기를 살피던 파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동료와 어린 아가씨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는 결국 사정을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남부에서 왔잖아요.”
파보는 남부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부모님은 오랫동안 남부에서 귀금속 등으로 만든 장식품을 파는 상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남 파보가 기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당연히 좋아하셨죠.”
기사는 준귀족 취급을 받는 명예직이었다. 집안에서 기사가 나온다는 건 평민 집안에서는 무척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마을 축제가 벌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제가 글라디고에 가고 싶다니까 아주…….”
격렬하게 반대하시던 부모님을 떠올린 파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분은 제가 황실 기사단이 되기를 원하셨죠.”
“북부도 좋은데! 글라디고가 최고란 말이에요!”
글라디고 기사단의 차기 단장이 될 레오니에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파보의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 무척이나 섭섭했다.
파보가 어색한 미소로 대신 답했다.
“지역 차별이 좀 심하거든요.”
멜레스가 그 이유를 대신 설명해 줬다. 예민한 이야기인지라 설명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왜?”
레오니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북부와 남부의 지역 간 차별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쉬이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었다. 특히 남부가 유난히 북부를 차별하는데, 가끔은 얘네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극심했다.
“다른 지역도 그래요?”
레오니에가 프로보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경쟁의식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경우는 없다고 동부 출신인 프로보가 말했다.
“어쨌건 저는 북부로 가려고 가출을 했고, 그 탓에 절연 당했답니다.”
“그래서 동생을 못 봐요?”
“동생한테는 떠나기 전에 제가 모은 돈의 절반과 편지를 남기고 떠났어요. 그렇게 헤어졌으니, 연락은 당연히 무리였지요.”
그러나 작년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남동생이 먼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원망하는 내용 하나 없는 편지가 어찌나 고맙고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염치가 없다 보니 만나러 가는 게 영…….”
“오빠답지 않은 수줍음이네요.”
“이야, 네가 염치도 차리냐.”
“새삼 다시 보이는군.”
“다들 취급이 너무하네.”
파보가 투덜거렸다.
“흐음, 그래도 수도에 있을 때 한 번 만나 봐요.”
레오니에가 통, 하고 파보의 등을 두들겼다.
“인생 앞으로 어찌 되는 건지도 모르는데, 보고 싶을 때 만나러 가는 게 좋아요.”
“아가씨…….”
“동생분도 파보 오빠가 보고 싶을 거예요.”
나중에 저택에 데려와서 소개해 달라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편지도 먼저 보냈다면서요. 동생분이 많이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해 봐요.”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파보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일곱 살 맞지?”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프로보가 멜레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게 벌써 몇 번째 의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을 지나시면 여덟 살이셔.”
멜레스가 나이를 정정했다.
“아가씨는 의젓하고 똑 부러지는 분이시니 우리와 깊은 대화가 가능한 거야.”
“깊은 대화……?”
프로보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조금 전 대화는 인생 경험 풍부한 어르신이 철부지 아이를 다독이는 듯한 대화였다. 심지어 대화의 선점을 아가씨가 쥐고 계셨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프로보도 곧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 * *
레오니에가 호위 기사들과 학술원을 구경하러 떠난 직후.
펠리오는 스승인 스트리지와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우연히 마주 내려오던 학술원 직원들은 아득할 정도로 까만 머리를 보곤 흠칫거렸다.
“다들 놀라네요.”
스트리지가 호호 웃었다.
“스승님은 참 속도 좋으십니다.”
“좋을 일이지요.”
자신의 애제자가 보레오티 공작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드디어 아이의 아빠가 되어 진심으로 행복 어린 모습을 하고 있던 것.
스트리지는 조금 전 딸을 보내면서 미소 짓던 펠리오의 옆모습이 아직도 신기했다.
“아이가 고아원에 있었다지요?”
“소문이 거기까지 났습니까?”
“수도에 도는 소문은 악의적이어도 사실인 경우가 많죠.”
“…….”
“잘하셨습니다.”
펠리오를 쏙 닮은 아이는 버림받았다는 기색 따윈 전혀 없었다. 스트리지는 레오니에와의 짧은 만남만으로도 아빠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펠리오가 노력을 많이 했단 뜻이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계단을 오르던 펠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스트리지도 따라 멈췄다.
“스승님과 저를 보고 있으면,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다 거짓말 같군요.”
펠리오가 저를 대견하단 듯이 바라보는 스승님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스트리지는 제자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예나 지금이나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남부라고 다 북부를 싫어할까?”
“요즈음은 그렇지요.”
“그래요, ‘요즈음’은 말이죠.”
스트리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곧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물결무늬가 선명한 오동나무로 만든 문짝 앞에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펠리오가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범인은 아직 못 잡았습니까?”
누군가가 이곳에 침범하기 위해 열쇠 구멍을 헤집어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수사가 큰 진척이 없습니다.”
스트리지가 출입 금지 팻말을 치우며 말했다.
“수사 당국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간혹 진심으로 조사하려는 분들도 계셨지만…….”
“안 들어도 뻔하군요.”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방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화려하게 저질렀군.”
책장은 전부 다 엎어져 부서졌고, 휴식을 위한 작은 소파는 칼 같은 것으로 헤집어 놓은 듯이 마구잡이로 찢어져 있었다.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열려 있고, 내용물도 바닥에 전부 떨어져 있었다.
“여기가 그 방입니까?”
안으로 들어선 펠리오가 무심히 두리번거렸다.
“말씀하신 대로 그때 이후로 그 누구도 들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그대로란 거군요.”
펠리오가 엎어진 책장 위로 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트리지가 출입 금지가 적혔던 팻말을 뒤집었다.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이곳은 아르데아가 사용했던 연구실이었다.
아르데아 보스그루니는 선망받는 학자였다.
물론 제 학문적 열망 때문에 처자식을 버리고 수도로 올라온 건 영원한 흠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의 학문적 기여도나 수많은 연구 성과는 학술회 입장에선 무척이나 커다란 공로였다.
아카데미에서도 까탈스러우나 실력만큼은 확실한 괴짜 교수로 유명했다.
“이곳 외에 망가진 곳은 없습니까?”
“바로 왼편 연구소와 2층 자료실도 당했습니다만…….”
난장판이 된 건 아르데아의 연구소가 유일했다.
“보스그루니 교수께선 잘 지내십니까?”
스트리지가 아르데아의 안부를 물었다. 펠리오는 그가 현재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살면서 레오니에의 가정 교사를 맡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본가에는 못 돌아가는 건가요?”
“혹시나 해서 보스그루니 백작을 저택에 불러봤습니다만…….”
펠리오가 고개를 내저었다. 헤로 보스그루니 백작은 아르데아를 보자마자 덤벼들었다. 예상된 말로였다.
보스그루니 백작은 레오니에에게 찻잔을 쥐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치던 수업을 단번에 찻잔으로 사람을 기절시키는 암살 수업으로 바꿨다. 덕분에 집안 살림 일부가 거덜 나 버렸다.
물론 보스그루니 백작이 나중에 따로 보상했다. 어차피 그 찻잔들은 전부 보스그루니 가문의 특산품이었다.
“어쩜, 어쩜.”
스트리지가 한 손으로 턱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보스그루니 백작께서 안 죽이시긴 게 용하네요.”
그 인간은 찻잔으로 머리에 구멍이 나도 정신 못 차릴 거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곤 자연히 보스그루니 백작의 젊은 시절 일화를 떠올렸다.
“보스그루니 백작께선 젊은 시절에 사교계의 전설로 유명한 분이셨죠. 그분이 찻잔을 쥔 것만으로도 젊은 영식들이 무수히 쓰러지셨지요.”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고, 모두의 우상이었다며 스트리지가 회상했다.
“지금도 그럽니다.”
그리고 현재 그 기술을 레오니에가 물려받는 중이었다. 펠리오는 그것만 생각하면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백작의 사교 전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 딸이 그런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걱정을 잠시 뒤로 미룬 펠리오가 밟고 올라선 책장을 주의 깊게 살폈다. 구두 밑창으로 툭툭 건드리니, 어딘가 홀로 소리가 다른 곳이 있었다. 책장의 가장 아랫부분이었다.
“스승님, 죄송하지만…….”
“잠시 나가 있지요.”
펠리오는 스트리지가 방을 나서고 정확히 60초를 세었다.
파지직, 파지직.
펠리오의 눈에 붉은 안개가 번졌다. 그가 밟아선 책장의 못 이음새에 투명한 얼음이 꼈다. 검은 맹수가 내뱉는 나지막한 숨결을 따라 얼음은 점점 커졌다.
곧 책장 아래로 어마어마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커지는 얼음을 버티지 못하고 나무판자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게 맹수의 송곳니인가요?”
잠시 후 복도 저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스트리지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대단하네요. 복도 끝까지 갔는데도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실제로도 스트리지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펠리오가 금이 쩍쩍 난 판자를 뜯어냈다. 안쪽에 숨겨진 비밀 장소가 있었다.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공작님은 한동안 수도에 머무시는 건가요?”
숨겨진 공간 속을 살피던 펠리오가 뒤를 돌아봤다.
“선황 폐하께서 승하하신 지 벌써 3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
펠리오가 잠시 잊었던 황실 행사 하나를 떠올렸다.
연회.
“열리겠군요.”
귀찮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3년이 지났으니 열릴 겁니다. 못해도 여름 전후에 열리지 않을까요?”
“저는 참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전에 수비테오 황제를 만났을 때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펠리오는 굳이 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애당초 사람이 북적거리는 연회는 귀찮고 불편했다.
“거기다 아이가 아직 어립니다.”
“유모한테 맡기시면 되지요.”
“유모는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펠리오도 유모를 고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저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쓰지 말라며 유모 고용을 사절했다.
“다행히 사용인들이 잘해 주고 있습니다.”
“따님이 많이 성숙하시네요.”
“성숙하지는 않습니다.”
어른스럽긴 해도 제 아빠 속 뒤집는 데는 타고난 애늙은이였다.
허리를 숙인 펠리오가 책장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저기 접히고 주름진 종이 뭉치와 낡은 수첩 한 권이었다.
* * *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스트리지는 학술원을 나가는 레오니에에게 갖가지 선물을 안겨 줬다.
“학술원에서 만든 기념품이랍니다.”
“기념품…….”
레오니에는 품에 한가득 안긴 부엉이 인형과 부엉이 공책, 부엉이 연필, 부엉이 필통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스트리지가 이 부엉이는 수리부엉이란 종이며, 이곳 학술원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레오니에가 부엉이 인형을 힐끔 바라봤다. 매섭게 치켜뜬 노란 눈동자가 제법 잘 만들어졌다. 집에 있는 까만 사자 인형 옆에 두면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수리부엉이가 궁금하시면 이 책을 읽어 보세요.”
그러면서 스트리지가 또 선물을 챙겨 주는데, 아이 팔뚝만 한 조류 도감과 학술원의 역사가 적힌 학술원 연혁 도감이었다.
“감사합니다.”
레오니에가 공손히 감사 인사를 건넸다. 받은 선물들은 호위 기사들이 따로 마차에 실어 주었다.
“공작님도 부디 조심하시기를.”
“스승님께서도.”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스트리지는 제자와 그의 어린 딸이 탄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 그 모습을 창 너머로 힐긋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불렀다.
“아빠는 저 할머니 존경해?”
“그래.”
“그건 아주 좋은 거야.”
레오니에가 부엉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싱긋 웃었다.
마차는 이내 수도에서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상큼한 샐러드가 먹고 싶다는 레오니에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펠리오는 품에 레오니에를 안고 당당히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소문이 자자하던 보레오티 부녀를 목격한 손님들은 식사도 잊은 채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예약은 안 했다만.”
혹시 비어 있는 자리가 있냐는 펠리오의 물음에, 식당 지배인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양해를 굽신굽신 구하더니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이래도 돼?”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머리칼을 가지고 놀며 물었다. 짧은 머리칼로 땋은 갈래머리는 금방 풀렸다.
“네가 먹고 싶다며.”
“이 아빠, 권력 남용하면서 딸 핑계 대는 거 보소.”
“레오 네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온 거고.”
그리고 자리가 없다면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라고 펠리오가 말했다. 글쎄, 레오니에는 과연 자리가 없을지나 의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 다행히 한 자리가 있답니다.”
정말 우연처럼 자리가 생겼다면서, 지배인이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쩔쩔맸다. 레오니에는 마음속으로 지배인을 동정했다.
그렇게 소개받은 장소는 구석진 곳에 커튼까지 길게 내려 친 자리였다. 펠리오는 이런 곳이 가장 비싸다고 넌지시 가르쳐 줬다. 레오니에는 그 말이 사실임을 자리에 앉자마자 깨달았다.
주변을 가린 커튼은 한눈에 봐도 고가품이었다. 수정 같은 조각이 촘촘히 새겨진 커튼은 조그마한 빛을 서로 반사시켜 어두울 뻔한 커튼 속 내부를 밝게 비쳤다.
주문한 음식은 금방 나왔다.
‘권력의 맛이네.’
꿀맛이란 뜻이었다.
야무지게 스테이크를 썬 레오니에가 샐러드도 곁들여 먹었다. 딱 기대했던 새콤달콤한 드레싱이 무척이나 취향이었다. 펠리오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배통이 커졌네.”
“배통이라니…….”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레오니에가 윗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러고는 실망이란 눈초리로 아빠를 노려봤다.
“배통이란 단어는 여자한테 쓰면 안 돼.”
“너는 내 딸이니까 예외지.”
“나도 일단 성별은 여자야!”
펠리오의 시선이 볼록 튀어나온 레오니에의 배를 향했다.
“넌 양심도 없냐.”
그게 배통이 아니라고? 꼭 엄마 젖 그득하게 먹고 빈둥거리는 강아지의 빵빵한 배랑 똑같았다.
“아빠 진짜 짜증 나……!”
그러면서 레오니에는 은근슬쩍 제 배를 더듬었다. 확실히 고아원에서 지낼 때랑 비교하면 많이 나오긴 했다. 그래도 자신은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저의 귀여움은 고작 배 좀 나왔다고 사라질 리가 없었다.
“나, 좀 귀엽지 않아?”
“너 지금 네 입으로 귀엽다고 말했냐…….?”
기가 막힌 펠리오가 냅킨으로 아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 줬다. 살짝 힘이 실린 탓에 레오니에의 볼살이 콕콕 들어갔다.
“아이란 자고로 배가 나와야 귀여운 법이지!”
냅킨에서 도망친 레오니에가 등을 활짝 펼치며 씩씩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배가 더욱 볼록 튀어나왔다. 하얀 셔츠 단추 부분이 팽팽하게 벌어졌다.
“……가끔은 말이다.”
펠리오가 아이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신발 신고 의자에 올라가지 말라는 잔소리도 덧붙였다.
“네가 나보다 어른 같다.”
“정말? 성숙해 보여?”
“늙어 보인다고.”
특히 말투가.
“너 그러다 나중에 폭삭 늙는다.”
아빠 맹수는 진심을 담아 아기 맹수를 걱정했다. 그러면서 어디가 폭삭 늙을지도 친히 자신의 얼굴 위아래를 손바닥으로 훑으며 가르쳐 줬다.
“끼야아아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오니에가 마물처럼 펠리오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후.
식사를 끝낸 보레오티 부녀가 커튼 밖으로 나왔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쳐진 채 나왔다. 그런 펠리오의 머리와 목깃은 누가 뜯어낸 것처럼 엉망이었다.
레스토랑 손님들과 직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 식탁 너머에서 들리던 두 부녀의 티격태격 말싸움도 환청이길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근처에서 먼저 식사를 끝내고 기다리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주군…….”
멜레스가 헝클어진 펠리오와 짐짝처럼 들쳐진 채 파닥거리는 레오니에를 번갈아 바라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뛰어난 기사가 고장이 나버렸다.
“아빠 한 번만 더 나보고 늙었다고 해 봐! 인생 재미없을 줄 알아!”
“이게 사납기가 마물보다 더하네.”
“마물 닮은 딸한테 다리 사이를 뽑혀 볼래!”
“하여튼 자식새끼 하나 있다는 게, 아빠가 걱정해 줘도 저 난리야.”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으아! 짜증 나, 진짜!”
마차에 올라탄 뒤에도 레오니에는 빽빽 소리를 질렀다.
“저 두 분을 보고 있자니…….”
놀란 채 입을 벌리고 있던 파보가 가까스로 턱을 움직였다.
“내 동생 보러 갈 용기가 생겨.”
아무리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어도, 저렇게 살벌하지는 않을 테니까. 파보는 주군 가족을 통해 큰 용기와 위안을 얻었다.
“그래, 나중에 꼭 가라.”
“가도 저러지는 않을 거 아냐.”
멜레스와 프로보도 동의했다.
* * *
“……이게 다 뭐지?”
며칠 후.
펠리오는 제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안에는 뜯지 않은 편지로 가득했다. 펠리오는 상자를 발견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상자 속 편지들에서 불편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부 주인님께 보낸 연서와 청혼서입니다.”
트라가 상자를 두 손으로 공손히 가리켰다.
“그것도 전부 오늘 아침에 도착한 것들입니다.”
며칠 모아 둔 편지가 아니라, 오늘 아침 자로 송달된 편지들이었다. 심지어 상자는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뒤이어 하인들이 편지가 든 상자 두 개를 더 가지고 왔다.
“참고로 소포 등 물건이 큰 건 제외했습니다.”
“…….”
“일단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트라 역시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편지에 무척 놀랐다. 펠리오가 원래 인기가 많았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단 ‘보레오티’라는 이름이 어느 정도 거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와.”
뽁, 하고 책상 너머로 동글동글한 머리가 튀어나왔다.
“다 아빠 편지야?”
레오니에가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매가 짧은 셔츠에 치마폭이 넓은 보라색 끈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제 발꿈치를 들썩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집무실 안에 있던 어른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레오 넌 또 언제 왔어.”
펠리오는 그런 제 부하들을 한 명씩 조용히 노려보며 물었다. 부하들이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까 상자 옮길 때.”
아침을 다 먹고 유유자적 저택을 돌아다니던 레오니에가 상자를 옮기던 하인들 뒤를 소리 죽여 따라왔다. 뭔가 재미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그럼 이게 다 아빠한테 온 연서예요?”
“확인은 다 안 해 봤지만…….”
아마 그렇지 않겠느냐며, 트라가 싱긋 미소지었다.
“이야, 아빠 이제 애 딸렸다고 인기 뚝 떨어졌을 줄 알았더니.”
“그런 일은 없다.”
펠리오가 자신했다. 그는 자신의 빛나는 외모와 완벽한 배경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레오니에가 짜게 식은 눈으로 아빠를 흘겨봤다.
“……됐으니까 책상에 올려 줘.”
펠리오의 도움으로 책상 위에 앉은 레오니에가 상자 속 편지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편지를 유심히 살폈다.
“사랑의 연서 같은데.”
화사한 노란색 편지 봉투에 꽃잎 석 장이 새겨진 촛농 인장. 거기에 봉투 틈 사이로 느껴지는 향수 냄새까지.
“지나치게 화사하고 가벼운 느낌인 것으로 보아, 아빠의 겉모습에 홀딱 반해 버린 어느 집 처자의 것이로군. 사랑까진 아니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동경이야.”
“그걸 그냥 보고 아세요?”
루페가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편지와 레오니에를 번갈아 봤다.
“에잉, 이 여자는 아니올시다.”
레오니에가 휙, 하고 편지를 치웠다. 루페는 문득 선대 파르두스 후작이셨던 저의 할머니가 파르두스 후작을 트집 잡으며 잔소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떨어진 편지는 트라가 솜씨 좋게 받았다.
레오니에는 그렇게 편지를 구경하고 추리하며 놀았다. 그동안 펠리오를 비롯한 어른들은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가 근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책상에서 내려온 레오니에도 응접용 소파에 앉아 조용히 편지를 분류했다. 자신이 아는 가문은 오른쪽, 모르는 가문은 왼쪽.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편지는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테이블 밑 상자에 버렸다.
“아, 히에이나 백작 영애다.”
불리는 이름에 펠리오가 서류를 살피던 손을 멈칫했다.
“이 언니 진짜 아빠 좋아하나 봐.”
한동안 주춤한다 싶었는데, 오늘은 무려 일곱 통이 도착했다. 레오니에는 보지도 않고 편지를 상자 안에 넣었다. 아빠를 괴롭히는 스토커는 하나뿐인 딸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혹시 이 언니, 저택에는 안 찾아와요?”
이 정도 성의면 저택에도 한 번 와 봤음직했다.
“저택까지 온 적은 없습니다.”
불법 침입자는 기사들 손에 바로, 라고 말하는 트라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스윽 긋는 시늉을 했다. 천하의 스토커도 제 목숨 아까운 줄 알았다.
“하지만 우연을 가장해서…….”
루페가 끔찍한 악몽이라도 떠올린 것처럼 사색이 된 채 중얼거렸다.
“공작님이 외출하시는 동선을 계속 따라다니며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땐 진짜 이 나이 먹고도 바지에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알았지요.”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는 레오니에의 예상을 뛰어넘는 스토커였다.
“아빠 동선을 파악했다고요?”
“그냥 쫓아가서 앞지른 겁니다.”
“미친 거 아냐?”
레오니에가 소름이 돋은 팔을 벅벅 문질렀다.
“맞는 표현이긴 한데, 아가씨께서 굳이 그 단어를 쓰시는 건…….”
트라가 조금만 조심하자며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레오니에가 턱을 쓸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빠랑 결혼할 상대라면, 그래도 이 정도의 끈질김과 똘기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또 그렇지요.”
“저 역시 동감합니다.”
루페와 트라가 동의했다.
“……둘 다 선을 넘으려는군.”
묵묵히 들어주던 펠리오가 은근히 경고했다. 그제야 루페와 트라가 입을 꾹 다물고 일에 몰두했다.
“그럼 나는 넘어도 돼?”
레오니에가 싱긋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너는 내가 일찍이 포기했지.”
“에이, 포기하지 마아.”
“아빠 이제 일하니까 조용.”
“조용!”
합, 하고 아기 맹수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게 다시 혼자 편지를 분류하며 놀던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 허락을 받아 편지 몇 개를 뜯어 내용을 읽어 봤다.
[북부의 주인이신 검은 맹수님께.]
레오니에가 와락 인상을 썼다.
‘으으, 유치해!’
손발이 오그라드는 머리말이었다. 물론 보레오티가 검은 맹수란 별명을 지니고 있지만,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그 별명으로 스스로를 자칭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빠보고 검은 맹수님이래.”
“…….”
서류에 서명하던 펠리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바로 옆에서 새로운 서류를 건네던 루페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역시 싫어하네.’
레오니에는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눈 부실 때마다, 공작님의 다정하신 미소가…….]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레오니에의 까만 눈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아빠의 미소?
그것도 다정한?
“이 무슨 오뉴월에 고드름으로 콧구멍 후비는 소리야…….”
“하아…….”
어린 딸의 야무지고 옹골찬 표현력에 아빠가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그만큼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한, 펠리오는 아무에게나 미소를 보여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정함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빠는 나한테만 그러는걸.’
자만이 아니라, 펠리오는 정말로 레오니에한테만 다정하고 웃음을 보여 준다. 원작에서야 물론 주인공인 바리아한테만 웃어 주지만, 적어도 지금은 레오니에가 그의 미소를 독차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은 다른 편지들을 통해 해결되었다.
“이런 망사한 것들…….!”
“망사가 아니라 망측이겠지.”
쟨 또 뭘 배워온 거야, 펠리오가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니에가 이리 와 보라며 조그마한 손을 열심히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편지 몇 장을 내밀었다.
“…….”
편지를 읽기 시작한 펠리오의 눈가가 매섭게 올라갔다.
[서점에서 보았던 찰나의…….]
[과일 사탕을 받아 들던 손이…….]
[……레스토랑에서 조우하였죠.]
“나 때문이었어.”
편지가 갑자기 늘어난 이유.
레오니에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콕 가리켰다.
이 모든 편지를 쓴 사람들은 레오니에와 함께 외출했던 펠리오에게 반한 거였다. 사납고 흉악하기로 소문난 보레오티가 어린 딸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던 모습이 수도 전역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버린 탓이었다.
결국, 펠리오를 그렇게 만든 레오니에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런데, 왜 이게 망측스러운데?”
편지를 다 읽은 펠리오가 물었다. 딱히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이 아빠 보소.”
레오니에가 진심으로 물어보냐며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표정을 삐뚜름하게 지었다.
분명 편지를 보낸 이들은 레오니에를 살뜰히 보살피는 펠리오의 모습을 꿈과 낭만처럼 묘사하고 칭찬하고 있었다. 그 점에 반했다는 내용도 수두룩했다.
“내가 없잖아.”
편지를 꼼꼼히 읽던 레오니에는 딱 하나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사랑이 몽실몽실한 연서들 속에서, 레오니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 존재를 아예 지워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하자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편지를 쓴 사람들은 아기 맹수가 마치 그날의 외출에 없었던 사람처럼 편지 속에서 지워 버렸다.
“……트라.”
펠리오가 빠르게 트라를 불렀다. 평온했던 집무실이 삽시간에 따끔따끔한 불쾌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여기 있는 편지, 전부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뒤에서 서류 작업을 돕고 있던 트라가 묵묵히 편지 상자를 가져갔다.
“내용을 확인한 뒤, 불순한 내용이 적힌 것들은 전부 따로 명단으로 만들어 두겠습니다.”
눈치 빠른 집사는 펠리오가 무엇 때문에 저리도 불쾌한지 빠르게 눈치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기민하게 파악했다.
“으휴, 하여튼 사람들이란…….”
레오니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엄마 후보가 빠르게 추려졌다.
* * *
“수도에 간이 부은 놈들이 많네요.”
북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파보가 얼마 전의 편지 사건에 대해 한마디 했다.
그는 근무할 때 입는 기사복 대신 조금 더 신경을 쓴 정복 차림새였다. 검은 제복 위에 새하얀 망토까지.
레오니에는 보고 있는 저가 쪄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파보는 보기와 달리 통풍이 잘 돼서 아주 쾌적하다고 했다.
“어쨌든 아빠가 엄청 화났어요.”
“저희도 느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한 펠리오 덕에 저택이 어수선했다. 특히 그가 자주 머무는 집무실 근처는 사용인들이 돌아다니지도 못할 정도였다.
“루페 님께서 자신 좀 살려 달라며 저한테 빌었다니깐요.”
“그 아저씨는 그래 허약해서 어떻게 아빠 비서 일을 한대요.”
“허약…….”
파보는 오늘도 일곱 살 아가씨의 단어 선택에 탄복했다.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파보가 조심스레 물었다.
“……딱히?”
레오니에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당사자는 누구보다 태연했다.
연서와 청혼서에 레오니에의 존재가 부정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들은 친모의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보레오티 가문의 사생아를 얕잡아 보는 거였다.
귀족 사회란 어느 곳보다 협소하고 편협하다. 특히 이곳은 보레오티에 관한 악소문이 많은 수도 중앙부였다. 천하의 보레오티도 ‘사생아 추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았다.
‘충격이 없단 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기이했다. 대충 예상해 본바, 저 자신이 아직 이 몸을 낳아 준 부모님에게 애정을 가지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었다.
엄마는 사랑의 도피를 떠난 전 보레오티 방계, 아빠는 누군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
레오니에는 낳아 준 친부모에 대해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걸 느낄 만한 기억이 없었다. 지금의 레오니에는 고아원 생활 이전을 기억하지 못한다.
‘레지나가 불쌍해.’
가만 보면 제 친모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었다.
과연 레지나는 ‘레오니에’를 예뻐했을까.
사랑하고 아꼈을까?
레오니에가 제 볼을 더듬거렸다. 이렇게 살이 포동포동 붙기 전의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생각해 보니 이전의 ‘나’도 레지나 만큼이나 불쌍했다.
파보가 그런 레오니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그냥 제 볼 더듬으며 딴생각 중인데, 파보는 아이가 자신의 출생에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특하고 애달팠다.
“아가씨.”
파보가 한쪽 무릎을 꿇고 레오니에의 손을 조심히 잡았다.
“저희 오늘 재미있게 놀다 올까요?”
오늘 두 사람은 함께 외출하기로 했다. 바로 파보의 남동생을 만나러 아카데미로 가기 위해서였다.
레오니에가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서 파보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해 줬다.
다만 펠리오가 지난번 편지 사건으로 레오니에가 저 없이 혼자 나가는 것에 무척 회의적으로 변했다. 외출 금지만 안 내렸지, 거의 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결국엔 허락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만약 누군가가 너를 불쾌하게 하거나 듣기 싫은 말을 했다면 무조건 돌아온 뒤에 일러바치라고. 그리고 남동생을 보러 아카데미에 가는 파보에게는 글라디고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으라고 명했다.
“주군께서 걱정하지 않도록, 아주 당당하게 돌아다니자고요.”
파보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오빠, 안 더워요?”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레오니에가 끝내 물었다. 보는 사람이 다 더웠다.
* * *
레오니에와 파보는 펠리오가 내 준 크고 검은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마차를 끄는 말들도 저택에서 가장 큰 북부 출신 준마들이었다.
아카데미로 가는 동안, 파보가 동생에 대해 알려 줬다.
“제 남동생 이름은 보파입니다.”
“뭐라고요?”
“보파요. 보파 가베르.”
파보가 동생에게 받은 편지를 주섬주섬 꺼냈다. 꾸깃꾸깃 주름이 가득 진 편지는, 그만큼 파보가 동생이 보낸 편지를 수도 없이 읽었다는 증거였다.
‘형제가 이름이 왜 저래.’
거꾸로 하면 보파.
또 거꾸로 하니 파보.
레오니에는 가베르 형제의 이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니 형제가 연달아 집이랑 연을 끊으려고 하지.’
레오니에는 필시 가베르 형제의 집안 반항이 저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확신했다. 자식 이름을 저딴 식으로 짓는 것도 아동 학대고 가정 폭력이었다.
“오빠네 동생은 뭘 배워요?”
“시계 만드는 기술을 배웁니다.”
“와아, 엄청 똑똑한가 봐!”
“어릴 적부터 시계를 좋아했거든요.”
귀금속이나 시계 같은 고가품을 판매했던 집안 덕에 그쪽으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만약 고장 난 시계라도 생긴다면 해체하고 조립하면서 하루 내내 놀았다고. 파보도 그 덕에 간단한 시계 수리 정도는 가능했다.
“기사단 식구들도 저한테 맡길 정도랍니다.”
부수입이 제법 쏠쏠하다며 엄지와 검지를 비비적거렸다.
“……이 오빠가 뭘 좀 아네.”
아암, 돈이 최고지. 레오니에도 손가락을 비비적거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마차는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때마침 아카데미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정규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곧이어 마차 주위로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파보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아가씨.”
새하얀 망토를 크게 펄럭이며, 파보가 두 팔을 벌렸다. 뒤에서 여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글라디고 기사님이라는 둥, 북부의 짐승이라는 둥 재잘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러자 파보가 이유도 없이 자줏빛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
레오니에가 그런 파보를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인간도 참 대단했다.
어쨌건 파보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내린 레오니에는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학교 시설에 방문 사실을 알리고 방문객 명단에 이름을 썼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방학을 제외한 기간에는 전원 기숙사에서 지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일정 시간 내 외출이 가능하고, 학생들을 보러 오는 가족들에게도 일부 구역을 제외하곤 교내를 개방했다.
“누가 침범하면 어떡해요?”
방명록에 제 이름을 쓰던 레오니에가 문득 스친 걱정을 입에 담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상치 못한 보레오티 영애의 방문에 쩔쩔매던 아카데미 직원이 서둘러 대답했다.
“본교 입구에서부터 후문까지 감시 마법이 걸린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이 지내는 기숙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원은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레오니에가 정중히 사양했다.
“조용히 볼일만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꼬마 영애의 조숙한 태도에 직원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레오니에는 파보의 손을 꼭 쥔 채 아카데미 내부를 돌아다녔다.
짙푸른 돔 형식의 지붕을 얹은 새하얀 건물. 이국적인 건물 외관은 당시 건축을 총괄한 사람이 동부에서 건너온 이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물 내부는 제국 양식을 따랐다. 지나치게 화려하단 뜻이었다.
레오니에가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멈춰 섰다.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옆에 있던 친구랑 쑥덕거리기도 했다. 검은 머리를 보고 흠칫거리는 학생들도 있고, 조그마한 레오니에를 귀엽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파보가 조심히 물었다.
만일 불편하시다면 저들을 한 번씩 노려보고 당장 품에 안아 망토로 시야를 가려 줄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불편하시면 꼭 말씀하세요.”
“지난번 외출보다 나아요.”
시선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전보다는 괜찮았다.
“흐음, 왜지?”
레오니에가 자문했다. 습관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척을 하니, 어디선가 작은 비명이 터졌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여학생 서너 명이 모여 레오니에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물론 레오니에가 돌아보기 무섭게 사색이 되었지만.
‘이야, 보레오티……!’
이름만으로 사람을 겁주는! 레오니에는 새삼 제국에 공공연하게 퍼진, 보레오티에 대한 선입견을 깨달았다.
일곱 살 꼬맹이가 돌아 봤자 얼마나 무섭겠는가. 여학생들은 레오니에의 뒤에 있는 보레오티, 그리고 펠리오가 무서운 거였다.
‘난 안 무서운데.’
이렇게 귀여운 일곱 살이 어디 있나. 안심하란 듯이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학생들의 얼굴에 천천히 혈색이 돌았다. 그러고는 머뭇머뭇 따라 손을 흔들었다.
“언니들 안녕!”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하니, 여학생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까보다 눈에 띄게 손을 흔들었다.
“귀여운 것들.”
돌아서는 레오니에의 눈빛에 애틋함이 가득했다.
“저 나이 땐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즐거울 때지.”
“할머니?”
파보는 어릴 적 자두라는 애칭으로 저를 불러 주시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문득 떠올랐다.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근데 어디서 만나요?”
“편지에 적혀 있는데…….”
파보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동생 보파가 보낸 편지에는 본교 왼쪽 정원에 심어진 하얀 꽃나무 아래에서 만나자고 적혀 있었다.
“남동생은 어떻게 생겼어요?”
걷는 게 귀찮아진 레오니에가 파보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
“아가씨의 취향은 아닐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파보가 대답했다.
“……내 취향이 뭔데요?”
어째 듣는 사람 기분 나쁜 말이었다. 더욱이 제 취향에 떳떳한 레오니에가 불쾌감을 드러냈다.
“보파는 살집이 없거든요.”
“그런 건 내가 마른 근육 쪽으로 공평하게 사랑…….”
“……근육도 없습니다.”
“아아……!”
레오니에가 안타까이 탄식했다. 그러나 곧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파보의 씁쓸한 시선이 따끔했기 때문이다.
레오니에는 괜히 헛기침을 콜록거렸다.
“난 그런 거로 사람 차별 안 해요!”
“편애는 하시잖아요.”
“누가 들으면 오해해요!”
레오니에가 서둘러 반박했다.
“편애가 아니라, 관심에 차등을 두는 거예요.”
그 두 개가 무엇이 다르냐고 되물으려던 파보가 말을 아꼈다. 이 이상 떠들었다간 아카데미에 아가씨의 변태 취향이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제 동생은 어릴 적에 많이 아팠습니다.”
잔병치레가 많았던 남동생은 바깥 외출도 자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탓에 피부도 하얗고 몸도 비쩍 말라 동네 친구들한테도 놀림을 많이 당했다고.
“제가 기사가 된 건 동생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동생 지켜 주려고요?”
“동생은 참 착하고 성실한 녀석이었거든요.”
“오빠도 착하고 성실한데…….”
레오니에가 파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보가 감사의 뜻으로 싱긋 웃었다.
마침 두 사람의 눈에 새하얀 꽃잎이 스쳐 지나갔다. 본교 왼쪽 정원에 심어진 커다란 꽃나무. 등나무처럼 올망졸망 모여 핀 새하얀 꽃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그 아래.
꽃가지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파보와 똑같은 자주색 머리가 찰랑거렸다. 귀밑까지 잘린 똑 단발이 가지런했다.
‘병약수 속성이라.’
레오니에가 소싯적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파보 오빠도 한 미모 하니까 미인수 가능성도…….’
레오니에는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그 건너 세상의 시선으로 펠리오를 바라보는 것엔 아직 망설임이 있었다. 아빠인 것을 떠나, 원작에서 여주 바리아와 엮이는 내용을 아는 탓이 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괜찮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적용했다.
‘성격도 얌전했다니 조신수나 꽃수, 아니, 꽃수는 너무 옛말이고.’
그렇게나 편파적이고 불순한 생각으로 가득한 레오니에는, 꽃나무 아래서부터 점점 다가오는 파보의 남동생을 바라봤다.
자주색 똑 단발, 희고 고운 피부.
“형!”
그리움이 한가득 담긴 굵은 음성, 반갑게 흔드는 상완근과 이두근 두둑한 팔. 힘차게 달려올 때마다 교복 위로 도드라지는 대퇴근까지.
“……으아아아아!”
파보가 두려움에 찬 비명을 질렀다.
“떡대수다!”
덩달아 놀란 레오니에가 달려오는 보파를 손가락질했다.
“제 동생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 와중에 비명을 지르던 파보가 동생을 가리키는 레오니에의 손가락을 서둘러 치웠다.
“형아…….”
보파는 몇 년 만에 보는 형을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바라봤다. 굵직한 손가락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찬찬히 훔쳤다.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작 파보는 감격이 쏙 들어갔다.
“왜 이렇게 됐어! 어째서 네가 마누스가 됐냐고!”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여린 남동생은 글라디고 기사단에서 가장 풍채 좋기로 유명한 마누스가 떠오를 정도로 품격 있는 근육질이 되었다.
키는 파보가 컸지만, 몸은 보파가 더 컸다.
“형이 집 나갈 때 나한테 준 거 있잖아…….”
“그래, 내가 줬지.”
파보의 유일한 아픈 손가락은 약한 남동생이었다. 혹시라도 저 없이 혼자 쓸쓸하고 외로울 때면, 저 대신 의지하라고 튼튼한 곰 인형을 마지막 선물로 주고 떠났었다.
“형이 준 곰 인형 덕에 이렇게 튼튼해졌어.”
“인형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파보는 거의 울먹거렸다.
“인형이 터질 때까지 주먹 단련을 했어.”
기사가 되기 위해 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형을 기억하며, 보파는 인형을 샌드백 삼아 열심히 주먹을 단련했다.
“그리고 터진 인형은 안에 묵직한 돌을 넣어 꿰맨 뒤에 등에 업고 운동했어.”
그렇게 체력이 붙으니 많은 것이 변했다. 몸이 튼튼해지니 살짝 밀치는 것만으로 괴롭힘이 사라졌다. 잔병치레도 줄어들었다.
“다 형아 덕분이야.”
“아니야…….”
파보는 동생의 근육 지분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글라디고 기사단 소속으로서, 파보 역시 전신에 단단한 근육을 두르고 있었다. 그 역시 근육의 참된 미학과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 레오니에의 근육 노래에 맞춰 흉근을 들썩인 기사 중에 파보도 있었다.
하지만 저의 소중한 남동생이 마누스 꼴이 되는 건 싫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자신이 원인이라는 것도 인정하기 싫었다.
“파보 오빠.”
쭉쭉, 아래로 당겨지는 소매의 움직임에 파보가 시선을 내렸다.
“나 소개해 줘야지요.”
레오니에가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보파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보파를 향한 순수치 않은 탐욕이 숨어 있었다.
파보는 순간 펠리오의 육아 고충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어쨌든 잘 지내서 다행이다…….”
너무 잘 지내서 문제인 것 같지만, 어쨌건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이었다. 그는 이제 두 팔로 전부 끌어안지 못하는 동생을 가까스로 포옹했다.
“보파, 소개할 사람이 있어.”
파보가 레오니에를 소개했다.
“보레오티 공작님의 영애시다. 레오니에 아가씨셔.”
“보레오티…….”
멍하니 이름을 따라 말하던 보파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우리 형의, 그러니까, 그, 가베르 경의 동생인 보파 가베르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시계 제작을 배우는 학생입니다.”
“안녕하세…….”
“아가씨.”
파보가 고개를 저었다. 존대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보파가 아무리 소중한 동생이어도, 레오니에가 말을 높일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런 건 확실히 구별해야 했다.
실제로 보파는 레오니에가 내뱉으려던 존대에 크게 당황했다. 이를 눈치챈 레오니에 또한 서둘러 말을 고쳤다. 여기서 계속 존대를 했다간 아마 파보나 보파가 불편해할 거다.
“레오니에야. 잘 부탁해.”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오니에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보파가 머뭇거리며 파보를 바라봤다. 파보는 어쩔 수 없단 듯이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서 잡아 주란 뜻이었다.
“그런데 근육이 엄청나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단련한 거야? 특별한 방법이 있어?”
조막만 한 손이 허공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처음 보는 사이인 보파의 근육을 멋대로 만질 수 없으니 대충 눈대중으로 근육을 더듬거렸다.
“아, 그게…….”
보파가 당황하며 머뭇거리자, 파보가 스리슬쩍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아카데미 구경 좀 시켜 주라.”
“어? 아, 응! 그럼 이쪽으로.”
몇 년 만에 조우한 형제는 어색할 틈도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보파는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며 파보와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게 썩 잘 되지도 못한 게, 레오니에의 존재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탓이었다.
괜히 미안해진 레오니에는 다음에 저택에 놀러 오라고 초대했다.
“제, 제가 가도 될까요?”
보파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몸은 커졌어도 겁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은 그대로였다. 파보는 어릴 적 동생이 떠올라 괜히 울컥했다.
“당연하지! 넌 내 동생이잖아.”
파보가 크게 웃으며 동생의 등을 두드렸다. 용기를 내라고 살짝 두드린 건데, 손바닥에 닿는 단단한 광배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곤 은근슬쩍 제 등을 더듬었다. 오랫동안 단련한 저와 엇비슷했다.
“다음에 나랑 같이 놀아. 아카데미 이야기도 더 해 주고.”
“그, 그래! 네가 저택에 와 주면 아가씨도 무척 기뻐하실 거야.”
“아…….”
코끝이 찡해진 보파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매로 촉촉이 젖어 가는 눈가를 조심조심 닦았다.
“뭐 그런 거로 감격해.”
레오니에가 괜찮다며 보파의 반대편 손등을 토닥였다.
“덩치만 컸지, 아직 애네.”
레오니에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거로 눈물을 닦으란 뜻이었다. 그러나 보파는 굳이 손수건으로 쓸 필요가 없어졌다. 저보다 한참 어린 꼬마한테 ‘애’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쏙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신 손수건을 감히 물리칠 수는 없어, 축축이 젖은 눈가 언저리만 가볍게 닦고 돌려드렸다.
레오니에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보스그루니 선생님이 그러셨어. 여인의 손수건은 남정네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스그루니?”
그러자 보파가 알은척을 했다.
“혹시 아르데아 보스그루니 말씀인가요?”
“알아?”
레오니에가 언급한 보스그루니는 ‘헤로’였지만, ‘아르데아’의 이름이 언급된 게 반가워 계속 물어봤다.
“작년까지 아카데미 교수님이셨어요.”
“아, 맞다…….”
레오니에가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르데아는 레오니에의 가정 교사로 들어오기 전에 수도에서 살았었다. 학술원 회원이자 아카데미 교수였다고 펠리오가 일전에 설명했었다.
“대단한 분이셨죠.”
“정말?”
“정말로요.”
레오니에와 파보가 눈을 마주쳤다. 북부 저택에서 본 아르데아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한번 책을 읽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망부석처럼 의자에 앉아 있고, 공부를 가르칠 때도 질문을 어렵게 꼬며 레오니에를 괴롭혔다. 그러다 헤로 보스그루니 백작이 예절 교사로 들어오니 쥐잡듯 잡히는 꼴이 되었다.
레오니에에게 아르데아는 딱 이랬다.
하지만 보파를 비롯한 아카데미 사람들은 다른 듯했다.
“괴짜이긴 하셨는데, 실력만큼은 정말 최고였어요. 그분의 눈에 든 제자들은 전부 성공한다는 전설이 있어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보파가 이를 보여 주겠다며 어느 곳으로 데려갔다.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가 쌓아온 업적과 학생들이 받은 상들을 모아 둔 진열실이었다. 아카데미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진열실도 무척이나 컸다.
“와아!”
레오니에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랬더니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여기를 보세요.”
각양각색의 트로피나 상장, 선대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 같은 것들을 지나.
보파가 벽면을 가득 채운 동판을 가리켰다. 이것들은 전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마친 졸업생들의 이름이었다.
“보레오티 공작님도 여기에 계시네요.”
보파가 끝에서부터 일곱 번째에 있는 동판을 가리켰다. 파보가 레오니에를 안아 보기 편하게 올려 주었다.
“아빠 이름…….”
조그만 손가락이 더듬더듬 아빠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을 더듬었다. 매끄러운 황갈색 동판에 펠리오 보레오티란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레오니에는 무척 신기했다.
“저도 들은 거지만, 보스그루니 교수님이 공작님이 졸업하신 이후에 채용된 거로 알고 있습니다. 뭐랄까, 북부에서 눈치를 줬다는 소문도 있고…….”
보파가 레오니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말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태연했다. 오히려 보파가 말한 소문이 진짜라고 믿었다. 아마 선대 보레오티 공작이 진짜 손을 썼을 거다.
보스그루니 백작은 보레오티를 섬기는 골수 가문이다. 그 수장이었던 자가 가문과 처자식을 버리고 수도로 가 버렸으니, 펠리오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압박 아닌 압박을 넣었을 거다.
“으흠, 어쨌건 공작님 이후부터 작년 졸업생까지 전부 교수님의 제자셨습니다. 그분의 연구실에서 보조로 일했던 분들이라고 합니다.”
보파가 오른쪽 끄트머리에 있는 동판들을 가리켰다. 레오니에는 동판에 적힌 이름들을 대충 둘러봤다.
‘어차피 아빠보다…….’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콧방귀를 뀌던 찰나였다.
“…….”
장난처럼 동판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가장 마지막 동판, 거기에 적힌 수석 졸업생의 이름이 레오니에의 숨을 멈추게 했다. 이름을 담은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사람…….”
동판에 적힌 이름에 대해 물어보려던 레오니에가 작게 콜록거렸다. 너무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파보가 소매로 입을 가려 주고 챙겨 온 물통을 건넸다.
레오니에가 진정되길 기다린 보파가 말했다.
“에르바누 선배님이네요.”
“아, 알아?”
겨우 숨을 가눈 레오니에가 물었다.
“이분도 유명하셨어요.”
보파가 말을 신중히 아꼈다.
“기숙사 같이 쓰는 선배가 그러셨는데, 자기는 살면서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셨어요. 인간관계가 거의 없다시피 할 만큼 공부만 하셨대요.”
“…….”
“그러고 보니 이분도 공작님이랑 똑같네요.”
“뭐, 뭐가?”
“이분도 수석으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하셨거든요.”
레오니에가 다시 마지막 동판을 바라봤다.
바리아 에르바누.
‘미친……!’
레오니에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 언니, 회귀했잖아!’
* * *
아카데미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여전히 바리아가 남기고 간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시 여주인공……!’
침대 위를 뒹굴던 레오니에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머릿속이 아직도 혼잡했다.
‘설마 그렇게 스칠 줄은 몰랐어.’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바리아와 언젠가 분명 만날 거란 확신은 가지고 있었다. 어쨌건 원작이 공인한 연인 사이였다. 눈만 마주쳐도 침대 위에서 운동한다던 묘사가 헛되지 않을 거다.
다만.
‘회귀는 예상 못했지.’
바리아는 회귀로 인해 아카데미를 두 번이나 다니는데, 수석으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하는 경우는 회귀한 후에 속했다.
일전에 과연 지금 이 시점의 바리아가 회귀를 했을지 안 했을지, 그것에 대해 아주 짧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흘려보냈었다.
그랬던 탓일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솔직히 정말, 진짜로 설마 했다.
기어코 솜털이 곤두선 레오니에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졌다.
레오니에는 책상에 앉아 종이 한 장을 펼치고 까만 깃이 달린 잉크 펜을 집었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원작 내용을 쭉 적어 내려갔다.
‘이젠 기억도 잘 안 나.’
쓰면 쓸수록 이게 맞나, 싶은 부분이 계속 생겼다. 레오니에는 북부 저택 저의 방에 숨겨 놓은, 원작 내용을 적어 둔 종이 뭉치가 간절했다.
어느 정도 대충 적은 레오니에가 자신이 쓴 걸 한 번 쭉 살폈다.
‘……어휴, 이 언니도 참.’
레오니에가 혀를 짧게 찼다. 바리아의 첫 번째 인생은 참으로 안타깝고 기구했다.
남부 귀족인 에르바누 가문의 바리아는 집안에서 겉도는 존재였다. 선명한 분홍색 머리를 타고나는 집안에서 바리아 혼자 탁한 분홍색을 품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부모님은 막냇동생인 로타 에르바누를 눈에 띄게 아꼈다. 심지어 로타는 올로르 자작 가문의 후계자와 약혼까지 한다.
바리아는 그런 가족들에게 인정받고자 열심히 공부해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황궁 행정관이 된다.
‘바보 같은 언니.’
왜 그랬어.
그게 비극인 줄도 모르고.
레오니에가 입술 끝을 축 늘어트렸다. 책으로 봤을 때도 단순히 불쌍했지만, 자신이 저 이야기의 일원이 되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안타깝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했다. 연민과 동정이 샘솟았다.
레오니에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중했다.
그렇게 황궁 행정관이 된 바리아는 어느 날, 우연히 황궁 도서관에서 기밀을 접하게 된다. 바로 황제가 동서남북 각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합하려는 속셈이었다.
사실 군주국 황제가 지방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수비테오 황제의 속셈이었다. 황제는 각 지역의 수장인 대귀족들을 전부 멸문시키고 자신의 사람들을 채우려 했다.
그리고 에르바누 가문이 이 계획에 동참했다.
바리아는 부모님께 안 된다고 말렸으나 오히려 크게 혼났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뺨을 맞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네 지역의 수장 중 가장 강한 보레오티를 찾으려고 홀로 밤중에 집을 나왔다.
“하아…….”
레오니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출은 바리아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바리아는 그 후 그대로 가출 처리가 되었다. 가족들은 누구도 가출한 장녀를 찾지 않았고, 세상은 그렇게 바리아를 잊어 갔다.
하나 실상은 여동생과 그의 약혼자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 부모님들의 패륜 역시 한몫했다.
‘그리고 회귀했지.’
아카데미 입학 1년 전으로.
“……독이 바짝 올랐을 거야.”
레오니에는 알 수 있었다. 저 역시도 고아원에서 겪었던 부조리한 학대와 폭력을 버텨 왔다. 반드시 이 지옥에서 벗어나 복수하겠다는 악바리 근성으로 이를 갈았다.
잠깐 암울해진 레오니에가 정원으로 나갔다. 어느새 햇볕이 따가운 정오였다.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였다.
“마실 것을 가져올까요?”
레오니에를 분수 옆 정자까지 모신 코니가 물었다. 레오니에는 잠시 고민하다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코니가 음료를 가져오려 돌아서기 무섭게 미소는 사라졌다.
‘지금도 혼자서 버티겠지?’
자꾸만 머릿속에서 바리아가 맴돌았다. 원작에서 바리아는 펠리오를 만나기 전까지, 행정관 전용 사택에서 홀로 지낸다. 가족들에게 배신당했던 첫 번째 삶을 떨치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고 떨칠 생각도 없었다.
‘동질감 드네…….’
레오니에는 아까부터 계속 고아원에서 지냈던 날들이 떠올랐다. 바로 가까이에 자신이 아는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니 괜히 과거의 저와 겹쳐 보였고, 절로 우울해졌다.
“후우…….”
스스로 기가 막힌 레오니에가 그대로 테이블에 턱을 괴고 흐느적거렸다. 이런 어둑하고 질척한 과거 따위로 동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때,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졌다.
“……아빠 왔어?”
레오니에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옆에 떡하니 앉은 펠리오를 불렀다. 이제 펠리오의 기척 정도야 집중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곧 차가운 손이 이마에 얹어졌다.
“레오, 너 열이 좀 있나?”
“아픈 거 아냐…….”
“그런데 왜 이래?”
“…….”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레오니에가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그냥.”
어느새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다만 지금은 펠리오를 바라보는 게 조금 불편했다. 기분이 워낙 우중충한 탓에 자신의 얼굴을 아빠한테 보여 주기가 그랬다.
다행히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얼굴을 억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빠 손 시원해.”
“네가 체온이 높은 거야.”
기다란 손가락이 아이의 앞머리를 빙글빙글 꼬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
“그러니 머리에 열이 몰리지.”
“또 시비…….”
레오니에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펠리오를 건드렸다.
“여자는 가끔 이렇게 사색에 빠질 때가 있어.”
“그냥 졸리다고 해라.”
“진짜야.”
입술을 삐죽이던 레오니에가 슬쩍 펠리오를 바라봤다. 분홍색이 살짝 들어간 반소매 셔츠를 입은 펠리오는 쇄골이 보일 정도로 목깃을 한껏 열어 두었다.
검은 맹수도 일단은 사람인지라 더위를 많이 타는 듯했다. 더욱이 펠리오는 겨울이 긴 북부 사람이었다. 남들보다 은근히 여름을 탔다.
“있잖아.”
자세를 똑바로 고친 레오니에가 아빠의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은 차가웠는데, 팔뚝은 레오니에의 체온보다 훨씬 따뜻했다.
‘수족 냉증 있나 봐.’
팔뚝을 만지작거리던 손은 곧 안마하듯 힘주어 주물럭거렸다.
“만약에 말이야.”
레오니에가 말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만약이다?”
“만약?”
“응. 정말로 만약.”
레오니에가 몇 번이고 강조했다. 펠리오는 알았으니 어서 말이나 하라며 레오니에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살짝 뒤로 휘청거린 레오니에가 눈을 흘겼다.
동시에 코니가 음료수를 가져왔다. 펠리오를 중간에 만나기라도 했는지, 시원한 음료가 두 잔이었다.
펠리오는 그중 작은 유리잔에 제 손수건을 빙빙 감았다.
“자.”
그리고 손수 레오니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차가운 잔 겉면에 맺히는 물방울에 젖지 말라는 배려였다.
“……혹시 누가 말이야.”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를 홀짝인 레오니에가 가까스로 말했다.
“자기 혼자서 엄청난 비밀을 숨긴 채 버티고 있는데…….”
그러면서 힐끔힐끔 아빠를 살폈다. 펠리오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감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아빠가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 혼자서 힘들게 버티는 게 너무 안쓰러워 보이면 어떡해?”
레오니에는 막상 바리아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내가 너를 돕겠다며 당장 찾아가 오지랖을 부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이는 이상하게도 계속 자신과 바리아의 과거가 겹쳐졌다. 고아원에서 괴로웠던 자신, 가족의 무관심과 배신으로 고통받던 그녀. 솔직히 닮았다고 하기엔 너무 억지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 마음만 먹으면 당장 만날 수 있는 수도 내에 회귀한 바리아가 있다니, 꼭 뭐라도 하고 싶어졌다.
‘난 원작에 관심 없는 거 아니었나?’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였다.
“레오.”
그때였다.
툭, 하고 차가운 것이 이마에 닿았다. 레오니에가 눈을 올렸다. 물기가 깨끗하게 닦인 유리잔이 이마에 올려졌다. 불투명한 음료 너머로 펠리오의 손이 큼지막하게 투영되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안쓰럽대?”
펠리오가 물었다.
“자기가 혼자 버티는 게 힘들다고 했어? 그래서 죽을 것 같다고 울었어?”
“어……?”
예상치 못한 말에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펠리오는 그런 딸을 지그시 바라봤다.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보려는 듯 올곧은 시선에 레오니에가 머뭇거렸다. 그리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말했다.
“그건 아냐.”
첫 번째 삶에서 맞이한 죽음을 끝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온 바리아는 분명 처절한 절망과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한 것도 아니었어.’
바리아는 최선을 다했다. 가족들에게 잘 보이려던 미련을 완전히 포기했다. 대신에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고, 저를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바리아는 믿을 수 있는 친구도 사귀고,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레오 넌 뭐 때문에 그 사람이 안쓰럽다고 느낀 거지?”
펠리오가 다시 물었다.
딱히 혼을 내는 말투가 아님에도 레오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근한 목소리와 나른한 눈길이 처음으로 불편했다.
그러나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닦달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아이를 혼낼 마음이 없었다. 그저 아이가 물어본 ‘만일’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준 것이 다였다. 그리고 아이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살짝 기다려줄 뿐이었다.
“겉으로 본 그 사람의 모습 때문에?”
다만 그것이 마냥 안쓰러운가?
안쓰러워 보인다고 동정해도 되는 건가?
여덟 살 생일을 코앞에 둔 아이를 너무 몰아붙이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자신의 딸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분명 제 뜻을 이해할 거라고. 그리고 펠리오의 예상은 오늘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으으!”
레오니에는 열이 확 올랐다. 그리곤 뭔가를 깨우친 듯, 소리를 질렀다.
‘잘못 생각한 거야.’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가지고 있던, 심지어 아이 본인조차 모르고 있었던 커다란 착각을 깨우쳐 줬다.
‘나는 다 아는 게 아니야.’
레오니에는 분명 ‘원작’을 안다. 앞으로 몇 년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 커다란 세상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깟 원작 좀 안다는 것만으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오만을 떨었다.
원작은 기껏해야 찰나였다.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곳 세상 속에서, 원작이 보여 주는 장면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언제건 원작과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컸다. 그 증거가 바로 레오니에 저 자신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원작의 흐름이 크게 뒤바뀔 수 있다는 본보기였다.
“창피해.”
레오니에가 고개를 팍 숙였다.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는 바리아의 지금 상황을 제멋대로 동정하다니. 이건 상대에게 아주 큰 실례였다.
“창피할 건 아니지.”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보다 느리고 힘이 실린 목소리가 위로처럼 느껴졌다.
레오니에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손수건 감긴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펠리오가 늘 지니고 다니는 손수건은 레오니에가 하나하나 골라 준 것이었다.
“너는 나랑 달리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거야.”
“근데 아빠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했잖아.”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보다 위에 서야 하는 보레오티가 굳이 남의 상황을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일전에 가정 교사 고용 문제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건 사실이지.”
펠리오는 그 생각 자체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레오 넌 그 사람을 걱정한 거잖아.”
“아냐, 상대한테 무례했어…….”
“그렇게까지 비하는 말고.”
잠시 말을 멈춘 펠리오가 무언가를 조용히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것들을 천천히 정리하는 동안, 레오니에의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고아원에서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손톱은 제대로 다듬지도 않아 날카로웠고, 그 틈엔 때가 가득했다. 거칠게 튼 손등은 새하얀 각질이 껴 있었고, 거스러미가 없는 손가락이 없었다.
지금은 그랬던 시절이 거짓말인 것처럼 포동포동하고 보드랍기만 했다. 분홍빛이 도는 손톱은 매끄럽게 반짝였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연민하는 게 나쁜 건 아니야.”
얼마 전까지, 하물며 레오니에를 만나기 전까지도 펠리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많은 고아원 아이들을 만났던 그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보아도 불쌍하단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이들의 상황이 저럴 뿐이니, 하고 남 일처럼 바라봤다.
하지만 레오니에와 함께 지내면서, 펠리오는 수도 없이 아이를 걱정했다.
너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나.
어른들은 왜 널 돕지 않았나.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건강해지고 예뻐졌는데도 쉴 틈 없이 걱정했다.
“누군가를 향한 관심이 없다면, 그마저도 할 수 없는 거야.”
“…….”
“그러니 너는 나쁘지 않아.”
레오니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제야 펠리오도 안도했다. 하여튼 애가 한번 풀 죽으면 낭떠러지처럼 축 처지니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지금은 기분이 많이 나아진 듯했다.
“그럼 아빠도 누구 걱정하고 막 그래?”
“일단 너.”
“헤헤……!”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아기 맹수가 몸을 비비 꼬았다. 테이블 아래 짧은 다리가 신이 나서 마구 흔들거렸다.
“그리고?”
“뭐…….”
펠리오가 잠깐 고민했다.
“카니스네 가족들. 아베페르랑 아이들까지.”
“그리고?”
“글라디고 기사단들. 카라도.”
“그리고오?”
“스트리지 스승님.”
“루페 아저씨는?”
“뭐, 그놈도 챙겨 줄까?”
장난스러운 펠리오의 물음에, 레오니에가 방긋 웃었다.
“아빠는 생각보다 착하구나!”
펠리오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푸스스 터진 웃음은 꽤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귀여워!”
“그건 아닐걸.”
“진짜야.”
자기는 거짓말 안 한다며 레오니에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진짜…….”
펠리오는 지금 느껴지는 기분이 신기하고도 이상했다. 이렇게나 마음이 몽글몽글했던 적이 없었다. 깃털보다 가벼운 구름처럼 한없이 부웅 떠오르는 기분이기도 했다.
저를 보고 착하고 귀엽다니.
“맹랑한 녀석.”
헛소리 그만하라며 펠리오가 괜히 음료를 들이켰다. 레오니에는 평소보다 붉은 혈색을 띤 아빠의 귀를 보며 몰래 키득거렸다.
초여름 날씨가 유난히 해맑은 어느 날이었다.
* * *
펠리오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뒤, 레오니에는 바리아에 대해서는 잠시 잊기로 했다.
‘연이 있다면 분명 다시 만날 거야.’
홀로 노력하는 바리아를 동정하는 건 그만뒀다. 대신 그녀와 다시 만나기 전까지, 부디 힘든 일이 찾아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만일 만나게 된다면 그때 반드시 도움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고민이 해결되고 나니,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어제 막 서부에서 수도 중앙으로 넘어온 리네 백작 가족들이 인사를 겸해 보레오티 저택을 방문했다.
“레오 언니!”
“누나아아!”
우피클라와 피누, 기운 센 강아지 남매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요 똥강아지들!”
레오니에가 각오를 단단히 다진 채 두 팔을 벌렸다. 그동안 열심히 훈련장을 달리면서 튼튼히 다진 두 다리에도 힘을 바짝 줬다.
“컥!”
그러나 저보다 큰 우피클라나 힘이 넘치는 피누를 이기지 못하고, 레오니에는 그대로 발라당 넘어졌다. 다행히 뒤에서 혹시, 하고 지켜보고 있던 멜레스가 받쳐 준 덕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레오니에는 어느새 하늘을 향해 뒤집힌 시야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얘들이 진짜.”
아비페르가 우피클라와 피누를 한 명씩 떨어트리며 나무랐다.
“죄송합니다, 영애.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간 잘 지내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흐트러진 레오니에의 옷맵시를 정리해 주며, 아비페르가 다정히 웃었다. 레오니에도 따라 배시시 웃었다.
“아니, 좀 크신 것 같은데?”
뒤따라 온 카니스가 제 다리 언저리에 손을 댔다.
“저희 서부 저택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가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게. 살도 좀 붙으신 것 같고.”
“어휴, 두 분도 참.”
자랐다는 말에 레오니에가 아닌 척 겸손을 떨었다. 그러나 이미 입꼬리가 광대를 뚫고 승천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에 옷을 전부 새로 맞추셨습니다.”
함께 마중 나온 트라가 쑥스러워하는 레오니에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 옷 맞추는 데 필요한 장식품들로 북부 광산에서 나는 보석들을 종류별로 제공하셨답니다.”
“어머나.”
아비페르가 웬일이냐며 호호 웃었다. 천하의 검은 맹수도 제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물러지는 모양이었다.
“언니, 우리 강아지예요!”
“멍무이!”
우피클라와 피누가 수도 저택에서 기르는 반려동물을 데려왔다며, 어서 보라며 손을 잡아당겼다. 못 이기는 척 끌려간 레오니에는 리네 가문 사용인들이 데려온 반려동물들과 마주했다. 털이 뽀송뽀송한 소형견 세 마리가 커다란 바구니에 담긴 채였다.
“귀여워!”
레오니에가 발그레해진 두 볼을 손으로 감쌌다.
“얘가 프프, 세세, 테테.”
우피클라가 한 마리씩 이름을 가르쳐 줬다. 태어난 순서대로 이름이 불린 개들의 목에는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피누가 그중 파란 목걸이를 찬 세세를 와락 끌어안았다.
“세세 좋아!”
세세도 피누가 좋은지 새빨간 혀로 날름날름 피누의 볼을 핥았다. 피누의 얼굴만큼 털이 부푼 꼬리가 바람을 일으키듯 붕붕 흔들렸다.
“낑낑! 낑!”
그런데 갑자기 개들이 겁에 질린 듯 몸을 움츠렸다. 꼬리가 배 밑에 닿을 정도로 축 늘어졌고, 안절부절못하며 낑낑거렸다.
“누나, 멍멍이 아야해?”
“나도 몰라? 어어? 아파?”
놀란 우피클라와 피누가 개들을 보듬으며 걱정했다.
“아, 괜찮아.”
혼자 차분한 레오니에가 안심하라며 두 아이를 다독였다.
“우리 아빠 나왔거든.”
레오니에가 저기 보라며 계단을 가리켰다. 일을 마치고 뒤늦게 나온 펠리오가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강아지들이 더욱 낑낑거렸다.
“아빠 때문이야!”
벌떡 일어난 레오니에가 킥킥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펠리오는 별말 없이 레오니에의 손가락을 접었다. 제법 세게 접힌 탓에 레오니에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에 펠리오는 우피클라와 피누에게 잘 왔다고 인사했다.
“공작님, 멍멍이예요!”
“우리 멍멍멍.”
아이들은 펠리오에게도 개들을 보였다.
그러나 개들은 바구니 안으로 기어들어 가 얼굴까지 두 발로 감싼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다 기어코 한 마리가 오줌을 싸고 말았다.
“세세 쉬 했어!”
피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 * *
개들의 심신 안정을 위해, 아이들은 레오니에의 방으로 가서 놀았다. 개들도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는지 바구니에서 뛰어나와 이곳저곳 탐색하며 뽈뽈 돌아다녔다.
그동안 어른들은 1층 응접실에 모여 짧은 근황을 나누었다.
“왜 개를 데려와.”
조금 전 일로 심기가 불편해진 펠리오가 카니스를 노려봤다.
“애들이 영애한테 보여 주고 싶다잖아.”
내 뜻이 아니었다며 카니스가 냉큼 발을 뺐다. 아비페르도 개들은 두고 오자고 말했지만, 아이들이 레오니에한테 보여 줄 거라며 하도 고집을 부려 데려왔다고 했다.
“그나저나 너 아직도 그러냐.”
“그래도 전보다 나아지신 것 같지 않아?”
“하긴…….”
아비페르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카니스가 큭큭거렸다. 펠리오가 리네 가문에 몇 번 찾아올 땐 개들이 기척을 느끼자마자 도망을 쳤었다.
“개들이고 고양이고, 조그마한 동물들은 어지간하면 너보고 다 도망치잖아.”
“가끔 그러는 거야.”
“뭐가 가끔이냐.”
늘 그랬지, 카니스가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상하게도 개나 고양이처럼 작은 동물은 펠리오만 봤다, 하면 냅다 도망쳤다. 아이들이 펠리오를 보자마자 자지러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강아지들이 도망은 안 쳤으니, 많이 나아진 상황이었다.
“송곳니 때문이야.”
“아니야, 네 얼굴이야.”
펠리오가 변명하니, 카니스가 바로 맞받아쳤다.
“공작님 잘생기셨어.”
너보다도 잘생겼는걸, 아비페르가 그건 아니라고 반박했다. 펠리오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러자 카니스가 삐친 어투로 다시 반박했다.
“무섭게 생겼잖아.”
“그거야……!”
아니라고 편들어 주려던 아비페르가 머뭇거렸다. 사실 저 역시도 펠리오의 아름다운 얼굴보다 섬뜩한 위압감에 지레 겁먹을 때가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괜찮습니다.”
그런 소리 듣는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펠리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곧 있으면 연회가 열린다던데.”
아비페르가 분위기를 바꿀 겸, 대화 주제를 돌렸다. 마침 또 펠리오의 책상 위에 뜯지 않은 노란색 봉투가 있었다. 황실이 보낸 연회 초대장이었다.
“야, 좀 뜯어 봐라.”
카니스가 뜯지도 않은 초대장을 가리키며 잔소리했다.
“네가 봤을 거 아냐.”
어차피 초대장 내용은 다 똑같으니, 카니스 네가 본 걸 전해 달라며 펠리오가 뻔뻔하게 굴었다.
“난 네 하인이 아니거든?”
기가 막힌 카니스가 투덜거리면서도 연회 날짜와 시간을 알려 줬다. 동시에 뜯지 않은 펠리오의 초대장을 과감히 뜯었다.
“다음 달 여덟 시. 늦게 열리네.”
“그때면 해가 질 때니까. 여름 연회는 늘 늦게 열리잖아.”
“야외는 아닐 거야. 귀하신 귀족들께서는 벌레를 싫어하니까.”
“당신도 귀족이야.”
빈정거리는 남편의 말투가 웃겼던 아비페르가 한마디 덧붙였다.
“난 안 가.”
펠리오가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차를 넘기는 자세며 태도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너 또 그러냐.”
카니스가 웬만하면 가라고 타일렀다. 선황 사후 처음 열리는 연회였다. 아무리 지금 황제가 싫어도 연회장에 얼굴이라도 비추는 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레오가 있잖아.”
“우린 애 없냐.”
펠리오가 아이 핑계를 대기 무섭게 카니스가 대꾸했다.
“저희 저택에 유모가 있으니까, 연회에 가실 때 영애를…….”
아비페르까지 합세해 빠져나올 구멍을 완벽하게 막으려던 찰나였다.
“……미쳤나, 이게.”
분노에 겨운 카니스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깜짝 놀란 아비페르가 왜 그러냐고 물었고, 카니스는 말없이 초대장을 건넸다.
초대장을 읽은 아비페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벨리우스 황궁.
황후궁에는 조그마한 정원이 있었다. 수풀이 우거진 서부가 그리웠던 티그리아 황후가 손수 직접 가꾼 곳이었다. 여름꽃이 이제 막 봉우리를 피웠고, 달콤한 꽃내음이 가득했다. 다양한 색이 흐드러지게 핀 여름 화원은 황후궁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공작의 아이요?”
싹둑.
정원에 핀 여름꽃을 손수 자르던 티그리아 황후가 불쾌하단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은발을 올려 묶은 덕에 새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을 제게 물어보시는 의중이 무엇인지요?”
티그리아 황후가 곁에 있던 시녀에게 다듬은 꽃들과 정원용 가위를 건넸다. 시녀는 이를 받아 바로 옆에 있던 테이블에 가지런히 내려놨다.
“폐하?”
수비테오 황제의 답이 없자, 티그리아 황후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뒤에서 황후의 새하얀 목덜미를 말없이 지켜보던 황제가 그제야 어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황후의 정갈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업무를 다 돌보고 한적한 여유를 즐기는가 싶었더니, 이런 식으로 방해받을 줄은 몰랐다. 티그리아 황후는 자신의 불쾌한 심기를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뒤에는 기사 넷과 무수한 시중들이 줄지어 있었다. 저 한 명 만나러 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이끌고 왔다. 오로지 제 권위를 높이 보이기 위해서.
“그래도 황후는 보레오티 공작과 친분이 있지 않은가.”
“친분이요?”
“그래. 결혼 전에 그와 면식이 있었다지.”
“면식이 있다고 다 친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뒤돌아선 티그리아 황후가 황제를 응시했다. 제 눈앞에 있는 사내는 겉은 멀쩡하게 생겼으나 그 내면은 어리석다 못해 자신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소인배였다. 보레오티 공작은 그에게 관심조차 없건만, 저 혼자 괜히 열등감에 빠져 그를 이겨 보려고 버둥거리는 꼴이 화가 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했다.
“황제 폐하.”
가까스로 침착해진 티그리아 황후가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저 역시도 공작에 대한, 더욱이 그 사생아라는 어린 소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시녀들이 알아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편이지요.”
“아이의 엄마로 추측되는 자도 모르는가?”
수비테오 황제의 재촉에 티그리아 황후가 콧방귀를 꼈다.
“보레오티 공작은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것만큼은 깔끔하지요.”
너랑은 다르게.
노골적인 말뜻을 눈치챈 황제가 화를 냈다.
“황후! 감히 내게 한 말이오!”
자신의 부정을 찔렸음에도 도리어 황후에게 소리를 높였다.
“그 건방진 태도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소!”
누군가가 본다면 황제가 진노하였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부들부들 떨 모습이었다. 어쨌건 허우대만큼은 멀쩡했기에.
“제가 언제 폐하께 건방졌습니까?”
하나 티그리아 황후의 눈에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저렇게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인간에게 자신이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그럼 조금 전 그 발언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보레오티 공작이 적어도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물론 지금 그가 품에 끼고 산다는 딸아이가 마음에 걸리지만.
황후는 솔직히 펠리오에게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그가 사생아를 거두어 진심으로 돌본다는 건 아주 의외였다. 적어도 제 자식을 편애하는 황제보다야 비교도 못할 만큼 대단했다.
“그리고 폐하.”
황후가 입을 여는 순간.
툭, 하고 노란색 장미가 머리채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황후가 입은 드레스 치맛자락이 넘실거렸다. 구름 한 점 없어 바람이라곤 전혀 없는 날씨임에도 말이다.
“……윽!”
수비테오 황제가 주춤 뒷걸음질했다.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 황제의 앞으로 지켜서듯 나섰다. 하나 그들 역시도 자신들 모르게 긴장된 근육 탓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황후 폐하.”
다만 티그리아 황후 뒤에서 홀로 조용히 서 있던 시녀만이 태연하게 움직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황후는 그제야 가까스로 방출하던 오러를 거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아직 많이 미흡하여 오러를 쉬이 다스리지 못하였네요. 자비로운 황제 폐하시라면 이해해 주실 것이죠?”
티그리아 황후는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살짝 내비친 오러에 눌러 겁먹은 일국의 황제가 사실 우스웠다. 존경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누가 왔지? 오늘 예정된 방문은 없는…….”
“황후 폐하!”
멀리서 애교가 한가득 묻은 목소리가 들렸다. 티그리아 황후의 입가가 움찔했다.
“오오, 황비!”
반면 황제는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호탕하게 반기었다. 조금 전까지 겁먹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티그리아 황후는 어이가 없어 콧방귀도 안 나왔다.
“황제 폐하도 계셨네요!”
우시스 황비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치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두 분 다 뭐하고 계셨나요?”
더운 날씨에도 초록색 머리를 화사하게 풀어헤친 우시스 황비는 순진한 눈초리를 귀엽게 찡그렸다. 앙증맞은 눈웃음에 황제가 다정히 미소지었다.
‘역시 여자는 저래야지.’
황후처럼 잘난 척하며 강한 면모만 보이는 것보다, 이렇게 순진하고 애교 많은 성격이 남자에겐 즐거움이었다.
“딱히 대단한 이야기는 없었네. 보레오티 공작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
“보레오티 공작님이요?”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이던 우시스 황비가 아, 하고 뭔가를 떠올렸다.
“그분의 사생아 말이군요!”
“황비, 아무리 그래도…….”
“그럼 있잖아요!”
사생아란 단어에 주의를 주려던 티그리아 황후보다, 황제의 손을 붙잡고 간청하는 우시스 황비가 더 빨랐다.
“저도 궁금했는데, 한 번 그 아이를 볼 수 없을까요?”
“황비!”
“그렇지만 황제 폐하는 뭐든 할 수 있는 분이시잖아요.”
황후의 나무람에 풀이 죽은 우시스 황비가 슬그머니 황제를 올려다봤다. 그러곤 싱긋 웃었다.
“마침 곧 있으면 연회도 열리잖아요.”
그때 아이를 초대하면 안 되느냐고, 황비가 은근슬쩍 수비테오 황제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 * *
“……이상이 대략적인 전말입니다.”
보고를 마친 루페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펠리오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집무실 분위기는 살벌하다 못해 얼음 속에 파묻힌 것처럼 오싹했다. 밖은 더운 여름인데 이곳만 시린 겨울이었다.
‘황제가 진짜 미쳤나.’
루페는 어이가 없던 초대장 내용을 떠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보레오티 공작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부디 귀애하시는 자녀분과 함께 방문하시어 황제 폐하의 진심 어린 걱정을 가라앉혀 주시길 바랍니다.]
무례를 넘어 시비나 마찬가지인 초대장이었다.
처음 초대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 루페는 자신이 헛들은 거라 착각했다. 황실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연회장에 어린아이를 데려오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근데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 이거 당장 항의해!’
당시 자리에 있었던 카니스는 당장 황실에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 딸을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는 소리잖아!’
루페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의도가 너무 악질적이었다. 황실은 소문이 무성한 공작의 사생아를 귀족들 앞에 세워 겁을 주려는 속셈이었다. 동시에 펠리오를 견제하려는 속셈일 테고.
물론 펠리오는 이를 항의하고 거절할 수 있다. 펠리오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오.”
묵묵히 침묵을 유지하던 펠리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할래?”
“……글쎄.”
펠리오가 의자 뒤로 상체를 슬쩍 기대자, 그 품에 안겨 있던 레오니에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의 조막만 한 손에는 문제의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어쩔까나.”
레오니에가 초대장을 책상에 툭툭 쳤다.
그럴 때마다 집무실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졌다. 사실, 지금 집무실에 가득한 살이 아리는 긴장감은 전부 레오니에의 불쾌한 심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진짜 공작님 판박이……!’
루페가 속으로 외쳤다.
아기 맹수는 하루가 가기 무섭게 아빠 맹수를 빼닮아 갔다. 무감한 시선으로 초대장을 응시하는 그 모습은 평소 남들을 우습게 보는 펠리오와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았다.
진정한 검은 맹수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좋아.”
잠깐의 고민 후, 레오니에가 초대장을 책상에 내려놨다.
“갈게.”
“아가씨!”
루페가 진심이냐며 걱정을 내비쳤다. 아무리 레오니에가 어른조차 놀라게 하는 애늙은이라지만,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는 연회장은 도저히 무리였다.
“나도 이번만큼은 루페와 같은 의견이다.”
펠리오도 루페와 같은 의견이었다.
우아하고 화려한 연회는 결코 보이는 것만큼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었다. 악의와 질투, 견제와 탐색이 판치는 무기 없는 전쟁터였다. 펠리오는 그곳에 어린 딸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어우, 나 정말이지.”
반면 레오니에는 두 어른의 반응에 퍽 실망했다. 이게 무슨 분위기냐며 어깨와 두 손도 과장 섞어 으쓱거렸다.
“나 보레오티야.”
콧방귀를 흥, 하고 뀐 레오니에가 오만하게 팔짱을 끼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멋들어지게 꼬기엔 아직 다리가 덜 여물어 쪼르르 내려갔다. 루페가 웃음이 터지려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걸어 온 시비는 받아 줘야지.”
안 그래?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펠리오를 뒤로 올려다봤다. 펠리오는 여전히 탐탁잖은 표정이었다.
“네 고집을 누가 말릴까.”
그러나 결국엔 피식, 입가를 비틀었다.
“……확실히 나의 후계자를 소개하는 자리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공식적인 자리 따로 안 만들어도 되고 좋으네!”
“하여튼 맹랑한 건 누굴 닮았는지.”
기분이 한결 좋아지니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 * *
레오니에가 다가오는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은 하루가 다르게 퍼져 갔다.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세상에, 이건 너무 잔인해.”
“아무리 그래도 어린 소녀인데.”
하나는 황실이 너무하다는 쪽.
“아니, 툭 까놓고 말해서 다들 궁금했잖는가.”
“공작을 그렇게 빼닮았다면서요?”
두 번째는 은근히 기대하는 쪽.
이렇다 보니 덩달아 연회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선황 사후 처음 열리는 뜻깊은 자리이기도 하나, 소문의 공작 영애를 볼 수 있는 공식적인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아비페르가 공작저에 방문했다.
“솔직히 저는 안 갔으면 하는 쪽이랍니다.”
아비페르가 지금껏 꾹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부인의 다과회건 전부 그 이야기예요. 다들 제게 얼마나 물어본다고요.”
“걱정을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부인.”
레오니에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영애께서 사과할 일이 있나요?”
아비페르가 괜찮다며 레오니에의 손등을 도닥였다.
“그래도 뭐, 영애께서 워낙 야무지고 똑똑하시니 그나마 마음이 놓이네요. 저도 그날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부인 덕에 제가 마음이 놓여요.”
똑 부러지게 답하는 레오니에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전투를 앞둔 기사처럼 기백이 넘쳤다.
‘감히 날 건드려?’
레오니에가 초대장을 허락한 이유는 하나였다.
‘지옥을 보여 주마.’
속셈이 너무도 뻔한 초대장이었다. 감히 보레오티를 걱정한다는 핑계로 저를 가지고 놀려고 하다니.
레오니에는 자신의 첫 예절 교사였던 케라나가 자연히 떠올렸다. 예방 접종처럼 비슷한 일을 경험한 덕에 여유가 넘쳤다.
레오니에는 어떤 식으로 황제와 귀족들을 골탕 먹일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연히 펠리오의 허락도 받았다.
‘이왕 할 거면 최선을 다해.’
작정하고 깽판을 치라며 든든한 응원도 받았다.
‘다행히 나는 평범한 꼬맹이가 아니란 말이지.’
레오니에는 자신의 어린 나이를 악용하기로 결정했다.
“크크크큭…….”
아비페르가 잠시 한눈 판 사이, 레오니에가 사악한 미소를 흘렸다. 귀여운 아기 맹수의 몸속에는 정신머리가 썩을 대로 썩은 영혼이 들어 있었다.
레오니에는 아비페르와 함께 드레스를 맞추러 광장으로 나갔다. 보레오티에 큰 여자 어른이 없는 탓에 레오니에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펠리오가 아무리 신경 쓴다고 해도 거기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아비페르가 나서 선뜻 도와주기로 했다.
“부인도 바쁘신 거 아니에요?”
“영애와 함께 나설 시간은 있답니다.”
“하지만 애들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다 안다며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저도 가끔 저희 아빠 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해도 듣는 척을 안 한다니까요.”
가끔은 자신이 애를 키우는 것 같다며 레오니에가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나…….”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를 아비페르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럴 땐 그냥 딱히 대꾸하지 않는 게 상책임을 몇 번의 경험으로 깨우쳤다. 거기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현재 수도에서 인기가 급상승 중인 드레스 가게였다.
문을 열자 딸랑딸랑, 종이 울렸다.
“보레오티 영애!”
머리를 질끈 동여맨 남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눈에 봐도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반가운 듯 흔드는 오른손에는 시침 핀을 꽂는 두툼한 솜이 달려 있었다.
“테온 남작!”
레오니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리네 백작 부인께서도 오셨군요.”
테온 남작이라 불린 남자가 아비페르에게도 친절히 인사했다.
그가 바로 이곳 드레스 가게의 주인이자 떠오르는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최근 보레오티 공작 영애의 의상을 전담한 것으로 더욱 이름을 떨쳤다.
“두 분 사이가 무척이나 좋으시네요.”
아비페르가 진심으로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둘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막역해 보였다. 이에 테온 남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저는 영애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얼마 전,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옷을 맞추기 위해 수도에 있는 디자이너들을 전부 저택에 초대했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줄 의상을 가져와 선보였다.
그리고 테온 남작만이 레오니에에게 선택받았다.
“남작의 옷이 가장 좋았어요.”
‘……설마 근육 때문에?’
아비페르는 저도 모르게 그만 레오니에의 선택을 의심했다. 소매를 한껏 올린 테온 남작의 팔뚝이 무척이나 튼튼했다. 근육 변태의 취향이었다.
하지만 그 의심은 곧 날아갔다.
“마침 잘 오셨어요. 옷 몇 벌이 완성되었답니다.”
테온 남작이 직원들에게 가져오라 말하니, 곧 조그마한 마네킹 서너 개가 줄줄이 들려 나왔다. 레오니에와 덩치가 비슷한 마네킹들은 다양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와아!”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네킹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 원피스는 영애께서 주문하신 대로 목깃을 보다 크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다양한 장식을 달아도 될 겁니다. 그리고 이쪽 바지는…….”
테온 남작이 의상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했다. 그가 제작한 의상은 하나 같이 독특하고 창의적이었다. 거기다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도 있었다.
아비페르는 이토록 유능한 디자이너를 왜 지금껏 몰라봤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제 아이들의 옷도 여기서 맞추고 싶었다.
“역시 대단해요!”
옷을 하나하나 살핀 레오니에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테온 남작이 쑥스러운 듯 고개만 끄덕였다.
“역시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도 남작한테 맡겨야겠어요.”
“영애…….”
“시간이 많이 모자랄 수도 있지만, 우리 힘내보자고요!”
레오니에가 으쌰으쌰 주먹을 쥐었다. 감격에 겨운 테온 남작 역시 각오를 다지듯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 불이 붙은 것처럼 새빨갛게 힘이 들어갔다.
“저의 모든 실력을 쏟아붓겠습니다!”
“예! 옷이 터질 정도로!”
“터질…… 응? 뭐가 터집니까?”
“우리의 열정이!”
레오니에가 황급히 앞말을 수정했다.
레오니에의 첫 번째 드레스는 열띤 토론 속에서 정해졌다.
“그래도 연회 드레스인데, 휘황찬란한 게 좋지 않을까요? 막, 어어, 어…….”
열심히 의견을 내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참고 삼아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렸더니,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이 입었던 노출 찬란한 드레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골?”
순간 떠오르는 것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옆구리 파인 것도 좋다……!”
그 틈으로 보이던 배우들 복근은 더 좋았지, 레오니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남작, 다 가려 주세요.”
아비페르는 못 들은 척하며 테온 남작과 드레스 디자인을 의논했다. 의견을 무시당한 레오니에가 툴툴거리며 애먼 소파 쿠션만 콕콕 찔렀다.
“그럼 망토 달아 줘요.”
문득 북부에서 자주 걸쳤던 망토가 떠올렸다. 겨울이면 춥다고 실내에서도 펠리오가 항상 망토를 챙겨 입혔다. 그게 습관이 되어서, 레오니에는 지금도 외출할 때면 항상 망토 같은 걸 외투로 즐겨 입었다. 지금도 짧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테온 남작은 열심히 스케치했다.
어느 정도 의견을 맞추던 중, 보레오티 공작저로부터 연락 하나가 도착했다. 드레스를 만들 때 필요한 가공된 보석은 며칠 내로 보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공작님께서 영애를 많이 생각하시네요.”
테온 남작의 말에 레오니에가 헤실헤실 웃었다.
드레스 주문을 마친 레오니에와 아비페르가 가게를 나왔다. 쨍쨍한 햇살이 눈 부신 날씨였다. 근처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다가와 양산을 건넸다. 아비페르가 양산을 펼치자, 레오니에도 따라 펼쳤다.
“다음에 우피클라랑 피누도 데려와요.”
함께 광장을 구경하자는 말에, 아비페르가 미소 지었다.
둘은 근처에 있던 카페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곧 주문한 음료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레오니에는 크림이 듬뿍 올라간 초콜릿 음료, 아비페르는 레몬이 두둥실 뜬 홍차였다.
“영애랑 같이 있으면 말이지요.”
레몬을 건져 내면서, 아비페르가 조용히 말했다.
“꼭 친구랑 노는 것 같아요.”
“저도요! 꼭 동년배랑 노는 것 같아요!”
“동년배…….”
아비페르가 웃음을 삼키며 가까스로 찻물을 넘겼다. 잘못했다간 크게 뿜을 뻔했다. 처음엔 저런 애늙은이 같은 모습은 무척 당혹스러웠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진짜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부인, 그럼 우리 말 놓을까요?”
“아니요.”
단호한 말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겼는지, 아비페르가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그랬다간 제가 공작님께 크게 혼이 날 거예요.”
아무리 친해져도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차기 공작님께 기껏해야 백작 부인인 저가 함부로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대신에 이름으로 불러요. 나는 부인이 날 레오니에라고 불러 주면 무척 기쁠 거예요.”
“그럼 저도 편히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아비페르!”
“네, 레오니에 님.”
레오니에와 아비페르가 서로 마주 보며 즐겁게 웃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는 순간이었다.
즐거운 수다를 마치고 카페를 나오려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멜레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레오니에를 찾았다.
“왜 그래요?”
심상찮은 예감에 레오니에 또한 표정이 심각해졌다.
“송구합니다. 마차 근처에 수상한 인물이 배회 중입니다.”
“수상한?”
“많이 위험한가요?”
아비페르가 슬며시 레오니에를 제 치마폭에 감싸듯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만일 그런 거라면 저 역시 나서서 이 작은 아이를 지켜야 했다.
그사이 레오니에가 여러 상황을 가정했다. 기사들은 대로 한복판에서 함부로 검을 꺼내지 못할 거다. 그 이유는 상대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거나, 검을 꺼내 대치하더라도 승산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은 무리지.’
보레오티가 자랑스레 여기는 글라디고 기사단은 제국 최강이었다. 거기다 지금 호위를 따라 나온 멜레스나 파보, 프로보의 실력은 기사단 중에서도 나름 상위였다.
하지만 멜레스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는 건, 수상한 인물이 물리적으로 위험한 사람은 아니란 뜻이었다. 밖에 남은 두 사람만으로도 대치가 가능하단 뜻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레오니에가 물었다.
멜레스가 결국 그 이름을 불렀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입니다.”
이는 레오니에가 단연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스토커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