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8. 입성, 입궁 (8/51)

#8. 입성, 입궁

“우리 사이에 뭘 또!”

카니스가 친구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비페르는 제 남편 엉덩이에서 꼬리가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을 꼬리일 텐데, 제 친구의 한마디에 그저 기뻐 열심히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얼마 전에.”

지켜보던 아비페르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보레오티 영애가 ‘혹시 백작 아저씨가 우리 아빠 샛서방 자리를 노리나?’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처음에야 당연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했다. 도대체 저 어린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상상이 가능한지 진심으로 궁금한 정도에서 끝이 났었다.

그런데 저 둘 보고 있자니.

“……헛말도 아닌 것 같네.”

수상쩍다며 아비페르가 푸른 눈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저 역시도 연애 시절에 두 사람 사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부탁인데.”

펠리오가 정색했다.

“제발 내 딸 앞에서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십시오. 이 변태가 그걸 듣고 나서 또 멋대로 오해하면 나만 골 아픕니다.”

딸만 아니었어도 당장 바닥에 내다 버리고 갔을 거라며, 펠리오가 품에 안은 원수를 이도 저도 못하는 눈으로 원망스레 노려봤다.

“제가 한 말인가요? 다 영애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건데.”

아비페르가 호호 웃었다.

이미 레오니에한테서 펠리오의 연인으로 추측되는 후보들을 다 들은 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후보들 절반이 남자란 사실에 아비페르는 배꼽을 잡아야 했다.

정작 농담의 대상이 된 펠리오와 카니스의 표정은 점점 썩어 갔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그딴 오해는 싫다 못해 역겨웠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론 대물이다…….”

저 나이에 그런 상상하기도 힘들 텐데, 카니스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레오니에를 칭찬했다. 대범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몇 걸음 뒤에서 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페와 코니, 미아, 글라디고 기사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냥 레오니에가 레오니에 했거니, 하며 덤덤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공작님.”

출발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루페가 다가왔다. 이젠 정말 마차에 올라타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마차에 오른 펠리오는 의자에 레오니에를 조심히 눕혔다.

“애들이 깨어나면 섭섭하겠네.”

카니스는 아직 방에서 자고 있을 우피클라와 피누를 떠올렸다. 보레오티 부녀가 아침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잠들기 전에 먼저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때도 우피클라와 피누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보레오티 저택에서 헤어질 때보다 훨씬 정이 든 탓이었다.

“역시 우리 애들이야. 보레오티라면 사족을 못 써.”

두 가문의 미래가 창창하다며, 카니스가 기쁜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일이 대충 마무리되면 수도로 갈 거야.”

“그때 다시 뵈어요. 조심히 올라가세요.”

리네 백작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보레오티의 마차가 출발했다.

새하얀 리네 저택이 점점 작아지고, 푸르른 수평선마저 보이지 않을 만큼 마차가 한참을 달린 후에야 레오니에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빠?”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레오니에가 멍한 시선으로 마차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자리를 옮겨 펠리오 옆에 앉았다.

“언제 출발했어?”

“좀 됐어.”

펠리오가 재킷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리네 저택을 떠난 지 이제 한 시간 정도 지났다.

“흐응?”

시계를 도로 안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니, 팔 안쪽으로 레오니에가 고개를 쑥 밀고 들어왔다. 당황한 펠리오가 저도 모르게 아이의 이마를 밀어낼 뻔했다.

“나 한 번 봐도 돼?”

회중시계가 신기했는지, 레오니에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호기심을 내비쳤다. 펠리오는 선뜻 재킷 안주머니에 연결된 회중시계 고리 줄을 풀어 그대로 아이에게 보여 줬다.

“이런 거 처음 봐.”

레오니에가 회중시계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신기하단 듯 중얼거렸다.

“집에도 시계 있잖아.”

“거실에 있는 그거?”

저택 거실에 연식이 무척 오래된 추시계 하나가 있었다. 상아색 몸체에 여러 빛깔로 반짝이는 화려한 자개 장식이 고풍스러운 괘종시계였다.

하나 레오니에를 비롯한 저택 사람들은 그 시계를 장식품 취급했다. 예쁜 건 둘째치고, 시계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탓이었다. 시계가 작동하질 않았다.

“그거, 작동한 적은 있어?”

“예전에는 움직였다지.”

펠리오가 여기저기 뻗은 레오니에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내 조부가, 그러니까 네 증조부가…….”

거실 괘종시계는 레오니에의 증조부 되는 선선대 보레오티 공작이 받은 선물이었다. 선선대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계는 북부 저택까지 오게 되었지만, 매시간 때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종소리가 거슬려 태엽을 빼버렸다고 한다.

“아깝게!”

사정을 알게 된 레오니에는 시계와 그것을 선물한 사람이 불쌍했다.

“시계 선물해 준 사람이 불쌍하잖아. 딱 봐도 비싸 보였는데.”

“그러게 누가 시끄럽게 굴래.”

그런 것도 고려 안 하고 선물한 사람이 잘못이라며 펠리오가 거만히 답했다.

“이 오만한 어른들…….”

레오니에가 혀를 끌끌 찼다. 다른 사람 입장이나 성의를 깊이 고려하지 않는 건 보레오티라는 인간이 지니는 특징인 듯했다. 저 오만한 성질머리는 아무래도 맹수의 송곳니처럼 피를 통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선대들도 뻔하지.’

펠리오의 가정 교사 고용 건만 봐도, 레오니에는 보레오티 조상님들이 어떤 사람이었을지 상상이 갔다. 얼굴만 조금씩 다른 펠리오들의 향연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조금 오싹해진 레오니에가 작게 몸을 떨었다.

그러다 문득 레지나가 떠올랐다. 보레오티의 피를 이었으면서도 이상과 로망에 푹 빠져 기어코 사랑의 도피를 떠났던 비운의 아가씨.

“……별난 사람이긴 했네.”

“누가?”

“내 친모.”

회중시계를 챙겨 넣던 펠리오가 멈칫했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 그 사람도 꽤나 보레오티다워.”

주변의 반대도 무릅쓰고 제 고집대로 행동한 것만 봐도 보레오티의 자기중심적인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응응, 팔짱을 낀 레오니에가 엄청난 발견을 한 것처럼 고개를 심도 있게 끄덕였다.

“…….”

펠리오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주군.”

똑똑,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누스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마누스 오빠?”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무릎을 기어가듯 타고 넘어가 창문을 열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마누스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펠리오를 기다리고 있던 터라 아기 맹수가 까꿍, 하고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다.

“조금 전에요. 그런데 왜요?”

“곧 게이트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주군께 보고하려고요.”

게이트를 지나가기 전에 마차 행렬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마누스가 어찌할지 펠리오에게 물었다.

“……여기서 점검하고 가지.”

한숨 같은 대답과 함께 펠리오가 명했다.

마차가 멈추는 동안, 레오니에는 갓길에서 코니와 미아의 시중을 받으며 샌드위치로 가볍게 배를 채웠다.

“맛있어.”

레오니에가 어느새 반밖에 남지 않은 닭고기 샌드위치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다. 달콤새콤한 꿀 겨자 소스가 촉촉하게 배인 식빵이 가장 맛있었다.

“소스 만드는 비법을 받아왔어요.”

미아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빗질하며 속닥거렸다.

“정말?”

레오니에가 눈을 반짝였다. 코니와 미아가 따라 웃었다.

“수도에 가셔도 드실 수 있고, 나중에 북부로 돌아가셔도 드실 수 있어요.”

“리네 저택 요리사님께서 한 병 따로 만들어서 선물로도 주셨어요.”

리네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음식을 너무도 맛있게 먹어 주어 감사하다며 챙겨 줬다는 말에,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수줍어했다.

그사이 레오니에는 빗질을 막 마쳤다. 형형색색의 리본을 쥔 코니가 양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며 기합을 팍팍 넣었다.

“이제 머리 묶으실까요!”

“머리 뽑는 거 아니지……?”

기합이 왜 저렇게 들어갔대. 레오니에가 흠칫거렸다.

“수도 하녀들에게 질 수 없으니까요.”

옆에서 코니를 돕던 미아가 대신 설명해 줬다. 그 사이 코니는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레오니에의 검은 머리를 반반으로 나누는 중이었다.

“북부 저택이랑 수도 저택이랑 은근히 경쟁하거든요. 물론 토박이 출신이 많은 북부 저택이 수도 저택 사용인들보다 앞서는 거야 당연하지만요.”

“그럼요! 그 앙큼한 것들…….”

미아의 말에 코니가 옳다구나 추임새를 넣었다. 레오니에가 불안한 기시감을 느꼈다.

‘또 나 가지고 경쟁하네.’

지난번에 저택에 온 리네 가문 하녀들에게 지기 싫다는 일념 때문에 인형 놀이 당했던 레오니에 입장에서, 하녀들의 호승심은 아주 두려운 것이었다. 그 탓인지 오늘따라 양 갈래머리가 유난히 부담스러웠다. 양쪽에 달린 큼지막한 리본이 흉기처럼 느껴졌다.

“게이트만 넘으면 수도가 코앞이에요.”

미아가 리본을 고쳐 주며 말했다. 머리 묶기에 온 힘을 다 바친 코니는 새하얗게 타버린 상태로 바위에서 쉬는 중이었다.

“근데 왜 저렇게 점검을 오래 해? 넘어가서 해도 되지 않아?”

레오니에는 아직도 점검 중인 마차 행렬을 가리켰다. 말발굽부터 시작해 짐 마차 연결 부위와 마차 바퀴 이음새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게이트를 한 번 통과할 때 울렁거리는 뭔가가 있대요.”

“울렁…….”

레오니에는 게이트를 처음 통과했던 지난 늦가을을 떠올렸다. 불쾌한 감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속이 부대꼈다. 미아가 말한 울렁거리는 뭔가가 대충 짐작이 갔다.

미아가 설명하는 울렁거림은 게이트의 특징 중 하나인 ‘일그러짐’이었다.

본디 게이트란 누군가가 만들어낸 발명품 같은 게 아니었다. 이전부터 제국 곳곳에서 ‘동 시간대에 다른 두 공간으로 이동’하는 기현상이 일어났었고,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 및 관리하기 위해 관문 같은 표식을 세운 것이 지금의 게이트였다.

마나와 오러, 하물며 맹수의 송곳니라는 신비한 힘이 존재하는 이곳에서도 게이트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 중 하나였다.

그렇다 보니 공간과 시간이 조작되는 게이트 내부에는 여러 작용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인 일그러짐은 사람의 신체나 사물 등에 영향을 끼친다.

“사람이나 짐승처럼 살아 있는 생물에는 크게 영향을 안 주는데, 물건 같은 건 종종 파손될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미리미리 손보는 거예요.”

“그럼 내가 멀미했던 건?”

미아가 쓰게 웃었다.

“운이 안 좋으신 경우죠.”

처음 게이트를 통과할 때 극심한 멀미를 한다는, 정말 몇 안 되는 경우 중 한 명이 바로 레오니에였다.

짜증이 난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보통 처음 건널 때만 멀미를 하지, 그다음부터는 괜찮아요.”

미아가 그런 레오니에를 달래 줬다.

“그럼 지난번에 아빠가 나한테 멀미약 먹였던 건?”

“주인님께서 혹시, 하고 준비하신 거였어요.”

레오니에가 속에 있던 걸 전부 게워낼 만큼 멀미를 심하게 했던 탓에, 펠리오는 오르티오 후작이 북부에 머물 때 효과 좋은 멀미약을 받았다고 한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만든 멀미약이 얼마나 비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빠……!”

감동한 레오니에가 기사들과 의논 중이던 펠리오에게 달려갔다. 마지막 마차 점검 보고를 받던 펠리오는 뜬금없이 제게 안긴 레오니에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같이 있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레오니에를 살펴보던 중, 새빨갛게 물든 귀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까지 다리에 숨긴 걸 보니, 부끄러우면서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가씨께서 외로우셨던 모양입니다.”

기사 중 한 명이 흐뭇한 미소로 부녀를 바라봤다. 다른 기사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 눈에는 아빠랑 떨어지기 싫어 투정 부리는 귀여운 꼬마로만 보였다.

“하여튼 진짜.”

펠리오가 피곤하단 듯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지.”

참을성이 부족하다며 펠리오가 잔소리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팔 하나를 아래로 내려 레오니에의 어깨를 도닥였다.

기사들은 히죽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겹게 붙잡았다. 여기서 웃었다간 게이트 너머 수도가 아니라 지옥행 확정이었다.

“그럼 출발하지.”

펠리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차에 올랐다. 곧 다른 사람들도 주위를 치우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기사들도 말 위에 올라 대열을 맞췄다.

“……와아, 봤냐? 봤어?”

“주군께서 저리 변할 줄이야.”

“그래도 좋은 변화다, 그치?”

기사들은 여전히 이따금 보는 펠리오의 부성애 가득한 모습이 신묘했다.

“약간 좀 간지럽기도 하고.”

누군가가 몸을 긁는 시늉을 하자 다들 소리 죽여 웃었다. 글라디고 기사단에게 펠리오는 무섭고 강인한 검은 맹수라는 인상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아빠의 모습을 한 펠리오가 아직은 낯설었다. 그래도 분명 좋은 변화였다.

게이트 통과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누군가가 세게 움켜쥔 것처럼 비틀린 커다란 기둥과 기둥 사이. 그리고 기둥 바로 뒤, 초록이 무성한 주변 풍경이 그대로 투영된 그곳으로 마차가 통과했다.

‘아.’

레오니에는 마차가 게이트를 지나가는 찰나, 몸 안이 술렁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처음 게이트를 통과했을 때 느꼈던 그것과 똑같았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펠리오의 커다란 손이 레오니에의 등을 찬찬히 쓸었다. 토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아이를 살피는 아빠의 눈에 걱정이 스쳤다.

다행히 레오니에는 멀쩡했다. 꼼꼼했던 점검 덕에 마차가 훼손되거나 말들이 다치는 일도 없었다.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한 레오니에는 보란 듯이 씩씩하게 웃었다.

“토 안 했어!”

“그래.”

등을 쓸던 손이 무심한 척 떨어졌다. 펠리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을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아빠는, 나를, 엄청 좋아한대요!”

“이상한 노래 부르지 마.”

“진짜잖아!”

“됐고, 저기나 봐.”

펠리오가 시끄럽다며 레오니에의 이마를 가볍게 찰싹 때렸다. 까불다 얻어맞아도 마냥 기분 좋은 레오니에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와아!”

바깥 풍경이 거짓말처럼 싹 바뀌었다. 울창했던 숲은 사라지고, 조그마한 건물 몇 채가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이 나타났다. 때마침 바람이 불자, 들판의 풀과 꽃들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신기하다, 진짜 단번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거잖아?”

“처음 겪는 것도 아닐 텐데.”

이제 얌전히 있으라며,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북부로 갈 때? 나 그때 토하고 해서 제정신 아니었어. 진짜 이슬…….”

초록 이슬 세 병을 나발째 들이켜고 다음 날 아침에 숙취로 고생하던 것 같다고, 진솔하게 표현하려던 애늙은이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눈을 움직였다.

“이슬?”

다행히 펠리오는 이슬까지만 알아들었다.

“……이, 이슬 세 방울 밖에 못 먹은 요정님처럼 어지러웠다고.”

“너 진짜 양심 어디 두고 왔냐.”

아이의 동심보다 양심이 시급했음을, 펠리오가 뒤늦게 깨우쳤다.

“왜 또 그래. 나 엄청 좋아하면서!”

“오냐오냐 봐주니 아주 기고만장하지?”

“그치만 아빠 눈에 나는 요정님이지?”

그만큼 귀엽지? 레오니에가 어깨를 잔망스럽게 떨며 초롱초롱 까만 눈을 깜빡거렸다.

“…….”

펠리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왜 내가 수치스러운지.”

부끄러움은 온전히 펠리오의 몫이었다. 어찌나 뻔뻔한지 구두 속 펠리오의 발가락이 그조차 모르게 오그라졌다.

자칭 요정 레오니에는 콧방귀를 뿡뿡 끼며 다시 창밖을 구경했다. 그래도 펠리오가 부정은 않았다. 레오니에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 * *

서부 게이트를 통해 도착한 곳은 황성으로 들어가는 출입 관리소 근처였다.

포효하는 사자가 떡하니 새겨진 검은 마차가 등장하자, 관리소 직원들과 경비경들이 우왕좌왕 움직였다. 레오니에는 창밖의 어수선한 바깥 상황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왜 저런대? 다들 신입인가?”

“그러게나 말이다.”

실상은 보레오티 공작의 등장에 긴장해서 저러는 거였지만, 펠리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바깥 상황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게 더 정확했다.

“게이트가 수도 안에 있으면 바로 도착하고 편할 텐데.”

“수도 안에도 하나 있어.”

기다리는 동안, 펠리오가 게이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줬다.

“지역마다 연결된 게이트가 총 네 개씩 있어.”

“네 개씩?”

레오니에가 오동통한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였다. 펠리오가 펼쳐진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아까 통과한 서부를 예로 들면, 여기 수도와 연결된 게이트가 하나.”

동부와 연결된 게이트, 남부와 연결된 게이트, 북부와 연결된 게이트. 이렇게 네 개씩, 다른 지역에도 그렇게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북부는 다섯 개.”

“다섯 개?”

“나머지 네 개는 다른 지역이랑 똑같고, 다른 하나는…….”

설명하던 펠리오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자아내는 어린 딸을 잠깐 바라봤다.

“……북부 산맥에 하나.”

위치는 말해 줬지만, 그곳 게이트가 어디와 연결되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와 이어졌는지는 조금 더 크면 말해 주겠다고 반려했다.

“에이, 나 궁금해서 잠 못 자!”

“너는 머리만 닿으면 자잖아.”

“어머? 나 되게 섬세한 여자야.”

레오니에가 땋은 갈래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며 새침을 부렸다.

“콩알만 한 게.”

레오니에의 조숙한 척이 웃긴 펠리오가 딸의 머리를 통통 두들겼다. 짜증이 난 레오니에가 익익, 화를 내며 펠리오의 손을 통통 때렸다.

잠시 떠드는 사이 출입 관리소가 확인을 마쳤다.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곧 제국의 수도를 아우르는 커다란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키만 한 벽돌이 차곡차곡 쌓인 성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그런데 아까 수도에도 하나 있다며.”

거긴 어디랑 연결된 거냐고 레오니에가 물었다.

“북부.”

“그럼 집에 갈 때는 빨리 가겠네?”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너랑 못 만났지.”

펠리오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여유롭게 꼬았다. 하지만 레오니에가 허리 휜다며 다시 다리를 잡아 풀어 줬다.

각 지역과 수도와 연결된 게이트는 대부분 황성 외곽에 있다. 하지만 북부와 이어진 게이트만큼은 황성 내부, 그것도 황궁 바로 안에 존재했다. 그 탓에 황실은 북부가 수도 게이트를 사용하는 걸 금지했다.

“겁이 난 거지.”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괴물들이 언제든 자신들의 뒤를 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몇백 년 전에 아예 법으로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완전히 겁쟁이네.”

레오니에가 비웃었다. 하지만 그 덕에 펠리오와 만날 수 있었으니, 썩 나쁘진 않았다. 펠리오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레오니에의 통통한 볼살을 손가락으로 콕콕 건드렸다.

“그러면 내가 있던 고아원은?”

레오니에는 지금의 ‘자신’이 처음 눈을 떴던 고아원이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지금까진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너는…….”

펠리오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똑똑.

누군가가 마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신원 확인 부탁드립니다.”

황성 입구를 지키는 기사가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

‘보레오티…….’

젊은 기사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마차에서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다. 마차 문에 새겨진 검은 사자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니, 다른 기사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고생이 많군.”

드르륵, 열린 마차 창문 너머로 펠리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도 번거로운 확인 절차를 서둘러 끝내고 싶었다. 그러니 어서 내 얼굴 보고 가라는 뜻으로 기사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나 이 불행한 기사는 보레오티 공작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흉악스러운 위압감에 사로잡혀 돌처럼 굳어 버렸다.

“아빠.”

그때. 큼지막한 리본 두 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사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굳어졌던 몸도 얼떨결에 풀렸다.

“이제 다 됐어?”

“나도 모르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펠리오가 말했다. 그러고는 네가 물어보라며 기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기사 오빠.”

레오니에가 싱글벙글 미소지었다. 멍하니 있던 기사가 화들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레오니에 보레오티예요.”

소문으로만 듣던 보레오티 공작의 딸이었다. 기사의 눈에 레오니에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확연히 나는 소공녀였다. 하물며 흉악하기로 유명한 보레오티 공작이 자상한 눈으로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힘든 일 하느라 노고가 많아요.”

하지만 재잘거리는 말투는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야무졌다.

“그런데 우리 마차는 언제 출발해요?”

그제야 기사는 자신이 보레오티 마차를 막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신원 확인 끝났죠? 이제 가도 되는 거죠?”

사색이 된 기사에게, 레오니에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아이의 말투에서 도도하고 사나운 분위기가 섬뜩할 만치 느껴졌다.

가까스로 정신 차린 기사는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제야 검은 마차가 황성으로 들어갔다.

“아빠, 들려?”

레오니에가 눈을 감고 귓가에 손을 올렸다. 갈대기 모양처럼 둥글게 만 손바닥 안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보레오티 마차의 등장은 황성 사람들을 술렁거리게 했다. 레오니에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북부의 위엄이 이토록 크고 엄청났다는 뜻이었다.

“다들 우리 보고 쫄았어.”

“예쁜 말.”

“겁먹어서 기를 못 펴네.”

“이젠 그냥 즐기지?”

사악한 녀석,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콧등을 툭 건드렸다.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에 아기 맹수가 수줍게 몸을 흔들었다.

“그래서, 수도에 온 소감은?”

덩달아 기분 좋아진 아빠 맹수도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저 멀리 크고 휘황찬란한 궁전을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휙 고개를 돌렸다.

“별거 없네.”

피식, 튀어나온 웃음이 점점 아빠를 닮아 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 * *

수도 저택에 처음 발을 내디딘 레오니에가 한마디 툭 던졌다.

“……생각보다 평범해.”

북부에 있는 저택은 한눈에 봐도 여기가 검은 맹수의 소굴이라는 음험한 기운이 폴폴 풍겼다. 여기서 누구 한 명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분위기였다.

시커멓고 우중충한 외벽과 자비 없는 큼지막한 규모가 딱 그랬다.

반면 수도 저택은 무척 소박했다. 물론 제국에 둘 있다는 공작 가문 중 하나답게, 규모는 마차를 타고 지나갔던 다른 귀족 저택들과 비교도 못할 만큼 크고 위압적이었다.

황실과의 사이가 어떠하든 간에 공작이란 위신에 걸맞은 저택이었다. 하지만 북부 저택과 비교하면 절반도 채 안 되는 크기에, 심지어 외관은 보레오티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화사하고 산뜻했다.

심지어 현관 앞 정원에 떡하니 세워 놓은 기둥 조각은 상큼한 레몬색이었다. 보레오티에게 상큼한 레몬이라니. 레몬 씨가 마를 소리였다.

“아빠, 저거…….”

레오니에가 기둥을 가리켰다.

“누가 저기 설치한 거야?”

저 기둥을 고른 안목이 누구의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보니까 기둥 바로 옆에 천사 모양으로 다듬은 정원수도 있었다.

이젠 진심으로 수도 저택이 무서워진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뻗었다.

“내가 이래서 수도를 안 와.”

펠리오도 이런 분위기의 수도 저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만스럽게 비틀린 눈썹이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타고난 북부 사람인 그에게 쓸데없이 예쁘장한 수도 저택은 도통 취향이 아니었다.

“북부 저택이 훨씬 멋있어.”

품에 안긴 레오니에는 다시 용기 내 정원을 둘러봤다.

“보레오티의 멋짐이 없어.”

보레오티하면 검은색인데, 수도 저택에서 본 검은색이라곤 아까 얼핏 본 저택 대문이 전부였다. 검게 칠한 대문 양쪽에 새겨진 보레오티 가문의 문장도 몇 안 되는 보레오티 흔적 중 하나였다.

“근데 그렇게 싫으면, 아빠가 고치면 되잖아.”

돈도 넘쳐나면서 왜 쓰지를 않느냐고 레오니에가 물었다.

“귀찮아.”

펠리오가 심드렁히 답했다.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해.”

안 오면 그만인 것을, 펠리오가 저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귀찮으면 숨도 쉬지 마.”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구레나룻을 살짝살짝 잡아당기며 잔소리했다. 대대로 이어진 저 귀찮음 때문에 수도 저택이 유지된 모양이었다.

때마침 저택에서 나온 사용인들이 두 부녀를 반겼다.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앞서 나가 인사했다. 고양이가 연상되는 젊은 남자였다.

“주인님, 어서 오십시오.”

사용인 일동을 데리고 공손히 인사하는 집사가, 레오니에는 어딘가 낯익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더니, 이를 눈치챈 집사가 싱긋 웃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레오니에 아가씨, 수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 수도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트라입니다. 북부 저택을 관리하는 카스토르 집사님의 아들입니다.”

“카스토르?”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라라고 하면 아실까요?”

“카라 할머니?”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손뼉을 짝 쳤다.

“할머니 아들이에요?”

“예, 제 어머니십니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서 카라가 선명하게 보였다. 두 모자는 눈을 빼고 다 닮았다.

트라는 두 사람을 저택으로 모셨다. 수도 저택 사용인들은 레오니에를 보고도 놀라거나 수군거리지 않았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레오니에를 봐야 했던 북부 저택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애초에 수도 저택은 펠리오가 처음으로 입양 의사를 밝혔던 곳이었다. 거기다 북부에서 있었던 대략적인 상황을 미리 전달받았기에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습니다.”

살짝 고개를 돌린 트라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께서 정말 아버지가 되셨을 줄이야.”

“말했잖아. 입양하겠다고.”

“저는 정말 설마 했습니다만…….”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리던 트라가 헉, 하며 숨을 들이켰다.

“아가씨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저희는 아가씨께서 저택에 오시는 것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트라가 허둥지둥거렸다. 혹시라도 조금 전 대화로 레오니에가 상처받았을까 걱정했다.

‘그럴 만도 하지…….’

나갈 땐 한 명이었는데, 돌아오니 둘이 되어 버린 주인님 가족이 얼마나 놀라울까. 레오니에는 트라를 충분히 이해했다. 아마 조금 전 태연히 인사하던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오히려 북부에서 보여 준 당혹스러운 반응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트라 아저씨는 아빠랑 친해요?”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상사와 부하 간 격식 차리는 대화가 아니었다. 펠리오의 입양을 ‘설마 했다’고 말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 저희는 젖형제입니다.”

트라가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제 어머니가 주인님의 유모셨지요. 마침 비슷한 시기에 제가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습니다. 루페 님과도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고요.”

“카라 할머니가 아빠 유모였어요?”

뒤늦게 펠리오와 카라가 함께 있던 모습들이 몇몇 떠올랐다. 사실을 알고 나니 그럴듯한 상황들이었다. 카라는 펠리오에게 자잘한 잔소리를 많이 했고, 펠리오는 그런 카라가 귀찮으면서도 몇 번 정도는 착실히 잔소리대로 따라 줬었다. 상하 관계라기엔 분명 이상했다.

“어쩐지……!”

레오니에는 오늘 여러 번 놀랐다. 트라는 그것 말고도 제법 경력이 화려했다.

“실은 글라디고 기사단에서도 몸담았던 적이 있습니다. 전직 기사였죠.”

“그럼 마물 사냥도 했어요?”

“서너 번 정도는 다녀왔습니다.”

다만 검을 휘두르는 일이 영 적성에 안 맞아 고생 좀 했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레오니에가 트라의 신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른 근육인 건가?’

보기엔 왜소한 체격인데, 다시 보니 연미복 팔뚝이 당기듯 탄탄했다. 레오니에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쪽도 좋았다.

“트라.”

펠리오가 히죽히죽 웃던 레오니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 녀석 변태니까 조심해라.”

“아빠!”

속내를 들킨 레오니에가 원망스레 소리 질렀다.

* * *

“여기가 아가씨 방입니다.”

레오니에는 볕이 잘 드는 2층 방을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이미 레오니에가 쓸 가구와 물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미리 북부에서 받은 정보로 세심하게 꾸며진 방은 부족함이 없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수도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방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었다. 책장에 꽂힌 책이며 드레스룸에 가득 쌓인 옷들까지. 전부 다 레오니에 취향이었다.

“나 여기서 살았던 것 같아!”

그만큼 편안하다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하녀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런데 이건 좀 너무 많지 않아?”

잠깐 수도에 머물다 갈 건데, 이렇게까지 꾸밀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곳도 아가씨 집인걸요!”

하녀가 그런 말씀 하시지 말라며 서운해했다.

“아가씨께서도 이제 수도에서 지내시게 될 날이 많으실 거예요.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아가씨께서 쓰실 방인데, 어찌 감히 무턱대고 꾸밀 수 있나요.”

언제든 불편함 없이 지내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 가족 없는 게 더 꿀 아냐?’

상사 없는 게 가장 편할 텐데. 레오니에는 저렇게까지 열심인 하녀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 코니와 미아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보레오티 사용인들 사이에도 경쟁의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창문틀에 먼지는 없고.”

코니가 손가락으로 창틀을 스윽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옷도 괜찮네요.”

미아는 드레스룸에 있는 옷들을 하나하나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레오니에가 좋아하는 향기가 옷에 스며든 걸 확인한 뒤에야 겨우 떨어졌다.

‘시어머니가 둘…….’

두 하녀는 방주인인 레오니에보다 깐깐하게 방을 살폈다. 경쟁 우위는 북부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게, 방을 안내해 준 하녀는 코니와 미아가 세심하게 살필 때마다 바싹 긴장했다. 심지어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다른 하녀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코니와 미아는 레오니에를 직접 보필하는 전속 하녀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위치가 달랐다.

다행히 방 안 점검은 무난하게 끝났다. 코니와 미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하녀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방 구경을 마친 레오니에가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하녀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 일렬종대로 섰다. 그들은 공손하고 바른 자세로 레오니에의 걸음을 조용히 기다렸다.

“어어…….”

까만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건 좀 불편했다. 레오니에는 아직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우르르 따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북부에서도 늘 하녀와 호위 기사, 딱 이렇게 두 명까지만 따라다녔다.

“코니.”

“예, 아가씨.”

“나 아빠한테 갔다 올게.”

혼자서 가고 싶다는 레오니에의 숨은 뜻을 읽은 코니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길은 아세요?”

북부 저택이었다면 혼자서 보냈을 테지만, 이곳은 수도 저택이었다. 레오니에가 이곳 위치를 알 리가 없다. 코니와 미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다못해 이곳에서 일하는 하녀가 같이 따라가 안내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괜찮아.”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빠 기척은 금방 찾아.”

* * *

‘송곳니가 대단하긴 해.’

레오니에는 홀로 씩씩하게 수도 저택을 돌아다녔다.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산만하게 움직였지만, 방향만큼은 오로지 한 곳만을 확실하게 목표로 두고 있었다.

‘아빠는 3층에 있구나.’

바로 펠리오의 기척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맹수의 송곳니를 조금씩 다룰 수 있게 되면서, 레오니에는 타인의 기척을 기민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송곳니는 곧 너 자신이기도 해.’

레오니에는 훈련 중에 펠리오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맹수의 송곳니는 피를 통해 이어지는 이능으로, 즉 신체 일부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능이 강해질수록 그 힘을 지닌 사람 또한 덩달아 강해지게 된다고 한다.

송곳니를 다룬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것과 똑같았다. 평범한 사람보다 건강해지고, 신체 조건 역시 우월해진다. 이는 보레오티 가문이 오랫동안 오만방자한 맹수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맹수, 맹수.”

아빠의 기척을 따라 총총 걷던 레오니에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근육 빵빵한 맹수 허벅지.”

불끈불끈 근육 짱짱.

우리 아빠 허벅지랍니다.

욕망 충만한 노랫말을 부르던 레오니에가 문득 고개를 올렸다. 복도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나 여전히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화풍이 세련되어 보였다. 그림은 복도 저 끝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무슨 내용이 있나?’

보고 있자니 서사가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사람 한 명을 가리켰다. 검은 머리를 한 걸 보니 보레오티 사람인 것 같았다. 성별은 가늠이 안 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림 속 보레오티를 따라, 레오니에가 다시 발을 움직였다. 보레오티의 곁에는 검은 사자가 있었다. 그들의 뒤엔 다양한 동물이 있었다. 두 발로 선 하얀 곰, 털이 무성한 야크, 커다란 뿔이 달린 순록, 회색 털을 지닌 늑대. 그리고 저들 아래 숨어 있는 점박이 표범까지.

‘……골수 귀족!’

레오니에는 그림 속 동물들이 북부의 골수 귀족을 상징한다는 걸 알아챘다. 숨어 있는 표범은 파르두스 가문이었다.

‘파르두스도 저 정도면 골수 아냐?’

보레오티와 파르두스 두 가문 간의 신뢰는 레오니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두터웠다. 프레스코화에 새겨진 저 그림이 증거였다.

그림 속 보레오티와 여섯 동물은 차가운 북부로 향했다.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이겨냈다. 이윽고 그들은 북부 산맥에 도달했다. 하지만 산맥 너머로 들어가는 건 보레오티와 검은 사자뿐이었다. 나머지 동물들은 전부 산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스코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끝이 난 프레스코화 바로 아래에 문이 하나 있었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기척을 강하게 느꼈다. 이 안에 아빠가 있었다.

“아빠.”

똑똑, 하고 두드리니 곧 안에서 문이 열렸다.

“아가씨!”

루페가 레오니에를 격하게 환영했다. 그러고는 어서 이리 들어오시라고 손짓했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레오니에는 얼떨떨했다. 살짝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이 루페를 바라봤다.

“아가씨 어떠세요? 주인님 참으로 근사하지요?”

함께 있던 트라도 지나치게 친절한 어투로 반기었다. 그들은 창가에 홀로 선 펠리오를 가리켰다. 그는 외출이라도 하려는 건지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북부에서 지낼 때보다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거기다 머리도 평소보다 바싹 힘줘 뒤로 넘겼다.

한데 그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이라도 외투를 벗어 던지고 목에 묶은 크라바트를 거칠게 뜯을 것 같았다.

‘어디 나가나?’

이제 막 수도에 도착했는데? 사정을 모르는 레오니에의 눈에도 이게 뭔가, 싶었다. 먼 길 달려왔는데 숨 쉴 틈도 없이 나가야 한다니. 힘든 건 둘째치고 상당히 배려 없는 일정인 건 확실했다.

‘……아하.’

그래서 기분이 나쁜 거였구나.

레오니에가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지금 준비 중인 외출이 펠리오에게 상당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약속인 듯했다. 그래, 분명 갑작스럽게 잡힌 거겠지. 그것도 만나는 상대가 아주 마음에 안 드는 걸 테고.

‘수도에서 아빠가 아주 싫어하고, 그러면서 아빠를 상대로 약속을 마음대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황제구나.’

펠리오는 지금 황궁에 갈 채비 중이었다.

“아빠, 어디 가?”

그 사정을 알면서도 괜히 모르는 체,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그러고는 루페와 트라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등 뒤로 엄지를 착 치켜세웠다. 제게 맡기란 뜻이었다. 루페와 트라는 그제야 겨우 숨을 돌렸다.

사실 레오니에가 따로 할 건 없었다.

“안 쉬고 왜 왔어.”

레오니에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펠리오는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날 선 불쾌감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아빠 보고 싶어서 왔지!”

“아까까지 봐 놓고 무슨.”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펠리오는 어느샌가 레오니에를 번쩍 품에 안고 둥둥 어르고 있었다. 느슨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그의 기분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증명했다.

트라가 소리 죽여 감탄했다.

“아가씨 대단하시네요…….”

다정한 맹수 부녀를 처음 목격한 트라에겐 이 모든 게 충격이었다. 저 주인님이 저토록 작은 생명을 소중하게 어르고 품어 주다니.

“저 정도야 약과지.”

루페는 괜히 자기가 대단한 것처럼 어깨를 으스댔다.

“그래서, 아빠 어디 가?”

“일하러.”

다시 싫은 생각이 난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일하는 남자는 멋있어!”

“난 안 해도 멋있어.”

“그건 그렇지!”

펠리오가 정색하며 답했다. 레오니에가 동의했다. 하지만 펠리오는 결국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레오니에는 품에 안긴 채 아빠의 등 너머를 바라봤다. 북부 저택에 있는 집무실과 똑같이 생긴 걸 보니, 여기도 집무실인 모양이었다.

따라오는 루페와 트라가 퍽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지금 출발해도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움직여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레오니에는 고생하는 저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못난 상사가 아빠인 죄였다.

현관에 도착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바닥에 내려 줬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펠리오의 손을 꼭 잡았다.

“아빠, 올 때 맛있는 가게 알아 와.”

“사 오는 게 아니고?”

펠리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늘 자신이 외출할 때마다 맛있는 간식 같은 걸 사 오라며 습관처럼 말하던 아이였다.

“아빠랑 같이 가서 먹을래.”

나중에 같이 외출해서, 그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며 레오니에가 반대편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가기 싫어?”

펠리오가 손가락을 안 내밀어 주니, 레오니에가 풀이 죽은 듯이 입술을 삐죽이며 은근슬쩍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살짝 몸을 비틀며 간절한 시선으로 아빠를 올려다봤다.

“…….”

한참 말이 없던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나 혼자서…….”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지, 허벅지 아래 내려온 손가락이 빠르게 탁탁, 까딱거렸다.

“……역성혁명을 일으키면 얼마나 걸릴까?”

뜬금없는 폭탄 발언에 레오니에와 루페, 트라가 동시에 굳어 버렸다.

“역성혁명 말이다.”

친절한 펠리오는 저들이 못 들었다고 생각해,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해 줬다. 그러고는 레오니에를 빤히 바라봤다. 당황한 레오니에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나는 그딴 거 바라지도 않았으니 내 핑계 대지 말란 뜻이었다.

“생각해 보니 웃기잖아.”

하나 아빠 맹수는 아기 맹수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다. 주제도 모르는 새대가리 때문에 내 딸과 외출조차 못 한다니. 펠리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있던 루페와 트라는 물론이거니와, 레오니에마저 흠칫하게 할 정도로 흉악스러운 위압감이 느껴졌다.

“황제 됐다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펠리오는 지난 3년을 떠올렸다.

여태껏 자신이 무서워 꼬리 말고 도망치던 놈이, 황제란 칭호 두 글자 좀 달았다고 기고만장한 꼴이 아주 가소로웠다. 그 와중에 또 제 정부를 황후로 올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안건으로 수도에 자신을 붙잡아 두지 않았던가.

제 지역을 다스려야 하는 대귀족 넷이 그딴 새대가리 하나 때문에 아까운 시간만 수도에서 허비했다. 저런 놈이 제국의 둥지를 꿰차고 있다니, 죽은 선황이 기가 막혀 다시 무덤에서 튀어나올 일이었다.

귀찮아서 여태 꾹 참고 있었지만, 차라리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게 모두를 위해 편한 일일 터다.

“이 아빠가 미쳤나.”

가까스로 정신 차린 레오니에가 퍽퍽, 펠리오의 허벅지를 때렸다.

“됐으니까 빨리 갔다 와!”

역성혁명이고 뭐고 일단 나가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급한 루페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정말로 출발하지 않으면 늦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빠가 황제 되는 거 싫어.”

“왜?”

“그딴 것보다 윗대가리 가지고 노는 음험한 게 좋아!”

레오니에가 소신껏 취향을 밝혔다.

“넌 누구 닮아서 그렇게 사악하냐.”

펠리오가 혀를 끌끌 찼다.

“…….”

“…….”

루페와 트라가 말없이 펠리오를 응시했다.

누구겠습니까. 당신 핏줄인데.

하지만 펠리오가 돌아보기 무섭게 둘은 시선을 휙 피하며 모르는 척했다.

“그러니 후딱 다녀와.”

레오니에가 현관문을 직접 열어 주며 배웅했다. 다녀와서 황제를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설명해 달라는 약속도 덧붙였다. 펠리오도 그제야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그 틈에 루페가 레오니에한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실 저도 가기 싫지만, 그래도 일단 황실이니까 한 번은 가야 하거든요. 아시다시피 공작님이 황제 새끼를 너무 싫어해서 말이지요.”

“황제 새끼라고요?”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칭 상식인이라고 자부하던 인간이 아이 앞에서 욕을 하다니.

“……아니요?”

그런 단어 처음 들어 본다는 듯이, 루페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속내는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온 속마음에 퍽 당혹스러웠다.

“됐으니까 가요.”

이젠 되물어보기도 귀찮아진 레오니에가 손을 휙휙 내저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사고는 적당히 치고!

마차가 저택 대문을 나서 사라질 때까지, 레오니에는 열심히 손을 흔들어 줬다. 배웅이라기보단 혹시라도 저 두 어른이 금세 마음 변해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마차는 되돌아오는 일 없이 무사히 가 버렸다.

“어휴…….”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온 레오니에가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집 남자들은 철딱서니가 없어요, 진짜.”

저렇게 싫은 티를 대놓고 내면 쓰나.

한 손에 턱을 괸 채, 레오니에가 철부지 같던 두 어른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어쨌건 고집쟁이 아빠를 내보내느라 진이 다 빠졌다. 레오니에는 말랑말랑한 어깨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며 하품을 크게 했다.

“피곤하시지요?”

어느새 차를 끓인 트라가 잔을 내밀었다.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은 밀크티가 앙증맞은 찻잔에 담겼다. 곁들인 다과도 알록달록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편히 말씀을 낮추세요.”

“트라 오빠는 카라 할머니 아들이잖아요.”

밀크티를 음미하던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거기다 우리 아빠랑 사이도 좋으니까, 함부로 안 부를 거예요. 그랬다간 아빠가 나한테 한소리 할걸요? 아빠는 자기 사람은 소중하게 여기니까.”

트라가 놀란 듯 눈썹을 위로 올리더니 이내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었다.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편지 그대로구나.’

편지 속 레오니에는 또래보다 한참 작지만, 무척 영민하여 어지간한 어른을 능가하는 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몇 개월도 안 되었는데 벌써 아카데미 수준에 도달했고, 맹수의 송곳니 역시 펠리오의 어린 시절과 견주어도 될 만큼 빠르게 익히고 있단다.

‘아이를 입양한다.’

트라는 작년 가을, 펠리오의 충동적인 입양 결정을 가장 먼저, 그것도 바로 옆에서 들었다.

그땐 펠리오가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매사가 너무 잘나고 완벽해 세상이 하찮고 지루하던 맹수가 기어코 사고를 치려고 작심한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입양도 말렸다.

하지만 매사가 잘나고 완벽한 인간은 충동으로 입양해도 다 잘 되는 모양이었다.

레오니에는 완벽한 맹수였다. 모든 색을 아우르는 검정, 맹수의 송곳니란 이능, 남들보다 뛰어난 두뇌, 새초롬한 이목구비와 저 혼자 잘난 성질머리. 거기에 자신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만 챙기는 살뜰한 차별까지.

트라는 조용히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쿵쿵거리는 고동은 눈앞에 있는 차기 보레오티를 향한 벅차오르는 기쁨이었다. 어렸을 적 펠리오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신비로운 기분을 또다시 경험했다.

‘그런데 언제 사고를 치신 거지?’

아직 사정을 듣지 못한 트라는 자연히 레오니에의 친모가 궁금해졌다. 펠리오와 만난 사람 중 임신을 했다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단 소문은 전혀 없었다.

“집사님.”

그때, 하인이 저택에 도착한 우편물을 쟁반 위에 올려 가져왔다.

“뭐예요?”

입에 있던 과자들을 꿀꺽 삼킨 레오니에가 물었다. 입가엔 부스러기가 가득했다.

“주인님께 온 편지입니다.”

트라가 손수건을 꺼내 레오니에의 입가를 툭툭 털어 주었다. 떨어진 부스러기는 새하얀 장갑을 낀 트라의 손바닥 안에 무사히 떨어졌다.

“엄청 많네요.”

차곡차곡 겹친 편지가 닭가슴살 샌드위치보다 두꺼웠다.

레오니에는 북부에 있을 적을 떠올렸다. 집무실에서 종종 책을 읽으며 펠리오를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업무 관련으로 하루에 서너 통씩 오는 게 전부였다.

“북부에선 주인님의 위세가 워낙 강하지 않습니까.”

트라가 쟁반에 담긴 편지들을 빠르게 확인하며 설명해 줬다.

“함부로 주인님께 사사로운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낼 멍청이는 없답니다.”

“트라 오빠도, 북부 출신이죠?”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북부에서 살았습니다.”

편지를 고르던 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냐는 뜻이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북부를 자랑스러워하는 말투나 은근히 상대를 깔보는 단어 선택이 전형적인 북부 사람의 특징이었다.

‘환경의 영향인가…….’

험준한 북부의 환경이 사람들을 아주 조금 거칠게 만드는 것 같았다.

레오니에는 슬그머니 트라 옆에 앉아 그가 정리한 편지들을 구경했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문의 이름, 처음 들어 보는 가문의 이름도 있었다.

‘에르바누는 없네…….?’

레오니에는 퍽 실망했다. 혹시 바리아의 가문에서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기대했다. 이왕 수도에 온 거, 또 다른 주인공인 바리아도 만나 보고 싶었다. 어쨌건 바리아 에르바누는 현재 가장 유력한 새엄마 후보였다.

‘억지로 이을 생각은 없지만.’

만약 펠리오가 바리아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과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했다. 레오니에한테 중요한 건 원작의 흐름보다 펠리오 개인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걸 다 제쳐 두고, 바리아란 인물 자체가 궁금하긴 했다.

“예쁘겠지?”

“누가요?”

레오니에의 혼잣말에, 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황한 레오니에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아, 그 사람이요?”

그런데 하필 레오니에의 손에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트라가 쓰레기라고 판단한 더미 속에 있던 거였고, 그것들 대부분이 펠리오에게 보내는 연서였다.

“히에이나 백작 영애군요.”

“히에이나……?”

“공작님을 사모하시는 분입니다.”

곤란하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트라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피로가 몰아닥쳤다. 히에이나는 레오니에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여섯 살 우피클라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나이 많은 언니.

“덕분에 지난겨울은 따뜻했지만요.”

트라가 벽난로를 지필 장작 걱정은 덜었다며 비아냥거렸다. 그 덕에 수도 저택 사용인들 사이에서 히에이나 백작 영애가 ‘장작’이라 불린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건 좀!”

레오니에가 울컥했다. 우피클라에게 한 짓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보낸 사람 성의가 있는데 그걸 장작으로 취급하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트라는 거기에 대한 변명 대신 히에이나 영애에게서 온 편지 한 통을 편지용 나이프로 쭈욱 찢었다. 레오니에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펠리오한테 온 건데, 그걸 함부로 개봉하는 그의 배짱에 감탄했다.

하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레오니에는 건네는 편지를 읽었다. 새빨간 잉크가 먼저 눈에 띄었다.

“어디 보자,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사랑해요. 공작님…….

“…….”

레오니에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수도에는 삿된 것이 많이 유행합니다.”

트라가 레오니에의 손에서 편지를 조심히 빼냈다. 그러고는 내용이 보이지 않게 네 번 정도 접은 뒤에 다시 봉투에 넣어 쓰레기로 분류된 편지 더미 중간에 끼워 넣었다.

레오니에는 그때까지도 굳은 채였다. 초롱초롱 밝게 빛나던 검은 눈동자는 얼이 나갔는지 흐리멍덩했다.

“며칠 전 하녀에게 들었는데, 최근에는 붉은 잉크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면 마음이 통한다는 아기자기한 주술이 인기라고 합니다.”

“아, 아기자기?”

“2년 전에는 재료가 뭔지도 모를 것으로 만든 과자가 유행했습니다.”

그때보다야 이게 훨씬 아기자기하지 않으냐며, 트라가 물었다.

“아기자기하구나…….”

빠르게 수긍한 레오니에는 곧이어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소설 장르를 착각했나?’

검은 맹수의 바리아는 분명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런데 편지는 스릴러였다.

“이제 이런 편지가 매일 열 통씩 올 겁니다.”

열 통만 오면 다행이라며 트라가 중얼거렸다.

“아빠……!”

레오니에가 조막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리 아빠 불쌍해!”

안타까운 절규가 터져 나왔다.

* * *

“…….”

펠리오가 문득 인상을 썼다.

“공작님?”

뒤따르던 루페가 말을 걸었다. 앞서가던 시종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계속 가도 되겠냐며 짤막한 고갯짓으로 조심조심 물으니, 펠리오가 괜찮다는 듯 귀에서 손을 뗐다.

“귀가 간지러우신가요?”

루페가 조금 전 행동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누가 공작님 욕하는 거 아닙니까?”

“내 욕하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하하, 공작님은 장수하실 겁니다.”

“너는 오늘 죽고?”

“오늘 참 살기 좋은 날이지요?”

뭔 농담을 못 해, 루페가 투덜거리는 속내를 감춘 채 회랑 너머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황궁에 들르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청명했다. 여름이 코앞이었다.

“……여름 휴가라도 다녀오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좋지.”

펠리오가 얼마 전 레오니에와 함께 놀러 간 바닷가를 떠올렸다. 아이는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에서 무척 재미나게 놀았다. 모래성도 쌓고, 파도에 발을 담그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다음엔 동부 계곡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수도에서 해 둬야 할 것들을 빠르게 끝내야만 했다.

“레비페스 경은 언제 온다지?”

펠리오가 물었다. 루페는 대답하기 전에 앞서 걸어가는 시종을 힐끔 바라봤다. 앞만 바라보는 시종의 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일주일 뒤에 수도에 도착할 거란 전보를 보냈습니다.”

“오래 걸리는군.”

“아무래도 처리가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지. 사안이 사안이니.”

곧 세 사람은 황제의 개인 응접실에 도착했다. 시종은 두 사람에게 잠시 기다리라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이 들어가면서 살짝 열린 문틈으로 달콤한 향이 진하게 풍겼다.

“나도 나지만.”

진한 향에 눈살을 찌푸리던 펠리오가 루페를 바라봤다.

“루페, 너도 조심해라.”

루페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움받는 역할이야, 어릴 때부터 잘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랑 지금은 달라.”

문 너머로 시종의 발소리가 들렸다.

“……네가 받은 ‘리코스’라는 성.”

펠리오가 드물게 진심을 담아 경고했다.

“황제에게 보통 거슬릴 게 아닐 테니.”

루페는 그 진심을 가슴에 새기었다.

“그래도 말입니다.”

문이 열리기 직전, 루페가 빠르게 속닥였다.

“그 거슬리는 표정을 보는 맛이 또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공작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아무리 상대가 답이 없어도…….”

“……최소한의 예우는 지키라고?”

펠리오가 짧은 숨을 고르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지, 뭐.”

비릿한 미소가 그득하던 얼굴에 가면 같은 무뚝뚝함이 그려졌다. 요사이 레오니에와 함께 지내면서 자주 웃던 펠리오가 익숙해진 탓인지, 루페는 어느 때보다 그에게서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원래는 저것이 그의 ‘평범’이었다.

모든 것을 비웃는 오만한 맹수.

“황제 폐하께서 안으로 드시라 합니다.”

시종이 고개를 뻣뻣이 든 채 황제의 명을 전했다. 그러나 펠리오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푹 숙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에 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펠리오와 루페는 그런 시종은 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보레오티 공작.”

소파에 홀로 앉아 있던 남자가 알은척했다. 황실 대대로 유전된다는 금빛 눈동자가 펠리오를 응시했다. 결이 좋은 황갈색 머리에 금빛 눈동자, 거기에 건장한 체격까지.

누군가는 찬란한 제국의 상징이라며 감격할지도 모르나, 북부의 검은 맹수에겐 크리 큰 감흥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오니에가 맹수의 송곳니를 발동할 때 보이던 황금빛 기운이 훨씬 더 경이로웠다.

“폐하.”

제국의 황제에게, 펠리오가 비웃음을 삼킨 채 인사했다.

“북부의 보레오티, 제국의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어디 한번 가지고 놀아 볼까.

그래야 집에 돌아가서 레오한테 해 줄 말이 생길 테니 말이다.

* * *

황실과 북부의 갈등은 깊다.

두 세력의 갈등은 제국 건국 초부터 이어졌고, 그만큼 오래된 악연이다 보니 사람들에겐 거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나 아주 간혹. 정말 가뭄에 손톱만 한 새싹이 나듯, 두 가문의 사이가 느슨해질 때가 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예로는 얼마 전 승하한 선황과 그보다 조금 먼저 사망한 선대 보레오티 공작이었다. 두 사람은 정말 예외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깝게 지내며 두터운 정을 쌓았다. 서로 저 잘난 맛에 사는 재수들끼리 우연히 죽이 맞은 탓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자식들도 어릴 적부터 자연히 얼굴을 마주하는 때가 많았고, 두 어른은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머저리가.”

그들의 아이 중 한 명인, 펠리오 보레오티는 루페가 가지고 왔던 서류를 하나하나 짚어 줬다.

“얼마나 등신 같은 짓을 했는지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북부에서 일어났던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을 찬찬히 알려 줬다.

서류가 쌓이면 쌓일수록, 펠리오가 관련된 자들의 이름을 손으로 하나하나 짚을 때마다. 동시에 수비테오 황제의 안색은 눈에 띄게 파리해졌다. 그러나 태연한 표정만큼은 힘겹게 유지 중이었다.

‘이것 봐라.’

펠리오가 조용히 감탄했다. 저만 보면 늘 지레 겁먹고 홀로 열등감에 빠져 있더니, 잠깐 안 본 사이에 제법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운 듯했다.

루페도 제법 놀랐는지 휘파람 부는 흉내를 냈다. 아직 서툴긴 하지만, 그래도 발전은 하는 모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펠리오가 나지막이 사과했다.

“흥분하여 그만 폐하 앞에서 실언했습니다. 말이 격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정작 그의 목소리는 흥분은커녕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저 조금이나마 감정을 다룰 줄 알게 된 수비테오 황제를 위한 배려였다. 실상은 조롱에 가까웠지만.

“……언행에 주의하도록.”

수비테오가 가까스로 웃는 상을 지었으나, 속은 말이 아니었다.

펠리오는 알겠다며 순순히 답했다.

“그럼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종이들은 이번 사건에 연루된 모든 죄인의 신상과 그에 관한 증거들이었다.

이번 사건을 주도한 타바누스 백작 가문을 비롯한 북부 세 가문과 히르쿠스 남작을 포함한 서부 귀족 가문들. 그리고 만일 이번 마물 불법 거래가 무사히 열릴 경우, 경매장에 참석하기로 한 자들의 명단까지 확보했다.

펠리오가 사건 현장을 기습한 건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단기간 내에 이토록 많은 정보와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지난겨울 마물 사냥 때부터 철저하게 조사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했군.”

수비테오 황제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칭찬이 후하십니다.”

펠리오가 겸손을 부렸다.

“제국의 근간을 해치는 자들을 잡아내는 것쯤이야, 아무런 일도 아니지요.”

설명을 마친 펠리오는 소파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었다. 마치 이곳 황궁 응접실이 저의 영역인 것처럼 건방지고 여유로운 동작이었다.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

“그러니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국의 신하된 도리일 뿐입니다.”

오히려 고마운 건 펠리오 쪽이었다. 덕분에 한 방 먹였으니.

설마 정말로 이번 일에 황제가 연루되었을 줄은 몰랐다. 가능성이야 어느 정도 있었지만, 펠리오가 아는 수비테오 황제는 이런 일에 은근히 몸을 사리는 인간이었다. 기껏해야 우시스 황비나 올로르 가문에 편승해 덕만 볼 줄 알았더니, 의외로 행동력이 있었다. 아니면 지독히도 멍청하거나.

어쨌건 그 덕에 지난 3년 동안 수도에서 반강제로 지내야 했던 짜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기분이었다.

“전부 황제 폐하의 덕입니다.”

“그대의 노고에 감사하지.”

수비테오 황제가 은근슬쩍 다리를 꼬며 칭찬했다. 펠리오는 눈을 살짝 감은 채 고개를 가볍게 움직였다. 속으로 피를 흘리며 태연한 척하는 황제를 향한 조롱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꼬아 올린 황제의 무릎 위에 얹어진 손가락이 산만하게 움직였다. 펠리오의 예상대로, 황제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눈 앞에 펼쳐진 증거들이 그의 목을 조여왔다. 증거 속 죄인 대부분이 황제의 편에 선 귀족들이며, 그중 몇몇은 수비테오 황제의 신망을 듬뿍 받고 이번 일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예를 들면 타바누스 같은.

황제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를 잃은 것은 아주 큰 낭패였다. 타바누스 가문은 이전부터 황실과 연이 깊은 가문이었다. 선황 때에는 잠시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수비테오가 황위에 오르면서 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현장에서 잡힌 건 타바누스 백작 영식이나, 그의 부친인 타바누스 백작 또한 이번 일에 크게 관련된 정황입니다.”

수비테오 황제가 짧게 혀를 찼다.

‘쓸모없는 것.’

제 아비와 다르게 야망이 넘치고 총명하여 황비의 친가를 소개해 주고 신뢰했더니 이딴 실망을 선보일 줄이야.

황제는 타바누스 영식을 질타했다. 그들을 잃어 아주 큰 낭패였다는 건, 그들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이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부랑자들을 고용해서…….”

펠리오가 입에 담은 부랑자는 황실 기사단이었다. 저들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다는 우시스 황비의 말에 선뜻 넘겨주었던 황실의 전력이 단숨에 부랑자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글라디고 기사단에 의해 모두 명을 달리했다.

황제는 쏟아지는 폭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펠리오는 그런 황제를 한 번 스윽 살피고는 이내 이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했다. 대부분 펠리오가 원하는 대로 결정되었다. 수비테오 황제의 정신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그런 고로, 처벌은 이 정도로 해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거의 펠리오 혼자 떠드는 중이었다.

“폐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타바누스 영식은…….”

황제가 가까스로 꺼낸 목소리는 폭삭 가라앉은 채였다.

“타바누스 영식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죽었습니다.”

펠리오가 말했다. 수비테오 황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찌 재판도 없이 함부로……!”

“제가 아닙니다.”

섣부른 오해는 곤란하다며, 펠리오가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죄목을 살피고자 지하 감옥에 일당들과 가두었으나, 안타깝게도 마물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습니다.”

“마, 마물이라고……?”

“타바누스 영식의 그림자 속에 한 마리가 숨어 있더군요.”

펠리오가 그들을 죽인 마물의 이름을 가르쳐 줬다.

“이노파코, 라는 마물입니다.”

겉모습은 늑대나 개처럼 친숙하게 생겼다. 그러나 그 이름처럼 사냥감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겨 기습하는 잔혹한 마물이다.

“겨울철 마물 사냥 때마다 항상 주의하는 녀석입니다.”

북부 산맥에서도 제법 안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마물인데, 펠리오는 타바누스 영식이 이노파코 마물에게 당한 이유를 간단히 추측했다.

“아무래도 새끼 마물들을 옮길 때, 이노파코 한 마리가 타바누스 영식의 그림자 속에 숨어든 것 같습니다.”

상세한 설명이 이어질수록 수비테오 황제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왜냐하면 저 마물은, 황제가 기르고 싶다고 희망했던 마물이기 때문이었다.

“위험 순위로 따진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요.”

설명을 마친 펠리오가 문득 생각했다. 그냥 마물에게 저놈이 잡아먹히게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 * *

그날 저녁.

펠리오는 저녁 식사 중에 레오니에한테 황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럼 루페 아저씨는 안 혼났네?”

우물우물, 입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킨 레오니에가 말했다. 마침 오늘은 루페도 특별히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가요?”

“으음, 다행이긴 하죠.”

루페가 나이프로 고기를 느긋하게 썰며 답했다.

“저는 일단 파르두스 가문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는데, 그런 제가 북부 골수 귀족 가문 중 하나를 이어 가게 되었으니 배알이 꼬일 겁니다.”

“아빠, 그래도 되는 거야?”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물었다.

“안 될 이유가 없지.”

펠리오가 와인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검붉은 포도주가 둥그스름한 와인 잔을 따라 기울어지더니 이내 펠리오의 입술 속으로 들어갔다.

“리코스 자작 가문은 몇십 년 전에 대가 끊겼지만, 가장 가까운 대에 파르두스 후작과 결혼한 기록이 있거든.”

“그 사람이 제 조부이십니다.”

루페가 고기 찍힌 포크로 자신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원래 리코스 자작 가문은 대대로 보레오티 공작을 보필하는 가신 가문입니다. 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위지요.”

“작위를 이렇게 함부로 줘도 되는 거예요?”

“소위 ‘골수’로 분류된 가문은 보레오티 관할이야.”

펠리오가 말했다.

건국 초, 초대 황제가 북부의 수장과 나누었던 약속 중 하나가 바로 북부의 절대적인 자치권이었다. 그중 하나가 현재 ‘골수 귀족’이라 불리는 특정 가문들의 작위 수여권이었다.

작위 수여가 황제의 독자적인 특권이라는 걸 고려하면,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권한이었다.

설명을 들은 레오니에가 이번 사건으로 처벌받았다는 북부 귀족 세 가문을 떠올렸다. 그들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북부에서 추방당했다. 하지만 작위는 가진 채였다. 골수 귀족을 제외한 가문의 작위는 황제의 권한이지, 펠리오의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레오니에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황제가 알면 배알이 꼬이고 시비를 걸만한 사정이었다. 대외적으로 황제파 출신인 귀족 한 명 빼돌려 골수 귀족으로 삼아 보레오티 편을 늘리는 꼴이니 말이다.

‘황제는 북부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레오니에는 소설 속에서 묘사되었던 황제를 떠올렸다. 대부분의 황실이 그러했지만, 이번 대 황제인 수비테오 아킬라 벨리우스는 이상하리만큼 북부를 향한 비이상적인 욕심을 지니었다.

“어쨌건, 아빠가 한 방 크게 먹인 거지?”

멋있다며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입가엔 새빨간 소스가 군데군데 묻은 채였다. 오늘 저녁 메뉴로 나온 스테이크 소스가 퍽 마음에 들어 포크로 긁어모아 먹은 탓이었다.

펠리오가 식탁 위 냅킨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 줬다.

“그럼 그 증거들 말이야.”

얌전히 아빠의 손길을 받던 아기 맹수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

그거로 황제를 압박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레오니에가 물었다. 펠리오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근데 왜 안 했어?”

“그건 공작님의 명안이셨죠.”

루페가 자랑처럼 말했다.

증거를 모으고 배후를 조사할 때마다, 황제의 암묵적인 동의와 은밀한 협력 현황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조사 중이던 루페는 당장 황실에 올라가 이놈의 멱살을 잡고 정신 좀 차리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런데 펠리오는 그 모든 걸 드러내지 말라고 명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국의 안정이었다.

역대 가장 완벽한 황권을 다졌다고 평해지는 선황이 승하한 지 이제 겨우 3년이 지났다. 괜히 현 황제의 잘못을 드러내 제국을 혼란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펠리오가 손을 들었다. 주절주절 떠드는 루페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두 번째는 뭘까?”

펠리오가 레오니에한테 물었다.

“……어?”

느닷없이 받은 질문에 레오니에가 퍽 당황했다.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위에 올리고, 저도 모르게 다소곳이 허벅지 위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펠리오와 루페를 번갈아 바라봤다.

펠리오는 여전히 무뚝뚝했고, 루페는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펠리오 역시 무언가를 기대하는 짓궂음이 그득했다.

‘이 어른들 보소.’

레오니에가 속으로 피식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려는지 궁금한 모양이네.’

예고도 없이 쪽지 시험 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지금 펠리오는 레오니에한테 간략한 시험을 냈다. 지금껏 들은 정보로 레오니에가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 상황이 썩 불쾌할 법한데도, 레오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재미있기까지 했다.

‘어떻게 답할까나?’

식탁 아래 붕 뜬 두 다리가 흥겹게 흔들거렸다. 펠리오와 루페는 자신들이 이 상황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만, 실상 주도권은 일찌감치 레오니에한테 떨어졌다.

‘모른다고 시치미뗄까?’

난 아직 어리고 작은 아이라서, 그런 어려운 내용은 모른다고 입술에 검지 하나 살짝 올린 채 어깨춤을 춰 볼까 고려했다.

하지만 바로 기각했다. 했다간 자신의 정신이 붕괴할 것 같았다. 어른들이 귀여워해 주는 건 둘째치고 말이다.

“……뻔하지, 뭐.”

그래서 레오니에는 저답게, 용맹한 아기 맹수답게 씩씩하게 답했다.

“서부와 티그리아 황후 폐하를 위해서잖아.”

황실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날 경우. 의외로 피해를 입게 되는 건 티그리아 황후일 가능성이 컸다.

현 제국의 정세는 서부 출신 티그리아 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파, 남부 출신 우시스 황비를 중심으로 하는 황제파. 이렇게 두 세력의 대립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황제파였다.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귀족파였다가 변심하고 등 돌린 황제파였다.

바로 히르쿠스 남작 같은.

남작이 헤스페리 가문에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정황을 보면, 제 가신에게 당할 뻔했던 서부의 통제력과 역량을 의심받기 딱 좋았다.

현재 황후의 기반은 나쁘지 않으나 황제의 편애가 노골적인 탓에 신중해야 했다. 지금은 황제를 깎아내려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보다 그쪽이 더 중요했다.

“……어라?”

대답하던 중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래?”,

어느새 펠리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오니에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번 상황을 심도 있게 파악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얼치기 귀족들보다 나았다. 누가 저 의견이 일곱 살 꼬마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할까. 펠리오는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제 자식이 이렇게 똑똑하고 잘났는데, 부모로서 기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건너 옆에 앉은 루페는 너무 놀라 턱을 쩍 벌린 채였다. 그 꼴이 아주 우스웠다.

“또 뭐가 있는데?”

아빠 맹수는 더 말해 보라며 아기 맹수를 다독였다.

“북부가 우위에 섰어.”

기분이 좋아진 레오니에가 싱글벙글 웃으며 이어 말했다. 눈이 마주친 부녀는 서로를 행복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동부랑 서부가 우리 보레오티한테 아주 큰 은혜를 입었어. 우리 덕에 배신자를 찾아내고 자기들 지역을 재점검할 수 있게 되었잖아. 이건 아주 큰 일이야.”

의리를 중시하는 서부와 은근히 자존심 강한 동부는 반드시 이번 일을 기억해 둘 거다. 언젠가 북부에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의 도움을 기대해도 되는 좋은 기회였다.

“올로르 가문도 이번에 꽤 흔들리겠지?”

남부를 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던 백조가 몸을 사릴 거다.

“황제도 그러지 않겠어?”

어쨌건 황제의 약점을 감춰 줬으니 얼마 간은 눈치를 볼 거다.

“어때?”

대답을 마친 레오니에가 두 어른을 바라봤다.

어느새 식당에는 적막이 깔려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했던 펠리오는 딸기 우유 사탕을 한 봉지째 쥐여 주고 싶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당히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아가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루페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에이, 뭘 그렇게까지 칭찬해요, 부끄럽게.”

“그러니까 말이야. 보레오티라면 이 정도로 똑똑한 건 응당 당연…….”

“아빠는 좀 조용히 있어!”

팍팍, 레오니에가 찬물 끼얹으려는 펠리오의 입술을 야무지게 때렸다.

“분위기 파악 좀 해!”

“이 불효막심한 것.”

펠리오가 얼얼해진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쥐똥만 한 게 힘은 또 어찌나 야무진지, 으르렁거리는 딸이 얄미워 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아니, 정말로 대단하세요.”

루페는 자연히 저의 일곱 살 시절을 떠올렸다.

저도 또래 중에선 무척 똑똑한 축에 속했다. 저보다 잘난 놈은 없다고 자만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일 그 당시의 자신이 지금의 레오니에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눈이 부셨을 거다.

어른들에게 잠깐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제국의 정세와 지역 간 세력 흐름을 완벽히 파악했다. 거기다 북부에 주어질 이득까지 확실하게 계산해냈다. 어쩌면 저것보다 더 파악하고 있을지 모른다.

루페는 소름이 돋았다.

저런 분이 차기 보레오티가 되신다니.

“……아빠!”

레오니에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싹 당겼다.

“루페 아저씨가 나 보면서 거친 숨결을 내뱉어!”

레오니에는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거친 숨을 내쉬는 루페를 한껏 경계했다.

“아, 아닙니다!”

뒤늦게 정신 차린 루페가 억울한 투로 부정했다. 그러나 레오니에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내가 설마설마했어…….”

레오니에가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나한테 아빠를 투영하고 있어……!”

저질! 레오니에가 소리쳤다.

달그락, 식탁 위로 포크나 나이프 같은 식기가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루페의 자리에서 난 소리였다.

“…….”

“…….”

두 어른은 누가 먼저 입이라도 뗄까, 입술을 꾹 다물었다.

“후우우우…….”

곧 펠리오가 바닥이 꺼질 정도로 깊고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깨가 축 처지다 못해 가라앉은 수준이었다.

‘공작님…….’

루페는 그런 펠리오를 안타까이 바라봤다. 천하의 보레오티도, 오만한 검은 맹수마저도, 저 잔망스러운 애늙은이 앞에서는 육아에 고생하는 평범한 아빠일 뿐이었다.

“넌 뭘 또 웃어.”

펠리오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루페는 그제야 자신이 히죽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은 발견이었다.

루페는 곧 펠리오가 내던진 식사용 롤빵으로 면상을 맞고 나서야 표정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 * *

그리고 새벽.

그믐달에 구름마저 잔뜩 낀 어둑한 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활기찬 광장마저 어둠에 잠겨 침묵에 휩싸였다. 하수구 근처를 누비는 쥐마저도 소리 내지 않는 은밀한 시각.

타바누스 저택 뒷문으로 수상한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마치 급하게 도망이라도 가는 것처럼 등에 짐 보따리를 한껏 짊어진 채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뒤로 또 다른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타바누스 백작.”

“으아아……!”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타바누스 백작의 등 뒤로 짐 보따리가 풀어졌다. 와르르 쏟아진 보석과 귀중품들이 데굴데굴 굴러 단단한 가죽신에 툭, 하고 부딪혔다.

“그간 평온하셨습니까.”

멜레스가 시린 눈빛으로 인사했다. 빛 한 점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잿빛 머리칼이 어둡게 물들어 갔다.

“글라디고 기사단 소속 멜레스 레비페스입니다. 지금은 보레오티 공작님의 명으로 레오니에 아가씨의 호위 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보, 보레……!”

멜레스를 올려다보는 타바누스 백작의 얼굴에 암담한 절망이 드리웠다. 분명 황실에서 보낸 시종 말로는, 글라디고 기사단이 수도에 도착하려면 일주일 뒤에나 도착한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돈 되는 것들만 챙겨 서둘러 야반도주를 하려던 건데.

어째서.

‘왜 내 눈앞에…….’

칠흑 같은 기사복에 새하얀 망토를 두른 저들은 마치 지옥에서 저를 마중 나온 사신 같았다.

타바누스 백작이 저도 모르게 공포감에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였다.

“쉿.”

어느새 백작의 옆으로 성큼 다가온 파보가 싱긋 웃으며 그의 입가에 재갈을 물렸다.

“오밤중에 시끄럽게 구는 건 귀족으로서 예의가 아니지요.”

자는 사람들 다 깨우잖아요.

여름날 뜨거운 태양 같은 목소리가 백작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재갈이 물리기 무섭게 역겨운 냄새가 비강을 타고 흘러왔다. 백작이 헛구역질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백작은 보았다. 함께 도망치던 자신의 아내와 사용인 두 명이 어느새 포박된 채였다.

타바누스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는 새 두 팔은 뒤로 돌려진 채 단단한 밧줄에 묶여 있었다. 두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멜레스가 이어 물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

“죽은 아드님 장례는 치르셔야지요.”

그와 동시에 프로보가 새하얀 천에 쌓인 무언가를 백작 앞에 툭, 내던졌다. 하얀 천에 꽁꽁 싸맨 무언가는 바닥을 몇 번 뒹굴더니 이내 살짝 풀려 버리고 말았다. 그 틈 사이로 낯익은 손이 보였다. 타바누스 백작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가 형체를 드러냈다.

타바누스 백작이 북부에서 지낼 아들에게 직접 건넨 반지였다. 하얀 천에 쌓인 건 무스카 타바누스의 오른팔이었다. 재갈을 물릴 때 맡았던 역겨운 냄새의 정체였다.

조금 전부터 파르르 몸을 떨던 백작 부인은 기어코 실신했다. 바닥에 머리부터 쿵 찧었음에도 누구 하나 나서 부축하거나 도와주지 않았다.

“으, 으으! 으으으으!”

눈에 핏줄이 바짝 선 타바누스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입에 물린 두툼한 재갈 탓에 모든 것이 막혀 버렸다. 그의 눈에는 분에 겨운 눈물만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공작님의 배려입니다.”

멜레스가 사정을 설명했다.

“영식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마물인 이노파코에게 습격당했습니다.”

울부짖던 타바누스 백작이 멈칫했다. 아들의 팔을 바라보는 백작의 얼굴이 급속도로 늙어 갔다.

“공작님의 전언도 있습니다.”

함께 있던 프로보가 말했다.

“자업자득.”

짧은 한마디였다.

그리고 수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게 왜 나의 영역을 건드려서 이 지경까지 가게 되었냐고, 결국 그대들이 선택한 어리석은 배신의 결과물을 보라고. 네 아들과 그들은 스스로 친 덫에 걸려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네 아들의 죽음은 결국…….

“……당신의 탓이지요.”

파보가 굳이 사족을 덧붙였다. 멜레스가 인상을 쓰며 가볍게 주의를 주었다. 파보가 어깨를 으쓱하며 무고한 척 양손을 들며 뒤로 한 걸음 멀리 떨어졌다.

곧 스르릉, 하고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검을 쥔 멜레스가 일전에 펠리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만일 그런 인간이 눈에 들어온다면.’

레오니에가 북부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이를 향한 좋지 않은 소문이 귀에 거슬리던 멜레스가 이를 걱정하니, 펠리오가 귀한 순간 하나를 약속해 줬다.

‘너의 검에 그들의 피를 적실 영광을 주도록 하마.’

메리오카 백작도, 글리스 남작도 전부 멜레스의 칼에 쓰러졌다.

펠리오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멜레스의 날 선 검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 * *

“멜레스 언니!”

레오니에는 아침부터 자신의 방을 찾아온 손님을 향해 활짝 웃었다.

“아가씨.”

멜레스가 오랜만에 뵙는 저의 작은 주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멜레스 레비페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언니, 보고 싶었어요!”

레오니에가 와락 멜레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멜레스도 기쁜 마음으로 레오니에의 등을 도닥였다. 불쑥 고개만 치켜든 레오니에가 헤실거렸다.

“언제 왔어요? 밤에?”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언니 피곤하겠다!”

“아가씨를 보니 피곤한 게 싹 사라졌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다정한 목소리에, 레오니에가 감격한 듯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뒤를 따르던 하녀들도 가슴 자락을 꼭 쥐며 꺅꺅거렸다.

멜레스는 레오니에를 식당까지 직접 데려갔다. 그곳에는 파보와 프로보도 있었다. 레오니에가 손을 붕붕 흔들며 달려갔다. 어찌나 반가운지,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그리움이 벅차올랐다.

“아가씨 엄청 크셨네요!”

파보가 아주 바람직하다며 고개를 큼직하게 끄덕였다. 컸다는 소리에 레오니에가 눈을 반짝거렸다. 프로보를 바라보니 그 역시도 같은 생각인지 싱긋 미소지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많이 크셨습니다.”

“얼마나? 얼마나요?”

“이젠 여섯 살로 보이십니다.”

“오오…….”

기뻐하려던 레오니에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 이번 가을 지나면 여덟 살이에요…….”

일곱 살 땐 다섯 살로 보인다더니, 이젠 여덟 살이 되니까 여섯 살로 보인단다.

“별 차이 없단 거잖아…….”

“아니에요.”

멜레스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가씨의 성장이 느린 건 어쩔 수 없어요.”

레오니에가 처음 북부에 왔을 때, 사람들은 레오니에를 비쩍 메마른 다섯 살로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하고 어여쁜 여섯 살로 보고 있다.

“그동안 아가씨 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이거 보세요.”

몇 날 며칠 제대로 감지도 못했던 더벅머리는 윤기가 잘잘 흘러내렸다. 버석버석했던 피부도 부드럽게 바뀌었다. 뼈가 앙상히 드러났던 몸에는 살이 통통하게 붙었다.

“아주 건강해졌어요.”

이건 무척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네?”

차이점을 깨달은 레오니에게 배시시 웃고는 몸을 꼬며 수줍어했다.

“사실 아가씨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세 살인 줄 알았답니다.”

멜레스가 비밀처럼 작게 말해 줬다.

“그 정도나?”

레오니에가 어머머, 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갸름하게 감쌌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아 보였나 싶어 흠칫했다.

한편, 펠리오는 막 식사를 끝내고 식당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같이 먹지!”

레오니에가 서운하단 듯 아빠의 다리에 엉겨 붙었다. 펠리오는 가던 걸음도 멈추고, 안겨 칭얼거리는 딸을 손수 안아 의자에 앉혀 주었다.

“그러게 누가 늦잠 자래.”

“아빠가 나 깨우지 말라고 했다며.”

“그러긴 했지.”

수도에 갓 올라온 아이가 혹시라도 피곤할까,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일부러 깨우지 말라고 집사인 트라에게 명했다.

“천천히 먹고 외출 준비해라.”

새롭게 올라온 식전 빵을 뜯어 먹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어느새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차올라 있었다. 펠리오는 그만 실소를 머금었다.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기특했다.

“수도 구경해야지.”

“우우 우 우응으…….!”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말해.”

레오니에가 서둘러 우물우물 볼을 움직였다. 씰룩거리던 볼이 일순 멈추더니, 목이 크게 꿀꺽 움직였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레오니에는 푸하, 하고 대차게 숨을 들이켰다.

“그럼 나 책 사 줘!”

아기 맹수의 얼굴에 꽃이 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