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부, 헤스페리
“마누스 오빠!”
레오니에가 팔을 흔들며 마누스의 품에 와락 안겼다.
“뛰다 넘어지시면 죽습니다.”
“그 정도로 안 죽어요.”
“저희가 죽습니다.”
나중에 주군께 죽는다며 마누스가 진심으로 부탁했다.
마누스는 레오니에가 고아원에서 펠리오한테 입양될 때 함께 있었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레오니에의 호위 기사가 될 뻔했으나,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있잖아요…….”
한걸음 떨어진 레오니에가 두 팔을 등 뒤로 새초롬하게 숨긴 채 상체를 조심조심 비틀었다.
“다리 근육 만져도 돼요?”
“아니요.”
마누스의 즉답에 레오니에가 축 처졌다.
“……전에 흉근으로 파도타기 해 줬잖아요.”
이전에 근육 노래로 하나가 되었던 순간을 떠올리라며 레오니에가 간절히 청했다.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사실 마누스는 자신의 근육에 애착이 있었다. 그리고 근육의 진가를 아는 레오니에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차기 북부의 수장이 근육의 참된 맛을 알아줘서 기뻤다. 하나 그 때문에 마누스는 레오니에의 호위 기사에서 탈락했다.
그는 글라디고 기사단에서 가장 우람한 근육을 자랑했다. 키는 펠리오보다도 컸고, 덩치는 부단장 모노보다도 컸다. 체격만 따진다면 마누스가 글라디고에서 가장 우람했다. 펠리오는 그런 마누스를 레오니에 곁에 뒀다간 큰일이 날 거라 판단하고 제외했다.
솔직히 마누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이유였다.
“주군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아가씨께 너무 오냐오냐하며 근육을 쉽게 만지게 하면 변태가 된다고, 너무 어리광을 받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난 이미 근육 변태인데!”
레오니에가 뻔뻔하게 답했다.
“…….”
마누스는 처음으로 펠리오를 동정했다. 천하의 검은 맹수도 저렇게 맹랑한 변태 딸이 있다면 보통 힘들 게 아닐 거다.
“아가씨.”
보다 못한 마누스가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이 이상 아가씨가 진성 변태가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만약에 아가씨의 말랑말랑한 볼살이 마음에 든다고 계속 만져달라고 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그럼 아빠한테 이를 건데요?”
송곳니로 당장 꿰뚫으라고 일러바칠 거라며 레오니에가 정색했다.
“변태도 아니고…….”
“바로 그겁니다!”
정색하는 레오니에가 약간 얄미웠지만, 마누스는 이야기가 통한 것 같아 안심했다.
“자고로 진정 근육을 아끼고 사랑하신다면, 어느 정도 참으셔야 합니다.”
레오니에의 근육 취향은 보통 변태로 오해받기에 십상이라며 마누스가 서글피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레오니에는 얼마 전 마누스가 전 여자친구에게 근육 변태라는 이유로 차였단 이야기를 떠올렸다. 레오니에도 그 말엔 동의했다.
“하지만 난 아직 애니깐!”
쥐똥만큼 작아서 괜찮다고 레오니에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아가씨, 설마…….”
경악하는 마누스에게, 레오니에는 대답 대신 사악한 미소를 슬그머니 지어 보였다.
“……사악하셔라.”
마누스는 오싹한 배신감에 몸서리를 쳤다. 영악한 아가씨는 본인의 나이와 체격을 이용해서 지금껏 당당하게 근육을 밝히고 더듬거렸던 거다.
대놓고 악질이었다.
“그래도 나 요즘엔 덜 밝히는데.”
“덜……?”
마누스는 어이가 없었다. 얼마 전 주군과 리네 백작의 검술 대련에서 백작의 치골근이 보고 싶다고 바지를 찢으라던 레오니에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런데, 나 아빠 보고 싶어요.”
한참 재잘거리던 레오니에가 숨 쉬듯 펠리오를 그리워했다.
“아빠 많이 바빠요?”
“으음, 이제 오시지 않을까요?”
마누스는 펠리오가 북부에서 하고 있을 사냥 계획을 떠올렸다. 레오니에가 서부에 도착한 지 벌써 열흘이었다. 이제 사냥을 마무리 짓고 내려오실 즈음이었다.
“아빠…….”
기운 없는 목소리가 또 한 번 펠리오를 불렀다.
“왜.”
그리고 펠리오가 답했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펠리오가 웬 까만 인형 하나를 팔에 낀 채로 서 있었다. 샛노란 리본이 목에 달린 사자 인형이었다.
“내가 너보고 밖에 나갈 때 외투 챙겨 입으라고 했지.”
장장 열흘만의 만남임에도, 펠리오는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레오니에의 옷차림에 잔소리했다. 감기 걸리면 너만 손해라는 고리타분한 말도 덧붙였다.
“자.”
어느새 레오니에의 앞까지 온 펠리오가 인형을 내밀었다.
“만드느라 좀 늦었다.”
마치 오다 주웠다는 듯이 심드렁한 말투였다. 하나 실상은 북부에서 피바람을 일으키고 청소하고 온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대충 둘러댄 핑계였다. 그러나 인형은 펠리오가 미리 준비해 둔 진짜 선물이었다.
“…….”
레오니에는 선물 받은 사자 인형을 빤히 바라봤다. 검은 보석을 두 눈에 박은 사자 인형은 보레오티 가문의 문장 속 맹수와 달리 무척 귀여웠다. 손에 잡히는 촉감도 부드러워 얼굴에 마구 비비고 싶을 정도였다.
“마음에 들 거다.”
말은 저렇게 자신 있게 해도,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고맙다는 인사라든가, 아닌 척 흥흥거리며 새침 떠는 수줍은 모습이 아니었다.
멍하니 인형을 바라보던 레오니에의 턱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으애애애앵!”
이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했다.
“으아앙! 으헉, 흐어어어엉!”
레오니에는 인형을 부둥켜안은 채 세상 떠나가라, 목청껏 엉엉 울었다. 숨까지 헐떡헐떡 넘어갈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울음에 두 어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빠! 아빠아아!”
펠리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 차리고 아이를 안았다. 품에 안긴 레오니에가 더욱 자지러지게 울었다.
“이 바보! 개멍청이!”
가까스로 울음을 멈춘 레오니에가 씩씩거리며 욕했다.
“왜 말없이 나만 여기 보냈어!”
펠리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레오니에는 그동안 혼자 몰래 숨기고 꾹 참았던 감정을 터트렸다. 바로 그리움이었다.
“보고 싶었잖아! 무서웠단 말이야!”
“레오…….”
“나만 두고 보내지 마! 혼자 가지 마!”
마차에서 눈을 떴을 때, 레오니에는 잊고 있었던 공포를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세상에서 낯선 아이의 몸으로 깨어났던 악몽 같던 그날이.
레오니에는 또다시 악몽이 반복되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다. 아무런 이유도 모르는 채 서부로 내려왔던 레오니에는 그 여행길 내내 슬프고 외로웠다. 저만 홀로 내보낸 펠리오가 너무도 미웠다.
그랬음에도 밤새 사탕이 든 유리병을 꼭 안고 펠리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
“흐윽…….”
실컷 울고 기운이 빠진 레오니에가 훌쩍이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빠 꼴도 보기 싫어…….”
레오니에는 새빨갛게 부은 눈으로 펠리오를 노려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
눈물 젖은 시야에 비친 펠리오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티격태격 말다툼할 때나 저를 짓궂게 놀릴 때조차, 펠리오는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종종 소리 내어 웃을 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느긋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들킨 아이 같았다. 당혹스럽고, 겁이 나고,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아이.
“아빠.”
그래서 레오니에가 가르쳐 줬다.
“미안하다고 해.”
이럴 땐 솔직하게 사과하는 거라고, 눈물 머금은 목소리로 똑 부러지게 말했다.
“……미안.”
펠리오는 놀란 얼굴 그대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레오니에는 이렇게 어색하고 감정 없는 사과는 처음 들어봤다. 어쩌면 펠리오의 27년 인생에서 처음 내뱉는 사과일지도 모른다. 엎드려 절받기보다도 못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두 번째 사과는 달랐다.
“정말 미안하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젖은 뺨을 쓰다듬으며 조심조심 눈치를 살폈다.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레오니에의 기분을 살피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래서 지난번처럼, 아이가 혼자 고독을 끌어안고 흐느끼던 그때처럼 등을 토닥이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지켜보던 마누스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이제 정원에는 레오니에와 펠리오 단 둘뿐이었다.
“창피해…….”
코를 한 번 크게 훌쩍인 레오니에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펠리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여전히 부끄럽고 창피했다. 하지만 속은 후련했다.
펠리오는 손수건을 꺼내 레오니에의 젖은 얼굴을 손수 닦아 줬다.
“…….”
그런데 닦아도 계속 나오는 콧물 때문에 손수건은 회생 불가 상태였다. 펠리오는 아이의 몸이 콧물로 형성된 건 아닌지 아주 짧은 찰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콧물 젖은 손수건은 송곳니의 힘으로 불타버렸다.
“왜 태워?”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진 레오니에가 퉁명스레 물었다.
“더러워서.”
“아까 나한테 미안하다며.”
그런 인간이 딸 콧물 더럽다고 손수건을 태워? 레오니에는 또 다른 깊은 분노에 뒷목을 잡고 끙끙거렸다.
“이럴 땐 콧물 젖은 손수건도 주머니에 넣는 멋짐을 보여야지!”
“난 그딴 거 안 해도 멋있어.”
“그렇긴 한데!”
더 따질 게 없어 기분 상한 레오니에가 손에 든 인형으로 펠리오의 입술을 퍽퍽 때렸다. 솜으로 가득 채운 인형이라 제법 아팠다.
“그래서.”
묵묵히 맞아 주던 펠리오가 뒤늦게 인형을 치우며 물었다.
“이제 괜찮아?”
“뭐가 또.”
“다 울었냐고.”
레오니에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우울했던 기분도, 보고 싶어서 한없이 그립던 마음도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아빠.”
괜히 무안한 레오니에가 인형 손을 꼼지락거렸다.
“어서 와…….”
뒤늦은 인사와 함께, 레오니에가 와락 펠리오의 목을 껴안았다. 펠리오도 다시금 아이를 품은 팔에 힘을 줬다. 두 부녀 사이에 끼인 사자 인형이 납작하게 눌렸다.
“다녀왔다.”
뒤늦은 인사를 주고받은 보레오티 부녀는 이윽고 소리 죽여 웃었다.
* * *
“이야, 역시 보레오티.”
밤늦게 돌아온 카니스의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재미난 걸 보고 온 사람처럼 생기가 가득했다.
“벌써 서부에 네가 왔다고 여기저기 알려졌더라.”
일하는 내내 서부 귀족들에게서 연락을 끊임없이 받았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들어오는 연락마다 답하느라고 진이 다 빠졌다.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지.”
아비페르는 펠리오가 타고 온 마차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마차가 그렇게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생겼는지 몰라.”
크고 웅장한 검은색 마차는 그냥 그 자체가 흉기 같았다. 무섭다 못해 기가 팍 눌릴 정도였다. 거기다 마차를 끌고 온 검은 말들도 범상치가 않았다. 얼핏 봐도 허벅지가 장정 두 사람의 몸을 합친 것처럼 불끈거렸다.
“마구간에 넣었더니, 우리 집 말들이 엄청 놀랐다더라.”
“그래도 금방 잠잠해졌지?”
“그건 잠잠해진 게 아니라 기가 눌린 거야.”
보레오티의 말들이 푸르릉, 투레질을 하고 말발굽을 몇 번 다그닥거리니 바로 눈을 내리깔고 구석으로 알아서 이동했다고 한다.
“혹시 말 사료에 마물을 섞어 먹이는 걸까?”
“추측이 퍽 재밌군요.”
어머나, 아비페르가 깜짝 놀라며 뒤돌아봤다. 펠리오가 퍽 재미 없단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무안해진 아비페르가 헛기침을 토했다.
“농담이었어요.”
“압니다.”
“넌 뭐하고 있었던 거야?”
카니스가 펠리오의 셔츠 중앙에 잡힌 주름을 가리켰다. 펠리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주름진 셔츠 자락을 손바닥으로 무심히 쓸었다.
“레오 재우고 나왔어.”
조금 전 펠리오가 나온 방은 레오니에가 지내는 손님방이었다. 옷에 남은 주름은 레오니에가 잠들 때까지 한 손으로 꼭 쥐면서 생긴 흔적이었다. 이제 아빠 셔츠를 쥐던 조막만 한 손에는 까만 사자 인형이 대신 자리했다. 평소 인형을 안고 자는 버릇이 없는 아이가 품고 잘 만큼 인형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지금 막 잠들었어.”
그러니 조용히 하라며 펠리오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으며 주의를 줬다.
“……여기 우리 집이거든?”
카니스는 어이가 없었다.
펠리오가 자기 딸 깬다고 집주인한테 조용히 하라는 꼴이 아주 그냥 제집에서 지내는 것처럼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이해해 줘. 영애가 공작님을 어찌나 그리워했다고.”
아비페르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늘 공작님 언제 오시느냐고 물었다니까요.”
“아이가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는요. 영애와 대화를 나누는 건 무척 즐거웠답니다.”
애늙은이를 상대하는 건 꽤 힘들지만, 이상할 만큼 대화가 잘 통해서 심심할 틈은 없었다. 꼭 또래 친구와 허울 없이 떠들고 노는 기분이었다.
“우리 강아지들도 자?”
대화를 듣고 있던 카니스도 자식들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당연히 자지.”
“그럼 가서 얼굴만…….”
“……보고 온답시고 뽀뽀하면서 깨우지 말고 어서 씻고 와.”
아내의 엄격한 명령에 카니스가 풀이 팍 죽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 펠리오는 어쩐지 카니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아이의 잠든 얼굴은 피로를 단번에 풀어 주는 명약이었다.
아비페르는 그사이 하녀에게 술상을 가져오라 시켰다. 카니스가 씻고 나올 즈음에 위스키 한 병과 함께 간단한 안주가 차려졌다. 세 어른은 술잔을 나누었다. 자연히 이야기 주제는 며칠 전 소탕한 마물 불법 거래 미수 사건이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네.”
카니스가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잔에 위스키를 쪼르르 부었다.
“부인 덕이 컸습니다.”
“제가 뭘 했나요.”
펠리오의 칭찬에 아비페르가 손사래를 치며 겸손을 부렸다.
“기껏해야 친정 창고 하나 빌려준 게 다인데.”
카니스와 레보오 기사단이 현장을 바로 기습할 수 있었던 건, 아비페르의 친정 가문 이름으로 대여한 물류 창고에서 숨어 상황을 살폈기 때문이다.
히르쿠스 남작이 조심한 건 헤스페리, 리네처럼 서부의 명문이나 북부와 연이 깊은 가문뿐이었다. 그러니 그들보다는 한미한 아비페르의 친정 가문까지 저들을 도울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만큼 남작이 높은 곳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를 지녔단 뜻이었다.
“여하튼 뒤처리하느라 바빴어.”
습격은 쉬웠는데 말이지, 카니스가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흉내를 냈다. 그가 오늘 늦게 온 것도 히르쿠스 남작이 저지른 만행을 정리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더욱이 봄철이라 상단이 바쁘게 돌아가는 탓에 피곤은 배가 되었다. 그래도 쓰레기 하나 치워 속은 후련하다는 게 진심이었다.
“헤스페리 후작님께서 한번 뵙고 싶다고 청하더라.”
“나중에 따로 연을 넣어 보지.”
“그래 주면 나야 고맙고.”
카니스가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어쨌건 처리는 다 했고? 죽였어?”
그러고는 북부로 몰아준 사냥감들의 안부를 물었다.
“보레오티 저택 감옥.”
“안 죽이고?”
난 바로 죽였는데, 카니스가 의외라며 중얼거렸다.
“재산 몰수와 북부 추방은 일단 해 뒀어.”
“빠르기도 하셔라…….”
아비페르가 그리 놀랍지 않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펠리오의 사냥 준비는 무척이나 철저했다. 그는 저들의 죄가 드러나기 무섭게 재산을 전부 빼앗고, 그들의 가족들은 북부에서 추방했다. 이 빠른 일처리가 가능했던 건, 루페가 월급 하나 믿고 밤 지새며 일한 덕이었다.
‘원래 자비가 없는 분이시지.’
술잔을 가볍게 홀짝인 아비페르가 무감한 얼굴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그는 안주로 나온 새우를 이상할 만큼 노려보고 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레오가 새우를 좋아하는데…….’라는, 아주 조금 바보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은 딸 바보가 다 되셨지만.’
아비페르는 못 들은 척했다.
어쨌건 검은 맹수는 본래 모두에게 평등하게 자비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펠리오가 조용히 읊조렸다.
“아직 한 놈 남았다.”
타바누스 백작.
“아아, 그 파리?”
카니스가 냉소를 금치 않았다.
지난 3년간, 선황 승하 후 새로 즉위한 황제가 정부를 황후로 올리겠다고 난리를 칠 때, 이에 반대하는 펠리오 옆에서 배짱 좋게 황제와 정부 편을 들었던 인간.
세 사람은 파리처럼 앵앵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3년 내내 펠리오 반대편에서 악을 썼으나, 결국 정부는 황비가 되는 선에서 황실은 귀족 의회와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타바누스 백작은 그대로 수도 저택에 숨어 지냈다.
그가 북부에 내려오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펠리오가 무서워서.
그리고 가주 없는 북부는 그의 장남인 무스카 타바누스가 돌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그딴 배짱이 나오나 했더니.”
빈정거리는 카니스의 입술 사이로 빠드득, 이갈리는 소리가 났다.
“백조 새끼가…….”
쾅! 하고 크게 내려친 테이블 위로, 으스러진 호두가 널브러졌다.
“……감히 서부를 건드려?”
분에 겨운 카니스는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모두에게 호감 받던 서글서글한 미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냥감을 코앞에 둔 미친개만 있었다. 손바닥에 박힌 호두 조각이 아픈 줄도 몰랐다.
비단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비페르가 현장에서 잡혔다던 황실 기사단을 언급했다.
“황실은 어쩌실 건가요?”
“그 기사 새끼들 지금 북부에 있지? 뭐 알아낸 거 있어?”
펠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황실 기사단 측에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자기들은 불 것이 없다며, 이 모든 건 자기들끼리 작당해서 벌인 짓이라며 같잖은 충성심을 보였다. 그중 몇몇은 심지어 혀를 깨물어 자진하려 했다. 심문하려 해도, 펠리오의 기에 눌려 기절하는 이까지 나왔다.
“황실이 개입한 건 틀림없지만…….”
과연 어떤 놈이 저질렀을까.
펠리오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가 하나를 금방 접었다.
“황실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는 건 황제뿐. 그러니 티그리아 황후는 당연히 제외지. 그분의 곧은 성정에 이딴 추잡한 짓을 벌일 리도 만무하고.”
그리고 손가락 하나가 또 접혔다.
“황제가 북부를 질투하는 게 한두 번이냐만은, 그래도 이런 걸 벌일 만큼 배짱이 두둑한 놈도 아니니…….”
남은 손가락은 하나였다.
황실 기사단을 움직일 힘은 없지만,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우시스 올로르.”
황태자의 정부였다가 황제의 애첩으로서 황비 자리를 꿰찬 붉은 백조.
“나 올로르 알아.”
푸른 수평선이 보이는 창밖을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보레오티 부녀는 단둘이 마차 타고 바닷가로 소풍을 가는 중이었다. 마차는 리네 가문의 것을 빌렸다. 보레오티의 마차는 너무 크고 까매서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목적지는 리네 가문이 소유한 조그만 해수욕장이었다. 사유지라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없고, 안락한 별장까지 갖추었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동안, 펠리오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레오니에에게 상세히 알려 주었다.
“아르데아 선생님이 그러셨어. 남부를 더럽히는 쓰레기래.”
“맞는 말이긴 한데, 아르데아가 너한테 그딴 말을 했다고?”
펠리오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요즘 레오니에 입이 점점 험해지는 것 같은데, 설마 그게 아르데아 탓이라면 크게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그럼 아빠가 바빴던 건 올로르 때문이야?”
“올로르 하나면 다행이지…….”
펠리오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낮게 깔았다.
곧 마차가 멈췄다. 먼저 내린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안아 내려 줬다. 사뿐히 땅에 발을 내린 레오니에는 짭짤한 소금기를 크게 들이켰다.
“아빠, 저거 봐.”
레오니에가 하늘 위를 가리켰다. 바다 위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떼 지어 날고 있었다. 한산한 바닷가에 인기척이 나타나자 갈매기들은 더욱 높이 날며 주위를 경계했다.
“새우 과자 던져 주고 싶다.”
“새우?”
“있어, 새우 까까…….”
말을 대충 돌린 레오니에가 모래사장 위에 발을 콕콕 찍었다.
“근데 아빠 이야기 들으니까, 굳이 내가 서부까지 갈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레오니에의 새하얀 원피스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활동하기 편하라고 하녀들이 땋아준 양 갈래가 생기발랄했다.
“아빠 나 엄청 걱정했구나?”
레오니에가 얄미울 만큼 히죽였다.
“……만에 하나가 있는 법이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는 그 만에 하나. 혹여 궁지에 몰린 먼지들이 레오니에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지 모른다는 최악을 염두에 뒀기에 아이를 서부로 내려보냈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 위에 모자 하나를 씌워 줬다. 갈대로 엮은 챙 넓은 모자였다.
레오니에가 간편한 차림인 것처럼, 펠리오도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새였다. 쇄골이 보일 만큼 넉넉한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발가락이 드러난 갈색 가죽 샌들까지. 거기다 앞머리도 정돈하지 않아 어딘가 방랑하는 젊은 청춘의 퇴폐미가 그윽했다. 옆에 레오니에만 없었다면, 그리고 하나하나 손수 챙겨 주는 모습만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아이 아빠라고 보지 않을 정도였다.
‘전에 튜닉 입은 거 봤을 때도 느꼈지만…….’
레오니에가 일전에 하얀 튜닉을 입고 있던 펠리오를 떠올렸다.
‘아빠는 하얀 거만 걸치면 야해지네.’
다른 사람들은 하얀색만 입으면 순수하고 깨끗해 보이는데, 펠리오는 도리어 그 반대였다. 레오니에는 그런 아빠가 무척 아까웠다. 펠리오가 아빠만 아니었다면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뻐했을 텐데. 레오니에한테 펠리오는 이제 소설의 남주인공보다, 가족이란 인식이 훨씬 강해졌다. 그림의 떡보다 못했다.
‘그러니 내가 아빠를 지켜야 해!’
너무 잘난 아빠를 둔 것도 딸 입장에선 피곤한 일이었다. 지난번 케레나 메레오카 영애 때처럼 괜한 것들이 꼬이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레오니에는 아무도 없는 해수욕장에서 홀로 주변을 경계했다.
“장난치지 말고. 다친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펠리오의 눈에는 레오니에가 장난치는 거로 보였다.
“그런 거 아냐! 지키는 거야.”
“뭐를?”
“아빠를 지키는 거야!”
레오니에가 씩씩하게 답했다.
‘……혼자만의 놀이인가?’
일전에 읽은 육아 서적에서, 어린아이들은 종종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이런저런 놀이를 한다고 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제 마음대로 설정해서 논다고들 하던데.
‘애는 아직 애군.’
펠리오는 크게 안도했다.
설마설마했던 레오니에가 그런 놀이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역시 동심은 억지로 키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정답이었다.
“어서 가자.”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린 펠리오는 별장으로 들어갔다. 포대기처럼 어깨에 탄 레오니에가 까르르 웃었다.
별장에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먼저 반겼다. 먼저 도착했던 리네 저택 사용인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해 둔 덕이었다. 레오니에가 코를 킁킁거리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배도 꼬르륵, 크게 울었다.
“땅 꺼지는 줄 알았네.”
펠리오가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도시락 바구니를 들었다.
“이 정도로 땅 안 꺼지거든?”
창피해진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이며 뒤를 따랐다.
부녀가 별장에 잠깐 들어간 사이, 해수욕장 한가운데 커다란 차양이 펼쳐졌다. 크게 펼친 돗자리 위에 올라간 레오니에는 눈 앞에 펼쳐진 푸른 경치에 푹 빠져 버렸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끼룩끼룩 갈매기 떼.
거기다 맛있는 도시락까지. 새우를 듬뿍 넣어 구운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문 레오니에가 행복에 겨워 눈을 질끈 감았다. 기쁨의 도리도리가 절로 나왔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참 값싼 천국이네.”
“흥, 아빠도 지금 웃고 있거든?”
“네가 하는 꼴이 웃겨서 그래.”
“내가 또 뭐!”
“그새 입에 새우 묻히고.”
그러나 손수 새우를 떼어 주는 펠리오도 분명 아까보다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레오니에와 함께 바다를 보며 숨을 고르는 이 순간이 무척 행복했다. 특히 음식을 열심히 먹는 레오니에의 모습이 가장 보기 좋았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우물우물 꿀떡 삼키는 모습엔 중독성이 있었다. 우연히 숲에서 마주친 다람쥐를 보는 기분이었다.
“으웅으웅…….”
레오니에가 도토리를 잔뜩 머금은 다람쥐 꼴로 뭐라고 웅얼거렸다.
“다 씹고 말해.”
하나도 못 알아들은 펠리오가 포도 주스를 따라 건넸다.
“그럼 이제 우리 집에 가?”
푸하, 하고 술 마시듯 잔을 비운 레오니에가 물었다. 마물 불법 거래를 몰래 꾸미던 나쁜 사람들을 잡았으니, 더는 서부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레오니에는 북부가 그리웠다.
“집에 가고 싶어.”
북부는 레오니에가 돌아갈 집이었다. 펠리오는 말없이 레오니에의 앞머리를 쓸었다. 크고 두꺼운 손가락에 갈라지는 앞머리가 점점 어수선해졌다.
“그런데 힘들겠지?”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힐끗 쳐다봤다. 돗자리 위 쪼그마한 발가락이 꼬물거렸다. 펠리오가 전해 준 상황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이를 알아챈 레오니에는 북부로 가자고 고집부릴 수 없었다. 물론 고집부릴 생각도 없었다.
“……그래.”
펠리오가 복잡한 심경을 담아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거기까지 눈치챈 딸이 기특하고 대견한 한편, 제 고집을 참고 아빠를 먼저 생각해 주는 게 미안했다.
펠리오의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도로 갈 거다.”
* * *
“수도 저택에 연락해 두었습니다.”
다음 날.
눈 밑이 퀭하다 못해 시커멓게 변한 루페가 핼쑥한 상태로 보고했다.
“일주일 뒤에 내려가신단 말씀을 전해 두었습니다. 집사가 괜찮다고 하더군요.”
정작 이를 보고하는 루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북부에서 일을 대충 마무리 짓고 늦게 내려온 그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저씨, 괜찮아요?”
얼마나 안색이 안 좋은지, 레오니에가 저를 잡고 기대서라고 말할 정도였다. 어서 괘념치 말고 잡으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루페가 어색한 미소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빠, 진짜 루페 아저씨 그만 좀 부려먹어! 이러다 사람 잡겠어!”
“그거 나 때문 아닌데?”
“아빠가 아저씨 상사잖아!”
“아가씨, 저는 괜찮습니다.”
루페가 콜록콜록 기침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레오니에는 애써 미소 짓는 루페가 짠했다. 상사 잘못 만나 고생하는 처지가 또 다른 기억 속 저와 무척이나 닮아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번 일만 끝나면 월급 세 배에 휴가 한 달을 받거든요.”
그 탓에 무리해서 몸이 안 좋은 거라며 루페가 웃었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듯, 퀭한 얼굴 가운데 눈동자만큼은 총명하게 반짝였다.
“속물…….”
레오니에가 어깨를 휙 치우며 동정심도 치웠다.
“인간은 본디 다 속물입니다.”
루페가 엄지와 검지를 살살 비비며 돈의 매력을 자랑했다.
‘그래도 좀 부럽다.’
레오니에는 한편으로는 루페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월급 세 배에 휴가가 한 달이라니. 저 같아도 그런 조건이었다면 자진해서 야근했을 터다. 거기다 루페의 월급은 또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 레오니에는 이전에 들었던 루페의 연봉을 떠올렸다. 조그마한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루페가 펠리오에게 작게 접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
그 자리에서 쪽지를 펼쳐 본 펠리오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아주 잠깐이나마 움직인 눈동자가 레오니에를 스쳐 갔다.
“뭔데? 고백 편지?”
레오니에가 농담처럼 물었다.
“……됐고, 가자.”
쪽지를 송곳니로 태워 버린 뒤, 펠리오는 레오니에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바다를 품은 리네 영지를 등지자 곧 울창한 숲길이 나타났다. 레오니에가 창문을 열고 싶다고 하니, 펠리오가 살짝 열어 바람을 쐬게 해 주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서부답게 녹음이 울창하고 공기가 좋았다.
“꼭 소풍 온 것 같아.”
“창문 밖으로 너무 얼굴 내밀지 마.”
“알았어.”
마차가 달리는 동안, 펠리오는 가지고 온 서류를 살폈다. 레오니에는 일하는 아빠와 창밖의 풍경을 번갈아 구경하면서 자작곡을 불렀다.
“검은 맹수 가족이 살아요.”
엄마랑 아빠랑 아기가 오순도순.
새하얀 눈 속을 어슬렁어슬렁.
맹수들은 산맥 뒤로 폴짝.
“산맥 뒤에는…….”
즐겁게 흥얼거리던 레오니에가 일순 노래를 멈췄다. 아닌 척 조용히 듣고 있던 펠리오도 덩달아 서류에서 눈을 떼었다.
“아빠.”
어느새 숲을 벗어난 마차는 헤스페리 영지에 들어섰다. 헤스페리 영지는 무인의 성지라 불리는 것치고는 무척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레오니에의 송곳니는 점점 가까워지는 범상찮은 기운을 기민하게 감지했다.
“뭐가 있어…….”
솜털 바짝 세운 아기 맹수가 아빠 옆에 찰싹 붙었다. 레오니에는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펠리오가 다과회를 열었을 때, 승마장 뒤에서 오르티오 후작의 기척을 느꼈을 때 딱 이랬다.
마차가 멈추고, 펠리오가 창밖에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레보오 기사들이다.”
그곳엔 새하얀 정복을 갖춰 입은 레보오 기사들이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까만 정복을 입은 글라디고 기사들과 무척이나 대조되었다.
“……저 사람들 때문이 아니야.”
레오니에가 반박했다. 레보오 기사단을 무시하는 건 아니나, 고작 기사들 때문에 저의 송곳니가 예민하게 반응했을 리가 없었다. 맹수의 송곳니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당연하지.”
펠리오가 기사단 뒤를 가리켰다.
“네가 반응한 건…….”
레보오 기사단 뒤에 서 있는 거구의 사내.
“……바로 저 사람이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찮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레오니에는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며 조용히 옷자락을 쥐었다. 술렁거리는 송곳니가 낯선 기척을 알아채기 무섭게 잠잠해졌다.
서부의 주인. 또 다른 맹수.
헤스페리 후작이었다.
“서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치 호랑이 한 마리가 두 발로 벌떡 선 것처럼, 헤스페리 후작은 어마어마한 풍채와 위압감을 자랑했다. 걸걸한 목소리가 꼭 바닥에 날카로운 무기가 갈리는 소리 같았다.
“분에 넘치는 인사로군요.”
펠리오는 레보오 기사단을 가볍게 눈짓했다.
“천하의 검은 맹수를 맞이하는 건데, 우리 레보오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얗게 센 머리를 바싹 뒤로 넘긴 후작의 이마가 번쩍거렸다.
‘와아…….’
펠리오의 다리에 찰싹 붙은 채, 레오니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헤스페리 후작을 응시했다. 어찌나 큰지 올려다보려고 뒤로 젖힌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아빠가 엄청 작아 보여.’
소설 주인공답게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진 펠리오마저 후작 앞에서는 아기자기했다. 레오니에의 얼굴을 다 가리고도 몇 마디가 남던 큼지막한 펠리오의 손이, 헤스페리 후작과 악수하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거기다 헤스페리 후작의 험상궂은 이목구비가 펠리오 뺨 칠 수준이었다. 솔직히 인상만 보면 헤스페리 후작이 한 수 먹고 들어갈 정도였다.
“오시느라 힘들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감탄하던 중에, 레오니에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그늘이 드리웠다.
“보레오티 영애.”
헤스페리 후작이 근엄한 얼굴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레오니에에게 미소 지었다. 무릎까지 굽혀 큰 몸을 낮췄는데도, 여전히 시선은 후작이 훨씬 위였다.
“……하나도요.”
레오니에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공손히 인사했다. 오늘은 원피스 대신 짧은 바지를 입은 터라, 레오니에는 왼손을 뒤로 넘기고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꼭 어른인 척하는 사내아이 같았다.
“레오니에 보레오티입니다. 서부의 주인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허허…….”
헤스페리 후작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어린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보니, 어린 시절의 펠리오가 자연히 떠올랐다. 두 부녀는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새초롬히 올라간 눈매라든가, 말하지 않을 때면 꾹 다물린 일자 입술이라든지. 거기에 사람의 내면마저 꿰뚫어 볼 것 같은 검은 눈동자도.
“서부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에요. 여기까지 오는 내내 푸른 경치를 구경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야무지고 재잘거리는 입담은 제 아비와 판연히 달랐다. 자세히 보니 인상도 조금 더 부드럽고 둥글었다. 예쁘장하게 웃는 것도 펠리오한테선 전혀 볼 수 없었던 면모였다.
후작이 입꼬리를 한껏 위로 올렸다.
‘사랑을 듬뿍 받았군.’
헤스페리 후작이 접한 소문에는 보레오티 영애가 공작 가문에서 썩 사랑받지 못하고, 어린 영애가 많이 부족하고 뒤떨어진다는 악의 담긴 내용도 있었다.
물론 그것들을 다 믿진 않았다. 그래도 펠리오의 성정상,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거란 합리적 추론은 할 수 있었다. 현 공작이 선대 부부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헤스페리 후작이 직접 두 눈으로 본 보레오티 부녀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아이는 무척 야무지고 당돌했다. 크고 낯선 어른들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말 한마디 실수도 없이 재잘거렸다. 잘 오른 살집과 차려입은 옷은 누가 봐도 사랑받고 자라는 아이였다.
거기다 똑바르게 인사하는 어린 딸을 흐뭇한 얼굴로 뒤에서 바라보던 펠리오는 더할 나위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작은 순간이나마 자신이 알던 ‘그’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주위에 있던 레보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떠들지는 않아도 맹수 부녀를 힐끔거리는 눈빛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좋을 때지.’
헤스페리 후작이 쓸쓸한 미소를 수염 아래 감추었다.
‘아버지, 이거 보세요!’
그에게도 레오니에처럼 작고 당돌했던 딸이 있었다. 이 세상 무엇과 견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후작이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서부 헤스페리 후작의 저택은 딱 필요한 것만 갖춘, 여백의 미가 돋보였다. 화려한 예술품이나 조각품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긴 했지만, 레오니에가 지금껏 방문한 귀족 저택 중에서 가장 소박했다. 그러나 저택 크기만큼은 보레오티에 견주어도 될 정도였다.
헤스페리 후작과 함께 들어간 곳은 그의 집무실이었다.
“영애께선 저와 함께 가실까요?”
헤스페리 후작 옆을 계속 뒤따르던 남자가 레오니에를 따로 불렀다.
“영애껜 재미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헤스페리 후작도 그러는 게 좋겠다며 싱긋 웃었다. 그는 레오니에가 이곳에서 지루해할 거라 생각했다.
“아빠.”
레오니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펠리오를 바라봤다.
“오래 걸려?”
“아마도.”
“으음, 그럼 나중에 데리러 와. 알았지?”
레오니에는 순순히 남자의 곁으로 가 손을 잡았다. 남자는 상냥한 인상과 다르게 무척 거칠고 단단한 손을 지니었다.
“자면 두고 간다.”
“업고 가!”
레오니에가 밉지 않게 펠리오를 흘겨봤다. 펠리오가 피식 웃으며 다녀오라고 눈짓했다. 집무실을 나온 레오니에는 아주 조금 빈정이 상한 상태였다.
‘이럴 거면 날 처음부터 따로 데려가지.’
집무실까지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 나오는 건 퍽 귀찮은 일이었다.
“걷는 것이 불편하시면 안아드릴까요?”
“제 발로 걸을래요.”
아이 취급이 여전히 불편한 레오니에는 남자의 손을 잡은 채 씩씩하게 걸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예요?”
“저는 후작님을 보필하는 비서입니다.”
자신을 이벡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편하게 부르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원래는 기사지요?”
레오니에의 물음에 이벡스가 걸음을 멈췄다.
“손이 익숙해서요.”
레오니에가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기사 언니 오빠들 손도 이렇게나 거칠고 단단했다. 펠리오도 그랬다. 이벡스의 손은 검을 쥐는 사람의 흔적이 가득했다.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이벡스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레보오 기사들처럼 정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기사처럼 보이는 차림새는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만으로도 알 수 있나요?”
“그리고 아저씨 근육도!”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레오니에가 까만 눈을 초롱초롱 반짝였다.
“기사들 근육이랑 비슷해요! 어깨가 넓고, 허벅지 근육이 무척 딴딴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를 그저 그런 꼬마로 보시면 곤란해요.”
으스대는 아이의 말투에 이벡스가 손등으로 웃음을 감추었다.
“여깁니다.”
이곳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이벡스가 말했다.
“누가 쓰는 방인데요?”
“지금은 쓰지 않습니다.”
“그치만…….”
방을 두리번거리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에 놓인 가구들이나 물건들은 한눈에 보아도 손때가 가득했다. 거기다 청소도 말끔히 되어 있어 먼지 한 톨 없었다.
레오니에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아가씨의 방이었습니다.”
책장을 구경하던 레오니에는 순간 가슴이 저릿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고개를 올리자, 어느새 이벡스가 레오니에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황실로 가시기 전까지.”
이벡스는 책장에 진열된 책들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쓰다듬었다. 누군가의 흔적이 가득 담긴 물건들을 살피는 그의 시선이 아련하다 못해 아파 보였다.
“그분께서 지내셨던 방입니다.”
이곳은 티그리아 헤스페리 벨리우스 황후가 결혼 전까지 머물렀던 방이었다.
* * *
펠리오와 헤스페리 후작의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마물 불법 거래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 직접 마물 포획에 참여하진 않아도 뒤에서 은근히 도움을 준 자들도 찾아내 처벌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면 다행이겠으나, 이번 사건의 배후에 황실이 연관되었던 증거가 너무도 뚜렷하다 보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우리 북부는 이 세 가문을 추방하고 재산은 몰수할 겁니다. 나머지들은 범죄에 공여한 정도를 따져 벌금을 내릴 예정이고요.”
하나 북부는, 펠리오는 그딴 게 전혀 없었다.
“또, 아직 남은 한 놈을 잡으러 수도로 내려갈 겁니다.”
펠리오는 보레오티란 이름 아래 이번 사건과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하고, 보란 듯이 연루된 황실을 크게 압박할 계획이었다. 가뜩이나 황실을 벼르던 와중에 아주 잘 걸렸다고 여기던 차였다.
“후작께선 어쩌실 겁니까.”
자신의 계획을 밝힌 펠리오가 헤스페리 후작에게 물었다.
“우리 쪽도 아마 비슷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후작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손에 들린 종이에는 이번 사건에 연루된 서부 귀족 명단이 적혀 있었다. 헤스페리 후작에겐 너무도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특히 가장 위에 적힌 히르쿠스 남작은 그가 제법 믿었던 가신이기도 했다.
“인생이란 참…….”
헤스페리 후작은 헛숨만 나왔다.
“……알 수 없는 것이로군요.”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해도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참담한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서부를 지켰고, 그것이 옳았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선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거다. 헤스페리 후작은 모든 것이 개탄스러웠다. 소신껏 달렸던 과거가 후회로 바뀌어 몰아닥쳤다.
‘……아무래도.’
펠리오가 그런 후작을 힐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관련된 건 아닌 모양이군.’
이번 사건을 조사하면서, 펠리오는 황제보다도 헤스페리 후작을 가장 많이 의심했다. 혹시라도 그가 이 모든 걸 알고도 눈감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상당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이번 일에 연관된 서부 출신 귀족이 많았고, 빼돌린 새끼 마물들을 경매할 예정이었던 장소 역시 서부 지역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헤스페리 후작에게선 거짓말의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선 죄책감과 후회만이 가득했다.
“‘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아.’”
그런 후작을 묵묵히 바라보던 펠리오가 누군가의 명언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앞만 볼뿐이지.’”
뜬금없는 발언에 헤스페리 후작이 눈만 끔뻑거렸다. 펠리오가 일하는 중에 사담을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는 눈에 띄게 웃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면 공포심이 생길 정도로 안 어울렸다.
“레오가 한 말입니다.”
펠리오가 명언의 주인을 밝혔다.
“레오, 라면…….”
헤스페리 후작이 ‘레오’란 애칭이 ‘레오니에’란 이름에서 따왔음을, 그리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이 보레오티 영애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저 인간이 애칭을 입에 담아?’
조금 전까지 우울감에 사로잡혔던 후작은 다른 의미로 생기를 되찾았다. 마중 나갔을 때 본 맹수 부녀가 서로 친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천하의 펠리오가 누군가를 애칭으로 부른다는 건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은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한 하루였다.
“과거에 연연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펠리오의 한마디가 잠시 현실을 망각하던 헤스페리 후작을 도로 데려왔다.
참으로 냉정한 조언이었다. 헤스페리 후작의 과거를 비난하면서도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며 따끔하게 지적했다.
“분명 후작 당신께선 실수가 좀 있었지요.”
기사란 명예에 치중해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건 아주 큰 잘못이었다. 특히 하나뿐인 딸을 그 머저리 황태자에게 시집보낸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이었다. 이를 들었던 당시의 펠리오도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으니 말이다.
“위로를 바라지 마십시오.”
괜찮다는 간단한 한마디를 건네줄 만큼, 펠리오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후작은 잘못을 알아차리고 후회할 만큼의 인성은 지니었다. 적어도 그가 쓰레기는 아니란 소리였다.
“그렇다고 과거를 잊으란 뜻은 아닙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 레오니에와, 과거를 후회하는 헤스페리 후작은 서로 상황이 달랐다. 레오니에는 부당한 학대와 배 굶주리는 곤궁을 이유 없이 겪어야 했다. 반면 헤스페리 후작은 어긋난 애정과 판단으로 소중한 딸을 황실에 보내어 뒤늦게 후회하고 말았다.
하나 펠리오는 두 사람이 앞으로 선택해야 할 길은 같다고 생각했다.
“앞을 보십시오.”
되돌아오지도 않을 과거에 연연할 여유 따윈 두 사람에게 없었다. 기특한 애늙은이 레오니에는 일찌감치 이 진리를 깨우치고 실천 중이었다. 이토록 어린아이도 앞을 바라보는데, 다 큰 어른이 못 할 리 만무했다.
‘오히려 어른이라 못 하지.’
나이를 먹을수록 생기는 미련이야말로 늙어 가는 인간의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생각을 마친 펠리오는 후작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헤스페리 후작은 조금 전보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는 펠리오가 한 말을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펠리오는 묵묵히 기다려 줬다.
사실, 그는 여태껏 헤스페리 후작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애지중지하던 딸을 자기 손으로 직접 황실에 시집 보내다니. 그 후에 헤스페리 후작이 당시 황태자였던 지금의 황제가 보여 준 만행에 처절하게 후회하는 모습에도 기어코 동정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저지른 어리석은 행보의 결과려니, 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껏 느끼지 않았던 감정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연민이었다.
‘나도 아빠라서 그런가.’
만일 저와 레오니에가 헤스페리 부녀였다면, 그렇게 문득 떠오른 ‘만일’ 하나에 펠리오는 처음으로 헤스페리 후작을 동정하고 연민했다. 레오니에를 키우면서 펠리오 역시 많이 변해 갔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남자…….’
펠리오는 아까 레오니에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던 후작의 보좌관을 떠올렸다. 이벡스, 남자의 이름을 떠올린 펠리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과연 어떤 기분일까.
‘후작 스스로 내리는 벌인가?’
제 딸을 황실에 시집보내기 위해 억지로 떨어트렸던 딸의 유일한 정인을, 지금껏 제 옆에 두고 다닌다는 건 분명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벡스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어쨌건 펠리오는 중요한 배움 하나를 터득했다.
‘저렇게는 되지 말자.’
나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소중한 아이의 미래를 진창으로 떨어트리지 말자고. 그리고 저렇게 후회하지 말자고. 펠리오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 * *
펠리오가 헤스페리 후작과 이야기를 끝냈을 때, 레오니에는 티그리아 황후가 썼던 방에서 기어코 낮잠을 자 버렸다.
“으어어어…….”
약속대로 잠든 레오니에를 업고 나온 펠리오가 괴이한 잠꼬대를 중얼거리는 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어? 아빠?”
“푹 잤냐.”
“아따, 침대 좋더라.”
“‘아따’?”
그건 또 어디서 배운 말인지, 펠리오가 혀를 끌끌 차며 레오니에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대충 훔쳤다.
“하아아아…….”
졸린 눈을 끔뻑이던 레오니에가 큼지막하게 하품했다.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고 있는데, 펠리오 뒤에서 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헤스페리 후작과 이벡스를 비롯한 후작가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레오니에는 그대로 펠리오의 어깨에 얼굴을 숨겼다.
“……이 아빠야, 사람이 있다고 말을 했어야지!”
창피한 몰골을 보인 레오니에가 입술을 앙다문 채 으르렁거렸다. 정작 펠리오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삐친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어깨를 앙앙 깨물었다. 탄탄한 승모근이 잘 다져진 어깨는 깨무는 맛이 있었다.
‘좋은데?’
레오니에는 화난 것도 잊은 채 최선을 다해 근육 욕구를 풀었다. 속에 난 열불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마차에 오르기 전, 펠리오가 헤스페리 후작에게 인사했다.
“다음에는 유벤이랑 칼라드 녀석들도 한 번 데려오십시오. 모노 꼬맹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글라디고 중진 기사를 기억해 주셔서 영광이군요.”
“일이 잘 마무리되면 레보오와 글라디고끼리 합동 훈련이나 하지요.”
“기대 하겠습니다.”
헤스페리 후작은 레오니에한테도 인사했다.
“영애께서도 조심히 가십시오.”
레오니에는 펠리오 품에 안긴 채 꾸벅 인사했다.
“후작님도 안녕히 계세요. 오늘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대뜸 후작에게 내밀었다. 엉겁결에 손을 내민 후작이 받은 건 딸기 우유 사탕이었다.
“기사 아저씨한테도 줄게요.”
레오니에는 오늘 하루 제 곁을 지켜 준 이벡스에게도 사탕을 건넸다.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예? 아, 예에…….”
딱히 무언가를 크게 해 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벡스로서는 의외의 선물이었다.
“너무 자기 자신을 탓하지 마요.”
사탕을 멀끔히 바라보던 이벡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급히 바라본 레오니에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따스한 눈길을 하고 있었다.
“후작님은 그래도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잖아요.”
제 할 말을 다 마친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말했다.
“가자.”
맹수 부녀가 마차에 올랐다. 어느새 태양은 서쪽으로 제법 기울어져 있었다. 여름이 가까워진 탓에 아직은 푸른 하늘이 선명했다. 그러나 곧 주홍빛 노을이 어스름한 땅거미를 칠 예정이었다.
마차가 출발하고.
“아까 그건 뭔데?”
창틀에 기댄 팔로 턱을 괸 채, 펠리오가 조금 전 상황을 물었다. 레오니에가 후작과 기사에게 사탕을 준 게 퍽 신기했던 탓이다. 아이는 어지간히 마음에 든 사람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사탕을 나눠 주지 않는다. 거기다 조금 전 레오니에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이벡스 아저씨.”
레오니에가 사탕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황후 폐하 애인이었잖아.”
“……어떻게 알았어?”
“나 아까 황후 폐하 방에 있었거든? 그때 엄청 애잔하게 방을 둘러보더라.”
애한테까지 들켰냐, 펠리오는 혀를 짧게 찼다. 보아하니 아직도 미련이 남아 헤스페리 저택에 머무는 듯했다. 그러니 후작이 자신을 곁에 두어도 묵묵히 있는 걸 테지. 펠리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라리 황후 폐하가 내 친부모처럼 사랑의 도피를 떠났어야 했어.”
“넌 하지 마라.”
펠리오가 바로 끼어들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만 아니라면 뭐, 결혼은 몰라도 애 생기는 건 허락해 주마.”
“와아…….”
레오니에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설마 저런 미친 소리를 아빠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보통 자식이 저 정도 사고를 치면 뒷목 잡고 쓰러지는 게 정상일 텐데.
“후계만 이어. 결혼은 심사숙고하고.”
“이 아빠 은근 최악이네…….”
뭐라 한마디 하려던 레오니에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문제는 계속 잡고 따져 봤자 제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역시 하룻밤 전에 각서 쓰는 인기쟁이 소설 남주인공은 뭐가 달라도 크게 달랐다.
“하지만 황후 폐하랑 이벡스 아저씨였다면 도피를 해도 잘 살았을 것 같아.”
“그랬겠지.”
듣다 보니 펠리오도 긍정하게 됐다.
“그래서 아까 사탕 주면서 그런 말을 한 거냐.”
“불쌍하잖아.”
“뭐가?”
“세 사람 다.”
헤스페리 후작도, 이벡스도, 티그리아 황후도.
‘그중 가장 불쌍한 건 황후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기껏 나라를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남편을 바라봤음에도 돌아온 건 책임감 없는 바람기뿐이었다.
‘역시 직접 보니 슬프네…….’
레오니에가 입 안에서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소설에선 펠리오와 바리아의 연애에 비중을 크게 둔 탓에 눈에 띄진 않았지만, 독자들에게 커다란 지지를 받던 또 다른 연애 노선 하나가 있었다. 바로 티그리아 황후와 이벡스의 비극적 사랑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써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독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레오니에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인생이란 게 뭔지.”
마차 의자에 앉아 붕 뜬 짧은 다리가 맥없이 흔들거렸다. 겨우 익숙해졌나, 싶은 제 두 다리가 다시 낯설었다.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멀쩡히 잘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섯 살 고아 ‘니아’가 된 것도. 비쩍 메마르고 흉터가 가득하던 ‘니아’가 사랑 듬뿍 받는 공작 영애 ‘레오니에’가 된 것도.
인생이란 참 예측 불가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묵묵히 듣고 있다기보단, 애늙은이의 심오한 인생 진리에 저도 모르게 푹 빠져 감탄하고 있었다. 가끔 보면 아이의 시선은 어른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이 내가 근육 변태를 키우는 아빠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결혼도 아직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는데, 충동에 휘말려 입양한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성심성의껏 키우게 될 줄은 펠리오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의 사랑스러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펠리오는 그런 지금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제 진심을 아이에게 굳이 드러낼 생각도 없었다. 그러기엔 펠리오도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그도 아주 조금이나마 수줍음을 탔다.
“이벡스 경에겐 성희롱 안 했지?”
그러니 평소처럼 짓궂은 농담으로 아이를 향한 사랑을 표현했다.
“……하여튼 진지할 틈을 안 줘요.”
살짝 찔리는 구석이 있는 레오니에가 투덜거리며 솜 주먹을 펠리오에게 날렸다.
* * *
보레오티 부녀가 수도로 올라갈 날이 정해졌다. 레오니에는 그사이 서부를 떠나기 전에 광장에 가서 쇼핑을 크게 했다. 손수 하나하나 고른 물건들은 북부에 있는 지인들에게 보낼 선물들이었다.
“이건 카라 할머니 거, 이건 펠리카 거…….”
북부 저택에 있는 사람들부터 시작해, 유일한 유아 친구인 플로무스와 오아시스 같은 차 모임 귀부인들 것도 빠짐없이 챙겼다.
‘빼먹은 사람 없겠지?’
레오니에는 수첩에 적어 둔 선물 받을 사람 명단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너보다 나은데?”
뒤에서 구경하던 카니스가 펠리오의 옆구리를 팔뚝으로 쿡쿡 찔렀다.
“넌 저런 섬세함이 없잖아.”
“너도 없어.”
반대편 소파에서 책을 읽던 아비페르가 사돈 남 말 한다며 피식했다.
“여보는 그럴 때 내 편 들어주면 안 돼?”
“두 사람 다 영애 좀 봐요.”
아비페르 눈에는 둘보다 레오니에가 몇 배나 훌륭하고 대견했다.
남의 집 소파에 뻔뻔히 누워 쉬고 있던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힐끔 바라봤다. 이것저것 챙기면서 사용인들에게 부족한 걸 챙기게 하는 모습이 확실히 기특했다.
“보레오티 영애께선 안주인 몫을 톡톡히 하시네.”
카니스도 그런 레오니에가 참으로 신기했다. 우피클라보다 고작 한 살 많으면서 저렇게 차이가 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 닮아서 그래.”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킨 펠리오가 레오니에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언니, 이거 봐요!”
“피누도! 피누도!”
자세히 보니 레오니에는 선물을 챙기는 동시에 리네 남매도 옆에 낀 채 돌보고 있었다. 우피클라와 피누는 레오니에를 따라 공책에 글자 쓰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야, 너 친구 많다…….”
레오니에는 우피클라가 공책에 쓴 이름들을 보며 감탄했다.
“저 친구 많아요!”
우피클라가 큼지막한 글씨로 적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피누도 누나 따라 자기가 쓴 정체불명의 글씨를 씩씩하게 외쳤다.
“피누 너, 시끄러워.”
귀청을 찌르는 남동생이 귀찮아진 우피클라가 어휴, 어휴 한숨 쉬며 투덜거렸다.
“애가 아직 어려서 그래.”
레오니에가 이해하라며 둘을 차례차례 토닥였다.
“……네 딸 진짜 일곱 살 맞지?”
카니스가 펠리오의 귓가에 조심히 물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 물음인지 모른다. 아이를 달래는 모양새가 경력 풍부한 유모 뺨 칠 정도였다. 펠리오는 징그러우니 얼굴 치우라며 무심하게 밀쳐냈다.
“저는요, 서부랑 수도에 친구가 있어요.”
우피클라는 나름 인기쟁이였다. 여우처럼 귀여운 인상도 한몫했지만, 제국에서 가장 큰 무역항과 상단을 지닌 리네 가문의 후계자란 배경이 가장 주된 이유였다.
“아빠가요, 친구는 골라 사귀어야 한대요.”
“틀린 말은 아니지.”
“그리고 엄마는요, 그런 거 티 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흐음…….”
레오니에가 어른들이 모여 있는 소파 자리를 힐끔 돌아봤다. 아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리네 백작 부부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역시 아빠 지인…….’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얘는 이제 친구 아니에요.”
열심히 친구 자랑하던 우피클라가 어느 이름 위에 빨간 크레용으로 직직 선을 그었다.
“왜? 누군데?”
“헤디요.”
헤디는 히에이나 백작 가문의 영식이었다. 그런데 우피클라는 헤디가 무척 좋다고 했다. 맛있는 간식을 종종 가져와서 함께 먹는다고 했다.
“헤디 형아!”
심지어 피누도 활짝 웃으며 아는 척했다.
“그런데 왜 친구 안 해?”
“헤디는 착하고 좋아요. 하지만 얘 누나가 싫어요.”
“왜?”
우피클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싫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무언가 싫은 기억이라도 떠올린 듯했다.
“제가 옛날에 공작님 좋아했잖아요…….”
“옛날…….”
“옛날…….”
조숙한 딸아이의 단어 선택에 카니스와 아비페르가 웃음을 꾹 참았다. 여섯 살 꼬맹이가 말하는 ‘옛날’이래 봐야 기껏해야 몇 달도 채 되지 않았다. 펠리오도 우피클라가 귀여웠는지 입가를 느슨히 풀었다.
“근데 얘 누나도 공작님 좋아하거든요? 예전에 저보고 비웃었어요.”
“뭐라고?”
“하찮다고요.”
지켜보던 카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싱글벙글 웃음이 만개하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덩달아 열 받은 아비페르는 레보오의 미친개가 날뛰려고 해도 크게 재재하지 않았다.
“아서라.”
펠리오가 애들 이야기에 끼어들지 말라며 흥분한 친구를 소파에 던지듯 앉혔다. 이야기를 들은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꼈다.
“별 시답잖은 게 또 있네.”
레오니에가 피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지?’라고 물었다. 피누는 멋도 모르는 채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까르륵거리는 웃음은 덤이었다.
“걘 몇 살인데.”
“몰라요. 어른은 아니에요.”
“야, 그럼 똑같이 애네.”
레오니에는 다음에 또 그쪽이 시비를 걸면 한 대 패라고 조언했다.
“별거 아닌 것들이 꼭 그렇게 시비를 걸어요.”
좁만 한 것들이 말이야, 레오니에가 마지막 선물 명단을 확인한 뒤에 하녀들에게 넘기었다. 리네 백작 하녀들이 입술을 꾸욱 깨문 채 서둘러 선물 꾸러미를 옮겼다. 그들도 레오니에와 우피클라의 대화가 웃겨 죽는 참이었다.
“근데…….”
우피클라가 우물거렸다.
“엄마가, 사람은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요?”
“몰래 패.”
애들끼리 패싸움하는 건 암묵적으로 용납되는 성장 과정이라며 레오니에가 일부러 말을 어렵게 풀어 썼다. 아니나 다를까, 우피클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대신 다이다이다? 서로 한 명씩 나와서 패는 거야.”
“네!”
“좋아, 역시 넌 내 수제자다.”
레오니에가 흐뭇한 얼굴로 주먹을 내밀었다. 우피클라가 이전에 배운 대로 주먹 쥔 손을 내밀어 콩, 하고 부딪혔다.
“나도오오!”
누나들 틈에 끼어든 피누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곧 아이들은 무어라 재잘거리더니 정원에 나가 놀다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
카니스와 아비페르의 원망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은 펠리오가 뻔뻔할 만큼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 애가 틀린 말 했나?”
솔직한 심정으로, 펠리오는 조금 전 레오니에가 말한 지론에 아주 크게 공감했다. 세상엔 매가 약인 것들이 분명 있었다.
“난 애들 빼고는 다 패.”
“거 참 신사 같은 깡패네.”
“공작님. 그래도 동심을…….”
아비페르는 레오니에와 대화를 나눌 때면 꼭 친구와 수다 떠는 것처럼 즐겁지만, 가끔은 아이의 동심이 너무 안 보여서 걱정이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펠리오라고 그런 걱정을 안 했을까. 오죽하면 레오니에의 동심을 길러보겠다며 이것저것 시도하고 회유했었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펠리오가 도달한 정답은 ‘방임’이었다.
억지로 뭐든 시도할수록 레오니에의 반발은 거세졌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큰 효과를 보였다.
“저 정도면 흘러넘쳐.”
레오니에는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충분히 아이다웠다.
“메마른 게 아니고?”
거의 가뭄 수준이라며 카니스가 반박했다.
“레오가 너무 똑똑하고 야무지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다.”
“이야, 너……!”
카니스는 드디어 펠리오가 자식 바보의 세계로 건너왔음을 확신했다. 어느 때보다 저의 친우에게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마침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펠리오는 레지나를 떠올렸다. 모두의 눈을 속이고 사랑의 도피를 떠났던 사촌 누이는 레오니에를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동심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홀로 남은 아이가 어떤 고생을 하고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펠리오는 동심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 펠리오가 툭툭,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무심히 두드렸다. 생각이 깊어지는지 미간에 패인 주름이 점점 짙어졌다.
‘그 방랑 기사.’
이 모든 일의 원흉.
애초에 정말 기사였는지조차 의문스러운 그 남자.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친부로 추정되는 남자를 오랫동안 머릿속에 담았다.
* * *
며칠 후.
보레오티 부녀가 수도로 올라가는 날이 밝았다.
“하아암…….”
아침 일찍 일어난 레오니에가 입이 찢어질 정도로 하품을 크게 했다. 옆에 있던 펠리오가 정신 차리라며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레오.”
“으응?”
“너 저거랑 똑같다.”
펠리오가 마차를 가리켰다. 웅장한 검은색 마차 문짝에 새겨진 보레오티 가문의 문장 속 사자도, 레오니에한테 지지 않겠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린 채 포효하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시비야, 진짜……!”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레오니에가 짜증을 내면서 펠리오의 다리에 몸을 기댔다. 나 졸려 죽겠으니 어서 안으라는 뜻이었다. 펠리오는 별말 없이 아이의 어리광을 선뜻 받아 주었다.
“토닥토닥도 해 줘…….”
편한 자세를 찾은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어깨에 턱을 괴며 흠냐흠냐, 입맛을 다졌다. 곧 크고 단단한 무언가가 조심조심 등을 어루만졌다.
“그간 신세 졌다.”
딸아이 잠투정을 들어주면서, 펠리오가 카니스와 아비페르에게 인사했다.
“너도 애 아빠 다 됐구나.”
감격에 겨운 카니스가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며 주책을 부렸다. 옆에 있던 아비페르가 그런 남편을 주책이라며 흘겨봤지만, 저 역시도 매번 볼 때마다 놀라긴 했다.
“부족한 건 없었나 걱정이네요.”
“부인께선 충분히 잘해 주셨습니다.”
“야, 그럼 나는?”
카니스가 서운하다며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만한 게, 마물 불법 거래 증거를 현장에서 확보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지. 창고에 갇혀 있던 새끼 마물들을 글라디고 기사들과 함께 북부까지 몰래 이송하느라 몇 날 며칠을 고생했지. 그 덕에 서부가 큰 화를 면하긴 했지만, 그래도 서운하긴 했다.
물론 펠리오가 카니스의 노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크게 갚으마.”
펠리오가 덧붙인 진심 어린 한마디에 카니스의 삐쳤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