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아기 맹수, 서부로 (6/51)

#6. 아기 맹수, 서부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스카 타바누스 백작 영식이 거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납품된 수량이 지난달보다 적지 않습니까!”

테이블 위로 납품 보고서가 거칠게 떨어졌다.

“……타바누스 영식.”

건너 앉은 케라타 자작이 주름진 미간을 두툼한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참을성 있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게 벌써 세 번째 설명이었다.

‘공작님께서도 이런 기분이실까.’

펠리오는 종종 세상 답답하단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볼 때가 있다. 케라타 자작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의 기분을 여실히 공감했다. 답 없는 사람과 마주하는 건 정말 피가 거꾸로 솟게 한다.

“봄철은 순록이 새끼를 낳는 시기입니다.”

순록은 가을에 짝짓기하고 이듬해 봄에 새끼를 낳는다. 이렇다 보니 새끼를 낳고 기르는 늦봄과 초여름에는 가죽을 생산할 수가 없다.

“해도 너무 줄지 않았습니까!”

이토록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세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타바누스 영식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납품 수량이 불만이었다. 케라타 자작이 두툼한 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마지막 인내를 끌어올렸다.

“지난해를 잊었습니까?”

어둑한 동굴이 연상되는 낮은 음성에 무스카 타바누스가 멈칫했다.

“마물 개체 수가 유독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마물’이란 말에 타바누스 영식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케라타 자작은 이를 눈치챘음에도 짐짓 모르는 척했다.

“그때 저희 케라타 가문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실 이건 거짓말이었다.

몇 달 전.

‘타바누스 상단과 거래 중이군요.’

겨우내 혹독하게 몰아닥치던 눈보라가 겨우 그친 뒤. 정기 보고를 위해 들른 케라타 자작은 뜬금없는 명 하나를 받았다.

‘납품 수량을 조금씩 줄이세요.’

‘……예?’

‘그리고 내가 지시한 어느 날에 그간 줄이면서 비축해 둔 물품을 한 번에 타바누스 상단에 푸십시오.’

이유 모를 지시에 케라타 자작은 크게 당황했었다.

펠리오는 큰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다른 귀족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관심조차 없었다. 북부 귀족들 사이에선 이제 유명한 보레오티의 새 예절 교사가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그렇게 아끼는 딸에게도 별거 중인 부부를 가정 교사로 보낼 정도니, 그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이렇게나 저명한 바였다.

‘……알겠습니다.’

하나 케라타 자작은 이유를 묻는 대신 고개 숙여 명을 받아들였다. 서글서글하고 풍채 좋은 케라타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로 응답할 뿐이었다.

‘케라타 가문에는 피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의심하지 않고 순순히 응한 덕인지, 펠리오는 케라타 가문의 안전을 확신했다. 펠리오의 뜻 모를 지시를 애써 태연히 따르던 케라타 자작이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펠리오의 뜻을 눈치껏 파악했다. 사실 파악할 것도 없었다. 보레오티는 타바누스를 사냥감으로 정했고, 사냥감을 몰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북부의 주인께서 그리 하라고 명하시면 의심하지 말고 따르는 것이 골수 귀족의 의무였다. 그렇게 순응하고 있어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다.

타바누스 가문을 비롯한 북부 귀족 몇몇이 지난가을 요란했던 마물의 번식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마물 새끼들을 납치해 어딘가에 모아 두었다는 것도.

해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조금 전 ‘마물’을 언급했더니 확실하게 반응했다.

케라타 자작이 끌끌 혀를 찼다.

‘마물은 보통 6개월 이후 성체가 되지.’

검은 맹수는 그 안에 사냥할 테고, 그날은 이제 코 앞이었다.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저러는 꼴이 참 웃겼다.

‘뒤에 누가 있어.’

그 ‘누구’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확실했다.

“……타바누스 영식.”

순간 인내를 잃은 케라타 자작이 묵직한 목소리로 영식을 불렀다. 끊임없이 불만을 표출하던 무스카 타바누스 영식이 멈칫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지금 너의 아집을 참고 넘어간다는 심정을 딱히 숨기지 않은 채, 케라타 자작은 펠리오가 명했던 마지막 명을 수행했다.

“지금 당장 순록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새끼를 양육하는 순록을 건드리는 건 우리에게도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또 줄어든 순록 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그러니 어느 정도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타바누스 영식이 조심히 물었다. 눈에 띄게 예의 발라진 태도였다.

“적어도 지금 태어난 새끼들이 젖을 뗄 때까지.”

일주일도 안 될 거라며, 케라타 자작이 마지막 인내를 끌어모아 미소지었다.

“젠장!”

케라타 자작이 가고.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무스카 타바누스가 술을 병째 벌컥벌컥 마시며 욕을 내뱉었다. 만만하게 봤던 케라타 자작에게 기가 눌렸던 자신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재수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생긴 건 호구처럼 멍청하게 생겼으면서 더러운 심보를 뒤에 숨기고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타바누스 영식은 있는 힘껏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비단 케라타 자작 때문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무스카 타바누스가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돌이켜 보면 그 시작점이 기묘했다.

바로 보레오티 공작이 주최한 다과회였다.

‘설마 눈치챘나?’

은근하게 오르던 술기운이 단번에 깼다. 아니라고 치부하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상단 일부터 시작해서 타바누스 가문이 투자하는 사업마다 쪽박을 치거나 상대측에서 난색을 표하며 거리를 두었다.

다과회 이후로 모든 것이 어려웠다.

‘그때 거기서 걸리지만 않았더라도……!’

타바누스 영식이 이 모든 게 펠리오 집무실에 몰래 들어가려다 쥐방울만 한 꼬맹이에게 들킨 탓이라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재수 없는 건 둘 다 똑같군.”

얼굴이며 성격이며 안 닮은 구석이 없었다. 어른에게 겁먹기는커녕 보란 듯이 노려보다가 냅다 고자질하던 얄미운 모습이 짜증 날 정도였다.

“백작 대리.”

그때, 보좌진 중 한 명이 들어왔다.

“뭐야!”

한껏 예민해진 무스카 타바누스 영식이 매섭게 물었다.

“메레오카 백작과 글리스 남작께서 오셨습니다.”

방문한 손님들의 이름을 들은 무스카 타바누스 영식이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들어오라 일렀다. 곧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근심이라도 있는 건가.”

메레오카 백작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의 눈에 술이 반이나 준 술병이 보였다. 술잔조차 없는 걸 보니 병나발째 마신 듯했다.

“썩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무스카 타바누스가 짧게 답했다. 사실 안색이 좋지 않은 건 도리어 메레오카 백작과 글리스 남작이었다. 특히 자식뻘의 어린놈에게 무시당한 메레오카 백작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메레오카 백작의 위상은 이전과 달랐다. 오만방자했던 딸 때문에 보레오티 공작에게 단단히 찍힌 그는 자리에 모인 셋 중에서 가장 작위가 높음에도 기를 펼 수 없었다. 펠리오의 경고는 그만큼이나 무서웠다.

이렇듯 셋은 보레오티를 부정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권위를 따랐다. 신기한 일이었다.

“수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글리스 남작이 품에서 붉은 편지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받아든 타바누스 영식이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새하얀 백조 깃털 하나가 들어 있었다.

“기대하신다고 합니다.”

봉투 속 깃털을 바라보는 타바누스 영식의 입가에 미련한 미소가 걸쳐졌다.

* * *

“끄으으응……!”

힘을 잔뜩 준 레오니에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얼굴 못생긴 거 봐라.”

옆에서 지켜보던 펠리오가 짓궂은 감상을 뱉었다.

“아씨, 나 집중하고 있잖아!”

실눈으로 살짝 노려본 레오니에가 빽 소리 지른 후 다시 전신에 힘을 주었다. 어찌나 힘이 실렸는지 높게 양 갈래로 올려 묶은 머리가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보레오티 부녀는 텅 빈 훈련장에서 맹수의 송곳니 훈련 중이었다. 곧 레오니에의 등 뒤로 황금빛 형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제 레오니에는 맹수의 송곳니를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꾸준한 훈련의 성과였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황금빛 형상을 유심히 살폈다. 폭주하면 당장 자신의 송곳니를 꺼낼 작정이었으나,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끄으응……!”

어느샌가 쭈그려 앉은 레오니에가 마지막 힘을 짜내며 끙끙거렸다. 그러다 번쩍 눈을 떴을 때, 황금빛 안개가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얍!”

이내 레오니에가 폴짝 뛰었다.

보기 좋게 살이 붙은 팔다리가 힘차게 뿅, 뻗어졌다. 황금빛 안개가 송곳니 형태로 변해 가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레오니에의 요란스러운 기합만 훈련장에 맥없이 메아리쳤다.

“……뭐.”

펠리오가 짧은 평을 남겼다.

“웃기긴 웃겼다.”

“그냥 비웃어…….”

스스로 생각해도 창피한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양 갈래로 묶은 검은 머리 사이로 새빨개진 귀 두 짝이 드러났다.

“웃고 싶어도 기가 쭉 빠져서 말이다.”

살다 살다 맹수의 송곳니를 저런 어처구니없는 기합으로 끄집어내는 보레오티는 처음 봤다. 나중에 보레오티 역사서에 적어 두면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얍’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난 필사적이었어.”

“어디가?”

“계속 시비 걸면 다음에는 ‘욕’이라고 한다?”

욕, 욕!

레오니에가 반항심에 삐뚤어진 표정을 지으며 씩씩거렸다. 지난겨울과 이번 봄 사이 키가 꽤 자란 레오니에는 이제야 가까스로 여섯 살처럼 보였다. 아직 또래보다 한참 작지만, 그 격차를 점점 줄여 가고 있었다.

“한 개씩 만드는 건 할 수 있는데…….”

레오니에가 이거 보라며 자신의 등 뒤로 송곳니 네 개를 차례차례 번갈아 만들어냈다. 네 개 다 생긴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완벽하게 사용하려면 네 개 전부를 만들어내야 해.”

펠리오가 자신의 송곳니를 보이며 말했다. 피보다 짙은 네 개의 붉은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래야 온전한 힘을 쓸 수 있어.”

“알아…….”

송곳니를 집어넣은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보레오티 가문 대대로 이어오는 이능 ‘맹수의 송곳니’는 그 이름처럼, 위아래로 두 개씩, 총 네 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 네 개는 각각 하나씩 다른 힘을 지니고 있다. 그 힘은 송곳니를 지닌 주인마다 조금씩 차이를 지니었다.

‘작가의 편애…….’

레오니에는 원작 내용을 떠올리며 이를 쓴 작가의 남주 편애를 비웃었다. 하나 그 덕을 저도 보고 있으니 싫은 건 아니었다.

“이런 건 또 레지나를 닮았군.”

펠리오가 오랜만에 사촌 동생의 이름을 꺼냈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펠리오는 별거 아니라며 심드렁했다.

“레지나도 송곳니를 연습할 때 이걸로 고생 좀 했지.”

송곳니를 하나씩 만들어내는 건 곧잘 했으나 네 개를 동시에 만드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습득하는 속도도 느렸다고 한다.

“나도 느린 편이야?”

“레오 넌 빨라.”

배우고 습득하는 속도는 오히려 펠리오와 비슷했다. 그렇게 말하는 펠리오의 얼굴에 흐뭇함이 가득했다. 이를 본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조금씩 형상을 띄기 시작하니 곧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

“응! 열심히 할게!”

“그리고 이상한 기합은 뱉지 말고.”

“그거 내가 일부러 내뱉은 거 아니거든?”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손을 잡으며 투덜거렸다. 하여튼, 잘 나가다가 꼭 이렇게 시비였다.

‘하지만 이게 아빠의 애정 표현이지.’

사람이 아직은 참 서툴렀다.

‘바리아를 만나기 전에는 좀 고쳐 주는 게 좋으려나…….’

언젠가 만날 운명의 상대에게 밉보이지 않게 교정 좀 할까, 레오니에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상대 역시 굳이 바리아일 필요는 없었다. 좋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과 잘 만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러다 진짜 펠리오가 저 키운다고 죽을 때까지 혼자 사는 건 미안한 일이었다.

“주인님, 아가씨.”

코니가 훈련장을 나온 두 부녀에게 인사했다.

“……아, 맞다.”

이후 약속을 깨우친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너 정말 거기 가려고?”

앙큼한 딸이 어디 가는지 아는 펠리오는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지금은 내가 보레오티 가문의 안주인이잖아.”

펠리오가 결혼해서 아내를 들이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비어 있는 가문 내 안주인 자리는 자연히 그의 딸인 레오니에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가야지!”

레오니에는 콧김을 내뿜으며 눈누난나 발재간을 부렸다. 서둘러 씻고 치장한 레오니에는 보레오티 안주인 대리 역할을 수행하고자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바로 북부 귀부인들의 차 모임이었다.

“어머, 공작 영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지요?”

“참으로 어여쁜 드레스네요.”

북부에는 귀부인들끼리만 모여 가지는 정기적인 다과회가 있었다. 제국의 두 번째 권력이라 불리는 수도 사교계와 달리 친목 도모가 목적인 평범한 차 모임이었다.

그러나 파르두스 후작 부인과 몇몇 이주 귀족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골수 귀족이란 걸 고려하면 평범하다는 말에 약간의 어폐가 있긴 했다.

“제가 혹시 시간을 되돌려 왔나요?”

하나 레오니에에게 그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귀부인들 얼굴이 한층 젊어지셨어요.”

일곱 살 꼬마의 새침한 농담에 부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오글거리는 칭찬이나 젊어 보인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영애께서는 농담도 잘하셔라.”

“그래도 들으니 좋네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우신 건가요?”

“어휴, 우리 집 남편도 저런 말 좀 배워 오면…….”

레오니에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상석에 앉았다. 아이가 앉은 상석에는 항상 푹신푹신한 방석이 다섯 장 깔렸다. 누구도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당연하게 여기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보레오티는 보레오티였다.

레오니에는 부인들과 함께하는 다과회가 좋았다. 겉모습은 어린아이여도 속은 아니었던지라, 레오니에는 애들끼리 어울려 노는 게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다. 유일한 또래 친구인 플로무스와 단둘이 노는 건 괜찮아도 매번 그러지도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예절 교사인 보스그루니 백작을 따라 귀부인들의 다과회에 참석했던 레오니에는 신세계를 발견했다.

대화가 통했다.

정신 연령이 비슷했다.

심지어 여기는 펠리오나 보스그루니 백작이 말했던 수도 사교계처럼 빙빙 돌려 말하는 게 없었다. 말 그대로 귀부인들끼리 즐기는 친목 도모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너무 좋아!’

레오니에가 드디어 발견한 설원 속 장작 지핀 오두막이었다.

다과회의 주 대화 내용은 뒷담이었다.

“제 아들이 말이지요…….”

이번에는 보스그루니 백작의 아들이 주제였다. 백작은 자신의 장남이 처자식 버리고 홀로 수도로 떠났던 제 아빠랑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한다며 가슴 속 응어리를 토했다.

“심지어 그놈이 나중에 돌아와서 작위도 가져가겠다는 거 있죠?”

백작은 눈앞에 아들이 있다면 당장 찻잔으로 머리를 깰 기세였다.

“어휴, 왜 그런대요.”

레오니에가 보스그루니 백작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했다.

“이러니 자식새끼는 키워 봤자 소용이 없어요. 길러 준 은혜를 몰라.”

그 말에 부인들이 크게 공감했다.

“백작께서 작위와 가문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한담.”

“저였으면 그 입을 바느질로 꿰맸을 거예요.”

“그걸 가만히 내버려 뒀어요? 호적에서 파버리세요.”

보스그루니 백작의 얼굴은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 당장 아들이 눈앞에 있어도, 찻잔 대신 티스푼으로 머리를 찍을 정도만큼 화가 풀렸다.

“저, 저기…….”

그때, 숫기 없는 젊은 부인 한 명이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부인에게 향했다. 시선이 모이자 젊은 부인이 부끄러운 듯 안절부절못했다.

‘아, 그 사람이다.’

레오니에는 금방 떠올렸다. 메레오카 영애와 결혼했던 테드로스 백작의 새 부인이었다. 수줍음 많고 여린 인상을 보고 있자니 과연 북부에 적응을 잘할지 걱정이었다.

‘동부 출신이라고 했던가.’

파란색이 도는 보랏빛 머리가 이국적이었다.

“그, 그러니까…….”

테드로스 백작 부인이 용기 내 말했다.

“제가 친정에서, 그러니까, 어머니께 배운 방법이 있는데…….”

테드로스 부인이 버터를 스콘에 바르는 나이프를 두 손으로 조심히 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꿱꿱 떠들지 않게 멱을 딸 수 있다고 했어요. 마법까지 더하면 출혈 없이 금방 해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테드로스 부인이 조심조심 멱 따는 시늉을 했다.

자리에 모인 북부 귀부인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테드로스 백작 부인.”

레오니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귀부인은 타고난 북부 사람이었다.

“북부에 오신 걸 환영해요.”

정말이지 미소가 끊이지 않는 최고의 차 모임이었다.

* * *

즐거운 모임은 항상 일찍 끝나는 법이었다.

“다음에 또 뵈어요…….”

레오니에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마차 밖 창문으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퍽 어리고 순한 것이, 차 마실 때 부인들과 떠들던 똘망똘망하고 야무지던 인상과 무척 달랐다. 귀부인들도 덩달아 손을 흔들었다. 모두 헤어짐이 아쉬운 표정이었다.

“……재미있으세요?”

호위로 따라온 파보가 물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친구분들하고 노는 게 더 즐거우실 텐데…….”

“저분들이 제 친구예요.”

레오니에가 즉답했다. 꼬맹이들 뒤치다꺼리는 고아원 동지들만으로 충분했다.

마침 마차가 광장을 빠져나와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로지 보레오티 공작저로 향하는 길이었다. 푸른 나뭇잎이 레오니에의 귀환을 반겼다.

“후우…….”

밖을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창틀에 짧은 팔을 걸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파보는 그런 아가씨를 걱정스레 보았다.

‘모친이 그리우신 걸까.’

겉으로야 인생 서너 번 산 것처럼 뻔뻔해도 아직은 어린 일곱 살이라지만, 펠리오가 아무리 살뜰하게 챙겨도 어머니가 살아 있는 것만큼은 못할지도 모른다. 귀부인들을 만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파보는 그런 내색 없이 꿋꿋하게 지내는 레오니에가 안타까우면서도 기특했다.

그렇게 파보가 홀로 감상에 젖어갈 때.

‘노래방 당기네…….’

레오니에는 조금 전 다과회 사람들과 노래방에서 오지게 흔들며 노는 상상에 푹 빠져 있었다. 상상 속에서 레오니에는 지금 막 현란한 양손 탬버린 기술로 노래방을 지배하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코니에 선생님!”

고아원에서 저와 아이들을 유일하게 정성껏 돌봐 준 코니에가 저택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레오니에를 발견한 코니에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지었다.

“니아!”

달려가던 레오니에가 인상을 팍 썼다.

“저 이제 니아 아니라니까요.”

몇 번이고 가르쳐 줬는데도 코니에는 항상 레오니에를 예전 이름으로 불렀다.

“미안해, 이게 습관이 되어서…….”

“익숙해지세요.”

“노력은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

입술을 삐죽이던 레오니에가 이내 헤실헤실 웃으며 코니에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여기 왜 오셨어요?”

“공작님께서 고아원을 더 후원해 주시겠다고 하셨거든.”

방금 막 얘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레오니에의 어깨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펠리오에게 너무도 고마운 마음이 흘러넘쳤다. 당장 볼에 뽀뽀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코니에는 펠리오가 손수 내준 마차를 타고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마차에는 호위로 기사 한 명이 따라붙었다.

“우리 아빠 너무 멋지다, 그쵸?”

들뜬 레오니에가 파보에게 물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오빠는 그냥 대답만 하란 뜻이었다.

“북부의 주인만큼이나 대단하신 분이 어디 있다고요.”

파보 역시 펠리오의 선심에 크게 감동했다. 하나 그 이상으로 레오니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펠리오의 모든 행동의 근원은 레오니에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상 북부의 실세는 레오니에였다.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기 맹수는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펠리오와 함께 저녁을 먹다 티격태격 싸우고, 거실에서 둘이 뒹굴다가 유치한 말싸움을 하고. 방에서 숙제하다가 심심해서 아빠 집무실 들렀다가 서로 시비를 걸고.

‘안 피곤하신가…….’

씻고 방으로 돌아가던 루페가 아직도 달라붙어 서로를 놀리는 맹수 부녀 둘을 질린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보는 사람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다행히 레오니에가 잘 시간이 되었다.

하품하며 꾸벅거리는 레오니에를, 펠리오는 품에 안고 방으로 데려갔다.

“자기 전에 이거 마시고 자.”

펠리오는 웬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뭔데? 독약?”

꿀떡꿀떡 다 받아먹은 레오니에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쌉쌀하면서도 끝 맛이 달콤한 것이 꿀을 탄 약차 같았다.

“나 아까 양치했는데…….”

“그럼 또 양치해.”

“아빠 진짜 짜증 나…….”

레오니에가 구시렁거리면서도 코니가 가지고 온 양칫물로 다시 양치했다.

“그래서, 아까 먹은 건 뭔데?”

설마 진짜 독약은 아니겠지, 레오니에가 젖은 입가를 소매로 벅벅 닦으며 다시 물었다.

“몸에 좋은 약이다.”

영양제라는 설명에 레오니에가 그런가, 싶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아암…….”

하루가 피곤했는지 커다란 하품이 몰아닥쳤다.

“이제 자자.”

“응…….”

꾸물꾸물 침대 위로 올라간 레오니에의 몸 위로, 펠리오가 이불을 포근히 덮어 줬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몇 번 도닥이더니,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잘 자라.”

“아빠도 잘자…….”

“나중에 보자.”

“으응……?”

어라? ‘내일 보자’가 아니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레오니에는 오늘따라 유난히 묵직한 졸음을 떨치지 못했다. 곧 새근새근 울리는 아이의 숨소리가 어둑한 방 안을 기분 좋게 채웠다. 평화로운 하루의 끝이었다.

여기까지는.

“…….”

잠든 레오니에를 한참 들여다보던 펠리오가 아이를 이불 채 돌돌 말아 안았다. 조심스러운 움직임 하나하나가 신중했다. 레오니에는 조금 전 막 잠들었는데도 깨는 기척 하나 없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작게 열린 입술 사이로 침이 흐르기 직전이었다.

현관 홀까지 나오자 모노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기사복에 하얀 케이프 망토. 늦은 시간임에도 모노는 글라디고 기사단 정복 차림새였다. 그리고 옆에는 조금 전 양칫물을 버리러 나갔던 코니는 미아와 함께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옆에는 짐 가방도 있었다.

“마차는?”

“준비되었습니다.”

대답과 함께 모노가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제 품에 더 붙여 안았다. 계절은 봄인데도, 불어오는 밤바람이 싸늘했다.

“아가씨께서…….”

코니가 평생 쓸 용기를 짜내 말했다. 미아가 경악했다.

“깨어나시면 서운해하실 거예요…….”

“내가 없어서?”

“아가씨는 주인님을 무척 좋아하시니까요.”

펠리오가 앞서 걸어가는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코니는 자신의 주인님께서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아도 펠리오가 대답해 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전처럼 깽판이나 치지 말아야 할 텐데.”

꼭 떨어져 지낼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는군. 덤덤한 목소리에 씁쓸한 웃음이 은은했다.

먼저 마차에 올라탄 코니가 짐 가방을 구석에 두었다. 뒤이어 오른 미아가 자신이 레오니에를 안겠다고 두 팔을 내밀었다. 이 역시도 엄청난 용기였다.

하나 펠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레오니에를 손수 마차 좌석에 눕혔다.

“으응…….”

레오니에가 입술을 푸푸 움직이며 잠꼬대를 했다. 펠리오는 미련이 남은 듯 딸아이를 계속 응시했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도 한 올, 한 올 정돈했다. 눕혀지면서 흐트러진 이불도 다시 고쳐 덮어 줬다.

“…….”

먼저 탄 코니와 미아는 괜히 멋쩍어 애꿎은 바닥만 바라봤다.

곧 마차 문이 닫혔다.

소중한 딸을 보듬던 아버지의 다정함은 지워지고, 맹수의 서슬 퍼런 살기가 드리워졌다.

송곳니를 드러낼 준비였다.

“글라디고 기사단.”

나의 짐승들.

펠리오의 앞에 정복을 갖춰 입은 글라디고 기사단이 좌우 대열을 맞췄다.

붉은 이채가 스치는 검은 눈동자를, 구름이 가린 달빛 한 줌이 얼핏 스쳐 갔다.

“지금부터 사냥을 시작한다.”

* * *

덜컹덜컹.

“…….”

레오니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규칙한 흔들림이 불편했다. 등도 어째 딱딱하고 몸도 갑갑했다. 팔다리를 움직이려고 해도 뭔가에 돌돌 말려 싸인 기분이었다. 그래도 고아원 때보다는 편하니, 참을 만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피곤하시면 조금 더 주무셔도 된다는 상냥한 목소리는 코니의 것이었다. 레오니에는 고마운 배려에 기대 베개에 조금 더 머리를 기대고자 했다.

“그래도 멀미 안 하셔서 다행이다.”

다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려는 레오니에의 귓가에 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에 심하셨다며?”

“기사님 말씀으론 게이트 넘자마자…….”

“……뭐야, 너 설마 진짜 가베르 경이랑 사귀어?”

“아, 아니야! 레비페스 경, 그러니까 멜레스 님이 알려 주셨어.”

점점 높아지는 말소리에 레오니에가 인상을 와락 썼다. 동시에 하녀들이 헉, 하고 말을 멈추었다.

‘미아가 있다고?’

레오니에가 인상을 쓴 건 두 하녀의 재잘거리는 수다 때문이 아니었다.

아침잠을 깨우러 방에 오는 건 항상 코니였다. 미아는 코니가 쉬는 날에 가끔 들르는데, 그것마저도 코니가 전날에 미리 일러 줬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때, 또다시 덜컹, 하고 몸이 흔들렸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레오니에가 벌떡 일어났다.

“꺅!”

방심하고 있던 코니가 비명을 질렀다. 건너편에 앉았던 미아는 으어어, 하고 숨을 헐떡였다. 하나 레오니에의 신경은 오로지 마차 밖 창문을 향해 있었다.

“…….”

창에 비친 레오니에의 얼굴은 말도 아니었다. 푹 자고 일어난 얼굴 위로 망연자실한 표정이 어렸다. 창밖의 화창한 하늘, 푸른 나무와 대비되었다.

레오니에는 단번에 알았다.

“여, 여기 어디야?”

이곳은 북부가 아니었다.

“주무시는 동안 게이트를 넘어 서부에 도착했어요.”

코니가 창문을 살짝 열어 맑은 공기가 들어오게끔 했다.

“어, 언제?”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가씨께서 주무시는 동안에요.”

“그러니까 언제!”

“그게…….”

코니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펠리오가 레오니에가 자기 전에 마시게 한 건 멀미약이었다. 멀미약 때문에 평소보다 깊은 잠에 빠진 레오니에는 밤중에 게이트를 넘어 멀미 없이 무사히 서부로 넘어왔다.

그제야 레오니에의 코에 따스하고 싱그러운 공기가 전해졌다. 서부 특유의 온화한 기온이었다.

“…….”

레오니에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장장 사흘을 달렸다.

“아, 아빠는?”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찾은 건 그렇게 사흘을 보내고 목적지인 리네 영지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때까지 레오니에는 멍하니 차창 밖만 바라봤다. 그만큼 놀랐다는 뜻이었다.

“아빠는? 우리 아빠는?”

레오니에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코니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불안감을 내비치는 건 처음이라, 코니는 가슴이 미어졌다. 늘 어른처럼 굴어도 아직 속은 여리고 불안한 모양이었다.

“주인님께서 나중에 뒤따라 오신다고 하셨어요.”

“급한 일 때문에 아가씨를 먼저 보내신 거예요.”

코니와 미아가 어떻게든 레오니에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아, 그렇지……!”

코니가 가방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두꺼운 수건 두 장에 돌돌 말린 채 보관된 유리병은 펠리오가 레오니에에게 자주 쥐여 주는 딸기 우유 맛 사탕 저금통이었다.

유리병을 품은 레오니에는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뒤늦게 창피함이 몰아닥쳤다. 진짜 애처럼 불안해하다니. 레오니에는 사탕이 그득 담긴 유리병 뒤에 얼굴을 숨겼다. 하나 투명한 유리병 사이로 레오니에의 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코니와 미아는 소리 없이 웃었다. 동시에 안도했다.

잠시 후 마차가 어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우중충한 보레오티 공작저와 반대로 새하얗고 화사했다.

“보레오티 영애.”

카니스 리네 백작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이곳이 서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 * *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걸 이번에 절실히 느꼈어.”

“예? 이제 와서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은데, 프로보가 루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루페와 프로보는 잠깐 쉬는 시간이 맞아떨어져 잠시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둘 다 요사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지금 가지는 짧은 휴식이 참으로 소중했다.

“당연히 알고는 있었지.”

일하느라 결린 목 주변을 주무르며 루페가 답했다.

잔망스러운 보레오티 부녀는 어느새 북부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덩달아 펠리오가 하나뿐인 딸을 아낀다는 건 상식 중 상식이 되었다.

다만 루페가 이번에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건, 펠리오가 레오니에 혼자 서부에 보낸 것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로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밤중 실행된 레오니에의 서부 여행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아가씨께 험한 걸 보여 주기 싫으셨던 거겠지요.”

프로보는 펠리오가 꺼낸 ‘사냥’이란 단어를 되새겼다.

펠리오가 아무리 딸에게 상냥하고 친구 같은 아빠라고 해도, 그는 남들보다 너무 잘나서 세상사 모든 것이 가소롭고 하찮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맹수였다. 거슬리는 문제들이나 제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먼지’라 부르는 게 증거였다. 그리고 ‘먼지’들을 해결하는 일을 항상 ‘청소’라고 불렀다.

하나 이번에는 ‘사냥’이라 말했다.

“피바람이 낭자하겠지.”

루페가 그 뜻을 대신 말했다. 그 역시 이번에 펠리오가 얼마나 화가 났고 기가 막혔는지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먼지들은 레오니에를 건드렸고, 보레오티가 매년 지켜온 평화를 깨트리려 했다.

최소 세 가문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낭자할 것이다.

펠리오는 그런 북부를 레오니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후계를 이을 테니 이런 경험이 필요할 터였으나, 아직은 작고 어린 딸에게 잔인한 면모를 일찌감치 보이고 싶지 않은 부성애가 작용한 듯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냥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레오니에의 호위 기사 셋을 전부 북부에 남겨 뒀다. 있지도 않을 만일의 사태를 위해서.

사람들은 종종 펠리오를 인종을 초월한 존재로 보았다. 하나 그 곁에 레오니에가 있으면 그 역시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펠리오에게 호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일하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고, 지난겨울은 추운지도 몰랐다.

“좋은 변화네.”

“동감입니다.”

그래서 루페와 기사는 지금의 상황이 큰 불만이었다. 기적처럼 찾아온 보레오티의 평화를 웬 멍청이들이 난동을 피워 가며 맹수를 자극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근본은 그대로인데.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서부로 보냈다는 건 아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봐주는 것 없이 그들을 끝내겠단 뜻이었다.

루페와 기사들은 멍청이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자작님.”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루페를 찾았다. 루페 밑에 있는 수행원 중 한 명이었다.

“조금 전 도착한 전보입니다.”

수행원이 쪽지 하나를 건넸다. 발신자는 파르두스 후작이었다.

쪽지를 받아든 루페가 내용을 확인했다.

“…….”

곧이어 얼굴이 저의 머리칼처럼 파리해졌다.

“……공작님은 어디 계십니까?”

루페가 애써 진정하며 펠리오의 위치를 확인했다. 동시에 프로보가 방을 나갔다. 프로보는 그대로 모노에게 향해, 곧 주군의 명이 있을지도 모른단 사실을 전할 것이다.

루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여기로 갑시다!”

루페는 수행원과 함께 움직였다.

* * *

서부로 내려온 지 닷새.

레오니에는 리네 저택에 아름드리 핀 꽃나무를 황홀한 눈으로 구경했다.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떨어지는 진홍색 꽃잎이 봄의 끝자락을 알렸다. 꽃비를 보고 있자니 북부에서 봤던 눈보라가 떠올랐다.

‘눈보라가 더 거칠긴 하지.’

예쁜 것도 아주 잠시.

레오니에는 어느새 북부를 그리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아직도 서부에 오지 않은 펠리오가 보고 싶었다.

‘망할 아빠…….’

이유도 말 안 하고 저만 달랑 보내다니.

레오니에가 괜히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꽃잎들을 손사래 치며 떨어트렸다.

“레오 언니!”

투덜거리던 중에 우피클라가 찾아왔다. 피누도 뒤따라 졸졸 따라왔다.

“언니 뭐해요?”

“꽃 보고 있었어. 참 예쁘네.”

“언니네 집에는 없어요?”

우피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함께 꽃나무를 올려다봤다.

“있는데, 아직 못 봤어.”

코니 말로는 저택에도 꽃나무가 있다고 했다. 다만 꽃을 피우려면 아직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작년 늦가을부터 보레오티가 된 레오니에는 당연히 꽃이 핀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 집 꽃은 어떨까.’

꽃나무 구경은 아쉬운 감정으로 끝났다.

그래도 서부에서의 생활이 좋았다. 카니스와 아비페르 백작 부부는 친절했고, 우피클라와 피누 남매는 레오니에 곁을 늘 졸졸 따라다녔다. 저택에서부터 함께 온 코니, 미아와 기사들도 함께였다. 쓸쓸한 기운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냥 아빠가 보고 싶은 거지…….’

쓸쓸하진 않은데, 펠리오가 생각 이상으로 보고 싶었다.

‘지난번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일전의 마물 사냥 때는 무려 한 달이나 떨어져 지냈다. 그때도 펠리오가 보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 축 처질 정도는 아니었다.

차이라면 딱 하나 있었다.

‘그때는 아저씨, 지금은 아빠.’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고 있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자신의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임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러니 그때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다른 건 당연했다.

“누나.”

토실토실한 뭔가가 레오니에의 손등을 콕콕 찔렀다. 멍하니 있던 레오니에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레오 누나.”

입에 초콜릿이 덕지덕지 묻은 피누가 눈망울을 반짝거렸다. 이내 조그만 두 손을 척 내밀더니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주세요오.”

“뭐를?”

레오니에가 알면서 모르는 척 물었다.

“사탕!”

커다란 초콜릿 쿠키를 다 먹고도 성에 안 찬 피누는 레오니에가 가지고 온 딸기 우유 사탕을 탐냈다. 일찌감치 쿠키를 다 먹은 우피클라도 얌전한 척하다가 은근슬쩍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 됩니다.”

하나 뒤에 있던 유모가 단호히 말했다. 우피클라와 피누가 입술을 삐죽였다. 레오니에는 유모와 하녀들이 간식 먹은 그릇을 치우는 틈을 타 둘에게 사탕 하나씩을 건넸다. 사탕을 받은 두 강아지가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사탕!”

“사탕!”

“쉬잇, 들키잖아!”

그제야 합죽이가 된 둘은 서둘러 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레오니에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어휴, 드시면 안 되는데.”

뒤늦게 알아챈 유모가 어쩔 수 없단 듯 피식 웃었다. 세 아이는 키득거리며 사탕을 맛봤다.

“여기 계셨군요.”

아비페르가 볼 한쪽이 볼록 튀어나온 아이들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들 볼에 하나하나 입을 맞춘 백작 부인이 찾은 사람은 레오니에였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시고요?”

“하나도요. 너무 좋아요.”

“부족한 점이 보이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레오니에는 여전히 아비페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단 걸 알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답답하시진 않으세요?”

물어보는 아비페르의 목소리에 염려가 가득했다. 서부로 내려온 뒤로, 레오니에는 단 한 번도 외출을 나가지 못했다. 이는 펠리오가 리네 백작 부부에게 따로 전한 편지 때문이다. 자신이 서부로 내려갈 때까지 레오니에의 외출을 자제해 달란 부탁이 적혀 있었다.

“…….”

레오니에는 아비페르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걱정을 읽었다. 예전에 처음 공작저에 들어갔던 날, 사용인들이 제게 종종 보였던 눈빛이었다. 딱히 악의적인 감정은 아닌지라 싫지는 않았다.

“부인께서 ‘인생이란 복수다’를 보여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영악한 꼬마 숙녀는 은근슬쩍 물었다.

“안 된답니다.”

아비페르가 미소로 방어했다. 레오니에가 인상을 팍 썼다.

‘인생이란 복수다’는 레오니에의 애독서 ‘인생 다 부질없다’의 후속권이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후속권을, 우연히 아비페르의 서재에서 발견한 뒤로 계속 눈독을 들이는 중이었다.

“부인…….”

레오니에가 불쌍한 척 두 손 모아 간절히 물었다.

“저 그거 보면 우리 아빠 생각 안 날 것 같은데…….”

“차라리 생각하세요.”

아비페르가 단호히 거절했다. 물러설 수 없는 레오니에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눈망울을 글썽거렸다.

“부인은 제가 불쌍치 않으세요?”

“네.”

즉답이 튀어나왔다. 몇 번을 부탁해도 아비페르는 요지부동이었다.

“지금은 공작님이 더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비페르는 레오니에가 참 야무지고 성숙해서 키울 때 많이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참 똑똑하고 생각이 깊어 대화도 곧잘 통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또래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처럼 재미있기까지 했다.

하나 부모 입장에서, 레오니에는 여러 가지 의미로 골치 꽤나 썩이는 자식이었다.

결국 먼저 지쳐 떨어진 레오니에는 다 때려치우라는 듯이 소파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만사 다 귀찮아졌다.

“아빠 보고 싶어…….”

아빠라면 아무 잔소리 없이 책을 사 줬을 텐데. 레오니에는 또 한 번 펠리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펠리오가 알았다면 기가 막혔을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혹시 아빠한테 뭐 안 왔어요?”

레오니에가 아비페르에게 물었다. 레오니에는 지난 닷새간 아빠는 언제 오느냐고,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고 끊임없이 물었다. 하나 돌아오는 건 항상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빈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곧 오실 거예요.”

아비페르가 눕느라 한쪽으로 쏠린 레오니에의 앞머리를 손수 정돈해 주며 말했다. 레오니에는 알고 있다. 리네 백작 부부는 레오니에를 배려했기에 저렇게 말한다는 걸. 두 사람은 레오니에를 무척 소중히 아끼고 보살펴 줬다.

마치 진짜 아이처럼.

“부인.”

하나 그런 태도는 삭을 대로 삭은 정신머리를 지닌 일곱 살 꼬마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니에가 질문을 고쳐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아빠가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멍청이들 족치고 있을 텐데, 지금 상황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가로랑 세로.

“둘 중 어느 쪽으로 자른대요?”

* * *

구름이 잔뜩 낀 밤.

손톱 모양의 달빛마저 가려져 어두컴컴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선 짐승 우는 소리마저 잠잠하니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히르쿠스 남작에겐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남작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히르쿠스 남작은 서부의 주인인 헤스페리 후작의 가신이다. 그의 가문은 다스릴 영지 없이 헤스페리 영지 내에서만 살아왔다. 현 히르쿠스 남작은 그런 가문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제 가문 이름을 딴 영지를 제 맘껏 다스리고 싶은, 진취적이고 야망 있는 자였다.

그래서 백조의 덫에 걸렸다.

히르쿠스 남작에게 접촉한 백조들은 그에게 엄청난 제안을 했다.

‘남들이 못한 걸 해낼 때 가장 큰 주목을 받는 법이지요.’

우아한 백조가 속삭였다.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작위 상승과 함께 남부에 히르쿠스 가문의 이름을 딴 영지를 내어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마물 불법 거래.

허영심 넘치는 귀족들의 과시욕을 채울 수 있는 최고의 장사 방법이었다.

히르쿠스 남작은 단번에 이를 승낙했다. 남작은 자신 있었다. 마침 새로 황위에 오른 황제가 제 정부를 황후에 올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댔으며, 헤스페리 후작을 비롯한 각 지역 주요 귀족들이 수도에 모여 있던 상황이었다.

서부와 북부, 동부의 수장들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절호의 기회였다.

히르쿠스 남작은 동부의 마탑 마법사들을 몰래 고용했다. 마법사들은 마물들이 발정하는 약을 만들었다. 약의 효과는 최고였고, 마물들이 많은 새끼를 쳤다. 그리고 마법으로 새끼 마물들만 잡아 서부 물류 창고에 가둔 뒤, 백조가 보내 준 황실 기사단들이 용병으로 위장해 주위를 철저히 경비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세 박자인지, 히르쿠스 남작이 시시덕 웃었다. 턱 끝에 달린 가는 수염이 붓털처럼 흔들거렸다. 마치 하늘이 자신을 돕는 듯했다.

그렇게 꿈에 부푼 히르쿠스 남작의 앞에 서부 물류 창고가 나타났다. 북부와 서부 상단들의 거래 물품을 보관하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창고는 헤스페리 후작이 소유한 서부 경계선 인근의 외진 곳에 위치했는데, 북부가 바로 코앞이었다.

‘멍청한 후작 놈.’

어리석은 늙은이 같으니.

창고에 도착한 히르쿠스 남작이 한껏 비웃었다. 그의 눈에 후작은 기사란 허례허식에 푹 빠진 머저리였다. 그깟 명예 때문에 제 딸을 저런 황제에게 시집 보내고 뒤늦게 후회하는 무늬만 기사일 뿐. 그러니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배신할 거라고 꿈에도 모를 거다. 항상 자신이 모시고 따라야 했던 인간이 저의 손아귀 안에서 움직일 거라는 상상은 엄청난 쾌감을 불러왔다. 오싹한 전율이 들뜬 전신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잠깐.”

창고를 지키던 용병 한 명이 다가왔다. 반반한 인상과 눈가에 난 점이 인상 깊었다.

용병과 남작은 미리 약속된 암호를 확인했다. 용병인 척 차려입은 황실 기사는 한결 예의 바른 태도로 남작을 어느 곳으로 안내했다. 수많은 물류 창고 중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바꾸어 줄 보물 창고로 향하면서, 남작이 물었다.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용병의 말대로 창고 앞에는 북부에서 겨우 도착한 세 사람이 있었다.

무스카 타바누스 영식과 메레오카 백작, 글리스 남작이었다.

“자칫하면 못 올 뻔했습니다.”

인사고 뭐고, 타바누스 영식은 자신들이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투덜거렸다. 히르쿠스 남작은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버르장머리에 기가 막혔다.

하나 그의 말처럼, 북부에서 온 세 사람 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보레오티 공작이 작심을 했어요.”

글리스 남작이 몸서리를 쳤다.

“여기저기 글라디고 기사단을 풀었습니다. 감시가 살벌해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당장 조사에 나서고 있어요.”

펠리오 보레오티가 작위에 오른 뒤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세 사람은 그제야 보레오티 공작이 그동안 얼마나 자신들을 봐주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공작은 분명 자신들이 벌인 일을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셋 중 타바누스 영식만 애써 태연하게 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보레오티 공작이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았다. 그저 허세로 불길함을 떨칠 뿐이었다.

반면 메레오카 백작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어디선가 보레오티 공작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싶어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운이 좋았습니다.”

타바누스 영식이 애써 좋게 생각했다.

어쨌건 셋은 공작의 감시를 피해 서부 물류 창고에 올 수 있었다. 계속해서 수량을 줄여 가던 케라타 자작 가문이 약속한 날에 그간 부족했던 순록 가죽을 제때 납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물품을 창고에 옮긴다는 이유로 겨우 상단 마차를 타고 밤중에 도착했다.

건방졌던 케라타 자작이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 줄 몰랐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해 봅시다.”

끼이익, 곧 낡은 창고 문이 열렸다.

오만상을 찌푸리게 하는 냄새가 가장 먼저 반겼다. 마물 특유의 텁텁하고 비릿한 냄새와 저들의 힘을 빼게 하는 달콤한 마법 약품 향이 섞여,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풍겼다.

환기할 때까지 잠시 뒤로 빠진 후에야 가까스로 안을 볼 수 있었다. 어른 팔뚝만 한 쇠창살이 빼곡히 박힌 철장 안에는 온갖 새끼 마물들이 갇혀 있었다. 향에 취한 어린 새끼들은 모두 맥을 추스르지 못한 채 철장 안에 쓰러져 있었다. 창고 안을 두리번거리던 타바누스 영식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직 어려서 귀엽군요.”

마물이란 것만 모른다면 덩치 큰 중대형견 정도로 보였다. 위압적인 생김새를 지닌 성체와 비교하면 어린 새끼들에겐 분명 어리고 둥글둥글한 점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마물입니다.”

조심해야 한다고, 용병 차림을 한 기사가 아는 척하며 그들에게 주의를 줬다. 그렇게 말하는 기사의 눈 밑에 난 점 하나가 도드라졌다. 곧 용병 차림을 한 기사들이 들어갈 준비를 했다. 창고에 남아 있는 향에 중독되지 않게 해독제를 적신 면으로 코와 입을 가린 뒤, 철장 위로 두껍고 어두운 천을 덮었다. 기사들이 철장을 들어 움직였다.

“조, 조금만 더 서두릅시다.”

메레오카 백작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 괜찮습니까?”

히르쿠스 남작은 변해 버린 메레오카 백작이 너무도 낯설었다. 자신만만하고 꼿꼿한 자세가 인상 깊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더욱 의아했다. 들리는 말로는 백작의 딸이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큰 사고를 쳤고, 그 탓에 결혼한 가문에서 쫓겨나듯 이혼당해 서부 별장에서 지낸다는 소문을 어찌 듣긴 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타바누스 영식이 애써 강한 척 크게 소리쳤다.

“무엇이 그리 무섭단 말입니까. 여기는 서부고, 검은 맹수는 여기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백작께선 좀 진정하실 필요가 있어요.”

펠리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히르쿠스 남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 검은 맹수가, 보레오티 공작이 무서우면 얼마나 무섭다고 저렇게 사람이 변해 버린단 말인가. 결국엔 같은 사람일 뿐이다. 저 역시도 헤스페리 후작이 무서웠던 적은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 봤자 아직 머리에 피도 안 통한 애송이일 뿐입니다.”

7년 전에 작위를 이어받은 어린놈이 가문의 명성에만 기대어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에 불과하다고, 히르쿠스 남작이 한껏 욕했다.

“그럼 한번 만나 보겠는가?”

친절한 목소리가 만남을 권유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기세등등하게 욕하던 히르쿠스 남작, 아닌 척 용감하게 굴던 타바누스 영식, 겁에 질린 메레오카 백작과 글리스 남작. 마물들을 옮기던 기사들까지.

“내가 그 오만한 놈과 친하거든.”

삐걱삐걱, 부자연스럽게 돌아서는 히르쿠스 남작의 시야에 환한 달빛이 내렸다. 그 아래로 아늑한 밀색 머리가 반짝였다.

“히르쿠스 남작.”

카니스의 손에 들린 검날도 서슬 퍼렇게 번쩍였다.

“예정에도 없는 야근 중인가?”

“…….”

“나는 급하게 잡힌 야근 중인데.”

친절한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웃음을 거둔 카니스 리네는 무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뒤덮었다.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로 모두를 즐겁게 하는 리네 백작은 없었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미친개 한 마리가 있었다.

히르쿠스 남작은 카니스의 검에 베이는 순간, 오래전 카니스의 이름 대신 불리던 별명 하나를 떠올렸다.

레보오 기사단의 미친개.

서부의 들판을 지키는 개도 결국은 맹수였다. 그래서 보레오티 공작과 친해질 수 있었음을, 그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쳐라!”

카니스와 함께 온 레보오 기사들이 창고를 일사불란하게 공격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황실 기사들이 서둘러 반격했으나 이미 기세는 한참 기울어진 후였다. 먼저 기다리던 다른 이들도 다 잡혀 있었다.

가까스로 도망친 메레오카 백작과 글리스 남작, 타바누스 영식과 몇몇 기사들이 가쁜 숨을 내쉬며 그저 눈에 보이는 산길을 계속 오르고 달렸다.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계속 쫓아오던 이들이 어느 순간 멈추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감지했음에도 그들은 달리는 걸 멈추지 못했다. 갑작스럽던 상황 탓에 본능이 이성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사실 본능도 고장이 난 상태였다.

그 탓에 바로 옆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매서운 살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컥!”

어둑한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기사를 덮쳤다.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기사는 그대로 짐승에게 목을 물렸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짐승은 으득으득 목을 부러트렸다. 목이 꺾인 기사는 그대로 쓰러졌다.

입가가 피로 흥건히 젖은 채, 맹수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 여유로움이 마치 장난감을 조롱하는 듯했다.

“젠장……!”

기사들이 검을 들고 맹수를 경계했다. 그들 뒤에 있던 세 귀족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런데 다가가던 어느 순간 맹수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다시 북부로 돌아오느라.”

아.

메레오카 백작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그만 실신했다. 하나 누구도 쓰러지는 백작을 받쳐 주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고생들 했어.”

흉포한 위압감이 점점 가까워졌다. 검은 정장 위에 새하얀 글라디고 기사단 망토를 어깨에 두른 펠리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세 귀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글라디고 기사단들이 그들을 빠르게 포위했다. 몇몇 황실 기사들이 반항했으나 쉽게 제압했다. 오히려 글라디고 기사들이 허무할 정도였다. 제압된 황실 기사들은 모두 포박된 채 입에 재갈이 물렸다.

“…….”

타바누스 영식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밧줄로 몸이 묶이고 땅바닥에 무릎이 강제로 꿇리는 와중에, 어떻게 펠리오의 얼굴이 저렇게나 선명하게 보이는지 궁금했다. 하늘 위 달은 다시 구름 속에 갇혔는데 말이다.

오르티오 후작의 마법 때문에 이곳 주변만 밝다는 걸, 타바누스 영식과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궁금하지 않나?”

펠리오가 포박된 그들을 내려다봤다.

무릎 꿇은 그들이 올려다본 펠리오는 무척이나 컸다. 검은 정장과 새하얀 망토가 꼭 북부 산맥을 연상케 했다.

“내가 그대들의 속셈을 어떻게 알았는지.”

펠리오는 설명해 주겠다며 아주 큰 아량을 베풀었다. 최근 레오니에를 데리고 송곳니 훈련을 해 준 탓에 설명에 꽤 도가 텄다고 자신했다.

“속셈이야 아주 쉽게 들통났지.”

유난히 활발했다는 마물 번식기치고는 겨우내 마물 사냥 중에 새끼를 마주치지 못했다. 거기다 겨우내 유난히 난동을 부리던 마물들 모두 출산 흔적이 있었다. 정황이 포착되니 나머지는 너무 쉬웠다.

펠리오는 자신이 없는 동안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인 귀족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귀족 중 중 딱 세 가문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꾸준히 이어왔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뒤에 백조가 있다는 것도.

새끼 마물을 납치하기 위해 동부의 마탑 마법사들을 고용하는 데 도움을 준 것, 황실 기사단을 기꺼이 내준 것도 전부 황실에 숨어든 기생충과 그것에게 감염된 남부의 붉은 백조였다.

“가슴이 벅차올랐겠군.”

백조의 눈에 들었다고 꽤 들떴던 모양이다.

펠리오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서 나도 그 기분을 한 번 더 느끼게 해 주려고 오늘까지 참고 기다렸다.”

당장 잡을 수 있는 걸 지금껏 미룬 건 펠리오가 베푼 잔혹한 친절이었다. 케라타 자작에게 타바누스 상단에 납품하는 수량을 줄였다가 어느 날에 단번에 풀라고 명한 것도. 리네 백작과 레보오 기사들이 기습하면서 그들을 북부로 도망치도록 몰이한 것도.

다만 저들을 북부로 유인한 몰이는 헤스페리 후작과 수도에 있는 티그리아 황후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배려도 한몫했다.

“벅차올랐는가?”

가슴이 아니라 도망친다고 폐부가 벅차올랐지만 말이다.

펠리오가 입가를 비스듬히 비틀었다.

“안 그러면 섭섭할 것 같군.”

전혀 섭섭하지 않아 보이는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원래 말이 저렇게 많으셨나?”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르티오 후작이 입 안에 남은 침을 포박된 죄인들 앞에 퉤, 뱉으며 인상을 썼다. 침에는 피와 털이 섞여 있었다. 짐승의 모습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정말 싫은 짓이었다.

마법으로 죽이면 편할 텐데, 짜증 어린 중얼거림도 덧붙였다.

“아가씨 덕에 부드러워지셨습니다.”

“징그러워라.”

멜레스의 대답에 오르티오 후작이 피식, 비웃었다.

“어쨌건 나도 이번에 큰 빚을 졌어요.”

북부가 맹수의 송곳니란 이능을, 서부가 오러에 특화된 지역이라면 동부는 마나가 풍부하고 마법사들이 많이 태어나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르티오 가문은 대대로 마탑의 주인을 이을 만큼 방대한 마나를 자랑했다. 그 힘으로 오랫동안 동부를 다스렸으며, 최초의 마탑을 세워 마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나 없는 동안 마탑이 많이 더러워졌더라고요.”

오르티오 후작은 펠리오가 전해 준 정보로 마탑 물갈이를 했다. 마탑 지하 감옥에는 마물 불법 거래에 가담한 마법사들을 비롯해 처벌해야 할 자들로 득실거렸다.

“공작님.”

돌아가면 할 일이 산더미인 오르티오 후작이 펠리오를 불렀다.

“밤도 늦었으니 그쯤 하실까요?”

“그러지요.”

펠리오가 선뜻 동의했다. 그 역시 어서 일을 끝내고 레오니에에게 가야 했다. 아이가 서부에서 깽판이라도 치지 않았을지, 혹여 저를 그리워하고 있으면 어쩌나 마음이 심란했다.

그런 탓일까. 펠리오의 등 뒤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붉은 송곳니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하나 송곳니는 그런 적 없었다는 듯 곧 매끄러운 모양으로 다듬어졌다. 글라디고 기사들과 오르티오 후작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 작고 둥그런 입 모양으로 벌려졌다.

“……오싹하네.”

오르티오 후작이 식은땀 한 방울을 흘렸다. 마법으로 만든 보호막으로 주변 기사들과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데도, 맹수의 송곳니 특유의 살기와 위압감이 전신을 날카롭게 찔렀다. 정말 위압적인 힘이었다.

“화가 많이 나신 거지요.”

부단장 모노 역시 기세에 눌려 눈살을 찌푸렸다.

“송곳니를 가장 잘 다루시는 분이, 고작 저 정도 작은 크기에도 살기를 흘리신다는 건 그만큼 화가 나고 조급하단 뜻이지요.”

“조급?”

“저들 때문에 레오니에 아가씨와 떨어져 지내셨거든요.”

응응, 글라디고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에 오르티오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보레오티 공작은 언제부터 딸 바보가 된 건지.

다들 왜 이렇게나 설명을 지나칠 만큼 상세하게 하는지.

하지만 지금 그런 고민은 쓸데없는 것에 불과했다. 오르티오 후작은 송곳니로 포박된 죄인들을 처단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보기 드문 진귀한 장면이었다.

포박된 죄인들은 살기에 짓눌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고, 심한 자는 거품까지 물었다. 맹수의 송곳니가 저들을 완전히 꿰뚫기 직전.

“…….”

펠리오는 바짓가랑이를 적신 무스카 타바누스 백작 영식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레오도 안 하는 실수를…….’

쯧.

나잇살 제법 처먹은 놈이 참 칠칠맞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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