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리네 백작 가족 (5/51)

#5. 리네 백작 가족

리네 백작 가문.

서부에 터를 잡은 가문은 푸른 숲과 들판, 아름다운 호수가 전부라고 여겨졌던 고향에 항구를 세우고, 남부로 집중되던 무역선들을 조금씩 끌어오면서 규모를 키웠다.

또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류 점이 되어 커다란 수익을 창출해냈다.

그런 선조들의 선견지명 덕에, 리네 백작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북부의 보레오티 공작 가문과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펠리오…….”

리네 가문을 이끄는 젊은 백작이 빠르게 지나가는 마차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보레오티 공작의 초대를 받은 카니스는 최근 수도를 강타한 어마어마한 소문의 진위를 직접 확인하고자, 당장 가족들과 함께 북부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 게이트를 통과했다.

“와아!”

“와아!”

적갈색 머리에 초록 리본을 묶은 우피클라 리네와 밀색 머리가 보드라운 두 돌배기 피누 리네가 눈이 새하얗게 쌓인 바깥을 보며 소리 질렀다.

“눈이에요, 눈!”

“누운!”

누나가 소리치자 동생도 따라 외쳤다.

“그러게. 수도는 이제 눈이 다 녹았는데.”

아이들과 함께 창밖을 보던 아비페르 리네 백작 부인도 여전히 겨울을 품고 있는 북부를 보며 감탄했다.

이제 겨울은 다 갔다. 서부만 해도 지금쯤이면 눈이 전부 녹고 가장 이른 봄꽃이 나뭇가지에 봉오리를 맺을 때다. 자신들이 지냈던 중앙 수도도 더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북부만 고집스럽게 겨울을 붙잡고 있으니, 이곳만 다른 세상 같았다.

“아빠, 공작님 집에는 언제 도착해요?”

한참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있던 우피클라가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비페르의 적갈색 머리를 물려받은 귀여운 여섯 살 소녀는 어서 빨리 보레오티 공작이 보고 싶어 몸을 흔들었다.

“얌전히 앉아야지.”

위험하다며 아비페르가 주의를 줬다.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기다려.”

“얼마나 걸려요? 정말 공작님 집에 가는 거예요?”

우피클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꽃받침처럼 감쌌다. 여타 아이들이 펠리오만 보면 기겁하고 자지러지는 것과 달리, 우피클라는 울기는커녕 오히려 펠리오의 얼굴에 반해 사랑에 빠진 꼬마 숙녀였다.

“아찌, 아찌.”

두 돌이 지나면서 말문이 튼 피누도 제 누나처럼 펠리오를 보고도 울지 않는 대범한 아기였다.

“저 북부에 처음 와 봐요.”

“나도! 나도!”

“엄마도 처음 와 봐.”

“아빠는 와 본 적 있어요?”

우피클라가 물었지만, 이번에도 카니스는 답이 없었다.

“아빠가 지금 중요한 생각 중이셔.”

아비페르가 우피클라를 제 옆에 앉히며 조용히 설명했다.

“무슨 생각이요?”

우피클라가 동생에게 과자를 하나 먹이며 물었다. 피누는 다람쥐처럼 야금야금 과자를 녹여 먹였다. 버터를 듬뿍 넣은 쿠키는 한 입 깨물자 사르르 녹았다.

아비페르는 그런 게 있다며 쓰게 웃었다.

‘심란할 테지.’

그리곤 하염없이 창밖에 눈을 고정한 저의 남편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저이 성격에 충격을 안 받을 리가 있나.’

카니스는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고 친목을 맺는 활동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펠리오 보레오티 공작이 유일했다.

작위를 넘어선 두 사람의 우정은 무척 유명했다. 그래서 카니스는 수도에서 펠리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보레오티 공작이 고아원에서 아이를 입양했는데, 그 아이가 무려 공작의 숨겨 둔 연인이 몰래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 거기다 가장 친하다고 자부했던 친구가 저 몰래 연인을 두고, 아이가 있는 것도 모르는 채 방치했다가 가까스로 찾아 공작 가문의 적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카니스는 그날 밤늦게까지 술을 놓을 수 없었다. 심지어 울었다.

“여보.”

보다 못한 아비페르가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제대로 듣지 못한 카니스는 여전히 창문 밖으로 멍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창에 비친 초록 눈동자엔 심란한 감정이 선명했다.

“카니스.”

이름을 불린 뒤에야 카니스가 시선을 움직였다.

“……어, 응?”

“무슨 고민을 그리 심각하게 해.”

“아아, 그냥 좀.”

카니스가 씁쓸히 말했다.

“어째 배신당한 것 같아서.”

말을 마친 카니스가 웃기지 않냐며 자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친한 사이잖아. 그러니 그런 느낌은 어쩔 수 없어.”

“그럴까. 너무 속 좁은 것 같은데.”

“아니야.”

카니스의 굳은 손등 위로 따뜻한 체온이 얹어졌다.

“공작님은 당신한테 전부 말해 줄 거야.”

“…….”

“둘은 가장 친한 사이잖아.”

서운한 감정 하나로 비틀릴 사이가 아니라고 아비페르가 힘주어 말했다. 그제야 겨우 표정을 푼 카니스가 아내를 따라 웃었다.

* * *

리네 백작 가족이 보레오티 영지에 도착하는 동안.

“으으…….”

레오니에는 간만에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엄청난 치장을 당하는 중이었다.

“귀찮게 왜 이런 짓을…….”

코니를 비롯한 하녀들은 케라타 자작 부부가 열었던 다과회에 방문할 때보다 더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는 레오니에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 리네 백작께서 가족분들과 오시는 거잖아요!”

코니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며 눈에 힘을 주었다. 옅었던 쌍꺼풀이 어찌나 진해졌는지, 레오니에는 순간 다른 사람을 보는 줄 알았다.

‘오, 쌍수!’

레오니에가 쓸데없는 감상을 하는 동안, 하녀들이 자신들이 투지를 불태우는 이유를 설명했다.

“리네 백작 가문 하녀들이 얼마나 얄미운지 아세요?”

“그것들이 꼭 공작님을 볼 때마다 자기네 아가씨를 자랑했다고요.”

“뭐, 안 예쁘신 건 아니지만, 그 나이 땐 그냥 다 예쁘죠.”

“공작님을 보고도 울지 않으니 미래의 공작부인이라고 말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랬다. 보레오티 공작 가에 소속된 여자 사용인들, 그러니까 하녀 대부분은 공작저에서 하는 일이라곤 언제나 청소, 청소, 청소뿐이었다. 사실 그게 주 본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상, 주인 저택의 마님과 어린 아가씨, 도련님들을 돌보는 일도 하고 싶었다. 예쁜 옷과 장신구로 주인분들을 꾸며주는 것 역시 하녀들의 특권이기도 했다. 그래서 콧대를 높이며 시비 거는 리네 백작 소속 하녀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저희에게 아가씨가 나타났어요!”

하녀들이 동시에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레오니에가 몸을 흠칫 떨었다. 고아원에서 처음 펠리오의 송곳니를 느꼈을 때보다 더 무서워서였다.

“아가씨께선 리네 백작 영애보다 훨씬 예쁘고 사랑스러우세요!”

“검은 맹수가 한낱 개한테 질 수 없죠!”

“기합 팍팍 넣는 거예요!”

“우리 아가씨가 이길 게 분명해요!”

승리를 확신한 하녀들이 다시 레오니에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언니들이 드디어 정신을 놨군…….’

중간에 엄청 아슬아슬한 말이 섞였던 것 같지만, 레오니에는 못 들은 척했다.

‘북부 지형이 문제인 걸까?’

레오니에는 이쯤 되면 북부에 과연 정상인이 얼마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북부 사람들이 호전적이라는 특성은 비단 귀족 가문만이 아니라 일반 평민들에게도 적용되는 특징인 듯했다. 그러면 북부 땅에 다른 지역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레오니에는 그런 생각을 하며 힘겨운 치장에서 현실 도피를 한참 동안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휴우.”

코니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훔치며 거울에 비친 아가씨를 향해 비장한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 있던 하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벽해요!”

어느새 대장이 되어 버린 코니를 따라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했다.

“…….”

정작 거울 속 레오니에는 죽상이었다.

검은 머리는 새하얀 레이스를 얽어 가닥가닥 땋고, 양옆으로 동그랗게 말아 묶었다. 어린이용 화장수를 얼마나 꼼꼼하게 발랐는지, 피부에서 윤이 나다 못해 광선이 쏟아질 정도였다.

그리고 장작 두 시간 동안 갈아입었던 수많은 옷 중에서 가까스로 드레스 한 벌이 선택받았다. 마치 흰 눈이 쌓인 북부 산맥처럼 위는 흰색, 아래는 검정이였다. 치마에는 새의 깃털처럼 보송보송한 장식이 꼼꼼한 바느질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 번 돌아 보세요.”

레오니에가 퀭한 눈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드레스 자락이 구름처럼 흔들렸다.

그렇지! 아자!

곳곳에서 하녀들의 굳센 함성이 들렸다.

마무리로 희고 검은 두 색이 만나는 허리 부근에는 허리띠로 쓰는 커다란 리본을 둘렀다. 목에는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리본을 옆으로 묶어 매듭지었다.

‘이번엔 리본이냐…….’

지난번 케라타 자작 부부의 다과회에서는 레이스로 전신을 덮더니, 이번에는 리본으로 칭칭 감아 버렸다. 심지어 치맛자락 밖으로 가까스로 드러난 구두에도 리본이 장식되어 있었다.

레오니에가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불편해…….”

걸을 때마다 구두에 치맛자락이 걸리적거렸다. 레오니에는 결국 예절 수업에서나 했던,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기를 해야 했다. 수치스러웠다.

“아가씨, 꼭 이기셔야 해요!”

“화이팅!”

하녀들이 뒤에서 힘찬 응원을 날렸다.

“나 가지고 경쟁하지 마…….”

싸울 거면 언니들끼리 머리 쥐어뜯고 싸우라는 말을, 레오니에가 목구멍 깊숙이 집어삼켰다.

* * *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평상시와 다름없는 차림을 한 펠리오는, 평상시와 전혀 다른 차림을 하고 내려온 레오니에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코니랑 다른 하녀 언니들이 꾸며줬어.”

레오니에는 걷기 힘드니까 안아달라고 팔을 뻗었다.

“인형 놀이 당했네.”

펠리오가 아이를 안으며 현관 앞으로 갔다. 현관문 앞에는 이미 리네 백작을 맞이하려고 나온 사용인들이 대기 중이었다.

“옷 이상해?”

“잘 어울린다.”

“난 별론데…….”

레오니에가 치맛자락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불만을 내비쳤다.

“가끔 이렇게 입고 다녀.”

진심을 담아 칭찬한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이내 배시시 웃더니 보답으로 아빠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덕분에 기운이 났다.

“하녀 언니들이 나보고 지지 말래.”

“뭘 져?”

“리네 백작 영애한테.”

무슨 소리인지 몰라 잠시 말이 없던 펠리오가 짧은 깨달음을 담은 소리를 냈다.

“뭔지 알겠군.”

그리곤 그 역시 백작 영애에게 지지 말라고 웃으며 농담했다.

“걔 성질머리 더러워?”

“아니, 그런 거 말고.”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주먹 쥔 손을 내리며 말했다.

“……하긴.”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안은 팔을 고치며 입가를 비스듬히 올렸다.

“네가 질 일은 없지.”

우리 딸이 어디서 쉽게 질 성격은 아니지.

“역시 성질머리가 보통이…….”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어흠, 펠리오가 고개 돌려 헛기침을 몇 번 토했다.

“그 집 애가.”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아빠를 많이 좋아한다.”

“뭐?”

“아빠가 여러모로 먹히는 얼굴이거든.”

“…….”

레오니에는 기가 막힌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먹히는 얼굴을 하신 아빠께선 고아원과 다과회에서 본인 등판만으로 애들을 자지러지게 울렸던 건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었다.

‘……응?’

소금에 절여 삼투압 된 배추 같은 얼굴이던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였다.

‘뭐야?’

레오니에는 설마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천하의 펠리오 보레오티가, 웃는 아이도 기절시키는 북부의 검은 맹수가 자기 딸한테 저 인기 많다고 자랑하는 건 꿈에서도 못 볼 일이었다.

레오니에는 순간 자신이 헛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아빠는 딸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고 있다. 꼭 칭찬받고 싶은 커다란 맹수처럼.

‘……정말로?’

레오니에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정말 나보고 질투하라고?’

세상에나, 레오니에가 진심으로 놀랐다.

지난번 송곳니 훈련 이후부터,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저를 대단하다고 칭찬하거나,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봐주는 것을 은근슬쩍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격은 수많은 감정 중 가장 흐뭇하고 행복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성격상, 그런 걸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건 또 싫었다.

그런데 마침 예전부터 저를 잘 따르던 친구네 딸이 온다는데, 여기서 레오니에의 질투를 아주 조금 유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비록 레오니에의 정신 연령이 인생 다 산 50대 같은 애늙은이라고 해도, 펠리오는 아이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확신했다.

‘오호, 요 아빠 보소.’

레오니에가 입가를 씩 올렸다. 펠리오도 따라 웃었다. 뜻이 통한 부녀는 눈만 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지 마.”

“지면 서운해?”

“조금?”

“그럼 아빠 하는 거 보고.”

그러나 이미 레오니에의 마음속에서는 승부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지킨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여섯 살 꼬맹이 따위는 한 입 거리도 안 되었다. 레오니에는 정신 연령부터 이미 한 수 이기고 들어가는 꼴이라며 자신했다.

“아빠.”

레오니에가 승리를 기원하듯 펠리오의 어깨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펠리오의 커다란 손이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아아.’

‘세상에나.’

‘우리 저택에서도 저런 따뜻한 장면이…….’

‘기적이 일어났어…….’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사용인들이 맹수 부녀를 향해 감히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펠리오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어리광부리는 레오니에는, 마치 아빠 맹수의 크고 넓은 품 안에 기어들어 가 곤히 안긴 아기 맹수를 연상케 했다. 그릉그릉, 목 우는 환청까지 들릴 정도였다.

“……흑.”

심지어 카라는 안경까지 벗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항상 차갑던 보레오티 공작저에 진정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빠 어깨에 턱을 기댄 레오니에가 힐끔 눈을 내렸다.

‘……승모근도 튼실하네.’

역시 우리 아빠야.

안타깝게도, 보레오티 공작저에 불어온 따스한 봄바람에는 어린 아가씨의 변태스러운 사적 취향이 섞여 있었다.

* * *

“……어째 개 같네요.”

리네 백작 가문의 짐을 옮기던 보레오티 사용인 중 한 명이 마차에 그려진 리네 가문의 문장을 가리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개 맞아.”

“예? 정말요?”

놀란 사용인이 리네 가문의 문장을 다시 살펴봤다. 어쩐지 사람 무척 잘 따르고 좋아할 것 같은 견종의 옆모습이, 어째 막대기나 공을 던져 몇 번이고 놀아 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만큼 사랑스럽고 친근했다.

“그러니 리네(개) 백작이지.”

“아아…….”

“알았으면 어서 짐이나 옮겨.”

쓸데없이 말이 많은 후배의 뒤통수를 매섭게 때린 선배가 재촉했다.

보레오티 사용인들이 리네 백작 가족들의 짐 마차를 옮기며 그들 가문의 사용인들과 얼굴을 익히는 동안, 집사 카라가 리네 백작 가족을 먼저 맞이했다.

“오랜만이야, 카라.”

카니스가 두 팔 벌려 카라를 덥석 안았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카라가 오시는 길 힘들지 않았는지 여쭈었다. 물어보는 말투에 걱정이 그득 담겨 있는 건, 실제로 카니스의 눈 아래로 새까만 그늘이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펠리오가…….”

카니스가 머뭇거리다 조심히 물었다.

“……아이를 데려왔다던데.”

으이구, 보다 못한 아비페르가 카니스의 팔을 잡아 제 옆으로 오게끔 끌어당겼다.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에는 주책이라는 질책이 한껏 서려 있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능한 집사 카라는 주제넘게 자신이 설명하는 대신, 직접 저택에 들어가 확인할 수 있도록 몸을 움직였다.

‘진정하자.’

카니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와아! 크다아아!”

“커! 커어!”

우피클라와 피누가 하늘 높은 공작저를 보며 소리 질렀다. 옆에서 폴짝거리는 산만한 아이들의 목소리도, 그렇게 떠들면 예의가 아니라고 잔소리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카니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새하얀 눈과 대비되는 검은 지붕과 세월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색이 바랜 벽.

눈앞에 있는 보레오티 공작저는 몇 번이나 와 본 친숙한 곳인데, 오늘만큼은 낯설고 무서웠다. 카니스는 처음 느껴보는 공작저의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혔다.

‘괜찮을 거야.’

후우, 카니스가 숨을 들이켰다. 북부 특유의 싸늘한 공기가 몸속 깊숙이 들어왔다. 덕분에 카니스는 마차 안에서보다 훨씬 진정할 수 있었다.

‘펠리오 네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자기 관리에 철두철미했던 친구가 사생아를 두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충격이지만, 그래도 당장 눈앞에 펠리오가 있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차분해졌다.

‘너도 많이 당황했겠지.’

카니스는 우피클라가 처음 태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무척 고대한 첫 아이와의 만남이었음에도, 카니스는 서툴고 어설픈 아빠였다. 마음의 준비를 10개월 가까이 한 저도 그랬는데, 갑자기 아빠가 된 친구는 더했을 거다.

그런 친구가 제게 사정을 설명할 정신이나 있었을까, 카니스는 먼저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혼자 서운하고 배신감을 느꼈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도.

‘내가 삼촌으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야지.’

카니스는 얼굴도 아직 모르는 조카를 걱정하며 듬직한 삼촌이 되어 주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한 지 고작 1분도 안 되었다.

“으허허허헝! 으허헝!”

카니스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자신들 가족을 맞이하러 나온 펠리오를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으아아앙!”

아빠의 우는 모습에 깜짝 놀란 피누도 따라 울음을 터트렸다.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하던 카니스가 우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었다. 큰딸 우피클라는 은근슬쩍 아비페르 옆으로 도망쳐 모르는 사람인 척했다.

“왜 이래, 진짜!”

남의 집에서 무슨 추태냐며, 아비페르가 작작 좀 하라고, 얼굴을 붉히며 잔소리했다. 아무리 남편을 사랑해도, 남의 집 현관 앞에서 엉엉 우는 주책까지 이해하고 보듬어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널 믿었는데! 믿었다고!”

“믿었으면 울지 마!”

“그런데 왜 그런…….”

카니스가 눈물로 젖은 초록빛 눈을 끔뻑거렸다. 청승맞은 눈물로 얼룩진 초록 눈이 펠리오의 품에 안긴 레오니에를 향했다.

“으아아아앙!”

카니스가 더욱 오열했다.

“힉!”

식겁한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목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숨겼다.

“저런 미친, 아니, 이상한 아저씨라고 말 안 했잖아!”

그래도 아빠 친구라고 욕은 안 했다.

“…….”

펠리오는 말이 없었다. 기실 지금 이곳에서 누구보다 당황한 건 펠리오였다. 친구라곤 저놈 한 명뿐인데, 잠시 안 본 사이에 저렇게 사람이 변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알았으면 절대 레오니에에게 보여 주지도 않았을 거다. 가뜩이나 애 속이 늙은 게 걱정인데, 저 모습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받으면 큰일이었다. 그는 평생 안 오던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보레오티 공작님.”

웬 여자아이가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우피클라.”

펠리오가 몸을 살짝 낮췄다. 덩달아 레오니에의 시선도 내려갔다. 붉은 갈색 머리를 예쁘게 정리한 여자아이가 초록빛 눈을 깜빡거렸다. 카니스와 아비페르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 우피클라 리네였다.

우피클라가 아기 여우처럼 새초롬하고 귀여운 얼굴로 예를 갖춰 인사했다.

“우피클라 리네라고 합니다. 오늘 저희를 보레오티 공작저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동안 신세 지겠습니다.”

제 아빠랑 엄마가 저러고 있는 동안, 야무진 첫딸이 눈치껏 먼저 저택의 주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영애.”

펠리오는 아주 조금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이야, 너 잘 배웠네.”

인사 야무지게 하는 거 봐. 레오니에가 대견하단 듯 칭찬했다.

“…….”

그러자 우피클라가 레오니에를 빤히 바라봤다.

“…….”

레오니에도 우피클라를 빤히 바라봤다.

두 아이는 얼떨결에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린 애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는 것뿐인데, 두 아이 주변을 감도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 갔다. 펠리오도 놀랐고, 레오니에 당사자도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마치 저를 탐색하는 듯한 초록 눈동자엔 빈틈이 없었다. 피할 이유가 없어서 같이 노려보고는 있는데, 도대체 처음 만나는 아이가 제게 왜 저런 눈을 하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현관 홀은 눈보라 치기 직전의 새벽처럼 고요했다.

주책스럽게 울던 카니스도 어느새 울음을 그친 채였다.

“……정말 공작님 딸이야?”

우피클라가 먼저 물었다.

“……그런데?”

어째 들리는 말투가 아니꼬워서, 레오니에는 저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난 나중에 커서 공작님이랑 결혼할 예정이야.”

우피클라가 당돌한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니 내가 네 엄마가 될 거야!”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 나한테 잘 보여!”

그러면 엄마가 되어 주겠다며, 우피클라가 선심 쓰듯 말했다.

“뭐 저런 미……!”

“……먼 길 오시느라 손님들이 많이 지치셨을 거다.”

어서 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펠리오가 거친 말투를 내뱉으려는 레오니에를 서둘러 막으며 주인으로서의 예를 지켰다.

꿈도 희망도 없는 환영식이었다.

* * *

우피클라가 레오니에의 새엄마가 될 테니 잘 보여야 한다는 공개 발언은 이미 저택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발 없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격언은 어느 곳에서나 똑같았다.

그만큼 엄청난 소동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걔 엄청 혼나던데.”

레오니에가 제게 잠옷을 입혀 주는 코니에게 말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답니다.”

코니가 단추를 잠가주며 쓰게 웃었다. 당시 레오니에와 펠리오 뒤에 있던 코니는 어마어마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어깨를 아주 희미하게 떨었다. 소스라칠 정도로 섬뜩했던 아비페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해!’

아무리 우피클라가 여섯 살 꼬마라고 해도, 공작 영애께 감히 말을 낮추고 무례한 발언을 한 건 아주 큰 잘못이었다. 아비페르는 그 자리에서 딸아이를 크게 혼냈다.

상냥했던 귀부인은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렸고, 우피클라는 꼬리 만 강아지처럼 훌쩍거렸다.

‘너도 창피하니까 그만 울어!’

불똥은 카니스에게도 튀었다.

내가 진짜 공작님과 영애 볼 면목이 없다며, 아비페르가 참았던 열불을 그 자리에서 터트렸다. 기어코 우피클라가 울음을 터트리니 가까스로 눈물을 그쳤던 막내 피누가 따라 울고, 카니스는 더욱 오열하며 삼중창을 노래했다.

‘……서부도 저래?’

북부만큼 미쳤어?

레오니에가 슬쩍 펠리오에게 속닥거렸고.

‘…….’

펠리오는 천장만 바라봤다.

“……환영식이 아니었어.”

레오니에가 고쳐 말했다.

“환장식이었지.”

그것도 개난장판이었다. 처음으로 아빠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빠랑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건, 리네 백작 아저씨 덕분이었는데.”

카니스는 더 없는 은인이었다. 그의 자식 자랑이 없었다면 펠리오는 충동적으로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레오니에는 지금도 지하 감옥에서 머무는 고아원 어른들에게서 지독한 학대를 받고 살았을 거다.

‘원작에서도 엄청 멋있었고.’

가족들을 사랑하며, 펠리오를 도와주는 근사한 조력자로 묘사되었건만, 실상은 친구 얼굴 보자마자 울음부터 터트리는 주책바가지라니.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다.

“……혹시 아빠를 좋아하나?”

레오니에는 저의 뛰어난 추리력에 입을 헉, 하고 벌렸다.

루페에 모노, 거기에 카니스까지.

“역시 그런 거였어!”

레오니에가 발딱 일어났다.

“아가씨, 제발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시지 마세요.”

코니가 레오니에를 도로 앉혔다.

“그치만 상황이 그렇잖아!”

“전혀 아닌데요?”

“아빠가 너무 잘생겨서 남자들이 꼬여!”

“아니라니까요?”

코니가 감히 정색했다.

* * *

“……너는.”

펠리오가 소파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이마와 눈가를 쓸며 중얼거렸다.

“결혼 진짜 잘한 줄 알아라.”

후우, 묵직한 한숨이 집무실 융단을 짓누를 만큼 길게 내려졌다.

“…….”

건너편에 앉은 아비페르가 침묵으로 동의했다. 이상한 데서 합심한 두 남녀는, 눈가가 시뻘겋게 짓무른 채 여전히 훌쩍이는 카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펠리오는 그냥 이대로 카니스를 쫓아 버리고 싶단 충동이 아주 잠깐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꼴에 친구라고.

“자녀분들은 어쩌고 있습니까.”

친구 녀석이 머리를 잠시 식히는 동안, 펠리오가 아비페르에게 물었다. 저도 이제 딸을 둔 아빠라고, 아비페르에게 눈물 쏙 빠지도록 혼나 풀이 팍 죽은 우피클라가 마음에 걸렸다.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아비페르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다 저희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영애께 감히 그런 망언을…….”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레오니에에겐 비밀이지만, 펠리오는 제 딸에게 큰 한 방 먹인 우피클라가 꽤 신선했다.

“요즘 우피가 계모가 나오는 동화책에 푹 빠졌거든요…….”

아비페르 말로는, 계모에게 박대당하는 소녀가 주인공인 동화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새엄마란 존재는 다 양딸을 괴롭히는데, 저는 그러지 않겠단 의도로 레오니에에게 그런 말을 했었단다.

펠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똑똑하군요.”

여섯 살이 동화책을 읽고 계모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자신이 공작과 결혼하면 레오니에의 계모가 된다는 응용까지 해 버리다니.

솔직히 놀랐다.

‘그 나이치곤 말이지.’

하나 레오만큼은 아니야. 펠리오는 바로 제 딸과 비교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에는 책을 읽다가 부조리한 부분이나 설명이 나오면 바로 반박하면서 법률적으로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이에 따른 사회 문제까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

아비페르가 조용히 놀라움을 삼켰다,

‘세상에나…….’

항상 무미건조하게 다물렸던 공작의 입꼬리가 눈에 띌 정도로 짙은 호선을 그렸다. 감정을 비치지 않던 검은 눈동자엔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따뜻한 온기마저 머금었다. 보름달이 은은히 빛나는 검은 밤하늘처럼.

펠리오를 보면 잘생겼단 감탄보다 위압감을 먼저 느꼈던 아비페르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잊어버렸다.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였다.

“아비…….”

다행이라면, 옆에서 훌쩍이는 남편 소리에 가까스로 피가 식었다는 거다.

“다 울었어?”

그래도 아직 눈에 콩깍지가 남아서, 아비페르는 손수건으로 남편의 눈가를 톡톡 두들겼다. 카니스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처연히 끄덕였다. 훌쩍이는 모습이 나이를 먹어도 어찌나 귀여운지, 아비페르는 저도 모르게 등을 토닥거렸다.

“나는, 그냥 좀, 실망했어…….”

눈물에 젖은 초록 눈이 펠리오를 원망스레 바라봤다.

“실망할 것도 없다.”

정작 펠리오는 시큰둥했다.

“도대체 누구랑 언제 그런 만남을 가진 거야!”

“몰라.”

펠리오가 목덜미를 쓸었다.

그는 과연 카니스에게 레오니에의 출생에 대해 말해 줘도 될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저래 보여도 일단 입이 무겁고 신뢰할 만한 성정이니 말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레오니에에게 물어보는 게 먼저였다. 당사자인 아이한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다. 특히나 레오니에처럼 생각이 깊고 똑똑한 아이는 자신이 제대로 생각해서 대답할 테니, 펠리오는 거기에 따르기로 했다.

“난 네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싸지를 줄 몰랐다고!”

“나도 몰랐다…….”

그러니 펠리오는 기꺼이 무책임하게 제 흔적을 싸지른 쓰레기로 전락했다.

“빨리 찾을 걸 그랬지.”

이 말만큼은 펠리오의 진심이었다.

레오니에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죄책감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레지나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았을 사촌이었다. 지옥에서 금방 구해낼 수 있었던 조카였다. 그랬더라면 저 아이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래야 했어.”

죄책감이 드리운 펠리오의 목소리에 카니스와 아비페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애께서 공작님을 많이 닮았어요.”

아비페르가 조심히 말을 걸었다.

“두 분이 서로의 귀에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이 어찌나 다정하고 보기 좋았는지 몰라요. 특히 영애께서 공작님 품에 편히 기댔잖아요.”

사이 좋은 부녀 그 자체였다.

진심 어린 아비페르의 한마디에 펠리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흑, 나한테 말해 주지.”

“다 울었냐?”

“다 잘 지내서 다행이야.”

카니스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가 맹수 부녀를 보자마자 울어 버린 건, 펠리오가 진정 자식을 소중히 아끼는 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고 배신감이 느껴지는 건 둘째치고, 카니스는 혹여 펠리오가 제 성질머리대로 아이를 대할까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친우는 아이를 소중히 아꼈고, 아이 역시 제 아빠를 잘 따랐다. 그늘 한 점 보이지 않는 두 맹수 부녀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져 버렸다.

본인도 주책이란 자각은 있는지라 뒤늦게 창피함이 찾아왔다. 그러나 두 사람을 향한 진심만큼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펠리오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단 한 순간도 본 적 없던 밝은 모습이었다.

“다행이야.”

목 아래까지 새빨개진 카니스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청승맞은 눈물을 지운 초록 눈에 날 선 이채가 스쳤다. 조금 전까지 주책맞던 카니스는 마치 모든 것이 연기였단 듯 자세를 고치고 심각한 표정으로 펠리오를 응시했다.

펠리오는 대답 대신 제 뒤의 책상 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체스판이…….”

아비페르 역시 같은 곳에 시선을 두었다.

“……난장판이군요.”

언뜻 보이는 체스판 기보를 읽은 아비페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질색했다.

“서부가 기생충에 감염됐잖아.”

중얼거리는 아비페르의 파란 눈이 가늘어졌다. 눈동자에 서린 날카로운 감정은 서부를 감염시킨 기생충을 어떻게든 죽여 버리고 싶다는 분노뿐이었다.

“…….”

카니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역시 펠리오가 자신들을 부른 이유에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어쩐지.”

무언가 이해가 된 듯, 카니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히르쿠스 남작이 요즘 묘하게 우리 상단과 부딪히더라니.”

“북부와 서부 경계선에 있는 물류 창고에서?”

파르두스 후작에게 들은 바가 있는 펠리오가 물었다.

“맞아. 얼마 전에도 물류 창고 관리 문제로 말이 많았어.”

“어떤 식으로?”

“가장 구석진 구역을 통째로 누군가에게 빌려줬지. 거기다 창고 관리직도 아닌 다른 용병들이 빌린 구역과 그곳 근처까지 위협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종종 상단 직원들이 창고에 보관한 물품 보안을 위해 용병을 고용해 경비를 세우는 건 절차만 거치면 크게 문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작은…….”

떨떠름히 입술을 깨물던 카니스가 아비페르를 바라봤다.

“……너무 지나쳤지.”

카니스의 말에 동의한 아비페르가 이어 말했다.

“물류 창고 관리는 엄연히 서부의 주인이신 헤스페리 후작님의 영역이에요. 만일 이 일을 헤스페리 후작님께서 아신다면 바로 조사에 들어갔을 거예요.”

“히르쿠스 남작이 위로 올라가는 보고서를 조작했다?”

펠리오가 비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에 아비페르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럴 수도 있죠.”

글쎄, 펠리오는 회의적이었다.

“남작한테 그 정도 지위는 없을 텐데.”

“그럼 다른 새끼가 또 있다고?”

“아비,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니면.”

툭,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시선을 모았다.

“알고 있으면서 묵과한다?”

펠리오의 추측에 리네 백작 부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유감스럽게도.”

그리 유감스럽지 않은 목소리로, 펠리오가 현 황실 사정을 간단히 정리했다.

“호랑이가 궁지에 몰려 있으니.”

황제가 황후를 곁에 두고 있는 한, 헤스페리 후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어쨌건 리네 백작 가족은 보레오티 공작의 귀한 손님이었다.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보레오티 사용인들도 오랜만에 맞이하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레오니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자리는 편안하셨나요?”

아침마다 리네 백작 가족의 안부를 살폈다. 귀한 손님들의 아침 안부를 묻는 일은 본디 가문의 안주인인 공작부인의 일이었다. 그러나 보레오티 공작이 미혼인 탓에, 레오니에가 이를 대신 수행하는 중이었다.

나무랄 곳 없는 아이의 움직임에 아비페르가 감탄했다.

“어쩜, 자세가 너무 바르네요.”

“보스그루니 백작이 제 예절 선생님이세요.”

“사교계에서 무척 유명한 분이시죠. 그분이 찻잔만 들어도 수많은 영식이 기절할 정도란 소문이 파다합니다. 수도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시지요.”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하나 천진난만한 미소 뒤로 살 떨리는 공포가 스쳤다.

‘……진짜 찻잔으로 사람 죽였나 봐.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없어!’

레오니에는 지난번 보스그루니 백작 부부의 싸움을 떠올렸다. 아마 백작은 영애 시절에 찻잔으로 수도를 제패했던 모양이다.

“부인께서도 그러셨을 것 같아요.”

레오니에 눈에는 아비페르도 보스그루니 백작과 비슷했다. 딸과 남편을 혼내던 백작 부인은 무패를 자랑하는 투견과 견줄 정도였다.

다행히 아비페르는 레오니에의 두려움 섞인 진심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첫 만남 때문에 첫인상이 그렇게 잡히긴 했지만, 아비페르 리네 백작 부인은 기본적으로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레오니에는 다정한 아비페르를 보고 있자니 고아원에서 저를 돌봐 주던 코니에가 떠올랐다. 그러자 또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우피클라와 피누 남매가 졸린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안녕?”

레오니에가 먼저 인사했다.

피누는 아직 낯을 가리는지 게걸음을 치더니 슬금슬금 아비페르의 품에 쏙 숨었다. 포근히 안긴 뒤에야 오동통한 단풍잎 손을 내밀어 작게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반면 우피클라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지난번 새엄마 발언으로 아비페르에게 쥐 잡듯 혼난 뒤로 레오니에를 볼 때마다 저리 기가 죽었다.

레오니에는 보고 있자니 가슴이 짠했다.

“얘.”

키 작은 일곱 살 언니가 키 큰 여섯 살 동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비록 첫인상이 개…….’

개 같다고 생각했던 레오니에가 곧 생각을 바꿔 먹었다.

어쨌건 상대는 아직 어린 여섯 살 꼬마 아가씨다. 정신 연령은 레오니에가 한참 높았고, 그걸 제외하더라도 우피클라보다 연장자였다. 언니로서 아빠 친구의 딸을 챙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나도 너한테 미안한 게 있어.”

레오니에가 연장자답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너한테 미쳤냐고 욕할 뻔했거든.”

뒤에서 두 꼬마 숙녀를 훈훈하게 지켜보던 아비페르가 입을 쩍 벌렸다. 기함하는 백작 부인을 바라보는 코니는 자기가 속된 말을 한 것처럼 죄송해져 안절부절못했다.

“미쳐? 미쳐?”

피누가 놀란 엄마의 턱을 만지며 앵무새처럼 따라 말했다.

“그, 그거 나쁜 말인데!”

똑똑한 우피클라는 나쁜 말을 바로 알아차렸다. 귀하게 자란 아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존대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래서 사과하잖아.”

정작 나쁜 말 한 레오니에는 꿉꿉했던 속을 털어내 가뿐했다.

“네가 불쌍해서 한마디 하는데, 새엄마가 뭐 쉽게 되는 줄 알아?”

“고, 공작님이랑 결혼하면 제가 새엄만데요?”

“결혼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지?”

안타까움이 가득한, 끌끌 혀 차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세상은 말이야.”

속이 시커멓게 찌든 내일모레 정신 연령 서른이 세상 물정 아직 모르는 여섯 살에게 현실을 가르쳐 줬다.

“마냥 쉬운 게 아니야. 현실은 혹독한 법이지.”

“혹독?”

“너랑 우리 아빠가 나이 차만 스물이 넘어. 무슨 뜻인지 알아?”

도리도리, 우피클라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우리 아빠를 사랑한다는 건, 우리 아빠를 천하의 변태로 만드는 거야. 세상에, 스무 살 차이라니! 누구 허파 뒤집을 일 있니?”

코니는 다른 건 몰라도 리네 백작 부인의 허파가 뒤집히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이젠 아비페르가 어떤 얼굴인지 보지 못할 정도로 죄송했다.

“그, 그치만…….”

첫사랑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우피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누가 그래?”

“도, 동화책…….”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이 자리에 없는 게 안타까웠다. 한때 저의 동심을 되찾아 주겠다며 노력했던 펠리오가 저 말을 듣는다면 아직도 방에 미련처럼 남아 있는 동화책을 다 버려 줄지도 모르는데.

동화책은 금서보다 더 위험했다.

레오니에는 문득 사랑에 환장해서 가출하고 애만 덜컥 낳은 친모가 떠올랐다. 그러곤 지끈거리는 목덜미를 슬금슬금 손으로 쓸었다. 허망한 동심에 빠져 사는 건 이젠 죽고 없는 레지나 한 명으로 족했다.

“너 이리 좀 와 봐.”

제게 오라며 까닥까닥 손짓하는 모양새가 꼭 애먼 사람 골목으로 부르는 부랑배 꼴이었다.

겁먹은 우피클라가 아비페르를 한 번 쓱 봤다. 그러나 아비페르라고 별수 없었다. 레오니에는 좋은 취지로 오라 부른 거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레오니에가 보레오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언니가 좋은 거 가르쳐 줄게.”

우피클라는 펠리오의 하나뿐인 친구인 카니스 리네 백작의 귀한 영애이자, 2대 공작과 4대 후작 가문 다음으로 부유한 리네 백작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바른길로 인도할 필요가 있었다.

레오니에는 선심을 크게 썼다.

“잘 들어.”

인생이란 말이지.

레오니에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 * *

벨리우스 제국은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황실과 수도가 자리한 중앙을 중심으로 이국적 특색을 갖춘 동부. 푸른 숲과 호수가 아름다운 서부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반짝이는 남부. 그리고 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을 등진 북부.

그중 서부는 무인들의 성지라 불린다. 서부 아이들은 날 적부터 장난감 검을 지니고, 동네마다 한 명씩 있는 검술 선생님에게 글자를 배우듯이 검술을 배운다. 귀족들은 비싼 돈을 주고 현역 기사를 가정 교사로 들이기도 한다.

“……그리고.”

펠리오가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으며 제 앞에 쪼르르 모인 아이 셋을 바라봤다.

“제국에 셋 있는 기사단 중 하나가 헤스페리 후작 가문에 속해 있지.”

검은 머리를 위로 쨍쨍하게 묶은 레오니에와 다갈색 머리를 양쪽으로 동그랗게 말아 묶은 우피클라, 밀색 머리를 가까스로 올려 묶다 보니 사과 머리가 된 피누까지.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사이가 좋아졌나?”

리네 백작 가족이 보레오티 저택에 머문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첫 만남이 그랬던 탓에 친해지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우피클라와 피누 남매는 레오니에 뒤를 항상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의남매 맺었어.”

레오니에가 엄지를 척 들었다. 하는 짓이 꼭 술 취한 아저씨 같았지만, 펠리오는 이제 그런 위화감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제 딸을 보통 아이들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수많은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 덕에 독특한 부녀 관계가 형성되었지만, 펠리오는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보레오티만의 가족이었다.

“어떻게?”

도대체 애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펠리오가 물었다.

“내가 인생이 뭔지 가르쳐 줬어.”

“백작 부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펠리오가 바로 옆에 있던 아비페르에게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데!”

작고 둥근 주먹이 펠리오의 탄탄한 허벅지만 골라 때렸다.

“……괜찮습니다.”

활동성 좋은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아비페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아비페르는 레오니에가 말하던 인생론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레오 언니가, 첫사랑은 아픈 거라고 했어요.”

언니라고 부를 만치 레오니에를 존경하게 된 우피클라가 비장한 눈빛을 했다. 그러나 펠리오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련함이 깃들었다.

“아파야 어른이 된대요.”

첫사랑에 꺾여 본 사람만이 성숙한 어른이 되고,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안다면 떠나보내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 우피클라는 언니의 가르침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제가 공작님 포기할게요.”

모두를 위한 결정이에요.

비장한 목소리가 담담히 이별을 고했다.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눈치껏 입 다물고 있으라는 펠리오의 살벌한 시선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힘들었을 거다.

“배려해 줘서 고맙습니다.”

펠리오는 어린 영애의 이별을 받아들였다.

곧 훈련복 차림을 한 카니스가 훈련장에 도착했다.

“……저 아저씨 없을 때 차여서 다행이네.”

아무것도 모르는 미소를 흠뻑 짓는 카니스를 보며,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속닥거렸다. 펠리오는 딸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동의했다.

“오늘은 백작 부인이 검술을 가르칠 거다.”

“그럼 아빠는?”

“공작님은 제게 잠시 빌려주시면 어떨까요?”

카니스가 펠리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요?”

레오니에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넌 가서 훈련이나 받아.”

펠리오가 또 쓸데없는 오해를 하는 딸의 등을 아비페르가 있는 쪽으로 툭 쳤다. 쓸데없는 오해 말고 훈련이나 받으란 뜻이었다. 아비페르 쪽으로 밀린 레오니에는 연무장 위로 올라가는 두 성인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수상해…….”

“어디가요?”

아비페르가 목검을 건네며 피식 웃었다.

“우리 아빠 주위엔 남자가 넘쳐요.”

“아아…….”

그쪽이었구나. 아비페르가 목검을 연필처럼 가볍게 굴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도 연애할 때 조금 의심은 했어요.”

“역시나!”

루페와 모노의 뒤를 이어, 카니스 역시 레오니에의 주의 대상 순위에 올랐다.

“이제 집중할까요?”

그간 레오니에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아비페르가 익숙하단 듯 레오니에를 아이들 속으로 보내며 목검을 쥐여 주었다.

아비페르의 검술 강의는 무척 간결했다.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시범을 보여 주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반복 연습을 이어 갔다. 레오니에는 배운 대로 열심히 움직였다.

반면 우피클라는 능숙하게 검을 휘두르며 응용 동작까지 연습했다. 피누도 두 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검 쥐는 손이 능숙했다.

“부인은 기사인가요?”

레오니에는 아비페르의 실력에 감탄했다.

“서부 출신은 대다수가 검을 배운답니다.”

“우리 할아버님, 엄청 센 기사에요!”

“기사!”

우피클라와 피누가 끼어들며 자랑했다.

“무려 긍지 높은 레보오 기사단이에요!”

수도에 황실 기사단, 북부에 글라디고 기사단이 있다면, 서부에는 레보오 기사단이 있었다. 역사만 따진다면 수도와 북부보다 훨씬 오래된 유서 깊은 곳이었다.

“우와아아아!”

그때, 연무장 위에서 엄청난 환호가 터졌다. 동시에 엄청난 기백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아비페르가 아이들을 제 뒤로 보내며 그 위를 바라봤다.

“대련 중인 모양이에요.”

“누가요?”

레오니에는 어안이벙벙했다. 기사들이 저렇게 흥분하는 건 처음 봤다.

“공작님과 저희 남편이요.”

레오니에는 카니스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떠올렸다.

서부 출신 귀족,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 공처가, 자식 바보, 보레오티 공작의 유일한 벗, 신뢰 가는 조력자.

‘그리고…….’

마지막 하나를 떠올리며, 레오니에는 두 검이 살벌하게 부딪히는 연무장을 바라봤다.

시퍼런 날이 든 진검 두 자루가 서로를 향해 자비 없이 날아들었다.

카니스 리네 백작.

그는 보레오티 공작과 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소드 마스터였다.

오랜만에 대련하는 두 친우는 봐주는 것 없이 서로를 노렸다. 빈틈은 어떻게든 찾아내어 검을 들이밀고, 살기 등등한 공격은 빠르게 피해 반격의 틈을 찾았다.

“…….”

원래도 표정 변화가 없는 펠리오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

서글서글 웃는 상이던 카니스의 눈가에 형형한 이채가 아른거렸다.

“아빠, 이겨라! 아빠!”

“아빠! 아빠!”

우피클라와 피누는 어느새 주먹을 불끈 쥐며 카니스를 응원했다. 기사들은 딱히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진 않았지만, 대련 중 흐름이 크게 좌우될 때마다 오오, 환호를 질러댔다.

레오니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펠리오가 검을 쓰는 걸 제대로 본 적 없던 레오니에에게 두 사람의 대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보기 드문 대련이죠.”

아비페르가 그런 레오니에를 보며 싱긋 웃었다. 마냥 애어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토끼 눈을 하며 놀라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제 남편이 저래 봬도 서부에서 꽤 알아주는 기사였답니다.”

말하는 아비페르의 목소리에 자랑이 가득했다.

“기사였어요?”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였다. 원작에서 안 나온 설정이었다. 하지만 잠깐 생각해 보니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었다. 애초에 소드 마스터란 게 검을 쓰는 걸 전제로 하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결혼 전에는 레보오 기사단 소속 기사였지요. 타고난 재능도 있어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도 올랐답니다.”

“오오.”

“검술 실력만 두고 본다면 공작님과 견주어도 손색없답니다.”

“오오!”

레오니에의 진심 어린 감탄에 아비페르가 으쓱했다.

“비록 맹수의 송곳니 앞에서는 꼬리를 만 개지만요.”

아비페르가 공손히 덧붙였지만, 레오니에는 카니스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 허벅지…….’

정말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후다닥 연무장 가까이 달려가, 우피클라와 피누가 카니스를 응원하는 곳에 끼어들어 힘차게 외쳤다.

“아빠!”

레오니에가 발꿈치를 폴짝거렸다. 옹골차게 쥔 주먹이 허공에서 힘차게 움직였다.

“백작님 옷 찢어 버려!”

근육 보여 줘!

레오니에의 응원 한마디에 시끌벅적했던 훈련장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내가 지금 뭐 헛들은 거 아니지?”

누구 옷을 찢으라고?

뭘 보여 달라고?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훈련장 분위기 덕에, 카니스는 펠리오에게서 겨우 떨어져 숨을 돌렸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반격할 틈을 살폈다. 그러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펠리오는 아예 환장하는 중이었다.

“넌 네 딸한테 뭘 가르친 거야.”

“내가 가르친 거 아니야.”

억울한 펠리오가 반박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변태였어.”

펠리오 역시 레오니에에게 희롱당한 경력이 수어 번 있었다.

“너 지금 네 딸한테 변태라고 했냐?”

“변태라고 내가 뭐 혼낸 것도 없는데.”

레오니에를 성심성의껏 돌보고 살핀 펠리오 입장에서는 퍽 억울한 소리였다. 입양한 순간부터 지극정성으로 돌본 덕에 아이의 거지 같던 몰골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지금은 누가 봐도 귀한 집 딸내미 자태가 뿜어졌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좀 보여 줘.”

펠리오가 틈을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펠리오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카니스의 상의를 건드리며 조그만 구멍을 만들었다.

“아빠! 그 아래를 찢어야지!”

레오니에가 연무장을 팍팍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복근은 됐어! 허벅지 대퇴근을 보여 줘!”

글라디고 기사단의 기사들 덕에 상체 쪽은 질리도록 봤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게 근육이라지만, 레오니에는 이제 하체가 간절했다. 특히 튼실한 허벅지 근육이 간절했다.

“치골근은 더 좋고!”

레오니에가 바지 속에 감춰진 카니스의 튼실한 허벅지 근육을 날카로운 맹수의 눈으로 살폈다. 펠리오는 딸의 바람대로 카니스의 하체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자, 잠깐!”

당황한 카니스가 우왕좌왕하며 가까스로 검을 막았다.

“……치골근이 무엇이죠?”

생소한 근육 이름에 아비페르가 물었다. 레오니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허벅지 안쪽, 사타구니 근처요.”

“여보, 안 돼!”

아비페르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빠, 지면 안 돼!”

“아빠! 아빠아아아!”

이에 질세라 우피클라와 피누도 힘차게 응원했다.

검술 대련은 다시 열을 띄기 시작했다. 레오니에의 기가 막힌 응원 덕에 기사들도 목청껏 소리 높였다. 이제 대놓고 누군가를 편들며 이기라고 환호했다. 맞부딪치는 두 검의 섬뜩한 간격도 점점 줄어들었다.

대련은 생각 이상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보는 사람들마저 땀이 흐를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함성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펠리오와 카니스의 피 말리는 대련에 어느 순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카니스의 근육을 보여달라고 외치던 레오니에마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두 어른을 바라만 보았다.

연무장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발소리.

챙챙,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

두 남자의 거친 숨소리.

‘……숨소리 좋은데?’

한참 대련에 집중하던 레오니에가 헛생각에 잠시 빠진 찰나였다.

“헉!”

어느 기사의 외마디 외침과 동시에 누군가가 놓친 검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연무장 중심으로 시선이 쏠렸다.

“세상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휙 돌렸다. 조금 전 그 말은 레오니에가 한 말이 아니었다. 바로 건너편 기사들 무리에 있던 멜레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뱉은 현실 부정이었다. 레오니에는 그 현실 부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검을 놓친 건 펠리오였다.

“와아! 아빠 이겼다!”

“아빠! 아빠!”

우피클라와 피누가 서로 부둥켜안았다.

대련의 승자는 카니스였다.

* * *

체스판을 보던 그 날 밤.

‘서부의 협력이 필요해.’

펠리오는 눈에 거슬리는 쓰레기들을 치우고자 카니스, 아비페르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네 백작 부부는 기꺼이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있잖아.’

이야기가 끝나고 돌아가던 중. 카니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도로 소파에 앉았다. 나가려던 아비페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함께 일어섰던 펠리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뭐 하나만 청해도 되냐?’

‘뭐를?’

펠리오의 머릿속에서 보레오티 공작가의 재산 목록이 빠르게 펼쳐졌다. 귀한 보석이 강줄기처럼 가득한 광산부터 시작해 황실 몰래 운영하는 상단 거래 물품까지. 이 중에서 카니스에게 선물로 줘도 괜찮은 걸 골랐다.

‘재산 말고.’

카니스가 그 속을 읽고 서둘러 말했다. 금광 하나를 1년 정도 관세 없이 거래하자고 펠리오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카니스의 부탁은 의외로 소박했다.

‘검술 대련에서, 한 번만 져주라.’

‘……뭐?’

‘아니, 당신 지금 그게…….’

뜬금없는 부탁에 펠리오와 아비페르가 놀란 눈을 주고받았다.

‘아니, 그, 우리 애들한테…….’

카니스가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었다.

‘……멋진 모습 좀 보여 주고 싶어서.’

짜고 친 대련이었지만, 카니스는 무척 만족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은 그저 폴짝거리며 카니스를 칭찬했다.

“아빠 이겼다!”

“와아! 아빠, 아빠!”

우피클라와 피누는 이기고 돌아온 카니스의 다리를 꼭 껴안으며 환호했다.

“아빠가 공작님보다 세요! 엄청 셌어!”

“아빠 멋쟁이!”

“그럼! 이 아빠가 얼마나 강한 기사인지 알겠지? 이제 아빠 멋지지?”

카니스가 턱을 높이 치켜들며 으스댔다. 뾰족해진 콧대가 검은 사자가 포효하는 훈련장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옆에 있던 아비페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몰라도, 글라디고 기사단은 펠리오가 일부러 져줬다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챘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카니스와 달리, 북부의 검은 맹수는 땀 몇 방울 흘린 것 빼고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펠리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으스대는 카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괜히 져줬나…….’

펠리오는 꺅꺅거리는 백작과 꼬마들을 저와 레오니에로 겹쳐 봤다. 기사가 건넨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은 펠리오는 뒤늦게 아쉬웠다. 자신이 이겼다면 레오니에가 우다다 달려와 안겼을 텐데. 그냥 금광 무관세가 나았을지도 몰랐다.

“아빠.”

어느새 곁에 다가온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올려다봤다. 펠리오는 혹시나 레오니에가 저에게 실망했을까 걱정했다.

“왜 졌어?”

그러나 레오니에는 실망하는 대신 이유를 물었다.

“왜 일부러 져줬어?”

“……눈치챘어?”

“그럼 몰라?”

드물게 당황한 펠리오에게,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아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잖아.”

제아무리 카니스가 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세계관 최강이신 북부의 검은 맹수를 이기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승부가 나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 왜 이렇게 똑똑하냐.”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쓰다듬는 대로 레오니에의 조그만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가 좀 잘났지.”

“맞아, 일부러 져줬어.”

펠리오가 몸을 낮춰 레오니에와 눈을 맞췄다.

“아빠가 이제부터 바쁠 거거든.”

“…….”

“조금 전 시합은 대가야.”

“대가?”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뒤를 힐끔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파르두스 후작 할아버지랑 관련됐어?”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순록과 펠리오의 나이 덕에 충격으로 끝났던 다과회 날. 제 친모가 10대에 임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잠시 잊어버렸지만, 원작에서 중요하고 심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파르두스 후작이 등장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파르두스 후작을 무려 두 번이나 만났다.

“뭐 있지?”

그것도 심각하고 중요한 게.

물어보는 레오니에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펠리오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있어.”

그러나 순간 파르르 떨리는 레오니에의 검은 눈동자 탓에 잠시 후회했다. 분명 지금 일어나는 일은 어린아이에게 들려줄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의 하나뿐인 딸은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했다. 비록 취향이 좀 변태스러워 그렇지, 어지간한 어른보다 뛰어났다.

“괜찮아.”

그러니 숨기는 대신, 이해를 구했다.

“우리 어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많이 심각해? 위험해?”

레오니에는 서둘러 원작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떠올렸다. 혹여 아빠한테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는 사건이라면 도움을 주어야 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아직도 자신이 원작의 어느 시점에 머무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까……’

레오니에가 일전에 물어보지 못한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1황자 생일!’

1황자의 열여섯 번째 생일 때 원작이 시작되니, 1황자의 나이만 알면 되는데 아직도 그걸 물어보지 못했다.

“아빠, 1황자 지금 몇 살이야?”

“갑자기?”

“빨리!”

“그놈이라면 올해 열한 살일 거다.”

2황자보다 두 살이 많다고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그러곤 그걸 왜 물어보냐며 되물었다. 하나 레오니에는 대답 대신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원작 시작 전이잖아!’

드디어 알아낸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 오 년 전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원작 내용은 아무 소용 없었다.

“……내가 뭐 도울 건 없어?”

다급해진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레오.”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레오니에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눈동자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심각할 필요 없어.”

조숙한 딸이 뭔가 좋지 않은 걸 예감한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그 예감은 거의 정확했다. 지금 흘러가는 상황은 분명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 그건 보통 사람의 기준이었다.

“내가 못해낼 일은 없다.”

펠리오가 오만할 정도로 자신했다.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보레오티 공작 가문이 해내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오만한 자신감은 진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걱정 마.”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번쩍 안았다.

“레오 네가 할 일은 딱 하나야.”

“……뭔데?”

걱정이 한풀 꺾인 레오니에가 물었다.

“먹고 놀고 자는 거.”

펠리오가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레오티 저택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내는 거.”

그것이 레오니에 보레오티 공작 영애가 해내야 할 중요한 의무였다.

* * *

매일 리네 백작 가족들과 어울렸던 레오니에에게 조금 쓸쓸한 소식이 전해졌다.

“저희 3일 밤만 자면 집에 간대요.”

우피클라가 북부를 떠나는 날을 전했다. 목소리에 서운한 기색이 가득했다. 비록 첫 만남이 건방졌지만, 우피클라는 보레오티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레오니에와 친해졌다. 저보다 한참 작아도 이것저것 잘 챙겨 주고 똑똑한 레오니에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레오니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간 리네 백작 가족들과 정이 들었다. 가까운 시일에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막상 들으니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반면 펠리오는 아니었다.

“이제야 가네.”

대놓고 속이 후련하단 표정을 지었다. 카니스가 서운하다고 달라붙기 무섭게 발로 퍽 차 밀어내기까지 했다.

“그래도 손님이니.”

아무리 귀찮은 친구라도 저택에 방문한 귀한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펠리오는 오랜만에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다과회를 열었다. 보레오티와 리네, 두 가문의 우정을 북부 귀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왜 새침을 부려.”

레오니에가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펠리오는 기가 막혔다.

“이게 새침으로 보이냐.”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데 속으로는 막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은 것처럼 보여.”

“너 또 이상한 오해하지.”

“……아니.”

“앞에 간격은 뭐야.”

“그냥, 뭐.”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레오니에는 어느새 카니스를 경계 대상으로 삼았다. 그것도 루페와 모노보다도 우선순위였다.

어쨌건 다과회는 순탄하게 준비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공작저에서 열리는 모임이었다. 마지막 모임이 선대 공작 부부가 살아 있던 때이니, 연차로 따지면 7년이 훌쩍 넘었다. 펠리오가 성인이 되자마자 공작위를 물려받은 이후론 모임은커녕 그와 비슷한 건 일절 없었다.

이러니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다과회 날짜가 초대장이 도착하고 바로 이틀 뒤였다.

레오니에는 이 모든 것이 참 펠리오답다고 생각했다.

“……아빤 정말 다른 사람 상황은 고려 안 해?”

보다 못한 레오니에가 기어코 잔소리했다. 가정 교사 고용 때부터 느꼈던 펠리오의 단점이 여기서도 드러났다.

“아빠 양심은 내 동심보다 없네.”

“최악의 욕이로군.”

“뭐, 이 아빠야.”

“어쨌건 내가 왜 남들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진심이야?”

아빠한테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다는 소설 묘사는 한 줄도 없었는데.

레오니에가 해괴한 것을 보듯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보레오티다.”

펠리오가 또 이상한 추측을 하는 레오니에를 보며 입가를 비스듬히 올렸다.

“자기들이 알아서 숙여야지.”

오만하다 못해 재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아빠 진짜 나중에…….”

반사적으로 비꼬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크게 데이거나 등에 칼을 맞을 거라고 말하기엔, 펠리오는 본인의 말대로 너무나 잘나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는 엄청난 재산과 흠잡을 데 없이 잘난 외모. 게으른 것 같으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근육, 맹수의 송곳니라는 사기 같은 이능까지.

그런 사람이 아빠다.

그것도 저를 무척 아끼는.

“…….”

레오니에가 서너 번 눈꺼풀을 깜빡였다. 현실 파악을 빠르게 했다.

“아빠.”

그러고는 냅다 펠리오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나 아빠의 그런 오만함이 너무 좋아.”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지,”

“그거나 이거나.”

다리에 한참 비비적거리던 레오니에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나도 아빠처럼 나 잘난 맛에 살고 싶어.”

“살아.”

펠리오가 숨 쉬고 살라는 것처럼 당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난 양심이 있는걸.”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이며 아쉬워했다. 인생을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상, 남들에게 미안해서라도 그리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양심 없는 녀석.”

뻔뻔하기도 하지,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

지나가다 우연히 두 부녀를 발견한 아비페르는 둘 다 아주 그냥 똑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서로 맞먹는 부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확신하면서.

* * *

북부에 거주하는 모든 귀족이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이 동반은 거절이었다. 어른들이 많아 아이들이 불편할 수 있을 거란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아빠 얼굴 때문이잖아.”

아이들이 펠리오만 봤다 하면 자지러지는 탓이라고 레오니에가 당일 아침 식사 자리에서 놀렸다. 손수 펠리오의 얼굴 위아래로 손을 요망스럽게 흔들기까지 했다.

리네 백작 부부가 애써 못 들은 척 식사에만 집중했다.

“공작님 얼굴 잘생겼는데요?”

“멋쟁이!”

우피클라와 피누는 마냥 해맑았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아빠를 놀린 벌로 오후 간식을 잃어버렸다.

귀족들에게 전해진 초대장 날짜는 빠듯했지만, 사실 보레오티 공작저의 다과회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펠리오가 카니스와 리네 백작 가족을 아낀다는 뜻이었다.

다과회는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살짝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에 시작됐다.

보레오티 공작저 안으로 쉴 틈 없이 마차가 들어왔다.

무려 7년 만에 개방되는 보레오티 저택이었다. 저택에 들어오는 모두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다과회보다 무투회에 참석한 사람 같았다.

아이는 참석 불가능한 다과회.

“와아…….”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플로무스는 감탄을 그치지 못했다.

보레오티 공작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직접 받은 플로무스 케라타 자작 영애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새하얀 만년설을 품은 북쪽 산맥. 그 산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보레오티 공작저가 크고 아름다운 위엄을 자랑했다.

건물 외관은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우중충했고, 새까만 지붕은 하늘마저 찌를 듯 뾰족했다. 누구 한 명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음산하기까지 했다.

한참 저택을 보던 플로무스가 고개를 뒤로 계속 넘기다 휘청거렸다. 이렇게나 큰 건물은 처음이었다.

“괜찮니?”

뒤에서 지켜보던 케라타 자작 부인이 쓴 미소를 지었다.

플로무스가 머뭇거렸다.

“무섭지는 않은데…….”

사실 좀, 엄청 무서웠다.

무려 보레오티 공작이 사는 곳이다. 커다란 저택과 우중충한 외관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어린 플로무스를 마구 짓눌렀다.

하지만 호기심도 있었다.

과연 보레오티 공작 가족들이 사는 저택은 어떻게 생겼을까.

마물의 머리를 박제해서 벽에 걸어 둔다는 오빠 말은 사실일까.

마물 고기를 매일 먹는 것도 사실일까.

“……괜찮아요!”

플로무스가 주먹을 꼭 쥐었다. 제 딴에는 나름 용기를 끌어모아 옹골찬 기합을 넣은 거지만, 케라타 자작 부부의 눈에는 어린 딸이 마냥 앙증맞았다.

진지한 딸을 위해, 부부는 웃음을 꾹 참았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와 편지를 주고받더니, 소심했던 아이가 눈에 띄게 용감해졌다. 늘 오빠한테 지기만 했던 전과 달리 제법 반격도 할 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오빠는 못 왔는걸.’

순진한 플로무스 얼굴에 약간의 으쓱함이 깃들었다. 다과회에 초대받은 아이는 플로무스가 유일했다. 저택에 혼자 남은 플로무스의 오빠는 입술을 삐죽이며 플로무스를 부러워했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심술궂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저는 레오니에 님 친구예요.”

그러니 무섭지 않다며 부모님에게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으아아앙……!”

플로무스는 저택 내에서 펠리오를 만나기 무섭게 턱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플로무스는 어린 나이에도 펠리오와 세 번이나 마주쳤다. 첫 번째는 아빠와 시내 구경하러 나왔다가, 두 번째는 자신의 집에서 열린 다과회에서.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지금.

북부의 주인이신 보레오티 공작을 지난 몇 달간 무려 세 번이나 만나는 건데도, 플로무스는 여전히 펠리오가 무서웠다.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공포감이 플로무스의 몸을 짓눌렀다.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속바지에 지릴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하나 플로무스는 무서운 것도 꾹 참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힘겹게 인사했다. 그나마 세 번이나 만났기에 가능한 용기였다.

“초, 초대, 초대를, 해 주셔서……”

인사조차 못 하고 피했던 지난번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펠리오는 그런 플로무스를 묵묵히 기다렸다. 저를 보고 자지러지는 아이들이야 워낙 익숙해서 이젠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무서움을 꾹 참고 제게 인사하는 플로무스가 나름 대견해 지긋이 지켜봤다.

펠리오 입장에서는 기특해서 바라보는 거였지만, 플로무스 입장에서는 인사 하나 제대로 못 한다고 크게 혼나는 기분이었다.

“오신 걸 환영합니다.”

플로무스가 인사를 다 마치고 숨을 고른 뒤에야 펠리오가 케라타 자작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작 부부도 초대해 주어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영애께서도.”

펠리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플로무스와 눈을 마주쳤다.

“다과회에 와 주어 고맙습니다.”

깜짝 놀란 플로무스가 히끅, 딸꾹질을 했다. 어찌나 크게 했는지 몸이 휘청거렸다. 그 모습에 펠리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숙인 얼굴에 미소가 걸쳐졌다.

‘나도 애 아빠 다 됐군.’

레오니에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만 보면 이유 없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순박한 플로무스도 그렇고, 기사단의 어린 시동들도 그랬다. 예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낯설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축이었다. 그런 저의 변화가 아주 괜찮다고 생각했다.

펠리오는 자작 부부를 다과회가 열린 연회실로 안내했다.

“자작 영애를 레오 방으로 안내해라.”

홀로 남은 플로무스는 공작저 하녀의 품에 안겨 레오니에의 방으로 향했다. 그제야 겨우 진정한 플로무스가 보레오티 공작저를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조금 전까지 겁먹었던 초록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밖에서 본 보레오티 공작저는 크고 무서웠다.

그리고 내부는 웅장했다.

하늘 높이 뻗은 천장 아래로 눈부신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계단 아래에는 폭신폭신한 양탄자가 끊김 없이 깔렸다. 양탄자는 어떤 발걸음 소리도 잡아먹어 버렸다. 벽에는 화려한 명화가 가득했다. 뭔지 몰라도 비쌀 게 틀림없는 꽃도 화병에 많이 꽂혀 있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공기마저 따뜻했다.

“플로!”

레오니에가 도착한 플로무스를 기쁘게 맞이했다.

“어서 와! 밖에 춥지?”

“안녕하세요…….”

“오늘 예쁜 옷 입었네.”

잘 어울린다는 레오니에의 칭찬에 플로무스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는 우리 아빠가 했어.”

“그래도요.”

플로무스는 이 모든 게 레오니에 덕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니에가 저와 친하게 지내 주니까 펠리오가 좋게 봐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오니에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으휴, 예뻐라.”

그러고는 엉덩이를 토닥거리듯 허공에다 손을 촐싹대며 흔들었다.

“아가씨…….”

하녀가 쓴 한숨을 꿀꺽 삼켰다. 주인님이 들으시면 또 애늙은이 같다고 걱정하실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계셨다.

플로무스는 처음 와 보는 레오니에의 방을 신기하게 둘러봤다. 방은 의외로 평범했다. 물론 침대나 책상 같은 가구는 한눈에 보아도 화려하고 큼지막했다. 하지만 장식된 물건이나 이런저런 분위기가 무척 포근하고 편안했다. 어쩐지 레오니에를 보며 다정히 웃던 펠리오가 떠올랐다.

모두에게 무섭기만 한 북부의 주인이지만, 레오니에 앞에서만큼은 평범한 아빠처럼 다정했던 미소가 이 방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레오 언니.”

그때, 우피클라가 쪼르르 다가왔다. 레오니에 옆에 서니 우피클라의 키가 한참 더 컸다.

“언니, 이 사람 누구예요?”

“누구야아?”

물어보는 우피클라의 등 뒤로 피누도 고개를 쏙 내밀었다.

두 남매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플로무스를 바라봤다. 플로무스도 그제야 방에 저 말고 다른 손님이 있단 걸 눈치챘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야.”

레오니에는 직접 플로무스를 소개했다. 저와 가장 친한 친구라는 말에 플로무스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레오니에는 이어 리네 남매들도 소개했다.

다행히 셋은 어색한 기류 없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피누는 살짝 낯을 가렸다. 우피클라 곁에 찰싹 달라붙은 채 플로무스를 관찰했다. 그래도 눈 마주치면 부끄러운 듯 몸을 흔드는 걸 보면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거나 북부에서 유행하는 보드게임을 같이 했다. 방 안이 어느새 웃음으로 가득했다.

‘우피클라가 살짝 걱정이었지만…….’

사실 레오니에는 넷 중 우피클라가 가장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혹여 플로무스에게 말실수라도 할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우피클라는 얌전했다. 오히려 플로무스에게 호감을 지닌 듯했다. 케라타 저택이 순록을 기른다는 말에 깜짝 놀라면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좋겠다…….”

한참 잘 놀던 우피클라가 주사위를 던지며 투덜거렸다.

“다과회도 하고.”

우피클라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도 하고 싶은데!”

“어른들의 다과회는 멋있어요.”

플로무스도 조금 부러웠다. 어른들의 다과회는 분명 멋있고 근사할 거란 말에 우피클라가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흐음…….”

반면 레오니에는 덤덤했다. 오히려 질린 얼굴이었다. 네 아이 중 오직 레오니에만이 오늘 열린 다과회가 그저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 *

“갑작스러운 초대였을 텐데도 이렇게 참석해 주어 감사합니다.”

펠리오가 다과회에 참석한 귀족들에게 인사했다.

‘별로 안 감사한 얼굴이신데.’

참석한 파르두스 후작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봐도 귀찮음이 역력한 인상이었다. 단조로운 목소리나 무미건조한 표정이 딱 봐도 참석하기 싫은데 부모님이 억지로 끌고 온 철부지 소년 같았다.

사실 이런 자리를 만든 것 자체가 용했다. 참석한 귀족들 대부분이 같은 생각일 거라고, 파르두스 후작은 여기에 자신의 전 재산을 걸 자신이 있었다.

“수도에 머문 탓에 북부에 많이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파르두스 후작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소홀했던 만큼 신경 쓰겠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무척이나 짜릿했다. 동시에 보레오티 가문을 향한 충성심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보레오티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 황실이 보레오티를 질투하고 탐해도, 혹은 세상이 그들에 대해 수군거려도 내버려 뒀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신들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간섭조차 않는다.

하나 그런 보레오티의 무감한 언행은 모든 것을 제압하고 위협한다.

여기에 만일 무엇 하나라도 검은 맹수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파란이 일겠지.’

파르두스 후작은 그간 알아낸 정보들과 북부의 불손한 움직임을 파악해 뒀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펠리오의 숨겨진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이 다과회는 선고였다.

앞으로 북부에 커다란 피바람이 불 거라는.

설사 너희가 뒤늦게 죄를 덮으려고 해도 부질없으며, 반드시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란 피비린내 나는 선고였다.

펠리오는 죽음의 선고를 향기로운 차와 달콤하고 짭짜름한 다과 속에 감추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귀족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그 중 몇몇은 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파르두스 후작은 혀를 작게 찼다. 저 겁먹은 이들 중 한 명은 펠리오가 주시하라고 했던 메레오카 백작이었다. 그러게 주제 파악도 못하고. 보레오티 공작 앞에서 고개조차 못 들 거면서 무슨 배짱으로 그딴 짓을 벌였는지.

보기만 해도 차 맛이 떨어졌다.

“부디 즐기다 가시길.”

펠리오가 먼저 차를 마셨다.

다른 귀족들도 따라 차를 마셨다.

다과회가 시작되었다.

* * *

마치 연회 같은 다과회였다.

다과회의 의도야 뭐든 간에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만큼은 완벽했다. 술 대신 차가 준비되었고, 잔잔한 음악에 몸이 동하면 파트너와 춤을 출 수도 있었다.

하나 참석한 귀족들은 긴장한 상태였다. 펠리오의 살벌한 경고 덕에 마음껏 다과회를 즐길 수 없었다. 심지어 몇몇은 혹여 그간 검은 맹수의 심기를 건드릴 짓은 하지 않았는가 빠르게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일전에 케레나 메레오카 영애 사건 때문에 호출받았던 귀족들이 그러했다.

이렇다 보니 인파는 자연히 둘로 나뉘었다.

찔릴 것 없는 귀족들은 점차 다과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웃음꽃이 피어났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농담까지 했다.

반면 찔리는 것이 많은 이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몰렸다.

“공작님, 멋진 다과회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마물 퇴치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황성에서 막 돌아오셨을 참일 텐데.”

보레오티와 함께 오래전부터 북부에 터를 잡았던 골수 귀족들이 차례차례 말을 건넸다. 펠리오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 나름 성실히 반응했다. 그 곁에는 카니스와 아비페르도 함께였다.

“귀한 손님을 위한 다과회로군요.”

어느 귀족이 웃으며 말했다.

카니스와 아비페르는 북부에 있어 아주 중요한 손님이었다. 비단 그들이 펠리오의 소중한 벗이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리네 백작은 제국에서 무척 큰 무역항과 상단을 운영하는 부자였다. 북부에서도 이들 리네 상단과 거래하는 가문이 많았다.

“리네 상단 덕에 저희가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다가온 우르마리티 백작이 묵직한 웃음을 토했다. 새하얗게 센 머리에 드문드문 잿빛 색이 섞여 있는 노신사는 마치 큼지막한 돌처럼 거대했다.

“우르마리티 가문과의 거래는 저희에게도 무척 좋은 기회였습니다.”

카니스가 사람 좋은 미소로 응수했다. 우르마리티 백작도 웃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는 마십시오.”

너희 때문에 우르마리티 가문과 연결된 우르베스페 상단이 더 큰 수익을 못 얻어내고 있으니 작작 좀 해라, 이 서부의 개 같으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젊어서 버틸 만하네요.”

우리 상단이 잘나서 돈 잘 버는 건데 왜 이 영감님께서 시비실까.

둘은 하하 호호 정답게 욕을 주고받았다.

카니스는 착하고 유한 인상이지만, 그 역시 한 가문의 주인이자 거대 상단의 주인이었다.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봐주는 것 없이 행동했다.

“케라타 가문에서 생산되는 순록 가죽도 무척이나 질이 높죠. 보스그루니 가문의 다기도 너무나도 매력적이고요. 북부 상품은 질이 참 좋아서, 저희 상단의 효자 상품들이랍니다.”

아비페르는 북부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을 하나하나 칭찬했다. 그 행동은 상단과 각 가문 간의 계약 관계를 두둑하게 했다. 카니스는 채찍이고, 아비페르는 당근이었다. 누군가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을 잘 아는 펠리오 눈에는 너무도 당연한 역할 분배였다.

“……잠깐 실례하지요.”

펠리오는 리네 백작 부부가 다른 사람들과 편히 대화하도록 홀로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다과회 내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능구렁이 영감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파르두스 후작.”

“공작!”

파르두스 후작이 드물게 들뜬 어조로 펠리오를 불렀다. 타인 앞에서는 항상 보레오티에 적대적인 모습을 연기하던 것치고는 아주 친근한 부름이었다.

펠리오는 비죽이려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오늘따라 저 치들과 함께하려는 게 유난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참석해 주어 감사합니다.”

펠리오가 나름 상냥히, 물론 본인 기준에서 상냥하다고 생각되는 인사를 건네었음에도, 인사받은 저들의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얼마 전 이혼한 딸을 서부 별장으로 요양 보낸 메레오카 백작, 조그만 상인 집안의 막내딸에서 남작위까지 올라간 글리스 남작. 레오니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고, 그 뒤엔 마물 불법 거래에 연루되어 곧 맹수의 송곳니 아래서 죽어 갈 예비 송장들.

‘내가 그때 경고를 덜 했나.’

분명 이다음은 죽음이라고 맹수의 송곳니까지 꺼내어 겁을 준 것 같은데.

펠리오는 자신이 지나치게 유해진 건 아닌지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레오니에를 키우면서 행동거지가 부드러워진 듯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그러다 젊은 남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낯빛이 어두운 두 어른과 달리 홀로 펠리오와 시선을 고집스럽게 마주했다. 겁을 먹긴 먹었는데 오기로 버티는 꼴이 제법 봐줄 만했다.

“타바누스 백작의 장남입니다.”

파르두스 후작이 타바누스 영식 옆으로 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제법 듬직하고 멋진 사내지요.”

“그리 보니 백작을 닮았군요.”

하나도 안 듬직하고 안 멋지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대신 참석했습니다. 무스카 타바누스입니다.”

“다과회에 잘 왔습니다.”

처음 마주한 두 남자는 자연스럽게 악수했다.

‘생각한 것보다 젊잖아.’

무스카 타바누스가 은근슬쩍 손에 힘을 주며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는 부친인 타바누스 백작이 지난 3년간 황성에 머무는 동안 가문을 다스리고 지지 세력을 확장했다.

젊은 타바누스는 야욕이 넘치는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올로르 가문의 눈에 들어왔다.

‘무려 황비의 가문이라고!’

황제가 올로르 가문 출신의 황비를 아낀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보레오티가 아무리 북부의 주인이고, 맹수의 송곳니니 뭐니 하는 이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황실의 부하에 불과했다.

‘이번 일만 잘되면…….’

무스카 타바누스는 자신이 있었다.

무려 북부의 마물 새끼를 판매하는 일이다. 잔혹하고 강인한 마물을 새끼 때부터 길들여 애완동물처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귀족들의 허세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

이는 틀림없는 최고의 사업 주제였다.

저의 부친은 보레오티 공작이 무서워 북부로 돌아오지도 못했다만, 이는 무스카 타바누스에겐 최고의 기회였다. 그는 이곳에 오게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보레오티 공작이 무서워 주눅 든 이주 귀족들이라니. 그들은 저의 적수가 못 되었다.

거기다 자신은 조금 전에 파르두스 후작에게 인정까지 받지 않았나. 이대로 승승장구한다면 올로르 가문을 통해 황제에게도 잘 보일 수 있을 거다. 그런 자신감을 가득 담아, 무스카 타바누스가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저와 나이대가 비슷한 보레오티 공작에게 지지 않겠다는 치기 어린 패기였다.

“…….”

이를 눈치챈 펠리오는 기가 막혔다. 지금 제 손에 느껴지는 이 쥐뿔만 한 악력은 뭔가 싶다. 설마 이게 기 싸움이라면 한심해 미칠 정도였다. 이건 고아원에서 처음 만났던 레오니에의 강렬한 눈빛의 반도 따라오지 못했다.

‘하여튼 파리 새끼들이.’

귀찮게 앵앵거리고.

펠리오가 옜다, 하는 마음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윽!”

손뼈를 으스러트릴 것 같은 괴력에 타바누스 영식이 짧은 비명을 터트렸다. 펠리오는 모르는 척 손을 빼고는, 손수건으로 당장 손을 닦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파르두스 후작을 바라봤다.

하찮은 기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타바누스 영식은 타바누스 백작이 지난 3년간 황성에서 바쁜 동안 북부에서 가주 대리로 열심이었습니다. 젊은데 미래가 참 밝아요.”

파르두스 후작이 싱긋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펠리오는 터지려는 비웃음을 꾹 참았다.

저놈의 영감은 비꼬는 것도 참 잘했다.

* * *

“귀여워! 아기 말이다!”

“갈기에 리본도 달렸어요.”

“나도! 누나, 나도오오!”

방에서만 노는 데 지겨워진 아이들은 승마장으로 향했다.

눈이 소복하게 깔린 승마장 위로 앙증맞은 조랑말들이 짤막한 다리를 자랑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조랑말 위에 한 명씩 앉아 승마를 즐겼다. 아이들 옆에는 글라디고 기사단 단원들이 한 명씩 붙어 고삐를 쥐고 천천히 이끌어 주었다.

“어떠세요, 아가씨?”

레오니에가 탄 조랑말 고삐를 쥔 프로보가 물었다. 그는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입양되던 날에 곁에 있었던 기사였다.

“말 속도가 빠르진 않으신지요. 혹여 무서우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프로보는 기사치고 몸이 꽤 가는 편이었다. 그는 동부에서 온 귀족 가문 출신으로, 눈이 덮인 것 같은 희뿌연 보라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였다. 그리고 무척 조심스러웠다.

“하나도 안 무서워요.”

레오니에가 보다 못해 말했다.

조랑말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먹은 게 체할 정도였다.

“좀 더 빨리 가면 안 돼요?”

“그러다 다치시면 어쩌시려고요.”

“지금 나 빼고 다 앞서갔잖아요.”

레오니에는 어느새 저를 제치고 나아간 아이들을 가리켰다. 프로보는 혹여라도 레오니에가 승마 중에 다칠까 걱정해 걸음걸이를 무척 느리고 섬세하게 낮추었다. 덕분에 레오니에만 답답해 속이 터졌다. 이 정도면 조랑말도 답답할 터다.

“너도 달리고 싶지?”

레오니에가 조랑말을 쓰다듬으며 은근슬쩍 프로보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얄짤없었다.

“아가씨께서 다치시면 저는 주군께 목이 떨어져 나갈 겁니다.”

당연히 물리적인 의미로요, 프로보가 냉정하게 거절했다.

“프로보 오빠는 마검사잖아요. 아빠 검 정도야 마법으로 막으면 되지.”

동부 출신인 프로보는 오러 대신에 마나를 검술에 응용하여 싸우는 마검사였다. 글라디고 기사단 안에서도 유일무이한 전력 중 한 명이었다.

“맹수의 송곳니 앞에서는 다 부질없습니다.”

유일무이한 전력도 맹수의 송곳니 앞에서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그래도 승마는 재미있으시죠?”

“뭐…….”

“이렇게 여유롭게 타는 것 역시 운치 있는 일이지요.”

“운치 두 번 있다가…….”

레오니에는 속 터지겠다는 딴지를 애써 꾹 참아 눌렀다.

하지만 분명 운치 있는 광경이었다.

새하얀 눈밭과 그 위를 느긋하게 걸어가는 조랑말과 아이들. 뒤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레오티 저택이 열려 있고, 그곳의 수많은 사람이 레오니에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챙겨 줬다.

‘그리고 아빠도 있어.’

입김이 풍기는 차가운 밖이 춥지 않은 이유였다.

레오니에는 또 한 번 더, 새삼 이 모든 것이 꿈 같았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다.

‘아빠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레오니에가 등 뒤에 있는 저택을 흘끔 둘러봤다.

이번 다과회는 사냥 준비이자 일찌감치 건네는 추모였다. 북부에 소란을 가지고 온 불온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사냥 준비이자, 이제 곧 펠리오의 송곳니에 꿰뚫려 죽어 나갈 자들에게 미리 명복을 빌어주는 추모 연회.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거지?’

레오니에는 조랑말 위에서 생각에 잠겼다.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은 앞으로 5년이나 남았다. 어느 정도 확정된 미래를 안다는 건 무척 안심되면서도 불안한 일이었다. 레오니에는 자신의 존재가 원작의 흐름을 크게 바꿨다는 자각을 늘 하고 있다. 그 탓에 종종 펠리오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 걱정이었다.

그들은 기껏해야 종이 속에 적힌 등장인물일 뿐이었을 텐데. 이젠 레오니에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펠리오는 발 디딜 곳 없던 레오니에를 따뜻하게 지탱해 주는 가족이었다.

‘……괜찮겠지?’

그래, 괜찮아.

레오니에는 불안을 떨쳤다. 북부 사람들은 모두 강했다. 고작 애 한 명 끼어들었다고 뒤바뀐 운명에 휩쓸릴 사람들이 아니었다.특히 펠리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였다.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딸내미인 저나, 훗날 만나게 될 예정인 여주인공 바리아뿐이었다.

‘바리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간만에 원작을 떠올리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리아는 가족들에게 배신당해 죽은 뒤 과거로 회귀했다는 설정을 지녔다. 레오니에는 언젠가 반드시 바리아를 만날 거란 확신은 있었다. 펠리오나 바리아나 둘 다 주인공이니,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그럼 그때 바리아는 어떤 상태일까.

‘회귀했을까?’

이런저런 의문이 들던 때였다.

“……!”

레오니에가 퍼뜩 고개를 움직였다.

“……오빠.”

그러고는 조랑말의 고삐를 쥔 프로보를 조용히 불렀다.

“프로보 오빠.”

“예, 아가씨.”

“어서 애들 피신시켜요.”

“……예?”

갑작스러운 말에 프로보가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고삐 잡힌 조랑말도 멈추었고, 그 틈에 레오니에가 말에서 내려왔다. 프로보도 뒤늦게 수상한 기척을 감지했다. 검을 뽑으려던 기사를 레오니에가 서둘러 제지했다.

“내가 막을 테니까, 어서 가요.”

“아가씨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습니다.”

프로보가 레오니에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시선을 움직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기사들은 저 앞에서 즐겁게 승마 중이었다.

‘아무도 못 느꼈나?’

아이들에게 붙은 기사들과 애들은 아직 멋도 모르고 꺅꺅 떠들며 놀고 있었다. 프로보는 그 점이 수상했다. 글라디고 기사단들은 혹독한 훈련과 마물 사냥으로 누구보다 오감이 발달되었다. 그런데 이 수상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거기다 이 기척은…….’

프로보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 뽑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프로보를 망설이게 했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었다. 거기다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잠시 저쪽에 다녀올게요.”

레오니에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프로보가 안 된다며 곧장 반박했다. 적의가 없더라도 수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혼자는 안 됩니다.”

“일단 아이들부터 저택에 먼저 돌려보네요.”

레오니에가 프로보의 품에서 벗어나며 씩 웃었다.

“나는 송곳니가 있잖아요.”

최근 훈련한 덕에 송곳니 끄트머리 정도는 빼꼼 내밀 정도는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기사와 맞먹을 정도였다. 거기다 폭주하긴 했어도 분명 송곳니를 사용한 전적도 있다.

“아이들을 보내고 다른 기사들과 서둘러 와 줘요.”

“하나…….”

“빨리요!”

그제야 프로보가 조랑말을 끌고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기사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레오니에도 서둘러 수상한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달렸다.

‘송곳니가 반응했어.’

술렁거리는 가슴 위로 조그만 손이 올라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이건 잠재된 맹수의 송곳니가 전하는 경고였다. 저를 향한 낯선 기척을 단숨에 잡아내 알려 줬다.

레오니에는 배운 대로 송곳니를 드러낼 준비를 했다. 검은 눈동자 위로 황금빛 안개가 천천히 일렁거렸다. 흔들림이 많지만 폭주했던 때와 비교하면 안정적인 움직임이었다.

마사 안에 있던 말들이 흥분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니에가 내민 송곳니에 불안해하는 중이었다. 레오니에는 마음속으로 말들한테 사과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옷에 달린 장식을 떼어내 흔적을 남겼다. 뒤따라 올 기사들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나랑 프로보 오빠만 느낀 거지?’

예민하다고 유명한 말들은 물론이거니와 오감이 남들보다 발달한 기사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프로보도 느끼긴 했으나 레오니에보다도 뒤늦게 감지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마구간에서 조금 떨어진 정원 구석이었다. 드넓은 저택을 둘러싼 담벼락이 나타났다. 담장 위에는 뾰족한 창이 연상되는 철장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

새하얀 털을 지닌 동물 한 마리가 있었다.

푸른색이 도는 점박이 무늬가 도드라진 맹수가 꼬리를 흔들며 레오니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시하는 두 눈은 마치 하늘 저 아득한 뒤편에 숨겨진 그윽한 우주처럼 깊다.

“……눈표범?”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도도한 맹수가 멈칫했다. 마치 네가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놀라는 것 같았다.

레오니에는 눈표범을 실제로 본 적 없다. 기거했던 고아원 근처 북부는 눈표범이 자생하는 곳이 아닐뿐더러, 저택 서재에 있는 동물도감에는 실렸을지도 모르나 아직 읽지는 못했다.

하나 또 다른 기억 속에서는 사진으로 몇 번 봤었다.

저건 틀림없는 눈표범이었다.

‘마물……은, 아니지?’

마물일 가능성은 영에 가까웠다. 펠리오가 마물을 사냥한 지 몇 달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곳은 검은 맹수의 저택이다. 북쪽 산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마물들이 자연히 몸을 사리며 피하는 곳이다.

아기 맹수와 눈표범의 대치가 계속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레오니에는 눈표범에게 적의가 없음을 감지했다. 앙증맞게 삐죽 내밀었던 송곳니를 감춰 봤다. 역시 눈표범은 달려들지 않았다.

조금 전 수상한 기척은 분명 저 눈표범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도 적의는 없었다.

‘……어라?’

그때,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눈표범은 분명…….”

레오니에가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눈표범이 꼬리를 한 번 살랑 흔들더니 잽싸게 담벼락 위로 폴짝 뛰어올라 그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뾰족한 철장 위를 거의 날아오르듯 넘었다.

“아가씨!”

눈표범이 사라지기 무섭게 프로보와 기사들이 도착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프로보 오빠, 아이들은요?”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방에는 멜레스가 있습니다.”

“고마워요.”

아이들의 무사와 안전을 확인한 레오니에가 그제야 긴장의 끈을 놓았다. 그러자 잠시 잊고 있던 추위가 느껴지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프로보가 그런 레오니에를 품에 안아 들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무엇이 있었습니까.”

프로보가 아무것도 없는 정원을 둘러보며 물었다.

“……고양이.”

레오니에가 말했다.

“크고 통통한 고양이가 있었어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 눈표범이 보통 눈표범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리고 그 정체를 자신의 입으로 밝히는 건 아직 이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고양이?”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지루한 다과회를 애써 참으며 자리를 지키던 중, 프로보가 찾아와 승마장에서 있었던 알렸다. 펠리오는 양해를 구하고 다과회에서 벗어났다.

“레오와 아이들은 무사한 거겠지?”

“현재 방에 멜레스와 파보가 함께 있습니다. 승마장과 그 주변은 마누스와 다른 기사들이 살피는 중입니다.”

“마물일 가능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수상함을 느낀 건 저와 아가씨 단 둘뿐이었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프로보가 고개를 저었다. 펠리오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고양이의 생김새는?”

“크고 통통했다고 합니다.”

“마물 보고도 귀엽다고 할 놈이군.”

저러다 마물 키우겠다고 징징거리면 또 큰일이라며 펠리오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레오니에가 마물을 키우고 싶다며 간청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키울 만한 게 있던가?”

“농담이시죠?”

가뜩이나 지금 그 문제로 바빠 죽는 프로보는 기가 막혔다. 펠리오가 그런 프로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농담이란 뜻이었다.

“어쨌건 그건 마물이 아냐.”

“그 동물의 정체를 아십니까?”

“그대와 레오 둘만 느꼈다면…….”

답은 뻔했다.

“프로보 엘레판 경.”

그가 프로보의 이름을 불렀다.

“동부 귀족 출신이면서, 동부의 주인을 잊은 건 아니겠지?”

프로보의 눈이 펠리오의 말에 따라 점점 커졌다.

“서, 설마……!”

그제야 조금 전 느꼈던 기척이 어째서 익숙했는지 알아챘다. 그건 마력, 즉 마나였다. 본디 오러는 오러를 지닌 자들이, 마나는 마나를 지닌 자들이 기민하게 느끼는 거였다. 그런 탓에 다른 기사들이 조금 전 수상한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거였다.

“오, 오르티오 후작께서……!”

프로보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그러건 말건 펠리오는 집무실로 향했다.

“……저건 뭐지?”

우뚝 멈춰 선 펠리오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집무실 앞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그리고 펠리오가 느낀 불쾌한 감정은 그 두 사람 중 오롯이 한 명만을 향했다.

“아빠!”

레오니에가 우다다 달려왔다.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품에 껴안으며 아이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에는 함께 있던 상대를 향한 경계심이 가득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런 레오니에를 살핀 펠리오가 남은 한 명에게 물었다.

“타바누스 영식.”

조금 전 그가 말한 ‘저건’은 바로 무스카 타바누스 영식이었다. 무스카 타바누스는 크게 당황하며 집무실에서 서둘러 떨어졌다. 그의 손은 어정쩡한 자세로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레오니에의 키와 엇비슷한 높이에 멈춰 있었다.

“내가 두 번 묻게 할 셈인가?”

“…….”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 그게…….”

“아빠 있잖아!”

레오니에가 기다렸다는 듯 무스카 타바누스를 손가락질했다.

“아까 나, 애들하고 간식으로 쿠키 먹었거든? 그리고 낮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와서 아빠 집무실에 가 볼까 싶어서 몰래 나왔는데…….”

레오니에가 재잘재잘 고자질했다.

요는 낮에 있던 일로 잠이 오지 않던 레오니에가 심심해서 저택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산책하던 중, 우연히 펠리오의 집무실을 지나가다 낯선 인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낯선 인물은 펠리오의 집무실에 들어가려는 것처럼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고.

“그래서 내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잖아!”

“너보고 뭐라고 했어?”

“저 미친 새끼가……!”

“저렇게 징그러운 건 새끼라고 하긴 그렇지 않나?”

펠리오가 쓸데없는 딴죽을 걸었다. 한참 고자질하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그러네.”

우야튼 저 미친 남자가, 레오니에는 착한 딸답게 호칭을 고쳤다. 그러나 ‘우야튼’ 같은, 걸쭉한 말버릇은 그대로였다.

“내가 들어가지 말라고 앞을 막았거든? 그러니까 저 아저씨가 나를 막 훑어보면서 피식거리고 비웃었어!”

“아, 아닙니다!”

무스카 타바누스가 뒤늦게 변명했다. 그는 화장실이 급해서 다과회에서 잠시 나온 거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우연히 집무실 앞까지 도달했다고. 그래서 이곳이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갔다고 둘러댔다.

“뻥 치지 마, 이 또라이야.”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리며 남자를 노려봤다.

“저 새끼가 나 들으라는 듯이 욕했어.”

“뭐라고.”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천박한 여, 여자의 피가…….”

신명 나게 일러바치던 레오니에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에구머니나.”

레오니에가 후다닥 내려와 프로보 뒤로 피신했다.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바로 옆에서 본 펠리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단연코 지금껏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함부로 묘사가 불가능한 흉악스러움으로 뒤덮였다. 프로보도 레오니에를 끌어안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나 오줌 쌀 뻔했어요.”

레오니에가 속닥거렸다.

얼음장 같은 공기가 삽시간에 퍼져 갔다. 프로보는 순간 자신이 내뱉은 숨이 허옇게 얼어붙은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만큼 전신을 감도는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툭툭.

허벅지 아래로 내려온 펠리오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타바누스…….”

펠리오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레오니에는 어느 미래를 확신했다. 무스카인지 마스카라인지 모를 저 남자는 펠리오 손에 반드시 끝을 맞이하게 될 거다.

그게 바로 조금 전 레오니에가 예상한 ‘뭐가 큰일 났음’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집무실을 화장실로 오해했다는 멍청한 이유가 아니라, 레오니에에게 천박한 피가 흐른다고 욕한 탓이라는 것도.

“……타바누스 영식.”

한참 말이 없던 펠리오가 다시 무스카 타바누스를 불렀다. 겁에 질린 채 파르르 떨던 무스카 타바누스가 불쌍할 정도로 몸을 흠칫거렸다.

“화장실은 이 층 연회장 바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아, 아아…….”

“어서 가시지요.”

의외로 펠리오는 무스카 타바누스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보에게 레오니에를 건네받으면서 친히 화장실까지 모시라고 명까지 했다.

프로보가 무스카를 체포하듯 끌고 가 버렸다.

“……화났어?”

레오니에가 힐끔 눈치를 살폈다. 펠리오는 그런 레오니에를 말없이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답답해 미치겠단 시선도 함께 보냈다.

“넌 화도 안 나냐.”

“화났지. 그러니 기다렸다가 이른 거 아냐.”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펠리오가 말한 지난번은 케레나 메레오카 영애와 있었던 사건이었다. 펠리오가 오면 고자질하겠다고 벼르고 있던 레오니에는 결국 송곳니를 폭주시키고 말았다.

“그냥 패.”

실수로 죽여도 감춰 주겠다며 펠리오가 말했다.

“패려고 했어.”

사실 펠리오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무스카 타바누스는 레오니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내듯 찔렀다. 레오니에는 기분 나쁜 걸 넘어 저놈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신을 건드리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케레나 전 예절 교사 이후로 경험하는 신박한 자살 방법이었다.

“……가로랑 세로.”

잠시 말이 없던 펠리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응?”

“둘 중 어느 방향으로 찢어 줄까?”

그 외에 대각선도 있다며 펠리오가 보기를 늘려 주었다.

“……내가 이제 와서 할 말은 아니지만.”

아빤 정말 애한테 못 할 말을 모르는구나. 레오니에는 으쌰으쌰 팔을 뻗어 펠리오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도 저 대신 화를 내주니까, 조금 전까지 불쾌하고 짜증 났던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

“나 이제 졸려.”

“방에 데려다줄까?”

“응…….”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방으로 향했다. 느릿한 걸음처럼 어화둥둥 도닥이는 손길에 하품을 크게 내뱉던 레오니에는 침대에 눕혀질 땐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도로 집무실로 향했다.

“기다리게 했군요.”

그곳에는 레오니에가 보았다던 크고 통통한 고양이가 있었다.

“딸아이가 낮잠 잘 시간이라.”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눈표범이 그르렁거렸다.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거기다 제가 멋대로 일찍 왔으니까요.”

눈표범이 번뜩 상체를 들어 이족 보행을 선보였다.

복슬복슬한 털은 새하얀 드레스로 변했다. 전신에 달라붙는 가늘고 긴 모양은 동부 저 너머 이국의 것이었다. 통통한 몸체는 굴곡진 여인의 몸으로, 매섭던 맹수의 얼굴은 푸른 머리를 짧게 친 이지적인 미녀의 미소로 바뀌었다.

“참고로 타바누스 영식이란 사내가 보레오티 영애께 모욕을 선사한 건 사실입니다. 아, 그리고 영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비웃더군요.”

“참으로 창의적인 자살 방법이군요.”

펠리오는 무스카 타바누스의 손가락을 고이 잘라 본인 이마에 정성껏 꽂아 주는 상상을 했다. 제법 잘 어울렸다.

소파에 앉은 여자가 싱긋 웃으며 오른 다리를 왼쪽으로 꼬았다. 길게 트인 치마 사이로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추워 보이는데.’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중에 레오니에가 자라서 저런 걸 입는다고 하면 골치 꽤 아플 것 같았다. 동부와 하는 거래 중 저 드레스는 수입하지 말자고 결정했다.

“우선.”

맞은편 자리에 앉은 펠리오가 인사했다.

“북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북부의 주인이 동부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오르티오 후작.”

아득한 밤하늘을 품은 가는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반겨 줘서 고마워요, 공작님.”

이 역시 사냥꾼의 미소였다.

* * *

다과회가 끝나고 이틀 뒤.

리네 백작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갈 마차에 올랐다. 그들은 서부 영지에 잠시 들러 그곳에서 지냈다가 다시 수도로 올라가 지낸다고 한다.

“징한 것들.”

이제야 가냐며 배웅나온 펠리오가 중얼거렸다.

“초대한 건 아빠잖아.”

아닌 척하면서 새침 떨기는. 레오니에가 수상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어. 그런데 유부남은 안 된다?”

“그딴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하든.”

“난 계속 주시할 거야! 나의 눈은 속일 수 없다고!”

“너도 참 인생 즐겁게 산다…….”

지루할 틈은 없겠다며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 맹수는 아기 맹수의 변태 취향을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게 속 편했다.

“그럼 우린 그만 갈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니스와 아비페르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 레오니에도 우피클라, 피누와 헤어짐을 나누었다.

“도착할 때까지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마차가 멈출 때마다 화장실 꼬박꼬박 들르고, 멀미할 것 같으면 창문 너머 멀리 보고…….”

레오니에는 그간 정이 든 두 아이에게 사랑의 잔소리를 퍼부었다. 주 내용은 먼 길 가는 동안 싸우지 말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는 말이었다.

“네!”

“네에!”

아이들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레오니에는 리네 남매를 제 수족처럼 길들였다.

“……네 딸 일곱 살 맞지?”

카니스가 몰래 속닥거렸다. 일곱 살 아이에게서 애들 엄마인 아비페르가 겹쳐 보였다.

“본인 말로는 정신 연령이 서른 가까이라더라.”

“그건 또 너무 현실적인 나이네요.”

어쩐지 설득력 있는 나이라며 아비페르가 키득거렸다.

“그럼 정말 가 볼게.”

“영애께서도 건강히 잘 지내세요.”

“네. 두 분께서도 조심히 가세요.”

레오니에가 공손히 인사했다. 첫날 보여 주지 못한 예의 바른 인사로 리네 백작 가족을 배웅했다.

“……영애께서.”

몸을 낮춘 카니스가 레오니에의 손을 잡으며 목을 울렁거렸다.

“영애께서 펠리오의 가족이 되어 주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카니스는 코를 크게 훌쩍이며 씩 웃었다. 진심으로 펠리오를 걱정하는 친구의 모습이었다. 레오니에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저도 아빠가 제 아빠라 기뻐요.”

“펠리오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응, 이제는 알아요.”

수줍어하는 레오니에의 머리 위로 펠리오의 커다란 손이 내려왔다. 전부 다 듣고 있었던 펠리오의 입가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인사를 마친 리네 백작 가족이 마차에 올랐다. 열린 창문 사이로 우피클라와 피누가 쏙 몸을 내밀더니 팔을 흔들며 다음에 또 보자고 크게 소리쳤다.

“내가 창문 밖으로 몸 내밀지 말라고 아까 말했는데.”

어휴, 레오니에가 짧은 숨을 흘리면서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레오 언니!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누나 빠빠!”

“너희도 조심히 가!”

곧 마차가 출발했다.

한동안 보레오티 공작저를 떠들썩하게 한 리네 백작 가족이 그렇게 돌아갔다. 펠리오와 레오니에는 리네 백작이 탄 마차가 새까만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 서 있었다.

“…….”

레오니에는 괜히 서운한 마음에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펠리오의 다리에 엉겼다.

“조금 쓸쓸해.”

“시끄러운 놈들 가서 속이 후련하지.”

“아빠는 솔직하지 못해.”

그러나 펠리오는 미동도 없었다. 반응 없는 아빠가 얄미웠던 레오니에가 조금 더 짓궂게 놀렸다.

“하아, 백작 아저씨가 결혼만 안 했어도 새 아빠로 점지해 볼 만…….”

“네가…….”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레오니에의 입술을 가볍게 두들기며, 펠리오가 말했다.

“……레오 네가 있으니까 쓸쓸하지 않아.”

레오니에가 눈을 끔뻑거렸다. 펠리오가 그렇지 않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곧 레오니에가 헤벌쭉 미소지었다.

“나도 아빠랑 있으면 하나도 안 쓸쓸해!”

두 부녀는 문득 햇살이 비치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정원에 심어 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레오니에가 나무를 가리켰다.

“푸른 잎이 났어.

앙증맞은 새싹이 싱그러웠다.

“몽땅한 게 너랑 똑같네.”

펠리오가 짧게 감상했다.

“……짜증 나, 진짜.”

창에 비친 레오니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느새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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