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4. 범상찮은 일상 (4/51)

#4. 범상찮은 일상

‘아마 막내였지?’

위로 나이 차 많은 누이와 형을 둔 루페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곧장 보레오티 공작저에 취직해 펠리오의 측근이 되었다. 후작 가문에선 자신이 무얼 해도 돋보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루페는 욕심이 많았다. 그는 출세욕이 많았고, 가문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보레오티 공작 가문은 루페의 욕심을 전부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직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상사와 남부러울 것 없는 봉급, 보레오티 공작의 비서라는 희소성까지.

말로야 만날 일이 너무 힘들다며 투정 부리지만, 결국엔 맡은 바를 완벽히 수행하는 루페의 모습은 강자에 충성하는 파르두스 핏줄의 명백한 산증인이었다.

‘루페 아저씨도 보통은 아니네.’

사람 좋은 얼굴로 그런 야망을 품고 있다니, 레오니에가 혀를 끌끌 차며 아이들을 따라 순록에게 먹이를 먹였다.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자른 사과를 손바닥 위에 올려 내미니 물컹한 입술 사이로 이를 드러내 물어 가져갔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그런 루페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이 상승했다. 보레오티 공작의 옆에 있으려면 그 정도 야망은 지녀야 했다. 야망만 품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야 루페가 훨씬 근사하고 멋졌다.

그렇다고 루페가 가족들에게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일 때문에 본가에 자주 못 가는 루페는 일로 만나는 후작을 통해 어머니께 편지를 전해달라 부탁하고, 가끔 만나는 조카들도 예뻐했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루페에게서 파르두스 후작이 겹쳐 보였다. 코와 입을 쏙 빼닮은 부자였다. 반면 루페의 눈은 지금 막 순록에게 당근을 주고 호들갑 떠는 조카랑 비슷했다.

“보레오티 영애.”

플로무스가 생각에 푹 빠진 레오니에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혹시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어린애가 참 일찍 철들었네, 레오니에는 그런 생각을 짧게 하며 싱긋 웃었다.

“나 괜찮아.”

그제야 플로무스가 한시름 놓았다.

“이제 순록을 탈 거예요.”

케라타 자작과 순록 농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일꾼들이 투투의 등 위에 안장을 얹었다. 아이 중 절반이 순록을 탈 예정이었다. 나머지는 다른 어른의 인솔을 받아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

“괜찮으시다면 타 보시겠어요?”

“그래, 좋아.”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 조심하세요…….”

파보는 조금 전 순록의 비밀을 알고 난 뒤로 계속 쭈뼛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아무런 죄 없는 투투의 촉촉한 코를 경계하며 노려보기까지 했다. 정작 투투의 파란 눈망울은 경계심 없이 느리게 움직일 뿐이었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많이 아파요!”

“파보 오빠…….”

레오니에가 동정 어린 시선을 내비쳤다.

“여기 순록은 기생충 없대요. 그치, 플로?”

“네, 네!”

“봐요. 플로도 그렇게 말하잖아요.”

“플로…….”

플로무스가 놀란 목소리로 레오니에가 말한 저의 애칭을 따라 곱씹었다. 애칭으로 불린 플로무스의 볼이 수줍게 물들었다. 레오니에가 계속해서 자신을 애칭으로 불러 주는 것이 좋았다. 진짜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아가씨가 아직 기생충을 몰라서 그래요!”

남부 출신인 파보는 어렸을 적부터 기생충이 얼마나 무서운지 배워왔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꿈에 나올까 무섭네. 레오니에는 파보를 놔두고 순록을 타러 갔다.

순록을 타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케라타 자작이 아이들을 한 명씩 순록 안장 위에 올리면, 일꾼들이 고삐를 잡고 울타리 안을 한 바퀴 빙글 돌아주는 게 전부였다.

“엄청 높았어!”

“순록이 움직였어요.”

“털도 엄청 두꺼웠어.”

순록 승마를 마친 아이들은 너도나도 감상을 주고받으며 재잘거렸다.

“보레오티 영애께서 마지막이시군요.”

가장 늦게 줄을 선 레오니에도 순록 위에 올랐다. 예상보다 높아진 시야에 레오니에가 움찔했다. 고삐를 잡으라는 자작의 말에 지체 없이 고삐를 두 손으로 꽈악 쥐었다.

곧 순록이 움직였다.

“오오…….”

레오니에는 다리에 닿은 순록의 근육에 감탄했다. 한 발씩 움직일 때마다 탄력 넘치게 꿀렁이는 근육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털이 생동감 넘치게 온기를 가득 품고 있고, 머리 위에 난 커다란 뿔은 오래된 나무 조각품처럼 단아하고 정갈했다. 마치 살아 있는 회전목마 같았다.

한 바퀴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레오니에는 케라타 자작의 손에 안겨 바닥에 무사히 착지했다. 투투가 고개를 숙이더니 레오니에의 얼굴에 대고 킁킁거렸다.

“투투가 영애를 잘 따르네요.”

“착하고 귀여워요.”

케라타 자작은 순록을 쓰다듬는 레오니에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헛된 소문이 무색할 만치 아이는 순수하고 깨끗했다. 순록을 보며 반짝이는 눈동자가 마치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같았다.

아이는 유리 구슬 같은 깨끗한 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먹을 수 있나?”

근육 때문에 질길 것 같은데.

“아아…….”

동심에 감동했던 자작의 미소에 힘이 쭉 빠졌다.

* * *

“아빠!”

순록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펠리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펠리오는 여전히 파르두스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레오.”

저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펠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추운 것도 모르는 듯 그저 기세 좋게 달려오는 딸아이를 가볍게 안아 올린 펠리오가 순간 인상을 짧게 썼다.

“순록 냄새.”

“투투가 계속 내 얼굴에 대고 킁킁거렸거든.”

“투투?”

“순록 이름. 암컷이야.”

“구경은 재미있었고?”

펠리오는 뛰어오느라 여기저기 빠진 아이의 머리칼을 손수 정리해 주며 물었다.

“근육이 끝내주더라.”

“넌 또 근육 타령이냐.”

“꿀렁꿀렁하더라.”

“좀 건전한 시각으로 볼 순 없고?”

“어어, 순록 맛있냐고 물어본 건 좀 건전해?”

레오니에가 대놓고 까불거렸다. 펠리오는 뭐라 한마디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만 작작 좀 하라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집에 가서 동화책 두 권 읽고 독후감 써라.”

“아, 왜!”

싫다고 대드는 레오니에를 가볍게 무시한 펠리오는 한숨을 짧게 쉬었다. 솜방망이 주먹이 몇 번 날아왔지만 보란 듯이 피했다. 동심 좀 키우려고 이곳에 데려왔더니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들은 것보다 사이가 좋군요.”

옆에서 맹수 부녀를 지켜보던 파르두스 후작이 껄껄 웃었다.

후작은 일전에 루페에게서 두 부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펠리오가 생각 이상으로 아이를 잘 보살피고, 아이도 그런 펠리오를 잘 따른다고.

‘진짜 부녀 같아요.’

보레오티 공작에게 딸이라니, 처음에 후작은 콧방귀를 뀌며 설마 했다. 그런데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본 맹수 부녀는 말 그대로 부녀였다. 그들은 어지간한 가족보다 허울 없이 지내며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동화책 싫어! 차라리 내 애독서 감상문 쓸래!”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다.”

“그럼 아빠가 해! 아빠가 나보다 더 동심 없으면서!”

“난 어른이잖아.”

치사한 핑계에 레오니에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몸만 애지, 정신 연령은 나름 견줄 만했다.

“나도 마음은 어른이야!”

“너는 애늙은이고.”

나이를 생각하라며 잔소리한 펠리오가 딸기 우유 사탕을 꺼내 입에 넣어 주었다. 얼떨결에 사탕을 입에 문 레오니에는 아빠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사탕을 오물거렸다.

진귀한 구경을 가까이서 마친 후작은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천하의 보레오티 공작이 육아라니.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남들이 다 그러지만, 역시 살아야 이렇게 재미난 것도 볼 수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후작의 나이는 사실 예순도 채 되지 않은 중년이었다.

“아, 나 친구 사귀었어.”

한참 반항하던 레오니에가 불현듯 떠올린 사실을 보고했다.

“누구?”

펠리오가 곧장 물었다.

“플로. 플로무스 케라타.”

“케라타 자작 영애?”

역시 그 아이가 정답이었군, 펠리오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애가 참 참하고 괜찮아.”

“그런 말 좀 쓰지 마.”

“으음, 하긴. 참한 건 아니지.”

순록 이야기만 나오면 애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 빼곤 다 괜찮았다. 사실 그 제정신 아닌 부분이 꽤 재미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케라타 자작 영애라면 괜찮지.”

“아빠가 웬일이야?”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남을 선뜻 칭찬하는 펠리오가 낯설었다.

“애가 착해.”

“착한 것 같아.”

“아까 보니 야무지더라.”

“그것도 맞아.”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또래보다 야무지고 머리가 좋은 플로무스와 나눈 대화는 상당히 편했다.

“그리고 순해.”

“어?”

“너한테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다.”

플로무스와 함께 있던 레오니에는 그 나이 또래 아이처럼 보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도대체 순하다는 것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무슨 상관인 건지, 레오니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펠리오는 저의 의중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아이의 눈빛을 손바닥으로 가려 무시했다. 레오니에가 손바닥을 잡아 휙 내쳤다.

“그럼 저희 손주는 어떤가요?”

파르두스 후작이 웃음을 꾹 참은 채 끼어들었다. 레오니에가 후작의 다리에 매달린 손주를 빤히 바라봤다.

“애가 착하고 좋아요.”

“하하! 영애의 말투가 꼭 연령 있는 부인 같네요.”

“제 속이 좀 삭았거든요.”

펠리오가 탄식했다. 애늙은이 딸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푸하하하하!”

태연한 레오니에의 말투에 후작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펠리오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뭐, 뭐. 레오니에가 턱을 으스대며 뻔뻔하게 굴었다.

“근데 아빠, 저 할아버지랑 친해?”

“아니.”

“친하답니다.”

펠리오와 파르두스 후작이 동시에 답했다. 심지어 펠리오는 정색까지 했다.

“그런 쓸데없는 건 왜 물어봐.”

“쓸데없진 않아.”

레오니에가 입술을 살짝 내밀며 반박했다. 제게 있어선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으니까.

‘파르두스 후작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때 등장해.’

원작에서 후작이 맡은 역할은 사건의 실마리가 될 정보 제공자였다. 명실상부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정보통이었다. 그런 후작이 펠리오 곁에 나타났다.

“그럼 아빠 몇 살이야?”

‘레오니에’는 소설에 아예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남주의 딸이 되었다. 시간은 원작의 변화와 상관없이 유순히 흘러가고 있었고, 원작을 아예 바꿔버린 레오니에는 뒤늦게 궁금해졌다.

자신이 지금 어느 시점에 머물고 있는지.

레오니에는 지금 와서 딱히 원작을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자신이 원작을 크게 바꾸었기 때문에, 앞장서서 원작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개소리는 내뱉기 싫었다. 그건 곧 저 자신을 없앤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돈 많고 권력 있고 잘생기고 근육 있는 아빠 덕에 떵떵거리고 사는데, 레오니에한테 원작의 흐름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 속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니, 알아는 둬야 했다.

문제는 그걸 확인할 방법이 많지 않다.

우선 소설에선 주인공들의 대체로 나이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저 남주가 여주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이라든지, 둘 다 제 나이에 비해 가진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는지, 나이가 들어도 잘 늙지 않는다든지. 전형적인 로판 주인공들답게 나이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한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딱 한 사람 빼고.’

저렇게 서로 안 맞는 펠리오와 파르두스 후작마저 합심해서 질색할 인물. 1황자였다. 황비 소생의 일황자의 16번째 탄생 연회가 열리는 첫날이 소설 [검은 맹수의 바리아]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지금 레오니에가 묻는 펠리오의 나이는, 일황자에 관해 물어보기 위한 일종의 초석이었다. 이제 막 공작 영애가 된 사생아가 뜬금없이 황자와 황실을 물어보는 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고.

‘거기다…….’

레오니에가 이런 수고까지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 부녀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파르두스 후작 때문이었다. 레오니에는 파르두스 후작에게 이상한 낌새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을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래서 저도 슬그머니 짜증 어린 시선으로 가볍게 바라봤다.

하나 저 능구렁이는 뭐가 좋은지 마냥 히죽거렸다.

‘짜증 나.’

소설로 볼 때야 매력 넘치고 능력 좋은 사람이지, 막상 실제로 마주한 후작은 아주 기분 나쁜 아저씨 이상 할아버지 미만이었다. 거기다 펠리오가 대놓고 질색하는 티가 역력하니, 그의 딸인 레오니에 역시 파르두스 후작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아빠의 적은 딸의 적!’

작은 고개가 열심히 움직였다.

찝찝한 이유는 또 있다. 후작은 마음만 먹으면 레오니에가 레지나의 딸이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검은 맹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주인의 허락 없이 보레오티 가문과 관련된 정보는 조사하지 않는다. 그런 탓에, 후작은 레오니에 보레오티란 이름을 달고 느닷없이 나타난 어린 소녀를 자신의 두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내려고.

“참 일찍 물어본다.”

한참 후작과 눈싸움을 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펠리오의 시선은 오히려 왜 지금껏 그걸 물어보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런 한편, 레오니에가 제게 관심을 가져 이런 걸 물어보는 게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입가가 느슨하게 올라간 게 증거였다.

“그래서 지금 물었잖아.”

레오니에가 실없는 웃음을 헤벌쭉 지으니 펠리오가 아이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러나저러나 펠리오가 제게 많이 무른 아빠라는 걸, 영악한 딸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또 한 번 미소를 지어 주니, 펠리오가 곧 입을 열었다.

“스물일곱.”

나이를 들은 레오니에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우렁찬 비명을 질렀다.

“뭐!”

큼지막한 비명에 펠리오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특히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던 펠리오는 귀가 얼얼했다. 지금껏 먹은 음식들이 키가 아니라 목청으로 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진짜야? 정말로?”

레오니에가 호들갑스레 손사래를 쳤다.

“아빠, 거짓말이지?”

“왜, 너무 많아서 놀랐냐.”

자신이 잘난 얼굴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펠리오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남들이 칭찬하는 소리야 귓가에서 벌레가 앵앵거리는 거나 다름없지만, 딸한테 잘생김을 인정받는 건 꽤 유쾌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레오니에가 손을 들었다.

“난 아빠 서른은 넘었을 줄 알았지!”

그리곤 자기 얼굴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무미건조한 행동이나 말투, 인생 서너 번은 살아본 듯한 나른한 인상 등. 지금껏 레오니에가 가까이서 보아온 펠리오 보레오티는 서른은 가뿐히 넘긴 줄 알았다.

“이게 어떻게 스물일곱 얼굴이야?”

나이를 그때까지 세다 잊어버린 거 아니냐며, 레오니에가 여전히 제 얼굴 위로 손가락을 잔망스럽게 움직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펠리오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는 아주 잘 먹혔다.

맹수의 송곳니를 발동한 것도 아닌데, 두 부녀가 서 있는 케라타 저택 정원에 매섭고 시린 공기가 휘몰아쳤다. 레오니에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고개를 푹 숙였다. 파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제발 아가씨가 입을 다무시길 간절히 기도했고, 파르두스 후작은 겁먹고 칭얼거리는 손주를 제 뒤로 숨기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그 와중에 후작은 홀로 배짱 좋게 웃음을 꾸욱 참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참다못해 거의 흐느끼는 중이었다.

“늙은이 죽는다, 죽어…….”

“으아아앙! 할아버님 죽지 마요!”

후작의 손자가 엉엉 울음을 터트린 뒤에야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아야!”

동시에 레오니에의 머리 위로 펠리오의 주먹이 콩, 내려 찍혔다.

레오니에 생애 첫 맴매였다.

* * *

보레오티 공작저로 돌아온 레오니에는 혹이 난 이마를 카라에게 보여 줬다.

“카라 할머니! 이거 봐요!”

발꿈치까지 쫑긋 세운 아기 맹수가 낑낑거렸다.

“아니, 세상에! 이게 무슨 혹입니까?”

“아빠가 때렸어요.”

그리곤 서글픈 표정으로 일러바쳤다.

“맞아도 쌌지.”

어느새 레오니에 뒤에 선 펠리오가 콧방귀를 끼며 고자질하는 딸을 가소로이 바라봤다. 첫 맴매에 기분 나빠진 레오니에가 두 주먹 꽉 쥐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아빠가 그냥 아빠야? 남들보다 배로 강한 사람이 어떻게 딸을 때려!”

“요새 자주 기어오른다?”

“늘 기어올랐거든?”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을 거란 뒷말을 삼킨 채, 레오니에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다.

“아프냐.”

“응.”

“난 안 아픈데.”

“아빠 진짜…….”

정색하던 레오니에가 너무 아파서 이마가 갈라지는 줄 알았다고 투덜거렸다.

펠리오는 입맛이 썼다. 이 작은 아이한테 손찌검했다는 사실이 저 자신을 불쾌하게 했다. 하얗고 둥근 이마에 붉은 혹이라니. 아이가 제게 까불고 대드는 게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그거 하나 못 참고 손을 올리다니. 스스로가 역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펠리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딸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이 조그마한 애한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렸는지.

“아빠 얼굴이 삭은 게 왜 내 탓이야.”

다행히 착한 효녀는 아빠의 그런 마음을 깃털처럼 날려 보냈다. 펠리오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혹이 난 곳을 힘줘 눌렀다. 곧 나지막한 비명이 가늘게 터졌다.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딸의 불평불만을 무시한 채, 카라에게 연고를 가지고 오라 지시했다. 그리고 손수 아이의 혹에 연고를 발라 줬다.

“으으, 냄새……!”

코를 찌르는 약초 냄새에 레오니에의 눈썹과 눈썹이 상봉했다. 그 모습이 퍽 웃겼던 펠리오가 연고가 묻은 손가락을 딸의 콧구멍 근처에 가져갔다. 약초 냄새 맡고 얼른 나으라는 아빠의 사랑을 느낀 레오니에가 오만상을 썼다. 인중이 코끝까지 올라갔고, 결국 펠리오가 어깨를 떨며 작게 웃었다.

“……!”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이 조용히 경악했다. 천하의 보레오티 공작이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모두 헛걸 본 줄 알았다.

“왜 또 웃어!”

그러나 레오니에의 한마디로 다들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이 진짜였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웃음을 여러 번 본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했다. 오히려 비웃지 말라며 위협이라곤 전혀 없는 물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게 누가 까불래.”

“동심 넘치고 좋네!”

“동심을 악용하지 마라.”

연고를 다 바른 펠리오가 같이 온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희미한 연둣빛이 수건에 스며드는 걸 본 레오니에의 입술이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왔다. 어쩐지 냄새가 고약하더니, 제 이마도 저 꼴이 났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사용인들을 물린 펠리오가 소파에 나른히 기대 누웠다. 레오니에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꾸물꾸물 움직였다. 느슨하게 누운 펠리오의 가슴에 등을 착 붙이고, 단단한 팔을 끌어당겨 제 허리에 감았다. 레오니에의 또 다른 지정석이었다.

“그나저나 아빠가 스물일곱이라니…….”

평화로운 시간이 찾아오니, 잠시 잊고 있었던 충격의 여파가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거리는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펠리오의 시선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 레오니에의 머리가 오늘 예쁘게 묶였다고 생각했다.

“우리 딸은 혹 만들고 싶다고 부탁하는 것도 참 잘해.”

“아니이이, 아빠가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거지.”

레오니에가 서둘러 핑계를 덧붙였다.

“너무 잘생기고 근사하니까 서른은 넘은 줄 알았지! 그 나이에 벌써 그런 얼굴이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얼마나 더 멋있어지려고 그래. 아주 그냥 얼굴로 마물들 쓸어버리겠네. 나도 아빠 닮았으니까 나중에 멋있어지려나.”

평소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콧소리와 혀 짧은 말투까지 섞어 가며 아빠의 심기를 풀어 줬다. 누가 들어도 잘못을 무마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과장된 말투다.

다행히 레오니에의 핑계는 대부분 사실이라 진정성이 조금이나마 있었다.

“헛소리는.”

“그러면서 왜 내 입에 사탕 먹여?”

애교가 잘 먹혔는지, 어느새 사탕을 문 레오니에가 입을 오물거렸다.

“……응?”

딸기 우유의 진한 단맛에 취하려던 찰나.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가 레오니에의 혹이 난 이마를 거세게 치고 갔다.

“아빠!”

“깜짝이야, 왜.”

전혀 깜짝 놀라지 않은 얼굴로 펠리오가 물었다.

“그럼 나 낳아 준 사람은?”

“뭐?”

“아빠 사촌 동생! 내 친모라는 사람. 몇 살 때 가출한 거야?”

지금 거실에 있는 사람이라곤 저와 펠리오뿐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누가 들을까 레오니에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

펠리오가 몸을 슬그머니 일으켰다. 나른하던 검은 눈에 당혹스러움이 드리워졌다. 그 반동으로 뒤로 콩, 넘어진 레오니에도 도로 일어나 아빠를 응시했다.

“……열여섯 살.”

자신이 기억하는 레지나의 마지막 나이를 헛말처럼 중얼거린 펠리오가 흘러간 세월을 뒤늦게 계산했다. 방랑 기사인지 뭔지 하는 놈과 눈맞아 사랑의 도피를 떠났던 레지나는 당시 열여섯 살이었고, 이게 벌써 십 년 전 이야기였다.

그리고 레오니에는 현재 일곱 살이었다.

“……미친.”

계산은 금방 나왔다. 아이 앞에선 나름 언행을 자중했던 펠리오가 처음으로 거친 말을 내뱉었다. 레지나는 무려 열여덟 살의 몸으로 임신해 레오니에를 낳았다. 이 낭만 넘쳤던 사촌 여동생은 이런 식으로 또 자신의 속을 박박 긁어 버렸다.

“우와…….”

덩달아 계산을 마친 레오니에 역시 펠리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 다른 생각이었다.

“아빠.”

그리고 펠리오를 불렀다.

“그 사람, 꿈과 희망이 넘쳤다면서.”

“……그랬지.”

“동심도 넘쳐났겠네.”

펠리오의 미간에 주름이 깊이 새겨졌다. 레오니에가 이때다, 하고 밀어붙였다.

“나 이제 동심…….”

“기르지 마.”

펠리오가 즉답했다.

“그딴 거 인생에 아무 도움 안 돼.”

지금껏 동심 좀 키우라고 막무가내였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펠리오에게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레오니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네가 열여덟에 임신하는 꼴 죽어도 못 본다.”

그 전에 상대 남자를 잘게 갈아 마물 밥으로 먹여 줄 생각이었다. 레오니에가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슬그머니 숨긴 손으로는 주먹을 불끈 쥐며 드디어 벗어났다는 환호를 기쁘게 표현했다.

처음으로 절 낳아 준 모친에게 고마운 순간이었다.

* * *

친모에게 의도치 않은 도움을 받았지만, 레오니에는 새롭게 드러난 저의 출생의 비밀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파르두스 후작이 나타난 이유를 알아내려고 했던 생각마저 까먹을 정도였다.

제 친모가 자그마치 10대에 임신했다니. 펠리오가 드물게 당혹스러워하던 모습이 사무치게 이해될 정도였다. 그렇게 태어난 저 자신도 놀랐으니까.

‘여러모로 대단해.’

과연 북부의 검은 맹수는 사고도 어마하게 쳤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 돌려받은 애독서 ‘인생 다 부질없다’를 닫았다. 아무리 인생 다 부질없대도, 도저히 애독서를 읽을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펠리오가 사다 준 동화책으로 충격받은 저의 마음을 정화하고 싶었다.

‘그럼 친부는 어떤 놈이야.’

궁금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면상에 대고 욕을 한 보따리 쏟아 주고 싶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철부지 소녀를 꼬드겨 도망친 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임신을 시킨 건지. 질문 하나하나에 주먹 하나를 꽂고 싶었다. 아니, 송곳니로 꿰뚫어 버리고 싶었다.

책임 못 질 임신은 레지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을 따진다면 어린 여자를 꼬드겨 무책임하게 싸지른 친부 쪽이 더 심각했다.

‘장담컨대, 그 새끼 분명 도망쳤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이 고아원에서 그토록 힘든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아가씨, 점심 식사하러 가셔야지요.”

“응!”

속으로는 얼굴도 모르는 친부의 책임감 없이 질질 흘리기나 하는 수도꼭지를 끊임없이 욕하며, 레오니에는 코니의 손을 잡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식당에 갔다. 언젠가 친부를 만나면 쓸모도 없는 수도꼭지를 뽑아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식당에 도착하니 펠리오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며칠 만에 보는 펠리오를 향해 우다다 뛰어간 레오니에가 덥석 긴 다리를 안았다.

“레오, 내가 뛰지 말랬지.”

“아빠 괜찮아? 안 힘들어?”

“힘들어 죽겠다.”

펠리오가 바로 옆 의자에 레오니에를 앉혔다. 실제로 펠리오의 얼굴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레오니에가 입가를 축 늘어트리며 손을 뻗었다.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팔이 짧아 실패했다.

“누가 우리 아빠 이렇게 힘들게 해!”

“레오 네가 가서 패주게?”

“응! 패줄게!”

이거 보라며 레오니에가 허공에다 에잇, 주먹질했다. 아이의 과장된 허세만으로도 이미 펠리오의 피로는 거의 다 날아갔다.

두 부녀가 떠드는 사이에 점심 식사가 나왔다. 해산물을 넣어 만든 로제 파스타와 아삭아삭한 잎채소에 치즈를 넣어 만든 샐러드는 아직 일이 많은 펠리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우와, 새우다!”

“새우가 좋아?”

“닭만큼 좋아.”

고작 새우 하나 가지고 저렇게 기뻐하다니. 펠리오는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제 접시에 있던 새우를 내밀어 손수 먹여 줬다. 오물오물 받아먹던 아기 맹수가 이번엔 제 접시에 있던 새우를 집어 쑥 내밀었다.

“아빠도 아앙.”

펠리오는 이제 시키지 않아도 예쁜 짓을 알아서 하는 딸을 기특한 눈으로 응시하곤 기꺼이 받아먹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레오니에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예쁘고 귀여웠다.

‘역시 강제는 좋지 않군.’

동심을 어떻게 길러 줘야 하나 걱정하던 걸 멈추니, 레오니에는 전보다 훨씬 아이처럼 행동했다.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니 표정도 밝아지고 반짝였다.

“새 가정 교사가 올 거다.”

그런 변화가 만족스러운 펠리오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입가가 토마토소스로 범벅이 된 레오니에가 식사를 멈췄다.

“애 아엉오아?”

“입에 있는 건 다 삼키고.”

레오니에가 아빠 말대로 입에 있던 걸 서둘러 꿀꺽 삼켰다.

“새 가정 교사?”

“그래.”

펠리오가 냅킨으로 레오니에의 입에 묻은 소스를 닦으며 말했다.

원래 레오니에의 예절 교사는 케레나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데려오려 했지만, 그쪽에서 일말의 사정으로 계속 제의를 반려했다고. 하지만 이번에 결국 가정 교사 제의를 받아들였다.

“……아빠랑 연관된 여자는 싫어.”

이전의 경험을 떠올린 레오니에가 경계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이번 예절 교사는 아르데아의 아내였다.

이름은 헤로 보스그루니.

“보스그루니 백작 가문의 가주다.”

“아르데아 선생님 귀족이었어?”

심지어 북부 골수 가문 출신이란다.

레오니에는 일전에 아르데아가 케레나의 본가인 메레오카 가문을 이주민 가문이라며 선을 긋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쩐지 차별이 좀 심한 것 같았는데, 골수 가문 출신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선생님 귀족 아니야? 왜?”

“둘이 지금 별거 중이라서.”

“……아빠는 뭘 하고 싶은 거야?”

평화로운 집안에 또 분란 요소를 집어넣으려고 하다니.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해.”

레오니에가 못 미덥다는 듯한 눈빛을 흘렸다. 이쯤 되니 펠리오가 저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범상찮은 가정 교사들만 골라 고용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이건 뭐, 새로운 아동 학대야?”

“우리 딸이 아빠 가슴에 비수를 꽂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아빠 상처 입었어.”

“상처를 입혔겠지.”

펠리오는 누가 봐도 누군가에게 전치 8주 상해를 입혔을 가해자의 인상이었다. 레오니에의 촌철살인을 가볍게 무시한 펠리오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매주 한 번씩, 네 훈련이 추가될 거다.”

바로 맹수의 송곳니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조금 전까지 가정 교사 문제로 투덜거리던 레오니에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호기심을 보였다. 이건 좀 마음에 들었다.

“불안정했지만 레오 너도 송곳니를 분명히 드러냈었지. 그러니 그걸 제대로 드러내는 방법과 사용 방법을 배울 거다. 거기에 체력 단련도 겸하고.”

“에이, 체력 단련은 싫은데…….”

집순이 레오니에는 성실한 체력 단련이 벌써부터 괴로웠다.

“내 후계자가 될 건데, 지금부터 조금씩 배워야지.”

펠리오가 게으름 피우지 말라며 잔소리했다.

“……아빠, 정말로 나 후계자로 삼을 거야?”

레오니에는 여전히 저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펠리오의 결심에 깜짝 놀랐다.

그는 일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땐 레오니에가 아직 이 세상에 마음을 제대로 열기 전이라 흐지부지 넘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펠리오의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이상, 레오니에도 이 후계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생각해야 했다. 다만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거기다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지도 의문이었다.

아무리 피가 통하는 가족이래도 일단 레오니에는 방계 출신, 그것도 대외적으로는 사생아라 알려져 있다.

“내가 전에도 말 안 했나?”

정작 펠리오는 네가 왜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 못하겠단 얼굴이었다.

“애초에 난 널 입양할 때, 그런 것까지 다 고려했다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인생 막산다고.”

“레오 네가 정말 하기 싫다면, 그땐 고려해 보마. 나도 아직 젊으니 결혼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넌 내 딸이고, 보레오티 공작 가주를 이을 후계 일 순위라는 건 변치 않아.”

또 이런 거로 의문을 제기하면 입을 꿰맬 거라며 펠리오가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끄집어냈다. 사실 협박이라기엔 레오니에의 마음을 단단히 다독이는 마법의 주문이나 마찬가지였다.

“……흥.”

레오니에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럼 뭐, 좀 해 볼까.”

검은 머리 너머로 드러난 둥글고 작은 귀가 새빨갛게 물든 채였다.

펠리오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곧 마음을 가라앉힌 아이는 어색한 헛기침을 콜록거리며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았다.

식사가 끝난 후, 레오니에는 펠리오를 집무실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앞장서 걸어갔다.

“아빠.”

“응?”

두 손 꼭 쥔 채 나란히 걸어가던 중, 레오니에가 물었다.

“아르데아 선생님은 왜 별거 중이래?”

그래도 제 가정 교사로 오는 건데, 어느 정도 사정을 알아야 중간에서 부부 사이를 조율하든 눈치를 살피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펠리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별거 아닌 것처럼.

“전 가주였던 아르데아가 공부하겠다고 결혼 초에 처자식을 북부에 두고 혼자 상경했거든. 그래서 부인이었던 현 보스그루니 백작이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가주 자리와 작위를 전부 이어받았어.”

그리고 놀라 쩍 벌어진 레오니에의 턱을 손수 닫아 줬다.

* * *

‘……아빠도 참 재주꾼이야.’

레오니에는 기어코 별거 중이었던 부부를 한 저택에 모아 놓은 펠리오의 저력에 감탄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더니, 펠리오의 단점은 그에 대한 완벽한 증거였다. 그는 타인의 상황을 지나치게 배려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케레나 전 테드로스 백작 부인, 현 메레오카 여식이 그랬다. 그 사람이 저를 좋아했던 걸 알면서도 실력 좋다는 이유로 딸아이의 가정 교사로 불렀다.

그리고 오늘.

예상대로.

“여, 여보!”

“아르데아 너 이 새끼가……!”

레오니에는 제 눈앞에서 격투를 벌이는 노부부를 공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말이 격투지, 헤로 보스그루니 백작의 일방적인 구타였다. 북부에서 거친 풍파를 다 견디고 살아온 노부인에게, 한평생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아르데아 전 교수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었다. 그런데도 주먹을 저리 날린다.

‘어쩌다 이리된 걸까.’

레오니에는 불과 몇 분 전을 떠올렸다.

‘헤로 보스그루니 백작입니다.’

저택을 방문한 헤로 보스그루니 백작은 회갈색 머리를 단아하게 올려묶은 노부인이었다. 바짝 선 허리와 쭉 펼친 어깨, 주름이 진 콧등에 얹어진 끝이 뾰족한 코안경이 노부인의 인상을 매섭게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대화를 나눠 보니, 부인은 집사 카라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히려 레오니에가 케레나에게 당한 일을 걱정했는지, 예절 교육의 진도 과정을 섬세하게 만들어 보여 줬다.

그때까지는 레오니에도 펠리오가 왜 제게 이 분을 붙여 주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스그루니 백작은 정말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좋은 학생을 만나 기분이 좋다며 칭찬까지 해 줬다.

그리고 수업을 위해 자리를 옮기던 중.

‘아가씨, 지난번에 물어보셨던 질문…….’

저택에 기거하던 또 다른 가정 교사가, 새로 온 가정 교사와 마주했다.

지옥의 시작이었다.

“북부로 돌아왔으면 얼굴이라도 내비쳤어야지!”

“그랬다가 또 이렇게 때리려고!”

“당연한 거 아니야! 네 놈 때문에 내가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무, 무릎은 아니 돼요, 부인!”

“돼!”

파경 직전까지 갔다면서 아직도 이혼하지 않은 두 부부의 살벌한 싸움이 레오니에를 도로 이 끔찍한 지옥으로 데려왔다. 어째 예절 교사라고 오는 사람마다 저렇게 전투적인지. 한결같이 호전적인 북부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마침 의자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듯 날아올랐다.

더는 안 되겠다 싶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방을 나왔다. 나오는 순간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두 부부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떨어트리기를 반복 중인 모습이었다.

“아가씨!”

멜레스가 밖으로 나온 레오니에를 서둘러 찾아갔다.

“괜찮으세요?”

혹여 아가씨가 소란에 놀라진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레오니에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멜레스는 잠시 저의 아가씨도 보통이 아니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멜레스 언니.”

“네, 아가씨.”

“북부에서 ‘예절’은 쌈박질을 뜻하나요?”

“그렇지는 않……!”

아니라고 말하려던 멜레스가 멈칫했다.

“그러니까, 그게…….”

수도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북부는 분명 예절에 좀 관대한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예절이 아예 무시되는 건 아니다. 평민 출신인 멜레스조차 그 정도 흐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멜레스가 멈칫한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껏 레오니에가 거친 예절 교사들이 전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교사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 오신 보스그루니 백작은 지금도 문 안에서 남편과 살벌한 부부 격투를 행하시는 중이었다.

“북부 사람들은 씩씩할 뿐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요?”

“네 아닙니다.”

멜레스가 이실직고했다. 그냥 저 부부가 좀 심각할 뿐이었다. 레오니에와 멜레스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하나 북부에서도 예절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보스그루니 백작은 영애 시절 사교계에서 무척 유명하신 분이셨어요. 그분이 찻잔을 손에 쥐면 뭇 영식들께서 쓰러지셨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답니다.”

곧 문 너머로 쨍그랑, 찻잔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겁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이어 들렸다.

“지금도 그런데요?”

“…….”

“그런데, 저거 우리 집 찻잔인데.”

남의 집안 살림 다 부수는 꼴이 아주 난리였다.

‘그나저나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골수 귀족이어도 보레오티 공작저 물건을 함부로 집어 던지는 건 엄청난 문제가 될 터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오니에는 우당탕 난동이 일어난 문 너머를 남의 일처럼 바라봤다.

“……거실에서 기다리시는 건 어떨까요?”

멜레스가 조심히 제안했다. 다행히 레오니에는 쉽게 받아들였다. 보아하니 오늘 수업은 글러 먹었다.

거실에 도착한 레오니에는 읽다 만 책을 들었다. 정신적 건강을 위해 애독서 ‘인생 다 부질없다’는 잠시 접어 두고, 유치하고 행복한 동화책을 선택했다.

‘아빠는 왜 저런 사람들만 데려오는 거람.’

아르데아와 보스그루니 백작이 만나면 저렇게 싸울 거란 생각을 못 했을 리가 없을 텐데.

레오니에는 동화책 읽는 것도 멈춘 채 턱을 괴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세상에 널린 게 미친 자라는 걸 가르쳐 주려고? 아니면 진짜 실력만 보고?

‘반면교사가 가장 가능성이 크네.’

레오니에는 저런 사람들만 저의 가정 교사로 채용되는 이유가, 너는 저렇게 되지 말라는 아빠의 깊은 가르침일 거라고 잠정 결론지었다. 웃기게도 펠리오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난 조용한 게 좋은데…….’

가정 교사로 인해 일어나는 소동은 지난번으로 족했다.

“아가씨.”

레오니에가 다시 마음 잡고 동화책에 집중하려던 때였다. 카라가 심상치 않은 표정을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를 단번에 눈치챈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할머니 왜 그래요? 무슨…….”

“보레오티 공작 영애.”

익숙한 목소리가 카라가 막아선 문 뒤에서 들렸다. 힘차게 발돋움하던 레오니에가 급제동을 걸었다. 휘청거리던 작은 몸이 카라보다 훨씬 키가 큰 상대방을 올려다봤다.

날카로운 인상에 잘 다듬어진 콧수염.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중절모를 손에 쥔 파르두스 후작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 * *

“공작님을 뵈러 왔는데 영애께서 보이더군요.”

“여기는 3층이고, 아빠 집무실은 4층인데요?”

“이런, 저도 많이 늙어서 층수 구별이 힘들답니다.”

“그럼 쉬세요.”

집무실까지 파르두스 후작을 안내하던 레오니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아직 그 정도로 늙진 않았습니다.”

껄껄 웃으며 뻔뻔하게 대꾸하는 파르두스 후작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어휴, 저 능구렁이 후작.’

레오니에가 밉지 않은 눈으로 몰래몰래 후작을 흘겨봤다.

파르두스 후작은 일부러 레오니에를 보러 3층 거실로 올라왔다. 레오니에가 거실에 있을 거란 사실을 짐작하는 건 후작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늘 보레오티 공작저에 헤로 보스그루니 백작이 예절 교사로 찾아간 걸 알고 있었다. 북부 소식쯤이야 파르두스 후작에게는 손바닥 안이었다. 그러면 백작은 자연히 공작저에서 지내는 전남편 아르데아와 만나 대판 싸울 테고. 그렇게 되면 공작 영애의 수업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아이는 어디로 갈까.

홀로 쉴 수 있는 자기 방이나 공작저 사람들이 예부터 애용하는 거실. 후작은 아직 어린 영애는 혼자 있는 제 방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실을 더 선호할 거라고 추리했다.

이토록 완벽하게 추리한 후작은 마치 저 자신에게 상이라도 주듯, 레오니에에게 자신을 집무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염치없이 부탁했다.

레오니에는 어쩔 수 없이 후작의 부탁을 들어줬다.

‘겸사겸사 아빠 보러 가는 거야.’

케라타 자작 저택에 다녀온 뒤로 펠리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눈보라가 몰아닥쳤던 초겨울에는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아빠였는데,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빠가 되었다.

얼마나 바쁜지, 요즘엔 식사 때도 못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카라와 코니가 말하기를, 레오니에가 잠든 밤중에 항상 방에 들러 자는 모습을 보고 갔다고 한다. 항상 협탁 위에 올려져 있던 딸기 우유 맛 사탕이 증거였다.

‘그나저나 이번엔 공작님이라고 부르네.’

지난번 케라타 자작저에서 봤을 때는 펠리오를 ‘공작’이라고 부르더니.

이는 레오니에도 아직 잘 모르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보는 눈이 많았고, 지금은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상대에게 잘해 주고 친한 척을 하지만, 파르두스 후작은 정반대였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파르두스 가문이 오래전부터 보레오티 가문을 섬기는 건 그 두 당사자와 몇몇 골수 귀족만이 아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북부에 적응 잘한 황제파라고 알려져 있다. 그림자처럼 보레오티를 섬기기 위해서는 이를 숨겨야만 했다. 그래서 후작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펠리오를 ‘공작’이라고 편히 칭하면서 황제파의 일면을 보였다.

이러한 점은 원작에서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설정이다 보니 레오니에는 파르두스 후작의 행보가 쉽게 이해되지 않아 의아했다.

‘어?’

그때, 레오니에의 눈에 후작이 들고 있는 상자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보드라운 검푸른 색 벨벳으로 처리된 상자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이다.”

레오니에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어딘가 익숙하고 알록달록한 상자라더니, 펠리오가 종종 사다 준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 포장 상자였다.

“이걸 아십니까?”

파르두스 후작이 휙 고개를 돌렸다. 꼭 인형 목이 꺾이는 것처럼 휙 돌아가는 모습에 레오니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리곤 뒤늦게 손으로 제 입을 덥석 가렸다. 파르두스 후작과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레오니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파르두스 후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반면 레오니에의 숨겨진 입꼬리는 불만스럽게 내려앉았다.

“……아빠가 사 줬었어요.”

처음 사 왔던 때는, 레오니에가 맹수의 송곳니를 폭주시킨 여파로 며칠을 앓아누워 결국 먹지도 못하고 버렸다. 펠리오도 레오니에를 신경 쓰느라 슈크림 따윈 잊어버렸다. 하지만 며칠 뒤에 다시 사 왔다. 그때는 부녀 둘이 벽난로 앞에서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펠리오는 슈크림을 한입 물고는 제 입맛에 안 맞다고 불평했지만, 레오니에는 그 자리에서 무려 두 개나 먹어 치울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은 레오니에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공작님께서 영애를 많이 아끼시는군요.”

“그거야 아빠 딸이니까요.”

당연한 거 아니냐며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뿡뿡 뿜었다.

“……정말요?”

“그럼 뭐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그럼 평생 모르는 채 사세요.”

레오니에가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아가씨께선 무척 어른스러우시군요.”

“제가 좀 많이 똑똑해요.”

“꼭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어른 같습니다.”

“후작께선 할아버지 같아요.”

“손주가 셋이나 있으니 할아버지지요.”

후작은 어떻게든 레오니에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기를 썼고, 레오니에는 어떻게든 후작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조용히 뒤따르던 멜레스만 죽을 맛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4층 집무실에 도착했다.

레오니에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곧 문을 열고 나타난 루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레오니에와 파르두스 후작이 함께 서 있었다.

“……아니, 수업은요?”

곧 정신 차린 루페가 먼저 레오니에를 살폈다.

“선생님들이 부부 싸움 중이에요.”

“결국 싸우시나요?”

루페가 예상했단 듯 되물었다.

“의자가 날아다녔어요. 그리고 보스그루니 선생님이 찻잔으로 아르데아 선생님을 제압했어요.”

아아, 어떤 상황인지 대충 그림이 그려진 루페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레오니에의 옆에 있던 파르두스 후작에겐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야위었어.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아직은 밥 먹을 여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사라질 것 같다며 루페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굶기는 줄 알겠군.”

어느새 루페 뒤에 선 펠리오가 비키라며 눈짓했다. 루페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고, 펠리오는 몸을 낮춰 레오니에를 번쩍 품에 안았다.

“수업은 어땠어?”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 아니지?”

그런 거면 아빤 정말 나쁜 사람이라며 레오니에가 눈을 흘겼다. 펠리오는 푸스스 부서지는 듯한 웃음을 조용히 흘리며 레오니에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딸내미 투정도 오랜만에 들으니 꽤나 기분이 좋았다.

“늦었군.”

그리곤 자신들 부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후작에게 뒤늦게 아는 척했다. 후작은 마치 흥미로운 발견을 목격한 탐구자처럼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펠리오는 태연히 레오니에를 안은 채 복도로 나왔고, 레오니에는 조금 전의 뽀뽀가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5분 일찍 왔습니다만?”

“안에 들어가 기다리도록.”

자신은 레오니에를 거실에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휙 등을 돌렸다.

“……루페.”

펠리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파르두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이 제발 꿈이 아니길 간절히 기도했다.

저렇게 사람다운 펠리오 보레오티라니. 이는 지금껏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던 파르두스 후작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칠 정도의 충격이었다.

“진짜 친딸이냐?”

“저야 모르죠.”

루페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님 하체까지는 제 권한이 아니잖아요.”

“너도 참 나 닮아서 거짓말 잘해.”

파르두스 후작이 주인 없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들고 온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루페가 차를 따르며 물었다.

“그래서 금방 알 수 있어.”

너무 잘하니까 도리어 후작은 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꼭 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후작이 건네받은 차를 마시며 피식, 웃었다. 콧수염이 살짝 흔들렸다.

“일전에 죽었다던 방계 출신의 딸이겠지.”

루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퍽 웃겼던 후작이 어디 한 번 더 놀라보라는 듯 자신의 추리를 말했다. 사실 이 정도는 후작에게 추리의 축에도 안 꼈다.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와 사랑의 도피, 하필 북부에서도 드물었던 폭우가 내리던 날, 마차는 범람한 물에 빠졌는데 두 사람의 시체는 어디에서도 못 찾았지.”

폭우는 도망친 두 사람의 흔적을 전부 지웠을 터.

“그날로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 만약 그때 두 사람이 무사히 살아 도망쳤다면 아이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낳고도 남았지. 뭐, 솔직히 나도 그 둘이 익사한 줄 알았는데 말이다.”

살아남은 건 좀 의외였다는 후작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루페는 단번에 레오니에의 정체를 파악한 제 부친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그런 시선쯤이야 자주 받아온 후작은 조금 전의 제 아들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루페의 얼굴이 빨개졌다.

“몰랐냐?”

“공작님도 모르셨습니다.”

루페는 자리에 없는 펠리오를 방패 삼아 핑계를 댔다.

“……어쩔 수 없지.”

찻잔을 내린 후작이 눈을 가볍게 움직였다.

“공작님은 레지나 아가씨를 싫어하셨으니.”

“싫어하시진 않았습니다.”

“머릿속 꽃밭이 휘황찬란한 사람이었지.”

막내아들은 레지나를 좋게 보았지만, 아버지인 파르두스 후작은 정반대였다. 그는 레지나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오히려 보레오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 냉정하게 혹평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께선 레지나 아가씨의 생사를…….”

“아니.”

파르두스 후작이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의 뒤를 캐는 짓은 하지 않는다.”

선대 공작도 사랑의 도피랍시고 반대하던 남자와 도망친 레지나를 포기했고, 펠리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르두스 후작 또한 그렇게 정신머리 없는 사람의 뒤를 쫓아 선행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보레오티 가문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일말의 편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잔인한 감상이긴 해도, 후작에게 레지나는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레오니에 영애는 아주 흥미로워.”

비쩍 말랐던 볼에 살이 붙고, 공작저에서 심신의 안정을 듬뿍 느낀 덕에 레오니에는 몰라볼 정도로 건강해졌다. 그리고 소스라칠 정도로 펠리오와 닮은 점이 쏙쏙 보였다.

몸에 품은 귀한 검은색과 올라간 눈초리, 꾹 다물린 일자 입술까지.

“얼굴도 얼굴이지만…….”

거기다 인생 다 산 것 같은 모습이나 또래보다 의젓하고 성숙한 모습까지.

이러니 사람들이 레오니에를 보자마자 펠리오의 사생아라 확신하는 거였다. 후작 역시 아이의 출생의 비밀을 확인했음에도 의심할 정도였다.

“하긴, 어쨌건 공작님의 친딸이란 소문이 영애에겐 훨씬 좋겠지.”

“당연한 말을.”

거칠게 열린 문 사이로 펠리오가 들어왔다. 파르두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는 걸, 펠리오가 손을 들어 막았다. 후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루페에게 고갯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영애께 제가 폐를 끼쳤군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을 사 오길 잘했더군요.”

저를 경계하면서도 슈크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레오니에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펠리오도 그걸 알았는지 아이를 데려다주러 갈 때 후작의 손에서 슈크림 상자만 쏙 빼 갔다.

“다음에는 더 좋은 간식으로 사 오겠습니다.”

“오지 마.”

“차기 보레오티 공작님께 잘 보여야지요.”

“가지고 왔나?”

펠리오가 후작의 능글거림을 가볍게 무시했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페가 곧장 상자를 열었다. 파르두스 후작이 가지고 온 또 다른 상자였다. 겉을 감싼 벨벳 천을 벗기자, 옅고 짙은 색이 반복되는 격자식 무늬가 드러났다.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는 좁은 칸 속에 갇힌 서른두 개의 조각품이 들어 있었다.

체스 용품이었다.

루페가 체스 말들을 전부 꺼냈다. 전부 북부의 광산에서 나는 진귀한 보석을 수공예한 예술품이었다. 평범한 체스 말과 달리 다양한 색과 그보다 더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거 부수고 싶네.”

정작 펠리오는 그 가치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손에는 붉은 루비를 깎아 만든 백조 체스 말이 들려 있었다.

“체스 말 하나에 저택 한 채 값입니다.”

“우리 북부에는 널리고 널린 게 보석이야.”

“정확히는 보레오티 공작저에만 널렸지요.”

말을 정정한 후작이 펼쳐진 체스판 위에 말을 하나씩 올렸다.

“최근 북부의 정세와 마물 밀거래 정황에 대해 알아왔습니다.”

“많이 늦었군.”

“송구합니다.”

톡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체스판이 채워졌다.

“사정이 있었겠지.”

“이해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펠리오는 사자 형상을 한 검은색 체스 말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오로지 북부에서, 그것도 아주 소량으로만 채굴되는 검은 다이아몬드였다.

두 편으로 나누어진 체스 말은 알록달록했다. 펠리오 앞에는 주로 검고 하얀, 파르두스 후작 앞에는 붉고 노란 체스 말이 가득했다. 그리고 펠리오의 자리 옆에는 파란 체스 말 하나가 여분용처럼 홀로 서 있었다.

“……메레오카 백작 가문.”

가장 앞에 있던 체스 말 하나가 움직였다. 카멜레온으로 조각된 폰이었다.

펠리오와 파르두스 후작의 체스가 시작되었다.

“중앙에서 이주한 귀족이군요. 지난번 백작 여식이 아주 큰 사고를 친 뒤로 위에서 엄청난 질책을 받았습니다. 보레오티 공작 가문에서 거대 배상금을 요구했다지요.”

“글리스 남작.”

툭, 또 다른 체스 말이 움직였다.

“이쪽은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귀족입니다. 원래는 상인 가문인데, 그중 막내딸이 행정관으로 취직했고, 드물게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았지요. 선대 보레오티 공작님이 황실의 명을 받아 대리로 서임하셨지요.”

둘은 각자의 말을 차례대로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검은 체스 말이 움직일 때마다 펠리오가 질문을 했고, 파르두스 후작은 붉고 노란 체스 말들을 움직이며 질문에 대답했다.

파르두스 후작에게 잡힌 검은 말들은 루페가 받아 따로 가져온 상자에 집어넣었다. 메레오카와 글리스였다.

툭, 툭.

아주 잠깐.

조용한 집무실에 체스 말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타바누스 백작.”

징그러운 파리 형상을 한 체스 말이 후작 앞에 놓였다.

“골치 아픈 곳이지요.”

멈출 기세가 없던 후작의 손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오랫동안 북부에 자리 잡은 이주 가문입니다. 남부 출신이지요. 저희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뭐, 역사가 있죠. 그리고 뼛속까지 황제파입니다. 3년간 수도에서 질리게 보셨을 테니 잘 아실 겁니다.”

파르두스 후작이 당시를 떠올리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반면 펠리오의 평평했던 눈썹 사이로는 굴곡이 짙게 졌다. 너무도 짜증 나서 타바누스 백작의 머리를 당시 회의실 테이블에 곱게 박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정부를 황후로 올려야 한다고 지랄했던 놈이지.”

펠리오가 지난 3년 동안 수도 내 저택에 머무르며 황궁을 들락날락했던 이유가 이거였다.

선황 승하 후, 황제 즉위를 앞둔 황태자가 뜬금없이 제안한 제 정부의 황후 즉위를 선언했다. 제 자식을 둘이나 낳은 황태자비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펠리오를 비롯한 북부 귀족들과 황태자비를 배출한 서부 귀족들은 이를 막기 위해 무려 3년이나 수도에 머무르며 황실을 압박했다. 항상 중립을 지키는 동부마저 이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비칠 정도였다.

물론 정부의 가문이 속한 남부는 이를 찬성했다.

‘수치스러운 시간이었지.’

다시 생각해도 제국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현 황제의 흑역사였다. 결국 황태자비는 무사히 황후가 되었고, 정부는 측실이 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어쨌건.”

파르두스 후작이 펠리오의 눈치를 살피며 이어 말했다. 수도와 황실만 관련되면 저렇게 불쾌해하니, 빠르게 주제를 넘어가는 게 도리였다.

“그 뒤로 타바누스 백작은 수도 저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공작님의 반대편에 있었으니, 무서워서라도 한동안은 북부에 오지 않겠지요.”

“메레오카와 글리스가 사람을 보냈다던 타바누스 저택엔?”

“타바누스의 첫째 아들이 가주 대리로 있습니다.”

동시에 후작이 하얀색 염소 체스 말을 움직였다.

“……그래, 상단을 운영했지.”

타바누스 백작은 중앙과 남부에 있는 인맥을 활용하여 제법 큰 상단을 운영했다. 북부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펠리오가 눈꼬리를 나른히 접었다.

“새끼 마물을 어떻게 잡았나, 했더니…….”

타바누스 상단은 북부에서 자생하는 약초들과 글라디오 기사단들이 잡아 죽인 마물의 부속물을 사들여 판매한다. 판매하는 물건은 전부 강력한 효능을 지니었다.

그렇다면 기사단 부단장 모노가 지난 번식기 때 유난히 난리였다는 마물의 동태는 쉽게 설명되었다. 강력한 효능을 지닌 재료는 이미 가지고 있으니, 마법사 두셋 정도를 고용해 약을 만들었을 거다. 마물의 번식을 부추기고 태어난 새끼들을 포획하는 건 그 정도로 쉬웠다.

“그럼.”

펠리오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서부로 가겠군.”

조금 전 파르두스 후작이 움직였던 새하얀 염소 체스 말. 하얀색은 서부를 상징하는 색으로, 북부의 상단이 중앙 수도로 가기 위해서는 서부 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수도와 북부 사이에는 커다란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길이 험준한 탓이었다.

그럼 누가 이런 타바누스의 꿍꿍이를 도울 수 있을까.

펠리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서부 귀족이 여기에 연관되었다.

“……머리 좀 썼어.”

영혼 없는 웃음소리가 조용한 집무실에서 공기 중에 흩어졌다.

“황후 폐하를 노렸군.”

서부의 주인인 헤스페리 후작 가문의 영애였던 티그리아 황후에게 흠집을 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동시에 눈엣가시인 북부도 같이 건드리면 더 좋고.

“누구 머리일까.”

“아시지 않습니까.”

후작이 붉은 말을 움직였다. 백조였다.

“올로르…….”

올로르 자작.

“영악한 딸을 둔 상으로 자작 작위를 얻은 머저리였지.”

“최근 남부의 중심이 올로르 가문이라지요.”

“메리디오 후작이 떡하고 있는데도?”

메리디오 후작은 남부의 오래된 주인이었다.

“지금 남부가 옛 남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파르두스 후작의 말에 펠리오가 남부 출신 파보를 떠올렸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글라디고 기사단을 동경하여 북부로 왔지만, 저의 고향에서 이뤄지는 변화에 질린 것도 한몫했다.

“고래는 물속으로, 백조는 물 위로.”

요란스러운 백조의 발길질에 고래가 차마 수면 위로 올라오지도 못하는 중이다. 이는 올로르 자작이 메리디오 후작을 대신하여 남부를 장악하고 있단 뜻이었다.

올로르 가문은 황제의 측실인 우시스 황비의 친정 가문이었다. 그리고 현 제국에 있는 귀족 중 가장 늦게 태어난 신생 가문이었다. 작위를 내린 건 당연히 지금의 황제였다.

그 여자를 황후로 올리기 위해서.

“타바누스 상단의 거래처 중에 올로르 자작 가문이 있습니다.”

검은 사자 말을 쥔 펠리오의 손등에 핏줄이 툭 올라왔다.

“황실이 개입했습니다.”

노란 검독수리 말이 움직였다. 황실의 상징이었다.

그 순간, 파르두스 후작은 집무실 창문이 열린 줄 알았다. 느닷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에 숨이 턱 막히고 주름진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돌아보니 루페도 파리해진 안색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후우우…….”

펠리오가 아주 느리고 긴 숨을 차분히 흘렸다. 그는 체스판 위에 펼쳐진 제국의 정세를 뒤엎고 싶은 충동을 꾹 참는 중이었다.

파르두스 후작이 남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쾅쾅 뛰었다. 맹수의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고도 주변 공기를 단번에 얼게 만든 펠리오의 범접할 수 없는 기세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후작은 기뻤다.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강인함은 노년을 코앞에 둔 사내를 설레게 했다.

곧 정신 차린 후작이 새하얀 곰 말을 움직이며 말했다.

“서부의 우르베스페 상단 직원의 목격담입니다. 북부와 서부의 경계선에 있는 상단 물류 창고에서 익숙한 얼굴을 한 용병을 보았다고 합니다.”

“익숙한 얼굴이라…….”

“황실 기사입니다. 목격담대로 신원을 확인하니 정말 황실 소속 기사였습니다.”

“어떻게 알아봤다지?”

“수도에 들를 때마다 거래처 카페에 있었다고 합니다. 항시 여자들을 끼고 돌아다녔다더군요. 수려한 용모와 눈가에 난 점 때문에 쉽게 알아봤답니다.”

저의 자랑스러운 글라디고 기사단원들을 떠올린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기사도 나름 준 귀족급이지 않습니까.”

펠리오의 생각을 읽은 파르두스 후작이 고개를 가볍게 움직였다. 아주 가끔 신분을 믿고 설치는 자들이 있단 뜻이었다.

“그런 것도 기사라고.”

체스판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펠리오가 검은 곰을 움직였다. 조금 전 후작이 건드렸던 새하얀 곰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서부의 우르베스페 상단은 북부의 우르마리티 백작 가문의 방계가 터를 잡고 세운 회사였다. 즉, 우르베스페 상단은 서부 소속이면서 보레오티 공작의 명을 받잡는 곰이란 뜻이었다.

우르베스페 상단을 통해 주시해야 할 서부의 배신자는 누구인가.

펠리오의 뜻을 기민하게 알아챈 파르두스 후작이 새하얀 염소를 다시 움직였다.

“용병으로 분장한 기사들이 물류 창고의 어느 구역을 계속 돌아보며 경비하고 있답니다. 물류 창고 중에서도 가장 구석지고 그늘진 구역을 통째로 빌렸다고 하는데, 이를 허락한 직원이 히르쿠스 남작입니다.”

“들어본 이름이군.”

어디더라, 펠리오가 기억을 되짚듯 중얼거렸다.

“헤스페리 후작의 가신입니다.”

파르두스 후작의 설명에 펠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니스한테 몇 번 들었어.”

유일한 벗이기도 한 카니스 리네 백작과 종종 만날 때마다 들은 이름이었다. 히르쿠스 남작의 신경질적인 성격 탓에 리네 백작이 운영하는 상단 직원들과도 자주 부딪친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하사받은 영지는 없다지?”

“헤스페리 후작 가문의 영지에 저택이 있습니다.”

펠리오가 콧방귀를 꼈다. 히르쿠스 남작에게, 이번 일만 잘 해내면 귓가에 제 가문이 떡하니 다스릴 영토를 하사해 주겠다는 달콤한 독을 덕지덕지 바른 모양이다.

“올로르 자작이겠지.”

“히르쿠스 남작이 얼마 전 휴가를 내어 남부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런.”

펠리오가 하얀 개 모양의 말을 움직였다.

“카니스를 초대해야겠군.”

개는 염소를 잡았고, 체스판에서 물러난 염소는 루페가 들고 있던 상자 안으로 떨어졌다. 상자 안에는 지금껏 펠리오가 잡은 체스 말들이 뒤엉켜 있었다.

이번엔 파르두스 후작이 붉은 백조를 움직였다.

“잡으실 수 있겠습니까?”

검은 사자가 백조의 뒤에 있는 노란 검독수리를 바라봤다.

“선황 폐하를 향한 존경을 담아 지금껏 가만히 있었던 거지, 굳이 내 영역까지 들어와 죽여달라고 목 내미는 얼간이들을 어찌 무시하고 내버려 둘까.”

“관대하시군요.”

“손님은 제대로 모셔야 한다고 레오가 그러더군.”

“하하하! 영애께서 아주 잘 배우셨습니다!”

“그 아이는 타고난 맹수야.”

흡족한 미소를 띤 채, 펠리오가 검은 사자 체스 말을 처음으로 움직였다.

의자 등받이에 나른히 기댄 펠리오가 긴 다리를 여유롭게 꼬았다. 레오니에가 몸에 안 좋은 자세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서 최근에는 자제하던 중이었는데, 그 탓인지 자세가 좀 불편했다.

펠리오가 슬그머니 다리를 풀며 체스판을 내려다봤다.

체스판의 형세는 본연의 체스 규칙을 전혀 지키지 않은 탓에 말도 안 되는 기보를 보였다. 뒤엉킨 말들과 뒤엉킨 색들. 마치 지금의 제국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벨리우스 제국.

말 그대로 동물의 왕국.

치열한 영역 다툼이었다.

그러나 검은 맹수에게는 딱히 감흥 없는 일이었다. 다른 동물들의 수준 낮은 영역 다툼과 간지럽지도 않은 시비 따위야 검은 맹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전부 사그라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검은 맹수의 발아래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며 오줌이나 쌀 테지.

그래서 검은 맹수가 일어났다.

“내가 요새 너무 잠잠했군.”

왜 이리 기어오르는지.

“자기들이 내 딸인 줄 아나.”

상상만으로도 징그러워진 펠리오가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차마 가리지 못한 검은 눈은 와락 찡그려졌고, 손등으로 가린 입마저 구역질하듯 움찔거렸다.

이 세상에서 검은 맹수의 앞에서 오두방정을 떨 수 있는 건 그를 빼닮은 아기 맹수뿐이었다. 아빠 등을 타고 기어올라 머리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것 역시 아기 맹수만이 지닌 특권이었다.

딸을 생각하는 펠리오의 입가는 본인조차 모르게 자연히 느슨해졌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체스판 위 영역 싸움 때문에 심기가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탓에 주변 공기는 영 포근하지 못했다.

싸늘하기만 한 공기를 흐트러트리듯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페, 리네 백작을 영지로 초대해라.”

“예, 공작님.”

“그리고 후작.”

펠리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후작이 명을 들을 자세를 갖췄다.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후작의 앞으로 날아왔다. 후작이 손을 내밀어 펠리오가 가볍게 던진 걸 받아냈다. 눈표범 모양의 파란 체스 말이었다.

체스 중 펠리오가 따로 빼 둔 예비용 퀸이었다.

“동부의 오르티오 후작에게 연을 넣도록.”

* * *

큼지막한 화장대 거울에 레오니에가 비쳤다. 거칠고 짧았던 검은 머리는 어느새 아이의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다.

“요즘 아가씨 머리 묶는 맛이 있어요.”

코니가 결 좋은 검은 머리를 빗질하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알록달록 예쁜 리본과 머리 장식으로 없는 솜씨까지 발휘해 가며 꾸몄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말총처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뒤, 아쉬운 마음을 담아 노란 리본을 단단히 달았다. 훈련 중에도 쉽게 풀리지 않게 하기 위한 코니의 배려였다.

“고마워, 코니.”

화장대에서 내려온 레오니에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훈련 조심히 하세요. 다치시면 안 돼요!”

“응, 다치면 아빠도 똑같이 때릴게!”

“그건 더 아니 되지요!”

기함하는 코니에게 다녀오겠단 인사를 남긴 채, 레오니에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멜레스와 함께 실내 훈련장으로 향했다. 폴짝폴짝, 아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즐거우신가요?”

멜레스가 들뜬 기분을 주체 못 하는 레오니에를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단 시선으로 바라봤다. 부쩍 활발해진 레오니에는 자신의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하곤 했다.

“맹수의 송곳니를 배운대요.”

맹수의 송곳니가 지닌 힘은 무섭지만, 이 엄청난 힘을 처음으로 제대로 배운다는 사실은 무척 두근거리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아빠가 직접 가르쳐 준대요.”

레오니에의 다리가 들뜨다 못해 폴짝거리는 건, 오랜만에 펠리오를 볼 수 있단 이유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빠를 본 게 파르두스 후작이 찾아왔던 날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나흘이 지났다. 그토록 짓궂던 농담마저 그리울 정도였다. 그래도 이젠 바쁜 게 좀 가셨는지, 루페를 통해 훈련 날짜를 알려 주었다.

“멜레스 언니는 아빠 봤어요?”

“저도 한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부단장님은 가끔 보고하러 가셨지만요.”

“모노 아저씨?”

아빠 주위에 루페 말고 또 다른 남자가 있었군.

레오니에가 주시해야 할 대상을 또 한 명 추가했다.

훈련장에 도착한 레오니에는 연무장 위에 홀로 서 있는 펠리오를 발견했다. 새하얀 튜닉에 갈색 바지를 입은 펠리오는 훈련장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 탓에 평소보다 어리고 자유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여기에 천장을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빛이 아른거리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까지 자아냈다.

“와아.”

레오니에는 발걸음도 멈춘 채 감탄했다.

“우리 아빠 엄청 잘생겼어요!”

멜레스의 손을 잡고는 저 보라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랍니다.”

멜레스가 키득거리며 맞장구쳤다. 글라디고 기사 중에서 펠리오의 얼굴에 한 번이라도 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럼 언니도 우리 아빠 좋아해요?”

“존경하는 거지요.”

“결혼하고 싶어요?”

“아니요.”

멜레스가 정색했다.

“목숨은 소중히 해야 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펠리오는 저의 외모를 깎아 먹을 정도로 흉흉한 위압감을 몸에 두른 맹수였다. 멜레스는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펠리오를 서슴없이 대한 레오니에가 진정 존경스러웠다.

“레오.”

어느새 시선을 내린 펠리오가 이리 오라 손짓했다.

“아빠!”

우다다다 달려간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와락 안겼다.

“오랜만이야! 많이 바빴어?”

“그래, 바빴다.”

다리에 달라붙은 레오니에를 떼어낸 펠리오가 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넌 편했나 보네.”

펠리오는 며칠 못 본 사이 묵직해진 딸을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레오니에를 유심히 살피는 눈동자는 사뭇 진지했다. 품에 안을 때 마주했던 눈높이가 평소보다 조금 더 높아진 기분이었다.

“살이 쪘나?”

“이왕이면 키 컸냐고 물어봐.”

“그거나 이거나.”

“아빤 미운 말만 골라서 하더라?”

심술꾸러기,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펠리오를 힐끔거렸다.

“바빴던 아빠한테 말하는 본새하곤.”

“그럼 나 잘 때 방에 오지 말지.”

바쁘다면서 늘 저 잘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와 사탕을 놓고 가는 펠리오가 괜히 바보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피로가 묻어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제 안 바빠?”

토실토실한 하얀 손이 펠리오의 눈가를 훑었다.

“잠은 푹 잤어?”

“……조금?”

“많이 자야지.”

“아빠도 자고 싶다.”

“훈련 다 하고 나랑 낮잠 잘까?”

아무리 애늙은이여도 몸은 어린아이라, 한창 성장 중인 레오니에는 언제나 낮잠을 잤다. 낮잠 시간은 주로 과외를 끝내고 간식 먹는 오후 시간이었다.

“너 잠버릇 심하던데.”

같이 자다가 네 발에 맞을까 무섭다며 펠리오가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얼마나 다소곳이 자는데!”

레오니에가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코니가 꼭 나보고 아기 동물 같다고 했어.”

“……동물 새끼?”

“단어랑 순서 바꾸지 마!”

그렇게나 그리웠던 펠리오의 짓궂은 농담에 레오니에가 빽 소리 질렀다.

“아빠는 꼭 막판에 그러더라!”

잔소리를 퍼붓는 딸을 바닥에 내려둔 펠리오가 휙 뒤돌아 연무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레오니에는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돈 많고 얼굴 잘생기고 근육 많고 작위 높으면 다야?”

“어.”

펠리오는 당당했다.

“그건 그래!”

레오니에도 수긍했다.

“넌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듣다 보니 어이가 없어진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레오니에가 새초롬히 눈을 흘기며 손으로 코를 가렸다.

“그냥 그런 아빠가 조금 얄미운데, 그래도 우리 아빠니까 참고 봐준다는 뜻이야.”

“속물적인 이유로 봐줘서 고맙다.”

“고마우면 유언장에 보레오티 공작가의 모든 재산을 하나뿐인 딸인 레오니에한테 넘긴다고 적어 줘. 모든 권위도 양도한다는 말도 적고.”

“딸한테 암살당하게 생겼군.”

“얼굴은 아빠가 암살하게 생겼어.”

질 생각이 손톱 사이에 낀 때보다 없는지라, 아기 맹수는 끊임없이 앙앙 짖어댔다.

“우리 딸은 기운도 넘치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시끄럽고 귀찮아 냉큼 쫓아 버렸을 텐데, 아빠 맹수는 기어오르다 못해 저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딸의 재잘거림을 기꺼운 마음으로 들었다.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농담을 그리워했듯, 그도 딸의 재잘거림을 그리워했다.

“근데 왜 아무도 없어?”

한참 떠들던 아이가 주변을 살폈다. 어째 목소리가 유난히 울리는 것 같더라니, 이 넓은 훈련장에 부녀 두 사람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조금 전 레오니에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멜레스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오늘은 우리가 통째로 쓸 거야.”

“어머나!”

레오니에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나 두근거렸어!”

“어디에서?”

요 애늙은이 딸이 좋아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날 위해 건물 전체를 대여한 거잖아!”

“딸아, 이거 원래 우리 거다.”

보레오티 공작저 안에 지어진 실내 훈련장을 보레오티 공작이 쓴다는데, 그걸로 감동하는 보레오티 공작 영애라니. 펠리오는 레오니에에게 필요한 건 동심이 아니라 가문의 자산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닐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날 위해서…….”

“정확히는 기사들을 위해서지.”

아직 맹수의 송곳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레오니에에게는 변수가 많았다. 특히 지난번처럼 폭주해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 가능성이 컸다. 때문에 펠리오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기사들을 야외 훈련장으로 전부 내보냈다.

“기사들 다치면 네가 책임질래?”

“아빠 짜증 나…….”

레오니에가 눈을 찌를 듯 승천하던 입가의 미소를 축 늘어트렸다.

어쨌건 훈련이 시작되었다.

펠리오는 주변에 있던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어 바닥에 벅벅 긁었다.

“맹수의 송곳니.”

연무장 바닥에 웬 덩어리 하나가 그려졌다. 레오니에가 쪼그려 앉아 아빠가 그린 덩어리를 빤히 바라봤다.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이 떠오르는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것도 상자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려 크림이 튀어나온 슈크림 같은.

“……아빠.”

레오니에가 머뭇거렸다.

“이게 뭐야?”

“맹수의 송곳니.”

“……아닌데?”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이 있다면, 재앙과 파멸 사이에 펠리오의 그림이 있었다.

“세상은 역시 공평했어.”

“……네 얼굴에 그려 버린다.”

“그래서 송곳니가 뭐라고?”

레오니에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바꿨다. 펠리오가 능청스러운 딸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 이내 짧은 한숨으로 용서하며 이어 설명했다. 진짜 딸만 아니었어도 바로 쫓아내고도 남았을 텐데.

‘나도 진짜 한물갔군.’

제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딸을 어쩌지도 못하고 있으니.

“……맹수의 송곳니는 보레오티 가문이 보레오티라고 불리기도 전부터 이어져 온 힘이다. 그 기원은 아무도 몰라. 가장 오래된 기록에도 이러한 힘을 지닌 사람들이 북부에 살고 있다는 게 다야.”

“가장 오래된 기록?”

“초대 황제의 실록.”

“그런 것도 있어?”

“너의 무지가 저 산맥만 하단 건 알겠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을 성격은 아닌지라, 한 방 가볍게 먹인 펠리오가 송곳니로 추정되는 슈크림 아래로 선 두 개를 작작 그었다.

“오러와 마나.”

“…….”

레오니에는 조금 전에 펠리오가 오러를 그리려다 멈칫한 순간을 목격했다. 하지만 아빠의 하늘 높은 자존감을 위해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맹수의 송곳니는 이 두 가지가 지닌 힘을 똑같이 쓸 수 있어.”

오러가 신체와 검을 비롯한 무기를 통해 발현되는 것처럼, 맹수의 송곳니 역시 신체와 무기를 강화할 수 있다. 그리고 마나가 자연 원소의 힘을 빌려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맹수의 송곳니 역시 자연 원소를 끌어들여 마법과 비슷한 힘을 쓸 수 있었다.

“오오.”

레오니에가 손뼉 치며 환호했다.

“그리고 아마 레오, 넌 이 두 가지를 다 겪어 봤을 거다.”

“두 가지?”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법은 일전에 송곳니를 폭주하면서 엇비슷하게 쓴 적이 있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커다랗고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매섭게 솟구쳤고, 하얀 입김이 피어오를 만큼 공기가 차가워졌다. 마치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자신의 감정에 동조한 것처럼.

하지만 신체를 강화했다는 건 어느 기억에도 없었다.

“……아마 고아원에서.”

펠리오가 조심히 추측했다.

“고아원에서 학대당할 때 무의식적으로 발동했을지도 몰라.”

레오니에가 고아원에서 유독 원장과 어른들에게 학대당했단 사실을, 펠리오는 루페가 조사해 올린 보고서를 통해 확인했다. 굽히지 않는 성격 탓에 충돌이 많았다고.

펠리오는 그런 학대 속에서 레오니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보고서에 작성된 고아원 선생님들의 폭력은 차마 입에 담기에도 역겨울 정도였다. 레오니에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레오 네 안에 잠들어 있던 송곳니가 너의 몸과 생명을 지켰을 가능성이 커.”

물론 이것은 전부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추측이 싫지 않았다.

“……그럼 날 지켜 준 건 보레오티였네.”

그런 식으로라도 아빠와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헤헤.”

실없는 웃음을 짓던 레오니에가 몸을 비비 꼬았다.

“그게 뭐 좋은 거라고 웃어.”

펠리오도 이번만큼은 아이를 놀리는 대신, 커다란 손을 뻗어 머리를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리칼과 저보다 몇 도는 높은 체온, 쾌활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잘도 버텨 주어 기특하면서도 미안했다. 동시에 이 아이를 홀로 남겨 둔 무책임한 부모를 향한 원망도 끓어올랐다.

“일단 시범을 보여 주마.”

그 감정을 잠시 배제한 펠리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검은 눈동자 위에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곧 아이의 눈동자가 물속에 숨어 있는 사금처럼 반짝였다. 두 송곳니가 공명했다.

‘……이거.’

은근히 기분 좋은데.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꾹 실었다. 딸아이가 저렇게나 똘망똘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들썩거렸다. 조금 더 멋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지금껏 아무 감흥 없던 맹수의 송곳니가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그래, 이왕이면.’

레오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야지. 그러다 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 붉은 송곳니를 두른 펠리오가 쥐고 있던 막대기를 한 손으로 두 동강을 냈다.

빠각,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꼭 딸기 우유 사탕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깨질 때처럼 경쾌했다.

“이건…….”

부러진 막대기 하나에 송곳니의 기운을 담던 펠리오가 힐끔 시선을 움직였다. 기대하는 레오니에를 살핀 펠리오는 송곳니의 기운을 담은 막대기를 실수로 손에서 놓친 것처럼 떨어트렸다. 막대기는 모래사장에 빠지는 것처럼 연무장 바닥에 콕 박혔다.

“오러처럼 몸을 강화해서 막대기를 꽂아 봤다.”

“우와아아!”

레오니에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막대기가 꽂힌 바닥을 손으로 더듬었다. 금이 가기는커녕 부서지면서 튀어나온 자잘한 돌 조각 하나 없었다.

‘이거 엄청 단단하다고 했는데!’

일전에 멜레스와 파보가 실내 훈련장 중앙에 설치된 연무장에 관해 설명해 준 것을 떠올렸다. 오러를 다루는 소드 마스터만 세 명인지라 이를 버틸 수 있도록 제국에서 가장 단단하고 값비싼 돌을 재료로 사용했다고.

그런데 그걸 고작 부러진 막대기로 치아로 슈크림 깨물듯 꽂아 버리다니.

“아빠 쩐다!”

이거 보라며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막대기 꽂힌 바닥을 계속 가리켰다.

“박혔어!”

“그래, 알아.”

“와아! 엄청나다!”

레오니에가 열렬히 환호했다. 아이는 제 자리에 얌전히 서지도 못한 채 발을 바닥에 콩콩 찍었다.

‘역시 부모가 너무 잘나도.’

애가 너무 피곤하겠어, 펠리오가 자화자찬했다.

“엄청 깨끗하게!”

“내가 했지.”

태연하게 답하는 목소리에 해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 다음엔 마나처럼 이렇게 할 수 있지.”

이후, 마지막 시범도 선보였다. 바닥에 박혔던 막대기가 새빨간 불길에 휩싸였다. 가까이서 구경하던 레오니에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

그러나 두 눈은 여전히 막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멋있다……!”

감격에 겨운 레오니에가 손을 마구 흔들었다. 맹수의 송곳니가 지닌 힘을 제대로 목격한 아기 맹수는 한껏 달아올랐다.

“……그런데, 나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금세 축 처져 버렸다.

“아빠는 엄청 익숙하게 잘하는데, 나는 못하잖아…….”

처음 드러냈던 송곳니도 울컥 치미는 분노에 끌려 올라와 폭주했고, 그 탓에 적잖은 피해를 주었다. 거기다 그날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자신이 어떻게 송곳니를 발동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엔 의지가 충만했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레오.”

축 처진 아이의 입가를, 손가락 두 개가 위로 쑥 올렸다. 송곳니를 집어넣은 펠리오의 검은 눈동자가 아이를 담았다.

“누구든 처음은 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글라디고 기사단도, 유능한 비서 루페도, 못하는 게 없는 집사 카라도, 레오니에의 머리를 예쁘게 묶어 주는 코니도.

“그리고 내가 널 가르칠 거야.”

천하의 검은 맹수가 직접 가르치는데, 못할 리가 없다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오만함이 어찌나 안심되는지, 레오니에의 입가는 펠리오의 손가락이 떨어졌는데도 배시시 올라갔다.

“그러니 기죽지 마.”

“응……!”

레오니에가 기합을 넣듯 두 주먹 불끈 쥐었다. 이제 정신 차렸단 뜻이었다.

“그럼 뭐하면 돼?”

뭐부터 하면 돼?

기대감 가득 찬 까만 눈동자가 의욕적으로 반짝거렸다.

“……헉, 허억.”

숨넘어가는 소리가 훈련장 가득 메아리쳤다.

“나, 나 죽어…….”

“그 정도로 안 죽어.”

저택과 맞먹는 실내 훈련장 세 바퀴를 겨우 뛴 레오니에가 거의 기어 다니는 수준으로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토했다.

“아빠 진짜, 허억, 내가 치, 친딸 아니라고……!”

원망 서린 아이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널 이렇게 아끼는 아빠가 어디 있다고.”

마실 물을 가져온 펠리오는 아주 서운했다.

“맹수의 송곳니를 제대로 다루려면 체력은 필수다. 부작용이 얼마나 심하다고.”

“부작용?”

펠리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바닥에 앉은 레오니에가 물을 꿀떡꿀떡 삼킨 후에 물었다. 이는 원작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은 설정이었다.

“그런 게 있어? 그냥 막 치사할 정도로 강한 게 아냐?”

“맹수의 송곳니로 크게 아팠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아,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작용이 뭐야? 심각해?”

레오니에는 고열로 앓아누웠던 날들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팔다리가 저렸다.

“두통과 오한.”

발진 및 두드러기. 근육통을 동반한 몸살 등.

펠리오가 지금껏 확인된 맹수의 송곳니 부작용을 설명했다.

“이거 무슨 약이야?”

맹수의 송곳니가 한순간에 시중에서 파는 감기약이 되었다.

레오니에의 첫 훈련이 이렇게 끝났다.

* * *

송곳니 훈련 이후.

레오니에의 잠자리를 살피러 온 펠리오가 말했다.

“앞으로 매일 훈련장 한 바퀴씩 뛰어.”

밑바닥이나 다름없는 레오니에의 체력을 목격한 펠리오가 그날 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송곳니를 더욱 잘 다룰 수 있도록 훈련 전에 아이의 체력을 먼저 단단히 다지는 게 우선인 듯했다.

당연히 레오니에는 투덜거렸다.

“귀찮은데…….”

아이가 폭신폭신한 이불을 들썩거렸다. 조그마한 발이 시위 중이었다.

“귀찮으면 숨은 왜 쉬냐.”

“아빤 모르지만, 내가 많이 바빠.”

“동심과 함께 양심도 메말랐군.”

펠리오는 기가 막혔다.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가장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레오니에였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잠깐 놀다가 아르데아한테 과외받고, 점심 먹고 놀다가 간식 먹고 낮잠 때리고, 다시 일어나 놀다가 저녁 먹고 씻고 자고.”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하루 일정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다. 심지어 과외는 격주였다.

“어휴, 내가 그렇게 바빴어?”

그러나 레오니에는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빠 맹수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콧방귀만 나오는 수준이었다.

“점심 먹고 난 후에 뛰어라.”

“밥 먹고 바로 뛰면 배 아파!”

“내가 알기로 네가 점심 이후로 무려 두 시간이나 놀던데…….”

그러나 레오니에의 일정 따위야 펠리오 손바닥 안이었다. 당황하는 레오니에를 바라보는 펠리오의 입가에 제 나이보다 어린 미소가 걸쳐졌다.

레오니에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기 맹수의 패배였다.

“사악한 아빠 같으니…….”

베개 밖으로 얼굴을 내민 레오니에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조그마한 콧구멍이 볼살에 눌려 아몬드처럼 가늘어졌다. 한쪽 눈도 볼살에 눌려서 반쯤 감겼다.

“꾸준히 운동해야 튼튼해지지.”

펠리오가 아이의 이불을 고쳐 주며 말했다.

“그럼 다 하고 기사 언니 오빠들하고 놀아도 돼?”

그러면 열심히 하겠다고 레오니에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성희롱 안 한다고 약속하면.”

“성희롱 안 하거든?”

“모노한테서 건의 사항이 올라왔다.”

아가씨의 근육 염탐 때문에 기사들이 훈련에 집중을 못 한다고.

“와, 내가 그 아저씨 그렇게 안 봤는데!”

뒤에서 몰래 내 이야기를 해? 레오니에가 배신자라며 씩씩거렸다. 그 고지식한 기사 아저씨가 이런 식으로 제 뒤통수를 때릴 줄 몰랐다.

“기사 언니, 오빠들도 나랑 즐겁게 놀았거든?”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기사들과 레오니에가 너무 어울렸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키운 노력의 상징인 근육을 알아봐 주는 어린 아가씨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레오니에는 그냥 근육 변태 꼬꼬마가 아니었다. 근육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갖춘 변태 꼬꼬마였다. 아이는 기사들의 근육을 구경하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상담을 해 주었다.

“도대체 그런 근육 지식은 어디서 얻은 거냐.”

모노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레오니에의 근육 지식은 전문가 수준이라고 했다.

“내가 근육을 좀 많이 알아!”

레오니에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서재에 근육 도감이 있던가.’

펠리오가 서둘러 서재 목록을 떠올렸다. 가문 내 주치의를 위해 신체 도감이나 의료용 장서를 여러 권 주문했던 기억은 있다. 하지만 그건 주치의 때문에 주문한 거라 서재가 아닌 주치의 방에 옮겼던 거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난 근육을 박애할 뿐이야.”

레오니에가 가슴 위를 주먹으로 팡팡 두드렸다.

“근육 박애…….”

펠리오는 자신이 살면서 저런 괴이한 단어를 들어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레오니에와 만나면서 참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 들은 ‘근육 박애’는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난 남녀 가리지 않고 근육이 좋아.”

남자에겐 남자만의 근육이, 여자에겐 여자만의 근육이 있다며 취향을 드러냈다.

“그것참…….”

펠리오가 말을 아꼈다. 세상 쓸데없이 평등한 변태였다.

“참고로 난 여자는 복근, 남자는 허리 근육이라고 생각해.”

레오니에가 보다 구체적인 개인 취향을 자랑했다.

“그리고 아빠는 흉근이 멋있어.”

“그런 칭찬은 처음이다.”

“내가 아빠 근육 몸소 경험해 봤잖아.”

처음 북부로 올 때, 게이트의 반동으로 멀미가 난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품에 안겨 이동했다. 그때 옷감 너머로 확인한 흉근을 훗날 두 눈으로 직접 구경까지 했다.

“아빠가 최고야!”

조그만 엄지가 창문 너머 달빛에 아스라이 빛났다. 정말 쓸데없이 빛났다.

“…….”

펠리오는 저 발언을 성희롱으로 쳐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최근 플로무스 케라타 자작 영애는 기분이 좋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편지 때문에.

‘나도 안부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가 생겼어!’

심술궂은 오빠나 사촌 언니들이 종종 편지를 받아 답장하는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구경했던 꼬마 영애는, 지금 제 앞에 놓인 편지를 보며 의자 위로 붕 뜬 발을 마구 흔들었다. 편지 옆에는 하녀가 조심히 사용하라고 건넨 편지용 칼도 있었다.

플로무스는 손끝으로 분홍색 편지 봉투를 손끝으로 조심히 쓸어봤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편지 봉투 입구에는 검은색 촛농을 부어 만든 인장이 찍혀 있었다.

포효하는 맹수.

무려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문장이었다.

‘이건 오빠도 못 받아 본 거야.’

플로무스는 일전의 다과회에서 레오니에와 친해진 계기로 편지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무서웠지만, 레오니에와 편지를 나누고 몇 번 더 만나면서 점점 사이가 가까워졌다.

편지용 칼로 봉투 위를 조심히 뜯어 편지지를 꺼냈다. 달콤한 냄새가 가장 먼저 플로무스에게 인사했다. 봉투 안에는 편지지와 함께 딸기 우유 사탕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레오니에가 다과회에서 나눠 준 이 딸기 우유 사탕은 제국에서 엄청 유명한 파티시에가 만든 디저트였다. 사탕 한 알이 고급 케이크 한 판 값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사탕은 현재 보레오티 공작 가문이 독점 중이라고 했다. 공작이 하나뿐인 딸을 위해 사탕 판매권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레오니에는 모르고 있지만, 자신은 심심할 때마다 까먹는 사탕 때문에도 제국에서 무척 유명 인사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사정까지는 잘 모르는 플로무스가 귀한 사탕을 조심히 입에 넣어 굴렸다. 진한 딸기 우유 맛이 침에 녹아내리면서 전신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주 잠깐 황홀경에 빠졌던 플로무스는 뒤늦게 편지를 펼쳤다. 남은 사탕은 서랍 속 보물 상자에 넣었다. 오빠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똑똑.

“플로.”

그때, 케라타 자작이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의자에서 내려온 플로무스가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우리 딸 뭐하나 궁금해서 와봤지.”

“저한테 편지가 왔어요!”

“보레오티 공작 영애께?”

“네!”

플로무스가 지금 막 편지를 읽으려던 참이라며 자랑했다.

케라타 자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플로무스가 워낙 소심한 탓에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자작 부부는 항상 걱정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레오니에가 참석했던 다과회 이후로 그런 걱정을 떨쳐 버렸다. 조금 느릴 뿐이었지, 아이는 저 나름대로 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들한테 순록에 대해 얼마나 열심히 설명했던가. 그때를 떠올린 자작은 무척 기뻤다. 플로무스는 그런 아빠를 보며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면 아빠한테 편지 내용이 무언지 가르쳐 줄 수 있니?”

자작의 물음에 플로무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산책가고 싶어 방방 뛰는 강아지 같았다. 케라타 자작이 껄껄 웃자 체격 좋은 몸에 걸맞은 뱃살이 흔들거렸다.

플로무스가 편지지를 가져왔다.

“세,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플로의 두 손에.”

“보레오티 영애는 역시 똑똑하시구나.”

우리 플로가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니. 케라타 자작의 말에 플로무스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플로 안녕? 잘 지내고 있니?”

플로가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편지 내용을 들은 흐뭇하게 듣고 있던 케라타 자작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작 플로무스의 표정은 점점 화사해졌다.

“……그래서 난 보스그루니 백작께 찻잔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을 배웠어.”

해맑은 편지 낭독은 계속 이어졌다.

* * *

다음 날, 케라타 자작은 어느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보레오티 공작저로 향했다.

‘딱히 편지 내용 때문이 아니야.’

케라타 자작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마침 공작께서 지시한 것도 있었고, 상단에 납품할 상품 보고도 전해야 해서. 그래서 겸사겸사 저택에 찾아온 거라며 애써 다급한 심정을 포장했다. 그러나 주머니에 들어가는 손수건이 어느새 흥건해졌다.

저택에 도착한 케라타 자작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케라타 자작.”

한참 서류와 씨름 중이던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파에 자리를 마련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극진한 대접에 케라타 자작이 깜짝 놀랐다. 콧대 높은 공작이 누군가를 직접 맞이하는 경우가 무척 드물었기 때문이다.

‘아, 보레오티 영애 때문이군.’

케라타 자작이 깨달았다. 레오니에가 플로무스와 사이좋게 지내는 덕이었다.

“타바누스 상단에 납품할 물품 수량과 일정 변경, 그에 따른 확인 보고서입니다.”

그러나 자작은 마음을 다잡고 원래 저택에 온 목적을 확실히 했다. 펠리오는 건네는 서류들을 바로 그 자리에서 살폈다. 꼼꼼히 확인한 펠리오가 고개를 짧게 움직였다.

“타바누스 상단 납품일은 이대로 천천히 미뤄 두세요.”

“알겠습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지 묻지 않네요.”

펠리오가 떠보듯 자작에게 물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사실입니다.”

케라타 자작은 펠리오의 명을 처음 받았을 때,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타바누스 백작이 기어코 무슨 사고를 쳐 검은 맹수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펠리오의 행동이 너무 조용했다. 물건 납품을 중단하라는 게 아닌, 납품 일정을 어느 특정 날짜까지 미루라니.

“하나 뜻이 있겠지요.”

케라타 자작 가문은 북부의 골수 귀족이었다. 검은 맹수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선지 몰라도 펠리오의 명을 들었을 때 딱히 불만이 없었다.

검은 맹수는 제 심기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무척 관대한 주군이다.

“자작은 칭찬이 후하군요.”

다리를 꼬려던 펠리오가 멈칫했다.

“……아이가 좋지 않은 자세라고 잔소리를 하도 해서인지, 몸에 밴 듯합니다.”

펠리오가 묻지도 않은 것에 홀로 변명을 댔다.

“원래 딸들이 야무지고 걱정이 많지요.”

공통된 주제에 어느새 두 아버지가 이야기꽃을 활짝 피웠다. 자작은 어느 때보다 펠리오가 가깝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북부의 주인을 향한 경외심만을 지녔는데, 지금은 그저 같은 자식을 둔 이웃사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희 딸이 보레오티 영애께 편지를…….”

껄껄 웃던 자작이 제 말에 헉, 했다.

“레오가 케라타 자작 영애한테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펠리오는 플로무스에게 엄청난 호감을 지녔다. 저의 애늙은이 딸을 아주 잠깐이나마 그 또래 아이처럼 보이게 해 주는 귀한 존재였다. 나중에 그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 후원해 줄 심산이었다.

“편지도 주고받더군요.”

레오니에가 하녀와 호위 기사들과 함께 시내로 외출을 나가 돌아온 날, 마음에 드는 편지지를 샀다며 제게 보여 주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펠리오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편지 인장과 촛농을 선물했더니, 레오니에는 편지지를 샀다고 자랑하던 때보다 훨씬 기뻐했다.

“……그, 정말 죄송합니다만.”

즐거운 추억을 되새기던 펠리오가 시선을 움직였다.

“편지, 저희 딸에게 온 편지가…….”

다시 흥건한 손수건을 꺼낸 자작이 이마를 닦았다.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편지가?”

“무어라 해야 할지…….”

어제 플로무스를 통해 들은 레오니에의 편지는 일곱 살 연령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플로무스는 어른스럽고 근사한 내용이라고 기뻐했지만, 케라타 자작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찻잔으로 상대를 기절시키는 방법.

동화책 주인공의 수도꼭지 뽑기.

아빠 주변을 맴도는 수상쩍은 남자들.

“너무 어른스럽달까, 수준이 높달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삭막하고 메마른 어른의 감성이 느껴지는 편지였다, 하지만 그걸 그 편지를 쓴 아이의 아빠, 그것도 검은 맹수의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며 순록 뿔에 자진해서 치이는 편이 나았다.

“……무어라 썼습니까?”

무언가 눈치챈 펠리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실은…….”

각오를 다진 케라타 자작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 * *

“레오니에 보레오티.”

그리고 그날 저녁.

펠리오는 거실에서 책을 읽던 레오니에를 불렀다.

“왜 아빠?”

레오니에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저를 집무실까지 부른 아빠를 올려다봤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펠리오는 레오니에한테 이름을 선물했던 이후로 처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 이걸 두 번이나 반복했다는 건, 그만큼 지금 펠리오의 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헝클어졌단 뜻이었다.

“내가 네 동심을 포기한 지는 오래다.”

그건 너도 알 거란 물음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합의해서 포기했지.”

지나치게 동심 속 꽃밭에 살던 레지나의 10대 임신이 발각된 이후였다.

“근데 그게 남의 애 동심까지 파괴하란 뜻은 아니었다.”

“나 그런 적 없어!”

“케라타 자작이 네가 플로무스한테 쓴 편지를 읽었다고 한다.”

“아니, 요즘 어른들은 왜 애들 사생활을 안 지켜 주는 거야?”

레오니에가 세상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찼다. 보다 못한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이마에 꿀밤을 내렸다. 딱히 세게 때리진 않았다.

“아야!”

“네가 문제야.”

“아, 또 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내용이었냐고 펠리오가 물었다. 레오니에는 투덜거리면서도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좀 여과 없었네.”

저도 찔리는 게 있는지, 눈을 뜬 레오니에가 시선을 스윽, 아래로 움직였다.

“그래도 나름 순화해서 쓴 거야.”

“찻잔으로 사람 패는 기술 배운다는 게?”

“그건 그냥 내가 뭘 배우는지 적은 거야.”

“내가 너한테 예절 배우라고 보스그루니 백작을 불렀지, 암살 기술을 배우라고 부른 줄 알아?”

“암살 아니야, 호신술이야!”

레오니에는 보스그루니 백작이 아르데아를 찻잔으로 제압하던 찰나를 직접 목격한 뒤론 그 기술에 매료되었다. 찻잔은 두꺼운 사전보다 강한 무기였다.

아이는 애당초 그런 사람을 자신의 예절 교사로 붙인 아빠가 잘못이라며 반박했다.

“그리고 호신술 하나 정도는 배우는 게 좋잖아.”

“네가 그런 게 왜 필요해. 맹수의 송곳니로 꿰뚫으면 될 텐데.”

“아빠는 그게 더 잔인하단 생각 안 해?”

맹수의 송곳니는 자비 없는 저세상행이었다,

“너한테 집적거리면 다 죽어야지.”

살아 무엇하겠냐며 펠리오가 말했다.

“……아이참.”

그 말에 레오니에의 화가 사르르 풀렸다.

“뭐, 어쨌든, 조심할게.”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흥흥 내뿜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펠리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레오니에를 품에 안았다.

“케라타 자작이 편지를 훔쳐 읽은 게 아니야.”

식당으로 가면서, 펠리오가 사정을 설명했다.

“자작 영애가 너랑 주고받는 편지가 기뻐서 읽어 줬다고 하더라.”

“그랬구나.”

레오니에는 자작을 향한 호감을 다시 회복시켰다.

“그런데 걔도 취향 좀 유별난데.”

저만 이상한 게 아니라며, 레오니에가 뒤늦게 변명했다.

“너만 하겠어.”

펠리오는 자타공인 근육 변태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짜증 난 레오니에가 아빠의 머리에 제 머리를 콩 박았다. 하나도 안 아픈 박치기였다.

“걔가 나한테 뭐 가르쳐 줬는지 알아?”

레오니에가 눈앞에 있는 펠리오의 둥근 귀에 손 고깔을 만들어 속닥거렸다.

“사실 순록은…….”

시원시원하게 움직이던 긴 다리가 멈칫했다. 펠리오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굳어졌다. 그럴수록 레오니에는 해맑았다.

“……그래.”

하나 곧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펠리오가 다시 움직였다.

“케라타 가문도 북부 골수였지.”

“잉? 그게 끝이야?”

더 안 놀라? 이번엔 레오니에가 얼굴을 굳혔다.

“넌 북부의 골수들을 너무 얕잡아봤어.”

식당에 도착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의자에 앉혔다.

“원래 북부 골수들은 반쯤 미쳤어.”

“그거 아빠가 아빠 욕하는 거야.”

본인이 골수 가문의 우두머리면서.

‘자기가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네.’

생각보다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 레오니에는 심통이 났다. 한방 크게 먹인 줄 알았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두 부녀가 티격태격 싸우는 동안, 근사한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레오니에는 크림소스에 뭉근하게 익힌 닭고기 요리를 보며 환호했다.

“레오.”

레오니에가 크게 잘라 한 입 먹으려던 찰나였다.

펠리오가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왜 동화책 주인공 수도꼭지를 뽑아야 하지?”

식사 시중을 돕던 사용인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아, 그거?”

레오니에가 닭고기를 오물오물 씹고는 꿀꺽 삼켰다.

“플로가 천사와 사냥꾼을 읽었대.”

천사와 사냥꾼. 펠리오도 익히 아는 동화책이다. 흉흉한 검은 맹수에게도 동화책을 팔에 끼고 다니던 어린 시절이 존재했기에.

“거기서 사냥꾼이 목욕하는 천사 옷 훔쳐서 아내로 삼잖아.”

“그래.”

“그리고 천사가 나중에 옷 찾아서 자식들 데리고 하늘로 돌아가잖아.”

“그랬지.”

“플로가 사냥꾼이 불쌍하대.”

그래서 레오니에는 편지에 사냥꾼은 아주 못된 범죄자라고 설명했다.

천사와 사냥꾼은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또 다른 세상에 있는 ‘선녀와 나무꾼’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동화책은 홀로 남은 사냥꾼을 불쌍하게 표현했지만, 레오니에는 결코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사냥꾼은 성범죄자야.”

레오니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펠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세상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펠리오는 북부에서 천사와 사냥꾼 동화책을 전부 폐기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건 네가 잘했다.”

“그치?”

“하지만 그렇다고 편지에 욕을 쓰라곤 안 했다.”

케라타 자작도 레오니에가 적은 편지 내용을 걱정한 게 아니라, 편지에 적힌 단어 선택을 걱정했다.

“누가 거기에다 수도꼭지를 뽑아 입에 넣어 씹게 해야 한다고 적으래.”

뒤에 있던 하인 두 명이 다리를 다소곳이 붙였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고아원?”

레오니에는 가장 만만한 고아원 선생님들한테 죄를 뒤집어씌웠다. 펠리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덕분에 저택 지하 감옥에 머물고 계시는 고아원 선생님들께 또 한 차례 격한 손님맞이가 예약되었다.

“레오.”

식사가 끝나고, 식후 와인과 디저트가 나왔다. 후식을 나르는 사용인들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며칠 후에 저택에 손님이 올 거다.”

“손님?”

레오니에가 디저트로 나온 레드벨벳 케이크를 포크로 찍으며 물었다.

“누구? 후작 할아버지?”

“그 영감이 왜 손님이야.”

펠리오가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차라리 욕을 해라.”

“딸보고 욕하라는 아빠라니…….”

우리 집 가정 교육은 근본부터 글러 먹었어. 레오니에가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크림치즈와 부드러운 스펀지 케이크를 감미롭게 맛보며 생각했다.

“그럼 누가 와?”

애초에 이 저택에 손님으로 올 사람이 많이 없었다. 대부분 보레오티 공작의 가신들이나 사용인들이 주문한 생필품 등을 납품하는 상인들이 전부였다.

“아빠 친구.”

일단은, 이라고 펠리오가 덧붙였다.

“에이.”

아빠한테 무슨 친구가 있냐며 무릎 신경 검사급으로 빠르게 놀리려던 레오니에가 동작을 멈췄다. 크림이 잔뜩 묻은 포크가 바닥에 땡그랑, 떨어졌다.

딱 한 명.

자타공인 보레오티 공작의 유일한 벗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펠리오가 충동적인 입양을 감행케 한 사람.

두 부녀가 고아원에서 서로를 만나는 기적을 행사케 한 사람.

레오니에에게는 더 없는 은인.

“……리네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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