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놈의 동심
며칠 후.
레오니에는 케레나 테드로스 백작 부인이 이혼을 당해 케레나 메레오카가 되었다는 소식을 카라에게서 전해 들었다. 메레오카 가문에서도 큰 죄를 짓고 돌아온 딸을 먼 지방에 있는 별장으로 요양 보냈다고 했다.
“아빠 말로는 아주 먼 데라고 했어요.”
레오니에는 이제 펠리오를 ‘아저씨’가 아니라 ‘아빠’라고 확실하게 불렀다. 그 변화가 기분 좋은 카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서부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별장입니다.”
북부는 일 년의 절반이 겨울이나 다름없기에, 북부 귀족들은 따뜻한 기후를 지닌 서부나 남부에 휴양 별장을 종종 짓는다. 보레오티 공작 가문도 북부 외 다양한 지역에 많은 별장과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케레나가 요양 갔다는 곳은 메레오카 가문이 지닌 다른 것 비교하면 아주 하찮은 별장이지만, 풍경화 속 배경처럼 푸른 숲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주변에 숲과 나무뿐이죠.”
시내에 나가려면 마차를 타고 반나절은 달려야 도착할 만큼 외딴곳이었다. 즉, 메레오카 가문에서 큰 죄를 짓고 돌아온 딸을 포기했단 뜻이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메레오카 가문을 비롯한 다른 귀족 가문들은 레오니에에게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바쳤다고 한다. 그날 모인 귀족들은 모두 아이에 관한 소문을 악의적으로 부풀리고 퍼트린 죗값을 치렀다.
이와 별개로 또 펠리오가 없는 동안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대가도 치르는 중이었다.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해요.”
욕심쟁이들을 욕하며 레오니에가 소파에서 폴짝 내려왔다. 두 갈래로 나눠 올려 묶은 검은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머리에 묶인 노란 리본은 단단히 고정된 채였다. 카라가 챙겨 온 겉옷을 걸쳐 주었다. 촘촘한 분홍색 망토를 두른 레오니에의 발에는 새빨간 가죽 부츠가 신겨 있었다.
“오늘 고아원에 가시는 날이지요?”
“네, 아빠랑 약속했거든요.”
펠리오는 마물 사냥 원정이 끝나면 고아원에 데려다주겠다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이제는 완전히 복구된 현관 홀로 나가니, 이제 막 나온 듯한 펠리오가 루페와 나란히 서서 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꽤 중한 일인지 서류를 살피는 움직임이나 소리 낮춘 두 어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카라 할머니, 우리 아빠 일해요.”
“일하시는 게 신기하세요?”
“만날 먹고 노는 줄 알았어요.”
“그건 네 일이지.”
어느새 레오니에 옆에 선 펠리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빠!”
거침없이 달려간 레오니에가 그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뛰지 마. 그러다 코 깨진다.”
채도가 낮은 빨간색 코트를 걸친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레오니에는 제 분홍색 망토와 아빠의 빨간 코트를 번갈아 살피더니 씩 웃었다.
“아빠랑 나랑 옷 색깔이 똑같아.”
“빨강이랑 분홍은 달라.”
“그치만 비슷하잖아.”
“네가 그런 거면 그런 거겠지.”
펠리오가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레오니에의 이마를 꾸욱 눌러 뒤로 넘겼다. 거기에 또 지지 않겠다고 레오니에가 필사적으로 목에 힘주어 버티었다.
“저녁 전에는 돌아오도록 하지.”
“자료는 오시기 전까지 정리하여 모아 두겠습니다.”
루페가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럼 식사는 어찌 준비할까요.”
“평소처럼 준비해 둬.”
“카라 할머니, 나 닭고기 요리 먹고 싶어요.”
“크림소스를 곁들인 것이지요?”
츄릅, 레오니에가 군침을 흘리며 명랑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는 어린 주인의 취향까지 완벽하게 파악했다. 레오니에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좋아했다. 특히 크림소스에 뭉근하게 익힌 닭고기 요리를 좋아했다.
“다녀오십시오.”
능숙한 집사의 배웅을 뒤로하며, 레오니에와 펠리오는 마차 위에 올랐다.
“그때 탄 거랑 똑같은 거.”
레오니에가 푹신한 의자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보레오티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크고 까만 차체와 흔들림 없는 의자는 고아원에서 입양될 적에 탔던 것과 똑같았다.
“이거 봐. 마차에서 토 안 해서 다시 탈 수 있잖아.”
“대신 죄 없는 나무가 네 토를 다 받았지.”
펠리오 역시 똑같은 날을 추억했다.
“거름 되고 좋지! 지금 가서 보면 쑥쑥 자랐을걸?”
“나무가 불쌍하긴 처음이군. 넌 양심도 없냐.”
“아빠 딸은 양심 없어! 아빠 닮았잖아.”
“내 양심은 저 산맥과 같아. 크고 넓지.”
“그러게. 메마른 게 아빠 양심이랑 똑같다.”
두 부녀가 오늘도 유치한 말싸움을 주고받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시내로 들어섰다. 레오니에는 이번에도 창가에 얼굴을 콕 박은 채 바깥을 구경했고, 펠리오는 그런 딸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는 창을 구경했다. 창에 비친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레오.”
“응?”
“여기서 내릴까?”
밖을 살핀 펠리오가 거리를 가늠했다. 이쯤이면 걸어서 고아원까지 가도 문제없는 위치였다. 만약 레오니에가 걷다 지치면 자신이 안고 가면 되는 일이었다.
레오니에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내려서 구경해도 돼?”
“나도 삼 년 만에 북부에 왔더니 거리가 보고 싶군.”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펠리오는 사람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니에에게 광장을 구경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제 불호를 가볍게 눌러 이겼다. 레오니에는 처음 보레오티 영지에 왔을 때도 시내 번화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곳에 와본 적 없다고 중얼거리던 아이의 마른 모습이, 인상이 달라 보일 정도로 건강해진 지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럼 내려서 갈래!”
마차가 멈췄다.
먼저 내린 펠리오가 손을 내밀었다. 레오니에가 아빠의 손을 잡고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다 다친다.”
이제는 버릇처럼 걱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빠는 걱정이 너무 많아.”
“원래 부모는 그런 거야.”
너무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펠리오가 멈칫했다. 흔해 빠지고 상투적인 표현을 진심을 담아 내뱉다니. 스스로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빠, 왜 그래?”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시선을 내리니, 레오니에가 동글동글한 눈을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볼을 툭 건드렸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둥글어진 볼살이 출렁거렸다.
저 모습을 보자니, 그런 진심이 나올 만했다.
“아빠, 꽃 따러 가고 싶어?”
저의 부성애에 감동하는 것도 잠시, 인상을 희미하게 쓴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손을 잡았다. 폭이 넓은 한 걸음이 느리게 움직이니, 폭 좁은 서너 걸음이 종종거리며 따라왔다.
“레오. 내가 그 표현 이상하다고 했지.”
“재치만 넘치고 좋은데.”
“도대체 어디가.”
“노상 방뇨로 꽃줄기를 꺾는 것 같고.”
제 말에 레오니에가 혼자 깔깔 웃으며 다리를 폴짝거렸다. 정작 대답을 들은 펠리오의 얼굴엔 먹구름이 꼈다. 희미하게 어려 있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아무래도…….’
소중한 딸을 위해서라도, 레오니에의 동심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를 느꼈다.
‘역시 고아원이 문제로군.’
펠리오는 저택 지하 감옥에 아직도 갇혀 있는 고아원 원장과 선생들을 떠올렸다. 레오니에의 말대로 죽고 싶다고 빌 때까지 대접 중인데, 그 결정이 옳았음을 오늘에야 확신했다.
‘그만큼 괴로웠단 거지.’
저택에서 상주하는 가정 교사 아르데아가 말하기를, 레오니에는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월등한 수준의 지능을 갖고 있다고 했다. 과장을 조금만 더 보태면 아카데미 학생 수준이라고.
그런 아이가, 눈치 좋고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가 그딴 고아원에서 2년을 버티며 살았다. 매일 보고 듣는 게 어른들의 비열한 행동과 역겨운 말투, 사무치도록 아픈 손찌검뿐이니 동심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지금이야 제 손을 잡고 저리 해맑게 웃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외롭고 힘든 마음을 꾹 삼켰다가 가까스로 터트리지 않았던가.
‘일단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법부터…….’
펠리오가 딸의 동심 회복 방법을 궁리하던 찰나였다.
“우와!”
해맑은 감탄이 아래서 터졌다.
문득 멈춰 선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니, 체격 좋은 사내들이 묵직한 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진 채 하나하나 가게 앞까지 옮기고 있었다. 사내들은 추운 날씨에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얇은 튜닉과 바지만 입은 채였다. 가마니가 묵직하니 옮기는 일이 힘들어 자연히 몸에서 열이 난 탓이었다.
“오오……!”
어느새 레오니에가 잡고 있던 아빠의 손을 내팽개쳤다.
“아빠, 봤어? 옷자락이 땀에 젖었어.”
“……너 고아원 안 갈 거냐.”
“고아원에 발 붙은 것도 아니고.”
좀 늦어도 괜찮다고 대충 대답한 레오니에는 이제 대놓고 그들을 구경했다.
“기사 언니, 오빠들 근육이랑 달라.”
신체 균형은 안 맞지만 저건 또 저것대로 매력이 있다며, 저런 게 바로 생활 밀착형 근육의 참맛이라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됐으니까 손이나 잡고 있어라.”
“응, 자.”
펠리오는 저를 바라보지도 않고 성의 없이 쑥 내민 딸의 손을 허무한 심정으로 잡았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는 슬그머니 제 뒷덜미를 잡았다.
초보 아빠는 육아란 본디 기쁨보다 속 터지는 일이 더 많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생애 처음으로 머리 뒤로 피가 쏠리는 기현상에 현기증이 찾아왔다.
“공작님.”
어떻게든 딸의 동심을 회복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펠리오가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 저는 케라…….”
“케라타 자작.”
자신을 부르자 케라타 자작이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저쪽에서 먼저 이름을 불러 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일전에 파르두스 후작 저택에서 인사를 드렸지요.”
“내가 수도로 가기 전이네요.”
“북부의 주인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하다고 예를 갖춰 인사하는 케라타 자작은 후덕한 턱살만큼이나 성품이 푸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유순한 인상과 달리, 제국 건국 이전부터 북부에 터를 잡고 살았던 골수 귀족이었다.
호전적인 북부인의 특성답게, 평소엔 얌전해도 할 땐 하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펠리오가 자리를 비운 3년간 문제 하나 일으키지 않았고, 레오니에와 관련된 소문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신다고 들었는데…….”
“딸아이와 잠시 외출하러 나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레오니에에 대한 소문이 이미 파다했고, 케라타 자작 역시 이를 들었음이 틀림없는데도 놀라거나 살피는 기색 없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가식이나 거짓은 없었다. 펠리오는 자작에 대한 인상을 좋은 쪽으로 남겼다.
“광장 구경에 푹 빠지셨군요.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레오니에는 여전히 가마니를 옮기는 사내들을 구경하느라 다른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제 까만 뒤통수만 자랑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케라타 자작이 껄껄 웃었다.
“사실 저도 제 딸아이와 함께하던 중이었습니다.”
“딸아이?”
“저희 둘째입니다.”
자작이 제 다리에 꼭 붙어 있던 딸의 어깨를 토닥였다. 펠리오는 저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기시감을 느꼈다.
“으, 으아앙…….”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케라타 자작의 딸 역시 펠리오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오돌오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자작 뒤로 숨은 아이의 손이 제 아빠의 바짓자락을 꽉 쥐었다.
“플로.”
자작이 펠리오의 눈치를 살피며 딸을 가볍게 타일렀다.
“보레오티 공작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시다.”
“그, 그치만…….”
강아지처럼 순하게 내려앉은 초록색 눈가에는 이미 눈물방울이 글썽글썽했다.
‘잠시 잊고 있었군.’
저를 보고 울기는커녕 쫑알쫑알 대드는 레오니에 때문에 잠시 잊어버렸던 저의 천부적인 재능을 실로 오랜만에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보고 저렇게 우는 아이가 대다수였다.
“아빠!”
그때, 레오니에가 고개를 휙 돌렸다. 울음을 터트리려던 아이가 흠칫했다.
“나 구경 다 했어.”
탐구 생활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돌아선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세요?”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검붉은 코트 자락에 몸을 은근히 숨기며 물었다. 펠리오는 괜찮다는 듯 아이의 어깨를 감쌌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케라타 자작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르부스 케라타 자작입니다.”
“안녕하세요. 레오니에 보레오티입니다.”
레오니에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자세로 제 이름을 말했다. 웃기게도, 레오니에의 인사법은 서부로 쫓겨나듯 요양 간 메레오카에게서 배운 거였다. 지금이야 그리되었지만, 한때 사교계의 꽃으로 불렸던 만큼 예절 하나는 잘 가르쳤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레오티 영애.”
“우리 아빠 친구예요?”
“하하, 제가 많이 배우는 입장입니다.”
북부의 검은 맹수는 북부 귀족들의 우상이고 자랑이라며 케라타 자작이 말했다.
“아이 앞이라고 굳이 띄워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띄우다니요. 사실인 것을요.”
“아빠, 존대해?”
그런데 정작 레오니에는 이상한 데서 깜짝 놀랐다.
“같은 귀족이니 존대하는 건 당연하지.”
“아빠 기사단 사람들한테는 안 하잖아.”
“그들은 일단 내 부하니까 그런 거고.”
반면 케라타 자작은 글라디고 기사단처럼 펠리오와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입장에서 함께 북부를 지키고 다스리는 사이기에 예를 갖춰 존대했다. 특히나 그는 북부의 골수 귀족이기에 펠리오가 조금 더 신경을 쓰기도 했다.
“물론 작위의 상하를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건 또 자신이 잘 지키고 있다며 케라타 자작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이야기가 샜군요.”
자작이 제 뒤에 숨어 있던 아이의 등을 톡톡 두들겨 앞으로 데려왔다.
“제 딸인 플로무스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레오니에 뒤에 서 있는 펠리오가 여전히 무서운 아이는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덜 무서워했다. 펠리오 주변에서 무자비하게 넘치는 흉포한 분위기가 감소했기 때문이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레오니에의 등장 때문이란 것도.
“플로무스 케라타예요.”
“안녕하세요, 레오니에 보레오티라고 해요.”
“저희 딸아이는 올해 일곱 살입니다.”
“에구, 아직 아기네.”
레오니에가 귀엽다는 듯 플로무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
“…….”
아이들의 인사를 지켜보던 아빠들이 할 말을 잃었다.
“레, 레오니에 님은 몇 살이세요?”
플로무스 역시 저보다 작은 레오니에에게 아기 소리를 들은 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일곱 살.”
동갑내기 레오니에가 선뜻 대답했다.
* * *
고아원을 다녀오고 며칠 후.
“자아, 눈 감으세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
어른 셋이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근 레오니에의 젖은 머리 위로 따뜻한 물이 부어졌다. 레오니에는 두 손으로 눈을 꼭 가렸다.
“이제 머리를 감겨드릴게요. 거품 들어갈 수 있으니 눈 꼭 감으세요.”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은 코니가 레오니에의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새하얀 거품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진 레오니에가 키득키득 웃었다.
“코니! 아가씨 몸 닦을 수건 가져왔어.”
머리를 헹굴 즈음에 밖에서 다른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 목소리다!”
“네, 아가씨. 저 미아에요.”
“어휴, 아가씨!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벽에 걸려 있던 돗자리만 한 수건을 가져온 코니가 레오니에의 젖은 몸을 감싼 채 번쩍 안았다. 레오니에는 저를 가뿐히 안고 움직이는 코니가 매번 신기했다.
“나 안 무거워?”
“아가씨는 아직 살이 조금 더 찌셔야 해요.”
“많이 쪘어. 아빠가 나보고 돼지 되겠다고 했는걸.”
레오니에가 투덜거리며 고자질했다. 코니와 미아는 재잘거리는 아가씨가 그저 웃겼다.
“아가씨가 아기 돼지처럼 귀엽다는 뜻이에요.”
“나보고 2개월 뒤에 잡아먹기 딱 좋겠다고 했는데?”
“미아, 여기 새 수건 좀 줘.”
아직 마음 표현이 서투신 주인님 변호를 포기한 코니가 못 들은 척 새 수건을 받았다. 옆에서 전부 듣고 있었던 미아가 배꼽을 잡고 호탕하게 웃었다.
“주인님께서 정말 그리 말씀하셨어요?”
“응. 오늘 저녁에도 나 돼지라고 놀렸어.”
저녁 식사에 나온 베이컨을 가리키더니 ‘우리 딸 친구 왔네.’라고 말하면서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라 손수 먹여 주기까지 했다. 네 친구 들어간다, 라면서.
“흥, 나 좋으면 좋다고 하지.”
유치하게 진짜, 레오니에가 머리 위로 쑥 들어오는 잠옷을 입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입꼬리가 광대뼈까지 히죽히죽 올라가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코니와 미아가 몰래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그 주인님이, 북부의 검은 맹수가, 눈 마주치는 것만으로 애들을 자지러지게 하는 공작이 자기 딸 예쁘다고 괜히 틱틱거리며 놀리고 밥 먹을 때마다 손수 먹여 준다니.
표현이 서툰 주인님도, 그걸 알면서도 투덜거리는 아가씨도 귀여웠다. 물론 대놓고 당사자들 앞에서 이야기했다간 목이 남아나지 않으니 입조심했다. 특히 펠리오 앞에서는 더욱.
“근데 아빠가 요새 좀…….”
푹신푹신한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레오니에가 중얼거렸다.
“고아원에 다녀온 뒤로 아빠가 좀 변했어.”
“주인님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리 펠리오가 전보다 사람 냄새를 풍긴다고 해도, 코니와 미아 눈에는 여전히 북부를 호령하는 검은 맹수였다. 스치기만 해도 느껴지지 흉흉한 위압감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물론 그런 건 레오니에에게 씨알도 안 먹혔지만.
목욕을 완전히 마친 레오니에는 기분이 좋았다. 따뜻한 목욕물 덕분에 추운 날씨에도 몸은 따뜻했고, 새하얀 잠옷은 피부 위를 흘러내릴 듯 부드러웠다. 거기에 이불만큼 포근한 나이트가운과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 덕에 천하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덕분에 레오니에의 걸음은 위풍당당했다. 뒤따라가는 하녀들이 웃음을 꾹 참았다.
“아빠!”
저녁 인사를 하러 찾아간 집무실에는 펠리오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눕다시피 등받이에 기댄 펠리오는 제 곁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빠, 똑바로 앉아야지.”
그러다 허리 휜다며 레오니에가 잔소리했다.
“나중에 늙어서 고생하지 말고.”
“넌 뭐 다 늙은 것처럼 말하고 있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근처 테이블로 치운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끝이 젖은 머리칼에 코를 가까이 가져가니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냄새 좋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샴푸 향이라며 레오니에가 재잘거렸다.
“아빠가 향이 강한 거 싫어하잖아.”
“내가 말한 적 있었나?”
“아빠는 왠지 그럴 것 같아.”
사실 이 세상의 바탕이 되는 원작을 읽었기에 아는 거지만, 거기까지는 비밀이었다.
“아, 오늘 뭐뭐 했냐면…….”
레오니에는 익숙하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알려 주었다. 고아원에 다녀온 이후 눈에 띈 펠리오의 변화 중 하나가 바로 레오니에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거였다. 그러나 말하는 건 레오가 다했고, 아빠는 항상 듣는 쪽이었다. 그래도 레오니에가 뭔가를 물어보면 곧잘 대답했다.
“……래서, 우응, 망토 머리까지 꾹 눌러 쓰고 장 보러 같이 갔어.”
하녀 언니들과 같이 시내에 나갔던 이야기를 떠들던 레오니에가 입을 크게 벌리며 쩝쩝거렸다. 말수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펠리오가 조금씩 제게 무게를 실어 몸을 기대는 딸의 이마를 짚으며 시계를 바라봤다.
뜨끈한 체온.
오후 아홉 시 삼십 분.
“너 이제 잘 시간이다.”
밤새 떠들고 놀 것 같은 레오니에는 의외로 규칙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어린이였다. 펠리오가 축 처진 레오니에를 품에 안았다. 묵직한 잠은 천하의 레오니에조차 피할 수 없었다.
아이는 쩝쩝, 조그맣게 입맛을 다지며 펠리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살이 잘 오른 볼살이 어깨에 눌려 흐느적 녹아 버렸다.
“주인님.”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코니와 미아는 안겨 나오는 레오니에를 발견했다. 둘은 자신들이 레오니에를 안고 가겠다며 조심스레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되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아이의 방까지 직접 안고 갔다. 눈치를 살피던 코니와 미아는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걸어가 레오니에의 방문을 열고 침대와 방 안을 정리했다.
하녀들이 나가고, 펠리오가 침대 위에 레오니에를 눕혔다. 나이트가운을 벗겨 근처에 있던 의자에 걸어 두고, 이불을 목 아래까지 푹 덮어 주었다.
“아빠, 사탕…….”
손에 꼭 쥐고 있던 딸기 우유 사탕을 건네받은 펠리오가 협탁 위 유리병에 넣었다. 톡,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안심한 레오니에가 배시시 웃으며 곧 눈을 감았다.
“레오.”
“으응?”
“잘 자라.”
“아빠도 잘자…….”
아이의 이마 위로 색이 옅은 입술이 쪽, 내려왔다. 아래로 숙인 아빠의 볼에도 쪽 소리가 났다. 이름을 불러 주면서 잘 자란 인사로 뽀뽀를 하는 것도 펠리오의 변화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 꿈 꿔야 해.”
“꿈에서는 나도 좀 쉬자.”
왜 너는 너밖에 모르냐는 말과 달리, 아이를 내려다보는 펠리오의 얼굴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레오니에는 졸음이 몰려든 어둑한 시야 속에서도 아빠의 기분이 썩 좋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
곧 빠르고 가는 숨소리가 색색 들렸다. 이불도 소리를 따라 위아래로 완만하게 움직였다.
펠리오는 꿈나라로 떠난 저의 어린 딸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항상 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당돌한 꼬마 숙녀는 저리도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잠이 들 때면 항상 입꼬리가 올라간다는 건 요사이 발견한 레오니에의 잠버릇이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펠리오가 짧게 하품했다. 잠든 아이를 보고 있더니 졸음이 옮았다.
“공작님.”
때마침 집무실 앞에 도착한 루페가 펠리오를 발견했다. 그는 펠리오가 어딜 다녀왔는지 대충 눈치챈 듯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가씨께서 잠드신 모양입니다.”
“일찍 자는 게 레오의 유일한 아이다운 점이지.”
“그래도 예쁘시지요?”
말씀 안 하셔도 다 안다며, 루페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 네가 왜 말해.”
펠리오가 정색하며 짜증을 냈다. 온화하던 그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아니, 뭐 말도 못합니까.”
남의 딸 예쁘다고 칭찬해서 욕먹기는 처음인지라, 루페는 꽤 당황했다.
“넌 경계 대상이야.”
집무실로 들어선 펠리오는 곧장 책상 의자에 바르게 앉았다. 자세를 똑바로 해서 앉으라던 레오니에의 잔소리가 귀에서 쫑알쫑알 머무른 탓이었다. 종종 결혼해서 자식을 본 기사들이 제 마누라나 남편보다 아이들에게 잡혀 산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결국 펠리오가 딱 그랬다.
“이건 좀 억울합니다. 제가 아가씨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레오니에의 입양 절차부터 시작해 고아원 청소, 선생님들 인솔 및 증거 은닉, 레오니에에 대한 악의적 소문의 근거지 찾기까지. 루페는 정말 최선을 다했기에 억울했다.
“……레오가 오늘 무어라 했는지 아나?”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걸.”
“나보고 ‘루페 아저씨가 새 아빠 되는 거야?’라더라.”
“새 아빠요? 아니, 아빠는 이미 공작님이…….”
무슨 소리인가 싶던 루페의 입이 순간 멈칫했다. 굳어 버린 루페의 입술이 경악으로 크게 벌려지는 건 바로 이어서였다. 일전에 펠리오와 엮였던 엄청난 오해가 떠오른 탓이다.
‘아저씨는 옷 벗고 있고, 루페 아저씨는 소파에…….’
자신들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떠올랐다.
루페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 어째서 또 그런 착각을 하신 겁니까!”
머리칼만큼 안색이 파래진 루페가 제 머리를 감쌌다. 어쩐지 요새 종종 제게 머무는 레오니에의 시선이 심상치 않더라니. 특히 집무실 근처에서 마주할 때마다 절 향한 아이의 시선이 묘했었다.
저와 펠리오를 의심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너 때문이다.”
펠리오의 표정 역시 썩 좋지 않았다. 오히려 루페의 머리를 줘 뜯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저는 또 왜요!”
“네가 날 너무 찾아서 그래.”
“서류 결재받으러 오는 것도 죄입니까!”
루페 입장에선 억울한 소리였다. 자신은 펠리오를 도와 보레오티 영지 운영 및 북부 전반을 관리하는 일을 도맡고 있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펠리오와 자주 만나 여러 문제를 의논해야 했다.
퍽 억울해진 루페는 제 나름 반박했지만,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 오히려 펠리오에게 접근 금지 비슷한 명령을 받았다.
“급한 업무 아니면 집무실에 오지 마라.”
“그럼 언제 오란 겁니까. 그리고 제 일의 대부분이 급한 업무입니다.”
“과외 중, 낮잠 중, 밤잠 중.”
펠리오가 손가락 세 개를 움직이며 예를 들었다. 레오가 이 세 가지를 할 때만 찾아오란 뜻이었다. 얼떨결에 주인 아가씨의 일정에 제 업무 일정을 맞추게 생긴 루페는 사표를 상사 얼굴에 던지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여기만큼 돈 주는 데 없다.’
북부의 검은 맹수는 돈이 많다.
맹수의 송곳니보다 무서운 건 바로 돈이라지.
삶의 진리를 통해 가까스로 퇴직 욕구를 가라앉힌 미천한 부하 직원이 싱긋 미소지었다.
“징그럽기는.”
“욕 감사합니다.”
직업 정신을 발휘한 루페가 싱긋 웃었다.
“일전에 명하신 조사 보고서입니다.”
루페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인 보고서를 내밀었다.
“일러 두셨던 귀족들을 중심으로 최근 북부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펠리오는 건네받은 서류를 살피며 루페의 보고를 함께 들었다.
“아직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작님의 경고에 겁을 먹고 몸을 사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최근 이들 가문에서 고용한 사용인들의 동태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건진 게 몇 개 있군.”
펠리오의 눈에 몇 가지 중요한 성과가 들어왔다. 루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관해 설명했다.
“메레오카 백작 가문과 글리스 남작 가문 두 곳에서 어느 저택으로 사용인들을 보냈습니다. 백작 쪽은 매번 같은 사람을, 남작 쪽은 매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 사람을 보낸 횟수와 방문한 시간대가 비슷합니다.”
의심하기에 충분한 사항이었다.
“……일단 두 집 날아가고.”
펠리오가 일찌감치 두 가문의 미래를 결정했다.
“그나저나 메레오카 가문이라면…….”
상당히 거슬리는 단어에 평평한 미간에 주름이 확 졌다. 평온했던 집무실에 미약한 긴장감이 흘렀다. 루페는 괜히 목깃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답답함을 풀었다.
“예, 그 가문입니다.”
보레오티 공작이 아끼는 보레오티 공작 영애께 주제 파악도 못하고 시비를 걸다 실성한 채 서부 별장으로 쫓겨난 전 예절 교사 케레나 메레오카 영애의 집안이었다.
거기다 이 가문은 레오니에와 관련된 소문을 악의적으로 부풀려 퍼트리기까지 했다.
“참 대단한 곳이군.”
발이 얼마나 넓기에 어디 하나 안 걸친 데가 없는지.
“과연 사교계의 꽃을 기른 집안다워.”
사교 활동이 남다르단 비아냥이 서린 말투가 집무실의 분위기를 일순 움츠리게 했다. 루페는 괜히 마른침을 한 번 꿀떡 삼키고는, 예의 바르게 등 뒤로 모아 잡은 손을 불안하게 매만졌다. 그리고 마저 보고를 이어 했다.
“그래서, 어느 가문에서 만났다지?”
“타바누스 백작 가문입니다.”
순간 펠리오의 잔잔한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타바누스…….”
길고 커다란 손가락이 책상 위를 탁탁 두들겼다. 레오니에가 그리 앉으면 허리 나간다고 잔소리했던 비스듬히 기대 누운 듯한 자세까지 하면서.
“귀찮은 파리가 꼈군.”
펠리오가 드물게 긴 한숨을 흘렸다. 루페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눈앞에서 깔짝거리는 쥐새끼나 조그마한 잡것들은 당장 잡을 수 있지만, 앵앵거리는 파리는 잡기도 힘들뿐더러 이래저래 거슬리는 게 많았다.
“맹수 없는 설산에 파리 새끼가 군림했다, 이건가.”
“공작님께서 수도에 머무신 3년 동안 자신이 군주처럼 살았더군요.”
“웃기지도 않는군.”
“믿을 만한 뒷배가 있으니까요.”
“아, 그건 좀 웃겼다.”
내뱉은 말과 달리 펠리오의 입가는 굳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일단은 황실이지 않습니까.”
루페의 말에 펠리오가 드디어 피식, 웃었다.
“레오의 성희롱이 더 낫다고 생각해 보기는 처음이군.”
적어도 우리 딸은 적정선은 아슬아슬하게 지키며 근육을 탐하니까. 펠리오는 제 딸의 쓸데없는 바람직함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황실이 파리 같은 면이 있죠.”
“선대 폐하까지는 괜찮았어.”
돌아가신 선대 황제는 펠리오가 진심을 담아 고개 숙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검은 맹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검독수리였다.
“황실이고 수도고…….”
최근 3년을 내리 그곳에서 머물렀던 펠리오는 한동안 황실과 수도와는 척을 두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 많고 중상모략만 넘쳐나는 화려한 쓰레기통이 저의 북부를 건드렸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둔한 새 새끼는 이걸 알려나.”
“황제는 모를 가능성이 크죠.”
“하긴, 제 등에 붙은 파리가 뭔지도 모르니.”
펠리오는 자신이 그간 수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원흉들을 떠올리며 이를 작게 갈았다.
“……아니지.”
곧 생각을 바꾼 펠리오가 조용히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흉포하고 사악한지, 루페는 외마디 비명을 터트리려던 제 입을 꾹 깨물었다. 펠리오는 황실이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그들이 북부에 가지고 있는 열등감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차라리 얽혀라.”
그래야 합법적으로 괴롭힐 수 있지 않겠냐며 사악한 심보를 드러냈다.
“……어째 아가씨를 닮아 가십니다.”
루페는 일전에 고아원 사람들 사이를 폴짝거리며 정신적 고문을 행하던 어린 주인을 떠올렸다. 공작의 미소는 그때 레오니에가 지은 맑고 해사한 미소와 무척 닮았다.
“그거야 내 딸이니까.”
“아, 예…….”
루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부녀의 해맑은 잔인함은 모두가 인정하는 닮은꼴이었다.
두 사람은 보고 내용을 간단히 논의하며 앞으로 어찌할지 의견을 나누었다. 펠리오는 간단한 지시 사항을 전하며 일단은 계속 주시하라고 일러 두었다.
“그리고 케라타 자작.”
“케라타 자작이요?”
그쪽은 그냥 제 영지를 성실히 일구는 사람인데, 루페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작의 둘째 딸이 레오랑 동년배더군.”
“……아아, 광장에서 만나셨다고 하셨지요.”
루페는 그제야 공작이 무슨 뜻으로 케라타 자작을 언급했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 부부가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거로 유명합니다. 특히 자작이 둘째 되는 케라타 영애를 거의 품에 끼고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아가씨와 같은 나이였군요.”
루페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레오와 친구가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검은 맹수의 흉악한 분위기에 겁먹어 울먹이던 얼굴이나, 자작 뒤에 숨어 눈만 쏙 내밀던 모습이라든가, 그 조그마한 입에서 나오던 아기자기한 말투라든가.
펠리오는 여전히 레오니에의 메마른 동심을 걱정 중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그 해결책을 찾은 기분이었다. 기분만 그렇게 느껴졌다.
‘우리 애한테 옮지는 않겠지.’
저보다 작은 레오니에에게 아기 소리를 들었던 플로무스의 놀란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 * *
며칠 후.
카라가 쟁반 위에 초대장 하나를 올린 채 펠리오에게 건넸다. 순록의 커다란 뿔이 그려진 초록색 인장으로 봉해진 말끔한 봉투였다. 편지용 칼로 위쪽을 잘라 내용물을 꺼내니, 며칠 후 열릴 다과회에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케라타 자작 부인이 보냈군.”
“자작 부인께서 종종 아이를 둔 귀족 가족들을 초대하여 다과회를 연다고 합니다. 주인님께서도 이제 한 아이의 부모이니 초대장을 받으셔도 이상할 게 없지요.”
“그래, 이상할 게 없지.”
일전에 광장에서 만났던 케라타 자작이 저의 아내에게 펠리오의 뜻을 잘 전달한 모양이었다.
읽은 편지를 도로 봉투 안에 넣은 펠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니에는?”
“아가씨는 거실에 계십니다.”
카라가 펠리오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그리고.”
거실로 향하는 펠리오에게 카라가 말했다.
“아르데아 님께서 나중에 학업과 관련하여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곧 과외 성적 보고가 있을 날임을, 펠리오가 떠올렸다.
“오후에 내가 찾아간다고 전해.”
그리곤 곧장 뒤돌아 거실로 갔다. 레오니에가 있는 곳으로 갈 때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걸음이 빨라졌다. 이내 거실에 도착한 펠리오는 곧장 장난감이 쌓여 있는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거기엔.
“…….”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장난감 목마 위에 앉아 흔들림에 몸을 맡긴 레오니에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과외가 끝나면 무조건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는 펠리오의 말도 안 되는 지시 때문이었다. 동심을 기르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의무적으로.
세상 메마른 눈빛으로.
“…….”
펠리오는 그런 딸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소음 하나 없이 앞뒤로 부드럽게 흔들리는 목마는 한눈에 봐도 고급품이었다. 까만 말의 눈은 값비싼 보석으로 박았고, 어린이용 파란 안장은 드레스에나 쓸 법한 값비싼 원단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최소한으로만 움직이는 둥근 다리 또한 옹골찬 나무를 솜씨 좋게 깎고 다듬어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렇게나 완벽한 목마 위에 올라 앞만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눈빛은 별 하나 없는 밤하늘처럼 컴컴했다. 아이의 애독서인 ‘인생 다 부질없다’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레오.”
“아빠!”
멍하니 목마에 몸을 맡겼던 레오니에가 기다렸다는 듯 우다다다 달려왔다.
“아빠, 봤지? 나 목마 탔다? 장난감 갖고 놀았다?”
“그래, 나도 봤다.”
그것도 착잡한 심경으로 지켜봤다.
해결해야 할 일이 나날이 쌓이는 중이지만, 펠리오에겐 레오니에의 동심 회복이 가장 우선이었다. 하지만 펠리오는 저의 하나뿐인 딸이 저렇게 의무적이고 건조한 표정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았으면 했다.
벽난로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앉은 펠리오의 다리 사이로 레오니에가 쏙 들어왔다.
“이제 지정석 다 됐지?”
“응, 내 지정석!”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가슴에 머리를 콩 박으며 방긋 웃었다.
“받아라.”
펠리오가 가지고 온 초대장을 레오니에에게 주었다.
“아빠 거?”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장으로 봉해진 편지 봉투에는 이미 편지용 칼로 위를 자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탓이었다.
“나랑 네 거.”
동그랗고 까만 눈이 커다래졌다.
“케라타 자작 기억나지?”
“그때 광장에서 봤던 아저씨랑 딸내미?”
기억난다며 레오니에가 대답했다. 봉투 속에 든 초대장을 꺼낸 레오니에가 읽어도 되냐는 듯 펠리오를 바라봤다. 펠리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애가 참 예뻤어, 그치?”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하지 마.”
“예쁘긴 예뻤잖아.”
대충 대답한 레오니에가 초대장을 찬찬히 읽었다.
“……응?”
초대장을 읽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레오니에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휙 뒤로 넘겼다. 가슴에 이마가 닿을 만치 고개를 꺾은 레오니에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이거 뭐야?”
“다과회 초대장.”
“무슨 의도야?”
“아이 동반 다과회에 갈 거다.”
레오니에의 얼굴에 암담한 그늘이 졌다.
“내가 지난번 외출 때 널 보고 걱정을 했다.”
“하지 마.”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되었기에, 레오니에는 슬금슬금 펠리오의 다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 하나 키만큼 팔도 긴 아빠에게서 도망치는 건 무리였다. 곧 붙잡힌 레오니에는 망연자실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레오니에를 바라보는 펠리오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와 안타까운 애정이 깃들었다.
“레오.”
“……왜, 아빠?”
“넌 평범한 아이처럼 뛰어놀 필요가 있어.”
쓸데없이 조심스러운 말이 너무도 불편했다. 펠리오는 남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레오니에는 거기서 자신이 예외가 된 지 꽤 되었다는 걸 안다. 그래도 이런 배려는 너무 싫었다.
특히 이 초대장을 읽고 난 지금은 더욱.
“넌 아직 어리다. 억지로 어른 흉내 낼 필요 없어.”
“이 뭔 개…….”
막 튀어나오려는 단어에 놀란 레오니에가 서둘러 효심을 힘껏 끄집어 올렸다. 그래도 저 걱정해 주는 아빠 면전에 ‘개소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 아빠.”
일단 펠리오에게 자신은 잘 지내고 있음을 설득하기로 했다.
“나는 장난감보다 책 읽으면서 혼자 있는 게 좋아. 그리고 아빠도 알지만, 나 엄청 어른스럽잖아.”
“하지만 그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니었어.”
“이 아저씨가 왜 이래, 갑자기.”
레오니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펠리오를 오랜만에 ‘아저씨’라고 불렀다. 착각이면 좋겠지만, 어째선지 펠리오의 찌푸려진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제발 저게 저를 향한 동정이 아니었으면 했다.
그러나 나쁜 예감은 다 들어맞았다.
“레오.”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분위기 왜 이래?’
동그란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동정과 안쓰러움이 공존하는 분위기가 이리도 낯설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너도 이젠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고, 그 나이대의 아이들처럼 놀아도…….”
“나 친구 있어! 고아원에서 봤잖아!”
레오니에가 얼마 전 찾아간 고아원을 언급했다. 고아원 식구들은 힘든 순간을 함께 견디고 버티었던 전우이자 가족이고,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고아원 식구들은 레오니에를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레오니에 덕에 그 지옥 같은 고아원에서 벗어나 보레오티 고아원으로 옮겨져 따뜻한 보호를 받게 된 걸 알았다. 이제 배 굶는 일도 없고, 배급받은 옷도 따뜻했고, 공부도 배울 수 있었다.
“그건 친구가 아니야.”
그러나 펠리오의 생각과 그날의 기억은 레오니에의 것과 많이 달랐다.
“보호자랑 피보호자지.”
고아원 아이들이 레오니에를 반긴 건 펠리오도 부정하지 않았다. 애들이 어찌나 서로 친한지, 서로 부둥켜안고는 한참을 엉엉 울었다.
하지만 친구처럼 보이는 건 딱 그 순간뿐이었다.
‘잘 지냈어? 밥은 안 굶고?’
‘어디 보자, 어이구 키가 엄청 컸네!’
‘흘렸어? 울지 마, 자. 누나가 닦아 줄게.’
‘야 이 오빠 새끼야! 너 내가 동생들 괴롭히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언니 이제 글자 다 외웠어? 대단해라!’
레오니에는 너무도 익숙하게 이전 고아원 식구들을 하나하나 돌봐 주고 챙겨 줬다. 저보다 어린아이부터 시작해 훨씬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도 레오니에 앞에서는 한참 어린 아기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 손길을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였다.
이전 고아원에서는 누구도 아이들을 지켜 주고 돌봐 주지 못했다. 그러니 책임감 강하고 똑 부러진 레오니에가 어른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지켰던 거다. 꿈 같은 동심 따위, 척박한 고아원에선 사치에 불과했다.
아이가 아이의 보호자라니.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펠리오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만일 자신이 사랑의 도피를 떠났던 사촌 동생에게 조금만 더 관심과 동정을 가졌다면. 그래서 그 당시에 조금만 더 수색을 길게 했더라면, 저 어린 것이 그토록 힘든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아가씨의 등에 상처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마치 채찍이나 가죽 혁대 같은 거로…….’
펠리오는 멜레스가 레오니에의 헐벗은 몸을 살핀 후 보고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또래보다 한참 작은 아이는 힘들었던 순간을 지금도 내색하지 않는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꾸역꾸역 삼키며,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눈가를 천천히 훑었다. 아이는 제 볼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아빠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레오.”
“응.”
“넌 내게 하나뿐인 가족이야.”
“아빠…….”
예상치 못한 고백에 레오니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난 네가 이렇게까지 커다란 존재가 될 줄 몰랐다.”
“……시비 거는 거야?”
이씨, 레오니에가 곧장 투덜거렸다.
“그러니 난 네가 네가 하고픈 걸 다 해 주고 싶다.”
근데 아빠가 못하게 하잖아…….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레오니에가 꾹꾹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그놈의 동심을 회복시킨다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라지 않나. 애독서 ‘인생 다 부질없다’도 압수해가지 않나. 그 대신 읽으라고 ‘꿈과 환상의 동화’를 쥐여 주질 않나.
레오니에는 아무리 제 겉모습이 애여도 애 취급은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너의 동심은 소중해.”
하지만 펠리오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솔직히 감동했다. 엄청 했다. 후끈 달아오른 눈시울 때문에 괜히 코까지 시큰했다. 자신이 그를 진짜 아빠라고 생각하고 따르는 것처럼, 펠리오 역시 레오니에를 소중히 보듬고 진심으로 아껴 주고 있었다.
‘아빠가 날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아는 것과 직접 보고 느끼는 건 확실히 달랐다.
“으으으!”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갈게!”
레오니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초대장이지, 결투장이 아니다.”
펠리오가 큰맘 먹은 딸아이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 * *
북부의 겨울은 어느 곳보다도 어둠이 길고 짙다.
케라타 자작은 영지 바깥에 있는 커다란 순록 농장을 살피고 돌아왔다. 워낙 넓은 탓에 보수할 곳이 없는지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이 가 버렸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전부 살폈고, 아무 이상도 없었다.
“이제 오셨어요?”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다녀오셨어요?”
저택에 도착한 자작은 가족들의 마중을 받으며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시각.
“……여보.”
먼저 침대에 누운 자작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당신 말대로 공작님께 초대장을 보내긴 했는데, 정말 오실까요?”
“그거 때문에 걱정입니까?”
옆에 누운 자작이 아내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옅게 웃었다. 자작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공작가에 초대장을 보내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 가문을 낮잡아 보는 건 아니에요.”
케라타 가문은 보레오티 가문과 함께 제국 이전부터 존재해 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그래서 비록 작위는 자작에 불과하나, 북부의 귀족들은 케라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작님이라고요.”
북부의 주인이자 검은 맹수.
“그분께서 초대장을 벽난로 땔감으로나 쓰셨으면 다행일 거예요. 적어도 종이 낭비는 아닐 테니 말이죠.”
케라타 자작은 아내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자작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부인 딴엔 아주 심각했기 때문이다.
“크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좋습니다.”
케라타 자작이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님께서 제게 직접 부탁하신 일이니까요.”
“저는 그마저도 안 믿긴다는 거예요.”
“부인, 남편을 좀 믿어 주세요.”
굵직한 손가락이 아내의 옆구리를 살금살금 간질였다. 자작 부인이 웃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알겠다고, 이제 믿는다고 말한 뒤에야 자작이 뒤로 살짝 떨어졌다.
“다과회 준비는 열심히 하시면서.”
“그거야…….”
만에 하나라도 진짜 보레오티 공작 부녀가 온다면, 어디 하나 흠이라도 보여 줄 수 없는 일이었다. 북부의 검은 맹수는 그만큼 경외로운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직접 뵈었다면서요.”
“아주 작고 귀여운 소녀였지요.”
레오니에를 떠올린 케라타 자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야무진 말투와 초롱초롱한 검은 눈동자가 쉬이 잊히지 않았다. 거기다 저보다 한참 큰 플로무스에게 ‘아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표현 써도 될지 모르겠으나, 애늙은이 같았습니다.”
“어머?”
“우리 플로를 보더니 ‘에구, 아직 아기네’라고 하더군요.”
“세상에나!”
자작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내를 따라 케라타 자작도 미소를 지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그런 레오니에가 안쓰러웠다.
플로무스가 또래보다 크긴 해도, 레오니에는 그 나이대와 비교해도 너무 작았다. 케라타 자작은 사실 레오니에를 처음 봤을 때 많아도 다섯 살이라고 여겼다. 그런 아이가 제 또래를 저보다 한참 어리게 바라봤다. 제 신분을 믿고 상대를 낮잡아 봤다는 게 아니라, 속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또래 아이가 제 친구로 보이지 않은 것 같다는 뜻이었다.
‘아마 고아원 생활이 힘들었겠지.’
보레오티 영지는 아니지만, 타 영지에 있는 고아원은 제대로 운영조차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공작께선 그런 영애를 보듬고 싶으신 거고.’
뒤늦게 찾은 저의 딸에게 좋은 것만 해 주고 싶을 거다. 자식을 둘이나 둔 케라타 자작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제게 아이 동반 다과회 초대장을 보내 달라고 연락했던 보레오티 공작은 그때만큼은 자녀를 둔 부모일 뿐이었다.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네요.”
자작 부인이 쓸데없는 소문을 퍼트리던 귀족들을 떠올렸다.
“공작께선 이번 다과회에서 영애가 친구를 만나게 해 주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초대 손님들을 신중히 골랐어요.”
케라타 자작 부인은 얼마 전 보레오티 공작저로 불려갔던 귀족들은 초대 목록에서 전부 배제했다. 공작이 수도에 머무는 동안 크고 작은 죄를 지었고, 레오니에에 관한 악의적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다. 그들 중엔 케라타 자작 가문과 친분이 있는 곳도 있었다. 당연히 초대에 제외된 것이 어찌 된 일인지 따졌지만, 보레오티 공작 부녀가 온다고 말하니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플로를 염두에 두신 걸까요?”
“그럴 겁니다. 광장에서 만났으니까요.”
부부는 지금쯤 순록 인형을 껴안고 곤히 잠들었을 막내딸을 떠올렸다.
“플로가 착하긴 하지만, 사람을 이끌고 할 만큼은 활발한 성격은 아닌데.”
내성적인 딸아이가 과연 보레오티 공작 영애와 잘 어울릴 수 있을지, 자작 부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인은 그게 걱정입니까.”
“당연하죠. 어쨌건 보레오티 공작 영애잖아요.”
“친구를 사귀는 데 작위고 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또 꿈 같은 말을…….”
자작 부인이 작게 하품했다. 이제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케라타 자작이 협탁 위에 있던 촛불을 후, 불었다. 일렁이던 주홍빛 불꽃이 꺼졌다. 어둠이 찾아든 침실에서 두 부부가 이불 속에서 서로를 꼭 껴안았다.
“부인.”
“네, 여보.”
“사실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자작 부인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당신은 공작님이 누구신 줄 모르고 계십니다.”
“공작님이요?”
“그분이 왜 검은 맹수겠습니까.”
* * *
“꺄아-!”
“으아앙! 무서워!”
“엄마! 엄마아아!”
“무서워! 무서워!”
“잘못했어요! 으아앙-!”
부모님을 따라 다과회에 놀러 온 아이들은 펠리오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어느 아이는 달리다 넘어졌고, 어느 아이는 엄마 치마폭에 얼굴을 숨겼다. 그중 몇몇은 어서 집에 가자고 빽빽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이 머물렀던 자리엔 조금 전까지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색칠 놀이책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채였다.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곳 근처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신발 한 짝도 떨어져 있었다. 참혹한 현장이었다.
“…….”
다과회가 열린다는 응접실에 들어와 숨 한 번 내쉰 게 전부인 펠리오의 얼굴이 비틀어졌다.
‘와아…….’
시중 겸 호위로, 정복 차림으로 따라온 파보가 감탄했다.
‘진짜 울면서 도망치잖아?’
아가씨 또래 남동생을 둔 멜레스에게 말로만 들었던, 맹수의 송곳니 이상으로 엄청나다는 펠리오의 또 다른 이능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아이들을 울리고 경기를 일으키게 한다던데. 아이들이 정말로 펠리오를 보자마자 자지러지며 도망쳤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던 파보는 어째 펠리오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에헤! 아빠가 울렸대요!”
반면 품에 안겨 있던 레오니에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파보는 아가씨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러고 보면 아가씨만 주군을 보고 울지 않잖아.’
고아원에서 처음 만날 적에도 그랬단 동료기사들의 증언이 떠올렸다. 아이들의 울음으로 짜증이 난 공작을 대놓고 놀리고 비웃을 수 있는 건 아마 세상에서 레오니에가 유일할 거다.
“울렸대요, 울렸대요!”
“아빠 놀리니 좋으냐.”
“내가 이 꼴을 하고 다과회에 온 보람이 있네.”
치렁치렁한 레이스 보닛부터 시작해 속치마를 빵빵하게 채운 연두색 드레스. 마무리로 새하얀 가죽 구두를 신은 레오니에가 한껏 비웃었다.
“나만 고생할 순 없지.”
코니와 미아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첫 다과회에 나가는 아가씨를 위해 기껏 최선을 다해 꾸며줬건만, 다 부질없어 보일 정도로 사악한 미소였다.
“배은망덕한 딸 같으니.”
혀를 짧게 찬 펠리오가 바닥에 레오니에를 내려 주었다. 그래도 잡으라고 손을 내밀었고, 곧 조그만 손이 꼬옥 쥐여 졌다.
“오, 오셨습니까.”
다과회의 주인인 케라타 자작 부인이 다가왔다.
“북부의 주인이신 보레오티 공작님을 뵙습니다. 저는 이번 다과회를 개최한 트라겔라 케라타입니다. 조촐한 곳에 모시게 되어 죄송할 뿐입니다.”
“부군 덕에 좋은 곳을 알게 되었지요.”
“남편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군요.”
펠리오가 조금 전의 소란을 사과했다.
“아직 아이들이 많이 어립니다.”
차마 네가 흉흉한 인상이라 그런 거라고 말할 수 없었던 케라타 자작 부인이 빙긋 웃었다.
“아, 그럼 함께 오신 이 귀여운 영애가…….”
“내 딸입니다.”
레오, 펠리오가 손을 놓으며 인사하라 고갯짓을 했다.
“안녕하세요, 케라타 자작 부인.”
레오니에가 치맛자락을 넓게 들어 인사했다. 나무랄 데 없는 자세였다.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여식, 레오니에 보레오티라고 합니다. 케라타 자작 부인을 만나는 날을 무척이나 기대했답니다. 다과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나.”
야무진 아이의 인사에 케라타 자작 부인의 얼굴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레오니에는 감정 표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작 부인이 어쩐지 참 귀여워 보였다. 일전에 봤던 자작과 나이 차이가 좀 있어 보였다.
그런 생각을 짧게 하던 중에 자작 부인도 레오니에에게 인사했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 저 역시 영애를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답니다. 저는 이번 다과회를 주최한 트라겔라 케라타라고 합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이길 바라요.”
서글서글한 자작 부인의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레오니에는 부인의 얼굴에서 자작이 겹쳐 보였다. 레오니에가 방긋 웃었다. 사이 좋은 부부는 닮는다더니, 아마 자작 부부는 무척 금실이 좋은 듯했다.
케라타 자작 부인은 다과회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줬다.
“아이들은 저곳 융단에서 놀고, 부모님들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아이들을 지켜본답니다.”
“다과회는 자주 열립니까?”
펠리오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곧 그의 앞으로 차가 준비되었다.
“교류하는 가문끼리 돌아가면서 엽니다.”
이번에는 케라타 가문 차례였다. 가문마다 다과회를 열 때마다 아이들을 위한 조그만 행사도 준비하는데, 이번에 자작 부인은 순록을 구경하고 탈 수 있는 체험을 준비했다고 한다.
“아이 안전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펠리오가 순록 이야기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순록의 발길질에 레오니에가 크게 다치는 끔찍한 상상을 해 버리고 말았다.
“순록은 사람을 잘 따르는 가축입니다. 저희 가문의 전문가가 바로 옆에서 지켜볼 거고, 구경 역시 울타리 밖에서만 할 겁니다. 세 마리 순록 다 가문 내 목장에서 기르고 돌본 아이들로만 선별했으니 기생충 감염도 없습니다.”
“순록을 탄다는 건?”
“참여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타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럼 되었습니다.”
휴우, 케라타 자작 부인이 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펠리오는 딸의 안전을 위해 물어보는 것뿐이었으나, 자작 부인은 중대한 업무라도 보고하는 것처럼 중압감에 시달렸다. 시부모님한테서도 느껴본 적 없는 압박감이었다. 설명 중간중간 손가락을 까딱이는 펠리오가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레오.”
펠리오는 소리 소문도 없이 제 옆에 떡하니 앉아 있는 레오니에를 바닥에 내려놨다.
“너는 가서 놀아라.”
“……나 아빠랑 있고 싶은데?”
레오니에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혀 짧은 소리를 냈다.
“레오는, 아빠랑 차 마시고, 까까도…….”
“이게 어디서 끼를 부려.”
“끼 아닌데에? 애굔데?”
“혀에 경련이라도 났나.”
징그러운 말투 쓰지 말라며 펠리오가 손가락으로 아이의 입을 여기저기 꾹꾹 눌렀다. 입에 손가락을 넣기 싫은 레오니에가 꾸욱 입을 다물며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으으, 역시 싫어!’
다과회까지 어떻게든 오긴 했는데, 저기서 놀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아빠…….”
보다 못한 레오니에가 각오를 굳혔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아?”
“다섯 살처럼 보이는 일곱이지.”
“사실 있지, 나 스물 넘었어. 내일모레면 서…….”
“꿈과 희망이 넘칠 나이다.”
“어디가!”
사람들 앞이라고 성질을 꾹 참고 있던 레오니에가 결국 폭발했다. 부녀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흠칫 놀랐다. 보레오티는 보레오티다, 검은 맹수가 나타났다며 사람들이 속닥거렸다.
“헛소리 말고 이거나 가지고 가.”
펠리오가 뒤에 있던 파보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뒤에서 웃음을 꾹 참고 있던 파보가 작게 헛기침하며 분홍색 벨벳 주머니를 전달했다. 펠리오는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하나 집어 보여 줬다. 레오니에 전용 간식인 딸기 우유 맛 사탕이었다.
“……잉?”
사탕을 본 레오니에가 갸우뚱거렸다.
“친구들하고 나눠 먹어.”
“여기 친구가 어딨어.”
다 아빠 얼굴 보고 울면서 도망쳤는데. 레오니에가 텅 빈 놀이 공간을 가리키며 반박했다.
“곧 들어올 거야.”
그 말에 귀족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놀이 공간으로 도로 보내었다.
레오니에는 바닷물을 흠뻑 머금은 시선으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하는 행동이 아주 그냥 짜다 못해 치사하단 뜻이었다.
“가서 친구 한 명 정도는 사귀고 와.”
“저것들하고 뭘 하고 놀라고…….”
레오니에는 투덜투덜 짜증을 내면서도 펠리오가 쥐여 준 사탕 주머니를 손에 꼭 쥐고 놀이 공간으로 갔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뒷모습을 느긋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 * *
플로무스는 일생일대의 기로 앞에 섰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를 잘 보살펴 주렴.’
다과회가 열리기 전, 자작 부부는 플로무스에게 당부했다.
저보다 아주 작으면서, 저보고 아기라고 말했던 레오니에는 무척 이상하고 신기한 아이였다. 그 말에 놀라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플로무스는 어둡고 무섭기만 했던 검정이 그렇게 예뻐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레오니에의 동그란 눈과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아주 귀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플로무스는 그러겠다고 쉬이 답하지 못했다. 레오니에의 뒤에 떡하니 있던 펠리오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토록 무섭고 위압적인 사람에게서 그리도 작고 예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 걸까.
플로무스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오빠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오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쩌면 걔도, 엄청 무서울지 몰라.”
손톱을 바짝 세운 오빠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플로무스가 흠칫 어깨를 떨며 한 발짝 뒤로 물러갔다.
“북부의 검은 맹수의 딸이야.”
그게 무슨 소리겠냐며 오빠가 속삭였다.
“그 애도 맹수라는 거야.”
으르렁, 오빠의 놀림에 플로무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테드로스 백작 부인 이야기 못 들었어? 아, 이젠 테드로스가 아니지. 어쨌건 그 사람 어떻게 됐는지 들었잖아. 보레오티 공작 영애한테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맹수의 송곳니에 꿰뚫려 미친 여자가 됐다잖아.”
“미, 미친 여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대.”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라고.
부축해 주는 사람 없으면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고, 옷도 혼자 못 갈아입을 정도라는 소문은 어린아이들도 부모님 몰래 속닥거릴 정도로 파다하게 퍼졌다. 사교계의 꽃은 그리도 허무하게 져버렸다. 그러나 누구도 그 소문을 과장되었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축소됐으면 됐지, 진실은 그보다 더 잔혹할 거라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아, 아닐…….”
아닐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플로무스 역시 북부에서 태어나 자란 귀족 아이였다.
‘부모님 말씀 안 듣는 못된 아이는 밤에 보레오티 공작이 잡아간다지?’
‘맹수의 송곳니가 지켜보고 있어!’
‘너 계속 울면, 검은 맹수한테 콱 물린다?’
지금에야 어른이 아이를 혼낼 때나 쓰는 관용구지만, 그 속에 있는 보레오티 공작 가문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들이 지닌 맹수의 송곳니란 이능 역시 실제로 존재하는 두려운 힘이었다.
북부의 검은 맹수.
북부의 지배자.
보레오티 공작 앞에 북부의 모든 것이, 마물까지도 몸을 낮춘다.
“나, 나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잡아먹히는 거지!”
“으아아앙!”
짓궂은 오빠의 놀림에 플로무스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오빠는 동생을 위로하긴커녕 더 놀렸고, 오빠의 철없는 장난은 마침 플로무스를 찾고 있던 자작이 발견하고 혼을 낸 뒤에야 끝날 수 있었다.
“억지로 친해질 필요 없다.”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은 어린 딸의 얼굴을 닦아 주며, 자작이 괜찮다고 말했다.
“대신 인사 한 번만 하렴.”
서글서글한 자작의 미소가 플로무스의 훌쩍임을 진정시켰다.
‘……좋아.’
비록 펠리오가 다과회에 나타나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쳤지만, 플로무스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고 용기를 냈다. 사실 두 다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조금 전 울면서 도망쳤던 오빠보다는 열 배나 나았다.
‘오빠는 엉엉 울었는걸.’
도망치다 넘어지기까지 했지. 플로무스가 울던 오빠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지었다. 만날 저보고 못생겼다고 놀리던 오빠가 훨씬 더 못생겼었다.
응, 오빠보다 내가 더 용감해.
거기다 자신은 다과회를 주최한 케라타 자작 부인의 딸이었다. 주최자의 딸이 손님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플로무스의 바로 뒤에는 겁먹은 아이들이 똘똘 뭉쳐 있었다. 부모님이 어서 가서 놀다 오라고 하는 바람에 반강제로 떠밀리다시피 나온 아이들은 레오니에에게 눈길도 못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계속 응시하는 탓이었다.
제 딴에는 딸내미가 친구들과 잘 어울릴지 걱정되는 마음에 지켜보는 거였지만, 그 간절한 부성애를 알 리 없는 아이들은 검은 맹수가 자신들을 잡아갈지도 모른다며 겁을 먹었다.
그런 점에서 플로무스는 그나마 나았다. 일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 덜 무서웠기 때문이다.
“저기…….”
그래서 용기를 내 레오니에의 곁으로 갔다.
* * *
반강제로 놀이 공간으로 쫓겨난 레오니에는 뒤통수가 아렸다. 슬쩍 돌아보니, 펠리오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가늘게 접힌 검은 눈에서는 ‘난 네가 반드시 애들하고 어울려 노는 걸 보고 말 테다.’라는 쓸데없는 부성애가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펠리오의 시선 때문에 아이들은 레오니에 곁에 다가오지도 못했다.
분명 화기애애한 다과회였을 텐데. 지금은 저 어린 것들도 살려고 몸을 사리고 있다. 레오니에는 마침 제 발밑에 있던 신발 한 짝을 가련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 진짜…….’
술 당기네.
오랜만에 정신 연령과 신체 연령의 격차로 피곤함을 느낀 레오니에가 그리운 초록 병 대신 손에 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먹었다. 오물오물 이리저리 입 안에서 굴릴 때마다 달짝지근한 딸기 우유 맛이 퍼져 나갔다.
레오니에는 고민했다.
‘장난감이냐, 애들이냐.’
다과회에서 레오니에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일단 장난감은 바로 논외였다. 저택에 널리고 널린 게 장난감이고, 쳐다도 보기 싫었다. 며칠 전에도 목마를 타면서 인생이 왜 이토록 부질없는지 수십 번을 고뇌하지 않았던가. 조금만 더 탔다간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또 다른 세상에 빙의할 뻔했다.
그렇다면 애들이냐.
이건 좀 여러모로 짚어야 할 점이 많았다.
레오니에는 고아원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때는 자신이 아이들을 돌보는 상황이었기에 어린아이들을 불편해할 여유가 없었다. 도리어 저를 찾고 기대는 아이들 덕분에 그 끔찍한 지옥에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다과회에서는 모두 동등한 입장이다.
같이 놀고 어울려야 했다.
‘같이 놀 수 있을까?’
아기 맹수가 한참 낑낑거리며 고민하던 중.
“저기…….”
플로무스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인사했다. 나름 용기를 내었다고 내었지만, 미세한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플로!”
창문을 깨고 도망칠 각오까지 했던 레오니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함박웃음 위로 볼살이 볼록 튀어나왔다. 입 안에 있던 사탕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있었지!”
단번에 플로무스 앞까지 다가온 레오니에가 아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플로무스가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몸을 화들짝 떨었다.
“우리 오랜만이다, 그치?”
그러고는 레오니에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플로무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동갑이어도 키 차이가 나다 보니 레오니에가 자연히 발꿈치를 들게 되었고, 플로무스가 등을 숙이게 되었다.
“……자세가 좀 이상한데?”
본인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던 레오니에가 팔을 풀고 플로무스의 손을 꼭 잡았다. 플로무스는 저를 막힘없이 만지는 레오니에의 행보에 어안이 벙벙했다.
‘보레오티 영애가 날 만졌어!’
싫은 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러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플로무스가 주먹을 앙증맞게 꼭 쥐었다.
“안녕하세요, 영애.”
플로무스는 어머니를 도와 초대받은 아이들을 돌보고 살필 의무가 있었다.
“다과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선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한참 늦은 인사였기에 플로무스는 어느 때보다 힘을 주었다.
“나도 초대해 줘서 고마워.”
사실 하나도 안 고맙지만, 눈앞에 있는 이 조그만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는 걸 아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 덕에 플로무스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플로무스는 용기를 낸 자신이 아주 조금 자랑스러웠다.
“혹시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세요?”
다과회에 이제 도착한 레오니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저희 다과회에는 맛있는 과자랑 달콤한 주스가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어요.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저기 있는 하녀들에게 부탁하면 돼요. 그리고 나중에 순록을 구경하는 시간도 가질 거예요.”
플로무스가 열심히 설명했다. 부모님이 이번 다과회를 얼마나 힘들게 준비했는지 뒤에서 몰래 다 지켜봤기에, 보레오티 공작 영애에게 이 다과회를 좋게 보여 주고 싶었다.
“순록? 루돌프?”
레오니에가 눈을 반짝였다.
“루돌프요?”
“코 빨간 순록 말이야.”
“보레오티 영애께서 기르시는 순록인가요?”
“그건 아닌데, 혼자 코 빨갛다고 다른 순록들한테 왕따 당하다가, 그 빨간 코 때문에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인생 핀 순록 이야기야.”
“어어…….”
레오니에의 설명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 플로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자신이 아는 순록에 대해 알려 줬다.
“순록은 원래 추운 날에 코가 살짝 빨개져요.”
“어, 정말?”
몰랐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레오니에를 본 플로무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대신 여름에 기생충이 알을 까고, 코를 뚫고 나와요!”
다만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굳이 안 알려 줘도 되는 상식까지 전해 줬다.
기어코 상상해 버린 레오니에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질색했다. 가뜩이나 없던 동심이 더 메마른 기분이었다.
“……너 순록 잘 아네?”
“순록 좋아해요!”
하지만 애가 저렇게도 눈을 반짝이니 그만 되었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어쩐지 고아원에서 돌보던 식구들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 정도면 그리 질색할 필요도 없었다. 괜히 혼자 오두방정을 떤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레오니에가 다과회를 편안하게 느끼자, 아이들도 이를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천천히 다가와 인사했다. 그중 몇 명은 같이 플로무스의 순록 설명을 들었다. 들어주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설명하는 플로무스가 더욱 힘을 내었다.
“순록은 참 착하고 예쁜 아이들이에요. 계절마다 눈 색깔도 다르게 보여요. 아, 예전에 저희 할아버지가 순록을 거세할 때 맨입으로 불…….”
“……야야야야!”
그 선을 넘으면 안 돼!
나름 즐겁게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식겁하며 끼어들었다. 뜨거운 달걀을 깨물었다고 말하려던 플로무스도, 겨우 진정을 되찾고 놀기 시작한 아이들도, 한숨 돌리고 아이들을 지켜보던 어른들도 모두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어어, 아니, 그러니까…….”
얼떨결에 시선을 주목받은 레오니에가 불편한 식은땀을 흘렸다.
“사, 사탕!”
마침 아빠가 건네준 비장의 주머니가 있었다.
“우, 우리 이거 먹을래?”
다행히 사탕은 효과가 좋았다.
* * *
“가베르 경.”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아이들과 사탕을 나누어 먹는 모습에 눈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대 눈에 레오는 지금 어떻게 보이나?”
“친구들을 두루두루 잘 살피는 착한 아이처럼 보입니다.”
파보는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레오니에가 기특했다. 워낙 애가 애늙은이처럼 지내니까, 파보나 다른 기사들도 걱정할 때가 많았다. 가끔은 아가씨의 진짜 나이를 잊을 때도 있었다. 가령, 지난번에 기사들끼리 술 마시러 갈 적에 저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뒤돌아서던 아가씨 때문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럼 되었다.”
펠리오가 차를 한 잔 머금었다.
‘너무 작군.’
딸이 또래 아이들과 잘 지내고 사귀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레오니에의 작은 체격이 안쓰러워 보였다. 요 몇 달간 잘 먹여서 키운 게 겨우 저 정도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펠리오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찻잔을 내렸다.
“……주군.”
경계심 어린 파보의 목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어느새 매서워진 눈초리가 어느 한곳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파보가 작게 속삭였다.
“물러나라.”
곧 파보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맹수가 눈을 느리게 움직였다.
“보레오티 공작.”
파르두스 후작이 다가와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옆으로 물러선 파보의 미간이 아주 잠깐 일그러졌다. 자신의 주군을 함부로 부른 것이 충성스러운 기사의 심기를 건드렸다.
“후작.”
그런 파보에게 가볍게 눈짓한 펠리오가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파르두스 후작에게 아는 척을 했다. 파르두스 후작이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전혀 몰랐다며 태연히 말하지만, 사실 펠리오는 파르두스 후작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케라타 자작을 통해 다과회 명단을 먼저 입수했기 때문이다. 이는 혹여 레오니에에게 악영향을 줄 사람이 없을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에 뵈었던 게 수도였지요?”
“얼마 전까지 황궁에서 질리다시피 만났지요.”
“하하하! 공작께선 말씀을 재미나게 하십니다.”
어찌나 호탕한 웃음인지, 주변에 있던 귀족들과 놀이 공간에서 어울려 놀고 있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돌아볼 정도였다.
‘……뭐야, 저 인간은.’
누구길래 감히 우리 아빠 앞에서 저리 친한 척이래.
레오니에가 눈을 얇게 뜨며 정체불명의 노신사를 지켜봤다. 레오니에가 아는 한, 펠리오에게 친근하게 굴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카니스 리네 백작뿐이었다. 펠리오의 성질머리를 애들 장난처럼 받아넘길 줄 아는, 화사한 봄날의 들판 같은 존재.
“누구지?”
저런 사람이 소설에 나왔던가.
레오니에가 북부 산맥처럼 흰색과 회색이 잘 어울려진 노신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할아버님이에요.”
그 궁금증을 해결해 준 건, 레오니에가 나눠 준 사탕을 열심히 먹고 있던 어느 사내아이였다.
“네 할아버지야?”
통통한 볼살과 둥근 코를 자랑하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신사의 손주라고는 해도 크게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아이는 동글동글한데, 노신사는 도리어 매서운 인상이었다.
“네 할아버지가 누군데?”
“파르두스 후작이세요.”
레오니에가 입을 크게 벌렸다.
* * *
북부와 제국의 갈등은 깊다.
그 시작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 제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시작된다.
당시엔 북부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이미 터를 잡고 형성한 세력이 존재했고, 초기 황실은 그들을 회유하여 귀족 작위를 내렸다. 그렇게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황실에 오만하고 강인한 북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특히 황실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지닌 ‘맹수’들이라면 치를 떨었다. 마법과 검술도 아닌, 마치 맹수의 송곳니를 형상케 하는 기이한 이능을 지닌 그들은 황실의 정예 부대와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무인과 마법사들을 가볍게 짓밟고 농락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북부의 맹수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유는 전해지지 않으나, 검은 맹수들은 제국의 작위를 받아 명목상 그들의 아래로 들어갔다.
북부의 절대적 자치권과 두 가문 간의 혼인 금지.
이 두 가지 조건을 걸고서.
제국은 어쩔 수 없이 두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북부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검은 맹수들이 지닌 송곳니란 이능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는지라 패배만도 못한 승리를 손에 넣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 대립하다간 자칫 제국을 북부의 맹수들에게 빼앗길 판이었다.
대신 제국도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북부에 황실의 피가 흐르는 귀족 가문 하나를 받아들일 것.
“우리 손주가 올해 여덟 살입니다. 장남의 아들인데, 참 귀엽지요?”
그게 바로 펠리오 옆에서 자신의 손주를 자랑하느라 콧수염이 축 늘어진 파르두스 후작의 가문이었다.
“손주 사랑이 극진하군요.”
펠리오는 차를 머금으며 그러냐는 듯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래도 첫 손주라 더 눈이 갑니다.”
“그렇군요.”
파르두스 후작이 호탕한 웃음을 껄껄 짓고, 펠리오가 묵묵히 들으며 간단히 답하는 수준의 일방적인 대화만이 테이블 위에서 이어졌다. 그런데 어째선지 두 사람이 앉은 자리에만 고드름보다 차갑고 날 선 분위기가 머물렀다.
기껏 열심히 다과회를 준비한 케라타 자작 부인만이 홀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다과회 주최자의 애처로운 심정은 두 남자에게 먹히지 않았다.
“아빠.”
그때였다.
“레오.”
후작을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얼음 조각처럼 시리고 날카롭던 시선이 거짓말처럼 녹아 버렸다.
“나 이제 순록 구경하러 갈 거야.”
레오니에가 사탕 주머니를 내밀며 말했다. 어느새 문 근처에 모인 아이들이 자작 가문의 하녀,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 겉옷을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마찬가지로 레오니에도 겉옷을 든든히 챙겨 입은 상태였다.
“가져가서 친구들하고 먹어.”
“순록 보면서 못 먹을 것 같아.”
“왜?”
“그냥…….”
지금 레오니에의 머릿속에는 동글동글 뜨거운 무언가가 불건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는 알까?’
뜨겁고 둥근 달걀 덕에 저의 쥐뿔만 한 동심이 파사삭 말라 비틀어졌다는 것을.
동그란 사탕과 동그란 달걀.
“……어쨌건 안 먹을래.”
입맛이 확 떨어졌다고 중얼거리는 레오니에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쳐 있었다. 오늘 저녁에 크림에 졸인 닭고기 요리가 나온댔는데, 그것도 지금 못 먹을 판이었다.
“호오, 이 아이가…….”
그때, 파르두스 후작이 부녀 사이에 끼어들었다.
“소문의 보레오티 공작 영애로군요.”
“……소문의?”
“아, 죄송합니다. 공작께서 소문에 민감하셨지요.”
후작이 실수했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펠리오는 그를 무시하고 레오니에에게서 사탕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아이가 겉옷을 잘 입었는지 확인한 뒤에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안녕하십니까, 공작 영애.”
파르두스 후작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후작을 무례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한 박자 늦게 인사를 받았다.
“레오니에 보레오티입니다. 아빠 딸이에요.”
“하하하! 아주 귀여우신 분이군요. 이래서 공작이 그리 품에 안고 사시나 봅니다.”
“아닌데요? 나는 아빠 품보다 근육…….”
“너 순록 보러 안 가냐.”
근육 희롱 직전에 말을 자른 펠리오가 파보를 불렀다.
“가베르 경을 데려가라.”
“응.”
“조심히 다녀와라.”
“알았어.”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떡이며 파보의 손을 잡고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친구분들과 재미있게 노셨습니까?”
“으음, 나름? 많은 걸 배웠어요.”
“어떤 겁니까?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순록 코가 왜 빨간 줄 알아요?”
나만 당할 순 없지. 못된 심보가 발휘된 레오니에가 사악한 미소를 히죽이며 파보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아아아악!
곧 파보의 듬직한 덩치에 안 어울리는 간드러지고 화사한 비명이 터졌다. 한 마리의 새가 떠오르는 청아한 목소리였다. 레오니에를 비롯한 주변 아이들이 이상하다며 까르르 웃었다.
저놈은 뭐하는 거야, 펠리오의 마땅찮은 시선이 파보를 향하던 찰나였다.
“……쉴 틈이 없군요.”
손주가 사라지자마자 파르두스 후작이 웃음을 지웠다.
“피차일반일 텐데.”
펠리오 역시 보란 듯이 존대를 치워 버렸다. 후작이 뾰족 선 눈가를 축 내리며 서운하단 말투로 안 어울리는 투정을 부렸다. 펠리오는 후작에게 찻물을 끼얹고 싶은 제 손목을 다른 손으로 꾸욱 잡아 눌렀다.
“허허, 거 참 너무하십니다.”
누구 때문에 이리 바쁜데.
새하얀 눈으로 덮인 고요한 정원이 훤히 보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후작이 식은 차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곧 시중들던 하인이 와서 차를 따랐다.
“저도 이제 많이 늙었지요.”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걸 본 뒤에야 후작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북부의 겨울이 고단합니다. 일 좀 그만했으면 하는데.”
“그럼 다시 수도로 올라가든가.”
“그냥 저보고 벼락 맞아 죽으라고 기도를 하십시오.”
쯧쯧, 혀를 짧게 찬 파르두스 후작이 차를 마셨다.
“그 머저리가 수도 둥지에 떡하니 있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제가 여기 평생 머물 겁니다. 그편이 오히려 서로에게 좋을 겁니다. 특히 저희 가문은 입장이 좀 있지 않습니까.”
“후작이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나?”
“당연히 썼지요. 그러니 제가 오늘 여기에 우리 귀한 손주를 데리고 나온 게 아니겠습니까.”
“거슬리는 영감 같으니.”
“최고의 칭찬이군요. 이거 참, 보란 듯이 우리 공작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야 죽을 때 후회 없이 눈을 감을 것 같네요.”
그게 자신의 마지막 인생 목표라며 후작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펠리오는 대꾸도 없었다. 그저 후작이 바라보는 창밖 풍경을 똑같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으아아, 냄새!”
“코 따가워!”
커다란 순록 우리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코를 잡고 키득거렸다.
“저기 봐! 순록이야!”
“엄청 크다! 말보다 커!”
하지만 곧 케라타 자작이 직접 울타리 안으로 끌고 온 커다란 순록을 보자마자 쾨쾨하고 구릿한 동물 냄새 따위는 전부 잊어버린 듯 환호했다. 커다란 소리에도 순록은 자작의 손길에 따라 얌전히 기다렸다.
“이 아이 이름은 투투입니다.”
아이들을 울타리 밖에서 케라타 자작의 설명을 들었다.
“올해 두 살인 어린 순록입니다.”
“두 살인데 이렇게 커요?”
머리 꽁지를 짧게 묶은 아이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긴 순록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꼬마들을 향해 눈을 끔뻑거렸다. 짙은 파란색 눈동자가 새벽 동트기 직전의 하늘과 비슷했다.
“순록은 사람을 잘 따른답니다. 말처럼 타고 다닐 수도 있지요.”
케라타 자작의 설명에 아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플로무스가 순록에 대해 먼저 가르쳐 줬기 때문에 다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몇몇 아이들은 손까지 들며 자신들은 이런 것도 안다며 자랑했다.
“…….”
그러나 레오니에의 귀에는 설명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신경은 조금 전 만났던 파르두스 후작을 향해 있었다.
‘그 할아버지가 후작이구나.’
파르두스 후작은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또 다른 세상에서 읽었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주연까지는 아니어도 펠리오를 돕는 조력자로서 제법 커다란 인상을 남긴 노신사 조연이었다.
능글맞지만 정보력 좋은.
좀 짜증 나도 실력은 검증된.
그래서 레오니에는 파르두스 후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본래 파르두스 가문은 황실에서 북부와 제국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두 세력 간의 화합을 상징하는 뜻으로 보낸 황실의 방계 가문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뒤에서 북부 본 거주민들을 이간질하여 갈등을 일으켜, 황실이 북부를 완전히 집어삼킬 계획으로 보낸 첩자 같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파르두스 가문은 힘을 좋아해.’
그들이 처음 황실의 뜻에 따라 북부로 이주한 건, 황실이 무척 강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자를 알아보고 주인으로 삼는, 약육강식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북부의 검은 맹수는 황실보다 강했다.
파르두스는 인간을 넘어선 경이로운 힘에 매료되었다.
‘결론은 뒤돌아섰다는 거지.’
파르두스 가문은 검은 맹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황실을 배반한 그들은 아예 자진해서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정보통이 되어 이중 첩자 노릇을 오랫동안 업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루페 아저씨 친가고.’
파르두스 후작은 루페 리코스 자작의 친아버지였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