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빠와 딸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레오니에는 그대로 카라를 찾았다.
“카라 할머니! 카라 할머니!”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카라는 우다다다 달려오는 레오니에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억지로 엄한 눈빛을 지었다.
“뛰시면 안 됩니다. 다칠 수 있습니다.”
“아저씨는 나보고 코 깨져서 피난다고 하던데.”
“그리고 저희한테 말을 높이는 것도 아니 됩니다.”
“하지만 안 익숙한걸요.”
“주인님께는 잘하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주인님께 말을 높이셔야지요.”
조곤조곤 잔소리한 뒤에야 카라는 레오니에에게 저를 찾은 이유를 물었다. 몰아닥친 잔소리에 어안이벙벙하던 레오니에가 카라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비밀 이야기에요.”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들을까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그 모습에 카라와 사용인들의 얼굴이 포근하게 녹았다. 아가씨의 부탁대로 사용인들을 보낸 뒤, 카라는 레오니에와 함께 근처에 있던 사용인 휴게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지금 다들 일하는 중이라 쉬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혹시라도 추울까 레오니에의 몸에 담요를 두르며 물었다.
“아저씨가 이야기해 줬어요.”
“무엇을요?”
“나 낳아 준 분이요.”
“아, 그러시…… 네?”
카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눈가에 자리했던 주름이 다리미질이라도 한 것처럼 쫙 펼쳐졌고, 그걸 본 레오니에가 오오, 감탄했다.
“그걸 아가씨께 말씀하셨다고요?”
“네.”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그러던데, 날 낳아 준 사람이 아저씨 사촌 동생이래요.”
“그, 그걸 어떻게 확인하시던가요?”
“맹수의 송곳니요.”
조그마한 손가락이 동그랗고 검은 눈을 가리켰다.
“저도 가지고 있대요.”
“…….”
“나 낳아 준 사람도 가졌…….”
“…….”
“할머니, 울어요?”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란 레오니에가 벌떡 일어나 우왕좌왕 팔을 흔들었다.
카라는 둥근 안경을 벗어 장갑 낀 손으로 젖은 눈가를 훔쳤다. 흐릿했던 눈이 도로 깨끗해지자 저를 걱정하는 레오니에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저의 예상이 맞았군요.”
레오니에가 레지나의 딸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루페와 이야기한 게 아직 며칠이 채 안 되었다. 카라는 이렇게 빨리 진실을 알게 될 줄 몰랐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지니었던 묵직한 돌 하나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나 곧 그 자리에 다른 돌이 내려앉았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시구나.’
영지에서 무사히 도망은 쳤지만,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너무 이른 나이에 맞이하셨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을 빠르게 정리한 카라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에가 괜찮다며 씩씩하게 말했다. 사용인들을 총괄하고 집안을 지키던 강인한 집사의 눈물이 낯설긴 했지만, 그만큼 레지나와 사이가 좋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궁금하거든 카라한테 물어봐.’
펠리오는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터트린 것치고는 뒷마무리가 허술했다.
‘레지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어.’
세상에서 가장 귀찮았다는 수식어 역시 죽은 당사자의 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카라를 찾아, 일단 펠리오에게 들은 말을 고스란히 전했다. 카라가 슬퍼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저씨가 날 낳아 준 분을 싫어했어요?”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카라가 곧장 반박했다.
“주인님이 정말로 레지나 아가씨를 싫어하셨다면…….”
아니라 말하려던 카라가 한참 뒷말을 고민했다. 레오니에는 카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했다. 만약 펠리오가 레지나를 정말로 싫어했다면 그는 직접 제 손으로 저승행 마차에 사촌 누이를 태웠을 거다.
그냥 가족이니까 참을 수 있다, 할 정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그런 사람이지.’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펠리오는 수사자였다. 암사자만 사냥한다는 인식 때문에 수사자는 게으르고 무능하단 편견이 있지만, 실제로는 제 영역을 수시로 돌아다니며 지키고, 암사자들이 사냥할 때 남은 새끼들을 살피고, 사냥 중인 암사자들이 위기에 처하면 달려가 도와준다고.
작가는 그런 수사자를 펠리오에 빗대었다. 펠리오는 겉보기론 흉흉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나,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제 앞에서 뭐가 일어나거나 누군가가 알짱거려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적당히’를 지키지 않아 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면 가차 없었다.
“레지나 아가씨는…….”
어떻게든 부드러운 표현을 찾으려다 실패한 카라가 레지나에 대한 설명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하나 이번에도 표현할 말을 찾는 게 어려웠는지 꽤 고심했다.
그러기를 한참, 이내 각오라도 한 것처럼 카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치가 많이 없는 분이셨죠.”
“……네?”
“일개 사용인이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나 적어도 주인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착하고 좋은 분이셨죠. 많은 사람이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좋은 말로는 모든 사람을 두루 살피고, 나쁜 말로는 눈치가 너무 없어 낄 때 빠질 때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부분은 레지나를 전자로 평가했지만, 펠리오는 명백한 후자였다.
“사실 레지나 아가씨께서 상당히 독특한 분이셨죠. 아무리 방계라고 해도 엄연히 보레오티 가문의 피가 흐르시는 분인데, 항상 웃으시며 모두에게 상냥하시고, 이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분이셨습니다.”
“이상?”
“사랑과 평화를 좋아하셨죠.”
카라의 입가에 맺힌, 그리움이 담긴 미소가 신빙성을 더했다.
“어딘가 멍한 구석도 있으셨고요.”
그게 웃으면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레오니에가 몰래 인상을 썼다.
“레지나 아가씨께서는 주인님을 많이 좋아하셨지요. 두 분 다 형제가 없었던지라, 친해지고 싶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같이 놀자고 곁을 맴도셨지요. 그분은 악의 없는 선한 마음으로 하셨지만…….”
또 말을 아끼는 카라를 보며, 레오니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들을 필요가 없었다. 펠리오와 레지나가 상극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것도 아저씨한테만 상극이었네.’
펠리오는 제 앞에서 눈치 없이 나대고 설치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런데 하필 같은 지붕 아래 사는 사촌 누이가 그러했으니,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거다.
‘도대체 얼마나 눈치가 없었으면…….’
카라가 대놓고 저리 말할 정도니,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을 거다. 거기다 이상까지 추구했단다.
레오니에가 또 다른 세상에서 경험해 본바, 눈치 없는 이상주의자만큼 골 아픈 것도 없다. 현실 파악 못 하고 그저 저 좋은 것만 나불거리며 민폐는 주변에 은근히 많이 끼치고, 그들과 엮이는 순간 화병 대기 명단에 오른다.
‘작가가 이걸 설정했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소설에 레지나가 나오지 않은 건, 펠리오가 그냥 레지나에게 그만큼 관심이 없어 말도 꺼내지 않은 탓이라는 건 알았다. 그의 인생에서 사촌 누이란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레지나가 조금 불쌍했다.
“혹시 아가씨는…….”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춘 카라가 레오니에와 눈을 마주했다. 깊은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레지나 아가씨가 보고 싶으신가요?”
아니, 전혀요.
“…….”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선뜻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레지나에 대한 레오니에의 호기심은 알랑방귀보다 가벼웠다. 기억에도 없는 낳아 준 여자에게 그리움이 생길 리도 만무했다. 그 증거로 레오니에는 한 번도 레지나를 ‘엄마’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아저씨랑 할머니랑 멜레스 언니랑 하녀 언니들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레오니에는 카라를 꼭 껴안았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괜히 물었다, 싶었다.
물어보느니만 못한 출생의 비밀은 실망만 잔뜩 안겨 줬다.
* * *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는 몇 주째 계속됐다.
카라를 찾아 레지나에 관해 물어본 이후, 레오니에는 단 한 번도 저를 낳아 준 친부모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사자가 이러니 그에 관한 주제는 자연스레 도태되어 갔다.
“정말 그거로 괜찮나?”
결국엔 펠리오가 먼저 물어봤다.
벽난로 앞에서 애독서 ‘인생 다 부질없다’를 읽고 있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휙 돌렸다. 기다란 소파에 나른하게 누운 펠리오는 기다란 팔을 뻗어 아이의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렸다.
레오니에가 보레오티 저택에 온 지 어언 한 달.
비쩍 말랐던 아이의 팔다리는 튼실해졌고, 냄새나던 더벅머리도 꾸준한 관리 덕에 꽃향기를 내뿜는 부드러운 머릿결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검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고, 곧 있으면 예쁘게 땋을 수도 있겠다며 하녀들이 레오니에보다 더 좋아했다.
아이가 건강을 회복해 다행이었다. 펠리오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진심으로 한다는 게 놀라웠다.
“그럼 뭐, 기억에도 없는 사람 붙잡고 울까?”
다시 책에 눈을 돌린 레오니에가 말했다.
사실, 레오니에는 저를 낳아 줬다는 친부모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 보려고 노력했다. 천하의 보레오티가 어쩌다 고아원에 가게 된 건지도 솔직히 궁금했다.
‘그럼 나 낳아 준 사람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물었더니, 정말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도망을 치셨답니다.’
레지나에겐 연인이 있었는데,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방랑 기사였다고 한다. 당시 보레오티 가주였던 펠리오의 부친은 당연히 두 사람 사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씐 레지나는 집안의 반대도 무릅쓰고 연인과 야반도주했다고.
레오니에는 거기서부터 친부모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어 버렸다. 레지나도 레지나였지만, 함께 도망쳤다는 친부란 인간도 정말 기가 막혔다.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
코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수상쩍었다. 딱 봐도 어떤 쓰레기가 있어 보이는 척하려고 내뱉은 거짓말 신분이 뻔한데, 레지나는 거기에 속아 함께 운명의 사랑이니 뭐니 하며 도망쳤단다.
‘그냥 끼리끼리 노는 거였어.’
카라는 그런 레오니에의 반응에 섭섭한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레오니에는 괜한 사실을 알았다며 며칠 내내 절 낳아 준 사람들에게 실망했다. 한편으론 이딴 출생의 비밀을 질질 끌지 않고 단번에 빠르게 알아내 정리할 수 있어서 나름 다행이기도 했다.
“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아. 앞만 볼뿐이지.”
“그런 점에서 넌 레지나보다 날 많이 닮았어.”
실제로 레오니에는 얼굴에 살이 붙기 시작하면서 펠리오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었다.
“다행이다. 눈치는 있단 뜻이네.”
대답하는 아이의 목소리엔 정말로 친부모를 향한 그리움이나 미련 따윈 없었다. 대신 그 이야기는 제발 그만 끝내자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 코니에 선생님이랑 친구들 보고 싶어.”
오히려 레오니에는 죽은 모친보다 고아원에서 같이 지냈다던 코니에와 다른 친구들을 걱정했다. 펠리오는 그들 모두 보레오티 영지에 설치된 고아원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날이 풀리면 레오니에를 고아원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아저씨 안 바빠?”
레오니에는 소파에 누워 게으름을 부리는 펠리오를 빤히 바라봤다.
“아저씨 요즘 일 안 하던데.”
바가지를 긁는 아내처럼 레오니에가 수상쩍은 시선을 한 채 물었다.
“너는 간식 먹을 때 흘리지나 마라.”
펠리오는 얼마나 흘리면서 먹으면 앞치마를 두른 거냐며 레오니에의 애먼 옷차림을 지적했다. 오늘 보레오티 공작 영애께선 도톰한 흰색 원피스에 까만 스타킹, 레이스가 촘촘히 박음질 된 앞치마를 입었다.
펠리오의 놀림에 레오니에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건 그냥 옷이야! 앞치마 원피스라는 거야!”
기가 막힌 레오니에가 앞치마를 쭉 펼쳐 보였다. 애독서 ‘인생 다 부질없다’는 바닥에 자연히 내팽개쳤다.
“아까도 간식 먹을 때마다 흘리더니. 침도 흘리고.”
“딱 한 번 그랬거든?”
레오니에는 억울했다. 영양가 높은 식사를 잘 챙겨 먹은 탓인지, 레오니에는 아래쪽 앞니 하나가 흔들리더니 며칠 전에 툭 빠졌다. 이가 빠진 자리가 신기해서 혀로 툭툭 건드리다 보니 그런 유치한 실수를 하게 된 것뿐이었다.
“난 이 빠져도 안 흘리고 먹었어.”
“아저씨는 날 꼭 이겨 먹고 싶어?”
“이런 날 보고 잘 배우라는 깊은 뜻이다.”
“내가 뭘 보고 배워!”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친 뒤로,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일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요즘엔 아예 소파에 드러누워 레오니에를 놀리거나 하릴없이 빈둥거릴 때가 태반이었다.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펠리오를 노려봤다. 그나마 펠리오에게서 배울 점을 굳이 찾자면, 돈 많고 신분 좋고 인물 출중하고 능력 좋아야 저런 성격 다 버린 인간도 주인님 소리 들으며 떠받들어진다는 차디찬 현실이었다.
“으휴!”
속에서 열불이 난 레오니에가 떨어진 책을 주워 다시 독서에 집중하던 찰나였다.
“어차피 곧 있으면 난 집에 없어.”
“응? 왜?”
“마물이 나댈 때다.”
“‘나댄다’는 표현은 좀 아니지 않아?”
그런 거친 말은 자식 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레오니에가 말했다.
“아저씨는 내가 보통 애가 아닌 걸 다행인 줄로 알아.”
“너도 내가 보통 아빠가 아닌 걸 다행인 줄로 알아.”
서로 양보가 없는 짧은 투덕거림을 뒤로하고, 펠리오가 좀 전에 하던 말을 이어 했다.
“보레오티 영지는 마물의 소굴이라고 불릴 만큼 마물이 많아.”
그래서 눈보라가 그치면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 사냥을 나서 개체 수를 줄인다고 한다.
두 부녀가 동시에 창밖을 보았다. 붉고 탐스러운 융단으로 만든 묵직한 커튼이 달린 창문은 몇 주째 끊이지 않는 눈보라로 희뿌옇게 흐렸다. 이마저도 눈보라가 처음 치던 날과 비교하면 상당히 얌전한 축이었다.
“얼마나 걸려?”
레오니에가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물어보는 말투에 걱정이 가득했다.
“길어도 한 달, 짧으면 이 주 내외. 마물 사냥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마물을 소탕하는 중에 날이 개면 빨리 끝나지만, 중간에 바람이라도 크게 불면 좀 걸리지. 마물은 인간보다 신체적으로 발달했으니까.”
길게 끌수록 인간이 불리하다는 말에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나중에 너도 데려갈 거다.”
“거길? 왜?”
“네가 내 후계자니까.”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펠리오는 뭘 놀라냐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난 애초에 널 그럴 생각으로 데려온 건데?”
“이 아저씨가 인생 진짜 막사네…….”
자기 조카인 줄도 모르고 데려온 고아에게 공작 가문을 물려주려 했다니, 레오니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저런 무계획적인 인간이 제 보호자란 사실이 새삼 서글프고 걱정스러웠다.
“……아저씨 결혼 안 할 거야?”
“지금은 그딴 것보다 육아가 재미있네.”
“역시 그때 루페 아저씨랑…….”
레오니에가 히죽거리며 양손을 막 비비적거렸다.
“그 이야기 또 꺼내면 간식 다 없애버린다.”
난잡하게 움직이던 손이 서둘러 입을 합, 가렸다. 펠리오가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저런데도 나한테 잘해 준단 말이지.’
얼굴은 잘생겨도 풍기는 분위기가 흉흉, 인성은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는 전형적인 소설 속 주인공. 하지만 제 딸에게만큼은 상냥한 아빠였다.
“아저씨.”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 레오니에가 소파에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러다 나중에 변덕 부려서 나 내쫓는 거 아니지?”
“……넌 날 뭐로 보는 거냐.”
감았던 눈을 뜬 펠리오가 심히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와락 썼다. 그러다 표정을 갈무리하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혹여라도 아이가 놀랄까 싶어서. 다행히 배짱 두둑한 아기 맹수는 태연했다.
“레오니에.”
길고 굵직한 손가락이 아이의 작은 콧잔등을 툭 건드렸다.
“넌 내 딸이다.”
거짓이라곤 전혀 없는 진솔한 검은 눈동자가 레오니에를 응시했다.
“그러니 난 널 마지막까지 책임질 거다.”
다시는 내쫓는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다. 혼을 내는 말투 때문인지, 레오니에는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다. 이 감정은 너무 기쁜 나머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부끄러움에 가까웠다. 전신을 감싸는 따스하고 오만한 안도감이 아직 어색했다.
이제야 겨우 ‘레오니에 보레오티’로 살아가는 레오니에는 여전히 펠리오를 아빠라 부르는 것이 낯설기만 한데, 펠리오는 저를 항상 딸이라고 부르고 그만큼 보살펴 주었다. 충동적으로 맺어진 부녀지간이지만,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확실하게 마주하고 받아들였다.
“……흥.”
괜히 얼굴 마주 보기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휙 고개를 돌렸다.
“딸 놀리는 아빠는 싫어.”
그러고는 새초롬한 투정과 함께 다시 책을 펼쳤다. 펠리오는 아이의 붉어진 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 *
마물 사냥 이야기가 나온 김에, 펠리오는 아예 레오니에를 기사단에 데려다 소개하기로 했다. 저택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나 얼추 적응도 되었으니, 슬슬 아이를 사람들에게 알려 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눈이 저렇게 내리는데?”
지금 밖에 나가면 얼어 죽는다며 레오니에가 엄살을 부렸다.
“양심이 있으면 좀 움직여라.”
펠리오가 벽난로 앞에만 계속 머무르는 딸에게 잔소리했다.
“언제는 나보고 살찌라며. 그래서 안 움직이는 거야.”
“너는 참 핑계가 좋아.”
“아저씨도 소파에서 만날 누워 있었으면서.”
누가 보면 등이랑 소파랑 꿰맨 줄 알았겠다며 따박따박 대들었다. 펠리오는 앙앙 울부짖는 아기 맹수를 가볍게 무시하며 근처에 있던 망토를 어깨에 걸쳐 주었다. 레오니에는 그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두 사람은 실내 훈련장과 연결된 서쪽 회랑으로 향했다.
“여기 처음 와 봐.”
유서 깊은 저택은 한낱 복도마저도 웅장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값비싼 장식이나 화려한 치장은 많이 없지만, 벽을 지탱하는 기둥이나 바닥에 깔린 대리석과 벽에 걸린 명화 몇 점이 보레오티 공작가의 흔들림 없는 위엄을 증명했다. 이곳은 꾸미거나 치장하지 않아도 위압감이 넘치는 곳이라는 듯이.
‘내가 보레오티라…….’
레오니에는 괜히 제 조막만 한 손바닥을 꼼지락거렸다.
그때, 마침 일하던 사용인들이 주인님 부녀를 발견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레오니에는 평소처럼 존대하며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펠리오가 사용인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용인들이 냅다 고개를 숙였다.
“사용인들한테 존대를 쓰네.”
“어? 응.”
“나한테는 반말하고.”
그래서 뭐, 레오니에가 뭐 어쩌라는 듯이 눈썹을 위로 꿈틀거렸다.
“존대해 줘? 해 줄까요?”
“징그러우니 됐다. 어쨌건 사용인들한테 존대하는 버릇이나 고쳐.”
“서두르지 마.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야.”
레오니에가 복도에 걸린 명화를 보며 대충 말했다. 딱히 고칠 생각이 없단 뜻이었다.
“아니.”
그 뜻을 헤아린 펠리오가 비웃었다.
“돈이 다 해결해 줄 거다.”
딴청 피우던 레오니에와 고개를 푹 숙인 사용인들이 섬뜩한 예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나 그렇게 줏대 없는 여자 아닌데.”
“내가 네 줏대를 본 적이 없다.”
“내 줏대는 귀해서 아무한테나 안 보여.”
“그럼 지금 한번 보지.”
나른하게 지은 미소는 자신만만했다. 가지런한 이를 슬쩍 드러내며 비스듬히 웃는 남자는 비열하고 불량한 느낌과 함께 아찔한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오늘부로.”
그러나 레오니에는 오싹함을 가장 먼저 느꼈다.
“사용인 전원 해고다.”
느닷없는 청천벽력에 사용인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레오니에가 빽 소리 지르며 눈, 코, 입, 얼굴에 난 구멍이란 구멍을 전부 동그랗게 벌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전한 앞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일개 사용인 주제에 감히 보레오티에게 존대를 들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펠리오가 냉정히 말했다. 오히려 이게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할 뿐이었다.
“가주로서, 집안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꼴은 못 본다.”
“아저씨!”
“존대를 들은 저 귀들을 베어도 시원찮은데.”
살벌한 예시에 죄 없는 사용인들만 안절부절못했다. 이 엄동설한에 내쫓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못해 바로 죽음이었다.
“그러니 내 넓은 아량을 베풀어, 귀를 자르는 벌 대신에 해고 통보를 내리지. 지금 당장 사용인 전원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홀 앞으로 모여…….”
“아, 알았어! 알았다고!”
당장 저들을 내쫓을 것 같은 펠리오의 행동에 결국 레오니에가 꼬리를 내렸다.
“앞으로 존대 안 할게!”
패배를 인정한 레오니에가 씩씩거렸다.
“네 줏대는 생각보다 싸네.”
펠리오가 피식 웃었다.
“사용인 전원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그러니 싸게 먹혔지.”
“뭐가 싸! 비싸지!”
보레오티 저택에서 근무하는 사용인 전원의 봉급이 뒷집 개 이름인 줄 아나.
레오니에는 앞니가 빠져 구멍 난 이를 드러내며 펠리오를 노려봤다. 그는 일곱 살짜리를 협박해 놓고는 아주 당당했다. 곧 검고 동그란 눈동자에 황금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성질 뻗친 새끼 맹수가 송곳니를 드러낸 것이다.
그 잠깐의 송곳니에도 사용인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예상 밖의 소득에 펠리오가 입꼬리를 느슨히 풀었다.
“봐라.”
존대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고, 아이의 송곳니 연습도 덩달아 해냈으니.
“돈으로 해결 못 하는 건 없어.”
* * *
작은 소동을 뒤로하고 도착한 기사 훈련장은 크고 넓은 원형 건축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추운 날씨 탓에 레오니에는 아직 보레오티 공작저를 전부 둘러보지 못했지만, 아마 이곳이 저택 본채 다음으로 가장 클 것 같았다. 얼마나 넓은지, 멀찍이서 훈련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점처럼 조그맣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우렁찬 기합 소리는 귀를 찢을 것처럼 생생했다.
“저길 봐라.”
어느새 레오니에를 품에 안은 펠리오가 건물 지붕을 가리켰다.
“와아!”
어마어마한 천장 높이에 레오니에의 고개도 덩달아 뒤로 넘어갔다. 어림잡아도 건물 5층은 거뜬히 넘어 보였다. 천장에는 어떻게 새겼는지 몰라도 보레오티 가문의 상징인 검은 사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천장에 저건 뭐야?”
“예전 선조 중 한 명이 새겼다고 전해진다.”
“속 시끄럽게.”
저런 걸 보면 꿈자리가 사납다며 레오니에가 혀를 내둘렀다. 펠리오는 그런가, 싶어 천장을 한 번 더 봤다. 수백 번을 올려다봤을 천장에 새겨진 검은 사자의 입 속 송곳니가 사나웠다.
“근데 왜 저렇게 높은 거야?”
“오러가 방출될 때 지붕이 무너지면 큰일이니까.”
펠리오는 자신이 단장으로 있는 글라디고 기사단에 무기를 통해 오러를 방출할 수 있는 기사가 무려 세 명이나 있다고 말해 줬다. 한 기사단에 오러 방출이 가능한 소드 마스터가 한 명만 있어도 엄청난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오러는 뭐야?”
“혹독한 체력 단련을 통해 변형된 신체 내 기운을 말한다.”
마법사들이 쓰는 마나는 선천적이고 정신적인 재능이라면, 오러는 그 반대로 후천적이고 육체적인 재능이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재능을 타고나야 하지만.”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솔직히 힘들다고 펠리오가 냉정히 말했다.
“아저씨도 오러 쓸 줄 알아?”
“그보다 더 강한 걸 타고났는데 뭐하러.”
“맹수의 송곳니?”
펠리오가 비스듬히 올라간 얇은 입꼬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저씨는 역시 얄미워.”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까만 머리칼 한 가닥을 톡, 뽑았다. 펠리오는 아파하는 티를 내보이거나 화를 내는 대신, 레오니에의 손에 들린 제 머리칼을 후, 불어 치웠다.
“너도 나중에 송곳니를 쓰는 방법을 배워야지.”
“배운다고 잘할 수 있을까?”
“그건 이미 네 속에 잠재되어 있어.”
피를 통해 타고나는 거니까.
커다란 손가락이 아이의 좁은 미간을 툭 건드렸다. 고개가 뒤로 가볍게 밀린 레오니에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괜히 벅벅 만졌다.
“네가 송곳니를 제대로 꺼내게 될 때, 더 자세히 알려 주마.”
“송곳니 꺼내면 아저씨 먼저 물어야지.”
“그 전에 내가 먼저 물걸?”
“내가 먼저 아저씨 가슴 물 거야!”
펠리오가 안고 있던 레오니에를 은근슬쩍 가슴에서 떨어트렸다.
“넌 왜 그렇게 가슴에 환장하는 거냐.”
“아니야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다며 레오니에가 억울해했다. 그리곤 자신을 변태 취급하지 말라며 정색했다.
‘자기가 변태라는 인식은 했군.’
그럼 지금껏 내 가슴을 심상찮게 쳐다보고 은근히 만지며 히죽이던 넌 뭐였던 건지. 펠리오가 그런 심정을 담은 착잡한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아저씨, 잘 들어.”
레오니에의 입술이 심각하게 들썩였다.
“난 우람 불끈한 근육이 좋아!”
우람 불끈한 근육이 좋아!
근육이 좋아!
좋아!
힘찬 목소리가 훈련장에 메아리쳤다.
“……어?”
한참 기사들의 훈련을 봐주고 있던 글라디고 기사단 부단장 모노가 동작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우람 불끈한 근육이 좋다는 개인 취향을 아주 우람 불끈하게 외치는 환청이 들려서였다.
“뭐가 좋다고?”
“근육이 좋다는데?”
“우람 불끈이 뭐야?”
“어디서 난 소리야.”
“훈련장에 변태가 들어왔나?”
모노가 들은 건 환청이 아니었다. 그 말고도 훈련 중이던 글라디고 기사단 전원이 동작을 멈추었다. 시선은 자연히 조금 전 엄청난 취향 공개가 메아리친 곳으로 향했다. 익숙하고 커다란 형체 하나와 낯설고 쪼그만 형체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곧 두 형체가 기사단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하고 커다란 형체는 기사단 단장이자 보레오티 공작인 펠리오였고, 낯설고 쪼그만 형체는 근육이 좋다는 제 취향을 당당하게 외친 레오니에였다.
“주군.”
기사들의 훈련을 봐주던 모노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펠리오는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레오니에는 펠리오에게 안겨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모노를 빤히 바라봤다.
“……모노는 결혼했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눈앞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 말의 의도가 뭐야?”
레오니에가 눈을 샐쭉하게 흘겼다.
“너의 근육이 될 수 없단 뜻이지.”
레오니에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솟아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오늘 이 아저씨가 내 허파를 뒤집으려고 작정을 하셨나.”
“아직 덜 뒤집은 것 같네. 숨은 잘 쉬는 걸 보니.”
“어휴, 유치해라! 아저씨는 나이를 아래로 잡쉈나 봐.”
“너는 그렇게도 못 먹었나 보네.”
아빠와 딸의 대화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유치하고 치열했다. 둘 다 서로 안 지려고 말꼬리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졌고, 누구 하나 그 대화에 끼어들 용기를 지니지 못했다. 레오니에를 일부러 놀리며 괴롭히는 펠리오의 얼굴에 진심으로 즐겁다는 감정이 선명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낯선 주군의 모습에 기사들이 동요했다.
“……전원 집합!”
그 속에서 먼저 정신 차린 모노가 기사들을 모았다. 그제야 부녀의 유치한 말다툼도 끝났다.
커다란 호령 아래 훈련 중이던 글라디고 기사단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얼추 보아도 오십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었다. 기사들의 시중을 드는 시동과 수습 기사까지 합치면 얼추 그 두 배는 넘었다.
“멜레스 언니!”
그 속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레오니에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척하니, 멜레스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의 일주일만의 만남이었다.
‘최근에 아저씨가 계속 내 옆에 있었으니까.’
자연히 호위 기사로 임명받은 멜레스와 다른 기사들이 옆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 외에도 아는 얼굴이 보이는 족족, 레오니에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다들 수고가 많다.”
펠리오가 방정 떠는 레오니에의 손을 잡아 내렸다.
“마물 사냥을 나서기 전에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게 좋겠지. 제군, 내 딸 레오니에다. 레오니에, 저들이 나와 함께 북부를 수호하는 글라디고 기사단이다.”
턱수염이 꺼끌꺼끌하게 난 커다란 사내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글라디고 기사단 부단장, 모노 케레스가 글라디고 기사단을 대표하여 인사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레오니에 보레오티입니다.”
아까 사용인들에게 존대하지 말라고 한소리 들은 뒤라, 레오니에는 펠리오를 힐끔 살폈다. 내려다보는 펠리오의 시선이 둥글게 휘었다. 레오니에의 걱정과는 달리, 기사는 엄연히 준 귀족에 버금가는 신분이었기에 예의를 지키는 게 정답이었다. 펠리오가 잘했다는 듯 머리도 쓰다듬었다.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기사단을 좋아하는구나.’
조금 전 기사단을 소개하는 펠리오의 말투에서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는 평소 주변에 무심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지만, 저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름 살뜰하게 챙겼다. 글라디고 기사단이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준비는 잘 되어 가나.”
인사를 마치고, 펠리오는 모노와 함께 마물 사냥을 위한 출정 준비를 물었다.
“올해 마물들이 번식기 때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주군께서 영지에 계시지 않는 동안 마물 새끼들이 내려와 몇몇 작은 마을을 덮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아마 작년보다 사냥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새끼를 친 마물은 예민하고 난폭하지.”
찌푸린 펠리오의 눈가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품에 안은 레오니에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제 저도 아빠라고, 새끼 마물 이야기에 딸을 보듬었다.
펠리오와 모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레오니에는 제게 쏟아지는 기사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하나하나 응대해 줬다. 정확히는 기사들의 근육을 노려봤다. 마침 훈련 중이라고 다들 검소한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땀에 젖은 훈련복 위로 근육들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거기다 몇몇 남 기사들이 덥다고 상의를 훌러덩 벗은 채였다.
아기 맹수의 까만 눈동자가 얼마나 맹렬한지 도리어 기사들이 움찔해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아저씨, 나 내려 줘.”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마침 저를 사이에 둔 펠리오와 모노의 이야기가 점점 진지해지던 찰나였다.
펠리오는 내려 주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멜레스 옆에 붙어 있어라.”
“왜?”
“그래야 네가 기사들 성희롱을 덜 할 거 아냐.”
기세 좋던 레오니에가 일순 멈칫했다. 돌아선 아이의 얼굴은 삐친 것처럼 뾰로통했다.
“아저씨는 내가 무슨 변태인 줄 알아?”
“그럼 아까 왜 웃은 건데?”
“기사 언니 오빠들이랑 놀 생각에.”
“쌍방 합의된 놀이어야 한다.”
“아, 좀!”
됐으니 어서 내려달라고 레오니에가 버둥거렸다. 그제야 펠리오가 바닥에 아이를 내려놨고, 레오니에는 눈을 가볍게 흘긴 뒤에야 잽싸게 기사들 속으로 들어갔다. 사라졌던 레오니에는 곧 멜레스의 품에 안겨 위로 쑥 모습을 나타냈다.
“……많이 건강해지셨군요.”
모노는 레오니에를 몇 번 본 적 있었다. 그러나 늘 멀리서 스치며 본 게 다였고, 그때마다 항상 레오니에의 마른 몸에 안쓰러움을 느꼈다. 하나 오늘 다시 본 아이는 건강함이 물씬 풍겼다. 심지어 펠리오와 말장난까지 나눌 정도로 배짱이 넘치고 지지 않는 씩씩함을 보였다. 어느새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의 얼굴은 환하다 못해 눈부셨다.
“잘 적응하셔서 다행입니다.”
“원래부터 자기 집이었으니까.”
모노가 조용히 웃었다. 그는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적응력과 배짱을 칭찬한 거라 여겼다.
하지만 펠리오의 말은 말 그대로였다.
* * *
레오니에는 멜레스 품에 안긴 채 기사들과 다시 인사를 주고받았다.
“멜레스 언니! 잘 지냈어요?”
“덕분에요. 아가씨께선 몰라보게 예뻐지셨습니다.”
빈말인 걸 알아도 기분 좋은 레오니에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수줍어했다. 그러다 손가락 사이로 빼꼼 눈을 내비쳤다.
“내가 방해한 거 아니죠?”
“설마요. 오셔서 얼마나 반가운데요.”
“전혀 아닙니다!”
“아가씨를 뵈어 영광인걸요.”
기사들은 그런 생각 마시라며 재빨리 반박했다. 가뜩이나 마물 사냥 출정 준비에다 밖에는 폭설까지 몰아닥치니 이래저래 답답함과 긴장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타난 레오니에는 무척 반가운 손님이었다. 삭막한 저택에 훈훈한 온기를 가지고 온 공작 영애는 기사들에게도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그나저나 아까 엄청난 말씀을 하셨던데.”
멜레스와 함께 레오니에를 호위하는 기사로 선발된 파보가 씩 웃었다. 자줏빛 머리를 한껏 뒤로 넘긴 그는 기사단 중 유일하게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남부에서 올라왔다는 파보가 길게 빠진 눈꼬리를 가늘게 휘었다. 사람들은 그를 평소 공작새처럼 화려하다고 말하지만, 실상 레오니에 눈에는 성격 좋은 개처럼 보였다.
“아가씨께선 근육이 좋으십니까?”
“네! 너무 좋아요!”
파보의 물음에 레오니에가 즉답했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육체미란 곧 근육이지요!”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파보를 비롯해 몸 좀 좋다는 기사들이 너도나도 근육을 과시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우, 뭐야.”
“징글징글하다, 진짜.”
“아가씨에게 뭘 보이는 거야!”
멜레스를 비롯한 몇몇이 매일 질리도록 보는 동료의 몸뚱어리에 야유를 보냈다.
“우와아아아!”
그러나 레오니에는 두 주먹 꽉 쥐며 열렬히 환호했다. 열정적인 반응에 훈련한다고 상의를 벗었던 기사 한 명이 가슴 근육을 번갈아 꿈틀거리자, 레오니에가 자지러지는 함성을 내뱉었다.
“아가씨, 침 흘리셨어요.”
멜레스는 제 품에 안겨 환장하는 레오니에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톡톡 닦아 주었다.
“침 아니에요. 감동의 눈물이에요.”
“그럼 눈에서 흐르는 물은 뭔가요?”
“소금물이요. 내 눈엔 바다가 있거든요.”
말 안 듣는 놈들 눈에는 피바다가 있고요.
잔뜩 흥분한 레오니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마구 지껄였다. 그저 제 눈 앞에 펼쳐진 육체미 가득한 천국에 얼이 나가 정신이 없었다.
기사들이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대놓고 티는 안 냈지만, 기사들은 레오니에가 고아원에서 입양되었단 사실과 아이의 정체가 펠리오의 사생아란 헛소문, 두 가지를 믿고 있었다. 그러니 레오니에가 처음 공작저에 왔을 때 얼마나 몸 상태가 안 좋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공작을 수행했던 기사들은 직접 목격까지 했으니 다들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건강해진 아이의 해맑은 웃음이 무척 기뻤다.
‘이걸 해맑은 웃음이라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근육에 흥분하는 일곱 살은 없을 거라며 멜레스가 쓰게 웃었다. 물론 그 모습이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다 용서가 되었다. 다른 기사들도 자신들이 노력한 증거를 칭찬받으니 좋아하는 모양이었고.
“…….”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살폈다.
기사 중진들과 모여 마물 사냥에 대해 의논하던 그는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딸의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낯선 어른들과 잘 지내는 걸 보니 저와 달리 사회성만큼은 타고난 모양이었다. 애당초 저를 보고 울지 않는 배짱마저 지녔으니 말은 다했다.
“아가씨께서 계시니 기사들도 즐거워하는군요.”
펠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아이가 있으면 분위기가 살지요.”
중진 중 한 명인 중년의 기사가 미소지었다. 회색빛 머리를 지닌 펠리오의 어린 시절 검술 스승인 유벤이었다. 글라디고 기사단에 셋 있다는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중진들도 따스한 눈빛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가문의 적에 이름은 올리셨나요?”
하실 거면 빨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며 유벤이 물었다.
“이미 올라가 있어.”
펠리오의 빠른 일 처리에 다들 놀랐지만,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참 심각한 눈으로 레오니에를 바라보던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자식들도 저러나?”
펠리오가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물었다. 마침 모여 있는 중진 중 절반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둔 인생 선배들이었다. 기사들이 한 번 더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저러나’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애가 근육을 너무 밝혀.”
펠리오의 진지한 고민에 유벤을 비롯한 중진들이 작게 웃었다.
“원래 저 나이 때 아이들은 어른들 눈으로 볼 땐 이상한 걸 좋아합니다. 제 자식 놈들도 아가씨만 할 적에 요상한 것에 정신이 팔렸지요. 뭐였더라, 과자 포장지였나.”
“제 딸아이는 보물 상자에 돌멩이를 가득 모았습니다.”
“그건 귀여운 축이지. 우리 장남은 벌레 시체를…….”
자식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너도나도 한마디씩 내뱉으며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런 주제나 이야기에 지금껏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펠리오는 생애 처음으로 그들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 깊이 공감까지 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주군께서도 이제 아버지가 되셨는데…….”
그 외의 육아 고민은 없으시냐며, 턱 끝이 멋들어지게 갈라진 칼라드란 기사가 물었다. 모노와 유벤, 칼라드를 비롯하여 모인 이들은 모두 펠리오가 어릴 적부터 보레오티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이라, 다른 사람들보다 펠리오를 조금 더 편하게 대했다.
마침 고민이 있던 펠리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애는 말이지.”
그리고 말했다.
“너무 똑똑해.”
펠리오의 팔불출 짓은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검과 함께 지낸 북부의 거친 기사들을 일순 얼빠진 얼굴로 만들었다.
“그대들 자식들은 일곱 살 때 자금 횡령 같은 단어를 썼나? 거기다 이미 내가 사 준 동화책은 다 읽었다는군. 제 방에 둔 것만 50권이 넘는데, 그걸 한 달도 안 되어서 다 읽는 게 말이 되나?”
지금까지 자식들 때문에 속 터지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건만, 느닷없는 자식 칭찬에 모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펠리오는 진심이었다. 고민을 털어놓는 표정이 마물을 상대할 때보다 심각했다.
“걸핏하면 나만 보고 우는 꼬맹이들과 달라. 우리 딸은 배짱도 크고 겁도 없어서 도리어 나한테 먼저 농담도 하고 시비를 걸지. 그러면서 내가 좀 피곤할 것 같으면 쿠키 같은 것도 구워서 선물하더군.”
그리곤 얼마 전에 선물 받은 생강 쿠키 이야기를 꺼냈다.
“애가 아직 손재주가 없어서 모양이 엉성했어. 처음 만들어 봤다니 어쩔 수 없겠지. 먹어 봤는데 적당히 바삭하고 향도 좋은 것이 피로가 싹 풀리더군. 아무래도 재능이 넘쳐나는 것 같다. 뭘 시켜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 예…….”
“그러셨습니까…….”
묵묵히 들어주던 기사들의 얼굴이 메말라갔다. 대놓고 말만 안 했지, 이미 그들의 눈에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황망함이 어려 있었다. 원래 부모란, 남의 집 부모가 자기 자식 자랑할 때가 은근히 짜증 나는 법이었다.
그러나 펠리오의 고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살이 찌기 시작하니 얼굴도 날 닮아 꽃을 피우더군. 가뜩이나 보레오티 가문의 영애라는 것만으로도 남들한테 아양 받고 떠받들어질 인생일 텐데, 그 얼굴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발밑에 두려는 건지.”
한 번 터진 딸 바보의 고민은 지금 창밖에 보이는 폭설과 똑같았다.
멈출 기미가 없었다.
나이 지긋한 중진들이 철없는 아이처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애꿎은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지겨운 자식 자랑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괜히 물었다고 후회하던 때였다.
“와아아!”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레오니에가 손뼉을 짝짝 치며 커다란 함성을 터트렸다.
“또 해 줘요, 또!”
“그럼 이번에는 아가씨께서 노래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노래에 맞춰서 해 보겠습니다.”
“노래에 맞춰서? 가능해요?”
“물론입니다! 저희가 술자리에서 개발한 장기거든요.”
“으음, 뭐 부르지?”
한참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맑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근육이 제일 좋아. 불끈불끈 모여라.”
둠칫둠칫, 둠칫둠칫.
“이두근 삼각근, 흉근 복근 짜릿해.”
두둠칫 둠칫.
레오니에의 근육근육한 노래에 따라, 기사들이 가슴 근육을 들썩이며 박자를 탔다.
“하체 쪽도 끝내줘요, 대퇴근!”
메마르고 삭막한, 현실적인 가사를 품은 아기자기한 노래가 끝나자 쪼르르 붙어 있던 몸 좋은 기사들의 가슴 근육이 파도가 치듯 연달아 움직였다.
“우와아아! 근육 파도타기!”
조금 전 노래하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열정을 불태우며 소리쳤다.
“……주군.”
지켜보던 모노가 펠리오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언제나 넓고 듬직하던 보레오티 공작의 어깨나 오늘따라 유난히 처져 보이는 건 기분 탓이 틀림없다며 속으로 연민을 삼켰다.
“저희 애들은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제 애들도요.”
“아가씨께서 좀 특별하시네요.”
“원래 천재들은 어딘가 어긋나는 법이지요.”
하하하, 육아 선배들이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그들은 오늘만큼 이렇게 속 시원한 적이 없었다.
* * *
그칠 기미가 없던 눈보라는 며칠 뒤 완전히 멈췄다.
“와아…….”
오랜만에 환한 햇살을 맞으며 깨어난 레오니에는 제 방 창문에 비치는 바깥 풍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옆에 있던 의자에 걸어 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니 사용인들이 레오니에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좋은 아침!”
펠리오에게 호되게 당한 뒤, 레오니에는 사용인에게 하대를 썼다. 처음만 어색했지, 지금은 익숙해져 곧잘 나왔다.
“눈이 사람 키만큼 쌓였어. 그렇게 많이 내린 건 처음 봤어.”
레오니에가 뒤꿈치를 들썩이며 떠들었다.
“보레오티 영지의 겨울 눈은 원래 그렇답니다.”
마침 세숫물을 가지고 올라온 하녀가 레오니에를 다시 방으로 데려가며 설명했다.
“올해는 그래도 적게 내린 편이에요.”
“정말? 저게? 사람 키만큼 내렸는데.”
“작년에는 이 층 창문까지 쌓였답니다.”
그래서 보레오티 저택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곳은 전부 3층 이상부터였다. 2층까지는 겨울이면 종종 눈이 쌓여 창문을 막기 때문에 햇살이 잘 안 들어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거실이 3층에도 있었구나.”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폭설이 내리던 내내 자주 머물렀던 3층 거실을 떠올렸다. 포근한 모닥불과 푹신한 융단이 넓게 깔린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노곤해졌다.
참고로 1층 거실은 여름 전용이란다.
“오늘은 어떤 걸 입고 싶으세요?”
세수를 마친 레오니에는 하녀가 골라준 옷 몇 벌을 신중히 고민했다.
“다 좋아 보이는데…….”
“그럼 이쪽은 어떨까요?”
하녀가 왼쪽에 있는 옷을 가리켰다. 새까만 깃털이 장식된 흑색 원피스였다. 아름다운 신부에게 순백의 드레스가 있다면, 보레오티 공작저에는 순흑의 원피스가 떡하니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샛노란 리본을 허리에 두르고요.”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입은 레오니에는 하녀가 챙겨 준 포근한 카디건을 챙겨 입은 채 식당으로 갔다.
“아저씨!”
식당 앞에서 펠리오를 발견한 레오니에가 활짝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잘 잤어? 좋은 꿈 꿨어? 내 꿈 꿨어?”
“네 꿈이 좋은 꿈은 아닐 텐데.”
아침 인사 대신 걸어오는 시비에, 레오니에가 웃음을 지우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여튼 이놈의 법적 보호자는 시비를 안 걸면 입에 가시가 돋는 듯했다.
“괜히 또 시비람. 아저씨는 나한테 잘 잤냐고 안 물어봐?”
“안 물어봐도 잘 잔 거 티 난다.”
“훈련하고 왔어? 어째 몸이 촉촉한 것 같아.”
“촉촉?”
“비누 냄새가 나.”
작은 코를 가까이 가져와 킁킁거리던 레오니에가 향기롭다는 듯 눈을 살짝 감았다. 말 같지 않은 소리 말라며 아이를 의자에 앉히는 펠리오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함께 식사하던 중에 펠리오가 말했다.
“마물 사냥하러 떠날 날이 잡혔다.”
“언제?”
“내일.”
“……그렇게 빨리?”
잘게 다진 베이컨과 으깬 감자, 채소를 버무린 걸 떠먹으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눈보라가 그치면 간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정해졌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펠리오는 그마저도 늦은 출발이라고 했다. 원래라면 오늘 당장 나가야 했다고.
“네 가정 교사들이 방문하는 건 보고 갈 거다.”
“가정 교사?”
아, 레오니에가 뭔가를 떠올렸다. 펠리오는 종종 레오니에가 가정 교사에게 배울 게 많다고 말했다. 고아원에서만 지냈으니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지식이나 소양이 많이 모자란다는 건 레오니에 본인도 인정하는 점이었다.
“오늘 오후에 도착해서 얼굴만 볼 거다. 본격적인 수업은 내일부터야.”
“그런 건 미리 말해 줘야 준비를 하지.”
“준비는 어차피 거기서 다 해서 가지고 온다.”
“이게 무슨 갑질이람…….”
멈췄던 레오니에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겨우 입에 들어간 으깬 감자는 짭짤하니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두 부녀는 산책 겸 못다 한 가정 교사 이야기를 하고자 정원을 산책했다. 어른 키만큼 쌓였던 하얀 눈더미는 그 짧은 사이에 사용인들이 깔끔하게 치웠다.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가 레오니에의 발걸음을 따라 이어졌다.
“근데 나 뭐 배워?”
“예절과 역사.”
펠리오가 아이의 발걸음이 새겨진 눈길을 따라 걸었다. 펠리오는 제 걸음 속도대로 걸었고, 레오니에는 그걸 따라간다고 쪼르르, 빠른 걸음을 유지했다. 작고 좁은 발자국과 크고 넓은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겨우 두 개만?”
물어보는 아이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넌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잖아.”
고아원에서 지낼 적에 코니에가 아이들을 모아 원장 몰래 글을 가르쳤다.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나중에 고아원에서 나와도 사람 취급받고 무시 안 당한다며.
“두 개도 힘들다고 나중에 징징거리지 마라.”
“흥, 아주 깽판을 쳐버릴까 보다.”
“평소처럼 하면 돼, 평소처럼.”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카디건 단추를 손수 고쳐 끼워 주며 말했다. 두 번째 단추가 구멍을 잘못 찾아 어그러져 있었다. 레오니에는 무심한 듯 다정한 손길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런데 언제 가정 교사를 구했어?”
최근 펠리오는 눈 온다는 이유로 일도 안 하고 허구한 날 레오니에 옆에서 빈둥거렸다. 그래도 마물 사냥을 위한 출정 준비가 막바지던 며칠 전까지는 식사 때 말고는 얼굴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네가 여기 온 바로 다음 날.”
레오니에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일찍?”
“네 방을 꾸미고 옷을 사기 위해 공방 사람들을 부르면서 가정 교사도 모집했지.”
“아저씨…….”
펠리오는 그때부터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 레오니에는 또 가슴이 저렸다.
그가 제게 이토록 잘해 주고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아갈 때마다 심장이 미어지는 부끄러운 통증이 찾아와 레오니에를 혼란케 했다. 저는 아직 아빠라 부르는 것도 어색해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런 딸의 심정을 아직 눈치 못 챈 펠리오가 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니 나 없는 동안 공부 열심히 해라.”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펠리오가 짓궂은 농담을 툭 던졌다.
“…….”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저씨 바보야? 나 안 울 거거든?
이렇게 냅다 반항 어린 대꾸가 돌아올 줄 알고 받아칠 준비를 하던 펠리오는 말이 없는 레오니에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늘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가 조용하니 괜히 무섭기까지 했다.
“……열심히 할게.”
레오니에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프냐?”
순순히 대답하는 아이가 익숙하지 않은 펠리오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안 아프거든!”
다행히 곧장 앙앙 짖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안 아프면 되었다고 생각한 펠리오가 평소처럼 아이를 품에 안으려고 팔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으으응.”
늘 잘 안기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자!”
대신에 제 손을 쭉 내밀었다. 펠리오는 한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그거 말고.”
보다 못한 레오니에가 덥석 펠리오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커다란 손가락 세 개가 보드랍고 따스한, 그리고 무척 작은 손바닥에 꼭 잡혔다.
펠리오의 날 선 눈매가 크게 떠졌다.
“손잡고 가.”
“…….”
“싫어?”
“……아니.”
새삼 놀랐을 뿐이었는데, 그 말조차 펠리오는 꺼내지 못했다. 레오니에는 그럼 되었다는 듯이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펠리오의 보폭이 워낙 크고 빠른 탓에 레오니에가 끌려가는 수준이 되었다. 펠리오는 누가 누구를 잡고 가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아이의 걸음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건강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제 또래보다 작은 아이였다. 아이의 발걸음은 당연히 어른의 속도에 미치지 못했고, 이는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자주 품에 안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건 처음이었다.
“…….”
어느새 펠리오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질질 끌려가던 아이의 걸음걸이도 점점 원래 제 속도를 되찾아갔다.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빨리 집에 와.”
앞만 보며 말하는 레오니에의 귀가 빨갰다. 마냥 추위 탓은 아닌 듯했다.
‘이것도 나름…….’
처음에는 그저 느려서 답답하다고 생각한 속도였고, 아이의 보폭을 맞추느니 안고 가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란히 걸어 보니 그런 것도 없었다. 오히려 품에 안고 걸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조그마한 온기와 부드러움이 펠리오의 가슴을 간질였다.
“사냥 끝나고 돌아오면 고아원에 가자.”
“응.”
“나 없는 동안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울지는 않을 거야.”
평소보다 시무룩한 레오니에의 대답에, 펠리오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보고는 싶을 것 같고?”
“뭐, 조금은.”
“솔직하지 못하긴.”
“아저씨야말로.”
나란히 찍힌 크고 작은 발걸음은, 부녀의 대화가 끊어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 * *
오후가 되자 마차 두 대가 공작저를 찾았다.
“예절을 가르칠 케레나 테드로스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역사를 가르치게 된 아르데아입니다.”
두 가정 교사가 보레오티 공작 부녀 앞에 섰다. 한 사람은 아주 아름다운 귀부인이었고, 다른 사람은 학식과 연륜이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예쁜이랑 수면제.’
레오니에가 가정 교사를 보고 느낀 첫인상이었다.
예절을 가르친다는 케레나 테드로스 백작 부인은 아주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이 지긋한 분이 올 줄 알았던 레오니에는 생각 이상으로 젊은 케레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차려입은 드레스가 어찌나 눈부신지 미간에 주름이 팍 졌다.
반면 역사를 가르친다는 아르데아는 현학자 같은 인상이었다. 얼굴에 깊이 진 주름이며 너덜너덜한 옷자락까지, 보레오티 공작을 만나는 자리에 감히 누추한 차림으로 자신 있게 온 노신사의 배짱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레오니에.”
펠리오가 아무 말 없는 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입니다.”
뒤늦게 인사를 올린 레오니에가 선생님들과 눈을 마주쳤다. 케레나는 싱긋 웃었고, 아르데아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테드로스 백작 부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할 거고, 아르데아는 저택에 상주할 거다.”
짧은 소개를 끝으로 가정 교사들은 다시 돌아갔다. 선생님들이 탄 마차가 저택에서 사라지는 걸 창문을 통해 끝까지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펠리오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
펠리오가 손을 마주 잡은 채 몸을 낮췄다.
“내가 조심할 건 없어?”
“네가 왜 조심을 해?”
해도 저 둘이 조심해야지, 별걸 다 물어본다며 펠리오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감히 보레오티 공작 영애가 눈치 보고 살펴야 할 상황은 이곳 북부에 결코 없다며 펠리오가 힘주어 말했다.
“설령 네가 무얼 잘못해도 말이지.”
“사람을 죽여도?”
“극단적인 예시긴 하다만, 아무 문제 없어.”
고아원 손님들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지, 펠리오의 말에 레오니에가 킥킥 웃었다.
“역시 사람은 권력을 쥐고 태어나야 하나 봐.”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
“아저씨는 그 성격 참고 살아 주는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
하지만 레오니에는 처음 만나는 가정 교사가 걱정이었다.
수업을 받기 전에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며 솔직히 말했다.
“아르데아는 엄청난 인재지.”
“얼마나?”
“제국 학술원 회원이자 아카데미 교수였어.”
아이의 까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술원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만 들어가는 학문 연구 기관이었다. 학술원 소속 회원들이 남긴 업적은 제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제국의 세 번째 권력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수도에 있는 커다란 교육 기관으로, 학술원 소속 회원 대다수가 이곳 출신이었다. 펠리오도 아카데미 졸업생이었다.
하나 레오니에는 아르데아가 교수였다는 과거형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북부에 있어?”
펠리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으음, 레오니에가 그 모습을 살피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테드로스 백작 부인은?”
아이에게 말하기 곤란한 뭔가가 있겠거니, 싶은 레오니에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펠리오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딸기 우유 사탕을 쥐여 주었다.
“일전에 나 좋다고 쫓아다니던 여자.”
“아저씨!”
레오니에가 인상을 팍 썼다.
“그런 여자를 왜 고용해!”
현재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사생아로 소문이 난 상태이다. 레지나의 딸이란 사실은 엄연한 비밀이며, 이를 아는 사람은 당사자인 두 부녀와 카라, 루페, 그리고 모노와 멜레스뿐이었다.
모노와 멜레스는 펠리오가 레오니에와 훈련장에 방문했던 날에 따로 불러 알게 되었는데,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마시고 있던 맥주를 대차게 뿜어 무지개를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그 아줌마도 이상하네.”
좋아했던 사람의 사생아를 직접 가르치겠다니.
레오니에가 빠르게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의 관계도를 그려봤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했고, 남자는 숨겨 둔 딸이 있었고, 여자는 그 딸의 가정 교사가 되었으니 완전히 진창 수준이었다.
“수상한데?”
레오니에의 눈이 폭설보다 매섭고 싸늘해졌다. 펠리오는 그런 아이의 시선이 아주 기특하면서도 가소로웠다. 감히 북부의 맹수인 제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 저의 딸이 유일할 터.
하지만 싸늘한 시선이 어째 따가웠다.
“북부에서 그 여자만큼 귀족 예절을 잘 갖춘 이도 없고. 그래 봬도 수도 사교계에서도 무척 유명해. 멍청하고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란 소리지.”
그래서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변명처럼 줄줄 말했다.
“수도 사교계?”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귀족 의회만큼 추잡한 곳.”
겉으로야 아름다운 귀부인들끼리 모여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 고상한 모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표독스러운 욕심과 치밀한 계산이 테이블 밑으로 오가는 속물들의 전장이었다.
학술원이 제국의 세 번째 권력이라면, 수도 사교계는 두 번째 권력이라 불렸다.
“언젠가 너도 그곳으로 가겠지.”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일원이 된 이상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펠리오는 그런 곳에 저 어린 것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벌써 입맛이 썼다.
거기다 펠리오라고 케레나를 선뜻 고용한 건 아니었다. 원래 다른 사람을 모집하려고 했으나 그쪽 상황이 여의치 못해 차선으로 채용한 거다.
어쨌건 케레나 테드로스의 실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레오니에가 추잡한 사교계를 먼저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기도 했다.
“……아저씨가 그렇다면야.”
레오니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이른 새벽.
검은 사자가 포효하는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어둑한 아침 하늘 속에서 살랑거렸다. 불어오는 바람은 이른 아침부터 마물 사냥을 하러 나서는 기사들의 여정을 돕기라도 하듯 잔잔했다.
“하암…….”
그 속에서 홀로 레오니에가 고개를 꾸벅이며 졸음과 힘겹게 싸우는 중이었다.
“넌 왜 안 자고 나왔어.”
갑옷으로 무장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안았다. 차가운 갑옷 재질에 레오니에가 몸을 부르르 떨며 으어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뒤에 있던 기사들이 남몰래 소리 죽여 웃었다.
“아저씨 가잖아…….”
졸음을 쫓기 위해 레오니에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려 했다. 곧 가죽 장갑을 낀 펠리오의 손이 이를 막았다. 대신에 더 자도 된다는 듯 등을 토닥거렸다. 레오니에는 그러지 말라는 듯 칭얼거렸다.
“내려 줘.”
바닥에 내려진 레오니에가 옆에 있던 하녀에게 눈짓했다.
“이거 줄게.”
하녀가 레오니에 대신 내민 바구니 안에는 소량씩 포장된 생강 쿠키가 들어 있었다. 쿠키를 본 펠리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봉투 중 유독 두터운 게 몇 개 있었고, 거기에는 유치한 사자가 까맣게 그려져 있었다.
펠리오는 자연히 사자가 그려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바싹 구운 엉성한 쿠키가 낯익었다.
“……언제 구웠어?”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신중하다 못해 정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밀려드는 졸음을 참느라 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밤에 몰래.”
어젯밤에 펠리오에게 먼저 자러 간다고 거짓말한 뒤에 몰래 주방에 가서 쿠키를 구웠다. 일전에 루페가 주인님이 쿠키를 제게 하나도 안 주고 다 드셨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딸이잖아.”
추운 곳에 아빠가 일하러 가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기사님들하고 나눠 먹어. 그래도 내가 아저씨 거는 특별히 조금 더 챙겼어. 여기 검은색 사자 그려진 게 아저씨 거고, 안에 쿠키 2개씩 더 넣었어.”
입이 찢어져라 하품한 레오니에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조심히 다녀와.”
배웅받은 펠리오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올 때 맛있는 거…….”
아직 잠이 덜 깬 레오니에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맛있는 거라.”
그러나 펠리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고 심각했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든 이 엉성한 쿠키보다 맛있는 게 세상 어디에 있을까. 펠리오는 진심으로 그딴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설령 있다 해도 전부 없애버릴 작정이었다.
도로 쿠키 포장을 덮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이내 툭,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에 떨어졌다.
“내가 없는 동안은 네가 보레오티의 주인이다.”
펠리오는 지금 모두의 앞에서 보레오티 가주의 권한을, 하녀 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린 일곱 살짜리 딸에게 전부 위임했다.
함께 마중 나왔던 루페와 카라가 놀란 눈을 했다.
“잘 보필해라.”
루페와 카라가 고개를 숙였다.
“레오니에.”
“응…….”
“공부 열심히 해라.”
“알았어…….”
레오니에가 귀찮다는 듯 몸을 꼼지락거렸다.
“일찍 자고, 밥도 많이 먹고.”
“으응…….”
“근육도 적당히 밝히고.”
“......”
“너 지금 일부러 대답 안 하는 거지?”
으으응, 레오니에가 잠꼬대를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나 펠리오의 발이 레오니에 앞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받았던 쿠키가 흐물흐물 녹아 접착제라도 되었는지 몸이 움쩍달싹 못 했다. 요 작은 것을 두고 가려니, 눈에 계속 밟혀서였다.
“……가베르 경.”
펠리오가 하녀 바로 옆에 있던 자줏빛 머리를 지닌 사내를 응시했다. 소문 이상으로 다정한 보레오티 부녀의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갔던 파보가 서둘러 정신 차리고 자세를 갖췄다. 이번 출정에 멜레스가 함께하고, 대신에 파보가 저택에 남았다.
“목숨을 바쳐 아가씨를 호위하겠습니다.”
파보가 진중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쥐며 단호히 맹세했다.
“다녀오마.”
조그마한 인사가 어느새 잠든 레오니에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잠든 아이의 입술이 입맛을 다시듯 몇 번 쩝쩝거리다 배시시, 호선을 그렸다.
천근 같던 펠리오의 발이 힘겹게 떨어졌다.
* * *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펠리오와 기사들을 배웅한 후 다시 잠이 든 레오니에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그래도 딱 맞춰 일어나셨네요.”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자신들이 깨우러 갔을 거라고, 하녀가 머리를 정돈해 주며 말했다.
“아저씨랑 기사님들은 지금쯤 어디로 갔을까?”
“산맥 입구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문 옆에 서서 호위 중이던 파보가 대신 대답했다.
“마물들은 보통 북쪽 산맥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아주 넓고 험한 곳이라 다양한 마물들이 모여 살지요. 마물의 고향이란 이명이 보레오티 영지에 괜히 붙은 것이 아닙니다.”
북쪽 산맥은 마물의 생태계가 집결된 곳이었다. 그리고 마물의 먹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보레오티 공작과 그가 이끄는 글라디고 기사단이 있었다.
“언제 올까요?”
점심을 먹으러 나온 레오니에가 곁에서 따라오는 파보에게 물었다.
“으음, 올해는 좀 걸릴 것 같네요.”
지난 3년간 이어진 마물 사냥은 보레오티 공작 없이 글라디고 기사단끼리 행해졌다. 기사단에 셋 있다는 소드 마스터들이 전부 나서 마물의 개체 수를 줄이기는 했지만,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펠리오가 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맹수의 송곳니는 생태계의 정점이었다.
“거기다 지난 번식기 때 마물들이 유난히 붕…….”
평소 동료들과 이야기하듯 저속한 표현을 쓰려던 파보가 입을 헙, 다물었다.
“유난히?”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니 레오니에가 검은 눈동자를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사, 사랑! 사랑이요!”
파보는 마물들이 서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마물 수가 늘었다고 허둥거렸다.
그 모습에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사랑은 멋진 거예요.”
“그럼요! 사랑은 근사하지요.”
파보는 자신이 위급한 상황을 재치있게 넘겼다며 안도했다. 이토록 어린 아가씨의 귀를 상스러운 말로 더럽힐 수 없었다. 혹여 그랬다간 주군의 검이 저의 피로 더러워질 테니.
“파보 오빠.”
쭉쭉, 그때 레오니에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붕가’가 뭐예요?”
파보의 구릿빛 피부가 창백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얼마 안 있어 가정 교사가 차례대로 도착했다.
가장 먼저 온 건 앞으로 저택에 상주하기로 한 아르데아였다. 낡은 짐 가방 두 짝과 오래되고 두꺼운 책 열두 권이 아르데아가 가지고 온 짐의 전부였고, 그는 전날 펠리오와 말한 대로 저택 사 층 손님방에 짐을 풀었다.
“안 힘드세요?”
방까지 쪼르르 따라온 레오니에가 물었다.
“북부의 커다란 저택은 보통 3층 위에 필요한 시설이 다 있으니 문제 될 게 없지요.”
“북부에 와서 살아 보신 적이 있어요?”
“제가 북부 출신입니다.”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자 아르데아가 껄껄 웃었다. 펠리오를 닮았으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곳곳에 보이는 아이의 눈은 별이 가득 뜬 밤하늘보다 깊고 총명했다.
“아가씨.”
아르데아가 레오니에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제 수업은 지금부터 시작이랍니다.”
얼떨결에 책을 받은 레오니에가 표지를 살폈다. 책 제목이 ‘제국의 역사’였다. 딱 봐도 고리타분한 것이 수면제 겸 베개 역할 톡톡히 하게 생겼다고 레오니에가 남몰래 생각했다.
“글은 읽을 줄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혼자 이 책을 읽으십시오.”
그러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아르데아의 수업은 상당히 파격적이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만큼 아이 스스로 움직여야만 지식을 얻고 배움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잔혹한 방식이었다.
‘저 할아버지도 보통이 아니네.’
레오니에는 비뚠 미소가 절로 나왔다.
생긴 건 성격 좋은 할아버지처럼 생겼으면서, 속은 아주 냉혹하고 잔인한 정원사였다. 이런 식으로 될성부르지 않은 싹들을 가차 없이 쳐냈을 테지. 감히 보레오티 공작 영애에게 그런 교육 방식을 고집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정말 존경스러웠다.
‘북부 출신은 다 이런가?’
책을 방에 놓고 나오니, 예절을 가르칠 케레나 테드로스 백작 부인이 때마침 도착했다. 전날과 달리 검소한 차림새인데도 케레나는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결치는 금발과 백옥 같은 피부는 바로 케레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레오니에는 그런 귀부인을 보자니 제 양부의 눈이 보통 높은 게 아닌 걸 깨달았다. 저런 미인마저 자신을 쫓아다니게 했으니까.
‘이건 도대체 무슨 조합일까.’
결혼 전에 좋아했던 남자의 사생아와 사생아의 아버지를 좋아했던 여자라. 참 기가 막힌 조합이었다. 레오니에는 예절 수업이 과연 잘 진행될지 의문이었다.
“그럼, 인사 방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그런 노파심과 달리, 케레나의 수업은 친절하고 상냥했다. 예절에 서툰 레오니에를 탓하지 않고 차근차근 하나하나 알려 주며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진짜 미련이 없나.’
이제 결혼해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니 과거의 미련은 전부 버린 것처럼 맑고 청아한 미소였다. 레오니에는 아주 잠깐이나마 케레나를 의심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잘하셨습니다.”
가르쳐 준 자세대로 바르게 인사한 레오니에에게 손뼉까지 치며 환호해 주었다. 반달처럼 접힌 푸른 눈이 얼마나 예쁜지 레오니에의 양심이 다 아플 정도였다. 괜한 사람을 오해한 것 같아 미안했다.
“아가씨께서 이렇게나 습득이 빠른 분일 줄은 몰랐어요.”
케레나의 진심 어린 말에 레오니에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대단하세요. 솔직히 걱정을…….”
말끝을 흐리던 케레나가 곧 말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레오니에는 여전히 미소를 품고 있었고, 그녀는 그에 안도라도 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선 공작님을 많이 닮아 이토록 어엿하시고 아름다우시죠. 그렇기에 모자란 내면을 많이 채우셔야 합니다. 이전 습관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요. 제가 가르치는 보람이 있겠어요.”
레오니에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수업이 끝난 레오니에는 케레나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소설 속 세상이라 그런지…….’
돌아선 레오니에가 조용히 감탄했다.
‘……자살 방법도 신박하네.’
레오니에는 케레나의 은근한 비꼼에 기가 막혔다.
펠리오가 고용한 가정 교사는 겨우 두 사람. 그런데 제정신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가르쳐야 할 고용주의 딸을 시험하질 않나, 다른 한 사람은 은근한 말로 고용주의 딸을 비난하지 않나.
‘아저씨도 대단하다, 진짜.’
어떻게 저런 인간들만 모아 제 딸 옆에 둔 건지.
하나 레오니에는 저를 위해 고용했단 펠리오의 진심까지 의심하지는 않았다. 배웅하던 날, 레오니에는 결국 추위와 졸음에 못 이겨 하녀 품에서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졸음으로 흐릿한 와중에도,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녀오겠다 인사하던 펠리오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히 들렸다.
‘아르데아 할아버지도 나쁜 사람은 아니고.’
다행이라면 아르데아는 가정 교사의 본연에 충실했다.
레오니에는 자신이 정한 분량만큼 책을 읽고, 이해가 되지 않거나 모르는 게 보이는 즉시 필기해 아르데아에게 가서 질문했다. 막힌 부분이 뚫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복습하고 되묻는 성실함도 보였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 아르데아의 태도가 조금씩 변했다. 물어오는 것만 상세히 대답해 주던 포근한 할아버지가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을 먼저 가르쳐 주면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까탈스러운 할아버지로 변했다.
동시에 수업의 질도 높아졌다.
수업이 끝나면 같이 식사를 하거나 간식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나누는 등, 두 사람의 사이까지 발전했다.
“선생님. 테드로스 백작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테드로스 백작 부인이라…….”
오늘도 변함없이 간식을 같이 먹던 중에 레오니에가 질문했다. 콩 등을 갈아 만든 곡물 젤리를 잘게 잘라 먹던 아르데아는 레오니에가 물어본 이름을 숨 쉬듯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제가 기억하는 이름은 테드로스가 아니지만요.”
아르데아가 기억하는 이름은 케레나 메레오카였다. 케레나가 결혼 전에 썼던 이름이다.
“메레오카 백작가는 수도에도 저택을 둘 만큼 명성 있는 귀족 가문입니다. 다만 다른 골수 귀족과 달리 중앙에서 넘어와 터를 잡은 이주민이죠. 그래서 북부에서는 수도만큼 먹히지 않는답니다.”
메레오카 백작 가문에 불만이 있는 건지, 아니면 북부 출신의 자존심 때문인지 몰라도 아르데아의 표현에는 명확한 구분이 있었다.
“참고로 골수 귀족이란 보레오티 가문과 함께 처음부터 북부를 지켜온 가문들입니다.”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그들 대부분이 보레오티의 방계 가문이었다.
“아주 드물게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채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고요.”
레지나 같은 사람 말인가,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 메레오카 영애는…….”
아르데아가 오래되지 않은, 수도에 있었던 시절을 추억했다.
“……사교계에서 유명했죠.”
펠리오가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을 품은 사람입니다.”
이건 펠리오가 하지 않았던 말이라 흥미가 갔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 도가 튼 자지요.”
“왜 꼭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싹수가 노란 걸까요?”
“원래 재능 있는 놈들이 더 재수 없는 법이지요.”
물론 저는 예외라며 아르데아가 선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쓸데없이 주장했다.
“어쨌든 케레나 테드로스 백작 부인은 말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사람입니다.”
아가씨께서도 항상 조심하세요. 아르데아는 레오니에한테 케레나를 조심하라고 일러뒀다.
“그 사람의 걱정과 칭찬에는 상대를 향한 비난과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뱀 똬리처럼 숨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말은 때때로 날카롭게 벼른 검보다도 아픈 법이었다.
“말로써 다친 마음은 쉽게 낫지 않는답니다.”
일곱 살 아이에게 할 조언은 아니었다. 하나 아르데아는 레오니에가 여타 또래 아이들보다 똑똑하고 수준이 높다는 걸 지난 3주간 확실하게 깨우쳤기에 진지하게 충고했다.
“……벌써 당했습니까?”
아르데아가 먹다 남긴 곡물 젤리를 노리던 레오니에가 움찔했다. 그 틈에 아르데아가 접시를 슬그머니 제 쪽으로 치웠다.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에 걱정이 그득했다.
“……세 번이나요.”
레오니에가 이실직고했다.
지난 3주간,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수업 동안 케레나는 질리지도 않고 아주 교묘한 말솜씨로 레오니에의 출신을 비웃고 무시했다.
“씨 알맹이도 안 먹혔지만요.”
“허허…….”
“테드로스 부인이 자기 좀 죽여달라고 애원하는데…….”
기어코 아르데아의 곡물 젤리를 빼앗아 먹은 레오니에가 입술 끝만 조용히 올렸다.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눈은 절대 웃지 않았다.
“아저씨 돌아오면 다 고자질해야지.”
아르데아는 케레나를 동정하며 혀를 끌끌 찼다. 동시에 속으로는 레오니에의 영악함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감탄했다.
아이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영특한 거야 수업하는 지난 3주 내내 뼈저리게 깨우쳤다. 과연 어려도 북부의 검은 맹수라고. 잔혹하고 비정한 일면이 펠리오를 그대로 빼닮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린 맹수는 몸을 한껏 낮춘 채 기다리고 있다. 굽혔던 몸을 일으켜 숨겨 둔 송곳니를 드러낼 순간을.
‘테드로스 백작 가문도 끝이로군.’
아르데아는 한발 먼저 테드로스 백작 가문의 미래를 애도했다.
* * *
“끼에에에에!”
괴상한 소리와 함께 마물이 검은 피를 토하며 쿵, 쓰러졌다.
펠리오는 피가 묻은 검을 허공에 가볍게 내쳤다. 바람을 가르는 휙 소리와 함께 피가 새하얀 눈밭에 흩뿌려졌다.
“케레스 경.”
근처에 있던 모노가 다가왔다. 펠리오는 짧게 숨을 고르며 근처를 둘러봤다.
“새끼는 어디 있지?”
“따라온 흔적이 보이지 않는군요.”
“나 없이 그대들끼리 3년간 설산을 청소했고, 올 번식기에 활발했다던 마물들의 상태를 고려한다고 해도 이건 좀 이상하군.”
펠리오가 조금 전 죽인 마물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발로 쓰러진 사체를 툭 쳐 옆으로 밀쳤다. 드러난 마물의 배를 살피던 펠리오의 검은 눈동자가 느슨히 움직였다.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젖이 탱탱 부은 상태였다.
“……애초에 비페라는 사냥 대상도 아니다.”
펠리오가 막 사냥한 비페라는 겨울에 새끼를 낳으면 이듬해 봄까지 새끼와 함께 굴속에서 겨울을 나는 마물이었다. 덩치가 크고 위협적으로 생긴 육식 마물이긴 해도 쥐처럼 작은 동물을 주 먹이로 삼았고,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사람에게 피해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새끼도 없이 혼자 다니다니.
맹수의 송곳니로 오감을 발달시켜 주변을 살펴보아도, 지금 막 죽은 어미 마물의 흔적 말고는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물의 난폭함은 내 기억보다 더하고, 새끼 마물은 보이지 않고…….”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정적인 움직임인데도 모노를 비롯하여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목을 감추듯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바위를 깎아 만든 설산을 뒤덮었다.
“……우선 하산한다.”
3주하고 사흘이나 걸린 사냥을 끝내는 게 먼저였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숨을 돌렸다. 드디어 이 길고 지루한 마물 사냥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특히 이번에 처음 출정에 따라온 평기사나 수습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안도했다.
“레비페스 경.”
멜레스가 펠리오의 부름에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아이들이 맛있어하는 간식을 파는 곳을 아나?”
하산할 때 필요한 지시라도 내릴 줄 알았던 멜레스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나 곧 그 뜻을 알아채고 표정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아가씨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으나, 제 남동생이 항상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제과점 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멜레스가 그곳에서 파는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을 추천했다.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무척 인기라고 했다.
* * *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시죠?”
“응.”
“무슨 일 있으시면 종을 흔드세요.”
“알았어. 코니, 잘 자.”
“아가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레오니에의 잠자리를 살핀 하녀 코니가 불을 끄고 방문을 닫았다. 깃털처럼 가볍고 푹신한 이불 속에 몸을 포근히 묻은 레오니에가 어둑한 방을 둘러봤다.
크고 아름다운 캐노피 침대와 그 밑에 깔린 보드라운 융단. 건너 구석에 있는 고급스러운 인형과 장난감들, 아이 키에 맞춰 제작된 책장과 수많은 책. 크고 넓은 책상과 푹신한 방석을 두 겹이나 쌓은 의자.
이불 속 팔을 꺼내면 고급 실크로 만든 잠옷이 나풀거린다.
“…….”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딸기 우유 사탕이 한가득 든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레오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병을 품에 안았다. 텅 비었던 유리병은 이제 묵직하니 두 손으로 꼭 잡아야만 했다.
이불 위로 사탕을 와르르 쏟으니 달콤한 향이 훅 퍼져 나갔다.
“하나, 둘, 셋…….”
조그마한 손가락이 사탕을 하나하나 주워 다시 병에 넣었다.
“……예순아홉, 일흔 개.”
세어 보니 사탕 개수가 저택에 머문 날보다 훨씬 많았다.
예쁜 짓을 해야 준다던 사탕도 어느 순간부터 예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유 없이 줄 때가 더 많았다. 펠리오와 함께 보레오티 영지에 온 지 두 달. 그리고 펠리오가 저택을 비운 지 어언 한 달.
“아저씨 늦게 오네…….”
중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졸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 달 동안 보지 못한 저의 법적 보호자 때문인지는 레오니에 본인도 몰랐다.
하지만 손에 든 일흔 번째 사탕은 한참 뒤에야 도로 병에 들어갔다.
‘전부 꿈 같다.’
레오니에는 무엇이 진짜인지 아직도 가늠하지 못했다.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비쩍 마른 고아가 되어 있었고, 이유 없는 학대 속에서 힘겹게 버티던 중에 운 좋게 소설 속 주인공을 만나 그의 양녀가 되어, 이렇게나 귀한 대우를 받고 사는 귀족 아가씨가 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린 몸이 한땐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저택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먹먹하고 서글픈 것이 마음속에서 은근슬쩍 존재감을 나타냈다. 레오니에는 붕붕 고개를 저으며 유리병을 품에 꼭 안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꺼풀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내일 예절 수업이 있는 날이네.’
밀려오던 졸음이 확 깼다.
레오니에는 과외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이는 아이가 기억하는 또 다른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아르데아는 괴짜 할아버지지만 상냥하고 똑똑했다. 하나 케레나는 아니었다.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많이 닮아 이토록 어엿하시고 아름다우시죠. 그렇기에 모자란 내면을 많이 채우셔야 합니다.’
첫날에는 사생아라 그 속은 천하다고 비웃었다.
‘아가씨를 데려오신 공작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더욱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다음은 운 좋게 공작에게 거둬졌다며 비꼬았다. 심지어 이땐 일부러 고개를 돌리는 척하면서 레오니에를 위아래로 흘겨보기까지 했다.
‘오랫동안 몸에 붙은 습관을 털어내기가 많이 어렵죠.’
마지막에 만났던 날엔 아무리 네가 열심히 해도 결국 천한 태생인 건 변함없다며 무시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면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귀부인의 착한 심성이라 착각할 정도로 뻔뻔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더욱 기가 막혔다.
‘아저씨는 이 여자의 뭘 본 거야.’
멍청하고 눈치 없는 사람 아니라면서.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던 레오니에가 이내 뿌우우, 볼 속 공기를 내뿜었다. 잘 생각해 보면 케레나는 펠리오의 말처럼 멍청하고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긴 했다. 그러니 그토록 교묘한 말솜씨를 지닌 거지.
‘그것도 내일이면 끝이니까.’
마물 사냥이 길어도 한 달이라고 했다. 내일 예절 수업이 끝나면 펠리오와 글라디고 기사단이 그 주 내로 돌아올 테고, 레오니에는 그간 당한 걸 전부 일러바쳐 케레나에게 크고 아름다운 엿을 먹일 작정이었다.
‘그딴 소리야…….’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되는 개소리였다.
물론 들으면 기분 나쁜 말이다. 하나 레오니에가 케레나에게 대놓고 불쾌감을 표현하지 않은 건, 저 혼자 화내는 것보다 펠리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고자질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검은 맹수는 북부의 모든 걸 다스린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딸이다.
‘양녀이긴 해도…….’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자신을 퍽 아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저 역시도 펠리오를 잘 따르고 좋아한다. 그러니 그가 케레나를 벌주는 것에 크게 의심은 않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양녀’라는 현실이 가슴을 따끔따끔 찔렀다.
레오니에가 유리병을 꽉 쥐었다.
‘말로써 다친 마음은 쉽게 낫지 않는답니다.’
아르데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처 입었나?’
레오니에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은 줄 알았더니.
가슴 근처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아무래도 깊숙이 찔려 다친 듯했다.
* * *
다음 날.
레오니에는 케레나의 손뼉 치는 소리에 맞춰 걸음걸이를 연습했다. 머리 위에 올린 얇은 책 한 권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이번 수업의 목표였다.
“네, 잘하고 계십니다.”
케레나의 칭찬처럼 레오니에는 곧잘 했다. 미리 그어 놓은 바닥의 선을 따라 내딛는 발걸음은 나비처럼 가벼웠고, 사뿐사뿐한 걸음 따라 흔들리는 새하얀 치맛자락은 말 그대로 나비의 날갯짓이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훌륭하세요.”
환한 미소와 달콤한 칭찬을 내뱉는 겉과 달리, 케레나의 속마음은 젖은 걸레를 비틀어 짜낸 물처럼 더러웠다. 저의 추잡한 속내는 레오니에를 계속 미워했다. 눈앞에서 열심히 배우는 레오니에가 꼴도 보기 싫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처음 펠리오가 고아원에서 아이를 데려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펠리오의 자기 관리는 수도에서도 무척 유명했다. 혹여 아이를 빌미로 협박이라도 할 것을 대비해 잠자리 전에 각서까지 쓴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런데 아이는 영락없는 보레오티의 핏줄이었다. 북부의 검은 맹수들만이 지닌다는 검은색을 몸에 품은, 명실상부 펠리오의 하나뿐인 혈육.
‘도대체 어떤 여자였기에……!’
케레나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매우 잘 알았다. 그 자신감에 몇 번이고 펠리오에게 다가갔으나 되돌아온 건 냉랭한 거절과 무관심이었다.
그 후 저 좋다는 남자 중 가장 조건이 좋던 가문의 영식을 골라 보란 듯이 결혼했지만, 펠리오의 사생아가 나타났단 소문을 듣고 그 증거를 직접 마주했을 때,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며 주체 못 할 질투가 들끓었다.
저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
그 여자를 품었을 펠리오에게.
그리고 자신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펠리오의 다정함을 온전히 받던 아이에게.
“……스 부인.”
“…….”
“테드로스 부인.”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끔찍한 망상에 빠져 있던 케레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부인이 시키신 대로 걷기 연습 열 번을 다 했어요.”
“그러셨나요. 힘드시지 않았고요?”
“네. 재미있었어요.”
활짝 웃는 아이의 미소가 얼마나 역겨운지, 케레나는 그 위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이쯤에서 할까요?”
하나 애써 그 마음을 꾹꾹 숨기며 미소로 진심을 감추었다. 레오니에는 배운 대로 치맛자락을 잡고 앙증맞게 무릎을 굽혀 공손히 인사했다. 그나마 아이가 제게 고개 숙이는 지금이 케레나가 겨우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저 여자 또 저러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레오니에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케레나가 자신이 고개 숙여 인사할 때만큼은 제 속내를 잠깐이나마 드러내는 건 수업 첫날에 알아챘다. 아이의 인사를 받는 케레나의 미소는 헐벗은 뱀의 허물보다 징그러웠다.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이것도 오늘이면 끝이라며, 레오니에가 애써 속을 갈무리했다.
아저씨만 돌아오면 다 일러바칠 거라고 벼르던 찰나였다.
“항상 제가 한 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케레나가 레오니에의 한쪽 팔에 손을 올리며 짐짓 걱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레오니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가씨께서 하시는 실수 한 번이 공작님의 발목을 잡을 수 있어요.”
레오니에는 오늘도 케레나가 내뱉는 신박한 자살 청부를 듣겠거니, 싶었다. 어째 그냥 한 번을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는 적이 없었다. 뭐라도 한마디를 안 뱉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저 끈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아가씨는 무척 잘 배우고 계세요.”
“칭찬 감사합니다, 부인.”
“그렇기에 더욱 본인의 입장을 아셔야 해요.”
검은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입장?”
이를 눈치채지 못한 케레나가 그렇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이의 눈에 황금빛 이채가 스치는 동시에 방 안 공기가 아주 조금이지만 싸늘해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렇게 풍족한 삶을 살게 해 주시는 공작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셔야 해요. 아가씨께서 이 모든 걸 영위할 수 있는 건 전부 공작님 덕분이지요.”
넌 공작만 아니었으면.
“저도 그 덕에 아가씨와 만날 수 있었고요.”
내가 공작만 아니었어도.
“그러니 아가씨께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셔야 공작님께 이 이상 폐를 끼치지 않지요.”
“테드로스 백작 부인.”
잠자코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입가를 조용히 올렸다.
“부인의 말씀,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답니다.”
조그만 손이 레이스가 덮인 새하얀 원피스 위에 얹어졌다. 손바닥에 힘을 주어 가슴을 슬그머니 누르면, 쿵쾅쿵쾅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늘 귀 기울여 듣는답니다.”
“제 진심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세요.”
“네, 물론…….”
반사적으로 그러하겠다고 답하려던 케레나가 움찔했다. 천천히 굳어지는 귀부인이 설마 하는 눈으로 저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어린 아가씨를 바라봤다. 예절 수업에서 배운 대로 곱게 서 있는 레오니에가 눈웃음을 살포시 지었다.
“자기 입장 하나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나대는 인간은 보레오티 공작저에 필요 없답니다.”
돌아서는 레오니에를 따라 치맛자락도 빠르게 돌아갔다.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용인들에게도 미리 말해 둘 테니 혼자 나가시면 됩니다.”
정말로 혼자 방에서 나온 레오니에에게 밖에서 기다리던 파보와 하녀 코니가 다가왔다.
“아가씨!”
“수업은 다 끝나셨습니까?”
코니와 파보가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레오니에를 맞이했다. 하지만 둘은 곧 레오니에의 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이 섬뜩하게 흐드러졌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파보는 맹수의 송곳니에 익숙하지 않은 코니를 제 뒤로 숨기며 레오니에를 살폈다. 아이는 꽤나 흥분했는지 가쁜 숨을 들썩이느라 가슴만 한참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겨우 진정한 뒤에야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테드로스 백작 부인께서는 혼자 가실 거예요.”
파보는 레오니에가 무언가에 화가 나 자신도 모르게 맹수의 송곳니를 발동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분명 저 방에 혼자 있을 테드로스 백작 부인임이 틀림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아가씨를 업고 가도 되겠습니까?”
파보가 한쪽 무릎을 굽혀 공손히 여쭈니, 레오니에가 팔을 뻗어 품에 안겼다. 아직도 눈에 황금빛이 퍼져 있는 아이의 주변 온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나 파보는 크게 내색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펠리오의 송곳니를 몇 번 접한 적이 있어서, 레오니에의 어수룩한 송곳니는 참고 견딜 만했다.
“나 산책하고 싶어요.”
“속이 답답하신가요?”
레오니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제가 겉옷을 챙겨 오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코니가 서둘러 방으로 간 사이, 레오니에는 파보의 품에 안긴 채 일 층 현관 홀까지 내려왔다. 때마침 코니도 따뜻한 겨울 망토와 털부츠를 가져왔다.
‘돌아오고 있어.’
후우, 아이의 눈을 살핀 파보가 안도했다. 황금빛이 흐드러졌던 눈동자가 다시 검게 돌아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흥분으로 발동된 송곳니라 흐트러졌던 마음이 진정되니 금세 가라앉았다. 송곳니의 기세에 눌렸던 코니도 이젠 레오니에의 옆에서 옷을 챙겨 입힐 정도였다.
‘만일 폭주라도 했다간.’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파보가 어깨를 파르르 떨던 때였다.
“자, 잠시만!”
서둘러 계단을 내려온 케레나가 소리를 질렀다. 하나 곧 현관 홀에 즐비한 보레오티 사용인들을 눈치채곤, 뒤늦게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아하게 내려와 레오니에 앞에 섰다.
“테드로스 부인.”
파보가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거기까지입니다.”
호위 기사는 케레나가 그 이상 레오니에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코니 역시 무언지 몰라도 레오니에를 제 치마폭 뒤로 감추며 한껏 경계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무언가 오해를 하신 듯하여…….”
“오해?”
천진난만하고 선한 아이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제가 의도치 않게…….”
“의도치 않게?”
“……아, 아가씨의 마음에 상처를 드린 것 같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레오니에는 케레나가 내뱉는 말에서 거슬리는 것들만 끄집어 따라 말했다. 케레나는 어느새 아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케레나는 겁을 먹었다.
조금 늦은 깨달음과 동시에 현관 내부 온도가 천천히 식어 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레오니에의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젠장!’
파보가 아이의 변화를 눈치챘다. 다시 송곳니가 발동되었다.
“코니 양! 당장 옆으로……!”
서둘러 떨어지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 아아……!”
코니가 맹수의 송곳니에 꿰뚫린 것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송곳니를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평범한 사용인들은 아이의 서투른 송곳니에도 겁을 먹고 쓰러지거나 맥을 추리지 못했다.
레오니에 바로 앞에 있는 케레나는 더했다.
뚜벅뚜벅.
벌 받듯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은 귀부인 앞으로 어린 소녀가 다가왔다.
“내가 아까 말했지요?”
사랑스럽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부인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겼다고.”
레오니에가 케레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첫날에 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지. 모자란 내면을 많이 채워야 한다고. 둘째 날엔 날 데려온 공작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그다음 날엔 내 몸에 붙은 습관들을 털어내기가 어려울 거라고 걱정했지.”
손가락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부들부들 떠는 케레나의 턱 아래에 멈췄다.
“내가 그 말에 숨겨진 뜻도 모를까 봐?”
사생아라 속이 천박하고, 운 좋게 거둬진 걸 다행인 줄 알아야 하며,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천한 과거가 사라지지 않을 거다.
레오니에가 시를 읊듯 속뜻을 풀이하자, 케레나의 푸른 눈동자가 점점 작아졌다. 천진난만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던 아이는 없었다. 오만했던 귀부인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보레오티 공작 영애는 이제 웃지도 않았다.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검은 눈동자는 도저히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보고 뭐라고 했더라?”
“오, 오…….”
“으응?”
“그, 그게, 그러니까, 오, 오해를…….”
“아아, 오해.”
레오니에가 고개를 나긋하게 끄덕였다.
“오늘은 나보고 내 입장을 알아야 한다고 했지? 공작님께 이 이상 폐를 끼치지 말라고. 그럼 오늘 한 말은 무슨 뜻인데? 이번에는 전이랑 달리 속뜻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던데 말이야.”
레오니에가 케레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귀에는 너란 존재는 공작가에 민폐다, 라는 말처럼 들렸는데…….”
그런 거면 너무 서운하다며 레오니에가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부인이 보기에 나는 이곳에서 어떤 입장이야?”
보드라운 아이의 손바닥이 지나간 곳마다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케레나는 두렵고 고통스러운데도 차마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채 눈물만 떨구었다.
“천한 사생아? 어미도 없는 고아원 출신?”
턱에 맺혀 떨어진 눈물은 피로 물든 치맛자락에 스며들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파보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다급히 뿜어졌다.
‘큰일 났다……!’
맹수의 송곳니가 폭주했다. 레오니에의 등 뒤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황금빛 기운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아직 송곳니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추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기에 위험했다.
어린 맹수가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레오니에의 주변부터 천천히 얼어 가는 공기는 이제 현관 홀 전체로 퍼졌다. 아무리 추워도 따스한 온기를 품었던 저택 내부에 서리가 끼고 유리창에 바사삭, 금마저 갔다. 거기다 케레나가 변명을 할 때마다 바닥에서부터 크고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마구잡이로 두 사람을 에워싸듯 뻗어 올라왔다.
마치 맹수의 심기를 표현하는 듯, 얼음 가시는 이 모든 원흉을 꿰뚫을 것처럼 케레나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녀를 스쳐 간 얼음 끄트머리에는 핏방울이 맺혔다. 값비싼 원단 자락과 살점이 뜯겨나간 귀부인의 몸에서 붉은 피가 흘렀고, 어느새 입고 있던 치맛자락은 점점 짙은 빨강으로 물들었다.
겁에 질린 부인은 당장 거품 물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이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파사삭. 레오니에가 쓰다듬던 케레나의 희고 고운 볼에 차디찬 얼음이 꼈다.
‘어서 막아야 해!’
그러나 파보 역시 송곳니에 꿰뚫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레오니에를 면전에 둔 케레나나 송곳니에 면역 없는 사용인들보다야 나으나, 기껏해야 고작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게 전부였다.
‘주군이 계셨다면……!’
저 작은 송곳니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이 자리에 있기만 한다면!
파보가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난리 났군.”
그때.
“깽판 친다더니, 정말 치고 있었네.”
버르장머리 없는 딸 같으니.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 포장을 한 손에 든 채.
* * *
길었던 출정에서 돌아온 기사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보레오티 공작저를 보며 너도나도 감격에 겨운 눈을 했다. 그중 몇 명은 아예 콧물까지 훌쩍이며 소매를 축축하게 적셨다.
“드디어 돌아왔다……!”
“우리 집이다! 진짜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다거나, 기름진 안주에 차가운 술을 곁들이고 싶다는 둥. 혹은 혼자 있고 싶다며 중얼거리는 기사들까지.
호들갑스러운 수하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펠리오가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올 때 맛있는 거…….’
그의 손에는 아까 광장에 들렀을 때 산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 여섯 개가 포장된 아기자기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한 달간 제대로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몰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
모노는 슈크림이 든 상자를 연민 어린 눈초리로 바라봤다.
“부하들에게 시키시지 그러셨습니까.”
“나보고 사달라 했으니, 내가 사야지.”
펠리오는 상자를 쥔 손을 조심히 했다. 그래도 선물이라고, 펠리오가 포장지에 리본 장식까지 손수 직접 골랐다는 걸 아가씨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모노는 생각했다.
‘주인장은 오늘 밤잠 설치겠군.’
모노는 제과점 주인의 공포 어린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안 무섭겠는가. 평소와 다름없던 가게에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단체로 들이닥쳤으니 말이다.
하필 또 한 달 동안 마물을 사냥하고 노숙한 탓에 의도치 않게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기다 그들을 이끄는 펠리오가 또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폭신폭신 구름 슈크림 포장.’
마물의 피가 드문드문 묻은 갑옷을 두른 채 포장한 슈크림을 쥐고 돌아서는 펠리오는 적군의 수급을 손에 쥐고 당당히 개선하는 희대의 영웅처럼 보였다.
“……아가씨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한동안 제과점 문은 안 열리겠지만, 모노는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챙기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 변화가 상당히 기꺼웠다.
“안 투덜거리면 다행이고.”
아닌 척 심드렁히 말하는 펠리오의 입가는 느슨했다.
“어쩌면 현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지금쯤이면 낮잠 시간이군.”
“아가씨께서 주군을 많이 기다리실 겁니다.”
이것만큼은 틀림없다며 모노가 진정성 있게 말했다. 돌아오는 말은 없었으나, 모노는 펠리오가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이는 걸 눈치챘다. 펠리오도 어느 정도 레오니에의 마중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모노는 흐뭇했다. 충동적인 입양으로 맺어진 맹수 부녀가 진짜 가족이 되어 갔다.
‘아저씨!’
돌아온 펠리오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레오니에가 쉽게 상상되었다.
하나 그들을 반긴 건 그런 따스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리운 저택으로 돌아온 기사들의 발걸음이 일순 멈췄다. 한 달 만에 돌아온 보레오티 저택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살기와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의 숨통을 위협하는 무자비함에 글라디고 기사단이 얼어붙었다.
“……맹수의 송곳니?”
저의 중얼거림에 말도 안 된다고 반박하려던 모노의 얼굴이 일순 사색이 되었다.
보레오티에는 검은 맹수가 펠리오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주군!”
모노가 외쳤다. 펠리오는 이미 저택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맺힌 붉은 이채는 저택에서 느껴지는 서툴고 불안정한 송곳니의 기운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들 물러나라.”
“주군! 저희도 같이……!”
“방해다.”
펠리오는 따라오려는 기사들을 냉정히 내치고 혼자서 저택으로 향했다.
점점 선명해지는 레오니에의 힘을 느끼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힘이 불안정해. 상당히 흐트러져 있어.’
레오니에는 아직 송곳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아직 훈련도 받지 않은 어린 맹수는 기껏해야 제 성질을 못 이겨 송곳니 끄트머리나 아주 잠깐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 아이가 저택을 감쌀 정도로 엄청난 기운의 송곳니를 발동했다면, 추론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폭주.’
펠리오가 낮게 목을 울렸다. 자칫하다간 저택 내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레오니에 본인마저 크게 다칠 수 있는 긴급한 상황이다.
“……난리 났군.”
저택 안으로 들어간 펠리오는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기가 막혔다.
레오니에의 송곳니에 예고 없이 짓눌린 사용인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추위와 살기에 몸을 떨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내 편, 네 편 구분도 못하고 모두를 공격했다. 급격히 가라앉은 공기 탓에 여기저기에 성에마저 꼈다.
“깽판 친다더니 정말 치고 있었네.”
새하얀 입김을 흘리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펠리오가 팔을 내밀었다.
“레오니에.”
한 달 만에 품에 안은 아이는 제 기억보다 훨씬 묵직했다. 잘 먹고 잘 지냈는지 볼살도 제법 붙어 토실토실했다.
“아빠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하고.”
그러나 아이는 펠리오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아빠가 눈앞에 있는데도, 딸은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가쁜 숨만 느리게 내쉬는 레오니에는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분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탓이었다.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에는 황금빛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
곧 붉은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눈을 바라봤다. 크고 성숙한 송곳니가 멋모르고 날뛰는 어린 송곳니를 천천히 감싸며 짓누르자, 검은색을 어지럽게 가렸던 황금빛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주변을 차게 얼어 붙이던 공기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푸하!”
“허억, 헉!”
굳어 있던 파보와 코니가 꽁꽁 얼었던 숨통을 크게 텄다.
“가베르 경, 어찌 된 일이지?”
몸을 추스른 걸 확인한 펠리오가 물었다.
“……아가씨를 지키지 못해 송구합니다. 저 역시 함부로 아가씨의 의중을 짐작할 수는 없으나, 테드로스 백작 부인이 아가씨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검붉은 눈동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케레나를 향했다.
얼음 가시 속에 갇힌 케레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괴상한 신음을 흘리는 몰골이, 한때 사교계를 주름잡았다는 화려한 과거마저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몸에 난 상처에는 흉물스러운 피딱지가 굳은 채였다.
“아무래도 부인이 아가씨께 도를 넘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파보가 레오니에와 케레나가 나누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전했다.
그러나 사정을 전해 들은 펠리오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게…….’
펠리오의 무반응이 얼마나 살 떨리는지, 파보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주체 못 하고 날뛰던 레오니에의 송곳니와는 전혀 다른, 절제되었기에 더욱 날카롭고 소름 돋는 송곳니가 홀을 아주 느리고 확실하게 장악했다.
정작 맹수는 품에 안긴 제 어린 새끼를 살필 뿐이었다. 어느새 송곳니를 가라앉힌 레오니에는 폭주의 여파로 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동그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가쁜 숨소리에 듣는 사람마저 괴로웠다.
“……참 신기하군.”
아픈 딸을 조금 더 조심히 고쳐 안은 펠리오가 슈크림 상자를 파보에게 넘겼다. 그 와중에 상자는 구겨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내가 북부를 비운 동안.”
그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케레나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고요한 홀에 뚜벅뚜벅 계단을 오르는 검은 맹수의 발걸음 소리만 또렷이 울렸다.
그러다 걸음을 멈춘 맹수가 송곳니를 내밀었다.
“다들 장래 희망이 자살로 바뀌었나?”
송곳니에 몸을 꿰뚫린 케레나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를 무심히 흘겨본 펠리오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계단을 마저 올랐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저리도 애원하는데. 거 참 이해를 못 하겠다며 중얼거리던 맹수가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
건네받았던 슈크림 상자를 들고 있던 파보는 펠리오가 올라간 계단을 멍하니 바라봤다. 뚜벅뚜벅, 점점 멀어져 가던 펠리오의 발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마치 송곳니에 꿰뚫렸던 케레나가 채 지르지 못한 가느다란 단말마의 비명 같았다.
차갑던 현관 홀은 어느샌가 원래의 따스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검은 맹수가 사라졌음에도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탓에 홀 중앙에 쓰러진 케레나가 옮겨지는 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 * *
달빛이 스며든 어둑한 밤이 레오니에를 반겼다.
“…….”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레오니에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곧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급격한 어지러움에 뒤로 쓰러졌다.
하나 머리에 닿은 건 푹신한 베개가 아니었다.
“쯧.”
크고 단단한 손이 레오니에의 머리를 받쳤다.
“아직 열이 남았으니 누워 있어.”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어중간하게 뜬 머리는 곧 베개 위로 천천히 안착했다. 레오니에는 두통을 견디며 고개를 아주 살짝 왼쪽으로 돌렸다. 그곳엔 의자를 침대 옆까지 끌어와 앉은 펠리오가 있었다.
“아저씨…….”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을 펠리오가 붙잡았다. 한껏 가라앉은 아이의 목소리는 씩씩하던 평소와 전혀 달랐다.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느슨하게 풀린 소매나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칼을 보니 꽤 오랫동안 제 옆을 지켰다는 건 짐작됐다.
“언제 왔어?”
“이틀 전에.”
“이틀…….”
“그리고 넌 그동안 계속 잠만 잤고.”
“……송곳니 때문에?”
드문드문 끊긴 기억 너머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린 레오니에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는 눈 밑까지 이불을 끌어 올린 레오니에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잘못했어요…….”
“갑자기 무슨 존대야.”
“그치만, 잘못했잖아…….”
“뭘 잘못했는데?”
펠리오가 이불을 도로 턱밑까지 내리며 물었다. 내려다보는 검은 눈은 도대체 레오니에가 무슨 뜻으로 저리 말하는 건지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고 쳤어…….”
레오니에가 다시 이불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나 펠리오는 잡은 이불을 놓지 않았다.
“무슨 사고?”
“…….”
“송곳니 쓴 거?”
“응…….”
아이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다. 풀이 팍 죽은 것이 처음 게이트를 타고 넘어와 멀미를 크게 겪었던 때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그땐 적어도 지금처럼 펠리오의 눈치를 살피지는 않았으니.
“일부러 썼어?”
펠리오가 미열이 남은 레오니에의 이마를 쓸며 물었다.
“아니야. 아닌데…….”
레오니에는 저보다 낮은 체온에 몸을 희미하게 떨었다. 이마를 식혀 주는 커다란 손등이 어찌나 다정하게 느껴지는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이내 훌쩍이는 콧소리가 처량하게 울렸다.
“……화가 났어.”
지금 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레오니에가 베개에 고개를 푹 박았다.
“내 입장을 잘 알아야 한대.”
하나 얼굴을 숨겼는데도 도리어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이 울컥울컥 흘러넘쳤다. 봇물 터지듯 멈추지 않는 감정의 격렬함이 작고 여린 아이의 어깨를 쉴 새 없이 흔들고 눈시울을 축축하게 적시었다.
“내 입장이, 도대체 뭔데?”
그건 레오니에가 단 한 순간도 떨치지 못한 마음속 돌덩어리였다.
“나도 모른단 말이야…….”
아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어리고 약한 아이로. 익숙했던 가족들도, 지겨울 정도로 자주 다녔던 장소도, 항상 들고 다니던 물건들도 전부 사라진 채로.
갑작스러운 변화가 두려웠지만, 이는 아주 잠깐이었다. 곧 이유 모를 폭력과 부당한 대우가 아이를 덮쳤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목표는 점차 시들었고, 이곳에서 살아나가겠다는 일념만을 위해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저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며 잠이 들 때마다 치를 떨었다.
“아저씨.”
그러다 검은 맹수를 만났다.
“나는 누구야?”
기적처럼 소설 속 주인공을 만나고, ‘레오니에’라는 이름을 선물 받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진한 대접을 받고 상냥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아주 잠깐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한 ‘나’의 것이 없었다는 걸.
“기억도 없는 고아? 운 좋은 입양아? 사랑의 도피를 떠난 바보 같은 여자의 딸?”
아니야.
‘나’는 그런 게 아니었어.
이곳에선 절대 말할 수 없는 이름이 있었고,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이 있었고, 지겹도록 익숙했던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 두고 온 모든 게 소중하고 애틋했다.
케레나가 비꼬아 묻던 ‘입장’은 그런 레오니에가 애써 무시하고 피했던 상처를 잔인하게 헤집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공작의 딸이, 레오니에 보레오티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흑, 흐윽…….”
차마 외치지도 못하는 흐느낌이 알록달록 꾸며진 어린 아가씨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넓은 침대 위에 홀로 몸을 웅크린 채 흐느끼는 아이는 무척이나 작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 길을 잃고 쓰러져 우는 어린 짐승과 닮았다.
펠리오는 완벽한 타인을 관조하듯, 그런 생각을 담담히 하며 아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하나 곧 가슴 깊이서 솟아오르는 감정에 숨을 멈칫했다.
“레오니에.”
지금껏 계속 허공을 맴돌던 커다란 손이 아이의 옆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레오니에.”
펠리오가 손가락을 슬그머니 움직여 이불보를 꽉 움켜쥔 아이의 손을 건드렸다.
“레오.”
조심히 손등을 어르던 손가락은 이내 커다란 손으로 바뀌어 아이를 감싸 안았다. 한참을 고개 숙여 운다고 얼굴이 시뻘겋게 젖은 아이가 그제야 눈을 빼꼼 내밀었다.
펠리오는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으아아앙!”
그 모습에 결국 레오니에가 울음을 터트렸다. 제 감정을 비웃는다고 착각해서였다.
“왜, 왜 웃어! 왜 웃냐고!”
“안 웃었어.”
“웃었잖아! 나 바보 같다고 비웃었잖아!”
“네가 지금 바보 같은 건 알고?”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레오니에를 가뿐히 피하며, 펠리오는 이불 채 아이를 감싸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울음을 그치며 히끅, 딸꾹질을 했다.
“바보 같은 고민이다.”
펠리오가 소매로 아이의 눈물과 콧물을 슥슥 닦아 주었다.
“아주 바보 같아.”
“…….”
“멍청한 딸 같으니.”
펠리오는 그 말을 끝으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코를 훌쩍이던 레오니에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멍하니 펠리오를 바라만 봤다. 그러다 느껴지는 안정적인 토닥임에 시선을 돌리니, 펠리오가 등을 툭툭 토닥이며 제 가슴 쪽으로 레오니에의 몸을 끌어당겼다.
머리에 닿은 가슴은 전과 똑같았다. 처음 게이트를 넘고 멀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아저씨의 가슴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따뜻하고 튼튼한 근육이었다.
“근육…….”
“……너도 징하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좋은 걸 어떻게 해……!”
“아직 덜 아팠군.”
징징거리는 짜증에 조금 질린 듯한 웃음이 위에서 들렸다. 둘은 그렇게 밤을 보냈고, 어느새 커튼 아래로 희미한 빛이 드러났다.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 잠이 들었고, 아빠는 잠든 딸을 여전히 품에 안으며 토닥거렸다.
* * *
며칠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 레오니에는 저 때문에 아직도 침대 신세인 사용인들을 찾아가 사과를 건넸다. 아무리 서툴러도 송곳니는 송곳니라고, 당시 현관 홀에서 근무하던 사용인 다섯 명이 지금도 병가 중이었다.
“미안해.”
레오니에는 사과를 쓴 짧은 편지와 쿠키가 든 봉지를 건네었다.
“많이 아파? 괜찮아……?”
축 처진 눈썹과 우물거리는 목소리는 아이가 얼마나 미안해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저희는 괜찮아요.”
“아가씨가 더 걱정이에요.”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그러나 사용인들은 도리어 레오니에를 걱정했다. 레오니에의 송곳니가 폭주한 이유는 예절 교사로 온 테드로스 백작 부인 탓이란 걸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주인님께서 그 여자를 크게 혼내실 거예요!”
레오니에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코니가 건강한 혈색을 자랑하며 화를 냈다.
“게다가 저희야 오랜만에 푹 쉬고 좋지요.”
“그런데, 가베르 경께선 괜찮으신가요?”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묻는 코니를 보며, 사용인들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실은 코니 저게 가베르 경께 마음이…….”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날 날 도와주셨던 게 고마워서…….”
“뉘에에, 그러시군요오.”
코니 옆에 있던 미아가 얄밉게 말투를 따라 했다.
“사실 저희 지금 땡땡이에요.”
아픈 건 며칠 전에 다 나았다며 사용인들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키득거렸다.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푼 레오니에도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비밀을 지키겠다 약속했다.
“펠리카.”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온 레오니에가 종종걸음으로 하녀장에게 다가갔다. 마침 펠리카는 아르데아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펠리카가 몸을 낮추며 안색을 살폈다.
“어머, 아가씨. 아직 뛰시면 안 되세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르데아는 언젠가 그 여자가 사고 칠 줄 알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수도에서 지낼 적, 그의 제자였던 지방 귀족 출신 영애가 사교계 모임에서 케레나와 그 일당들에게 호되게 당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세상에나.”
펠리카 부인이 진저리를 쳤다.
“소문 안 좋은 사람인 줄이야 알았지만, 그래도 설마 보레오티 저에서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요. 우리 어린 아가씨께서 야무지고 똑똑하니 그 못된 심보를 일찍 알아채신 거지, 어쩜 그리 어리석고 비열한지.”
“그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말라고, 아르데아가 레오니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레오니에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아줌마가 있었지!”
아기 맹수는 케레나에 대해서 아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히려 펠리카 부인과 아르데아가 언급하고 나서야 그 여자의 존재와 저 때문에 크게 다쳤을지 모른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먼저 시비 걸었잖아요.”
레오니에가 두 손과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쩌겠냐는 듯 고약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 사용인들이 저 때문에 다친 건 무릎 꿇고 손을 싹싹 빌어서라도 사과할 수 있지만, 케레나가 어찌 되었건 전혀 하등 관심 없었다.
“우리 아가씨는 어쩜 이리 씩씩하고 용맹하실까. 과연 북부의 맹수다운 기개세요!”
펠리카 부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에헴, 칭찬받은 레오니에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가슴을 내밀었다.
“정서 교육엔 썩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나마 아르데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정도의 걱정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 역시 케레나의 도 넘은 행위를 동정할 생각이 없기에 이내 수긍하며 주름진 미소를 비치었다.
“저기, 근데…….”
레오니에가 빨간 구두코를 바닥에 콕콕 찍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아, 아저씨는?”
* * *
‘천국은 항상 가까이 있다고?’
어느 유명한 성인이 남긴 명언을, 루페는 속으로 한껏 비웃으며 반박했다.
‘천국은 무슨.’
지옥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루페는 제 눈 앞에 펼쳐진 지옥을 관조했다.
가장 앞에 앉은 펠리오 보레오티 공작을 기준으로, 그의 호출을 받고 저택에 모인 북부 귀족들이 죄지은 사람처럼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숨 한 번 내쉬는 것도 허락받아야 할 것처럼 행동을 조심했다.
그들은 펠리오가 직접 초대한 귀한 손님들이었다.
하나 아직 어떤 대화도 나오지 않았다.
‘10분은 지났을까.’
루페가 흘러간 시간을 가늠했다. 영겁 같은 10분이었다. 초대받은 저들에겐.
모두의 앞에 찻잔이 놓여 있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하녀 두 명이 잘 우려낸 따뜻한 차가 지금은 미지근하게 식은 채였다. 누구 하나 차 한 모금 입에 머금지 못했다.
오로지 펠리오 혼자 즐길 뿐이었다.
‘레이디 그레이.’
찻잔에 따라진 홍차 이름이었다.
레이디 그레이는 아직 차에 익숙지 않은 초심자나 귀족 아이들이 다과에 입문할 때 가장 먼저 마시는 차 종류로, 펠리오의 취향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그는 차를 즐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보란 듯이 레이디 그레이를 마시고 있다.
저 홍차에 내포된 의미는 아주 무거웠다. 보레오티 가문에서 유일하게 ‘레이디’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두 달 전 펠리오가 고아원에서 데려왔다는 수수께끼의 사생아뿐이었다.
공작은 그 아이에게 손수 ‘맹수’의 이름을 지어 주고 가문의 적에 올렸다.
‘홍차는 찻잎 색이 어두워 검은 차라고도 불리지.’
홍차계의 레이디.
검은색을 몸에 품은 공작의 딸.
레이디 그레이는 레오니에 보레오티를 의미했다.
“……내가.”
한참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의 암울한 미래를 예상하던 루페가 고개를 들었다.
“북부를 비운 지 얼마나 됐지?”
침묵하던 펠리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펠리오의 움직임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맹수를 떠올리게 했다. 심지어 자신이 만든 이 자리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펠리오가 조금 전까지 마시던 찻잔은 바닥을 내보였다.
“약 삼 년입니다. 정확히는 3년하고 2개월입니다.”
루페가 곧장 답했다.
“연차로 따지면 4년인가.”
일어난 펠리오는 보폭이 넓은 걸음을 천천히 움직이며 초대한 귀족들이 앉은 자리를 어슬렁거렸다. 마치 사냥감을 탐색하는 듯, 그들의 안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귀족들은 몸을 흠칫 떨거나 괴이한 신음을 짧게 흘렸다.
펠리오의 심드렁한 입가에 비아냥 어린 조소가 설핏 맺혔다. 결국은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무참히 무너질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주제 파악 못 하고 설치고 다녔다니.
“루페 리코스 자작.”
펠리오가 루페에게 턱짓했다. 여기서 나가란 뜻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간 루페는 닫힌 문을 등지고 참았던 숨을 토했다.
‘드디어 지옥에서 벗어났다……!’
루페는 맹수의 송곳니를 자의 아니게 몇 번이나 가까이서 경험한 바가 있다. 그래서 저기에 더욱 있고 싶지 않았다. 수없이 경험해도 익숙지 않은 공포감이 선명해, 저곳에서 벗어났음에 안심하며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찰나였다.
“루페 아저씨.”
꾹꾹, 누군가 바짓자락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게 된 루페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거기엔 새까만 머리를 양 갈래로 나눠 조그맣게 묶은 레오니에가 있었다.
* * *
검은 맹수가 어슬렁거리는 회의실은 조용했다.
루페가 회의실을 도망치듯 나간 동시에 펠리오는 자신의 모든 소리를 잠재웠다. 맹수는 사냥할 때 항상 발소리를 지우고 기척을 숨겼고, 그것이 이곳에 모인 어리석은 치들을 압박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에.”
흉흉한 조소 너머로 느껴지던 위압감이 조금씩 귀족들의 숨통을 조였다.
“눈치 없이 설치고.”
검은 눈에 조용한 살기가 어렸다.
“나대는 꼬락서니는.”
펠리오가 한마디씩 말을 끊어 곱씹을 때마다 귀족들의 목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자신의 목을 쳐달라는 듯 푹 숙인 꼴이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그렇게라도 저 맹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물며 맹수는 아직 송곳니조차 내밀지 않았다.
“제발 죽여달라는 간청인가?”
진심으로 궁금하단 듯 물어보지만, 펠리오는 그들의 대답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떠오르는 레오니에의 처절한 눈물과 괴로운 흐느낌은, 펠리오에게 주체 못 할 살의와 분노를 들끓게 했다. 누구보다 용감하고 씩씩한 아이가 그렇게까지 홀로 참고 지냈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다.
하나 펠리오는 자신 역시 저들과 다를 게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저 치들이 자기 입맛대로 떠드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고, 레오니에가 수상하다고 말한 케레나를 오판하여 아이 옆에 데려온 건 결국 펠리오 자신이었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실책이었다.
‘아이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문득 떠오르는 카라의 질책이 쇳덩어리처럼 묵직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레오니에를 돌보고 키우는 저의 행동에서 그런 식의 오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오니에조차 충동적인 입양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그 탓에 아이가 제게 기대지 않고 홀로 참았던 거라면, 꽤 속이 쓴 일이다.
‘눈치가 좋고 영리하다는 게…….’
마냥 좋고 기특한 줄 알았더니. 속을 보이지 않는 의젓한 자식은 다른 의미로 부모를 쓸쓸하고 서글프게 했다.
“……테드로스 백작.”
그런 제 혼란스러운 감정을 깊이 숨긴 채, 펠리오는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안색이 좋지 않았던 사내를 불렀다. 이름이 불린 테드로스 백작은 의자가 들썩일 만큼 몸을 떨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저, 저는…….”
“그러고 보니 부인은 잘 지내나?”
테드로스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의 귀에 들린 조금 전 펠리오의 안부는 만약 네 부인이 잘 지내고 있다면 내가 손수 못 지내게 만들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덜컹!
“소, 송구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어코 테드로스 백작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부인의 잘못으로 공작저에 불려간 불쌍한 사내는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엉엉 울다시피 빌고 또 빌었다.
누구 한 명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테드로스 백작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테드로스 백작을 제외하고 여기 모인 귀족들은 펠리오가 북부에 없는 동안 제 이득을 위해 ‘눈치 없이 나댄’ 전과가 하나씩 있었다. 고아원 일을 마치고 돌아온 루페가 밤을 새우며 분풀이하듯 샅샅이 찾아낸 치들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또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었다. 레오니에에 관한 소문을 유난히 악질적으로 흘러나오게 했다는 점이다. 그 소문이 흘러 케레나 테드로스에게까지 전해졌고, 그것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나대다가 그 꼴이 난 거다. 듣기로는 송곳니에 크게 당한 케레나가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다고 했다.
“앞으로 보레오티 저택에 기거하는 모든 이의 눈과 귀에.”
물론 그건 펠리오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케레나 메레오카의 흔적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야 할 거다.”
한참을 울며 빌던 테드로스 백작이 움찔했다. 펠리오는 아내를 잘못 둔 죄밖에 없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사람 보는 눈 없는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적어도 테드로스 가문은 펠리오가 없는 동안 묵묵히 제 영지만을 성실히 다스렸다.
그러니 케레나와 이혼만 한다면 너의 가문에 해가 될 일은 없을 거다.
그런 취지를 담아 케레나를 결혼 전 가문의 성을 붙여 불렀다. 벌은 나중에 따로 케레나와 그를 먹여 키웠던 부모에게 응당 물을 예정이었다.
다행히 이곳에 케레나의 친부인 메레오카 백작도 있었다. 케레나를 연상케 하는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백작이 제게 닥친 미래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몸을 일으킨 테드로스 백작은 코를 훌쩍이며 허리를 마구 굽신거렸다. 펠리오가 이만 나가 보라며 손짓했다. 꽁무니 빠지듯 도망치는 테드로스 백작이 사라지기 무섭게, 검은 눈동자에 붉은 이채가 섬뜩하게 어렸다.
“……헉!”
누군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제 손과 목을 움켜쥐었다. 마치 전염병처럼 다른 귀족들도 연이어 몸을 떨거나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괴로워했다. 어느 이는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몸이 기울였다.
“두 번째는 없다.”
맹수가 송곳니 끄트머리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사냥감들은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사경을 헤맸다. 맹수는 그저 노려만 볼뿐, 송곳니가 번뜩이는 입에서는 위협하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 터무니없는 소문에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은 건, 눈앞에서 죽여달라고 일일이 날뛰는 너희 치들을 상대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내리는 경고 역시 아주 가벼운 축이었다. 정작 이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귀족들은 죽기 직전이었지만.
“그럴 시간에 내 딸과 벽난로 앞에서 뒹굴고 말지.”
실제로도 펠리오는 폭설이 치던 날 동안 그렇게 지냈다. 제 무릎 위에 앉아 딸기 우유 사탕을 조심히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레오니에는 펠리오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배시시 웃었다.
‘아저씨!’
저를 보며 방싯거리는 얼굴은 펠리오의 가슴을 먹먹히 덥혔다.
“마지막 경고다.”
테이블을 가볍게 짚은 커다란 손에서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맹수의 송곳니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나자, 귀족들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몸을 팔딱이며 고꾸라졌다.
“내가 지금 봐주고 있다는 걸 기억해라.”
검은 맹수는 차가운 눈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다음은 죽음이었다.
* * *
레오니에는 루페와 함께 회의실에서 멀리 떨어진 응접실에서 펠리오를 기다렸다.
레오니에는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싶었으나, 루페가 ‘공작님이 송곳니를 쓸 게 뻔하잖아요.’라며 필사코 거부했다.
“루페 아저씨는 안 다쳤어요?”
“저는 제 집무실에서 일하던 중이었답니다.”
기다리는 동안 레오니에는 저 때문에 다친 곳은 없는지 루페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걱정했다. 다행히 루페는 당시 있었던 일조차 몰랐을 정도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단 건 느꼈죠.”
멀쩡한 몸이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쾅쾅 뛰었다고.
“맹수의 송곳니가 그만큼 강하거든요.”
그건 또 다른 기억 속에서 원작을 읽었던 레오니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해 본 송곳니는 글로 본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소설 속 맹수의 송곳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능으로 멋들어지게 묘사됐다. 오러나 마나 같은 힘을 합쳐도 이기지 못한다는 작가의 편애 섞인 설정까지 덧붙여져 있어, 펠리오의 매력을 또 한 번 이끄는 장치로 쓰였다.
‘마냥 멋있는 게 아니었어.’
반면, 맹수의 송곳니를 제 몸으로 경험해 본 지금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레오니에는 폭주의 여파로 송곳니를 발동했던 당시를 드문드문 기억하지만, 분명 눈앞에 있던 케레나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던 감정만큼은 소스라칠 정도로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맹수의 송곳니는 사람 목숨쯤이야 칼로 베개를 찢어 버리듯 날카롭고 가차 없었다.
“……무서운 힘이에요.”
소파에 앉아 붕 뜬 제 두 다리를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눈이 한없이 깊고 진지했다.
루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쓰게 웃었다. 사람이란 보통 강한 힘을 지니면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귀족 아이들이 제 가문의 명성만 믿고 설치는 것도 그런 예이고, 지금 회의실에서 펠리오에게 죽어라 혼나고 있을 귀족들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하나 레오니에는 자신의 힘이 가지고 올 여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이답지 않은 진중함이 기특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아가씨는 조금 더 생각 없이 사셔도 될 텐데.”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애 맞는데요…….”
도대체 본인이 몇 살인 줄 아시는 거야.
애늙은이 같은 소리에 루페가 맥없는 웃음을 흘리던 차였다.
“레오니에.”
일을 다 마친 펠리오가 어느새 응접실까지 직접 행차했다. 팔에는 웬 옷가지가 걸린 채였다.
“아저……!”
반사적으로 달려나가려던 레오니에가 문득 멈춰 섰다. 펠리오와 루페가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평소라면 당장 안겨들어 재잘재잘 떠들어야 정상일 텐데. 선뜻 다가서지 못한 레오니에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참지 말고 가라. 그거 병 된다.”
나름 신경 쓴 펠리오가 한마디 했더니, 레오니에가 빽 소리를 질렀다. 뒤에 있던 루페도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수줍어하는 거잖아! 왜 이리 눈치가 없어!”
“수줍다는 애가 소리는 잘도 지르네. 귀청 떨어지겠다.”
“그리고 여자에 대해 너무 모르네! 그럴 땐 ‘꽃 따러 간다’고 둘러 말해야지.”
“꽃은 무슨 죄야.”
세상에 핀 모든 꽃 다 꺾이겠다고, 펠리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어서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레오니에는 잠시 눈을 여기저기 굴리다 이내 포기한 듯 쫄래쫄래 다가갔다.
“루페.”
펠리오가 챙겨 온 옷가지를 레오니에에게 손수 입히며 말했다. 팔에 걸려 있던 옷가지는 레오니에가 저택 내나 정원을 산책할 때 주로 입는 망토였다.
“손님들이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가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루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방을 완전히 나서기 전, 루페는 레오니에에게 다음에 또 만나자는 듯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레오니에도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펠리오가 이내 어깨에 힘을 빼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몸은?”
“괜찮아.”
“열은?”
“열도 없어.”
이거 보라며 레오니에가 제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곧 그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왔다. 펠리오의 손은 아이의 얼굴을 거의 가릴 정도로 컸고, 레오니에는 그게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이제야 웃네.”
작은 중얼거림에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펠리오는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왜 또 안 웃어?”
“어어…….”
두 부녀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사실, 레오니에는 지난밤 펠리오에게 엉엉 우는 모습을 보인 게 마음에 걸렸다. 그 이후 펠리오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조금 불편했다.
‘말실수한 건 없겠지?’
감정이 좀 격해진 탓에 깊이 숨겨 두었던 그리움이 터져 버려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다. 다시 그때를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겉모습이야 나약한 일곱 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행히 펠리오는 그날의 일을 딱히 꺼내지 않았다. 저를 살피는 눈빛에서도 쓸데없는 동정이나 괜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펠리오 보레오티는 항상 그러했든 나른한 표정으로 흉흉한 위압감을 기가 막히게 드러내는 중이었다.
“……근데, 귀족 손님들 배웅은 카라 할머니 일이잖아.”
딱히 할 말 없던 레오니에가 펠리오와 루페의 조금 전 이상했던 대화를 괜히 끄집어 물었다. 막상 물어보니 이상하긴 했다. 왜 귀족 손님들이 저택을 나서는데 공작의 비서인 루페가 이를 확인하러 간단 말인가.
“아아, 그거.”
별일 아니라며 펠리오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일종의 감시지.”
“감시?”
“쥐새끼가 돌아다니는 듯해서.”
나른히 지은 펠리오의 조소는, 감히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되지도 않은 짓거리를 벌인 놈들을 향한 찬사와 애도였다. 동시에 이번에 쥐새끼를 소탕하면서 북부를 한 번 제대로 청소해야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3년간 비운 자리가 생각 이상으로 여파가 큰 모양이었다.
유달리 요란했다던 마물의 번식기, 그런 것치고는 사냥 내내 눈에 띄지 않던 새끼 마물들. 원래라면 사냥 대상도 아니었던 얌전한 마물의 난폭한 행동들까지.
‘마물 불법 거래 정황.’
가끔 마물은 신비로운 매력이 있다며, 이를 길들여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냐며 겉멋만 잔뜩 들고 머리는 종이봉투처럼 가벼운 귀족들이 지껄이곤 했다.
그러다 뒤에서 몰래 마물을 잡아들이는 일이 일어나곤 하는데, 역사에도 몇 번인가 기록된 어리석은 사태가 또 반복되려고 한다.
다 자란 마물을 잡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새끼 마물은 약물이나 중급 마법 등으로 포획할 수 있기에 역사에서도 종종 마물 거래 정황이 기록된 적이 있다.
‘하나 마물은 마물인지라.’
항상 끝이 좋지 않았다.
새끼 때나 잠시 귀엽고 얌전하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성체가 되면 포악한 성품을 드러내 사람을 해치고 심한 경우엔 그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그럼 자연스레 뒷수습은 마물마저 씹어 죽인다는 보레오티 공작가의 몫이었다.
‘잡히면 어떻게 족치지.’
제게 이런 귀찮은 뒤처리를 넘긴 쥐새끼들을 가로로 찢을지, 세로로 찢을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일 하긴 하는구나.”
중얼거리는 레오니에의 목소리엔 약간의 감동마저 어려 있었다.
‘원작에서는 그런 거 잘 안 보여 줬지.’
소설은 바쁜 공작, 북부의 주인이라는 식으로 펠리오의 자리와 바쁜 업무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긴 했다. 하나 여느 소설 속 남주인공처럼 여주인공과 만나 산책하고, 밥 먹고, 침대 위에서 넘어진 김에 같이 운동하고 또 운동하느라 바쁘셨다.
펠리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욕 같은 칭찬 고맙다.”
말 안 듣는 딸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칭찬해 줘도 그런 식으로 받으면 내가 아주 서운해.”
“서운할 것도 없다.”
“그리고 어차피 루페 아저씨가 일 더 하잖아.”
“돈을 그렇게 주는데 일이라도 많이 해야 안 억울하지.”
“세상에서 제일 못된 상사가 여기 있네.”
두 부녀의 대화는 항상 이랬다. 도움이 되는 정보는 크게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마음 편하게 주고받으며 티격태격했다. 일전의 펠리오라면, 이런 대화를 나눌 시간에 잠이나 자는 게 효율적이라고 여기며 대화 자체를 끊어 버렸을 거다.
“너, 살은 쪘나?”
하나 지금은 펠리오가 먼저 실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카라 할머니랑 펠리카가, 겨우 찌운 살 아프면서 다 빠졌다고 그랬어.”
그러면 레오니에가 또 다른 대화를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이토록 하릴없는 대화는 펠리오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지루한 일상에 편안한 감정을 선물했고, 저를 보며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는 레오니에는 그보다 더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솔직히 나는 살보다 근육을…….”
“레오.”
“불끈불끈 키우고…… 응?”
근육을 희망하던 레오니에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오니에는 이름이 길잖아.”
너무 놀라 굳어 버린 레오니에의 궁금증을 눈치챈 펠리오가 무심히 답했다.
“내가 내 딸 애칭으로 부르겠다는 게 뭐.”
본인도 익숙하지 않은지 괜히 눈을 피하며 뒷말을 덧붙였다.
조금 전 펠리오가 대수롭지 않게 부른 ‘레오’는 ‘레오니에’란 이름을 줄인 애칭이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이끼리 애정을 담아 부르는 애칭으로, 펠리오가 처음으로 레오니에를 불렀다.
레오니에는 바로 옆에서 직접 자신의 애칭을 듣고도 믿지 못한 표정이었다.
“레오.”
그래서 펠리오가 다시 확인이라도 시키듯 애칭으로 아이를 불렀다.
“나는 네 아빠고 가족이다.”
조금 전까지 나른하던 눈가에 힘이 가득했다. 아이를 지그시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는 어째선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덩달아 눈을 마주한 레오니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출렁이는 제 마음을 겨우 다스렸다.
펠리오가 자신을 ‘아빠’라고 지칭하는 건 자주 들었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게 발밑이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지금 펠리오 품에 안겨 다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왜 그런지 알아?”
“그거야 아저씨가 날 입양…….”
“틀렸어.”
툭, 하고 손가락이 조그마한 콧잔등을 건드렸다.
“네가 내 가족이 되어 줬기 때문이야.”
레오니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저씨!’
걸레짝도 될 수 없을 허름한 옷자락을 걸친 꾀죄죄한 아이가 감히 보레오티 공작 앞을 막아섰던 순간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족이 되었다.
“그러니 네가 누구인 걸로 고민할 필요 없어.”
도망친 사촌 여동생의 딸도, 고아원 출신 사생아도, 북부의 검은 맹수도. 전부 필요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건 ‘아빠와 딸’, ‘가족’. 그게 다였다. 나머지는 주변 사람들이 제 입맛대로 지껄이는 쓸데없는 잡소리에 불과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보며 입가를 올렸다.
“네가 이번엔 진짜 아팠나 보다.”
평소처럼 대들기는커녕 이렇게 울기나 하고.
펠리오는 어느새 고개를 떨궈 눈물을 뚝뚝 흘리는 레오니에를 제 어깨에 기대도록 살짝 끌어당겼다. 곧 축축한 것이 옷자락에 스며들었고, 아이의 흐느낌은 점점 커졌다.
“흑, 흐윽……!”
레오니에가 울먹거렸다. 어느새 짧은 두 팔이 펠리오의 목을 감싸 안았다. 울먹이는 소리 사이로 부들부들 떨리는 단어가 힘겹게 토해졌다.
“아, 아빠…….”
“그래.”
“아빠……!”
“그래, 레오.”
답하는 펠리오의 목소리에 잔잔한 기쁨이 깔렸다.
“아빠한테 뭐든 말해.”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큼지막한 손은, 지난밤에 아이의 등을 토닥이던 것처럼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이내 어깨에 닿은 조그만 머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고아원에서 맞았던 것도, 배가 너무 불러서 토할 것 같은 것도.”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것도, 딸기 우유 사탕을 병에 한가득 모으고 싶다는 것도, 고아원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것도, 일하느라 집을 비우는 아빠한테 서운했던 것도.
말 못 할 그리움에 몸서리칠 때도.
“바보 같은 고민이어도.”
예를 하나하나 드는 펠리오의 말투는 고저가 없었다. 하나 그 단조로움이 레오니에에게는 아주 큰 위로가 되었다. 다정한 자장가보다 안락하고, 보송보송한 이불보다 포근했다.
레오니에는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며 펠리오의 품에 안겼다.
“아빠…….”
가슴 속을 어지럽혔던 감정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낯선 세상에서, 낯선 몸으로 깨어난 뒤부터 하염없이 떠오르던 그리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희망이 무너질 때마다 차곡차곡 쌓였던 절망. 펠리오를 만난 이후로는 혹여 저 때문에 그의 미래가 어긋나면 어쩌나, 싶은 미안함까지.
지금껏 홀로 견디어냈던 그리움이 아주 조금씩 뒤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리움과 말할 수 없는 기억, 감정들이 한 권의 동화책이 되어 갔다. 그리고 레오니에의 가슴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이란 이름의 책장에 꽂혔다.
아주 가끔은 떠오를 거다.
이렇게나 소중했었지, 라며 동화책을 꺼내 추억하면 눈물이 맺힐지도 모른다. 너무나 그립고 사랑스러운 내용이니 레오니에는 한참 동화책을 붙잡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엉엉 울지도 몰라.
하지만 마지막엔 분명 책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거다.
그리고 아빠한테 달려갈 거다.
‘신기해…….’
펠리오의 품에 안긴 레오니에가 코를 훌쩍였다. 저만큼이나 쿵쿵 뛰는 아빠의 심장 소리가 이렇게나 기쁘고 안심되다니. 레오니에는 소매로 눈가를 벅벅 훔쳤다.
“별거 아닌 거로 울긴.”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손을 치우고, 대신 저의 소매로 눈가를 톡톡 훔쳤다.
“다 울었어?”
레오니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 아래까지 내려온, 양 갈래로 높이 묶은 머리가 흔들렸다. 길어진 머리는 레오니에가 보레오티 공작저에 머문 시간과 같았다.
“손잡고 걸을까?”
“응.”
눈밭에 발을 내디딘 레오니에는 제 앞에 내밀어진 커다란 손을 꼭 쥐었다. 큼지막한 손바닥에 단풍처럼 작은 손이 걸려 있는 모양새였다.
세상이 아직 낯설어 괜히 허세 부리며 앙앙 짓기만 했던 겁쟁이 옆에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듬직한 아빠 맹수가 있었다.
“아빠.”
레오니에가 젖은 눈을 휘었다.
“나 아빠 꽤 좋아해.”
“……‘꽤’는 뭐야.”
“놀리는 건 좀 싫단 뜻이야.”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러나 펠리오의 얼굴에는 조금 전 내뱉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용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아기 맹수가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기에 아주 완벽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