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저씨와 고아
“……으아아앙!”
빨간 리본을 머리에 단 예쁘장한 아이의 눈에 공포가 가득 차고, 이내 눈물이 맺혔다. 이윽고 아이는 세상이 떠나가라 자지러지는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괴물이라도 만난 것처럼 경기를 일으켰다.
얼굴에 짜증의 기색이 어린 펠리오 보레오티 공작은 미간을 좁히며 손을 휙휙 저었다. 문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지켜보던 고아원 관계자가 서둘러 우는 아이를 밖으로 데려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줄어들던 때.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지?”
후우, 짧은 입바람에 검은 앞머리가 흔들렸다. 무덤덤한 검은 눈동자에 지루함이 어렸고, 그 감정 그대로 아이가 있던 자리를 아주 잠깐 보던 펠리오의 시선이 이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고아원 원장이 사용하는 책상에 위스키가 놓여 있었다.
“공작님께서 지시한 일이시지 않습니까.”
바로 뒤에 있던 비서 루페가 대답했다.
“이것도 신기록이군요.”
“뭐가.”
“아이들이 모두 공작님 얼굴만 봤다 하면 울지 않았습니까.”
펠리오의 고아원 방문은 이곳까지 합쳐 다섯 번째였다.
“공작님 얼굴만 봤다 하면 저리 겁을 먹으니…….”
“그러고 보니 내 검이 요즘 피 맛을 안 본 지 꽤 되었군.”
“……참으로 무례하지요? 이래서 멋 모르는 어린 애들은.”
공작님의 위대함도 못 알아보고.
빠르게 태세를 변환한 루페 역시 많이 지친 상태였다. 서둘러 보레오티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틈틈이 영지마다 들러 고아원을 들쑤시니 여러모로 피곤했다.
루페는 제 앞에 앉아 있는 펠리오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봤다. 험난하고 위험하기로 유명한 최북단 보레오티 영토를 다스리는 펠리오 보레오티 공작은 어릴 적부터 두 가지 의미로 남다른 이목구비를 자랑했다. 하나는 잘생김, 다른 하나는 흉흉함이었다.
머리칼과 눈동자에 품은 아득한 검은색, 옅은 색을 품은 입술은 적당히 도톰했고,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 그 아래로는 다부진 목선을 자랑했다. 오랫동안 단련하여 건장한 체격은 입은 옷 위로도 선명히 드러났다. 거기다 제국에 단 둘뿐인 공작 가문 중 하나이니, 명실상부 제국 신랑감 일 순위였다.
그러나 이렇게도 잘난 남자지만, 펠리오는 잘생긴 외모마저 감춰 버리는 흉흉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북부의 검은 맹수라는 가문의 이명을 고스란히 품고 태어난 그는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곁을 지키는 루페도 종종 흠칫하는데, 저 아이들은 오죽할까.
‘그나저나 왜 갑자기 아이를…….’
루페는 새삼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며칠 전이 떠올랐다.
‘아이를 입양한다.’
황궁에 들렀다 돌아온 펠리오는 입고 있던 겉옷을 집사에게 건네며 문제의 한마디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리고 진짜로 북부 영지로 돌아가는 길마다 고아원에 들러 아이들을 손수 울리시는 중이었다.
‘차라리 결혼을 하시지.’
그러면 몇 년은 걸리더라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떡하니 태어날 텐데. 루페는 도저히 펠리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흉흉하더라도 그는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그를 바라는 여자와 가문은 항상 끊이지 않았다.
루페는 문득 지난겨울이 떠올랐다. 보레오티 공작이 결혼을 생각한다는 헛소문만으로도 결혼 적령기 딸을 지닌 귀족 가문에서 편지를 보냈고, 덕분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아이는 조금 전이 마지막인가?”
끊이지 않은 장작 덕에 꺼지지 않던 벽난로 불을 떠올리던 루페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방금 그 아이까지 해서 18명 전원 만났습니다.”
루페는 근처에 있던 기사한테 눈짓을 주었다. 뜻을 알아차린 기사는 먼저 밖으로 나가 출발을 준비하라고 전했다. 고아원 앞에 떡하니 있던 크고 우람한 마차가 갈 채비를 마칠 즈음에 펠리오와 루페가 나타났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고아원 원장이 손을 싹싹 비비며 펠리오의 옆을 서둘러 따라왔다. 겨울을 지척에 둔 서늘한 날씨에도 원장의 시뻘건 피부는 기름지고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아쉬워하는 말투라기엔 지나치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동시에 속물적인 욕심도 내비치었다.
“참으로 예쁘고 착한 아이들입니다. 공작님을 한 번이라도 뵈었으니 평생의 운을 다 쓴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나저나 이제 겨울이니 아이들이 제대로 견딜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루페는 회의적이었다. 지금껏 들렀던 다른 고아원들 역시 재정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곳의 아이들 옷은 겨울을 대비해 따뜻한 솜옷이었고, 지나가며 본 시설들도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보였다.
하나 이곳은 아니었다. 운동장에 설치된 놀이 기구는 고장이 난 지 오래였고, 쓸데없이 커다란 화분 뒤에 숨겨진 유리창은 깨져 있었으며 벽에는 금이 가 있었다. 원장이 고아원 운영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보여 주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을 보자마자 기겁하던 다른 고아원 아이들은 선생님을 찾았지만, 이곳 아이들은 자신들을 데리고 가던 관계자나 선생님들의 손길에 움찔거렸다.
지금 펠리오는 고아원을 둘러보며 재정 지원이라는 선행을 명목으로 입양할 아이를 찾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도 보레오티 가문의 지원을 받게 될 거다. 하나 저 속물의 시커먼 주머니에 지원금이 다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들자, 루페는 처음으로 보레오티 가문의 자산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 봐야 보레오티의 재산과 비교하면 먼지 수준이지만.’
그때였다.
“니아!”
뒤에서 누군가가 날카로운 고함을 쳤다.
공작이 나가는 길에 누가 이토록 무례한 짓을 저지른 건지 확인하기 위해 모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고아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 한 명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 손에 잡힌 작은 아이를 혼내고 있었다.
“이거 놔!”
아이는 저를 붙잡은 남자의 손등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남자가 손을 놓자, 아이는 틈을 놓치지 않고 후다닥 달려가 공작의 앞에 떡하니 섰다.
유일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공작은 짧은 팔다리를 최대한 벌려 제 앞을 막은 맹랑한 꼬마를 훑어봤다. 기름으로 떡이 진 머리와 땟국물이 진 옷에 먼저 눈이 갔다. 조금 전까지 만났던 아이들은 적어도 몸은 깨끗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씻기지도 않았고, 옷은 저택 하녀들이 쓰는 걸레보다 못했다. 게다가 자신한테 데려오지도 않았다.
하나 아이의 눈빛만큼은 진흙 속 사금처럼 반짝였다.
“아저씨!”
헉, 낭랑한 아이의 외침에 루페와 기사들이 기함했다. 감히 보레오티 공작에게 아저씨라니, 목이 날아가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망언이었다. 몇몇 기사들은 제 목이 잘릴 것처럼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세상에.”
겨우 정신 차린 루페 역시 아이의 배짱에 크게 감탄했다. 펠리오를 보고 울지 않은 첫 번째 아이였다. 거기다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머리색과 눈동자가……!’
아이는 펠리오와 똑같은 검은색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서둘러 저것을 치우…….”
펠리오가 손을 들어 원장의 움직임을 막았다. 당장이라도 아이를 끌고 가려던 원장이 움찔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공작의 검은 눈동자에 사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루페.”
펠리오의 부름에 루페가 빠르게 명단에 있던 아이들의 인적 사항을 떠올렸다.
“명단에 없던 아이입니다.”
원장이 서둘러 변명했다.
“그, 그것이, 저 아이는 원체 버릇도 없고 사고만 치는 아이라…….”
“그래서 감히 공작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건가? 분명 나는 고아원에 있는 모든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공작님의 뜻을 전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루페의 엄한 지적에 원장이 서둘러 바닥에 무릎을 조아리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고아원 어른들이 벌벌 떠는 모습을 심드렁히 바라봤다.
“그래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이의 시선을 도로 끌었다.
“네 이름은?”
“없어.”
“고아원 출신이라도 이름은 있을 텐데?”
“어른들은 나보고 ‘니아’라고 불러. 하지만 난 그 이름 싫어.”
평소에는 꼭 ‘야’라고 부르면서, 꼭 때릴 때만 니아라고 불렀다. 거기다 그 이름도 고아원에 들어온 첫날에 원장이 읽던 음란한 소설에 나오는 매춘부 이름에서 따왔단 걸 알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펠리오가 아이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겁도 없군.”
가늘게 접힌 펠리오의 검은 눈동자에 붉은 살벌함이 비치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고아원 공기를 순식간에 옥죄었다. 아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결코 그를 피하거나 쭉 뻗은 팔다리를 내리진 않았다.
“네가 감히 누구의 앞길을 막은 건지 아나?”
펠리오가 조금 더 진심을 내어 겁을 주자, 끝내 아이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괄괄한 기세를 자랑하던 어린 얼굴에 처음으로 겁이 내비쳤다. 까만 눈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당장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지.”
펠리오가 한 발자국 다가가자 아이가 더욱 주춤거렸다. 그런데도 아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이를 악물더니 악으로 버티었다.
“…….”
그때, 펠리오의 걸음이 멈췄다. 공작은 저와 비슷한 아이의 검은 눈을 바라봤다. 아이의 눈이 사금을 뿌린 것처럼 한순간 반짝거렸다.
“……맹수 새끼.”
나지막한 감상이 펠리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맹수 새끼라, 펠리오는 제가 뱉은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턱을 쓸며 제 다리보다 작달막한 아이를 관찰했다. 맹랑하고 겁도 없는 것이, 아니, 겁을 먹고도 물러서지 않는 꼴이 퍽 흥미로웠다.
“확실히 너에게 그 이름은 안 어울리는군.”
저 괄괄하고 겁 없는 맹수 새끼에겐 ‘니아’는 너무도 얌전하고 부드러운 이름이었다. 검붉은 눈동자가 잠잠해지더니 도로 순수한 검정으로 변했다. 펠리오는 아이에게 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을 선물하기로 했다.
“레오니에 보레오티.”
아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너무 길잖아.”
“레오니에가 이름이다, 멍청아.”
“나 멍청이 아니야!”
“영지로 돌아가면 가정 교사부터 불러야겠군.”
가르칠 게 산더미라고 중얼거리며,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가뿐히 들어 마차 안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푹신한 의자 위로 넘어진 레오니에가 아프다며 빼액 소리 질렀다.
뒤에 있던 루페와 기사들이 바보처럼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고, 공작님!”
서둘러 정신 차린 루페가 마차 문에 매달렸다.
“잠시만요! 이게 어찌 된……!”
당황한 루페의 눈앞에는 더 아찔한 광경이 펼쳐졌다. 검은 맹수라 불리는 펠리오가 저보다 작고 연약한 레오니에의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여유롭게 막으며 비웃는 중이었다.
“이 아저씨가 진짜!”
그에 더 열 받은 레오니에가 씩씩거리며 펠리오를 노려봤다.
“애 가지고 놀면 재미있어?”
“생각보다 재밌군.”
“힉, 이 아저씨 변탠가 봐!”
“말하는 본새하곤.”
이래서 그 늙은것들이 자식 이야기만 하면 한숨을 푹 쉬는 건가.
펠리오는 그런 생각을 짧게 하며 레오니에를 놓아주었다. 레오니에는 동그란 눈을 부릅뜨며 으르렁거렸다. 하는 꼴이 정말 딱 맹수 새끼였다.
“레오니에.”
펠리오가 다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이 탄 마차에 새겨진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문장에는 검은 사자가 포효하고 있었다.
포효(펠리오)하는 사자(레오니에).
보레오티 공작 영애에게 이만큼 어울리는 이름도 없었다.
* * *
펠리오 보레오티 공작이 느닷없이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한 이유는 아주 사소했다.
‘어제 우리 아들이 말을 했어!’
유일한 친우의 한마디였다.
2년 전 전 둘째를 얻은 카니스 리네 백작은 틈만 나면 제 자식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예쁜지 자랑했다. 펠리오는 저만 보면 저렇게 자식 자랑에 열을 쏟는 친우가 신기했다. 저렇게 떠들면 성대 결절이 올 것 같은데도 피 한 번 안 쏟는 게 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카니스가 카니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니스 리네 백작은 보레오티 공작에게 서슴없이 다가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펠리오가 험준한 설산이라면, 카니스는 따뜻한 들판이었다. 이렇게나 상반되는 성격을 지녔음에도 둘은 곧잘 어울렸다.
‘그런데 넌 언제 결혼할래?’
‘너 죽거든.’
‘난 너랑 사돈 맺고 싶은데!’
카니스는 결혼의 장점과 자식들의 귀여움을 열심히 전파했다. 기저귀 찬 토실토실한 엉덩이, 살이 접힌 팔뚝, 지쳐 돌아온 저를 반겨주는 장녀의 해맑은 마중까지. 자랑을 넘어 거의 포교 수준이었다.
평소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테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카니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도 들어서 뇌리에 아예 새겨졌는지도 모른다.
‘아빠란 존재는 참으로 숭고하지.’
정작 그리 말하는 카니스는 썩 숭고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헤벌쭉 늘어진 인중이 징그러울 정도였다. 결혼 전에는 제 약혼녀 자랑할 때마다 저러더니, 이제는 자식 놈들 자랑만 하면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귀엽다고! 왜 내 말을 안 믿어!’
거울이나 보고 그딴 소리를 하라고 핀잔을 건넨 펠리오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날따라 유독 거리에 가족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모두 행복해 보였다.
저리도 좋을까.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감상하던 펠리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날 입양한 거야?”
레오니에는 기가 막혔다.
갑작스레 결정된 입양으로 펠리오가 탄 마차는 여전히 고아원 앞에 멈춰 선 상태였다. 루페는 고아원에 들어가 입양 서류를 대신 작성 중이었고, 기사들은 마차 주위를 둘러싼 채 경계 중이었다. 그동안 펠리오는 자신의 양딸에게 입양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알려 줬다.
친구 말에 혹해서 애를 입양하다니.
고아원에서 지내는 2년 동안, 레오니에는 아이를 입양하러 오는 어른들을 본 적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입양을 원하는 이유는 다 달랐다.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봉사하러 왔다가 눈에 밟혀서, 죽은 아이와 닮아서.
하나 분명한 건,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향한 애정과 관심을 지니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아니었다.
“아저씨 바보지?”
이렇게나 멍청한 입양 이유는 처음이었다. 레오니에가 대놓고 한껏 비웃었다.
“하나뿐인 자식이라는 게 말하는 본새가 참 어여쁘군.”
펠리오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제게 바락바락 대드는 건방진 태도가 싫지 않았다. 도리어 풀 죽어 눈치를 살피거나 엉엉 우는, 앞서 본 아이들보다 훨씬 좋았다.
“어쨌건 너도 원한 거 아닌가? 그러니 내 앞을 막아섰겠지.”
“……응.”
레오니에가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자신은 이 사람을 따라가 지긋지긋한 고아원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도박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행운이 따라왔다. 어쨌건 그 덕에 레오니에는 고아원을 떠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당했던 걸 생각하면 속이 후련해야 했지만, 아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있잖아.”
레오니에가 고아원 건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침 루페가 건물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 뒤로 원장이 굽신거리며 뒤를 따랐다. 레오니에의 동그란 눈이 가늘어졌다.
“……부탁이 있어.”
고아원 원장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 고아원 원장이랑 선생님들, 자금 횡령해.”
“그런 것 같더군.”
“우리를 학대했어. 요즘에는 포주랑 연락도 해.”
해진 아이의 옷소매를 못마땅하게 보던 펠리오가 멈칫했다.
“너 포주가 무슨 뜻인지 알고…….”
“알아! 사람 팔아서 술집에 넘기는 거잖아.”
레오니에가 이를 악 깨물었다.
“……여기 있는 언니 중 한 명을 포주한테 넘길 거래.”
“…….”
“그러니까, 혼내 줄 수 있어?”
“전부 다?”
펠리오의 되물음에 레오니에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근데 코니에 선생님은 안 그랬어. 그 선생님은 우리를 잘 챙겨 줬어.”
“갈색 머리에 손가락을 다친 여자. 맞나?”
“맞아!”
그걸 어떻게 알았대? 레오니에가 감탄했다. 펠리오는 저를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동그란 눈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옷 안에 실오라기라도 들어 있는지 가슴 부근이 간질거렸다.
“그 사람만 너희를 걱정하더군.”
코니에는 고아원 관계자 중 유일하게 공작을 경계하고 살피는 시선을 보내었다. 아이들이 울면서 나올 때마다 원망 어린 눈을 흘기기도 했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아등거리던 원장이나 눈치를 살피던 다른 이들과 전혀 달랐다.
“술만 마시면 항상 우리를 때렸어.”
“원장이?”
“응.”
펠리오가 짧은 소매 너머로 삐져나온 레오니에의 팔뚝을 훑었다.
“팔에 있는 그 멍도?”
“이건 다른 선생님이.”
레오니에가 소매를 슬그머니 내리며 멍을 가렸다.
“원장이 때린 상처는 등에 있어.”
마치 옷에 먼지라도 묻었다는 듯이 태연한 말투였다. 레오니에는 그렇게 고아원에서 당한 부조리함을 전부 일러바쳤다. 이를 묵묵히 들은 펠리오의 검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니까 혼내 줘.”
“어떻게?”
죽여 줄까? 펠리오가 물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고개를 저었다.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고문해 줘.”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펠리오는 사금을 뿌린 듯한 그 눈을 지긋이 보았다.
‘……애가 맞나?’
자연히 먼저 떠오르는 건 카니스의 큰 딸인 우피클라였다.
붉은 여우가 연상되는 귀여운 꼬마 숙녀는 펠리오의 얼굴을 보고도 울지 않는 배짱을 지녔고, 아이의 나이가 올해 여섯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 레오니에는 우피클라보다 작았다. 고아원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한다고 해도 너무 메말랐다. 겉으로 보기엔 다섯 살이나 겨우 되었을 외모였다. 반면에 말투는 그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성숙했다. 자금 횡령이나 고문은 저 또래 아이들이 쓸 법한 단어가 아니었다.
“공작님.”
때마침 루페가 입양 서류를 가지고 돌아왔다. 펠리오는 수고했다는 말 대신 서류부터 내놓으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서류에는 레오니에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나이는 일곱이었다.
“루페.”
“예.”
“넌 여기 남아라.”
“……예?”
이제 겨우 영지로 돌아간다고 안심하던 루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레오니에는 절망하는 그를 동정했지만, 펠리오는 시큰둥했다. 관심도 없어 보였다.
“꽤 더럽던데, 청소 정도는 해 줘야지.”
루페가 몇 번 입술을 들썩이다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안색이 머리칼처럼 창백해졌다.
“먼지 하나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청소해라.”
“……알겠습니다.”
“아저씨!”
레오니에가 루페를 향해 힘찬 응원을 날려 줬다.
“이왕 청소하는 거 팔다리를 분질러 버려! 가죽 허리띠로 등도 때리고! 접싯물에 코도 박아! 먼지까지 탈탈 털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루페의 안색이 제 머리 색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기개가 좋군, 펠리오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아, 코니에 선생님은 빼고! 우리한테 잘해 줬어.”
횡령 증거는 액자 뒤 금고에 있어!
곧 마차가 출발했고, 기사 두 사람과 고아원에 남은 루페는 점점 멀어져 가는 마차를 멀뚱히 바라봤다. 레오니에는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공작님이 숨겨 놓으신 친딸 아니지요?”
숨겨 놓은 딸 찾으려고 고아원을 그리도 샅샅이 뒤지신 거냐고 마누스가 물었다. 그만큼 레오니에의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거기다 아이 역시 검은색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군요.”
또 다른 기사인 프로보 역시 공감했다.
“……일단.”
루페의 얼굴에 피곤이 어려 있었다. 기사들이 그를 동정했다.
“일부터 하지.”
서둘러 영지로 돌아가 쉬기 위해서는, 공작이 내린 ‘청소’라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루페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털어야 할 먼지가 산더미였다.
* * *
고아원을 떠난 지 이틀째.
레오니에는 중간에 들른 여관에서 무려 세 번이나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은 뒤에야 머리의 기름을 벗고 전신에 묻었던 때를 벗겨냈다. 펠리오의 수행 기사 중 유일한 여자인 멜레스가 도와주었다.
깨끗해진 아이의 작은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긁히고 멍이 든 건 기본이고, 등 뒤에는 가죽으로 맞은 것처럼 새빨간 줄이 서너 개 나 있었다. 멜레스는 서둘러 이 사실을 펠리오에게 전했다. 펠리오는 기사에게 당장 고아원으로 가서, 아이들한테 단 한 번이라도 손찌검을 한 놈들은 전부 영지로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자신이 친히 손을 봐주겠단 뜻이었다.
다음 날,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어디선가 가져온 포근한 파란색 원피스와 두툼하고 기다란 털 망토를 입었다. 대충 자른 흔적이 역력한 검은 머리는 멜레스의 도움을 받아 붉은 리본으로 예쁘게 정리했다.
“나 이런 거 처음 입어 봐!”
레오니에가 들뜬 목소리로 어떠냐고 물었다. 자신이 보아도 제법 곱게 자란 아이 같았다.
“잘 어울리세요.”
씻는 걸 도와준 멜레스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속은 문드러졌다. 어린아이가 고아원에서 힘든 생활을 한 거로도 모자라 이런 옷 하나 제대로 입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저 나이 또래의 남동생이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였다.
반면 펠리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이제야 사람 같군.”
그러다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는 비아냥만 흘러나왔다.
“원래 사람이었거든?”
그런 말 말고 칭찬을 해 달라는 듯, 레오니에가 말했다.
“예쁘지도 않은데 무슨 칭찬을 해.”
“아저씨 너무한 거 아냐? 이제 내 아빠잖아.”
“그러면서 넌 아저씨라고 부르나?”
“아빠란 단어가 입에 안 익어서 그래!”
“나도 칭찬은 입에 안 익어서 말이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봐주는 게 없는 펠리오는 진심을 담아 비웃었다. 성질 뻗친 레오니에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러나 워낙 마른 상태라 도리어 안쓰럽게만 보였다.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딸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즐거웠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칭찬이 듣고 싶거든 살 좀 쪄라.”
펠리오가 아는 레오니에의 유일한 동년배는 카니스의 딸인데, 그 아이와 비교조차 못 할 정도로 비쩍 말랐다. 순간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물론 짜증의 대상은 곧 영지 내 저택 지하 감옥에서 만날 고아원 관계자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레오니에의 식사에는 고기가 빠짐없이 나왔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배가 볼록 나오고 입에서 트림이 꺽, 나올 만큼 실컷 먹인 뒤에야 보레오티 공작령으로 출발했다.
“배불러…….”
너무 많이 먹어 지친 레오니에는 마차 좌석에 누워 게으름을 부렸다. 끅끅, 하고 작은 트림이 연이어 나왔다.
“토하면 어쩌지?”
“하면 되지.”
맞은 편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펠리오가 심드렁히 답했다.
“마차 비싸잖아. 아깝고. 청소하는 사람들도 힘들 거야.”
“네가 왜 그딴 걸 걱정하지?”
펠리오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레오니에가 그제야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새파란 원피스와 망토, 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새빨간 리본은 원래부터 레오니에의 것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살 게 많겠군.’
보레오티 공작 저택에는 아이를 위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거라곤 펠리오 본인이 어릴 적에 쓰던 물건이었지만, 그것들은 전부 창고에 쌓여 먼지가 수북하니 당장 쓰기에도 뭣했다. 그리고 펠리오는 그런 걸 아이한테 주고 싶지 않았다.
“…….”
잠시 생각하고 싶지 않던 옛일이 떠오른 공작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놓았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여전히 펠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이제 보레오티 공작 영애다.”
펠리오도 아이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이깟 마차 하나 버린다고 아까워 마라. 네가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차 정도는 가뿐히 살 수 있는 재산을 벌고 있으니, 네가 바라는 건 뭐든 말해.”
오오! 레오니에가 호들갑스러운 감탄을 흘렸다.
“아저씨 좀 멋진데?”
하긴 돈이 최고라며 레오니에가 킥킥 웃었다.
펠리오는 웬 수전노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평민이라서 돈을 밝히는 건가, 싶다가도 레오니에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세상의 풍파란 풍파는 다 겪어본 어른의 능글맞음과 비슷했다.
그랬다. 아이는 아이답지 않았다. 펠리오는 그게 걸렸다. 마치 손가락에 난 거스러미처럼.
“그렇지만 역시 토는 안 할래.”
하면 아프잖아, 레오니에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펠리오의 시선도 아이를 따라 창밖으로 향했다. 알록달록 물든 나무들이 가을의 끝자락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마음이 부자여야 해.”
“그건 다 헛소리야.”
“맞아, 헛소리야.”
돈 없는 사람들이 정신 승리하려고 내뱉는 소리일 뿐이라며 레오니에가 심드렁히 말했다.
“아저씨 뭘 좀 아네.”
1일 차 부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잘 통했다. 펠리오는 자신의 변덕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가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잠시 후 기사 한 명이 마차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창문을 밀자 멜레스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목적지에 곧 도착한다고 전했다. 레오니에가 아는 얼굴을 보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멜레스 언니!”
레오니에가 아는 척을 했다. 멜레스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짧게 숙였다.
“나 저 언니 좋아.”
“멜레스는 우수한 기사지.”
펠리오는 그제야 딸의 호위를 맡을 기사들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도 구해야 했다. 가정 교사와 유모, 호위 기사 같은. 그런 의미로 멜레스는 공작 영애의 호위 기사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레오니에.”
그렇게 대충 영지로 돌아가 해야 할 것들을 빠르게 정리한 펠리오가 물었다.
“게이트는 타봤나?”
* * *
“우에에에엑!”
레오니에는 비쩍 마른 나무를 부여잡고 열심히 속을 게워냈다.
조금 전까지 단풍이 우거졌던 숲 대신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침엽수림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저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할 틈이 없었다. 보레오티 영지까지 단번에 넘어오는 게이트의 반동으로 극심한 멀미를 겪는 탓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멜레스가 조그마한 등을 툭툭 두드렸다.
“저리 허약해서야.”
펠리오가 혀를 끌끌 찼다.
마차가 게이트 부근에 도착했단 소식을 전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레오니에는 동그란 눈을 끔뻑이며 그게 무어냐고 물었다. 펠리오는 긴 거리를 단번에 빨리 갈 수 있고, 아주 가끔이지만 처음 타는 사람들은 익숙지 않아 멀미도 한다고 설명했다.
‘터널 같은 거겠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타봤지만, 괜찮을 것 같아.’
하나 결과는 꽝이었다. 레오니에는 하필이면 게이트를 처음 타면 멀미를 한다는, 그 극소수 중 한 명이었다.
“나 죽어…….”
멜레스의 품에 안긴 채 다가온 레오니에는 메마르고 시든 잡초 같았다.
“그깟 멀미로 죽는 놈은 못 봤다.”
축 처진 아이를 보고 있자니 펠리오는 또 짜증이 났다. 가뜩이나 마른 애가 기운도 없이 골골거리니 더 아파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느끼는 짜증과는 조금 달랐다. 아이의 팔에 났던 멍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아저씨 재수 없어…….”
그러나 성질은 그대로인지 저를 욕하는 아버지 말씀에 곧장 대들었다.
“봐라, 덜 죽었잖아.”
펠리오는 제 방한용 망토를 벗었다. 그리고 멜레스의 품에 안겨 있던 레오니에를 조심히 껴안아 망토로 감쌌다. 순식간에 두툼한 덩어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후우…….”
레오니에는 편안히 숨을 내뱉었다. 펠리오는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어색하게 등을 토닥였다.
“으으, 두드리지 마…….”
토할 것 같다는 레오니에의 투정에 펠리오가 서둘러 손을 멈췄다.
“너는 참 말도 많다.”
아프면 제발 입 좀 다물라며 펠리오가 잔소리했다. 레오니에는 이제 대들 힘도 없는지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옷에 토해도 돼……?”
“넌 내가 그냥 우습지?”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토닥이는 손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얼마 안 있어 편안한 숨소리가 들렸다.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품에 기대 잠들었다.
“……못생겼군.”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본 펠리오가 넌지시 한마디 했다. 그러나 무덤덤한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가 있었다.
곧 출발한다는 펠리오의 조용한 지시가 내려졌고, 기사들은 펠리오와 잠이 든 레오니에가 마차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은 조금 전 펠리오의 부성애 담긴 모습에 경악했다.
“……봤냐?”
“어, 봤어.”
“전 헛것을 본 줄 알았습니다.”
“주군께서 머리를 다치시진 않았잖아…….”
“야, 진짜 숨겨 둔 딸인가 봐.”
험준한 북쪽 대륙의 맹수라 불리는 보레오티 공작 가문에서도 가장 특출난 가주로 손꼽히는 펠리오 보레오티는 선대들이 그러했듯 사람에게 무심하고 감정에 덤덤했다. 그런 주군이, 어제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에게 저렇게 정성을 쏟아붓고 있다. 심지어 잠든 아이가 깰까 염려되어 목소리까지 낮췄다.
이는 펠리오의 곁을 오랫동안 수행한 기사들에게는 엄청난 공포였다. 북쪽 산맥에 사는 마물보다 무서웠다.
“아가씨도 보통은 아니더라.”
여관에서 레오니에를 잠깐 돌보았던 멜레스가 한마디 했다. 멜레스는 이미 레오니에를 보레오티 공작 영애로 여기고, 예를 갖춰 대하고 있었다. 펠리오가 딸로 삼겠다고 하였으니,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은 군말 없이 이에 따라야 했다.
“심지어 어제는 주군 등 뒤에다 발길질까지 하더라니까.”
“헉!”
“무슨 배짱으로 그런대!”
기사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었다. 설명하는 멜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군께서 씻고 나온 아가씨한테 ‘씻어도 여전히 못생겼네.’라고 농을 하셨거든. 그러자 아가씨께서 바로 주군한테 내 얼굴에 뭐 보태 줬냐고 대들다가, 그래도 화가 덜 풀렸는지 발길질을 하더라고.”
기사들이 자신들의 귀를 서둘러 더듬었다. 자신들이 뭔가를 헛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멜레스의 거짓 없는 표정을 보고는 이 모든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레오니에의 배짱.
나머지 하나는 아이에게 장난 같은 시비를 툭툭 걸었다는 펠리오의 태도.
“……진짜 친자식인가 봐.”
그러지 않고서야 그 작은 아이가 감히 공작에게 거침없을 수가 있을까. 그건 오로지 피를 이은 자식이니까 가능한 기적이라며 기사들이 소곤거렸다.
본디 기사란 충성을 맹세한 주군에 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모두가 자신들이 직접 본 기묘한 부녀 관계에 대해 계속 떠들었고, 곧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친자식이 확실하단 쪽으로 의견이 점점 굳혀져 갔다.
* * *
보레오티 영지.
험준한 북쪽 대륙에 내려진 이름은 하나이나, 별명은 서너 개였다. 마물의 소굴, 만년설의 끝. 그리고 검은 맹수들의 고향.
검은 맹수는 보레오티 영지를 다스리는 보레오티 공작 가문을 뜻했다.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강인한 보레오티 가문은 제국에서 드문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그들을 향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별명이었다. 가문 문장에 새겨진 포효하는 검은 사자 역시 여기서 반영되었다.
“너는 운이 좋아.”
펠리오는 어느새 잠에서 깬 레오니에에게 말했다. 아이는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입술을 냠냠거렸다.
“나와 똑같은 검은 색을 지녔으니.”
“흐응.”
여전히 망토에 돌돌 싸인 채 펠리오의 품에 있던 레오니에가 마차 창문 밖을 바라봤다. 속이 가라앉고 한숨 자고 나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눈이 많아.”
“보레오티 영지는 봄까지 눈이 쌓인다.”
“많이 추워?”
“익숙해지면 괜찮다.”
“나 추운 것도 좋아해.”
레오니에가 방긋 웃었다.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느슨히 풀었다.
“눈은 처음 보나?”
“으으응.”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투명한 창에 비친 아이의 눈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련함을 지니고 있었다. 펠리오는 그런 저의 딸을 조용히 관찰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아이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웠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7살이라고 기록되어 있던 고아원의 신상 정보를 떠올렸다.
피골이 상접한 겉모습은 영락없는 다섯 살이었다. 하지만 설령 일곱이라고 해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단어나 가끔 내비치는 조용한 표정은 펠리오를 놀라게 했다.
‘평민이 아닐지도.’
가늘어진 검은 눈이 레오니에를 주의 깊게 살폈다. 처음엔 당연히 평민이라 확신했다. 제게 보이던 태도나 방정맞은 대꾸는 절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나 어제 하루 동안 같이 지내보니, 의심스러운 점이 보였다.
아이는 식사 때 포크와 나이프를 잘 썼다. 음식도 깔끔하게 먹었다. 자신에게 대들기는 해도 선은 반드시 지켰다. 어쩌면 고급 교육을 받은 귀족 가문의 자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젠 내 딸이지.’
설령 아이의 부모가 귀족이라고 해도,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식을 어떻게 돌봤기에 이 지경까지 되게 두었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거기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이 역시 펠리오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맹랑한 태도가 맹수의 딸 같으니 영락없는 보레오티 가문의 영애였다.
매번 자식 자랑을 하던 카니스가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저씨.”
“왜.”
“나 배고파.”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었다. 애는 애라고, 그렇게 토하고 끙끙거리더니 금세 멀쩡해졌다.
“조금만 참아.”
이제 저택에 금방 도착한다며 무심한 어투로 달랬다. 멀미로 속을 다 게워내 배가 허전했지만, 레오니에는 묵묵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또 왜.”
배가 고프다고 해도 아이는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오히려 저택에 다 왔다는 말에 두 눈이 이전보다 생기로 반짝였다.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아저씨 가슴 튼실하네.”
가슴 언저리에서 히죽히죽 웃는 소리가 들렸다.
펠리오는 생애 처음으로, 그것도 딸한테 성희롱을 당했다.
기분이 착잡했다.
* * *
“와아.”
레오니에는 마차 창문에 코를 박은 채 공작령의 풍경을 구경했다. 마굴의 소굴, 만년설의 끝이라는 살벌한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거기다 최북단에 위치한 외진 영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잘 발달했다. 마차가 달리는 포장도로라든가, 언뜻언뜻 보이는 커다란 시장이라든가. 군데군데 가로등 같은 것도 있었다. 거리가 어두워지면 밝혀질 환한 빛이 자연히 떠올랐다.
“멋있어! 이런 거 처음 봐!”
“수도와 비교하면 그래도 작지.”
“난 수도 안 가 봐서 몰라.”
“…….”
“그러니 나한테는 여기가 최고야.”
창에서 얼굴을 뗀 레오니에가 배시시 웃었다. 펠리오는 실없는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역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차는 곧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 문이 열리자 레오니에가 가장 먼저 폴짝 뛰어내렸고, 뒤따라 내린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품에 다시 안았다.
“이제 안 아픈데.”
“나도 안다.”
그래도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놓지 않았다. 조금 전 기세 좋게 뛰어내린 아이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떠는 걸 놓치지 않아서였다.
저택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모두 모여 주군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펠리오의 품에 안긴 낯선 여자아이를 보고는 크게 동요했다.
“저택 크다!”
주군과 똑같은 검은 머리를 지닌 아이가 거대한 저택을 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꼭 이런 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
아이의 진지한 표정에 음산함이 스쳤다. 펠리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지?”
“진짜? 정말 사람이 죽었어?”
“지하에 감옥이 있다.”
레오니에가 감탄하며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오오, 고문!”
“볼래?”
“벌레 있을 것 같아서 싫어.”
사용인들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대화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그때, 용기를 낸 누군가가 펠리오와 레오니에의 곁으로 다가갔다. 펠리오가 수도에 올라간 사이 영지 내 저택을 관리한 집사 카라였다.
“오셨습니까.”
그러나 노련한 집사는 자신의 호기심을 억누르고 돌아온 주인을 맞이했다.
“내가 없는 동안 저택을 지키느라 수고했다.”
의례적인 칭찬 한마디를 끝으로, 펠리오는 곧장 유명한 의상실과 가구 공방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느닷없는 명령은 오랜 세월 펠리오를 지켜봐 온 집사를 머뭇거리게 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오랫동안 보레오티 가문에 몸담고 일한 카라는 처음으로 주인의 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신 말의 뜻을 물어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어찌 그들을 부르시는 겁니까.”
“이 집에 아이가 지낼 만한 곳이 없지 않은가.”
“아이…….”
그 말에 카라의 눈이 절로 주인의 품에 안긴 여자아이에게로 향했다. 주인과 똑같은 검은색을 머리와 눈동자에 품은 아이는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카라를 바라보더니 손을 살살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오니에라고 합니다.”
“아니지.”
펠리오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내가 가르쳐 준 이름은 그보다 더 길었을 거로 아는데? 그새 까먹었나?”
“……그거 말해도 돼?”
“그럼 앞으로도 널 반쪽짜리 이름으로 소개할 건가?”
제대로 된 이름을 말하라고 펠리오가 핀잔을 주었다. 멀뚱히 듣고 있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서너 번 끄덕였다. 펠리오는 아이의 귀가 발갛게 물들어 가는 걸 눈치챘다. 그러자 처음으로 제 나이처럼 어려 보였다.
“레오니에 보레오티입니다.”
곧 레오니에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 하나가 툭 떨어졌다. 펠리오가 잘했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처음 받아 보는 칭찬에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도리질을 했다.
“…….”
카라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식사를 다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했다. 근처에 있던 하녀 한 명에게 아이가 먹을 식사도 준비하라고 일러둔 뒤, 하녀가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걸 본 뒤에 펠리오의 뒤를 따랐다.
* * *
“진짜라니까!”
“주인님이 아이랑 같이 오셨어!”
“검은 머리였다니까?”
“품에 계속 안고 계시더라.”
어린 하녀들부터 시작해 부엌에서 일하는 요리사들과 정원사와 마부들까지.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요 며칠 똑같은 주제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자신들의 주인이 데려온 어린아이였다.
“주인님께 여자가 있었나?”
“없지는 않았지. 그 얼굴에 궁할 리가 있겠어?”
“단어 선택하곤. 신종 자살 방법이니?”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무섭잖아.”
“그런데 아가씨는 별로 안 무서웠어.”
사용인 중 누군가 소문의 아가씨를 만났다. 집사 카라가 임시 배정한 하녀였다. 다갈색 머리를 촘촘히 묶은 하녀가 안쓰럽다는 듯이 아가씨에 대한 인상을 설명했다.
“너무 마르셨더라.”
누가 보아도 학대의 여지가 보이는 메마른 몸과 너저분한 머리카락 끝이 잊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만나는 사람마다 씩씩하게 인사했다. 나중엔 집사마저도 아이를 동정하며 잘 챙기라고 따로 불러 말할 정도였다.
사용인들이 말을 아꼈다. 고아원 출신이란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렸는데, 그곳에서 어떤 식으로 자랐을지 대충 감이 왔다. 몇몇은 혀를 내두르며 몹쓸 곳이라며 욕설까지 던졌다.
“하지만 눈이 동그라니 귀여우셨어.”
하녀가 서둘러 덧붙였다.
“원래 애들은 다 귀여워.”
“그럼 역시 주인님의…….”
사용인 대부분은 펠리오가 데리고 온 아이가 ‘숨겨 둔 자식’이라고 여기었다. 그러나 도대체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예전에 자주 연서를 보내던 영애 아닐까? 그 왜, 히에이나 백작 영애…….”
“카페르 가문도 있었지.”
“내가 알기로는 리네 백작 영애도 관심이 있다고 하던데.”
“야, 그분은 고작 여섯 살이잖아!”
이런저런 추측만 난무하는 가운데, 펠리오는 자신의 집무실로 세 사람을 불렀다.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 카라와 가문에 소속된 글라디고 기사단 부단장 모노, 앞으로 호위대의 대장이 될 멜레스였다. 펠리오는 세 사람에게 아이를 입양한 이유를 밝혔다.
“……그런 이유로 아이를 입양했단 말씀이십니까?”
레오니에의 입양 사정을 전해 들은 셋은 입을 쩍 벌렸다. 충동적이다 못해 무책임하기까지 한 입양 이유에 어이가 없었고, 특히 카라는 무책임한 짓이라며 화를 냈다.
정작 펠리오는 창틀에 기댄 채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카라는 펠리오가 한 행동이 꼭 개나 고양이를 장난감처럼 예뻐하려고 주워다 기르는 것과 똑같다고 비난했다.
“내가 그딴 것도 구분 못 하는 것 같나?”
듣다 보니 기분이 나빠진 펠리오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레오니에가 개나 고양이 따위와 비교당하는 게 불쾌했다. 하나 카라는 여전히 펠리오를 탓했다. 그의 충동적인 태도는 분명 아이한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거였다.
살벌한 분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한 건 부단장 모노였다.
“정말 혈연관계가 아닙니까?”
모노가 꺼칠한 턱을 매만졌다.
“하나 그 검은색은…….”
제국에서 검은색을 품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기실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피를 이은 자들만이 검은색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레오니에를 향한 여러 의문과 추측은 자연히 펠리오의 사생아라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펠리오 역시 그 점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살부터 찌워.”
하지만 그저 그딴 것보다 아이의 마른 몸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카라가 포기하듯 한숨을 쉬었다.
“주인님, 어찌하실 겁니까.”
“뭘 어째. 길러야지.”
펠리오의 시선이 도로 창밖을 향했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요.”
카라는 아이를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보내라는 잔혹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아이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 이 모든 건 펠리오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충동적인 입양이어도 펠리오는 나름 아이에게 잘해 주려고 했다.
실제로 요 며칠 동안 공작저에는 많은 공방 주인과 상인이 드나들었다. 레오니에의 방을 꾸미고 필요한 물건들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레오니에의 취향을 고려해 만든 방에는 푹신한 침대가 놓였고, 그 바로 옆에 만든 놀이방에는 동화책이 한쪽 벽을 가득 채웠고, 아기자기한 인형들이 산더미처럼 놓였다. 건너편에 만든 옷방에는 곧 값비싼 옷과 장신구가 채워질 예정이었다.
‘무관심보다는 낫다.’
카라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힘겹게 마음먹었다.
“지금쯤이면 영지에 아가씨에 대한 소문이 돌겠군요.”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위해 수많은 공방 장인들을 공작저에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고객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자연히 레오니에와 만났다. 아무리 입막음을 한다고 해도 공작저로 들어가게 될 주문 물건들 때문에 소문은 쫙 퍼질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오늘 오전에 장을 보고 온 하녀 두 명이 카라에게 아가씨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창밖에 시선이 고정된 펠리오가 피식, 소리를 내며 입가를 올렸다.
아까부터 계속 바라보는 창밖에는, 레오니에의 까맣고 둥근 머리가 보였다. 두툼한 털옷을 껴입은 레오니에는 하녀들과 함께 정원을 구경 중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른 더벅머리를 말끔히 다듬고 빨간 리본으로 예쁘게 장식한 레오니에는 처음 보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멀리서 보는데도 며칠 새 좋아진 안색이 확연했다. 배시시 웃으며 눈 쌓인 정원을 뽈뽈뽈 돌아다니는 모습이 까만 아기 동물 같았다. 뒤따르는 하녀들 역시 그런 레오니에가 귀여웠는지 이것저것 챙겨 주고 말을 걸었다. 씩씩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벌써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는군.”
지켜보는 펠리오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그 모습을 의도치 않게 목격한 카라와 모노, 멜레스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주인이 저렇게 인자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들은 내일 만년설이 다 녹는 건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했다.
펠리오가 앞서 물은 질문에 뒤늦은 대답을 했다.
“일단 내버려 둔다.”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고정된 채였다.
“……하나.”
멜레스가 무례를 구하고 끼어들었다. 줄곧 창밖을 바라보던 펠리오가 시선을 움직였다. 딱히 분노 같은 열띤 시선이 아니었음에도 멜레스는 몸을 작게 떨었다. 이내 실수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뒤에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북부 귀족들은 수도에 있는 황제보다 보레오티 공작에게 충성한다.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강인함을 오랜 세대에 걸쳐 직접 목격한 탓도 크지만, 이곳을 오랫동안 지켜냈다는 자긍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맹수 앞에 완전히 배를 깔고 드러눕지는 않았다.
지금 공작령에서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당연코 미혼인 공작이 데리고 온 어린 딸이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는 자연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다양한 추측을 만들어내고, 그 추측은 좋은 내용일 리가 없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충성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아가씨께서 입에 오르는 것은…….”
조용히 쥔 멜레스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레오니에는 삭막하고 싸늘한 공작저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어린 영애께서 머무르는 곳에는 항상 웃음소리가 났고, 곁을 호위하는 멜레스는 어느새 무시 못 할 정이 들었다. 그녀는 어린 아가씨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다.
“……그렇군.”
펠리오가 그런 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덤덤한 얼굴 위에 희미한 만족감이 어렸다.
“대놓고 설치는 자살 희망자는 없겠지.”
북부의 주인이 돌아온 이상, 대외적으로 떠들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 만일, 조금이라도 레오니에의 귀에 허튼 소문이 들리기라도 한다면.
“죽이면 된다.”
펠리오는 소문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저에 대한 소문에도 관심이 없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정도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아니었다. 부녀지간이 된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펠리오는 어떤 흉흉한 소문도 레오니에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세상 다 산 애늙은이처럼 행동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마차 안에서 새하얀 눈에 덮인 보레오티 영지를 신기한 듯이 구경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지금도 새하얀 눈밭을 돌아다니며 즐거워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그런 인간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대의 검에 그들의 피를 적실 영광을 주도록 하마.”
멜레스가 예를 갖췄다.
“주군.”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똑똑 났다. 펠리오는 들어오라 명했다. 갈색 머리를 한껏 뒤로 당겨 묶은 커다란 사내가 기사의 예를 갖춰 인사했다. 루페와 함께 고아원에 남았던 마누스였다. 펠리오는 마누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들이 오셨군.”
잠잠했던 검은 눈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 * *
정원에서 실컷 산책하고 돌아온 레오니에의 하얀 볼이 말갛게 달아올랐다.
“재미있으셨습니까?”
식당으로 레오니에를 데리고 온 하녀장 펠리카 부인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에서 본 것들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눈이 내 발목까지 왔어요. 걸을 때마다 눈이 나를 붙잡는 것 같았어요.”
“그러셨군요. 하인들에게 눈을 치우라고 말할까요?”
“으으응. 나 눈 좋아해요.”
도리도리, 레오니에가 고개를 저으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나중에 또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 거라며 저의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사이 하녀들이 레오니에의 젖은 겉옷과 신발을 벽난로 가까이에 두었다. 타닥타닥, 장작 지피는 소리와 함께 후끈한 온기가 식당 공기를 따스하게 덥혔다.
곧 주방장이 간식을 들고 올라왔다.
“와아!”
까만 눈동자가 눈 앞에 펼쳐진 간식들을 보며 반짝였다. 새하얀 거품이 몽실몽실한 따뜻한 우유와 알록달록한 채소와 고기, 치즈가 들어간 포카치아가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려 있었다.
간식들을 받친 쟁반에는 까만 아기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레오니에 전용 물건이란 뜻이었다.
“잘 먹을게요.”
레오니에가 음식을 직접 가지고 온 주방장에게 꾸벅, 인사했다. 두툼한 주방장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포카치아를 입 안 가득 넣어 우물우물 씹자 짭짤한 맛 뒤로 고소한 풍미가 올라왔다. 반쯤 삼킨 뒤에 머그컵에 담긴 새하얀 우유를 호호 불며 꿀꺽 삼키니 입 안에서 행복한 온기가 퍼져 갔다.
“으음!”
레오니에의 표정이 흐물흐물 녹았다.
“너무 맛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른들도 흐뭇했다.
공작저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레오니에는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 기름으로 떡이 졌던 머리는 향유를 듬뿍 발라 항상 부드러웠고, 비쩍 말랐던 팔다리 위로 살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특히 얼굴이 동글동글해져 이전처럼 불쌍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간식이 바닥을 보일 때였다.
“아가씨.”
멜레스가 식당을 찾았다.
“멜레스 언니!”
레오니에가 의자에서 내려와 쪼르르 달려왔다.
“저택 탐방은 재미있으셨나요?”
“네!”
“제게는 말을 낮추셔야지요.”
몇 번이나 반복되는 잔소리에 레오니에가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다. 멜레스는 그런 레오니에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존대가 편한데…….”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영애께서 일개 기사에게 말을 높이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기사는 엄청 노력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런 기사들에게 ‘일개’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멜레스는 자신들의 노고를 알아주는 어린 아가씨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처음 만졌을 때보다 보드라운 살결이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고개를 드니 레오니에가 수줍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가씨.”
멜레스가 이곳에 온 이유를 불렀다.
“주군께서 부르십니다.”
“아저씨가?”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눈을 가늘게 뜨며 수상쩍어했다.
“……또 나보고 ‘예쁜 짓’하래요?”
펠리오는 레오니에한테 필요한 모든 걸 해 주었다. 침대면 침대, 책이면 책, 심지어 승마 연습할 때 필요한 조랑말까지 목에 리본을 달아 선물해 주었다.
‘이게 웬 돈 지랄이야.’
어마어마한 선물들을 받은 레오니에의 감상평은 전혀 아이답지 않았다.
‘정말 피가 통하나 봐.’
‘주인님 말투랑 똑같아.’
‘어쩜 두 분 다 저리 무심할꼬.’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이 쑥덕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멜레스는 알 수 있었다. 아닌 척하는 레오니에의 귀는 빨갰으니까.
펠리오가 아무리 돈을 쓴다고 해도, 이는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자산에 어떤 흔들림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바늘로 손가락을 찔렀는데도 피는커녕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대신 펠리오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자식이 하는 예쁜 짓이 그리 보기 좋다지.’
유일한 벗이라는 카니스 리네 백작의 말을 근거로, 레오니에에게 하루에 한 번은 꼭 ‘예쁜 짓’을 하라고 말했다. 동시에 레오니에의 눈동자가 소금물 한 잔을 들이켠 것처럼 짜게 일그러졌다.
‘……안 하면 어떻게 돼?’
맥 빠진 딸의 물음에 아빠는 어깨를 들썩였다.
‘자식새끼 허투루 키운 거지.’
‘…….’
‘안 한다고 너를 내쫓지는 않을 거다.’
‘……아저씨 역시 변태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얇아지는 아이의 눈초리는, 정말 세상에 별사람 다 있다며 한탄하는 듯했다. 펠리오는 건방진 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밀었다.
‘넌 언제 날 아빠라고 부를 거냐.’
‘노력은 해 볼게.’
그런 연유로, 레오니에는 하루 한 번씩 꼬박꼬박 예쁜 짓을 절찬리에 공연 중이었다.
“아가씨께서도 즐기시는 것 같던데요.”
멜레스가 레오니에의 애교를 떠올리며 웃었다. 호위 때문에 곁을 자주 지키니 멜레스 또한 레오니에의 애교를 여러 번 목격했다.
“즐기는 건 아닌데…….”
입술을 오리처럼 내민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그저 저를 거둬 준 펠리오한테 고마우니까, 그 정도 효도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잘 먹혔다. 펠리오는 레오니에의 어색한 예쁜 짓을 보면 눈에 띄게 차분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딸의 전투적인 애교가 끝날 때마다, 펠리오는 선물로 사탕을 쥐여 주었다. 아기자기한 포장지가 예쁜 딸기 우유 맛 사탕이었다.
‘주군과 딸기 우유 사탕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사탕을 건네는 펠리오는 누가 보아도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사탕을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둔 예쁜 유리병에 차곡차곡 모아 두는 레오니에 역시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잠들기 전에 유리병 속 사탕을 부어다 병에 넣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한다고 하녀가 웃으며 전해 주었다.
입양 사정을 아는 멜레스는 나름 걱정스러웠지만, 두 사람이 자신들만의 인연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내심 다행이었다.
‘정말 놀랄 일만 일어나네.’
설산처럼 고요하기만 하던 보레오티 공작저에 정말로 따스한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 왜 불렀어요?”
멜레스는 제 품에 안긴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손님이 오셨답니다.”
다정하던 멜레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레오니에는 그녀의 볼을 조심히 만졌다.
“화났어요?”
“좋은 손님이 아니니까요.”
“왜요?”
“……아가씨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에요.”
멜레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주군께선 아가씨를 모셔오라 하셨지만, 저는 솔직히 걱정입니다. 아가씨께서 그 사람들을 보고 혹여 상처 입으실까 걱정이에요. 만일 싫으시다면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주군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오니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입을 천천히 열었다.
* * *
보레오티 공작저는 크고 넓다.
우선 아치형의 커다란 철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본 저택까지 이어지는 앞뜰이 나타난다. 절제된 대칭의 미를 자랑하는 조경과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분수를 지나면 그때야 저택이 보인다.
검고 뾰족한 지붕이 높이 솟은 저택은 새하얀 눈과 대비되면서 고풍스럽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보레오티 가문의 상징인 검은 사자가 장식된 손잡이를 잡고 현관을 열면, 넓은 홀과 2층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계단이 손님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번 손님들은 저택의 주인이신 보레오티 공작께서 직접 나서 맞이했다.
볼품없는 행색을 한 손님들은 포박당한 채 넓은 홀에 무릎을 꿇었다.
“고아원은 어떻게 됐지?”
손님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하며 펠리오가 물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총 여섯이었다. 고아원 원장이 가장 앞에 앉았고, 선생님들과 관계자들이 그 뒤에 앉아 꼭 삼각형처럼 보였다. 공작과 눈이 마주친 손님들은 겁에 질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화재 사고로 전소하였습니다.”
청소하고 돌아오느라 지친 루페가 퀭한 눈으로 보고서를 제출했다. 펠리오는 넘겨받은 보고서를 훑어보며 루페의 보고를 들었다.
“이동 중 화재로 전원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그곳 영지에서 전해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린아이들이며 인자한 코니에 선생님까지. 비통한 일입니다.”
살아만 있었다면 저희 영지에 데리고 오는 건데.
루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마침 저희 영지 내 고아원이 지난봄에 시설을 증설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군. 조금만 더 일찍 갔더라면 다 살았을 텐데.”
루페의 연기에 말을 맞춘 펠리오가 손에 들린 보고서를 응시했다. 나른하게 뜬 검은 눈동자에 붉은 이채가 머무르기 시작했고, 새하얀 보고서가 화르르 불타더니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손님들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그러나 공작저 사람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보레오티 공작 가문만의 능력.
루페가 피로를 물리고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바닥에 쌓인 뿌연 재들을 바라봤다.
보레오티 공작 가문이 북부의 주인이 되고, 감히 황실마저 그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척 많다. 북부 귀족 특유의 호전성, 제국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한 가문의 역사, 그간 공작 가문이 제국을 위해 세운 업적이라든가.
그러나 루페는 그보다 더 큰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저 능력이지.’
무인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들이 터득하는 ‘오러’와 마법의 근원이 되는 ‘마나’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 오로지 보레오티 가문의 피가 흐르는 사람만이 지니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힘이었다.
힘을 사용하는 순간, 검은 눈동자에 그 능력을 상징하는 색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동자에 나타난 색과 똑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기묘한 문양을 만들어내는데, 마치 맹수의 날카로운 이빨과 비슷하게 생겼다.
사람들은 이를 ‘맹수의 송곳니’라고 부른다.
물론 힘을 쓴다고 무조건 송곳니 문양이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조금 전 펠리오가 쓴 힘은 아주 극소량이라 눈동자에 붉은색이 뒤섞이는 것만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공포를 조장하기엔 충분했다.
느긋한 맹수의 눈이 붉어지는 순간, 초대받은 손님들은 공포에 몸서리를 쳤다.
“아저씨!”
이런 분위기와 전혀 안 어울리는 청량한 목소리의 등장에 루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나 사용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멜레스의 품에 안긴 채 현관 홀에 도착한 레오니에는 바닥에 발이 닿기 무섭게 쪼르르 달려왔다. 손에는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조그마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다친다.”
펠리오가 달려온 레오니에를 품에 안으며 주의를 줬다. 정작 레오니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왜 이래? 나 고아원에서 도망 하나는 최고였어.”
“코 깨져서 피라도 나야 정신 차리지.”
“아저씨는 왜 그렇게 표현이 극단적이야?”
“그런데 왜 고아원에서 도망을 쳤지?”
“저 사람들이 나 때리려고 했으니까.”
결국엔 잡혀서 엄청 맞았다는 말까지 완벽하게 고자질했다. 그 말에 한결 풀렸던 펠리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던 저택에 서늘한 한기가 몰아닥쳤다. 무릎 꿇은 고아원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루페와 공작저 사람들마저 오싹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루페는 알았다. 지금 공작은 품에 안은 제 딸이 놀랄까 분노를 최대한 참는 중이라는 걸. 그런데도 이렇게나 압도적인 흉흉함을 자랑했다.
“어, 비서 아저씨다.”
저 혼자 그런 공포를 느끼지 못한 레오니에가 해맑은 목소리로 루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레오니에 아가씨를 다시 뵙니다.”
루페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 아저씨란 말이 어색한 것도 있지만, 쉬이 움직이지 못할 험악한 분위기 탓도 컸다.
“루페라 편히 부르십시오. 그간 잘 지내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저 엄청 잘 먹고 잘 잤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루페는 못 본 사이에 무척 건강해진 레오니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시커먼 때 한 점 묻지 않은 말간 피부와 빨간 리본을 단 검은 머리, 북부 산맥에 사는 마물의 털을 기운 원피스와 도톰한 스타킹에 빨간 방울이 올망졸망 달린 털 부츠.
누가 보아도 사랑받고 자란 귀족 영애였다.
충동적인 입양이라 나름 걱정했던 그간의 나날이 허무할 정도였다.
“……니아?”
그때 손님 중 한 명이 힘없는 목소리를 꺼냈다.
“니아, 니아야! 우리야! 선생님들이야!”
“무사했구나! 얼마나 걱정했다고!”
“어째서 연락 한 번 안 한 거야. 밥은 잘 먹고 지냈어?”
“세상에, 너무 예뻐져서 몰라봤잖아.”
레오니에를 본 고아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어찌나 필사적인지 보레오티 영지까지 끌려오느라 추위에 굳어진 안면 근육을 억지로 올린 탓에 경련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마치 구명줄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레오니에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니아!”
고아원 원장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나다! 원장 선생님!”
자신이 처한 상황이 진정 억울한 것처럼, 원장은 통곡에 가까운 외침으로 레오니에를 불렀다. 아이는 그런 원장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이에 안달 난 원장이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는 추억을 미화했다.
“네가 처음 고아원에 온 날이 떠오른다.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지. 그때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알아? 마치 생쥐처럼 앙증맞고 가련했어. 그리고 내가 네 이름을 손수 지어줬고…….”
“아저씨.”
원장의 말을 끊은 레오니에가 저를 내려 달라며 펠리오의 옷자락을 가볍게 당겼다. 펠리오는 고아원 손님들을 가볍게 훑은 뒤에 레오니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원장을 비롯한 선생님 몇몇이 레오니에 곁으로 달려들려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짓눌렸다.
“너를 찾은 손님들이다.”
몸을 낮춘 펠리오가 소매로 레오니에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아까 먹었던 간식 부스러기가 소매에 묻어 옮겨졌다.
“아빠인 나는 그들을 대접할 의무가 있어.”
“응.”
“그러니 내가 손님들을 온전히 대접하기 전에, 네가 먼저 봐야지.”
“어째서?”
레오니에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이미 두 부녀는 손님들을 어떻게 대접할지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즉, 굳이 저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네가 내게 부탁했던 것을, 아직도 원하는지 알아보려고.”
그럴 마음은 조랑말 털 한 가닥만큼도 없지만, 혹여 아이가 저 치들의 모습에 동정을 느껴 선처를 원한다면 펠리오는 그리 해 줄 의향이 있었다. 대신 뒤에서 몰래 따로 대접해 줄 생각이었다.
“으응…….”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 위로 보드라운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잠시 궁리하는 척하던 레오니에가 품에 지니고 있던 상자 뚜껑을 열었다. 감미로운 오르골 선율이 넓은 홀을 울렸다.
지금 상황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음색에 펠리오가 한쪽 눈꼬리를 치켜떴다.
“뭐지?”
“손님들께 드리는 선물.”
돌아선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진혼곡.”
* * *
아기 맹수는 아빠와 나눈 이야기를 번복하지 않았다.
“내가 왜 용서해?”
도리어 레오니에는 자신을 니아라 부르며 어색한 미소와 뒤늦은 다정함으로 잔인했던 과거를 하려던 어른들에게 거침없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미친놈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미 마차는 저 멀리 떠난 뒤였다.
레오니에는 이때다 싶어 고자질을 시작했다.
“이 선생님은 만날 내 팔뚝 꼬집었고, 이 인간은 가죽 혁대로 애들 패는 걸 자랑으로 여겼어. 그리고 이 선생님은 고아원 돈으로 유부녀랑 불륜…….”
그래도 근 일주일 만에 만난 고아원 사람들이라고, 아는 사람을 만나 신이 난 레오니에는 신고 있던 부츠 한 짝을 벗어 손님들 한 명, 한 명의 이마를 기분 나쁠 만치 툭툭 건드렸다.
“유후! 즐거운 고문 시간!”
흥이 오른 아기 맹수가 잔망스러운 발재간을 부렸다.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
인생 어찌 될 줄 알고, 레오니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오르골 연주가 멈추면, 레오니에는 다시 앞으로 가 상자 뚜껑을 닫았다 열어 진혼곡을 틀었다. 그 행동이 얼마나 잔인한지, 기어코 어느 어른이 살려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이내 레오니에가 마지막 손님 앞에 섰다.
“우리 원장님은…….”
이제 원장은 아까처럼 레오니에를 구명줄처럼 애절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절망과 공포에 뒤섞인 허망한 눈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보레오티 공작저의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나와의 추억이 아주 많지.”
빛나는 샹들리에는 교수형 목줄처럼 보였고, 귀에 들리는 아기자기한 오르골 소리는 말 그대로 진혼곡이었다. 저 앞에 길게 뻗은 계단은 저승길로 겹쳐 보였다.
“왜 포주한테 연락한 거야? 언니를 팔면 그다음은 나나 다른 친구들이었겠네?”
레오니에가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왜 우리를 그렇게 괴롭힌 거야?”
“…….”
“원장님이랑 선생님들 같은 어른들은 우리를 지켜 줘야 하잖아.”
까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부츠로 원장의 이마를 툭툭 치는 레오니에의 얼굴에는 분노나 증오 같은 건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해충이 울고 있거니, 하는 듯 무심했다.
“근데 왜 그딴 식으로 살았어?”
레오니에가 물었다.
“응? 왜 그랬어?”
원장은 대답할 수 없었다. 뭐라고 변명하고 발악하든. 이제 어떤 발악과 애원도 소용이 없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았다. 레오니에의 뒤에서 무심히 관조하는 척하면서 살기를 조용히 내비친 검붉은 눈동자가 손님들의 모든 의지를 옥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고아원에 들어간 날은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야.”
그 정도는 기억 좀 하라는 말과 함께, 털 달린 부츠가 원장의 이마 위로 세차게 떨어졌다.
“멀리 안 나가.”
제 볼일 다 마친 레오니에가 손님들께 마지막 배웅을 했다.
“만나서 역겨웠고, 다시는 무슨, 지옥에나 떨어져라.”
레오니에는 손을 흔드는 대신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들었다. 기사들에게 잡혀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고아원 손님들의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드리워졌다. 기사들은 손님들이 혹여 자진이라도 할까, 입에 재갈을 물렸다.
배웅을 마친 레오니에는 오르골을 챙겨 펠리오의 품에 안겼다.
“어휴, 속 시원해.”
10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갔다며 레오니에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넌 이제 7살인데?”
“……말이 그렇다고.”
관용 어구도 모르냐며 레오니에가 핀잔했다. 펠리오는 아이의 손에 딸기 우유 사탕을 쥐여 주었다. 사탕을 본 레오니에가 이게 뭐냐는 듯이 펠리오를 바라봤다.
“나 오늘 예쁜 짓 안 했는데?”
“했어.”
“아까 그거? 고아원 선생님들 괴롭힌 거?”
“보레오티 가문의 일원다웠다.”
예상치 못한 칭찬에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툭 튀어나온 동그랗고 작은 귀에 은은한 붉은색이 피어올랐다.
평소 대범하고 애늙은이처럼 사는 레오니에가 의외로 수줍음이 많다는 것. 그리고 부끄러우면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게 버릇이라는 것도 펠리오가 지난 일주일간 알아낸 중요한 사실이었다.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은 사탕을 손에 쥔 채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누가 보아도 가슴 따뜻해지는 모습이나, 루페는 기함을 했다.
“아저씨가 직접 고문할 거야?”
레오니에가 입에 넣은 사탕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었다. 아까 받은 건 유리병에 넣으려고 주머니에 넣었고, 입에 있는 건 펠리오가 먹여 준 다른 것이었다.
“네 손님이니 직접 해야지.”
“아저씨 멋있어!”
도저히 평범한 부녀의 평범한 대화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너도 재능이 있어.”
“고문에?”
“그래. 나중에 한번 배워 볼래?”
“검으로 찌르는 거?”
레오니에가 퍽퍽 찌르는 시늉을 했다. 루페는 자기가 찔린 것처럼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고 보니 검도 배울 필요가 있군.”
“으음, 난 무기로 괴롭히는 건 싫은데.”
비명이 시끄럽고 피가 튀겨 더러우니 싫었다.
‘아니야! 제발 그만해!’
두 사람 다 제발 살벌한 대화는 그만두라고 루페가 속으로 처절하게 외쳤다.
‘제발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시란 말입니다! 누가 애한테 그런 말을 하나요!’
펠리오는 그렇다 칠 수 있었다. 공작님이 남들과 다른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하나 고문 자체를 싫어해야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싫다는 레오니에도 이상했다.
‘진짜 공작님의 친자식인가?’
이쯤 되자, 루페도 저 다정하고 살벌한 부녀가 정말 피가 통한 사이일 거란 확신이 생겼다. 고아원에서 레오니에를 처음 만났던 날에도 심상찮다고 느꼈던 저의 직감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아가씨!”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하녀 몇 명의 칭찬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용인들이 감격 어린 얼굴로 레오니에를 바라보며 조금 전 용감했던 고문을 칭찬했다. 레오니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펠리오의 어깨에 기대었다.
‘……혹시 내가 이상한가?’
나 혼자 감격 못 하는 거야? 나만 이상한 거야? 루페는 저를 빼고 환호하는 공작저 사람들을 얼빠진 눈으로 바라봤다. 심지어 집사는 동그란 안경을 벗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감동한 건지 제발 가르쳐 줬으면 했다. 저도 같이 울게.
그러다 멜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루페가 아는 공작저 사람 중 몇 안 되는 상식인.
하나 멜레스 역시 감격에 겨운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바로 죽이면 안 돼. 알았지?”
“그런 아까운 짓은 안 해.”
“맞아. 본전은 뽑아야지.”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지?”
“……고아원?”
레오니에가 조금 전 한 말 덕에 고아원 손님들에게 행해질 고문의 강도가 올랐다.
“아, 나 좋은 생각이 있어. 몸에 줄을 묶어서, 낭떠러지에다 미는 거야. 그러면 떨어지다가 줄의 반동으로 다시 위로 올라왔다가, 또 내려가고, 또 올라왔다가, 또 내려가고…….”
레오니에가 한 손을 올렸다 내리며 시범을 보여 줬다. 꼭 공을 바닥에 튕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딱 멈추면, 줄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거야.”
설명을 들은 펠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 볼 가치가 높군. 마침 저택 뒤쪽에 실험하기 좋은 절벽이 있지.”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무리하지 마’의 주체는 당연히 펠리오와 기사들이었다.
“건강해야 오래오래 고문하지.”
레오니에가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약속을 종용했다. 크고 작은 새끼손가락 두 개를 겹치면서 ‘약속 어기면 꿀밤 한 대’라고 재잘거리는 부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훈훈한 장면이었다.
루페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했다.
* * *
펠리오는 지하 감옥으로, 레오니에는 멜레스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친자식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루페는 집사 카라에게서 진실을 전해 들었다.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이던 카라가 목소리를 낮추라며 쉬쉬거렸다. 다행히 두 사람은 펠리오의 집무실 옆 회의실에 단둘만 있었다. 곧이어 카라는 펠리오의 지시대로 루페에게 레오니에에 대해 보다 상세히 전해 주었다.
“……맙소사.”
자신의 추측이 다 틀렸다는 사실에 루페는 이마를 한참 문질렀다. 피가 안 통해도 닮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저 둘은 그런 걸 간과하더라도 걸리는 점이 많았다.
‘특히 저 검은색과 성질머리는…….’
검은색은 보레오티 가문 출신만이 품을 수 있는 고결한 색이었다. 거기다 일주일 만에 다시 본 레오니에는 무서우리만치 펠리오와 닮아 있었다. 살이 조금 붙으면서 건강해진 아이의 얼굴에는 펠리오의 모습이 분명 있었다. 특히 조금 전 고아원 손님들을 괴롭히던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보레오티 가문 특유의 사악함이 영락없이 드러났다.
‘설마…….’
문득 루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하지만 곧장 그들의 얼굴을 지웠다.
‘내가 두 눈으로 봤어.’
범람한 강물에 떠밀려 만신창이가 된 마차를 직접 봤다.
파란 머리가 새하얗게 셀 것처럼 고민하는 루페를 말없이 지켜보던 카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지나 아가씨와 닮지 않았나요?”
그 한마디에 루페의 복잡한 생각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카라의 애잔한 눈빛이 보였다. 루페는 저 인정 많은 노부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곧 그의 이지적인 눈매가 가늘어졌다.
“……차라리 공작님의 사생아란 쪽이 현실성 있군요.”
루페는 카라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처음 만났던 날, 레오니에의 꼬질꼬질하고 메마른 모습을 봤을 때, 루페는 단 한 번도 레지나를 떠올리지 못했다. 거지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행색이었다. 그런 아이를 어떻게 레지나 아가씨와 겹쳐 본단 말인가.
물론 오늘의 레오니에는 누가 뭐라 해도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사랑 받는 아가씨였다.
‘바로 그 사람처럼…….’
‘루페!’
그리운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했다. 어떤 이의 이름도 기운차게 부르던 그 사람은 레오니에의 웃음처럼 얼어붙은 저택을 따스하게 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안 닮았어.’
그래, 이게 가장 문제였다. 만약 레오니에가 조금이라도 레지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면, 아까처럼 언뜻 스치는 추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을 거다.
루페는 결국 카라의 말을 부정했다.
“레지나 아가씨는 죽었습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이었다. 당시 보레오티 영지에는 이례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레지나는 그 틈에 자신의 정인과 도망을 쳤고, 두 사람을 찾으러 나섰던 펠리오와 기사들은 흠뻑 젖은 채 돌아왔다.
망토에 맺힌 수많은 빗방울, 들어온 문 너머로 보이는 어둑한 먹구름. 그리고 망토를 벗으며 했던 펠리오의 말.
‘레지나는 이제 보레오티가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모든 수색을 중단했다. 이후 저택에서 ‘레지나’란 이름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마치 그 사람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 뒤, 제가 강 하류까지 떠밀린 마차를 직접 인수했습니다.”
빗물에 젖은 길을 급하게 달리던 마차는 그대로 강물에 떨어져 하류까지 흘러갔다. 건져낸 마차는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말이 마차지, 그냥 수초 더미로 엉망이 된 커다란 나무 상자에 불과했다. 빗물에 떠밀려온 잡다한 것에 외벽이 긁혔고, 깨어진 창문 안으로 들어온 물 때문에 내부는 흠뻑 젖어 있었다.
범람한 강물은 그들을 아주 멀리 흘려보냈다.
저택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그들의 간절함을 이뤄주기라도 하듯.
“하나…….”
집사가 눈을 슬그머니 내리며 망설였다.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지요.”
루페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만약 그분들이 그 사고 속에서 무사히 벗어나 보레오티 저택에서 도망친 거라면…….”
* * *
“에취!”
요란스러운 재채기와 함께 레오니에가 휘청거렸다.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큼지막한 재채기였다. 옆에 있던 하녀들이 너무 귀엽다며 까르르 웃었다.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일주일 동안 살이 조금이나마 붙은 레오니에의 몸은 아직도 많이 야윈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젠 동정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가 창피하시다고요.”
“아까는 그리 멋있으셨는데.”
“……정말요?”
짧고 가는 손가락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빼꼼 나왔다. 하녀들은 허공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으음, 사실 조금 무서웠어요.”
“그래도 멋있었단 건 진심이에요.”
포박당한 손님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던 레오니에는 섬뜩했다. 그리고 뒤에서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손님들에게 위압적인 시선을 내비치던 펠리오는 더 무서웠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하녀들 역시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몇 년간 일한 깡다구가 있었다. 그들 역시 정상인 범주에서 꽤 벗어났단 뜻이었다.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일하는 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 역시 보레오티 사람이었다.
“이거 봐요.”
레오니에가 침대 협탁에 올려다 둔 유리병을 들고 왔다. 안에는 펠리오에게 받은 딸기 우유 맛 사탕이 담겨 있었다. 레오니에는 뚜껑을 열고 아까 받은 사탕을 넣었다. 톡, 떨어지는 소리에 아이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하나, 둘, 셋…….”
유리병 속 사탕은 어느새 스무 개가 넘었다.
펠리오가 딸이 예쁜 짓을 하지 않아도 가끔 사탕을 준 덕이었다.
“많이 모으셨네요.”
유리병을 껴안은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탕이 가득 차면 뭐하실 거예요?”
“언니들이랑 나눠 먹을래요.”
어머나, 하녀들이 진심으로 감격했다.
“그럼 저희는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이 종을 흔드세요.”
하녀들은 잘 세공된 손잡이가 달린 은색 종을 레오니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종을 가볍게 흔들자 맑은 음색이 딸랑딸랑 울렸다. 과연 이 간질거리는 소리만으로 사람이 올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표정을 짓던 레오니에에게 하녀들이 설명했다.
“마법으로 만든 종이에요.”
“사용인들은 다 알아들어요.”
하녀들이 소매 속에 있던 가는 팔찌를 보여 줬다. 가죽끈에 달린 은색 조각이 종 색깔과 비슷했다.
오오, 레오니에가 입술을 동그랗게 했다.
“신기하다…….”
“그렇죠? 저희도 신기해요.”
“그만큼 비싸지만요.”
보레오티 가문이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거라고 하녀들이 몰래 가르쳐 줬다.
그럼 편히 쉬시라는 말과 함께 하녀들이 물러갔다. 방에 혼자 남은 레오니에는 손에 들린 종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마법이 걸려 있다니 아주 비싸겠지? 레오니에는 그리 생각하며 테이블 위에 종을 올렸다. 매끈하게 생긴 작은 종은 무척 예뻤다.
레오니에는 이렇게 생긴 종을 테이블에 일렬종대로 쪼르르 세운 뒤, 빠른 손놀림으로 하나하나 흔들어 아름다운 연주를 하던 음악가를 본 적 있었다.
전생에서.
* * *
지하 감옥에서 손님들과 오붓한 시간을 나눈 펠리오는 방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된 따뜻한 물에 몸을 씻었다. 평소처럼 사용인 한 명 없이 혼자였다.
‘오랜만에 각 잡고 청소하니 꽤 피곤하군.’
내일은 레오니에가 말한 대로 절벽에 줄을 묶어 대롱대롱 매달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바로 죽을 것 같았다. 펠리오는 그들을 올봄까지는 살려둬야 할 것 같았다.
나른한 자태로 욕조에 기댄 그는 선잠이라도 든 것처럼 눈을 감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순간 욕실 천장에 고인 물방울이 툭 떨어졌고, 그 소리에 맞춰 눈을 떴다.
‘미친놈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러자 손님들을 대접하던 레오니에가 떠올랐고,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도대체 그런 발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아직 가정 교사를 고르는 중이라 제대로 배운 것 하나 없는 아이가, 펠리오에게 기대 이상의 신선한 충격과 흐뭇한 재미를 선사했다. 한 손에 부츠를 들고 촐싹거리던 재간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아이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일전에 카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걱정 많은 노부인은 펠리오의 충동적인 입양을 가장 걱정했다. 하지만 펠리오는 집사의 걱정을 말 그대로 오지랖이라고 생각했다.
‘어딜 봐서 애완동물이야.’
제법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침침해진 모양이었다. 레오니에는 목줄을 차고 길들일 수 있는 나약한 동물이 아니었다. 아이는 처음 봤을 때부터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배짱을 자랑했다. 고아원 어른들에게 학대당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은 강인함은 맹수 그 자체였다.
목줄로 묶어 길들이려고 한다면 역으로 큰 화를 입을 거다. 지하 감옥에 갇힌 손님들처럼.
‘그나저나…….’
역시 아이는 이상했다.
‘진혼곡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 고아원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 줬을 리가 없다. 그럼 진혼곡은 어디서 배운 걸까. 생각과 동시에 목욕을 마친 펠리오는 사용인들이 미리 준비해 둔 푹신하고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생각했다.
진혼곡, 자금 횡령. 아이가 했던 말은 그 또래의 귀족 아이라도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고아원에 들어갔을 때의 나이가 다섯 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보호자가 함께 있었다는 뜻이 된다. 펠리오는 아이의 과거가 궁금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입적도 다 마쳤으니, 혹여 친부모가 나타나 친권을 주장해도 문제없었다.
‘아니면 천재인가.’
바지 한 벌만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온 펠리오는 어느덧 제 딸의 남다른 발상이 천부적인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흐뭇해했다. 지루할 뻔한 올 한 해가 레오니에 덕에 아주 즐거워졌다. 충동에 가까웠던 입양은 펠리오의 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나오셨습니까.”
제법 괜찮은 기분으로 목욕을 마친 펠리오를 맞이한 건 루페였다.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
펠리오는 루페를 쓱 지나쳤다. 테이블 위에는 항상 목욕 후에 가볍게 마시는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투명한 유리잔에 동그란 얼음 하나가 떨어졌고, 그 위로 옅은 갈색 술이 쪼르르 떨어졌다. 그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굳이 루페의 무례한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 얼굴로?”
루페는 당장이라도 쓰러져 사나흘은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루페는 상당히 억울했다. 이게 다 남한테 일 떠넘기고 홀로 여유롭게 술 마시는 펠리오 때문이었지만, 불쌍한 부하 직원은 차마 저의 상사에게 잔소리할 수 없었다. 신분 차는 둘째치고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 쪼그라들었다.
“말도 없이 들어와 죄송합니다. 하나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들렸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달란 말에 술잔을 내린 펠리오는 책상에 몸을 나른하게 기댄 채 고개를 가볍게 움직였다. 한번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기분이 좋았기에 뭐든 봐줄 의향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있어?”
펠리오와 루페는 동시에 문을 바라봤다.
“아저씨 없어?”
“아직 씻고 계시나 봐요.”
같이 온 하녀 한 명이 옆에서 말했다. 아까 목욕을 준비하러 들어간 사람들을 봤다는 하녀의 말에 레오니에가 그러냐며 되물었다.
“나중에 다시 오실까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아이는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언니는 아저씨가 무서워요?”
뜬금없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펠리오와 루페는 아예 입을 다물고 문밖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녀는 주저 없이 무섭다고 대답했다.
“주인님은 북부의 보레오티 공작님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시니, 무서운 게 당연하죠. 저는 평범한 하녀일 뿐이니까요.”
요는 펠리오의 존재 자체가 무섭다는 뜻이었다. 루페는 저렇게 즉답하는 하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감탄했다. 과연 보레오티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람답다는 짧은 감상도 덧붙였다. 힐끔 펠리오를 보니, 익숙하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이었다.
“근데 아저씨는 나한테 잘해 주는데?”
오늘만 벌써 사탕 2개나 받았다며 레오니에가 자랑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잖아요.”
“그런 걸까요?”
“그럼 아닌가요?”
“으음…….”
레오니에가 말끝을 흐렸다. 방에 있던 두 어른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덩달아 짧은 머리칼도 흔들리고 있겠지. 동글동글한 뒷모습이 참 귀여울 거다.
“……그런 거면 좋겠다.”
수줍은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펠리오는 쑥스러워하는 레오니에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가를 비스듬히 올렸다.
“그렇지만, 나 때문에 아저씨가 노총각 되면 어쩌죠?”
조금 전까지 아이의 서투른 진심에 감동했던 루페가 서둘러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펠리오를 살폈다. 그는 상당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인님은 인기 많으세요.”
“얼굴이 다가 아니에요.”
심성이 고와야지, 레오니에가 엄격히 말했다.
“아저씨 성질이 보통 더러운 게 아닌데…….”
아이는 거기에 저까지 달렸으니,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마치 아직도 장가 안 간 옆집 아들을 걱정하는 주책맞은 아주머니 같았다. 입술을 깨무는 것만으로도 모자람을 느낀 루페는 서둘러 볼살을 깨물었다.
“내가 먹여 살려야 할까요?”
큭, 루페가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 아저씨…….”
성질도 더러운데 애까지 대롱대롱…….
이젠 하녀도 웃음을 참고 있는지 말이 없었다. 루페는 아예 소파에 기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감탄을 넘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천하의 보레오티 공작을 저렇게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다니. 거물도 보통 거물이 아니었다.
“나 때문에…….”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또 동정하려던 찰나였다.
굳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기척도 없이 열린 문에 하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린 문 너머로 바지만 입은 펠리오가 나타났다. 그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단 표정을 지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아저씨 있었네?”
정작 레오니에는 자기가 했던 말은 다 잊은 것처럼 해맑았다.
“왜 없는 척했…….”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펠리오의 발가벗은 상반신을 바라보다, 이내 소파를 붙잡고 일어서는 루페 쪽으로 움직였다. 루페의 얼굴은 웃음을 참느라 빨갛게 물든 채였다.
“……어?”
짧은 손가락이 펠리오와 루페를 번갈아 가리켰다.
“아저씨는 옷 벗고 있고, 루페 아저씨는 소파에…….”
“아가씨! 그런 거 아니에요!”
레오니에의 떨리는 목소리에 하녀가 서둘러 정정했다. 하녀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이의 발칙한 착각에 뇌가 뒤늦게 움직인 펠리오와 루페는 서둘러 거리를 두었다. 이미 멀리 떨어진 상태였지만 둘은 질색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심지어 고개까지 휙 돌렸다.
“……들어와.”
펠리오는 일단 레오니에를 안으로 불렀다. 하녀는 문밖에서 기다렸다.
“아저씨…….”
“그런 거 아니다.”
“아저…….”
“그런 거 아니라고.”
마지막 말에 힘주어 변명한 펠리오가 자괴감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고작 그런 남자로 보이나?”
펠리오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아저씨, 동성을 좋아하는 건 결코 죄가…….”
“그거 말고.”
이제 그 착각은 되었다고 펠리오가 말했다.
“내가 고작 애 하나 있다고 인기가 떨어질까?”
잠시 골똘히 생각한 레오니에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보라며 펠리오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는 잘났어.”
“알고 있으면 됐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사람 만나야지.”
내가 지금 몇 살이랑 대화를 나누는 거지? 애늙은이 발언에 펠리오가 기막혀 헛숨을 흘렸다.
“지금은 아니야.”
“나 때문에?”
“그냥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이쯤 돼서야 펠리오는 내가 왜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펠리오는 레오니에를 품에 안으려다 움찔했다.
“……왜?”
두 팔 뻗어 안길 준비를 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서 저를 안으라며 손짓하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는 아빠의 튼실한 가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섬뜩함을 느낀 펠리오가 근처에 있던 셔츠를 걸쳐 단추까지 꼼꼼히 잠근 뒤야 레오니에를 품에 안았다.
“칫.”
안타까운 혓소리는 무시했다.
“왜 옷 입어?”
레오니에의 물음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냐.”
“좀 본다고 닳나!”
“나도 다 됐군. 딸한테 성희롱이나 당하고.”
“으응, 그럼 미안.”
바로 반성한 레오니에가 앞으로는 몰래 보겠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하나 펠리오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미는 대신에 하루빨리 예절 선생을 찾아야겠다고 중얼거렸다. 레오니에가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런데 왜 왔지?”
“아, 맞다.”
그제야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린 레오니에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아저씨 주려고.”
리본으로 포장된 조그마한 봉투 안에 엉성하게 생긴 쿠키가 담겨 있었다.
“아저씨 아까 지하 감옥에서 열심히 고문하고 왔잖아. 피곤할 것 같아서 주방장 아저씨랑 같이 쿠키 구웠어. 이거 먹고 힘내.”
단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펠리오의 입맛을 고려해 설탕을 적게 넣었다며 레오니에가 말했다.
“아저씨가 만날 나한테 사탕 주니까, 이번에는 내가 주는 거야.”
펠리오는 선물 받은 쿠키와 레오니에를 번갈아 봤다.
“그래 봤자 이거 만드는 데 든 재료는 다 내 돈에서 나온 건데?”
거대한 저택부터 시작해 화장실에 걸린 휴지까지, 이 저택에 있는 모든 건 다 펠리오 보레오티 공작의 소유였다.
“……나 아저씨 그럴 때마다 너무 미워.”
낭만이 없다며 레오니에가 투덜거렸다. 세상 무심하고 흉흉한 얼굴로 돈 자랑이라니, 레오니에는 짜증이 확 났다.
“안 먹을 거면 줘!”
쿠키를 빼앗으려고 손을 휙 내밀었지만 헛수고였다. 펠리오는 쿠키를 바지 주머니 안에 쏙 넣었다.
“누가 안 먹는데.”
“기분 나빠서 주기 싫어졌어. 이거 뭐, 돈 없으면 서러워서 살겠어?”
“이제 내 돈이 네 돈인데?”
“아저씨, 아까 내가 농담한 거야.”
내 맘 알지? 바로 태세를 변환한 레오니에가 조그마한 주먹으로 머리를 콩 찍으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잘 감기지도 않아 억지로 감은 한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저 두 분은.’
자연히 외톨이가 된 루페가 부녀를 바라봤다.
‘내 존재를 잊으셨나?’
두 부녀는 루페의 존재도 잊은 채 한참을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 * *
쿠키를 준 레오니에가 방을 나간 뒤에야 루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아직도 있었나.”
역시 날 잊고 있었네, 루페는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한 것도 없는데 피로가 더 중첩된 기분이었다. 진짜 사나흘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고 싶었다.
“뭐 때문에 왔다고 했지?”
“아직 말도 못 꺼냈습니다.”
“그럼 지금 말해.”
툭툭 내던지는 건조한 말투는 조금 전 레오니에를 대할 적과는 완전히 달랐다.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두고 간 쿠키 포장을 뜯어 봤다. 그러고는 쿠키를 하나 꺼내서 이리저리 둘러봤다. 모양새는 엉성해도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졌다. 냄새도 적당히 고소했다. 한 입 베어 물자 생강 맛이 났다. 피곤할 때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루페는 그런 펠리오가 신기했다.
‘저 사람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다니.’
평소에는 세상 무심하고 모두에게 관심 없는 흉흉한 인간이, 그 조그만 아이가 눈 안에 들어오기만 해도 일단 품에 안고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눴다.
레오니에를 놀리는 말투는 무심하게 들릴지 몰라도 분명 애정과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보레오티 공작은 평소만큼 무섭지 않았다.
“……레오니에 아가씨에 관한 이야깁니다.”
쿠키 맛을 음미하던 펠리오가 시선을 움직였다. 그래, 저 눈빛이지. 루페는 도로 원상 복구된 펠리오의 흉흉한 분위기에 몸을 움찔 떨었다.
“한 번 조사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우선, 듣고 나서 화를 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쓸데없는 말이군.”
어조 없는 말투에 루페가 움찔했다. 하나 곧 각오를 굳힌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드립니다. 이래 봬도 목숨을 걸고 하는 겁니다.”
“네 놈도 새끼손가락 걸게?”
내 손가락은 비싸다며 펠리오가 쿠키 하나를 제 입에 쑥 넣었다. 쿠키가 제법 입에 맞았다. 그 드물다는 펠리오의 농담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루페가 짧게 심호흡했다.
“저는 어린 아가씨께서 레지나 아가씨와 연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방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스스로 지뢰를 건드린 루페는 눈을 꾹 감았다. 차마 앞에서 저를 응시하는 펠리오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다른 곳보다 일찍 겨울이 찾아오는 곳이 바로 보레오티 영지고, 방 분위기도 차가운데, 신기하게도 루페의 등 뒤로 땀이 줄줄 흘렀다.
차마 침 한 방울 삼킬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레지나는 죽었어.”
한참 있다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루페는 펠리오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죽은 사촌을 언급하는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하나 시체는 아직 찾지 못했잖습니까.”
카라의 말대로다. 당시 수색대는 마차는 찾았어도 레지나와 정인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 마차가 떠밀려 온 강 하류가 워낙 급류인지라 다들 두 사람이 죽었다고 단정 짓고 말았다. 펠리오 역시 그 점에 관해 이의를 달지 않았다.
“만일 그때 레지나 아가씨와 그 정인이 살아서 도망쳤다면,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레오니에 아가씨라면, 사생아란 소문은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짧은 중얼거림에 루페의 안색이 밝아졌다.
“나도 사실 레오니에의 과거를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러셨군요.”
“하나 네 말을 들으니 오히려 하면 안 되겠단 확신이 들어.”
안심하던 루페가 고개를 들었다.
“우린 레오니에를 고아원에서 만났다.”
“그러니 더욱 부모를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은 부모 찾아서 애한테 알려 주게?”
아, 그제야 루페는 깨달았다. 레오니에가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건, 설령 레지나와 그 정인이 그때 무사히 도망쳐 레오니에를 낳았더래도 지금은 죽고 없다는 뜻이었다.
루페는 자신의 성급함에 혀를 얕게 깨물었다.
“그리고 레지나의 딸이라는 배경은, 레오니에에게 좋지 않아.”
가문에서 반대한 남자와 도망친 방계 출신 영애의 딸.
제국에서 가장 강한 사내이자 북부의 주인인 보레오티 공작의 사생아.
사실 둘 다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만일 둘 중 하나를 골라 레오니에의 꼬리표로 붙여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 쪽이 훨씬 정당성이 컸다. 적어도 후자의 뒤에는 펠리오가 친부모라는 설정이 붙기라도 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루페가 순순히 사과했다. 잠시 과거에 얽매여 지금을 둘러보지 못했다. 명백한 실책이었다.
“그래도 네가 나보다 낫군.”
“예?”
저를 깔아뭉갤 듯한 시선을 보낼 줄 알았는데, 뜬금없는 칭찬에 루페가 바보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루페는 펠리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레지나의 딸이라…….”
그의 표정은 너무도 잔잔했다.
“난 그쪽으론 생각도 못했다.”
하물며 평화롭기까지 했다.
‘그 가능성을 왜 떠올리지 못한 걸까.’
아이가 너무 말라서? 아니면 거지처럼 생겨서? 루페가 저리 말할 정도라는 건, 집사인 카라 역시 레지나를 떠올릴 가능성이 컸다. 지금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은 펠리오가 공작이 된 이후 전부 새로 고용한 자들이었다. 그러니 레지나에 대한 소문은 들어도 얼굴을 알지 못한다. 레오니에를 봐도 그들이 레지나를 떠올리지 못한 건 당연했다.
하나 펠리오는 아니었다. 그는 레지나와 어릴 적부터 자라왔다. 누구보다 레지나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펠리오의 눈에 레오니에와 레지나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다. 겹쳐 보이기는커녕 루페가 레지나 이름을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쪽과 관련하여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보레오티에서 도망치고 싶다던 너를 잊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잊어버린 모양이군.
펠리오의 입가가 비틀렸다.
“네 눈에는 레오니에가 레지나와 닮아 보이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레오니에는 오히려 펠리오를 더 닮았다.
역시, 펠리오는 저의 눈이 이상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확인하는 건 간단해.”
펠리오는 굳이 레오니에한테 물어 레지나의 흔적을 찾을 수고를 못 느꼈다. 고아원에서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사금처럼 반짝이는 걸 목격했다. 그때 자신은 레오니에가 마나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가끔 마나를 타고나는 아이들은 위기에 처할 때 본능적으로 보호 마법을 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만약 마나가 아니었다면.
저나 레지나처럼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거라면.
그 아이에게 정말 보레오티 가문의 피가 흐른다면.
* * *
폭설이 쏟아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폭설은 드디어 북부에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다른 곳보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보레오티 영지는 레오니에가 처음 도착했을 때도 추웠지만, 지금 몰아닥치는 폭설로 인한 강추위와 비교하면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거나 다름없었다.
“레오니에.”
아침 식사로 나온 큼지막한 수란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들었다.
“‘대롱대롱’은 다음에 해야겠다.”
아침부터 스테이크를 썰고 계시는 펠리오는 먹기 좋은 한입 크기로 잘라 레오니에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대롱대롱’은 어제 레오니에가 고안한 신종 고문 명칭이었다. 작명가는 무려 펠리오였다.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은 레오니에가 거센 눈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을 바라봤다.
“날씨 때문에?”
오늘 레오니에는 안감이 도톰한 멜빵 바지와 보드라운 하얀 셔츠를 입었다. 아직 짧은 검은 머리에는 노란 머리띠를 꽂았다.
음식을 오물거리는 볼살은 전날보다 더 탱글탱글했다.
“손님 대접하다가 애먼 기사들만 얼어 죽지.”
차라리 어제 매달아 뒀으면 좋았을 거라며 펠리오가 나른히 중얼거렸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에서 기다리던 하녀들이 레오니에의 어깨에 얇고 빨간 실내용 망토를 걸쳐 주었다. 저택 내부가 아무리 따뜻하대도 아직 몸이 약한 아이를 조심히 살피라는 펠리오의 명이 있어서였다.
“이거 ‘슈퍼맨’ 같아.”
“누구?”
“옷 위에 팬티 입는 아저씨.”
레오니에가 말한 묘사를 그대로 상상한 펠리오가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변태도 있나?”
“변태는 아니고, 으음, 그냥 팬티를 옷 밖으로 입은 거야. 개인 취향이지.”
“그게 변태라는 거다.”
평소 레오니에에게 변태 소리를 듣는 펠리오는 퍽 억울했다. 저보다 더한 변태가 있는데도 그놈 편을 들어주는 딸이 아주 미웠다. 아빠 속도 모르는 레오니에는 변태의 몸이 아주 튼실해서 좋다고 칭찬했다.
‘몸 밝히는 건 천성인가.’
도대체 고아원 생활이 얼마나 열악했으면 아이가 이러는지. 지하 감옥에 계시는 손님들께 드릴 대접의 강도가 오늘도 강해졌다.
펠리오는 혀를 짧게 차며 레오니에가 쪼르르 앞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빨간 망토를 흩날리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이가 뒤를 돌더니 뭐가 그리 좋다고 씩 웃으며 펠리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 그러다 코 깨진다.”
나른하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거실에 도착한 부녀는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벽난로 근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동화책은?”
펠리오가 하녀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책 제목이 ‘인생 다 부질없다’였다. 분명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동화책 전권을 사다 방에 두었는데, 정작 레오니에는 동화책이 재미없다며 투덜거렸다.
“유치하잖아.”
“네 나이엔 그런 거 읽는 거야.”
“어차피 다 읽었어.”
대충 대꾸한 레오니에가 책을 펼쳤다. 펠리오가 한쪽 눈썹을 위로 꿈틀거렸다. 그 많은 양을 다 읽었다는 말이 쉬이 믿기지 않았지만, 왠지 레오니에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 책은 어디서 났지?”
“아저씨 서재. 가서 읽어도 된다고 했잖아.”
“이 책은 왜 뽑아 온 건데.”
“내 경험상, 인생 참 부질없더라고.”
아이는 열심히 살아도 어느 순간 삐끗하면 다 끝장이라며 애늙은이 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친부모님이 보고 싶나?”
그 한숨을 오해한 펠리오가 물었다. 책에서 고개를 뗀 레오니에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아저씨.”
이윽고 놀라운 말을 꺼냈다.
“나 친부모가 누군지 몰라.”
나른하게 풀려 있던 펠리오의 눈이 커졌다.
“고아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 없어.”
소파에 푹 기댔던 등을 떼어낸 펠리오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메말랐던 아이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살이 붙었고,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서 보기 좋았다.
“그럼 부모님 보고 싶어?”
“아니.”
아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 부모님은 이제 아저씨잖아.”
“…….”
“그리고…….”
레오니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몸을 낳아 준 친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들에게 잔인한 말일 수도 있으나 애정이나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니에가 혼자 간직하는 ‘비밀’ 속에 존재하는 ‘부모님’은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그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저 혼자만의 비밀이라 결코 펠리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펠리오한테 여러모로 미안한 것도 많았다.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 탓에 의도치 않은 침묵이 길어졌다.
“……기억해야 해?”
레오니에는 뒤늦게 펠리오의 눈치를 살폈다. 펠리오는 평소처럼 노곤해 보이는 눈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못 해도 괜찮아.”
아이가 불안해한다고 생각한 펠리오는 제 무릎 위에 레오니에를 앉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어 주었다. 사탕을 머금은 작은 입술이 오물거렸다.
“그래도 내가 네 부모라는 건 안 잊었네.”
한참 사탕을 먹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들었다.
펠리오는 아이가 뒤에 흘린 ‘그리고’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크게 연연치 않기로 했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레오니에의 보호자는 명실상부 자신이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제법 괜찮은 부녀지간이란 사실이다.
“곧 죽어도 아빠라고는 안 부르니 잊은 줄 알았지.”
“그, 그건 아직 입에 안 달라붙어서 그래…….”
“핑계도 가지가지다.”
“아, 또 시비야!”
이익, 레오니에가 짧은 팔을 흔들며 분노했다. 물론 레오니에의 주먹은 펠리오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보레오티 공작이자 글라디고 기사단장이기도 한 펠리오에게는 솜방망이만큼 가소로울 뿐이었다.
“레오니에.”
한 대도 때리지 못해 씩씩거리던 레오니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뭐. 시비 걸면 확 가슴 깨문다?”
“눈 한 번 보자.”
“……눈?”
뜬금없는 소리에 놀랐지만, 레오니에는 곧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펼친 책을 덮고 옆에 두었다. 펠리오는 아이의 까만 눈을 응시하며 눈을 피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가슴에서 손은 떼고.”
이 와중에 제 가슴 위에 다소곳이 올린 아이의 손도 잡아 내렸다.
“넌 왜 이렇게 밝히냐.”
“누가 보면 아저씨는 안 밝히는 줄 알겠네.”
“입 열지 마. 고기 냄새난다.”
“아저씨가 먹인 거잖아!”
부녀는 유치한 말다툼을 계속 이어 가면서도 마주한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새 레오니에는 이를 눈싸움으로 인지했는지 눈에 힘을 주어 부릅떴다. 펠리오는 제 귀에 들리는 조그마한 으르렁 소리는 착각이겠거니, 하고 여겼다.
그렇게 눈을 바라보기를 한참.
‘……뭐 하는 거지?’
이게 도대체 뭔 짓인지 가늠해 보던 레오니에가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펠리오의 검은 눈동자에 붉은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한 점처럼 보이던 붉은색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이내 검은 눈동자 절반을 뒤덮었다.
레오니에는 홀린 것처럼 이를 바라봤다.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아.’
그때, 아이의 동그란 눈이 붉은색에 염색된 것처럼 화끈거렸다. 깜짝 놀란 레오니에가 흠칫하는 동시에 펠리오는 천천히 멀어졌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맺혔던 붉은색도 어느새 사라졌다.
“뭐, 뭐야……?”
레오니에가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조금 전까지 두 눈을 덮쳤던 화끈한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손등으로 눈 주변을 조심히 눌러도 느껴지는 건 미세한 압박감뿐이었다.
“아저씨?”
아이는 답을 구하고자 펠리오를 바라봤다.
“다들 나가.”
평소처럼 검은 눈으로 돌아온 펠리오는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을 물렸다. 사용인들은 발소리도 죽인 채 거실을 나가 방문을 닫았다.
“레오니에.”
펠리오가 말했다.
“나는 돌려 말하는 건 질색이야.”
“어?”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건 뭣도 없는 것들이 있는 척하려고 지랄하는 거나 똑같아.”
“으음…….”
돌려 말하는 것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지닌 건가.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펠리오는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빗겨 주며 이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한참 머리칼을 정돈해 주던 손가락은 머리에 꽂은 노란 머리띠를 툭 건드렸다.
“아무래도 네가 내 조카인 것 같다.”
레오니에의 턱이 저 아래로 툭 떨어졌다.
* * *
급작스러운 흐름에 레오니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카가 있었어?’
이 무슨, 어, 아니, 잠깐만.
황망하게 굳은 아이의 표정을 살핀 펠리오는 나름 배려랍시고 레오니에를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배려 아닌 배려 덕분에 레오니에는 서둘러 자신이 기억하는 줄거리를 떠올렸다.
‘검은 맹수의 바리아.’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또 다른 세상에서 즐겨 읽었던 소설이었다.
책 내용은 제목이 다했다. 북부의 주인인 보레오티 공작과 그의 영원한 반려가 될 여인 바리아 에르바누 백작 영애의 사랑 이야기로, 소위 말하는 클리셰를 나름 재미있게 풀어쓴 소설.
그리고 레오니에가 이곳이 소설 속 세상이란 걸 알게 된 건, 고아원에 도착한 커다란 마차에 새겨진 공작 가문의 문장 덕분이었다. 검은 사자가 새겨진 보레오티 가문 문장은 소설 표지에서 익히 본 것이었다.
‘난 처음에 정말로 하녀가 될 생각이었어.’
어느 날 눈 떠보니 고아가 되었고, 저를 학대하는 지긋지긋한 고아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 걸고 도박했다가 운 좋게 보레오티 가문의 양녀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조카라고?’
아무리 소설 내용을 떠올려도 펠리오에게 조카가 있었단 언급은 한 줄도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이렇게 중요한 출생의 비밀을 아침 식사 후에 가르쳐 주다니.
‘보통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알려 주지 않아?’
입양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다니. 레오니에는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펠리오가 더 충격이었다. 물론 자신은 평범한 일곱 살이 아니니 그딴 비밀 좀 알았다고 엉엉 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고아야. 아저씨도 나 고아원에서 데려왔잖아.”
다만 자신에게 보레오티 공작 가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넌 보레오티의 상징을 몸에 품고 있어.”
“우연일지도 모르잖아.”
“검은색은 보레오티 가문에서만 유전되는 특징이다.”
“그, 그거야…….”
그건 누구보다 레오니에가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머리칼을 매만지던 펠리오는 제 눈치를 살피는 아이의 눈가를 찬찬히 쓸었다.
“난 네가 마법사라 생각했다.”
“……잉?”
뭘 보고?
레오니에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꼬질꼬질한 고아가 귀한 공작님 앞을 겁 없이 막아섰다가 이유 모를 위압감에 겁을 지레 먹었지.
“고아원에서 날 응시하던 네 눈이 반짝이더군.”
일부러 겁을 주기 위해 발동했던 펠리오의 붉은 송곳니에 레오니에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반짝였다.
그때 펠리오는 아이의 반짝이는 눈이 마나의 흐름이라 여겼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어린 마법사들은 종종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마나를 몸 밖으로 방출할 때가 있었고, 펠리오는 레오니에가 바로 그 경우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너도 송곳니가 뭔지는 알지?”
“보레오티 가문에서만 이어지는 이능이잖아.”
책에서 읽었던 묘사에 따르면, 맹수의 송곳니가 발동될 때면 검은 눈동자에 특유의 색이 섞인다고 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조금 전 펠리오의 검은 눈동자가 붉어졌을 때 깜짝 놀랐다.
왜 갑자기 저에게 송곳니를 발동한 걸까.
그리고 이번에는 어째서 고아원에서 봤을 때와 달리 흉흉한 위압감을 느끼지 못한 걸까.
“네 눈이 반짝인 건, 내 송곳니에 공명한 거다.”
펠리오가 고아원에서 봤던 레오니에의 눈동자가 반짝이던 현상은 마나의 방출이 아니라, 레오니에가 품고 있던 송곳니가 앙증맞게 드러난 거였다.
펠리오의 붉은 송곳니에 반응해 저도 따라 어흥, 내민 거였다.
“그래서 아까 그, 공명, 이란 걸 내가 한 거야?”
“송곳니는 송곳니에 반응하거든.”
맹수의 송곳니는 오로지 혈연으로 이어지는 이능이며, 사람마다 각기 다른 오러나 마나와 달리 유사한 파동을 지니었다. 그래서 종종 다른 이의 송곳니에 이끌려 자신이 송곳니를 발동하기도 했다.
조금 전 펠리오가 레오니에에게 한 게 바로 공명이었다. 그래서 위압감을 느끼지 못한 거다. 이번에 드러낸 붉은 송곳니는 위협이 아닌 공명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진짜 보레오티…….”
더듬더듬, 작은 손이 살이 막 붙기 시작한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래도 전부 꿈 같았다.
어느 날 눈 뜨니 부모 없는 고아가 된 것도, 지옥 같던 고아원에서 부당한 학대를 당한 것도, 펠리오를 만나 이곳이 소설 속 세상이란 걸 깨달은 것도, 그와 정말로 피가 통하는 가족 사이라는 것도.
“그러면…….”
하지만 아무리 꿈 같아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게 있었다.
“날 낳아 준 사람은 누구야?”
이것만큼은 책을 읽은 레오니에조차 알 수 없었다. 이런 소설의 설정이 보통 그러하듯, 펠리오는 보레오티 가문의 유일한 구성원이었다. 부모님은 일찍 사망하고 형제조차 없었다.
그때, 펠리오의 얼굴에 짜증이 얼핏 스쳤다.
“……내 사촌 누이.”
고모님의 딸이었다고 덧붙인 펠리오의 뒷말이 가관이었다.
“세상 가장 짜증 나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