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가출한 아내 (17/17)

외전. 가출한 아내

* * *

13구의 어느 뒷골목.

관리되지 못한 길바닥에는 쥐가 들끓었고, 쾨쾨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 구불구불한 골목의 끝에는 작은 약재상이 하나 있었다.

13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약재상이었다.

“이번에도 ‘그 약’이 필요하신 거지요?”

“…….”

약장수는 대답 없는 손님에게 불쾌해하지 않았다.

이 손님은 약의 유효기간인 7일마다 상인을 찾아왔다. 금화 한 개라는 거금을 지불하면서도 잔돈을 받지 않는 특별한 손님이었다.

“역시 말씀이 없으시군요. 어쨌든 평소대로 7일 치를 드리면 될까요?”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해 드립죠.”

주인은 흡족하게 웃으며 손놀림을 빨리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몰래 손님을 흘긋거렸다.

낮은 천장에 닿을 듯 훌쩍 큰 키, 남들의 두 배는 될 듯한 떡 벌어진 어깨, 뼈마디가 굵은 커다란 손.

검은 후드로 온몸을 감쌌는데도 왜소해 보이기는커녕 거인처럼 커다랗다. 저 검은 후드가 아니라 평범한 의복을 입었다면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근육질의 젊은 남자였다.

‘13구의 뒷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내야.’

리옹의 13구는 매춘으로 유명한 퇴폐 지역이었다.

활기찬 리옹의 시가지와는 달리, 구시가지에 위치한 13구의 이른 아침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 남자는 언제나 지금처럼 13구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만 찾아왔다.

‘처음엔 어느 업소의 문지기가 심부름을 온 줄 알았지.’

하지만 신비하리만치 과묵한 남자의 언행과 이따금씩 보이는 결 좋은 금발, 왼손 약지에 낀 비싸 보이는 결혼반지가 그의 신분을 대신 말해 주었다.

짐작건대, 평범한 귀족은 아니다.

남자를 둘러싼 진중한 기운과 손끝 한 번 닿기 싫다는 듯 잔돈을 거절하는 도도한 분위기는 신성하기까지 하다.

남의 눈에 띄기 싫은 고귀한 신분의 훤칠한 사내.

약장수는 이 젊은 남자를 향한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다.

이는 그가 사 가는 약 때문이기도 했다.

“실례지만 약은 귀인께서 복용하시는 겁니까?”

“…….”

남자는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가 들켜 괜한 입방아에 오르기 싫다는 뜻이었지만 약장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아시다시피 이 약물은 일회성이라 자주 복용하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한 번 사정할 때마다 한 병씩 마셔야 하니까요.”

그렇다. 심지어 남자가 사는 약은 남성용 피임약이었다.

철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리옹에선 식량난으로 인해 엄격한 산아제한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피임은 대부분 여자의 몫이었고, 남성용 피임약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약장수의 주 고객은 거의 접대부들이었다. 그래서 약장수는 귀족으로 짐작되는 이 남자와 한번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귀한 신분의 기혼 남자가, 왜 굳이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서 피임약을 사 가는 거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13구의 건물들은 대부분 녹슬었고, 거미줄 같은 실금이 가 있었다. 대부분의 깨진 창문에는 어두운 적색, 혹은 검은색의 커튼이 아슬아슬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커튼은 안을 가리기 위한 용도였지만 이는 겉치레조차 되지 못했다. 밤마다 온 건물에서 교성이 끊이질 않아 13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확실히 이 신성한 남자가 걸음하기엔 더럽게 추잡스럽고 음침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이 약물은 10일 안에 부패해 버리니 귀인께서 매번 이렇게 약을 사러 오시는 번거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남자가 눈을 맞추듯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는 게 별로 탐탁지 않은지, 이번에는 약장수에게 귀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남자의 분위기를 닮은 낮은 음성이 퍽 듣기 좋았다.

“피임에는 이 약보다 더 나은 것이 있습니다. 효과는 물론 확실하고요.”

“다른 약?”

“초면이라 강한 약은 권해 드리지 않았습니다. 한데 계속 필요하신 것 같아서…… 잠시만 기다리십쇼.”

남자가 관심을 보이자 약장수는 곧장 몇 가지 종류의 약을 더 꺼내 보였다.

“사실 귀인께서 드시던 약은 이곳에선 아무도 취급을 안 하는 겁니다. 한 번 물을 뺄 때마다 한 병씩 마셔 줘야 한다니, 이렇게 비효율적인 약을 누가 먹는답니까?”

“본론만.”

“예, 그러니까 여기 창놈들이 먹는 약은…… 아…… 아니,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한 약장수는 땀을 삐질 흘렸다.

“남성 접대부들이 주로 먹는 피임약은 따로 있습니다. 귀인께선 물론 접대부가 아니지만, 효과가 오래 지속되는 강한 약이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행히 남자는 불쾌하기보단 더 효율적이라는 약에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약은 머리색이 엷게 변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가임상태가 되면 다시 돌아옵니다.”

작은 병을 들고 살짝 흔들자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울렸다.

“이거 한 병이면 한 달도 갑니다. 보통 반년짜리를 가장 선호하고요.”

“반년?”

“예, 더 오래가는 약도 있습니다.”

꽤 솔깃한지 남자는 헝겊에 싸인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귀인께서 드시는 약은 두통이나 구역질 같은 부작용도 있지만 가장 큰 단점은…… 너무 번거롭지요.”

그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달간 본 모습 중에 가장 적극적인 의사표현이었다.

‘하긴, 일주일 치를 40병씩 사 갔으니.’

혼자 다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하룻밤에 5번씩…….

‘아이고.’

다부진 저 몸만 봐도 꽤 정력적인 남자였다. 그러니 매번 얼마나 귀찮았을까.

“일단 사흘짜리를 먼저 드셔 보십쇼. 그리고 보름, 한 달, 반년으로 점점 기한을 늘려 가는 겁니다.”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군.”

“어쩔 수 없지요. 아, 여자들 것은 훨씬 간단합니다.”

약장수는 가장 가까운 선반을 뒤적였다. 그 속에서 꺼낸 헝겊을 풀어낸 그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검은색 알약을 하나 들어 보였다.

“이 약 한 알이면 영원히 임신에서 해방입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검은색 알약이 위험스레 번쩍였다.

“이걸 드릴까요? 해독약도 따로 있어서 원하면 언제든 다시 가임상태로…….”

하지만 남자는 애초에 여성용 피임약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성용은 없나?”

“남성용도 있긴 있는데 지금 당장은 가진 게 없습니다. 찾는 손님들이 많지 않아서 말이죠.”

약장수는 남자를 좀 더 털어먹고 영구피임약을 구해 줄 생각이었다.

“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남자는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이 들고 있던 사흘짜리 약병을 내려놓으며 눈짓했다.

“이것도 보관기간이 있나?”

“물론이지요. 이것도 10일입니다.”

“그 안에 다시 와야겠군.”

몹시 귀찮은 듯 남자의 목소리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사흘 치를 3병 드리겠습니다. 60길리입니다.”

약장수는 이번에도 금화 하나를 받았다.

“잔돈은 드리지 않아도 되지요? 예예, 감사합니다.”

약장수는 기쁜 얼굴로 약이 든 병을 포장하며 넌지시 물었다.

“귀인께선 멀리서 오시나 봅니다.”

그 순간 푹 눌러쓴 후드 사이로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를 아나?”

“아이고, 그럴 리가요.”

약장수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 같은 누추한 약쟁이가 어떻게 귀인 같은 분을 알겠습니까? 그저 13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립니다.”

남자는 그 말에 조금 안심한 듯, 전처럼 날 세운 눈빛을 던지거나 하지 않았다.

“안심하십쇼. 이래 봬도 이 자리에서만 15년을 지냈습니다. 장사의 제일은 신용입지요.”

약장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말했다.

“전 귀인을 모릅니다.”

앞으로도 알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13구는 리옹의 그림자 같은 곳이지요. 이곳엔 의외로 고귀한 분들도 많이들 오십니다. 귀인처럼요.”

“나를 모른다더니.”

“아, 그분들도 누군지 다 아느냐 하면은 그건 아니고요.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천한 종자들과는 다른 고귀한 티가 난다고 할까요?”

능청스런 약장수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매우 낯을 가리는 듯했지만, 다행히 장사꾼과는 말도 섞지 않는 재수 없는 부류는 아니었다.

“아무튼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검은 옷을 입고 오시면 가끔은 죽음의 사신이 아닌가 흠칫할 때가 있다고요.”

남자는 적대심이 제법 풀렸는지 느슨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직 그런 걱정을 할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고, 가는 데 순서가 어디 있답니까.”

약장수는 약병을 가죽 주머니에 담으며 가벼운 농담처럼 덧붙였다.

“요즘은 나이 더 먹었다고 먼저 죽고, 더 어리다고 오래 사는 거 아닙니다요. 50년도 채 못 살고 죽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팔십까지 정정한 할매들도 많습디다.”

그러자 검은 후드 아래 남자의 도톰하고 불그스름한 입술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보이는 건 겨우 입술뿐인데도 아주 수려하게 잘생긴 남자일 것 같았다.

‘이런 농담을 좋아하나?’

그는 정말로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더 꺼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군.”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게 왜 듣기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약장수는 얼른 돈을 받아 넣었다.

“실례지만 물량이 모자라서 그러니 창고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이 시간엔 오는 손님이 없으니 편하게 계십쇼.”

“그러지.”

남자는 확실히 낯가림을 덜었는지 전보다 편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조잡스러운 공간에 그의 관심을 끌 물건은 없을 터였다. 그저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때우려 구경을 하는 듯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약장수는 문득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설마 어느 마님의 정부인가?’

젊고 잘생긴 남자가 자신이 먹을 피임약을 원하니 다분히 그럴듯했다.

하지만 남자의 고고한 분위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마님의 정부라니, 약장수는 저절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남자 같지는 않아.’

이윽고, 창고에서 돌아온 약장수는 반갑게 양손 가득한 약병을 들어 보였다.

“오래 기다리지 않으셨…….”

한데 남자는 뭔가에 집중하느라 그가 돌아온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커다란 그 손에 들린 건 익숙한 책자였다.

‘밤마다 여자를 만족시키는 9가지 비법.’

이 13구에 가끔 찾아오는 노름쟁이들도 더는 읽지 않을 만큼 오래된 책.

너덜너덜해서 제목도 알아보기 힘든 저 책이 어떻게 눈에 들어왔을까?

‘언행으로 봐서는 신전이나 의회의 높으신 기사님인가 했더니.’

약장수의 의혹에는 불이 붙었다.

‘그냥 어느 마님의 정부가 맞나 보구나.’

약장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렇게 젊고 잘난 남자가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여자한테 빌붙어 먹고 산담. 쯧쯧쯧.’

하지만 13구에 저런 이가 한둘이던가? 약장수는 남녀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창부들을 봐 왔다.

‘이 호구 손님한테 필요한 걸 알게 되어 다행이지.’

그는 언짢은 속내를 숨기고 능청스레 헛기침을 했다.

“흠흠.”

책을 내려놓은 남자의 시선이 제게 닿자, 약장수는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혹시 정력제는 필요치 않으신가요? 낮이고 밤이고 벌떡벌떡 일어나는 약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약장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가장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약이 바로 정력제 아닌가!

“물론 귀인께선 뭐, 충분하시겠지만 마침 창고에 아주 좋은 약이 들어와 있지 뭡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건 됐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드셔 보시죠. 이 약은 절대 싸구려가 아닙니다. 정말 다릅니다. 없어서 못 파는 건데 귀인께만 특별히…… 흠흠, 알겠습니다. 지금은 정말 필요가 없으신가 보군요.”

약장수는 입을 꾹 다문 남자에게 겁을 먹고 말을 돌렸다.

건장한 데다 과묵한 이라 그런지, 한 게 없는데도 지레 겁이 났다.

남자는 가죽 주머니에 담긴 병을 들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약재상을 나가려다가 문득, 멈칫한 그가 물었다.

“혹시 말이다.”

“예?”

잠시 주저하던 남자는 고민하듯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혹시 그…… 정력제.”

“예! 지금 갖다 드릴까요?”

약장수는 반색하며 얼른 창고의 열쇠를 손에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라는 말만 하면 뛰어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남자가 필요한 건 이번에도 제 것이 아니었다.

“부인한테도…… 효과가 있나?”

“여자한테요?”

흠칫한 약장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15년 경력의 약쟁이지만 처음 받아 본 질문이었다. 밤을 조르는 여자는 방탕하다 여겨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모시는 마님이 어지간히 나이가 많으신가 보군.’

돈 많고 나이 지긋한 마님들이 젊고 싱싱한 남자를 정부로 두는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본남편은 적게는 10살, 많게는 30살까지 차이가 나니 누군들 젊은 남자를 거절하겠는가?

저 남자가 여성용 정력제를 찾는 걸 보니 뻔했다. 남자의 손에 끼워진 저 반지도 아마 겉치레용이겠지.

“글쎄요. 저 정력제가 여자한테도 효과가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어깨가 아래로 쑥 내려갔다. 가볍게 묻더니 내심 기대했나 보다.

‘주당 40병씩 사 가길래 매우 뜨거운 밤 생활을 보내는가 했는데.’

그것도 마님과 전부 다 쓴 게 아닌가 보다. 하긴, 리옹처럼 불륜이 흔한 도시에.

“마님의 기력을 보충하고 활기찬 생활을 하시려면 약보다는 음식이 낫습니다.”

귀족 마님들 가운데는 식성이 까다로워 식사를 가리는 경우도 많았다.

연로한 그의 ‘부인’이 정확히 어떤 상황이기에 이 과묵한 남자가 염치 불고하고 그런 약까지 찾는 걸까?

“혹시 마님께서 일상생활도 힘든 상태신가요?”

“음식은 이미 잘 섭취하고 있다. 일상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그럼 정확히 문제가 무엇인가요?”

남자는 말을 가리는 듯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증상을 알아야 정확한 약을 권해 드릴 수 있다’고 첨언하자 그제야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우리 부인은 남들이 말하길 기력이 20대 못지않다고 한다.”

“오, 그러시군요.”

“다방면으로는 왕성한데 유독…….”

“유독?”

“밤에만 피곤하다는 소리를 자주 하고…… 잠이 많아, 무척. 체력이 점점 떨어지는 건지…….”

“체력 저하가 심하신가 보군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니.”

내 말이 그 말이라는 듯,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여성용 정력제는 없나? 밤 기력이 좋아지는 그런 약 말이다.”

“글쎄요…… 이것 참.”

약장수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갑자기 다급하게 성큼 다가왔다.

“그대가 사실은 시의회 출신의 뛰어난 약사였다는 걸 알고 있다.”

순간 약장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독약제조를 권유받아 죽은 척 위장하고 이곳에 발을 들였다던가.”

놀랍게도 남자는 그의 잊혀진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약장수는 괴롭게 고개를 떨궜다.

“그건 전부 지난 일입니다.”

“리옹에서 가장 뛰어난 약사를 찾아다녔는데, 다들 그대를 추천하더군.”

“손님의 지인들께서 아는 약쟁이가 저뿐이었나 보지요. 그분들이 13구에 자주 찾아오시나 봅니다.”

“내가 대화하는 이들은 이곳에 걸음하지 않는다.”

그 단호한 대답에 약장수는 그야 모르는 일이라고 대꾸하려다 그냥 말을 삼갔다.

‘자기가 그걸 어떻게 확신한다는 거야? 막말로 신전의 교황님, 기사님도 아니고.’

이 남자처럼 얼굴을 가리고 놀러 오는 귀족들이 오죽 많은가?

“모르는 약이 없어서 매우 촉망받는 인재였다던데.”

“하아.”

약장수는 영업용 미소를 지우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까지 들먹일 만큼 남자는 끈질겼다.

“리옹에 그대만 한 약사가 없다는 건, 갈리아 전역을 뒤져도 없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

“마님의 정력제요?”

남자가 한 번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본 모습 중에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었다.

약장수는 그가 쓸데없이 너무 점잖고 절제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봤자 정부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쯧쯧.’

이 13구에 널리고 널린 창부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원래 정부들은 밤일로 제 쓸모를 증명하려 하니 남자가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한심했다.

어쨌거나 약장수는 약이나 비싼 값에 팔면 그만이었다.

“가진 약이 있기는 합니다. 여태 한 번도 팔아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히 얘기해 보도록.”

“예, 그러니까 그 약은 리옹의 철벽 밖에 사는 건강한 노루의…….”

* * *

“으음, 이게 무슨 냄새야.”

희수는 아침부터 코를 찌르는 냄새에 불쾌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상쾌하게 시작하는 아침이 이렇게 방해되어 조금 짜증스러웠다.

‘누가 아침부터 이렇게 쓴 걸 먹는담.’

중얼거리며 옆으로 돌아눕는 순간, 희수는 확 다가온 쓴 냄새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으음, 여보…….”

결국 부스스 일어난 그녀가 주동자를 탓하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이런 거 안 먹겠다고 했는데…….”

“이건 진짜 좋은 거야. 아침에 먹어야 더 효과가 좋대.”

칼릭스는 요즘 들어 부쩍 갈리아의 산간오지에서 온갖 약을 구해 왔다.

먹으면 오래 산다는 불로장수의 명약이었다.

“어휴.”

희수는 저보다 8살 어린 남편의 정성이 갸륵하고 기특하여 하는 수 없이 약을 먹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제 입술에 약 그릇이 들이밀어지자 저절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냄새가 너무 지독해.”

“냄새만 그래.”

“어떻게 냄새만 그래?”

희수가 어이없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칼릭스는 어서 먹기나 하라는 듯 그녀의 코를 직접 막아 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내가 우리 아들한테 하는 것 같네.’

꼭 제가 어린애가 된 것 같았지만 남편의 과한 다정함이 싫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그녀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들이켜고 나서야 그릇을 치우고 코를 놓아주었다.

희수는 재빨리 그가 건넨 시원한 물을 한 컵 마시고, 옆에 놓인 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여전히 쓴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으, 너무 써.”

그녀가 인상을 구기고 있자 칼릭스는 잘했다고 상을 주듯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건넸다.

“며칠 전에 들었는데 요즘은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더군. 당신도 관리만 잘하면 여든까지 살 수 있어.”

“난 이런 거 안 먹어도 오래 잘 살 거라니까 자꾸 그래.”

희수는 아침부터 갑갑한 소리를 해 대는 남편을 노려보며 그를 밀어냈다.

“저리 비켜요. 씻게.”

아직 제 앞날이 얼마나 창창한데 자꾸 저런 소리를 하는지. 부인이 나이 많다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쯧쯧.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차는 동안 칼릭스는 자연스레 다시 희수를 앉히고 그녀의 다리로 손을 뻗었다.

“이것 봐. 멍든 게 아직도 안 나았잖아.”

“아이, 참.”

희수는 핀잔하듯 그의 손을 밀어냈다. 어젯밤에도 확인했으면서 아침에 다시 봤다고 다 나았겠는가? 남편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이들과 놀아 주다가 다친 것이라 희수는 대수롭지 않았다.

“며칠 갈 것 같다고 했잖아요.”

애들이 아빠를 닮아 어찌나 힘이 좋은지. 덥석 안겨 드는 걸 안아 주다가 맥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희수는 사실대로 말했다가 아들이 혼날까 봐 본의 아니게 거짓으로 둘러댔다.

“앞으로 밤에는 계단 오르내리지 마. 응?”

칼릭스는 조심스레 시퍼런 멍을 매만지며 안쓰러운 얼굴로 당부했다.

“……알았어요.”

가뜩이나 아들들은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셋이나 되는 아들들이 하나같이 너무 기운이 넘쳐서 큰일이었다.

“손목도 다쳤는데 다리까지 이게 뭐야.”

희수는 남편의 속상한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 슬그머니 붕대를 감은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요즘 그녀는 ‘클로비스 부인의 살롱’을 새롭게 운영하는 데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손목을 삐끗해서 일주일간 붕대를 하고 있었는데 과로 때문인지 여전히 차도가 없었다.

칼릭스는 제 나이 때문에 회복이 점점 더뎌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번 기회에 차라리 우리 침실을 1층으로 옮길까? 집사가 그러는데 당신이 2층까지 올라가는 것도 힘든 것 같다고…….”

“어휴!”

희수는 질색하며 칼릭스의 가슴을 때렸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집사도 문제였다.

“겨우 한 번 쓰러진 걸 가지고 계속 그래.”

“겨우?”

순간 남편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아들들이 때리지도 않는 아빠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다는 거죠.”

찔끔한 희수는 얼른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그게 큰일이 아니면 뭔데.”

말싸움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희수는 괜히 커튼을 한 번 쳐다봤다가 또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이 요즘 얼마나 바쁜데 별일도 아닌 걸 같고…….”

“왜 별일이 아니야?”

“자꾸 사소한 걸 갖고…… 큰일 하는 사람이 왜 쓸데없이 집에서 열을 올리고 그래요.”

“나한테 희수 너 말고 큰일이 어딨어?”

남편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를 부르는 호칭도 여보, 당신을 버리고 연애 적으로 돌아갔다.

“몸은 성한 데가 없으면서 쉬지도 않고, 약도 안 먹고!”

화가 많이 났나 보다. 희수는 슬그머니 그의 눈을 피했다가 어깨를 꽉 붙들렸다.

“아프면 말이라도 할 것이지 나한테는 숨기기만 하고!”

“숨긴 게 아니라, 당신이 걱정하니까…….”

희수는 뭐라고 반박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정원에서 쓰러졌다기에 얼마나 놀랐는데! 그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던 그는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벌떡 일어서서 그녀를 등지고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칼릭스는 긴 숨을 들이마시며 북받치는 감정을 홀로 진정시켰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희수는 잠이 홀딱 깨 버렸다.

굉장히 서운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지, 덩치도 산만 한 남자가 저렇게 울어 버리면 대체 어쩌란 건지.

아침부터 말싸움을 이어 가느라 날카로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칼릭스는 원래 잘 우는 남자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도 그녀가 첫째 아이를 출산했을 때였다.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네가 아프면 난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가 혼잣말을 하듯 원망스레 중얼거렸다.

저를 이렇게나 소중히 여기는 건 정말 남편뿐이었다. 저 자신도 가끔 이렇게 스스로에게 소홀한데, 이 남자에겐 정말 자신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같이 산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감동이 차올랐다.

“여보, 내가 다 미안해요. 당신 마음을 몰랐어.”

희수는 조심스레 그의 소매를 당겼다. 화났다고 저를 내팽개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그녀의 손길을 따랐다.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길 기다린 사람처럼 몸을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

“앞으로는 다 말할게.”

희수는 널찍한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바위처럼 딱딱한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 쓸데없는 얘기도 많이 해야지. 그래야 귀찮다고 할 거야.”

“귀찮다고 안 해.”

그는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슬그머니 그녀를 한 번 안아 주며 뭔가를 내밀었다.

“분위기 좋을 때 주려고 했는데.”

고이고이 헝겊에 싸인 걸 보니 이번에도 약이었다.

“또 오래 사는 약이에요?”

그러자 칼릭스가 조금 당황한 눈빛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는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헝겊을 풀어내며 말했다.

“이건 정력제야.”

“정력제? 아휴…… 여보!”

희수는 부러 들으라고 긴 한숨을 내쉬며 그를 흘겨보았다.

“당신이 이런 걸 왜 먹어?”

“…….”

“당장 갖다 버려요!”

칼릭스는 저를 나무라는 아내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살을 부대끼며 산 지 벌써 10년째.

독사 같은 누이들과 어울려 다니니 사람이 영향을 좀 받지 않을까 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희수는 참 한결같았다.

“어쩜 이렇게…….”

사람이 투명한지.

칼릭스는 이런 아내가 참 귀여우면서도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아, 좋은 약이면 이리 줘요. 캐서린 아가씨한테나 갖다 줘야겠다.”

희수는 모든 시누이들과 친하지만 그중에서도 캐서린과 각별했다.

칼릭스는 캐서린이 부부간의 사적인 얘기까지 서슴없이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겨 버렸다.

희수는 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감정표현에 자유로워졌다. 가끔은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칼릭스는 여전히 누이들과 데면데면해서 그냥 예전보다 낫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예전엔 인형 같았으니까.’

클로비스 가문의 여자들은 앞에선 가면을 쓰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뒤에선 온갖 음해를 펼치는 데 뛰어났다.

칼릭스는 종종 클로비스 가문의 여자들을 마귀나 살쾡이, 독사에 비유하곤 했지만 근래에는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원해서 그런 삶을 살았던 게 아닐 테지.’

그는 가끔 계모를 떠올렸다.

모든 걸 가졌지만, 그 모든 걸 버려 버린 그 여자.

계모는 이 저택을 떠나 버림으로써 남은 모두에게 사랑과 행복,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역설했다.

캐서린이 웬 비렁뱅이와 결혼을 해 버린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남편의 명예보다는 사랑이 더 가치 있다 여겨졌겠지.

“여보, 이거 그러니까 남자한테 확실히 효과가 있는 거죠? 이미 이것저것 시도를 해 봤다는데…… 실망할까 봐 걱정이네.”

희수가 고민스레 헝겊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또 퍽 귀여워 보여 칼릭스는 웃으며 헝겊을 풀어냈다. 저절로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거 남자가 먹는 게 아냐.”

“그럼요?”

“이 정력제는…….”

그는 비밀을 말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희수가 자연스레 귀를 갖다 댔다.

“이 약은 여자가 먹는 거고.”

속삭인 그는 일부러 아내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가 귓불을 핥았다.

“네 거야.”

순식간에 아내의 귀가 벌게지는 게 보였다.

칼릭스는 마침 오늘이 휴일이라는 사실에 신께 감사했다.

“우리 지금 먹어 볼까? 손은 내가 조심할게.”

“여보, 아니…… 이거 어디서 이런 약을…….”

말을 잇지 못하던 희수는 난처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소홀했나.’

밖에선 점잖은 사람이 이런 약까지 구해 오다니. 이렇게까지 간절한 게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노루의 고환을 말린 거래. 정력제라곤 했지만 말을 들어 보니 그냥 최음 효과가 있는 것 같더군. 그래도 분위기가 다르다니 그거라도 한번…….”

“노루 고환?”

말을 듣자마자 희수는 황급히 헝겊에서 손을 떼었다.

어쩐지 어디서 자꾸 구린내가 나는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헝겊을 만졌던 손에서도 이상한 가죽 냄새가 진동했다.

“그대로 먹기는 힘들어 보여서 가루로 만들어 왔어. 먹는 것도 싫으면 기름에 개어서 촛대에 바르면 향기로도 충분히 취할 수 있다던데.”

참 열심히도 듣고 왔구나. 희수는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여보, 나 이런 건…….”

다행히 그녀가 싫은 티를 내자 칼릭스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무척 아쉬워 보이긴 했지만 그래,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약을 치워 버렸다.

희수는 약간 상심한 듯한 남편을 달래려 눈을 찡긋거렸다.

“나 오늘은 만찬이 없어요. 일정이 일찍 끝나. 그러니까…….”

스르르 다시 고개를 든 파란 눈동자가 기대에 부풀어 반짝거렸다. 희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늘 밤에 열심히 넷째를 만들어요!”

순간 밝았던 칼릭스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 버렸다. 흠칫 놀라는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띄는 반응이라 희수도 모를 수 없었다.

“왜요?”

“아……무것도.”

“에이, 뭐야. 얼른 나가요, 애들이랑 아침 먹게. 다들 기다리겠어.”

칼릭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희수와 칼릭스는 싸울 일이 거의 없는 부부였다.

희수는 남편을 잘 믿는 아내였고, 칼릭스는 아내의 의견을 잘 따르는 남편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 가족이란, 절대 잃을 수 없는 삶의 축복이고 가장 큰 보물이었다.

결혼 초기에 클로비스 가문에 합류하는 일 때문에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그조차도 칼릭스는 금방 아내의 말을 따랐었다.

하지만 이 화목한 부부 사이에도 딱 한 가지,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으니.

“넷째는 무슨.”

칼릭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 가녀린 몸으로 어떻게 또 임신을 하겠다는 건지.”

희수는 속이 없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마음먹은 일에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들 반대하던 연극회도 결국은 그녀의 살롱에서 개최하였고, 유행을 따르기 싫다며 매번 실험적인 머리 스타일을 고집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녀가 앞장섰던 모든 일들이 성공했다.

리옹의 귀족들이 천박하다고 배척했던 연극 문화는 현재 리옹의 가장 큰 유행이 되었다. 귀부인, 평민 아가씨들 할 것 없이 희수의 특이한 머리 스타일을 따라했다.

그래서인지 희수는 더욱더 딸을 갖고 싶어 했다. 그 소원은 거의 열망에 가까웠다. 주위에 딸아이를 가진 시누이들이 많아서 더욱 부러운 모양이었다.

칼릭스도 여식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희수 모녀가 나란히 앉아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특히 칼릭스는 억척같은 아들이 셋이나 있어서 더욱 희수를 닮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자주했다.

희수가 여식을 원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또 그녀가 외롭게 자랐으니 이해도 가지만…….

“집사, 출산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다신 아이를 낳지 못하겠다고 매번 그러시더니 마님은 또 잊어버리셨나 봅니다.”

칼릭스과 희수는 이 문제로 몇 번 크게 다퉜지만 아무리 싸워도 둘의 의견은 합쳐지지 않았다. 이 문제는 둘 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래서 칼릭스는 이 문제로 더 이상 싸우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 냈다. 그녀 몰래 피임약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 2년째였다.

“포기할 때도 됐는데 왜 희수가 아직도 넷째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군.”

희수는 ‘클로비스 부인의 살롱’을 열고 부인들끼리 모여 그림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친목도모를 하는 동안 칼릭스는 집사를 닦달했다.

“마음을 돌릴 수 있게 옆에서 잘 얘기를 해 보라고 하지 않았나!”

“주인어른, 제가 어떻게 마님의 마음을 돌리겠습니까?”

집사 알버트는 벌써 10년이나 이 부부를 모시며 많은 걸 파악했다.

“제까짓 게 어떻게 감히! 마님의 가장 소중한 남편인 주인어른께서도 못 하시는 걸 제가 어떻게요!”

이렇게 말하면 그는 ‘그건 그렇지’ 하곤 내심 만족하며 닦달을 포기한다.

“후우…… 아무래도 그렇겠지.”

집사의 예상대로였다. 그는 더는 가타부타 말없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듣자 하니 영구적으로 가임상태에서 해방되는 약이 있다고 한다. 그걸 먹어 볼까 하는데.”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집사는 경악한 나머지 번쩍 얼굴을 들었다.

“지금…… 주인어른께서…… 그런 약을 드시겠다는 겁니까?”

이분이 미쳤나? 그런 눈빛을 쏘아 줬지만 그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급도 없이 그런 짓을 했다간 희수가 화를 내겠지. 안 그런가?”

“진심이십니까?”

마님을 향한 주인어른의 사랑은 깊고도 지극했다. 그래서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경악스런 그의 언행에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집사는 이번엔 정말 놀랐다.

“피임약을 드시겠다고요? 그것도 영원히 임신이 불가한 약을……?”

집사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실례지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씀이신지……?”

칼릭스는 바로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에 홀로 13구를 찾아갔다. 벌써부터 그가 약을 먹고 있는 걸 알면 집사가 기절할지 몰랐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지. 칼릭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겐 건강한 아들이 이미 셋이나 있다.”

그리고 세 명 모두 무사히 3년을 넘겨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더는 필요 없어.”

죄인처럼 칼릭스의 불평을 듣고 있던 알버트가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귀찮게 굴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가문을 나가 버리겠다는 협박을 심심찮게 해 왔던 그였다.

한데 이제는 레이놀드, 크리스토퍼, 필립 그 세 아이들 중 하나가 이 가문의 후계자가 될 거라고 인정했다.

“주인어른…….”

뜻밖의 감동이 차올랐다.

칼릭스를 주인으로 모신 지 어느덧 10년째.

사생아였던 칼릭스 클로비스는 이 가문에 눈곱만큼도 애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놓고 그렇다 말한 적은 없지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칼릭스는 이 가문에 책임감을 갖지 않았었다. 조금도.

그가 이 가문에 속해 있는 이유는 오직 아내 때문이었다.

이방인 출신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하여. 또 그녀가 원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클로비스의 성을 물려주기를.

그래서 칼릭스는 스스로를 귀족 가문의 주인이기 이전에 신전 소속의 성기사라고 여겼었다.

‘우리 주인님이 드디어 변했구나.’

이는 클로비스 가문의 집사로서 무척 반가운 변화였다.

“이제 정말 고귀한 가문의 주인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설마 그가 13구를 전전하며 피임약을 찾아다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기에 집사는 그저 기쁘기만 했다.

똑똑.

알버트가 감격에 빠져 있는 사이, 하인이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실례합니다, 집사님.”

문밖에 선 하인이 조용히 용건을 말했다.

“마님께서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클로비스 경께요.”

“쯧, 아직도 호칭을 틀리는 멍청한 놈이 있구나. 클로비스 경이 아니라 주인어른이시다.”

“아, 예! 죄송합니다, 집사님.”

“그래서, 마님께서 살롱이 늦어진다고 하시더냐?”

“살롱은 지금 막 끝났습니다.”

“주인어른, 마님의 살롱이 지금 막…….”

머리를 한쪽으로 괴고 둘의 대화를 듣던 칼릭스가 집사를 재촉했다.

“희수는?”

그에게 살롱이 끝났단 사실을 알리려던 알버트는 다시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님께선 귀부인들의 배웅을 가셨느냐?”

“마님께서는 화가 피에르와 함께 정원으로 가셨습니다, 집사님.”

심장이 철렁한 알버트는 열심히 눈짓을 하고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하인은 무심하게도 사실을 일렀다.

“화가와 저녁식사까지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요리사에게 만찬을 신경 써 달라고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

인상을 팍 구긴 집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놈은 왜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떠들고 난리야!’

제가 모시는 주인은 귀가 밝아서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도 잘만 듣는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내와 관련된 일이라면 예민했다.

벌써 뒤통수가 뚫릴 듯했다. 제 뒤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그러니 클로비스 경께, 기다리지 말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이만 가 봐라.”

집사는 이를 으득 깨물곤 얼른 가 보라며 하인의 등을 떠밀었다.

“예, 그럼…….”

하인은 그가 왜 화났는지 영문을 몰라 그저 깊숙이 고개를 꾸벅였다.

집사는 하인이 넓은 복도의 끝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그 화가는 왜 하필이면 우리 마님의 눈에 띄어서……!’

그림은 갈리아 켈티카를 관통하는 예술문화의 주류였다.

사실 재주가 뛰어난 화가를 발굴한 건 그녀에겐 행운이었다. 심지어 그 화가는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소묘만을 그리던 평민 출신이었다. 귀부인의 후원 없이는 작품을 그려 낼 수 없었다.

제일 먼저 그 화가를 발굴한 희수는 그의 그림을 독점했다. 오직 그녀의 살롱에서만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었기에 그녀에겐 무척 잘된 일이었다.

‘근데 화가가 왜 쓸데없이 그렇게 반반하게 생겼냐고!’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다.

화가는 30대 중반 정도의 병약한 미청년이었다.

갈색머리에 하얀 피부, 청색 눈동자는 흔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외모였지만 그 화가는 가진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묘했다.

다들 그의 작품을 워낙 주목하니, 그림뿐만 아니라 화가까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러니 주인어른이 그를 질투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원래 화가와 귀부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그래서 귀부인들의 가장 흔한 불륜 상대가 화가이기도 하지만.

“피에르.”

뒤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등이 따가웠다. 집사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또 그 작자인가?”

“…….”

이럴 때일수록 의연해야 한다.

집사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고 몸을 돌렸다.

“예, 마님께서 야외사생을 구경하시나 봅니다.”

“야외사생?”

그런데 더 열이 받았는지 그가 벌떡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뭐라 다른 말은 없었지만 깎은 돌덩이 같은 그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당장 정원으로 달려 나가 화가의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간 이 대저택에서 일하던 하인과 마부, 정원사는 수도 없이 해고되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얼굴이 반반하거나, 마님의 또래이거나, 마님에게 얼굴을 붉히거나.

하지만 피에르는 그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마님의 신뢰와 관심을 받는 화가.

마님에게 충성과 신의를 바치는 뛰어난 재주의 화가를 멋대로 대했다간…….

‘주인어른께선 마님을 실망시키는 걸 절대 원치 않으시지.’

그는 아내의 앞에서 화가를 흉보거나 질투하는 걸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피에르의 그림을 칭찬하고 후원금을 늘려 주었다.

정작 그의 그림을 싫어하면서.

“집사, 정말 저 작자가 예술가라고 생각하나?”

물론이었다. 현재 피에르는 가장 주목받는 화가였다. 기존에 리옹에서 선호되던 화풍까지 바꾸어 놓은 전도유망한 화가.

“세기의 천재라고?”

“다들 그렇게 말하기는 하지요.”

알버트는 집사로서 모시는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 작자는 그림을 잘 그리긴 하지만 예술가는 아니야. 그냥 심각한 변태다.”

“…….”

집사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혼자 머리를 긁적였다.

‘사제의 눈으로 봐서 그런가?’

피에르는 한정된 주제로만 그림을 그렸다. 꽃과 여자.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오직 그 두 존재뿐이라고 했다.

반면 칼릭스는 저 화가 때문에 사람들이 전부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왜 여자와 꽃만 그린단 말인가?’

또, 그런 화가의 그림을 왜 다들 세기의 예술 작품이라 칭송하는가?

물론 아름다움은 고전적으로 추구되는 가치이긴 하지만 왜 저 작자는 하필 그 아름다움을 꽃과 여자한테서만 찾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도 아니고, 꽃과 여자라니. 뭔가 이상하다. 한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고 그냥 속이 불편했다.

“주류가 향유하는 예술을 나만 이해하지 못해 유감이군.”

“아닙니다, 주인어른.”

집사는 다급히 혀를 굴렸다.

“마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님께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치가 바로 예술 작품이 가진 힘이라고 하셨으니까요.”

“희수가 그래?”

“예, 그래서 마님의 살롱에서는 항상 그런 설전이 오가는 걸요.”

“귀부인들이 모여서 그런 얘기를 하나?”

놀란 칼릭스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집사를 돌아보았다.

“예. 사실 피에르는 칭송만 받는 화가가 아닙니다. 칼날 같은 비판도 받고, 음탕하다는 욕도 먹지요. 듣기로는 그림을 계속 그리면 손목을 분질러 버리겠다는 협박 편지도 받았답니다.”

집사는 내심 그 편지를 보낸 게 바로 제 주인어른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눈치를 봐선 다행히 아닌 듯했다.

“그 작자가 비난을 받는 줄은 몰랐는데.”

“피에르가 유명한 건 그림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를 두고 자주 논쟁이 벌어져서 그렇습니다. 역시 마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보지 않으셨군요.”

칼릭스는 고집스레 입술을 꾹 닫았다.

피에르는 희수가 무척 좋아하는 화가였다. 그래서 칼릭스는 자신이 반대 의견을 가졌다는 걸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아예 그에 관한 대화를 회피했다.

항상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남편이,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를 무척 싫어한다는 걸 알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는가?

“희수는…… 저 작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글쎄요. 마님은 후원은 하지만 그림을 구입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피에르가 준 것도 걸어 놓지 않으셨죠.”

순간 칼릭스의 보기 좋은 눈가가 살짝 구겨졌다.

그런데 후원은 왜 하는 거지? 처음으로 아내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복잡한 여자가 아닐 텐데. 속내가 따로 있는 여자가 아닌데…….

“마님은 단순한 어휘를 사용하셔서 순진해 보이지만 사실은 생각의 수준이 높으신 분입니다. 무척 세련되시고요.”

집사는 갈리아의 모든 도시에서 살아 봤던 만큼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이방인 출신의 마님을 진심으로 모신다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마님께선 전의…… 그, 사시던 곳에서 많은 교육을 받으신 분 같습니다.”

칼릭스도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니 살롱 같은 사교 모임을 만들 생각을 했겠지.

희수가 귀족식 표현은 아직 모자라다 해도 그들과 함께 예술을 논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원래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눈치가 없고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인격이, 사실은 귀족식 화법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돌려 말하기’와 ‘꼬아서 말하기’, 그리고 ‘어렵게 말하기’는 타고나야만 배울 수 있는 거니까.

“이건 제 예상이지만, 마님께선 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피에르를 후원하시는 듯합니다. 모호한 알레고리는 언제나 효과적이니까요.”

집사는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사람들은 논쟁을 좋아합니다.”

왜 논쟁을 부러 만들려는 걸까? 살롱을 유지하려고?

“희수가 피에르를 풍자(allegorie)하고 있나? 아니면 피에르가 세태를 풍자하는 건가?”

“그건 마님과 직접 대화해 보시지요.”

집사는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토로했다.

“두 분은 사이도 좋으시고, 같이 보내는 시간도 많은데 대체 왜 이런 대화는 하지 않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그 시간에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차마 대답을 할 수 없는 칼릭스는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렸다.

“주인어른께선 저택에 오시시면 곧장 마님부터 찾으시잖습니까. 그렇게 바쁘게 침실에 올라가선 두 분이서 대체 무얼 하시는지 이해가…… 아?”

집사는 말을 하던 중에 스스로 해답을 깨우쳤다.

“그, 그렇군요. 그래서…… 아니, 그렇다고 대화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신지……. 아니, 제가 감히 캐묻는 건 아닙니다, 주인어른.”

정색한 알버트는 손을 내저었다. 부부의 상황을 알게 되자 잠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랬군요. 그렇다면…… 마님께서 그렇게 고민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고민?

제 행복한 아내에게 고민이 있었단 말인가?

칼릭스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어서 말해 보라 재촉하자 집사는 순순히 그녀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마님께선 요즘, 임신 소식이 없다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순간 칼릭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 늦으면 안 된다고 매일 기도도 하시는걸요. 얼마나 간절하게 여식을 바라시는지 모릅니다.”

칼릭스의 얼굴에는 불안이 드리웠다. 순식간에 속이 타들어 갔다.

지금 피에르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 * *

칼릭스는 화가와 함께 저녁을 먹자는 아내의 요청을 거절하고 홀로 먼저 침실에 들었다.

‘몸에 뭔가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우신 듯합니다.’

그의 머릿속에선 아까 집사에게 들었던 말들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아이들과 놀아 주는 내내 그랬다.

‘그러실 만도 하지요. 도련님들을 임신하셨을 때는 굉장히…… 빠르셨으니까요.’

세 아들은 연년생이나 다름없는 터울이었다. 셋째 필립을 낳고 나서는 희수와 합의하에 넷째를 낳지 않기로 했었다.

한데 그녀가 2년 전부터 갑자기 마음을 바꿔 넷째를 갖고 싶다고 했다.

정확히는 여식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넷째를 낳는다고 해도 그게 또 아들일지 누가 아는가?

임신은 고된 일이다. 다들 그녀의 임신은 무난하다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임신 기간 내내 희수는 그 좋아하는 고기도 잘 먹지 못했고, 다리는 항상 퉁퉁 부어 있었으며 매일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임신 기간이 끝나면 고생은 더 했다.

출산하고 나서는 거의 반년은 누워 지내야 했고, 수유를 하느라 살은 쭉쭉 빠졌다. 수유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산파의 권유에 따라 그 기간에는 거의 아내를 만나지도 못했다.

그 조치에 불만은 없었지만 칼릭스는 항상 초췌한 얼굴로 부축을 받아야 하는 병자 같은 아내가 안쓰러웠다.

남들은 희수의 고통으로 낳은 삼 형제를 마치 제 아들인 양 자랑스러워했다. 줄줄이 여식들만 있던 클로비스 가문에서 삼 형제가 생겼으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칼릭스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아이들은 전부 엄마의 피땀으로 빚어냈으므로.

‘차라리 내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었으면.’

그럼 고민도 없이 대신해 줄 텐데, 그러지도 못한다.

신께서는 왜 하필이면 연약한 여자에게 그 힘든 일을 맡기셨는가. 왜!

또 신이 원망스러웠다. 부정하게도 칼릭스는 희수를 알고부터 부쩍 신을 원망하는 일이 잦아졌다.

화려한 벽화로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던 칼릭스는 힘이 쭉 빠진 허무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또 넷째를 낳겠다는 건지.”

넷째 아이는 사실 많은 것도 아니었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선 자식들을 열댓 명씩도 낳으니까.

더군다나 그녀의 주위에는 그런 가족들이 많았다. 카일리도, 크리스틴도 그랬다. 그래서 덩달아 넷째를 낳고 싶어졌나 보다.

‘더 늦으면 안 된다고 매일 기도까지 한다고?’

칼릭스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희수 또한 완고했다. 결국 그가 아내 몰래 피임약을 먹게 된 지 2년째.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포기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몇 년째 소식이 없다고 상심하고 계십니다.’

상심하고 있다.

아내가, 상심하고 있다.

그 사실이 칼릭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녀를 웃게 해 주기 위해서 한 결혼인데…… 오직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한 결혼인데. 2년간 상의도 없이 몰래 약을 먹고 있었다는 걸 알면 그녀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칼릭스는 아내를 실망시키기는 게 가장 두려웠다. 다정하고 자상한 남편이 되기 위하여 그간 그토록 노력했는데…….

“여보?”

순간 칼릭스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얼마나 고민이 깊었는지 아내가 침실에 돌아온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희수는 신기한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당신이 별일이네. 귀신처럼 기척에 밝더니.”

지레 찔린 칼릭스는 그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반응을 오해했는지 희수가 불쌍하게 두 눈썹을 늘어트렸다.

“여보, 혹시 화났어요?”

헛다리를 짚었다. 희수는 귀걸이를 끌러 옆에 두곤 그의 가까이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일정을 일찍 끝내려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안 돼서…… 당신이 모처럼 쉬는 날인데.”

“난 화난 게…….”

난 화난 게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제 허벅지를 더듬어 오는 바람에 칼릭스는 그만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의 신경이 전부 그녀의 손이 닿은 제 허벅지로 향했다.

쓸어내리듯 부드러운 손짓이 오늘따라 농염하게 느껴졌다.

“나 기다렸어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렇게 물어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다린 것 같기도…….

그런데 고민할 틈도 없이 벌써 제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죄 많은 몸뚱이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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