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16. 평범한 일상에 숨은 한 조각의 행복 (16/17)

16. 평범한 일상에 숨은 한 조각의 행복

* * *

무사히 구조된 희수와 레이놀드는 며칠을 꼬박 앓았다. 칼릭스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돌아온 그 후부터 내내 희수와 레이놀드의 옆을 지켰다.

희수는 아이의 앞에서는 강한 척을 했지만 든든한 남편의 품에서는 펑펑 울었다. 또다시 겪게 된 이 일이 너무나 끔찍했다.

‘트라우마가 될 것 같아.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러기를 며칠.

시누이들이 비싸고 맛있는 희귀한 과일이라며 귤을 싸 들고 몇 날 며칠을 찾아왔다. 정확히 귤은 아니지만 귤과 비슷한 과일이었다.

처음엔 귀찮게 구는 시누이들이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싫은 건 아니었다. 안락한 곳에서 친한 사람들과 편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차차 기분이 나아졌다. 평소처럼.

“……그 순간 우리 레이놀드가 손에서 불을 확 뿜지 뭐예요! 그때부터 이제 살았구나! 내가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어서 재빨리 난간 아래로 숨었죠!”

“어머, 세상에.”

“세상에, 레이놀드가.”

“역시 큰아들이야.”

낮에는 귤을 까먹으면서 자식자랑을 하고, 밤에는 남편의 수발을 받으며 며칠을 보냈더니 끔찍했던 그날의 일도 점점 잊혀졌다.

레이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들은 엄마보다 정신적인 회복이 더 빨랐다. 엄마를 구했다는 주위의 칭찬과 격려, 특히 아버지의 인정과 관심은 레이놀드의 자긍심에 불을 질렀다.

이틀 만에 큰 결정을 내린 레이놀드는 쪼르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 저 아카데미 가지 않으면 안 돼요?”

“레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니?”

“저도 신전에서 기사 서임을 받으면 안 되나요? 악을 물리치고, 시민들을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요. 아버지처럼요!”

“진심이야?”

“네.”

레이놀드는 배움을 위해서 아카데미에 가려던 게 아니었다. 도련님으로 오만하게 자랄까 봐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서 사회성을 기르려던 참이었다.

“전 선택받은 능력이 있잖아요. 사람들을 구해 줄 수 있는 능력이요.”

그렇다. 성력이 발현되었다는 건 온 집안의 경사였다. 때문에 모자가 함께 겪은 이 끔찍한 일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친인척과 지인들을 비롯하여 신전과 시의회에서 물밀듯이 선물을 안겨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희수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또 연회를 준비해야 하는구나.’

평소처럼 손님을 맞이하고, 연회를 준비하면서 희수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반복되는 일상은 가끔 지겨워도 고통을 잊어 가는 원동력이 되는 법이었다.

“마님! 마님!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첫째 도련님의 소식을 듣고 오셨답니다!”

중후한 멋이 있는 중년 남자였다. 희수는 처음 보는 낯선 이였지만 집사가 먼저 안으로 들인 걸 보면 중요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또 친척인가?’

여느 명문가가 그렇듯, 클로비스 가문도 친인척이 굉장히 많았다. 다들 높은 곳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라 어느 누구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에헴.”

“낮부터 찾아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애써 웃는 낯을 하고 있던 희수는 당황한 시선으로 옆을 보았다. 다행히 집사장이 언제나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숙부님이십니다, 마님. 리옹 시의회에서 재무관을 지내고 계시죠.”

그가 잽싸게 손님의 얼굴을 알아보고 귓속말을 해 주었다.

희수는 그제야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에게 예를 갖췄다.

“숙부님, 제가 먼저 초대장을 보내 드렸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서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네요.”

“뭐, 다들 그날의 그 끔찍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 부인의 침착한 대처에 감명을 받아 얼굴이나 한 번 볼까 하고 찾아왔지요. 초대장은 없었지만.”

사실은 가문의 가주 자리를 놓고 혈족들과 싸웠던 지난 일 때문에 면목이 없어서 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셨군요.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숙부님.”

하지만 희수는 미소를 지은 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에서 우연히 클로비스 경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람이 영…… 얼마나 뻣뻣한지 집안의 어른을 보고도 먼저 알은척을 할 생각을 안 합디다.”

“남편이 바쁘면 그래요. 그래도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정말 언짢으셨겠어요. 마음 푸세요, 숙부님.”

“에헴.”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 저렇게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는 걸 보니 저녁까지 먹고 갈 생각인 듯했다.

“레이놀드는 지금 수업을 받고 있어요. 집안 어른이 오셨으니, 크리스와 필립을 불러오라고 할게요. 같이 정원에서 차를 마시면서 숙부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아할 거예요.”

“지난 일은…….”

“지난 일은 지난 일이죠. 자주 방문해 주세요, 숙부님. 저는 아이들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가 곤란하답니다.”

숙부는 기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희수는 머릿속으로 오늘의 일정을 다시 고민했다.

‘만찬에 오는 손님들은 다섯째 시누이와 아주버님이니 같이 식사를 해도 괜찮을 거야. 숙부님과 싸웠던 둘째 시누이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네.’

그렇게, 그녀의 평범한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 * *

아내는 나흘쯤 누워 있다가 금방 평화를 되찾았지만 칼릭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일은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어떻게 도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어!”

“저도 놀라긴 마찬가지입니다!”

“주교회가 그런 짓을 벌이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전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다고요!”

“네가 교황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전 주교회에서 따돌림을 받는 처지입니다!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불같이 화를 내던 칼릭스는 끝내 프란시스를 놓아주었다. 한참 그를 다그쳤지만 그러고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 노인네들은 저를 끼워 주지도 않습니다. 무슨 작당을 하는지 저는 전혀 모릅니다.”

변명도 듣기 싫었다. 꼴도 보기 싫어서 아예 몸을 돌리고 먼 하늘만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리던 칼릭스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휙 프란시스를 돌아보았다.

“결혼맹세에 증인만 서지 않았어도……!”

“…….”

프란시스는 그가 으르렁거리는 걸 보고 또 부인과의 만남을 일정에 넣을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주기적으로 그녀를 만나서 고충을 토로해야 칼릭스의 태도가 그나마 나긋해지고,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온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의 결혼은 나도 구했구나.’

프란시스는 옷자락을 정리하며 사건의 경위를 짚었다.

“시민들 사이에선 시계탑에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지요. 그 이후로 시계탑을 오르는 발길이 뚝 끊겼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모르셨나 봅니다.”

“시민들 사이에서 난 소문을 아내가 어떻게 알아?”

“글쎄요, 다방면으로 활동이 잦으시니 당연히…… 어쨌든.”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프란시스는 얼른 말을 돌렸다.

“제 생각에는 주교회에서 이방인들을 시계 안에 가둬 두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시계탑의 거대한 시계가 있는 곳. 그곳은 옥상과 달리 제한된 몇 명만 출입할 수 있었다. 굳이 꼽자면 리옹에서 신전 다음으로 비밀스런 장소였다.

“주교회에선 아마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도심을 혼란에 빠트려 성기사들의 활약을 보여 줄 적당한 시기를요.”

시계탑에 올랐던 시민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정황으로 볼 때, 끔찍하지만 일부러 매녹을 만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이방인들을 오랫동안 가둬 두고, 인육을 식사로 주었겠지.

밖에서 벌어지는 흉흉한 일보다 도시 내의 큰 사고 한 번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경도 알다시피 리옹의 시의회는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추밀원의 권력이 주교회를 위협할 정도니까요.”

“하아…….”

리옹을 움직이는 지주가문의 한 명으로서, 또 추밀원의 한 명으로서 칼릭스는 누구보다 리옹의 시의회를 잘 알았다.

“지금 리옹의 시장은 주교회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요. 경의 매부 말입니다.”

60대 노인인 리옹의 시장은 칼릭스의 첫째 이복누이의 남편이었다.

“그러니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리옹을 신전의 권속으로 삼고 싶었겠죠.”

이는 신전과 시의회의 뻔한 알력 싸움이었다. 전 교황인 요세프가 그랬었고, 그 전 교황도 그랬었다.

매번 있어 왔던 권력자들의 신경전.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꾸민 일에 제 아내가 휘말렸다는 게 달랐다.

‘절대 용서 못해.’

칼릭스는 아내의 소원에 따라서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흔들었다.

‘절대로, 용서하지 못해.’

똑똑똑, 때마침 시종이 밖에서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교황님, 실례지만 지금 주교회에서 클로비스 경을 부르십니다. 그분과 함께 계신지요?”

시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릭스는 프란시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의사를 확인하듯이.

하늘이 내게 열어 주신 길이다.

칼릭스의 새파란 눈동자 너머에는 불길이 일렁였다. 프란시스는 이를 알아보고 경악했다. 그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서재를 나가려 휙 몸을 돌렸다.

프란시스는 그의 단단한 팔뚝을 붙들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앞만 응시했다.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클로비스 경,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대답을 알 것만 같았다.

“이러지 말고…… 집에 있는 부인을 생각하세요. 부인께서 원하시는 건 평화 아닙니까.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제발…….”

프란시스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말렸다. 하지만 칼릭스는 끝내 눈을 맞추지 않았다.

“넌 기도나 해.”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서재를 나가 버렸다.

* * *

집사가 답지 않게 허둥대며 정원까지 달려왔다.

“마님! 마님! 신전에서 온 서신입니다!”

날이 좋아 밖에서 차를 마시던 희수는 얼른 그가 전한 서신을 받아 들었다. 신전에서 전하는 건 남편의 소식일 확률이 높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남편의 소식이 아니었다. 이제 희수는 집사의 도움 없이도 문어체 서신을 읽고 쓰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단번에 활자를 읽어 내린 그녀는 충격을 금하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엄청난 비보였다. 때문에 열심히 준비했던 레이놀드의 축하 연회를 취소하게 생겼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건 아쉽지 않지만, 그보다 서신의 내용이 믿기지 않았다.

“신전의 주교회 전원이 다크 홀 저편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매녹에 의해서?”

이는 대저택뿐만 아니라 갈리아 켈티카 전역에 전해진 비보였다.

‘철벽 안도 이제 안전하지 않은가 봐.’

도심의 한가운데, 시계탑에서도 매녹이 나타나더니 이제는 신전까지!

다크 홀은 다크 스톤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무작위 하게 한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늙고 힘없는 사제들이 그 새까만 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희수의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12명의 사제들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주교회는 명칭만 주교회일 뿐, 사실은 고지식한 수석 사제들의 정파였다.

어느 무리에나 그렇듯 신전에도 파가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와 과격파. 그중 주교회는 과격파에 속했고, 프란시스와 칼릭스는 따지자면 온건파에 속했다.

그 정파 간의 대립이 얼마나 살벌한지, 희수는 주교회의 인사들은 몇 번 본 적도 없었다.

“당장 이번 주에 장례식을 치른다고? 시체도 없는 장례식을 치르다니, 정파가 달라도 명예를 지켜 주는구나.”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신전에선 당장 장례식을 치른다고 했다. 죽은 사제들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희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신을 정리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당연히 검은 옷을 입겠지만, 그녀가 고민하는 건 디자인이었다.

‘귀부인들이 전부 오겠지. 어떻게 입어야 우아하면서도 경박하지 않게 젊어 보일까…….’

그녀가 자신의 역할과 소양을 고민하는 그때, 몇 발자국 멀리 서 있던 집사가 시종에게 또 다른 서신을 전해 받았다.

“마님, 또 왔습니다. 이건 시의회에서 보낸 급보랍니다.”

희수가 서신을 확인하자 이번에도 같은 내용이었다.

‘리옹 시의회는 주교회 전원의 영원한 작별을 국장으로 깊이 애도한다……?’

시장의 서명이 찍힌 비보였다. 리옹의 몇 개 지주가문에만 보낸 특별한 서신이었다. 희수는 서신을 덮으며 피식 웃었다.

‘첫째 시누이가 아주 축제를 열겠구나.’

크리스틴에게 전해 듣기로는 리옹의 시장은 주교회를 아주 골칫거리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첫째 시누이가 신전을 가도 기부금을 안 낸다고 했나.’

희수는 서신을 접고 다시 혼자만의 티타임으로 돌아갔다.

곧 크리스와 필립의 공부시간이 끝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야 했다. 그러고 나서 레이놀드의 축하 연회를 취소한다는 서신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례식에서 착용할 액세서리를 고민했다.

희수의 검소함은 결코 미덕이 아니었다.

‘단출한 목걸이를 사면 시누이들이 또 놀리겠지.’

사교계는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남편에게 보석을 선물 받으면 자랑거리지만, 부인이 제 것을 직접 사면 사치가 되는 세계였다.

희수는 가진 게 전부 비싼 보석뿐이라 장례식에선 민망하여 실 목걸이를 샀다가 시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고민을 더 해 봐야겠어.’

그녀를 둘러싼 세계에선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희수의 고민거리는 항상 같았다.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대저택의 안주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자신의 소양.

희수는 그렇게 클로비스 부인으로 사는 일에 하루하루 능숙해졌다.

* * *

칼릭스는 모처럼 쉬는 날 희수와 다시 파리로 향했다.

둘은 저번과 똑같은 과정을 답습했다. 게리 부인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즐기고, 바다 내음을 맡으며 여유롭게 낚시하는 시민들을 구경하고, 좌판에서 파는 굴을 먹었다.

‘지난번 바닷가 데이트가 마음에 들었나 봐.’

그가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걸 보니 그런 듯했다. 오후에는 손을 꼭 붙잡고 파리의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긴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평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 마음은 더 풍족했다.

“바다가 참 검다. 굉장히 깊다던데.”

희수는 단둘이서 하는 외출이 즐거웠다. 칼릭스는 쉬는 날엔 거의 대저택에만 있으려고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가 먼저 파리행을 물었다.

그녀는 바다에만 시선을 고정한 칼릭스의 허리춤을 쿡쿡 찔렀다.

“나오니까 좋지?”

오늘따라 말수가 적긴 하지만 저렇게 뚫어져라 바다를 응시하는 걸 보면 분명 경치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희수는 기분이 좋아서 혼자 조잘거렸다.

“집사가 그러는데, 난 검은색이 안 어울린대. 주교회 사제들의 장례식이 끝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알버트는 왜 그런 소리를…….”

“그렇게 안 어울려?”

칼릭스는 힐긋 아내를 돌아보았다.

단정하게 올린 검은 머리칼과 그 위에서 빛나는 진주 머리핀. 사슴 같은 목덜미에 매달린 목걸이가 번쩍였지만 그것도 별거 아니었다.

그의 눈에 보석보다 빛나는 건 그녀의 쇄골이었다.

얇은 목과 풍성하고 부드러운 가슴 사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의 목덜미. 그곳의 툭 불거진 양쪽의 가녀린 뼈. 쇄골은 항상 그녀의 몸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면서도, 그녀의 얇은 귓불에서 내려온 몇 가닥의 잔머리가 그의 단전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저 잔머리가 그녀의 귀여운 실수인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저건 고의였다.

아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갖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봉긋한 저 가슴 아래에 맨 은색 벨트처럼.

검은색 일자 드레스가 왜 저렇게 야한 건지……. 아내는 남들이 입고 걸치는 평범한 것조차 특별하게 만들 줄 아는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의 좁은 어깨와 풍만한 가슴은 허리를 더 얇아 보이게 만들었다.

희수는 뱃살이 생겼다고 낙담했지만 아직도 그의 허벅지보다 얇은 허리였다. 뱃살은 조금 생겼지만 그것마저 보들보들하고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안 어울려? 이상해요?”

“좀…… 연약해 보이기는 해.”

“당신은 매번 나한테 연약해 보인대.”

희수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그 깜찍한 옆모습에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아, 이제 교황님도 기운을 좀 차리셔야 할 텐데.”

아내는 장례식 내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프란시스를 걱정했다.

프란시스는 장례식 첫날 시민들 앞에서 주교회 사제들 전원의 공식적인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충격으로 쓰러진 뒤 기력을 차리지 못해서 애도의 기간에 참여하지 못했다.

“안쓰러워 죽겠어.”

대외적으로는 그렇지만, 칼릭스는 아마 프란시스의 입이 찢어져서 시민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바늘…… 바늘을 갖고 다녀야겠습니다. 웃음이 나올 때마다 허벅지를 찌르면서 슬픔을 연기해야 해요. 힘든 일입니다.’

프란시스와 같은 온건파의 사제들은 10년 묵은 숙변이 내려갔다는 둥, 신전의 개똥을 드디어 치웠다는 둥 경박한 표현을 참지 않았다.

‘수석 사제님, 근데 이러다 언젠가 돌아오는 거 아닙니까? 갑자기 다크 홀이 열려서 다시 뱉어 내는 거 아니냐고요.’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시게!’

프란시스는 사제들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의 냉정하고 단호한 눈빛에 사제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이다.

주교회의 노인들이, 산 채로 다크 홀에 던져진 게 아니라는 것을.

‘또 경의 손만 더러워졌군요.’

프란시스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두려워했지만 막상 칼릭스가 일을 끝낸 다음에는 무척 안심했다.

‘이 비겁자는 경의 희생과 노고로 닦아진 평화의 길을 노력 없이 걷습니다.’

하지만 칼릭스는 전 교황을 시해했던 그때처럼 죄책감을 가지진 않았다. 그의 양심은 이제 신과 신전을 벗어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계기가 되었을 뿐, 그 일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믿었다.

‘대신 제가 세상을 떠나는 날, 경의 죄를 모두 혼자 짊어지겠습니다.’

아내는 주교회 사제들의 죽음과 장례식의 진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이와 똑같은 일을 집안에서 두 번이나 겪고도 여전히 어떤 의심도 없었다.

시녀장과 계모의 장례식이 이렇지 않았던가?

산드라는 계모를 비롯한 이복누이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뒤 시체까지 갈가리 찢겨 황무지에 버려졌다. 하지만 순진한 아내는 산드라가 수도원의 노동을 못 이겨 자살을 했다고 들은 대로 믿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진실을 알았다.

계모는…… 계모는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수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혼자 훌쩍 떠나 버리는 바람에 그녀가 거짓 장례식을 치르며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하지만 칼릭스는 주교회가 사라진 진실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원래 복잡하고, 심각하고, 어려운 일은 아내에게 나누지 않고 혼자만 짊어졌다. 가장으로서 당연한 책임이었다.

“여보, 저것 봐요! 갈매기가 너무 귀여워.”

아내는 고개가 뒤로 넘어갈까 걱정될 만큼 신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그녀의 치아가 보일 정도로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간 많은 일을 겪고도 여전히 저렇게 밝은 걸 보면 사람이 참 무구하고 맑았다.

한데 이 세상이 그런 제 아내를 이용하려 하고 승냥이처럼 달려들어 뜯어먹으려고 드니, 칼릭스는 건장하게 자랄 제 아들들보다 아내가 훨씬 연약하고 작아 보였다.

“빨리 봐. 발에 미역을 붙이고 다니잖아.”

정말이었다. 발에 미역을 감은 뚱뚱한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갈매기가 사라지고도 희수에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녀의 기쁨과 행복은 그에게도 전해졌다. 오랫동안 골치였던 주교회는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는 잠시나마 조용해졌다.

제 손으로 이뤄 낸 평화이건만 아내의 웃는 얼굴을 보니 이제야 실감 났다.

모든 고난과 시련이 전부 끝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걱정도 없었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 재밌는 걸 봤네. 오늘 정말 기분 좋다. 여보, 우리 열심히 오래 살아요.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칼릭스는 아내의 뜬금없는 귀여운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교황님이 그러는데, 당신은 옛날엔 참 사는 게 재미가 없는 사람 같았대.”

“둘이서 그런 대화를 해?”

“그럼. 우리는 당신 얘기만 해.”

희수는 까치발을 하고 남편의 머리카락 위에 붙은 작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우리 앞으로도 열심히 오래 행복하게 살아요, 지금처럼. 가끔 힘들어도 같이 이겨 내고 오래오래 살자구. 알았지?”

거기까지만 하면 기분이 참 좋았을 텐데, 그녀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당신은 나보다 10년은 더 살 거야. 이렇게 건강하고, 나보다 8살이나 어리니까 적어도 10년은 더…….”

“난 너보다, 딱 일주일만 더 살 거다.”

확 열이 받은 칼릭스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걸 끝까지 지켜보고, 가장 안전한 곳에 묻히는 걸 확인하고, 그리고 네 옆에 묻힐 거야.”

그의 눈빛엔 반드시 그리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로 가득했다.

“내가 꼭 지켜 주고 보호해 줄 거다. 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오기가 담긴 목소리엔 장난기라곤 없었다.

“난 그때까지만 살 거야.”

“아이, 참. 농담을 못 해.”

희수는 무섭도록 진지한 남편의 어깨를 툭 때렸다.

“난 농담 아니야.”

“알아, 내가 괜한 소리를 했지. 미안해.”

저 고집스러운 입술이 고맙고, 또 감동적이라 울컥했다. 희수는 그의 품에 오래도록 안겼다가 짧은 입맞춤을 나누고 아쉽게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가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검은색 돌, 바로 다크 스톤이었다.

건장한 팔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힘차게 바다에 던져 버렸다. 작은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둘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어디에 빠졌는지도 알 수 없는 바다 저 멀리로.

“지금 뭐한 거예요? 왜?”

“그냥.”

칼릭스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할까 봐 여태껏 갖고 다녔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희수는 그 돌이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는 걸 알았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당신한테 어떤 생각이 있었겠지.”

그녀는 싱긋 웃으며 그 일을 가볍게 넘겼다. 칼릭스는 말 못할 안도와 고마움을 느끼며 아내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걸으며 부두까지 다다랐다. 그곳엔 사람들이 꽤 모여서 시끌벅적했다.

이 부두는 더 이상 배가 서지 않는 부두였다. 대신 간이 소극장이 설치되어 이제는 시민들의 문화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연극을 하나 봐.”

파리와 부르고뉴에는 연극이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부르고뉴에선 귀족들이 즐기는 가장 큰 문화가 바로 연극이라고 했다. 그림이나 음악이 아니라.

하지만 리옹의 귀족들은 연극을 전혀 즐기지 않았기에 희수에겐 간만의 기회였다.

더군다나 이런 거리 공연은 천박하다 여겨져 귀족들은 꺼려했다.

희수는 그를 데리고 인파의 뒤로 향했다. 연극은 한창 중반까지 다라라 마침 절정 부분이었다.

“엘레나, 날 사랑하지 않으시오? 정녕 날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오?”

수려하게 생긴 젊은 남자배우가 소리쳤다.

“사랑이 아니라면, 내게 차라리 죽으라 하시오!”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절절히 구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배우의 잘생긴 외모와 연기력이 관객들의 박수와 공감을 끌어냈다.

파리의 모든 시와 노래, 연극이 그렇듯이 이번에도 남녀의 사랑이 주제였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고.

희수가 뭔가 말하려 하자 칼릭스가 몸을 수그렸다. 그녀는 시끄러운 주위 관객들 때문에 귓속말을 해야 했다.

“이 연극은, 저 남자와 저 여자가 우연히 만나서 불같은 사랑을 하다가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거예요. 지금 헤어지는 부분이야.”

“이 연극을 봤어?”

“안 봤어도 알아.”

희수는 피식 웃으며 연극의 주요 장치들을 설명했다.

“남자의 집안에서도 반대하고 여자의 집안에서도 반대를 해. 왜냐면 둘이 신분이 달라. 쉽게 결혼할 수 없다는 설정이지.”

게다가 남자와 여자는 평범하지 않은 나이 차이도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파리 출신인데 남자는 리옹 출신이야. 우연히 파리에 들렀다가 여자를 만난 거예요.”

희수의 설명을 들을수록 칼릭스의 표정은 굳어졌다.

“둘은 성격도 엄청 달라. 남자는 점잖고 여자는 재기 발랄해. 아마 초반에는 남자가 여자 때문에 깜짝 놀라고 당황하는 장면들이 있었을 거야. 그게 참 재밌는데 우리는 놓쳤네.”

출신지 차이, 집안의 반대, 신분 차이, 성격 대립. 사랑에 관한 연극이라면서 온갖 극악한 설정이 다 있었다. 이별하기 위해 만난 연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봐, 이제 헤어진다.”

희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무대를 가리켰다. 남자는 서서 울부짖었고, 그 반대편에서 여자가 쓰러져 울고 있었다.

칼릭스는 끔찍하게 기분이 상해서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안 봐. 이만 가자.”

그가 몸을 돌리자 희수가 이것만 보고 가자며 버텼다. 칼릭스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독촉했다.

“이별 연극을 왜 봐!”

“이건 이별 연극이 아니에요. 사랑에 관한 거라니까.”

“…….”

그는 올라오는 말을 꾹 참았다. 이별이 어떻게 사랑일 수가 있냐고 다그치고 싶었다.

이별은 사랑의 그림자조차 될 수 없었다.

칼릭스는 아예 무대에서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상한 티를 내자 그녀가 까치발을 하고 속삭였다.

“여보, 두 사람은 곧 재회해. 그래서 우연한 만남이 사실은 운명이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배우들는 각자 바쁘게 움직이다가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화살 모양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연극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장치였다.

이윽고 옷을 갈아입은 남녀배우는 다시 무대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다시 우연한 만남이 반복되었다. 호들갑스럽게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여자의 말에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럴 거면서 왜 헤어진 거지.

한데 남자배우는 그 모순적인 말에도 몹시 감격한 얼굴로 여자의 두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날 기억하시오?”

여자는 괜한 뜸을 들이며 관객들과 남자를 애태웠다.

저 남자의 간절함이 느껴지지도 않는 걸까. 저렇게 웃지나 말지. 설레는 미소를 띤 여자의 표정 때문에 속이 탔다. 정말 사랑했던 걸까. 헤어진 그동안 뒤늦게 사랑을 깨달았던 걸까.

처참한 이별을 겪었다면 누구나 후회해 보았으리라.

왜 사랑은 서로가 눈앞에 있는 그 순간엔 보이지 않는 건지…….

“네. 하루도 당신을 잊은 적 없어요.”

그 대답은 줄곧 남자를 사랑해 왔다는 뜻이었다. 칼릭스의 냉소와 달리 주위에선 안타까운 한숨이 흩어졌다. 에둘러 서로의 지난 감정을 확인한 남녀의 사랑이 애절했다.

“지금도…… 날 사랑하시오?”

남자의 떨리는 물음이 다시 이어졌다. 차이고 또 같은 걸 물어본단 말인가. 자존심도 없는 건가…… 그 진부한 질문을 다시 하다니. 칼릭스는 허탈하게 픽 웃었다.

남녀배우의 상황과 대사가 몇 년 전 제 모습을 보는 듯했다.

“네. 당신을 향한 사랑만이 내 전부예요.”

그렇게 여자가 순정을 고백하며 연극이 끝났다. 관객들은 박수를 보내며 마침내 이루어진 사랑을 축하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

전형적인 파리의 신파극이었다.

희수는 진한 포옹을 나누는 남녀배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것 봐. 내가 다시 만난다고 했잖아.”

“이걸 자주 봤어?”

“파리의 연극은 전부 이런 내용이니까. 우연히 만나 사랑하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서로를 기다리다가 다시 만나고…… 다 똑같아요.”

칼릭스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파리의 관객들은 매번 같은 내용의 연극을 이렇게 즐겁게 관람한단 말인가.

“난 싫어.”

칼릭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파리의 시민들은 어렵게 얻은 사랑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거야. 낭만적이지 않아?”

“고통을 즐기나 보지.”

사랑하는데 왜 이별하고, 이별했는데 어떻게 웃으며 재회할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한 취향이었다.

“여긴 항구 도시잖아요. 그래서 재회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하나 봐. 연극뿐만 아니라 시, 노래도 다…….”

그때 희수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무대 위에서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들던 남자배우의 손 때문이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나무로 만들어진 의수였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며, 배우들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동시에 무대의 뒤에서 쏟아지듯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활기찬 미소를 띤 그들은 앞선 연극의 주조연 배우들이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공연이 전부 끝난 모양이었다. 배우들은 한 명씩 나와 차례차례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배우들 가운데는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년의 남녀도 있었다.

‘저렇게 짧은 금발머리를 소화했네.’

한 중년 여인이 희수의 시선을 끌었다. 귀 끝에 닿을까 말까 한 과감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우아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귀족의 하녀 역할을 했었는지 하녀복을 입고 있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환히 보이는 미소가 아름다웠다.

희수는 별 감흥 없이 다시 남자배우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의수를 하고 있는 그의 나이를 짐작하던 그 순간이었다.

“당돌한 하녀를 연기했던, 스칼렛입니다!”

사회자가 그 중년 여인의 이름을 외쳤다.

희수는 움찔 놀라 다시 그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관객들을 향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자세히 그녀를 들여다보던 희수의 얼굴에 놀란 빛이 번졌다.

고생 한 번 해 본 적 없는 하얀 피부는 노천극장의 강한 햇볕에 살짝 그을려 있었고, 바닷바람을 맞아 거칠어진 머릿결은 예전처럼 반들반들 빛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스칼렛.’

놀라서 크게 벌어진 희수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저런 낯선 미소를 걸친 채…… 게다가 파리 같은 시골 항구 도시에서!

‘이름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

그녀는 계모였다. 연극의 복장인 저 하녀복보다 더 놀라운 건 그녀의 활기찬 미소였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표정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녀는 가면 대신 행복을 걸치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이만 가요.”

희수는 그의 손을 이끌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칼릭스는 계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는 원래 여자가 옷만 갈아입어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눈썰미가 없었다. 아마 스칼렛이라는 이름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 큰일 나지.’

방금 본 계모의 행복한 미소 위에 남편의 분노한 얼굴이 겹쳐졌다.

계모가 그렇게 대저택을 떠나 버린 뒤, 희수는 홀로 모든 일을 떠안고 꽤 고생을 했었다.

클로비스 대저택은 평판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연회가 많았고, 안팎으로 신경 쓸 일도 많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레이놀드의 성력 발현 때문에도 한참 바빴었다. 그렇다고 둘째, 셋째 아이들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욕심이지만 희수는 항상 아이들의 옆에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시누이들도 그녀를 도왔지만 그들은 이미 출가외인이라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건강한 희수가 두 번이나 쓰러졌을 만큼 대저택의 안주인 역할은 힘들었다.

칼릭스는 거의 저주를 품듯 계모를 찾았다.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다가 도저히 소식이 없어서 노선을 바꿨다.

그가 큰 연회를 주최하고 대저택의 고용인들을 관리하며 희수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집사들은 처음엔 ‘내정은 안주인의 몫’이라고 그를 말렸다. 하지만 연회의 손님이 눈에 띄게 늘자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가문의 번영은 곧 집사들의 명예였다.

‘다시는 파리에 오지 말아야겠어.’

희수는 혼미한 정신을 다잡으려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돌아가요. 이제 크리스하고 필립의 공부가 다 끝났을 테니까.”

“갑자기 무슨 일인데?”

“무, 무슨 일이기는. 시간이 늦었으니까 그렇죠.”

칼릭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서둘러서 자신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려는 게 이상했다. 그러면서 흘끔거리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저 남자배우가 잘생겼어?”

제 딴에는 심각하게 물었지만 아내는 장난 말라는 듯이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도 아니란 소리는 안 하기에 그가 급히 몸을 돌렸다.

“어떻게 생겼는지 다시 봐야겠다. 계속 쳐다보던데…….”

“아이, 당신이 제일 잘생겼지.”

희수는 잽싸게 그를 붙들고 단단히 팔짱을 낀 채 걸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질투가 났는지, 그가 앞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멸치처럼 마른 게 뭐가 멋있다고.”

“아이, 참! 당신이 제일 멋있어요. 다들 그러는 걸.”

“곧 권태기가 온다더니…….”

“카를로스 경은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몰라. 부러워서 그러나.”

희수는 남편의 팔뚝을 거의 끌어안듯 하며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그가 말을 멈췄다. 불평이 없어진 걸 보니 이제 기분이 나아졌나 보다.

하지만 그녀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팔뚝을 놓아주자 다시 중얼거렸다.

“8년이나 봐서 이제 내가 지겨울 거라고…….”

“지겹기는 누가 지겨워요. 이렇게 멋있는 남편이 어떻게 지겨워.”

결국 희수는 리옹으로 돌아가는 내내 남편을 달래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또 그 수려한 얼굴로 얼마나 제 눈을 멀게 하는지, 매 순간마다 사랑이 퐁퐁 솟아 제 가슴이 항상 용암처럼 뜨겁다고 온갖 소리를 다 했다.

희수는 그런 남편이 귀여우면서도 황당했다.

‘사람 참 한결같구나. 아니, 사랑이 한결같은 건가?’

어느덧 결혼 8년 차가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칼릭스의 당부에 따라 희수는 제 나이는 잊었다. 가끔은 귀엽고, 여전히 든든한 남편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래서 모든 걱정이 사라졌는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마님, 마님! 큰일입니다!”

뿌듯한 마음을 안고 돌아온 대저택에선 다시 골치 아픈 일들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도련님과 필립 도련님이 격한 의견 다툼을 벌이셨습니다!”

“또 싸웠나요?”

희수는 이마를 싸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삼 형제를 키우다 보니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신앙의 기원은 시련이라던 교황님의 설교가 떠올랐다.

남편은 무서운 얼굴로 두 형제의 행방을 물었다.

“그래서 지금 둘은 어디에 있나, 집사.”

“두 도련님은 주인어른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방금 침실로 가셨습니다.”

집사는 저도 모르게 고자질을 했다. 크리스토퍼와 필립은 꼬마 장수들이었다. 집 안의 비싼 집기를 부시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아마 지금쯤 자는 척을 하고 계실 겁니다.”

칼릭스는 오늘이야말로 그 버릇을 고쳐야겠다며 둘을 서재로 불러오라고 명했다.

“집사, 이번엔 뭘로 싸웠나요? 또 목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온몸에 시퍼런 멍이 잔뜩 있겠구나. 그러고도 파란색 보라색 물감을 바른 것 같다고 신나게 웃고 있을 망아지들을 떠올리니 한숨만 나왔다.

“하아.”

쓰러지듯 소파에 기댄 희수는 골치가 아파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칼릭스가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와 목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심하게 싸우지 않았을 거야. 많이 다치진 않았을 거야.”

그렇게 위로를 들으며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망아지들의 우당탕탕 소리가 없었다.

한참 답이 없어 아이들의 침실을 찾았더니 유모가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마님, 두 도련님은 지금 곤히 주무십니다.”

희수가 눈만 떼면 싸움을 벌이는 그 망아지들은 신기하게도 잘 때는 우애가 좋았다. 각자의 침실이 있는데도 꼭 한곳에서 잠을 청했다.

“정말 잠들었다고?”

혹시 유모가 혼날 아이들이 불쌍해서 변명을 하는가 싶었지만, 두 아이는 정말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게 사실은 잠든 척을 하시겠다고 했는데…… 진짜 잠드셨어요.”

희수는 커다란 침대에서 제멋대로 잠든 두 아이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싸움이 격했는지 코까지 골고 있었다.

레이놀드는 이렇지 않았는데, 삼 형제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놀라웠다.

칼릭스 역시 황당하단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왜 이렇게 걱정이 가실 날이 없는 건지.”

희수의 시선은 잠든 막내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또 싸움을 벌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화가 났었는데, 천사같이 잠든 모습을 보니 그게 그리 대수일까 싶었다.

“사는 게 원래 그렇지, 뭘.”

그녀는 옅은 미소를 걸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카를로스는 언제 파면당할지 걱정된대. 게리 부인도 레스토랑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온대. 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대요.”

다들 저마다의 걱정을 안고 산다.

일상은 피곤하고, 골치가 아프고, 가끔은 죽을 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있다가도 결국은 모든 게 지나가고.

그러고나면 또 가끔은, 행복하다.

평범한 삶이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그래도 난 우리 애들 얼굴 볼 때마다 정말 행복한걸. 건강하잖아.”

사는 건 원래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다가, 옆을 스치는 행복을 놓치지 않고 발견해 내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아, 그래도 아직 살 만하네’ 하고 안심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것.

“다들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 거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평범한 일상에 숨은, 한 조각의 행복을 찾아서.

두 사람은 그렇게 내일도 열심히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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