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15. 사랑의 도시 (15/17)

15. 사랑의 도시

* * *

칼릭스는 고용인들 앞에서나 신전에선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딱 한 명,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프란시스는 제외였다.

그는 주교회의 허수아비 교황이 되어 버린 불쌍한 프란시스에게는 제법 너그럽게 굴었다.

오늘도 주교회에서 탈탈 털리고 돌아온 프란시스는 고통과 핍박이야말로 신앙의 밑거름이라는 걸 증명하듯,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클로비스 경, 예전에 말입니다.”

눈을 감고 있던 프란시스가 갑자기 심각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인가요?”

“내 결혼식?”

“아니, 그 직전에 왜 리옹의 신전에서…… 7년 전 신전에도 얼마나 일이 많았는데 제가 한가하게 경의 결혼식을 묻겠습니까!”

번쩍 눈을 뜬 프란시스가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 푹 한숨을 내쉰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경의 결혼식 직전에, 리옹의 신전에서 다크 홀이 열렸었지요. 주교회에서 그 기록을 읽었나 봅니다.”

칼릭스가 희수를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기 위해서 다크 홀을 열었던 날이었다.

“제게 다크 스톤에 대해서 묻더군요.”

순간 칼릭스의 쇄골 사이, 목이 따끔했다.

프란시스가 말하는 다크 스톤은 여전히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주교회는 왜 이제 와서 7년 전의 기록을 찾는 거지?”

“그게…….”

프란시스는 말을 주저했다. 제 입으로 말하기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차기 교황 선출 때문인가?”

“맞습니다.”

5년 뒤의 일이긴 하지만 수뇌부는 언제나 미리 움직이는 법. 주교회에서는 교황 선출권을 두고 시의회와 알력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교회에서…… 다크 스톤을 모으고 있나?”

칼릭스의 맑은 푸른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서렸다. 누군가 다크 스톤을 원한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그것도 신전의 주교회라면.

‘주교회가 믿는 건 신이 아니라 신전이지.’

칼릭스는 자연스레 전 교황, 요세프를 떠올렸다. 자신의 손으로 숨을 거뒀던 그 끔찍한 자. 요세프 역시 주교회 출신의 교황이었다.

주교회. 결국 그들이 문제였다.

“설마 요세프가 했던 짓을 반복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아…….”

프란시스가 눈을 피하고 푹푹 한숨만 내뱉자 감정이 격해진 칼릭스는 거칠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프란시스!”

그는 허수아비라는 별명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차마 친우의 선하고 올곧은 눈빛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후후.”

프란시스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의로 다크 홀을 열어 이방인을 이 세계로 끌어와 혼란을 유도했던 전 교황, 요세프.

그를 시해하고 재판을 받았던 칼릭스의 손에 붙들려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 썩은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일념으로 교황이 되었는데…….”

한데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주교회의 반대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또 주교회의 찬성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매번 변명에 변명이었다.

“제정신이냐?”

그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슬펐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또한 요세프와 같지 않을까.

“클로비스 경, 만에 하나 제가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널 죽일 거다.”

“예, 반드시 그리해 주십시오.”

두 남자는 서로를 태울 듯이 마주 보았다. 그러다 칼릭스가 먼저 거칠게 그를 놓아주었다.

“젠장!”

프란시스는 비틀거리다 다시 꿇어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신전을 지키기 위해선 시의회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제가 교황이 되어선 안 되었다.

‘하지만 권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애꿎은 목숨을 앗아 가는 건 맞는 일인가.’

주교회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하였지만 세상에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목숨은 없는 법. 프란시스는 응답을 받기 위해 애썼지만 답은 없었다.

‘신께서는 나의 부정한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

이미 세속에 찌들어 타협해 버린 나약한 이 마음을.

자책하듯 눈을 꽉 감은 프란시스는 오랜 기도 끝에 예배실을 나왔다.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나마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도 신의 사제로서 명예를 지켜 줄 이가 옆에 있었다.

“경이 제 곁에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징그러운 소리.”

“혹시 주교회에서 경을 불러 다크 스톤을 달라고 해도 절대 주지 마세요.”

“갖고 다니지도 않아.”

프란시스는 걸음을 뚝 멈췄다. 놀란 그가 근엄을 잃은 눈빛으로 칼릭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크 스톤을 집에다 두고 다닌다고요? 그 물건을요?”

복도에는 어차피 단둘뿐이었다.

“어차피 성력이 없으면 아무도 사용하지 못할 물건이잖아.”

“레이놀드에게 성력이 발현된다면요?”

“훈련받지 못한 자는 성력을 다룰 수 없어.”

“하지만 레이놀드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습니까? 장난을 치다가 불을 뿜으면 어떡합니까?”

“그 헛소리 좀…….”

칼릭스는 짜증스럽게 눈을 흘겼다. 말보다 성력을 먼저 익혔던 그와 달리, 레이놀드에게선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곧바로 푸른 불꽃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성력을 푸른 불꽃으로 바꾸려면 제대로 된 훈련이 필요했다.

아마 레이놀드는 커서 시의회의 관리가 되지 않을까. 이는 방계 혈족들의 바람이었다.

아들이 아직 어려서 칼릭스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장난감인 줄 알고 갖고 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애들은 우리 침실에 못 들어와.”

“그래도 그렇지 다크 스톤을 어떻게 집에 두고 다닌답니까.”

“뭐, 재수 없으면 쥐새끼가 물어 갔겠지.”

가볍게 대답한 칼릭스는 유유히 그를 앞질러 갔다. 프란시스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러고 보니 퇴근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하긴, 집에 보석을 두었으니.’

다크 스톤 같은 돌멩이가 걱정이겠는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집에 있는데 말이다.

‘부인이 보석이었다면 목에 걸고 다녔을 테지.’

하지만 그러질 못하니 칼릭스는 갈리아 켈티카 전역을 수소문해서 찾은 뛰어난 호위들을 고용했다. 그래서 클로비스 대저택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신전만큼 안전한 곳이었다.

‘게다가 거긴 주교회가 없으니, 어쩌면 신전보다 그의 집이 더 안전할지도.’

프란시스는 쯧쯧쯧 혀를 찼다.

칼릭스에게 지겹도록 하는 소리지만, 결혼이 그를 구했다.

* * *

“후아.”

희수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바닷가 특유의 텁텁한 짠내가 속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콧등이 가볍게 찡그러졌다.

“음, 이제야 바닷가에 온 기분이 들어.”

철썩이는 파도소리, 끼륵거리는 갈매기 떼, 짠내 가득한 바다 내음, 머리카락을 뒤흔드는 강한 바람까지. 모든 조합이 그녀를 설레게 만들었다.

10년 전, 희수가 탔던 비행기는 파리의 샤를 드 공항에 도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파리에 와 있었다.

갈리아 켈티카의 항구 도시, 파리.

이 도시를 파리라고 명명한 건, 이 도시가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리라.

‘사랑의 도시.’

희수와 칼릭스는 게리 부인의 레스토랑에 들러 점심식사를 마쳤다. 예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민망하거나 불편할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애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풋내기 연인이 아니었다. 애정과 사랑으로 쌓은 그들의 신뢰는 이제 무한해졌다. 수평선을 알 수 없는 저 바다처럼.

칼릭스는 아직도 에드워드가 이곳에 근무하는지를 물었지만 희수는 왜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고 되묻는 대신, 등짝을 한 대 때려 주고 말았다.

맛있는 점심식사를 끝낸 뒤에는 바닷가를 걸었다.

“파리의 바닷가는 정말 오랜만이네.”

이 바닷가는 희수가 혼자였던 3년 동안 종종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다.

결혼하고 리옹에서 지내며 아이들을 키우느라 통 걸음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남편과 함께 들러 여유로운 휴일을 보내게 되었다.

“당신은 어때요?”

“…….”

칼릭스는 대답 없이 그저 아내의 허리를 더 꽉 감쌌다.

희수는 오랜만에 찾은 파리의 바닷가를 보며 해방감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그는 아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거대한 파도, 넘실대는 검은 물결. 끝을 모르는 광활한 저 바다가 그에게 이상한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위험에서도 그녀를 지켜 줄 자신이 있었는데…… 한데 눈앞에 펼쳐진 저 바다는 아니었다.

“어휴, 추워.”

해가 저물어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게다가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 있으니 춥지 않을 리가.

그런데도 희수는 뭐가 그렇지 신이 났는지 통 걸음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이어진 곳부터,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조각배까지. 그 모든 걸 깊이 담아 가려는 듯이 눈을 떼지 못하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희수는 클로비스 대저택의 안주인으로서 이제는 제법 근엄한 얼굴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신난 어린아이 같았다.

“옛날 생각난다.”

이곳의 모든 게 향수를 불러오는 모양이었다.

저와 이별하고 혼자 지내던 시간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녀의 옛 고향.

희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지난 과거들을 그리워하며 추억으로 남겨 두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감상에 빠진 아내를 재촉하는 대신 겉옷을 벗어 어깨에 둘러 주었다. 소중한 이 휴식 시간이 온전히 그녀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몇 년 전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감정은 거의 없었다. 아내가 보여 준 성실한 사랑은 그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고, 가족을 돌보고 집안을 지키려는 노력은 그를 감동시켰다.

그녀는 갈리아 켈티카의 많은 것을 순응했고 제 옆자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다. 적응이 힘들다는 투정이나 모순적인 귀족사회에 대해 싫은 소리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중심을 잡은 건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다.

순간 칼릭스의 귀에 환청이 들렸다.

짝, 짝, 짝, 비꼬는 듯한 박수소리. 그리고…….

‘정말 점잖아지셨군요, 클로비스 경. 부인의 노고가 큽니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결혼이 경을 구했습니다.’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왜 이 순간 그가 떠오른 건지…….

교황, 프란시스는 제 부부 사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신전의 일을 고민해야 할 시간에 제 가정사며, 대저택의 소식을 얼마나 캐묻는지 모른다.

교황 친위대에 속한 칼릭스는 사실 희수와 있는 시간보다 교황과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니 부인과 단둘이 있는 시간마저도 프란시스의 목소리가 저절로 떠오른 것이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차기 교황 선출이 언제라고 했지. 5년 뒤인가.’

자꾸만 이직을 권하는 포교단으로 자리를 옮겨 버릴까 고민 중이었다. 그만큼 저와 아내를 향한 프란시스의 관심과 참견이 지나쳤다.

‘제발 우리한테 신경 좀 꺼.’

‘경께서는 입만 열면 하는 소리가 부인의 일이란 걸 깨닫지 못하시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먼저 물어보잖아.’

‘제가 부인이 좋아하는 음식, 부인이 좋아하는 화가, 부인이 좋아하는 식당을 대체 왜 알아야 합니까?’

‘그러니까 그걸 대체 왜 알고 있는데?’

‘경을 보면…… 참……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께서는 남녀의 사랑이 죄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아내의 만찬 초대에 응하는 걸 보면 사람이 참 염치가 없었다.

부인과 단둘이 있는데도 자꾸만 프란시스가 생각나는 건, 며칠 전에 있었던 대화 덕분이었다.

다크 스톤, 다크 홀.

이방인을 불러내 이 세상을 교란하는 그 끔찍한 일. 칼릭스는 다크 스톤에 대해 전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바로 제 옆에 있는 아내 때문에.

“여보, 우리 저기도 가 봐요.”

어느덧 감상을 마친 희수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뭔가 불리한 상황에서만 하는 애교스러운 말투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굴을 파는 좌판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걸 안 먹고 갈 수 없잖아.”

갈리아 켈티카의 시민들은 굴을 즐겨 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싱싱한 굴을 먹을 수 있는 곳은 항구 도시인 파리와 산토니뿐이었다.

그래도 레스토랑이 아닌 저런 좌판에서는…….

“진심으로?”

칼릭스는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린 희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응. 어차피 아무도 못 알아볼 텐데, 뭘.”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곳은 리옹이 아니라 파리니까.

간만의 부부 외출에 칼릭스는 시종과 호위를 물리고 나왔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쉬는 날엔 종종 이런 시간을 함께하지만 이제 리옹에선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가 많아 파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희수가 아무리 리옹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해도 이 자그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알 리 없었다.

칼릭스는 쉬는 날엔 외부에서 오는 연락도 잘 안 받을 만큼 집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또 순순하게 옆을 따라왔다.

“어서 가요. 내가 제일 잘하는 에까이에(Ecailler)를 알아.”

굴을 까는 해산물 상인들, 파리의 에까이에는 유명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칼릭스를 이끌었다. 그는 별 저항 없이 아내가 이끄는 굴 좌판으로 향했다.

“이렇게 싱싱한 굴은 한 번도 안 먹어 봤지?”

“이런 데서는.”

칼릭스는 신분 때문에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많았다. 희수가 권하는 많은 것들이 그랬다.

“크고 싱싱한 굴 있어요! 사이즈마다 가격이 다릅니다!”

“자, 골라 보세요! 제일 큰 게 제일 맛있습니다!”

굴 좌판은 시끄러웠고 코를 쏘는 짠내로 가득했다. 칼릭스는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굴을 파는 상인의 커다란 목소리가 다소 무례하게 느껴졌다.

누가 이런 경험을 권했다면 절대 응하지 않았겠지만 아내가 청하는 일이라 군말 없이 따라왔다. 이는 사랑의 힘은 아니었다. 희수가 권하는 모든 경험들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많은 좌판 중에 익숙하게 한 곳으로 걸어갔다.

“제일 크고 싱싱한 걸로 주세요.”

“3길리입니다, 마님.”

모자를 썼지만 그녀의 신분은 감춰지지 않았다. 칼릭스는 묵묵히 상인에게 작은 금화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이고, 이렇게 큰돈을.”

상인은 난색을 표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거스름돈을 찾는 다급한 손짓에 칼릭스가 짧게 거절했다.

“됐다.”

“정말입니까? 너그러운 부부시군요.”

상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좌판의 뒤편까지 안내했다. 작은 탁자와 앉기 좋은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칼릭스는 아내를 위해 손수건을 깔아 주었지만 희수는 이를 거부했다.

“엉덩이 차가워서 싫어.”

그러자 그가 아내가 앉을 만한 다른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전부 차가운 돌바닥이었다.

“이봐, 여기 의자는…….”

칼릭스가 상인에게 물어보려 하자 그녀가 팔뚝을 잡았다.

“어쩜, 당신은 아직도 이래.”

희수는 그를 바위에 앉히고 자신은 그의 널찍한 무릎에 앉았다. 밖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이런 과감한 스킨십을 할 수 없었다.

“여긴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걸.”

그녀가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입에 넣지도 않은 굴이 벌써부터 맛있게 느껴졌다. 제 예상대로였다. 아내가 권하는 모든 일은 그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했다.

“자아, 왔습니다. 특별히 신경 써서 골랐어요.”

때마침 상인이 신난 얼굴로 쟁반 가득히 굴을 가져왔다. 가운데는 반 잘린 레몬이 있었다.

“고마워요.”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상인은 유쾌하게 소리치고 자리를 떴다.

희수는 저를 안고 있는 남편 대신, 레몬을 쭉 짜서 굴 위에 뿌렸다. 순식간에 상큼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그녀가 가장 큰 것을 들고 칼릭스의 입가로 가져갔다.

“먼저 먹어.”

그가 수줍어 거부했지만 희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하다가 아내의 팔이 아플까 봐 어쩔 수 없이 굴을 삼켰다.

“음.”

짭짤하면서도 싱싱한 바다의 맛. 씹을 것도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식감이 훌륭했다. 상큼한 레몬 향이 입안을 맴돌아 전혀 비리지 않았다.

“맛있죠?”

“응.”

군더더기 없는 그 대답에 희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 역시 오랜만에 먹는 바닷가 좌판의 굴이 너무나 맛있었다.

“내가 먹여 주는 걸 잘 먹으니까 너무 귀여워요, 여보.”

“귀엽기는.”

그가 다정하게 구는 건 오직 아내의 앞에서 뿐이었다. 피곤한 그녀의 일상에서 저마저 딱딱한 가장 노릇을 했다간 희수가 집을 나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또 와서 먹어요.”

부부는 그렇게 쟁반의 굴을 전부 비우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둘만의 짧은 데이트였다.

* * *

“레이, 난간에 기대면 안 돼!”

“그럼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

희수는 레이놀드와 함께 리옹의 시계탑을 찾았다.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주교회 소유의 첨탑이었다.

‘시계탑도 오랜만이네.’

칼릭스와 종종 데이트를 했던 곳이지만 그가 추밀원의 한 명이 되면서부터는 자주 오지 못했다.

희수는 아카데미 입학을 앞둔 레이놀드의 긴장을 풀어 줄 겸, 둘이서만 이곳을 찾았다.

‘크리스도 데려올 걸 그랬나.’

아니, 감당이 안 됐을 거다.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희수는 레이놀드와 크리스토퍼, 필립까지 연년생의 삼 형제를 키우면서 급격히 늙어 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닮은 아이들이 성격도 조용하고 얌전하면 좋았겠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놀드는 그나마 눈치가 빨라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장소를 가렸다. 하지만 크리스토퍼와 어린 필립은 아니었다.

‘엄마랑 공놀이하고 싶어요!’

‘엄마랑 잡기놀이하고 싶어요!’

아무리 유모가 있어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엄마였다. 희수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나마 칼릭스가 다감한 성격이어서 아이들과 잘 놀아 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일곱 자매들을 키우셨을까.’

여자아이들은 다른가. 하긴, 시누이들은 얌전하게 지내라고 엄한 교육을 받았겠지.

대저택의 도련님들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만 제외였다.

‘남편이 너무 엄하게 대하는 건가? 아니야.’

칼릭스는 쉬는 날 아침마다 아이들과 밖에서 공놀이를 해 줄 만큼 다정하지만 때로는 굉장히 무서운 아버지였다.

그가 표정만 굳혀도 엉엉 우는 바람에 아이들에겐 회초리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희수는 남편의 훈육방법이 싫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옳으니까.’

칼릭스는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일에서도 실수가 드물었다.

부부는 서로를 똑같이 생각했다. 희수 역시 그를 믿었기에 꾸중하면서 몇 번 아이들을 울렸어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들들은 희수에게 어리광을 많이 부렸다. 피곤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부모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라 희수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우와.”

사방이 뻥 뚫려 해방감이 좋은 옥상이라 그런지 레이놀드는 신이 났다. 한참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다가 이제는 난간 너머의 작아진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레이, 저 붉은색 깃발 보이니?”

“네, 저기 신전이잖아요!”

“여기서 보니까 정말 작아 보인다. 신기하지?”

“네! 엄청 작아 보여요. 근데 우리 집은 더 작은 걸요?”

“대저택을 찾았어? 어디?”

“네, 저기 있잖아요! 저기요!”

시계가 있는 아래층은 출입금지지만, 탑의 옥상은 시민들에게 개방된 공간이었다. 한데 최근에는 발길이 아예 끊겼는지 가장 붐빌 시간인데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레이놀드는 한적한 옥상을 마음껏 누렸다.

리옹의 철벽부터 클로비스 대저택, 그리고 신전과 아카데미, 자주 놀러 가는 시누이들의 저택까지 아는 곳을 전부 찬찬히 살피며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다.

“레이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빨리 와 볼 걸 그랬다. 그치?”

“괜찮아요! 어머니는 바쁘시잖아요. 어린 동생들이 있으니까요.”

레이놀드의 입버릇 같은 말이었다. 희수는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바쁜 아이를 뒤에서 꼭 끌어안아 주었다. 복슬복슬한 갈색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저기 아카데미가 보여요, 어머니!”

“레이, 아카데미는 4년만 배우고 오는 거야. 알지?”

“네. 잘 지낼 거예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레이놀드는 어린 두 남동생의 늠름한 형이자, 가문의 후계자로 교육받았기에 나이치고는 성숙한 말솜씨를 자랑했다.

어느덧 어엿한 6살이었다.

“동생들이 걱정이죠. 어머니를 많이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할 텐데……. 그래도 아버지가 계시니까 안심이에요.”

그때 호위가 부랴부랴 의자를 갖고 올라왔다. 계단을 오르느라 그의 이마에 땀이 범벅이었다.

“마님, 다리 아프시지요? 여기 앉으십시오.”

“고마워요.”

“앉아서 좀 쉬고 계세요, 어머니. 전 조금만 더 둘러보고 올게요.”

희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두 명의 호위가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지키고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한 명의 호위가 남았다.

레이놀드는 엄마의 당부를 새겨듣고 난간 가까이에 서거나 하는 위험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도 희수는 아래를 구경하는 아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옆에 있던 호위도 아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가서 레이놀드의 옆을 지켜 주겠어요?”

“알겠습니다, 마님.”

한적한 오후.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꽤 고층인데도 바람이 세지 않고 살살 불어 몸이 나른했다.

댕, 댕, 댕.

아래층의 시계가 울렸다. 리옹의 전역을 맴도는 거대한 종소리가 평화롭게 시간을 알렸다.

감미로운 종소리의 여운을 즐기던 그 순간이었다.

문 바깥에서 뭔가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 옥상까지 올라오는 유일한 계단은 좁고 꽉 막힌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소리가 심하게 울려서 들렸다.

‘뭐지?’

쿵! 철문에 뭔가 여러 번 부딪혔다. 근처에 앉아 있던 희수는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난다. 꽉 닫힌 철문과 계단의 공명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다. 한데 묘하게 익숙했다.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한 소리였다.

‘이 소리는…….’

가슴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정확히 정체를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의 본능이 먼저 위험을 감지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희수는 레이놀드에게 달려갔다.

“레이!”

그녀가 아이를 끌어안는 동시에 밖의 누군가가 철문에 쾅! 하고 부딪혔다. 희수는 몸을 움찔했다.

“마님, 제 뒤에 계십시오!”

호위는 용감하게 칼을 빼어 들고 희수의 앞을 지켰다. 그때 또다시 크게 철문이 흔들거렸다. 밖의 누군가가 문을 열기 위해서 몸을 부딪치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호위가 소리쳤지만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혹시 상대가 사라졌나 했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쾅쾅쾅쾅쾅!

연달아 문을 두드리는 간격이 빨라졌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필사적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했다.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소통이 되지 않는 상대.

징그러우리만치 필사적인 저 행동.

‘저건…… 사람이 아니야.’

희수는 이제야 문밖 계단에서 울렸던 괴이한 공명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뼈와 살이 조각나는 소리, 그리고 사람이 뜯어 먹히는 비명소리였다.

10년 전 있었던 끔찍한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두고, 그간 한 번도 들춰 보지 않았던 일들.

‘매녹.’

그들을 떠올리자 무력감과 절망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도시에 들어온 이후로는 한 번도 그 죽은 자들을 만난 적 없어서 완전히 잊고 살았다. 한데 어째서 갑자기…….

쾅쾅쾅쾅쾅쾅!

철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덜컹거리는 걸쇠가 금방이라도 풀릴 것만 같았다.

“누, 누구냐! 넌 누구냐고!”

어딘가 비정상적인 행동에 호위마저 겁에 질린 듯했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밖에 호위병이 둘이나 있었잖아요. 그들은요?”

“레이, 진정하렴.”

그렇게 말은 했지만 희수는 레이놀드보다 더 놀란 상태였다. 그녀는 애써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몸을 피할 곳이 없을까 했지만 이곳은 옥상이었다.

“마님, 제가 걸쇠를 잡고 있겠습니다!”

호위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철문으로 달려갔다. 온몸으로 걸쇠를 붙들고 밖의 상대에게 소리쳤다.

“절대 널 들여보내 줄 수 없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두드리던 몸짓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이내 더 과격하고 빠른 속도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쾅쾅쾅쾅!

“이놈, 네까짓 게 감히……!”

“쉿!”

난간을 살피던 희수는 호위를 향해 속삭였다.

“조용히! 우리 목소리가 매녹을 흥분시키고 있어요!”

“매, 매녹이요?”

흠칫한 호위는 깜짝 놀라 일그러진 철문을 응시했다.

시체의 몸으로 걸어 다니는 괴물.

도시 밖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그런 게 리옹의 한가운데 나타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어머니, 매녹이라고 하셨어요?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사람들이요?”

“쉿, 조용히 하렴.”

희수는 난간 너머로 발 디딜 곳이 있는지 살폈다. 사람이 앉아 있을 만한 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끼가 잔뜩 껴서 미끄러워 보였다.

‘너무 위험해.’

매녹을 피하자고 밖으로 떨어져 죽을 수는 없었다. 그사이에도 밖에선 쉴 새 없이 문을 쾅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마님! 곧 문이 열릴……!”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반동으로 나자빠진 호위병은 힘겹게 다시 칼을 들고 희수의 앞을 막아섰다. 겁먹은 티를 감추려 애썼지만 그의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 명이 문을 두드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이놈들이 어떻게 여길…….”

걸어 다니는 시체들.

매녹은 네 명이나 되었다.

희수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심하게 훼손된 그들의 모습이 충격적이라 아들의 눈부터 가렸다.

다들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은 맞는 듯한데, 희수가 살던 세계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호위가 그녀를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마님,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희수는 충직하고 강인한 그의 눈빛에 혼미한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은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사이에 도련님을 데리고 빨리 계단을 내려가세요!”

“안 돼요! 우, 움직이지 말아요. 가만히 멈춰 있어요. 가만히!”

매녹은 도망가는 사람을 가장 먼저 먹이로 삼는다.

“저들은 지금 움직임이 느려요.”

그래서 더 기괴했지만 희수에겐 다행이었다. 네 명은 뛰기는커녕 문턱을 넘어 옥상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계단을 지키던 호위들이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죽은 모양이었다. 문밖에는 핏자국이 낭자했고 어렴풋이 조각난 시체가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다 죽고 말 겁니다, 마님.”

“난간 밑에 턱이 있어요. 그쪽으로 피신을 할 테니…….”

호위는 비장한 얼굴로 희수와 레이놀드를 번갈아 응시했다. 긴장한 나머지 가쁜 숨을 내쉬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게 속삭였다.

“마님과 도련님을 제발 구해 주십시오.”

그의 마지막 기도였다. 호위는 칼을 치켜들고 겁 없이 시체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마님, 어서 계단으로 도망치세요! 어서요!”

네 명을 상대로 한 전투였다. 그는 매녹을 한쪽으로 유도하며 문으로 향하는 길을 터 주었다.

매녹은 움직임이 느려 처음엔 호위가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상대가 맹목적이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시체들은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찌르고 베어도 죽지 않았다.

“아악!”

매녹은 동료의 머리를 벤 그의 팔뚝을 물었다. 호위가 칼을 놓치자 급격히 승세가 뒤집어졌다. 그를 한가운데 두고 매녹은 배고픈 이리 떼처럼 달려들었다.

바닥으로 넘어진 그는 비명을 질러 댔지만 그 소리도 곧 사라졌다. 벌써 목숨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는 법. 희수는 호위의 말대로 레이놀드의 손을 꽉 붙잡고 문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계단의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란 걸 깨달았다.

“……!”

아래층 계단 옆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시계가 있어서 통제가 엄격한 곳이었다.

그 작은 문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아우성치는 여러 손들이 보였다. 저들 모두가 매녹인 게 분명했다.

그때 꾸역꾸역 밀려 나온 두 명이 바닥을 기다가 인기척을 듣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방인으로 보이는 매녹이었다.

그들은 희수와 눈이 마주치자 번개같이 계단을 올라왔다.

희수는 순간적인 힘으로 아이를 문밖으로 밀쳐 냈다.

“레이, 난간 너머로 숨어!”

그리고 저 역시 문밖으로 뛰어나가려는 순간, 긴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순간에는 모든 게 느릿하게 보였다.

아들의 경악한 얼굴 위에 오늘 아침 출근을 하며 제게 입맞춤을 해 주던 남편의 다정한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머니!”

“난간을 넘어가! 숨어서 밑에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해!”

그때 차갑고 억센 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희수는 엎어진 채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잡아끄는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아악!”

또 다른 손이 그녀의 몸을 움켜쥐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 가슴이 쿵쿵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새파란 하늘이 보였고,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엄마!”

희수의 몸 위로 파란 불길이 일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를 덮쳤던 매녹에 불이 붙었다.

‘파란 불꽃.’

매녹은 괴롭게 몸을 비틀었다. 레이놀드는 깜짝 놀라서 성력을 발현한 제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정신을 차린 희수는 있는 힘껏 매녹을 계단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당황한 레이놀드를 이끌고 난간으로 뛰었다.

불이 붙은 다른 매녹이 그녀를 쫓아왔다. 하지만 불꽃이 온몸으로 번져 활활 타 버린 바람에 휘날리는 종이처럼 비틀거리다 푹 쓰러졌다.

희수는 난간을 넘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옥상에는 아직 호위를 먹어 치우는 네 명의 매녹이 있었다. 그를 다 뜯어 먹고 나면 저 괴물들은 또다시 먹잇감을 찾아 헤맬 터였다.

“레이, 다시 불꽃을 일으켜 봐!”

“어…… 어떻게요?”

“아까처럼! 아까 네가 한 것처럼!”

레이놀드는 이리저리 용을 썼지만 푸른 불꽃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 봐. 아까 네가 한 것처럼만 해 봐, 레이!”

잔뜩 긴장한 레이놀드는 종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무시무시한 시체 둘이 쓰러진 엄마의 위로 올라탔고, 엄마는 금방이라도 그 괴물들에게 먹혀 죽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세뇌하듯 말했었다.

‘내가 없으면 너희들이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

엄마는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가녀리고, 연약한 여자니까…….

레이놀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안 나와요…….”

희수는 선택받은 이 재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칼릭스가 자유자재로 푸른 불꽃을 일으켰기에 아들도 그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성력은 훈련되어야만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었다. 첫 경험은 찔리듯 튀어나온 반사적인 본능이었다.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레이놀드는 엄마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상황이 속상한 나머지 울먹였다.

“그래, 그럼 숨어 있자.”

희수는 낑낑거리는 아들을 데리고 조심히 난간을 넘었다. 다행히 움직임이 느린 매녹은 먹잇감을 먹는 데만 집중해서 희수가 난간 아래로 숨는 걸 보지 못했다.

‘일단 저들의 눈에만 띄지 않으면 돼.’

내려가는 계단에는 더 많은 매녹이 있었다. 그들의 힘과 속도는 사람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저와 아들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느니,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도시의 치안대가 곧 올 거야.’

리옹은 수도인 만큼 관리가 철저한 곳이었다. 이 시계탑의 입구에도 치안대가 있었으니 최상층에서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면 당장 신전에 연락을 취했을 터.

‘진정하자.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마음을 단단히 먹은 희수는 수그리고 앉아서 드레스 자락을 찢었다. 그리고 그 새빨간 옷감을 난간에 매달았다. 아래를 지나가던 행인이 위를 쳐다봐 주길 바라며.

‘제발 누군가 우리를 발견해 주길.’

긴 천은 바람에 휘날렸다. 희수는 아들을 끌어안은 채 바싹 몸을 웅크렸다.

레이놀드는 엄마의 심박동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어머니, 무서우세요?”

“아니야, 뭐가 무서워. 곧 우리를 구해 줄 신전의 기사들이 올 거야. 걱정할 것 없어, 레이.”

여전히 울상을 한 아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요, 엄마…….”

어른은 아이보다 아는 게 많아서 두려움도, 겁도 더 많았다.

희수는 혼자 황무지를 헤매던 그 악몽이 다시 떠올라 괴로웠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저는 왜 어머니를 도와줄 수 없는 걸까요?”

“무슨 소리야, 레이가 엄마를 지켜 줬는걸. 레이놀드가 구해 줬어.”

“제가 구해 준 거예요?”

“그럼.”

희수는 이후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여기서 구해질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우리 아까처럼 구경이나 하자, 레이. 저기 신전이 있네.”

작게 속삭인 희수는 살아남길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새파란 하늘에 새빨간 천 한 조각.

붉은 물감을 바른 붓이 지나간 듯, 행인들은 하늘에 선명한 그 자국을 눈여겨보았다.

* * *

희수와 레이놀드는 예상대로 도시의 치안대에게 먼저 발견되었다.

치안대는 시계탑을 오르다가 매녹을 발견했고, 지침대로 신전의 성기사를 불렀다.

마침 리옹에 남아 있던 건 카를로스를 비롯한 몇 명이었다.

“옥상에 이게 웬 불이지?”

한데 사람을 구하러 올라간 옥상에는 이미 푸른 불꽃이 잔뜩 옮겨붙어 있었다. 레이놀드가 만들어 냈던 불이었다.

“아니, 누가 이렇게 무책임한 짓을 저지른 거야!”

카를로스는 짜증을 부리며 화재를 진압하는 데 애썼다.

푸른 불꽃은 매녹만 태우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잘 꺼지지도 않아서, 도시 안에서 불을 지르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위였다.

“검은 재가 이렇게 곳곳에 있는 걸 보니 매녹이 한둘이 아니었나 보군. 그래도 그렇지 처리를 했으면 불을 꺼야 할 거 아냐!”

카를로스는 그렇게 옥상의 화재를 처리하고서야 난간 아래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희수와 레이놀드를 발견했다. 매녹보다는 화재로 죽을 뻔한 모자였다.

“부인? 거기 혹시…… 클로비스 부인입니까? 아니겠지요? 제 눈이 헛것을 본 것이겠지요?”

카를로스는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건 칼릭스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내, 그리고 보물 같은 아들이었다.

“오, 신이시여…… 부디 시련을 멈춰 주시옵소서…….”

기절할 뻔한 카를로스는 부랴부랴 그들을 구해 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요즘 기도를 소홀히 했더니 신께서 제게 벌을 내리셨나 봅니다. 부인,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몸은 괜찮으신가요? 제발 그렇다고 해 주시죠.”

“전 괜찮아요.”

희수는 카를로스의 요란하고 친근한 목소리를 듣고부터 심신이 안정되었다.

“푸른 불꽃을 만든 건 바로 레이놀드예요. 레이가 절 구했어요.”

“레이놀드가…… 하다하다 이제 성력까지 다룬단 말씀입니까? 정말이지 못하는 게 없는 아이로군요. 어쨌든 부인,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불이 번져서 혹시 벌을 받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아무 걱정 마십시오, 부인. 지금은 남편이나 생각하세요. 소식을 들었다면 아주 애가 달았을 겁니다.”

그는 희수에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 주었다. 희수는 그 다정함에 속이 울컥했다. 이제야 완전히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으흑.”

그녀는 아들을 안은 채로 카를로스와 셋이서 포옹을 나누었다.

“흠흠, 흠흠흠.”

풍성한 은발의 그는 여전히 낯가리는 고양이처럼 어색해하며 애써 모자를 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제 친우를 똑같이 닮은 똘똘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다, 레이. 네가 네 어머니와 리옹의 시민들을 구했으니 네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할지 눈에 벌써 훤하구나. 이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네 자랑을 듣겠어. 나도 정말 기쁘구나.”

레이놀드는 자주 얼굴을 보던 카를로스의 칭찬에 점점 마음이 풀어졌다.

“넌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단다, 레이놀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이의 심장은 큰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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